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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9-10-13

요셉 시대의 동전이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Archeologists Find ‘Joseph-Era’ Coins in Egypt)

AiG News 


    고고학자들은 이집트에서 창세기의 요셉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도 있게 되었다. (The Jerusalem Post. 2009. 9. 25). 

예루살렘 포스트(Jerusalem Post) 지는 이집트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진 보관되어 있던 동전(coins)들이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 뉴스는 이집트의 알-아흐람 신문이 보도했던 것으로, MEMRI(2009. 9. 24. 동전들을 볼 수 있음)에 의해서 해독되었다.

발견된 모두 5백여 개의 동전들은 이집트 박물관의 소형 유물 그룹에 속해있던 것으로서, 장신구류로 잘못 분류되어 있었다. 연구 팀의 리더인 무하마드 타베트(Sa‘id Muhammad Thabet)는 요셉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던 동안에 여러 지하실에서 그 동전들을 발견했다.

그 발견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은 동전을 친숙하지 않았고 주로 물물교환에 의존했다는 이전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다. 타베트는 나일강 다리 공사의 감독관으로 있었던 한 고대 이집트인의 편지를 읽고 있을 때에 그러한 생각에 의문을 품었었다. 토트-네헤트(Thot-Nehet) 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동전과 농산품들로 교환하는 임대 토지들에 대해서 기록했었다.     

장신구로 분류됐던 동전들은 사실상 둥글었는데(또는 거의 원형), 한 쪽 면에는 문자가, 다른 쪽 면에는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을 타베트는 주목했다. 이것은 오늘날의 것을 포함하여 수세기를 통하며 만들어졌던 동전들과 같은 형태이다. 동전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 면은 이집트 이름, 날짜, 값어치가 새겨져 있었고, 반면에 다른 쪽 면은 이집트 파라오의 얼굴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동전들은 여러 크기였고, 비싼 물질로 만들어졌다. 또한 유사한 동전들이 여러 고고학적 장소들에서 발견되어 왔는데, 그것은 그 물체들이 장신구가 아니라, 동전들이라는 타베트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동전들은 이집트 역사의 여러 시대들의 것으로 평가되었는데, 요셉의 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창세기 41장의 기록과 일치하는 한 동전이었다. 그 동전에는 ”바로가 꿈에서 보았던 살진 일곱 암소와 파리한 일곱 암소들을 상징하는 한 암소의 형상과 충실한 일곱 이삭과 마른 일곱 이삭에 대한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연구자들은 동전에 새겨진 문자들을(초기 알려진 상형문자와 대조하여) 해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셉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요셉의 이집트식 이름을 판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타베트의 연구가 정확하다면, 우리는 창세기 역사의 사실성에 대한 또 하나의 매력적인 증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 연구는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리뷰되거나 학술지에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의 정확성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Baptist Press 지는 ”요셉의 동전들에 대해 회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타베트의 주장을 의심하고 있는 복음주의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었다. ”나의 첫 반응은 동전들에 대한 해석이 꽤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전문가인 멤피스 대학의 로버트 그리핀(Robert Griffin)은 설명했다.

남서부 침례 신학교의 고고학자인 스티븐 오티즈(Steven Ortiz)는 타베트 팀이 그 발견으로 코란의 특별한 구절들을 입증하고자 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물론 타베트의 연구 동기가 그 발견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견 내용이 학술지에 게재되고 정확하게 검토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할 것이다. 이제 계속되는 고고학적 발견들로 창세기(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나머지 책들) 기록의 신뢰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참조 1 : 성경의 요셉 이름 형상 동전 이집트서 발견 (2009. 9. 25.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09/09/25/0601170100AKR20090925201800079.HTML

Egyptian coins in the time of Joseph

http://creation.com/images/pdfs/tj/j26_3/j26_3_85-91.pdf

 

참조 2 : Is the story of Joseph in the Bible a true story?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16.html

Is there evidence that the Israelites once lived in Egypt as the Bible says? Has Joseph's original tomb been found?
http://christiananswers.net/q-abr/abr-a027.html


For more information
Chapter 11: The Glorious Middle Kingdom
Does Archaeology Support the Bible?
 

