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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R.M.Cornelius 외
2005-02-05

원숭이(스코프스) 재판과 브라이언의 변론

(Scopes : Creation on Trial)


      1925년 미국에서 일명 ”원숭이 재판 (Monkey Trial)”이라고 불리는 재판이 있었다. 피고인의 이름을 따서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이라고도 하는 재판으로, 사건은 그 해 7월 미국의 테네시 주의 데이턴이라고 하는 작은 시골도시에서 발생하였다. 한 공립학교 교사인 스코프스가 수업 중에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것과, 이에 대한 반진화론자인 기독교인들의 고소로 시작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우습고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당시의 주교육법상에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던 상태였기에, 이러한 고소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그것도 우리에게는 일제의 압제하에 있었던 시기에 일어난 것이기에 생소한 이야기이지만, 당시 재판의 관심과 이 재판의 파장이 미국 교육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교과과정에 진화론이 자리를 잡게한 중요한 사건이기에, 당시 재판의 진행을 검토하여 보는 것은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이 재판의 기소자측의 변호를 맡았던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 (William Jennings Bryan)이 진화론자들의 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한 점과 성서에 대한 그의 곳곳한 자세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이 되리라 생각한다. 


1. 언론의 관심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시작된 작은 시골도시의 이 재판이 보도되자, 빠른 속도로 전 미국의 이목이 이곳으로 집중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모여든 언론의 규모를 통해서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200 여명의 신문 기자들이 취재를 위하여 이 작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방송계 대표자들도 대거 참가하였는데, 유명한 방송국인 시카코 트리뷴 WGN 에서는 이 재판을 미국내의 공판사상 처음으로 라디오 전국 중계를 준비하고 있었고, 65 개 전신 교환수들이 몰려들어 사상 최다의 기사를 유럽과 호주로 보내는 등, 그 관심은 대단하였다. 


2. 목적의 이탈과 제시된 진화의 증거들 

7 일간의 열띤 공방전이 오고 갔으며, 재판의 시작은 스코프스 교사가 주의 교육법상에 유죄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하였지만, 피고측의 변호사들은 피고인에 대한 무죄성을 변론하기 보다는 진화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더욱 열을 올렸다. 예를 들면 그들은 ”스코프스 교사가 진화론을 가르쳤습니까?” 라는 질문 조차도 전혀 없이, 스코프스의 위법행위에 대하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재판의 진행은 진화론에 대한 정당성 문제로 확산되어, 이는 스코프스 교사의 위법문제에 대비하였던 기소자측을 적지않게 당황시켰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측이 몇 가지의 증거들을 제시하였는데, 그들이 제시했던 증거들은 오늘날에는 오히려 진화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 증거들은 보면, 흔적기관, 태아(헥켈)의 배, 그리고 인류화석인 네안데르탈인, 호모에렉투스인, 필트다운인, 네브라스카인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이었다. (이들 증거들에 관한 허구성은 그 동안 창조지에서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하였으므로 이를 참조하기 바람) 


3. 성경에 대한 피고측 공격과 브라이언의 대답 

재판은 진지하고 복잡한 질문들로 이어졌다. 특히 일곱째 날에 열띤 질문과 대답은 감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재판의 절정을 이루었는데, 나중에 피고측 변호인은 성경의 무오성 문제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예를 들면, 뱀은 하나님이 기어다니라고 저주하기 전에 꼬리로 걸어 다녔습니까?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하였습니까? 지구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3500~5000 년 전에 이집트와 중국에서 살았습니까? 라는 식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기소자측 변호사인 브라이언은 이러한 난해한 질문에 대하여 성경적인 지식을가지고 능숙하게 응수하였고, 그가 모르는 대답에 대하여는 솔직히 시인하였다. 가열된 대화 중에 브라이언은 성경의 문구가 실제로 말하는 점들은 지적해 주며, 피고측 변호사에게 성경을 부연 설명하지 말고 그대로 인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대표적인 대화내용을 보면, 

문 : 당신이 요나가 고래에게 삼키웠다는 내용을 읽을 때 당신은 어떻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가?

답 : 나는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웠다고 읽었다. 고래라고 말하지 않았다.

문 : 그런가? 확실한가?

답 :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바이다. 큰 물고기,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나는 고래를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

문 : 브라이언씨, 신약성경이 고래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답 : 잘 모르겠다. 나는 그것은 물고기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황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나는 성경이 물고기를 말한다는 것을 당신에게 주목시키고 싶을 뿐이다. 성경은 고래라고 말하지 않았다.

문 : 그러나 신약 성경은 고래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답 :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내가 그것에 관하여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겠다.

문 : 자, 당신은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었고, 그는 거기서 3 일 동안이나 지냈으며, 고래는 그를 땅 위로 토해내었다고 말하였다. 당신은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믿는가?

답 : 나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단지 그것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뿐이다.

문 : 당신은 그것이 일상의 물고기였는지 그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답 : 당신은 추측해도 된다. 진화론자들은 추측한다.

문 : 그러나 우리가 추측할 때 , 우리는 바른 감각을 갖고 추측한다.

답 : 그러나 종종 그렇지가 않다.

문 : 당신은 물고기가 사람을 삼키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졌는지 아닌지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답 : 성경이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말하지 않는다.

문 : 당신은 하나님이 목적을 위하여 특별하게 물고기를 수리하셨는지도 모른다.

답 : 그렇다, 성경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문 :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이 그들을 만들었다고 믿는다. 즉, 그는 그러한 물고기를 만드셨고 그것은 요나를 삼킬만큼 컸었다고 믿는다.

답 : 그렇다. 추가하자면, 하나의 기적은 다른 기적만큼이나 믿기가 아주 쉽다.

문 : 그것은 나에 관한 것이냐?

답 : 그것은 나에 관한 것이다.

문 : 그것이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니냐?

답 : 당신에게는 믿기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는 쉽다. 기적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행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보았을 때 기적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요나의 기적을 믿는 것은 성경의 다른 기적을 믿는 것 만큼이나 아주 쉽다.

문 : 요나가 고래에 의해 삼키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완벽하게 쉽나?

답 : 만약에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면...(그러나) 성경은 진화론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극단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질문의 초기에 브라이언은 ”성경 안에 모든 것이 거기에 적혀 있는 대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고 말하므로,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몰아부치는 피고측의 함정을 피하였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비유적인 곳이 있다” 라는 것과, 그러한 비유적인 언어는 적당히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언급을 피고측 변호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해석을 가질 권리가 있다 라는 의미로 확대시켰다. 
 

4. 재판의 결론과 그 결과 

포성과 함께 시작하였던 ”스코프스의 재판”은 피고 스코프스가 유죄 판결과 100 불의 벌금형이 내림과 함께 막을 내렸다. 재판의 결과 미국의 일곱 주에서 연달아 비슷한 법적 논쟁을 일으키게 하는 발단이 되었다. 더욱이 이 재판은 1960 년대 까지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에 진화론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던 당시의 추세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당시 언론들의 보도방향은 사람들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대부분의 기자들은 재판의 시작전부터 이미 기독교인인 브라이언을 공격하려는 생각을 갖고 취재를 시작하였으며, 브라이언의 진화론의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브라이언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사를 실었다. 한 기자에게 왜 재판을 취재하러 왔는가 하는 질문을 하자, ”오, 저는 무슨 일인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무엇을 써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영화 관계자들도 가끔씩 흥미거리로 이 재판을 영화화 하였는데, 제작자들의 편견으로 재판의 중심 내용과는 많이 벗어난 경향이 있었다. ”세계의 가장 유명한 공판” 이란 영화제목으로 장식된 영화들은, 재판을 재연할 때마다 당시의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쟁보다는 주로 유명한 관계자들, 극화한 논쟁들, 절정의 모습들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편견을 가진 기록들은 무모하게 성경을 고수하려는 기독인들에 의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한 진화론자의 피해로서 이 재판을 인식시켰다. 


5. 브라이언의 생각들 

이러한 언론의 편견된 기록들은 브라이언의 진의를 파악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도록 하였다. 재판 전후의 브라이언의 기록들은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다음은 그의 기록중 몇 가지 예들이다. 

   # 192O년과 1923년, 네브라스카에서 있었던 입법총회

”우리는 공립학교 선생에게 종교를 가르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선생들이 학교에서 성경을 공격하는 것이 허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공립학교와 대학에서 선생들이 정통기독교를 설명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념과 성경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그리스도를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는 식의 가르침에 대하여 저지할 권리가 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치기 원할 때 그들 자신의 학교를 설립한 것처럼, 진화론자들도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다면 그들 자신의 학교를 설립하여야 한다.” 

   # 1923년, 상원의원 싱글테리에게 보낸 편지

”진화론은 계속된 관찰에 의한 확정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가설이며, 사실로서 가르치는 것은 위험하다.” 

   # 1923년 월간 대중과학

”모든 진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문제를 논하며 자연의 책 안에서 혹은 책중의 책(성경)안에서 발견되든지 어떤 것도 추측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진화가설과 같은 가설들은 진실이 아니다.”

   # 1925년 5월 28일과 7월 12일, 데이턴 시의 법률가 수힉스에게 쓴 편지

”연설, 출판, 생각, 지식의 자유를 향한 어떤 공격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부모들은 자식들의 종교적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를 가졌다.”

”허위로부터 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한 개인으로서 사고하기 위해 만든 집단의 권리는 그 개인의 권리와 동등하게 인정되야 한다” 라고 하며 진화론의 침투에 대하여 단체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브라이언은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 대하여 자유롭고 진보적이었지만 성서적으로는 보수적이었다.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성경의 성령의 감동과 권위, 신성, 처녀의 잉태, 기적들,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인류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대속능력의 믿음에 관하여 논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위치는 브라이언을 도덕과 종교의 문제에서 절대론적인 권위주의로 치우쳐 있는 사람으로 인식시키기도 하였는데, 그는 삶의 모든 관점에서 영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진화론의 가설을 하나님의 권위, 성경의 기초, 기독교 정신, 마지막에는 문화의 모든 면을 향한 도전으로 보았다. 


6. 맺음말 

”원숭이 재판”에서 피고인 스코프스는 유죄로 선언되었지만, 실제로 이 재판은 진화론이 전 미국으로 확산되는 동기가 되었다. 재판과정에서 진화론의 증거들은 오늘날에는 케케묵은 허구들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진화의 논리성을 이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기소자측 변호사인 브라이언의 정확한 진화론의 문제지적과 그의 성경에 대한 믿음을 향해서, 언론들은 브라이언을 성경을 무모하게 신뢰하는 고집쟁이로서, 그리고 피고측 변호단을 진리를 향한 피해자로 표현하였다. 재판으로부터 70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어떠한 편견 속에서 살고 있는지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추측된 이론인 진화론이나 동일과정설과 같은 진리로 향하는 길목의 장애물들 앞에서, 진리를 지켜야 할 사람들은 이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준비하여야 한다.

 


번역 - 이재만

링크 - http://www.creationsensation.com/MuseumStore/scopes_creation_on_trial.htm 

          http://www.creationsensation.com/MuseumStore/scope

출처 - 창조지, 제 108호 [1998. 5~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729

참고 :

김무현
2004-12-09

창조를 믿는 것은 지적 자살 ?


       창조에 관해서 어떠한 믿음을 갖느냐는 것은 개인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할 뿐 아니라, 과학과 시대정신의 패러다임(paradigm)을 잡아 나아가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 창조에 관한 연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지적설계로 이루어진 (하지만 죄로인해 타락한 모습도 아울러 보여주는) 피조세계와, 과학이란 이름으로 위장된 진화론의 모순과, 그로 야기된 문제점들을 보시고 굳건한 창조신앙을 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책에는 저자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는 누군가가 그 책을 지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가전제품과 생활필수품에는 제조 회사가 표시되어 있으며, 모든 건축물에는 설계자와 시공자가 있습니다. 만든 사람이 없이 저절로 생긴 것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은 유사과학 진화론은 이러한 대전제를 부정하고 모든 피조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 졌다고 주장 합니다.


