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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Russell Grigg
2013-12-24

복음 역사의 일곱 C : (2) 저주 (Curse) 

어린이를 위한 성경적 창조론 2


복음 역사의 일곱 C는 Creation(창조), Curse(저주), Catastrophe(격변), Confusion(혼돈), Covenant(언약), Christ(그리스도), Consummation(완성)이다. 그것들은 세상과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사랑스런 정원으로 된 에덴에서 사는 것이 대단히 즐거웠다. 거기에는 맛있는 과일과 견과류 및 여러 종류의 멋진 먹거리들이 많이 있었다. 온순한 티라노사우루스를 가볍게 치는 등의 일이 어땠을 지를 상상해 보라. 그러나 그런 일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하나의 규칙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그에게 단 한 가지의 규칙을 주셨다. 아담은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도 되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경우에 그는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경고하셨다. 그 과일에 독이 있었던 게 아니다. 죽음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에 대한 벌이었다.

그 이전까지 아담과 하와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죄’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택하기를 원하셔서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셨다. 그 나무는 시험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선택할 만큼 그분을 사랑했을까 아닐까?


사탄의 전술

어느 날, 하와는 아담 말고 다른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음성은 뱀이 있는 방향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마귀인 사탄이었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와는 대답하기를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 단 하나는 예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이 그것을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무를 만지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그것은 아담 스스로 그 나무를 만지지 말 것을 경고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탄이 하와에게 말했다 :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그러나 사탄의 말은 거짓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적이었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부정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시도했다. 세상에서 첫 번째 유혹이 바로 하와를 대상으로 했던 것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사탄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던진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라는 것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탄이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진화의 개념을 이용하는 것으로써, 이는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없이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성경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이 우리로 하여금 따르기를 원하시는 규칙들을 주셨다. 여기에는 진리를 말하는 것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우리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규칙을 위반하는 것을 ‘죄’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죄와 같은 것은 없을 것이며,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죄와 같은 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그분의 규칙을 지키지 않았냐고 물으실 수도 없다. 또한 우리는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 필요하지도 않다.

TV에서 누군가가 ‘진화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당신은 당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화는 사실이 아니다.”


사탄이 약속한 것이 아니다.

하와는 나무를 살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웠으며, 열매는 달콤해 보였다. 그녀는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지를 생각했다. 그녀는 열매 하나를 따서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주어서 그도 열매를 먹었다.

오호라. 결과는 그들이 예상한 대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것을 갑자기 인식했다. 그리고 이제는 선과 악의 차이를 알고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고 부끄러워했다.

이것은 사탄이 약속했던 것처럼 진기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 거짓말 한 것임을 밝혀주는 일이었다. 죄는 항상 이와 같다. 우리는 잘못된 것임을 아는 어떤 일을 행할 때, 우리가 그것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것을 행하고 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부끄럽고 후회하게 만든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날 늦게 하나님은 동산에 오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분을 피해 나무 사이에 몸을 감추었다. 이것은 선한 일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분은 그들이 스스로 나오기를 원하셨다. 대신에, 그들은 나와서 그분을 만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물론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죄를 자백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누군가를 비난하려고 했다. 아담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와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하와를 만들어주신 하나님까지 비난했다. 그리고 이어서 하와는 사탄이 그녀에게 말할 때 이용한 뱀을 비난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시므로, 죄에 대해서는 항상 벌이 뒤따른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제 땅이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하셨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일생동안 땅을 파고 수고하여야 먹을 음식을 생산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악의 벌은 하나님이 경고하셨듯이 그가 죽을 것이며, 그의 몸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그녀가 행한 일 때문에, 자녀를 출산하는 고통이 크게 더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녀의 딸들은(그리고 그녀들의 딸들은) 여전히 남편을 갖기를 원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대신에 사탄을 따르기로 선택했으므로, 우리 모두도 같다. 우리 모두는 옳은 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바라며 태어난다.

하나님은 여전히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시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도 역시 사랑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에게(그리고 우리에게) 사탄에 대항하는 한 선지자의 형태로 약속을 주셨다. 하와의 후손 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느 날 오셔서 이 땅에서 사실 것이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심으로써, 사탄의 일을 멸하실 것이다. 이 일은 약 2,000년 전에 일어났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잎을 입었지만, 하나님을 그것을 대신하여 아담과 하와를 위해 동물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따라서 최소한 한 동물이 죽었어야 한다 - 그들의 죄 때문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밖에 두셨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생명나무라고 하는 다른 나무를 먹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죄를 가진 상태로 영원히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지키게 하셨다. 그날부터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여러 해를 더 살기는 했지만, 그들의 몸은 오늘날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creationmagazine.com/creation/2013vol35iss2?pg=26#pg24 

출처 - Creation ex nihilo Vol. 35(2013), No. 1, pp.24-2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816

참고 : 5813|5832|5837|5844|5875|5965|6033|6083|5643

Russell Grigg
2013-12-19

복음 역사의 일곱 C : (1) 창조 (Creation) 

어린이를 위한 성경적 창조론 1



 복음 역사의 일곱 C는 Creation(창조), Curse(저주), Catastrophe(격변), Confuion(혼돈), Covenant(언약), Christ(그리스도), Consummation(완성)이다. 그것들은 세상과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자, 성경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기 위해 일 주일을 사용하셨다. 우리는 이 주간을 ‘창조 주간’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실제 지구가 회전한 날이 여섯 번 포함되어 있으며, 쉬신 날이 하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성경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첫째 날

처음에는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 일을 행하셨을까? 단지 그것이 일어나라고 명령하심으로 이를 행하셨다. 와우, 얼마나 놀라우신 하나님이신가? 모든 것을 그분 말씀의 능력과 권위만으로 창조하시다니!

하나님이 이것을 행하실 때, 다른 일도 같이 일어났다. 즉, 시간이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이 빛은 태양빛이 아니다. 하나님은 넷째 날 이전에는 태양을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빛의 근원으로서 태양 없이도 빛을 창조하실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천국에서는 등불이나 태양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다.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계 22:5).

첫째 날의 빛이 회전하는 지구에 대해 ‘낮’과 ‘밤’을 제공하였다. 그래서 그 첫 번째 낮과 바로 그 첫 번째 밤이 각각 약 12시간씩이었다. 그것은 장구한 기간의 시대도 아니고, 수십억 년 전도 아니다.


둘째 날

창조 주간의 둘째 날에, 하나님은 식물이 안에서 자라고 동물과 사람이 그 위에서 살 수 있도록 지구를 준비하시는 일을 계속하셨다. 이를 위해 지구 주위에 대기를 만드셨다. 그 대기에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포함된다. 그것은 산소, 질소, 그리고 소량의 다른 가스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모두는 당신이 살 수 있도록 적절히 혼합되어 있었다. 대기에는 수증기가 있어서 응축되어 구름을 형성한다.

하나님이 그것이 일어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화산 폭발이나, 남조류가 수억 년 동안 산소를 만들었다거나, 어떤 사람들이 추정하고 있는 다른 것들의 결과가 아니다.


셋째 날

하나님이 지구를 창조하셨을 때, 지구는 완전히 물로 덮여 있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창조 주간의 셋째 날에 하나님은 마른 땅이 드러나라고 명령하셨다. 일부분의 해양저가 가라앉아서 땅에서 물이 물러갔다. 지구에 언덕과 평평한 땅이 형성되었다. 그때 대륙이 몇 개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성경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창 1:9)라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아마도 대륙은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일곱 개의 대륙들 일부는 노아 홍수의 결과로 나중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때도 다시 한번 지구가 완전히 물로 덮였었다.

또한 셋째 날에 하나님은 땅이 모든 종류의 초목을 내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에는 식물과 씨와 과일과 나무가 포함되어 있어서 동물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대신에 그것들을 먹을 수 있었다. 또한 사람은 곡물과 풀과 채소와 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꽃과 향기 나는 식물들이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이들 각각을 그들의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말씀하고 있다(창 1:11~12). 이것은 식물들은 어떤 한 식물에서 다른 식물들로 진화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넷째 날

넷째 날에 하나님은 태양과 달과 태양계의 행성들뿐만 아니라, 우주안의 수십억의 은하계들 속에 수십억의 별들을 창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것들을 만드셨다고 말씀한다. ”밤과 낮을 나뉘게”, 그리고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그리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창 1:14~18). 하나님은 단지 이 모든 것이 존재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이것을 행하실 수 있었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만드신 또 다른 이유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기”(시 19:1) 위함이다.

