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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6-07-07

칠십이레의 예언 

김무현


칠십이레의 예언 (Prophecy about Seventy Sevens)


우리들은 하나님의 예언과 그 성취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올바로 보기 위해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시공을 초월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제한 하려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에는 앞으로 일어날 왕국들과 그 미래에 대한 놀라운 예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백미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유대 백성들의 장래의 운명과 메시아의 죽음을 예언한 칠십 이레의 예언이라 생각됩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한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노라 (베드로 전서 1:10-11)

먼저 성경을 펴서 다니엘서 9:21~27을 자세히 묵상하며 읽으시고 중요한 내용들을 메모해 두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선포하고 계십니까?                                                   

먼저 9:24절에 보면 “유대백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셨다.”했습니다. 칠십 이레란 70년 x 7 즉 490년의 기간을 말합니다. 25~26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total = 69이레 즉 69 x 7=483년) 지날 것이요, 그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를 예언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483년 기간의 시작은 느헤미야 2:1-9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바사(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20년 즉 BC 444년에 예루살렘의 성을 중건하라는 칙령이 날 때였습니다(다니엘 9:25).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AD 30년과 AD 33년의 2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유대 월력으로 정월 (아빕월, 니산월)십사일)의 예비일(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 요한복음 18:39, 19:31, 마태복음 27:62)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AD 30년을 전후하여(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던 시기= AD 26-36) 유월절과 예비일이 겹치는 경우는 딱 2번 AD 30년과 AD 33년입니다. 누가복음 3:23에 예수님이 공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가 삼십 세쯤 되었다고 했고,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유월절이 3번 지나므로, 그 공사역 기간이 약 3년 정도라 생각됩니다. 최근까지 많은 성경학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AD 30년이라 주장하여 왔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예수님의 탄생 후 바로 헤롯 대왕이 죽은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마태복음 2:19),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 역사 사본에 의하면 헤롯 대왕이 BC 4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BC 4년, 예수님의 죽음을 AD 30년으로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 몇몇의 고고학자들이 런던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of London)에 보존되어 있는 요세푸스의 역사 원본과 사본을 다시 대조 검토하여 나가는 중에 헤롯 대왕의 사망연도가 1544년 이후의 사본부터 BC 1년을 BC 4년으로 잘못 기록된 오기(copy error)를 발견하였습니다. 즉, 헤롯 대왕의 사망과 예수님의 탄생은 BC 1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연도도 AD 33년으로 수정되어 가고 있습니다(참고: 다른 로마의 역사와 그 정황들은 AD 33년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중요하고도 놀라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칠십 이레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칙령이 날 때부터(BC 444)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AD 33년)까지 483년의 기간이 지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유대 월력(우리나라의 음력과 비슷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유대 월력의 1년은 360일입니다. 즉 BC 444년부터 AD 33년까지 476년이 있는데, 이를 유대 월력으로 환산하면 476×(365/360)=483년이 됩니다(더 자세한 연구에 의하면 윤달을 포함하여 날짜까지 정확히 성취).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의 예언이 말씀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참으로 역사를 그의 뜻대로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역대상 29:11)


•칠십이레 예언에 관한 역사적 배경 (Further Historical Background about Seventy Sevens)

앞에서 칠십 이레의 예언에 대해서 살펴볼 때, 예수님이 AD 33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다른 로마의 역사와 그 정황들이 그것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황제는 티베리우스 시저(Tiberius Caesar)이었습니다. 그가 60세를 넘기자 몸이 쇠약해지고 그래서 AD 26년에는 카프리섬(Island of Capri)에서 요양하며 부분적으로 정계에서 은퇴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로마를 다스릴 집정관(regent)으로 세자누스(Sejanus)를 임명하였습니다. 이 세자누스는 유대인 탄압자로 유명하였고 빌라도(Pilate)는 그에 의해 유대의 총독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초창기의 빌라도는 세자누스의 정책과 보조를 같이하여 티베리우스황제의 우상을 성전에 세우는 등 유대인을 미워하고 포악하게 다루는 반유대사상(Anti-Semitism)으로 일관했습니다(누가복음 13:1). 한편 세자누스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로마에서 쿠데타 음모를 계획하다 티베리우스황제에게 발각되어 A.D. 31년에 처형되고 맙니다. 그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한 티베리우스황제는 유대에 대해 세자누스와는 달리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독립권을 조금은 인정해 주는 “Let the Jews alone.” 정책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자누스의 권력을 등에 업고 유대민족에게 포악한 정치를 하였던 빌라도 총독은 A.D. 31년 세자누스의 처형 이후 매우 어정쩡한 정치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유대민족에게 어느 정도 자율권을 주라는 티베리우스황제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독의 자리도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 19장을 정독해 보십시오. 이 당시 유대인에 대한 빌라도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포악하게 힘으로 권세를 휘두릅니까? 아니면 그들의 자율권을 조금 인정하는 가운데 그들의 눈치도 살핍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아무런 혐의도 찾지 못해서 놓아주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의 어떤 말에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꿉니까? 그 때의 정치적 상황과 어떻게 결부가 됩니까?