진화론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주알 (cosmic egg)의 단 한번의 거대한 폭발에 의해서 모든 우주와 물질과 생명이 저절로 만들어 졌다“ 고 말하는 이론입니다. 마치 '먼지와 물과 바람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걸려서 난초가 만들어졌다.'고 하는것과 같지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비라 하고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예레미야 2:27) 라고 한다며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첨단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의 과학이 예레미아 선지자 때와 똑같은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적 가설과 추론에 불과한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믿고 있으며, 모든 정규 교육과정에서도 진화론이 부정될수 없는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규 교육과정을 통하여 진화론에 세뇌되어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혼란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허울좋은 타협안을 만들어 놓고 자위하기도 합니다. 기원에 관한한 창조와 진화 두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창조가 참이면 진화는 거짓이요, 진화가 참이면 창조가 거짓입니다. 서로 상반되는 두 대전제가 동시에 진리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18세기의 신학자 윌리엄 팔리(William Paley)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시계공논증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연의 지적설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즉 길을 가다가 만약 시계를 하나 발견하면 그 사람은 시계를 바라보며 이 시계를 만든 시계공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듯이, 시계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생명들을 바라볼 때는 반드시 창조자가 있을 것이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 진화론이 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혀 가고 있을 즈음에 다윈의 불독(Darwin's bulldog)으로 널리 알려진 신다윈주의의 지도자인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 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모든 생명은 누적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결과로서, 설계논증은 낡고 비과학적인 것임으로 이것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시간낭비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으며 '자,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창세기 11:4) 으쓱대면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 보려 했던 인류의 교만함을 다시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본주의를 대표하는 리차드 도킨스의 도도하고 교만한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진화론의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드러나며 그 기둥들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한편, 첨단화된 분자생물학을 통하여 DNA의 구조와 엄청나게 복잡한 유전자코드(genetic code)가 해석되면서, 마이클 베히(Michael Behe)의 “다윈의 블랙박스(Darwin's blackbox)“ 나, 필립 존슨(Phillip Johnson)의 ”다윈주의 부수기(Defeating Darwinism)“, 윌리엄 뎀스키(William Dembski)의 ”설계추론(The design inference)“ 등 전능자의 지적 설계가 과학적으로 더 타당한 것임을 보여주는 책들이 연속적으로 출판되며 지적설계운동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비추어 최근에 오하이오 주의 교육지침에서는 진화론과 함께 진화론의 문제점들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권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의학자이며 컴퓨터 공학자인 마크 이스트맨(Mark Eastman)과 찰스 미슬러(Chuck Missler)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창조(The creation beyond time and space)” 라는 저서를 통해 '다윈 이후 수세기 동안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지적자살을 기도하는 것(committing intellectual suicide)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 왔으나, 성경비평이 가장 극심했던 20세기에 걸쳐, 그 전의 인류역사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창조를 뒷받침해주는 자료들이 발견되고 축적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라고 지적한바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고 전제합니다. 과학자들에 대해서 당신은 어떠한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편견이 없고, 객관적이고, 항상 진리만을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당신도 이미 과학주의(과학의 우상)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학자들도 우리와 같은 한계성을 지닌 사람들이며, 그들의 의견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배경신념하에 연구하므로 객관적이지 못할 수 있으며, 특히 실험실에서 증명할 수도 없고 자연계에서 관찰할 수도 없는 기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진리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지배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지적대로 과학자는 그시대 패러다임의 절대적 권위와 영향력 하에서 연구에 임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도 “과학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잡다한 감각자료를 기반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반드시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게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도 “관찰자는 언제나 거기(어떤 주관적 견해)에 있어 결론을 만들므로 그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프랜시스 쉐퍼도 “과학자는 일정한 사고방식의 틀을 갖고 그 안에서 실험을 고안하고, 관찰결과를 배열하고 결론을 맺게된다.” “심지어 현대과학은 사회학적 과학의 성향을 갖고 있는데, 즉 객관성을 거의 확신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얻고 싶어하는 사회학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자신들이 요구하는 어떤 결론으로 쉽게 도달하게 된다.”고 지적하며 그 예 중의 하나가 진화론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연재를 통하여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인가? 이 피조세계에 전능자의 창조와 설계의 흔적이 있는가? 또한 진화론으로 교육받은 우리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성경에 적힌 사실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창조과학에서 성경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들은 과연 과학적사고체계로도 설득력이 있는가? 기독교인으로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계속 생각해 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과학 사역을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이려는 무모한 시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진화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듯이 초월적 창조도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습니다. 다만 로마서 1장 20절 말씀처럼 피조세계에 남겨놓으신 전능자의 설계와 창조의 흔적을 추적하며, 다른 한편으로 진화론의 모순과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알리는 사역인 것입니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353

참고 :

Curt Sewell
2004-12-06

왜 우리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에 대해 배워야만 하는가? 

(Why Should I Learn About the Creation vs Evolution Controversy?)


      여러 종류의 독자들이 있듯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상관없어,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도 않잖아, 그리고 난 과학에 흥미 없어.” 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질문들을 조금 더 해보기로 하자. 당신의 친구나 가족 구성원 중에서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당신은 지난 수십년 간의 국가 윤리나 사회 관습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만약 당신의 대답이 '네' 라면 부디 계속해서 읽어 주기 바란다. 이 질문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창조론과 진화론”은 커다란 논쟁 중에서 단지 한 단면이라는 사실이다. 이 논쟁은 인류의 처음 시작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오랜 전쟁(The Long War Against God)” 이라고 불려져 왔다. 지난 2 세기 동안 그 전쟁에서의 중요한 격전지는 유물론 대 유신론이라는 관점이었다. 이 두 종류의 철학적 믿음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관점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정상적인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90% 안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60%가 넘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또한 성경은 어떤 부분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꼭 사실이라고는 할 수 없는 오래된 책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부류중의 한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경우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성경 속의 권능과 영감에 대한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중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라면, 당신은 당연히 과학이나, 사회, 역사, 철학, 중에 어느 수업을 들었던지 간에 진화론에 관해 어떤 내용이든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기독교 가정이나 교회와 같은 곳에서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면, 아마도 당신의 부모님이나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가르침과 학교에서 배운 것 사이에서의 차이 때문에 궁금해 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차이점이 자신의 인생관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만약 당신이 이런 학생의 학부모라면,  그리고 특히 당신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논쟁에 날카로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쟁이 그 학생들로 하여금 기독교적 믿음을 버리도록 초래하는 주요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세속의 학교에서, 특히 과학을 가르치는 미국의 국립대학들은 진화론적 유물론을 설득시키고 있는 호교론자들이다. 그들은 '물리적인 우주 속에서 어떤 종류의 초자연적인 것의 개입은 과학에서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우리들이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라는 이론을 펼친다. 이것은 종교적인 믿음을 황폐화 시키는 것이다. 만약 크리스천 청소년이 대학에 다닐 때 그의 신앙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아마도 확실히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과학에 흥미가 있다면, 그리고 교회나 어떤 종교적인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수천만년 전에 살았던 공룡들에 관해, 또 그들이 어떻게 멸종하게 되었는가에 관해 더 흥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과학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그곳에는 누가 거주했었는지에 관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이고, 또 그곳의 모든 생물들은 수억 수천만 년의 시간을 거쳐서 천천히 진화했다고 확신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이 정말 사실일까? 그들의 주장을 증명할 만한 어떠한 뚜렷한 증거들을 그들은 가지고 있을까? 당신은 이제 놀라게 될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많은 과학적 이론들을 기술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적인 증거들을 논하면서, 당신이 믿고 있는 것만큼 그 이론은 진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들이 천천히 진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보다, 신이 우리 세상을 갑자기 창조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증거들이 더욱 많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한때 나 자신도 그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놀랐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놀랄 것이다. 이러한 놀라움이 마침내 나로 하여금 진화론을 믿다가 창조론을 믿도록 바꾸어지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내가 왜 이 작은 글을 쓰고 있는 지에 대한 이유를 리스트로 간단하게 작성하여 보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창조가 수십억년 동안 천천히 발전되어간다는 진화론과 동일과정설의 주장보다 이 세계와 모든 생물체들을 훨씬 더 잘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추후의 글에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많은 증거들을 제시할 것이다.


ㆍ나는 물리적인 증거들을 기술함으로써, 진화론은 대중들을 속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확고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제 나는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교과서들이 사용하고 있는 여러 순환논리들과 철학적인 기초를 보여드리겠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가르침으로서, 학생들의 논리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교육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중에 하나이다. 모든 사실들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으며 사고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학생들이 이 두 관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그들이 지적으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ㆍ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진화론을 반대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신앙에 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수천년 전의 일이지 수십억년 전의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ㆍ또한 성경은 예수님께서도 진화가 아닌 창조를 믿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실제로 지구 의 지표를 파괴하고 대부분의 동물과 사람들을 멸망시켰던 전 세계적인 노아의 대홍수를 믿으셨다. 그는 확실히 그러한 성경적인 기적을 믿으셨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들을 믿으셨다면, 우리들도 믿어야하지 않겠는가.

ㆍ많은 기독교 교리들은 창세기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창세기는 많은 부분을 창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만약 그러한 창조 사건들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던 사건이라면, 그것은 기독교 사상의 기초를 붕괴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다가올 심판이 남아 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천국에 있기 보다는 지옥에 있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ㆍ완전한 비종교적인 이유에서도, 나는 또한 진실된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과학은 진실만을 가르쳐야 하며,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실은 진화가 아닌 하나님의 창조임을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만약 과학자들이 하나님을 이 우주의 설계자로서 창조자로서 받아들인다면, 훨씬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연구들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ㆍ우리의 사회는 유물론과 진화론의 교육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만약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동물들의 후손들이고, 우리들의 잘못된 행동은 단지 동물들의 본성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들은 죄를 범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화론은 도덕적 책임감을 사라지게 하고, 상황에 따른 윤리만을 대체해 놓았다. 우리의 사회는 범죄, 질병, 사생아, 수백만 건의 낙태, 그리고 수많은 여러 문제들로 신음하고 있다.


나는 창조론과 진화론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ㆍ창조론과 진화론은 둘 다 실제적으로 과학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실제로 관측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 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입증될 수도, 반증될 수도 없다.


ㆍ창조론과 진화론은 둘 다 종교적인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둘 다 어떤 종류의 신앙과 믿음 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 믿음은 유신론이고, 다른 하나는 무신론이다.


  

*참조 : Expel the Creationists (CEH, 2008. 12. 16)
http://creationsafaris.com/crev200812.htm#20081216b


번역 - 한동대학교 창조과학연구소

링크 - http://www.rae.org/bits01.htm

출처 - Revolution against Evolution, 1999.11. 2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346

참고 : 4249|4501|4441|4386|4345|4140|4012|4010|3893|3879|3800|3688|548|540|2151|1912|1914|5462|5461|5413|5272|5211|5210|5112|4766|4765|4636|4635|4542

C.S. Lewis
2004-10-06

우연이라는 견해 

(Accidental angle)


    "만약 태양계가 우연한 충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이 행성에서의 생명체들의 출현이 또한 우연히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인간의 진화 역시 우연한 사건이었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thoughts)들도 또한 모두 우연적으로 (원자들의 운동에 의한 우연한 부산물로서) 생겨난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생각들에 해당되며, 유물론자들과 천문학자들의 생각에도 적용될 것이다.

만약 유물론과 천문학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단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면, 왜 우리들은 그들의 생각이 진실일 것이라고 믿어야만 하는가? 한 우연적인 사건이 모든 우연적인 사건들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것은 우유병이 쏟아졌을 때 만들어진 우연한 얼룩이 당신에게 병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왜 그것이 쏟아졌는지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과 같다.”

* C.S. Lewis (1898–1963), The Business of Heaven, Fount Paperbacks, U.K., p. 97, 1984.


* 참조 : 1. 생각의 유효성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71

2. 진화론 : 진정한 과학인가, 어리석은 생각인가?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14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1/i2/angle.asp 

출처 - Creation 21(2):47, March 199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239

참고 :

Doug Sharp
2004-08-14

창조가 과학적이고, 진화는 종교적이다.

(Creation is Scientific but Evolution is Religious)


       ”진화론은 과학이지만, 창조론은 종교이다!” 당신은 종종 이런 말을 진화론자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창조론을 주장하는 동기가 종교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종교적(religious)’ 이라는 단어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정의된다면, 어찌됐든 그들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진화론 역시 그들 자신의 신들을 숭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다.

기원(origin)에 관한 학문의 목적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거나,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기원에 과한 이론은 과학적 실험으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에, 두 믿음 다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이다.