별들은 빅뱅으로부터 수십억 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 아니다. 무언가가 폭발하여 모든 것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폭발하는 모든 에너지가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그런 폭발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우주에서 보고 있는 모든 정교한 법칙들과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폭발은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직 큰 혼란과 무질서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들은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다섯째 날

다섯째 날이 되기까지 하나님은 땅이 생명을 지탱할 수 있도록 준비하셨다. 따라서 다음으로 하나님은 바다가 물고기와 함께, 물에서 사는 서로 다른 모든 동물들로 충만하라고명령하셨다. 여기에는 고래와 사경룡 같은 큰 어류와 크릴과 동물성플랑크톤 같은 작은 어류가 포함된다. 하나님은 또한 이 날에 나는 생물, 즉 새, 박쥐, 벌, 익룡 등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모든 물고기와 모든 새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으며, 그 모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각 생물들이 자기 자신을 닮은 아기 생물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 중 어떤 하나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진화되지 않았으며, 그들 중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여섯째 날

여섯 째 날에 하나님은 땅에게 육지동물을 ”내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에는 요즘 가축이라고 부르는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애완동물과 양과 소 등. 또한 요즘 야생동물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 즉 코끼리, 호랑이 및 캥거루가 포함된다. 그때는 그들 중 어떤 것도 사납지 않았으며, 그 어떤 것도 서로를 먹지 않았다. 그 날에 하나님은 기어다니는 것과 공룡도 만드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동물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말씀하며, 우리는 이미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공룡이 알을 나면 거기서 아기 공룡이 태어나지, 아기 새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다. 그분은 흙으로부터 아담을 만드신 다음 아담의 옆구리로부터 하와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자녀를 낳아서 땅의 모든 곳에 사람이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28). 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는 결혼이라는 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가정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자녀가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당신의 증, 증, 증, 증, .... 증조부 증조모이다. 그들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지 않았고, 따라서 당신도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따라서 당신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이다.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당신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드릴 수 있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동물들은 그분의 형상대로 만들지 않으셨으므로, 이런 일을 전혀 할 수 없다.

주 예수님 역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 되셨으며, 완전한 하나님-인간으로 죄 없이 사셨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우리 중의 하나이기도 하신 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 주간에 만들어 내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완벽했으며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나쁘거나 악하지 않았다. 동물이나 사람에게는 죽음이 없었다. 돌연변이도 없었고, 생존경쟁도 없었으며, ‘적합하지 않은(열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일곱째 날

오늘날 칠 일의 한 주는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은 6일에 걸쳐 엿새 동안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일곱째 날에는 쉬셨다. 그분은 피곤하지는 않으셨지만(히브리 단어의 의미는 ”멈추다”이다),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이것을 행하셨다.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십계명에 그것을 포함시키셨다. 네 번째 계명은 칠일 중 하루를 안식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 20:8~11).

예수님 - 하나님의 말씀

창조 주간 동안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명령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 중의 하나가 ”말씀”(요 1:1~14)이라는 것을 아는가? 신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주를 만드셨으며(히 1:2), 모든 것들이 예수님에 의하여,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요 1:3, 골 1:16)고 말씀한다.

우리는 우주 먼지로 만들어졌는가?

어떤 사람은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되어 다량의 수소가스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이 수소가 별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 별들 중 일부가 폭발하였으며, 이로부터 사물을 만들 수 있는 다른 모든 물질들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지구에 있는 모든 것들이 별에서 형성된 물질, 혹은 ‘우주먼지’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지구를 만드셨으며, 바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공기도, 흙에서 자라는 식물들도 모두 하나님이 별들을 만드시기 이전에 만드셨다고 말씀하신다.

빅뱅이 있었는가?

진화론자들은 우주가 수십억 년 전에 빅뱅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무(nothing)’에서 ‘모든 것(everything)’은 고사하고, 어떻게 ‘어떤 것(something)’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것에 목적이나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빅뱅이 ‘작동’하는 데에 필요한 충분한 중력을 제공하기 위해서 ‘암흑물질(dark matter)’이라는 보이지 않는 물질을 고안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충분한 ‘추진력’을 제공하기 위해 ‘암흑에너지(dark energy)’라는 것을 고안해야만 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창세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권위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훨씬 더 잘 설명해 준다. 그리고 그 목적도 말이다. 즉, 그것은 아름다운 우주 안에서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한 장소를 준비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진화는 사실인가?

아마도 당신은 진화론자들이 TV 프로그램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거나, 그들이 쓴 책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알고 싶다면, 단 하나의 방법은 거기에 있어서 일어난 일을 목격했던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우주가 시작되었을 때, 어떤 진화론자도 거기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계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증인이시다. 사실상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당신은 창세기 1장에서 그분이 무엇을 하셨으며, 왜 그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우주는 수십억 년이 되지 않았다. 모든 창조는 대략 6천 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어느 관점이 옳은가?

비록 진화론자들이 진화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성경에 기록된 기사가 어떻게, 그리고 왜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를 훨씬 더 잘 설명해 준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많은 과학자들이 깨달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진실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creation.com/seven-cs-1

출처 - Creation ex nihilo Vol. 35(2013), No. 1, pp.24-27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813

참고 : 5816|5832|5837|5844|5875|5965|6033|6083|5643|3384|4039|1984|2497|3728|5559|2535|5122|5906|4140|3771|4628|4501|5110|2864|5859|4643|4069|3722|6332

Brian Thomas & Mic
2013-08-06

미국인의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여론조사 

: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Urgency & Opportunity: Poll Shows Evolving Trends)


     최근의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37%는 성경의 기록처럼 하나님께서 최근 과거에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고 있었다.[1] 그리고 25%는 인간은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왔지만, 그 과정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믿고 있었다(유신진화론). 이 두 그룹을 합하면, 미국인의 62%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고 있었다. 조사자의 17%는 ”모르겠다”로 응답했다. 

그러나 미국인의 21%는 인간은 하나님 없이, 수십억 년에 걸쳐서 진화된 존재라고 믿고 있었다. 이 수치는 비교적 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전에 비하면 조금 늘어난 수치이다. 2004년에는 단지 13%가 인간은 오직 자연적 과정을 통해 진화된 존재라고 믿고 있었고, 2008년에는 단지 15%가 믿고 있었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계속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8~29살 그룹에 있는 미국인들의 31%가 인간은 하나님의 간섭 없이 하등한 생물로부터 진화한 존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믿는 자들의 증가 추세는 수십 년 동안 공교육에서 진화론만이 일방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현실 상황을 반영하고 있을 수 있다. 1998년의 한 여론 조사는 미국의 선도적 과학자들의 72%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는 1933년에 비해 4%가 증가한 수치이다.[2] 이것이 반기독교적 교육가들이 미국의 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십 년 동안 진화론 세뇌 교육을 시켜온 결과일까?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인류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하나님을 배제한 무신론적인 진화 이야기는 구체적인 증거나 건전한 이유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 연구의 다른 세부 사항들은 yougov.com에서 볼 수 있는데, 앞으로의 일들을 예측해볼 수 있게 한다.[3] ”모르겠다”라고 응답한 사람들 중 가장 높은 19%가 비판적인 18~29살의 그룹에서 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창조-진화 논쟁에 대한 양측의 의견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을 것임을 가리킨다. 또한,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를 믿고 있는 많은 수의 응답자들은 각각 32%, 36%, 40%의 비율로 ”모르겠다”로 답했다.

이러한 세속화 경향은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 진화론의 허구성과 창조주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매우 긴급한 과제임을 가리키고 있다. 긴급함은 곧 기회이다.



References

1.Hallowell, B. Did God Really Create the Universe and Mankind? Yahoo News. Posted on yahoo.com July 23, 2013, accessed July 24, 2013.
2.Larson, E.J., and L. Witham. 1998. Leading scientists still reject God. Nature. 394 (6691): 313.
3.Henderson, B. Belief in Evolution up Since 2004. YouGov. Posted on today.you.gov.com on July 22, 2013, accessed on July 26, 2013.


*관련기사 : 진화론 믿는 영국인 절반도 안 돼 (2006. 1. 30. 조선일보)
http://www.chosun.com/economy/news/200601/200601300091.html

영국인들 절반 이상 진화론 안 믿어 (2009. 2. 2. 국민일보)
http://www.kukinews.com/news/article/view.asp?page=1&gCode=int&arcid=0921178374&code=41131111

캐나다인 60% 창조론 수용 (2007. 7. 5.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2782622.html?ctg=-1

美 국민 78%는 창조와 신 인정해 : 진화론은 15% 신뢰... 2년 전보다 창조론 지지 늘어 (2012. 6. 6. 기독일보)
http://www.christianitydaily.com/view.htm?id=4477

미국 목회자들, 대체로 진화론 거부 (2012. 1. 19. 크리스찬투데이)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19652§ion=sc73§ion2=

기독교사 97% '진화론만 가르치면 안돼' : '진화론과 비판 관점 동시에 가르쳐야' (2009. 7. 1. 뉴스파워)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4161§ion=sc2§ion2=

한국인 30.6%, 진화론 불신 (2009. 2. 10. 굿데이스포츠)

http://www.gooddaysports.co.kr/news/?cset=star&;bset=view&tot_code=49&code=5205

한국갤럽,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진화론 지지자 증가 (2012. 7. 23. 한국경제)

http://pr.hankyung.com/newsRead.php?no=639818

진화론 지지 비율 10년새 29% -> 45% (성결신문 2012. 08. 01)

http://www.feel5.co.kr/sknews/304/04.pdf



출처 : ICR News, 2013. 7. 29.

