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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강성열
2005-04-29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2부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본 논문은 3부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3. 생태계 시간의 인식과 그 확장

(1) 태양 중심의 생태계 시간과 일상 생활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시간은 철저하게 자연계의 운행을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시간과 자연계(또는 생태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참으로 시간은 피조 세계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 속에도 있고 자연 안에도 있다. 생체 리듬에 맞추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의 생명 작용이나, 태어나서 자라고 잠을 자고 음식물을 취하고 짝짓고 번식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살아가는 동물의 생존 리듬은 한결같이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져 있다. 이른바 생체 시간(body-time)이라는 것이 우주 만물 안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21).   시간이 이처럼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시간이 무엇이라고 규정하지는 못하면서도, 인간의 삶이나 자연계의 운행이 본질적으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나 자연계의 운행은 결코 시간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시간의 이러한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시간을 의식하던 때부터 그들은 자연 속에 감추인 시간을 찾아내고자 애썼다. 시간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할 때에만 자기들의 삶이 효율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냥이나 채집 또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계절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을 잘 살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해와 달과 별 등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체의 움직임 안에 깃들인 시간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나무와 꽃과 각종 동물들의 몸에 새겨진 생태계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고자 했다. 적어도 옛날에는 그랬다. 인간은 온갖 시간으로 충만한 생태 환경과 일체가 되었으며, 자연계 안에 깃들인 시간을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였다. 곧 천체의 운행과 동식물의 생명 활동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과 그 리듬을 같이하고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인식은 자연 안에 새겨져 있는 시간의 흐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은 해와 달 및 별들의 운행, 추위와 더위, 썰물과 밀물, 동식물의 생명 운동 등을 통하여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그에 기초하여 삶을 영위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창세기 1장에 묘사된 해와 달과 별 등의 움직임이요, 하루 주기의 시간 단위이다. 그래서인지 하루 주기를 기본으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간 인식은 자주 천체의 운행과 관련하여 서술된다. 자연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생명체가 일출과 일몰에 맞추어 깨어나서 활동하다가 날이 저물면 자는 존재임을 고려한다면, 하루 주기의 시간 서술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사실상 천체의 운행과 삶의 리듬을 함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천체의 운행 중에서도 가장 자주 언급되는 해의 경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의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한창 더운 대낮에”(in the heat of the day), 즉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 하나님을 만난다(창 18:1). 그리고 사울이 소집한 이스라엘 군대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햇볕이 뜨겁게 내리쬘 때쯤에(by the time the sun is hot) 그들을 암몬 족속의 압제로부터 건져낼 것임을 통보하며(삼상 11:9),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한창 더운 대낮에”(about the heat of the day) 낮잠을 자다가 자기 밑에 있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에게 죽임을 당한다(삼하 4:5). 그런가 하면 느헤미야는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until the sun is hot)”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라고 명함으로써 성문을 여는 시점을 태양의 운행과 관련하여 규정한다(느 7:3).

시편 19:5-6은 하루의 변화를 태양의 뜨고 짐과 관련시켜 시적으로 표현하며(“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제 길을 달리는 용사처럼 즐거워한다.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니, 그 뜨거움을 피할 자 없다”), 104:20-23은 해가 지고 돋는 시점에 따라 짐승과 인간의 삶이 교체되어 나타남을 다음과 같이 운치 있게 노래하고 있다:

주님께서 어둠을 드리우시니, 밤이 됩니다.
숲 속의 모든 짐승은 이 때부터 움직입니다.
젊은 사자들은....해가 뜨면 물러가서 굴에 눕고,
사람들은 일을 하러 나와서, 해가 저물도록 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처럼 태양의 운행과 관련하여 생태계 시간의 흐름을 인식했다는 것은 아하스와 히스기야 치세 때에 해시계(日影表)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왕하 20:9-11; 사 38:8). 그리고 하루를 새벽과 아침, 낮, 저녁, 밤 등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천체의 운행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해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때가 새벽이라면(출 14:24, 27; 삿 19:25 등)22),  해가 지평선으로부터 완전히 떠올랐을 때가 아침이고(삿 19:25-26), 낮은 해가 높이 떠있을 때이며(삼하 4:5), 저녁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의 어스름한 때(창 15:12; 신 16:6)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밤은 해가 완전히 지고 달과 별이 떠있는 때를 가리킨다(창 15:5, 17; 느 4:21). 저녁 때는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때”로 묘사되기도 한다(창 24:11).

21) 이에 대해서는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151-160을 참조. 흔하지는 않지만 구약에서는 야곱이 하란 지역의 목자들에게 하는 말, 곧 “아직 해가 한창인데, 아직은 양 떼가 모일 때가 아닌 것 같은데...”(창 29:7)라는 표현이나,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예레미야의 비판 메시지, 곧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렘 8:7)라는 표현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신 행위를 설명하실 때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 26:34; 눅 22:34; 요 13:38; 참조, 막 13:35)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22) 새벽은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때”로 묘사되기도 한다(룻 3:14). 그런가 하면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새벽에 관하여 한 다음의 말은 고통스러운 시간의 정지를 간절히 원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밤에는 새벽 별들도 빛을 잃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도 밝지를 않고, 동트는 것도 볼 수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욥 3:9).

 

(2) 달 중심의 생태계 시간과 고대 이스라엘의 달력 체계

고대 이스라엘은 위에서 보았듯이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생태계 시간을 중심으로 하루 주기의 삶을 영위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안정된 삶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자연계의 다양한 리듬들과 계절의 변화 및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 등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생산 활동을 비롯한 모든 삶의 차원들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이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춘 한층 확대된 생태계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달의 운행을 기초로 하여 만든 달력이다. 그것은 일종의 생태 달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어디에서도 고대 이스라엘의 달력 전체를 완성된 형태로 보여 주지 않는다. 이는 이스라엘의 달력 체계가 주변 나라들과의 역학 관계 속에서 오랜 변화와 실험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구약성서 안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달력 자료들을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자료들과 비교하면서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족장들이 어떠한 달력 체계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족장 시대의 인물들은 봄(spring)을 한 해의 시작으로 계산하는 바벨론 지역의 달력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나안 정착 이후부터는 어느 정도 상황이 바뀌었을 것이다. 가나안 지역의 농경 생활 리듬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가을(fall)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는 가나안 지역의 농사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1908년에 마칼리스터(Macalister)가 발견한 게제르(Gezer=수 10:33; 12:12; 삿 1:29 등의 ‘게셀’) 달력이다. 이 달력은 1월부터 12월까지를 2개월 단위로 또는 1개월 단위로 구분하고서 해당 기간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서술하되, 가을철을 한 해의 시작으로 설정하고 있다23).

분열왕국 시대 초기에 속한 이 달력은 가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봄으로써 당시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사력을 채용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아울러 구약 본문들 중에 가나안 농사력에 속한 주요 달들의 이름이 나타난다는 것도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빕(Abib)월과 시브(Ziv)월, 에다님(Etanim)월 및 불(Bul)월 등의 네 이름들이 그렇다(출 12:2; 신 16:1; 왕상 6:1, 37-38; 8:2). 주로 유월절 및 솔로몬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이상의 네 이름들은 초기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농사력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아빕월이 양력의 3~4월에 해당하는 달로서 한 해의 첫 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출 12:2)은,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봄철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족장 시대의 달력 체계가 가을철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가나안식 달력 체계와 더불어 사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가나안 달력의 네 이름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본문들이 포로기 이후에 편집된 것들로서, 바벨론 달력 체계가 상용화된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24).

어느 경우에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부터 완결된 달력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과, 가나안 정착 이후로부터 왕정 말기에 이르기까지는 대체적으로 가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가나안 달력 체계가 우세하였으리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달력 체계는 포로기 이후에 가서는 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바벨론의 달력 체계로 크게 바뀐다. 이 점은 포로기 이후 시대에 기록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스가랴 등의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25).

불완전하기는 해도 이러한 달력 체계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달력 체계가 30일-더 정확하게는 29.53059일-을 주기로 하여 규칙적으로 차고 기우는 달의 운행에 기초하고 있으며, 계절의 순환과 맞물려 있는 자연 생태계의 변화를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달력 체계가 자연 안에 새겨진 시간, 곧 생태계 시간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더욱이 각 달에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은 인간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각종 농작물의 재배와 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바, 이는 이스라엘의 달력이 당시 사람들의 일상 생활-특히 농경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자연계의 생명 활동을 달의 변화에 맞추어 정리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생태계 시간은 이렇게 해서 일찍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중요한 생존 조건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3) R. A. S. Macalister, The Excavation of Gezer (1912), II, 24-28; W. F. Albright, “The Gezer Calendar,” BASOR 82 (1943년 12월), 18-24; ANET, 320.
24) S. J. De Vries, “Calendar,” IDB 1, 484.
25) De Vries, “Calendar,” 486.

 

(3) 생태계 시간과 제의 활동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세계의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1년 열두 달을 기준으로 하는 달력 체계를 운영하면서, 한 달 내지는 1년을 주기로 하는 각종 축제들을 지켰다. 이 축제들이 반영하는 시간은 종교적인 시간(religious time) 또는 제의 시간(cult time) 26) 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 달 주기의 제의 시간이 월삭(매월 초하루)을 가리킨다면, 1년 주기의 제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삼대 축제(절기)들을 가리킨다. 새해맞이 축제는 후자에 속하지만, 월삭과 비슷한 성격의 축제라 할 수 있다.

먼저 월삭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월삭은 달(moon)을 기준으로 하는 축제요, 자연의 시간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축제이다. 매월 초하루는 달이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기에, 달의 운행에 새겨진 생태계 시간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달의 새로운 시작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월삭을 지키면서 자기들의 삶이 늘 새로워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 날에 다른 축제일들의 경우와 똑같이 축제의 성격을 나타내는 나팔을 분 것을 보면(민 10:10; 시 81:3) 월삭이 축제의 날인 것은 분명하다27).  여느 축제일들처럼 명시적인 축제 규정이 없지만, 민수기 28:11-15는 매월 초하루에 드려야 할 제물에 대해서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참조, 사 1:13; 겔 46:1-7). 또한 예언서를 비롯한 여러 구약 본문들이 안식일과 더불어 월삭에 대해 언급하는 바, 이 본문들을 종합해 보면, 월삭은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을 중단하고서(암 8:5)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날이요(호 2:11; 참조, 삼상 20:5, 18, 24), 금식이나 애곡함이 없는 날이기도 했다(유딧 8:6). 온 인류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을 대망하는 종말론적인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도 월삭이었다(사 66:22-23). 특히 일곱 번째 월삭은 매우 중요한 달로 간주되었다(레 23:24). 에스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토라를 낭독해 들린 날은 바로 7월 초하루였다(느 8:2).

월삭이 이렇듯이 매월 초하루에 갖는 축제로서 한 달을 주기로 하여 되풀이되는 절기라고 한다면, 새해맞이는 1년을 주기로 하여 되풀이되는 신년 초하루 축제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을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는 가나안의 달력 체계를 사용하던 때에는 가을의 시작인 7월 1일이 바로 새해의 시작이요, 새해맞이 축제(신년 축제, New Year's Festival)가 열리는 날이었다(민 29:1-6). 이스라엘에는 이날 역시 노동을 중단하고 거룩한 모임을 열었으며, 같은 달 10일의 속죄일과 15일부터 시작되는 초막절을 예비하였다(레 23:24-25).

1년 주기의 축제들에는 이 외에도 이른바 순례 축제들(pilgrim feasts)로 알려진 유월절(무교절), 칠칠절, 초막절 등의 삼대 절기가 있다. 슈미트(W. H. Schmidt)는 이들 순례 축제들이 농경 사회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추수기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순환과정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본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정착 생활에 들어가면서 가나안 땅의 주변 원주민들로부터 그 땅의 성소들에서 행해지던 절기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28).  그 중 첫 번째인 유월절은 봄철이 시작되는 아빕월(바벨론 달력으로는 니산월) 14일 밤에 지키는 것으로(출 13:3), 본래 유목민들이 초원의 겨울 목초지에서 경작지의 여름 목초지로 이동하기 전에, 이동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막기 위해 행하는 피뿌림의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희생제물의 피가 사람과 짐승을 광야에 있는 악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정기적으로 피뿌림의 예식을 거행했었다29). 유월절의 이러한 유래는 그것이 유목에 필요한 생태 환경의 변화 시기에 맞추어 지켜지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유월절은 초목의 생장과 관련된 생태 시간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종교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빕월 다음날인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 계속해서 지키는 무교절은 본래 가나안 지방에서 곡물 수확을 시작하기에 앞서 곡물의 첫 이삭(보리)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성공적인 곡물수확을 기원하는 농경 정착 사회의 종교 의식이었다(레 23:9-11)30).  이러한 사실은 문화권이 다르긴 해도 무교절 역시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시간, 곧 생태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켜지던 절기였음을 보여 준다. 비록 이스라엘이 이를 출애굽과 관련된 초태생의 구속과 관련지어 이해하였지만 말이다(출 13:1-16). 삼대 축제의 두 번째인 칠칠절도 생태계 시간에 충실한 축제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교절이 수확(보리)의 시작과 더불어 지키는 축제라고 한다면, 맥추절(출 23:16)로도 불리는 칠칠절은 처음 익은 곡식(밀)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레 23:21; 민 28:26) 수확(밀)의 종결을 기념하는 축제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칠칠절은 무교절에서 시작된 곡물 수확을 종결짓고서 성공적인 수확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농경 축제였던 것이다. 농산물의 생장과 수확이라는 생태계 시간의 흐름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가 하면 수장절로 알려진(출 23:16; 34:22) 초막절은, 나중에 광야 유랑 중의 초막 생활을 기념하는 축제로(레 23:39-43; 느 8:13-18), 그리고 시내산 계약의 갱신 의식으로 발전하여(신 31:9-13) 계약 갱신(covenant renewal) 축제의 성격을 갖기에 이르렀지만31), 본래는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 곧 과일과 올리브 열매 및 포도 등을 저장하는 것을 기념하는(신 16:13; 레 23:39ff.) 가나안의 농경 축제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초막절의 이러한 유래 역시 그 축제가 각종 농산물을 저장해야 하는 일정 시기, 곧 생태계 시간에 맞춘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상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주요 축제들은 전반적으로 가나안 정착 이후 가나안 문화와 종교와의 접촉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이 팔레스타인의 농경사회를 반영하는 농경축제요, 자연계의 순환과 생태계의 시간을 따르는 민간축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그것들을 야웨(Yahweh) 신앙의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철저하게 역사화, 신학화하고 있기는 해도, 그 축제들이 지켜지는 시기만큼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자연의 시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이로써 그 축제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 질서 내지는 생태학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것들로 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갈 수 있었다.


26) Snaith, “Time in the Old Testament,” 177.
27) 월삭은 예언자의 자문을 구하기에 적합한 날로 여겨진 듯하며(왕하 4:23), 에스겔은 종종 초하루에 환상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겔 26:1; 29:17; 31:1; 32:11). 학개 역시 다리오왕 2년 6월 초하루에 예언의 말씀을 받았으며(학 1:1), 바벨론 지역에서는 매월 초하루에 예언하는 자들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였다(사 47:13). 그런가 하면 모세는 정월 초하루에 성막(tabernacle)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출 40:2, 17).
28) W. H. Schmidt, 『역사로 본 구약 신앙』, 강성열 옮김 (서울: 나눔사, 1989), 179-180.
29) J. C. Rylaarsdam, “Passover and Feast of Unleavened Bread,” IDB 3, 663.
30) Schmidt, 『역사로 본 구약 신앙』, 182.
31) J. C. Rylaarsdam, “Booths, Feast of,” IDB, 1, 457.


출처 - 2004. 11. 27,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99

참고 :

강성열
2005-04-29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3부


본 논문은 3부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4. 시간의 끝(종말)과 생태 신앙

(1) 시간의 끝(종말)에 관한 보편적인 믿음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끝나면서 우주와 세계 역시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의 삶과 생각을 지배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떤 계기로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전 세계를 덮쳤을지도 모르는 홍수나 화산 폭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산불 등의 자연 재앙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던 인류는 이렇게 세상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 신의 이름을 붙이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도모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구상에 존재해 왔던 무수한 종교들은 시간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종말 의식을 갖게 되고 또 종교에 의지하게 된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인간의 죽음에 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시간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만큼 사실적이고 엄정한 종말은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행복, 기쁨 등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물질, 가족, 재산 등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빼앗아가 버린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자신의 삶과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되고 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절대적인 상실로부터 도피하지 못한다. 죽음은 정말 두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 불안이라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죽음과 종말의 시한이 못 박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사람들을 찾아오고야 말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었던 이러한 종말 의식은 과학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라고 예외일 수 없다. 오늘날의 사람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과 종말을 자각하면서 산다. 현대인들에게도 시간의 종말인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 뿐이 아니다. 시간의 종말에 대한 인식 및 그로 인한 두려움은 역설적이게도 과학적인 사실들로부터 주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종말에 대하여 갖는 두려움은 두 가지 요인들로부터 생겨난다. 그 하나는 외부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것이다. 화산 폭발, 대홍수, 지진, 태풍 등의 자연 재해, 그리고 행성과 지구의 충돌 및 이로 인한 지구의 대격변 등이 외부적 요인에 해당한다면,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및 사회적 병리의 급속한 확산 등은 내부적 요인에 해당한다. 이것은 시간의 종말에 대한 인식이 종교와 같은 어떤 특정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을 포함한 총체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참으로 시간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최첨단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똑같이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시간의 종말이란 주제가 직선적 시간 개념에 익숙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실제로 구약성서에서 발견되는 직선적인 시간 표상은 참으로 시간과 역사가 일회적인 것이요, 유한한 것임을 함축하며, 정해진 끝을 향해 직선적인 진행을 계속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직선적 진행의 한복판에 시간의 창조자이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시간과 역사의 모든 과정, 곧 그 시작과 중간 과정 및 끝 일체를 주관하시고 결정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32).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시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심과는 달리 끝을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여 시작된 시간과 역사는 그가 정하신 최후의 심판을 향해 나아가되, 결코 되돌아오거나 반복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진행할 뿐이다. 하루나 1주일, 한 달, 1년 등의 기본적인 시간 단위야 늘 되풀이되겠지만, 그 안에서 운행되는 인간의 삶과 역사까지 항상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한 번 흘러간 시간과 같을 수가 없다. 시간의 틀은 순환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되는 인간의 삶과 역사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죽음이나 종말을 향해 직선 형태로 계속 전진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에서 시간의 끝에 대한 생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단 종말에 대한 인식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찾아오는 죽음에 직면하여 생긴 것이요,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각종 자연 재해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전자는 맨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그에 대한 죽음의 형벌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며(창 2:17; 3:22-24), 태곳적 사람들의 수명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창세기의 족보들(창 5:1-31; 11:10-32)에서 금방 확인된다.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노래하는 시편의 몇몇 노래들(시 39:4-5; 90:9-10)도 개개인에게 닥치는 시간의 끝을 매우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간의 시작에 관한 고대 이스라엘의 창조신앙 자체가 시간의 끝-완전한 끝은 아니지만-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홍수 이야기를 시작하는 창세기 6:13이나 홍수 이야기를 끝맺음하는 창세기 8:22 본문이 그렇다. 6:13은 모든 생명체의 “끝날”이 이르렀음을 강조하며, 8:22는 홍수 이후에 이루어질 새로운 세계의 안정적인 질서를 창조 질서의 시각에서 서술하는 바, 서두에 있는 “땅이 있는 한”이라는 표현은 땅이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시작된 것이기에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을 것이다33). 하지만 이 본문은 시간과 역사의 끝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시간의 끝에 대한 인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겠지만, 그것이 끝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한 것은 비교적 후대에 이르러서이다.