하지만 창조론이 더 과학적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알려진 과학 법칙들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화론은 훨씬 더 큰 ‘신앙(faith)’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열역학 법칙들을 위반하며, 확률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초 안에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생체 시스템과 그것을 복제해보려는 인간의 시도가 비교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단백질을 합성하기 위해서는, 한 팀의 뛰어난 과학자들과, 많은 양의 비싼 화학 시약들, 수백 개의 반응 단계들, 자동화된 실험 장비들, 그리고 수개월에 걸친 계획 등이 요구된다.

진화론를 기초로 한 예측들은 현실성을 반영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화석과 지층들은 잘못된 위치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어떤 동물의 DNA 함량은 진화론적 패턴을 따르지 않으며, 생물체들 사이의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은 진화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있다.

만약 진화론이 사실이었다면, 매우 많은 전이형태의 중간 생물들이 존재했을 것이고, 이것은 생물체들을 분류하는 데에 어려움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동물들은 번식(breeding)이라는 장벽에 의해서 유전적인 구분되는 분명한 '종류(kinds)”들로 분류된다.


진화론자들을 향한 기독교인의 자세

창조와 진화의 논쟁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이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 조심해야하며 기도해야 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나는 하나님께서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알 필요가 없다. 나는 단지 그가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고 말하며, 이 논쟁을 무시하는 자세를 선택한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의 자세는 별 문제는 없지만, 불신자들 특히 자신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유로서 진화론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늘 항상,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 할 때, 많은 시간을 진화론적 논쟁들과 부딪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진리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일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타당한 자료와 생각 없이 자신의 주장만을 펼치다가 많은 손해를 본다. 그러한 주장(이론)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좋은 신학도 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눠지게 하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한다. 결과적으로 "가짜 과학 (진화론)”과 타협하면서 많은 이상한 교리와 이교(cults)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숙한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남아있는 이러한 이교적 자세는 진리에 대한 또 다른 방해물이 된다. 만약 한 사람이 도덕주의적이고 심판자적인 자세를 보인다면, 그는 즉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들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나누는 것은 매우 민감한 과정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매우 귀중하고 엄청난 가치가 있으며, 금이나 은보다 훨씬 더 귀중하다는 자세를 포함하고 있다. 비난하거나 부정적인 자세는 금이나 은을 쓰레기 속으로 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결코 논쟁(debate)에서 "이기려고(win)" 노력하거나, 진화론자들을 개인적으로 비난(condemn)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사람들을 잘못된 학설로부터 분리해내는 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종종 기독교인들은 자기방어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맡겨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들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그리고 어둠의 주관자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진화론이라는 속임수를 미워하지만, 그것에 기만당한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대신, 그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사랑해야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남을 박해하는 기독교인은 결코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 못한다.


진화론자를 이해하기

진화론자들의 동기 부여(motivation)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이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하나님'은 '인간 자신'인 것이다. 그들의 교리는 바로 인간이 진화의 생존 경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서있다는 것이고, 인간은 스스로가 그들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한 예로, 한 화학교수의 연구실 문에서 들은 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한 학생이 교수에게 인류를 더 낫게 하는 과학을 공부하길 원한다고 말하자, 교수는 학생에게  자선단체로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는 것이었다.

 ”과학은 자존가(egotist)를 필요로 한다. 과학 자체를 사랑하는 진정한 자기중심주의자”

과학자들은 과학적 방법에 매료되어 있는 듯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발견해내는 것이 더 많을수록, 과학자들은 스스로가 신이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때문에, 그러한 생각과 대립되는 이론이나 사실들을 외부로 밀어내는 것이다.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이 유명해진 이유는 과학적 증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는 데에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운행되도록 하신 후, 간섭하시지 않고 포기하여 버린 기계론적 우주론을 주장한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밀어낸다. 조지 심슨 (George Gaylord Simpson)은 그의 책 '과거의 삶(Life of the Past)'에서 이러한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쓰고 있다.  

”인류는 독특한 이해력과 잠재력을 가지고 우주 속에 홀로 서 있는, 길고 무의식적이고 비인격적인 물질 과정으로 생겨난 독특한 생성물이다. 인간의 존재는 누군가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며, 그 자신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통제할 수 없으며 감지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창조된 창조물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주인인 것이다. 그는 그의 운명을 결정하고, 다룰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진화론은 과학자들의 자기 경배(self­worship)를 강화시켰다. 만약 인류가 ”진화의 길고 무의식적이고 비인격적인 물질 과정”의 산물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며,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왜 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해야 하는가? 나는 스스로 존재하게 된 사람이다!” 이것이 그들의 이유이다.

진화론이라는 종교는 자신의 교리, 전통, 생활방식, 그리고 문화를 가지고 있다. 사회학적 진화론(Social Darwinism)은 진화론의 논리적인 확장으로서, 많은 다른 철학과 종교들을 명시하고 있다. 이것들의 예는 다음과 같다 :

* "당신 자신의 것을 행하라"는 철학

*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최적자' 라는 사고방식

* 자본주의의 '고달픈 개인(rugged individual)'의 형태 (Ayn Rand와 같은)

* 뉴 에이지 운동 (New Age movement)

* 신비주의 (Rosicrucianism)

* 신지학 (접신학, Theosophy)

* 심령술 (Spiritism)

* 악마숭배주의 (Satanism)

* 마르크스주의 (Marxism)

* 사회주의 (Socialism)

* 민족우월주의 (Racism)

* 나치주의 (Nazism)

* 낙태 (Abortion)

기독교를 믿으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사탄은 창세기에서부터 강력하게 공격한다. 지난 150 여년 동안 공들인 진화론은 그에 반하는 압도적인 과학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꽃을 피웠고 유지되어 왔다.

만약 창세기가 의심스러운 기록이라면, 인류의 타락과 구속도 역시 의심스러운 일인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의문은 주변적인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중심적인  논쟁인 것이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타락한 길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서 1:18~20 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물들을 통해 이미 그의 능력과 신성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치 못한다는 것이다. 불신앙에는 핑계가 없다. 그들의 생각은 허망하여지고, 그들의 미련한 마음은 어두워졌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있다 생각하나, 우준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사람과 금수를 경배하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셨고, 그들은 자신 스스로 죄의 욕망에 사로잡혀 버렸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사람들에게 설명함에 있어서 공격적이어야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이 타락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첫 번째 표시임을, 성경은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만약 창세기가 사람들에게 정말로 사실로서 이해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만약 그들이 더 이상 의심 없이 믿는다면,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일하실 수 있을 것이다.


진화론적 편견을 확인하기

진화론적 편견은 많은 형태로 접할 수 있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에게 사용되어지는 여러 논쟁과 책략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가장 흔한 책략 중에 하나가 시류에(우세한 쪽에) 편승하도록 하는(bandwagon) 수단이다. 이러한 책략은, 모든 지식인들은 진화론을 믿는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창조론을 믿는 사람은 단지 소수이며, 광신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책략에 대해 무엇보다도 먼저, 대다수 의견이 언제나 진리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둘째, 시류에 편승하는 사람들은 단지 대다수의 의견은 시끄러운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류에 편승하도록 하는 방법은 창조에 관한 논쟁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알아야할 필요가 있는 전형적인 사탄의 책략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소수(minority)에 속한다면, 협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고 말씀하고 있다. 

진리로 나아가는 자는 언제나 소수임을 기대해야만 한다.

질문 공세(barrage) 수단은 창조론자들을 반대하는 데에 자주 사용되는 또 하나의 무기이다. 토론 시에 질문들은 대담자를 당황하게 하기 위해서 매우 빠르게 요청되어진다. 그러한 사람들은 늘상 목소리가 크고, 무례하며, 전혀 대담자의 대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만일 그러한 상황에 당신이 놓여 있다면, 당신의 유일한 수단은 똑같이 무례하게 그 사람에게 맞서거나, 같이 질문 공세를 퍼붓는 일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당신은 그에게 엄하게 대해야 될 것이고 그러한 행동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논쟁을 이기고자 하는 사람이다.

창조론자들의 글에 대한 검열(censorship)은 진화론자들에 의해서 사용되는 또 다른 전술이다. 활발한 검열은 과학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창조론 교육에 반대하는 법안을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어진다.

논쟁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고 무시해(ignore) 버리는 것은 창조론자들을 냉대해버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자주, 창조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사실들도 교과서에서는 무시되어진다. 또는 만약 그것이 언급되었다 하더라도 얼버무리거나, 기각시키거나, 비웃어버리고 만다.

인신 공격(Ad Hominem)도 한 사람의 평판을 나쁘게 하여, 실제 논쟁으로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멀어지게 하려는 또 하나의 전략이다.

성급한 결론(hasty conclusion)은 부족한 증거에 기초해서 내리게 되는 불합리한 논증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 먼저 출석한 10명의 사람이 빨간 내의를 입었다는 것이 관측된다면, 성급한 결론은 모든 교인들이 빨간 내의를 입었다고 결론내리는 것일 수 있다.  

크리스천은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그는 의견(opinion)으로부터 사실(fact)를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마도, 아마,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예측된다....등등과 같은 추측성 단어들 밑에 빨간 색으로 밑줄을 그어라. 어떤 과학책들은 빨간 색으로 인해 홍역에 걸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진화론과 모순되는 사실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계속하라. 이러한 증거들은 너무도 풍부하다. 예를 들어, 물고기는 몇몇 포유류의 DNA 양보다 25 배나 더 가지고 있음을 생화학 교과서에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문장들을 노트로 옮겨 적고, 그러한 사실들을 수집해 보라.  가정(assumptions)들에 밑줄을 긋고, 그것들을 적어 두고, 그리고 그것들이 유효한지를 테스트해 보라.

학생들을 좌절시키는 또 하나의 문제는 어려운 과학 전문 용어들의 남용이다. 이것은 학생들을 혼란의 바다 속으로 파묻어 버린다. 전형적으로, 진화론자들은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어를 어렵게 재명칭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판단력의 암흑화(obfuscation) 라고 불려진다. 그리고 이것은 창조론자들에 대해 사용되는 전술일 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정신이상 상태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사용된다.

이 질환의 또 다른 특별히 유해한 균주는 단지 이해하기 힘든 도표와 그래프들과 함께 ‘그리고’ ‘그러므로’에 의해서 나열되어있는 수학적 공식들로 구성되어있는 논문들이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것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학생은 자신에게 이와 같은 질문들을 물어보라.

* 가정(assumptions)들은 무엇인가?

* 그 가정들은 유효한가?

* 결론은 무엇인가?

* 결론은 유효한가?

* 그는 어떻게 가정들로부터 결론을 얻었는가?

* 이 논문은 모두에게 읽혀질 가치가 있는 것인가?

창조론자들도 또한 이러한 형태의 저술을 피할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이 독자들을 잃어버리려면 어떤 글을 이치에 맞지 않도록 쓰면 된다. 암흑화는 늘상 지나친 자기 아집의 결과이다. 이것은 자기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될 수 없다. 과학자는 만약 시간을 낸다면, 그의 저술을 이해 가능하도록, 읽기 쉽도록 쓰는 것이 가능하다. 


연구 방법을 개발하기

만약 크리스천 학생이 과학을 공부하여 성공하려고 한다면, 그는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또는 그녀)가 관측한 모든 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는 것과, 그가 연구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연구가 건조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 상당 부분은 연구의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초기의 과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과학적 연구를 실시하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직도 많은 것들이 발견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고, 창조하신 자연에는 발견되어야할 것과 탐사되어야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크리스천 학생들은 질(quality)로서 나타내져야만 한다. 모든 것에서 뛰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비록 선생님의 의견이 당신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시험 때에 선생님이 동의하지 않는 답을 제시함으로서, 당신의 주장을 증명해보려고 노력하지 말라. 시험은 그러한 장소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동의할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당신의 믿음에 반대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당황하지 말라. 대신 기뻐하라! (야고보서 1:2). 만약 당신이 당신의 선생님과 의견을 달리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사랑과 존경의 자세 안에서 행하여야 한다. 그가 당신은 광신자라는 고정 관념을 갖을 기회를 주지 말라. 당신의 행동이 나무랄 데가 없도록 하라.

꼭 배워야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라. 중요한 이슈를 마음 속에 새기는 비결이 있다. 책이 당신의 것이라면, 중요한 부분에는 반드시 표시를 해두라. 노트에 적어두고, 논리적인 순서로 그것들을 조직하라.