링크 : http://www.icr.org/article/7570/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선태
2013-05-07

필로의 박하사탕 (이은일 회장)


인터넷방송인 ISTV에 출연한 이은일 회장 방송내용입니다.

제목 : 필로의 박하사탕 - 멘토를 찾아서

진행 : 주선태 교수

출연 : 이은일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회장, 고려대 의대 교수)



번역 -

링크 - ,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IuGelQBg9Gk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44

참고 :

전진규
2013-05-06

창세기에 답이 있다를 읽고


** 이 글은 2013년 4월28일 창조과학교육원 기본과정(새순교회)을 수료한 전진규 집사님의 필독도서 독후감입니다. 전진규 집사님은 새순교회에서 4년째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고 계십니다. 저자의 허락을 얻어 홈페이지에 전문을 공개합니다.

 

'창세기에 답이 있다'를 읽고

사실인 성경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 들이지 못한 저를 오늘의 창조과학 세미나를 새롭게 눈 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두꺼운 성경을 집사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집사님의 말씀이 창세기 1장~11장이 전체 성경 공부 기간의 반이 될거라고 말씀하시면서, 창세기의 1장~11장을 이해하며 받아들여야만 그 뒷장을 이어 나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심판,복음에 대해 믿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말로는 성경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배운 과학(진화론)이라는 지식과 배치되는 것에 많은 혼란을 겪어 왔습니다.특히 최신 과학 장비인 연대 측정기라는 기계로 화석이 수억년 전이라든지, 동물 및 사람의 뼈가 몇 만년 전이라든지 하는 발표에는 의심 없이 그대로 믿어 왔으며, 그 사람들(과학자 및 고고학자들)이 대단하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으며, 또한 동,식물을 다루는 다큐멘트를 좋아하는 저는 그 동,식물들이 진화되어 지금 이렇게 생존하고 있다는 것에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학교에서의 배운 지식과 살아오면서 들어온 정보에 꽉 매여 있었기에,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 창조의 날들에 대해 본 책에서 언급한 창조한 날들을 내 맘대로 해석하여, 그 날이 하루가 아닌 창조의 하루는 수억 년이 아니였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섬김이를 하면서 얼마나 잘못된 신앙관으로 학생들을 섬겼던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창세기에 답이 있다' 첫 장을 넘기면서 ”과학은 과거의 사실을 직접 다룰 수가 없다”라는 이야기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그들(과학자들)은 시간을 뒤로 돌릴 수가 없으며, 직접 과거를 관찰할 수 없으며,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 시험하고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 실상인데 저는 그들이 수 년동안 연구해서 발표한다는 그들의 말(과거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하는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구한 내용들이 그럴 것이라는 믿음속에 살고 있으며, 그들도 평범한 인간이며 초인간이 아니라는 저자의 말에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궁금해졌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서 중요하게 읽은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책의 내용이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창세기는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왜 기독교의 적들(진화론자)은 창세기를 훼손하려고 애를 쓰는 것일까? 의 물음의 답은 창세기는 성경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의 의미는 그것의 기원과 연관되어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결혼의 근본적인 의미, 죄의 의미, 안식일의 의미, 주가 오신다는 예언 등은 기독교의 교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헨리 모리스 박사는 ”만약 어떤 경우로 인하여 성경에서 창세기가 삭제되었다면 성경에 남아 있는 부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층이 없는 고층 건물이요, 교각이 없는 다리와 같다”고 창세기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창세기에는 천지창조, 타락, 대홍수, 바벨탑 사건의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진화론자들은 이 사건을 부인하고 있다. 기독교인들 조차도 이 사건들을 열거 못하는 사람이 많으며 창세기에 기록된 사실을 믿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 하셨고. 그들은 순전하고 죄가 없었으며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규정을 거부하고 반항하였고, 이 반항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죽음의 저주를 내리셨다. 이 사건들은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근본적인 이유들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와 복음의 연관성이 있다. 복음의 궁극적인 약속에서 미래에 대한 놀라운 소망 즉, '만유를 회복하실(행3:21)' 것이며 원래 창조되었던 모습으로 회복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혼동을 일으키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6일에 걸친 창조, 흙으로 창조된 아담' 등 천지 창조로부터 예수님의 탄생까지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믿어 왔는데, 오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진화되어졌다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박물관, 공공학교 등을 통해서 홍보하고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많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창조과학이 등장하면서 과학적인 연구 결과로 진화론에 반증이 되고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다량의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기독교인들이 서서히 그 혼돈에서 벗어나고 있다.

날-시대설, 점진적 창조설, 간격설, 창세기 비유설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날-시대설과 창세기 비유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었다. 진화론은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던 본래적 낙원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생명은 혼란속에서 시작하여 보다 나은 완벽함을 향하여 조금씩 진화되어진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성경은 이 세상이 처음부터 완벽하였고 질서 정연했다고 말한다. 우리의 세상은 향상되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고 오히려 타락하고 퇴보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사람은 단지 우연에 근거한 적자생존의 진화과정을 통하여 고도의 개발단계에까지 다다른 고등 동물인 영장류에 불과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진화론에 입각한 교육은 수백만 어린이들과 그 부모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의 중요한 판단들과 그에 따르는 행동들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알수 있다.

우리 자신들이 우연히 현존하게 되었다면 삶의 가치를 잃어버릴 것이다. 진화론의 교육은 사회 질서 및 복음을 파괴한다.(결혼의 감소, 노동윤리의 감소, 자살의 증가, 혼음의 증가, 포르노의 증가, 낙태의 증가등) 많은 사람들의 삶은 생명체에 대한 거짓된 견해인 진화론에 근거하여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퇴락은 창조주를 배척하는 내면 세계가 바깥으로 표현된 결과들이며, 그이유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위에 굳건히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진화론의 진입을 대단치 않게 생각하여 무시하거나 그 이론과 적당히 타협해 왔다. 그러한 견해를 취함으로서 과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어떤 문제가 야기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깨어 일어날 것을 외치고 있다. 저자는 복음을 파괴하고 있는 진화론자들과 싸워 이길 것을 주문하고 있다. 진화론에 기초를 둔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과의 싸움인데, 그들의 포는 창조론이라는 기초에 겨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초가 파괴되면 기독교라는 성이 괴멸될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포를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 성에 쏘아야 되는데, 교인들간에 서로를 향해 쏘고 있으며, 아무 의미없는 곳을 향해 쏘고 있으며, 자신들의 기초를 향해 쏘고 있으며, 개개의 문제들을 향해 쏘고 있다. 세속적 인본주의의 기초인 진화론을 공격하지 않고 단순히 겉으로만 나타내는 개개의 문제들만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생각봐야 한다.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믿고 창세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창조론이라는기초를 재건하여 진화론의 허구성과 비과학성을 세상에 알림으로서 진화론을 효과적으로 공격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눈을 크게 떠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고 필요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기독교적 바탕을 지키며 적극적으로 거짓된 진화론적 가르침에 반대해야 한다. 끝으로 저자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씨는 십자가의 복음이다. 우리가 뿌리는 씨 중 많은 씨들이 진화론적인 철학의 가시밭과 돌밭에 떨어진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복음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이 돌과 가시밭을 없애야만 한다. 창조론적 복음전도는 먼저 길을 닦고 십자가 복음의 씨를 심는다. 설계로부터의 증거를 포함한 하나님의 존재하신다는 증거, 과학이 진정 무엇이며, 그것이 증명할 수 있는 것과 증명할 수 없는 것, 진화론의 과학적 허구성에 대한 증거, 공룡들이 성경과 역사에 어떻게 부합되는지, 노아의 홍수에 대한 증거, 인류가 하등동물에서 진화해 오지 않았다는 증거 등을 진화론을 추종하는 사람들과 위와 같은 주제로 토론하여 창세기의 전체적인 복음에 관한 확실히 그리고 명료하게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이 모든 행위는 항상 기도하는 것과 성령을 잊지 않을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금번 창조과학 세미나를 통해 나의 변화된 모습을 '창세기에 답이 있다'는 책을 통해 적어봅니다.

1. 나의 성경에 대한 믿음은 회복되었다.

2. 이제는 하나님이 더 가깝게 느껴지고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3. 생전 처음으로 내가 기독교를 진정 이해한다고 느낀다.

4.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5. 진짜 과학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바를 그대로 뒷받침한다.

