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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조정일
2004-07-26

창조개념체계의 과학교육을 위한 함축들


I. 진화개념체계에 따른 과학교육의 시도들 

1970년대 말부터 과학교육의 목표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과학과 기술의 급속한 발전, 과학지식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의 인식, 환경과 자연지원에 대한 새로운 관심 등의 요인들과 탐구 중심의 과학교육 시도의 실패가 그 기본 목표와 전제 등에 대한 숙고를 요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말부터 거의 1970년대까지 과학교육의 목표는 각 학문의 구조에 바탕을 둔 지식과 탐구과정의 이해와 적용에 있었다. 이것은 과학교육이 미래의 과학자를 양성해내는 기능을 한다는 국가의 정책적인 의도에 의해 형성되었다. 따라서 그 당시 과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과학자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배우는 데 있었다. 국가의 지원 아래 많은 교과과정이 개발되었다. 고등학교 수준에서 대표적인 교과과정으로 물리의 Physical Science Study Committee(PSSC)), 화학의 Chemical Education Materials Study(CHEM STUDY), 생물의 Biological Science Curriculum Study (BSCS), 지구과학의 Earth Science Curriculum Project (ESCP) 등을 들 수 있다. 

생물분야의 경우 생물학 전체 내용에 구조를 제공해 준 주제는 ‘진화’와 ‘탐구’이었다.1) 진화의 개념은 단지 내용으로뿐 아니라, 생물교과 전체내용의 구조를 형성해 주는 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부정적이었다.2) 3) 4) 많은 교사들이 위의 교과과정을 바탕으로 개발된 교재들의 선택을 기피하고, 수많은 교사연수에도 불구하고 그 교과과정의 기본 전제와 철학들이 재대로 이해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 교재들이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서들은 지적하였다. 학생들의 성취도도 계속 감소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1970년대 말부터는 과학교육의 비판과 함께 사회의 변화들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그것은 과학교육이 과학자의 양성을 위한 것보다는 학습자의 인간적 측면, 과학과 기술의 사회와의 연관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5) 이렇듯 과학교육의 목표가 학문적 준비이외의 개인적 필요, 사회적 논쟁점, 직업교육 등에 관심을 두는 경우, 과학수업에는 필연적으로 가치관이 반영되고, 과학과 관련된 개인의 생활과 사회의 논쟁점에 대해 학생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도록 격려되고 자극된다. 과학교육이 이와 같은 목적 군들을 위해 수행되어야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이끌어 갈 추진력(핵심)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 지에 관하여는 이견이 있다. 왜냐하면 그 핵심을 인간관, 자연관, 그리고 사회관을 반영하는 사상체계(framework of thoughts)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물교육의 경우, 폴 허드는 새로운 교과과정에서 생물교육의 목적들은 자연의 한 부문으로서, 인간이란 종의 연구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6) 그래서 인간을 다른 종들과는 다른 독특하고도 유일한 유기체로 이해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사회와 자연환경사이의 부조화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성취해야 할 생물교육의 목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생물교육의 기본적인 전제가 진화론이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1960년대의 학문중심의 교과과정만큼이나 과학의 사회적 연관성과 유용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교과과정도 진화사상을 그 노력의 철학적 배경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학문의 기본체계로서 진화사상을 이용하려던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처럼, 과학을 개인적 필요 사회적 논쟁점에 적용할 때 진화를 그 핵심사상으로 하는 경우도 실패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진화사상이 목표성취를 위한 추진력으로 사용될 경우 실패의 잠재적 가능성은 확실하다. 위에서 제시된 과학교육의 목표 군들 - 즉 개인적 필요, 사회적 논쟁점, 학문적 준비, 그리고 직업교육 내지는 인식 - 은 한 개인의 삶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데 반해, 진화사상은 가르치는 교사나 배우는 학생들에게 생물 (크게는 과학) 학습의 당위성을 제공하거나 학습성취 의욕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유물론적인 진화사상이 영적 존재인 인간의 갈구를 채울 수 없으며, 인간, 자연 그리고 사회를 포괄하는 통일적인 세계관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화사상이 생물교육의 구조를 형성해 주고 전체 내용을 꿰뚫는 상위 개념으로 작용할 경우, 그것은 제한적이며 비능률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식은 현실과 동떨어진 별개의 산물로 인식되어지고, 가치나 태도의 면은 각 개인의 선택이나 결정에 맡겨지거나, 기껏해야 인간존속과 사회유지를 위해 필요한 가치와 태도들을 고취하고 권장하는 정도로 밖에는 교육할 수 없다. 또한 이 추구 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자연의 심미적 속성, 신에 대한 경외심, 의미 있는 존재로서 자기확인 등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상의 논의에서 현재 생물교과과정의 추진력이자 핵심사상이 진화라는 개념이며, 이에 따른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이 논문에서는 진화에 대한 대체적 개념체계로서 창조개념체계가 과학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보이고자 한다. 

 
II. 창조개념체계의 과학교육을 위한 함축들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 인간의 타락, 구속, 영화로 구성된다. 이 요소들 중 창조이외의 요소들은 공교육제도의 현실과 자연을 학문대상으로 하는 과학의 성격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과학교육의 목표와 과정들에서 고려하기 어렵다. 그러나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문화명령은 과학교육을 위한 중요한 함축들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진화론 중심의 과학교육체계에 대한 건전한 대안으로서 창조개념체계가 제시될 수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교육의 전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도덕적이며, 책임 있는 존재(Person as a moral and responsible being)이다.(창1:26).

둘째, 모든 인간은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창조성(Creativity)을 갖고 있다 (창2:19,20).

셋째, 인간은 관계를 위한 존재 -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상호간의 관계, 자연세계와의 관계 - 로 지음 받았다 (창1:27,28).

넷째, 인간은 일(work)하도록 부름 받았다 (창1:28).

위의 전제들은 지식, 가치, 기능의 영역에서 분명한 교육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창조개념체계는 자연세계,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상호간의 관계 및 인간의 본질을 포함하는 총체적이고도 일관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특징들은 진화개념체계만큼 창조개념체계가 학생들의 과학지식에 대한 인식론, 가치, 태도 및 학습욕구, 그리고 성취도 전반을 위한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상위개념체계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1. 도덕적이고 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이 전제는 과학교육뿐 아니라, 일반 교육 전 분야에 적용되며, 개인의 지식, 태도와 가치 그리고 기능과 능력의 개발은 자유롭고 책임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자연세계와 관련하여 “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과학교육에 중요한 함축을 제공한다. 과학교육이 지향하여야 할 목적군 중 ‘사회적 논쟁점’의 영역은 과학과 관련된 여러 사회적 논쟁점들의 본질을 이해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식, 가치, 기능면에서 교육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의 문화명령은 이 ‘사회적 논쟁점’ 영역이 논의되고 실행될 수 있는 사상적 배경과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책임을 주셨다. 따라서 자연의 개발은 하나님의 뜻이며, 자연의 이용과 개발은 오직 인간위주로, 탐욕의 동기로 이루어져서는 안되며, 사회와 자연환경이 적절히 조화될 수 있고 부작용을 최소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지시하고 있다. ‘사회적 논쟁점’으로 거론되는 환경오염, 오존층의 파괴, 온실효과, 방사능의 위험, 중금속 중독, 수자원의 고갈, 인구문제, 우주개발이나 유전공학 등 특정연구의 타당성 및 한계 등과 관련된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바람직한 태도와 가치를 지니게 하며, 연구의 손익을 따지고 분명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사고과정을 제공하는 것이 이 목적 군이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담당한다는 마음으로 이 목적 군에 접근할 때 의미 있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교육의 영역 중 가치, 태도의 영역은 창조와 진화의 개념체계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진화의 체계아래서는 보통 사회구성인 다수가 지니고 있는 태도나 가치가 학생들에게 전달되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슈들에 대한 판단은 학생 개개인에게 유기되어 진다. 인간의 미래의 운명은 인간 자신에 의해 결정되며, 그래서 그 결정은 인류의 생존이나 발전 등의 인위적인 척도에 의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쳐진다. 반면, 창조개념체계에서는 피조세계는 인간의 책임 하에서 개발되고 돌보아질 대상이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과 존재를 확실히 나타내며(시19:1, 롬1:20), 이 세계에 대한 연구와 발견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솜씨에 대한 경탄과 즐거움이 된다. 과학과 관련된 사회적 제 문제 및 논쟁에 있어서도 창조의 체계는 보다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

기능의 영역에서 창조개념체계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교육에서 개발하여야 할 종합적인 사고력, 문제해결 능력,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도덕적이며 자유로운 인간이 주는 과학교육에의 함축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 자발성, 자부심, 인간성과 독립심들을 키울 수 있는 학습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수업이 집단 교수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교사의 일방적인 수업주도와 학생의 수동적인 학습활동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위의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개별화 학습과 학생들에게 많은 활동과 책임을 부여하는 수업형태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2. 창조성 (Creativity) 

창조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적인 인간의 본질적이고 현저한 특성이다.7) 따라서 창조성은 예술가나 과학전문직 종사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학자, 신학자, 운동선수, 기업가, 가정주부, 그리고 학생 등 누구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은 더욱 인간적이게 하며 (more humane), 평생에 창조성을 발휘하지 않는 사람은 충분히 인간적인 삶을 누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상으로 창조성 자체가 목적이자 이상으로 추구되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무신론과 진화론에 그 바탕을 두고 나타나는데, 자연주의, 인간중심주의, 심미주의, 기술과학주의, 경제주의 등으로 비인간화, 인종주의, 민족우월주의의 병폐를 야기하였다. 

창조성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지식관과 같이 겸손과 확신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창조성은 무한하지도 않고 절대 무로부터의 생성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그 창조성은 피조세계에 내재된 질서와 구조를 하나님이 세계를 지으신 목적과 관련하여 밝히는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조성이 발휘되는 작업에서 인간은 존재의 의미와 일의 보람을 가지며 자신의 자유와 독립성의 표출을 경험한다.

Torrance는 창조적 사고는 능력, 기능 그리고 동기의 공통부분으로부터 예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8) 그는 창조성을 한 과정(a process)으로 보았다. 어려움, 문제점, 논리의 비약, 빠진 요소 그리고 부조화를 감지하며, 문제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이러한 결함에 대한 추측과 가정을 세우고, 추측을 검증하고, 재수정하고, 재검증하거나 아니면 문제를 재 정의하고, 마지막으로는 그 결과를 전달하는 과정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과학적 방법(scientific method)의 제 요소들로서 과학교육에서 탐구(inquiry)라는 이름으로 지향하는 목표이다. 

새교과과정운동(New Curriculum Movement)에서 강조되었던 탐구교육은 순전히 미래의 우수한 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준비로서 제공된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러한 교육과정을 통해 효과를 얻지 못했고, 대부분 학교들은 이 교과과정을 기피하고 탐구교육의 비현실성을 토로하였다. Welch는 “과학교육자들이 탐구교육을 시도한 햇수만큼 그들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였다”고 하였다.9) 그들의 노력이 실패한 이유로는 여러 외부적인 요인들이 거론되지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진화를 그 교과과정의 기본체계로 삼았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거의 그들의 하는 활동과 자신의 삶을 연관지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배우고 실험하는 것은 과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자신들이 스스로 그 탐구과정에 참여할 수 있고, 그 탐구활동이 자신의 삶의 일부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왜 이렇게 자신의 삶과 학습활동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행동을 가지게 되었을까? 진화사상체계는 학생들이 자연을 탐구하고, 그 과정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여기도록 하는 배경과 기능을 (동기부여, 활동의 유목적성) 제공하지 못하였다. 탐구교육은 전체 사회의 필요 - 과학자 양성 - 를 위해 필요하였지,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잠재적 창조성을 개발하고 보다 인간적인 삶을 위한 과정으로서 제공되지 않았다. 

창조개념체계에서 창조성의 교육은 본질적으로 인간성의 신장을 위한 교육이어야 하지, 어떤 부차적인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됨을 분명히 한다. 비록 우수한 영재들을 위한 교육이 특별히 이루어질 수 있지만, 적어도 창조성교육은, 모든 학생을 위한 것이라는 전체적인 학습환경이 중요하다. 각 개인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성을 부여받았다는 전제아래 모든 학생들의 모든 활동에서 창조성이 고취되고 요구되는 학습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

창조활동은 과학과 관련된 개인적인 필요들, 사회적 쟁점들, 학문의 준비 및 직업인식 등 과학교육의 모든 분야에서 실행될 수 있고 학생들의 개인적 관심, 능력 등의 차이에 따라 개별화 학습이 제공될 필요가 있다. 창조적 행동을 예견할 수 있는 3가지 요건이 능력 (abilities), 기능(skills), 동기(motivations)라고 할 때, 창조개념체계는 창조적 행동을 위한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하며, 소유하고 있는 능력, 기능의 수준에서 창조활동을 명령한다. 또한 그 활동은 자기의 삶에 연장되어지며, 평생토록 지속되는 삶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그러나 능력과 기능이 갖추어 졌다고 하더라도 동기가 제공되지 않으면 창조활동이란 특별히 요구된 환경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진화사상에 바탕을 둔 과학교육의 탐구교육의 결과이다.

창조성교육과 관련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요소로서 학교나 지역사회의 요구가 있다. 입시제도와 학부모의 지식위주의 수업요구 등이 창조성교육을 방해할 수 있다. 또한 교사의 준비도, 민감성, 지식, 세계관 등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상황은 한편으로는 현재의 교육제도 내에서 교재개발, 교수법개발, 교사교육 및 제도개선을 통해 이룰 수 있고, 한편으로는 독자적으로는 기독교대학과 같은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해서 설립된 기관에서 과학교사를 양성하고, 같은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초 중, 고등학교에서 보다 창조성교육이 창조되는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3. 관계를 위한 존재 

창조의 세계관에서 아담과 이브의 창조는 인간의 관계적인 존재를 말해준다. 이 관계는 부부의 관계를 넘어 그들로부터 이루어지는 인간들 간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성을 사람들 서로의 관계를 통해 더욱 고양된다.

반면, 진화의 사상체계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활동의 동기를 삼아 남기 위한 경쟁에서 찾게 한다. 이러한 동기는 더 나아가 인간성의 본질인,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에 기원을 둔 노동이 축복이 아니라, 단지 생존을 위한 수고나 일, 그 자체로 전략해 버리게 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노동이 즐거움보다는 수고가 더 특징이 되었지만, 창조때 부여된 노동의 본질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다.

창조의 세계는 인간 상호의 상위 하나님의 교제만큼이나 서로 긴밀하고, 하나가 되어야 함을 전제한다(요17:11하, 요17:21). 따라서 우리의 바람직한 교육은 학생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자극하며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활동을 제공해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 과학교육에서 이 관계를 위한 학습활동이 어떻게 시도되어야 하는지는 보다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과학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공동적이며 협동적으로 연구하는 활동, 의도적으로 상호 협동을 요구하는 실험활동 등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개인적 필요나 학문적 필요 그리고 작업교육과 관련해서도 인간관계를 교육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4. 노동에의 소명 

현재 논의되고 있는 과학교육의 목표에는 과학과 관련된 직업에 대한 소개 내지는 인식을 하나의 목표 군으로 삼고 있다. 이 목표 군은 과학, 기술과 관련된 직업들의 성격과 전망을 알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도록 준비시키는 일이다. 우리나라 교육체계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연계와 인문계를 결정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구체적인 직업을 위한 전공을 결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다른 어느 교과목보다도 과학교육은 직업교육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창조의 사상체계는 “직업”, “노동”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다. 노동은 충분히 의미 있는 활동이며, 인간성을 증진시키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활동이다. 또한 노동은 인간관계속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관계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표출시킨다. 종합적이고 일관된 창조의 사상체계의 실제적인 작용들인 노동과 직업은 학생들이 과학과 관련된 직업을 알아보고 선택하는데 있어 개인의 자질, 취향, 직업의 유망성을 포함하여 보다 포괄적인 요소들을 고려하게 한다. 어쩌면 다른 사상체계 혹은 세계관 아래서 선택할 수도 있었을 직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창조의 개념체계는 직업이 자기의 삶뿐 아니라 하나님의 전 주권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 궁극적으로 이 개념체계의 차이는 일에 임하는 태도, 자세에도 영향을 준다. 사도 바울은 종과 상전이 각각의 일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으며, 디모데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고 권하라고 명하고 있다(딤전6:2). 이 가르침들은 학생들에게 직업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일에 있어 구체적이고 확실한 함축을 제공하고 있다.

III. 끝맺는 말 

이 글을 통해 창조의 개념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즉, 도덕적이고 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 창조성, 관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노동에의 소명이 과학교육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 군들, 즉 개인적인 필요, 사회적인 쟁점, 학문적 준비, 그리고 직업교육에 어떤 함축들을 제공해 주는지를 지식, 태도, 기능의 영역에서 살펴보려고 했다.

여기서 논의된 창조의 개념체계의 요소들은 그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라고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는 없다. 저자가 창세기 강해설교를 들으며 진화의 개념체계 위에 세워진 과학교육의 제반 시도들을 이 창조의 개념체계를 바탕으로 재구성할 때 훨씬 의미 있고 일관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을 뿐이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을 구성하는 창조, 타락, 구속, 성화의 전반적인 면에서 과학교육에의 함축을 고려할 수 없었던 것은 공교육제도 및 과학이라는 학문에 의한 제한과 저자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충분한 숙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이 창조의 개념체계에 바탕을 둔 과학교육의 실현가능성의 여부이다. 앞으로 창조의 개념체계로부터 나온 함축들이 과학교육을 위해 보다 효율적이며 의미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노력으로서 창조의 개념체계에 입각한 교과과정, 교수법, 교사교육, 수업 등의 개발과 실행, 그리고 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기독교학문학회발표 논문집(89.8.10~12)에 게재된 논문임을 알려드립니다.>

 

참고문헌 

1) Schwab, J. J(supervisor) (1963). 'Biology teachers handbook', New York : John Wiley & Sons, Inc.

2) Helgeson, S, L ; Blosser, P. E. ; and Howe, R. W. (1977). 'The status of precollege science, mathematics, and social science education : 1955-1975, Vol 1 : Science education'. U. S. Government Printing Office.

3) Stake, R. E.(1977).'case studies in science education , Vol 1 'The case reports', U. S. Government Printing Office.

5) Harms, N. C. : Yager, R. E(Eds.). (1981). 'What research says to the science teacher'. Vol 3. pp. 7-8, Washington, D. C : National Science Teacher Association.

6) Hurd, P. D (1981). Biology education. In N. C. Harns and R. E. Yager (Eds.), 'What research says to the science teacher', Vol 3, p.13,

7) Holmes, A. F. (1983). 'Contours of a worldview (Studies a Christian worldview', William B. Edrmans Publishing Company' 이승구 역, 기독교세계관, 1985, p.289. 도서출판 엠마오.

8) Torrance, E. P. (1980). In A. E. Lawson (Ed), '1980 AETS Yearbook : The psychology of teaching for thinking and creativity', p.237, Columbus, OH : ERIC Clearinghouse for Science, Mathematics, and Environmental Education.