즉 빌라도 총독의 유대인들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와 그의 불안했던 정치적 입지를 볼 때, 요한복음 19장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은 세자누스가 처형된 A.D. 31년 이후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과 정황들은 A.D. 33년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음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시편 93:5)

다니엘 9:26에는 “메시아가 끊어 없어진 후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 하려니와” 즉 A.D. 70년 로마의 타이터스(Titus)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훼파 되고(마태복음 24:2) 그 이후 유대민족은 온 세상에 흩어져 유리 방황하게 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재판 시 본디오 빌라도에게 “이 사람(예수)의 피에 대하여 나(빌라도)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복음 27:24-25)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저주 맹세한대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비롯하여 “앤티세마이티즘”이라는 유대인 핍박이 예수님 이후의 역사 속에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은혜의 교회시대( church age of grace)는 유대민족에게는 버림받고 잊혀진 기간입니다. 이리하여 은혜의 복음은 온 이방 세상 끝까지 전파될 것이고(누가복음 21:24, 마태복음 24:14)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회심하게 되고(호세아 3:5, 로마서 11:25-26) 유대백성은 7년 대 환란(Jacob's 7-year tribulation)의 중심역할에 서게 될 것입니다(7년 대 환란의 시작에 예수님의 공중재림과 모든 믿는 성도들의 휴거가 일어날 것임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의 회심이 있게 하여(이사야 45:17), 그들을 복음전파의 마지막 도구로 쓰셔서 결국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시키실 것임).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4:21)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라기 3:6)

유대백성의 마지막 한 이레(490-483=7년)에 대해서 다니엘 9:27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의 계시와 예언은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한번 확인이 됩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다니엘 12:1)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언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시키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그의 가족들이나 제자들이 어서 메시아로서 세상에 드러내실 것(Messianic manifestation)을 옆에서 부추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때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요한복음 12:23)고 하시며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Your time is anytime but my time is God-appointed and my hour has not yet come.(John 7:6)” 즉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은 시간대가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한 예언의 성취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우주와 생명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시고 그의 뜻대로 역사를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시고 무릎꿇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창세기 및 구약의 많은 부분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판단하기에 비과학적인 요소들이 있다하여 “신화 (mythology)”로 전락시키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33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 당신에게도 있습니까?


앞에서 살펴 본 예들 외에도 성경에는 수많은 예언들과 그의 성취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인도아래 기록된 것임을 하나님의 결재 도장까지 찍어가면서 증거 하신 것입니다. 주위의 작은 개미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 개미들은 3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 사람들이 철학이나 언어를 구사하고 컴퓨터나 비행기를 만들고 하는 것들을 아무리 천재 개미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개미가 되어 그들의 표현 방식으로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같은 피조물인 사람과 개미 사이에도 이와 같이 엄청난 격차가 있다면, 초월자인 창조주와 피조물인 우리 사이의 차원적 격차는 정말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우리들의 작은 머리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이사야서 10:15를 묵상하십시오. 그 크고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짖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사야 29:16)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6

모형과 풍유 

김무현


모형과 풍유 (Type and Allegory)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상징을 통하여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모형론(typology)과 풍유법(allegory)이 있습니다. 모형(types)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예언적 상징(prophetic symbol designed by God prefiguring something to come)이고 풍유(allegory)는 확장된 은유법(extended metaphor)입니다. 모형론은 앞에서의 멜기세덱의 예와 같이 객관적인 상징성이 있고 또 성경이 그를 증거 해 주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성막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등이 모형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 등입니다.

저희가 (제사장들이 성막 안에서)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브리서 8:5a)

로마서 5:12-21을 정독하여 보십시오. 로마서 5:14의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NASB 성경에 “Who is a type of Him who was to come.”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8-19)

위의 성경말씀에 의하면 왜 아담이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합니까?