이번 세미나를 마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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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정병갑
2013-04-01

생명의 날에 생각해보는 생명나무


프롤로그

  유리는 소련의 첩보기관 KGB에서 인간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의해 모스크바의 비밀 연구소에서 태어난 복제인간이다. IQ 500의 천재인 그는 어느 날 호수의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조로증에 걸렸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화 억제제 치료를 받는 것이다. 접근 금지된 도서관의 논문을 몰래 읽은 후 파리의 세양 박사가 노화억제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 유리는 경비원을 간단히 해치우고 모스크바의 극비 연구소를 탈출하게 된다. 8살 어린이 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신경이 매우 민첩하였고 근육의 힘은 성인보다 뛰어난 복제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련의 첩보망을 피해야했기 때문에 자동차를 이용하지 못한 유리는 죽을 힘을 다해 하루에 150 Km씩 달려서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고 단 몇 주 만에 프랑스어를 마스터한다. 그리고 천재적인 두뇌를 이용하여 분자생물학, 생화학 등을 공부하여 세양 박사의 연구를 돕게 된다. 그러나 결국 노화를 늦추는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첨단 생명과학 정보가 담겨있는 유리의 시신을 쟁탈하기 위해서 벌이는 CIA와 KGB의 치열한 첩보전 앞에 유리의 인권은 무시되고 생명과학 지식을  쟁탈하려는 쪽과 지키려는 쪽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만이 묘사되고 있다.

이 소설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광기가 낱낱이 그려지고 있다. 이 점이 독자들을 섬찟하게 만든다. 복제인간을 탄생시켜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메드베제프 박사는 ”이 연구의 가장 큰 의미는 인간이 바야흐로 그 운명을 지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창조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다”라는 무서운 독백을 하고 죽는다. 이 소설의 바탕에는 생명공학 기술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겠다는 인간의 오만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복제 인간, 1997. 알렌 엔젤 지음. 문학마을)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나타낸다. 자극에 반응한다, 성장한다, 생식한다, 규칙성이 있다, 물질대사를 한다 등등....이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특징은 아마도 ”생식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생식은 자기를 닮은 후손을 남기는 일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생명의 정한 이치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질 수도 있다. 그래서 죽지 않는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외에도 생명나무를 두셨는데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을까 걱정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3:22)”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영생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생명나무는 무엇일까?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는 실재했던 나무였을까? 아니면 상징적인 의미로 기록한 것일까? 생명나무가 무엇이기에 그 열매를 먹으면 영생할 수 있는 것일까? 실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생명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는 ”베에쯔 하하임”으로서 육신적인 생명을 강건하게 함으로써 영생할 수 있는 나무인 동시에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의 과실(떡)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영원한 축복의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요 6:48~54).

그런데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는다고 어떻게 영생할 수 있을까? 에덴동산에는 분명히 생명나무가 실제로 있었을 것이고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에덴동산도 없고 생명나무도 실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이 생명나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생명나무에 대한 현대 생명과학적 가능성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한다면 복제인간을 사용하여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복제인간을 어떻게 사용하면 영생할 수 있을까? 복제인간을 만드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정상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 후 체세포의 핵을 이 난자에 이식한다. 핵을 이식 받은 난자는 분열하게 되고 일정기간이 지난 다음 자궁에 착상시키고 10달 후에 태어난 아기는 체세포 핵을 제공한 사람과 똑같은 복제인간이 되는 것이다. 체세포 핵을 제공한 사람이 우수한 지능을 가졌다면 복제인간도 우수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나며 람보처럼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라면 복제인간도 강인한 체력을 가진 아기로 태어나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복제인간을 많이 만들어서 젊은 청년까지 잘 사육(?)한 다음 냉동시켜 장기간 보관할 수 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 복제인간의 모체가 노화되어 일부 내장의 기능이 떨어지거나 이상이 생길 때 냉동된 복제인간을 해동시켜 살려낸 후 복제인간의 해당 기관을 모체에 이식하면 아무 문제없이 건강한 내장기관을 갖게 된다. 필요하다면 거의 모든 내장기관을 바꿔치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내장기관 뿐이랴? 쭈글쭈글한 피부는 물론, 백발의 머리까지, 사지는 물론 몸통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서 뇌에 기록된 모든 정보까지도 컴퓨터 하드디스크 복사 하듯이 복사할 수 있다면 인간은 복제인간을 활용하여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생명나무 실과가 아니겠는가?

만약에 생명과학 기술이 이러한 일을 해 낸다면 이것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결과가 된다. 과연 그러한 날이 올 수 있을까? 과연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체를 인간의 능력으로 조작하여 영생하도록 바꿀 수 있을까? 이 기술에는 심각한 문제가 또 하나 더 있다. 바로 복제인간의 생명이다. 영생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복제인간은 인격을 가진 인간 이라기보다는 훗날 장기를 제공할 실험재료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존재다. 그러한 복제인간에 인권이 어디 있으며, 존엄성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은 비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이세상과의 이별이요 끝이며 마지막인 반변에 기독교인에게는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요 시작이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입학식이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새로운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고 이 땅에서의 육신적 생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한다. 생명이 죽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을 누릴 수 없다. 그런데 현대 생명공학을 활용한다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인간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걱정되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든든히 지키게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3-24)”에서 알 수 있듯이 그룹(천사)들과 불 칼을 이중으로 두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지 못하게 지키고 계신 것이다.

만약 인간의 오만과 독선이 생명과학 기술을 잘못 사용하므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기 위해서 생명나무에 접근하려 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그룹들이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생명나무 길을 지키는 두루 도는 불 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복제인간을 탄생시켜서 영생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무용지물이 될 것으로 믿는다. 하나님이 생명나무 길을 지키고 있어서 복제인간 탄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할렐루야!!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06

참고 : 5440|5333|5148|5015|4768|4227|2328|2292

정광도
2013-03-26

욥의 십자가


      욥은 아브라함과 거의 동시대에 선지자적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욥의 십자가’라는 말은 매우 어색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욥은 예수님의 조상인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장차 자신을 구해주실 분이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욥기 19장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합니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과 만나서 인생의 문제를 풀려고 호소(욥기 23장 3 ~ 5절: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하려 합니다.

욥은 세 친구와 젊은 현인 엘리후와 ‘인간과 하나님’이란 주제를 놓고 기나 긴 논쟁을 합니다. 욥의 극한 고난은 인생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생각들을 펼치게 하였습니다. 당대의 내노라 하는 현자들이 토론하였지만,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욥은 인생에 대한 토론을 더 할 수 없을 만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재산도 자녀도 잃고 하나님도 자신을 버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정도로 몸은 만신창이 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아도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셔서 창조의 역사를 들려 줍니다. 창세기에 설명되지 않았던 창조의 자세한 사건들을 풀어나가면서 설명하십니다. 아마도 욥이 조물주로부터 듣고 기록한 부분들은 극히 일부분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의 사건만을 설명하고, 욥이 겪은 고난을 위로하시거나, 왜 고난이 오는지에 대한 설명은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창조의 사건만 계속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타조에게는 새끼를 잘 기르는 지혜를 주시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욥기 39:17: ”이는 하나님이 지혜를 베풀지 아니하셨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여러 동물을 설명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드셨는지 그리고 어떤 특징을 각각 주셨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어떤 동물은 총명하게 어떤 동물은 덜 지혜롭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만드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욥도 하나님에게 고난을 왜 그렇게 모질게 주셨는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그렇게 찾던 하나님을 만났지만, 감히 한 마디도 묻지 못하고 창조의 사건 설명만 들었습니다. 욥은 절대 주권자이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자신이 무지한 말로 인생과 하나님의 속성을 논한 것을 회개(욥기 42장 2~6절: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합니다.

욥은 이제서야 인생의 해답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됩니다. 욥이 얻은 해답은 전능하신 절대 주권자 창조주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욥의 구원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욥은 고난의 때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멀리 바라보고 대속주를 기다렸습니다. 그 대속주 곧 창조주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가로의 나무와 수직의 긴 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직의 긴 나무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말하고, 수평의 짧은 나무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말한다고 합니다. 욥은 친구와의 관계도 용서를 통해 회복하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욥기 42: 10절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 사건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시면서, 동물의 모든 특성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만드셨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유신진화론적 신학자들은 모든 동식물이 진화로 만들어 졌고, 그 특성들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강변합니다. 이와 같은 사상이 자유주의 신학계뿐만 아니라 보수 신학계에도 슬금슬금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도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도 모두 부정합니다. 세상의 자연과학이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위에 군림하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드리고, 자연과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성경의 각 부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별 저항 없이 부정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수직 막대기를 가볍게 버렸습니다. 수직 막대기 없는 수평 막대기는 땅에 떨어져서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외치는 십자가의 도는 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는 돌무더기에 쓰러진 무가치하고 실패한 십자가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절대 주권적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없이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인간들 간에 지은 죄에 대해서 교회에 나아가 회개하지만,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인정하지 아니하는 보다 근본적인 죄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조금만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욥은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였습니다. 욥의 구원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이 고난과 역경을 견디는 믿음은 전능하시고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을 바로 믿는 창조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신앙고백에서 태양을 신격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욥기: 31장 26절 ~ 28 절: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진화론자들은 만물이 스스로 주인이라고 생각하여 거대하고 신기한 물체나 동식물을 신격화합니다. 진화론자들이 동물의 멸종을 특별히 안타까워하는 것은 진화가 만들어 낸 하나의 가상의 신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도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께 찬양하기 보다는 그 피조물을 경외하기도 합니다. 일본인의 신관과 인도인들의 신관도 이와 같은 범신론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고통을 깊이 인식하고 그 사랑을 느끼는 것 만으로는 구원이 이루어 지지 않고 그 분이 누구이신가를 바로 알고 믿는 믿음에서 구원이 나오는 것이 아닌지요?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인정하지 않고, 성경을 부분적으로 믿고 의심하면서 구원을 바라는 것은 가장 큰 모순이 아닌지요?