크리스천 학생은 창조성, 완전성, 우수성으로 특징되어야 한다. 과제를 받았을 때마다, 통찰력, 아이디어, 신선한 접근을 위하여 주님께 의존하라. 모든 일에 정직하고, 다른 사람의 작업을 도용하거나 복사하지 말고, 자신의 작업을 수행하라. 할당된 것보다 10%를 더 하라. 그것은 100 배로 늘어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창조론을 공유하기

당신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해 하지 말라. 만약 당신이 답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을 위장하려고 하지 말라. 당신은 전능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라. 만약 할 수 있다면, 대답을 발견할 때까지 질문을 연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라. 자주, 이것은 깊은 영적 성장의 시간이 될 것이다.

조롱하는 자들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주제나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 전혀 올바른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당신이 답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 답을 조사해서 오겠으니 다시 만나자고 제안하라. 그가 거절한다면, 그는 아마도 그 답을 듣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또는 당신이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당신과 토론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실망하지 말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보도록 하지 않으시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전까지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리라 기대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해야할 것은, 창조론(creationism)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도구로서 사용하라는 것이다. 창조론은 소금(salt)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토론과 관심분야를 나눌 때 양념처럼 가미되어야 한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안에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리고 창조와 진화에 관한 긴 토론으로 옆길로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금은 그 자체만으로는 전혀 음식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창조론은 작은 양으로 첨가된다면, 그 목적을 잘 맞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람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워주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지적인 질문에 대해 만족할만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데에 방해가 되는 주요한 장애물들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물들이 제거될 때, 복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번역 - 한동대학교 창조과학연구소

링크 - http://www.rae.org/issues.html

출처 - Revolution against Evolution, 1999. 6. 26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51

참고 : 6146

이재만
2004-08-13

원숭이 재판


      창조과학 사역을 하다 보면 거의 매번 나오는 질문이 있는데 "학교에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진화론만 가르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이다. 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그 중에 한가지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알고있는 사건이다. 사건 자체뿐 아니라 대부분이 왜곡되어 보도되었기에 이 사건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의 교육과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1925년 미국에서 일명 '원숭이 재판 (Monkey Trial)' 이라고 불리는 재판이 있었다.  피고인의 이름을 따서 '스코우프스 재판 (Scopes Trial)' 이라고도 하는 재판으로, 사건은 미국의 테네시 주의 대이턴이라고 하는 작은 시골도시에서 발생하였다. 한 공립학교 교사인 스코우프스가 수업 중에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것과,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고소로 시작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우습고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당시에 주 교육법상에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 되었던 상태였기에 이러한 고소가 가능 하였던 것이다.


교통이 어려운 그 때에 200 여명의 세계 기자들이 취재를 위하여 이 작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미국 공판사상 처음으로 라디오 전국 중계가 되기도 했다. 막상 재판이 시작하자 스코우프스 교사가 주의 교육법상에 범법 사실보다는 피고측은 법적인 문제를 이탈하여 진화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더욱 열을 올렸다. 재판은 점점 복잡한 진화론에 관한 질문들로 이어졌다. 그러나 고소자 측 변호사인 브라이언은 이러한 난해한 질문에 대하여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능숙하게 응수하였고, 물론 그는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인 질문에 대하여 모르는 대답에 대하여는 솔직히 시인하였다. 재판 결과는 피고의 유죄판결과 100불의 벌금형이 내림과 함께 막을 내렸다. 


재판 결과 일곱 주에서 연달아 비슷한 법적 논쟁을 일으키게 하는 발단이 되었으며, 1960년대까지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에 진화론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던 당시의 추세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당시 언론들의 보도방향은 사람들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대부분의 기자들은 처음부터 이미 고소자 측을 공격하려는 생각을 갖고 취재를 시작하였으며, 고소자 측의 진화론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고소자 측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사를 실었다. 한 기자에게 왜 재판을 취재하러 왔는가 하는 질문을 하자, "저는 무슨 일인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무엇을 써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영화 관계자들도 가끔씩 흥미거리로 이 재판을 영화화 하였는데, 편견을 가진 영화들은 성경을 고수하려는 기독교인들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진화론을 무모하게 공격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편견에 의해서 이 사건은 오히려 진화론이 전 미국과 세계로 확산되는 동기가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진화론의 증거들은 오늘날에는 케케묵은 허구들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진화가 논리적으로 이해(?) 시키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성경과 진화론의 대결이 되어버린 이 재판을 보면 마치 빌라도 앞에서 예수와 바라바 사이에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예수)을 없이 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눅 23:25) 재판의 결과는 미국 학교에서 성경을 없이하고 진화론이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48

참고 : 2067|3677|4010|3051|2148|2061|729

윤성호
2004-07-26

과학철학으로 바라본 창조, 진화 논쟁


Abstract

'과학'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면서도 그 뜻을 정확이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이다. 창조과학서도 진화론과 창조론을 비교하며 '과학'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그 의미가 매우 불만족스러운 때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로인해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비판함에 있어서 "당위적 연역법"에 근거할 때가 많고 인식론적(認識論的) 형평성을 잃을 때가 많다. 본 글에서는 과학철학의 내용을 중심으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논의(-주로 창조론적 입장에서)에서 사용된 '과학'의 정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여려형태의 과학철학 이론에 근거하여 창조, 진화문제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

 

1. 문제제기

    위의 (명제 1, 2)는 국내의 대부분의 창조론자들이 동의하고 주장하는 명제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명제 3)을 주장하는 창조론자들도 있지만 현재의 추세는 (명제 3)까지 쉽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위의 주장들이 공통적으로 함의(imply)하고 있는 주장은 "과학이란 증명가능하고 실험적으로 확실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필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 위하여 대표적인 과학철학적 견해들 - 논리실증주의, 칼 포퍼와 반증주의, 토마스 쿤과 패러다임, 라카토슈와 연구 프로그램, 파이어아벤트와 아나키즘(anarchism) -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위의 명제들은 논리실증주의적 견해에 의존하는 것이고 이러한 견해는 오래전에 포기된 주장들이다.

 

2. 논리 실증적 입장에서의 과학

    즉 이론은 실험에 의해 확인되어져야 하고 다른 누구라도 다시 실험을 하며 재현되어야 하며 이렇게 해서 얻어진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의 주장들인 위의 세 주장은 1900년대 초반 학계의 과학에 대한 이론이며 현대의 일반인 및 대다수의 창조론자들의 '과학'의 개념에 대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위의 3가지 주장을 기반으로 한 과학에 대한 개념은 이미 깨진지 오래이다.

    위의 견해가 깨진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가지를 한다면 '관찰의 이론의존성 (theory laden)'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떠한 사실을 관찰할 때는 필연적으로 몇가지 이론들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행성 등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물체의 운동을 관찰할 때는 만원경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 때는 광학이론의 도움을 받게된다. 원자 등의 미시세계를 관찰할 때는 구름상자등의 실험적 도구를 받게된다. 만일 우리가 어떠한 이론적 도움을 받지 않고 단지 감각에 느껴지는 진술만을 한다면 "밤하늘의 달은 새끼 손톱만하다"라는 주장과 "태양이 지구를 돈다"라는 주장을 하게 될 것이다. 즉 어떠한 관찰도 이론적 바탕없이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관적인 과학이론", 혹은 "객관적 증명"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떠한 관찰, 실험도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예는 생략한다. 이것은 기초적인 과학철학 입문서2)를 보면 수없이 많은 예가 나와있다.

    만일 논리실증주의의 견해를 따른다면 분명 "진화론은 과학이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험적으로 재현할 수도 없고 정확한 의미의 증명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떠한 과학이론도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퍼의 주장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다.


3. 포퍼와 반증주의3)

    "어떠한 이론도 정확하게 증명될 수 없다"라는 것을 받아들인 포퍼는 "과학이론이란 반증가능성이 있는 이론이다"라고 하였으며 하나의 과학이론이 반증되었을 때 - 틀렸다고 판단했을 때 - 기존의 과학이론을 폐기처분하고 새로은 과학이론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즉 과학이론은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반증(falsify)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과학이론은 계속적으로 반증되며 보다 정확한 이론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Britanica' 및 대부분의 사전적 정의 및 교과서적 정의로 이용된다.

    예를 들어보자. 가장 간단한 예로 열역학 1법칙, 2법칙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 두법칙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단지 이것을 아직까지 반증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증될 가능성은 있다. 그것은 '영구기관'을 만들어보이는 것이다. 두 번째 예로 뉴튼의 법칙을 들어보자. F= ma 로 표현되는 뉴튼의 이론은 증명된 이론인가? 천만에!! 그저 F= ma 라고 썼더니 많은 사물 현상들이 설명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현재와서 뉴튼의 이론을 적용하다 보니 반증사례가 나타났다. 수성의 궤도운동, 미시세계의 원자의 운동에 있어서는 뉴튼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을 도입하여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비록 F= ma가 반증되었지만 '반증가능성'이 있었기에 과학이론으로 다루어야 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증가능성이 없는 이론으로는 "물체는 그 고향을 땅에 두고 있기 때문에 밑으로 떨어진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모든 현상을 '잠재의식'과 '성욕'으로 해석한 프로이드의 이론 등을 들 수 있다.

    포퍼의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진화론의 과학여부를 따져보자. 진화론은 엄격한 의미에서 '반증'될 수 없기에 과학이론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창조론은 어떤가? 창조론 또한 반증가능이 불가능하기에 과학이론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종종 "창조는 과학적인 사실이다."라는 주장을 듣게 되는데 만일 어떠한 이론이 과학이론으로써의 자격을 갖는다면 언제든지 '반증'될 수 있어야
하며 폐기처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 과학이론은 엄밀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하다.

    포퍼는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였고 과학의 객관성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그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반증가능성'이란 개념이 비판받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과학 이론은 중심이론과 그 이론주변을 감싸고 있는 보조이론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론의 반증 예에 부딪치게 되면 그 주변의 보조가설을 수정함으로써 그 반증 예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로 천동설과 지동설의 주장이 양립할 당시의 예로 티고브라헤라는 과학자는 지동설을 다음과 같이 반증하였다. "만일 지구가 돈다면 오늘 바라보는 별들의 위치와 내일 바라보는 별들의 위치가 연주시차에 의하여 달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몇 일에 걸쳐 별의 위치를 확인하였더니 별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로 지구는 돌지 않는다." 그러나 티코 브라헤는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가 짧다라는 보조가설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실제로는 별들과 지구의 거리는 매우 크기에 눈으로 연주시차가 확인되지 않는다. 두 번째 예로 뉴튼의 이론이 발전할 당시 뉴튼의 이론은 천왕성의 운동을 설명하지 못하였고 이것은 당시의 뉴튼이론의 반증사례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누군가 천왕성 외부에 새로운 행성이 있다면 천왕성의 운동이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역으로 미지의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만원경으로 확인하였더니 지금의 해왕성이 발견된 것이다. 이와같이 과학이론의 반증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이론의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 현대의 과학철학은 토마스 쿤과 페이어 아벤트에 의하여 상대론적 결론으로 다가서게 된다.


5.  토마스 쿤과 파라다임4)

    이러한 주장들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60-70년대 이후 과학철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 의하면 과학이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게 된다.

정상과학 → 이상 현상 → 위기 → 혁명 → 새로운 정상과학

    즉 어떠한 이론(이론 A)에 의하여 과학이론이 계속하여 발전하다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거나, 그 시대의 패러다임(paradigm)과 일치하지 않을 때 위기를 겪게 되고 이것을 대치할 만한 새시대의 패러다임에 일치하는 이론(이론 B)이 나오면 그 이론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결코 누적적이거나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이고 또 전혀 새로운 형태로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새로운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듯이 말이다. 또한 패러다임이란 그 시대의 과학자 사회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가치관, 문화적 배경, 실험적 엄밀성의 정도 등 여러 가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요소로 구성되어진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뉴톤의 이론으로 뉴톤의 이론에서 아이슈타인의 이론으로의 발전은 축적적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라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진 것이고 이것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쿤에 의하여 "한 이론이 과학적 이론인가, 아닌가?" 라는 문제라든지 "한 이론이 과학적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라는 문제는 실험적 사실의 판별 여부 객관성에 있지 아니하고 다분히 과학자 사회의 동의여부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론도 진화론도' 그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의 범주 않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진화론은 다수의 과학자가 승인하는 정상과학의 형태이고 창조론은 소수의 과학자가 받아들이는 이론인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최근의 학계의 경향 - 많은 생물학자들이 대진화의 과정을 찾아내는데 실패하고 점차로 증가하는 수의 과학자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창조론을 제시하는 경향 - 은 진화론에 위기현상이 오지 않았나하는 추측도 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혁명이 실제로 일어나고 하나의 이론이 새로운 이론으로 대치되었을 때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6. 페이어 아벤트와 아나키즘 5)

    'Anythings goes(어떠한 것이든지 좋다.)'라고 대변되는 페이어 아벤트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이론이란 정치활동, 신화와 근본적이 차이가 없으며 과학자들의 학회는 정치인들의 정당대회와 유사하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데이타를 조작하고 소수의 사람이 신봉하는 이론적 바탕에서 쓴 논문을 거절하는 일을 할 뿐이다. 이러한 견해는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 반 이성주의 철학등과 함께 최근에 점차로 큰 힘을 얻어가는 추세인 것 같다.