Get Answers : Archaeology,  Bible,  Genesis,  History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10/10/news-to-note-10102009 

출처 - AiG News, 2009. 10. 10.

미디어위원회
2009-07-31

하나님은 공격적인 행동도 창조하셨는가? 

(Did God Create Aggressive Behavior?)

by Brian Thomas, Ph.D.


      성경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창조 주간의 사역을 마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it was very good)...”고 기록하고 있다.[1] 그러나 오늘날 이 세계에서 보여지는 공격적인 행동과 같은 몇몇 일들은 부정적이고, 위험하며, 파괴적이다. 만약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한 새로운 연구는 이러한 궁금증에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의 트루디 맥케이(Trudy MacKay)가 이끄는 연구팀은 초파리(fruit flies)들의 어떤 유전자의 영향을 조사하다가, 공격적 행동(aggressive behavior)을 야기시키는 특별한 돌연변이들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러한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57개 유전자들에서 59개 돌연변이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돌연변이들의 32개는 공격성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반면에, 27개 돌연변이들은 초파리들이 더 평온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2] 그 연구 전까지 57개 유전자들 중에서 어떠한 것도 공격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BMC Biology 저널에 게재된 그 연구의 결론 중 하나는 ”사람을 포함하여 다른 동물 종들 사이의 공격적 행동에 대한 미래 연구에 있어서, 이들 유전자들이 새로운 후보 유전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3]

공격적 행동들은 창세기 1장이 아니라, 창세기 3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우주적인 비극을 기록하고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 세계에는 타락, 고통, 질병, 죽음이 들어왔다.[4] 일부 동물들의 공격적인 행동들은 하나님의 원래의 완벽한 창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는 것이다.[5]       



References

[1] Genesis 1:31.
[2] 'Cross' breeding: What makes an angry fly? BioMed Central press release, via EurekAlert!, June 24, 2009.
[3] Edwards, A. C.. et al. 2009. Mutations in many genes affect aggressive behavior in Drosophila melanogaster. BMC Biology. 7: 29.
[4] Genesis 3:17-19.
[5] Romans 8:2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4778/ 

출처 - ICR News, 2009. 7. 16.

Brian Thomas
2009-07-21

보톡스 : 독물도 치료약이 될 수 있다. 

(Botox : Toxin Becomes Treatment)


      보톡스(Botox) 치료는 얼굴의 주름을 줄여주는 화장품처럼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또한 눈 근육(eye muscles) 장애를 치료하는 데에도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발견에 의하면, 과민성 방광(overactive bladders)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들에게 보톡스를 주사하여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톡스는 ”보툴리눔 톡신(botulinum toxin)”의 줄인 말로서, 의학적 치료 시에 사용되는 상품명이다. 독 물질로 간주되는 그것의 활성 성분은 어떤 박테리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단백질들이다. 보툴리눔 톡신은 매우 소량이라 할지라도, 보툴리누스 중독(botulism)을 일으킨다. 특별히 유아들에게 이것은 사망을 초래할 수 있다. 보툴리누스 중독은 보통 약물 사용, 부적절한 통조림 제품, 비위생적인 접시의 재사용 등으로 일어난다. 

최근 실시한 한 연구에 의해서 영국 구이스 병원과 런던 킹스 컬리지의 비뇨기과 의사들은  방광조직 안으로 보톡스 주사가 과민성 방광으로 고통당하는 환자들의 배뇨 빈도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1] 이것은 16명의 환자들에서 치료 후 적어도 24주 동안 더 안락한 삶과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많은 자연의 해로운 물질들의 경우에서처럼, 보톡스가 병을 일으키는 잠재력은 대게 부주의함과 오용 때문에 기인한다. 그러나 어떤 물질의 나쁜 영향만을 보고 그 선천적 잠재성을 무시해 버린다면, 보톡스의 의학적 장점은 이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주의 깊게 조절되고 정확하게 사용된다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단백질이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물질의 잠재력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연구하고 시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명령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청지기로서, 과학적 탐사와 발견의 역할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행 17:28) 창조주의 작품들에 들어있는 경이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References

[1]Botox injections can significantly improve quality of life for people with overactive bladders. Wiley-Blackwell publisher press release, June 9, 2009, reporting research published in Sahai, A. et al. 2009. Improvement in quality of life after botulinum toxin-A injections for idiopathic detrusor overactivity: results from a randomized double-blind placebo-controlled trial. BJU International. 103 (11) 1509-151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4766/ 

출처 - ICR News, 2009. 6. 2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677

참고 : 2365|2998|699|2996|2245|3046|4606

Stacia McKeever
2009-07-03

하나님은 마음이 변하시는 분인가? 