예수님이 그 창조주이심과 예수님의 창조적 기적을 일부러 부정하고,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만 강조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 창조는 인정하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기적을 부인하는 모양새도 참 안타깝습니다.

요한복음 1 장은 예수님이 창조주 이심을 선포하고 있으며, 그 창조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욥의 십자가를 마음 속에 그려 봅시다. 욥의 십자가는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고 창조 신앙과 용서를 통해 온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수를 누리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욥기 42장 17절: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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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
2013-03-20

히브리식으로 생각해보실까요?


      몇 해 전 창조과학회 모임에서 한 목사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예쁜 여자 아이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여러분 이 아이에게는 2종류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창조론 강연을 오랫동안 하시던 분들이라 사람의 유전자를 2종류로 어떻게 나눌지 잠깐동안 고민하는 모습들이 보였고, 제 머릿속에도 DNA, 염색체 등을 떠올리면서 답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답변은 너무 쉬었습니다. ”이 아이는 제 손녀딸인데 이 아이가 가진 유전자의 종류 중 하나는 예쁜 유전자이고, 또 하나는 아름다운 유전자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식 사고와 헬라식 사고를 얘기하시면서 창조론 강연을 하는 우리들에게 히브리식 사고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몇 해 전 가을에 저희 가족은 친하게 지내는 집사님 가족과 함께 며칠간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단풍이 한창이었는데 초등학생이던 집사님의 큰 딸에게 ”단풍이 왜 생길까?”하고 물었습니다. 과학을 특별히 좋아하던 그 아이는 ”가을이 되어 찬바람이 불면 나뭇잎의 엽록소가 파괴되어 색깔이 변하는데 ... ” 하면서 열심히 설명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단풍이 지는 것은 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수고한 사람들이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서 기쁘게 즐기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란다.” 그 아이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는데 집사님 부부는 의미있는 표정으로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는 과학주의에 빠져있습니다. 과학적이지 않으면, 그래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면 일단 무시하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과학이 발견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과학이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 6일간의 천지 창조, 예수님의 성육신, 성경의 수많은 이적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보라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타락 이후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헬라식 사고를 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이성을 좇아 살아왔고, 그런 모습이 현대 과학과 어우러지면서 헬라식 과학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현재 교육의 많은 부분에서도 헬라식 사고만을 강조하면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 역시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히브리식 사고는 이성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찾으려고 애쓰는 생각과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에 있어서도 무언가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지 않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다음의 질문과 답처럼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아름다운 꽃이 생겨난 이유는?” →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에게 창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시고, 인간들 사이에 특히 남성이 여성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계절마다 열매가 열리는 이유는?” →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이 계절마다 맛있는 열매를 먹고 나누며 먹거리를 주신 분께 감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늘에 수많은 별이 빛나는 이유는?” →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계심을 밤마다 기억하게 하시면서 수많은 별들로 채워져 있는 커다란 우주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히브리식 사고는 헬라식 사고로 절대 풀어낼 수 없는 많은 사실에 대해 좋은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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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일
2013-01-01

“새로운 출발선에서”


      2013년 새해를 맞이하는 창조과학 동역자, 후원자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길 기도드립니다. 6대 창조과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인사를 드리면서, 창조신앙 회복의 최전선인 창조과학회의 회장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영적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김영길, 송만석, 이웅상, 정계헌 등 역대 회장님들의 수고와 헌신을 생각해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직분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매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와를 강하고 담대하게 하신 이유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함께 감당할 리더십들과 동역자들이 있어 마음을 다지면 새로운 걸음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창조과학회는 학술과 교육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헌신적인 사역을 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학술과 교육은 창조과학회의 두 기둥이 될 것입니다. 학술사역을 통해 새로운 과학적 지견을 넓힐 뿐 아니라, 진화론을 인정하는 신학과 교회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접촉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화론의 해악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분들에게 창조신앙을 학문적 토대에서 전하면서,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감추어왔던 창조질서를 전하는 귀한 연구가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교육원을 통한 교육사역도 오프라인에서 온라인까지 확장되는 과감한 시도가 이뤄질 것입니다. 인터넷 방송, SNS 등을 이용한 창조과학 컨텐츠의 보급이 이뤄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젊은 창조과학자들이 함께 어울리고 새로운 꿈을 꾸는 창조과학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복음화율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10대들을 위한 창조과학 교육이 무엇보다 급하며, 이를 섬길 수 있는 젊은 사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캠퍼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창조과학 운동이 일어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창조과학 어린이, 청소년 캠프, 창조과학탐사여행과 같은 프로그램들이 확장되고 정착될 수 있도록 교회와의 연합사역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창조과학회는 강사료를 학회에 헌금하면서 사역에 헌신한 많은 선후배 동역자들로 인해 한국교회로부터 분에 넘치는 존중과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교회에서 창조과학 사역에 대한 지원이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가 더 한국교회를 섬겨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미자립 개척교회, 군교회, 선교사님들을 더 적극적으로 섬겨, 우리나라 교회가 부흥하고, 선교지에서 놀라운 열매들이 나타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세상은 화려하고 풍요하며, 과학이 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에 창조신앙을 전하는 것은 초대교회가 유대인들과 이방인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로마까지 복음을 전해 세상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창조신앙의 회복은 이 세대에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연합과 능력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갔듯이 창조과학 동역자들의 연합과 기도를 통해 창조신앙이 회복되고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길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창조과학 사역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헌신한 많은 동역자들과 함께 새로운 출발선에 선 심정으로 함께 달려가고 싶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들을 격려할 것이고 믿습니다. 부름의 상을 좇아 푯대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2013년 1월 1일 새해 아침에

이은일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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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최용준 한동대학교
2012-09-28

과학과 신학 : 갈등인가? 통합인가? 

(Science and Theology: Conflict? or Integration?)



요약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과 신학의 관계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두 학문은 서로 대립적이며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는 입장이며, 둘째로 양자는 각각 독립된 학문으로 영역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관점이다. 셋째로 신학과 과학은 서로 이해관계가 중복됨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지막으로 양자는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이 네 가지 입장을 간략히 소개한 후 궁극적으로 두 학문은 통합관계가 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Historically speaking, there are four type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science and theology. The first type is the conflict theory, stating the two disciplines contradict and are incompatible with each other. The second view is that both are independent treating each as quite separate realms of enquiry. The third perspective is that both can have a dialogue because each field has things to say to each other. Finally, there is an integration model which aims to unify both fields into a single discourse. After presenting each view respectively and critically, I would like to argue that science and theology can be integrated harmoniously.

 

I. 서론

최근 과학과 신학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학문적인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1) 그렇다면 양자 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과학과 신학이 처음에는 상호 대립적이지 않았다. 특히 자연과학의 본격적인 발전기를 중세 이후로 볼 때, 당시 과학은 신이 창조한 세계를 연구하는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신학자가 과학에도 정통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과학과 신학은 상호 갈등을 빚기도 하였고, 반대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과 신학의 이러한 관계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겠다.2) 첫째, 두 학문은 서로 대립적이며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은 이전의 프톨레미적 세계관, 즉 지구 중심적 세계관에 대해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처음 주창한 지동설을 나중에 다시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과학적 증거를 들면서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그 때까지는 신학의 한 분과로 연구되어왔던 과학이 점점 신학의 권위를 위협하자 기존 교회는 과학에 대해 종교 재판이라는 명목으로 경고하였고, 그 이후부터 과학은 수시로 신학과 갈등관계를 보여 왔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이론은 미국의 과학자 드레이퍼(John W. Draper: 1811~1882)3) 및 화이트(Andrew D. White: 1832~1918) 등이 주창하였다.

둘째로 위의 견해에 반대하여 과학과 신학은 각각 독립된 학문으로 연구 영역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 의해 주창되었다. 그는 과학이란 경험 가능한 사실(facts)의 영역을 다루는 학문이며, 신학은 가치와 도덕 및 신앙(faith)의 영역을 다룬다고 하면서 양자를 분명히 구분했다. 따라서 두 학문은 서로 갈등이나 모순된 관계가 아니라 각기 별개의 분야이며 나름대로의 방법론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영향으로 그 후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였다. 

