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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과학사 속 창조진화 논쟁사

박영민(미디어팀장)
2022-04-27

과학사 속 창조진화 논쟁사

오경숙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땅에 충만하며,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28). 우리는 스스로 이 명령을 지키기에는 한계를 갖고 있다. 우리는 살만한 환경과 조건이 갖춰져야 그나마 생육하고 충만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황무지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그분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사 45:18). 세상을 다스리려면 먼저 정복해야 한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땅을 취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무언가를 정복한다는 것은 잘 알아내라는 의미도 있겠다. 잘 알아야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세상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관찰하고 알아내어 삶을 이롭게 하는 데에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무에서 창조할 수 없고, 세상의 법칙을 만들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원리를 관찰하고 알아낼 뿐이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의 규칙과 원리를 알아내어 삶에 활용할 뿐이다. 그리고 세상의 원리를 알아가며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를 향한 사랑과 배려를 더욱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 그리고 과학혁명

세상의 원리를 잘 담아 낸 것으로는 과학을 꼽을 수 있다. 과학은 세상에 숨겨진 원리와 규칙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물질세계에 대해 다루는 학문으로서 자연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지식 체계이다(정인경 외, 2019, p. 12).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과학은 창조의 질서와 규칙일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힘의 원리를 알아내며, 과학이 급성장하고 삶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 과학혁명이다. 중력과 만유인력 등, 힘에 대해 처음 발견하고 정의한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시작하여 전자기장에 이르는 힘까지 관찰한 패러데이와 맥스웰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과학의 대 전환이 일어났다(정인경 외, 2019, p. 23). 16세기에 시작된 과학혁명은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이후, 1687년에 뉴턴이 중력과 운동법칙을 정리하여 발표한 약 150년 동안 유럽의 과학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말한다(정인경 외, 2019, p. 56). 과학혁명의 영향은 과학에 국한되지 않고 유럽 사회의 문화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모든 과학혁명의 주역이 대부분 하나님의 창조를 믿었던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발견하고자 힘썼던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세상과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얻고자 신학자에게 묻다가 중세에는 철학자에 물었고, 현대에는 과학자에게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과학의 역할이나 위상이 높아졌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과학이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학의 의미와 한계를 안다면 과학을 통해 모든 것의 시작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한편 무신론 입장의 과학자들은 원자에서 시작해서 단세포와 복잡한 생명체에서 점점 진화하여 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은 인류 진화에 이어 문화와 기술이 발달하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는 그들의 생각을 덧붙여 빅 히스토리로 설명한다. 어쩌다가 과학자가 존재에 대한 답을 내놓게 되었고, 또 많은 사람이 신뢰하며 믿게 되었을까?


과학의 구분과 창조·진화 논쟁사 서막

과학은 관찰과 실험 가능성에 따라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관찰과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원리를 알아낼 수 있는 실험과학의 영역이 있으며, 실험으로 재현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지만 관찰한 것을 기반으로 과학적 추론을 통해 과학적으로 검증해 가는 이론과학의 영역이 있다. 천체 물리학의 경우, 직접 만지며 실험할 수는 없지만, 우주나 천체를 관찰하여 그 힘과 원리를 분석할 수 있다. 그래서 천제 물리학의 경우 이론 물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찰도 실험도 불가능한, 과거에 일어난 자연의 현상에 대해 추론하는 영역인 역사과학 혹은 기원과학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영역이다. 이 영역은 현재를 통해 과거의 상황을 관찰할 수 없으므로 현재를 관찰함으로써 과거에 대해 추론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과학으로 그 신뢰도와 권위는 다른 두 영역의 과학에 비해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기원과학은 특히 연구자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의존하여 해석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의 시작에 대해 논하는 창조론이나 진화론이 이 영역에 해당한다. 둘 다 관찰과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인 셈이다. 이 두 믿음의 충돌의 과학사의 전반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헬 헬먼의 「과학사의 흐름을 바꾼 열 가지 이야기; 과학사 대논쟁 10가지」에서 반 이상이 창조와 진화에 대한 논쟁을 담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이충호 역, 2019, p. 4-5).