    "그에게 진화론이 객관적 사실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당연히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객관적 사실이 있다고 믿는거야?"  페이어 아벤트의 철학에 있어서 과학에 있어서의 객관성,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단지 어떠한 이론이 더 실용적이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지가 중요할 따름이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가 수십년 내에 일반인들에게 암묵적으로 들어올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신앙이 암암리에 실존주의적, 반이성주의적 철학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과 같이. 그러한 시대에서 현재의 방식으로 창조론을 변증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7. 라카토슈와 연구프로그램

    라카토슈의 논증은 과학이론에 대한 직접적인 증명 혹은 반증을 시도하려는 오류를 피하는 동시에 토마스 쿤과 페이어 아벤트와 같은 상대론적 결론도 피하기에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카토슈에 의하면 어떠한 이론 B가 기존의 이론 A보다 더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고 또한 새로운 현상을 예측한다면, 또한 그 내부적 정합체계가 일관적이라면 이론 B를 이론 A를 대신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즉 그에 의하면 한 이론의 절대적인 증명, 반증은 불가능하지만 이론간의 상호 우월성 여부, 이론의 점진성(혹은 퇴행성) 여부를 판별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의 이론에 의하여 창조론, 진화론을 판별해 본다면 두 이론 중 어떠한 이론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어떠한 이론이 보다 많은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고 또한 과학활동에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비교가 될 것이다. 단순히 진화론의 비일관성 - 예를 들면 진화의 과정에 대한 이론이 여러 가지가 된다는 등의 - 만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론이든지 보조가설 등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자신의 이론을 새롭게 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조로 (그림 1)은 토마스 쿤, 라카토슈, 페이어 아벤트 등의 견해를 단순하게 나타낸 것으로 기존의 이론 A가 새로운 이론 B로 변화할 때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토마스 쿤에 의하면 두 이론은 공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서로 설명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며 라카토슈에 의하면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이론이 설명한 체계를 포함하고 더 넓은 영역을 설명할 수 있고, 페이어 아벤트에 의하면 두 이론이 설명하는 영역, 방식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


8. 결론

    이상에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 후 '과학철학자' 들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단순히 생각한 '과학'이라는 용어를 놓고 여러 가지의 정의가 가능함을 보았으며 최근의 논의에 의하면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이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살펴보았다. 또한 과학적 이론에 대한 증명과 반증이 그리 쉽지 않은 것도 살펴보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각 과학관을 기반으로 하여 창조, 진화 논쟁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명제 (1, 2 혹은 3)으로 표현되는 창조론적 변증에 대한 비판도 언급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의 '과학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단순한 진화론 비판을 넘어서서 '창조론적 대안'을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 관하여서는 앞으로 많은 토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nd Notes

1) 윤성호 형제는 청년 창조과학 연구회 회원이며 포항공대 환경공학과 석사를 졸업했습니다.

2). 현대의 과학철학, 차머스 저, 서광사, 1994.

3). 과학적 발견의 논리, 칼 포퍼 저, 박우석 역, 고려원, 1994

4). 과학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저, 김명자 역, 동아출판사, 1992.

5). 방법에의 도전, 페이어 아벤트 저, 정병훈 역, 1987.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3

참고 :

신재헌
2004-07-26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소고


<글의 순서> 

     I. 서론: 용어의 정의와 중요한 논점들

     II.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

     III.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

     IV. 성경과 과학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 


I. 서론 : 용어의 정의와 중요한 논점들
 

진화론을 신앙안으로 수용하자는 주장 ―유신론적 진화론― 이 최근 기독인들 중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바 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과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신학적·성경해석학적 고찰을 통하여 진화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근본주의적 창조과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성경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정립에 대한 도전을 주고자 한다. 앞으로의 논리전개를 위하여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련된 용어들을 간략히 정의 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에서 말하는 '진화'는 소진화와 대진화를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고, '진화론'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다루는 과학 이론이다. '소진화'란 보통 어떤 종(species)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종분화(speciation) 과정을 수반하는 작은 변화를 의미한다 [1,2]. '종분화'란 어떤 종이 지리적 격리 등과 같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가면서 어미종(원래 종)과 상호 교배할 수 없을 만큼 생식적으로 격리된 새로운 종을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3]. (종분화의 정의는 종의 정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예를 들면 유전적으로는 교배가 가능하지만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절대로 교배하려고 하지 않는 두 생물군을 같은 종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다.) '대진화'란 현재 생물계의 모든 분류군들이 오랜 시간동안 소진화 즉 종분화와 같은 미세한 과정의 축적에 의하여 최초 (무생물의) 형태로부터 유래했음을 의미하는 (가설적) 과정이다 [1,2,4]. 많은 진화론자들은 종분화 자체를 대진화로 여기면서 종분화에 대한 증거들을 가지고 대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는데, 애석하게도 창조/진화 논쟁의 격렬한 싸움들은 이와 같이 진화에 관련된 용어들의 정의를 엄격하게 사용하지 않는데서 대부분 비롯된다 [5].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창조적 진화론이라고도 하는데 진화를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태초에 시공과 물질 그리고 자연법칙을 창조하셨고 그 이후에는 부여하신 자연법칙 하에서 자연적인 과정으로 우주를 형성시키셨고 생물들을 진화시키셨다는 것이다 [6,7,8]. 온건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최초 생명체의 발생과 인간 영혼의 창조 등 일어나기가 매우 어려운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특별히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직접 창조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물의 기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많아지는 기준으로 몇 가지 기원론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신론적 진화론 → 이신론적 진화론 → 유신론적 진화론 → 점진적 창조론 → 순간(명령)적 창조론  

여기서, '이신론(理神論)적 진화론'이란 태초에 빅뱅을 시작시킨 원인이 초자연적 존재냐 아니냐 라는 점에서만 무신론적 진화론과 틀리고 나머지는 무신론적 진화론과 같다 [9]. 이러한 이신론적 진화론은 우주와 생명의 발전에 있어서 어떠한 신적 목적이나 계획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전적으로 비기독교적 견해이다. '점진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매우 긴 지질학적 시간동안 단계적으로 창조하셨는데 각 창조의 사이사이에는 소진화를 사용하셔서 종들을 다양하게 하셨다 라는 것으로 지질학적 발견들을 성경과 조화시키면서도 대진화는 인정하지 않는다 [10,11]. '순간(명령)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행위를 통하여 사실상 거의 즉각적으로 모든 생물들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으며 그 생물들이 원래의 종류에서 크게 벗어남 없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라는 것으로 [9], 홍수격변설과 함께 창조과학의 이름으로 활발히 주장되고 있는 창조론이다. 점진적 창조론과 순간적 창조론은 창세기 1장에 나와 있는 '종류대로의 창조'를 지지하는데, 이 때의 '종류'는 현재 생물분류학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취급하는 '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속(genus)'이나 '과(family)'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종류라는 단어를 종에 가까운 의미로 해석하면서 종분화까지도 부인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좀 더 온건한 창조론자들은 종분화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5]. (앞으로 특별한 수식어 없이 그냥 '창조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점진적 창조론과 순간적 창조론을 함께 의미하는 것으로 하겠다.)


II.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고찰
 

과연 대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과연 모든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발생되어 어떤 자연적인 과정을 거쳐 현재의 복잡한 형태로까지 되었다는 주장을 사실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본 장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과연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 

첫째, 진화론자들은 소진화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을 연장해서 그대로 대진화에 부여하는 우를 범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소진화는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종 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로부터 어미 종으로부터 딸 종으로 분화하는 종분화 현상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식물의 경우 종분화는 관찰 가능한 과학적 사실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비록 직접 관측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16종의 갈라파고스 핀치새"라든가 "수백 종의 하와이 초파리" 등과 같이 종분화를 지지하는 몇 가지 '상황 증거'들이 있는데, 그 증거들은 ―물론 '종류' 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라는 창조론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일단 종분화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는 된다 [12]. 신다윈 종합설에 의하면 이러한 종분화의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것은 '자연선택', '유전적 (돌연)변이', 그리고 '지리적 격리'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종분화 현상을 그대로 대진화로 여기면서 대진화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믿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인) 학자들은 소진화의 사실성이라는 측면을 연장해서 그대로 대진화에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13-17]. 금붕어와 지네의 차이나 낙지와 꿀벌과의 차이와 비교해 볼 때, 하와이 초파리의 종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너무나 미소하다 [17]. 그러한 미소한 형질의 변화가 쌓이고 쌓여서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형태의 기관"을 만들어낸다는 진화론적 설명은 실제적 증거가 아닌 가설과 유비를 근거로 한 추론에 불과한 것이다 [13]. 비록 우연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 소진화의 메커니즘은 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매우 다른 형태의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내는 대진화의 메커니즘으로써 역시 동일하게 사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마이클 덴튼(M. Denton)은 이러한 상황을 '날씨 변화'와 '계절 변화'에 비유하는데, 매일 매일의 날씨 변화를 설명하는 고기압이나 저기압과 같은 현상을 가지고 계절 변화와 같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7]. 

종분화가 대진화의 메커니즘이 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논증은, 종분화 과정이 유전정보가 새로 생성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잃는' 과정이라는 주장에 기초한다 [18]. 새로운 기관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 기관의 특성을 규정하는 유전정보들이 새롭게 생성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파충류가 진화해서 조류가 되기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던 날개가 생겨야 될 뿐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허파나 심장 같은 여러 기관들도 그 형태가 엄청나게 변화해야 하는데 [19], 이러한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려면 새로운 기관의 특성을 규정하는 기능적 정보들이 하나 둘 생성되어 기존의 유전정보에 첨가되거나 아니면 기존의 것을 대체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종분화 과정은 특정 유전정보를 잃음으로써 어미종으로부터 분리되어져 가는 현상이므로 이와같은 대진화적 변화의 근거로 제시되기가 힘들다 [18]. 

최근에 필자는 만약 대진화가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새들이 점점 진화해서 나중에는 우주를 날라다니는 새들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과연 새가 수 억년 (또는 수 십 억년) 뒤에 우주를 날라다니는 생물로 진화될 수 있을까? 혹자는 허황된 소리라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대진화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먼 훗날 발생할 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화론의 가능성에 너무나 심취된 나머지, 진화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식의 어떤 '신앙'적 형태로 진화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줄리안 헉슬리(J. Huxley)는 다윈 100주년 기념식에서 "생명의 진화는 이제 더 이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우리의 모든 생각의 근거이다... 우리는 의미론과 정의라는 수렁에 빠져서 꼼짝 못하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라는 식의 교조적 발언을 했다 [13]. 반면, 그 바로 전 해인 1959년 독일의 동물학자 베른하르 렌쉬(B. Rensch)는 대진화는 소진화 과정을 연장해서 설명할 수 없으며 현재 알려진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당시 지도적 생물학자들의 리스트를 제시하였다 [20]. 이러한 의견 차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진화론의 두 번째 문제점은 진화계통수상의 가상적 공통 조상들과 전이 형태의 생물들이 화석 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약 대진화가 사실이라면 원시 단세포 생물과 현재의 복잡한 생물들 사이에 있을 법한 수많은 '공통 조상' 또는 '전이 형태'의 화석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오히려 전이적 형태의 부재가 더 일반적인 법칙임을 보여주고 있다 [21, 22]. 거의 모든 주요 무척추동물 문들의 대표들이 어떤 전이 형태 없이 갑자기 등장한 소위 '캄브리아기 폭발'이나, 대부분의 '피자식물' 즉 꽃식물들이 이들이 속하고 있는 군의 분류 형질을 그대로 갖고 특수화 된 채 백악기에 돌연히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출현초부터 고도로 특수화 되어 있고 서로가 고립된 분류군으로서 돌연히 출현하고 있는 '어류군' 등은 아직도 해석이 안되는 골칫거리로 남아 있고 [21, 22], 이 외에도 화석상의 수많은 의문점들이 점진주의적 다윈 진화론의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현재 주류 기독인 생물학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리처드 라이트(R. T. Wright) 교수는, "화석은 진화에 대한 단 하나의 진실한 역사적 증거이지만 이는 점진적 다윈주의자들이 제안한 계속적 변화이기보다는 불연속적 기록이다. 즉, 전이적 형태들보다는 공백이 더 많은데 이는 대량 멸종이 발생하며, 새롭고 복잡한 것들이 화석 유물에 아주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들은 감지할 만한 변화 없이 수백 만년 동안 존재한다... 즉, 진화론의 경우 문제점은 화석 증거의 부족 ―전이적인 형태의 부재― 에 주로 기인하며.."라고 말한다 [21]. 