하지만 양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중복됨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보는 세 번째 관점이 나타났다. 이것은 미국의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61~1947) 및 영국의 과학자이며 신학자인 폴킹혼(John C. Polkinghorne: 1930~)이 강조하는 입장으로, 과학과 신학은 창조적 협력을 통해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 진리들을 계속해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비추어 보면서 재고하는 동시에 과학 이론도 그 전제가 되는 철학적, 신학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자들도 과학적인 이론과 경험적인 실험에 개방적이어야 하며 과학자들도 신학자들의 연구에 귀 기울일 때 이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양자는 서로 공헌할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두 학문은 궁극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 헤르만 도여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가 주장했다. 여기서 양자가 통합된다고 해서 각자의 학문 영역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학의 연구 영역과 신학의 연구 대상은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양자 모두 하나의 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그 학문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므로 인간에 의해 통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에도 그 인간의 중심이 학문과 인간의 궁극적인 기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통합의 성격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도여베르트는 이러한 내용을 소위 그의 ‘이론적 사고의 선험적 비판(transcendental critique of theorectical thought)’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4)

본고에서 필자는 이 네 가지 입장을5) 좀 더 각기 상세하게 소개하고 평가하면서, 이 네 가지 이론 중 어느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지를 탐구하여 결론을 맺고자 하는데, 결국 두 학문은 갈등적 요소도 있고 독립적 요소가 있지만 대화가 가능하고 나아가 통합관계가 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II. 과학과 신학의 관계

1. 갈등 모델 

과학과 신학이 서로 갈등적 입장에 있다고 보는 관점은 초대 교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대표적인 교부는 터툴리안(c.160~c.225)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유명한 말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우선 이방 철학과 복음의 관계를 언급한 것이지만, 폭넓게 해석한다면 인간의 이성이 중심이 된 과학과 신적 계시가 중심이 된 신학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영적 대립 관계6)에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갈등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근대 계몽주의(Enlightenment) 시대에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과학자들은 점차 계시에 기초한 신학적 진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과학은 점점 더 절대화되어 가장 신뢰할만한 지식을 획득하고 진리를 얻게 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방법으로 인정하게 되는 소위 ‘과학주의(scientism)’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과학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고까지 주장하게 되어, 결국 신학이 전제하는 신적 존재까지도 의심하게 되었고, 과거의 모든 전통들이나 미신 또는 신학적 주장들도 이성에 의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7)

나아가 이러한 이성 주도적 과학 및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인본주의적이며 낙관주의적 역사관을 낳아 인류의 모든 문제들을 인간의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해결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하는 무한한 진보신앙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부터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과학이 달성한 수많은 업적은 세계관 및 인간관까지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의 단세포 생물에서 진화되어 왔다고 보게 된 것이다.  

또한 과학은 성경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 부활 등 초자연적 기적들 및 초월적 창조주나 신적 섭리도 자연법칙에 어긋나기에 부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관은 결국 기계적이며 결정론적이고 물질 중심적 세계관인 자연주의(Naturalism)을 낳게 되었다.8) 자연은 하나의 거대하고 정교한 기계에 불과하며 정해진 법칙을 따라 움직일 뿐 의미는 없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의 자유나 가치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생각은 결국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낳게 되었고, 히틀러 또한 다윈의 진화론에 큰 영향을 받아 나찌즘을 주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거대한 도전 앞에 신학은 큰 충격을 받았고 처음에는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과학적 증거들을 반박할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가령 영국의 성공회 주교였던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 1805~1873) Wilberforce)는 당시의 저명한 과학자로서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하던 헉슬리(Thomas H. Huxley: 1825~1895)의 이론을 비판하였고,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였던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다윈의 사상을 무신론으로 몰아붙였다.

또한 이 갈등 이론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과학자 드레이퍼 및 화이트 등에 의해서도 주창되었는데, 먼저 1870년대 초에 드레이퍼는 종교와 과학 간의 갈등의 역사에 관해 책을 출판하였다. 여기서 그는 특별히 가톨릭교회의 교황 무오성 교리 및 반 지성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반면에, 이슬람과 개신교는 과학과 큰 갈등이 없다고 주장했다.9) 또한 1896년에 화이트는 「기독교 내에서 과학과 신학의 전쟁사」라는 책을 출판했다.10) 이것은 그가 이 주제에 대해 30년 동안 연구한 결과물인데, 여기서 그는 과학에 대한 기독교의 제한적이며 독단적인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갈등 모델을 소위 "드레이퍼-화이트 논제(the Draper–White Thesis)”, '전쟁 논제(the Warfare Thesis)” 또는 "전쟁 모델(the Warfare Model)”이라고 부른다. 즉 과학과 신학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던 신화나 갈릴레오 사건과 같이 종교와 과학은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로 적대적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입장은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가령 코인(Jerry Coyne) 및 타이슨(Neil D. Tyson)등 미국의 일부 과학자들도 과학과 신학은 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가령 타이슨은 뉴튼(Isaac Newton: 1642~1727)이 해결되지 않은 과학적 이슈들에 대해 종교적인 해답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 갈등 모델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모델의 과학관은 결국 무신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근본주의적 신학자들은 이 모든 과학적 주장을 거부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축자적으로 확신하고 주장했다. 나아가 참된 과학은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하지만 진화론은 창조론과 어긋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적어도 신학과 진화론적 과학은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고 화해할 수 없는 갈등관계이다. 그런데 사실상 근대 과학이 낳은 무신론적 자연주의라고 하는 세계관 자체는 이미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무시무시한 제 1,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을 경험하면서,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나이브한 낙관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과학주의의 우상을 버리게 되었다. 신학 또한 근대 과학의 다양한 도전 앞에서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권위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과학의 열매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지나친 과학지상주의를 경계하는 입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갈등 이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2. 독립 모델

갈등 모델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된 이론이 독립 모델이다. 즉 과학과 신학은 별개의 영역을 다루는 독립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자연 현상의 작용을 다루며 신학은 초자연적이고 초경험적 현상들 및 가치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다룬다고 본다. 전자는 사실의 영역을 후자는 신앙의 영역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 간에는 전혀 연결점이 없고, 따라서 갈등이 일어날 필요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칸트가 그 대표적 철학자로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하면서 실재를 현상계(phenomenal world)와 초현상계(noumenal world)로 나누어 전자는 과학의 영역으로, 후자는 신학의 영역으로 이원화했다. 현상계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자연계를 의미하며 초현상계는 궁극적인 원인들 및 사물의 진정한 성질을 다룬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확실한 지식은 오직 현상계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칸트는 초자연적이거나 도덕법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모두 신앙의 영역으로 추방하여 사실-신앙(fact-faith)의 이원론적 입장을 유지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학의 속박과 간섭으로부터 과학을 온전히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결과 과학은 물질의 영역으로 제한되었고 마침내 포이에르바흐(Ludwig A. von Feuerbach: 1804~1872)와 같은 무신론적 물질주의(materialism)를 낳았고,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미국의 과학자 굴드(Stephen J. Gould: 1941~2002)는 '양립 이론(non-overlapping magisteria: NOMA라고도 불림)'을 주장한다. 이 입장은 과학과 신학은 근본적으로 인간 경험의 다른 면들을 다루기 때문에 각 학문은 각자의 영역이 있고 따라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11) 굴드가 이렇게 과학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반면, 영국의 철학자 스테이스(Walter T. Stace: 1886~1967)는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는 과학과 신학은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고 완전하다고 본다.12) 경험을 해석함에 있어 과학은 서술적이지만 신학은 규범적이며, 과학은 사실의 세계를 다룬다면 신학은 당위의 세계를 다루고, 과학은 방법(how)을 신학은 이유(why)를 다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가 자기 영역을 지키지 못할 때 혼란이 생기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갈릴레오 재판이라는 것이다.