9) Welch, W. W. (1981). Inquiry in science education. In N. C. Garms and R. W. Yager (Eds.), 'What research says to the science teacher', Vol 3, Washington, D. C.: National Science Teacher Association.

 


출처 - 창조지, 제 65호 [1989. 10~1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03

참고 :

이정자
2004-07-26

대학생들에게 창조과학을


    강의에 대한 비기독학생들의 반응은 모든 창조과학 사역자들에게, 특히 교수들에게 학원에서의 창조과학활동에 대한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강의가 개설되기까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는, 1999년 12월, 학사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드디어 전교생 대상 교양선택 제9영역, '과학과 자연관리'분야의 교과목으로 창조과학강의 개설안을 통과시키게 되었고, 이에 따라 2000년 1학기부터 그 첫 강의가 시작되게 되었다. 강의 개설을 위해 준비한지 거의 5년만의 일이었다. 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한 후에도 학생들이 수강 신청을 하기 직전까지 계속 강의 명칭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최종적으로 '창조과학의 이해'로 결정, 마무리되었다. 학사위원회에 제출하여 심의를 거치기 위해 강의의 개설 목적과 강의할 내용에 대한 강의계획표 등을 작성하며 이번에는 꼭 심의에 통과되어 강의가 시행될 수 있도록, 강의의 책임교수로서 환경학을 전공한 강준원교수와 함께 기도로 준비했다. 

하나님께서는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창조과학회 회원이 되기 전부터 나를 창조과학 세미나 강사로 세우셨다. 하지만 대학에서, 교회에서, 또 국내에서, 국외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세미나를 하면서도 나는 늘 나의 전공과 다른 분야라는 부담이 있었고 떠밀려서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던 중 강의하는 대학에서 좀더 학문적인 전문성을 갖추어 15주 연속 강의를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어 정규 강의를 위한 절차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선 나의 전공인 수학 분야에서 창조를 증거할 수 있는 학문적인 내용을 발견하지 못하면 강의 개설을 제안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내게 의무적으로 맡겨진 전공과목 강의, 연구와 병행하여 이 일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국의 ACMS(Association of Christians in the Mathematical Sciences)에 가입, 회원이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캠퍼스 내에 창조과학 각 전공 분야를 함께 증거할 수 있을 신실한 동역자들을 세워주시도록 기도했는데 드디어 강준원 교수를 준비시켜 주셔서 함께 강의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내가 강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창조과학강의 개설을 요청할 예정인데 나와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얘기를 꺼냈을 때 그도 같은 생각을 갖고 준비중에 있었던 것이다.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강의를 위한 새벽기도를 하루도 쉬지 않았고, 특별히 수강학생 200명 모두와 각 주제별 강사를 위해 계속적으로 기도하였다. 100명이 넘는 대형강의가 이루어지리라 예상을 못했고 또 대부분 기독교인 학생들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의외로 비기독교인 학생수가 더 많았던 것도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강의 운영

학점은 한 주일 내 2시간 강의로 2학점으로 했고, 60분 강의에 이어 20분 정도는 강의와 관련된 창조과학 비디오를 보고 그것에 관해 각 조장의 인도로 조별 토론을 가진 후, 조별 보고서를 공동으로 작성, 제출하도록 했다. 모든 강의는 시청각 기자재를 사용하여 진행했으며 비디오를 보지 않는 날은 강의를 연속 2시간 하는 것으로 했다. 200명의 학생을 10명씩 20조로 나누었는데 각 개인의 신앙정도에 따라 조를 편성하고 신앙이 깊고 교회나 기독동아리 활동이 활발한 학생을 조장으로 세웠다. 신앙의 정도는 개강 첫 날 설문지를 통해 조사했으며, 신앙의 등급은 5단계로 구분하여 각 단계별로 학생들이 골고루 섞이도록 조를 만들었다. 조장들과는 수업시간 외에 따로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각 조원들이 한 학기동안 삶의 방향과 목표를 하나님을 향하여 맞출 수 있도록 잘 인도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비교적 조별 토론을 즐거워하며 열심히 토론에 참여했다. 토론의 결과는 조별로 평가하여 개인의 중간, 기말 보고서와 함께 학점 산출의 자료로 삼았다.

수강생들의 불평을 가능하면 적게 하기 위해 결정적인 기독교적 언사와 행동은 가급적이면 피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첫 시간을 맡은 내가 '이 강의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과학적으로 증거하는 강의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묵상기도로 시작하겠다'고 학생들에게 선언했을 때 학생들은 항의없이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숙연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주교재는 기원과학(한국창조과학회 편)으로, 참고 문헌은 성경과 자연과학(한국창조과학회 편)으로 했다. 한 학기동안의 강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강의 주제

강의 교수

제1주

기독교 세계관이란?이정자

제2주

기원론의 두 모델

제3주

창조에 대한 수학적 고찰

제4주

우주의 기원:물질과 에너지강준원(환경학)

제5주

성경에 나타난 과학

제6주

엔트로피의 법칙권영식(화학)

제7주

생물학적 고찰:생명의 신비정계헌(생물학: 순천향대학)

제8주

중간고사 (중간보고서 제출)

제9주

생명복제의 원리와 의미김현원(의과대학 생화학교실)

제10주

인체 창조한용표(의과대학)

제11주

지질학적 고찰(지층과 화석)김세현(지질학:상지대학)

제12주

환경과 창조질서강준원

제13주

창조역사의 문자적 고찰이정자

제14주

종합토의강준원, 이정자

제15주

기말고사 (기말보고서 제출)



비기독 학생들의 반응과 의식의 변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른 교양과목에 비해 매우 많은 학생들이 이 강의에 관심을 보였다. 강의 첫 시간에 198명의 수강생 중 81명이 기독교인(매주 교회에 출석하는)이라고 응답했고 마지막 시간에도 82명이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하였으므로 한 학기 동안 기독교인의 수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그 동안 우리가 관심을 갖고 관찰한 것은, 기독교인 학생이 창조과학 강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보다는 비기독교인 학생들의 창조주와 창조론에 대한 반응과 의식의 변화였다. 수강생 중 117명의 비기독교인 대학생들의 의식구조의 변화를 관심있게 관찰함으로, 앞으로 창조과학 강의가 더 많은 대학에서, 각자의 전공분야에 대해 창조과학적 안목으로 훈련되고 헌신된 교수들에 의해 과감하게 실행될 수 있도록 돕고자 함이었다. 다음의 모든 자료는 수강 학생들의 60%인 비기독교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이다.

첫 주 강의 시작하기 전의 설문 조사에 의하면, 창조주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학생이 35명, 종교와 상관없이 창조주(조물주)는 있다고 응답한 학생이 64명이었다. 그러나 15주 후, 마지막 강의가 끝난 후에 다시 조사된 설문에서는 창조주는 절대로 없다는 학생이 12명이었다. 한 학기의 강의를 듣고 난 후, 무신론자들로서 절대로 창조주는 없다던 학생의 50% 이상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했던 창조주라는 신은 바로 기독교의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다는 학생은 40명이고 4명만이 다른 종류의 신이라고 했다.  

진화론에 대해서는 18.2%만이 계속 진리라고 응답했고 그들 중 75.8%는 진화론이 한낱 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거나 또는 많은 오류가 있어 진리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임을 알게되었다고 표현했다.

우주만물은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47%였고 40%는 단호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5명만이 우주만물이 진화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창조과학이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76.8%가 답함으로 창조과학이 복음전도의 좋은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었다. 강의 선택하기를 잘했다고 응답한 학생은 73.7%로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도 상당히 호의적인 학문으로 창조과학이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가 계속 도와준다면 앞으로 성경의 창세기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다는 학생은 87.9%에 달했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계속 더 알고 싶다는 응답이 85.8%였으며, 성경이 진리 또는 부분적으로라도 진리라는 데에 93%가 동의했고 4%만이 특정 종교의 교리를 적은 책이라고 표현했다. 12%의 응답자는, 성경은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게도 꼭 들어보라고 추천하겠다는 학생이 27.3%, 추천하고 싶은 과목이라고 응답한 학생은 65%였다. 

이런 종류와 유사한 기독교적 강의는 대학에서 필요없다고 한 학생은 비기독교인 학생중 단 2명뿐이었다. 강의 내용이나 강의 진행 방법, 그리고 강사 선정과 강의의 주제 선택 등 각 질문에 대해 모든 것이 좋다(또는 아주 좋다)는 반응은 70-80%였고, 좋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응답은 2-4%로 아주 미미한 정도에 그쳤다.

결론적으로 기원론은 창조론 또는 창조론 쪽(진화론보다는)이라고 생각한다는 학생이 51.5%에 달했으며, 계속 진화론이 옳다고 하는 학생은 3%, 진화론 쪽일 것이라는 학생은 17.2%였다. 

이상의 강의에 대한 반응들은, 모든 창조과학 사역자들이, 특히 교수들이 창조과학을 통해 비기독교인 대학생들에게 충분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면서 학문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과감하게 접근하게 하는 용기를 갖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강준원 교수 및 다른 모든 강사들, 그리고 기독교인 수강생들과 조장들의 수고에 감사드리며, 비기독교인 학생들이 소감으로 남긴 글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비기독교인이지만 진화보다 창조가 더 과학적이다."

"진화론의 잘못됨을 비판할 수 있고 창조론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게 됐다"

"단지 시간표가 맞아서 듣게 것인데, 주위의 친구들에게 수강을 많이 권하고 싶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대학마다 개설되면 좋겠다"

"비기독교인에게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다"

                                                                       … 강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번역 -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culture/c5/c51/c51c4/education.htm 

출처 - 창조지, 제 121호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04

참고 :

강정식
2004-07-26

교회와 학교에서의 창조론 교육을 생각하며


우리는 진정한 과학과 진정한 신학에 의해 제공되는 상보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우리의 삶과 생각과 행동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가장 효과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청소년기를 거쳐왔다면, 누구나 중·고등학교 과학시간에 진화론에 대한 선생님의 강의로 인하여 어려움을 경험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선택이 없는 진리-과학-진화론이라는 연결고리에 얽혀 진화론만이 진리라고 기록하며 그 증거를 몇 가지 설명하는 교과서 앞에서, 이제 막 신앙이 형성되고 있는 청소년 그리스도인들은 적지 않은 갈등을 겪어야만 한다. 그 갈등은 비단 과학교과서를 배우는 청소년 뿐 아니라, 모든 대중 매체를 통하여 진화론을 설명하고 있는 과학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게 경험하였거나 경험하고 있는 갈등이다. 이 글에서는 창조론 교육에 대하여 교회에서의 창조론 교육과 학교에서의 창조론 교육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교회에서의 창조론 교육

먼저 교회에서의 창조론 교육을 생각해 보자. 교회에서의 창조론 교육에 있어서는 창조론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진화론의 잘못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성경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여 년 간 한국창조과학회가 한국교회에 미친 선한 영향력과 그 결과는 말로 다 설명 못할 만큼 크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많은 선배 창조과학자들의 헌신과 기도가 보이지 않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리 창조과학회는 앞으로도 이 일에 계속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의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과학'이라는 주제이다. 진화론과의 갈등으로 인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개인의 신앙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는 신앙심의 정도보다는 진화론이 기반을 두고 있는 과학에 대한 각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또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신앙심이 아무리 좋더라도 그의 과학에 대한 입장에 따라 진화론에 현혹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필자와 함께 과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 또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는 것은,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이 진화론의 유혹으로부터 전혀 미혹되지 않고 승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에 유익을 줄 것이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패턴에 대하여는 수많은 연구가 있지만, 여기서는 뷰브(R.H.Bube)박사가 제안한 패턴 중 주요한 몇 가지를 예를 들고자 한다. 패턴의 첫 번째는 "과학은 신앙의 가능성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이 패턴에서는 과학과 신학은 동일한 사실에 대하여 동일한 종류의 것을 말하며, 과학적인 설명과 신학적인 설명이 모순되면 반드시 하나는 옳고 하나는 틀린데, 이 대결에서 항상 과학이 승리자가 된다. 어떤 그리스도인의 과학과 신앙에 대한 관계설정이 이 부류에 속한다면 그는 과학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패턴은 '과학의 발견들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유지된다'는 입장이다. 이 패턴에서는 과학과 신학은 동일한 사실에 대하여 동일한 종류의 것을 말하며, 과학적인 설명과 신학적인 설명이 모순되면 반드시 하나는 옳고 하나는 틀리고, 이 대결에서 항상 신학적 설명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견해는 신앙적 입장에서 참으로 중요한 입장이며,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부류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견해는 학문적인 발전은 없지만, 과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 집단이 있기에,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문화에서의 그 중요성은 간과될 수 없다. 이 그리스도인 그룹은 믿음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반지성적이며, 자신과 자신의 사회를 과학에 의하여 주도되는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분리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때때로는 기본적으로 이 유형에 관계된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을 올바른 과학의 궁극적인 안내자로 만들기 위해 과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계하기도 한다.

세 번째 패턴은 "과학과 신앙은 완전히 관계없어서 그 중 어느 것도 나머지 다른 것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과학과 신학은 다른 사실에 대하여 다른 종류의 것을 말하고, 그 사이에는 어떤 공감도 없다. 과학은 신학에 대하여 전혀 할 말이 없고, 신학은 과학에 대하여 전혀 할 말이 없기에 대립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 유형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패턴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갈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패턴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방법이며,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네 번째 패턴은 "과학과 신앙은 적절한 종합이 이루어지도록 모두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 패턴에서는 과학과 신학은 동일한 사실에 대하여 동일한 종류의 것을 말해야 하지만, 그러나 현재의 과학과 신학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므로 현재 필요한 것은 과학과 신학이 서로 양립할 수 있고 실재(reality)의 새로운 해석에로의 접근을 향한 과격한 변형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변형에서부터 뉴에이지에 이르기까지, 온건주의에서 극단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것은 과학과 신학 모두의 과격한 변화를 요구하며 그래서 진정한 과학과 진정한 신학의 특징을 부인한다는 큰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바른 패턴이라 할 수 있는 다섯 번째 패턴은 "신앙과 과학은 실재에 대한 보충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는 입장이다. 이 패턴에서는 과학과 신학은 동일한 사실에 대하여 다른 종류의 것을 말하며, 각각은 각자의 진정한 역량에 진실할 때 실재의 본성에 대한 가치 있는 통찰력을 서로에게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재에 대한 적절하고 일관성 있는 관점을 가지기 위하여 이 두 형태의 통찰력을 통합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 유형이 진정한 과학과 진정한 기독교 신학의 특징에 대한 가장 일관된 관계이다. 이것은 실재(reality)의 본성에 대한 서로 다른 통찰력으로서, 각각을 정당하게 대하기 위한 전체적인 통합의 노력이며, 과학적 설명과 신학적 설명을 모두 유지하면서 그들의 차이를 인식하고 그들의 유사점을 평가하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점이다.

우리는 진정한 과학과 진정한 신학에 의해 제공되는 상보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우리의 삶과 생각과 행동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청소년들과 대학생, 청년들에게 과학과 신앙에 대한 바른 관계설정에 대한 교육을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이중적인 신앙을 가지지 않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창조론 교육  

이제 학교에서의 창조론 교육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작년 8월에 미국에서는 학교에서의 창조-진화론교육에 대한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기에 이 지면을 통하여 잠시 소개하려 한다.

작년(1999년) 8월 11일, 미국 캔자스주 교육위원회는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에 관한 일체의 언급을 삭제하기로 결정하였다. 약 1년 동안의 긴 논쟁 끝에 10인의 교육위원회는 창조론자들의 손을 든 것이다. 세계적인 과학저널인 「사이언스」(Science, 8월 20일, Vol.285, pp.1186-1187)와 「네이처」(Nature, 8월 19일, Vol.400, pp.697,701)가 이 사건을 1면 기사로 다루었으며,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의 언론들이 이 사실을 기사화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도 즉시 보도되었다.(중앙일보, 8월13일, '진화론교육금지', 8월17일, '진화론의 일보후퇴' ; 동아일보, 8월13일, '진화론 가르치지 말라' ; 조선일보, 8월13일, '학교서 진화론 교육 금지' ; 한국일보, 8월13일, '미캔자스주 생물교과서 진화론 삭제')

새로운 교과과정은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을 삭제할 뿐 아니라, 우주가 대폭발로 인해 탄생되었다는 빅뱅이론에 대한 언급까지 삭제하였다. 이 획기적인 수정에 대하여 미국 국립과학교육센터의 한 관계자는 "수정된 수와 진화에 대한 언급의 철저한 삭제와 정의의 변화 등에서 이전에 보아온 어떤 것보다 포괄적이다"라고 평하였다(뉴욕타임즈 1999년 8월 12일). 사실 이와 비슷한 창조론과 진화론의 법적 논쟁이 앨라바마, 네브라스카, 텍사스 주 등 다른 주들에서도 전개되었으며, 루즈빌 대학의 생물학과 교수이며 미국 국립생물교사협회의 주간자인 랜디 무어의 말대로 "논쟁은 어디서나 진행되고 있고 창조론자들이 승리하고 있다."(뉴욕타임즈 1999년 8월 12일)

캔자스주에서의 이 사건은 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육에 대응해 온 창조론자들의 오랜 노력의 결과 중 하나이다. 필자는 창조론자들이 이런 내용을 입법적 이슈에 도달시킨 정책에서부터, 진화론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도 매우 지혜로왔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진화론이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라고 교과서 내용을 수정하게 하거나(실제로 앨라바마주에서는 이 안이 채택되었다), 때로는 진화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교과서에 포함하도록 제안하거나(텍사스주 등), 때로는 진화는 과학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교과서에서 완전히 삭제하도록 제안(캔자스주)하는 등 각각의 주에서의 창조론 운동은 각각의 상황에 맞게 지혜롭게 전개되었으며, 성공하였다. 현재의 작은 성공들은 앞으로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기초석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 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우리 나라의 여러 종류의 과학교과서들은 모두 여전히 진화론만이 유일하게 과학적이고 진리인 양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진화의 증거라고 제시된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근거에 타당성이 없거나 잘못된 증거들이라는 비난을 받는 내용들이며, 교과서 어디에도 확실한 진화의 증거는 없다. 생화학적으로 하나님의 설계의 증거를 잘 설명한 책인 <다윈의 블랙박스(Darwin's Black Box)>의 저자인 베헤(M.Behe) 교수는, 현재까지 진화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진화론은 무너져야 한다는 주장을 'Publish or Perish'라는 경구로 표현하였다.