단순히 개개인의 죽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종말의 공동체적이고(communal) 우주적인(cosmic) 차원을 선명하게 강조하는 이른바 종말 신앙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주전 8세기의 문서 예언자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중론이다34). 종말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과 종말 신앙의 기본 형태가 그들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예언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종말 신앙은 예언의 시대가 끝나고 묵시의 시대가 오면서 제대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옳을 것이다. 예언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종말 신앙이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일정 시간의 끝을 의미하는 반면에, 묵시가들의 종말 신앙은 문자 그대로 시간과 역사 모두가 끝나는 한 시점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32) 이 점은 특히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사건(수 10:12-14)과 해 그림자를 열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한 사건(왕하 20:8-11; 사 38:7-8)에 매우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던지신 다음의 질문 역시 하나님 아닌 다른 누구도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네가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에게 명령하여, 새벽이 제자리를 지키게 한 일이 있느냐?”(욥 38:12).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고 보는 시편 74:17 의 고백이나,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또 추수 기한을 정하신다는 설명(신 11:14; 호 6:3; 렘 5:24; 욜 2:23) 역시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다.


33) Westermann, Genesis 1-11, 457; Geerhardus Vos, The Eschatology of the Old Testament (Phillipsburg: P & R Publishing Company, 2001), 81-83.
34) 박준서, “구약성서를 통해 본 종말론의 이해,” 『구약 세계의 이해』 (서울: 한들출판사, 2001), 168.

 

(2) 문서 예언자들의 종말 예언과 생태 신앙

주전 8세기에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문서 예언자들은, 왕이나 특정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예언 메시지를 선포했던 초기 예언자들과는 달리,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메시지, 곧 이스라엘의 완전한 파국(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을 처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전 예언자들이 개개인의 범행을 들추어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재난으로부터 보존하려고 한 반면에,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무조건적인 파멸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초기 예언자들의 예언 메시지가 단편적이고 부분적이었던 반면에, 주전 8세기 이후에 활동한 문서 예언자들은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예언 메시지를 선포하되, 특히 국가 전체의 완전한 파멸, 곧 예루살렘의 함락, 성전 파괴, 왕정 붕괴 등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사실상 시내산 계약의 저주 규정에 따른 것으로서, 기존의 국가 형태를 완전히 끝장낸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35).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은 생태학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암 8:8; 9:5-6; 호 4:3; 사 13:9, 13; 24:18-20; 나 1:4-5; 습 1:2-3; 렘 9:10-12; 겔 38:19-22; 학 2:6, 21 등). 물론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범죄 행위가 주변 환경인 생태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기본적인 사실36)에 기초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시간 개념과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심판 메시지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최초의 문서 예언자인 아모스의 심판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심판 선고에 의하면, 야웨는 근본적으로 “묘성(Pleiades)과 삼성(Orion)을 만드신 분, 어둠을 여명으로 바꾸시며, 낮을 캄캄한 밤으로 바꾸시”는 분(암 5:8)이지만, “대낮에 해가 지게 하고, 한낮에 땅을 캄캄하게 하는” 분이기도 하다(암 8:9). 이것은 야웨가 겨울과 여름의 계절 변화를 주도하는 분이요, 낮과 밤의 시간 변화를 주관하는 분이시면서도, 때로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기 위하여 천체를 중심으로 하는 생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자신이 창조한 시간 질서를 뒤집을 수 있는 분임을 암시한다(참조, 암 5:18; 렘 15:9; 습 1:15; 욜 2:2 등)37).

만일에 아모스가 예언한 바와 같은 생태 질서와 시간 질서의 혼란이 생겨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시간 질서를 담당하는 천체의 제 기능 상실은 아마도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정상적인 생명 활동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천체의 기능 마비로 인하여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이 뒤집어지는 상황에서는 생태계의 대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창조하신 시간 질서가 생태계의 유지와 존속에 대하여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모스의 이러한 심판 메시지는 신명기 28:29(“너희는 마치 눈이 먼 사람이 어둠 속에서 더듬는 것처럼 대낮에도 더듬을 것이다”; 참조, 사 59:9-10)에 있는 저주 규정의 성취에 해당하는 바, 비슷한 시기에 남왕국에서 활동한 이사야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이사야는 야웨의 날에 있을 심판의 한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하늘의 별들과 그 성좌들이 빛을 내지 못하며,
해가 떠도 어둡고, 달 또한 그 빛을 비치지 못할 것이다. (사 13:10; 참조, 사 8:22)

이사야의 이 본문 역시 아모스가 선포한 심판 메시지와 똑같이 천체의 시간 기능 상실과 그로 인하여 예상되는 생태계의 대혼란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백성에게 드러내시는 야웨 신현(theophany)의 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조주이신 그의 심판 임재로 인하여 발생하는 피조 세계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38).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의 결과를 혼돈으로의 복귀와 관련시키고 있는 예레미야의 심판 메시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없으며,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습니다.
둘러보니, 기름진 동산마다 황무지가 되고...
이 일 때문에 온 땅이 애곡하고,
하늘이 어두워질 것이다.... (렘 4:23, 25-26, 28; 참조, 사 34:4).

예레미야의 이러한 심판 선고는 유다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태초의 혼돈에로 복귀한 것과도 같은 상황을 초래할 것임을 뜻한다. 그것은 곧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상황, 곧 혼돈과 어둠이 지배하는 상황을 가리키며, 아직 아무 것도 창조되지 않은 상황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계의 완전한 붕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할 것임을 이처럼 비유적인 언어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시간의 소멸과 그로 인한 생태계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포로기 이후의 요엘도 비슷한 메시지를 선포한 바가 있다. 그는 야웨의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메뚜기처럼 많은 군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쳐들어오면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며(욜 2:10; 참조, 마 24:29), 끔찍스럽고 크나큰 야웨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붉어질 것”이라고 말한다(2:31). 그는 또한 야웨께서 판결의 골짜기에서 주변 나라들을 심판하실 때에도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3:15). 요엘의 이러한 심판 메시지는 아모스나 이사야, 예레미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간조차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요, 그 결과 온통 어둠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생태계의 붕괴와 파멸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말한 태초의 혼돈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39).

그러나 이처럼 공포스러운 하나님의 심판을 계기로 하여 도래할 끝날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끝이면서 또 다른 시작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그들의 끝이 가까웠다고 설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러한 사실은 파멸 이후의 새로운 창조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예언자들의 종말론적인 메시지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후에 인간의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새로운 창조 세계가 전개될 것임을 확신에 찬 어조로 선포하는 바, 변화된 그 세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끝장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힘입어(호 11:8; 습 3:17) 다시금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선포한 새로운 시대, 그리고 희망의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 야웨께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남은 자”; 암 3:12; 9:8-10; 사 1:9; 6:13; 7:3; 10:20-22; 11:11-16; 28:5; 30:17; 겔 6:8-10; 습 3:12-13 등)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요, 그들은 고향 땅에서 이상적인 지도자의 통치 아래 샬롬의 나라를 이루며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남은 자들이 살게 될 샬롬의 나라가 하나님께서 주실 온갖 풍요와 번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요(암 9:11-15; 호 1:10-11; 14:4-8; 욜 3:18 등), 그 결과 이전에 심판으로 인하여 파멸과 무질서에 빠진 생태계가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때, 홍수 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우주적인 계약을 맺은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더 정확하게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계약을 맺음으로써40) 자연계와의 사이에 우주적인 계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호세아의 구원 메시지(호 2:18)41)나, 동물들의 세계에까지 확대 적용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평화를 선포하는 이사야의 구원 메시지(사 11:6-9; 참조, 65:17, 25)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불어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임을 강조하는 에스겔의 구원 메시지 역시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에덴 동산과도 같은 생태계의 회복과 관련시켜 설명한다(겔 34:25-29; 36:8-11, 35; 47:1-12)42). 이러한 구원 메시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함한 새로운 창조 질서의 회복-더 정확하게는 생태계의 회복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이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새로운 창조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조화로운 상호 공존의 세계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자연 안에 새겨진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 시간의 운행이 이제는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사랑의 사귐과 나눔이 있는 평화의 세계 안에서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시간 질서의 회복을 생태학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예언자가 바로 호세아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연 질서-시간 질서를 포함하는-의 회복과 풍요로운 농산물 수확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창조의 복을 주실 것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을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 (호 2:21-22)

이 본문에 의하면 자연 질서의 회복은 전적으로 야웨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야웨의 자비로운 응답은 자연계의 모든 영역들에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 있는 하나님-하늘-땅-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스르엘 등의 순환 구조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이 순환 구조에 의하면, 창조주이신 야웨께서 하늘에 응답하신 결과 하늘이 햇빛과 비를 땅에 내려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하늘이 땅에 응답한 결과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등의 풍요를 이스르엘에게 제공할 것이다. 호세아는 이를 통하여 계절의 순환과 곡물의 생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새로운 시간 질서의 회복이 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구원 은총(2:23)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복인 생태계의 회복이 시간 질서의 회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35) 특히 북왕국과 남왕국의 “끝”을 강조하는 아모스 8:1-3; 에스겔 7:1-13 두 본문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36) 이를테면 아담과 가인에게 내린 생태학적인 성격의 형벌(창 3:17-18; 4:12)이나 노아 시대에 임한 우주적이고 생태학적인 차원의 홍수 심판, 출애굽 당시의 각종 생태학적인 재앙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 T. Frymer-Kensky, “Pollution, Purification, and Purgation in Biblical Israel,” in C. L. Meyers and M. O'Connor (eds.), The Word of the Lord Shall Go Forth: Essays in Honor of David Noel Freedman (Winona Lake: Eisenbrauns, 1983), 399-414; H. H. Schmid, “Creation, Righteousness, and Salvation: ‘Creation Theology’ as the Broad Horizon of Biblical Theology,” in B. W. Anderson (ed.), Creation in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102-117; G. Friedrich, “생태학과 성서,” 이정배 (편), 『생태학과 신학-생태학적 정의를 향하여』 (서울: 종로서적, 1989), 44-50.
37) Shalom M. Paul, Amos: A Commentary on the Book of Amos,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1991), 168, 262. 예레미야 13:16(“주님은 빛을 어둠과 흑암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도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자연 질서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J. A. Thompson, The Book of Jeremiah,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85), 369.
38) R. E. Clements, Isaiah 1-39,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94), 136.
39) 이 점에 있어서는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심판 재앙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 재앙들은 한결같이 창조 질서가 자신의 정상적인 경계선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재앙 이야기에 의하면, 이집트 심판의 도구가 된 자연계의 모든 요소들은 피조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한계를 깨뜨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피조 세계가 광란에 사로잡힌 것과도 같은 그림을 보여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삼일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아홉 번째의 어둠 재앙은 빛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상황,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이 혼란에 빠진 상황 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태초의 혼돈과도 같은 상황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더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필자의 다음 글을 참조: 『오늘의 눈으로 읽는 구약성서』, 72-79.
40) M. DeRoche, “The Reversal of Creation in Hosea,” VT 31 (1981), 400-409.
41) R. Murray, The Cosmic Covenant (London: Sheed and Ward, 1992), 31-32, 39; G. I. Davies, Hosea (Grand Rapids: Eerdmans, 1992), 84.
42) A. DeGuglielmo, “The Fertility of the Land in the Messianic Prophecies,” CBQ 19 (1957), 308; Ronald A. Simkins, Creator and Creation: Nature in the Worldview of Ancient Israel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4), 235-237.

 

(3) 묵시문학의 종말 진술과 생태 신앙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전 8세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악을 심판하실 끝날이 곧 올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끝임을 강조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죄악과 탈선으로 오염된 역사의 끝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옛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은 철저하게 역사와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들이 설교하는 끝 또는 종말은 당연히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다43). 이른바 역사 내적인(within history) 종말론이 문서 예언자들의 신앙과 신학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내지는 희망의 미래가 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도무지 실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고통과 절망의 상황이 계속 강화되면서, 예언신학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묵시 사상이 생겨나게 된다. 묵시 사상은 일반적으로 세계의 종말과 천상 국가에 관한 신적인 비밀을 밝히는 것을 뜻하는 바, 이러한 묵시 사상은 고통과 절망의 현실이 극대화되던 주전 2세기에 이르러 다니엘서를 필두로 하는 본격적인 묵시작품 내지는 묵시문서들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고통과 탄식 및 가난 등의 사회ㆍ정치ㆍ경제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으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한편으로, 그들로 하여금 극도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44).

그렇다면 이처럼 극심한 탄식과 절망의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묵시작품들은 시간과 종말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가? 묵시작품들은 무엇보다도 현실 역사 내지는 현 세대에 대한 강한 비관주의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묵시문학은 극도의 절망과 비탄의 현실을 밑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묵시작품들은 인간의 삶이 진행되는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자리임을 부정한다. 도리어 그것들은 악의 세력이 현실 세계와 역사의 무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악의 무리가 지배하는 현 세대가 빠른 시일 안에 종결되리라고 봄으로써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기도 하다45).

이러한 확신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왕국을 강조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묵시작품들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예언자들의 설교하는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왕국과는 달리, 그 본질에 있어서 초월적이고 초지상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46). 따라서 묵시문학의 종말론은 시간과 역사가 끝을 본 다음의 시대를 내다본다는 점에서 역사 초월적인(beyond history) 종말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묵시작품들이 한시적인 현 시대(world-age)와 미래의 영원한 시대(eternal age)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두 시대 이론 내지는 시간적 이원론(temporal dualism)을 전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47). 물론 다가올 새 시대는 현 시대의 완결이 아니라 현 시대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옛 시대 안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 까닭에 본격적인 묵시작품들이나 묵시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현존하는 세계와 역사가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임을 강조한다(사 65:17):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사 65:17)

이 본문은 창세기 1:1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실 세계가 이전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이룰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벧후 3:10-13; 계 21:1).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이전 세계가 그 안에 새겨진 시간 개념을 포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는 기존의 시간 개념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간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같은 차원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66:22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새로운 세계가 영원의 차원과 맞닿아 있는 것이고 볼 경우, 새로운 시간 역시 같은 차원에 속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간은 구체적으로 이전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대체 어떻게 새로워진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 암시를 초기 묵시에 해당하는 스가랴 14:6-7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날이 오면, 햇빛도 차가운 달빛도 없어진다.
낮이 따로 없고 밤도 없는 대낮만이 이어 간다.
그 때가 언제 올지는 주께서만 아신다.
저녁때가 되어도, 여전히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시간 개념이 창조적으로 변형될 것임을 뜻한다. 이를테면 첫 번째 창조의 첫날에 이루어진 낮과 밤의 교체 주기, 곧 시간 구분의 기초를 이루는 낮과 밤의 주기적인 반복이 사라질 것이요, 항상 낮만이 지속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또한 홍수 이야기의 결론 부분(창 8:22)이 묘사하고 있는 다양한 시간 질서가 사라지거나 완전히 새롭게 변화될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운행에 기초하여 정하신 기존의 시간 질서는 본래 파괴와 소멸의 위협-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저주가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추위와 더위의 반복이나 낮과 밤의 순환 같은 기존의 시간 질서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위 본문은 첫 번째 창조의 열매인 시간의 주기적인 순환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추위도 어둠도 없는 따스함과 밝음-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비롯되는-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참조, 사 60:19-20; 계 21:22-25; 22:5)48). 이러한 시간 개념의 변화는, 마지막 때가 되면 시간 질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적인 메시지들(마 24:29-31; 막 13:24-27; 계 6:12-14; 8:12; 20:11)에 의해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43) 박준서, “구약성서를 통해 본 종말론의 이해,” 170; 왕대일, 『묵시문학 연구: 구약성서 묵시문학 다니엘서의 재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29-30.
44) J. J. Collins, “The Apocalyptic Technique: Setting and Function in the Book of Watchers,” CBQ 44 (1982), 107-109. 묵시문학은 위기 상황에 놓인 자들을 위로하는 위기관리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기존질서에 맞서는 저항문학이기도 하다: 왕대일, 『묵시문학 연구』, 70-80.
45) Walter Schmithals, The Apocalyptic Movement: Introduction and Interpretation, tr. John E. Steely (Nashville: Abingdon Press, 1975), 77-84.
46) 그리고 이 왕국 개념은 모든 인간과 피조 세계 전체를 포함하는 재창조와 관련된다: D. S. Russel, The Method and Message of Jewish Apocalyptic: 200 BC-AD 100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4), 280-284.
47) 박준서, “구약 묵시문학의 역사이해,” 155; 왕대일, “묵시문학 운동의 역사 이해,” 기독교사상 편집부 엮음, 『종말론의 올바른 이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82.
48) R. L. Smith, Micah-Malachi, WBC (Waco: Word Books, 1984), 288-289. 묵시적인 경향을 보이는 이사야 30:26 역시 비슷한 어조로 “달빛은 마치 햇빛처럼 밝아지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서 마치 일곱 날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이 밝아질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낮과 밤의 주기가 필요없는 때, 곧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강한 빛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날이 올 것임을 강조한다(참조, 희년서 1:29; 19:25; 에디오피아 에녹서 91:16): O. Kaiser, Isaiah 13-39: A Commentary, OTL, tr. R. A. Wilson (London: SCM Press, 1974), 303. 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 D. E. Gowan, Eschatology in the Old Testament, 홍찬혁, 『구약성경의 종말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200-204.

 

5. 나가는 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이 창조되면서 시간이 창조되었고, 그로 인하여 시간이 없었을 때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낮과 밤의 기본적인 시간 단위뿐만 아니라 계절과 날들 및 해 등의 보다 큰 시간 단위들이 만들어졌다고 봄으로써,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시간이라는 틀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시간 자체와 시간의 다양한 단위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계 시간과는 다른 자연 생태계의 리듬, 곧 농산물 수확의 시기와 기온의 변화, 계절의 순환, 낮과 밤의 반복 등의 자연 시간에 기초하고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들은 자연계의 주기적인 순환을 측정하고 계절과 기온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달력을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농사를 비롯한 다양한 생산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자연계의 주기적인 순환을 그대로 따르는 축제와 절기를 개발함으로써, 그들은 인간의 삶을 압박하는 세속의 시간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곤 했으며,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전인적인 교류를 통하여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켜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생태계의 리듬에 기초한 시간의 주기적인 순환이 무한정하게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직선적인 시간관에 기초한 종말 신앙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시간이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통치 하에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표, 곧 시간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 예로써 주전 8세기 이후의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천체의 기능 상실과 그로 인한 생태 질서와 시간 질서의 대혼란이 그에 수반될 것임을 자주 예언하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생태 질서의 회복과 그로 인한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을 가능케 할 것임을 예언하기도 했다. 반면에 묵시작품들은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현실 역사와 세계가 완전히 끝장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생태계와 그 안에 새겨진 시간 개념이 사라지거나 완전히 변형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생태 질서와 시간 개념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간의 창조자요 주인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시간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흐름 일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여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요, 오염된 세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시간과 역사 및 세계 전체를 끝장내시고 새로운 시작을 이루실 수도 있는 분이다. 어떻게 보면 묵시가들이 예고한 종말은 우주적인 대파멸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구원을 강조하는 희망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그들이 선포한 시간과 역사의 마지막은 파괴와 전멸을 목표로 하는 때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통한 회복과 완성을 목표로 하는 때인 것이다.

시각을 달리하여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주목해 보자. 계몽주의 이후 한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힘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오늘날에는 과학과 산업기술의 발달로 누리게 된 풍요의 뒷자리에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위기, 전쟁 빈발 등의 다양한 부작용과 역기능이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인류와 우주의 전면적인 파멸이 불가피할 것임을 조심스럽게 예견하는 견해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낮과 밤의 구분마저도 무너뜨린 채로, 계량화된 시계 시간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 모두를 지배하고자 하는 고도 산업사회의 비인간적인 모습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 문명은 자연과 세계로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을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동식물을 포함한 각종 생명체에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와 무관한 각종 유전자를 삽입하거나 인간의 시간 스케줄에 적합하게 유전 정보를 조작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렇다.