신학자들 중에는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브룬너(Emil Brunner: 1889~1966),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및 니버(H. Richard Niebuhr: 1894~1962)가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실존주의적 신학은 칸트와 키엘케골의 영향을 받아 이 세상을 사실, 법칙 및 결정론의 영역과 가치, 의미, 목적 및 자유의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신학은 하나님과의 도덕적이고 종교적 경험을 해석하는 학문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과학은 신학과 모순되지도 않고 신학을 지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신학도 과학의 발견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신학도 더 이상 성경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성경은 과학적인 책이 아니며, 창세기는 단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신화로 보고, 창조를 하나의 긴 진화 과정으로 보려 한다. 나아가 동정녀 탄생이나 예수의 부활 등 성경에 나타난 많은 기적들도 부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내용들은 과학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이 세상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든 신앙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지배적인 과학이론은 물질주의적, 기계적이었다. 따라서 자연에는 더 이상 자유, 의미 그리고 가치의 영역이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과학은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불확정성 등이 지배하면서 더 이상 하나의 세계관을 믿지 않는다. 신학도 더 이상 과학을 그 기초로 보지 않고 과학에 의해 위협받지도 않는다. 따라서 신학은 어떤 과학이론에도 무관심하며 다만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헌신적 결단 및 도덕적 의미만 탐구한다. 결국 과학과 신학은 서로 해치거나 지원할 수 없고 상호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 이론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다. 과학은 매우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기도한 수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반면, 신학 또한 일상적인 삶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철학자인 쿤(Thomas S. Kuhn: 1922~1996)도 과학이란 문화적 전통에서 나타나는 패러다임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신학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13) 폴라니(Michael Polanyi: 1891~1976)도 과학적 지식도 보편성에 대한 헌신에 불과하고 많은 과학적 방법에 대한 개념에서 발견되듯이 객관적 중립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14) 나아가 그는 모든 지식은 개인적이며, 따라서 과학자가 학문하는 행위조차도 매우 개인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며, 신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헌신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15)

영국의 물리학자인 쿨슨(Charles A. Coulson: 1910~1974) 및 미국의 물리학자 쉴링(Harold K. Schilling)도 과학과 신학의 방법들은 서로 공통점이 많다고 주장했다.16) 쿨슨은 과학이 단지 사실들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에 의해 진보하며, 신학은 과학이 다루지 못하는 경험의 영역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쉴링은 두 학문의 영역 모두 ”경험, 이론적 해석 및 실제적 적용이라는 삼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이 모델은 신학과 과학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무시하여 양자 간에 건설적인 대화와 교류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신학도 과학적 세계관 및 철학의 영향을 받았고 과학 또한 특정한 철학적 전제들을 이어 받은 신학적 분위기에서 탄생했음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는 계속해서 과학과의 열린 대화를 통해 계속해서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대화 모델에 대해 알아보겠다.

 

3. 대화 모델

많은 신학자들이 이제는 과학의 연구 결과들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과학자들도 그들의 이론들을 좀 더 신학적 문맥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도 신학과의 대화에 더 관심을 가진다. 가령 ‘왜 우주는 질서 정연하게 존재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은 과학이 답변할 수 없으므로 신학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상호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령 신학적 교리들도 현재 과학의 빛에 비춰보고 반대로 과학 이론들도 신학적 요소들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지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과학적 이론이나 발견에 의한 새로운 사실들에 좀 더 개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신학 연구의 지속적인 발전에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할 것이다. 과학자들 또한 그들의 가정들이 신학에 기초해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자세는 그들이 연구한 데이터를 해석하는데 영향을 줄 것이다. 나아가 그 가정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과학적 진보를 낳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상호 연구를 자극하고 격려하는 동시에 자체적인 영역을 훼손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대화의 과정에서 특정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이러한 대화는 건강하고 상호적인 협력을 낳게 될 것이라고 본다. 즉, 과학은 신학이 가질 수 있는 오류나 미신을 제거할 것이며, 신학은 과학이 무의식적으로 절대화하는 전제들을 지적할 수 있으므로 양자는 상호 협조 및 견제하면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모델은 과학과 신학을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대신 한 사건에 대해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실재는 매우 다양한 차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과학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과학은 실재의 한 면을 떼어 내어 그 면을 다양한 기술로 실험하고 측정한다. 그러나 신학은 실재 전체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과학이 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델의 대표적인 학자로 미국에서 과정 신학을 정립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1861~1947), 독일의 몰트만(Juergen Moltmann), 영국의 물리학자이면서 성공회 신부였던 폴라드(William G. Pollard: 1911–1989)와 폴킹혼(John C. Polkinghorne) 그리고 호트(John F. Haught) 등이 있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이 실재의 한 차원을 말한다면, 철학은 과학이 추상화하는 실재 전체를 다루며, 신학은 이러한 전체 실체의 도덕적이고 종교적 차원 즉, 신과 세상 및 인간과의 관계를 다룬다고 본다. 따라서 대화 모델은 과학과 신학이 다루는 대상, 주제 및 방법도 다르다고 보면서 양자 모두 그 영역 안에서 진리이며 상호 모순되지 않고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의 폭을 넓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몰트만 역시 세계에 대한 신학적 인식이 자연과학에 중요하며 과학적 인식도 신학을 풍요롭게 한다고 주장한다.17) 폴라드는 인간의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이고 공적인 반면 신학적 지식은 주관적이며 개인적이라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편견임을 지적했다.18) 나아가 폴킹혼 역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시도한 영국의 대표적 학자로 자신의 대화 원리를 공명론(consonance)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공명이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신학적 이해가 지속적으로 서로를 심화시키고 상대방으로 인해 자신이 새롭게 조명되는 관계”를 의미한다.19) 그는 과학과 신학 모두 하나의 신과 우주를 전제하며 과학이 탐구한 실재와 신이 창조한 우주는 서로 일치한다고 본다.20) 그러므로 신학과 과학은 함께 하는 것이 우주에 대해 더 적합한 이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맥그라스(Alister E. McGrath) 또한 양자 간의 인터페이스와 상호 관계를 강조한다.21)

이러한 대화 모델은 과학과 신학의 장단점을 상호 보완한다는 면에서 바람직하게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상호 타협하여 창조적 진화론 등 성경 진리를 양보하려는 경향도 있다. 이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통합 모델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제 이것을 살펴보겠다.

 

4. 통합 모델

프랑스의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순전히 물질적인 관점에서 관찰하는 당시 과학의 흐름과는 대조적으로, 물질과 정신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외면’과 ‘내면’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주는 단순한 출발점(알파 포인트)에서 시작하여 점점 복잡한 체계를 이룬 후 정신세계로 확산되어 완성점인 ‘오메가 포인트’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심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이다.22) 따라서 과학과 신학도 궁극적으로 이 오메가 포인트에서 만나게 될 것이므로 함께 대화하면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의 역사가이며 생물학자인 바울러(Peter J. Bowler)도 과학과 신학간의 갈등보다 화해를 추구하여, 지적으로 보수적인 과학자들과 자유주의적 신학자들 간의 협력 및 통합을 강조했다.23) 바버가 1966년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에 관한 책을 출판한24) 이후부터 ‘종교와 과학’ 그리고 ‘신학과 과학’에 관한 학술지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25) 그 외에 미국 물리학 저널 (American Journal of Physics) 및 미국 과학 저널 (American Journal of Science) 등과 같은 주요 학술지에도 이와 관련한 논문들이 실리기도 했다. 나아가 최근에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인 플란팅가(Alvin Plantinga)는 과학과 종교 간의 피상적인 갈등 보다는  깊은 일치점이 있으며, 오히려 과학과 자연주의 간에는 얼핏 일치점이 있는 것 같지만 보다 깊이 고찰해보면 더 큰 갈등이 있다고 주장했고26) MIT 출신의 과학자 슈뢰더(Gerald L. Schroeder)는 과학이 신앙에 긍정적 근거를 제공한다고까지 말한다.27)

네덜란드의 과학사가인 코헨(H. Floris Cohen)은 근대 과학의 발전 초기에 성경적 영향이 있었음을 주장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호이까스(R. Hooykaas: 1906~1994)의 논제 즉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성경적 세계관이 그리스의 합리주의적 약점에 대한 대안이 되었음을 강조했다. 즉 하나님의 일반 은총 속에 만인 제사장설이 강조되면서 직업이 소명임을 인식하여 육체노동을 존중하게 되었고,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 창 1:27-28; 2:15) 하에 실험 및 경험주의를 강조하며 자연의 신성을 제거한 신관이 주요한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개신교가 근대 과학의 출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28)

옥스퍼드의 역사가 해리슨(Peter Harrison) 또한 성경적 세계관이 근대 과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해리슨은 개신교적 성경 해석이 자연의 해석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29) 그는 또한 창세기의 창조 및 타락 이야기가 17 세기 영국의 자연과학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당시 과학은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자연에 대한 지배를 회복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30)

역사가이며 종교학자인 클라렌(Eugene M. Klaaren)도 창조 신앙이야말로 17 세기 영국에서 과학이 출현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31) 역사가 제이콥(James R. Jacob)도 17 세기 성공회의 지적 변혁 및 영향력 있는 영국 과학자들(가령, 보일 및 뉴튼)에 대해 언급했다.32)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가이며 신학자였던 브루크(John H. Brooke)는 자연 철학자들이 자연법에 대해 언급할 때, 그 법칙들은 지적인 신에 의한 입법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데까르트(1596-1650)도 ”하나님께서 자연에 심으신 법칙들”을 발견한다고 주장했으며, 나중에 뉴튼도 태양계의 법칙은 ”지혜롭고 전능하신 신의 섭리와 지배”를 전제한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33) 역사가 넘버즈(Ronald L. Numbers)도 이러한 입장이 화이트헤드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여러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가 과학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34) 베일러 대학교의 사회학자 스타크(Rodney Stark)도 ”기독교 신학은 과학의 출현에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며35) 한국의 조덕영 교수는 칼빈의 적응 이론(accommodation theory)이 복음주의적 과학관이라고 보며36) 박찬호 교수도 원칙적으로 통합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37)