우리 나라의 현 교육상황에서 창조론자들은 어떻게 기도하고, 또 운동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교회교육에서만이 아니라 학교 교육에서의 창조론 교육을 위하여도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대안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며, 분명히 우리는 지혜로와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든다면, 첫째, 우리가 '창조과학'이라고 부르는 과학을, 일반 과학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창조론에서 근본적으로 신앙의 영역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창조론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과학의 영역 안에서 창조론을 설명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 이론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의 과학을 넘어서 비그리스도인을 포함하는 창조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앞으로 이 이론이 과학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발전해 가야할 길은 멀지만, 현재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창조를 설명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고 있다. 각 사람에게 전도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듯이, 비그리스도인에게 창조론을 설명하는 방법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적이어야 한다. '지적설계' 이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 과학적인 방법과 '창조과학'의 학문적인 발전을 통하여 그들에게 창조론을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교훈으로는 상황에 맞는 단계적인 전략을 들고 싶다. 지난 수 십년 간 진화론만을 진리로 설명해 온 우리 나라 교과서에서 갑자기 진화론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하고 창조론만 설명하도록 바꾸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보다는 좀 더 나은 상황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를 들어, 창조론을 진화론과 동등하게 가르치도록 주장할 것인지, 둘 다 과학교과서에서 삭제할 것인지, 진화론을 가르치되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하나의 가설로서 가르치게 할 것인지, 진화론에 대한 반론을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게 할 것인지 등, 우리 나라의 상황에 맞는 전략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각각의 전략에 맞게 지금부터 하나하나 준비해 가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입법적 이슈로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최종 목표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새 천년에는 학생들이 교실현장에서 진화론의 허울을 벗어버리고 자연 속에 명백히 드러난 하나님의 창조(설계)의 경이로움을 알게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과 기도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할 것이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culture/c5/c51/c51c5.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05

참고 :

이광성
2004-07-26

창조과학부 특별반을 운영하면서


모든 삶이 사역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창조과학 역시 이러한 사역의 일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의 성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삶'이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
 

    모태 신앙이었던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크게 해보지를 못했다. 그저 의심 없이 말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학교 교육, 특히 중·고등학교 과학교육을 받으면서 의심의 싹이 자라기 시작했다. 물론 교회도 착실히 다니고 믿음 생활도 남에게 칭찬 받을 만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시는가?'라는 질문은 호시탐탐 나를 쓰러뜨리려고 노리고 있었다.  

많은 사건들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하고 그래서 믿음도 자라게 되고 많은 일에 의심하는 모습이 줄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못하고 어렴풋하게 넘어 간 것에 있었다. 힘이 들고 말씀과 기도생활에 소홀해 질 때면 어김없이 이 질문은 나의 마음을 파고 들어왔다.

그래서 교회나 청년회나 성도가 모인 곳에서는 누가 봐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였지만 홀로 있을 때는 그렇지 못한 적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도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100%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 끊임없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고 이야기하는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었다. 가까이는 교회에 다니시는 부모님과 가족들로부터 교회의 많은 성도들, 라디오 방송에서 듣게되는 많은 간증들, 기독교 서적에 가면 만나는 전 세계의 많은 책 저자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를 믿는 사람이 이토록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전 시대적으로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가장 큰 약점은 내가 체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그러더라,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좋더라"고는 할 수 있지만 "이렇다, 좋다"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다시 갈등은 불거졌다. 대학 입학 시 전공을 결정할 때 고민이 되었다. 고등학교까지 배운 것을 토대로 본다면 과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고 더 나아가 오히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니, 과학을 많이 알게 된다면 정말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이러한 걱정을 가지고 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이는 걱정에 불과했다. 입학 전에 기독교 서점을 통해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와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서적을 보면서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입학하고 보니 의외로 과학을 전공하는 크리스천 교수님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 교수님들과 여러 이야기도 나누고 듣기도 했다. 그 중에 길원평 교수님은 대학교 교단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무서운 분(?)이셨다. 게다가 국민일보 기사에 나온 진화와 창조에 관한 기사 등을 교수님 연구실 문 앞에 붙여 놓기까지 하셨다.(길 교수님은 내가 교사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답을 알게 해 주신 분이었다.)  

이렇게 알게 된 것이 바로 창조과학이라는 용어와 단체였다. 그 때는 자격이 되지 않아 창조과학회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는 못했지만 창조과학회 책자와 교수님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해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게된 두 번째 계기가 되었는데, 즉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다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많은 설계의 흔적을 보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알게 된 것이다(예, 열역학법칙 등).

이와 병행하여 세 번째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고 체험하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성경이었다. 교회의 한 선생님을 통해 말씀 묵상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겸손한 마음으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이름을 넣으며 말씀을 대하니 말씀이 정말 송이꿀보다도 더 달게 느껴졌다. 전에는 성경에 왜 만화가 없는지 투정했던 내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어떠한 소설과 책자보다 성경 보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정말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님이 계시는구나".

지금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설사 봤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자기 눈으로, 자기 지식으로, 교만한 마음으로 보는 이들이다. 성경은 그렇게는 이해될 수도 없고, 얄팍한 지식과 과학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책인 것이다.  

네 번째는 기도응답이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기도응답이라고 생각하고 '요구'하기만 하던 시기를 지나,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는 것이 완전한 기도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많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경험하고 순종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 시작하는 체험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연이겠지 했지만 두 번, 세 번 그리고 그 이상의 많은 기도 응답을 체험하고는 도저히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니 나도 "이렇더라, 저렇더라"는 인용이 아닌 "이렇다, 저렇다"라는 체험의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바로 성경 자체의 과학성과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의 역사성을 통해서였다. 비과학이라고 여겼던 성경, 과학으로 밝혀지기 수 천년 전에 기록된 성경에 이미 수많은 과학적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었다(예 : 많은 별, 공간에 있는 지구, 토끼의 되새김질 등). 노아방주가 사실이었다는 것(예 : 노아방주의 과학성, 인디언 벽화나, 한자의 예를 통해 인디언이나 중국인도 모두 노아의 후손이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다.

이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가능했다. 첫째는 사실이다. 주위 사람이 많이 믿고 있다는 사실, 자연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사실, 성경이 과학적이고 역사적이라는 사실 등. 둘째는 체험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인격적 변화, 말씀 묵상의 체험, 기도응답의 체험, 찬양의 뜨거움을 통한 영적 감동, 원수를 사랑할 때의 예수님 심정 이해, 성령의 열매, 결실 등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어떻게 전파할 것인가?(교육 현장으로 부르신 하나님)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었을 때는 입학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학교에서 하나님은 없다라고 하는 교과서를 들고 가르치고 있는 교육현실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교회에서 성경이 절대 권위로 인정받고 있듯이 학교에서는 교과서가 절대 권위로 인정받고 있었다. 만약 교사가 교과서와 다른 내용을 가르친다면, 교과서가 오타가 아닌 이상 그 교사가 잘못 가르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교과서에 하나님이 없다라고 적혀 있으니 '이런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이, 특히 기독교 학생이 올바른 신앙관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교사에 대한 소명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에서나 여러 선교 단체에서 복음으로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창조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 다음 단계인 타락과 구원과 재림을 이야기해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가?"라는 강한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집을 쌓은 것과 같음을, 결정적일 때 하나님을 의심하게 됨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으로 창조과학회에 관심을 더욱 많이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자격이 되지 않아 무심히 넘겼던 창조과학회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부산 기윤실 간사를 통해 같은 방을 쓰고 있던 창조과학회 부산 지부를 알게 되었다. 그 간사를 통해 창조과학회에 가입하고 정기모임에도 참석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를 창조를 믿는 물리교사로 준비시키고 계셨다.

 

3.. 창조과학반 설립 및 운영

1) 설립

하나님께서 처음 2년간은 나를 학교에서 인정받는 교사로 키우셨다. 신임교사였지만 교수능력으로 다른 교사와 학생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삶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인격과 성품이 인정받지 못한다면 다른 많은 것은 사실 소용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3년 째 1999년에 특활활동에 창조과학반을 신청하게 되었다. 우리 학교는 종교에 대해 친숙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특활반이 허락될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는데 놀랍게도 학교측에서는 허락이 떨어져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2) 운영

매 달 마지막 토요일에 전일제 특활을 실시했다. 첫 달에는 물리실에 설치된 전용선을 통해 먼저 학생들에게 창조 사이트 소개했다. 한동대 창조과학전시관(www.han.ac.kr/exhibit /index.html), 새벽별의 창조과학 홈페이지(user.alpha.co.kr/~dawnstar/) 등에서 많은 자료를 보여 주었고 한국창조과학회 홈페이지(www.kacr.or.kr/create/main.htm)에 들어가 즉석에서 학생회원으로 가입시켰다. 다음 달에는 한동대 창조과학전시관에 있는 파워포인트 자료로 노아의 방주, 공룡, 젊은 지구나이, 생명의 기원, 헬렌산을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두 달 동안 기초지식을 습득하도록 한 후 그 다음부터 대학교를 찾아다니며 교수님과 학생들이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부산대학교 길원평 교수님, 고신대학교 이강래 교수님 등을 만나면서 대학 시절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과학과 교수님들을 직접 뵙게 해 주었다.

이와 병행하여 조를 편성하여 연구하도록 했다. 학생 스스로 발표할 수 있도록 창조과학 사이트에서 자료를 받아 학생들에게 분배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일반적인 창조과학 자료와 UFO, 진화의 허구를 다룬 Time지 해석도 있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부산 창조과학회 정기모임에 참석할 수 있도록 담임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낸 것이다.  담임 선생으로서는 단체 활동을 하는데 학생을 특별한 이유(?)없이 그렇게 보낸다는 것은 결정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 때 또 느낀 것이 평소 교사들과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정기모임에 참석하여 여러 교수님들, 강사들을 통해 그들은 창조과학의 내용을 습득하게 되었다.

 

4. 학예제 준비 및 실시

학예제는 물리실에 꾸몄다. 칸막이를 사용, 방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관과 암실관, 생활관으로 구분했다. 먼저 본관은 하나님 존재하심을 드러내는 것을 주제로 삼아 창조과학의 자료를 전시했고 암실관은 비기독인이 흥미를 느낄만한 것으로 꾸몄으며, 생활관은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으로 구성했다. 전시 방법은 게시물과 멀티미디어 자료를 같이 병행했다. 게시물은 워드에서 편집용지를 제일 크게 하고, 프린트를 할 때 인쇄메뉴에서 가로와 세로를 모두 확대했다. 마지막으로 인쇄방식을 나눠 찍기로 하면 B4지 6장 정도의 크기로 게시물이 나뉘어서 프린트된다. 이를 다시 붙여 우드락을 받치고 비닐을 입히면 한 개의 게시물이 완성되었다. 학생들을 방꾸미는 조, 워드 작업조, 붙이는 조, 우드락에 놓고 비닐을 입히는 조 등으로 분업시켜 일을 추진했다.

1) 본관: 먼저 게시물로는 "창조과학과 진화론의 역사" 난을 만들었다. 이는 창조지 117호(1999년 11∼12월호)의 "20세기를 마감하며" 난을 정리하였고 특히 잇단 총기난사 사건으로 미국 사회가 큰 충격에 빠져 있는 가운데 미 캔자스주가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을 폐기키로 결정한데 이어 켄터키주에서는 교실에 십계명을 게시토록 허용하는 등 미 교육계가 창조론을 기반으로 한 도덕성을 회복 운동에 부심하고 있다는 내용과, 캔자스주 교육위원회의 진화론 폐기 결정이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아칸소 주에도 영향을 미쳐 앞으로 유사한 결정이 있으리라는 것을 강조했다.  

다음 전시물은 '성경과 한자'난으로 하나님과 마귀(上帝:상제, 神:신 신, 靈:신령 영, 鬼:귀신 귀, 魔:마귀 마 등), 천지 창조(西:서녁 서, 造:지을 조, 元:처음 원 등), 타락(람:탐할 람, 禁:금할 금, 兇:범인 흉 등), 노아방주(船:배 선, 穴:구멍 혈, 空:빈 공, 分:나눌 분 등)로 나누어 게시물을 만들었고 이 한자를 통해 중국인이 노아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그 다음에는 '성경과 과학' 난이었다. 이는 과학이 발달하기 몇 천년 전에 이미 성경에 기록된 과학적인 사실을 전시하는 코너였다. 내용으론 무수히 많은 별, 묘성과 삼성, 공간에 떠 있는 지구, 운석의 존재, 해로, 바다의 근원, 바람의 무게와 수증기, 전기-통신 시대 예보(욥기38:35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공동조상(여자 : 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는 엄마에게만 받음 → 하와 / 남자 : Y염색체 → 아담), 토끼의 되새김질, 할례 등을 다루었고 이 '성경과 과학' 난을 통해 비 과학으로 여겨졌던 성경의 과학성과 그 저자가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윈은 천국에 갔을까?"라는 파트도 만들었다. 이는 후쿠오카 이현배 선교사님(ccc.kimc.net/lee/LEECREA.html)의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얻었다. 다윈이 신학과에 다녔었고, 종의 기원에도 초판에는 "생명은 최초에 하나님에 의해 2, 3 혹은 하나의 형태로 불어넣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 역시 초기에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며, 노후에는 자신의 이론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진화론의 창시자도 그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멀티미디어 자료로는 노아 방주, 헬렌산 폭발, 공룡, 지구의 역사난을 각각 만들었다. 컴퓨터 1대에 하나의 주제로 4대를 전시했고 특히 노아의 방주는 프로젝션 TV를 연결해, 방문자가 반드시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옆에 노아방주 모형을 비율에 맞춰 축소, 제작하여 전시했다. 컴퓨터 1대에 두 사람의 도우미를 준비했고 관람자가 자유롭게 컴퓨터를 조작하며 볼 수 있도록 인도했다. 그 다음 멀티미디어 자료로는 창조과학회에서 구해온 창조과학 비디오를 보여 주는 '완벽한 지구'난을 만들었다. 비디오가 돌아가지만 게시물이 필요해 물의 밀도, 대기의 조성, 지자기 세기, 지구의 중력, 지구의 온도(이산화 탄소량, 기단이동, 해수이동, 알베도, 자전축, 자전속도, 태양과 지구까지 거리) 등을 게시물로 만들어 전시했다. 이를 통해 이 지구가 얼마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 것 하나 조금이라도 변하게 되면 이 지구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2) 암실관: 암실관은 비기독인이 흥미를 느낄만한 것으로 꾸몄다. 암실관은 사방을 다 막고 형광등 대신에 블랙 라이트를 꼽아주면 흰 바탕이 형광의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장소였다. 먼저 'UFO'난을 만들어 그 허구성과 위험성를 강조했고, 사다리 타기로 캐롤송, 선물, 인공 눈 뿌리기 등의 메뉴를 구성했다.

3) 생활관: 생활관은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으로 구성했다. 한 참 옷로비 사건으로 기독인이 욕을 먹고 있는 상황에서 삶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 코너였다.  먼저 "기독교 독립 투사" 난을 만들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준, 이토오 히로부미 저격의 천주교인 안중근과 공범자로 지목된 우덕순 등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국가를 위한 삶을 강조했다.

그 다음 세계에 영향을 주자는 주제로 창조과학자를 게시했다. 한편으로는 창조론을 과학 발전의 방해물로 여기고 종교가 과학에 들어와 사이비과학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음을 이야기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중에도 창조를 믿는 과학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그 업적은 또한 얼마나 컸는지를 이야기했다. 켈빈, 파스퇴르, 파스칼, 뉴튼, 케플러, 보일, 심프슨, 패러데이, 플레밍, 멘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윌리암 램세이 경, 마우리, 주울, 맥스웰, 모르스, 린네, 오일러, 라이트형제, 프랭클린, 라이프니츠, 조셉리스터 등 그 삶과 업적을 전시했다. 이를 통해 자신이 담고 있는 학문에서 세계 많은 사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독인이 되자는 내용을 강조했다.

그 다음은 '진화론 병폐'난을 게시했다. 진화론의 가장 큰 병폐는 인간존엄성의 말살임을 강조하고 그 예로 약육강식, 공산주의, 히틀러, 북경천안문사태, 인종차별 등을 이야기했다. 이에 반해 우리 기독교에는 사람의 귀천이 없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로 여김을 강조해 상호 존중하고 사랑하자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국가와 세계도 좋지만 자신의 주위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자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학문과 삶'이라는 부분을 게시했다. 이 부분은 물리 수업시간에 수업을 마치기 전 학생들에게 해 준 인성교육을 모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상대속도는 움직이는 관측자가 본 상대방의 속도로 그 값은 상대방의 속도에서 관측자의 속도를 빼 주면 되는데, 이를 통해 인성교육은 "색안경을 끼지 말자"로, 움직이는 즉 편견을 가진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성의 법칙으로는 습관의 중요성, 작용과 반작용으로는 먼저 대접하자는 내용 등을 이야기했다. 이를 통해 과학에서, 학문에서, 또한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자는 내용을 강조했다.

 

5.. 맺음말

하나님께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에게 갈등을 주시고 과학에 흥미를 주시고 교사의 사명을 주신 이유 중에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크게는 세상에, 작게는 학교에 전파하도록 하는 크신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사역에는 참으로 많은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찬양사역, 선교사역, 부부사역, 청소년사역, 복지사역, 도시사역, 농촌사역, 인터넷사역, 문화사역 등 우리가 접해 있는 모든 삶이 사역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창조과학 역시 이러한 사역의 일부분일 것이다. 각 사역을 담당하는 사람의 특징은 그 사역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 사역에 모든 삶을 바치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역의 성공에 중요한 요소가 바로 '삶'이었다는 것이다. 창조과학부 특활반에서 학예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것은 삶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캔자스주에서 진화론 교육을 금지시키는 투표를 했을 때 그 위원들이 모두 기독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진화론을 반대했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 주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농촌사역을 하시는 목사님은 대부분 그 삶을 공유하시는 것을 들었다.  

이렇듯 교회든 선교단체든 개인이든 모든 기독인은 어떠한 사역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주위의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창조과학부를 운영하면서 배우게 되었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culture/c5/c51/c51c6.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06

참고 :

허성욱
2004-07-26

창조론 교육의 필요성


1. 서론

기원에 관한 견해나 학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크게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두 모델로 나눌 수 있다. 자연적인 모델은 진화론이고, 초자연적인 모델은 창조론이다.1) 이 두 개념은 인류역사만큼 끊임없이 대립되어 왔다.

구한말, 서양 문물이 우리 나라에 밀려오면서 기독교가 전래되고 미션계 근대식 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창조주를 알기 시작하였고, 근대식 학교를 통해서 서양과학이 들어 왔다. 일정 때인 1933년 '발명회'가 '과학조선'을 창간하는 한편 찰스 다윈의 기일인 4월 19일을 전후하여 '과학주간'을 설정한 것은 이 시기에 이미 진화론 교육이 공교육기관에서 실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이 창조와 진화라는 두 가지 견해가 함께 들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창조과학회의 창립(1981년) 자체가 기원관 교육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고, 그 전에도 이의 중요성을 이해한 분들이 창조와 진화에 관한 책을 번역하여 우리 나라에 소개하였다. 본 논자도 주일학교2)와 공교육기관 교육과정에 창조과학을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지금 공교육 기관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 6차 교육과정에서는 창조론을 다루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공교육기관에서 학생들은 창조과학자들의 학설이 반영되지 않은 교과서를 통해 일방적으로 진화론만 과학적 진실인 것처럼 배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의 극복을 위해 창조과학교사연합회가 창립(1999년 8월)되었고, 때마침 미국 캔자스 주의 교육위원회가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배제키로 결정한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시기적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창조론 교육의 필요성을 논의해보는 것이 이 소고의 의미이다.