(Contradictions : A Change of Heart. Does God change His mind?)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 3:6)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삼상 15:29)

이것과 같은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 분의 본성과 성품은 변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러나 아래와 같은 다른 구절들에서는, 중보자의 탄원이나 백성들의 회개가 있었을 경우 하나님이 한 국가나 한 그룹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돌이키시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가?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 32:14)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렘 26:3)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렘 26:13)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렘 26:19)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10)

성경으로부터, 우리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sin)를 벌하셔야만 한다는 것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창 2:15-17, 롬 6:23). 그러나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하시고 죄를 회개한 자들에게 자비와 용서가 한량없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 두 특성 사이의 균형은 예레미야서의 이 구절들로부터 가장 잘 요약될 수 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렘 18:7–10)


표현된 감정들

다음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분으로 비난될 때 인용되곤 한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6)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 15:11)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감정(emotions)이 없는 분이심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사실, 감정은 자주 의인화된 언어로, 또는 인신동감론적(anthropopathic, 신의 감정을 사람의 감정처럼 표현하는) 언어로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동과 감정을 사람의 행동과 감정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구절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던 인간들의 죄에 대해서 가지셨던 감정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 구절들은 ”나는 그것을 처음에 즉시 시행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것을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했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나님은 불순종과 사악함에 대해 우리 모두가 죄에 대해서 가져야만 하는 반응으로, 한탄하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 또는 특성이 변하시는 분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슬픔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은 그 분의 거룩하신 본성이다.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결정과 관련되어 있는 중요성을 알고 있다.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서 하나님의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은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 많은 인간들에 대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연민과 자비의 마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은 개인 또는 국가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선택하시는 데에는 변하실 수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1/05/contradiction-a-change-of-heart

출처 - AiG, 2009. 1. 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663

참고 : 4492|4608|4578|4540|4043|4480|4488|4452|4451|4450|4416|4413|4399|4387|3218|3166|3162|3065|3020|2805|2688|2530|2321|1793|1790|1756

미디어위원회
2009-04-29

노아 홍수 이전의 지명들이 이후에도 나타나는 것은 

홍수가 전 지구적 파괴를 일으키지 않았음을 가리키는가?

(Contradictions: Location, Location, Location)

Bodie Hodge 


      창세기 6~9장을 읽을 때,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인 홍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홍수 이전의 지명들이 홍수 이후에도 지명이나 인명으로 등장하는 것은 성경의 모순인가? 예를 들어 표1은 가장 흔한 사례들을 나타내었다 :  


표 1.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의 명칭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꽤 간단하다. 몇몇 실례를 사용하여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 자주 지명들은 전해져 사용된다. 예를 들어 일리노이 주의 베르사유(Versailles)는 정착민들이 켄터키로부터 일리노이로 이주하여 왔을 때, 켄터키 주의 베르사유로부터 이름을 따왔다. 그리고 이전의 켄터키의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베르사유로부터 따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베르사유에서 만난 적이 있었죠? 라고 묻는다면, 어느 베르사유입니까? 라고 물어봐야할 것이다.

2. 지명들은 자주 사람의 이름으로부터 붙여지곤 한다. 가나안(Canaan)이라는 지명은 노아의 손자인 가나안에서 유래하였다. 미조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St. Louis)는 프랑스의 왕 루이 9세(King Louis IX)로부터 그 지명이 유래했다.    

