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Jonathan Sarfati
2009-02-13

창세기 1장의 수 패턴

 : 날(day, 욤)의 길이에 대한 결정적 단서 

(The numbering pattern of Genesis : Does it mean the days are non-literal?)


       창세기 1장의 날(days)들은 히브리어로 보면 재미있는 패턴(형태)을 가지고 있는데, 영역본에는 종종 잘 반영되어있지 않다. 그 최초 날에 사용된 수사는 기수(cardinal number, 예를 들면 하나, 둘, 셋 ...)로서, יום אֶחָד (yôm echad, 욤 에하드, Day One)는 한 날(하루)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날들은 서수(ordinal numbers, 둘째, 셋째, 넷째 ...)로 수식되어 있다. 또한,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에는 정관사(ה, ha, 하, the)가 없고, 반면 여섯째 날부터 일곱째 날은 정관사가 붙여져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간의 문자적 번역은 ‘하루’,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그 여섯째 날’, ‘그 일곱째 날’이 된다.
 
이 패턴은 문자적 날(literal days)들에 반대하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 중의 선두주자인 휴 로스(Hugh Ross)가 제기한 논증들 가운데 하나를 무력화하는데 충분하다 :

”특별한 창조의 날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데 있어서 문장들의 색다른 배열이 존재한다. 히브리어를 낱말 대 낱말로 번역한 텍스트를 보면, 다음과 같은 어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저녁이었고 아침이었다. 몇째 날” ... 그 낱말의 배열은 단순하고 평범한 표현을 분명히 벗어난 것이다. 이 구문론적 불분명함이 어떤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 '날(day)'이 여기에서는 어떤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1]

앞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휴 로스는 그 구문에 대해 틀렸으며, 따라서 그의 논증은 붕괴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러한 주장은 히브리어에 대해 학식이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무모하게 해석했던, 그리고 허위인 것으로 판명된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2] 

호주 장로교회의 교회사에 대해 박사 논문을 썼던 목사인 로렌드 와드(Rowland Ward) 박사는 창세기가 쓰여진 그대로의 역사라는 견해를 지속적으로 반대해온 사람이다. 그는 심지어 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책인, 무신론자인 이안 필머(Ian Plimer, 호주의 지질학자)가 쓴 책 ‘신을 위해 거짓말 말하기(Telling Lies...)‘에 대해서도 신뢰를 부여하고 있었다.[3] 와드는 휴 로스보다 더욱 궤변적이다. 그리고 정확한 패턴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창세기의 기록된 그대로의 해석을 반대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에 ’골격가설(Framework Hypothesis)‘을 주장하였는데, 그 가설은 세속적 과학(진화론)에 비굴하게 항복하여 변형시킨 견해이며, 또한 빈약한 해석에 의한 불일치로 와드 자신이 썼던 것처럼, 창세기 1장의 날들은 실제로는 시대(ages)들로 해석되어야함을 요구하고 있는 이론이다.[4] 그러나 골격가설은 이미 폐기처분되고 있는 중이며[5, 6], 따라서 이 글은 오직 수 패턴(number pattern)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와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들 특징들은 단지(mere) 사건들의 연대기적 순서를 강조했다면 기대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cf. 민수기 29:17, 20, 23, 26, 29, 32, 35).”[7]

성경(cf. 눅 3:1-2)에 기록되어 있는 연대기(chronology)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연대기가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면, ‘단지(mere)’라는 단어도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서 아래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와드와 같지 않게 히브리어 전문가들은 그 패턴이 실질적으로 문자적 날들의 경우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일리노이주의 콩코디아 대학(Concordia University)에서 신학 및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는 앤드류 스타인만(Andrew Steinmann) 박사는 창세기의 패턴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그는 ‘욤 + 수 = 문자적 날’이라는 규칙에 예외는 없으며, 그 패턴은 창세기의 날들은 24시간의 날들임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주장하였다 :

”만약에 אחד (에하드는 first가 아니라 one이라는 의미)가 기수로 사용되었다면, 창세기 1:5절의 설득력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밤’, ‘낮’, ‘저녁’, 그리고 ‘아침’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을 것이다. 창세기 1:5절은 그 날의 주기를 시작하고 있다. 빛이 창조됨으로써 빛과 어둠은 하나의 주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낮'과 '밤'이라는 명칭을 주셨다. 저녁은 빛/낮으로부터 어둠/밤으로의 전환이다. 아침은 어둠/밤으로부터 빛/낮으로의 전환이다. 하나의 저녁을 가지고 하나의 아침을 가지는 것은 온전한 하루를 가지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창세기 1:5절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 저녁 + 아침 = 하루(evening + morning = one day). 

그러므로 매우 비범한 문법적 구조의 사용에 의하여, 창세기 1장은 하루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구절에서 특별히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이 한 절 내에서 '날(day)'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나타난 의미는 하루의 주기 동안에 일광(밤의 대비로서)에 의하여 조명되어지는 시간(낮)이다. 그 두 번째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일광과 어둠의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기간(날)이다.

그것은 그 본문이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져서, 주의 깊은 독자들은 그것을 '첫째 날'이라고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신에, 정관사의 생략에 의하여 그것은 '하루'라고 읽혀져야 하며, 그것에 더하여, 비록 넷째 날 이전까지 태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어둠 그리고 낮과 밤의 전환을 가진 태양력의 24시간의 하루와 동일한 하루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정관사가 없음을 설명해준다. 다른 저녁과 아침은 '하나의(a)'('the'가 아니라) 둘째 날을 성립시켰다. 다른 저녁과 아침은 하나의 셋째 날을 만들었고, 그리고 넷째 날도 그런 식이었다. 그 여섯째 날에, 마침내 그 관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조차, 문법은 이상한데, 왜냐하면 기대되는 바와 같이 욤(יום)에 관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여섯째 날이 통상적인 한 태양일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그러나 그것은 또한 창조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와 같이, 그 일곱째 날은 욤(יום)에 관사가 없는 채로, 욤 하쉬브아(יום השביעי, 날 그 일곱째)(창세기 2:3)라고 서술되어있다. 이것은 또한 서술자가 부여한 것이며, 통상적인 한 태양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날이었으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이다.” [8]

그 일곱째 날에 대한 맨 마지막 부분은 그 일곱째 날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휴 로스와 같은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주장하는) 점진적 창조론자들에 의해 제기된 저속한 주장을 논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9] 그러한 주장도 다른 타협안들처럼 불신되어지고 있다.[10, 11]  

그리고 스타인만은 특별한 문맥보다 전반적인 의미론적 범주에 의해 한 단어를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지적하면서[12], 히브리어는 명백하게 24시간 하루(24-hour days)들임을 가리킨다고 결론지었다.