이로 인하여 이제는 시간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 충만해 있던 자연이 이제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잃고서 인간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연계의 각종 생명체들과 관련된 언어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특히나 생태계의 시간을 표현하는 각종 시간 언어들이 그 자취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 언어들의 실종은 역으로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제거함으로써 생태계 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 뿐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자연 시간에 맞춘 축제조차도 사라지고 없다. 설령 축제가 있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생태계 시간에 맞춘 것이 아니다. 생태학적인 축제가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현상 역시 생태계에 대한 무관심을 증폭시킨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적어도 우리가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한에는,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는 불가피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그 자체가 비극적인 종말로 귀결될 수도 있는 과학기술 문명의 폐단을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우리는 비록 성서 저자들이나 당시의 공동체가 오늘날 고도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생태 문제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거나 생태주의를 하나의 주의나 주장으로 제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다양한 신앙고백과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보여 준 생태학적인 시각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만큼 생태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이제는 녹색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녹색의 입으로 신학을 말하고자 함은 물론, 녹색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생태계를 온전하게 지키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류사 이래 가장 힘겨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제대로 가꾸고 보전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올바른 실천을 통해 구체적인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출처 - 2004. 11. 27,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00

참고 :

김정욱
2005-04-12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진단과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3


김정욱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V.  지구적인 환경문제 진단


인류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삶을 살아나가면 이 환경문제는 머지않아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현재 60억의 인구가 21세기 말에는 100억 내지 140억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지구의 경제규모는 지난 100년 동안에 50 배가  증가했다 35). 특히 2차 대전 이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단지 50년 동안에 인구가 20억에서 62억으로 36), 지구 경제가 15 배 37), 화석연료의 사용이 25 배 38), 공업생산이 40 배 늘었다 39) 성장하지 않으면 파탄이 날 수밖에 없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구조 아래서는 지금과 같은 성장이 당분간은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21세기 말이면 지구 경제는 다시 10 배 혹은 50 배가 성장할 수도 있다. 경제규모가 10 배 커진다는 말은 생산을 10 배 많이 한다는 말과 같고 생산이 10 배 많아지기 위해서는, 인류가 지금과 꼭 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에너지와 자원이 10 배 더 필요하고 폐기물이 10 배 더 생기며 환경파괴행위도 10 배 더 커진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10 배, 혹은 50 배나 더 커진 경제를 뒷받침할 만한 에너지와 자원이 이 지구상에 있느냐 할 것 같으면 한 마디로 말해서 없다. 이러한  경제는 대부분이 재생이 불가능한 에너지와 광물자원 그리고 삼림, 흙, 바다 등으로부터 얻게 되는데 이러한 자원은 한정이 되어 있어서 언젠가는 고갈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지구가 지금보다 열 배나 더 커진 환경파괴행위를 감당할 수 있나 할 것 같으면 그것도 한 마디로 말해서 아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환경용량도 일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석유의 매장량은 지금대로 파내 쓰면 30년 쓸 것밖에 없고 더 찾으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희망 매장량까지 보태서 한 60년을 보고 있다. 그래서 2010년 이전에 생산량이 최고에 달했다가 2050년이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석탄도 2100년대에 이르러 고갈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40). 우라늄도 알려진 매장량은 25년 쓸 것밖에 없다. 희망 매장량까지 보태서 약 50년을 볼뿐이다 41).

 

에너지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원도 다 마찬가지이다. 선진공업국들이 처음에는 다 자국에서 나는 자원으로 산업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후진국으로부터 수입한 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고 지금은 후진국으로 있는 자원수출국들이 산업이 성장하면서 더 이상 자원을 수출할 수가 없게 될 때, 그 때 지구의 경제는 파탄이 나고 말 것이다. 로마클럽이 1972년에 발표한 ‘성장의 한계’에 의하면 알루미늄, 구리, 납, 아연, 텅스텐, 니켈 같은 광물 자원들의 알려진 매장량도 거의 석유, 석탄, 우라늄 정도에 지나지 않아 수십 년 정도 쓸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무한한 자원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한 가지 자원이 모자랄 때마다 과학자들은 대체자원을 찾곤 하지만 대체자원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끝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무한한 줄 알았던 물이나 흙까지도 유한하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닥치게 될 환경의 변화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적외선을 흡수하여 지구를 따뜻하게 하는 기체들인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냉매로 쓰이는 CFC 등이 지난 100년 사이에 갑자기 늘어남으로 인하여 생기는 지구의 기후변화현상, CFC(chloro-fluoro-carbon: 염화불화탄소)의 사용으로 인한 성층권의 오존층 파괴, 과다한 벌목과 무리한 목축과 농업으로 인한 지구의 사막화, 삼림과 습지와 같은 서식지의 파괴와 남획으로 인한 생물의 멸종, 환경호르몬과 같은 독성물질의 축적으로 인한 생태계 교란 등이 지구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21세기에도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이 계속 되고 그에 따라 에너지와 자원이 고갈되고 지구는 더워지며 사막이 늘어나고 오염이 축적되고 생물들이 죽어가고 생태계가 위협받을 때에 인간이 지금처럼 생존이 가능할 것인가? 답은 절망적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의 경제가 무한정 계속 성장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지구가 크지 않고 가만있는데 지구의 경제가 어떻게 계속 커질 수가 있는가? 이 지구 생태계에서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성장하는 것은 암 밖에 없다. 암의 종말은 죽음이다.



VI.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국토환경 방안


국토는 단지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되고 환경생태학적인 측면에서 황폐해지지 않고 풍성한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안정될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한다. 경제정책은 때에 따라 변할 수가 있지만 우리 자손만대가 살아야 할 국토 생태계의 기본적인 골격은 변해서는 안 된다. 영구히 이 땅이 사람과 생물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이 풍성한 생태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변하지 않는 목표를 가지고 지켜나가야 한다. 이 목표는 국가의 어떤 정책보다도 우선순위가 앞서야 한다.

 

국토를 가꾸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곳이 산림, 갯벌, 농지, 세 곳이다. 산림은 육상 생태계를 지탱하는 기반이고, 갯벌은 해양 생태계의 기반이며, 농지는 사람이 먹고 살 식량을 생산하는 기반이다.

 

산림은 필요한 강수량을 얻고 적당한 하천용수를 유지하며 바람직한 수질을 유지하고 생물들에게 서식지를 제공하고 깨끗한 공기를 유지하고 기상을 적당하게 조절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지난 수천년간 역사상에 많은 고대문명국가들이 망해왔는데 그 나라들은 모두가 산림이 황폐해지면서 나라들도 같이 망해왔다. 산림을 어디에 얼마나 확보하고 가꾸어야 하는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확고한 목표가 세워져야 한다. 지금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산지개발은 다시 검토가 되어야 한다.

 

지난 수천년간을 인류가 산림을 훼손해온 역사라고 한다면 지난 백년 동안에는 해양생태계가 급격히 파괴되어 왔다. 그 이유는 갯벌을 파괴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긴 해안선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다. 이 해안선만 잘 지키면 수산자원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서해안에다가 무턱대고 간척사업을 벌이고 공단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 지금 간척 예정지로 되어 있는 곳들은 대개가 만으로서 어족들의 산란지들인데 이들을 무분별하게 없앨 때 서해의 해양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평가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서남해안 어족의 약 2/3는 생애 주기에 한번씩은 반드시 갯벌을 거쳐야만 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간접적으로 갯벌과 연관되어 있는 어족까지 합치면 90% 이상의 어족이 갯벌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2).

 

하구에다가 무조건 둑을 세우는 것은 위험하다. 해양 생태계의 기반이 갯벌이고 갯벌 중에서도 가장 생산성이 높아 핵심이 되는 곳이 바로 하구 갯벌이다. 그런데 지금 서해안에는 하구가 거의 다 막아져 간척되었고 새만금 지역의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가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구 갯벌인데 이 갯벌도 사라질려고 한다. 지금 해운대를 비롯해서 많은 해수욕장에서 모래가 사라지고 있는데 이의 주된 이유도 하구에 둑을 세워 모래의 유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특히 서해안의 해수욕장들은 거의가 뻘밭으로 변해가고 있다.

 

농경지는 일정량을 반드시 확보해 놓아야 한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쌀 농사를 포기하고 대신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만 IMF를 맞으면서 이런 주장들은 쑥 들어갔다. 인류 역사상 도시국가들은 대개가 백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다 망했는데 그 이유는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계의 강대국들은 다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스위스나 이스라엘 같은 작은 나라들도 식량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브라질 같은 나라들은 경제위기가 닥쳐 무역을 못하게 되더라도 농사를 지어먹고 살면 된다. 그러나 식량자급율이 25%도 안 되는 우리는 다 굶어죽게 되어 있다. 경제위기는 앞으로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너무 많고 땅이 좁아 농사는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꼭 그렇지 않다. 농사는 잘만 지으면 한 사람이 먹고사는데 200평이 필요 없다. 지금 식량자급율이 25% 미만이라 하지만 축산만 안 해도 자급율은 70%까지 쉽게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수입하는 식량의 대부분이 사료이기 때문이다. 담배나 술 같이 급하지 않은 농사를 줄이고 품종을 잘 계획하여 재배하면 훨씬 더 올릴 수 있다. 이스라엘은 전국토의 절반이 사막이고 나머지 절반도 강우량이 우리의 절반 밖에 안 된다. 그것도 비가 겨울에만 내리고 여름 농사철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물 사용량은 우리의 1/3도 안되어 1인당 하루 170 리터의 물로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로 쓰고 또 이 물로 농사까지 지어 식량이 자급자족하고도 남아 수출을 한다 43).

 

비록 쌀 농사가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갯벌을 간척해서 논을 확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식량에서 가장 생산이 잘 안되고 부족하기 쉬운 것이 단백질이다. 단백질이 가장 비싼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육지에서는 단위면적당 단백질 생산을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쌀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쌀 농사보다 훨씬 더 단백질을 많이 생산하는 방법이 수산자원을 얻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산자원은 비료나 농약을 칠 필요도 없고 밭 갈고 김맬 필요도 없고 해안선을 가만히 놓아두기만 하면 저절로 생기기 때문에 농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새만금 사업으로 28,000 ha의 농지를 만들더라도 여기에서 나는 농업 소득보다는 갯벌이 사라짐으로서 잃게 되는 어업 손실이 더 큰 것으로 평가된바 있다.



VII.  지속가능한 지역사회


그리고 각각의 지역사회를 국토의 전체적인 환경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재생 에너지에 기반하여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자원을 순환하며, 환경을 깨끗이 지킬 수 있도록 생태학적으로 가꾸어 나가야 한다. 즉,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지역사회 안에서 최대한으로 공급하고 지역사회에서 나오는 폐기물도 그 안에서 최대한 처리를 하되 최소한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고 물질순환체계를 구축하고 환경오염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으로 지역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캘리포니아를 이상형으로 삼아 용도지역들을 멀찍이 띄어 놓고 각 지역들을 거미줄처럼 도로로 얽어 자동차로 다니게 하고 에너지와 자원을 무한정 투입하고 쓰레기는 딴 데다 갖다 버리는 그런 도시는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경제가 지구화된 지금 세상은 일면 편리한 점도 있으나 다른 일면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세상이다. 지구촌의 어느 구석에서 금융이나 에너지나 자원의 흐름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이는 우리나라의 지역사회에도 곧 영향을 미쳐 기능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곧장 우리나라의 위기로 이어졌고, 아시아의 위기가 세계를 위협했던 몇 년 전의 금융위기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런 판에 세계화를 부르짖고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을 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파랑에 휩쓸리도록 방치해 놓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지구화 혹은 세계화된 현실에서 다른 나라에는 위기가 닥치더라도 그것이 우리나라에는 그대로 전파되지 않도록 완충 혹은 차단장치를 잘 갖추어 놓는 것이 현명한 대책이다.

 

올바른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시작해야할 일은 지역사회의 규모를 줄이는 일이다. 도시가 지금처럼 천만 명이 넘는 규모가 되면 이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만들 수가 없다. 어느 정도의 인구가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에 적합한가에 관한 과학적인 답이 나와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에서 인구 20만명 정도의 도시 환경이 가장 살기에 쾌적하다는 평을 자주 듣고 있다. 환경친화적인 도시로 거론되고 있는 도시들도 대개 그 정도의 규모이다. 도시가 어느 정도 작아야만 주위의 농촌과 어우러져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고 순환형의 지역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 서울의 인구가 조선시대의 19세기 말 이전에는 항상 20만에서 일정하게 유지되었었다 44). 이 규모가 자원순환형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크기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도시 자체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외부로부터 식량과 에너지와 자원 등을 공급받아야 하고 또 폐기물을 내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도시로 식량과 자원을 공급할 수 있고 또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넓은 생산지를 끼고 있어야 생태학적으로 안정될 수가 있다. 도시에서 나오는 하수나 음식 쓰레기 같은 많은 폐기물들은 농지로 돌아가야만 할 것들이 많다. 농지에서는 그런 자원이 없어서 농토가 척박해지고 도시는 그런 지원이 낭비되어 오염이 발생한다. 그리고 농촌에서 발생하는 많은 쓰레기들도 그것을 재활용할 수 있는 산업시설들은 도시에 있다. 도시와 농촌이 공동체로 묶어져야 농촌은 농산물을 필요한 만큼 정성껏 생산하고 도시는 농촌이 생산한 농산물을 올바로 소비하게 된다. 그래서 자원순환사회를 만들려면 도시는 생산지인 농촌과 협동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사회라 하는 것은 도시와 농촌이 따로 독립적으로 지역사회를 만들기보다는 서로 연계하여 공동 지역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도시들이 광역화하면서 인근의 농촌을 행정구역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새로운 에너지원에 대비하여 지역사회는 교통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어떤 형태의 국토개발도 그에 따라 발생하는 교통수요를 공급해 주면된다는 방식, 즉, 공급위주로 교통문제를 해결해 왔으나 새 천년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방법이다. 첫째는 가장 교통 수요가 적도록 지역사회를 구축해서 교통을 가장 적게 이용하고도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당이나 일산 같이 일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 bed town 을 만드는 방법은 환경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그리고 안산이나 창원 같이 자동차를 타야만 다닐 수 있는 도시도 적절하지 못하다.

 

그 다음은 가장 에너지가 적게 들고 오염이 작도록 교통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래서 지역사회 내에서는 자전거, 혹은 소형 자동차를 이용하고 지역사회간에는 기차(혹은 소형 자동차를 실을 수 있는 기차)를 중심으로 하는 교통체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자동차 연료로는 태양 에너지 혹은 수소 전지가 거론이 되고 있다 45). 이들 연료로는 자동차를 대형화하거나 고속화하기가 어렵다.

 

물질순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을 쓰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빗물도 지금처럼 되도록 빨리 배수해서 하천을 범람하도록 하여 홍수를 조장하기보다는, 되도록 많은 양을 지하로 흡수시켜 홍수를 막을 뿐만 아니라 지하수를 채우도록 해야 한다. 외국에 새로이 건설되는 도시 중에는 아예 우수관을 깔지 않고 자연배수가 되도록 시도를 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빗물을 시민들이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하천 옆의 유수지들은 단지 홍수를 막기 위해서 물을 가두어 둘 뿐만 아니라 모은 물을 처리해서 중수도로 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각 가정이나 빌딩들도 빗물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수도를 만들어 생활하수를 처리해서 쓸 뿐만 아니라 지하철이나 큰 빌딩에서 나오는 지하수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지금 30% 이상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수관도 잘 정비하여 쓸데없이 많은 물을 멀리서 가져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역사회의 환경문제는 그 지역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지역사회도 다른 지역의 환경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역의 쓰레기는 그 지역 안에서 처리를 해야지 광역 쓰레기 처리장을 지어 딴 데다 부담을 안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녹지도 그 지역 내에서 그 지역주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지역의 환경문제는 그 지역 안에서 완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역사회가 혐오시설을 기피하고 환경파괴 행위를 반대할 때에 이것을 단순히 지역이기주의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것이 바른 환경정책이 못되기 때문에 그런 마찰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환경문제는 지역 내 소수의 시민들이 불평을 할 때에 이를 해결해 줘야 한다. 만약 환경문제가 다수 시민들의 문제로 번질 때에는 이미 해결하기에는 늦기 때문이다. 지역의 환경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지역의 주민들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환경운동을 활성화해야 한다.



VIII.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인류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인류의 앞날은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는 그 흐름이 너무나 도도하고 거세기 때문에 이 세대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듯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물결 따라 흐르지만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르듯이 산 믿음을 가진 교회는 세상 풍습을 따를 것이 아니라 망해가는 세상에 소망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잘못한다고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 본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을 실천하고 새로운 지역사회를 가꾸어 나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세상이 경제적인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해서 교회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린벨트 같은데 땅 사다 놓고 규제가 풀리고 땅 값 오르기를 기다린다든지, 교회 헌금 수입으로 성공여부를 따진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입으로 아무리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다 헛일이다. 오히려 가장 소중한 땅을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시민들에게 녹지로 내 놓는다든지,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생태계를 구입해서 자연에 돌려준다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자 없는 은행을 운영한다든지 하여 세상의 경제적인 논리를 뛰어 넘는 그런 가치관을 교회가 실천으로 보여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세상이 할 수 없는 참신한 방법으로 보여 줘야 한다.

 

그리고 돈과 정성을 쏟는 곳도 세상 풍습과는 달라야 한다. 세상에서는 돈이 벌리는 곳에 그리고 사람과 생물을 죽이는 데에 온갖 돈과 정성을 다 쏟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선교사업에 돈을 썼다고 자랑하지만 실은 자기 교회에 성도들을 끌어 모아 자기 교회 키우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는 교회가 많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돈을 자꾸 긁어모아 자기 사업 확장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교회 건물 짓는데 돈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데 그래서 결국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은 수많은 십자가와 교회 건물뿐이고 기독교 정신은 부패한 사회에 파묻혀서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교회는 사회를 위해서는 유익하지만 수익이 없는 그런 사업에도 열심히 투자를 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돈도 아니고 자기과시도 아니고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교회는 돈이나 재산이 나고 사랑을 모아두는 곳이 아니고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부동산 투기로 번 돈을 하나님의 축복인양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런 식으로 가만 앉아서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는 세상에 대해서 세금제도를 공평하게 하라고 큰 소리를 칠 수가 없다. 그리고 정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돈을 올바로 쓰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부터가 헌금을 바로 써야 한다. 성경이 십일조를 말할 때에는 내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거두어들인 십일조를 어떻게 써서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라는 것까지도 다 말하고 있다(신14:28-29). 교인들을 향하여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거두어들인 십일조를 올바로 쓰지 않는 교회는 도적질하는 교회이다.