3. 간혹 사람들의 이름은 지명으로부터 유래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이름에 런던(London)이 들어간다. 이 이름은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부터 유래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볼 때, 어떻게 지명들이 홍수 이후에도 쉽게 전달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의 손자는 하윌라(Havilah) 땅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스(Cush)는 함의 아들이다. 그리고 앗수르(Asshur)는 셈의 아들이다. 노아, 함, 셈은 홍수 이전에 살았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이름들은 바벨탑 분산 이후에 이들 일부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의 지명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구스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Ethiopia) 지역이고, 앗수르는 앗시리아(Assyria) 제국이 발원하였던 지역이다... 등등. 

예를 들어, 만약 내가 템즈 강(Thames River)을 언급했다면, 많은 사람들은 즉시 영국 런던에 있는 유명한 강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코네티컷 주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도 같은 이름의 템즈 강이 있다. 정착민들이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만나게 된 강들을 그들이 친숙했던 강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던 것이다. 노아와 그의 후손들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 예상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도 에덴동산에 있었던 유명한 강들을 따라 이름 붙여졌을 것이다. 

여기에 성경의 어떠한 모순도 없다. 단지 새로운 장소, 강들, 민족들을 이전에 사용했던 이름들을 다시 사용하여 이름 붙였던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3/23/contradictions-location-location-location 

출처 - AiG, 2009. 3. 23.

미디어위원회
2009-03-28

아르박삿을 낳을 때의 셈의 나이에 대한 성경 기록은 오류인가? 

(Contradictions : My Three Sons. Were Noah’s sons born when he was 500 

as Genesis 5:32 says or not as stated in Genesis 7:6 and Genesis 11:10?)

Bodie Hodge 


     노아(Noah)는 홍수 이전에 세 아들을 두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창 6:10). 노아의 아들들은 모든 같은 나이가 아니었다. 창세기 5:32절부터 시작하여 보자.

”After Noah was 500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Shem, Ham and Japheth.” (Genesis 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 5:32)

이 구절은 노아가 그의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 500세, 또는 그 이상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과 같은 목록으로부터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노아가 500세 된 이후부터 아이들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주 자녀들의 목록은 가장 중요한 자녀로부터 시작한다(예. 창 11:26). (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가계가 이어진다). 우리는 창세기 10:21절과 9:24절로부터 각 자녀들의 상대적 나이(서열)를 알 수 있다.

”Sons were also born to Shem, whose older brother was Japheth; 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 (Genesis 10: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창 10:21)  (개역개정, 개역한글 등의 한글 성경은 야벳이 셈의 형이 아니라, 셈이 야벳의 형으로 번역하고 있다).

”When Noah awoke from his wine and found out what his youngest son (Ham)had done to him.” (Genesis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4)

창세기 10:21절은 야벳이 가장 나이가 많은 자녀였고, 노아가 500 살이었을 때 태어났던 자녀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9:24절이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함은 가장 나이가 어린 자녀로서, 그의 아버지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 자녀였다.

그러므로 셈은 야벳과 함 사이에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창세기 7:6절과 창세기 11:10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셈은 노아가 500살 때에 야벳과 함께 태어난 쌍둥이 또는 세쌍둥이가 아니었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창 7:6)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 11:10)

따라서 노아는 (500세에 야벳을 낳았고) 홍수가 땅에 일어났을 때 600세 였고, 셈은 홍수가 일어난 2년 후에 100세 였다. 그러므로 셈은 노아가 502세 였을 때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셈은 백 세(노아 나이 602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는(창 11:10) 성경 기록은 오류가 아닌 것이다). 성경에서 함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함은 셈 이후에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창세기 5:32절은 노아의 모든 아들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구절들은 그들의 탄생 순서와 나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2/02/contradictions-my-three-sons 

출처 - AiG–U.S. 2009. 2. 2.

미디어위원회
2009-02-13

창세기 1장의 수 패턴

 : 날(day, 욤)의 길이에 대한 결정적 단서 

(The numbering pattern of Genesis : Does it mean the days are non-literal?)