‘욤(יום)’은, 영어 단어 ‘날(day)’과 같이, 그 의미가 다양하다. 그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24시간 하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ref] 그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의 길이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5절에서 에하드(אחד, one, 하나, 기수)가 사용되고, 그 이후 다른 날들에 대하여는 서수들이 사용된 독특한 용례는 그 본문 자체가 통상적인 태양일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3]


결론

창조론자들은 서수와 기수의 패턴들, 그리고 어떤 날들에는 정관사들이 있고 다른 데는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패턴은 창조에 대한 사실과는 관련이 없지만, 사용되어진 날(욤)을 24시간의 하루로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References
1. Ross, H., Creation and Time, NavPress, Colorado Springs, p. 48, 1994.
2. For examples, see Sarfati, J., Shame on Charisma! 29 May 2003.
3. For thorough refutation, see Plimer Files.
4. Ward, R.S., Foundations in Genesis: Genesis 1–11 Today, New Melbourne Press, Melbourne, Australia, p. 44, 1999.
5. Pipa, J.A., From chaos to cosmos: a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http://pressiechurch.org/Theol_2/From_chaos_to_cosmos.htm>, 13 January 1998.  
6. Kulikovsky, A.,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37(4):237–244, 2001.  
7. Ward, Ref. 4, p. 45.
8. Steinmann, A., אחד as an ordinal number and the meaning of Genesis 1:5,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JETS) 45(4):577–584, 2002; quote from pp. 583–584; italics in original, bold added.
9. Ross, Ref. 1, pp. 48–49.
10. Is the seventh day an eternal day, Creation 21(3):44–45, 1999.
11. Kulikovsky, A.S., God’s rest in Hebrews 4:1–11, Journal of Creation 13(2): 61–62, 1999.  
12. New Testament scholar Dr Don Carson referred to the exegetical fallacy of ‘Unwarranted adoption of an expanded semantic field.  The fallacy in this instance lies in the supposition that the meaning of the word in a specific context is much broader than the context itself allows and may bring with it the word’s entire semantic range.’  Exegetical Fallacies,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2nd Ed., p. 60, 1996.
13. Steinmann, Ref. 8, p. 584, italics added. He has a footnote, ‘Whether or not one believes in the veracity of the Genesis account of creation in six solar days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As the ETS accepts biblical inerrancy, we can presume that the author himself doesn’t intend to advocate error in Genesis. Rather, he is pointing out that it is more honest to say that Genesis teaches 24-hour days but is wrong, than pretending that it’s right but teaches something else.

 

*참조 1 :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 - 김명현 교수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srE1PjdV-s

The Ultimate Assertion : והארץ :הארץ ואת השמים את אלהים ברא בראשית

Evidence of Supernatural Design in the Divine Prologu

https://creation.com/images/pdfs/tj/j07_2/j07_2_184-196.pdf


*참조 2 :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Good approach misapplied to get ‘analogical days’ : A review of Genesi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35-39.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1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71-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93-101.pdf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100/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70/ ,

출처 - Journal of Creation 17(2):60–61, August 2003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540

참고 : 3932|4297|4440|1790|3331|4375|4380|2016|2982|1922|888|1571|2638|2302|1940|2704|2936|87|2134|766|2942|891|2336|930|3020|2378|1756|3302|3901|3898|3735|3709|3640|3589|769|3707|3689|3628|3731|3641|2797|3186|4140|4374|4204|4868|4870|4872|4878|4982|4985|5094|5271|5275|5332|5394|5395|5402|5415|5440|5463|5514|5578|5625|5627|5628|5711|5723|5741|5753|5852|5861|5870|5882|5886|5889|5910|5985|5986|6044|6017

한국창조과학회
2008-12-29

‘충만하라’ 인가, ‘다시 충만하라’ 인가?

 (Contradictions: Full of Meaning Replenish or fill?)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Genesis 1:28, KJV)

어떤 사람들은 킹제임스 역본(King James Version)에서 이 구절이 아담과 하와가 지구 행성을 ‘다시 채우는(refill)’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최초의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두 번째 창조(second creation)’의 부분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간격이론(Gap theory)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뉴킹제임스 역본(New King James Version)에서 같은 구절을 읽어보라.

”Then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fillthe earth and subdue it;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on the earth.” (Genesis 1:28, NKJV)

킹제임스 역본에서 사용된 단어 ‘replenish’는 17세기(King James Version이 번역될 당시)에 단순히 ‘fill(채우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킹제임스 역본에 참여했던 번역가들이 살던 그 당시에 단어 ‘replenish‘는 ’refill(다시 채우다)‘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단어는 비축하다(stock), 채우다(fill), 공급하다(supply), 거주하다(inhabit)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Fill‘과 ’refill‘의 단어 관계처럼 ’plenish‘와 ’replenish‘ 관계는 성립하지 않음을 주목하라(plenish 라는 단어는 영영사전에 없다). ’Replenish‘라는 단어는 ‘replete(충만한)’이라는 단어로부터 왔다. 행복으로 ‘replete’하게 되었다는 것은 행복으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어 ‘replenish’가 ‘to fill again(다시 채우다)’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1612년에 있었다. 이 해는 킹제임스 역본이 발간된 그 다음 해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하나의 시적인 의미(a poetic sense)로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1:28절은 시가 아니다. 영어 단어는 수세기에 걸쳐서 의미가 변하면서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replenish 단어는 일반적으로 ‘refill’을 의미하게 되었다.

창세기 1:28절에 ‘replenish’ 단어에 대한 원래 히브리어 단어는 ‘male’ 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fill’을 의미한다. 그리고 킹제임스 역본의 다른 모든 곳들에서(예로 창 1:22) 그와 같은 방식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그 단어는 히브리 단어에서도, 그리고 킹제임스 역본 번역자들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그 당시 단어에서도 ‘refill(다시 채우다)’을 의미하지 않았다. 번역가들이 ‘replenish’ 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fill up(가득 채우다. 즉 make replete(full))’에 가까운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지구를 다시 채우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하지 않았다.

뉴킹제임스 역본(그리고 몇몇 다른 번역본들)은 그 단어를 정확하게 오늘날의 말투인 ‘fill’로서 번역하고 있다. 이 명백한 것처럼 보이는 모순은 원본 사본들에서의 오류가 아니라, 단순히 번역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번역 -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22/contradictions-full-of-meaning

출처 - Answers, 2008. 12. 2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92

참고 : 2982|2134|2016|2638|3640|4043|4488|4452|4451|4450|4416|4413|4399|4387|3218|3166|3162|3065|3020|2805|2688|2530|2321|1793|1790|1756|4663|4599|4713|4714

Roger Patterson
2008-12-13

하나님은 일부다처를 묵인하셨는가? 

