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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6-06-07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시길 원하셨나? 

김무현


    성경을 비아냥거리며 비웃기를 좋아하는 불신자들 가운데에는 만일 전지 전능하신 창조주가 계시다면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왜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을 오늘날 보여주시지 않는가? 라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실제로 기적을 보느냐 안 보느냐가 믿음의 결정적인 동기가 됩니까? 출애굽기의 바로 및 애굽백성 그리고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민수기 14:22-23)은 어떠합니까? 여리고성의 백성들(여호수아 2:10-11)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및 따르던 사람들은 어떠하였습니까?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29:3-4)

신명기 29:3-4에서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는 등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도 하나님을 깨닫는 마음과 영적인 눈과 그 음성을 듣는 귀를 갖고 있지 못함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영적인 눈을 허락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며, 동행하고 인도하여 주시는 그 은혜가, 그 많은 기적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 때보다도 얼마나 더 풍성 한지요.

하나님께서 믿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심지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볼지라도 믿지 않게 됩니다. 누가복음 16:31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믿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6:31)

요한복음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전후하여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참으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라지신 예수님을 열심히 찾으러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낸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한복음 6:28)”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그러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성령의 자연스러운 역사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무리들은 그 교훈을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로 체험한 그 다음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요한복음 6:30)” 즉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합니다.

기적 때문에 흥분하며 믿으려하는 사람들은 계속 기적을 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믿음의 기반이 기적이기 때문에 그 기억이 희미해지면 또 다른 기적을 찾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메시아의 참 의미며 그 안에 영생이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런 어려운 말씀은 잘 이해가 안가니 표적이나 보여달라고 수군대는 무리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복음의 메시지)이 영이요 생명이나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책망하십니다. 즉 표적을 봄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그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서는 그 기적을 체험한 무리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예수님)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러라(요한복음 6:66)”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무엇인가 얻어내기를 바라며 따라다니던 무리들은 진리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마저도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흩어지고 숨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나의 신앙에 혹시 이러한 모습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요?

최근 인간 유전자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를 통하여 지극히 미세한 유전자(gene) 속에 실로 엄청나게 복잡하고도 정교한 정보들이 신묘막측 하게 담겨져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DNA를 모두 연결하면 지구와 태양을 10번 이상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된다고 합니다. 그 안에 인체의 생명현상을 만들어가고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체의 구조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저 우리가 숨쉬고 사는 것이 기적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능자의 지적 설계를 보면서 모든 진화론자들이 신앙을 가지게 됩니까?

로마서1:20에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창조주의 손길을 분명히 보되, 그를 인정치 않으려는 죄성이 그 믿음의 시야를 가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그 뿌리깊은 죄성 말입니다.

이 세상신(사단)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4)

로마서 1:21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로마서 1:21-25)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성경을 통하여 주어지기 전에는, 그러한 기적들이 하나님의 유일한 신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필요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완전한 계시(성경 66권)가 주어진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대에 기적의 역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완전한 계시가 주어졌으므로 극히 제한적으로 (특히 자연계의 기적) 사용하실 뿐입니다. (완전한 계시가 미미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한 일선 선교지 등에서도 기적의 역사가 복음전파의 일익을 담당함을 볼 수 있음).

로마서 1:17을 묵상하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무엇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 이르게 합니까?

고린도전서 1:21-24를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1-24)

유대인과 헬라인은 각각 무엇을 구한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까? 왜 좀 더 드라마틱한 방법대신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쓰실까요?

이 시대에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역사 하실 때 회심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사실 성경을 통한 완전한 계시가 주어진 후에 가장 놀라운 기적중의 기적은 그 말씀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인격과 가치관이 완전히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의 변화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냐 사단의 능력이냐를 분별하는 리트머스 테스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실재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새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과연 필요할까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17:31)

로마서 16:26에 의하면 우리의 신앙을 능히 견고케 하는 것은 계시된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로마서 16:26)

다음의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정리하는 기분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길 원하셨나?”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7-29)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4:1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22:18~19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도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복음의 내용이 요한계시록으로 마쳐졌다고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다른 것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에 부가되거나 비슷한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 카톨릭에서 교리문답서를 성경과 같은 위상에 둔다거나 교황청의 명령을 성경과 같은 권위에 둔다면 그것은 오류일 것입니다. 모슬렘들은 마호메트에게 알라신이 특별히 계시하셔서 성경 위에 코란을 주셨다고 합니다. 몰몬교도들은 조셉 스미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계시하셔서 성경 위에 몰몬경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이 요한계시록 22:18에 비추어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예레미야 23:30)? 성경의 전체적 내용을 확실히 알고 이단의 교리에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리고 주위에 이단의 교리에 현혹된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에게 정확하고 바른 복음을 전할 지혜와 담대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5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김무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성경의 참 저자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다음 구약의 성경구절들을 찾아보시고 그 핵심적 내용을 정리하십시오.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0:1-2, 33: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출애굽기 17:14, 24:4)

제 구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 (에스겔 24:1-2)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이사야 30:8)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Then, the Lord put forth His hand and touched my mouth, and the Lord said to me; 'Behold, I have put My words in your mouth.') (예레미야 1:9)


예수님/성령님께서 말씀하시길…

40명이 넘는 성경의 저자(실제로는 대언자)들은 성경에서 3,000번 이상이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대언해서 적고 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찾아보며 성령님이 성경의 참 저자임과 그로 인한 권위와 무오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정리하십시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요한일서 1:1-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라디아서 1:11-12)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에베소서 3:3-4)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 (요한복음 10:35)

마태복음 22:43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육체적 저자는 다윗이지만, 참 저자는 성령님이었음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36:4에 보면 바룩이 예레미야서를 기록했으며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실질적 저자입니까? 한편 예레미야가 구술한 내용은 여호와께서 직접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누가 예레미야서의 저자입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사도)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태복음 10:20)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일서 5:7)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3

성경의 저자는? 

김무현


      성경은 성경의 저자가 오직 성령님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6, 베드로후서 1:21, 요한복음 14:2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義)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참고> “감동하다”의 헬라어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다”의 뜻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후서 1:2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하나님께서는 계시와 영감의 기록인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친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는 지도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애굽기 20:19).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두렵건데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신명기 18:16).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명기 18:18). 이것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약속이지만 또한 앞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택하시고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고 기록할 것임을 약속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우리가 참 선지자인가를 구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명기 18: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나 대언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계시나 영감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나 대언자들은 다만 성경기록의 도구나 매체로 쓰여졌을뿐 성경의 저자는 아닙니다. 성경의 참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2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 I. 서언

 김무현 


서언

제 1, 2장에서는, 참 기독인이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계시하여 주신 성경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가치와 윤리체계를 세우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구원의 범위를 넘어, 다른 사람의 구원과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사회와 문화의 구속에까지 열정을 갖고 있는 자이어야 함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건강한 성경적 세계관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inerrancy)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18에서 다음과 같이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해 증거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8)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특별히 다르게 창조된 것은 영적인 존재(창세기 2:7)로서 사고 할 수 있다는 것과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어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사랑과 그 계획들을 기록하여 놓으셨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의 시작과 끝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육체적 죽음 뒤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을까? 절대적 윤리 기준은 과연 존재하며 누가 그것을 만들 수 있나?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고민하며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명확한 해답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붙드시며, 그의 뜻대로 운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도록(stewardship, 창세기 1:28, 시편 8:6) 창조된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을 알려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15에서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창세기 1:26)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하여 언어로 기록하여 넣으셨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후서 1:2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그의 말씀을 보존토록 하셨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로마서 3:1-2)

이스라엘 서기관(Jewish scribes; Masoretic)들이 양피지 두루마리에 하나님 말씀을 사본으로 기록하고 보존하는데 어찌나 철저했던지, 획수를 정확히 세어 중간에 한 획이라도 잘못되면 그 두루마리 전체를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본을 만드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붓을 깨끗이 빨고 경건한 자세와 마음으로 기록했다 합니다. 다른 민족이 이 사명을 부여받았더라면 이렇게 정성스럽게 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튼 이러한 정성스런 기록의 보존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사야 2:3)