Jonathan Sarfati


       창세기 1장의 날(days)들은 히브리어로 보면 재미있는 패턴(형태)을 가지고 있는데, 영역본에는 종종 잘 반영되어있지 않다. 그 최초 날에 사용된 수사는 기수(cardinal number, 예를 들면 하나, 둘, 셋 ...)로서, יום אֶחָד (yôm echad, 욤 에하드, Day One)는 한 날(하루)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날들은 서수(ordinal numbers, 둘째, 셋째, 넷째 ...)로 수식되어 있다. 또한,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에는 정관사(ה, ha, 하, the)가 없고, 반면 여섯째 날부터 일곱째 날은 정관사가 붙여져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간의 문자적 번역은 ‘하루’,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그 여섯째 날’, ‘그 일곱째 날’이 된다.

이 패턴은 문자적 날(literal days)들에 반대하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 중의 선두주자인 휴 로스(Hugh Ross)가 제기한 논증들 가운데 하나를 무력화하는데 충분하다 :

”특별한 창조의 날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데 있어서 문장들의 색다른 배열이 존재한다. 히브리어를 낱말 대 낱말로 번역한 텍스트를 보면, 다음과 같은 어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저녁이었고 아침이었다. 몇째 날” ... 그 낱말의 배열은 단순하고 평범한 표현을 분명히 벗어난 것이다. 이 구문론적 불분명함이 어떤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 '날(day)'이 여기에서는 어떤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1]

앞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휴 로스는 그 구문에 대해 틀렸으며, 따라서 그의 논증은 붕괴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러한 주장은 히브리어에 대해 학식이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무모하게 해석했던, 그리고 허위인 것으로 판명된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2] 

호주 장로교회의 교회사에 대해 박사 논문을 썼던 목사인 로렌드 와드(Rowland Ward) 박사는 창세기가 쓰여진 그대로의 역사라는 견해를 지속적으로 반대해온 사람이다. 그는 심지어 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책인, 무신론자인 이안 필머(Ian Plimer, 호주의 지질학자)가 쓴 책 ‘신을 위해 거짓말 말하기(Telling Lies...)‘에 대해서도 신뢰를 부여하고 있었다.[3] 와드는 휴 로스보다 더욱 궤변적이다. 그리고 정확한 패턴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창세기의 기록된 그대로의 해석을 반대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에 ’골격가설(Framework Hypothesis)‘을 주장하였는데, 그 가설은 세속적 과학(진화론)에 비굴하게 항복하여 변형시킨 견해이며, 또한 빈약한 해석에 의한 불일치로 와드 자신이 썼던 것처럼, 창세기 1장의 날들은 실제로는 시대(ages)들로 해석되어야함을 요구하고 있는 이론이다.[4] 그러나 골격가설은 이미 폐기처분되고 있는 중이며[5, 6], 따라서 이 글은 오직 수 패턴(number pattern)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와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들 특징들은 단지(mere) 사건들의 연대기적 순서를 강조했다면 기대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cf. 민수기 29:17, 20, 23, 26, 29, 32, 35).”[7]

성경(cf. 눅 3:1-2)에 기록되어 있는 연대기(chronology)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연대기가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면, ‘단지(mere)’라는 단어도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서 아래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와드와 같지 않게 히브리어 전문가들은 그 패턴이 실질적으로 문자적 날들의 경우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일리노이주의 콩코디아 대학(Concordia University)에서 신학 및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는 앤드류 스타인만(Andrew Steinmann) 박사는 창세기의 패턴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그는 ‘욤 + 수 = 문자적 날’이라는 규칙에 예외는 없으며, 그 패턴은 창세기의 날들은 24시간의 날들임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주장하였다 :

”만약에 אחד (에하드는 first가 아니라 one이라는 의미)가 기수로 사용되었다면, 창세기 1:5절의 설득력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밤’, ‘낮’, ‘저녁’, 그리고 ‘아침’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을 것이다. 창세기 1:5절은 그 날의 주기를 시작하고 있다. 빛이 창조됨으로써 빛과 어둠은 하나의 주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낮'과 '밤'이라는 명칭을 주셨다. 저녁은 빛/낮으로부터 어둠/밤으로의 전환이다. 아침은 어둠/밤으로부터 빛/낮으로의 전환이다. 하나의 저녁을 가지고 하나의 아침을 가지는 것은 온전한 하루를 가지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창세기 1:5절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 저녁 + 아침 = 하루(evening + morning = one day). 