 

2. 진화론의 진화과정

오늘날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져 있다. 만약 과학을 공부한 사람이 진화론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면 과학계에서 이단자 취급을 받기 쉽다. 20년 전쯤에는 교회에서조차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공교육기관에서 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이다. 또 종교와 과학은 다루는 영역이 다르다는 생각으로 서로 비껴가 버린 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진화론은 정말로 과학적 사실인가?

진화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504∼433 B.C.)의 생물 진화에 대한 생각,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 생물의 자연발생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시대를 휠씬 지난 18세기 초에 마우퍼튜스(Maupertuis, 1698∼1759)가 다지증(polydactyly)의 유전을 연구하여 격리와 진화에 의한 자연선택의 역할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 분류학자들(특히, 린네 Linne, 1707∼1778)에 의해 다양한 생물이 분류됨으로써 진화적 사고에 대한 빠른 진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진화론은 지질학의 발달로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영국 학자 허튼(Hutton, 1726∼1797)이 동일 규모, 동일 속도의 지각변화라는 균일론을 주장하였고, 1798년에는 맬서스(Malthus, 1766∼1834)가 <인구론>을 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밖에는 증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인구증가가 빈곤이나 악덕 등 사회악의 원인인 만큼 식량에 알맞도록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내용은 후에 다윈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초에는, 균일론을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프랑스의 퀴비에(Cuvier, 1769∼1832)가 창조론적 입장에서 동물의 구조와 기능, 화석에 대해 연구하여 대변혁론(Catastrophism)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기를 든 라마르크(Lamark, 1744∼1829)가 용불용설(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였고, 영국의 지질학자 라이엘(Lyell, 1797∼1875)이 1830년 <지질학의 원리>를 발간하였다. 그는 "현재는 과거를 아는 열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다윈(Darwin, 1809∼1882)이 그 유명한 <종의 기원>을 통해 자연선택적 진화설을 주장하게 된다.

그의 주장은 창조론자들에게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고, 헉슬리(Huxley, 1825∼1895)가 토론회에서 다윈의 설을 옹호하였다. 영국 박물관의 오웬(Owen, 1804∼1892)은 다윈의 이론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하버드대학의 유명한 어류학자였던 아가시(Agassiz, 1807∼1873)에 의해 미국으로 확산되었다. 아가시는 북유럽 전체가 최근의 지질연대에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주장하고, 대변혁론을 수정하여 신이 이 대변혁에 이어 몇 가지 특수한 경우에 대해서 창조적인 작업을 수행하였다고 추정하였다. 이러한 점진적 창조(Progressive creation)에 따르면, 신은 천지창조했던 그 이래로 자신의 창조물이 점차적으로 최종의 목표에 이를 때, 즉 하나님의 모습과 똑같은 사람이 창조될 때까지 재창조를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1860년에서 1902년에 이르는 기간에 생명과학은 다윈의 이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종의 기원> 발간 6년 후, 수도사 멘델(Mendel, 1822∼1884)이 유전의 법칙을 발표하였지만 다윈의 진화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드프리스(Hugo de Vies, 1848∼1935)의 실험 후 부활하였으며, 1862년에는 프랑스의 파스퇴르(Pasteur, 1822∼1895)가 백조목 플라스크를 사용한 실험을 통해 생물의 자연발생설을 반박하고, "생명은 기존의 생명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생명속생설을 주장하였다.

 1938년 구 소련의 화학자 오파린(Oparin)은 그의 저서 <생명의 기원>을 통해 생명이 어떠한 신비로운 창조에 의하여 생겨났으리라는 가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성되었다는 화학진화를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1953년 시카고 대학의 화학자인 유레이(Urey)와 밀러(Miller)의 실험으로 뒷받침되었다.

1940년경, 골트슈미트(Goldschmidt)는 종(種)의 형성과정에서 다윈이 제안한 많은 작은 변이들의 느린 축적보다는 커다란 유전적 변화가 중요하리라는 생각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많은 지지자가 없었다. 1960년대 초까지는 모든 생물학적 형질은 자연선택에 적응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리고 진화의 기구에 대해서는 거의 신다윈설에 의해 이해되는 것같이 보였다.3)

1980년 10월 16일-19일, 시카고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린 진화론자 학술회의에서 점진론적 진화가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현대적 종합이론의 제일인자로 알려진 아얄라(Francisco Ayala)는 "화석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작은 변이들이 축적되지 않음을 이제 확신한다"고 했다. 그 후 하버드 대학의 구울드(Gould)교수는 갑작스럽게 다른 종으로 변한다는 <단속평형설(斷續平衡說)>을 주장하였다.4)

진화론은 이렇게 진화를 거듭해 왔지만, 여전히 열역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화석학적으로 부정되고 있으며, 그 과학적 증거는 없다.5)

 

3. 창조론 교육의 필요성들

3-1. 구속사적 관점

창조론을 교육해야 할 필요성은 첫째로, 구속사적 관점6)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성경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은 구속의 원리를 정확히 알리기 위하여 주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은혜의 말씀이다. 우리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사의 여정은 "창조 - 타락 - 구원"의 순서로 이어진다. 여기서 '구원'이란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 즉 창조 당시의 그 의롭고 영생하는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만약 '창조'가 사실이 아니라면 '구원'은 의미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창조'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이다. 만약 '창조'가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뿌리째 흔들리게 되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론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는 창조신앙에 있는 것이다.

기초가 허술한 신앙을 성경은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비유한다. 창조신앙이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므로 그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되고 만다. 기초가 튼튼한 신앙, 그것은 창조신앙이 확고한 신앙일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이 확실해지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신앙도 확실해진다. 그 누구도 아닌 창조주 하나님만이 우리를 모든 불의와 죄에서 건지셔서 온전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신앙이 확실한 사람이라야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 그 고백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야 세상에 편만한 이단 사설, 이교의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 대적 마귀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진화사상을 퍼뜨렸을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창조신앙임을 사탄이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기초를 허물어 버리기 위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이비과학 진화론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 진화론이 공격하는 방향은 기독교의 근간인 '창조'이다. 창조를 부정하면 당연히 기독교가 허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속삭임은 얼마나 그럴듯한지 모른다. '신앙과 과학'은 추구하는 방법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다룰 수 없다고 말한다. 창조는 성경에나 등장하는 종교적인 사실이고, 따라서 비과학적이라고 아주 쉽게 말해 버린다. 교과서와 각종 과학도서에, 각종 매체에 그렇게 자주 가르쳐지고 주장되는 진화론이야말로 과학적 사실이라고 속삭인다. 그 속삭임 앞에 엄폐되어 있는 천길 낭떠러지. 소중한 주님의 어린 영혼들에게 그 곳이 낭떠러지임을 알려주고 하나님께서 만유의 창조주이심을 증거해 주는 일이 우리 가르치는 자들의 사명일 것이다.

 

3-2. 세계관 문제

둘째로, 세계관 문제7)이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보는 눈을 말한다. 세상을 보되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인간의 사유, 감정, 의지 및 행위와 관련하여 하나의 의미 있는 사상으로 짜여진 눈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를 주관적, 사상적으로 소화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세계관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견해이다. 그 속에는 우주의 근원, 본성, 인류의 본질과 의미, 인간의 생활태도에 대한 견해들이 들어 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적 견해들도 스며 있다.

이러한 견해들 가운데서 만유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관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창조론적 관점과 진화론적 관점이다. 같은 사물, 같은 화석 자료를 보더라도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어떤 사람은 창조론적으로 해석하고, 다른 사람은 진화론적으로 해석한다. 사물을 보는 눈이 각자 다른 것이다.

창조론은 유신론적인 입장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계시고, 창조주의 지혜와 설계대로 만유와 사람이 피조되었고,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통제하시며 붙들고 계신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무신론이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인한다. 만물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날 수 있으며,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된다는 것이다.

세계관의 변천 과정을 보면, 15C 이전의 영적 세계관이 16∼18C의 과학혁명 시대를 거치면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대치되었으며, 기계론적 세계관의 한계성이 노출되면서 19C 후반의 '신과학 운동'에 의하여 시스템적이며 유기체적인 세계관이 추구되었다.

'신과학 운동'에서는 우주와 인간의 근원자 및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주는 '저절로' 또는 '자율적'으로 창조 목적을 향해 진화한다.

그러나, 우주 만물은 저절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창조주께서 '목적을 가지고' 그의 의도와 법칙에 따라 만드셨다. 그것을 인정하는 세계관이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8) 그 눈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참 자유와 부요를 누릴 수 있으며, 타락 이후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눈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창조론을 배워 알아 하나님을 믿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3-3. 유일신 신앙

셋째, 유일신 신앙 때문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이라는, 만물의 기원을 보는 관점들은 현상계를 다루는 자연과학의 연구방법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두 관점을 견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다. 즉, 진화론자는 창조주가 없다고 믿고, 창조론자는 창조주가 계신다고 믿는다(히11:3).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지으신 바로 그 분이시고, 만유를 직접 창조하셨으므로 만유의 시작을 직접 목격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만유의 창조자이시며, 만유의 대주재자로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는 그들을 주재하는 다른 신이 없다. 여호와는 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신32:12)이시다. 그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시는 유일하신 분(신32:39)이시다.

세상을 친히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유와 생명을 창조하셨음에 대해 언급하시는 구절을 성경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잠3:19),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8:22-31절). 이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의지할 자"이셔서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잠3:26)하신다.

유일신이신 여호와께서는 거듭 자신이 유일신이심을 강조하시고 또, 명백히 하신다. 그러시면서 인간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시기를 잊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

그러실 뿐 아니라, 유일신을 아는 것이 영생의 조건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와 대화하고 협력하며 함께 발전하자"는 운동을 벌일 수도 있고, 종교다원주의적 사고를 할 수도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단호한 어조로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십계명 중의 첫 계명이다. 창조론을 가르치는 일은 진화론적 철학이 청소년들에게 주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유일신 사상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인 것이다.

 

3-4. 인간의 존엄성

넷째로, 인간의 존엄성 문제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생명에 대하여 상반된 인식을 갖게 한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존엄에 관한 인식이다.

진화론자들은 인간 스스로가 아무에게도 의존되어 있지 않으며 스스로 자연의 법칙 속에서 가없는 세월 동안 진화해 왔다는 주장이야말로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와 삶의 의미를 주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인간 운명의 예속을 의미하므로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9)

그러나,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을 길이 없다. 인간은 단지 물질로부터 화학 진화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원이 된 물질 즉 분자 원자에 사랑이니 윤리니 하는 것을 요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물질 자체가 존엄한 존재일 수 없는 것이다.10) 그러므로 각종 패륜 행위, 인간 박해, 폭행, 핍박, 집단 따돌림까지라도 진화론적 사고로는 나무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창1:26-27) 지음 받은 특수한 존재(창2:8, 고전15:39)라고 말씀한다. 인간은 또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창1:28)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 타락하여(창3:6) 비참하게 되었지만(창3:17-19,22-24),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고(창3:21), 메시야 약속을 하셨으며(창3:16), 구약 시대 내내 인간에게 그 계획을  알려 주셨고, 마침내 메시야를 보내셔서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

인간은 복중에서 짓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아셨고(램1:5),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된 (시139:16) 존재이다.1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인식할 때 생명의 존엄성이 인정되고12), 피조된 인간에게는 창조주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할 윤리 도덕과 의무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13)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기 위해서도 창조론 교육은 필요한 것이다.

 

3-5. 인간의 자연과의 바른 관계 정립

다섯째로, 인간의 자연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서이다.

진화론은 "생물의 종이나 혹은 그 이상의 계통군(系統群)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변화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생물은 어떤 공통의 조상에서 점차 분지(分枝)하여 오늘의 수많은 종에 이르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14)고 주장한다. 따라서 진화론상의 인간은 진화의 산물로서 자연 현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수 없다.

반대로 창조론에서 인간은 식물이나 다른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창1:26) 창조된 특별한 존재(창2:7)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물건을 만들어 내고, 조절하는 기능15)을 부여하셨다. 그래서 시조 아담은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줄(창2:19∼20) 만큼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며 지키게(창1:28, 2:15) 하셨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자연만물은 인간의 관리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연의 소유권을 양도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관리를 위임했다는 사실이다.16)

달을 보고 빌고, 해를 보고 빌며, 나무 혹은 돌무더기 아니면 이상한 모양의 돌에게 절하고 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알면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신이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주의 지혜의 작품이다. 인간도 자연도 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자연이나 인간을 예배하는 일은 실로 창조주에 대한 모독이다.17)

태초에 하나님은 지구 환경과 생태계를 창조하실 때 질서와 조화를 주셨고 종의 다양화를 통해 환경조건의 변화에 대해서 상당한 복원능력과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인간문명활동에 의한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환경파괴는 생태계의 자정능력이나 조절 기능을 약화시키고 치명적인 손상을 가해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18) 이것은 정복하라는 말씀을 파괴하라는 것으로 오해한데서 시작된다. 이 말씀은 오히려 '경작하라, 발견하라'라는 뜻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를 창조주의 뜻에 합당하게 개발하고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길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 때에만 가능하다.

 

4.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창조론을 교육해야 할 필요성은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구속사적 관점을 명백히 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하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인간과 자연과의 바른 관계 정립을 위해서이다.

게다가 진화론은 열역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화석학적으로 부정되고 있으며, 그 과학적 증거도 없다.19) 그러므로 바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도 창조론 교육은 실시되어야한다.

 

<참고문헌>

1) 한국창조과학회.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서울 : 태양문화사. 1981.

2) 허성욱. 주일학교 공과에 창조과학을 심어야. 한국창조과학회지 창조 1993년 2월호.

3) 성기창 외. 생물진화학. 서울 : 형설출판사. 1990.

4) 한국창조과학회.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서울 : 태양문화사. 1981.

5) 위와 동일

6) 이광원. 창조신앙교육 이렇게 하자. 교사창조과학회 창립세미나 강의안. 1999. 2.

7) 허성욱. 주일학교 공과에 창조과학을 심어야. 한국창조과학회지 창조 1993년 2월호.

   이광원. 창조신앙교육 이렇게 하자. 교사창조과학회 창립세미나 강의안. 1999. 2.

8) 이광원. 창조신앙교육 이렇게 하자. 교사창조과학회 창립세미나 강의안. 1999. 2.

9) 양승훈. 창조론 대강좌. 대구 : CUP. 1996.

10) 한국창조과학회.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서울 : 태양문화사. 1981.

11) 김종배. 신비한 인체 창조섭리. 서울 : 국민일보사. 1993.

12) 양승훈. 창조론 대강좌. 대구 : CUP. 1996.

13) 한국창조과학회.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서울 : 태양문화사. 1981.

14) 성기창 외. 생물진화학. 서울 : 형설출판사. 1990.

15) 호리꼬시 노부지. 임번삼 역. 인간의 탄생. 서울 : 한국 창조과학회. p.127.

16) 양승훈. 창조론 대강좌. 대구 : CUP. 1996.

17) 호리꼬시 노부지. 임번삼 역. 인간의 탄생. 서울 : 한국 창조과학회. p.127.

18) 김정한. 과학자와 함께 읽는 창세기 이야기. 서울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7.

19) 한국창조과학회.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서울 : 태양문화사. 1981.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culture/c5/c51/c51c7.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07

참고 :

박광민
2004-07-26

교단에서 진화론의 허구성을 가르치며


    아직까지는 가르침의 결과가 확연히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창조과학의 전도자가 될 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 화석, 인류의 진화, 태양계의 기원과 우주의 기원 등의 내용들 중에는 성경과 배치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는데, 교사로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이 내용들을 가르칠 것인지가 나에게는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나 자신도 이런 주제들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창조과학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고, 연수회에도 참가하여 창조론과 진화론, 노아의 홍수, 지구연대, 인류의 창조, 우주와 태양계의 기원 등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서적들을 통하여 하나씩 알아 가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수업시간에 위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한편으로는 진화론적 견해를 (교과서에 있음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론적 견해를 가르쳤다. 그러나 학생들이 진화론의 허상을 분명히 알게 된 후에도 창조론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을 훈련시킬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1992년 '창조과학반'이라는 학교 내 공인된 동아리를 조직하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 점심 시간에는 창조과학 공부를, 목요일에는 기도회를 가졌으며, 지금도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선배들이 후배들을 가르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수업시간에 나오는 진화론의 문제점들에 대한 자료를 미리 슬라이드로 제작해 두었다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반드시 보여주고 설명을 하곤 했다. 지금부터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내 나름대로 가르치고 있는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보겠다.


1. 화석학적 측면

화석의 생성조건은 첫째 단단한 뼈나 껍질이 있어야 하고 둘째 매몰속도가 빨라야 하며 셋째 화석화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진화론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러나 첫째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 해파리의 화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둘째 조건인 매몰속도는 동일과정에 의한 변화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결정적으로 세 번째 조건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지각변동이 아니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모두를 한꺼번에 설명하기 위해서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격변적인 지질학적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하등동물이라고 분류되는 삼엽충도 사실은 무기물인 방해석으로 된 눈을 가지고 있고 1000개 이상의 수정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수정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뒤떨어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동물을 하등한 종류와 고등한 종류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제각각 독특한 기능을 지닌 고유한 동물로 창조하신 것이다.

"현재는 과거를 아는 열쇠이다"라는 동일과정설을 살펴보자. 시상화석으로 설명하는 이 이론은 진화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을 통해서는 세계 곳곳에 분포하는 석탄의 생성조차도 설명할 수 없다. 석탄은 양치식물이 그 원조가 된다고 말한다. 양치식물은 아열대의 더운 기후에서 자라고 있다. 그러면 석탄 생성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따뜻한 기후였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매몰되기 위해서는 지각의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석탄의 생성은 노아 홍수 전의 따뜻한 기후와 급격한 변동 즉 대홍수를 설명하는 것이 된다.