(Contradictions: A Man of Many Wives Does God condone polygamy?)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왕상 11:3)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 3:2)

성경에는 일부다처(polygamy) 관계가 명백히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 명의 처를 두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거짓말, 살인, 강간의 사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다처의 사례가 기록되었다는 것이 그것이 묵인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어떠한 구절도 없다.

창세기 기록에 의하면 태초부터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을 작정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2장은 아담을 위한 한 여성의 창조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4절에 이것 때문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룬다면, 셋이나 더 많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9:3-9절에서 예수님이 이혼에 대하여 질문 받으셨을 때 확실해진다. 예수님은 본래(from the beginning)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진 결혼 개념을 지지하시면서 창세기 2:24절을 인용하셨다. 본래(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일부다처 관계가 아니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한 예언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위의 열국 같이 그들 위에 왕을 세우리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었다(신 17:14). 이어서 하나님은 앞으로 세워지게 될 왕들에 대한 기준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17:17절에서, 왕들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분명히 왕은 일부다처를 행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부다처를 묵인하셨는가?

왕들을 포함하여 많은 유대 지도자들과 족장들도 여러 명의 아내들을 두고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다처 관계는 심판과 곤경을 불러 일으켰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관계로 인해 죄 값을 치렀다. 아브라함은 하갈과의 관계로 인해 가족 내의 갈등과 분쟁으로 고통당했다. 다른 사례들에서도 이러한 결과들이 뒤따랐다.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야곱의 생활이 하나님에 의해서 축복받은 것이 아니냐고 일부 사람들은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죄의 관계를 사용하셨다고 죄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계는 밧세바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일부다처는 많은 문화들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혼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되었다(마 19:8).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창조의 부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선택한 ‘음란한 세대(adulterous generation)’ 라고 부르셨다. 유대인(또는 어떠한 다른 사람)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것을 묵인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01/contradictions-a-man-of-many-wives

출처 - AiG, 2008. 12. 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80

참고 : 4452|4451|4450|4423|4416|4414|4413|4402|4401|4399|4395|4394|4391|4390|4387|4385|4381|4376|4329|4258|4237|4148|4071|4100|4043|3974|3945|3935|3932|3898|3872|3812|3783|3731|3730|3707|3739|3689|3654|3641|3628|3633|3623|3589|3372|3311|3302|3289|3249|3242|3233|3220|3218|3208|3206|3204|3186|3170|3168|3166|3162|3155|3148|3101|3097|3065|3036|3022|3020|2996|2982|2970|2960|2942|2805|2797|2746|2737|2688|2643|2549|2545|2534|2530|2525|2515|2458|2425|2323|2321|2362|2030|1805|1793|1790|1756|1430|1412|1413

Bodie Hodge
2008-11-12

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즉시 죽지 않았는가?

(Contradictions : Time of Death. Why didn’t Adam and Eve die the moment 

they ate as Genesis 2:17 implies?)


 이 질문은 창세기 2:17절로부터 생겨난다. 거기서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듣게 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몇몇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즉시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창세기 2:1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일종의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구절이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는 그 날로 죽었어야만 했음을 뜻하는 ”죽으리라(die)”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 날 즉시로 죽는 것인가, 아니면 죽기 시작하는 것인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창세기 2:17절의 의미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그 날로 죽지 않았다는 것은(창 5:4-5)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못 말씀하셨든지, 아니면 사람의 해석이 잘못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히 6:18). 그렇다면 오류투성이의 인간들이 실수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곳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히브리어를 영어로 문자 그대로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 ”Tree knowledge good evil eat day eat die (dying) die”

히브리어는 두 개의 다른 동사 시제(dying and die)를 가지는 'die die(muwth—muwth)”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 또는 글자 그대로 ”반드시 죽도록 죽어가는(dying you shall die)”으로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에 들어섰다는 의미로 죽음의 시작을, 그리고 마침내 죽을 것임을 가리킨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던 시점에서 죽기 시작하였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었다(창 3:19). 만약 그들이 즉시로 죽을 것임을 의미했다면, 하나님은 단지 한 번만 ‘muwth’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그것은 죽기 시작하는 또는 정녕 죽으리라가 아니라, 죽는, 죽다, 죽었고 등을 의미했을 것이다. 구약의 저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의미들을 잃어버릴 때가 간혹 있다.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 하나는 문자적으로 또는 단어 대 단어 (word-for-word)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용의 동등성 또는 생각 대 생각(thought-for-thought)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만약 이 구절이 단어 대 단어로 번역되었다면, 'dying die” 또는 'die die”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어가 반복 사용될 때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문법적 구조를 가지는 영어권의 독자들에게 어려울 수 있다. 그러한 문법적 구조를 허락한 제롬(Jerome)의 라틴어 번역본(Latin Vulgate)은 이것을 ”dying die” 또는 ”dying you will die” (morte morieris)로서 번역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더 동적인 의미를 갖는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죽지는 않지만, 확실히 죽음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2:17절의 네가 먹는 '날(day)에는'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욤(yom)에 관해 말하면, 그 단어는 나중에 나오는 단어 ”정녕 죽으리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행동(eating)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2:37절에서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말할 때, 거의 동일한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왕상 2:37)

여기서도 창세기 2:17절처럼 ”날(yom, day)에는”과 ”죽임을 당하리니(dual muwth)”가 사용되었다. 창세기 2:17절에서 욤이 행동(먹는 것)과 관련한 것과 똑같이 여기에서도 행동(나가서 건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두 경우에서 모두 그것은 그들이 죽을 특별한 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솔로몬도 또한 시므이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그 날에 즉시 죽는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부터 시므이의 날은 카운트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날에 그들(아담과 시므이)의 행동은 마지막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죽음은 시작되었다. 그들의 행동의 결과로서 그들은 정녕 죽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2:17절에 나오는 날은 그들이 먹었던(불복종했던) 날에 관한 것이고, 그들이 죽는 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0/20/contradictions-time-of-death

출처 - AiG, 2008. 10. 2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52

참고 : 4043|3218|3166|3065|3022|2688|4380|4204|3020|3162|2530|2321|1756|4387|4450|4413|4399|4414

Laymanby Brian H. Edwards
2008-10-17

성경의 진리를 풀기

(Unlocking the Truth of Scripture)


      성경은 보물 상자다. 그 안에 가득히 든 보물을 열기 위하여 크리스천들은 특정한 열쇠, 즉 성경해석학 또는 해석법칙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성경의 정확한 해석은 거의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 자체의 교리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말씀들을 해석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과 성경의 인간 저자가 의도한 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크리스천들은 먼저 ”이것은 어떤 종류의 구절인가?”를 질문하여야 한다.