그러므로 매우 비범한 문법적 구조의 사용에 의하여, 창세기 1장은 하루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구절에서 특별히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이 한 절 내에서 '날(day)'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나타난 의미는 하루의 주기 동안에 일광(밤의 대비로서)에 의하여 조명되는 시간(낮)이다. 그 두 번째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일광과 어둠의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기간(날)이다.

그것은 그 본문이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져서, 주의 깊은 독자들은 그것을 '첫째 날'이라고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신에, 정관사의 생략에 의하여 그것은 '하루'라고 읽혀져야 하며, 그것에 더하여, 비록 넷째 날 이전까지 태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어둠 그리고 낮과 밤의 전환을 가진 태양력의 24시간의 하루와 동일한 하루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정관사가 없음을 설명해준다. 다른 저녁과 아침은 '하나의(a)'('the'가 아니라) 둘째 날을 성립시켰다. 다른 저녁과 아침은 하나의 셋째 날을 만들었고, 그리고 넷째 날도 그런 식이었다. 그 여섯째 날에, 마침내 그 관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조차, 문법은 이상한데, 왜냐하면 기대되는 바와 같이 욤(יום)에 관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여섯째 날이 통상적인 한 태양일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그러나 그것은 또한 창조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와 같이, 그 일곱째 날은 욤(יום)에 관사가 없는 채로, 욤 하쉬브아(יום השביעי, 날 그 일곱째)(창세기 2:3)라고 서술되어있다. 이것은 또한 서술자가 부여한 것이며, 통상적인 한 태양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날이었으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이다.” [8]

그 일곱째 날에 대한 맨 마지막 부분은 그 일곱째 날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휴 로스와 같은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주장하는) 점진적 창조론자들에 의해 제기된 저속한 주장을 논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9] 그러한 주장도 다른 타협안들처럼 불신되어지고 있다.[10, 11]  

그리고 스타인만은 특별한 문맥보다 전반적인 의미론적 범주에 의해 한 단어를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지적하면서[12], 히브리어는 명백하게 24시간 하루(24-hour days)들임을 가리킨다고 결론지었다.

‘욤(יום)’은, 영어 단어 ‘날(day)’과 같이, 그 의미가 다양하다. 그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24시간 하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ref] 그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의 길이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5절에서 에하드(אחד, one, 하나, 기수)가 사용되고, 그 이후 다른 날들에 대하여는 서수들이 사용된 독특한 용례는 그 본문 자체가 통상적인 태양일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3]


결론

창조론자들은 서수와 기수의 패턴들, 그리고 어떤 날들에는 정관사들이 있고 다른 데는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패턴은 창조에 대한 사실과는 관련이 없지만, 사용되어진 날(욤)을 24시간의 하루로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References
1. Ross, H., Creation and Time, NavPress, Colorado Springs, p. 48, 1994.
2. For examples, see Sarfati, J., Shame on Charisma! 29 May 2003.
3. For thorough refutation, see Plimer Files.
4. Ward, R.S., Foundations in Genesis: Genesis 1–11 Today, New Melbourne Press, Melbourne, Australia, p. 44, 1999.
5. Pipa, J.A., From chaos to cosmos: a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13 January 1998.
6. Kulikovsky, A.,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37(4):237–244, 2001.
7. Ward, Ref. 4, p. 45.
8. Steinmann, A., אחד as an ordinal number and the meaning of Genesis 1:5,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JETS) 45(4):577–584, 2002; quote from pp. 583–584; italics in original, bold added.
9. Ross, Ref. 1, pp. 48–49.
10. Is the seventh day an eternal day, Creation 21(3):44–45, 1999.
11. Kulikovsky, A.S., God’s rest in Hebrews 4:1–11, Journal of Creation 13(2): 61–62, 1999.
12. New Testament scholar Dr Don Carson referred to the exegetical fallacy of ‘Unwarranted adoption of an expanded semantic field. The fallacy in this instance lies in the supposition that the meaning of the word in a specific context is much broader than the context itself allows and may bring with it the word’s entire semantic range.’ Exegetical Fallacies,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2nd Ed., p. 60, 1996.
13. Steinmann, Ref. 8, p. 584, italics added. He has a footnote, ‘Whether or not one believes in the veracity of the Genesis account of creation in six solar days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As the ETS accepts biblical inerrancy, we can presume that the author himself doesn’t intend to advocate error in Genesis. Rather, he is pointing out that it is more honest to say that Genesis teaches 24-hour days but is wrong, than pretending that it’s right but teaches something else.