성경의 원본은 지금 남아있지 않고(신약원본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약 사본 사이에는 약 100년 정도의 간격이 존재함) 사본(codex)들도 손상된 부분이 있는 채로 보전되어, 여러 사본을 서로 비교 검토하여 오늘날의 성경전체가 완성된 것입니다. 1947년 아랍의 양치기 소년에 의해 쿰란 동굴에서 구약전체가 거의 손상 없이 보존된 사해사본(Dead-Sea scroll: copied around 200 B.C. by Essenes(에세네파))이 발견됨으로 성경전체가 특별한 문제없이 사본으로부터 잘 만들어졌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편 신약성경은 지금까지 일부 또는 전체가 수록된 고대 헬라어 사본들이 5,000개 이상 발견되었으며, 교리상의 문제에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의 일부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한 예로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A.D. 100년경 사본으로 보이는 요한복음(A.D. 90년경에 기록)의 일부분이 보존된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Nestle Greek New Testament와 거의 완전히 일치함이 밝혀졌습니다. 원어로 된 성경(구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신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됨)이 사본으로 만들어지거나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극소량의 누락이나 주석을 위한 첨가 및 그 의미 전달이 조금 모호해 질 수는 있겠지만, 그 원본이 성령님의 인도 하에 오류 없이 만들어 졌음을 믿는 것은 흔들리지 않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바뀌어도 성경말씀은 진리로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이사야 40:8)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4:35)

구약 39권은 AD 90년 얌니아 종교회의에서(예수님 생존시에도 구약 39권은 이미 정경으로 인정되고 있었음), 신약 27권은 AD 397년에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e)에서(AD 367년 아타나시우스 감독 등에 의해 신약 27권이 합본으로 편집됨) 정경으로 채택되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정경의 선택과정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셨음을 조금도 의심치 말아야겠습니다. 40인이 넘는 저자가 1500년이나 되는 기간에 걸쳐 기록한 성경 66권이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consistent)이고 내용이 서로 완벽하게 맞는 것을 보면, 성령님이 정경 66권의 참 저자이시며 정경으로 채택케 하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님이 참 저자임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 예언의 성취에 있습니다. 즉 먼저 말씀하시고 나중에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노라.” (요한복음 13:19)

 

요약 (Summary)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저자들을 통하여 그 성경 원본에 자신의 말씀이 오류없이 기록 되도록 성령으로 주관하시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의 믿음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이 최종 권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놀라운 예언의 성취들은 역사와 모든 만물과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그가 계시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3-29

다빈치코드 : 비밀스런 감춰진 진실? 

; 성경을 공격하고 있는 반기독교적 베스트 셀러

 (The Da Vinci Code : secret hidden truth?)

Alexander Williams 


      악마(Devil)는 거짓말쟁이며 모든 거짓의 아비이다. 사람의 마음(heart of man)은 무엇보다 미혹되기 쉬우며 극도로 부패한다. 이 둘이 합치면 정말로 매우 해로운 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들이 성경(Bible)을 불신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전략들을 시도해 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해야만 한다. 이런 토대 속에 최신 베스트셀러 책(저자의 웹 사이트에서는 고금을 통해 가장 널리 읽히는 책 중의 하나라고 주장함)은 댄 브라운(Dan Brown)이 집필한 다빈치코드(The Da Vinci Code)이다. 영화판권은 이미 소니 영화사에 팔렸고, 총 감독은 2005년 영화상영을 목표로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론 하워드 감독, 톰행크스 주연의 영화 ‘다빈치코드’가 2006년 5월 19일에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개봉 예정이다).

태평스런 독자들은 이 작품이 단지 가톨릭 교회의 오푸스 데이(Opus Dei) 회(會)에 반대하는 성배를 지키려고 하는 자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살인 미스테리를 다룬 흥미진진한  공상 소설에 지나지 않는데, 왜 항의를 하냐고 질문한다.

첫째 이유는 이 소설이 역사적인 사실(fact)에 의거한다는 대담한 진술 때문이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이 소설에 기술되는 모든 예술품, 건축, 문서와 비밀의식들은 정확 합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겨우 1명의 비평가가 동의하면서, '그의 연구에는 오류가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오류가 없는 연구?

그러나 분명 오류가 있다 [1]. 예를 들면, 다빈치코드에 등장하는 영웅 중의 한 명은 레이 티빙(Leigh Teabing) 경(卿)이라는 저명한 역사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배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첫 번 째로 성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천국으로부터 팩스로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무수한 번역, 추가와 개정을 통하여 생성되었습니다. 역사는 결코 그 책의 최종적인 버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방황하던 하나의 역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수 천의 추종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80개 이상의 복음서들이 신약성경에  포함되는 것이 고려되었습니다. 어떤 복음서가 성경에 포함될지를 누가 결정했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성경은 이교도인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에 의해 집대성되었습니다." (다빈치코드 p.231)

굉장히 많은 역사적 오류들은 계속 나열하고 있지만, 이 한 페이지만 보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는 데에 충분하다.

모든 성경은 그 자체가 정말로 "하나님의 감동으로(God-breathed) 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16).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며 (베드로후서 1: 21),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4:35, 마가복음 13:31, 누가복음 21:33). ‘무수한 번역본들'에 의해 그 의미가 소실되거나 와전되지 않았다. 최초의 언어는 히브리어(구약성경 , 일부는 아람어)와 그리스어(신약성경) 였다. 예를 들면 성경의 현대 영어 번역본은 고대 그리스어와 옛 히브리어 필사본의 세밀하게 준비된 기록들(수 천의 필사본으로 퍼져나감)에 의거한다. 기원전 1 세기에 쓰여진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은 구약성경 책의 필사본들이 1000 년이 지나도 최초 히브리 성경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필사 중에 생겨난 약간의 오류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성경의 최종 버전(definitive version)’을 확실히 가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라틴 불가타 역본(Latin Vulgate, 4세기에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은 1000년 이상 최종적인 버전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버전으로의  갈림은 주로 신학적 교리에 의해서였지, 필사본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 개신교와 카톨릭 성경의 내용은 구약성경에서 약간 다른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사한 필사본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도 주요한 교리는 필사본의 차이로 인해 애매해지지 않았다. 정말로, 유사한 고대 필사본들이 많다는 사실은 최초의 원본들이 매우 정확했음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삶은 수천 명의 추종자에 의해 기록되었던, 불안한 영향을 끼치던 한 역사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당시 로마 제국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지척거리 내에서 살았고 죽었던 무명의 목수였다. 그의 '불안한 영향'은 몇  세기가 지난 후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결국 잘못된 많은 복음들을 만들어내었고, 아무도 그와 경쟁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선택하도록 했다는 생각은 웃기는 일이다.

신약 성서 문서들에 대한 수집은 1 세기 이내에 시작되었다. 바울은 누가복음을 '성경(scripture graph)‘으로서 참조했다 (디모데전서 5:18절에는 신명기 25:4절과 누가복음 10:7절을 성경에 기록된 예로서 인용하고 있다).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이 '성경(scripture)'이었고, 베드로후서 3:15-17절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을 권위가 있는 것으로 인정했고, 수신자들에게  '다른 성경(the other scriptures)'과 같이 그 의미들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틀린 경전들로부터 진정한 경전들을 찾아내고 분리해내려는 작업은, 이단자였던 마르시온(Marcion)이 권위가 인정된 책들을 매우 축소시켜 자신의 목록을 만든 2세기에 동기를 부여받게 되었다. 모방은 항상 원본 이후에 출현하므로, 신약성경 수집의 주요 형태들은 그 당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콘스탄틴 황제가 소집했지만 결정을 내린 것은 318명의 주교 모임이었다)에서, 그 의제는 토의조차 되지 못했다. 공의회의 토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집중되었고, 그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4복음서의 권위는 참석한 모든 주교들에게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갖고있는 신약성경 27권의 책(우리가 소위 정경(Canon)이라고 부르는)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종적인 성명은 AD 393년과 397년에 아프리카 교회회의(African synods, 히포와 카르타고에서 개최)에서 선포되었다 [2].