성경 구절의 여러 유형들

성경은 역사적인 서술, 시, 비유, 서신, 예언 등 여러 종류의 다른 문학형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만일 성경의 어느 구절이 분명하게 역사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목적이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만일 어느 구절이 시이면 비유적인 언어를 기대하여야 한다. 예를 들자면 시편 104편 3절은 하나님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다른 성경에 비추어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문자적 사실보다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음을 안다.
 
아마도 예언이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성경구절의 유형일 것이다. 성경에서 예언을 대하면 그 예언의 뒤에 있는 배경적 상황과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와의 관련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잡이는 그 예언이 신약에서 설명되어진 방식이다. 성경에 대한 신중한 연구와 성경 해석학 원리를 적용하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글을 고찰하고 있는지와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방법을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문맥이란 무엇인가?

1 . 성경의 문맥

절(verse) 전후의 구절들을 반드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 즉 신자인가 비신자인가, 젊은이인가 노인인가, 순종하는 자인가 불순종하는 자인가? 등등. 이 구절에서는 어떤 논제를 다루고 있는가? 성경의 이 특별한 책(낱 권)의 통합적 주제는 무엇인가? 주변의 절들은 이 절을 설명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등과 같은 것들을 파악해야 한다.


2. 역사적인 맥락

본문이 기록될 때, 또는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시대에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 주변으로부터 가해지고 있었던 위협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예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다윗은 광야에서 사울 왕에게 쫒기고 있던 중에 시편의 일부를 썼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시편들은 더욱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올 것이다. 역사적 맥락은 성경 그 자체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좋은 성경 주석이나 성경 백과사전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참고 서적들은 많은 성경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당시의 지역적 관습들, 예를 들어 목동, 고기잡이, 혼인, 의복, 희생제사 등과 같은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명백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공부하는 성경 구절의 문학적 종류와 그 맥락을 파악한 후에는, 그 단어의 문법적인 의미와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다소 확실하지 않거나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보통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문자적 의미가 사리에 잘 맞으면, 다른 의미를 찾지 말라는 것이 건전한 충고이다. 예수께서는 가끔 ”너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성경은 근본적으로 그 뜻이 명확하다고 생각하셨다.

모든 언어는 문법적 규칙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규칙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젊은 크리스천들은 요한일서 3:9절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해석은 만일 네가 죄를 범하면 너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어 동사가 ”현재 진행” 시재로 사용되었고,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아무도 삶의 방식으로서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라도 그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개개 단어의 뜻을 연구하면서, 그 단어가 그 문장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같은 저자에 의해서 다른 구절들에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등을 연구하라. (Strong's 과 같은 좋은 성경공부 컴퓨터 프로그램의 성구사전, 또는 일반 웹상의 성경공부 도구들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여느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일상적인 언어들을 사용한다. 일상 언어들을 인지하는 것이 성경의 바른 이해에 있어 필수적이다. 성경이 직유나, 은유 또는 과장법과 같은 일상 언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그와 같은 언어의 정상적인 용법에 따라 해석되어야만 한다. 다른 말로하면, 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취해지도록 의도되어졌지만, 말의 비문자적 유형은 문맥 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문자적인 역사(literal history)로서 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문맥은 결정적이다.
 

이것이 다른 성경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성경해석학의 또 다른 원칙은 성경의 조화를 포함한다. 진리의 하나님이 성경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바르게 해석했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여야 한다. 만일 한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한 절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절들과 모순되면 우리는 틀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더욱 신중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적용(application)이 전문적으로 해석 과정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성경은 단순히 지적 자극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을 개조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성경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지적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0-13)


잡상인들을 조심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의 유전을 좇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5-13)

바울은 그들 자신들의 목적대로 가끔 물질의 취득을 위해 성경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반대하며 고린도 교인들을 경고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7)

베드로는 성경의 어려운 구절을 억지로 비틀어서 그들 자신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고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크리스천들은 성경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위험은 성경 이야기를 미화시키고, 그리고 나서 그들이 마치 자기들 뒤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첨가 사항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변하는(정확하게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결론

하나님은 우리들이 말씀의 보화를 정확히 알고 삶에 적용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의미로 성경이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것과 그분이 의미했던 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해석학의 상식적인 원칙들을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 이들 원칙들은 따르기가 쉽고,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그 원칙들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unlocking-scripture

출처 - Answers Magazine, September 18, 200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30

참고 : 4374|4058|4423|3055|666|2797|4380|4375|3591|4401

Answers Magazines
2008-09-17

아르박삿의 아들은 누구인가? : 가이난, 셀라? 

(Who was Arphaxad’s son: Cainan or Shelah?)


      만일 당신이 성경 관련 잡지에서 족보 도표를 대조해 본다면,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경들에 기록되어있는 누가복음 3:36절의 가이난(Cainan)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이 이름이 창세기 10:24, 11:12, 그리고 역대상 1:18,24절에 있는 상응하는 족보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딤후 3:15-17), 이 모순은 무오 했던 성경 원본에서는 오류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 삽입(insertion)은 후대의 70인역(Septuagint, LXX) 필사본들(비-영감된 히브리 필사본들)에서 발견되어진다.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삽입된 것에 대해서는 2 가지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가이난은 원본 사본에는 들어 있었는데, 히브리 필사자들이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을 필사하던 중에 이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모리스 박사가 지적했던 것처럼[1] 히브리 서기관들은 필사 과정에 매우 신중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낮은 설명이다. 또한 그 이름은 구약성경의 다른 고대 판(사마리아역, 불가타역, 가장 오래된 70인역 등)들에서도 빠져있다.

두 번째의 설명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누가의 편지를 필사한 70인역 필사자들이 부주의로 인해 아르박삿(Arphaxad, 아박삿)과 셀라(Shelah, 살라) 사이에 가이난을 실수로 삽입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1:12). 따라서 그 사이에 가이난이 들어가는 것은 나이 상으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중의 70인역 필사자들이 누가복음에 있는 명단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에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을 삽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래리 피어스(Larry Pierce)는 이러한 설명이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38 – 약 100)의 자료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를 편집하기 위해 분명히 70인역을 사용했지만, 가외의 가이난을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그는 입증하였던 것이다 :

만약 요세푸스가 ‘70인역(LXX)’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70인역에 기초하여 쓰여진 어떤 다른 문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저술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70인역의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가이난이라는 가외의 세대가 70인역 또는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문서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세푸스는 그(가이난)를 넣었을 것이다! 만일 70인역에 가이난의 이름이 포함되어있었다면, 요세푸스가 착오로 그것을 누락시켰거나(가능성 없음), 그 자료를 가볍게 취급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롬(Jerome, 약 AD 347~419/420)은 벌게이트 성경(Vulgate, 성경의 라틴어 판)을 AD 5세기에 번역하였을 때,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롬은 70인역이 너무나도 부정확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히브리 텍스트(Hebrew text)를 사용했다[2]. 