 

*참조 1 :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 - 김명현 교수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Po6SaewoYLw

The Ultimate Assertion : והארץ :הארץ ואת השמים את אלהים ברא בראשית

Evidence of Supernatural Design in the Divine Prologu

https://creation.com/images/pdfs/tj/j07_2/j07_2_184-196.pdf


*참조 2 :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Good approach misapplied to get ‘analogical days’ : A review of Genesi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35-39.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1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71-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93-101.pdf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100/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70/ 

출처 - Journal of Creation 17(2):60–61, August 2003.

미디어위원회
2008-12-29

‘충만하라’ 인가, ‘다시 충만하라’ 인가?

 (Contradictions: Full of Meaning Replenish or fill?)

 Stacia McKeever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Genesis 1:28, KJV)

어떤 사람들은 킹제임스 역본(King James Version)에서 이 구절이 아담과 하와가 지구 행성을 ‘다시 채우는(refill)’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최초의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두 번째 창조(second creation)’의 부분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간격이론(Gap theory)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뉴킹제임스 역본(New King James Version)에서 같은 구절을 읽어보라.

”Then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fillthe earth and subdue it;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on the earth.” (Genesis 1:28, NKJV)

킹제임스 역본에서 사용된 단어 ‘replenish’는 17세기(King James Version이 번역될 당시)에 단순히 ‘fill(채우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킹제임스 역본에 참여했던 번역가들이 살던 그 당시에 단어 ‘replenish‘는 ’refill(다시 채우다)‘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단어는 비축하다(stock), 채우다(fill), 공급하다(supply), 거주하다(inhabit)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Fill‘과 ’refill‘의 단어 관계처럼 ’plenish‘와 ’replenish‘ 관계는 성립하지 않음을 주목하라(plenish 라는 단어는 영영사전에 없다). ’Replenish‘라는 단어는 ‘replete(충만한)’이라는 단어로부터 왔다. 행복으로 ‘replete’하게 되었다는 것은 행복으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어 ‘replenish’가 ‘to fill again(다시 채우다)’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1612년에 있었다. 이 해는 킹제임스 역본이 발간된 그 다음 해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하나의 시적인 의미(a poetic sense)로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1:28절은 시가 아니다. 영어 단어는 수세기에 걸쳐서 의미가 변하면서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replenish 단어는 일반적으로 ‘refill’을 의미하게 되었다.

창세기 1:28절에 ‘replenish’ 단어에 대한 원래 히브리어 단어는 ‘male’ 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fill’을 의미한다. 그리고 킹제임스 역본의 다른 모든 곳들에서(예로 창 1:22) 그와 같은 방식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그 단어는 히브리 단어에서도, 그리고 킹제임스 역본 번역자들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그 당시 단어에서도 ‘refill(다시 채우다)’을 의미하지 않았다. 번역가들이 ‘replenish’ 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fill up(가득 채우다. 즉 make replete(full))’에 가까운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지구를 다시 채우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하지 않았다.

뉴킹제임스 역본(그리고 몇몇 다른 번역본들)은 그 단어를 정확하게 오늘날의 말투인 ‘fill’로서 번역하고 있다. 이 명백한 것처럼 보이는 모순은 원본 사본들에서의 오류가 아니라, 단순히 번역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번역 - IT 사역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22/contradictions-full-of-meaning 

출처 - Answers, 2008. 12. 22.

미디어위원회
2008-12-13

하나님은 일부다처를 묵인하셨는가? 

(Contradictions: A Man of Many Wives Does God condone polygamy?)