또한 동물군 천이의 법칙을 살펴보자. 같은 지층에서는 동일 시대의 화석이 나오고 그것으로 진화의 과정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삼엽충과 사람의 발자국 화석이 같이 산출된다든지 공룡과 사람의 화석이 같이 산출되고 있다. 이렇듯 교과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진화론적인 내용들은 설명이 잘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2. 퇴적암의 구조

퇴적암의 구조는 보통 4가지가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점이층리는 해저사태에 의해서 심해저에 퇴적된 것으로 하나의 층리에 서로 다른 입자들이 밑에서부터 큰 입자의 순으로 질서정연하게 점이적으로 쌓여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연흔이라는 구조는 물결 모양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물결치는 모습이 풍화작용으로 없어지기 전에 암석이 된 것이다. 건열은 가뭄이 들어 메마른 땅이 갈라지듯이 암석이 갈라져 있는 모습이다. 사층리라는 구조는 물이 흘러가거나 바람이 불어서 층리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노아의 홍수로 설명이 가능하다. 점이층리는 노아 홍수 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창 7:11)"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지진과 화산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그 때 점이층리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연흔도 노아 홍수 시에 가능했다. 물이 약 57일 동안 급속히 감하여지면서 물결치는 모습이 생기게 된 것이다. 건열도 물 속에 잠겨 있던 부드러운 토양이 수면 위로 노출되면서 갑자기 강렬한 태양 에너지에 의해 굳어지면서 갈라지게 된 것이다(초등학교 시절 찰흙으로 사람이나 탱크를 만들 때를 생각해 보라). 또한 사층리는 아무리 많은 비가 오고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분다고 해도 그런 모습으로 암석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강력한 홍수와 수압에 의한 힘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3. 지구의 연대

방연석, 월석, 운석을 가지고 지구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데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은 운석을 가지고 측정하는 방법이다. 운석의 전 단계는 유성이며 그 전 단계는 별이나 행성이다. 여기서 지구가 행성이므로 운석의 모성인 행성도 지구와 같은 연대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측정이 이루어진다. 지구에 떨어진 운석 중 석질운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철질운석이 그 다음이고, 석철운석은 극히 적은 양이다. 그러므로 지구연대 측정에 사용되는 운석은 석질운석과 철질운석이다. 그런데 석질운석 속에는 우라늄과 납이 들어있는데 반해 철질운석 속에는 우라늄은 없고 납만 있다. 그러므로 철질운석의 납의 양은 처음의 양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라늄의 반감기가 45억년이므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얼마의 우라늄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우라늄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석질운석 속의 납의 양과 철질운석 속의 납의 양의 차이가 우라늄이 붕괴되어 변한 납의 양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남아있는 우라늄과 변한 납의 양의 비를 구하여 운석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지구의 연대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 떨어진 많은 운석이 같은 행성에서 떨어진 운석이라고 보는 기준도 모호하며, 설령 같은 운석에서 떨어진 운석이라 해도 운석의 모성인 행성이 지구와 같은 시기에 생성되었다는 근거 또한 불충분하다.

이 밖에도 인류 진화의 허구성, 태양계의 기원, 여러 가지 지질학적 지형의 형성과정 등의 내용들을 수업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진화론의 허구성을 드러내고 창조론의 합리성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멀리 가서 이방 사람 전도 못해도 내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추첨을 통하여 우리 학교에 들어 온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증거를 가르치는 것으로 전도의 사역에 동참하고자 생각해 왔다. 아직까지는 학교에서의 창조과학의 가르침의 결과가 눈에 잘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이 아이들이 대학에 가고 사회 진출한 후 언젠가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창조과학의 전도자가 될 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culture/c5/c51/c51c8.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08

참고 : 6553|6486|6550|6149|6132|5081|5130|4639|5740|5683|5420|5994|6449|4821|6263|6018|6468|6148|6474|5510|5947|5954|5591|6211|5589|5602|5966|4837|6090|485|3890|390|2349|3782|6438|4510|5474|6495|5458|6243|5863|2698|6399|5460|6489|5135|5000|4828|6118|6394|6168|6138|5996|774|5497|5827|5158|5962|6358|6258|6119|4066|5544|5443|6556|6501|6096|5459|5274|5450|5909|6461|6436|5586|4542|5041|3391|6393|6476|6292|5796|5768|6271|5462|6146|6439|3591|6125|3426|6285|6152|6153|6022

이은일
2004-07-26

기독교와 창조과학


차례 

서문 ------------------------------------------------- i

1. 서론 ---------------------------------------------- 1

2. 내면 세계와 세계관 ------------------------------- 4

3. 과학적 사고와 세계관의 변화 --------------------- 12

4. 신비주의와 UFO, 외계인 ------------------------- 15

5.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비교 ----------------------- 17 

참고사항 -------------------------------------------- 22 

 

서 문

21세기를 앞둔 지금의 시대는 변화와 긴장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 변화하지 못하면 생존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혼돈과 새로운 질서가 교차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외부의 변화가 극심할 때일수록,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가 안정되어 있지 못하면 변화하는 세상을 쫓아갈 수는 있어도, 변화를 주도할 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가 대립하던 시절에는 사람들은 외부에 의지할 만한 이념과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적인 이념이 없어지고, 전 세계는 오직 경제적인 이익만을 중요시 여기는 경쟁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물질주의가 강력한 영향을 주는 시대입니다. 또한 이 시대는 정보화 사회입니다. 즉,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여 공간적 제약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쟁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지식이나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바로 내면세계의 안정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서양인들이 동양의 종교에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내면 세계에 연관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종교와 외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과학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왔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갖는 모든 믿음체계는 종교적인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믿음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체계는 성장하면 받는 다양한 경험과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신에 영향을 받습니다. 어떤 믿음체계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신조를 갖고 있음으로 '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믿음 체계는 단지 내면 세계의 평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 살아가는 방식,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 체계 중에서 세계가 어떻게 이뤄졌고(기원),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지를 보는 큰 시각을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각도로 세계관을 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시각 중에 대립되는 것은 창조론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와 창조과학'과목은 창조론적 세계관을 소개하는 과목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진화론적 세계관이라는 표현은 들어보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미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진화론적 세계관이 철저하게 학습되었습니다. 생물학은 물론이고, 지리학, 역사, 우주과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학문분야가 진화론적 세계관의 영향력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기독교와 창조과학'에서 소개되는 창조론적 세계관이 매우 낯설며,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명지대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기독교 관련과목으로 할 수없이 수강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적 세계관은 이미 매우 낡은 세계관이며, 현재와 미래의 세상을 잘 설명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세계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론적 세계관은 종교적 신념이라는 거부감을 사람들이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대안으로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적 세계관을 종교적 거부감 없이 살펴본다면, 실제로 현재와 미래의 상태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과목을 통해 지금까지 학습되어진 진화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삶이 더 풍성해지길 기대합니다.

2000년 3월

이은일


I. 서론 

1. 종교와 과학

좁은 의미의 종교는 종교적 틀 (카톨릭교, 기독교, 불교 등)을 이야기 하지만, 넓은 의미의 종교는 인간이 삶에서 가지는 '믿음체계'를 이야기한다. 좁은 의미의 과학은 자연과학적인 발견이나 지식체계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의 과학은 인간이 가지는 '지식체계'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으로 표현되는 사람이 가지는 믿음과 지식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과학지식은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 또는 그 시대의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 어떤 과학지식은 연구자의 주관과 전혀 관계없이 동일한 것도 있지만,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되어야 하는 연구도 있고 (예를 들어,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를 연구하려면 연구자가 파동을 볼 것이냐, 입자를 볼 것이냐를 먼저 결정하고, 빛의 성질을 조사한다), 또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그 결과를 해석하는데는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되게 된다. 따라서 전체적인 과학지식 체계는 사람이 가지는 '믿음체계' 와 불가분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지식의 부분이 믿음의 부분에 비해 적으며, 주관적인 믿음이 삶의 영역을 더 폭넓게 지배하고 있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모든 과학이라는 배는 종교라는 바다 위에 떠있다'는 것이다. 

 

2. 세계관 

지식과 믿음체계, 또한 실천적 정서적 측면까지 포함한 세계에 대한 포괄적 견해를 세계관이라고 한다. 세계관은 인생관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단순히 이론적 태도가 아닌,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어떤 실천적 방향을 지향하면서 결단하고, 행동하는가의 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서양에서 중세 시대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중심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정치적 권력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 세속적인 가치관이 깊게 들어왔고, 기독교적 세계관의 중심이 되어야 할 성경보다는 종교적 전통이나 교황의 말들이 우선 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르네상스 이후 신이 중심이 되는 시대가 아닌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진화론은 인본주의에서 해결하지 못하던 기원의 문제를 해결한 중요한 이론이었다. 따라서 진화론은 생물학 뿐 아니라 전 학문영역에 영향을 주었고, 19세기 이후 진화론적 세계관은 전 가치체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과학문명과 세계관 

16세기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한 과학문명의 발전은 과학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게 했으며, 현대 과학의 발전이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고 편안하게 해준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그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개발된 기술로 인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이러한 과학문명의 발전을 보면서 사람들은 과학문명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1, 2차 세계대전이 있기 전까지 믿고 있었다. 세계대전을 겪기 전까지 인류의 계속적인 발전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눈부신 과학문명의 발전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기계론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진화론적 역사관은 인류가 원시시대로부터 계속적으로 진화되면서 발전해 왔다고 가정하고있다. 따라서 미래의 인류도 진화되면서 더욱 발전해 갈 것이라고 믿고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는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진화론적 낙관주의는 역사를 보는 시각으로 적합하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21세기 앞둔 지금, 환경오염문제, 에너지 고갈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류 생존자체가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인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보다는 이기적인 투쟁을 계속하고 있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에너지원이 개발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물리학, 천문학의 발전으로 형성되었다. 고대의 우주관인 천동설은 천문학의 발전으로 지동설도 대체되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당시의 과학지식을 독점하고 있던 종교적 지도자들은 지동설을 종교재판으로 억압하였다. 유명한 갈릴레오가 재판 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이 종교재판은 종교가 과학을 억압한 예로 들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존의 과학지식을 독점하고 있던 과학자들이 새로운 과학지식을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힘을 사용하여 억압한 예가 될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 등 자연과 우주의 법칙이 발견되면서 자연과 우주는 신비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 되었고, 그 안에 숨겨진 법칙을 계속 발견하면서 자연과 우주는 하나의 정교한 기계처럼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르네상스이후 인본주의 철학의 발전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물리학과 철학의 발전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형성했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부분은 지식의 세계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은 본질상 일치하지 않지만, 정신세계를 제외한 물질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기계론적 세계관은 기독교적 세계관보다는 진화론적 세계관을 더 지지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4. 세계관과 사람 

기계론적 세계관은 서양의 과학문명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기계론적 세계관만으로는 인류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단순한 과학문명의 발전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는 전쟁, 기아, 폭력, 부정 부패 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 시대의 세계관은 그 시대의 지식과 믿음체계에 의해 형성되고, 일단 형성된 세계관은 모든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다. 시대 상황이 변하고, 새로운 지식과 믿음체계에서는 과거의 세계관이 맞지 않으며, 세계관이 변화되어야한다. 그러나 한번 형성된 세계관이 바뀌기 위해서는 매우 큰 변화의 힘이 요구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장 중요시되던 시대에서 기계론적 세계관은 적합한 세계관일 수 있으나 과학 문명의 발전만으로 인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 시대에서는 더 이상 적합한 세계관이 될 수 없다. 인류가 닥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과학 문명은 발전했지만 인류는 에너지 고갈, 전쟁, 기아, 부의 불균형 등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이 전 세계가 하루 사이에 오갈 수 있는 세계화된 사회, 모든 정보가 컴퓨터 네트 워크를 통해 동시에 세계에 전달되는 정보화 사회에 도달한 것이다. 기계문명 시대의 가치관과 운영 전략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극도의 경쟁적 사회에 도달하면서 인류는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서 인류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정신적인 가치의 창출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기계론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은 사람이 단지 물질이 모여있는 우수한 동물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으며, 따라서 인류는 상대적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현대 철학은 사람의 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철학의 발전과 시대의 변화는 결국 철학 자체가 없어지는 후기 산업화 사회를 초래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지식과 생각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로 인간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고백을 철학은 스스로 하게 된 것이다.

'인간 자신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물음 자체를 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은 인간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음을 거부하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진화론적 세계관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과학문명의 발전과 물질의 풍요는 한때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인간이 이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시대는 마치 가난한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부자가 되었는데, 막상 부자가 되자 돈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과 같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삶의 궁극적 질문은 인간의 기원과 존재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진화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기원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했다고 주장하였으나, 인간이 물질로부터 나왔다는 앞으로도 진화될 것이고 주장함으로써 현재의 인간이 물질의 결합에 불과하고 앞으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중간과정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는 불확실할 수밖에 없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은 자신의 공허감을 헛된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경향을 가진다. 마약, 섹스, 스포츠 등을 통해 만족을 구하려고 하며, 그것도 안될 경우 자살을 하게 된다. 죽음을 예찬하고 미화하는 일은 이런 상황에서 나오게 된다. 

 

5. 창조론적 세계관 

진화론과 대립되는 창조론적 세계관이란, 우주 만물이 지혜를 가진 전능자,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개념이다. 진화론의 주장처럼 우연히, 무목적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디자인되었다는 주장이다. 창조론적인 세계관의 근거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진화론적 세계관이 설명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 반대되는 이론으로 창조론적 세계관이 근거가 있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기원에 대한 가능한 이론은 진화론과 창조론 밖에 없으며, 과학적인 증거들을 살펴볼 때, 진화론과 창조론 중 창조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둘째 근거는 성경이라는 고대 문서이다. 이 문서에 의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라는 것이다. 이 문서에 근거하여 천지 만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창조론적 세계관에 의하면 천지 만물이 창조된 것은 신의 특별한 목적과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지한다. 물론 '신'은 창조만 하였고, 특별한 목적과 의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조론적 세계관을 지지하는 과학적 증거와 성경의 증거는 신의 특별한 목적과 의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즐겨 먹는 과일의 경우, 과일을 맺는 식물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사람들만 즐겁게 해줄 뿐 식물 스스로에게는 별로 이득이 없다. 작게 만들어도 번식하는데 지장은 없는 것이다. 진화론적 세계관은 이런 과일의 크기를 설명하는데 애로를 느끼지만, 창조론적 세계관은 이런 과일이 인간이 먹기 위해 창조된 것이라는 해석을 할 수 있다.

 

 

II. 내면세계와 세계관 

인간의 내면 세계를 보는 시각도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다. 진화론적 세계관,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내면 세계란 단지 뇌에서 일어나는 화학변화에 불과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정신과 영역에서 사용되는 약물들은 사람의 우울증 등의 감정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드의 심리학 이후 정신과 영역은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한 탐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지금도 이런 부분이 무시되지는 않지만, 복잡한 심리 상태를 분석하기보다는 비교적 간단히 약물로 치료하는 것이 더 선호되고 있는 경향이다.

어떻게 약물이 사람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까?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나타나는 호르몬을 연구한 결과 그 호르몬 자체나 그 호르몬에 영향을 주는 약물을 줌으로써 감정 상태를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약물이 감정에 영향을 준다고 곧, 뇌 속에서 일어나는 화학변화가 인간의 내면 세계를 모두 결정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다.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감정을 결정하는 것은 뇌 속에서의 호르몬 자체가 아니라, 복잡한 심리적 기전과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 호르몬에 의해 내면세계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 세계에 의해 호르몬이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내면세계에 의해 결정된 호르몬을 인위적인 약물로 조절함으로써 어느 정도 심리적 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약물로 모든 것이 조절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더 많은 복잡한 기전을 알게되면 사람의 마음도 쉽게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하고 있다. 이런 기대는 일부 사실이지만, 사람이 단순한 기계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내면 세계는 성장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 및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인간의 내면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기능하고 있고, 상처 입고, 상처를 주는 실재적인 것이다. '인격'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내면 세계의 그 무엇은 사람과 다른 동물을 구별하는 특성 중의 하나가 된다. 그래서 사람을 '영적 존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특별히 영적인 존재라는 표현은 내면 세계가 초월적인 신과의 관계도 포함되기 때문에 사용되는 어휘다. 그러나 상대가 초월적인 신이든, 자기 자신을 포함한 사람이든, 심지어 동물과 식물, 자연계이든 '인격적인 내면세계'는 끊임없이 반응하고 표현하고 기능하고 있다.

과학과 내면 세계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주제인 것 같지만,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의해 세상을 설명하려는 과학이 한계에 부딪치고 있고, '초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내면세계의 에너지를 현실 세계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고 있다. 내면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내면 세계는 에너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이다. 내면 세계는 인간 사회에서 흔히 관찰되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내면 세계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무엇인 문제인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1. 관계의 의미와 요소 

사람이 어떤 가치관과 믿음체계를 갖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호흡하고 살고 있다. 내면 세계도 육체적인 세계와 마찬가지로 먹고, 배설하며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내면 세계의 음식은 관계를 통해 전달되며, 이 음식을 통해 내면 세계의 인격이 성장하게된다. 

1) 관계의 4가지 요소

관계는 사랑, 신뢰, 존경(존중, 명예), 이해(지식)의 4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 4가지 요소는 내면 세계를 성장시키는 음식물이다. 그러나 제대로 이 4가지 요소를 통해 성장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사랑은 가장 오해하기 쉬운 것이고, 신뢰는 가장 깨지기 쉬운 것이고, 존경(존중)이나 명예는 가장 소홀히 취급되면서도 가장 받기 힘든 것이고, 이해 또는 지식은 관계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부분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음식물과 다른 것은 육체적인 음식물은 먹고 배설하는 것이지만, 관계를 통한 요소는 주고받는 것이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준다. 관계는 역동적인 것이며, 많이 주고받을수록,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커지는 것이다. 관계를 통해 내면 세계가 성장하고, 내면세계가 성장할수록 관계는 깊어진다.

관계의 4가지 요소는 서로 별도의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격을 구성하는 실체의 다른 면들이며, 관계를 형성하는 표현 방식의 다양한 모습들이기 때문이다. 

① 사랑

사업이나 시장에서의 사람들간의 관계들에서는 사랑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다. 반면에 결혼이나 가족 내에서 부모 자녀 관계처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오류도 쉽게 범할 수 있다. 어떤 인간 관계에서도 사랑이 없는 관계는 진정한 관계가 될 수 없다. 또한 반대로 사랑하는 것과 소유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사랑은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소유는 지배하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의지적인 사랑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중요하다. 감정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의지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격이 감정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의지적인 부분도 인격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하지 않는데 억지로 사랑할려고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사랑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의지는 한 인격에서 나오는 두 가지 모습이다. 전체적인 인격이 완전하다면, 사랑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의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완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지 전까지, 사랑이 잘 성장하도록 가꿔 주어야한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밭을 가는 것과 같다.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은 씨앗 자체의 생명력 때문이지, 농부가 그 생명력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명이 잘 자라고, 풍성한 수확을 하기 위해서 농부는 잡초를 제거하고,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해주어야한다.

사랑의 내용물로는 돌봄, 친절함(동료의식), 좋아함, 우정(가장 사심 없을 때의 사랑: 동등함, 열림, 끈질김), 부드러움(가장 온유할 때의 사랑), 관대함(가장 후할 때의 사랑), 민망히 여김(사랑과 동정), 용서(가장 은혜로울 때의 사랑) 등 다양하다. 다시 말해 이성 간의 달콤한 사랑도 있지만, 가족 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에는 책임감, 열린 마음, 성숙한 인격이 요구된다. 이말은 역설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사랑을 통해 인격이 성장하는데,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성숙한 인격이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격이 성장하기 때문에 둘 다 맞는 것이다. 