피어스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 AD 약 180~ 약 250)로부터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누스도 그가 분명히 70인역의 부풀려진 연대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대표(AD 220년에 쓰여짐)에 가이난을 누락시켰다. 가외의 가이난의 추가는 AD 22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

... 요세푸스는 크리스천 저술가가 아니었고 누가복음 족보의 필사본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에 반해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아리스티데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Aristides) 3장에서, 그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족보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 사실 그는 누가복음 3:25절을 인용하고 있었다[3]. 따라서 아프리카누스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사본들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리카누스가 누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이 가짜 가이난이 들어 있었다면, 아프리카누스는 분명히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연대기를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누가복음 사본이라고 알려진 P75 (AD 175-255년 사이[4])라 불려지는 보드머 소장품(Bodmer Collection)의 파피루스 사본(papyrus codex) 102 페이지(원래는 144 페이지)에는 가이난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3:36절에 있는 내용은 AD 220년 이전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개혁주의 침례교파 신학자인 존 길(John Gill)은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 더해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 가이난은 창세기 11:12절에서 모세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았고, 구약의 어떤 히브리어 사본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또한 사마리아어 판(Samaritan version)이나, 탈굼어 판(Targum version)에도 없다. 또한 요세푸스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가계의 족보가 반복되고 있는 역대상 1:24절에도 없고, 베자(Beza)의 가장 오래된 누가복음의 헬라어 판에도 없다. 그 이름은 정말이지 현대의 70인역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원래는 거기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료로부터 누가가 취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어떤 부주의한 누가복음 필사자의 탓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위 있는 70인역에 부주의하게 삽입되어진 그때부터, 많은 헬라어 판들(Greek copies), 라틴어 판인 벌게이트(Vulgate Latin), 모든 동방 판들(Oriental versions),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판(Syriac)에도 가이난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셀라의 아버지가 되는 그러한 가이난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의 어느 사본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5].

 

Footnotes

[1] Morris, H.M.,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1976, p. 282.
[2] Pierce, L., Cainan in Luke 3:36: insight from Josephus, CEN Technical Journal 13(2):76, 1999.
[3] Ante-Nicene Fathers 6:126, Hendrickson, Peabody, MA, 1994.
[4] Geisler, N.L. and Nix, Wm. E.,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Bible, Moody Press, Chicago, revised and expanded, pp. 390–391, 1986.
[5] Commentary available online.

 

*참조 : What about Caina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41-43.pdf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chronology-conundrums

출처 - AiG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399

참고 : 4387|4043|3218|3166|3065|3022|2688|4380|4204|3020|3162|2530|2321|1756|4391|4385|3707|930|4375

Frank Luke
2008-08-27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요세푸스는 말했다. 

(Josephus says, ‘Genesis means what it says!’)


      창세기의 분명한 의미에 대해서 타협하고 있는 사람들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은 현대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신하여, 과거의 대부분 주석가들은 오래된 연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을 보통의 날(24시간으로 된 하루)들이라고 해석했다. 더군다나, 오리겐(Origen)이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과 같은 사람들조차 오래된 연대 사상을 신랄하게 공격하였고, 지구의 나이는 수천 년에 불과하다고 단언했었다.[1] 유대인 주석가들 중 1세기에 살았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약 100)는 여타 사람들 중에서 두드러졌다.

유대(Judea)에서 태어나서 성장기를 거기에서 보냈던 요세푸스는 의심의 여지없이 성경 밖의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사가였다. 만일 요세푸스가 아니었다면, 유대 역사의 전체 기간이 세월의 뒤안길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여느 선량한 유대인처럼, 요세푸스도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한 우선적인 이해가 없다면, 유대인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경이 유대교를 정의한 바와 같이, 요세푸스는 먼저 성경을 정의함으로써 유대교를 설명하였고, 그들의 거룩한 경전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랑을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서로 불일치하고, 서로 모순 되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 시대의 모든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는 22권의 책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당연히 신성한 것으로 믿어지며[2], 그들 중 5권은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모세가 죽을 때까지의 인류 기원에 관한 전승들과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간은 3,000 년 보다 약간 짧은 기간이다... 예언서들은...13권이 있다. 나머지 4권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인생들에 대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3].

늘 그렇듯이, 요세푸스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의 분명한 단어들은 명확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인류는 모세의 시대까지 단지 3,000년 정도 되었다고 그는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성경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또는 성경의 신적 교리들 중 어떤 것이라도 바꾸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하고 있었다.[4]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인 ‘유대 고대사’의 서문에서, 요세푸스는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을 더 깊이 설명하고 있었다. 왜 모세가 성경을 창조 기사로부터 시작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요세푸스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모세가 이 교훈을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열망했을 때, 그는 다른 입법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약이나 다른 권리들에 관하여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율법의 제정을 시작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존중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우리 인간들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함으로써 시작했다. 이제 그가 일단 그들을 신앙에 순복하도록 인도하였을 때, 그는 다른 모든 일에도 순복하도록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우리의 입법자는 어떤 일을 지혜롭지만 수수께끼 같이, 어떤 것들을 점잖은 풍유로 말하고 있지만[5],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6]. 

요세푸스는 그의 방법론을 설명한 후, 창조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간다. 그는 모세의 설명이 전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었다 : ”이것은 정말로 첫째 날이었다[7], 그리고 단지 6일 동안에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8]. 요세푸스는 그가 이런 말들이 수수께끼 같다거나 우화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어떠한 지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논평은 창세기에 기록된 모세의 말만큼이나 의미가 분명하였다.

요세푸스는 에덴동산에 이어, 아담의 타락과 아담에서 노아까지 10 세대를 기록하고 있었다.[8] 요세푸스는 위에서 모세와 아담 사이의 시간이 3,000년이라고 언급했던 바와 같이[10], 아담에서 홍수까지 사이에 어떠한 시간적 간격도 허용하지 않았다.[9] 요세푸스는 대홍수에 관한(그는 물이 모든 곳을 덮었던 전 지구적 홍수로서 기록하고 있다[11]) 그의 글에서, 창세기 5장의 계보들 사이에 간격이 없음을 여러 번 확인하고 있었다.[12].