이외에도 대진화의 가설적 추론적 성격을 보여주는 몇 가지 논점들이 더 있지만 그것들을 다 살펴보는 것은 본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생략하고자 한다. 본 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최근 몇몇 주도적 신학자, 과학자, 과학철학자 등 여러 분야의 기독인 학자들에 의하여 활발히 주장되고 있는 '지적설계가설' (intelligent design hypothesis, ID)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ID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발견된 많은 생물학적 지식들이 생물이 진화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적 설계에 의하여 탄생한 것임을 증거해준다고 말한다 [23]. 이것은 세포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물학적 기작들이 '환원'될 수 없을 정도의 복잡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명현상이 자연적으로 탄생했다고 믿는 것 보다는 어떤 설계자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 훨씬 더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모래 사장에 쓰여진 어떤 글자를 볼 때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파도와 바람에 의해 저절로 생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그 글자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각이듯이, 그리고 과학자들이 외계에서 오는 메시지를 찾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것도 그러한 메시지가 자연적으로 날라온 것이 아니라 어떤 외계의 지성적 존재가 보내 준 것이라는 지극히 정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듯이, 복잡하고 정교한 생명현상을 보면서 지성적 존재에 의한 설계를 추론해 내는 것이 결코 '비과학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24]. 이러한 논의는 다분히 과학철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차후에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행해질 것이라고 기대된다. 



III.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
 

"진화론은 과연 기독교 유신론과 배치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유신론적 진화론 논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일 것이다. 만약, 진화라는 단어를 "무목적적이고도 우연한 과정에 의하여 모든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라는 식의 의미로만 사용한다면,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 "Yes!"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인으로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목적'과 '우연'이라는 철학적 함의들을 진화론으로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오히려 무신론적 진화론자들로부터 공격받는 빌미가 되고 마는데 그들은 유신론적 진화론이 우연이라는 과정에 신의 손길을 가정함으로써 진화론 자체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한다. 즉, "자연적인 메커니즘만으로도 충분히 진화가 일어나는데 왜 거기다가 신의 의지를 집어넣는냐"라고 비난하는 것이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의 반응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또한, 창조론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면 왜 가설적인 진화론에 집착하느냐?"라는 식으로 유신론적 진화론을 몰아부친다. 양측으로부터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유신론적 진화론은 도리어 양측으로부터의 공격에 부딪치고 있는 셈이다. 진화론의 철학적 함의들에 대한 고찰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먼저, 과연 진화론은 무신론인가? 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당연히 "No!" 라는 대답을 함으로써 진화론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하는 첫 번째 이유로 삼는다. 물론 이 질문의 답은 당연히 "No" 이다. 왜냐하면 서론에서 다루었듯이 진화론은 생물 현상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의 몇몇 부류는 이 질문에 '예' 라고 대답한다 [25]. 역시 서론에서 다루었듯이 이러한 불일치는 바로 용어의 정의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진화론과 '진화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진화주의'는 세계관 차원으로 끌어올려진 진화론을 의미하는데, 자연적인 과정인 진화만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모든 생물과 우주의 발달에 유일한 원인이 된다는 '믿음'이다 [26]. 이러한 진화주의는 현재 '자연주의 세계관' ―보이는 물질만이 실체의 전부라고 믿는 세계관― 과 함께 무신론을 대표하고 있다. 무신론자들이 다윈식 진화론을 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모든 기원의 문제를 단순한 자연적인 메커니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다윈 종합설의 대가인 마이어(E. Mayr)도, "살아 있는 자연의 모든 현상에 대해 순수하게 유물론적인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자연도태가 '하나님을 폐위시켰다'고 거론되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27]. 결론적으로 말하면,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무신론이 아니지만 무신론적 세계관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 사람이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진화론이 함의하고 있는 '우연' 또는 '무목적성'은 기독교적 창조관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통상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이신론적 진화론에 가까운 답변을 하는 부류인데,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최초의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 진화에 의한 최종 산물을 미리 염두에 두시고 모든 '초기조건'을 정교하게 잡아주셨다는 것이다 [28]. 즉, 오늘날의 모든 생물체는 하나님의 개입없이 진화를 해왔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오늘날의 생태계가 이룩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적 창조관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두 번째 부류는 점진적 창조론에 가까운 답변을 하는 부류인데, 양자역학적 함의를 도입하여 진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 자체에 신적 행위가 개입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29]. 이것은 진화의 밑바탕에 있는 유전적 돌연변이가 '불확정'적인 양자적 사건에 의해 발생하고 있고, 이 불확정성은 하나님에 의해 양자세계에 부여된 본질적인 법칙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깨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지대로 진화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29]. 즉, '우연'이라는 양자적 자연법칙 안에서 하나님은 얼마든지 진화 과정을 조정하실 수 있으므로 기독교적 창조관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부류의 대답은 어떤 경우이든지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두번째 질문을 무사히 통과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일단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에 의한 계획과 의지를 인정한다면, 더 이상 무작위적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초기의 단세포 형태로부터 지금의 다양한 생물계를 이루었다 라는 가설적 설명 ―대진화적 설명― 을 수용할 필연성이 없어진다. 우리에게는 수백 만 번의 변이 없이 각 생물을 그 종류대로 즉각적으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6]. 

세 번째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과연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이다. 비록 유전적 변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더라도 자연선택이 제 기능을 하려면 결국 수많은 변이 형태의 생물들이 생겨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변이적 생명체들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절하게 적응될 후손 ―하나님이 의도하신 생물― 이 등장하기까지 적자생존과 경쟁이라는 지극히 잔인한 메커니즘의 '희생물'로서의 가치밖에 없는 것이다 [30].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생물들을 보시고 기뻐하셨다. 모든 생물들이 정말로 수많은 변이체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면 그러한 것이 과연 보시기에 좋으셨을까? 이러한 논점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답변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랑'이라든가 '잔인'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개념은 인간적인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차피 지금도 그러한 적자생존이 생태계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에 대해서는 비록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가치 기준과 감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분명 지금의 생태계는 아담의 범죄 이후이고 하나님의 창조는 그 이전이므로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자연선택 또는 적자생존에 의한 창조라는 개념은 기독교적 창조관과 매끈하게 조화되기 힘든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IV. 성경과 과학에 대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과 과학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 등과 같은 질문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논점이 된다. 이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성경의 영감성에 대하여, 성경해석에 대하여, 그리고 과학의 한계와 성경의 한계에 대하여 깊이있는 연구와 이해를 필요로 한다 [31]. 본 장에서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근본주의적 창조과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좀 더 나은 합일점을 향한 방향제시와 도전을 주고자 한다. 이러한 고찰은 비단 창조/진화 문제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성경과 과학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모색에도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그럼, 성경해석에 있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정립에 있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첫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의 구절들을 단지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조직신학자 에릭슨(M. J. Erickson)은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다룰 때에 유신론적 진화론이 사용하는 전략은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인데, 하나는 창세기가 생물과 인간 기원의 방식에 관하여 어떤 구체적인 사항도 말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들이 다만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9]. 이는 분명히 옳은 지적인데, 왜냐하면, 유신론적 진화론은 진화론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창세기의 구문들을 단지 상징적 또는 알레고리(풍유)적인 표현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담을 지은 '흙'이 어떤 선재하는 피조물을 상징한다거나, "번성하고 충만하라"가 다른 종류를 생산하라 라는 것을 상징한다거나 하는 것).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알레고리적 해석과는 달리 개신교의 전통적 성경해석학에서는 문자적 해석을 가장 우선시한다 [32]. 여기서 '문자적'의 사전적 뜻은 "글이나 표현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구성과 의미를 따르는, 또는 단어의 일상적이고 명확한 의미를 따르는"이다 (Webster's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물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언어의 수사학적 표현이나 상징들, 모형들, 혹은 알레고리를 간과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32]. 중요한 것은, 문자적 접근은 다른 모든 문학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통상적 관행이며, 문자적 해석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판명 나지 않는 이상 상징적 또는 알레고리적 의미로 대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2,33,34]. 

둘째,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과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성경과 과학에 대한 분리주의(구분주의, compartmentalism)란 성경과 과학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주장하면서 [35], 성경으로부터 문자적·역사적 의미는 무시하고 도덕적·영적 의미만 추출하고자 하는 이원론적 태도이다. 리처드 라이트는 분리주의에 대하여, "창세기 초반부는 신화적으로, 혹은 우리에게 역사적인 참조점이나 자연계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결여된 신학적 진리를 가르치는 일련의 비유로 본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그 문제들을 아예 도외시함으로써 과학과 성서 사이의 갈등을 피하고 있다. 만일 진화론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세계관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분리주의자들에게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35]. 유신론적 진화론은 "창세기에 기술된 하나님의 창조 기사로부터는 창조의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알아낼 수 없다"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는 결국 성경과 과학에 대한 분리주의적 태도에 매우 가까움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과학의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며 성경이 기술된 방식도 비이론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구절들을 신화적 서술로 격하시키거나, 아니면 엉뚱한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분명한 것은 비록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한 비이론적 서술이지만 창세기에는 분명 창조의 방식이 기술되어 있으며 이와 함께 피조물들의 관계와 지위, 역할, 속성 등도 함께 나타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문제점은 이러한 구절들의 문자적 의미 자체를 아예 포기한다는데 있다. 

성경해석에 대하여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대하여 유신론적 진화론이 취하는 입장은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 취하는 입장과 정확히 반대이다.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의 문제점은 창세기의 구절들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모든 과학을 평가하거나 제거하고자 한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유신론적 진화론이나 근본주의적 창조과학이나 모두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와 역사적 배경이 무시된 채 비유적으로만 혹은 문자적으로만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성경과 과학의 관계에 있어서 과학이 성경의 해석을 좌지우지하게 해서는 안되듯이 마찬가지로 성경을 가지고 과학을 평가하거나 제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중요한 점은, 어떤 과학이론이 성경의 구절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일때 어느 한쪽을 무시하기에 앞서서 성경과 과학을 각각의 올바른 방법론에 의해 평가하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선행될 때에 모순처럼 보이던 부분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최소한 필자의 눈에는― 이러한 노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는 근본주의적 창조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만약 이러한 노력들이 진지하게 전개된다면 양자는 분명 좀 더 나은 합일점에 도달하게 되리라고 본다. 성경은 어떤 책이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과 과학은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은 논의가 활성화되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1]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권오식 역), p.125, IVP, 1995.

[2]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황영철 역), p.277, IVP, 1991.

[3] R. A. Wallace, et. al, 생물학 -생명의 과학- 3판 (이광웅 외 7인 역), pp.370-374, 을유문화사, 1993.

[4]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임번삼 외 2인 역), p.99, 한국창조과학회, 1994.

[5]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Ch. 4, 7, 10, 11, IVP, 1996.

[6] W. Grudem, 조직신학(상) (노진준 역), pp. 402-407, 은성출판사, 1997.

[7]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상) (신경수 역), pp. 434-435,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8]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신경수 역), p. 46,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9]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pp. 44-46.

[10]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상), p. 435.

[11] M. J. Erickson, 복음주의 조직신학(중), p. 47.

[12]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93-98.

[13]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pp. 277-278.

[14]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 90.

[15]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p. 125-126.

[16] P. E. Johnson, Darwin on Trial 2nd Ed., pp. 19-20, 68-69, IVP, 1993.

[17]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99-105.

[18] P. Davis, D. H. Kenyon, and C. B. Thaxton, Of Pandas and People, Haughton Publishing Co., Dallas, pp. 15-20, pp. 77-89, 1989.

[19]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p. 223-238.