② 신뢰

신뢰는 위탁의 대가이다. 또한 신뢰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뢰는 신념 이상의 태도이다. 즉, 신뢰는 인지적 요소와 정서적 요소 뿐 아니라 행위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반대적으로 표현하면 신뢰는 당신이 취하는 위험이다. 신뢰는 그 사람이 당신을 실망시킬 경우를 대비한 긴급대책을 갖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신뢰의 대가는 상처 입기 쉽도록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신뢰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진실해져야만 하고, 신뢰한다는 것은 책임감을 포함한다. 신뢰를 형성하기는 어렵지만, 신뢰는 깨어지기 쉽고, 한번 깨어진 신뢰는 회복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신뢰는 위기(결정으로서의 신뢰) 이면서 과정(자라나야 함)이다. 신뢰의 내용은 자신감(가장 확실할 때의 신뢰), 충성(가장 위탁된 신실함), 신뢰성(가장 양심적인 진실성), 의존성(성실함에 기초), 일관성, 약속을 지킴(말에 대한 신뢰성), 정직(진리에 대한 신실함)등이다. 따라서 신뢰하는 것에는 고통이 따른다.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고통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자신의 진실성과 신실함을 유지하기 위한 고통이다. 이런 고통을 통해 인격이 성숙된다. 신뢰하지 않으면 상처는 받지 않을 수 있겠지만, 영원히 어린아이와 같은 인격으로 남게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도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다.

신뢰를 구축하려면 속고 있다고 느끼거나 속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특정한 대화방법을 피해야한다. 이러한 대화방법으로는 부분적인 진실만 이야기하기, 간접적이거나 둘러서 이야기하기, 사실적인 내용만 대화하고 감정은 나누지 않는 경우, 똑같은 메시지를 사람마다 다르게 꾸미는 경우 등이다. 위험한 상황 속에서,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또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위장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위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결국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에게 속을 뿐이다. 신뢰하지 못하는 인격은 결코 신뢰받지도, 사랑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게 된다.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과 신뢰를 구축하는 방법은 사실상 동일하다. 단지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과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신뢰를 구축하려면, 위험을 먼저 감수하고, 먼저 상대편의 강점에 신뢰를 두되, 약점에 두지 말고, 일의 성취에 대한 칭찬을 신속히 하여, 당신이 상대방에 갖는 믿음을 표현하고, 당신 자신의 성품에 있는 성실함과 진실함을 본받게 하고, 실패할 때 또 다른 기회를 주는 것 등이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과 시험하고 실험하는 것 사이에는 세심한 구별을 해야한다. 사람들이 미리 신뢰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러한 책임감을 받아들였다면 '나는 당신을 신뢰했지만 나를 실망시켰군요'라는 말을 절대 하지 말아야한다. 신실함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구축해야한다. 

③ 존경 (존중)

존경(존중)이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면 첫째로, 내가 사람들의 가치를 인식하게 될 때 나의 삶이 놀라울 정도로 부요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많은 가치 있는 남자들과 여자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그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둘째로, 오직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때만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서로 명예롭게 여기기보다는 멸시함으로 가득 차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존중할 때 나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게 된다. 셋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좋은 자기 형상을 주려고 시도하더라도 사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화상은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상호 존중하는 관계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좋은 자화상을 스스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인격의 형성에 있어, 자기 존중감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존중감이 없이는 내면 세계가 잘 성장할 수 없다.

보통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존경할 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는 내재적인 것이다.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그 존재 자체가 존중받을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인격이 성숙하면 성품으로서의 가치를 더하게 된다. 성품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여 얻어진 것이므로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보다 더 존중받을 만하다. 또 개인의 성취에 따른 가치가 있다. 그 사람이 이룬 업적도 마땅히 존중받아야한다. 지나치게 업적만이 존중받는 것은 문제 있지만, 존재로서의 가치, 성품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성취로서의 가치도 존중받아야 한다. 

④ 이해 

모든 사람이 이해 받고자하는 갈망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려지고자 하는 만큼 동일하게 알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더 많이 아는 것은 관계를 형성해 가는데 필수적인 것이며, 다른 의미로는 관계의 목적이기도 하다. 보통 안다고 하는 것은 의식세계에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안다는 것은 내면세계로 내재화시켜 생활화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연결된 여러 주변 정보를 아는 것 뿐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이해하고, 그 존재의 일부를 자기로 내면화시키는 과정이다.

왜 우리는 이해 받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사랑 받고, 신뢰받고, 존중받길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다른 존재에게 이해되길 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은 곧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물음과 같다. 관계를 통해서 단순히 고독감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알아야 나를 알게되는 것이다.

이해하는 것에서 필수적인 것은 영으로 사람을 아는 것이다. 말은 중요한 영의 매개체인데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게 되고, 말을 통해 서로 교통하게 된다. 따라서 말을 통해서 관계가 파괴되기도 하고, 관계가 깊어지고도 한다. 말을 포함한 의사 소통 전체를 커뮤니케이숀이라고 한다. 말, 표정, 행동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상호적인 지식과 이해는 우리 자신들에 관해 정확하고 의미있게 알릴 때 가능하다. 또한 상대방의 말을 정확하고 의미있게 해석할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해하는 것에 대한 일차적이며 가장 보편적인 장애는 커뮤니케이션의 결핍이나 부적절한 커뮤니케이션이다.

말이 서로를 이해하는 도구라면, 분별력과 상상력은 말 뒤에 있는 존재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분별력이 없으면 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상상력은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이 상상력을 통해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가정과 부부, 가족 관계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가정은 동물과 같이 생존의 울타리일 뿐이다. 창조론적 세계관에서는 내면 세계의 형성과 가족 관계가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가족 관계, 또는 가정은 사람에게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동물처럼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 뿐 아니라, 내면 세계의 형성과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사람을 동물과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보는 근본적인 시각에 진화론적 세계관과 창조론적 세계관이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단지 동물보다 머리가 좋은 존재인가, 아니면, 내면 세계를 가진, 영적인 존재로 보는 것인가? 기독교적 창조론적 세계관에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진정한 부모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이를 이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신뢰, 존중, 이해를 경험해야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 만이 구원이 길이라는 의미 중의 하나는 예수만이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각 개인에 대한 완전한 사랑, 신뢰, 존중, 이해를 주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길만이 내면 세계의 완성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론에서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이고 주장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장 24절)' 이 성경의 말씀은 부부관계가 떠남, 연합, 한 몸을 이루는 세 가지 원칙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온전한 부부관계를 이루기 위한 첫째 단계는 그때까지의 부모에 대한 의존적 관계를 떠나 독립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독립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부부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부부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 문제를 함께 극복함으로써 관계가 성숙되게 되는데 부모와의 의존적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경우는 문제를 극복하기보다는 의존적 관계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들도 자식이 자신의 소유물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둘째 단계는 연합은 사실상 갈등의 단계이다. 완벽한 관계인 한 몸을 이루는 전 단계로서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단계이다. 이 연합의 단계에서 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해 관계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반대로 신실한 관계에 기초하지 않은 성은 현재의 관계 뿐 아니라 미래의 관계를 파괴한다. 왜냐하면 성을 통해서 인격적 관계를 깊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쾌락의 도구로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관계가 비정상적이 될 뿐 아니라, 미래에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서 성이 도리어 두 사람의 관계를 왜곡하게 만들 수 있다.

가정 내에서의 가족관계는 부부관계를 기초로 이뤄진다. 창조론적 세계관에서 여자(부인)는 남자(남편)의 돕는 배필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을 돕는다'라는 표현과 같은 표현이다. 즉, 여자는 남자의 부족한 점을 도와줌으로써 남자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또한 여자가 남자보다 지혜롭다고 남자를 무시하지 말고, 도리어 돕는 위치에서 겸손하라는 것이다. 가정 내에서 남편은 아내를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폭군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갖는 권위이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해서가 아니며, 또한 순종이라는 것이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의지적인 겸손이다. 남편과 가정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녀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보고 관계에 대하여 배우고 실행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에서 사랑을 배우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에서 의지적인 순종을 배운다. 최근 아버지의 권위가 가정 내에서 상실되고, 아내가 더 이상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 모습이 늘어나고, 또 이런 상황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부 관계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아내가 그 과정에서 자신을 낮춘 것은 결국 한 몸을 온전히 이루어 함께 영화롭게 되기 위한 것이다. 이 과정을 밟지 않고 아내가 자신의 지혜로 남편을 지배하고, 아버지는 가정에서 권위를 상실하면 부부 관계가 한 몸을 이루는 데로 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자녀들도 미래에 다른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데 장해가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배우고, 딸은 어머니의 순종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아들과 딸 모두 책임과 권위, 순종과 지혜를 가정에서 배우게 된다. 책임에 대한 권위와 의지적인 순종을 통해 사랑, 신뢰, 존경, 이해 등의 관계의 요소들을 저절로 배우게 된다. 가정은 자녀들이 관계를 형성하고, 관계에 대하여 책임을 갖고, 적절한 역할을 분담하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배우는 학습장이다. 이런 것을 배우지 못한 자녀들은 관계를 형성하는데 서툴게 되고, 어려움을 느낀다. 흔히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랑하고, 자녀들이 잘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부모들이 자녀들을 이해하는데는 소홀히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을 지배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내면 세계의 인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신뢰를 받고, 존중받고, 이해해 주는 경우 건전한 인격이 형성되고, 차츰 인격이 성장되면서, 이제는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 하게되고, 주면서 더 큰 내면 세계의 성장을 느끼게된다.

가정에서 바른 관계에 대하여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성장하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이루기 쉬운 위장된 관계로 만족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부유하지만 가족들간에 관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이들에서 발견되는 위장된 관계는 특권의식, 돈, 권력이 중심이 되는 관계들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읽게 되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된다. 

 

3) 상처와 치유

성장할 때 부모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거부당하거나, 충격적인 일을 당하는 등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상처가 있는 경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 정신 분석학은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과거를 직시하게 해준다. 이 과정을 통해 과거에는 치료할 수 없었던 부분을 지금 치료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과거의 상처를 드러냈는데, 현재도 치료할 수 없는 부분일 경우가 있다. 따라서 정신 분석보다는 마음의 치유가 더 중요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 존중, 이해, 신뢰를 받아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된다.

자신을 진정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람을 만남으로서 이런 치유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 관계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있겠으나, 그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인격으로 회복된다. 불행히도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 이런 치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제는 세계적인 관심사이다. 이런 치유를 위해 상처받은 자와 상담하는 상담자의 역할은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며, 그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이런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없이는 될 수 없다. 이런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상담자의 역할이다. 

 

4) 두 가지 형태의 관계

관계에는 도구적 관계와 완성적 관계가 있다. 도구적 관계란 그 관계를 통해 어떤 목적을 획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관계, 예를 들면 회사내의 인간관계 등은 이런 도구적 관계이다. 획득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도구적 관계라고 해서 이 관계가 표면적이거나, 거짓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도구적 관계라 할 지라도 그 안에서 인격적 만남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에는 인격적 만남이 필수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관계의 여러 가지 요소들, 사랑, 신뢰, 존경, 이해가 모두 필요하다. 도구적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고, 특별한 관계인 부부관계 등의 완성적 관계와 구별하기 위한 용어일 뿐이다.

완성적 관계란 관계 자체가 좋은 것을 목적을 갖는 관계이다. 부부관계, 가족 관계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부부는 행복해야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 행복을 파괴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부부관계나 가족 관계가 왜 행복해야하나?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부부관계나 가족 관계의 목적이 우수한 자식을 낳고, 훈련해서 생존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적 세계관에서는 부부 관계나 가족 관계 자체가 행복해야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부관계나 가족 관계가 좋지 않으면 어떤 인생도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부부관계나 가족 관계에서 사랑, 신뢰, 이해, 존중하는 요소들은 서로의 내면 세계에 어떤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완성적 관계를 도구적 관계로 가져가려고 할 때 많은 불행이 온다. 결혼을 통해 재물이나 자손을 얻고자 하거나, 어떤 일을 함께 이루는 효과적인 도구로 생각할 때 부부관계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완벽한 완성적 관계를 처음부터 가질 수 없지만 우선 순위가 부부관계에 있고, 다른 부분은 이차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 부부관계는 위기를 겪게 된다. 

 

2. 관계의 실패

1) 관계의 파괴

죄는 관계를 파괴한다. 반대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다. 기독교적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파괴된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관계의 4가지 요소 중 사랑을 손상시키는 일들은 잔인함, 싫어함, 거절, 뒤로 물러서거나 냉대함, 감사하지 않음, 소홀함, 시기, 사랑을 방해하는 인색함 등이다. 신뢰를 깨는 일은 비밀을 지키지 못하는 것, 신실치 못함이나 불충성, 배반, 모든 형태의 부정직함, 신뢰와 연관된 도덕적 결함, 불공평과 불의함, 선망(부러워함) 등이다. 존경을 손상시키는 것들은 부적절함, 능숙치 못함, 반복되는 실수, 무책임감, 이기심, 자기연민이나 자기 탐닉, 도덕적인 실패, 비열함 등이다.

인격이 건전하지 못하면, 이런 파괴적인 요소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요소들은 자기 자신도 거부감을 갖지만, 계속 반복되게 되면 인격의 한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따라서 관계를 파괴하는 요소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2) 관계의 회복

관계를 회복은 상처의 회복과 유사하다. 그러나 상처의 회복은 단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내면 세계가 준비되는 것이다. 상처가 회복된 인격도 다른 사람들과 건전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다시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용기가 다른 건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 회복에서 매우 중요하다.

부부관계나 가족관계처럼 깨질 수 없는 관계이면서 행복해야하는 관계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기초가 된다. 이런 완성적 관계는 잘 형성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 이런 투자는 손해인 것 같지만 결국 개인적 인격의 완성으로 가는 중요한 선택인 것이다. 완벽한 인격은 없지만 성숙한 인격을 이루는 것은 완성적 관계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확대된다.

부부나 가족에게 사랑과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반 사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으로 불리울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위장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관계나 가족 관계, 친구들과도 이런 위장된 관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쾌락을 매개로 해서 만나는 관계, 자기학대로부터 나온 일방적 희생관계,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관계 등의 위장 관계는 건전한 인격 형성, 관계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 이런 위장된 관계를 청산하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건전한 관계 형성, 내면 세계 형성의 시작이 될 수 있다. 

 

3) 함몰 

내면 세계의 황폐화는 결국 개인의 함몰로 나타난다. 함몰이란 갑작스럽게 땅이 꺼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혀 이상의 증후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살을 해버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조그마한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고 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참다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자라면, 건전한 인격이 형성되지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줄 수 없고, 신뢰받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 참다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내면 세계는 마치 음식물을 먹지 못해서 배고픈 것처럼, 내면 세계의 심한 갈망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건전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내면 세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대신 다른 것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이것은 돈, 권력, 명예, 자만심 등이다. 이런 것으로 다른 사람의 사랑, 이해, 존중을 사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이런 부분이 무너지면, 예를 들어 많은 돈을 잃거나, 명예를 손상당하거나, 권력을 잃어버렸을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 받을 수 없으므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 함몰은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서서히 무너지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III. 과학적 사고와 세계관의 변화 

1. 과학적 사고란 무엇인가? 

전통적 과학관에서 과학은 소박한 귀납주의적이며 (객관적 관찰이 가능하다), 따라서 객관적 과학법칙이 유도 가능하고, 가치 중립적이며, 과학적 발견은 누적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전통적 과학관은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적 철학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인간 이성에 근거한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며 가치 중립적이고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1, 2차 세계대전을 겪지 전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더욱이 눈부신 기술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미래가 과학의 발전과 함께 더 큰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통적 과학관에서 이해하는 과학은 부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학지식이 그 시대의 세계관, 연구자의 주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적인 일이다. 철학적으로 과학지식의 귀납법적 법칙 유도가 논리적으로 틀렸다는 주장이 흄으로부터 대두되었다. 흄은 한정된 자료와 관찰로부터 일반적 법칙을 유도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100마리의 백조를 관찰해서 그 백조들이 하얗기 때문에 모든 백조가 하얗다는 법칙을 유도했다면 이러한 유도는 틀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찰자는 이 세상의 모든 백조를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흄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지만 흄의 논리에 근거하여서는 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때 포퍼는 'Refutation'논리를 제시하였다. 즉 부정할 수 있는 모든 반대를 부정했다면 잠정적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까만 백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백조가 희다는 명제를 옳다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쿤은 유명한 패러다임론을 통해 '과학은 형이상학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전제와 같은 패러다임 위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개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관찰이나 실험이 어렵다는 것이다. 비록 여러 검증의 단계를 거치지만 이론 구성의 단계에는 주관적 전제와 가치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작은 부분에 있어서 과학은 객관적이며, 가치 중립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지식체계도 그 지식을 수용하고, 평가하는 사람의 믿음체계(또는 가치관, 세계관)와 이익 등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 이론이 가치체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이제 상식화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사실을 진리와 동일시하고, 과학적으로 측정되지 않는 것은 비과학적인 것, 다시 말해 진리가 아닌 것처럼 인식하는 과학주의 또는 물질주의의 영향력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2. 학문과 세계관과의 관계 

학문은 이론으로 사물을 대하는 제한적 경험이다. 학문은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이다. 이 학문의 이론이 맞는 지는 철학(인식론)이 한다. 철학(인식론)은 인간이 만드는 학문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학문을 만들어가는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또한 반대로 만들어진 학문이 세계관에 영향을 주기도한다. 

1) 르네상스 이전의 학문 

그리스, 로마 시대의 학문은 인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학문은 인본주의적인 학문인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신본주의적 학문이 인본주의적 학문을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전, 서양의 모든 학문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론적 세계관을 가진 학문이라고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신학의 영역은 성경을 근거하였으나, 기타 학문 분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모든 학문 분야는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되었고, 그렇게 행해졌다. 

 

2) 르네상스 이후의 학문

르네상스 이후 중세의 억압적 종교체계를 인본주의 체계로 바꾸게 됨에 따라, 새로운 학문은 창조론적 세계관인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객관성, 중립성,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객관성, 중립성, 공공성에 대한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종교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염증을 반영한 것이다. 즉 종교적 주장에 따른 전쟁의 피해를 없애기 위해서 종교를 삶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지식체계는 주관적 견해의 차이에 따른 폐해를 없애기 위해 객관적이면서도 공공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사상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진화론은 기독교적 세계관인 창조론을 대치할 이론으로 각광받게 되었고, 왕정에서 시민정치로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에서 개혁세력의 정치적 지지도 받게되었다. 진화론적 세계관은 이후 창조론적 세계관을 대치하면서 생물학 분야 뿐 아니라, 학문의 전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3) 철학과 물리학의 발전

데카르트의 인식론으로 시작된 철학은 계속적으로 발전을 하였다. 데카르트는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분리하여 생각하였고, 이러한 데카르트 철학은 학문적 영역에서 정신적인 분야를 제거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프로이드와 융의 정신분석학이 발전되기 전까지 정신적인 분야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의 지동설 등 천문학의 괄목한 발전과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 등 물리학의 발전은 모든 자연 현상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후 양자론, 상대성 이론 등의 물리학의 발전은 물질 세계가 단순히 물질로만 구성된 것이 아닌 공간, 시간과 연관되어 있는 매우 복잡하고, 인간의 생각과 언어로는 완벽하게 설명되어지지 않는 어떤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물리학의 발전은 자연 현상이 기계적인 현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했다.

철학의 계속적인 발전은 사실상 선대의 철학적 인식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이론을 전개한 것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철학은 인간의 인식이 객관적이라는 대명제가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니체는 모든 인간은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가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 될 수 없다고 했고, 프로이드는 인간에게는 자신이 인식할 수 없는 무의식 세계가 있고, 이 무의식 세계가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깊은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였고, 현대 철학자인 하버머스는 인간은 자신의 이익(Human interests)에 의해 인식하고 행동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더 이상 철학은 인간의 인식을 기준으로 학문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모든 학문이 이해관계, 인격성, 신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현대 철학의 상식이 되었다.