 

교회가 세상의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로 잡는데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분야는 아마도 지역사회를 가꾸어 나가는데 있을 것 같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주민들이 적어도 매주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교회만큼 지역사회에서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교회는 지역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고 또 지역사회의 주민들의 생활이 또한 지속가능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올바른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시작되어야 할 운동 중의 하나는 흩어지는 운동이다. 도시가 지금처럼 천만 명에 이르는 규모가 되면 이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가 되기에는 너무나 크다. 성경은 우리더러 항상 흩어지라고 하고 있는데 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떼로 모여서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도시가 어느 정도 작아야만 주위의 농촌과 어울어져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고 순환형의 지역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

 

도시 자체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외부로부터 에너지와 자원과 식량 등을 공급 받아야 하고 또 폐기물을 내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도시로 식량과 자원을 공급할 수 있고 또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넓은 생산지를 끼고 있어야 생태학적으로 안정될 수가 있다. 따라서 도시의 지역사회는 생산지인 농촌과 협동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사회라 하는 것은 도시와 농촌이 따로 독립적으로 지역사회를 만들기보다는 서로 연계하여 생활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가 맺어져서 생산과 소비를 이어주고 순환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교회가 해야 할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서로 유대관계가 맺어져서 생산과 소비의 양태가 다 올바른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 자체도 지역사회 안에서 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재활용센터를 운영한다든지, 환경상품을 판매한다든지, 환경시설을 정직하게 운영하여 지역에 봉사한다든지, 환경교육을 한다든지, 그 밖에 교인들의 생활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활동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벌이는 이런 활동을 꼭 교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여 기독인들이 땅의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겠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는 세상과 꼭 같이 돈과 권력을 따르고 거짓과 위선에 빠져있어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이 허망하게 파괴되어가는 땅을 구하는 사명을 교회가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가치관을 돌려야 한다. 나라의 경제를 우선시하고 부자가 되는 것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땅을 망치는 일에 앞장서고 협력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인 판단은 사물을 크게 왜곡할 수가 있다. 돈 가진 사람과 사업 시행주들이 경제성을 평가하기 때문에 대체로 이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경제성을 왜곡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효율성을 따지는 가치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자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금전적인 가치를 현재 시점에서의 가치로 환산하는 데에 있다. 이자 혹은 할인율은 현재를 중요시하고 미래를 무시한다. 지금과 같은 이자율로 경제성을 계산하면 우리나라가 백년 후에 통째로 망해도 현가로는 전혀 손해로 계산되지 않고 천년 후에 지구가 통째로 망해도 현가로 계산하면 하나도 손해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가치판단은 항상 미래의 환경파괴를 대가로 현재 돈벌이가 되는 그런 사업을 조장하게 되어 있다. 산을 깔아 엎고 갯벌을 간척하면 개발업자는 당장 큰돈을 번다. 그러나 나라는 결국에는 망하게 되어 있다. 경제성을 평가해서 할 일 안 할 일을 정해 나가면 결국은 지구는 망하게 되어 있다. 미래 세대는 이런 평가과정에 참여할 수도 없고 또 정책결정과정에 투표를 할 수도 없다. 경제적인 논리가 아니라 먼저 환경적인 논리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지구의 자원을 착취하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왔다. 그래서 크고 편리하고 빠르고 아름답고 비싼 상품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개발되었지만 환경적으로 타당한 상품들은 찾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 땅의 법칙에 맞게 환경적으로 올바로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도 과학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모를 만큼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연구할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과학기술의 목표가 사람들을 일 안하고 편하게 살도록 만드는데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 땅에서 환경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찾는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어야 한다.



IX.  맺는 말

 

오늘날의 환경문제가 ‘땅을 정복하라’는 기독교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한 16세기 영국의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이란 것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져야 하고 인간은 이 자연을 길들이기 위해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서 미국의 청교도들은 자연이 인간의 적이라도 되는 듯이 자연과 싸워 이기는 정신을 ‘개척정신’이라고 하여 미덕으로 기렸던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제일 먼저 내린 명령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생물을 다스리라’이다. 많은 사람들은 땅에 ‘충만하라’ 했으니 땅이 비좁도록 자식을 많이 낳아 퍼뜨리고, ‘땅을 정복하라’ 했으니 백두산이고 한라산이고 다 불도저로 깔아 엎어 버리고, ‘생물을 다스리라’ 했으니 생물을 다 잡아 먹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이 땅에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다고 한데서 잘 나타나듯이, 인간이 땅을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성경에 없다. 히브리 원어에서 ‘충만하라’는 것은 채워라, 충족시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땅이 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순리대로 채워주라는 것이다. 우리가 땅의 필요를 채워 주면 땅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뜻이다. 또 ‘정복하라’는 것은 히브리 원어에서 가꾸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땅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면 우리의 삶도 아름답고 풍성하게 되고 북 아프리카나 북한 같이 땅을 황폐하게 만들면 우리의 삶도 황폐하게 된다는 뜻이다. ‘생물을 다스리라’고 한 것은 생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면 우리의 삶도 보살핌을 받는다는 뜻이다.

 

지금 이 땅의 많은 기독인들이 큰 착각들을 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일하면 할 일을 다 한 줄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바깥 세상을 향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들을 전도하고 구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을 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착각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막 16:15, 롬 8:21, 골 1:23). 이 땅이 오염되고 그 안에 피조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천만이나 되는 기독인들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참다운 기독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들에게 진정 기쁜 소식은 인간의 죄악으로 고통 받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도록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순리대로 이 땅을 가꾸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파괴되어 가는 이 땅을 바로잡아 후손들에게는 우리가 물려받았던 것보다 더 나은 환경을 물려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이 땅에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길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는 길이다.

 

 

참고문헌

1) 금표(禁標)는 돌에 금표라고 쓰고 그 아래에 법규를 새겨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마을에 세워 둔 비석 같은 것이다. 환경청, 환경보전의 길, 1990, p. 13.

2) 이숭녕, 한국의 전통적 자연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5, p.201.

3) 내무부, 자연보호, 1978.

4) 최창조, “최창조의 땅의 눈물 땅의 희망: 12. 금수강산 그린벨트” 한겨레 신문, 2000. 2. 24, p.21; 환경청, 앞의 책.

5) 구약성경, 신명기, 25장 3절.

6)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Seoul  Metropolitan  Administration, 1988, p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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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환경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업무보고자료, 2003.1.

13) 김운수외, 서울시 노후 자동차 환경성 증진방안에 관한 연구, 서울시정개발연구원, 1999.

14) Kim, Jung Wk, 앞의 논문, 1999.

15) 김종달, 에너지 수요관리강화를 위한 중.장기 정책방안 연구,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보고서 94-07, 1994, p.44.

16) 건설교통부에서 제시한 이 수치는 물사용량이 크게 부풀려 있어서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를 근거로 댐건설계획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이 수치를 그대로 인용한다(건설교통부, 수자원장기종합계획(1997-2011), 1996).

17) 건설교통부, 수자원장기종합계획(Water Vision 2020), 2001.

18) Viegand, J, “Implementation of Energy Efficiency Measures in Denmark towards Sustainability”, 지속가능한 국토환경의 보전 및 개발전략을 위한 국제 세미나 논문집,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개관기념 세미나, 2000. 5.

19) Wang, Y.D., Byrne, J, Kim, J.W. et al, 'Less Energy, a Better Economy, and a Sustainable South Korea: An Energy Efficiency Scenario Analyis', Bulletin of Science, Technology & Society, 22(2), 2002, pp.110~122.

20) Lloyd, A.C., 'The Power Plant in Your Basement', Scientific American, 28(1), July, 1999, pp 64~69.

21) 김정욱, “영종도신국제공항 건설사업: 무엇이 문제인가?”, 대한토목학회지, 42(1), 1994, pp. 93~105.

22) Dasgupta, M. et.al., Impact of Transport Policies in Five Cities, Transport Research Laboratory, 1994.

23) 새만금사업환경영향공동조사단, 새만금사업 환경영향공동조사 결과보고서(수질분과), 2000.

24) 새만금 사업환경영향공동조사단, 새만금사업 환경영향공동조사 결과보고서(경제성분과), 2000.

25) 유근배, “서해안 간척사업과 환경문제”, 서울대학교 사회정의연구실천모임 세미나 발표자료, 1991.

26) 새만금사업환경영향공동조사단, 새만금사업 환경영향공동조사 결과보고서(환경영향분과), 2000.

27) 건설교통부, 수자원 장기 종합계획(1997-2011), 1996, pp. 18~85.

28) 건설교통부, 수자원장기종합계획(Water Vision 2020), 2001, p.34.

29) 전영신,심재면,김철희,김병곤, “장거리 수송 모형”, ‘대기관리모형연구’ 교과목 report, 1993.

30) 우정헌, 「동북아 월경성 대기오염 해석을 위한 통합모형체계의 개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9.

31) The Korea Herald, “Scientists say coal fumes poisoning millions in China”, April 6, 1999.

32) 강동근, 「동북아시아 대기오염물질의 장거리 이동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3.

33) 김태엽, 「중국의 아황산가스 배출이 한반도의 대기오염에 미치는 영향」,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3.

34) 환경부, 「환경백서」, 2002.

35)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ur Common Future,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p.4.

36) United Nations, World Population Prospects, the 1998 Revision, New York, UN, December, 1998.

37) World Bank, Development and the Environ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38) Brown, L., et al, State of the World 1994, A Worldwatch Institute Report on Progress Toward a Sustainable Society, Norton, 1994.

39) Curran, T.P., “Sustainable Development: New Ideas for a New Century”,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특강 강의 원고, 2000. 3.

40) 김영길 외, 자연과학, 생능, 1990, pp. 378-382.

41) 통상산업부, 한국전력공사, 1995년 원자력발전백서, 1995, p. 108.

42) 유근배, 같은 글, 1991.

43) Giora,A., “Water Resource Management Pracyices in Israel towards Sustainability', 지속가능한 국토환경의 보전 및 개발전략을 위한 국제 세미나 논문집,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개관기념 세미나, 2000. 5.

44)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Seoul  Metropolitan  Administration, 1988, pp. 2~4.

45) Appleby, A.J., The Furure of Fuel Cells: The Electrochemical Engine for Vehicles, Scientific American, 281(1), 1999, pp. 58~63.



출처 - 2004. 11. 27.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64

참고 :

김정욱
2005-04-11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진단과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2

김정욱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III. 국책사업들과 환경문제


1. 발전소 건설사업

우리나라의 중장기 전력수급계획에 현재 19기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앞으로 2020년까지는 14기 더 건설할 예정으로 있다. 원자력 발전소 외에도 영흥도에 세계최대의 석탄발전소 단지를 계획하고 있고, 이들 발전소와 아울러 전국 곳곳에는 고압송전탑이 세워지고 고압송전선 깔리고 있다. 이들 발전소가 건설되면 2020년까지는 전기 생산이 두 배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비는 1기당 3조원 이상이 들기 때문에 이들 발전소를 짓는 데는 총 40조원 이상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우리보다 소득이 훨씬 높으면서도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은 적은 선진국들이 모두 앞 다투어 에너지 사용량을 지금보다도 더 줄이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에너지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이런 에너지 과소비를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해 나가서는 나라의 앞날이 크게 우려된다. 덴마크는 1970년대에 석유파동이 일어난 이후 줄곧 에너지 효율개선과 절약정책을 편 결과 지난 30년간 큰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사용량이 하나도 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재생 에너지가 전체 에너지의 12%를 점한다. 그리고 앞으로 2020년까지는 에너지 사용을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고 에너지의 전량을 재생 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18). 일본도 1970년대에 산업구조조정을 하면서 에너지와 자원을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쓰도록 개조하면서 환경오염문제를 해결하고 또 동시에 경제가 크게 일어서고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1970년대에는 일본도 큰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사용이 늘지 않았다. 결과로 일본은 지금도 선진국 중에서도 에너지 효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에너지를 거의 전량 수입하는 나라가 에너지 효율은 OECD에서 가장 낮고 국산인 재생 에너지 사용율은 0.2% 밖에 안 되고 그러면서도 에너지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이는 방법만 찾고 있으니 나라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한전이 발전소 짓느라고 진 외채가 300억 달러에 이르는데, 1997년에 외환위기를 맞게 된 데 대해서는 바로 한전도 크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때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IMF에서 빌린 돈이 600억 달러가 되지 않는다. 우리도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는데 투자를 하고 노력을 하면 이룰 수 있다. 조명기구, 산업체의 전동기, 건물의 냉난방 등 가정, 산업, 상업, 교통 등의 부문에 현재 상업화가 되어 실용화되고 있는 에너지 절약 기술만을 도입하더라도 2020년까지는 우리나라 전체 에너지 수요의 29%를 절약할 수가 있다 19). 이 에너지를 절약하면 50조원이 드는 17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지을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에너지 효율을 향상시키는데 드는 투자비는 연간 5조원 정도인데, 이 투자비는 에너지 절감으로 인하여 5년 안에 회수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낭비하는 나라가 미국인데,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에 의하면, 앞으로 건물의 냉난방에 쓰이는 에너지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고 교통 에너지는 1/3 수준으로 줄이는 것이 미국의 목표라고 하였다. 이 담화는 백악관을 친환경적으로 리모델링 한 후에 백악관의 에너지 사용이 절반으로 줄은 것을 확인한 후에 발표한 것이다.

 

지금과 같이 대형 발전소를 국토 끝에다 짓고 큰 소비처는 또 다른 국토 끝에다가 만들어 전기를 보내면 에너지 손실이 대단히 크다. 송전손실까지 보태면 에너지 효율을 29%까지 올린 예가 없다. 그러나 에너지를 필요한 곳에서 만들어 쓰면 그 효율을 70% 이상으로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20). 재생 에너지는 그 생산 밀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멀리다 큰 공장을 지어 멀리 대량 수송을 하기가 어렵다. 필요한 곳에다 만들어 써야 한다. 그리고 에너지 효율을 올리고 에너지원을 다양화하여 서로 보완할 수 있도록 분산형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에너지 정책에 가깝다.

 

2. 경부고속철도

경부고속철도는 서울과 부산을 두 시간에 잇기 위한 사업이다. 하루 30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현재 1시간에 한 대 정도 다니는 열차를 앞으로는 지하철 타듯이 5분에 한 대씩 다니게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이 고속철도의 승객은 7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승객 30만 명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속 350 km로 기차가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고속철도를 위해서 원자력 발전소를 하나 더 가동해야 할 것이다. 서울에서 서울까지 두 시간 걸리고 부산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걸리는 나라에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리고는 고속철도를 만들고는 중소도시의 교통이 오히려 대단히 불편해졌다. 그래서 국토의 균형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사업비도 애초에 5조원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20조원도 훨씬 더 든 사업이다. 건설되고 난 후에는 운영하는 데에도 큰 재정적인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런 고속철도를 가진 나라는 세계에서 일본, 스페인, 프랑스, 독일 정도인데 서울-부산 정도의 거리이면 편도 요금이 10~15만원에 이른다. 우리가 이들 나라보다 건설비가 결코 싸지 않았다. 현재 경부간 편도요금을 4만원 정도로 받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부족분은 정부에서 보조를 해 주어야 한다. 그 많은 승객에게 정부가 이런 보조를 해주려면 얼마나 많은 예산이 여기에 들어가야 할 것인가?

 

그것보다는 서울-인천, 서울-수원, 부산-울산, 부산-마산 간에 급행전철을 놓는 것이 훨씬 더 급하고 유용하다. 서울-부산, 서울-광주 간에는 복복선 철도를 놓아서 지금보다 기차가 좀더 자주만 다니게 해주면 된다. 그것은 고속철도에 비하면 돈도 얼마 들지 않고도 교통문제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고 대기오염을 개선하는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3. 인천국제공항

인천 국제공항은 동아시아의 중심공항으로 연간 1억 명을 수송할 수 있는 공항으로 계획하고 있다. 이 규모는 현재 세계 최대 공항인 시카고의 O'Hare 공항보다 두 배나 크다. 원래 계획을 하면서 정부에서 홍보하기로는 인천에서 미국이나 유럽을 2-3 시간에 나를 수 있는 극초음속 초점보기를 위한 공항이라고 국민에게 홍보를 했으나 실제는 그런 공항이 아니다. 지금 항공 교통의 추세는 대륙의 중심공항에서 갈아타는 것이 아니라 출발지와 목적지 공항간을 직접 연결하는 것이다. 인천 국제공항은 대륙의 중심공항이기 이전에 먼저 우리나라의 중심공항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종도는 우리나라의 중심공항이 되기에 부적합한 지역이다. 아무것도 없는 국토의 서북쪽 끝에다가 세계에서 제일 큰 공항을 만들어서 도로며 철도며 전기며 물이며 모든 부대시설들을 완전히 새로 건설해서 공급하고 그 많은 승객들을 오가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가 따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국토를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원은 이 인천국제공항이 2032년까지도 적자를 면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21).

 

국제공항은 첨단산업의 발달에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공항을 제대로 이용할 수가 없는 대전, 청주, 광주, 대구 같은 곳에는 정부가 계획한대로 첨단산업을 발달시키지를 못하고 있고, 인천 공항 인근에 이들의 입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지를 못하고 수도권 집중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김포공항을 확장하고, 이미 국제공항으로 착공했다가 축소한 청주공항을 다시 확장하여 두 공항을 보완적으로 사용하면 훨씬 경제적이고 환경피해도 적다. 충청권으로 행정수도가 이전되면 어차피 그 지역에도 공항이 필요하기 때문에 청주공항을 쓸 수 있도록 하면 경제적이다. 아니면 지금 공군 비행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오산이나 수원의 공군기지를 국제공항으로 활용하든지, 아니면 오산이나 수원의 공군기지 인근에 공항을 만들었다가 통일 후에 공군기지를 흡수하는 방안 등을 고려했더라도 기존의 시설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건설비도 영종도공항의 1/5 내지 1/10 미만으로도 충분하고 환경피해도 훨씬 적다.

 

4. 고속도로 건설사업

 정부는 또 자동차로 전 국토를 반나절에 갈 수 있도록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그래서 국토를 남북으로 달리는 고속도로를 7개,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9개, 소위 ‘7x9’ 고속도로망을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각 도시에서 이들 고속도로로 연결하는 도로가 곳곳에 뚫리고 있다. 이렇게 도로가 많이 건설되는 탓에 우리나라의 자동차 대당 주행거리가 선진국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이런 교통정책이 결국 에너지 소비를 촉진하고 환경오염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부의 교통정책은 자체적으로 모순에 빠져 있다. 공항은 마치 국민들이 모두 비행기를 탈 듯이 계획하고 있고, 철도는 철도대로 또 국민들이 모두 철도를 탈 듯이 기대하고 있고, 고속도로를 계획할 때에는 또 모두가 자동차를 탈 것으로 보고 계획을 한다. 교통은 많이 다니지 않고도 해결되도록 국토를 계획해야 교통이 편리하고 경제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통계획은 쓸데없이 많이 다니도록 유도하고 있어서 이것이 바로 국토를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도로는 아무리 많이 뚫어도 도로가 막힐 때까지 차를 몰고 가기 때문에 자동차 도로로서는 교통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좋은 도로가 뚫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더 멀리 가서 살려고 한다. 도시내 교통혼잡을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도로를 더 뚫는 것이 아니고 주차장을 줄이고 주차비를 올리는 것이다. 많은 연구결과들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22). 교통은 공급을 잘 해주는 것이 잘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적게 다니고도 해결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통문제를 가장 잘 푸는 방법이다. 도시간은 철도, 도시 내에서는 도보, 자전거, 발자동차, 에너지 절약형 소형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대기오염을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고속도로로 전국을 뚫기보다는 철도망을 깔아야 한다. 백만명을 1 km 수송하는데 승용차는 30.8 TOE(석유환산톤)가 들지만 전기철도는 3.5 TOE 밖에 들지 않아 철도를 이용하면 에너지 사용량을 1/9로 줄일 수가 있다.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의 선진국들의 장래 교통계획도 바로 이렇다.

 

5. 간척사업

시화나 새만금 같은 간척사업들은 우리나라에서 필요하다기보다는 수자원공사나 농어촌진흥공사 같은 회사가 있기 때문에 진행되는 사업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에 물을 1년이고 2년이고 담아 둘 수 있는 담수호를 만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고인 물이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지간히 깨끗해 보이는 물이라도 일단 담아 두면 쉬 썩게 마련이다. 시화호나 새만금호는 유입수를 아무리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깨끗하게 처리한다 할지라도 이들 유역의 여건상 담수호 물은 썩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런 물을 이용해서 농업용수나 공업용수로 쓰겠다는 것도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새만금사업 공동조사단의 보고서에 의하면, 새만금호는 그대로 막으면 시화호보다도 수질이 더 나빠지고, 1조원 가까운 예산을 써서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책을 세우고도 우리나라의 어떤 담수호보다도 수질이 더 나빠질 것으로 예측된 바 있다. 특히 만경강 유입의 만경호 수질은 시화호의 수질과 거의 유사할 것으로 예측되어 있다 23).