풍유법적 해석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외의 감추어진 은유적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즉, 객관성은 결여되지만 주관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도 있는 비유적 표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생 라합이 여리고성 함락시 자기 집 창문에서 붉은 밧줄을 내림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여호수아 2:21), 그 붉은 밧줄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 피로 물든 밧줄을 붙드는 자는 살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는 죽으리라.”는 등의 해석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마라의 쓴 물로 인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좌절하고 원망할 때(출애굽기 15:22-2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질 때, 쓴 물이 단물로 바뀐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을 풍유적 표현으로 “예수님의 몸(이새의 가지, 이사야 11:1; 하나님의 싹(Branch of the Lord), 이사야 4:2)이 십자가(나무)에 던져짐으로 고통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쓴 물) 영생과 거듭남의 참 기쁨(단물)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24)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은 특히 개인의 묵상시간에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되어 큰 은혜로 다가올 수는 있지만 다른 성경구절에서 뒷받침해주는 객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학적 의미로 객관화하는 데에는 많은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풍유적 해석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11에는 동방박사들이(Magi) 갓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보배합을 열어 황금(gold)과 유향(incense)과 몰약(myrrh)을 예물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예물들은 앞으로 일어날 예수님의 사역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황금은 왕관 즉 왕(kingship)에게 적합한 예물이며, 유향은 분향에 사용되므로 제사장(priesthoodship)에게 적합한 예물입니다(요한계시록 8:4, 출애굽기 30:34-37). 앞에서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예수님을 상징했었음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것으로(요한복음 19:39-40)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축하하는 선물로서 시체에 바르는 몰약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예수님의 사역을 드러내시기 위해 특별히 동방박사들의 예물을 그와 같이 미리 정하여 놓으시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모형(type)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형(type)과 풍유(allegory)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NASB성경에는 갈라디아서 4:24의 “이것이 비유니”가 “This is allegorically speaking(NASB)”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4:22-31에, 이삭과 이스마엘을 각각 새 언약 안에서의 자유 자율법 안에서의 종 된 자로 조명하고 있는데, 무엇이 무엇에 대한 알레고리적 상징인지 정리하여 보십시오. (만약 위의 창세기의 내용이 특별히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상징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선포하신 것으로 본다면 모형(type)에 해당할 수 있겠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5

멜기세덱 : 오실 예수님의 모형 

김무현 


멜기세덱 : 오실 예수님의 모형 (Melchizedek: The Type of Jesus Christ)


창세기 14:17-20에는 족보에도 없고 역사에도 없었던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나타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창세기 14:17-20절을 읽으시고 왜 멜기세덱이 예수님의 type(모형)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7-20)

•멜기세덱의 신분은 왕이며 또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왕 중 왕이시며 오늘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성찬시 예수님의 찢긴 살과 흘린 피를 기념합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하였습니다. (모든 믿음의 후손들에게 축복권을 가진 분)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하였습니다. (모든 믿음의 후손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으실 분)

그 답을 히브리서 7장에서 찾아보십시오.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은 각각 무엇을 말하며 무엇에 대한 상징입니까?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예수님)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옛언약)도 반드시 변역(새언약)하리니 (히브리서 7:11-12) (If perfection could have been attained through the Levitical priesthood, why was there still need for another priest to come - one in the order of Melchizedek, not in the order of Aaron? For when there is a change of the priesthood, there must also be a change of the law.)

히브리서 7:3은 멜기세덱에 관하여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증거합니다. 생명의 끝도 없으시고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편 110편을 묵상하시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편 110:1,2,4)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고 있었던 다윗은 멜기세덱이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예표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그 시대의 레위 제사장의 관례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영원한 제사장이 되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사무엘하 23:2)와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살렘 왕의 문자적 의미는 “평화의 왕”(이사야 9:6, 미가서 5:5)이고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사야 11:4, 예레미야 23:5-6)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6-7)

평화의 왕의 상징은 나귀를 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예루살렘 입성 시 나귀새끼를 타리라는 것은 스가랴 선지서에 예언되어 있으며 신약의 마태복음 21:5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스가랴 9:9-10)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1:5)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왕 중 왕으로 오셔서 로마를 비롯한 모든 이방을 심판하고 유대인의 왕국을 세우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초림시에 먼저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하는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오셨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재림의 때에는 전능하신 심판 주, 왕 중 왕(Almighty Warrior, King of kings)으로서 나귀대신 백마를 타고 오시며(요한계시록 19:11-14)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불꽃같은 눈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요한계시록 19:11-13)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4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언 

김무현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언 (Prophecy about Death of Jesus)

인자는 (구약에)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죽거니와) (마태복음 26:24)

성경은 예수님께서 왜, 어떻게 죽으셔야 하는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찾아보시고 정리하여 보십시오.

내(사도 바울)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고린도 교회)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구약의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3-4)

왜?: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5-13)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10, 3:23-2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사야 53:5-6,11)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어떻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 3:14)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13-14)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1, 7-8, 16, 18)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사야 53:7, 9, 10)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사단)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15)

구약의 여러 예언들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지 너무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 22편에는 다윗이 성령의 조명 하에 예수님의 죽음을 영감으로 공유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종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사도행전 4:25)

16절에 먼저 손과 발이 뚫리는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Crucified with His hands and feet pierced). 7, 8절의 조롱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그대로 당하셨으며 (마태복음 27:39), 18절의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며 통으로 짜여진 속옷을 제비뽑는 것까지 십자가 아래서 로마군병들이 그대로 행한 것은 실로 놀라울 뿐입니다 (마태복음 27:35). 이사야 53:9절에서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고 예언된 것처럼 예수님의 장례는, 제자들이 아닌, (산헤드린 공회원인 가장 의외의 인물) 부자(rich man) 아리마대 요셉(그리고 니고데모)에 의해서 몰약과 침향 백 근이나 들여서 치러지고 그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마태복음 27:57-60, 요한복음 19:38-39).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25-27)