[20] B. Rensch, Evolution above the Species Level, Columbia Univ. Press, New York, p. 57, 1959.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p. 99)

[21]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p. 128-130.

[22] M. Denton, 진화론과 과학, Ch. 8.

[23] 지적설계이론에 대해서는 www.origin.org 와 www.discovery.org/crsc 등의 인터넷 사이트 참조 바람.

[24] J. Wells, Evolution and Intelligent Design, http://www.discovery.org/crsc/crscviews/wellsdesign.html

[25]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1-185.

[26]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132.

[27]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122.

[28]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 186.

[29]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6-188.

[30] Del Ratzsch, The Battle of Beginnings, pp. 189-190.

[31]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Ch. 8, 10.

[32] Bernard Ramm, 성경 해석학 2판 (정득실 역), pp. 167-176, 생명의 말씀사, 1996.

[33] C. E. Hummel,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pp. 197-202.

[34] Bernard Ramm, 성경 해석학 2판 (정득실 역), p. 158.

[35] R. T. Wright,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 p. 93.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6

참고 :

손기철
2004-07-26

창조냐 진화냐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는 크게 진화론과 창조론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진화론은 오랜 시간의 역사 속에서 원소들이 우연히 결합하여 단세포 생물이 되고, 이것이 진화하여 현재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나왔다는 것이며, 창조론은 창조주에 의해 - 그 지혜와 설계에 의해 처음부터 다양한 생물들이 종류별로 단시간동안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를 비교해보기 위해 먼저 과학적 접근 방법을 생각해 보자.  과학이란 일반적으로 현상의 관찰, 원인에 대한 문제 제기, 가설의 설정, 실험을 통한 검증이라는 일련의 방법을 거쳐서 비로소 하나의 "과학적 법칙"이 성립되는 학문 체계이다. 그러나 기원의 문제는 그 첫 단계인 현상의 관찰이 불가능하고 실험을 통한 검증으로 사실 여부를 밝힐 수도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 과학을 적용하려면, 이미 밝혀진 과학적 자료를 고찰하여 어느 것이 더 과학적 논리와 법칙에 타당하게 들어맞는지를 판별하거나, 제한된 실험을 통하여 기원 과정들을 단편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한 예로, 단세포로부터 고도의 복잡한 생물체로의 변천을 주장하는 진화론이 증명되려면 수많은 중간 단계의 생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생물에서도, 발견된 화석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화석은 현재와 똑같은 과거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인데, 이것은 진화론보다는, 생물이 처음부터 종류별로 창조되어 존재해 왔다는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게다가 말과 당나귀의 교배로 출생한 노새가 생식 능력이 없는 것이나, 초파리의 돌연변이 실험에서처럼, 아무리 다양한 돌연변이를 일으켜봐도 비정상적인 초파리만 나올 뿐 본래의 종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물이 탄생되지 않는다는 사실 등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물체의 변화는 환경에 적응하는 수준에서 그 종류 내에서만 이루어질 뿐, 다른 종으로의 변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 생물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경우를 수학 확률적으로 계산해 보면 제로로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이에 대해 과학자 카프란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라는 잡지에서 "생명체 형성의 확률이 1/10^130이라고 한다면 생명은 생명을 주는 자, 즉 창조주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또한 이미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이 오히려 자연발생 및 진화의 개념을 부정하고 있는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비과학적인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진화론을 고수하고 학생들과 어린이들에게 열심히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비교에 있어서 반드시 짚어보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인데, 이를 위해서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진화론을 고수하는 과학자들의 주장은 과학과 신앙이 별개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둘은 서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고 완전히 대치되는 별개의 영역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과학은, 흔히 생각하듯, 철저히 가치 중립적이고 객관적 영역이 아니며, 그 시대 다수 혹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체계(세계관)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즉,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증기기관에 대한 이론과 연구가, 우주시대에는 천체물리학과 로켓엔진에 대한 실험이, 세계대전이 발발한 때에는 원자폭탄에 대한 과학자들의 밤샘연구와 그 실적들이, 에너지가 부족한 평화시기에는 같은 원자폭탄의 원리가 원자로의 개발을 위한 연구에 사용되고 연구되는 것이다.  

좀 더 관념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자신 속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고 체계 위에서 자연계의 현상들을 해석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연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창조론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것이며, 진화론자로 대변되는 무신론자들은 증명 불가능한 가설과 이론들을 만들어 내어서라도 우연과 오랜 시간에 의해 그것들이 형성되었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과학적인 반증들만 수없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진화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그들이 무신론의 테두리안에 있는 한 다른 대안을 생각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가 단순한 과학적 사안이 아니라 신념이 작용하는 문제임을 이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과학 자체가 신앙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람이 행해온 다른 일들도 그렇듯이, 과학도 장구한 세월에 걸쳐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현시점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학이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미완의 상태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학자적 고백이 된다.  생명의 기원을 논하는 수많은 생물, 화학, 물리, 지구과학 관련 서적이 출판되고 무수히 개정되어 우리들의 도서관에 진열되어있다.  아마 전세계에 있는 이 책들을 다 모은다면 잠실운동장을 채울 분량이 될 것이다. 새로운 학설이나 이론이 발표되어 학자들간에 동의가 얻어지고 이것이 서적화 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전에 알고있던 이론에서 오류를 발견하여서 수정할 필요가 생겼거나, 또 다른 하나는 이전에는 미쳐 알지 못하던 사실을 발견하고 그 기전을 설명하거나 같은 현상을 사람이 조절할 수 있는 상태, 즉 실험적으로 반복 재현한 것들인 것이다.  과학자들이 생명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고 비판하고, 가설을 다듬어 온 과거 100여년간 이 작업은 무수히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계속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창세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 전에 씌어 지고 그 이후 개정된 바가 없는 이론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은 과거 100여년간 만들어지고 계속적으로 수정된 여러 이론 (또는 가설)과 3400년 전 씌어지고 한 차례도 수정되지 않은 한 이론 사이의 논쟁이다.

과학에서는 가설 (한사람 또는 몇몇 과학자들의 주장으로 대변되는)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며, 여러 차례 수정된 가설은 신뢰가 더욱 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의 현상을 놓고 대립된 여러 가설들이 대립된 상태에서 다시 개별적으로 수정되어 가는 과정을 반복한다면 그 가설 전체가 불신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며 진리는 수정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는 단일한 것이어야 한다.  창세기는 3400년간 변화하지 않았으며, 여러 나라의 말로 각 나라의 언어학자들이 원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가운데 번역되기는 하였지만 이 과정에서도 수정판이나 증보판이 발간되지 않은 하나의 생명기원이론을 담고 있다.  어느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의 제한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서라도 말이다.

수세기전 철학과 과학이 함께 태동하고 발전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대 학문의 최고 분야로 자타가 공인하던 물리학 (physics), 그 물리학의 막강한 권위 앞에서도 그보다 더 낳은, 가시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할 수 없는 어떠한 물리학, 물리학 위의 어떤 것이 있음을 과학철학자들은 인정하였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meta-physics (형이상학)라 부르기로 했다.  물리학 다음의 물리학, 물리학 위의 물리학인 것이다.  자연과학 위의 자연과학, 자연과학의 다음 세대에 오는 자연과학.  그것을 우리는 창조과학이라 부른다.  성경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자연과학에 대한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 받고 과학자들이 거듭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천지를 조성하신 창조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세상 속에서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창조주의 놀라운 지혜와 권능을 더욱 분명하게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104:24)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8

참고 :

고건
2004-07-26

타임(Time) 지가 강력히 비판한 진화론의 문제점들


     타임(Time) 지는 최근 세 차례 진화론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한 번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또 한 번은 진화에 대해, 그리고 한 번은 인류의 조상에 대해 각각 표지를 장식하는 특집기사를 보도했다. Time 지는 세계 누구나 그 권위를 인정하는 시사주간지이다. 이러한 Time 지가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 근거가 희박하고, 이제 폐기될 수밖에 없는 이론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이 세 기사를 중심으로 세계 유명 시사주간지에 조명된 진화론의 현주소를 소개하고자 한다.


(1) 1993. 10. 11 일자.

1993년 10월 11일자 Time 지의 표지기사는 '생명의 기원'이다. 1871년 다윈은 첫 생명체가 물 속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953년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밀러(Miller)라는 대학원생이 유리관 속에 물, 암모니아 가스, 메탄 가스 등을 넣고 전기 스파크를 일 주일 동안 가해보니까, 소량의 아미노산이 검출되었다. (아미노산들은 다시 결합하여 단백질을 이룬다.) 이때 사람들은 '생명의 기원' 논쟁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서둘러 떠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1963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중고등학교에서 기도와 예배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 케네디 대통령은 그 일가가 계속적인 비극에 휩싸이는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1994년 스페인에서 개최된 '생명의 기원' 주제 세계학술대회에서 밀러 실험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지구상 대기가 암모니아 가스 등으로 뒤덮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현대 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생명체 내의 모든 단백질은 DNA/RNA 지령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므로, 밀러가 만든 방식의 아미노산은 생명체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신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DNA/RNA 자신이 생성되려면 다시 단백질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 단백질을 만들라는 지령은 DNA/RNA가 내리는데, DNA/RNA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단백질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마치 닭과 달걀과 같은 수수께끼이다.)

셋째, 최근 지구상에서 확인되는 모든 화석 층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종들이 다 한꺼번에 출현된다. (이 기사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다룬다) 마지막으로 첫 생명체는 단순한 아미노산이어서는 안 된다. 이 개체는 처음부터 '완전한 번식능력'을 가지고 생겨나야만 한다. 번식능력을 갖추지 않고 생겨난 생물체는 후세로 이어지지 않은 생물체이다. 번식능력이 없이 생겨나 자신 한 세대만 살다 가버린 생물체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물체이고, 우리와 관계가 있는 모든 생물체는 첫 세대부터 번식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들뿐이다. 그러니 생명체는 생겨난 첫 대부터 자신과 동일한 종을 재생산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매우 정교한 생식기능, 유전자 등을 가지고 태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돌연변이도 적자생존도 시작될 수가 없다. 그런데 진화연습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이러한 복잡하고 정교한 기능을 갖출 수 있는가?

첫 생명이 물과 번개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가설이 위와 같이 무너지자, 진화론자들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개의 새로운 가설들을 제안하고 있다.

첫 번째 주장은 바다 속 깊은 곳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첫 생명이 탄생되었다는 주장이다. 지상에서는 밀러 실험과 같은 환경이 갖추어진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러한 환경이 있었을 법한 곳을 찾아 바다 속 화산을 지목한 것이다. 그곳은 화산 용암이 분출하면서 암모니아 가스 등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섭씨 120 도가 넘는 뜨거운 곳에서는 모든 생물이 다 죽는다는데 어떻게 거꾸로 생명체가 생겨날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 등에 대해 잘 설명을 못하므로, 아직 과학적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바다 속 화산근처에 생명체가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거꾸로 주변에서 이민해간 것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두 번째 주장은 유성 등이 대기 중으로 떨어지며 타들어 가는 순간 암모니아 가스 등이 발생되고 여기서 생명체가 탄생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연소 기간은 수 분밖에 안되어 너무나 짧고, 태어나야 할 생명체는 너무 복잡하여, 이 역시 설득력이 모자란다.

세 번째 주장은 외계의 생명체가 우주 먼지 등에 묻어 지구로 왔다는 주장이다. 외계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그곳에 안 가본 사람(?)은 반박해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생명체가 우주 먼지를 타고 지구로 이민해올 수 있는지 여부도 큰 의문이다. 지구까지 오려면 엄청나게 긴 세월 동안 엄청나게 비친화적인 환경 (온도, 유해 우주선 등)을 견뎌야 하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문 투성이다. 물론 이것도 증명은 안된 것이다. 최근에는 화성 생물 탐사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쓰고 있고, 인터넷을 통해 외계로부터 전파를 받는다고 야단들이다. 화성의 생명체를 탐사하려고 엄청난 돈을 쓴다는 것은 곧 바꾸어 말하면 ”지구에서는 생명이 스스로 우연히 생길 수 없습니다”를 시인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Time 지는 오늘 현재 '생명의 기원' 에 대해서는 다만 서너 개의 설익은 주장만이 난립해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2) 1994. 3. 14 일자.