요세푸스는 그의 저술 전반에 걸쳐서, 그가 기록하고 있었던 핵심적인 입장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유대 분파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 사이의 교리 차이를 말하고 있었지만, 창세기 1-11장에 대한 이런 핵심적 해석에 대한 유대인들의 단 한 마디의 다른 의견도 기록하지 않고 있었다.[13]. 만약 어떤 다른 의견이 있었다 할지라도, 요세푸스는 그 의미가 애매하지 않고 명백하였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언급할만한 가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히브리 성경을 설명하는 동안, 오늘날의 안티기독교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말하고 있었던 반유대주의자들과 직면했었다. 요세푸스의 시대에 이교적인 헬라 역사가들은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의 역사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동일과정설적 과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부인하고 있고, 지구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진정한 역사를 부인하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오늘날의 교회가 문자적 창세기의 반대자들(오직 세속적 과학만이 기원에 관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해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들에 대해 대답하고 있었다 :

”무엇보다 나는 오로지 헬라인들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고대의 역사들에 대해 알고 싶어질 때, 우리 자신의 것에서부터 그 진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서,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헬라의 역사가들은 자료들을 쉽게 수집할 수도 없었고, 그들이 기초할 수 있는 어떤 좋은 기록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추측으로부터 그들의 역사를 썼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쓴 책들을 두고 서로 논박하고 있으며, 동일한 사건들에 대하여 매우 상충된 설명을 하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14].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현대 교회가 창세기와 지구의 시작에 관한 성경의 기록에 강력히 서 있어야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예수님의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창세기에 대한 일관된 견해는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 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This is thoroughly documented in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ch. 3, Master Books, Arkansas, USA, 2004, which includes sections on Josephus.
2. The Jewish canon contains the same books as the Protestant Old Testament, but they are numbered and grouped differently (for example, they counted all the minor prophets as one book—The Book of the Twelve).
3. Against Apion, 1.8, p. 776, emphasis added. All quotations from Josephus taken from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Josephus, Complete and Unabridged,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Hendrickson Publishers, Inc., Massachusetts, USA, 1987. These books are also available in the Online Bible.
4. Against Apion, 1.42. And many Jews have died rather than compromise Scripture and God’s commands. The Maccabean revolt started when one man and his five sons refused to let Hellenists sacrifice to Greek gods in the Jewish Temple.
5. Josephus uses ‘allegory’ as we would use ‘typology’. The difference is that typological events really happened and have a deeper, spiritual meaning underneath the literal one (you might think of it as the ‘preaching point’). By his own account, Josephus prefers the literal over any figurative meaning and uses ‘allegory’ exactly as Paul does in Galatians 4:24.
6. Antiquities Preface, 4.
7. Antiquities 1.1.1, emphasis added.
8. Antiquities 1.3.2, emphasis added.
9. The Flood occurred 2,656 years after Creation in most copies of Antiquities 1.3.3. This agrees with the Greek Septuagint translation (ca. 250 BC), while our English Bibles are mainly translated from the standard Hebrew (Masoretic) text, which says 1,656 (see also Hansen, P., Real History: The Timeline of the Bible, Creation 27(4):28–29, 2005). Dr Pete Williams shows why the Masoretic Text is likely to be closer to the original Hebrew in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 Journal of Creation 12(1):98–106, 1998; <www.creationontheweb.com/chronology>. It is possible that Josephus couldn’t find a Hebrew manuscript in the heart of the Empire, or else later scribes changed Josephus’ Hebrew numbers to conform to the Septuagint. Indeed, a few very old manuscripts of Josephus agree with the later Masoretic text. Those manuscripts report 1_56 years between Creation and the Flood (the centuries marker is smudged beyond recognition).
10. Indeed, the book’s heading is, ‘Containing the interval of three thousand eight hundred and thirty-three years: From the Creation to the death of Isaac.’ Once again, the expanded figures are due to Septuagint numbers, but the point is still that there is no room for millions of years since creation.
11. Antiquities 1.3.5.
12. Antiquities 1.3.3–4.
13. The groups themselves record some few differences amongst individual members, but the vast majority follow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11.
14. Against Apion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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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누구였는가?

요세푸스의 본명은 요세프 바르 마티아스(Joseph bar Matthias)였다. 그는 사두개인(Sadducee)으로 출생했고, 엣세네파(Essenes) 사람들의 친구였지만, 바리새인(Pharisee)으로서 훈련을 받았다. 요세푸스는 또한 예루살렘에서 외교 사절로서 로마에 가기도 하였고, 나중에 열심당 민병대(Zealot militia)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AD 66년의 유대 반란(Jewish Revolt) 동안에 그는 로마에 대항해서 갈릴리를 방어했다(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AD 67년에 그의 주둔지에서 집단학살을 간신히 피했으나, 포로로 잡혀서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넘겨졌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누스가 후에 황제가 될 것이라고 통찰력 있게 예언했다. 이런 일이 AD 69년에 실제로 일어났을 때, 베스파시누스는 요세푸스를 방면해 주었다. 저항운동이 희망 없음을 깨닫고,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매국노로 낙인 찍혔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AD 70년 처참하게 점령되었다. 곧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요세푸스의 학식과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인정하였다.

황제의 보호 아래,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역사에 관한 각각 여러 권들로 이루어진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즉 한 권은 ‘유대 전쟁사(Wars of the Jews)’ (약 BC 145년부터 AD 70년까지의 마카비 혁명(Maccabean revolt, 마카베오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함락까지 초점을 맞춘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 (창조로부터 BC 145년까지를 망라하는 유대인의 성경, 전통, 민속에 관한 해설서)이다. AD 100년에 어느 시민의 후원으로, 그는 ‘아피온을 반박함(Against Apion)’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삶(The Life of Flavius Josephus, 자서전)’을 출판했다.


*참조 : Daum 백과사전/요세푸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6a2678b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69/

출처 - Creation 29(3):15–17, June 200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380

참고 : 4375|2797|1790|3654|4374|3932|2638|4204|2982|3640|2016|1922|3020|3689|3641|3628|2942|3249|3242|3931|3055|2330|3024|4140|3186|4329|4258|4237|4148|4071|4100|4043|3974|3945|3935|3898|3872|3812|3783|3731|3730|3707|3739|3633|3623|3589|3372|3311|3302|3289|3233|3220|3218|3208|3206|3170|3168|3166|3162|3155|3148|3101|3097|3065|3036|3022|2996|2970|2960|2805|2746|2737|2688|2643|2549|2545|2534|2530|2525|2515|2458|2425|2323|2321|2362|2030|1805|1793|1756|1430|1412|1413

Don Landis
2008-08-20

“하나님이 가라사대”

(“And God Said”)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라고 말했던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받고, 공격당해 왔다. 뱀의 말은 성경의 정확성(Bible’s accuracy)과 성경의 권위(Bible’s authority)라는 두 가지 요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성경의 정확성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은 사람에 의해 쓰여졌고, 따라서 오류(errors)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수 세기 동안의 필사들을 통해 사람들이 많은 오류들을 도입했다고 말한다.