더욱 놀라운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에 의해서 은 30냥(출애굽기 21:32, 노예를 속전하던 정도의 가치)에 팔리실 것과 그 은 30냥이 성전에 던져질 것과 가룟 유다의 자살 후에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데 쓰여질 것이라는 스가랴 11:12-13의 상징적 예언이 마태복음 26:15과 27:6-7에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스가랴 11:12-13)

(Then I said to them, 'If it is agreeable to you, give me my wages; and if not, refrain.' So they weighed out for my wages 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e Lord said to me, 'Throw it to the potter.'; that princely price they set on me. So I took the 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rew them into the house of the Lord for the potter.)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마태복음 26:15)

(What are you willing to give me if I deliver him to you? And they counted out to him(Judas) thirty pieces of silver.)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마태복음 27:5-7)

(Then he threw down the pieces of silver in the temple and departed, and went and hanged himself. But the chief priest took the silver pieces and said, 'It is not lawful to put them in the treasury, because they are the price of blood.' And they took counsel and bought with them the potters field, to bury strangers in.)

왕으로 오실 메시아(예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그 값이 매겨져 노예를 속전하던 값인 은 30세겔에 팔린다는 것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예언입니까? 그 시대의 분위기로서는 이 예언이야말로 거의 신성모독을 했다는 질책을 면키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모두 예언적으로 기록되었으니 그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에 관한 300개 이상의 구약의 예언들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200년 전에 기록된 히브리 사해사본과 헬라어 번역 칠십인역 및 수많은 다른 사본들을 통하여 그 기록들이 예언이 성취된 후대에 변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불순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볼 때 죽음을 면했던 것처럼(민수기 21:9)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고 믿을 때, 그리고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집니다(요한복음 5:24). 예수님께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13).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44-4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3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예언 

김무현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가 행한 모든 말씀, 기적과 부활 외에도 성경의 예언으로 확신될 수 있습니다.

그(예수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성경(구약)이 곧 내(예수님)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예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21)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한복음 5:46)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예언 (Prophecy about Birth of Jesus)

예수님의 출생지와 출생집안, 출생방법 등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예언하고 있습니까?

출생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테초에니라. (미가서 5:2)

출생집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 11:1-2, 10)

출생방법: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많은 유대 사람들과 모슬렘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현현이 아닌 위대한 선지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내가 하나님이고 메시아임을 성경이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설사 어떠한 사람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가장할 목적으로, 성경에 나와있는 예언의 몇 가지를 흉내내려 해본다 할지라도, 자기의 출생에 관해서는 자기가 임의로 조정(control)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미가서에서 예언된 대로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시는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운행하시어 그 뜻대로 이루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가 5:2)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이새(다윗의 아버지)의 가계(이사야 11:10)에서 동정녀(처녀, 이사야 7:14)를 통하여 잉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움직이지 아니하시면 미가서의 예언은 불발로 끝나버릴 위기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1-7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로마황제의 생각을 움직여 로마의 식민지인 유다 백성에게 호적하라 명을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자손이므로 본적(사무엘상 16:1)이 베들레헴인 요셉은 출산이 가까워 거동이 불편한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에 호적 하러 갑니다. 도착하자마자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합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오는 도중 요셉과 마리아가 늦잠을 잤거나 다른 이유로 여정이 조금이라도 늦추어 졌다면 미가서의 예언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여정과 그 갈길, 그 때와 모든 행사를 주관하시고 주위의 권세자들이나 사람들의 마음과 뜻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번 보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요 (시편 33:13)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시편 33:15)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1

제5장 성경의 예언과 성취 I  - 서언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됨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김무현


서언

앞장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성령님의 인도 하에 기록되었으며, 1500여 년에 걸쳐 40인 이상의 저자를 통하여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일관성이 있고, 서로 모순이 없다는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며 공부하였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성령님이라는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한 증거는 성경의 예언들로 드러납니다. 성경은 어떠한 중요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선포하고 그의 성취를 통하여 역사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증거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전 수 백년 전에 다 완성되어 그 사본이 널리 배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오신 후, 그 이루어진 일들을 보고 배포된 사본들을 모두 거두어들여 수정하고 조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3:19)

성경에는 1817개의 예언(for 737 separate subjects)이 8,352 구절에 들어있으며 이는 전체 성경 내용의 27%나 된다고 합니다. 그 예언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것을 보면서 역사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예언들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괜히 예언들을 임의로 적어놓았다가 나중에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위험을 또한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성령님의 강권적 인도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내용의 예언들이 기록되었고 또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는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수백 구절에 달합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예수님에 관한 구약의 예언과 성취에 관한 몇 개의 예만을 함께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지면의 제약 상 더 많이 살펴보지는 못하지만 이 예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이사야42:9)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한복음 16:13-14)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15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 III. 토의 및 적용