 

갯벌을 간척하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손실이 된다는 주장은 벌써부터 있어 왔다. 간척해서 비료 주고 농약 뿌리고 씨 뿌리고 밭 갈고 해서 열심히 농사짓는 것보다는 갯벌을 그대로 두고 저절로 나는 것을 잡기만 하면 되는 수산업이 훨씬 더 쉽고 소득도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만금공동조사단 보고서에 의하면, 새만금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은 소득은 연간 505억원이나 이 갯벌을 농지로 조성할 때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연간 49억원이라고 되어 있다 24). 우리나라 서해의 물고기는 90 % 이상이 갯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25). 그리고 밀물 때 잠기고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을 없애고서는 아무리 많은 하수처리장을 지어 봤자 헛일이라는 것도 잘 알려지고 있다. 새만금 갯벌 2만 ha가 하루에 10만톤을 처리하는 하수처리장 40개의 기능을 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26). 간척을 하고 난 뒤에 바닷물 흐름의 변화로 인하여 일어나는 해안선의 변화도 큰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해수욕장들이 지금 모래가 사라지고 있고 특히 서해안 지역에서는 뻘까지 퇴적하여 해수욕장으로서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그밖에도 해일을 막아 준다든지, 해안의 침식을 방지한다든지, 기타 심미적, 생태학적인 여러 기능들을 생각할 때에 간척은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간척은 우리 국토를 규모 있고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간척공사 그 자체로 생존하는 회사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다. 새만금 사업은 식량안보를 위한다며 근 20년에 걸쳐 6조원의 예산을 들여 28,000 ha의 농지(순수 논 18,000 ha)를 조성한다는 사업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매년 30,000 ha 의 농지를 다른 용도로 전용하고 있다. 그리고 새만금 사업 강행을 발표하고는 이후에 곧 쌀이 남아돈다고 발표하였고 이어 과잉생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3만 ha의 농지를 유휴농지로 돌리겠다고 발표하였다. 지금 논이 평당 3-4 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새만금 농지는 평당 조성비가 7만원에 이르러 그 경제성은 계산해보나 마나이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를 원하는 전라북도의 도민들은 정부가 거듭거듭 농지로 조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해도 이를 믿지 않고 복합산업단지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 이 간척지를 복합산업단지로 조성하기 위해서는 총공사비가 27조원에 이른다. 이 산업단지의 평당 조성비는 96만원에 이른다. 이래서는 산업단지로서도 타당성이 없다. 지금 그 보다 훨씬 싼 단가로 산업단지로 조성해 둔 곳도 입주업체가 없어서 쉬는 공단이 많이 있다. 갯벌은 그냥 가만히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6. 다목적댐 건설사업

1996년에 건교부에서 만든 수자원 장기 종합계획(1997-2011)에 의하면 당시 10개의 다목적댐에서 우리나라 전체 물 사용량인 연간 300억 톤의 약 31%에 해당하는 93억 톤의 물을 공급하고 있는데, 앞으로 2011년까지는 20개의 다목적댐을 더 건설하여 65억 톤의 물을 더 공급하겠다고 하였다. 이 계획의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물수요량이 현재 연간 300억 톤에서 2011년에 367억 톤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하천으로부터 공급할 수 있는 양이 200억 톤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늘어난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댐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27). 이것이 2001년에 세워진 수자원장기종합계획에 의하면, 물 수요가 2011년에 374억 톤, 2020년에는 381억 톤으로 되어 있어서 지난번 계획과 거의 유사하다 28).

 

이는 2011년까지 국민 한 사람이 생활용수로 하루에 500 리터, 공업용수로 260 리터를 사용하여 총 760 리터를 쓸 것이라는 계산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계에 이렇게 물을 많이 쓰는 나라는 없다. 미국이 하루에 625리터를 쓸 뿐 독일은 공업용수까지 보태서 200리터, 이스라엘은 여기에다 농업용수까지 합하여 170 리터를 쓸 뿐이다.

 

건교부는 재작년에 홍수 피해가 나자 곧 댐을 여러 개 더 지어 홍수를 막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댐이 부족해서 홍수피해가 난 곳은 한 곳도 없다. 둑을 보수를 안 해서 터졌다든가, 펌프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든가, 산을 함부로 훼손하여 산사태가 났다든가, 하천을 침범하여 물이 제대로 못 흐르도록 만들었다든가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지난 몇 십년간 정부에서는 홍수대책을 위해서 댐을 만든다고 수십조 원을 썼으나 홍수피해는 더 커졌다. 그 동안 홍수를 부추기는 공사를 더 열심히 추진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비가 집중되기 때문에 대형 댐을 만드는 등의 대책이 필수적이라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보다 위도가 아래인 나라들은 여름, 혹은 우기에 비가 우리보다 더 많이 온다. 그들이 모두가 다 큰 댐을 가지고 홍수와 가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도 여름에는 우리보다 더 큰비가 온다 그러나 우리처럼 큰 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 소규모들이다.

 

큰 댐은 작은 홍수나 작은 가뭄은 잘 관리한다. 그러나 잘못되면 큰 재난의 원인이 된다. 유사시에 이런 큰 댐들이 붕괴되거나 폭파되는 때에는 큰 재난을 불러온다. 큰 댐을 짓는데 돈을 쓰기보다는 물을 절약하는 데에 투자를 하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큰 댐들은 수질관리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큰 댐을 만들어 부영양화가 일어나지 않는 호수가 없다. 그리고 생태계와 기후의 교란이며 이런 등의 이유로 대형댐은 지속가능한 발전 방안이 아니다. 물의 수요를 줄이고 유역의 물순환을 잘 관리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방법이다. 동강댐을 지어서 얻겠다는 물은 우리나라 1,000만 가정에 절수용변기 한 대씩만 설치하면 그 물을 얻을 수가 있다. 동강댐을 짓는데 드는 예산이 1조원이라고 했는데(정부에서 1조원이라고 하면 적어도 3조원 이상이 들어가는 것이 우리나라의 관례다), 절수용변기 1,000만 대를 다는 것은 1,000억이면 충분하다. 댐을 짓는 것은 아주 쉽다. 국민들은 모두 가만히 있고 수자원공사 혼자서만 열심히 일하면 된다. 그래서 외자를 빌려서 댐을 짓고 물 값을 받아서 운영하면 된다. 그러나 상수관 물이 안 새도록 막고, 우수 유수지에 받아놓은 빗물을 이용하도록 하고, 중수도 시스템 만들고, 기업들은 무방류 시스템을 도입하고, 절수용품 보급하고, 이런 일을 하자면 지방 공무원들, 지역 주민들,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모두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적은 돈으로도 경제를 튼튼히 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세계경제포럼에서 2002년에 세계 각국의 환경지속성지수를 발표를 했는데 우리나라는 142개국 중 136위를 했다. 그 이유는 인구 일인당, 국토 단위면적당 에너지와 자원 소모와 환경오염배출이 세계에서 가장 많았는데 반하여 환경개선의지는 가장 약했기 때문이다.



IV. 동북아 지역의 환경문제 진단


21세기에 우리나라가 겪게 될 환경문제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시아 지역의 환경문제가 바로 우리나라의 환경문제로 직결된다. 동북아시아 지역은 현재 세계에서도 가장 경제밀도가 높은 곳 중의 하나이다. 이 지역에서는 대기오염물질의 월경이동, 해수의 오염, 기업의 이전과 이에 따르는 환경오염문제, 기타 이 지역의 활발한 경제성장과 관련된 각종 환경문제들이 지금 산적해 있다. 이 지역은 다음 세기에 이르러서 계속 성장을 이룰 것으로 예상이 되기 때문에 환경문제도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이 지역에서는 서풍이 주풍이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쉽게 이동된다. 예를 들면 황하 상류의 알라샨(Alashan) 사막이나 고비 사막 혹은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에서 발원한 황사가 단지 3, 4일이면 우리나라와 일본에 도달한다 29). 최근에 이르러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어서 다음 세기이면 중국은 충분히 세계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엄청난 양의 대기오염물질을 배출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2,000 만 톤 정도의 아황산가스를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0). 이 양은 우리나라 SO2 배출량의 약 15 배에 해당한다.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중국도 경제성장율과 비슷한 속도나 혹은 그것을 앞질러 오염배출량이 늘어난다면 이는 21세기에 이르러 동북아시아 지역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에너지의 대부분을 자국에서 생산하는 석탄에 의존하고 있는데 중국의 석탄은 열량은 낮고 각종 중금속을 비롯한 오염물질의 함량이 높아 선진국에서는 그대로는 쓸 수 없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1).


이 지역에 부는 바람의 특성을 분석해 볼 것 같으면 중국의 대기오염은 모든 계절을 통 털어서 주로 우리나라로 불어오게 되어 있다 32). 중국에서 발생한 아황산가스가 산성비나 혹은 먼지에 흡수되어 우리나라에 강하하는 양은 전체 발생량의 1-2% 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서 33)이는 우리나라의 대기오염과 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황해는 남북의 길이가 약 1,000 ㎞, 동서의 폭이 최대 700 ㎞, 면적이 약 400 ㎢, 평균수심이 약 44 m, 체적이 17.6 ㎦ 이다. 이 바다는 반폐쇄 해역으로서 표면수와 심층수가 해류에 의하여 활발하게 섞인다. 이와 같이 황해는 수심이 얕고 용적이 작은데다가 비교적 정체된 반폐쇄 해역이기 때문에 오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이 적다. 그런데 황해 연안 일대는 지금 우리나라와 중국이 앞 다투어 다음 세기를 대비하여 활발하게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해양오염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황해에 오염을 배출하고 있는 주요 오염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수도권의 오염을 실어 나르는 한강을 꼽을 수 있고 중국에서는 엄청난 양의 토사와 다른 오염물질들을 실어 나르는 황하와 양자강과 그리고 연안에는 텐진(天津), 다렌(大蓮), 칭다오(靑島), 샹하이(上海) 등의 도시들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한강, 금강, 영산강을 통해 황해에 배출하는 BOD의 부하가 1년에 약 50만톤이다 34). 지금 중국에서는 재래식 변소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앞으로 수세식 변소가 보급되고 하수도가 설치되면 분뇨와 각종 오수가 황해로 흘러들 것이다. 그 때 1인당 배출량이 우리나라에 접근해서 우리보다 약 30배 많은 인구로부터 약 30배 많은 오염물질을 황해에다 배출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황해에 유입되는 BOD의 총량은 1년에 약 1500만 톤에 이른다. 이는 황해 물 1㎥ 에 매년 850g의 BOD를 부하시키는 셈이 된다. 물 1㎥ 에 매년 50g의 BOD를 부하시킨 시화호의 물이 어떻게 오염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황하를 통하여 황해로 흘러드는 토사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황하 하구에는 이들 토사로 인하여 매년 거의 1 km 씩 바다가 메워지고 땅이 생겨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예측들은 환경정책상에 뚜렷한 어떤 방향과 목표가 있지 않으면 새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아니라  21세기에 당장 우리나라의 환경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출처 -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62

참고 :

김정욱
2005-04-09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진단과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1

김정욱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I.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환경윤리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선조들은 자연에도 다 이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 이치에 따라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노력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환경을 파괴하거나 오염시키는 행위를 천벌을 받을 죄악으로 알아왔고 그런 행위에 대해서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큰 형벌로 다스려 왔었다. 옛날에 공자가 제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어느 나라에서는 재를 버린다고 곤장 스무 대를 치는데 이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닙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재를 안 버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인데 이런 쉬운 범죄를 엄한 벌로 막아서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옛날 마을에서 발견되는 돌 판에 ‘棄灰者  杖三十, 棄糞者 杖五十’(기회자 장 30, 기분자 장 50 :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30대, 똥을  버리는 자는 곤장  50대), 혹은 ‘棄灰者  杖八十, 放牲畜者 杖一百’(기회자 장 80, 방생축자 장 100 :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 가축을 방목하는 자는 곤장 100대) 이라고 새긴 금표(禁標)가 발견된다 1). 똥과 재를 버린다는 것은 이들이 다 유용한 거름 자원인데 이 자원을 낭비하고 강이나 길에 버려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축을 방목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행위도 엄한 벌로 다스렸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나무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집을 짓거나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2). 그리고 산림을 보호하되 특히 소나무 숲을 가꾸기 위해 「송금작계절목(松禁作契節目)」이라는 규정을 두고 주민들은 나무를 심기 위해서 계(契)까지 모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만든 숲을 송계림(松契林)이라고 불렀다 3). 지금 우리나라에 그린벨트가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특별히 보호해야할 산림을 금산(禁山) 혹은 봉금구역(封禁區域)으로 묶었었다. 서울 주변의 산들은 대개 금산으로 지정되었고 지방에서도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설정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금산에서 벌목을 하거나 채석을 한 자는 곤장 90대에 벌목한 수만큼 나무를 다시 심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엄격하게 시행하여 세조 때 기록에 의하면 금산의 소나무 한 그루를 불법으로 베어내는 대가는 곤장이 100대, 두 그루면 곤장 100대를 친 후에 군복무를 시키고, 열 그루면  곤장 100대를 친 후 오랑캐 지역으로 추방하기도 했었다 4).

 

모세의 율법에서 곤장을 40대 이상 때리는 것을 금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형벌이 얼마나 엄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5). 곤장은 20대만 해도 공자의 제자들이 분개할 정도로 엄한 형벌이고 100대면 거의 죽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더 때릴 수도 없을 정도로 극형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나무를 함부로 베면 천벌을 받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제사를 먼저 지내고야 나무를 베었었다. 나무와 산림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예전에는 산에 올라가면 산을 더럽힐까봐 오줌도 누지 않았고 똥은 싸들고 내려 왔다고 한다. 이런 풍습은 지금도 일부 전통을 존중하는 노년층에 전해지고 있다.

 

환경범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냉엄하고 형벌이 무거웠기 때문에 환경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보통사람들로서는 감히 생각하기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문화는 자원을 철저히 아끼고 재활용하며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도록 생태학적으로 짜여져 있었다. 가정생활에서는 버리는 쓰레기가 생기지 않도록 집집마다 마당을 두어 가축을 기르고 텃밭을 집 가까이 두었었다. 그래서 작은 곡식 알갱이는 닭이 쪼아 먹고, 큰 음식 덩어리는 개나 돼지가 먹고, 설거지한 개숫물은 소여물 삶는데 쓰고, 재나 분뇨는 농지에 비료로 쓰고, 버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뜨거운 물을 마당에 붓는 것도 땅을 죽인다 해서 용납되지 않았으며 그 밖의 거의 모든 자원이 재활용되었었다. 제주도에서는 인분마저도 돼지에게 사료로 먹일 정도로 자원의 재활용이 철저했다. 만약에 제주도에서 육지에서와 같은 재래식 변소를 만들었다면 투수성이 큰 지질의 특성상 지하수가 오염되어 물을 마시기 어려웠을 것이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았었다. 쓰레기가 없었기 때문에 쓰레기를 국가에서 별도로 치운 적도 없었다.

 

취락이나 주택구조 자체도 생태학적으로 올바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산꼭대기나 경사가 급해서 생태학적으로 취약한 지역은 보존하고, 그 아래 경사가 좀 완만하지만 다른 용도로는 쓸 수가 없는 곳에 무덤을 두었다. 취락은 그 아래에 산을 북쪽으로 등지고 남향집을 지음으로 가장 에너지 효율적인 취락을 만들었다. 집 뒤에는 대나무 같은 나무를 심어 토사의 유실과 우물을 더럽힐 수 있는 오염물질들을 여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집 자체도 환경친화적이었다. 초가지붕은 썩으면 퇴비로 쓴다. 집을 짓는데 나무는 최소한으로 써서 산림자원을 아끼고 벽은 흙과 짚으로 만들어 보온과 습도 조절이 잘 되도록 만들었다.

 

특히 온돌은 어떤 난방장치보다도 열효율이 뛰어나고 오염이 작은 난방구조이다. 난방을 따로 하는 것도 아니고 아침저녁으로 밥만 지으면 저절로 난방이 되는 것이 온돌이다. 난방을 우리나라만큼 효율적으로 하는 나라가 세계에 없다. 일본은 두터운 이불에 더운 물통을 안고 자거나 화로를 피우는 정도가 고작이다. 유럽 사람들은 벽난로를 피우는데 이것은 열효율도 형편없고 실내 공기 오염이 심각하다. 유럽 사람들이 난로에 석탄을 태울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피해를 입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부 부유한 집에서는 유럽을 본 떠서 집에 벽난로를 달아 놓는데, 벽난로에 불을 때서 방을 데우자면 에너지 소모가 많고 실내공기 오염도 심해진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도시를 가장 농사짓기 좋은 평야에다 만들어 땅을 낭비를 하는데, 우리나라는 평야는 농사를 짓도록 그대로 아껴두고 도시는 평야 가장자리에 산을 끼고 건설하여 도시가 비대해지는 것을 막았다. 서울의 인구는 1660년에 20만에 이른 후 19세기말에 개방이 이루어지기까지 늘지도 줄지도 않고 항상 20만 명을 유지했다 6). 지금 유럽의 도시들이 환경친화적인 도시 인구의 규모를 20만 명 정도로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울도 주위의 환경에 무리를 주지 않고 환경적으로 건전한 도시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 인구 규모를 유지하지 않았나 하고 짐작이 된다. 도시에 필요한 땔감은 산림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인근 지역으로부터 반입되었고 도시의 분뇨는 인근의 논밭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물도 하천이나 지하수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지역사회를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럽 사람들이 산 모습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다. 유럽 사람들은 예전에 집에 변소도 없이 살았다. 집을 지으면 벽 하나에 두 집이 같이 지붕을 올려 짓는다. 유럽의 도시에 층수가 꼭 같은 건물들이 죽 늘어선 이유가 바로 벽 하나를 양쪽 집이 같이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을 지으면 마당을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마당이 없는 집에서는 변소를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유럽의 도시 사람들은 오랫동안 변소도 없이 살았다. 호화스럽기로 유명한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변소가 없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분뇨는 요강에 받았다가 길이고 하천이고 아무 데나 창 밖으로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재수 없으면 길 가다가 오물 벼락을 맞는 것이 예사였다고 전해진다. 중절모가 바로 이 오물 벼락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7). 영국의 어떤 도시들은 길 가운데를 아예 파놓고 오물을 그곳에 버리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길에 오물이 하도 많이 널려 있어서 오물을 밟지 않기 위해서 만든 신이 하이힐이라고 전해진다. 부인들은 외출할 때면 변소가 없기 때문에 곤란을 겪어야 했다. 유럽 여자들이 이상하게 크게 벌어진 치마를 입게 된 이유가 변소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치마를 입으면 아무 데나 앉는 곳이 바로 변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하천이라는 것은 냄새가 나서 귀부인들은 코를 막고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도시의 하천은 오물이 두텁게 쌓인 시궁창이어서 한 번 빠지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비해서 서울의 청계천은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말 그대로 깨끗한 물 그대로였다.

 

유럽의 도시에서 물을 그냥 마신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유럽에서 큰 전염병이 자주 돈 이유도 그곳이 대단히 불결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348년에서 1349년 사이에 페스트가 전염되었을 때에는 인도북부에서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전 인구의 1/3이 죽을 정도였다. 유럽의 도시에서는 맹물을 마신다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식사 때 포도주와 맥주를 통상 마신 이유도 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술을 안 마시고 물을 마시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었다 8). 근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도시들이 필요 이상으로 엄청난 규모의 하수도를 건설한 것도 물로 인한 전염병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90% 이상이 유럽 사람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인하여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미국에서 몇 명 안 되는 유럽의 이주민들이 전쟁도 안하고 그 큰 나라를 다 뺏을 수 있었던 이유도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옮겼더니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삼림도 제대로 보존이 되지 않았다. 집 짓고 땔감하고 목초지 만들기 위해서 일찍이 거의 다 훼손되어 수종도 몇 십 종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영국에는 600 종 정도의 식물이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최근에 많이 훼손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만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수종들이 남아 있다.