후기 산업화 사회를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인식론의 붕괴로 더 이상 객관적 가치 체계를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시대를 통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비합리주의, 상대성, 다의성, 이질성, 다양성, 복수성을 특징으로 가지게 된다. 즉, 어떠한 통일된 가치를 주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3. 창조론적 세계관의 재등장 

르네상스 이후 진화론적 세계관,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모든 학문 분야에 영향을 주었고, 신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신학자들 중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는 것이 더 이상 지성적이고 개화된 사람들에게 맞지 않으며, 이런 상태가 계속 되면, 성경 자체가 전혀 사람들에게 읽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감은 갖게 되었다. 이런 위기감으로 인해 성경을 재해석하는 학문이 발전하였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발전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 자체에 대한 연구, 새로운 해석에 대한 시도 등을 통해 신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지만, 성경 자체의 의미를 하나의 고대 문서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다시 말해 성경은 신학의 연구 대상일 뿐이지, 믿음 체계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신학은 가톨릭의 종교적 횡포에 저항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킨 종교 개혁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였다. 성경을 학문의 대상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신학교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교육받은 체계로 되어 있으므로, 목사들도 이런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하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자하는 '창조과학' 운동이 일어났으며,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기록들이 모두 역사적 사실이며, 과학적으로도 오류가 없는 것이라는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진화론은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성경 기록의 역사성과 과학성을 지지하는 증거들이 발표되고 있다. 진화론적 세계관 속에 있는 기존 학자들은 이런 창조과학의 주장들을 종교적으로 과학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창조과학자들은 진화론자들이야말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인 진화론으로 과학을 왜곡하고, 사람들의 생각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주장한다.

 

 

IV. 신비주의와 UFO, 외계인 

1. 신비주의의 대두 

물질문명 또는 기계문명이라고 불리우는 20세기가 저물어 가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물질 문명과 기계 문명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기계 문명시대의 사고 방식이 세계화, 정보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무한 경쟁 시대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학적으로는 물질주의, 기계적 세계관으로는 더 이상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혹자는 과학의 진보는 계속 될 것이라고 믿는 반면 혹자는 새로운 과학 - 초과학 -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의 두가지 정신적 흐름은 과학주의와 신비주의이다. 과학주의는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과학이 우상이 된 사상이다. 이 과학주의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전능의 신으로 군림하던 20세기의 뒷면에서 사람들은 물질주의와 합리주의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정신적 문제들을 풀기 위해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힌두교, 불교 등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정치적 불안과 함께 무당, 귀신, 윤회 등 신비주의적인 내용들이 많이 매스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20세기는 또한 성경의 예언처럼 민족이 민족을 치는 시대인 것 같다. 민족주의적인 흐름이 세계 곳곳에서 거세지고, 민족끼리 전쟁을 벌리고 있는 것이 매일 매스컴에서 다루어질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족 고유의 문화를 강조하면서 귀신과 관계된 굿, 살풀이 등이 행사마다 빠지지 않고 자리잡고 있다. 

과학주의와 신비주의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과학주의는 영적 실체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고, 신비주의는 육적(물질적) 실체를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현실은 100% 물질적인 것도, 100% 영적인 것도 아니다.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두 가지 모두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영적인 문제와 실질적인 문제가 모두 중요하며,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과학주의는 인격적인 관계를 무시하고, 신비주의는 개인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과학주의의 한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신비주의로 강력하게 쏠리고 있다. 21세기는 신비주의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어떤 사상이 좋은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상이 사람들간의 관계를 좋게 만드는가, 아니면 거리끼게 만드는가? 그 사상을 통해 개인의 인격이 존중되는가 아닌가? 정서적으로 자유롭게 되는가, 억압당하는가? 현실적인 통찰력을 높게 해주는가 아니면 현실 감각을 잃게 만드는가? 음란한 일이나 부정적인 일들이 나타나는가? 등의 질문들을 통해 그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라면 그러한 신비주의는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것이다. 

 

2. UFO 

UFO란 말 그대로 확인되지 않은 비행물체이다. UFO로 보고되는 대부분이 구름, 새, 비행기 등이지만 일부 알 수 없는 물체들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물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미확인 비행물체 UFO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UFO에 우주인 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이 물체들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어떤 지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런 비행물체는 현재의 지구의 과학 수준보다는 높은 수준의 어떤 지성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것이다. UFO에 대한 이야기는 멀리는 이집트의 벽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신비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면서 UFO에 대한 믿음이 종교적 운동으로까지 퍼지고 있다. 우주인과 교신을 하고, 대화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책으로 출판되고 있다. 이미 화성에 생명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화성, 심지어는 달에서 외계인을 만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태양계에 대한 과학적 탐사가 진행되면서 외계인의 위치는 화성에서 아직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먼 은하계로 변화되기도 한다.

UFO와 외계인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인 근거가 희박함에도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 드려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UFO와 외계인에 대한 믿음은 진화론과 연관되어 있다. 지구에 최초의 생명체가 우주로부터 왔다는 우주 기원설은 진화론의 일종이다. 우주 기원설이 더 발전하여 우주인들이 지구에 생명체를 주었거나, 여러 동식물들을 창조하였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지구에 왔던 우주인들이 지금 다시 왔다고 생각하며 이들을 환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

UFO에 외계인 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진화론에 의해 뒷받침되고, 외계인이 실제로 지구에 존재하였는데 외계인의 시체를 미국 정부가 감추고 있다는 X-file 등의 이야기에 의해 이러한 믿음이 강화되었다. 영화와 만화, 소설 등에서 외계인은 단골로 다뤄지는 소재이고,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이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믿음 뒤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과학의 발전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 같다.

진화론은 이 넓은 우주에 지구와 같은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외계인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직까지 지구 이외 생명체가 있는 것은 발견된 적이 없다. 생명체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주장도 이러한 흔적으로부터 진화되어 생명체가 될 수 있다는 진화론적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창조론적인 관점에서 외계인은 존재할 자리가 없어 보인다. 성경의 기록은 지구에 하나님께서 각종 생명체를 창조하셨고, 해와 달과 별들은 지구의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엄청난 우주가 있더라고 과학적으로 생명체가 형성될 가능성이 없으며, 거대한 우주를 창조한 목적도 창조주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근거로 본다면, 지구가 아닌 곳에 하나님이 생명체를 창조하신다는 것은 성경기록에도 없지만, 성경의 흐름으로도 맞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외계인을 만나고,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외계인이 있다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FO는 마치 과학적인 주장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UFO와 외계인은 단지 과학의 탈을 쓴 신비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V.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비교 

1. 기독교 

여러 종교 중에서 기독교는 그 배타적인 성격으로 인해 비판을 받는 종교중의 하나이다.기독교의 독특성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강조인데, 많은 종교가 사람들의 믿음체계로부터 성장했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경을 근거로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인격적인 존재이며, 창조주라고 주장된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중심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은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고 (신뢰의 상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함으로써 (존중의 상실),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이해의 부족)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어찌하든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길 원하셨다.

관계의 회복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키셔서 그 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다시 보여주셨다.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면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사람들을 심판하는 거룩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또한 성경이 기록되게 하고 읽혀지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들을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이해'와 '존경 (경외)'의 요소가 중심인 것이다.

관계 회복의 결정적인 것은 용서다. 용서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죄인과 그 죄인을 용서하는 피해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하나님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사람을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관계의 회복이 이뤄진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과정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자신의 죄를 의식하는 것이고, 둘째는 용서를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죄인 입장에서는 용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죄책감이 남아있는 것이 문제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용서를 하더라도 죄를 지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다시 거룩하게 해야 거룩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데 거룩하지 못한 상태를 거룩한 상태로 회복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셔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형벌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셨다.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당했으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에 대한 모든 결과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죄가 없어지고, 죄에 대한 죄책감도 없어지고, 다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사람은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창조물로 회복되고, 거룩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만 거룩한 인간으로 회복되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회복을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영원한 삶을 하나님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면 세계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은 산다는 것은 오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육체적인 부분이 죽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육체적인 변화가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때 이뤄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영적인 관계 회복 뿐 아니라 육체적인 부분까지도 포함한 온전한 관계회복을 위해 오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회복한 사람들은 육체적인 부분도 회복될 것이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다시는 없는 것이다. 

 

2. 카톨릭교 

카톨릭교와 기독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카톨릭교는 착한 행위(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것을 해석하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용서함을 받는 것과 선행 모두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선행은 그 결과이지, 관계 회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체적인 카톨릭과 기독교의 교리상의 큰 차이는 '교회'과 '제사장'에 대한 개념이다. 카톨릭은 교회(로마 카톨릭)의 권위가 신적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교황도 오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변화가 있긴 하지만). 기독교는 성경만이 신적인 권위가 있고, 눈에 보이는 교회가 성경위에 세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류가 없는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죄지은 사람 사이에서 끊어진 관계를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카톨릭은 이런 역할이 사제(신부)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기독교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만인 제사장 개념).

카톨릭이나 기독교는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음에도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종교적 전통의 영향 때문이다. 

 

3. 이슬람교 

마호멧교는 잘못 부르는 것이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을 무슬림(Muslim) 또는 모슬렘(Moslem)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복종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슬람교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중시한다. 예언자 마호멧의 가르침을 절대시하고 그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이슬람교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슬람교의 천국의 개념은 기독교처럼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강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천국은 술이 흐르는 강, 언제나 섹스의 대상이 되는 여인들로 가득 찬 곳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슬람교는 매우 남성 중심적인 종교이며, 외적인 순종을 강조한다.

이슬람교는 유일신 알라를 숭배의 대상으로 하며, 성경을 비롯한 여러 개의 경전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예수를 단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여러 경전이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있지만, 마호멧의 코란이 가장 우월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슬람 신앙의 다섯가지 지주는 다음과 같다. 1) 신앙진술: '알라외엔 다른 신이 없으며 알라신의 예언자는 마호멧'을 사람들 앞에서 반복한다. 2) 기도: 매일 다섯번 성지메카를 향해 이 의식을 지켜야한다. 3) 자선행위: 총수입의 40분의 1을 자선에 바침(과부,고아, 불쌍한 사람들에게). 4) 라마단(음력9월):한달동안 금식, 해가 지면 잔치를 한다. 5) 메카순례: 생에 최소한 한번은 메카를 순례(하지).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다. 기타 지하드(성전)등이 있다. 

 

4. 힌두교 

흰두교는 인도의 여러 종교적 형태를 총칭하고 있는 것이며, 실제적인 그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전체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보고 살고 있는 세상은 마야 (임시적이며 아무 뜻이 없음)이고 계속적인 환생을 통해 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간의 관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흰두교의 신들은 인간과 같이 희노애락이 있고, 인간은 신이 되는 것이 목표이고, 인간은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인간의 죄, 관계의 파괴 등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관심은 죽은 후에 어떻게 환생할 것이냐 이다. 흰두교의 가르침은 현실을 무시되고 죽은 후의 환생을 위해 명상, 요가, 선행 등이 강조된다.

흰두교는 기원전 2000년경 크게 번성했던 아리안 족들이 인더스강 유역을 정복했을때 두각을 나타내었다. 베다(Veda) 계시받은 지혜라고 믿고 성스럽게 생각(여러 신들이 가득 기록)한다. 기원전 500년 베다에 기록이 추가되어 계급제도를 확립되었다.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무사), 바이샤(농부), 수드라(노예)의 네 개의 계급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마지막 계급인 노예는 베다를 들을 수도 없고 베다를 이용해 구원을 얻을 권한이 없다.

기원후 1,000년 경 대중적 흰두교가 등장하여 라마야나와 마하바라와 같은 새로운 문서가 나타났다. 바가바드 기타(신들의 노래) 크리슈나 신을 숭배하여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인도에는 3억 3천만의 신이 있는 셈이고(힌두교인 한명당 한명의 신이 있는 셈), 이중 비슈나신(2억명정도가 숭배, 최소 10회나 인간들에게 출현했다고 주장함 거대한 거북이, 석가 등), 시바(생식의 신, 수백만)등이 숭배자가 많다. 

 

5. 불교 

불교는 힌두교로부터 나온 것으로 대중적 흰두교가 등장한후 인도에서는 사라졌다. 불교는 도타마 시다르타(기원전 560년경 인도국경 네팔의 룸비니 출생)가 창시하였다. 힌두교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한 나무밑에서 40일 주야로 묵상한 후 자신의 생의 뜻과 구원에 대하여 설법을 시작하였다. 그를 부처(Buddha)로 부르게 되고, 승가를 창립하여 45년후 부처가 사망할 때까지 수천명이 그 종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는 8정도를 행하면 누구나 열반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즉, 구원은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데,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흰두교와의 차이점은 흰두교는 세상에서 생은 아무 뜻이 없다고 하지만 불교는 이 세상에서의 생이 매우 현실적인 것이며 고통은 실재하므로 세상에서 벗어나 해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고통을 통해 죄를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이고,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고통을 벗어나라는 것이다.

불경은 석존의 제자인 마하가섭이 중심이 되어 아난다와 우바이가 기억하고 있던 석존의 가르침을 선포한 것이다. 석존의 제자들은 각기 달리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서로 질문하고 확인해서 정리하였다. 회중들에게 큰 소리로 암송하여 그 교법을 심었는데, 이러한 모임을 결집이라고 한다. 석존이 세상에 떠난 후 2백년동안 결집이 세번 또는 네번있었다. 이 최초의 경전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인도와 중국에서 수정과 개정, 증보의 과정을 거치고, 대승불교도들에 의해 창작되기도 하였다.

한 두세기는 하나의 경전으로 오다가 교단내부에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나뉘면서 분열되고 어느 시기에는 20개정도의 분파가 서로 대립하여 다른 경전을 가졌다. 이후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누어지고 대승불교는 여러 파로 나뉘다가 마지막에 출현한 것이 밀교이다.

20세기의 불교형태는 티벳에서는 귀신을 숭배하는 불교, 일본에서는 군사적이고 국수적 창가학회(Soka Gakkai), 몽고등에서는 라마교형태로 되어있지만, 불교의 큰 두가지 형태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이다. 소승불교(작은 수레의 교리, 테라바다 불교 - 연장자의 도)는 운 좋은 소수만이 즉, 부처의 도를 정확히 따르는 사람만이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승려의 생활을 강조하고, 승려들을 위해 토지와 금전을 기증하게 함으로써 승려되는 매우 부유한 생활을 하게 된다. 스리랑카, 버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성행하고 있다.

대승불교(위대한 수레)는 부처가 45년간 지상에 생존한 것은 그가 인류를 구하기로 결심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부처(와 그와 같은 사람들)는 인류의 한 구세주로 여긴다. 중국, 티벳, 일본, 베트남, 한국에서 성행하고 있다. 

 

6. 뉴에이즈 (New Age) 

뉴에이즈는 흰두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환생과 업보를 주장하고, 모든 것이 신이고 인간 존재의 내면에 잠재된 신성을 깨우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적인 초자아와 합쳐지는 것이 참된 자아로 회복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각 사람이 독립된 존재로서 관계를 형성하는 것보다는, 존재 자체가 초월적인 존재로 흡수되는 것을 중시한다.

뉴에이지 운동은 점성술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마릴린 퍼거슨 '물병좌의 음모'라는 책에서 이 시대를 '물병좌 시대' 즉 새로운 시대라고 일컫는다. 삼백년동안의 서구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후에 이 지구상에 널리 퍼질 새로운 영성의 기운이 떠오르고, 의식의 진보를 통해 이 우주선(지구)의 키를 조종한다고 주장한다. 초월의식을 강조하고 지성, 도덕성을 초월하는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셜리 맥크레인의 말에 잘 나타나있다. '세상에는 진정으로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류가 깨달을 때까지는 평화가 없을 것이다.' 

 

7. 샤마니즘 

샤마니즘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귀신들에 의해 화와 복이 온다는 것이다. 귀신을 화내게 하지 않고 달랜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 인격적인 관계에 대하여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8. 기독교의 이단들 

기독교의 이단들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부정한다. 기독교의 이단들은 유니테리언(예수님의 신성 부인), 여호와의 증인 (새 교리를 준수), 크리스챤 사이언스 (물질은 환상, 뉴에이즈와 유사), 몰몬교 (인간도 결국 하나님이 됨), 통일교 (다시 온 예수 - 문선명)등이 있다. 

 

 

참고사항 

1. 강사 이은일

- 생년월일: 58년 1월 22일

- 학력: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박사) 졸업

-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부교수

- 연락처: 02-920-6170, eunil@kuccnx.korea.ac.kr 

2. 교재: 1) 강의록 (한국창조과학회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음

www.kacr.or.kr -> 창조과학 자료실내 -> 게시판 자료실

'명지대강의록2000 한글파일'

2) 기원과학 (한국창조과학회 편, 도서출판 두란노) 

3. 강의계획

1) 강의록 '서문 및 서론'

2) 강의록 '내면 세계와 세계관'

3) 강의록 '과학적 사고와 세계관의 변화'

4) 강의록 '신비주의와 UFO, 외계인'

5) 기원과학 '서론'

6) 기원과학 '생명의 발생설'

7) 기원과학 '열역학적 고찰'

8) 기원과학 '생물학적 고찰'

9) 기원과학 '현대 지질학과 대홍수 I'

10) 기원과학 '현대 지질학과 대홍수 II'

11) 기원과학 '화석학적 고찰'

12) 기원과학 '완벽한 설계'

13) 기원과학 '연대측정의 과학성'

14) 기원과학 '성서적 창조론'

15) 평가

 


출처 - 창조지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09

참고 : 6107|4487|6480|6639|3782|4241|6211|6356|6169|6473|6096|5083|5274|6461|6075|6634|5796|6292|6476|2647|6174|5718|6180|905|6165|6618|6631|6633|6636|6566|6638|6468|6449|6582|6553

John Christensen
2004-07-26

美 생물교육 딜레마


      과학분야에서 가장 앞선 나라인 미국. 그러나 미국의 학교에선 현대과학의 기본적 텍스트라 할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교육할 수 없다. 국민 중 기독교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면서 창조론을 가르치라는 압력이 거세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미국인의 양면성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앨라배마州(주) 교육위원회는 "진화론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식물이나 동물, 인간 등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론이다. 생명체가 처음 지구에 나타났을 때 이를 본 사람은 없다. 따라서 생명의 기원에 관한 어떤 언급이라도 사실이 아닌 이론으로서 다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생물 교과서에 이 같은 교육위원회의 否認(부인) 규정이 삽입된 주가 많다. 적지 않은 교사들은 이 규정 때문에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다. 