과학사 속 창조와 진화 논쟁사는 과학의 본격적인 발전을 제공한 16세기의 과학혁명의 배경에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12세기 무렵 유럽에 대학이 등장하면서 학교를 중심으로 지식이 체계적으로 교육되고 전승되기 시작했다(정인경 외, 2019, p. 50).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이 지배적으로 교육되었다. 13세기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스콜라 철학이 주를 이루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접목시켜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켰다(정인경 외, 2019, p. 51). 14세기 무렵에는 유럽을 강타한 기근과 흑사병으로 수많은 인명을 잃으며 신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싹트기 시작한다. 한편 뛰어난 학자들까지 잃으며 대학의 지원까지 받지 못해 교육체계가 무너지기도 했다(정인경 외, 2019, p. 51). 또한 중세 교회가 면죄부 판매 등으로 타락하며, 신에 대한 원망에 이어 교회에 대한 불신으로 커져갔다. 결국 신 중심의 사고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의 전환이 일어난 인본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문화로는 르네상스로 나타났다. 한편 교회 내부에서는 1517년 루터를 시작으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다(정인경 외, 2019, p. 59). 르네상스 시대에 발달한 항해술을 통해 콜럼버스와 같은 모험가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기도 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납 활자를 만들어 활판 인쇄를 시작했는데, 1450년부터 50여 년간 2,000만 권의 책이 출판되었으며, 이 책들은 유럽 전역으로 르네상스 문명을 확산시켰다. 종교개혁이 퍼져나갈 수 있었던 데에도 인쇄술이 한몫했을 것이다.


창조진화 논쟁사


1.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

종교와 과학의 충돌로 보여진 과학사 속 거대 논쟁사의 시작은 과학혁명의 시작이기도 한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일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는 2,000년이나 유럽 사회를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오스의 우주 체계인 천동설을 뒤집는 주장이었다. AD. 150년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이자 지질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관찰 결과들을 설명하기 위해 지구 중심의 천문 체계를 만들어냈다(이충호 역, 2019, p. 24).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그 주위를 달과 태양, 행성들과 별들이 일련의 동심구 위에서 돌고 있다는 체계를 주장하였다. 또한 모든 천체는 원 궤도를 돈다고 가정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관측되는 천체 운동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한 최초의 체계이기도 했다(이충호 역, 2019, p. 25). 그 체계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하늘의 모습과 일치했고, 훗날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다. 거기에는 13세기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역할이 컸다. 예컨대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지구 중심의 우주론과 잘 어울렸다. 천국과 지옥의 개념도 지구 중심설과 잘 맞아떨어졌다.

그림 1. 코페르니쿠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너무 복잡하다고 여겼다. 그는 태양이 정지해 있고,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동시에 1년에 한 바퀴씩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지동설을 가정했다. 지동설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엉뚱하여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최인식, 2004).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그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를 공전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교회를 위협했던 용감한 과학자이며, 과학에 무지한 교회가 그를 핍박했다고 하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자이며, 역사가인 오웬 징거리치(Owen Gingerich)는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역사 기록을 바르게 정립하는 데 바쳤고, 30년 동안의 프로젝트 결과를 출판하였다(코프지, 2004). 그 내용은 코페르니쿠스의 원고가 젊은 루터교 수학자인 레티쿠스에게 위탁되었고, 루터교인 인쇄업자에 의해서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책의 출판을 후원했던 이도 루터교도였으며, 특히 루터교의 수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얻기를 열망하였고, 그들의 친구들에게 복사본들을 건네주며 함께 공부했다는 내용이다. 루터교도 대부분은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받아들였고, 감사해했다고 한다. 루터교는 당대 종교개혁의 주역들이었다. 즉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해 교회에서 핍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과는 달리 당대의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의 해석은 성경은 틀렸고, 지구는 변방에 불과하며, 사람은 특별하지 않다는 견해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종교재판