정경(Canon)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고, 단지 사람들에 의해 인정될 뿐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명한 신약성경 학자인 브루스(F. F. Bruce)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

"신약 성경의 책들은 정경 목록에 형식적으로 포함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권위를 갖게된 것이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신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것을 교회가 인정했기 때문에 교회의 정경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교회] 공의회들은 기독교계 내에 어떤 새로운 것을 강요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기독교 사회 내에서 이미 일반적으로 실행되고 있던 것들을 집대성했던 것일 뿐이다.” [8]

그리스 신약성경(Greek New Testament)의 세계적인 권위자 중 하나인, 브루스 메트져(Bruce Metzger)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여러분은 정경이 교회 정치가 관여한 일련의 싸움의 결과가 아니었다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정경은 책들의 권위있는 목록이기 보다는 권위있는 책들의 목록이다. 이 책들의 권위는 선택되었기 때문에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 각 책들은 누군가가 그것들을 함께 모으기 전에 이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4]

(성경의 오류없음과 정경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 Q&A: Bible을 보시오).


실수들, 그것은 늘 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른 소설 책들도 동일한 품위없는 역사적인 실수들을 분명히 자행해 왔다. 그러므로 왜 이 다빈치코드 소설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이 소설은 매우 저명한 일부 실제 인물과 조직인 (그리고 거의 믿을만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오푸스 데이, 진짜보다 가짜 복음서를 더 선호하는 '역사학자들'을 이 음모이론과 함께 등장시켜서 교묘하게 사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 소설에서 신성한 성배(Holy Grail)는 술잔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성한 성배는 예수님과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은 한 여성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 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인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그림 속에(예수님의 오른 편, 명예스러운 자리에)  바로 이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 확인해 보라) [5].

댄 브라운은 소설적 기법을 활용하여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한 유혹적인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혼을 포함시켜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도록 주장한다). 

댄 브라운이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서(Gospel of Mary Magdalene)'는 '변경될 수 없는(unaltered)' 사실이고 (p.248), 따라서 이러한 사건들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그러나 그가 인용한 말들은 이 소설이 사기임을 무심코 드러낸다) 주장할 때, 총명한 독자들은 이 소설이 실패작임을 알게된다. 이 영지주의 복음서(Gnostic gospel)는 세 개의 단편적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출현은 2 세기 중반으로까지 그 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같은 또는 다른 영지주의 복음서가 기술되기 이전에, 이미 교회는 4개의 정경이라고 인정 받은 복음서들의 권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했던 사람들은 쉽게 이러한 이단 사설에 속았을 수도 있다.

한편, 강한 영향력이 있는 가톨릭 집단인 오푸스 데이회는 그들의 '비밀'이 노출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조사를 무위로 끝내기로 작정하고 살인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이 말하는 원래의 '진정한 (true)' 기독교 신앙은 여신 숭배 의식이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독교 역사를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여성혐오(misogynist patriarchal)' 버전으로 대체하여 재구성해 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가치

여기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밝혀진 진실(upon revealed truth)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비밀스런 감춰진 진실(secret hidden truth)에 근거하는가? 나의 신앙은 모세로 (정말로 아담으로까지, 창세기 5:1) 거슬러 올라가는 문서화된 밝혀진 진실에 근거한다. 모세는 죽기 바로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명기 29:29)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명기 30:11-14)

말씀이 그들에게 가깝게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 말씀이 쓰여지도록 보증하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1:18, 신명기 31:9-13, 24-29).

기독교 신앙에는 어떤 숨겨진 원리가 자리잡을 곳이 없다. 숨겨진 심오한 것들이 확실히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문서로 우리에게 원리를 확실히 보여주셔서, 우리가 그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을 때 우리가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판단의 기준은 우리에게 전하셨던 말씀이다 (요한복음 12:48). 따라서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기록들을 이미 제공하셨다는 것이고, 진정한 역사가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고, 부정할 의도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용하고 있는 소설가들을 경계해야할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A comprehensive critique with links to other critiques is given at A Review and Critique of The DaVinci Code
2.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II Ante-Nicene Christianity A.D. 100325, Eerdmans Publishing Co., Grand Rapids, 1910 & 1992, Ch. 138, pp. 516524.
3. Bruce, F.F., The New Testament Documents: Are they reliable? IVP, Downers Grove, Illinois, 1960.
4. Metzger, B., interviewed in Strobel, L., The Case for Christ, Zondervan, Grand Rapids, MI, 1998.
5. Leonardo Da Vinci was a brilliant 15th century artist and technological genius, not a Bible scholar, and he is described in the book as a 'trickster.' His curious painting displays artistic license, not necessarily biblical truth.


*참조 :

.댄 브라운 '다빈치 암호' 비판 (1)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54019

.댄 브라운 '다빈치 암호' 비판 (2)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54023

.댄 브라운 '다빈치 암호' 비판 (3)

https://m.cafe.daum.net/tulipconference/lmVo/20?

.소설 다빈치코드의 허구 드러낸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33581

.다빈치코드는 신성 모독하는 허구에 불과…이래서 반대한다 (2006. 3. 27. 국민일보)

https://v.daum.net/v/20060327193507044

.다빈치코드 보급판 5백만권 뿌려진다 (2006. 3. 16. 크리스천투데이)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73052

.다빈치코드 공식홈페이지
http://www.sonypictures.com/movies/thedavincicode/

The Historical Basis of Dan Brown's The Da Vinci Code

https://biblearchaeology.org/research/contemporary-issues/3997-the-historical-basis-of-dan-browns-the-da-vinci-code

The Da Vinci Code: Fiction masquerading as fact

https://creation.com/the-da-vinci-code-fiction-masquerading-as-fact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4/0413davinci.asp

출처 - AiG, 13 April, 2004.


미디어위원회
2006-03-08

이 성경 구절들은 서로 모순인가? : 솔로몬의 병거 수, 

다윗이 죽인 사람 수, 염병으로 죽은 사람 수,  솔로몬이 얻은 금, 다윗이 지불한 땅 값. 

(Contradictions in the Bible?)


1.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던 병거의 말의 수는 사만 인가, 사천 인가?

1) ”솔로몬의 병거의 말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며” (열왕기상 4:26)
   ”And Solomon had forty thousand stalls of horses for his chariots, and twelve thousand horsemen"

2) ”솔로몬의 병거 메는 말의 외양간은 사천이요 마병은 만 이천 명이라...” (역대하 9:25)
   ”And Solomon had four thousand stalls for horses and chariots, and twelve thousand horsemen"

추정되는 모순에 대한 설명 :

그 구절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당신은 어떠한 모순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솔로몬은 한 병거(chariot, 전차) 당 10마리 말로 이루어진 병거들을 갖고 있었다. 만약 솔로몬이 사천의 병거들을 위한 외양간을 갖고 있었다면, 그것은 사만 마리의 말들을 위한 외양간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많은 성경 번역본들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을 실수라고 보고있지만, 사실 어떠한 모순도 없는 것이다. 

*참조 : Did Solomon have 40,000 stalls for horses or 4,000 

https://www.followintruth.com/did-solomon-have-40000-stalls-for-horses-or-4000

 

2. 다윗이 죽인 사람의 수에 차이가 있는가?

1)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승의 사람과 마병 사만을 죽이고...” (사무엘하 10:18)
   ”And the Syrians fled before Israel; and David slew the men of seven hundred chariots of the Syrians",

2)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천승의 군사와 보병 사만을 죽이고...” (역대상 19:18)
   ”But the Syrians fled before Israel; and David slew of the Syrians seven thousand men which fought in chariots",

추정되는 모순에 대한 설명 :

한 병거당 10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두 구절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참조 : How Many Charioteers Did David Slay?

https://apologeticspress.org/how-many-charioteers-did-david-slay-738/


3. 염병(plague)으로 죽은 자에 차이가 있는가?