 

옛날 우리나라의 지역사회는 하나하나가 생태학적인 단위로서 기능하여 태양만 있으면 돌아가는 그런 사회였다. 물질은 그 자체 안에서 완전한 순환이 이루어 졌고 폐기물이나 오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고대 문명국들은 땅이 거의 다 황폐해졌다. 중국의 땅도 산림이 황폐하여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사막으로 변했고 황하와 양자강은 하천 바닥이 인근의 지면보다 높아졌으며 농경지들도 많이 척박해졌다. 유럽의 육상 생태계도 그 모습이 크게 왜곡되어 있다. 미국의 농경지들은 그 좋던 땅들이 100년을 견디지 못하고 황폐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천 년간 이 땅에서 농사짓고 살면서도 농경지와 산림이 비교적 최근까지도 잘 보존되어 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선조들이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세기에 들어서 에너지와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환경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어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때,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로부터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옛날과 똑 같은 삶의 양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과 철학을 배운다는 뜻이다.



II.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진단


그러다가 우리나라는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기에 이르러서는 환경윤리관이 완전히 뒤바뀌어 환경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국가적이 반역행위로 간주하였다. 부산수산대학교(지금의 부경대학교)의 원종훈 교수가 수산양식장의 환경오염도를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 대학의 학장은 면직되었고, 그의 제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 교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몇 년 후에 사망했는데 고문 후유증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많은 환경 전문가들이 언론에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공해방지법이 있었지만 이 법은 공해방지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였다. 기준이 너무 느슨하여 기준을 어기기도 어려웠고 기준을 어겼는지 조사를 하여 처벌을 한 적도 전혀 없었다. 이 시기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환경오염의 피해를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이의 결과로 우리나라는 자원의 낭비가 심하고 환경오염이 심한 사회로 탈바꿈하였다. 우리나라의 GNP당 에너지 사용량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편에 속하여 OECD 평균보다 50%가 높다. 또 환경오염 성장이 경제성장을 앞질러 1982년에서 1996년 사이에 경제가 연 9.6% 성장한데 비하여 산업폐수와 산업폐기물은 연 13% 이상 증가하였다 9). 결과로 우리나라의 환경오염밀도는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도 앞선다. 일본과 비교하자면 우리나라는 인구가 1/3, 국토면적이 1/4, GNP가 1/12 정도이지만 아황산가스 배출밀도가 5배, BOD 배출밀도 20배, 유독성폐기물배출밀도 4.5배에 이른다. GNP당 에너지 사용량은 우리가 일본의 3.5배에 이른다. 1인당 소득은 일본의 1/4 수준이나 1인당에너지 사용량은 일본의 1.2배이다. 우리의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독일을 다 앞질렀다 10).  

 

경제학자들은 1인당 소득이 5,000 달러를 넘으면 환경이 개선된다는 Kuznets 이론을 자주 내세우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소득이 10,000 달러에 이르기까지도 환경오염물질 배출량이 계속 증가하기만 했다 11). 결과로 우리나라의 환경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울산, 온산 공단은 주민 37,000여명을 이주시키는 방법으로서 공단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여천공단에서도 주민들이 환경오염을 이유로 이주를 요구한 바가 있다. 1991년에 낙동강 페놀오염사고가 있은 이후로 정부는 ‘맑은 물 대책’에 17조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했다고 하나 물을 오염시키는 정책이 더 잘 추진되어 물은 더 나빠졌다. 그래서 현재 수돗물을 안심하고 그대로 마시는 사람은 전 인구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12). 또 세계에서도 자동차가 가장 바쁘게 돌아다니는 나라가 되어 대기오염도 세계에서 가장 심한 나라로 항상 선정되곤 한다. 한국 사람들의 승용차 대당 주행거리는 1년에 2만6천 km 인데 반하여 미국의 평균 주행거리는 1만9천 km, 영국이 1만5천 km, 프랑스가 1만4천 km, 독일이 1만2천 km, 일본은 1만 km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 건설되는 도로로 인하여 우리나라 승용차의 주행거리는 앞으로도 이에서 더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예측이 되고 있다 13). 우리나라는 교통 에너지가 전체 에너지 수요의 23%에 이를 정도로 교통 에너지 소모가 많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나라의 도시들을 공기 나쁘고 시끄럽고 교통소통이 안 되는 곳으로 만들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런 성장위주의 경제개발정책을 아직도 계속 밀고 나가고 있다. 우리 정부가 세운 2020년까지의 장기발전전략에 의하면, 인구는 장차 5천만에서 안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20년까지 30,000 달러로 올리고, 자동차는 지금보다 두 배 반이 늘어 2,500 만대를 보급하여 2인에 한 대 꼴이 되도록 하고, 공장면적도 지금의 두 배반이 되도록 380 km2를 공급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14). 이러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에너지는 1990년을 기준으로 2030년까지 4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놓은바 있다 15). 수자원은 또 1996년에 발간된 수자원장기종합계획에 의하면, 1997년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합하여 1인1일당 535 리터에서 2011년에는 760 리터를 공급하기 위하여 대목적 댐 20개를 더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16). 그리고 2001년에 건교부에서 새로이 작성한 계획에 의하더라도 2020년까지 생활용수가 연간 90.21억톤, 공업용수가 45.65억톤이 필요하여 둘을 합치면 여전히 1인1일당 744 리터가 필요한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17).

 

이런 장기발전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각종 대형국책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국책사업들은 대개가 공개적인 논의를 거쳐 결정된 것이 아니라 먼저 정치적으로 결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어 사업타당성조사보고서가 꾸며진다. 그리고는 사업을 먼저 시작한 후에 환경영향평가를 형식적으로 거친다. 일단 사업이 착수되면 ‘시작된 국책사업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예산을 서너 배, 대개는 그보다 훨씬 더 크게 올려 현실화한다. 비판의 소리는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사업을 합리화시키고 밀어 부친다. 이들 타당성조사 보고서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에는 많은 사실들이 왜곡되어 있다. 다음에 지금 추진되고 있는 몇 가지 국책 사업들의 문제점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출처 -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60

참고 :

김정욱
2004-12-06

성경과 환경

김정욱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1. 창조질서에 대한 이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는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셨다고 떠들면서 땅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딴판이다. 물, 공기, 흙이며 거기 사는 생물들 각각이 왜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그 이유나 가치를 연구하고 더 좋은 모습으로 가꿈으로서 인류의 생활을 보다 풍성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돈벌이하고 정욕적인 쾌락을 위해서 이용하기 위한 재료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비능률적이고 무가치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보다 더 가치있는 모습으로 변형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굽은 강을 곧게 하고, 습지에서는 물을 빼고, 마른 땅에는 물을 넣고, 살림을 풀밭으로 만들고, 바다를 땅으로 만들고 하는 등등의 대규모의 토목공사들을 벌이고는 인간의 위대함을 자랑해 왔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이러한 인간의 노력들이 많은 경우에 형편없는 실패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원래 있던 자연의 모습들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오묘한 섭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플로리다에서 굽이쳐 흐르는 키시미(Kissimee)강을 곧은 수로로 만들고 나니 강에 살던 많은 생물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강은 굽이쳐 흐르면서 물살이 빠른 곳 느린 곳, 깊은 곳 얇은 곳 등이 있어야 수초가 자랄 수 있는 곳, 물을 잘 정화시킬 수 있는 곳, 수중생물들이 알을 낳을 수 있는 곳, 새끼가 자랄 수 있는 곳 등이 있어서 물도 깨끗하고 다양한 생물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키시미강을 원래 모습대로 돌리고 있는데 직강화(直江化)할 때보다도 그 모습을 복원하는데 훨씬 더 많은 돈이 들고 있다. 이디오피아에서는 10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땅의 절반이 살림이었다. 그러나 그 삼림을 아무 짝에도 쓸데 없다고 생각하고는 목재도 팔고 목축도 하고 농사도 지어 꿩 먹고 알 먹겠다고 다 없애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삼림이 3퍼센트 정도 밖에 안 남아있다. 나무를 없애고 나자 이 땅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온 땅이 가물어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 참사가 벌어지게 되었다. 육지에는 나무가 있어야만 나무에서 증산(蒸散)된 수증기가 비가 되어 내리고 내린 비는 나무가 있어야만 땅에 저장이 되어 생태계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척사업도 마찬가지이다. 밀물 때 잠기고 썰물 때 드러나는 간석지는 해일을 막아주고, 물을 정화시켜주고, 영양이 풍부한 퇴적물로 인하여 수많은 조간대(潮間帶) 생물들을 부양하기 때문에 해양생태계를 지탱하는 기본이 된다. 서해 바다 물고기의 90 퍼센트 정도가 간석지와 직,간접으로 이 갯벌과 연관되어 있다. 근래에 서해안의 건석지가 거의 사라지면서 해일의 빈도가 커져서 간척하느라고 쌓았던 많은 수산물을 값비싼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간척 이전에 생산되던 수산물에 비하면 그 수익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엄청난 돈과 수고를 들인 끝에 얻는 이익보다는 잃는 손해가 훨씬 큰 것이다. 

결국 가만히 따져보면 하나님께서는 강이 필요한 곳에 강을, 바다가 필요한 곳에 바다를, 간석지가 필요한 곳에 간석지를, 땅이 필요한 곳에 땅을, 산림이 필요한 곳에 산림을, 풀밭이 필요한 곳에 풀밭을, 저수지가 필요한 곳에 저수지를 이미 다 주셨던 것이다.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모든 것이 다 뚜렷한 목적이 있고 질서가 있고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억지로 뒤바꾸고 흐트러 놓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우어 주는데 있어야 한다. 자연이 그 원래의 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변형을 가해서는 어리석은 결과 밖에 얻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연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창조질서의 파괴 

지금 인류는 자연의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무책임하게도 이 땅을 수많은 오염물질로 더럽히고 있다. 오염물질 중에서도 자연계에서 분해가 잘 되지 않는 농약이나 중금속과 같은 독성오염물질들은 두고두고 생물들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이들 독성오염물질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내에서 생물체 사이를 순환하기 때문이다. 이들 오염물질들이 생태계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순환하면서 생물들에게 피해를 입히나 하는 것은 다음의 예들에서 잘 증명되고 있다. DDT는 2차대전 중에 발명된 살충제인데 모기와 같은 해충을 박멸하기 위하여 열대와 온대지방에 주로 뿌려졌다. 그런데 지금은 먹이순환법칙을 타고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서 DDT가 검출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세대가 다 죽고 없어진 다음에도 이 DDT는 지구상에 그대로 남아서 생물들에게 피해를 입힐 것으로 예상된다. 이 DDT가 바로 간암을 비롯한 여러가지 암을 일으키는 발암물질 중의 하나이다. 통계조사에 의하면 DDT가 암환자에게서 정상인들보다 두 곱절 반 이상이 많이 검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DDT는 또 칼슘대사를 방해하기 때문에 많은 새들이 알껍질이 얇아져서 번식을 제대로 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DDT는 플랑크톤의 광합성 능력을 떨어뜨리는데 오늘날 세계 각국의 연안의 생산성이 떨어진 것도 여기에 그 원인의 일부가 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먹이연쇄에 의한 독성물질의 순환이 얼마나 정확하나 하는 것은 일본에서 일어난 미나마타병이나 이타이이타이 병에 얽히 이야기를 보아도 명확히 드러난다. 산업폐수에서 미량 배출된 중금속이 바다로 나가서 희석되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결국은 먹이연쇄를 타고 인체에 축적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인명을 빼앗아 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국에서 조사된 바에 의하면 독수리류의 알은 거의 60%가 부화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 알에서 검출되는 오염 물질들이 DDT며, PCB(polychlorinated bipheny)며, dioxin이며, 각종 농약과 중금속 들이다.

지금 인류는 단지 자연을 좀 변형시키고 오염시키는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물들을 또한 죽여나가고 있다. UN의 조사에 의하면 앞으로 20년 내지 30년이 지나면 지구에 있는 생물 종의 1/4이 멸종하리라고 한다. 만약에 내가 성경 중에 디도서 같이 짧은 한 권 정도는 있으나 마나라고 생각해서 성경에서 영원히 찢어 없애려고 했다고 하자. 그러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떼를 지어 몰려 와서는 나를 사단으로 몰아 찢어 죽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못지 않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는 증거인 생물들이 떼죽음을 당하는데 대해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그 존재를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피조물인 자연을 통해서도 알려 주고 계신다. 욥기에도 자연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려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것이 생물들이다. 인간이 똑똑해서 문명을 이룬 줄로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다 자연을 모방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생물들을 모방한 것이 많다. 비행기는 새, 잠수함은 물고기, 레이다는 박쥐, 컴퓨터는 두뇌를 모방한 것이다. 인간이 생물들을 아무리 잘 모방한다 해도 생물들 그 자체만큼 훌륭한 물건들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밥 떠 넣어주면 에너지가 나오는 기계, 나무 잎사귀 넣어주면 비단이 나오는 기계, 흙에 꽂아 두면 곡식이 나오는 기계 등등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가 병이 났을 때 병을 낫게 하는 약들도 대개는 생물들에서 나온다. 그리고 많은 생물들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 그것을 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된다. 이 생물들이 바로 우리 생명의 기반이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재료이고 생활의 지혜의 근원이다.

그러면서도 지금 인류는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명목하에 삼림이나 습지 같은 생물들의 가장 중요한 서식지들을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영종도에 공항을 짓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경제개발의 논리로 이루어진다. 영종도의 갯벌은 여름을 시베리아에서 보내고 동남아와 호주에서 겨울을 나는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봄과 가을의 이동 중에 잠간 들르는 중간 경유지이다. 여기 갯벌에 사는 생물들을 먹이로 하여 계속되는 비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갯벌을 서해의 해양생태계를 지탱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영종도의 갯벌인 이런 생물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지역이지만 경제적인 논리로 주판을 튀기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주판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인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창조하신 생물들을 그것이 어떤 생물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다 죽여 없애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약도 안주시고 우리에게 병을 허락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지금 암이나 에이즈가 잘 치료되지 않는 것은 그 약을 만드는 생물들을 인간이 이미 다 멸종시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또 많은 땅들을 황무한 사막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생태학적으로 농경지로 부적합한 곳을 무리하게 개간함으로 인하여 일년에 600만 ha의 농경지가 완전한 사막으로 변하고 있으며, 또 일년에 1100만 ha, 즉 남한만한 면적의 삼림이 무리하게 농경지로 개간되고 있는데 이의 대부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사막으로 변하고 만다. 지금 아프리카에서만도 수백만의 인구가 삼림을 농경지로, 농경지를 다시 사막으로 만들면서 여전히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국경을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남미나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에서 땅을 무리하게 혹사하면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여 사막을 만들게 되는 동기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가난한 나라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자연을 희생하였다가 다시는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환경이 황폐해진 나라들도 많이 있다. 


3. 21세기의 환경문제 

이러한 환경문제는 머지 않은 장래에 인류에게 큰 재난으로 닥칠 것이다. 현재 50억의 인구가 다음 세기의 들어서서 80억 내지 140억에서 안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인류의 끊임없는 경제개발 노력에 힘입어 지구의 경제규모가 앞으로 2025년이면 다섯배, 2050년이면 열배는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경제규모가 열배 커진다는 말은 생산이 열배 커진다는 말과 같고 생산이 열배 커지기 위해서는 인류가 지금과 꼭 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에너지와 자원이 열배 더 필요하고 환경파괴행위도 열배 더 커진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열배나 더 커진 경제를 뒷받침할 많은 에너지와 자원이 이 지구상에 있느냐 할 것 같으면 한 마디로 말해서 '없다'. 이러한 경제는 대부분이 재생이 불가능한 에너지, 광물, 삼림, 흙, 바다 등으로부터 얻게 되는데 이러한 자원은 한정이 되어 있어서 언젠가는 거덜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지구가 지금보다 열배나 더 커진 환경파괴 행위를 감당할 수 있나 할 것 같으면 그것도 한마디로 말해서 '없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석유의 매장량은 지금대로 쓰면 앞으로 약 50년 정도 쓸 수가 있고 석탄은 200년 쓸 것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을 열배 더 빨리 쓰면 50년이 5년, 200년이 20년 밖에 안된다. 에너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원도 다 마찬가지이다. 모든 선진국들이 처음 산업을 일으켰을 때에는 자기나라에서 나는 자원으로 산업의 수요를 충족시켰지만, 지금은 선진국 치고 자기나라에서 나는 자원으로 자기나라 산업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나라가 없다. 모두가 후진국으로 부터 수입한 자원에 의존한다. 앞으로 몇십년 지나고 산업화가 더욱 진전되면서 지금은 후진국으로 있는 중국이나 브라질 같은 나라가 자국의 산업에 충당하기 바빠서 더 이상 자원을 수출할 수 없다고 할 때, 그 때 지구 경제는 마비가 되고 말 것이다. 무한한 자원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한 가지 자원이 모자랄 때마다 과학자들은 대체자원을 찾곤 하지만 대체자원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무한한줄 알았던 물이나 흙까지도 유한하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절실히 깨닫고 있다.

열배나 더 커진 경제활동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환경문제도 인류의 앞날을 위협한다. 그 중의 하나가 지구의 온실화 현상이다. 산업화 이전에 대기중에 250 ppm이던 이산화탄소가 지금은 350 ppm으로 증가하였고, 이것이 다음 세기의 중엽 이후에는 배가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래서 다음 세기의 말까지는 더워진 기온으로 인하여 빙하가 녹아 지구의 해수면이 65cm 이상 상승하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만약에 지구에 매장되어 있는 석탄과 석유를 한꺼번에 다 태운다면 이산화탄소는 지금의 다섯배로 늘어나리라고 예상된다. 이럴 경우에 지구의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만약에 이 때 지구의 빙하가 다 녹는다면 해수면은 60 내지 70m 상승하게 되어 지구 대부분의 인간의 주거지와 농경지가 바다에 잠기게 된다.

오존층의 파괴도 두드러진다. 지난 10여년간 남극 상공의 오존층은 절반이, 칠레 남부의 상공은 1/4이, 북반구 지역은 3% 정도가 얇아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최근에는 북극의 상공에서도 남극에서와 비슷한 파괴현상이 나타났다고 보고되고 있다. 오존층은 태양이나 외계에서 오는 강한 자외선이나 우주선, 감마선 등을 차단하여 생물들을 보호한다. 앞으로 오존을 파괴하는 원인 물질인 CFC(chloro-fluoro-carbon: 염화불화탄소)를 전혀 규제않고 나간다면 2020년이면 북반구의 오존층이 평균 15%정도 파괴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그 파괴는 고위도로 올라 갈수록 파괴의 정도가 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CFC를 더 이상 방출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미 대기중에 방출해 놓은 오염물질 만으로도 오존층은 상당량이 더 파괴될 것으로 예상된다. 산성비를 비롯한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생태계가 광범위하게 피해를 입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지금 유럽과 북미에서 많은 삼림이 죽어가고 산성호수들이 생겨나고 있는데, 대부분이 그 원인을 산성비에 돌리고 있다. 산성비는 극동지역에까지도 확장되었다. 앞으로 21세기에 이르러 남미와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지역까지도 경제개발이 확산되어 산성비의 영향을 받게 된다면, 지구상에서 온전하게 남을 생태계를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급속도로 사막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진데 이로 인하여 해마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다. 21세기에 이르러 지구의 경제규모가 열 배 커지고, 이에 따라 사막화의 속도도 열 배 커진다면, 그 때는 2,3년이면 인도대륙, 4,5년이면 중국대륙이나 미국대륙이 사막으로 변하게 된다. 지금도 육지의 거의 30%가 사막인데, 이런 속도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지구상의 대부분의 땅들이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앞으로 20년 내지 30년 안에 지구 생물종의 1/4이 멸종될 것이라고 추산이 되고 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경제규모가 열 배 커지면서 생물의 멸종속도도 열 배 더 커져서 2,3년마다 1/4씩 멸종해 간다면 지구 생태계는 안정을 찾지 못하고 금방 파멸되고 말 것이다. 