 과학과 종교 사이에 적대감을 조성한 한 가지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갈릴레이가 받은 재판과 그 판결문을 꼽을 수 있다. 1616년 갈릴레이에 이르러서 그도 지동설을 주장하며, 다시 지동설이 수면 위에 올랐다. 갈릴레이는 본인이 망원경을 제작하여 천문관측에 사용하며 많은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1609년 인류 최초로 달의 표면을 관측하였으며, 1610년에는 인류 최초로 목성의 위성을 관찰하기도 했다(정인경 외, 2019, p. 69-70). 갈릴레이의 우주 관측을 통해 우주가 천상계와 지상계로 구분된 곳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교회의 견재가 심해졌다. 1616년 교황청 추기경 위원회는 갈릴레이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결론짓고 갈릴레이에게 그의 견해를 주장하거나 가르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정인경 외, 2019, p. 70).

1632년 갈릴레이는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라는 긴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역시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제지를 받았다(정인경 외, 2019, p. 69-70). 그래서 1633년 갈릴레이는 로마 교황청으로 다시 소환되어 종교재판을 받고 유죄 선고를 받았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는 피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갈릴레이는 같은 피사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교황이 되기 전에는 갈릴레이 편에서 중재에 나서기도 했던 그가 교황의 위치에서 자신의 권위에 맞선 갈릴레이에게 가혹한 박해를 가했다고 한다(이충호 역, 2019, p. 20-21). 이로 인해 종교계가 과학계를 핍박한 것으로 회자되기 족했을 것이다. 문제는 성경과 천동설은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과학은 성경보다 우월하며 종교는 과학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해석으로 흐르게 된 것이다.

그림 2.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동설은 그 당시의 천문학자, 철학자들의 입장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도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성경은 천동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었기에 갈릴레이의 주장은 성경과 모순된다고 생각했다(Russell Grigg, 1997). 그들은 성경이 지구 둘레를 태양이 돌고 있음을 말한다고 생각한 몇몇 구절들을 성경에서 선택해 내었다. 모세가 “해가 돋았더라(창 19:23)” 그리고 “해가 진지라(창 28:11)”라고 기록했을 때, 그의 목적은 천문학적 관점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표현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Russell Grigg, 1997). 그리고 가장 편리한 기준틀로 상대적 운동을 기술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완벽하게 유효한 것이었다. 명백한 의미는 태양 자체가 움직인다는 이차적인 추론을 요구하지 않고, 보여지는 현상을 언어로 완벽하게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상학자들이 기상예보 시에 ‘해 뜨는(sunrise)’ 시각과 ‘해 지는(sunset)’ 시각을 알려줄 때 사용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그들은 기준점을 지구로 사용하여 보여지는 현상을 표현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한 말을 편리하게 사용하였다고 해서, 기상 예보관들을 과학을 모르는 비과학적인 사람들이라고 취급하지 않듯이, 성경에 그러한 표현이 있다고 성경을 비과학적으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명히 시적 표현을 의미하는 시편 19:6, 시편 93:1 과 같은 구절들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갈릴레이는 스스로를 카톨릭 교회의 충성스러운 아들로 여겼으며, 그는 교회에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는 재판 후 7년 후인 1640년, 눈까지 멀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오직 성서와 신의 계시만이 우리의 경건한 요구에 답을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충실한 신자였다. 즉 성경과 과학의 충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크리스천 과학자들에 의해 지동설이 주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크리스천 과학자들에 의해 과학은 더 발전하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의 뒤를 이어 등장한 요한 케플러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기존 연구를 발전시켰다. 그는 1596년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정인경 외, 2019, p. 67-68; 이충호 역, 2019, p. 27). 그는 천체역학의 질서와 행성의 운동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이는 태양계의 태양중심체계와 별의 운동을 추적하는 천체위치추산 도표를 발표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케플러는 진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신학과 수학을 공부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천문학뿐 아니라 성경적 연대기를 계산하였으며, 우주의 나이는 성경 그대로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케플러는 그의 책에 “우리 천문학자는 자연이라는 책을 연구하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이러한 사고를 갖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도록 한다”라고 기록했다(이재만, 2004).