성경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한 가지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성경이 과거에 정확하게 필사되었다는 한 가지 증거는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의 발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7년 한 목동에 의해서 발견된 이 두루마리 성경은 BC 250-150년 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발견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오래된 성경 본문을 약 1,000년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본의 내용이 그 이후의 필사본들과 비교되었을 때, 어떠한 중요한 차이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필사가들이 거의 1,000년 동안 매우 정밀하게 필사작업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이 놀라운 발견은 우리를 성경 원본에 1,000년을 더 가까이 데려다 주었다.

또한 하등비평, 문법, 문맥상의 증거들에 근거하여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건전한 주장들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필사가들이 성경 본문을 필사할 때, 매우 신중하였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고, 수많은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성경의 특성과, 성경 본문의 역사적 정확성을 증거로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성과 속성에 근거하여,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또 하나의 성경 안에서의 논거가 있다. 그리고 이 논거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숨을 불어넣었으며(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여, 벧후 1:2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신뢰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분은 무한한 지혜를 갖으셨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 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신뢰할만하고, 정확하고, 무오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분 자신의 본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성경의 정확성은 보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의 기록을 보존키 위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이신 그의 친 아들을 구속의 목적을 위하여 인간의 형상을 취하여 보내셨다.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시고 하나님이 지불하신 비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분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 우리의 죄 값을 그 분이 갚으심, 그리고 그 분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진리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여기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고,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값을 치렀고, 모든 미래의 세대들이 알 수 있도록 기록하셨다면, 하나님은 성경의 본문에 오류가 생겨 훼손되고, 메시지가 망쳐지도록 놓아두었겠는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하나님이 성경의 본문이 분실되고 메시지가 혼란스럽게 되도록 허용하셨다면, 그 분은 자신의 목적과 그 분의 독생자와 십자가상에서의 희생에 대한 목적에 불성실하다 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사역에 대한 완전한 기록을 인간들에게 잃어버려지도록 허용하시지도, 허용하실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 분은 오는 세대들에게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속을 무효화시킨 것이 된다.

하나님의 본성, 특성, 그리고 속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서 절정을 이룬 그 분의 뜻과 약속과 계획에 대한 신실한 증인일 것을 요구한다. 


성경의 권위

하나님은 모든 권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성경은 권위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경의 원저자이시기 때문에(딤후 3:16), 성경은 권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근거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메시지의 전달을 보증하셨고, 자신의 권위로 이 메시지를 강화하셨음으로, 인간은 오직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즉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은 성경이 정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가 정확한 성경을 갖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확신할 수가 있다. 성경은 진리이며, 그의 아들 안에서 믿음에 대한 그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자들에게 용서와 영생을 주시겠다는 그 분의 제안과 약속을 신실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biblical-authority-god-said

출처 - Answers Magazine, October 30, 200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374

참고 : 4329|4258|4237|4148|4071|4100|4043|3974|3945|3935|3932|3898|3872|3812|3783|3731|3730|3707|3739|3689|3654|3641|3628|3633|3623|3589|3372|3311|3302|3289|3249|3242|3233|3220|3218|3208|3206|3204|3186|3170|3168|3166|3162|3155|3148|3101|3097|3065|3036|3022|3020|2996|2982|2970|2960|2942|2805|2797|2746|2737|2688|2643|2549|2545|2534|2530|2525|2515|2458|2425|2323|2321|2362|2030|1805|1793|1790|1756|1430|1412|1413|921|721|720|666|629|630|568|522|521|528|512|3931|3055|3024|2330

Andrew Kulikovsky
2008-05-30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Evenings and mornings)


      역사적인 실제 이야기로서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흔히 부딪치는 문제는, 넷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었는데 어떻게 창조의 첫 3 일 동안에 저녁과 아침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분명해 보이는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창세기 1장을 명백한 역사로서가 아니라, 문학적인 글로서 보도록 하였다.[1]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사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가능성 있는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들이 있다.[2]  
 

일시적인 빛의 근원

창조 첫째 날에 하나님은 빛(light)을 창조하셨지만, 어떠한 빛의 근원(light sources)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그 빛은 어디서 기원된 것일까? 무엇이 그 빛을 만들고 있었는가? 창세기 1:4 절은 우리에게 힌트를 주고 있다 :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이 구절을 14절과 비교하여 보라 :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하나님은 최초의 3일 동안 하나님이 ‘낮(day)’과 ‘밤(night)’으로 각각 이름을 지으셨던(5절) 빛과 어두움을 나누는 일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일째 이후에 그 일은 새롭게 창조되어진 해와 달에게 맡겨졌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빛의 근원이 존재하게 된 4일째 이전까지 빛과 어두움이 나뉘어져 있어서,  처음 3 일 동안은 일시적인 어떤 종류의 낮과 밤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태양과는 독립된 초기의 빛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었던 랍비들의 해석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 빛은 후에 철수되어졌고,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되어졌다.[3] 정말로 요한계시록 21:23, 22:5절은 이 견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보다 하나님 스스로가 새 예루살렘을 어떻게든 밝게 비추게 될 것이다.


일반적인 시간의 표시물

이들 용어(저녁과 아침)들은 실제로 특별한 사건을 설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반적인 시간의 표시물(general markers of time)들이 될 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단어들과 같이, ‘저녁(evening)‘과 ’아침(morning)‘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저녁‘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을 때의 짧은 기간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한 그 단어는 자주 하루 일의 끝을 나타내는 시간, 즉,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기간 사이의 시간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된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기간의 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태양이 지고 있을 동안에 먹는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침'이라는 단어는 태양이 지평선으로부터 출현한 때의 짧은 시간의 기간만이 아니라, 정오 이전의 어떤 시간에 대해 언급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창세기 1의 문맥과 매우 잘 어울린다. 천지창조의 각 날들은 그 날에 하나님의 활동(activities)들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라는 구절에 의해서 마쳐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을 마치시기(‘저녁’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이전 한 기간 동안 일하셨다. 그리고 다시 일을 시작하셨던 때인 ‘아침’까지 활동을 안 하시는 기간을 가지셨다. 바꾸어 말하면, ‘저녁(evening)’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활동하지 않으시는 기간의 시작을 일컫는 말이며, ‘아침(morning)’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비활동 기간의 종료를, 그리고 다음 날 일의 시작을 나타내는 때를 일컫는 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녁과 아침은 일몰과 일출을 가리키기 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기술했던 것처럼 하나님 일하심의 시작과 종료에 대한 단순한 시간의 표시물(markers)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있을 수 있다.