1)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민수기 25:9)
   ”And those that died in the plague were twenty and four thousand.' [24,000]

2)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고린도전서 10:8)
   ”Neither let us commit fornication, as some of them committed, and fell in one day three and twenty thousand." [23,000]

추정되는 모순에 대한 설명 :

하루에 23,000 명이 죽고, 다음 날에 1,000 명이 더 죽었다면, 거기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

*참조 : Inconsistent Allegations

https://apologeticspress.org/inconsistent-allegations-1606/


4. 솔로몬이 오빌에서 얻는 금은 사백 오십 달란트인가, 사백 이십 달란트인가?

1) ”솔로몬왕이 에돔 땅 홍해 물 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은지라 히람이 자기 종 곧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을 솔로몬의 종과 함께 그 배로 보내매 그들이 오빌에 이르러 거기서 금 사백 십 달란트를 얻고 솔로몬왕에게로 가져왔더라” (열왕기상 9:26-28)
”And king Solomon made a navy of ships in Eziongeber, which is beside Eloth, on the shore of the Red sea, in the land of Edom. And Hiram sent in the navy his servants, shipmen that had knowledge of the sea, with the servants of Solomon. And they came to Ophir, and fetched from thence gold, four hundred and twenty talents, and brought it to king Solomon."

2) ”그 때에 솔로몬이 에돔 땅의 바닷가 에시온게벨과 엘롯에 이르렀더니 후람이 그 신복들에게 부탁하여 배와 바닷길을 아는 종들을 보내매 그들이 솔로몬의 종들과 함께 오빌에 이르러 거기서 금 사백오십 달란트를 얻어 솔로몬왕에게로 가져왔더라” (역대하 8:17-18)
”Then went Solomon to Eziongeber, and to Eloth, at the sea side in the land of Edom. And Huram sent him by the hands of his servants ships, and servants that had knowledge of the sea; and they went with the servants of Solomon to Ophir, and took thence four hundred and fifty talents of gold, and brought them to king Solomon."

추정되는 모순에 대한 설명 :

이것은 다른 두 여행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른 성경 구절들에서 오빌로 갔던 많은 여행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년에 일차씩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 왔음이더라” (열왕기상 10:22),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성전 벽에 입히며” (역대상 29:4)

*참조 : Bible "contradiction" - How much gold did Solomon get from Ophir?

https://www.creationscience.co.uk/blog/bible-contradiction-how-much-gold-did-solomon-get-from-ophir

Do 1 Kings 9:28 and 2 Chronicles 8:18 contradict?

https://forwhatsaiththescriptures.org/2021/09/30/do-1-kings-9-28-and-2-chronicles-8-18-contradict/


5. 다윗은 그 땅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주었는가, 은 오십 세겔을 주었는가?  

1)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사무엘하 24:24)
”And the king said unto Araunah, Nay; but I will surely buy it of thee at a price: neither will I offer burnt offerings unto the LORD my God of that which doth cost me nothing. So David bought the threshingfloor and the oxen for fifty shekels of silver."

2) ”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역대상 21:25)
”So David gave to Ornan for the place six hundred shekels of gold by weight."

여기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 은 오십 세겔은 후에 제단이 세워진 그 땅(터)에 대한 비용으로는 너무도 보잘것 없다 (참조. 출애굽기 21:32). 그러나 그 비용은 한 마리의 소 값으로는 적절해 보일 수 있다. 역대상의 기록(금 육백 세겔)은 최초 땅에 대한 가격으로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다윗은 오르난에게 소 값도 역시 지불하고자 했다. 다윗은 땅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지불하였고, 소 값으로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하였다.    

*참조 : Balancing the Budget

  https://answersingenesis.org/contradictions-in-the-bible/balancing-the-budget/


*참조 : Countering the Critics Question and Answers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aq/critics.asp#contradictions

Bible Contradictions

https://answersingenesis.org/contradictions-in-the-bible/

Apologetics Press : Alleged Discrepanc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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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미디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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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위원회
2006-03-02

창조 복음주의자였던 사도 요한

(John ... the creation evangelist)

Russell M. Grigg 


      AD 90년 경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60여년이, 그리고 바울이 죽은 후 1 세대가 지나간 시기였다.

사랑받는 제자였던 요한(John)은 이제 살아있는 가장 마지막 사도였다. 그는 20여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교회 내에서 박해와 고난보다는 부패와 잘못된 가르침이 전해지는 것을 보아왔었다. 이것은 1세기의 교회 내로 침투하고 있는 병균과 같은 것들로서 결국에는 교회를 내부로부터 파멸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그러므로 창조주, 구세주, 심판주가 될 수 없다고), 그리고 죄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진정한 지식은 오직 계몽된 중개자들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사상의 전파에 대항하기 위해서, 나이 많아 늙은 요한은 펜을 들고 파피루스에 복음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특별한 것이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복음주의자 요한

복음주의자 요한은 영혼을 일깨우는 메시지를 적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신성과 창조주로서 예수님의 위대한 역할을 주장하면서, 그 당시에 있던 거짓교사들에 대해 대답하고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요한은 우주가 존재하게 되었던 순간으로 우리들을 데려갔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표현인 ‘말씀’(the Word, 그리스어로 Logos)은 우주와 그 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방법, 즉 "하나님이 가라사대(And God said)”...., 또는 베드로가 사용했던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벧후 3:5)을 생각나게 한다. 성육신하여, 이 말씀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요 1:14).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을 보고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참조 막 9:2), 다음과 같이 확언하였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빛과 어두움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었던 요한은, 사람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이 진리에 반응할 때, 그들은 빛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도록 이끌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렇게 함으로서 믿음의 성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36). 그리고 제자들의 첫 번째 임시적인 반응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 1:38)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했고, 시작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뒤따랐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함으로서 (최초의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였고...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1)) 그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면서("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고("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요16:30)”), 그리고 마침내 전능하신 영광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감격스러운 도마의 믿음과 기쁨의 위대한 고백("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속에서 그 절정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첫 번째 증언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을 거부함으로(요 9:13-41, 10:33) 그것을 거부했다.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요 2:18)”). 이것을 통해 요한은 점점 더 어두움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자들 중에는 물러가고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요 6:66).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돌을 들어 치려하는 자들이 있었다 (요 8:59). "우리도 소경인가?” 라고 물어보는 바리새인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0-41) 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도 있었다(요 13:27).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주장하는 대제사장들도 있었다.   


잘못된 가르침

오늘날에도, 잘못된 가르침이 다시 교회 내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만약 그것을 점검하지 않고 방치해 둔다면, 그것은 심각한 손상을 입힐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1] 20세기에 들어서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 분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진리는 진화론이라는 철학에 의해서 더럽혀져서 내려오고 있다.

만약 태초에 창조주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왜 지금 구세주가 필요하단 말인가? 만약 아담 이전에 죽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죄의 삯이 죽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세계가 진화론이 가르치는 것처럼 이전부터 항상 투쟁과 피흘림과 죽음의 고통으로 가득했었다면, 무엇으로 회복되어진다는 것인가? [2] 

그리고 만약 성경의 첫 글인 창세기의 기록이 신화나, 공상소설, 또는 신학적 시라면, 성경의 마지막 글인 요한계시록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에 대한 기록도 그것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이 우주가 창조주의 도움없이 저절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는 교과서, TV 프로그램, 잡지 기사들의 형태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죄와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해주신 선과 악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사람은 어느 날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인, 그리고 성경 해석에 있어서 반창조주 철학을 허락한 그 당시의 교회들은 인본주의라는 종교에 기초한 사상들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1 세기의 교회들을 위협했던 피할 수 없는 파괴적인 내부 붕괴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주신 메시지 속에서 경고하셨던 것이었다. 

그러나 1 세기의 교회들은 살아남았다. 사도 요한의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고, 창조주 하나님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우리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오게 했다.


결론

오늘날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설명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훨씬 많은 이유와 증거들이 있다. 만약 이러한 근본적인 진리들을 뒤따라 간다면,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를 빛과 어두움 중 어디에서 살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이끌 것이다. 