우주의 체계를 정립한 뉴턴도 당시에 말씀 그대로의 하나님의 창조를 믿었다. “태양, 행성, 혜성들로 이뤄진 이런 가장 아름다운 시스템은 오직 강력한 지성적 존재의 계획과 주권으로부터 만 나올 수 있다.”는 고백만 보더라도 그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힘, 관성, 가속도, 중력장 이론을 밝히며 당대 과학혁명의 중심역할을 담당한다. 과학혁명은 결국 영국을 중심으로 1차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핵심이 되었다.

과학혁명 이후, 자연은 조화롭고 질서가 잡혀 있는 곳이므로 이런 조화와 질서는 수학이나 기하학으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정인경 외, 2019, p. 60). 그래서 대부분의 실험결과를 정량적인 무게와 온도, 습도와 기압의 변화로 표현하고 이를 숫자로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각 나라에서 과학과 관련된 학회가 탄생하였다.


3.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옥스퍼드 논쟁

 창조·진화 논쟁의 가장 핵심은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한 다음 해인 1860년 옥스퍼드 논쟁이다. 사실 진화론을 제기한 사람은 다윈이 처음이 아니다. 종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신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한다는 생각은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제게 되었다(이충호 역, 2019, p. 120). 그 중에 라마르크(chevalier de Lamarck)의 용불용설에 대한 주장은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고 사용하면 발달한다는 이론이다(이충호 역, 2019, p. 120). 획득형질은 후손에 전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린이 높은 곳의 먹이를 먹다가 목이 길어졌고, 후손에게 유전되면서 점점 먹이 길어졌다는 견해이다.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므스 다윈(Erasmus Darwin) 역시 그러한 주장을 폈다. 그의 책에는 원숭이에서 사람이 되었다고까지 남겼다(이충호 역, 2019, p. 120).

그림 3. 1860년에 진화론을 놓고 논쟁을 했던 윌버포스 주교와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헉슬리.


다윈의 종의 기원의 자원이 된 탐사는 1831년 해양관측선인 비글호에 탑승할 기회를 얻어 5년간 항해에 동행하며 여행지의 동식물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었다(이충호 역, 2019, p. 120). 비글호의 선장은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였다. 그는 성경을 매우 면밀히 읽었으며, 인류의 이동과 천문학에 대한 관찰을 통해, 창세기는 신뢰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정확하며, 문자 그대로 진실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Kaloyirou, 2019). 비글호의 항해의 목적은 남미 연안의 해도를 작성하기 위함인 것과 남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위치한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에 세 명의 푸에고 원주민을 그들 고향 땅에 귀향시키는 것이었다(Lavallee, 2003). 이 세 명의 원주민은 영국에서 신교육과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하고 선교를 하고자 하였다(Lavallee, 2003).


다윈은 박물학자로서 동행하였으며, 비글호가 방문하는 낯선 곳의 다양한 동식물을 연구하고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정인경 외, 2019, p. 112). 이러한 방대한 관찰기록들은 훗날 진화론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비글호 여행에서 다윈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갈라파고스 제도에서의 관찰이었다. 19개의 섬마다 그곳에 사는 거북과 핀치 생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관찰한 것이다(정인경 외, 2019, p. 112). 5년간의 긴 비글호 여행을 끝내고 1836년 고향으로 돌아온 다윈은 여행하며 수집한 자료와 방대한 문헌들을 정리하며 학계에서 지질학자며 생물학자로 서서히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다윈은 이미 알려져 있던 동식물의 육종 방식에서 인위 선택이라는 현상을 통해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자연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명의 종 다양성 역시 선택과정을 거쳐 새로운 종이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정인경 외, 2019, p. 113).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다음 해인 186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개 진화론 논쟁이 펼쳐졌다. 이 모임은 영국학술협회(British Association)에 의해 개최되었으며, 약 1천 명 정도의 꽉 찬 청중이 참석했다. 당시 다윈의 대변인이며 불독이라고 알려진 생물학자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와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 주교가 진화와 창조진영 대변인으로 등장했다(이충호 역, 2019, p. 125). 과학 논쟁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서사시적 사건 중의 하나가 시작되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미스터리와 혼란에 뒤섞여 있다. 그 결과 그 사건에 대해 말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윌버포스는 만약 누가 동물원의 유인원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불쾌하겠는가 하고 지적했다(이충호 역, 2019, p. 125). 당시 저명한 천문학자이며 박물학자인 존 러벅은 다윈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고, 비글호의 선장이자 뉴질랜드 총독을 지낸 바 있는 로버트 피츠로이 제독은 일어서서 성경을 흔들면서 모든 진리의 근원이 바로 성경이라고 주장했다(이충호 역, 2019, p. 125). 이 논쟁에서는 증거들이 실제로 진화론을 뒷받침하지 않았으며, 누가 이겼는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윈과 헉슬리의 추종자들은 후에 승리를 주장하였다(Sibley, 2017).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인간의 진화 문제와 때로는 생존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는데도 가지고 있는 종의 형질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 유래와 성 선택’을 통해 성 선택이라는 또 하나의 선택이 존재함을 들어 설명하려했다(정인경 외, 2019, p. 114). 다윈의 진화론은 단순한 생물학 지식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과 철학이 되었으며, 사회 전반의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정인경 외, 2019, p. 114). 무엇보다 다윈주의를 인간계의 진화와 약육강식에 적용한 사례가 등장했다. 유럽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한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나 다윈의 사촌인 골턴의 우생학과 갈의 골상학 등은 인종 차별 및 성차별의 과학적 근거로 삼으며 많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으며,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정인경 외, 2019, p. 115).