인류의 조상에 대해서는 Time 지가 1994년 3월 14일에 표지 기사로 실었다. 여기서는 그 기사 중 가장 중심  부분인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 네안데르탈인 화석을 처음 조사한 과학자는 불란서 사람 Boule이었다. Time 지에 의하면 그는 그 시대를 풍미하던 다윈의 진화론에 매우 부담을 느낀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그는 네안데르탈인을 인류와 원숭이 사이의 연결고리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Boule의 보고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은 (그 모양이 마치 현대인과 원숭이의 중간처럼 보여서)   

      ”발을 원숭이처럼 곧바로 펴지를 못했었다.     
      원숭이처럼 발로 물건을 쥘 수 있었다.  
      원숭이처럼 척추를 곧게 펴지 못했었다. 
      원숭이처럼 턱이 앞으로 나왔다”

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1957년 미, 영 과학자들이 Boule이 조사했던 바로 그 화석을 재조사해 보니,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 재조사에 의하면 네안데르탈인은

      발을 곧바로 폈었다. (Boule이 조사한 화석은 관절염 때문에 굽었었다) 
      발로 물건을 쥘 수 없었다. 
      척추는 곧바로 뻗었었다.

더욱 더 수상한 것은 네안데르탈인의 두뇌는 우리의 두뇌보다 더 컸는데, 이 중요한 사실을 Boule 은 보고서에서 일부러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1957년 이후로도 계속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연구가 되면 될수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들은 완전한 다른 종임이 입증되고 있을 뿐이다. 1997년 12월 17일 CNN은 영국 과학자들이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조사해 본 결과, 네안데르탈인은 인류와 무관한 종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 교과서는 오늘날까지도 네안데르탈인을 인류의 조상으로 고집하고 있다.

네안데르탈인뿐이 아니라, 1996년 6월 3일자 Time 지는 필트다운인(Piltdown Man)에 대해서도 기사를 내보내었다. Piltdown Man은 1912년 영국에서 발견되어, 한때 원숭이와 현대인 사이의 연결고리로 각광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그것이 가짜인 것으로 밝혀졌었다. 누군가가 사람의 두개골에 원숭이의 턱을 일부러 끼워 넣고, 그것을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 칠을 하고, 줄칼로 밀은 사실이 정밀분석 결과 밝혀진 것이다. 1996년 Time 지는 그것이 누구 짓인지를 밝혀낸 것이다. 그는 바로 영국 박물관의 동물학부 책임자로 일하던 Hinton 라는 사람이었다. 그 증거로는 Hinton 씨가 생전에 소유하고 있던 여러 뼈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봄으로서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Time 지는 인류의 조상에 대한 특집을 마감하며, 이 분야를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는 주장은 사실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한낱 상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결론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생업에도 큰 지장을 줄 수 있다. 과학이 아닌 상상따위로 알려지면 더 이상 연구비, 교수 승진 등을 기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Time 지 독자란에 아무런 항의도 없는 것을 보면, 이러한 모욕적인 기사에 대해 별달리 항의할 근거도 없는 것 같다.


(3) 1995. 12. 4 일자

1995년 12월 4일 Time 지는 화석과 진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지구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지층 중에 캄브리아기(Cambrian)는 매우 유명하다. 캄브리아기는 수 km의 화석층을 이루는데, 거기에서는 척추동물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생물 종들이 한꺼번에 다 발견된다. 캄브리아기 지층은 영국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다윈 시대에도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윈에게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캄브리아기 층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다 한꺼번에 어우러져 발견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캄브리아기 밑 어딘가 진화를 증명하는 지층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다윈 이후 130년간 지구의 지층을 조사해왔고, 이제는 그 조사가 다 끝났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그린랜드, 중국, 시베리아, 그리고 최근 나미비아까지 모든 지층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전 세계 지층들은 동일한 시간대에, 동일하게 발전했음을 보여주고 있고, 또 캄브리아기 위로는 거의 모든 종들이 한꺼번에 갑자기 출현하지만, 캄브리아기 밑으로는 생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캄브리아기 밑으로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호주 등이 대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멀어지며, 육지와 바다와 히말라야 산들이 형성되던 흔적과, 엄청난 화산,지진 등의 흔적과, 도저히 생명이 살수 없는 환경이였음을 알려줄 뿐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만일 캄브리아기의 생명체들이 진화해서 생긴 것이라면 그 진화에 소요된 기간은 아무리 길어야 500만 년~1000만 년 정도에 폭발적으로 빠르게 진화했어야만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사실이다.

Time 지는 이러한 현상을 "생물학적 빅뱅(Biology Big Bang)" 또는 "초음속 진화"라고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이 기사에서 취재대상이 된 하버드, MIT 교수들은 이러한 발견이 동료 생물교수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물학자들은 모든 종이 500만 년에 다 진화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버드, MIT 교수들은 ”우리가 과거 추정하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종들이 생겨났습니다. 엄청나게 이상한 일입니다 ... 이 결과는 생물학자들이 불안해할 정도입니다.”  Time 지는 이 기사 끝 부분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이제 화석에 나타난 현상들을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다. 다윈의 가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진화론이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맺고 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창조론은 시인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Time 지는 생명의 기원 문제에 대한 다원과 밀러의 가설은 이제 완전히 폐기되었고, 새 이론은 검증된 것이 없으며, 현재 화성 등 외계에서 생명의 기원을 찾는 중이라는 말로 맺고 있다. 이는 곧 지구상에서는 생명체가 스스로 우연히 생겨날 수 없음을 시인하는 말이다. Time 지는 인류의 조상을 연구하는 분야는 과학이 아니라, 상상에 불과한 분야라고 결론 짖고 있다. 마지막으로 화석은 이제 거의 탐사가 끝난 상태이고, 그 결과는 다윈 진화론의 폐기라고 보도하고 있다. 즉 모든 생물 종들은 한꺼번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생물 종들이 진화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면, 그 진화 시기는 아무리 길어도 500-1000만 년이라고 적고 있었다. 그러므로 Time 지는 공공연히 다윈 진화론이 죽었음을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 차례의 도전적인 기사에 대해  진화론자들은 단 한번의 반론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년간 과학은  실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진화론은 단 한치의 진전도 없었다. 너무나 큰 대조이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Time 지의 보도 보다도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국내 언론들이 오늘도 UFO 같은 글들은 대문짝하게 다루면서도, 위에서 소개한 기사는 한 번도 제대로 다루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 모든 과학 섹션 기사들은 왜 이러한 중요한 보도를 외면하는가? 밀러가 실험 결과를 발표할 때,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도 난리법석을 떨며, 하나님을 서둘러 떠나고, 헌법까지 고치고 했는데, 막상 그 진화론의  정정기사가 나가니, 이제  아무도 서둘러 이를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서둘러 전하려 하는 사람도 없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과학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을 성급히 떠난 사람들이 왜 이제는 과학이라는 이유로 하나님 앞으로 성급히 되돌아오지 않는가? 왜 아무도 이 기사들을 보도조차 않는가? 그것은 아마도 과학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죄의 본성 문제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Time 지는 매주 표지 기사마다 그 편집후기를 Time 지 맨 앞 쪽에 게재한다. 1994 3월 14일 Time 지에는 (인류의 조상을 표지 기사로 내보내었던 때이다.) 수석부사장이 표지 기사 편집 후기를 쓰고 있었다. 거기서 수석부사장은 그 기사를 취재했던 기자의 소감을 그대로 적고 있다. 

”인류의 조상을  취재했던 기자는 기자가 되기 전 테네시 고등학교에서 과학 선생님을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모든 진화론 내용이 엉터리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모든 학교도 마찬가지로 엉터리를 가르쳐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최근  몇 차례의 Time 지의 진화론 특집기사로 밝혀졌습니다. 이제  진화론에 대해 잘못 알고 계시던 분들은 그러한 생각을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진화론의 허구가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1998년 4월 27일 Time 지는 미국 중고등학교에서의 종교활동 상황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앞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언급하며 설명한 것과 같이, 1963년 미국은 학교에서 종교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그후 공립학교에서는 일체의 예배가 금지되어 왔다. 요즈음 미국 법정은 이 문제를 다시 다루기 시작하였고, 판결이 아직 나지도 않았는데, 공립학교 중 상당수가 이미 학교에서 기도와 예배를 부활 시켰다. 최근에는 십계명까지 다시 교실에 걸기 시작하였다. 98년 당시 Time 지가 통계 낸 바에 의하면, 미국 공립학교의 4분의 1이 이미 위와 같은 신앙활동을 부활 시켰다.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공립학교가 헌법에서 금지한 예배를 교정에서 부활 시켰다는 것은 -- 그것도 준법정신이 유달리 강한 미국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최근 캔자스 주에서는 학교에서 진화론을 ”검증이 안된 가설로만 가르칠 것”, ”진화론을 사실로 입증된 것처럼 가르쳐서는 안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또 ”진화론은 일체 시험에 못 낸다”고 못박았고, 다른 주들에서도 비슷한 조치를 검토 중이다.

많은 사람들은 최근 미국 고등학교에서 계속적으로 총기 사고가 일어나는 근본 원인을 미국 교육현장에서 기독교 교육을 없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화론의 가장 큰 문제는 "진화론은 우리 사회와 역사를 죄악으로 몰아간다”는 데에 있다. 당연한 결과이다. 필자는 최근 서점에서 추천하는 역사책을 읽은 적이 있다. 서점 점원은 청아출판사의 이야기세계사 라는 책을 추천해주었는데, 이 책은 서울대 역사학과 교수들을 위시하여 전 세계 유명한 역사학자들이 저술하고 감수한 역사서로서, 읽기 쉽도록 풀어서 쓴 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에서도 ”진화론은 우리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죄를 짖게 한 장본인”이라는 결론을 큰 지면을 할애해서 적고 있다.

”서구인들은 다윈의 설을 빌려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주의, 군국주의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시행할 수 있었다. 서구인들은 진화론의 적자생존 이론을 빌미로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착취하고 말살시키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계율이라고 받아들였다. 패자는 당연히 멸절되야 한다는 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받아들였다. 진화론이 나온 후 갑자기 정복민족을 자처하는 민족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진화론이 나온 후, 갑자기 민족마다 민족주의, 민족우월성 고취운동을 경쟁적으로 벌이게 되었다. 영국은 세익스피어를, 독일은 괴테를 민족 우수성을 입증하는 도구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 상부상조 정신은 말살되었고, 휴머니즘은 찾아볼 수 없는 덕성이 되었다. 사회적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변용하여 영토확장, 군비증대, 민족간 불신, 국가간 적대감을 악화시키는 일, 유태인 말살 등의 인종청소에 사용하며, 세계대전에까지 이르는 길을 예비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모든 죄악의 주범으로 이 역사책은 진화론을 지목하고 있다. (336 쪽 이야기 세계사)

나는 최근 web에서 허블망원경으로 찍은 밤하늘 사진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체험하였다. 밤 하늘에서 우리 눈으로는 1000 억개 이상의 별들을 볼 수 있는데 보기에는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밖에 안 보이는 그 별들이 막상 허블망원경으로 찍어보니 그 하나 하나가 다시 1000억개의 별들로 구성된 은하계로 나타나고 있다! 'Deep Space' 라는 이름이 붙은 이 허블망원경 사진은 (www.seds.org/hst/hst.html에 들어가면 누구나 그 jpeg 사진을  볼 수 있다.) 실로 우리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 가를 압도적으로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나는 또 아주 가느다란 모기 다리를 보며 은혜를 받는다. 그 실보다 가는 모기 다리 속에 신경이 있고, 혈관이 있고, 양분과 산소를 결합하여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연소기관이 있고, 심줄과 같은 운동 기관이 있고, 연소후 나오는 노폐물을 몸 밖으로 걸러내는 기관이 있을테니 실로 신묘막측하다. 그 가는 다리로 모기는 (털이 수북하고 때로는 가파르기도 한) 우리 몸 위를 걸어 다니며 한번 넘어지는 일도 없이 잘도 다닌다. 어디 그뿐이랴, 천장에 거꾸로 매달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절묘한 다리를 만들되 (그것을 손으로 조립하듯 만드는 것도 어려운데) 그것을 일일이 DNA/RNA 로 설계하고 제작하셨으니, 참으로 모기 다리는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경이로운 작품일 수밖에 없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나, 눈을 내려 땅을 보나,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만한 증거로 가득찬 곳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19-20) 아멘.

 

*한국창조과학회 자료실/진화론의 주장에 있는 자료들을 참조하세요

http://www.kacr.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J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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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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