 

References

1. The Church has survived, will survive, and indeed will overcome all the opposition that Satan can muster, as Jesus promised,‘…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ell shall not prevail against it’ (Matthew 16:18). Nevertheless, in Revelation chapters 2 and 3, Jesus also issued the sternest of warnings about the demise of those individual churches that entertained false teaching.
2. Acts 3:21 (see also Isaiah 11:6-9).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john-the-creation-evangelist

출처 - Creation 14(1):43-44, December 1991.

미디어위원회
2005-08-03

대홍수 이후 시대 3

유종호


8. 진화론자들에게는 창조로부터 바벨탑 후의 약 100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역사 기록이 없다.

바벨탑 후의 약 100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부터 시작해서 진화론자들의 역사책은 실제적인 사실들, 날자들, 사건들, 사람들의 이름들을 기록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단순한 가상이나 추측 또는 이론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대홍수 직후와 홍수 이전 약 1,600년 내외의 실제적인 역사기록이 없다. 그들은 과학적인 방법이나 통상적인 역사 기록에 의해서 바벨탑 이전 시대의 인류의 역사 기록을 확실하게 추적할 수가 없고 홍수 이전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홍수에 대한 것, 그리고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흩어졌던 기간 이전의 사람들, 부족들과 나라들의 이름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과 이론과 추정은 인간이 마침내 역사기록을 시작하기까지 “추정적이고 가상적인”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은 점진적으로 발달해 왔다는 것이다.

로버트 웬케는 그의 저서 <선사시대의 제 양상들, 1980> p.266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의 조상들은 사냥하고 수집하며 살아오다가 10,000년 내지 3,500년 사이의 1-2천 년 이내에 갑자기 재배성 식물과 농업경제가 세계 도처에서 독자적으로 나타났다. 어떤 여건들이 이와 같은 광범위한 문화적 현상들이 있게 했는가? 그리고 이런 여건들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만 존재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진화론자들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경과 거기 주어진 역사에 대하여 그처럼 적대적이지 아니하고, 그들이 만일 교만과 자기숭배에 빠져있지 않다면, 그들에게 이제껏 답변되지 아니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이미 찾아냈으련만.

성경이 우주, 그리고 특히 인간과 문명의 기원에 관련하여 가르쳐 주는 역사는 추정이나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자들이 선사시대라고 즐겨 부르는 기간 동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실제 이름, 그들이 살았던 시기, 그들의 수명, 그들이 행한 일 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역사적 진실을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 자리에 사실에 입각한 역사를 제시한 일이 없다. 동북 일리노이 대학에 있는 아시아 연구 프로그램의 회장인 폴 웰티는 그의 저서 <인간의 문화유산-세계사, 1969> p.6에서 다음과 같이 통상적인 진화론적 시도를 하고 있다.

“이 무렵(BC 3,000) 쯤에 인간은 자기의 생각이나 활동, 법칙들, 경험들, 싸움들, 그리고 소원들을 쓰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역사라고 부르는 그것을 시작했던 것이다. 인간이 필기를 하기 전 거의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길고 긴 모든 기간이 단지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고 관찰했던 것들을 아무도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사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나는 다음 사실 즉,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말고도 1,500년에서 2,000년이 더 있다는 사실을 추가하고자 한다.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이보다 이른 역사적 기록에 대해서 왜 최소한 언급조차 안 하고 그것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는가? 모두가 알고 있는 씌어진 인간의 기록들은, 성경이 일반 역사보다 1,500년 내지 2,000년 더 앞서 있는 것을 빼고는 성경에 나와 있는 수천 년간의 기록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폴 웰티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크로마뇽인들의 그림들과 그 이전 사람들의 화석과 제품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선사시대 조상들이 남겨놓은 그 자신들의 소수의 흔적들로부터 일반적인 그림을 이어 맞춘 우리 학자들의 놀라운 학구적 활동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직도 과거로부터의 유물이나 유적은 극소수이고 그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은 일부만 사실이고 일부는 거짓일지도 모른다. 씌어진 기록이 없이는 우리는 어느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무슨 고백인가! 그러나 왜 그들은 성경이 세속 역사보다 1-2천 년 전의 만물의 실제 시작에 대해 제시해 주는 바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가? 창세기는 물론이고 누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의 크리스마스 얘기에는 우리들에게 주는 많은 역사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때때로 크리스마스에 의해서조차도 상당히 빨리 지나가버리거나 읽히지 않는다. 눅3:23 이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께서·······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등등 약 60세대를 거슬러 나열하고 마지막으로 3장 말미(36절)에 셈은 노아의 아들이요, 그 위는 레멕, 므두셀라, 에녹, 야렛, 마할랄렐, 가이난, 에노스, 셋, 아담으로 끝맺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실제로는 피조자)이었다. 우리들과 우리의 후손들이 이보다 더 나은 어떤 (소위) 선사(先史), 또는 참 역사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떤 역사 또는 소위 선사(先史)가, 우주와 인간의 창조, 자기들의 창조주를 배반한 인간의 타락, 전 세계적인 대홍수, 그리고 바벨탑 사건 때의 언어의 혼잡 등 이 지구와 우주의 고대사의 4대 사건을 주장하는가? 전 우주의 광대무변함, 시계와 같이 정밀한 태양계, 태양과 행성들과 그들의 위성들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면서 서로 인력을 작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상의 만물들 특히 인체의 완벽성 등을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은 전능하신 비물질적이고 영존하시는 설계자-창조자가 만물의 시초에 계셨음을 분명하게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우주의 만물과 모든 원소를 무에서 창조하신 분이다.

더구나 지상 만물의 점진적인 퇴폐와 노화는, 비록 설계자-창조자가 처음에는 완벽하고 잘 설계된 지구를 창조하셨으나 만물을 썩고 퇴폐하게 만드는 어떤 사건이 역사의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열역학 제2법칙에 비추어보아도 명백하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욱 상세하게 다루겠다.

그래서 지구상에 수 천 피트의 퇴적층과 산맥의 융기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 지구 역사상 어느 시점에 매우 격렬한 홍수와 산들의 융기작용이 있었다는 것과 이런 일은 점진적으로 서서히 그리고 균일하게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지구의 전 영역에서 각기 다른 문명이 전격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은 인류가 어떤 이유로 각각 다른 언어들을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부족, 종족, 나라마다 다른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분명하게 말해 준다. 오늘날에는 약 6,000가지로 구성된 50여개의 언어 집단이 존재하고 있다.


9. 바벨탑 이후 첫 몇 백년-또한 동굴들과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크로마뇽인.

사람들은 바벨탑사건 이후 세계의 여러 곳으로 이동했는데, 그들은 소집단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음식과 은신처가 쉽게 확보될 수 있는 곳으로 흩어졌고 반드시 바벨탑으로부터 바깥쪽으로 나아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상당기간 단순한 사냥꾼이나 식량을 모으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각자의 침구를 가지고 다녔겠지만, 영구 주택이 손쉽게 마련될 수 있는 재료들로 지을 수 있을 때까지는 가끔은 동굴입구 근처에서 살았을 것이다.

동굴은 현대인들까지를 포함해서 전 역사에 걸쳐, 인간들이 자신들을 위한 다른 거처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도 사용해 오고 있다. 구약 창 14:6에 보면 그 이름이 동굴에서 사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호리 족속들은 천막에서 살았다. 에돔 족들과 롯과 다윗과 엘리야도 동굴에서 간소하게 살았다. 오늘날 인도에는 동굴에서 사는 베다족이 있다. 우기에는 입구 근처에서 햇볕과 공기를 쬐며 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풀로 지은 오두막에서 산다.