김무현 


보화 캐기에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어느 미국 사람이 죽은 아버지가 몇 백만 불의 유산을 본인 이름으로 남겨 놓은 것을 모르고, 일생동안 거지처럼 살다가, 죽기 전에야 그 사실을 알고, 억울해 땅을 치고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값을 메길 수 없는 엄청난 보화, 즉, 우리의 인생을 정말 풍성하게 해 줄 성경을 유산으로 남겨 주셨는데, 그 말씀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은 채, 영적으로 거지처럼 살다가 일생을 마감하는 이름뿐인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땅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보화 캐기에 오늘부터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왜 쓸데없는 내용이 있지?

당신은 간혹 성경을 읽는 도중 ‘왜 이런 쓸데없는 내용이 있지?’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말씀은 “원대한 창조의 목적과 과정”, “우리를 향하신 계획”, “사랑과 권면의 메시지” 등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마음 중 꼭 필요한 것만 성경에 담아 놓으셨습니다.(성경이 팔만대장경이 아님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내용 중에 필요 없는 말씀은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너무도 자세히 나오는 성막의 구조양식이나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 제사들, 그리고 여러 절기들 이 모든 것들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그런 내용 같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과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성도의 삶 등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속의 보화를 캐내는 사람에게만이 그에 합당한 큰 감동과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119:103)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헛 그물질만 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게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11절에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고기가 일 백 쉰 세 마리라.” 이 구절을 묵상하던 중 ‘왜 성경에는 이런 쓸데없는 내용들이 있지? 도대체 물고기수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어느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었습니다. 모나미 볼펜 사장이 처음에는 사업에 번번이 실패하여 가지고 있던 자본과 재산을 다 날리고 실의와 고뇌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기까지에 이르렀답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기도원에 올라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며 요한복음을 읽어내려 가던 중 바로 그 21장에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실의에 빠져있는 제자들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함께 하실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큰 고기가 153마리나 가득한 그 물, 그곳에 눈이 멈추어지며 “네가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때 사업에 재기하고 이 같은 수확을 얻으리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슴이 벅차 오르며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오더랍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후로 주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뛰어 성공했고, 그래서 모든 모나미 볼펜에는 “153”이라는 표시가 찍혀있다고 합니다.  (참고 : 153 이란 수는 각 숫자의 3제곱을 더한 합이 자기 자신이 되는 특이한 수이다. 즉, 13+53+33 = 1+125+27 = 153 )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시편 119:50)

이 설교를 들은 후에 ‘정말 성경에는 쓸데없는 내용이 없구나. 내가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구절에서 다른 사람은 새 생명을 얻고 인생이 전환되는 그러한 능력이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필요 없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 한자 한자에서 성령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부(wealth)와 귀(honor)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역대상 29:12)

[나눔] 당신은 일반적으로 필요 없어 보이거나 그냥 넘어가기 쉬운 성경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한 예를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How do we know the Bible is inspired?)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숨결로 영감되어 대언자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흔히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증거가 있으면 말해보시오.”라고 질문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경우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앞에서 공부한 바와 같이 성경이(디모데후서 3:16 등)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증거 하지만 그것은 아래 예와 같이 순환이론(circular reasoning)이므로 논리적으로 그들을 설득시키기가 힘이 듭니다.

•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진리이며 권위이다. (The Bible is inspired, therefore true and authoritative.)

• 그렇다면, 성경이 영감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How do you know it is inspired?)

• 그건,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지. (Because the Bible says so.)

• 그러면, 그 성경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How do we know it is right about this?)

• 그건, 성경이 영감 되었기 때문이지. (Because the Bible is inspired.)

……

이러한 논리적 설득이 어려운 이유는 성경을 이미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졌다고 받아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사이에 생각하는 전제 및 견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효과적인 대응방안은 무엇일까요? 어떤 식으로 불신자들의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 함께 토의해 봅시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Always be ready to give an answer to everyone who asks you to give the reason for the hope that you have. But do this with gentleness and respect. (I Peter 3:15)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14

성경은 과연 비과학적인가? 

김무현


성경은 과연 비과학적인가?(Is the Bible Scientifically Unreliable?)