 

4. 교회의 사명 

인류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살아가기를 고집한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인류가 자멸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에 이르러 인류의 최대 과제는 환경문제를 해결하는데 촛점이 모아질 것이다. 환경위기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의 물질 문명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자연을 정복해서 길들이고 이용하기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리하여 자연에 가한 대규모의 파괴가 곧 인간의 승리인 것으로 인식하여 왔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린 대규모의 자연파괴 혹은 변형행위는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대규모의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싸워 이기는 행위를 미덕으로 기려 왔으나, 인간은 결코 자연을 거스려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다. 자연법칙에 순응해서 자연을 지키고 가꾸며 살아야 한다. 성경에는 분명히 에덴동산을 '가꾸고 지키도록 (to dress and to keep)' 사람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2:15). 인간이 이 땅을 마음대로 오염시키고 파괴하고 생물들을 죽여도 된다는 당위성은 성경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이 땅을 가꾸며 살아야 한다.

현실을 볼 때에 우리는 이 땅의 종말이 나날이 나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는 큰 소망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어디에 만드실 예정인지 잘 모른다. 이 우주가 아닌 다른 곳인지, 아니면 이 우주 어디에 있는 다른 곳인지, 아니면 이 우주 어디에 있는 다른 별이 될런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혹은 이 땅을 다시 회복시켜서 만드실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때에 교회는 이 땅을 회복시키는 일에 하나님의 충성된 동역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이 땅을 회복시킨다는 각오로 열심히 이 땅을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 교회가 이 땅도 간수를 못한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인들 어떻게 간수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이 땅의 많은 기독인들은 큰 착각들을 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일하면 할 일을 다 한 줄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바깥 세상을 향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들을 전도하고 구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을 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착각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막 16:15, 롬 8:21, 골 1:23). 이 땅이 오염되고 그 안에 피조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천만이나 되는 기독인들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참다운 기독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들에게 진정 기쁜 소식은 인간의 죄악으로 고통받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도록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amazement/a3/a34/a34c5.htm

출처 - 창조지, 제 105호 [1997. 11~1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

참고 :

이웅상
2004-12-06

생태계의 창조섭리

이웅상
한국창조과학회 전임 회장 (3대,5대)
명지대학교 교수/교목

 1. 타락 이전의 생태계 

하나님이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하신 결론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1) 라는 말씀이었다. 창세기 1장6절에 하나님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심으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궁창은 하늘이란 말로 대기권 위에 물층이 있어 지구를 보호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지구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 때 이 물층이 지구위에 쏟아졌으니, 시간당 1.3cm의 소나기로 계산해도 40일간 내린 강우량은 12m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창7:1~12). 여기에 지하수가 터져 나와 온 지면을 물로 덮은 것이다.

이 엄청난 양의 물이 대기권 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니, 전 지구는 이상적인 환경을 유지했을 것이며, 대기압은 적어도 2.18기압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궁창위의 물이 존재함으로써 지구환경에 미쳤던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제일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궁창위의 물에 의한 온실효과다. 즉 대기권위에 둘러싸인 물층에 의해 지구는 적도나 극지방이 모두 온화한 이상적인 기온과 습도를 유지했을 것이다. 오늘날 기상학자들은 궁창 위의 물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면, 지구에는 비가 내릴 수 없고 오직 이슬에 의해 수분이 공급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2장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6절에는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정확한 과학적 기술(記述)인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한 것이 기상학적 지식이 전혀 없었던 B.C 1450년 경이라면 그는 어떻게 홍수 이전의 보지 못한 지구환경을 이토록 정확히 기술할 수 있었을까?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모세에게 창조의 비밀과 역사를 계시하여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이며 (딤후 3:16, 벧후 1:21),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요 신비인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더욱더 풍성한 자료들로 궁창위의 물에 의한 온화한 지구환경을 증언하고 있다. 북극에서 화석으로 발견된 종려나무, 산호초, 맘모스 등은 과거에 이러한 생물들이 북극에도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생물체의 잔유물인 석탄과 석유도 극지방을 포함하여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악어의 화석은 미국 뉴저지주와 영국 뿐 아니라, 남극지방에서도 발견되었다. 최근 북극의 얼음 속에서 발견된 맘모스의 위(胃)에서 연꽃 같은 아열대 식물들의 화분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상상할 수 없는 화석들이 남극의 세이모아라는 섬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남극이 빽빽한 삼림으로 우거졌으며,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었음이 화석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이 모든 자료들은 궁창 위의 물과 이로 인한 온실효과 이외에는 어느 학설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다.

다음으로 궁창 위의 물은 생물체에 해로운 단파장의 방사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자외선과 우주선은 DNA를 파괴해 생물에 해로운 돌연변이를 유발하는데, 이러한 방사선이 완전히 차단됨으로써 지구는 생물이 살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궁창 위의 물로 인해 대기압은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높았을 것이며, 이 높은 대기압은 세포에 보다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게 했을 것이다. 결국 산소를 필요로 하는 생물들의 성장은 더욱 활발했을 것이며, 상처를 입었을 경우에도 훨씬 빨리 치료되었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인류가 대부분 900세 이상 살았다는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놀라운가! 모세 자신은 120년 밖에 살지 못했으면서도 이 놀라운 진리를 기록했으니, 성령의 능력이 아닐까? 오늘날 과학은 지구초기의 이상적인 환경으로 인해 생물들의 수명이 길고, 그 결과로 거대한 크기로 성장한 생물들을 많이 발굴해 왔다. 길이가 30m 정도나 되는 거대한 공룡이 발견되었는가 하면, 길이 1m정도의 잠자리, 키가 4m나 되는 낙타, 키가 3m를 넘는 조류들, 오늘날에는 원숭이 만한 나무늘보가 5.5m되는 거대한 화석으로 발견되었다. 이들의 대부분이 현재의 생태계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이지만, 오늘날 지구의 가뭄, 혹한 등 생장에 불리한 환경의 변화로 인해 궁창의 물로 보호를 받고 있었던 노아의 홍수 이전처럼 빨리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2. 타락 이후의 생태계 

죽음도 고통도 없던 완전한 에덴동산의 생태계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후로 지구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8). 종(種)간의 교잡과 돌연변이를 통해 다양한 변이가 생겨나게 되었고, 생태계는 생존을 위한 생물간의 치열한 투쟁터가 되고 말았다. 식물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화학독성물질을 생산해 자신을 보호하기 시작했고(Allelopathy), 유익한 박테리아들도 병원균이 되어 생물을 죽이는 기능을 갖게 되었다. 상호이익을 추구하던 공생관계도 많은 것들이 기생관계로 변해 서로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동물들도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기 위해 육식을 시작함으로 오늘날의 생태계의 먹이 피라밋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3. 홍수 이후의 생태계 

궁창위의 물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괴되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후 세상은 마침내 죄가 관영하게 되었고, 인간의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임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근심하셨다(창 6:5,6). 결국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40주야 동안 비를 내리셨는데, 창세기 7장11절에 표현하시길 '하늘의 창들이 열려' 비가 쏟아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의 죄로 파괴된 것이다. 그 결과로 인간의 수명이 갑자기 짧아지기 시작하였으니 노아는 950년을 살았으나, 그의 아들 셈은 602년을, 손자인 아르박삿은 438년을, 그의 11대 손인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다 죽었다. 6백여년 만에 인간의 수명이 900세에서 175세로 줄어든 것이다. 수명의 단축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마침내 100세 이하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궁창위의 물이 파괴됨으로써 인간의 수명만이 단축된 것이 아니다. 모든 생물의 수명이 줄어들고 성장률이 떨어졌다. 식물계에 의한 절대 생산량이 떨어져 채식만으로는 생물들이 생활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셨으니(창9:3), 이 때부터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시작되었으며, 인간 또한 육식을 하게 된 것이다. 

궁창위의 물이 없어지자 지각은 일정한 습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물이 증발해 구름을 형성하여 무지개를 이루니 이것을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언약으로 사용하셨다(창9:13-16). 그러나 지구는 궁창 위의 물이 파괴된 이후 계속 퇴락해 오늘날의 많은 생태학적인 지구 종말론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산화탄소의(CO2) 위기설, 오존층의 파괴, 대기와 수질의 오염, 방사능 오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새 창조를 하고 계시니, 이사야와 베드르, 요한을 통해 예언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그것이다(사 65:17,66:22; 벧후3:13; 계21:1). 거기에는 눈물도 애통하는 것도 없으니 사망도 아픈 것도 없을 것이다 (계21:4). 또한 그곳은 각종 환경오염으로 시달리지 않고 생수와 신선한 공기를 어디에서나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니라'(계 21:27)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을 위한 새 세계가 마치 신부가 단장하듯이 예비되어 있으니(계2:12)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가! 모든 환경과 생태계가 다시 새롭고 완전하게 창조되는 세상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창조된 생태계를 바라보는 기독인의 바른 자세는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첫째로 성서적 자연관의 확립이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곳곳에서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밝히고 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원시대기에서 우연히 화학반응이 일어나 최초의 생명체가 생겨나고, 여기서부터 오늘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물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말씀 속에는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진화론의 설명처럼 인간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진화한 가장 고등한 동물이므로 마치 자연의 주인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물과 같이 피조물중의 하나인 것이다. 시편 50:10-12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은 철저히 세계의 소유주는 창조자 하나님이심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맡은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창세기 1:28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주신 명령이 있다. '생육하고 번영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의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이다. 창조 세계의 주인은 분명히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인 것이다.

청지기로서 인간의 첫 번째 책임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자손번식에는 충실했지만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에는 거역했다. 창세기에서의 인류는 바벨탑을 쌓고 흩어져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동케 하심으로 강제로 흩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편리주의와 산업발전을 핑계로 도시를 건설하고 엄청난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살면서, 온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을 어기며 살고 있다. 결국 자연은 훼손되고, 오염물질의 대량생산으로 지구의 생태계는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해결책은 말씀에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 대도시라는 현대판 바벨탑 건설을 지양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지기로서 인간의 두 번째 책임은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은 '땅을 정복하라'는 말을 '땅을 소유하라'는 말 내지는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마음대로 개발하고 착취하라는 뜻으로 오해해 왔다. 그러므로 인류역사의 상당부분이 서로 땅을 점령하려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개발이란 명목아래 자연은 말할 수 없이 파괴되어 왔다. 그러나 창세기1:28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법대로 '경작하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땅을 인간이 소유하고 마음대로 훼손하고, 땅의 권리를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잘 관리하며 경작하여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이 번성케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25장에는 땅을 경작하되 7년마다 1년씩 땅을 쉬게 하고, 그동안 저절로 맺힌 열매조차도 거두지 말도록 안식년을 명하시고, 50년째 되는 해에도 동일하게 땅을 경작치 말고 쉬게 하도록 하는 희년 제도를 주셨다. 결국 땅을 경작하되 훼손되지 않고 자연을 보전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청지기로서 세 번째의 책임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는 것이다. '다스리다' 라는 말은 성경에서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보호하다' 라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섬기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창조자를 대신해서 잘 관찰하고, 관리하며 보호하는 책임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이시오, 하나님 자신이지만 피조물인 인간이 죄 가운데 멸망해 가고 있을 때 구원하시기 위해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된 존재로 자연을 섬김으로 보호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자연관은 창조신앙에 기초해야 하며, 이는 창조자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생태계의 특성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생태계는 생물과 무생물과의 끊임없는 물질교환으로 되어 있으며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모든 물질이 순환한다는 것이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무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물이 순환함으로 물에 녹는 모든 물질이 역시 함께 순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오염시킨 모든 물질이 물과 함께 순환하여 결국은 전 생태계를 오염시키게 되고, 그 중의 한 구성원인 인간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도서 1:7에는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고 연하여 흐르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연하여 흐른다'는 말은 그것이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잠시 편하게 살려고 무심코 버린 오염 물질이 나에게 되돌아오며,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야간 몰래 버린 공장폐수가 인간에게 되돌아온다는 경고인 것이다. 성경은 물뿐만이 아니라 대기도 순환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전도서 1:6에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한히 넓은 하늘인데 하고 무심코 방류한 매연이 산성비가 되어 전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오존을 생성해 식물의 생산량을 감소시키며, 동물의 호홉기 질환을 유발시키고 있다. 또한 과다한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 발생된 이산화탄소가 가져와 전 세계적인 온난기후로 빙하가 녹아 세계가 물에 잠길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 오늘날 지구의 현실인 것이다. 전 기독인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를 바로 이해하고 우리의 우매함을 회개하며, 바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창조자께 지혜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청지기로서 자연보전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 제일 먼저 기독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편리주의를 버리고, 좀더 단순하고 절제하는 생활로 돌아가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야겠다. 그리고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창조자를 증거하여 창조 신앙을 갖고 청지기로 헌신하도록 해야겠다. 이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 뿐 만 아니라, 모든 자연이 고대하는 바인 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로마서 8:19)

 

*참조 ; Ecology, biodiversity and Crea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068/


출처 - 창조지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728

참고 :

Michael Oard
2004-09-09

영화 '투모로우'의 지구 온난화에 대한 과대선전

(The Greenhouse Warming Hype of the Movie the Day after Tomorrow)

Michael Oard


     심각한 주제를 다룬 대재앙의 영화로 선전되어지고 있는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는 엄청난 속도의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1-3 지구 온난화는 극지방에서 일하는 한 팀의 과학자들 발아래 있는 남극 빙하의 붕괴로부터 시작되어진다. 연쇄반응과 같은 결과로, 빙하의 붕괴로 인하여 30m 높이의 쯔나미(tsunami; 해일의 일종)가 맨하탄을 뒤덮고, 곧이어 도시는 얼음으로 동결되어 버린다. 슈퍼 토네이도(super-tornadoes)는 로스앤젤레스를 파괴하고, 커다란 우박은 도쿄에 있는 사람들을 두들기며, 뉴델리는 눈 속에 파묻힌다. 3개의 거대한 허리케인과 같은 폭풍이 북반구를 뒤덮는다. 온도는 초당 18°F로 급강하하여 사람들을 완전히 얼려버린다. 지구 온난화는 순식간에 지구를 얼게 하여 다음 번 빙하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빙상들은 너무나 빨리 이동해서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가 없다. 미국 북부에 있는 사람들은 얼음 속에 파묻혀 버리며, 남부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적 역할의 역전이 일어나, 모든 라틴 아메리카의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추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멕시코에 난민 보호를 요청한다. 이 영화에는 부시에 반대하는 강한 정치적 편향이 들어있다.

이 영화는 최근에 발간된 ‘다가오는 대폭풍(The Coming Global Super-storm)’ 이라는 책을 상기시키는데, 그 책에서 빙하기가 펼쳐지는 것은 불과 며칠만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책의 저자들은 빙하기 동안에 시베리아에 털이 많은 매머드가 있었다는 것에서 특히 영감을 얻었다.

지구 온난화가 빙하기를 유발했을 것이라는 생각의 기반은 무엇인가? 빙하기에 관해서는 족히 60가지가 넘는 이론이 있다. 거기에 한 가지, 즉 지구 온난화를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강우를 유발시키고, 빙상을 녹여서 북대서양에 어마어마한 양의 담수를 보내게 되며, 멕시코 만류(Gulf Stream)와 온난 해류를 멈추게 한다. 인근 대륙들은 냉각되면서 전 세계에 빙하기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왜 이 영화를 추천하는가?


많은 과학자들은 처음에 그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가, 그 선전 가치에 열중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가 일반인들의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가차 없이 이용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영국에서 화요일에 있었던 영화 시사회(pre-release screening)에서 영화 홍보원들은 이 영화는 물리 법칙을 무시한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fiction)이고, 지구 온난화가 벌써 일어나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지구 온난화의 위험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영화는 환경론자, 과학자, 그리고 심지어 전 부통령 알 고어(Al Gore)와 같은 일부 정치가에 의해 과대선전이 되고 있다. 월러스 브뢰컬(Wallace Broecker)은 지구 온난화의 무시무시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그린란드 얼음에 보존된 기록을 통하여, 지구 기후계의 교란적인 특성, 즉 매우 다른 상태로 갑자기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밝혀졌다. 나는 온실 가스의 계속적인 축적이 이러한 대양의 재편성을 촉발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연계된 커다란 대기의 변화를 유발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교란적 (disturbing)‘ 이라고 했다. 지구의 인구가 110억 내지 160억이 될 때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광범위한 기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6

많은 인기 작가들이 그러한 온실효과로 인한 빙하기의 공포를 퍼뜨리고 있다. 산불, 가뭄, 홍수, 허리케인, 그리고 심지어 강한 눈보라가 일어나면 지구 온난화 탓으로 돌리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윌리암 캘빈(William Calvin, 1998, p.47)은 월간 대서양(Atlantic Monthly)에서 다음과 같이 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온난화는 역설적으로 급격한 냉각을 유발하여 문명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대격변을 일으킬 수도 있다” 7 뉴욕커(New Yorker) 지의 엘리자베스 콜버트(Elizabeth Kolbert)도 덩달아서 문명의 종말에 대하여 똑같이 무시무시한 경고를 하고 있다.8 일부 사람들은 그 기후 변화는 지구상의 95% 이상의 종을 쓸어버린, 가장 최악의 멸종으로 여겨지는 ‘페름기(Permian)’의 멸종과 같을 것이라고 협박한다. 일부는 심지어 이 멸종이 지구 온난화로부터 유발되었으며, 장래의 격변적인 온난화에 대비하여 어떤 일들을 시행하기에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9 지구 온난화의 일부 옹호론자들은 지금 바로 행동해야만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그 영화와 같은 일이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 속도는 수십 년이라는 느린 과정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10 그렇더라도, 빙하기라는 것에 대해서 수십 년은 격변적인 속도이다. 기후학자(Climatologist)들은 최근에 기후가 빙하기와 간빙기 형태 사이에서 갑자기 바뀔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변동(paradigm shift)을 겪었다. 이러한 생각의 변동을 일으킨 것은 새로운 GISP2와 GRIP 그린란드 얼음 코어 내의 산소 동위원소에 있어서의 돌연한 변화이다.9

다른 과학자들은 전체 줄거리는 믿지 않지만, 돌연한 기후 변화는 그래도 수용하고 있다. 그들은 인공적인 CO2가 대양을 따뜻하게 해서 바닥으로부터 메탄 수화물(methane hydrates)의 방출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5,10 대기로 방출된 또 다른 온실 가스인 메탄은 격변적인 온난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온실 공포에 대해 어떤 근거가 있는가?

나는 지구 온난화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옹호자들은, 북극해의 얼음이 얇아지고 있는 것, 세계적으로 빙하가 후퇴하고 있다는 것, 최근 수십 년 동안 미시간 호에 호수 얼음이 줄어든 것 등과 같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많은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모든 회의론자들도 온난화가 이미 발생해오고 있다는것을 인정하고 있다. 주된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1) 장래의 온난화 규모는 어느 정도가 될 것인가? 그리고 (2) 그것은 유해할 것인가?