끝으로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 도여베르트는 과학과 신학이 서로 독립성이 있지만 통합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38) 그에 따르면 각 학문들은 실제의 한 양상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연구한다. 가령 과학 중에도 물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물리적인 면만 집중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자료들을 모으고 체계적이며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물리학적 지식을 축적하고 법칙들을 연구한다. 신학은 계시인 성경에 기초하여 각 분야(조직신학, 성경 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등)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립한다. 이렇게 각 학문의 대상을 생각하면 칸트 등이 말하는 독립 이론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나, 궁극적으로 두 학문을 각각 학문으로 만드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점이 또한 통합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도여베르트는 이것을 이론적 사고의 반립(antithesis)과 종합(synthesis)으로 설명한 후 결국 이 학문의 주체인 인간도 독립적이거나 자충족적이지 못하고 궁극적 기원을 지향하며 그 기원과의 관계에 의해 학문의 내용 및 전제가 결정된다고 본다. 이러한 기원이 성경적인 유신론일 경우 각 학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과학적 물질주의 등을 낳게 되며, 이것은 결국 사상적 우상이 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과학과 신학의 통합은 만유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거듭난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 창조 질서 및 영적인 법칙들을 연구할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III.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과학과 신학간의 관계를 네 가지 모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양자를 갈등적으로 보는 입장, 서로 독립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모델, 두 학문의 대화를 시도하여 상호 보완하려는 입장, 그리고 통합될 수 있다는 모델도 살펴보았다. 특히 필자는 기독교 철학적 관점에서 진정한 통합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혀 보았다. 기독 학자는 계속해서 겸손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학문과 신앙 그리고 삶 전체가 통합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Footnotes

1)그 대표적인 두 저서로는 폴킹혼(John C. Polkinghorne)의 One World: The Interaction of Science and Theology (Philadelphia and London: Templeton Foundation Press, 2007) 및 Science and Theology: An Introduction (London/Minneapolis: SPCK/Fortress Press, 1998) 참조.
2)이 네 모델은 Ian G. Barbour, When Science Meets Religion, 이철우 역,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 (서울: 김영사, 2002)와 http://en.wikipedia.org/wiki/Relationship_between_religion_and_science를 참고했다.
3)John W. Draper,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New York: D. Appleton, 1874)
4)Herman Dooyeweer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Ontario: Paideia Press, 1984)
5)존 호트(John Haught)는 이 네 가지 입장을 모두 영문자 C로 시작하는 분류법을 제시했다. 즉 갈등(Conflict) 이론, 대조 (Contrast) 이론, 접촉 (Contact) 이론 및 긍정 확인 (Confirmation) 이론이다. John Haught, Science and Religion: from Conflict to Conversation (Mahwah NJ: Paulist Press 1995) 구자현 역,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 (서울: 들녘, 2003) 참조. 그는 대화를 강조한다.
6)근대에 와서는 네덜란드의 영적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도 양자 간에 영적 대립(antithesis)이 있음을 인식하고 주장했다. A. Kuyper, Lectures on Calvinism (Grand Rapids: Eerdman, 1931) 참조.
7)러셀은 심지어 과학과 신학의 갈등은 단지 학문 간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이 있음을 주장한다. Russell, Bertrand. Religion and Science, 김이선 역, 종교와 과학 (서울: 동녘, 2011)
8)James Sire, James Sire, 김헌수 역, The Universe Next Door 기독교세계관과 현대사상, (서울: IVP, 2007) pp. 75-105 참조.
9)http://en.wikipedia.org/wiki/Conflict_thesis 2012년 3월 20일 오전 11시에 접속함.
10)Andrew D. White,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 (Kessinger Publishing, 2004) (재판). Ferngren, Gary B. ed. Science and Religion: A Historical Introduction (Baltimore and London: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2)도 참고.
11)Stephen J. Gould. Rocks of Ages: Science and Religion in the fullness of life (Ballantine Books, 1999)
12)W. T. Stace, Time and Eternity: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Religion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2)
13)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14)Michael Polanyi, Science, Faith, and Society (Oxford: Oxford Univ. Press: 1946), reprinted b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in 1964.
15)Michael Polanyi, Personal Knowledge: Towards a Post-Critical Philosoph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Ian G. Barbour, 'Science and Religion Today'. In Ian G. Barbour (ed.). Science and Religion: New Perspectives on the Dialogue (1st ed.) (New York, Evanston and London: Harper & Row, 1968) pp. 3–29.
16)http://en.wikipedia.org/wiki/Relationship_between_religion_and_science#Independence, 2012년 3월 28일 오후 1시 55분 접속함.
17)Moltmann, J. 김균진 역, Wissenschaft und Weisheit: Zum Gespraech zwischen Naturwissenschaft und Theologie, 과학과 지혜: 자연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위하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18)William G. Pollard, Physicist and Christian: A dialogue between the communities (Seabury Press, 1961)
19)J. Polkinghorne, Quarks, Chaos and Christianity: Question to Science and Religion, (New York: The Crossroad Publishing Company, 1994) pp. 67-68. Ted Peters도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다. Peters, Ted. ed. Science and Theology: The New Consonance, 김흡영, 배국원, 윤원철, 윤철호, 신재식, 김윤성 역,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 (서울: 동연, 2002) 참고.
20)이정배, '폴킹혼(J. Polkinghorne)의 공명론과 유신론적 자연신학 연구: 유신론적 작인 이론을 중심으로”, 한국조직신학회 엮음, 과학과 신학의 대화 한국조직신학논총 9집,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p. 39.
21)McGrath, Alister E. A Scientific Theology, Volume 1: Nature. Volume 2: Reality. Volume 3: Theory. (Edinburgh: T&T Clark, 2001)
22)Pierre Teilhard de Chardin,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and Row, 1959), pp. 250-75.
23)Peter J. Bowler, Reconciling Science and Religion: The Debate in Early-twentieth-century Britai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24)Ian G. Barbour, Issues in Science and Religion, reprinted by Harpercollins College Div in 1971. Smedes, Taede A. 'Beyond Barbour or Back to Basics? The Future of Science-and-Religion and the Quest for Unity'. Zygon, 2008 43 (1): pp. 235-58도 참고.
25)http://en.wikipedia.org/wiki/Faith_and_Science#Christianity, 2012년 3월 24일 오후 5:30에 접속.
26)Ibid., Alvin Plantinga, Where the Conflict Really Lies: Science, Religion, and Natural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27)Schroeder, Gerald L. The Hidden Face of God: Science reveals the ultimate truth (New York: Touchstone, 2001)
28)Ibid., R. Hooykaas, 손봉호, 김영식 공역, Religion and the Rise of Modern Science 근대과학의 출현과 종교 (서울: 정음사, 1987)
29)Ibid., Peter Harrison, The Bible, Protestantism, and the Rise of Natural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30)Ibid., Peter Harrison, The Fall of Man and the Foundations of Scien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 Charles Webster, The Great Instauration (London: Duckworth, 1975)
31)Ibid., Eugene M. Klaaren, Religious Origins of Modern Science: Belief in Creation in Seventeenth-Century Thought (Grand Rapids: Eerdmans, 1977)
32)Ibid., James R. Jacob, 'The Anglican Origins of Modern Science”, Isis, Volume 71, Issue 2, June 1980, pp. 251-267.
33)Ibid., John Hedley Brooke, Science and Religion: Some Historical Perspectiv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 19.
34)Ibid., Ronald L. Numbers, Science and Christianity in pulpit and pew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 4, 138 n. 3. 여기서 그는 특별히 포스터(Michael B. Foster), 호이까스(Reijer Hooykaas), 끌라렌(Eugene M. Klaaren) 그리고 자키(Stanley L. Jaki)의 업적을 인정한다.
35)Ibid., Rodney Stark, For the glory of God: how monotheism led to reformations, science, witch-hunts and the end of slave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 p. 123.
36)조덕영, 과학과 신학의 새로운 논쟁: 과학과 신학의 최근 주요 논쟁점에 대한 복음주의적 해석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2006) pp. 67-77 참조.
37)박찬호, 과학과 신학 그리고 영성 (서울: 대서, 2010) 참조.
38)Yong Joon Choi, Dialogue and Antithesis: A Philosophical Study on the Significance of Herman Dooyeweerd's Transcendental Critique (Philadelphia: Hermit Kingdom Press 2006). 최용준, '헤르만 도여베르트: 변혁적 철학으로서의 기독교 철학의 성격을 확립한 철학자',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손봉호 외, (서울: IVP, 2005), pp. 3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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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2012 국제학술대회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473

참고 : 5466|5462|4765|4766|5272|5112|5461|5210|5211|3241|3244|2312|2962|3700|3434|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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