이 세상의 진리나 과학적 패러다임은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변해 갑니다. 하지만, 성령님에 의해 기록 된 성경은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참 진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무오성은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현 과학의 패러다임으로 뿌리를 내린 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면 창세기의 창조내용이 근거 없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진화론의 문제점들만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2권 『성경적 창조관 세우기』에서 더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무디과학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어윈 문(Erwin Moon) 박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일생동안 성경의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수 차례에 걸쳐 과학적으로 어떤 문제나 모순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하여 보았으나 그러한 오류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에스겔 7:2과 이사야 11:12에 '땅 사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네 구석들(four corners)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지구가 사각형으로 되어있다 하니 비과학적이고 오류가 있다"라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corners'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나프'의 일반적인 의미는 '극한(extremity)'입니다. 이 '카나프'는 욥기 37:3과 38:13에서도 쓰였는데, 그곳에서는 땅 끝(ends)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땅 끝이란 번역도 땅에 끝이 있는 것처럼 잘못 전달될 위험이 있습니다(실제로 중세 및 그 이전의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음.). 즉 욥기 37:3의 '빛으로 아주 먼 곳(extremity)까지 이르게 하시고'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4 corners를 가진 사각형을 말하고자 했다면 '파무드'라는 정확한 의미의 히브리 단어를 주셨을 것입니다. 히브리 원어의 부적절한 번역 표현으로 발생된 오해들입니다.


또 간혹 성경에 지구가 평평한 것 (flat earth)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성경에는 그런 구절들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욥기 26:7에는 "그는 땅을 공간에 다시며(He suspends the earth over nothing: NIV)"와 같이 우주 공간 속에 아무런 지지도 없이 중력에 의해 떠있는 지구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이사야 40:22에는 "그는 땅 위의 궁창에 앉으시나니(NIV: He sits enthroned above the circle of the earth)"와 같이 지구가 원형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circle'이라는 말은 구상/원형을 의미하는 히브리 원어 '쿠그(khug=sphericity or roundness)'를 번역한 것입니다. 잠언 8: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을 두르실 때"에서도 같은 원어 '쿠그'가 'compass'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여튼 성경에서는 분명히 지구가 구상으로 되어 있으며 우주 공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히려 더욱 놀라는 것은 B.C. 700년 경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가 어떻게 지구가 구상임을 알았으며, 아브라함 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욥이 어떻게 지구가 이 우주 공간에 덩그마니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는 그리이스나 로마 사람들, 심지어 중세의 사람들까지도 지구를 거대한 코끼리나 거북이 또는 헤라클레스등이 받치고 있다고 이해했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그들의 손을 빌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34-35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재림시 지구의 한편에서는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낮에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은 순간적이며 전지구적 사건일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당시 어느 누구도 지구가 구상이며 자전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지구상에 밤과 낮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은 이미 열성/우성에 관한 멘델의 법칙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예로 성경은 욥기 36:27-28에 물의 순환과 강우(Hydrologic Cycle and Precipitation)에 관한 정확한 과학적 표현이 나옵니다. 욥기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아브라함의 부족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욥기 36:27-28). "He draws up the drops of water, which distill as rain to the streams; the cloud pour down their moisture and abundant showers fall on mankind." (Job 36:27-28)

심지어 중세(Middle Ages)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구름이 어떻게 생기며 비가 왜 오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신비로움으로 여겨왔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B.C. 2000년 경의 욥이 어떻게 그렇게 물의 순환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는지 경이롭기만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할 수 있었겠지만…….


시편 8:8에는 바다의 흐름(해류)에도 길이 있다고 합니다.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The birds of the air, and the fish of the sea, all that swim the paths of the seas).” 이사야 43:16에도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pathways in the seas)” 라고 하였습니다. 바다에 해로가 있다고 처음 발견된 것은 해양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매튜 모리(Matthew Maury)에 의해서이며 19세기 중엽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8편에는 이미 바다에 해류가 있다고 선포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조에 관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3)라고 증거하였습니다. 현대물리학의 아버지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에너지(E)와 물질의 질량(m)이 E=mc2 (c: 빛의 속도)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보이는 것들(질량)이 보이지 않는 것(에너지)으로부터 창조될 수 있음(matter can be made from energy)을 증명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확장되는 우주 (expanding universe: 시편 104:1-2, 이사야 42:5, 45:12) 나 공기에 무게가 있다는 것 (욥기 28:25) 등 성경이 쓰여졌을 그 당시 지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과학적, 의학적 기록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갈릴레오는 후일 종교재판의 압력에 의해 자신의 견해를 외적으로 수정한바 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성경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많은 불신자들의 “성경과 과학은 충돌한다”라는 편견과는 달리 프랜시스 쉐퍼 (Francis Schaeffer) 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습니다. "근대 과학의 등장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와 대립하지 않았다. 사실상 결정적으로 과학혁명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에 근거했다." 20세기의 저명한 두 석학 화이트헤드 (Whitehead)와 오펜하이머(Oppenheimer)교수는 불신자이면서도 정직한 관점으로 "근대 과학의 중요한 기초가 성경적 세계관에서 탄생하였다"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즉 "인격적 초월자의 지적 합리성에 대한 신념이 근대 초창기 과학자들의 연구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과학의 역사에는 3번의 큰 혁명이 있었습니다. 뉴턴에 의한 중력장의 발견이요, 맥스웰의 전기장과 자기장의 통합이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 not completed yet)입니다. 모두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입니다.