더군다나, 일몰과 일출은 지역과 계절에 따라 많은 시간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북극권 안에 있는 라플란드(Lapland, 스웨덴 북부)에 있는 옐리바레(Gällivare) 지역은 여름 한 달 동안 하루 24 시간 내내 낮을 경험한다. 라플란드는 ‘한밤중 태양(midnight sun)’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옐리바레는 겨울 한 달 동안은 긴 밤만 계속된다.[4] 일몰과 일출은 이 기간 동안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출과 일몰의 의미로서 저녁과 아침은 결코 발생되지 않는다! 햇빛 또는 어두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녁과 아침(또는 낮 시간과 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은 일몰과 일출을 가리키기 보다는,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시작과 종료를 가리키는 단순한 시간의 표시물(time markers)로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어떤 경우든지, 창조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에 저녁과 아침의 발생은 특별한 창조를 기술하고 있는 성경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Related articles
How could the days of Genesis 1 be literal if the Sun wasn’t created until the fourth day? 
Light, life and the glory of God
Morning has broken ... but when?


Further reading
Astronomy and Astrophysics Questions and Answers


References
1. For a detailed refutation of such views see Kulikovsky, A.S.,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CRSQ 37(4):237–244, 2001.
2. Other solutions have been suggested by Hugh Ross and John Sailhamer, but their interpretations are forced and stretch the text beyond breaking point. See Sarfati, J.,Genesis questioned by billions of years beliefs; a review of The Genesis Question by Hugh Ross, Journal of Creation 13(2):22–30 1999, and Kulikovsky, A., Unbinding the rules, a review of Genesis Unbound by John Sailhamer, Journal of Creation 14(3):35–38, 2000.
3. Lewis, J.P., The Days of Creation: an historical survey, J.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2(4):433–455, 1989; p. 449. Scholar Victor P. Hamilton holds to a similar view in his commentary on Genesis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Eerdmans, Grand Rapids, p. 121, 1990).
4. The north and south poles experience six months of daylight and six months of darknes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599/ ,

출처 - Creation, 16(2):83, August 200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297

참고 : 3932|4204|1790|2797|2982|3640|3331|3363|3731|2207|4440|4297|4375|4380|4140|4374|5394|5381|5265|5275|5035|5033|4869|4540|4492|4487


John D. Morris
2008-03-10

태양이 있기 전의 햇빛 

: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 이전의 하루는 하루가 될 수 없는가? 

(Sunlight Before the Sun)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 주간의 첫째 날에 하늘과 땅(the heaven and the earth)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사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어두웠다 (3절). 둘째 날과 셋째 날에 바다, 궁창(대기), 대륙이 나타났고, 식물이 창조되어, 마치 땅이 인간의 거주를 위해 점차 준비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넷째 날에 하나님이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14절)”라고 선언하시면서, 해, 달, 그리고 별들을 창조하셨고, 이것의 목적은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였다.(15절).

이 빛은 방향성이 있었고, 특정 광원으로부터 왔다. 지구는 분명히 그 빛 아래서 회전하고 있었으므로, 빛과 어둠의 시간이 교대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5절).

회의론자들은 이 점에서 성경적 창조론의 과학성을 오랫동안 비웃어 왔다.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어떻게 지구에 빛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성경의 오류임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이 명백한 오류로 보이는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관련된 과학적, 성경적 자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실제로 태양만이 아니라, 많은 광원(sources of light)들이 있다. 또한 가시광선뿐만이 아니라, 많은 형태의 빛들이 있다. 단파장의 빛들로서 자외선, X선, 그리고 다른 빛들이 있다. 장파장의 빛으로는 적외선, 라디오파 등이 포함된다. 빛은 마찰에 의해서, 불에 의해서, 수많은 화학반응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뿐만아니라 태양에서처럼 원자분열 및 융합의 핵반응에 의해서도 빛은 생성된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손가락 끝에 많은 선택사항들을 가지고 계신다. 빛은 자동적으로 태양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창조 이야기에 사용된 히브리 단어(Hebrew words)들에서 중요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3절에서 '빛(light)'을 창조하셨을 때, 사용된 단어는 오직 빛의 존재만을 의미하는 반면에, 넷째 날에 '빛들(lights)'을 위해 사용된 단어는 '빛을 지닌 것들(light bearers)', 또는 영원한 빛의 근원(permanent light sources)들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것들의 목적은 빛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창조된 인간들을 위한 시간기록계(timekeepers)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장 유용한 별 창조 이론에 따르면, 넷째 날 우주의 모든 곳에서 창조된 별들로부터의 빛은 지구 시간으로 이틀 걸려 지구에 도착했을 것이고, 여섯째 날에 아담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정보를 위해서 www.icr.org에 있는 러셀 험프리(Russell Humphrey) 박사의 우주론 기사를 참조하라.)

명심해야할 것은 창조 주간(Creation Week)은 유일하게 기적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적적인 사건들은 오늘날의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하다. 특히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요한일서 1:5)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지구 밖에 자연 광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days)들이 오랜 기간(long periods)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준창조론자(semi-creationists, 오랜 지구 연대를 믿는 창조론자)들에게는 좀 더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창세기는 분명히 식물들은 셋째 날에 나타났고 태양은 넷째 날에 나타났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식물들은 광합성을 위한 태양 없이 수백만년 동안을 암흑 상태로 견딜 수 없다. 만약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 이전의 하루는 24시간의 하루가 될 수 없다는) 문자적 창조 주간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창조주간의 하루가 오랜 시대라면, 식물들은 생존할 수 없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더 적절하고 만족스런 설명인가. 성경이 현대의 과학적(진화론적) 견해를 따라 이해되고 설명되어질 필요는 없다. 그저 성경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만 필요할 뿐이다.

* Dr. Morris is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참조 : Morning has broken … but whe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86

Light, life and the glory of God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61

'태양은 넷째 날 창조됐는데, ‘아침 저녁’은 첫날부터?” (2013. 2. 16.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1377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3620/ 

출처 - ICR, 2008. 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204

참고 : 1790|2797|2982|3640|2016|1922|3331|3363|2838|2270|4183|3832|3020|5394|5265|5275|5035|4540|4492|4440|4297|3731|3689|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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