4. 스코프스 재판

 1900년대 가장 큰 창조·진화 논쟁으로 꼽자면, 1925년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 일명 원숭이 재판)을 들 수 있다. 1959년 다윈의 「종의 기원」발표 후 미국에도 진화론은 수십 년 동안 과학에 영향력을 끼쳐오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세속적 진화론이 의미하는 창조론이 종교적 도덕적 암시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한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도록 강요하였다. 그에 대한 반대 반응으로 테네시주를 포함한 몇 개의 주들은 공립학교에서 인간이 동물 조상들로부터 진화했다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새롭게 조직된 ACLU(American Civil Liverties Union, 미국시민자유연맹, 인본주의협회)의 지도자들은 다윈주의적 자연주의에 기초한 완전히 세속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이 법안을 바꾸기를 원했다(Morris, 2007). 스코프스 재판은 그것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이었다.

그림4. 클러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 좌)와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 (William Jennings Bryan, 우). 

(Photo Credit: CORBIS/Bettmann)


ACLU측은 몇 개의 테네시주 신문들에 그 법안을 시험하길 원하는 선생님을 찾는다는 광고를 실었다. 테네시 주 데이톤(Dayton)이란 작은 마을의 실업가들은 그들의 지역사회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존 스코프스(John Scopes)를 권유하였다. 스코프스는 생물학 교사는 아니었지만, 가끔 대리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진화를 언급했던 기억을 생각해내지 못했으나, 그가 체포된 후에 그 법을 확실히 위반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 변호사들은 그가 한 학생에게 개인적으로 진화를 말한 것으로 각색하였다(John D. Morris, 2007). 아이로니컬하게도, 스코프스가 가르쳤다는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되던 것들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The New Yorker 에 따르면, “스코프스의 교과서는 우생학을 기초로 하여 ‘정신박약자’들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는 내용이었다(Anonymous 2006, p.83; Stephen Caesar, 2006).


7일간의 열띤 공방전이 오고 갔으며, 재판의 시작은 스코프스 교사가 주의 교육법상에 유죄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하였지만, 피고측의 변호사들은 피고인에 대한 무죄성을 변론하기 보다는 진화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더욱 열을 올렸다. 예를 들면 그들은 “스코프스 교사가 진화론을 가르쳤습니까?” 라는 질문조차도 전혀 없었으며, 스코프스의 위법행위에 대하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재판의 진행은 진화론에 대한 정당성 문제로 확산되어, 이는 스코프스 교사의 위법문제에 대비하였던 기소자측을 적지 않게 당황시켰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측이 몇 가지의 증거들을 제시하였는데, 그들이 제시했던 증거들은 오늘날에는 오히려 진화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 증거들은 보면, 흔적기관, 태아(헥켈)의 배, 그리고 인류화석인 네안데르탈인, 호모에렉투스인, 필트다운인, 네브라스카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이었다(Cornelius 외, 2005).