과학의 여러 분야의 박사학위를 가진 윌더스미스(A. E. Wilder-Smith)는 그의 『성경의 신뢰성(The Reliability of the Bible)』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성경은 과학교과서도 아니고 과학적 전문 용어로 쓰여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성경은 여러 과학적 현상들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어휘들로 명확하고도 무오하게 기록하였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로부터 성경은 오류가 많고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이러한 조롱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태복음 22:29)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12

성경이 참 역사의 기록임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들 

김무현


 성경이 참 역사의 기록임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들 (Archeological Evidences of the Bible's Historical Records)


당신은 누구에게 의심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있었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불쾌했던 경우 중에 하나였겠지요. 당신은 성경을 읽으면서 또는 기도를 드리면서 의심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야고보서 1:6~8을 묵상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야고보서 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성경의 많은 기록들을 과학적/합리적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의 작은 머리로 재해석하려는 운동이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이러한 자유신학은 동정녀탄생이나 예수님의 모든 기적들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예수님을 부처나 공자와 같은 훌륭한 도덕선생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자유주의 신학이야말로 오늘날 진화론과 함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가장 큰 사단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진화론과 인본주의, 자유주의가 팽배했던 유럽의 교회들은 지금 화려한 건물과 간판만 존재하지 신앙은 죽은 채로 남아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4을 묵상하십시오.

그 중에 이 세상 신(사단)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4)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로마서 16:17-18)

성경은 비과학적인 책이 아니라 초과학적인 책입니다. 지어낸 역사가 아닌 참 역사입니다. 과학으로서는 영의 세계(spirit)나 초월자를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최근까지 발달된 과학은 오히려 진화보다는 창조를 더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2권에서 더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기록임이 계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과학에 관한 저서보다 신학에 관한 저서를 더 많이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심도 있는 성경 연구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의 역사적 기록들은 세속의 어떤 역사문서보다 더 사실이며 진리이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45년 간 고대 문서들을 연구한 윌슨 교수(Prof. Robert Wilson)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세속의 대부분의 역사 문서들은 편견적이거나 부정확하다. 하지만 오직 성경만은 신뢰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많은 고고학자들이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에 의심을 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앗수르 최대의 성읍이며 요나서에 나옴으로 유명한 니느웨의 유적을 고고학자들이 19세기까지 발견하지 못하여 그것과 관련된 성경의 내용을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큰 홍수의 범람으로 잠겨버린 니느웨성의 흔적과 유적들이 발견되고 소 선지서 중의 하나인 나훔 1:1, 1:8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에 다시 한번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에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1970년경에 시리아에서는 B.C. 2300년경으로 추정되는 Ebla 점토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성경을 비판하는 일부 고고학자들이 창세기에 나오는 “가나안(Canaan)”이라는 이름이 구약의 후대에서나 쓰인 이름으로 모세 오경이 모세에 의해서 기록되어졌다는 유대전승에 회의적 반응을 보여 왔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창세기 1:2의 “테홈(the deep)”이라는 히브리 원어가 구약의 후대에서나 쓰였던 단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Ebla 점토판에 의해서 “Canaan”과 “Tehom”의 히브리원어가 이미 모세 전에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Ebla Tablet

또한 이사야 20:1에는 “앗수르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비평하는 많은 고고학자들이 다른 근동의 어떤 역사적 문서에서도 사르곤 왕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역사성에 오류가 있음을 주장하여 왔습니다. 최근에 이라크의 코사밷(Khorsabad)라는 곳에서 사르곤 왕의 궁전의 일부가 발굴되어 아스돗을 포획한 사실이 그 궁전 벽에 새겨져 있음으로 인해서 성경의 정확한 역사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비슷한 예로 성경에 나오는 헷족속(Hittites)에 대한 기록이 다른 근동지방의 문서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음으로 인해서, 성경의 저자가 역사에 없는 민족을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되었었습니다. 최근에 터키의 보가즈코이 (Bogazkoy)라는 곳에서 헷족속의 도시와 역사적 기록들이 발굴됨으로써, 성경의 정확한 역사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다니엘 5장에 바벨론의 마지막 왕으로 나오는 벨사살 왕(Belshazzar)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다른 근동의 문서에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 나보니더스 (Nabonidus)로 나와있음으로 해서 성경을 비평하는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경이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으로 간주하여 왔었습니다. 19세기 중엽에 벨사살이 나보니더스 왕의 아들로서 그 당시에 나보니더스 왕과 바벨론을 공통으로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적힌 토판(Tablet)들이 발견됨으로써 성경의 정확한 역사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특히 다니엘서의 예언들이 너무나 정확하게 성취되기 때문에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이 그 책이 다니엘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 후대에 쓰여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자료는 거의 없으며 그저 다니엘서에 헬라어 단어 3개가 들어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리스의 악기 이름으로서 그와 같은 자유신학적 주장에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여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대 바벨론의 유적들은 『다니엘』서의 내용들이 모두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합니다. 예를 들어 발굴된 한 바벨론 건물의 비석에는 다니엘서 1장의 내용처럼 포로로 잡혀온 왕족과 귀족에게 갈대아(바벨론)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라 적혀있고, 다른 곳에서 발굴된 거대한 용광로에는 다니엘서 3장의 내용처럼 바벨론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 시키는데 사용되는 용광로라 적혀있었습니다. 한편 발굴된 느브가넷살 왕의 명각에는 다니엘서 4장에 느브가넷살 왕이 제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했던, 그 공백기에 대한 기록이 있었는데, 그 내용과 시기가 성경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최근에 고대 역사를 연구한 데이비드 롤(David Rohl)의 문명의 기원 (The Genesis of Civilization)과 피터 제임스(Peter James)의 책 암흑의 세기들 (Centries of Darkness) 에 의하면, 성경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고대 초기 이집트의 역사의 일부가 조작/변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합류하여 영국 케임브리지 (Cambridge) 대학의 렌프류(Coli Renfrew) 교수는 “고고학의 시대 추정에 새로운 혁명이 진행 중에 있다.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할 것이다. (A chronology revolution is on its way. History will have to be rewritten.)”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간에는 불신자들까지도 성경을 토대로 연구하고 탐험해야만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성경이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오류 없이 기록된 책임을 믿습니까?