바벨탑 사건 이후 그렇게 이동한 사람들이 조상들로부터 금속과 그것의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금속을 확보하기까지는 돌과 부싯돌이 발견되는 곳에서는 그것들을 계속 사용했고 점진적으로 정착지와 공동체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많은 다른 방법으로 부싯돌을 쪼개는 방법을 알아냈다.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하나의 비밀이다. 부싯돌로 여러 가지 칼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날카로웠든지 오늘날 사람들이 칼로 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그 돌칼로 짐승들을 도살할 수 있었다. 야만인들도 매우 빠르게, 죽인 동물의 가죽을 가지고 그들의 거처를 짓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진화론자들이,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전이되었다는 것을 발견해 내기 위한 시도로, 기꺼이 원용하곤 하는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은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 네안데르탈 계곡의 동굴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때 이래 해골들이 벨기에, 프랑스,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어오고 있다. 이 두개골 중의 어떤 것은 경사진(뒤로 재껴진) 이마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현대인의 것만큼 큰 두뇌를 가지고 있다. 화가는 이 사람들을 원숭이로도, 정치가로도 그릴 수 있었다. 만일 그들에게 사업가의 옷을 입히면 그들은 뉴욕의 월가를 거닐어도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있다. 실제로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우리들의 것보다도 더 커서 진화에 관한한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고 큰 뇌를 가지고 있는 것 외에는 현대인과 다르지 않다.

진화론자들에 의해 자주 원용되는 또 한 쌍의 화석은 몇몇 네안데르탈인과 같이 때때로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은 프랑스의 Le Eysies 마을에 있는 적은 바위 거처의 이름을 따서 크로마뇽인이라고 부른다. 5구의 해골이 발견되었다. 한 늙은 남자, 두 젊은 남자, 한 여자, 그리고 한 어린이인데, 그들 모두는 한 가족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추측한 대로 원인(猿人)이 아니고, 긴 다리와 현대인들의 것만큼 큰 뇌를 가진 키가 크고 직립하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의 뇌의 크기는 현대인들의 것이 평균 1,350cc인 것에 비하여 1,550~ 1,650cc 였다. 그들의 뇌가 14~22 % 더 크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수만 년 전 인간의 것이라는 것인가? 이것들이 최근 사람의 것이어서는 안 되는가? 그들이 동굴에서 살았고 때때로 그 동굴들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 아무 것도 증명해 주지 못한다. 

과거 어떤 동굴인들은 동굴의 벽에다 말, 사슴, 황소, 들소, 매머드, 그리고 그 밖의 동물들이 활동하는 모습으로 훌륭한 그림들을 그려놓았다.

소위 이들 원시인(?)들에 관하여 1961년도 라이프 지는 p.169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주된 동굴에 있는 Lasceaux와 몇 개의 인접한 화랑에는 거의 500두의 황소, 말, 영양, 그리고 강에서 헤엄치는 한 떼의 순록들까지 예술성과 힘 있고 탁월한 동작이 정확도를 갖추어 그려져 있다. 그 그림들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미술품의 앙상블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고 나서 라이프 지는 낡은 진화론 신조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계속 쓰고 있다.

“이 동굴 사람들 즉 크로마뇽인들은 그들의 미술품으로 진화의 오랜 과정에서 지금까지 성취한 최고의 기량을 소유했음을 증명했다.”

아마도 이 크로마뇽인들은 그들이 대홍수 때에 가지고 있던 기술과 지식으로 이런 능력을 성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들의 이런 이동에 대하여, 알렌 콘슬라와 테리 스마트 공저 <세계의 사람들-세계사 연구, 1984> p.38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의한 모든 발굴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선사시대 사람들의 온전한 모습을 모르고 있다. 우리의 지식이 제한되어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한데에서 살다가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체는 대기 중에 노출되어 있어서 부패했고, 그들의 뼈들은 동물들에게 씹혔고 햇볕에 표백되었다. 우리의 지식은 또한 다른 이유들로도 제한 받는다. 즉 선시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를 글로 기록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검토하거나 알아내기 위한 문자적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뼈들이나 도구들이나 다른 생활의 유물들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내야만“ 한다. 이런 증거들을 가지고 우리는 이야기의 줄거리와 내용을 짜 맞출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은 추리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

추측과 가정이 진화론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의 기초인 것이다.

1987년 3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 p.167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후기 빙하기 사람들은 창의력이 없는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대도약을 한다. 최초의 이 완전한 현대 인류-호모 사피엔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은 빙하기 유럽의 거주자들로부터 왔다.”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아마도 대홍수 때 동굴 내의 퇴적층이나 기타 지역에 매장된 사람들 중의 일부였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제시한 모든 것들은, 어린이들이 자기들의 조상들을 원숭이들 속에서 막연하게 손으로 더듬어 찾도록 방치하면서도, 교과서는 가지고 있지 않은 유사 이전의 역사이다. 이 모든 정보들을 무시하고 실질적으로 경멸하는 것은 얼마나 비과학적인가? 진정한 과학이라면 이런 식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과학자들은 진정으로 과학적인 해답을 찾기 위하여 사용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하고 활용한다.

진화론자들과 역사교과서 교사들은 성경 역사가 창세기 12장과 그 이하에 주어진 것과 동일한 많은 사건들을 기록한다. 창세기 11장은 데라 및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완벽하게 창세기 12장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의 처음 1~11장이 교과서 및 다른 역사책이 가지고 있는 선사와 같이 유사이전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는가? 이 사학자들은 왜 하나님에 대해 반역만 하고 창세기 1부터 11장까지를 거부하는가? 창세기 12장 이후의 전 성경을 통하여, 성경의 처음 11장은 역사적 사실이요 역사적 사건임을 계속하여 거론하고 있다.

한편 바벨탑 사건 직후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데 지쳐서 가족 단위로 정착생활 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들은 연평균 기온이 21℃ 내외로 온난했던 애굽, 바빌론, 소아시아, 팔레스타인, 앗시리아,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 중국, 그리고 미주의 온난한 지역 등과 같이 비옥한 강 유역에 모여 살게 되었다. 모든 종류의 기술과 기능을 소유하고 유능한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은 신속하게 가정과 도시를 이룩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거대한 방주를 건조했던 점으로 보아 바벨탑 이후의 그들의 후손들도 분명코 모든 종류의 발달된 구조물들을 만들 수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선박까지도 만들고 페루, 멕시코, 아메리카 등에서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2장을 참조하라.


지금까지(영원한 찬가의 서곡에서) 지구의 창조로부터 바벨탑 이후의 몇 세기까지 인류사의 과정에서 일어난 것들을 살펴보았다.

이 단락에서는 나는 첫째로 진화론자들이 공공 연구기관들을 통해서 우주와 지구와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증명되지 아니한 생각들을 마치 입증된 사실인 것처럼 공표함으로써 야기해 온 혼란에 대해 다루고, 두 번째로는 인간의 손을 통해 기록된 말씀으로 영원하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영이신 만물의 창조주요 설계자에 대해 가져온 긍정적 희망에 대해서 다루려고 한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08-02