재판은 진지하고 복잡한 질문들로 이어졌다. 특히 일곱째 날에 열띤 질문과 대답은 감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재판의 절정을 이루었는데, 나중에 피고측 변호인은 성경의 무오성 문제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예를 들면, 뱀은 하나님이 기어다니라고 저주하기 전에 꼬리로 걸어 다녔습니까?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하였습니까? 지구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3500~5000 년 전에 이집트와 중국에서 살았습니까? 라는 식의 질문이었다(Cornelius 외, 2005). 전제적으로 창조·진화 논쟁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포성과 함께 시작하였던 “스코프스의 재판”은 피고 스코프스가 유죄 판결과 100 불의 벌금형이 내림과 함께 막을 내렸다. 하지만 추후에 벌금형조차도 무효화되었고, 재판의 결과 미국의 일곱 주에서 연달아 비슷한 법적 논쟁을 일으키게 하는 발단이 되었다. 더욱이 이 재판은 1960년대까지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에 진화론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던 당시의 추세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Cornelius 외 2005).


1933년에는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듀이(John Dewey)는 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며 국공립학교에서 기도와 성경을 없애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기름을 부어준 것이 바로 1960년, 1925년에 있었던 스코프스재판이 영화로 패러디되면서 당시의 상황을 극화시키며 기독교계가 과학계를 탄합하는 스토리로 전해지게 된다(Caesar, 2006). 안타까운 것은 이 영화가 미국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가장 큰 영향으로 1963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에 의해 헌법에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명시하게 되었고, 공교육에서 진화론만 교육하도록 지시하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제도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국가였고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의 중심을 이루었던 영국에 이어 당대 과학과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던 미국마저도 공교육에 진화론이 들어가며 대세는 완전히 진화론이 자리 잡게 되고 만다.


맺음말


과학은 지성에만 의존하는 지식에 불과하며, 여러 가지 종류의 지식 중 하나일 뿐이다(박형룡, 2016, p. 41). 이러한 과학에 절대 권위를 부여한 것이 과학주의적인 해석이다. 과학주의란 실재에 대한 지식은 오직 과학에서만 나오며, 자연과학에서 유래한 실증적 지식에 기반한 주장만이 공적 기관이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이라는 것이다(황을호, 2019, p. 34). 과학을 종교의 위치까지 그 위상을 높여 놓고자 하는 것이다(임준섭, 2018, p. 223). 과학주의는 철학이지 과학이 아니다(황을호, 2019, p. 72). 과학이라는 학문에 보이지 않는 신을 넣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신을 제외하고 설명하기 시작한 움직임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비진리라는 ‘과학주의’를 낳게 된다. 결국 신 없이 내가 가진 과학이라는 도구로 나 혹은 과학이 신이 되어, 보이는 대로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진화되었다는 상상이 사실로 둔갑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비진리라 정의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다윈의 진화론의 배경에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과학의 발전이 일부 과학주의로 치우친 데에 있을 것이다.


과학은 현대 산업과 삶에 긍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나의 시작과 삶의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 이후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 해답은 오직 말씀에서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다(창 1:26-27).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귀하게 여김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유신론적 세계관을 위협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흔들었으며, 더 나아가 과학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력은 결국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마저 위협한다는 면에서 심각하다(임준섭, 2018, 223-250).


일부 신학자들은 창세기를 포함하여 성경은 사람이 기록했기 때문에, 단지 사람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창세기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반면에, 사람이 생각해낸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생각해낸 이론은 ‘사람의 작품’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그렇지 않음을 선포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2:13).


우리는 과학으로가 아니라 말씀을 기반으로 한 믿음으로 세상의 시작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히 11:3). 믿음은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이고(히 11:1), 지식의 시작이며, 구원의 이르는 길이다(딤후 3:15).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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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뱁티스트 5-6월호, 2022 VOL.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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