호주고고학연구소(Australian Institute of Archeology)의 소장이었던 윌슨(Clifford Wilson) 박사는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의 어느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과 상반된 적이 없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소유한 어떤 역사책보다도 가장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고고학의 가장 위대한 권위자 넬슨 글루에크(Nelson Gluek)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찾아낸 수십 가지의 고고학적 발굴들은 한결같이 성경의 역사기록들이 개괄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경의 내용을 자세히 연구함으로 인하여 종종 놀라운 고고학의 발견들이 이루어졌습니다.” (Dr. Nelson Glueck, Archeologist, from his book “Rivers on the desert”)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9

성경은 왜 다른 역사책이나 자서전들과 다른가? 

김무현

 

성경은 왜 다른 역사책이나 자서전들과 다른가? (Why the Bible Is Distinctively Different from Other Historical or Biographical Books?)


우리는 흔히 역사책에서 배우는 역사적 기록을 무비평의 자세로, 마치 그 속의 모든 내용이 확실하고 객관적인 기록인양 받아들이려 하며, 그 역사적 기록들이 개인의 편견이나 관점 또는 민족의 유익여부에 따라 얼마나 많이 변조되고 위조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하지만 성경은 성령님의 인도 하에 기록된 책이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압제 당하고 사로잡혀 가는 일들, 그리고 민족의 영웅이나 왕들이 조금도 미화되지 아니하고 추잡하고 부끄러운 것까지도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어떤 개인이나 민족의 유익에 따라 변조되어서 기록되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시편 33:4)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는 모두 다섯 명의 여인들이 나옵니다. 즉, 다말, 라합, 룻, 밧세바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 중 마리아를 제외한 네 명의 여인이 이방인 출신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의 성관계를 통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의 천한 기생이었습니다. 룻도 모압여인이었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왕과 간통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흠많은 여인들과 부끄러운 사실들을 굳이 예수님의 왕의 계보에 포함시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특별한 목적과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마태를 그와 같이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시를 받은 저자들의 입과 손을 통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모세는 창세기 1:26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리고 창세기 3:22에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창세기 11:7 바벨탑 사건에서도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라고 기록했습니다. 창조주를 가리키면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씀으로써 이방민족의 다신교와 유사하다는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기록했을까요? 분명히 유일하신 하나님(Mono God)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모세가 왜 ‘우리’라는 말을 썼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왜 ‘엘로힘’(Elohim의 접미사 him은 3이상의 복수인 경우에 쓰임. 하지만 엘로힘은 단수동사와 함께 쓰였음)이라는 이름을 썼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며 모세가 절대로 써서는 안될 것 같은 단어가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임의로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그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한 분이면서도 세 위(성부, 성자, 성령)를 가지신 인간의 두뇌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에 동참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개념을 모세가 그의 두뇌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조명하여 주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경도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함께 창조사역을 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만물이 그(예수 그리스도)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6-17)

비슷한 예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중에 의아한 내용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2:38-39)

베드로는 욥바에서 고넬료에 대한 직접적인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이방인의 구원이나 성령 받음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할례 없는 이방인의 구원을 외쳤던 사도 바울과의 혼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고넬료 사건전인 오순절 설교에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으로 죄사함을 받는 약속에 모든 이방인이 포함된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설교 중에 강권적으로 그렇게 인도하여 주셨고 그것을 누가가 기록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사주를 받은 발람의 입에서 엉뚱하게도 이스라엘을 축복한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같은 일들, 즉, “성령이 너희 생각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한복음 16:13)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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