대홍수 이후 시대 2

유종호


5. 대홍수와 바벨탑 사이의 기간 중의 사람들과 그들의 기술들

대홍수 이후에 사람들은 다시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몇 배나 더 잘 순종하기 시작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 대홍수 이전 사람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기술과 능력들(특히 건축 부문)이 곧장 도시와 국가 건설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벨탑과 계단식 피라미드형으로 건설한 신전 또는 사원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수학, 건축, 그리고 기술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지구의 인구를 늘리고 상업을 발전시키고 나라를 형성하는 데 있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가 터키로 진출한 후인 1810년경부터 우크라이나의 공한지에 토지를 허용했던 게르만인들과 매우 흡사했다. 1880년 제 3세대 만에 그 지역의 인구밀도가 매우 조밀해져서 수많은 젊은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할 첫 번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런 건설적인 게르만인들을 바라본 러시아 원주민들은 “이것이야말로 게르만식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홍수 후 겨우 1-2세대 만에 홍수 이전 시대에 풍미했던 교만과 반역과 독신(瀆神)과 반신(反神) 현상이 다시 만연했는데, 특히 그들이 하늘까지 닿을 탑을 쌓으려고 계획했을 때는 그 도가 극에 달했다. 아마도 그들은 오늘날의 교과서와 도서관들이 당시 그들의 역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신전과 같은 탑들을 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성과 대(臺)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11:4)”라고 말한다. 아마도 홍수 이전에는 사람들이 온 세상에 널리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탑을 쌓은 목적은 또한 아담 이후 “사람의 아들들” 이래로 인간들이 늘 그래왔듯이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인간을 영화롭게 하고 인간을 신성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햇볕에 말린 일상적인 벽돌을 쓰는 대신에 그들은, 기후와 시간에 의한 파괴를 더 잘 견딜 수 있을 불에 뜨겁게 구운 벽돌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벽돌들이 서로 잘 접착되도록 하기 위하여 바벨론 근교에서 진흙 또는 아스팔트를 갖다가 사용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또한 인간의 언어를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교만한 계획들을 모두 무위로 돌려버렸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라는 말씀(잠언 16:9)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그들의 말을 교란시키셨다. 이것은 분명히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내려온 가족과 부족들과 백성들에게 관한 것이지 각 개인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족 간에도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개의 가족이나 부족은 각기 고유한 방언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말들이 옛 생각과 연합을 이룸에 의한 내적 과정으로 구성된 기적이 그들로부터 제거되고, 각 가족과 부족에게는 즉시로 새롭고 상당히 다른 모습의 표현방식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언어의 혼돈이 너무나도 철저해서 사람들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일도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더 이상 서로가 함께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은 가족끼리, 종족끼리, 부족끼리 지구의 모든 지역으로 흩어졌고, 그때 각각의 무리들은 그들 자신의 고유한 언어, 문자, 문서, 문화, 문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을 것이다. 

현대 인간(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교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대홍수 전, 바벨탑 전, 그리고 역사를 통해 줄곧 그랬던 것과 다르지 않다. 안토니 펠드만은 그의 저서 <공간, 1980> p.215에서 별을 삼키는 블랙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즉;

“만일 그 이론이 맞는다면 은하의 운명은 결정적이다. 우리가 지금 밤하늘에서 보는 별들이 소멸되어 버리는 것은 오직 시간의 문제다. 다행히도 그와 같은 대재앙의 시간 스케일이 매우 길다(수십억 년). 그래서 우리 자신의 태양계가 위협받기 전에 우리는 블랙홀이 미치지 못하는 다른 은하계를 식민지로 삼아 멸망을 피하는 방법을 능히 고안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또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라. 이것이 바벨탑 사건 때의 인간의 태도였고 “사람의 아들들”의 태도였다.


6. 진화론자들은 언어의 기원을 모른다.

진화론자들은 왜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갑자기 많은 다른 언어들을 구사하기 시작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수천 가지의 언어들과 방언들이 있고,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배우기가 어렵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언어가 원숭이의 채팅과 다른 동물들의 각종 울음소리들로부터 발전되어 왔으며, 인간이 언어를 발전시킨 것은 오랜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애써오고 있다. 이 주장은 시를 짓는 사람들에 의해서 부인되었다. 언어학자인 노암 춈스키는 인간의 언어와 동물들의 울음 등은 전혀 달라서 심지어 서로를 비교할 수조차 없다. 유명한 철학자인 막스 뮬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터치하지 못하는 장벽 즉 언어의 장벽이 있다. 언어는 우리의 루비콘 요새이고 어떤 사람도 그것을 감히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자연선택의 과정도 새들과 동물들의 표현으로부터 의미 있는 말들을 추출해낸 적이 없다” (언어학 강론 p.23, 240, 370에서).

언어가 동물들의 정글에서 생겨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원시인들의 언어는 일반적으로 고도로 복잡하다는 것이다. 다윈이 인류 가운데 가장 미개하고 그들의 언어는 조잡하다고 여겼던 남아메리카의 최남단에 사는 사람들은 30,000개 이상의 어휘를 가졌는데, 이는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것의 2배 이상이나 되는 분량이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언어는 헬라어보다도 더 복잡하다. 고대 헬라어와 라틴어는 현대의 그것들보다 더 복잡하다. 아마도 바벨탑 사건 때에 야기됐던 혼잡한 언어가 문어(文語)로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들의 사상과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한 더 많은 다른 단어들을 고안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7. 기록물(문서들)

인간의 언어가 바벨탑 사건으로 혼잡하게 되고 다른 가족들과 부족들이 그들의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후,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문어체로 발전시키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에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왔다. 버나드 람 교수는 그의 저서 <과학과 성경에 대한 크리스천의 관점> p.327에서 “창4, 5장에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도시와 농업과 금속 제련과 음악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쓰고 계산하고 건설하고 농사짓고 쇠를 녹이고 작곡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런 일들은 아담의 바로 후손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

만일 인간들이 홍수 전에 문자로 기록할 수가 있었다면, 당연히 홍수 후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수에서 바벨탑 사건까지의 기간 동안 창11:1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더라.”라고 씌어있는 대로 인간은 하나의 언어만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언어와 기록이 인간이 창조된 바로 그 순간부터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에, 대홍수 전과 대홍수 후의 족장들의 자세한 족보가 노아를 거슬러서 아담 때부터 정확히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기록들은 필기를 해놓지 않으면 유지 보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전 기간을 망라한 족보 내역은 어딘가에 기록으로 보존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노아는 족장들의 역사적 기록들을 방주에 가지고 들어갔을 것이고, 그것이 창세기에 잘 요약되어 있다. BC 2,500에서 BC 3,000년 이전의 문자와 기록된 역사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바벨탑 이후에 새로운 언어가 생겼음으로 옛 것은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제네크 쿠팔이 그의 저서 <인간과 그의 우주, 197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대로 그때 문자가 온 지구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대 애굽의 그림 모양의 표현, 수메르와 아카드 땅에서 사용된 상형문자, 인디아의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원시 인디언들의 심벌(아직도 해독되지 않았지만) 등은 대략 같은 시기에 각각 독자적으로 발명되었다.”

각기 다른 가족들과 부족들 단위로 땅 위에 흩어졌음으로 자연스럽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각각에게 내려주신 새로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대화를 그들이 개발한 문자들로 기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지구 전역에 갑자기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러 기록들이 대충 그때부터 애굽, 수메르, 바빌로니아,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중국, 일본, 그리고 페루의 잉카,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마야, 그리고 물론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미디어위원회
2005-08-01

대홍수 이후 시대 1

유종호 


1. 대홍수 이후의 지구

대홍수 기간과 그 직후에 지구 위에서 생겼던 모든 재난을 감안해 볼 때, 대홍수 이후의 지구는 과연 어떠했을까? 한 가지는 아주 분명하다. 대홍수 이후 물이 빠진 세계는 그 전에 존재했던 아름답고 쾌적하고 풍성한 옛 모습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3: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 위에 있던 수증기 층으로부터 지구상에 엄청나게 퍼부은 많은 양의 비와, 거칠고 파괴력을 가진 바람과 토네이도, 사이클론, 허리케인, 북극지역에서의 거의 순식간에 -130℃로 기온의 급강하, 해저 샘(깊음의 샘)들의 터짐, 땅덩어리와 산들의 융기, 화산과 지진에 의한 전 지구가 흔들림, 빠른 속도로 밀려와서 육지를 덮친 엄청난 높이의 파괴적인 해일, 부서지고 깨진 바윗돌과 온갖 잡탕들과 뒤섞여 버린 비옥한 토양 등... 이 모든 것들이 1, 2마일 또는 그 이상의 깊이로 새로운 퇴적층을 이루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지구에 살아남은 거민들을 위해 전혀 새로운 지구 환경을 만들었다.

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비옥한 원시 토양은 아마도 영원히 잃어버린 것 같다. 노아와 그의 세 아들 내외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럽인들이 미국의 새로운 땅으로 이민해서 유럽지방의 옛 지명들을 미국의 새 정착지에 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와 그 후손들은 분명히 홍수 전부터 알고 있던 옛 지명들을 새로운 정착지에 부여했을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지상의 물을 분리하시고 마른 땅을 드러나게 하셨을 때, 즉 대홍수 이전의 육지는 지금보다는 훨씬 넓었을 것이다. 대홍수 이전에는 기복이 덜하고 평평했던 지구 표면은 홍수 이후에는 궁창의 물이 쏟아져 내려서 험준한 산맥과 깊은 해저를 이루며 변형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해저 특히 대륙 인근의 대륙붕들은 옛날에는 마른 육지였을 것이다.