옹호자들이 그런 주장을 하게 된 동기는 그린란드 얼음 코어 내의 기후 변화가 급격하다는 증거뿐만 아니라, 2100년까지 CO2가 두 배가 되어 2-6 °F의 지구 온난화가 예상되는 대기 모델의 탓도 있다. 바로 최근에 과학자들은 명확한 피드백 메커니즘 때문에 온난화 되어지는 최대 온도 상승치를 10°F로 증가시켰다.11

그러나, 최근에 대기는 자연적으로 CO2 실험을 진행해 오고 있다. 산업혁명 이래로 대기권 내의 CO양은 약 30% 정도 증가했다. 다른 온실 가스, 특히 메탄은 CO2보다 30%나 더 많이 증가했다.12 따라서 본질적으로 CO2가 60% 정도 증가한 것이 되지만, 인정된 온난화의 정도는 단지 약 1°F 에 불과하였다. 이런 온도 변화의 어떤 퍼센트는 장기간의 온도 측정에서 나타나는 시스템 자체의 편차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어떤 과학자들은 온난화의 일부 원인이 1800년대 후기에 끝난 소빙하기(Little Ice Age) 말엽 이래로 태양복사에너지가 약간 더 많아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13 따라서, 실제 온실 효과는 약 0.5°F 정도 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과 비교할 때, 그 모델들은 CO2 증가에 너무나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옹호자들은 온도가 예상 외로 느리게 상승하는 이유가, 같은 기간 동안 대기 내의 황산염의 증가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두 번째로 언급할 문제는 따뜻한 기후가 유해할 것인가이다. 많은 기후학자들은 따뜻한 기후가 더 많은 강수를 초래할 것이고, 증가된 CO2는 식물의 성장을 증가시켜서 결국 CO2의 증가를 늦추거나 멈출 것이라고 주장한다.14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러한 이점이 금방 끝나버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또 다른 연구 과제이다.


그린란드 코어는 정말로 갑작스런 기후 변화를 보여주는가?

온실 공포의 대부분은 GISP2와 GRIP 코어 내에서의 빠른 변화에 대한 진화론적, 혹은 동일과정적 해석의 결과이다. 산소 동위원소에 있어서 그런 갑작스런 변화는 코어의 빙하기 시기 내내,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에 기후가 온난했을 때에도 나타난다. 빙하기 말의 낮은 온도 지점(cold spike)을 젊은 드라이어스(Younger Dryas)라 한다. 이들의 빠른 변화는 약 1,000년 동안 지속되는 변화를 20, 30년 미만 이내에 일으키는 갑작스런 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천년 규모의 사건들은 꽤 커다란 기후 편차를 나타낸다 - 중부 그린란드에서는 약 20°C[38°F]의 편차..... 그 사건들은 종종 급격하게 시작하거나 급격하게 끝난다. 대부분의 빙하기-간빙기 차이와 같은 변화는 대개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다. 그리고 대기 순환 양상의 변화에 더 민감한 어떤 것들은 1-3년처럼 짧은 시간 내에 변한다.” 15

따라서, 최근의 지구 온난화의 공포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은 얼음 코어에 적용된 진화론적, 혹은 동일과정적 패러다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대신 우리는 그린란드 얼음 코어에 대해 성경적 지구역사를 적용할 수도 있으며, 그러한 산소 동위원소 내의 빠른 변화는 한번의 빠른 빙하기 동안 추위와 더위가 반복된 것을 나타낼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16,17 그렇지 않았다면, 그린란드 코어는 빙하기 이래로 기후가 대개 안정된 상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홍수가 빙하기를 초래했기 때문에, 미래의 빙하기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들은 온난화의 공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가 지구의 청지기(stewards)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구를 돌보아야만 한다. 따라서 온실 효과에 의한 지구 온난화는 중요한 이슈이다. 환경 문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도록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여기에 관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급진적인 환경주의자들의 모든 과대 선전과 유도된 공격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온실효과에 회의적인 대기 과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은 에너지 회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논쟁하는 양측으로부터 증거를 다 들은 후에 균형 있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가능하다면 해석이 필요 없는 실제 데이터들을 많이 모을 필요도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실제적인 제안들을 수행함으로써 잠재적인 문제들을 해결해갈 수 있을 것이다.



References

1. Controversial disaster film casts spotlight on global warming, May 4, 2004, Environmental News Network

2. Scientists warm to climate flick, despite bad science, May 5, 2004, The Associated Press

3. Brown, P., T. Radford, and J. Vidal, May 13, 2004, Never mind the weather overkill: Scientists praise Hollywood's global warning, The Guardian

4. Bell, A. and W. Strieber, 2000. The Coming Global Superstorm, Pocket Books, New York.

5. Callus, A., May 12, 2004, Climate change gets a Hollywood makeover, Reuters

6. Broecker, W. S., 1997. Thermohaline circulation, the Achilles heel of our climate system: Will man-made CO2

 upset the current balance? Science 278, p. 1,588.

7. Calvin, W. H., 1998. The great climate flip-flop. Atlantic Monthly 281 (1): p. 47.

8. Kolbert, E., 2002. Ice memory: Does a glacier hold the secret of how civilization began—and how it may end? New Yorker January 7, pp. 30-37.

9. Lynas, M., May 17, 2004, NS Essay—global warming: is it already too late? New Statesman

10. Disaster flick exaggerates speed of ice age, May 13, 2004

11. Sisson, T. W., J. W. Vallance, and P. T. Pringle, 2001. IPCC report cautiously warns of potentially dramatic climate change impacts. EOS 82 (9), p. 113, 114, 120.

12. Michaels, P. J. and R. C. Balling, Jr., 2000. The Satanic Gases: Clearing the Air about Global Warming, CATO Institute, Washington, D.C., p. 31.

13. Lean, J., J. Beer, and R. Bradley, 1995. Reconstruction of solar irradiance since 1610: Implications for climate change. Geophysical Research Letters 22 (23):3,195-3,198.

14. Report: global warming not so bad, May 13, 2004. Search CNN.com

15. Hammer, C., P. A. Mayewski, D. Peel, and M. Stuiver, 1997. Preface. Journal of Geophysical Research 102 (C12): p. 26,315.

16. Oard, M. J., 2003. Are polar ice sheets only 4500 years old? Impact #361,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El Cajon, California.

17. Oard, M. J., 2002. Wild ice-core interpretations by uniformitarian scientists. TJ 16 (1):45-47.


* Michael Oard has a Master's of Science Degree in Atmospheric Science

 

 *참조 : Global Warming in Perspective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3/n4/global-warming

 

God’s global warming worked just fine : Evidence from the pre-Flood world suggests that we need not fear global warming from carbon dioxide
http://creation.com/global-warming-facts-and-myths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373.htm

출처 - ICR, Impact No. 373, July 2004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99

참고 : 3918|6027|5885|5785|5412|4981|4757

손기철
2004-01-14

유전자변형 농산물


      21세기의 삶을 맞이한 오늘날,우리에게 있어 가장 우려되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면, 이는 '환경오염 및 파괴'와 '녹색혁명의 종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식물과 관련되어져 있는데,식물은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 에너지 제공처일 뿐만 아니라, 생명체의 건강유지 및 적절한 생존환경을 만드는데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창 2:8).

오늘날 인류가 60억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60년대 초부터 시작된 녹색혁명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녹색혁명은 주로 전통적 육종기술의 발달,비료와 농약의 개발,그리고 농업기술의 신개발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동안 이러한 녹색혁명은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지만,이제는 그 반대급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즉 생산지향적인 농업기술의 발달은 다양한 연유로 인해 환경문제를 초래해,토양의 중독성 및 토질악화,물 부족,환경파괴 등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는 분명한 '녹색혁명의 한계성'이 예고되고 있다.

한편,최근 들어 분자생물학의 발전은 인간의 건강 및 질병치료 뿐만 아니라, 농업분야의 '녹색 바이오테크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인류의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미 그 서막은 오른 셈이다. 신문지상이나 TV 뉴스 시간을 통해서 심심찮게 유전자변형 농산물의 안정성에 대한 논란을 접하게 되는데,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유전자변형 옥수수나 콩을 수입해서 먹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라는 것이 바로 유전자변형 농산물을 일컫는 것으로,특별한 형질을 나타내는 DNA 유전자를 목적식물에 유전자조작을 통해 첨가시킴으로 그 특별한 형질이 발현된 식물을 말한다. 이 새로운 유전자조작 기술을 사용하면,앞으로 병충해 및 제초제 저항성,고품질성,고저장성,잡종식물 등 새로운 식물의 생산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GMO는 단지 과학기술 발전의 승리로만 치부되어질 것이 아니라, 환경생태 변화와 사회,경제적인 문제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그 미래를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실정이다.

특히나,GMO는 인체에 직접적으로 독성물질 및 발암생성 및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으며, 또한 환경에 방출될 경우  

1) 병해충이나 잡초화 가능성,

2) 야생 및 근연종과의 교잡과 유전자 전이,

3) 다른 생물체로의 전이 가능성,

4) 비목표 생물체에 대한 영향,

5) 생물 다양성에 대한 영향 등은 단순히 실험실에서 검증될 수 없고, 자연에서 상당한 세월이 거친 다음에 발현되기 때문에 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의 상황은 2차세계대전 때 원자폭탄의 개발과 똑같은 경우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삶의 윤리적 측면과 신학적인 측면을 도외시하고 과학기술만이 최고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는 일단의 과학자 태도와 과학이 아닌 신격화된 '과학주의'에 대한 맹종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성장제일주의'와 '국가경쟁력'을 위한 지식이 아니 라, 그것을 활용하는 지혜이다. 인간의 죄악성은 끝이 없다(창 6:5). '선악과'도 부족해서 이제 '생명과(生命果)'까지 도전하고 있는 셈이다 (창 2:9).



출처 - 기독공보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523

참고 :

김성현
2003-10-02

성경적 환경관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에 대한 권위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권위는 한정되고 파생된 것이며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1. 서론

요즈음처럼 환경문제가 모두의 관심이 된 적은 없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무분별한 개발에 의한 환경파괴를 고발하고 있고, 많은 환경단체에서도 민감하게 환경오염과 파괴에 대해 반응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환경파괴에 의해 매일 수십 종의 생물이 멸절되어 종의 다양성이 줄어든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환경은 나아지는 것 같지 않으며 오히려 더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지구의 날이 제정 된지 30년이 지난 지금 각종 미디어에서는 이날을 특집으로 다루어 많은 환경관련 글들을 발표하였다. 주간지인 타임지 역시 어떻게 '지구를 구할 것인가(How to save the Earth)'란 제목의 특별판을 찍어내어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다. 필자는 대학에서 환경화학을 가르치면서 이 환경문제야말로 단순히 몇몇 기술의 개발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세계관에 입각해서 접근해야 하며,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창조지에 실린 두 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이미 성경적 환경관의 개념을 파악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앞의 글의 연장선상에서 좀더 깊이 논의한 것이다.

 

2. 지구, 그 미묘한 균형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지구는 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이다. 세이건(Carl Sagan)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외계의 지적 생명체(ET,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를 찾아봤지만 결코 존재한다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바다는 푸른색으로, 대륙의 많은 부분은 녹색으로 덮여있다. 우선 지구의 크기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도 매우 경이적이다. 만약 지구가 지금보다 더 크다면 지구의 중력이 커져서 메탄이나 암모니아와 같은 가벼운 기체들의 농도가 지금보다 더 높아질 것이요, 만약 지금보다 더 작다면 산소가 외계로 빠져나가 농도가 낮아질 것이다. 그 어느 쪽도 지금의 조건보다 안 좋게되어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도 지금보다 가깝거나 멀다면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거나 하강하여 역시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조건이 될 것이다. 현재 지구의 평균온도가 약 15도인데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아주 적당한 온도이다.

생명체는 이런 지구의 표면에서만 살아간다. 물론 지구 내부에서는 아무 생명체도 살 수 없다. 지표면에서부터 대기가 존재하는 상층부를 대기권(atmosphere)이라 부른다. 대기권은 온도의 분포에 따라 4개의 권역(sphere)으로 나누는데 대기의 순환이 있는 지표면에서 약 10-12km까지의 부분을 대류권(troposphere)이라 하며 그 이상으로부터 약 50km까지를 성층권(stratosphere), 그 이상을 각각 중간권(mesosphere), 열권(thermospher)이라 한다. 각 권역마다 온도의 분포, 화학반응, 대기의 조성 등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권역은 대류권과 성층권이다. 대류권에선 모든 기상현상이 일어나며 생명체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가 많이 존재한다. 성층권은 많은 오존을 함유하고 있어 자외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대류권의 두께를 한번 살펴보자. 약 10km 정도인데 지구의 직경이 약 6300km가 넘는 것을 생각하면 약 0.16%도 채 안 되는 두께이다. 사과를 지구로 생각하면 사과 껍질에도 못 미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류권이다. 성층권까지 고려해도 그 두께는 매우 미미하다. 여러분들은 아마 원자폭탄이 터지는 사진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굉장한 폭발력으로 위를 향해 올라가다가 옆으로 퍼져 마치 버섯모양으로 폭발이 진행되는데 그 이유는 폭발이 대류권 끝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삶은 바로 그 밑의 공간이 어떠하냐에 달려있다. 만일 핵전쟁이 일어나면 그 대류권은 온전치 못할 것은 불문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가 계속 더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몇 십년 동안의 지구온도의 변화를 보면 약간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으로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를 꼽는데 이의가 없다. 이산화탄소는 대기 중 약 0.3%로서 질소, 산소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산화탄소는 녹색식물의 광합성에 필수불가결이다. 만약 이산화탄소의 양이 지금보다 적으면 식물의 광합성이 둔화되어 이산화탄소의 소모가 적어지고 따라서 대기의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증가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이산화탄소의 양이 많아지면 식물의 광합성이 활발하게 되어 이산화탄소 소모가 빨라져 결국 대기 중의 농도가 적정한 값을 유지하게 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이산화탄소의 대기 중 방출량이 너무 많다는데 있다. 전 세계의 에너지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는 연소하면 이산화탄소가 나오는데 그 방출량이 현재 식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아 공기 중에 계속 축적이 되며, 지표면에 도달한 태양광이 적외선 형태로 우주로 방출이 되어야 하는데 마치 온실처럼 이산화탄소가 적외선을 흡수하여 지구의 온도가 서서히 상승한다고 한다. 더구나 지구의 허파라고 불려지고 있는 아마존 유역의 열대우림(rain forest)이 개간 등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어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지구온난화의 직접적인 효과는 기상이변 현상이다. 작년 유난히 엘리뇨에 의한 기상이변이 전 세계적으로 심했는데, 그 이유는 여름철에 태평양의 수온이 예년보다 몇도 더 상승하여 이와 맞닿고 있는 공기층이 어마어마한 열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세계 곳곳에서 대기의 순환에 의해 예측치 못한 기상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3. 환경을 보는 시각

슈마허(E. F. Schmacher)는 그의 명저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를 통해 자본주의 경제원리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비록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찰한 것은 아니지만 환경문제에 관련하여 매우 통찰력 있는 분석을 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자원은 자본과 소득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본주의적인 경제개념으로는 부존자원들, 예를 들면 화석연료나 기타 다른 광물들은 모두 소득에 속한다. 자기 자본을 갖고 장사를 할 때 소득이 생기면 누구라도 소비하게 되어있다. 반면 자본은 소비하지 않고 가능한 보존하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선 자연을 소득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 어느 누구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라도 기술력이 있고 자금력이 있으면 마음대로 캐내어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현재의 서구문명을 이룩했지만 한편 자연을 황폐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동양적인 사고방식은 어떠한가. 도교사상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은 자연을 글자 그대로 스스로(自) 그러한(然) 것으로 보았고 자연과 일체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소위 무위자연(無爲自然)설을 말하는데 인공적인 것을 가하지 않고 자연과 합일되는 사상을 말한다. 이러한 사상에서는 과학의 발달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성경적인 관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자연을 정복이나 숭배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자연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6일 동안의 창조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가시적인 우주, 자연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인간의 창조에서 그 절정을 맞게 되는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도 피조물임에는 분명하지만 다른 피조물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사명을 흔히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르는데 이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가꾸라는 것이다. 창세기 1: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린 화이트(Lynn White Jr.)로 대표되는 많은 사람들은 환경파괴의 원인을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성경 말씀 탓으로 돌리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다른 피조물에 대한 권위(dominion)를 뜻한다(창9:1-7; 시8:4-8). 그러나 우리의 권위는 한정되고 파생된 것이며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은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연을 본래의 의도에 맞게 잘 활용하도록 지음 받았다. 이렇게 인간이 부여받은 직위를 청지기직(stewardship)이라고 하는데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해서 집안을 다스리는 자이다. 분명 집 주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종도 아니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처럼 우리들도 피조세계를 잘 관찰하고 연구하여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한다. 이러한 사명은 한 세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듯이 대대로 이루어 가야하는 사명이며, 이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인간과 피조물간의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

 

4.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지금처럼 신록이 우거진 계절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물고기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섭리를 맛보려면 자연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한편 잘 살펴보면, 이 아름다운 자연에 생존경쟁,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투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잡혀 먹힐 수밖에 없고 자연에 부적합한 것은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다.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 자연에 실은 엄청난 부조리, 모순이 공존하고 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철저히 잘못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진화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러한 상황을 당연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그에 대한 답을 명확히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인간뿐 아니고 다른 피조계까지 타락하였다. 아무 죄 없는 땅까지 저주받은 것을 보면 인간의 다른 피조물에 대한 우월성이 있음이 명백하다. 땅은 이제 아름다운 소산뿐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도 내게 되었다. 즉, 열역학 제 2법칙이 말하는바 붕괴의 원리가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창조시 완벽한 샬롬의 상태에 있었던 피조물들 간의 관계도 왜곡되어 생존경쟁의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전에 누군가가 '바이러스의 전자현미경 사진을 보았더니 매우 아름답더라. 하나님이 유해한 바이러스조차 그렇게 아름답게 만드셨나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러한 견해는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쓸데없는 것, 해로운 것, 무익한 것은 하나도 만드시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 그러한 것들이 생겨난 것이다. 엉겅퀴를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으셨지만 타락의 결과 그러한 것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는 기존의 피조물의 기능이 악하게 바뀐 것이다.

 지금 피조물들은 신음하고 있다. 강한 자건 약한 자건 모두 신음하며 궁극적인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롬8:19-23).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이러한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5. 해결책은 있는가?

 환경단체 중 그린피스(Green peace)나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 같은 단체는 환경보존에 매우 적극적이다. 이들은 포경선 앞에서 조그만 보트를 타고 시위함으로써 고래를 못 잡게 하거나 핵물질을 수송하는 배가 출항을 못하도록 하기도 한다. 이들은 압력단체로서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나 환경보존을 강조하는 개인의 이면에 흐르고 있는 사고 방식은 과연 무엇인가?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환경으로부터의 인간의 고립이다. 인간이 환경을 오염시켰고 결국 인간도 환경으로부터 고립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역으로 환경을 보존하면 인간도 잘 될 것이요, 따라서 세계평화도 올 것이며 결국 지상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지구가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의 다른 피조물에 대한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환경으로부터의 인간의 고립이 궁극적 문제인가? 성경은 결코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의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결과, 모든 관계가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물론이요 인간과 자연 또는 자연계 내에서도 왜곡된 관계가 발견된다. 그러나 이 모든 왜곡과 모순의 근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분리이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그 속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해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거나 환경주의(environmentalism)라는 고상한 이름 아래 자연을 신성시하고 숭배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바울이 잘 지적했듯이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1:25).' 자연을 보호해야 하지만 신성시하거나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한 것과 같다(히브리서3:3). 환경운동을 하는 자들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은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은 지금 진정 큰 위험에 직면해 있다. 자연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때문이다.

 

6.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환경위기의 뿌리는 인간의 타락이며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궁극적인 해결책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그때는 모든 것이 태초의 샬롬의 상태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무엇을 할 것인가. 작게는 물자 아껴쓰기, 함부로 쓰레기 버리지 않기로부터 크게는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의 감축, 대체 에너지의 개발 등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은, 많은 경우 충분히 환경을 깨끗이 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오염이 되는 이유는 환경정화에 드는 비용을 아까와하고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만 풀려고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인 것 같다. 단적인 예가 현재 경제성장의 지표에 환경파괴의 영향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피조계의 청지기로 부르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환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명확해 질 것이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amazement/a3/a34/a34c2.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9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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