73년전 고교 생물교사인 존 스코프스는 인간과 원숭이의 선조는 같다는 것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테네시 주법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 미국의 최고법원이 '스코프스의 판결’을 뒤엎고, 州와 지방교육위원회는 교사의 진화론 교육을 금지하지 못한다’고 선언한 지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찰스 다윈의 이론은 미국 전역의 교실에서 점증하는 세련된 창조론자들과 진화론을 과학교육에서 배제하려는 州나 지방교육위원회, 창조론을 스스로 거부하는 생물교사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루즈빌 대학의 생물학교수이자 전국생물교사협회가 발행하는 잡지인 '미국 생물교사' 의 편집장인 랜디 무어 박사는 '스코프스가 살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진화론-창조론 논쟁의 갈등은 변한 게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학교와 공동체에서의 창조론 교육을 감시하는 미국과 학교육센터 부회장인 유진 스콧 박사는 "진화론에 대한 창조론의 도전 양상들이 변했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 라는 이론이 교실에 파고들고 있는데, 이 이론은 "우주는 너무 복잡해서 전지전능한 창조자에 의해 목적을 가지고 설계됐음에 틀림없다"는 식이라고 스콧 박사는 말했다. 

창조론은 성경의 창세기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부터 "신이 진화과정 자체를 창조했다(유신론적 진화론)"(전국적인 조사결과 과학자들의 40%가 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에 걸쳐있다. 다윈 진화론의 교조적인 교육을 공격하는 4권의 책을 낸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의 법률교수인 필립 E 존슨은 '학생들이 진화 이론을 불신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슨은 지적 설계 이론의 교과서 삽입을 시도하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접근 탐구 네트워크' 란 단체와 관련된 인물이다. 

미국에선 여러 도시에서 생물교사들이 진화론 교육에 대한 제재들에 대해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법정투쟁중인 루이지애나의 생물교사 돈 아길라드는 "창조론과의 싸움은 이제 법정투쟁을 하는 교사들의 문제가 아니라, 풀뿌리부터 진화론 교육을 다시 해야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이 지역 387명의 생물교사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24%가 창조론을 믿고 있었고, 29%는 고등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이 적당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말한다. 

시시 베네트는 이 같은 법적 공방이 계속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다. 진화-창조 논쟁에 대해 사람들이 식상해 한다는 것이다. 과거 진화론 교육이 무언가 잘못돼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이 같은 사건들은 앞으로 미국의 진화론 교육이 근본적으로, 질적으로 변하도록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culture/c5/c51/c51o12.htm ,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11

참고 :

조정일
2004-07-26

기독과학교사는 과학을(진화론을 포함하여)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1. 학교 유형과 내용에 따른 접근

우리 나라 공립학교는 학교의 교육과정 틀 속에서 가르치도록 의무화되어 있다. 공립학교 교사도 기독신앙 인격으로 가르치면 학생들이 따르고 무엇인가 다르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세계관이 수업 도중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그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진화론을 다루는 경우라면 교사가 먼저 그 내용을 잘 이해한 후 재편집하여 자료를 만들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통해 조별 토의를 시키고 발표하도록 한다. 교사는 그 발표 내용을 듣고 정리해준다. 학생들 중에서 진화론적 증거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마련이고, 학생들 스스로 그것이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일반 사립학교라면 공립학교와 다를 바 없겠지만,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사립학교라면 과학교사는 교육과정을 재편집하여 기독교 세계관에 바탕을 둔 교과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은 기독교 신앙뿐 아니라 숙달된 교수-학습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에 훈련받아야 한다.

아래 항목들은 어느 학교에 근무하든지 교사가 의지와 관심만 있다면 시도할 수 있는 접근법들이다.

첫째, 과학 활동 안에 들어있는 공통적인 믿음, 예를 들어 모든 세계에는 질서가 있다; 이 세계는 탐구를 통해 알 수 있는 이해 가능한 세계이다; 우리의 지식은 제한적이고 변할 수 있다 등의 과학적 세계관이 기독교 세계관과 일치됨을 부각시킬 수 있다.

둘째, 과학적 사실을 가르칠 때 관련 성경 구절이나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건과 연관시킬 수 있다. 경민중학교 남영민 교사는 엽록체 속에 녹색색소가 함유되어 있는 과학적 사실, 외떡잎식물에 형성층 부재,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진 사실, 식물의 증산 작용, 소의 되새김질, 생명유지에 필요한 피, 혈액의 응고 기작, 신장의 기능, 각 동물의 호흡기관, 각 동물의 감각기관 등의 예를 통해 교과 내용이 어떻게 성경적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혈액 단원의 학습지도안을 구성할 때 학습목표를 1) 혈액의 조성과 기능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2) 혈액 순환의 필요성을 확인한다. 3) 혈액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대독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다 로 설정하였다. 이처럼 한 학습 목표를 설정 할 때도 연관된 성경적 의미를 포함시킬 수 있다. 실제 이 내용을 가지고 수업을 할 경우, 혈액의 구성이나 기능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솜씨와 능력, 그리고 사랑을 말할 수 있고, 이 내용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피흘림의 의미를 전달하여 줄 수 있다.

이런 접근은 교사에게 성경, 신학, 기독교와 과학과 관련하여 많은 준비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과학 수업에 성경 내용을 말하기란 매우 어렵고, 학생들도 수용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업계획을 세우고, 어떤 단원에서 어떤 내용과 활동을 포함시킬 것인지를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물론 매 시간마다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전체적인 수업 목표로 '과학 사실을 통해 학생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실제도 계시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능력이 대단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다'를 포함시킬 수 있다.

셋째, 진화 관련 내용을 다룰 때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활동을 개발한다. 중학교에 나오는 진화의 증거는 그 진술과 함께 현재 그 증거들을 부정하는 다양한 글도 함께 읽게 하여, 토의를 해보게 한다. 이를 통해 교사들이 직접 부정하지 않더라도 학생들끼리 토의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교사도 직접적으로 진화의 증거들이 실제로 틀렸음을 분명히 제시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 창조 관점에서 과학교육의 방향 설정 

과학교사의 모든 활동은 각 교사가 생각하고 있거나 교육과정에서 제시한 교육목표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독 교사의 적극적인 활동 역시 이 목적 안에서 수행된다. 일반적으로 과학교육의 목표는 과학지식, 탐구능력, 과학적 태도, 과학의 본성, 실험실습 기능, 과학과 사회와의 관계의 이해 및 습득에 있다. 지향하는 바 교육목적은 창의적이고 도덕적이며 건강한 인간 육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인 교사들 또한 교육 목표와 교육 목적에 충실하지만, 그 근거들을 성경에서 찾고 확인한다면 확신을 갖고 교육에 임할 것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해 다음과 같은 4가지 교육의 목적이 되는 인간 창조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인간은 도덕적이며, 책임 있는 존재이다 (창 1: 26)

2. 모든 인간은 한계 내에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갖고 있다 (창 2: 19,20)

3. 인간은 관계의 존재 -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 상호간의 관계, 자연세계와의 관계-로 지음 받았다 (창 1: 27,28)

4. 인간은 일하도록 부름 받았다 (창 1: 28)

이 사실들은 과학교육 각 영역에서 일관적이고도 통일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네 가지 사실들은 일반 교육에서도 주장되지만 하나님이 빠져 있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하나님이 빠진 도덕적 책임은 상대적이고 인본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빠진 창조성은 인간을 경제의 도구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높다. 또한 자기우상화나 교만에 빠지거나 그 창조성을 선하게 사용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데 쓴다. 하나님이 빠진 제 관계는 불안정하고 기초가 없다. 이기심과 탐욕이 모든 관계의 밑바닥에 흐른다. 성경의 맥락 없이 노동의 의미가 이해되고 수용되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의 면전에서 인간이 도덕적이고 책임있는 존재이어야 함은 자명하고도 당위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창조성을 부여받았고, 이것은 더욱 고취되어야 함을 명령한다. 모든 관계의 기본은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정립이며 그에 따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피조 세계의 관계가 정립된다. 사람은 타락이전에도 동산을 관리하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일을 부여받았고, 타락 후에도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순화하고 헛된 일에 정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고된 수고의 은혜를 주셨다. 바로 과학교육은 창조사실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수행되어야 한다.


3. 교육의 방법

첫째, 부지런하고 열심히 배워야 한다.

둘째, 깨어 기도하고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한다.

셋째, 늘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한다.

넷째, 기회를 적극 활용한다. (특별활동 시간, 방과후 시간)

다섯째, 다양한 교수법을 활용해야 한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 해 주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도덕성과 책임감, 창의력, 인간과의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 일의 의미를 교육시킬 수 없다. 교사는 소위 요즘 말하는 열린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 열린교육을 위한 방법을 열거해 본다.

1) 학생 중심의 수업이 되도록 한다 - 문제 해결, 그룹별 토의 및 활동, 정보찾기와 활 용, 학생 질문과 아이디어를 반영, 활동 중심의 수업.

2) 교사 나름대로 새로 교육과정을 짠다 - 학습 소재, 순서, 개념의 양, 학습활동들을 교사의 판단에 따라 다시 배열하고 계획한다.

3) 협동 활동을 활용한다.

4)주변의 문제를 가지고 학습하고 그 해결 방안을 소규모라도 실제 실행해 보게 한다. 지역주민, 가족, 학교 등을 대상으로 해볼 수 있다. 이런 활동은 책임감, 관계성, 일의 의미를 북돋는다.

5) 교사들은 부단히 적절한 교수방법들을 개발하여야 한다.

학교 유형과 과학수업 내용에 따른 수업 접근방법  

내용 학교

일 반 과 학 내 용

진 화 론 내 용

공립학교나
일반사립학교
○질서. 조화, 설계 요소를 강조한다.
○생물의 신비, 자연의 통일성, 물질세계의 질서를 중요 주제로 다룬다.
○뛰어난 그리스도인 과학자의 일화나 명언을 말해준다.
○위의 일들을 위해서 교사는 교육과정을 자신의 의도로 재편성해야 한다.
○단원 개발시 관련 부분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분명히 다루어야 한다.
○활발한 학생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학생 활동 중심으로 접근한다. 즉, 학생들이 자료를 읽고 토의하고 발표하고 자기의 의견을 정리하게 한다.
○교사는 의문사항에 대해 대답해 주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을 교정해 준다.
○교사는 자신의 관점과 진화론의 오류를 적절한 기회에 분명히 제시한다.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사립학교○교육목적이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하는 것이 되도록 한다. 창조개념체계 (도덕적, 책임있는 존재, 창의적 존재, 관계적 존재, 노동에의 부름)에 기초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이에 부응하는 교수법을 적극 도입한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수행한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수행한다.
○창조론에 기초한 자료를 개발하여 수업에 활용한다.
○창조와 진화의 영향에 대해 논의한다.


기타활동특별활동이나 방과후 지도 시간등을 적극 활용한다.

 

출처 - 창조지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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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한국창조과학회
2004-07-26

『검정불합격 무효청구소송』에 대하여


     최근 이화여대의 이양림 교수(동물발생학)와 서울과학고등학교의 이광원 교사(생물학)는1990학년도부터 사용될 고등학교 2종 생물과목교과서용 검정심사본을 제출하여 2차 심사에까지 합격하였으나, 기존의 진화론적 관점과는 다른 시각으로 기술하였다는 이유로 교과서 심사본 내용중 제4장 생물의 진화 단원에 대하여 대폭적인 수정을 요구한 문교부에 불복, 불합격 처분된 교과서에 대하여 문교부를 상대로 「교과서 검정 불합격 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지난 2월 5일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하였다. 

생물교과서는 보통 “생물의 진화”라는 장을 두고 있으며, 이 장의 주제는 알다시피 생명의 기원과 출현에 대한 생물학적 견해로서 진화론을 다루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이미 생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 영역에 미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물교과과정도 이와 같은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여 왔다. 더욱이 진화론은 유물론의 등장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본지 88년 7월호/54호 참조)함으로써, 금세기 인류역사를 이념투쟁의 장으로 변모시켜 돌이킬 수 없는 해독을 끼친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진화론이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데 있다. 진화론은 그 학설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긍정적 근거들이 있는 반면에 학설적 견고성을 의심케 하는 부정적 근거들이 또한 그와 못지 않게 있다. 그러므로 진화론을 교과서에 다룸에 있어서는 고등학교 생물교육이 가지는 교육적 보편성을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절대적 과학적 사실이 아니며, 여전히 가설적 학설로 남아 있는 진화론의 현재적 입장을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우리 자라나는 세대에게 하나의 과학적 주장으로서의 진화론을 올바르게 인식케하고, 그들의 자유로운 과학적 사고에 장차 올바른 판단과 검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바람직할 것이다. 

또한 이번 교과서가 비판적 시각에서 진화론을 서술한 또 다른 이유는 진화론이 기초하고 있는 우연적 존재관 때문이다. 진화의 결정적 국면마다 우연에 우연이 거듭되어, 그것도 무한대의 시간을 두고 작용된 것을 전제로 하는 진화론은 그 증명의 불완전성보다 물질론적 생명관에 잇닿아 있는 그 존재관의 우연성이 경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아 확립을 교육 효과로 얻기 원하고, 건전한 사회 윤리관을 세우기 원한다면, 미숙한 학생들에게 허무를 줄지 모르는 존재관을 기초로한 진화론은 완벽한 입증에 이르지 않는 한 학설로서의 부정요소를 함께 가르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더욱이 기존의 국내고등학교 생물교과서들을 보더라도 『지구상에 생명이 언제부터 어떻게 출현하였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89년, 지학사간) 『이 지구상의 생물이 최초에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온 의문이며, 현재도 풀리지 않고 있는 의문이다』(89년, 동아서적간) 『생물이 지구상에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커다란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중략 … 오늘날, 과학의 성과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의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89년, 삼화서적간) 등으로 기원에 대한 이론이 단순히 가설임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나머지 부분들에 대하여서는 진화론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취지를 조심스럽게 살려 집필 완료한 것이 1989년 1월 13일 약정 출판사인 (주)계몽사를 통하여 제출한 교과서 1차 심사분이었다. 그 결과 89년 3월 4일 문교부로부터 1차 심사 합격 통보를 받았으며 다만, 4장 「생물의 진화」장에서 20군데 정도 재구성 내지 진화론에 입각하여 재진술하라는 수정 지시를 받았으나, 그 지시 사항이 의도한 취지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어서 지시에 따른 2차 심사본을 제출하게 되었다. 그 간에 교사용지도서를 제출하여 이에 대하여도 역시 몇 군데 수정지시와 함께 1차 심사 합격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2차 심사본에 대한 심사결과였다. 1차 수정지시를 최선으로 이행하여 제출한 심사본에 대하여 문교부는 원칙적으로 합격통보(89년 8월 1일)를 해왔으나,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부당한 수정 지시를 해 온 것이다. 이 수정지시는 1차 수정지시에 따라 재집필한 제 4장의 내용 가운데 16곳을 전면삭제 지시하였으며, 1차 심사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통과된 부분중에서만도 무려 12곳을 삭제하라는 지시를 담은 것이었다. 이는 1차 심사의 의미를 무색케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에 따를 경우 제 4장은 앞뒤의 연결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으므로 애초의 집필의도를 살리는 것은 고사하고 나머지 부분들의 교육내용 전달조차 불가능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1차 합격 통지서가 발송(89년 8월 1일)되어 저자들이 통지를 받은 후 확인 수정할 수 있는 기간이 일주일도 채 안 되는 8월 9일까지 수정 본을 제출하라고 지시하고 이행치 않을 시 불합격 조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듯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저자와 약정 출판사는 의도한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의 최소한도 교육효과 마저 살릴 수 없는 수정지시에 따르느니 교과서 집필 자체를 포기함이 교육자적 양심에 합당한 것으로 판단하고는, 문교부의 지시대로 따른다면 출판에 따른 상당한 경제적 이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검정을 위하여 들인 엄청난 경제적, 시간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문교부 앞으로 「교과서 검정신청 포기」라는 서면을 제출하였다. 그러자 문교부는 가차없이 89년 8월 19일자로 교과서 검정최종심사결과 불합격처분을 통보하였다. (지금까지 2차심서 합격 후 불합격된 국내 교과서는 교과서 검정역사상 없었음). 

그런데 최근 저자 등은 교과용 도서에 관한 개정(1977. 8. 22. 대통령령 제8660호, 개정 1988. 8. 22, 동령 제122508호)을 열람할 기회에 교과서 검정방법을 규정한 제16조 제2항이 '2차 심사는 가쇄본에 의하여 1차 심사결과 보완 지시가 있은 사항의 이행여부와 체제 등의 적합성 여부를 심사한다'”라고 규정한 것을 발견하여 문교부가 2차심사후 내린 내용 등에 대한 수정지시는 법에 어긋나는 내용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1차 심사의 경우 표지의 저자와 출판사가 삭제된 상태에서 심사되므로, 객관성이 유지될 수 있기에 내용심사가 필요하나, 2차 심사에서는 출판사와 저자가 공개된 상태에 심사되므로 편견이 작용할 것을 우려하여 1차 심사에서 내용심사를 대부분 마감하고 최종 2차 심사에서는 1차 심사의 보완지시이행여부와 체재의 적합성 여부 등만 심사하도록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심사에서도 지시하지 않는 내용을 2차심사에서 재차 수정 지시한 것은 일부 심사위원들이 저자와 출판사가 공개된 가운데서 편견을 갖고 심사하여 재차 내용에 대한 부당한 지시를 한 것임이 분명하다. (1차와 2차 심사위원은 서로 다르다). 

사정이 그러할 경우, 그러한 사정을 모른 채 도저히 문교부의 수정지시기간 안엔 제출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집필 의도에 어긋난 지시에 따르느니 학자적 양심에 따라 포기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판단되어 제출한 검정신청 포기의 의사표시는 전혀 착오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취소함과 아울러 문교 당국에 합리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1차 서신을 보내어, 1차심사에서 지적된 것을 기초로 재수정할 기회를 건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1차 심사의 의도를 충분히 살리는 한편, 문제된 제4장의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수정집필할 것을 탄원하였으나, 문교부의 별다른 조치가 없어 소송을 내게 된 것이다. 

이렇듯 단순히 문교부의 부당한 행정절차에 대한(실제로 거의 합격된 것이나 다름없는 심사본에 대한 2차 심사에서의 부당한 지시요구에 대한) 소송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매스컴과 언론에서는 마치 이 문제가 종교와 과학의 논쟁이라도 되는 듯 홍미 위주의 시비로 비화시키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기에 이 문제에 대한 소송의 결과가 「종교와 과학」 또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판결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며 판결의 결과가 또 다른 방향으로 오도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합당한 판결이 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늘날 진화론적 사고가 모든 학문을 지배하는 풍토에서 한 양심적 기독교인 과학자로서 담대히 이번 교과서를 집필하신 두 분 선생님과 출판사의 입장을 본회는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이번 판결에 주목한다. 

이번 소송은 단순히 문교부의 부당한 행정절차에 대한 소송이며, 그러기에 또한 그 판결 여부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위축하거나 상실시킬 수도 없음을 다시 한번 밝혀둔다. 첫 소송은 5월 7일(월) 서울고법에서 정기호 판사의 주재로 있을 예정. (※ 본회는 이와는 별도로 검정이 필요치 않은 대학교양과정용 「자연과학」(가칭)을 4월 말경 발행할 예정입니다).

 


출처 - 창조지, 제 68호 [1990. 3~4]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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