풍성하게 자라던 수많은 맛있는 과일들, 견과류, 딸기류, 손쉽게 구할 수 있던 각종 채소류들은 모두가 사라졌다. 그 전에 있던 삼림과 인공적인 거대한 문명의 산물들은 없어져 버렸다. 울퉁불퉁한 산들과 급하게 흐르는 강들이 인간들이 다니려고 하는 모든 길을 막아버려서 넘고 건너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딴 행성에 온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달라진 것은 지구 표면만이 아니었다. 기후도 엄청나게 변했다. 그때까지는 궁창 위에서 보호막 역할을 하던 물 층이 그들을 보호하고 땅위에 알맞게 수분도 공급해 주었었는데, 이제는 온난하고 쾌적한 봄날 같은 기후는 더 이상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혹서와 혹한과 무시무시한 폭풍우의 날씨가 반복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후와 직면하게 되었다. 젯드 기류를 따라 이동되는 고·저 기압체계는 하루하루의 날씨가 예측할 수 없고 끊임없이 변화무쌍했다. 보호막 역할을 하던 물 층이 사라지자 당대 인간은 물론이요 자녀들과 후손들 그리고 동물들의 수명은 단축되었고, 마찬가지로 식물들의 수명도 현저히 단축되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뉘게 하시매(창1:7)” 이전에 궁창 위에 있던 물에 정영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일단 떨어진 이 물들은 지금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다시 하늘로 되돌아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땅 덩이를 들어 올려(융기시켜) 산맥들을 형성하셨을 때, 동시에 모든 홍수 물들을 저장해 둘 처소를 만들기 위해 땅의 어떤 부분의 깊이는 낮추셨다. 

이것은 모두가 시편 104:5-8의 내용과 잘 어울리는데 즉,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8절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산은 솟아오르고 골짜기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처소로 내려갔나이다.”이다. 진실로 노아와 그의 후손들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2. 대홍수 이후의 사람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틀림없이 그들은 고도의 지적 수준을 가졌으며, 기술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르네 누어버겐은 <잃어버린 인종들에 대한 비밀, 1977>에서 노아와 그의 아들 가족 등 소수의 생존자들은 대홍수 이전에 있었던 기술지식을 거의 보유할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같은 책 p.26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는 바뀐 환경에 낯선 생존자들인 이 8명의 적은 집단이 홍수 이전 문명으로 알려져 있는 모든 부문의 기술적 환경여건을 재생시키기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물론 기술 분야는 그것의 유지를 위해서 많은 인구가 꼭 필요하다. 따라서 생존한 인간 가족들이 대홍수 이후 시대에 재건할 수 있었던 문명의 수준은 심각하게 낮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대형 3층 선박을 건조하고 있던 전 기간 동안(약 120년)에 그들이 능히 그들의 자손들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여러 다른 분야에서도 추가적인 기술과 기능을 틀림없이 습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도급자들을 고용했다면 틀림없이 그들로부터 많은 기능을 배웠을 것이다.

노아는 홍수 이후에도 350년 동안을 생존했는데, 창세기 10:1-4절에 보면 노아의 손자들과 증손들의 명단이 나와 있다. 이들과 증손들의 또 다른 후손들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홍수 이전부터 전수해 온 많은 기술을 배웠을 것이다. 이런 기술로부터 고도의 기술과 발달된 애굽(이집트), 수메르,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문명들로 이어졌다. 우리는 애굽인들이 피라미드와 다른 많은 건축물들을 건설하기 위해서 얼마나 뛰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이미 살펴본바 있다. 사실 창세기 10:8-10절에는 함의 아들인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시작되었으며”라고 씌어 있다. 바벨과 시날과 니느웨는 수메르와 바벨론의 발달된 문명의 사람들에게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어떤 세대는 구약의 족보에서 가끔 그랬던 것처럼 생략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가지고 있던 기술지식은 그들의 후속 세대로 전수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홍수 이후 10대 손에 해당한다. 홍수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고, 노아 자신도 홍수 이후에 350년 동안이나 살았고, 각 세대간 수 백년 씩이나 서로 겹쳐서 살았음으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은 분명코 여러 세대에 걸쳐 후손들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다. 비록 바벨탑 이후의 민족과 부족들은 조상으로부터 후손들에게 잘못 와전된 내용을 전하였지만, 이 사람들은 대홍수 이야기를 다음 세대들에게 전하였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홍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홍수 이전의 역사에 관한 지식도 전해 주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히브리 민족은 아담과 하와 때로부터의 인류의 역사에 관하여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지만, 수메르인들 조차도 대홍수 이전 시대에 대해서는 다소간 왜곡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벨론 우르의 아브라함 고향 마을로부터 1-2마일 북쪽에서 웰드-브룬더 탐험대는 BC 2100년 경 누르-닌수브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쓴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는 웰드 프리즘을 발굴했다. 이 프리즘에는 대홍수 이전에 살았던 10명의 왕(성경에 있는 홍수 전 10족장들을 언급한 것임)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 누르-닌수브르라는 사람에 관하여 르네 누어버겐은 그의 저서 <잃어버린 인종들의 비밀들> p.26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의 설명에서 그는 10명의 홍수 이전 왕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슬픈 말들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대홍수가 온 땅을 뒤덮었다.” 수메르 인들과 후기 바벨론 인들 그리고 앗시리아 인들은 대홍수 이전 시대를 우수한 문학적 자원으로 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바벨론의 한 왕은 “그가 대홍수 이전 시대의 작품들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했다. 니느웨에서 대형 도서관을 발견한 앗수르 바니팔은 “대홍수 이전 시대의 대형 비문”에 관해서 언급했다. 그것은 대홍수 전·후의 문명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그것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발달된 이유는,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들 뇌의 전용량을 온전히 사용하였던 반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우리 뇌의 용량의 1/6만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만일 노아와 어쩌면 도급자들과 함께 그의 세 아들들이 그렇게 큰 배를 지었다면, 그들과 후손들은 태평양 또는 최소한 아프리카와 남미를 횡단하는 배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과테말라의 마야인들은 그곳에서 많은 지식을 소유했던 최초의 인류라고 말했다.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950년 이상을 살았고, 노아는 홍수 이후로 350년을 더 살기는 했지만, 대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훨씬 단명했다. 궁창 위의 물 층이 오늘날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유해파 일부를 차단시키는 것을 도와줌으로서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장수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여야 한다. 이것은 여성들의 가임(可妊) 연한에 관한 것이다. 그 때 여성들이 임신할 수 있는 기간은 오늘날의 약 50세까지보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은 더 길었을 것이고, 대홍수 때까지 인구는 수십억 명에 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홍수 이후 단 기간 내에 인구는 한 나라를 이룰 만큼 증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창10:32절에 이르기를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3. 바벨탑

위에 인용한 창10:32 직후, 창11:1,2절에는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시날 평지는 노아의 증손인 니므롯이 나라를 세웠던 땅이다 (창10:10). 역사적으로 시날은 바벨론과 관련을 맺고 있다.


4. 대홍수와 바벨탑 사이의 기간

노아 시대와 바벨탑 사건 사이의 몇몇 족장들의 이름들이 창세기 10과 11장에서 빠져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의 두 사건 사이의 기간은 불확실하다. 아마도 그 기간이 150년에서 350년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아브라함의 출생년도가 BC 2167년이라는 것을 기초로 할 때 대홍수는 BC 2460년에 발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바벨탑 사건은 대홍수 후 150년 내지 350년 기간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상의 다른 사건에서 미루어 대홍수와 바벨탑사건은 그보다도 수 세기 이르게 발생했을 수도 있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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