Roger Patterson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왕상 11:3)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 3:2)

성경에는 일부다처(polygamy) 관계가 명백히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 명의 처를 두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거짓말, 살인, 강간의 사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다처의 사례가 기록되었다는 것이 그것이 묵인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어떠한 구절도 없다.

창세기 기록에 의하면 태초부터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을 작정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2장은 아담을 위한 한 여성의 창조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4절에 이것 때문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룬다면, 셋이나 더 많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9:3-9절에서 예수님이 이혼에 대하여 질문 받으셨을 때 확실해진다. 예수님은 본래(from the beginning)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진 결혼 개념을 지지하시면서 창세기 2:24절을 인용하셨다. 본래(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일부다처 관계가 아니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한 예언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위의 열국 같이 그들 위에 왕을 세우리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었다(신 17:14). 이어서 하나님은 앞으로 세워지게 될 왕들에 대한 기준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17:17절에서, 왕들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분명히 왕은 일부다처를 행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부다처를 묵인하셨는가?

왕들을 포함하여 많은 유대 지도자들과 족장들도 여러 명의 아내들을 두고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다처 관계는 심판과 곤경을 불러 일으켰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관계로 인해 죄 값을 치렀다. 아브라함은 하갈과의 관계로 인해 가족 내의 갈등과 분쟁으로 고통당했다. 다른 사례들에서도 이러한 결과들이 뒤따랐다.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야곱의 생활이 하나님에 의해서 축복받은 것이 아니냐고 일부 사람들은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죄의 관계를 사용하셨다고 죄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계는 밧세바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일부다처는 많은 문화들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혼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되었다(마 19:8).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창조의 부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선택한 ‘음란한 세대(adulterous generation)’ 라고 부르셨다. 유대인(또는 어떠한 다른 사람)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것을 묵인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조 : A Man of Many Wives. Does God Condone Polygamy?

https://answersingenesis.org/family/marriage/a-man-of-many-wives/

Does the Bible condone polygamy?

https://creation.com/does-the-bible-condone-polygamy

What About Polygamy in the Bible?

https://answersingenesis.org/family/marriage/what-about-polygamy-in-the-bible/

Family/Marriage questions and answers

https://creation.com/family-marriage-questions-and-answer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01/contradictions-a-man-of-many-wives 

출처 - AiG, 2008. 12. 1.

미디어위원회
2008-11-12

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즉시 죽지 않았는가?

(Contradictions : Time of Death. Why didn’t Adam and Eve die the moment 

they ate as Genesis 2:17 implies?)

Bodie Hodge 


    이 질문은 창세기 2:17절로부터 생겨난다. 거기서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듣게 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몇몇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즉시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창세기 2:1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일종의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구절이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는 그 날로 죽었어야만 했음을 뜻하는 ”죽으리라(die)”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 날 즉시로 죽는 것인가, 아니면 죽기 시작하는 것인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창세기 2:17절의 의미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그 날로 죽지 않았다는 것은(창 5:4-5)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못 말씀하셨든지, 아니면 사람의 해석이 잘못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히 6:18). 그렇다면 오류투성이의 인간들이 실수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곳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히브리어를 영어로 문자 그대로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 ”Tree knowledge good evil eat day eat die (dying) die”

히브리어는 두 개의 다른 동사 시제(dying and die)를 가지는 'die die(muwth—muwth)”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 또는 글자 그대로 ”반드시 죽도록 죽어가는(dying you shall die)”으로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에 들어섰다는 의미로 죽음의 시작을, 그리고 마침내 죽을 것임을 가리킨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던 시점에서 죽기 시작하였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었다(창 3:19). 만약 그들이 즉시로 죽을 것임을 의미했다면, 하나님은 단지 한 번만 ‘muwth’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그것은 죽기 시작하는 또는 정녕 죽으리라가 아니라, 죽는, 죽다, 죽었고 등을 의미했을 것이다. 구약의 저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의미들을 잃어버릴 때가 간혹 있다.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 하나는 문자적으로 또는 단어 대 단어 (word-for-word)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용의 동등성 또는 생각 대 생각(thought-for-thought)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만약 이 구절이 단어 대 단어로 번역되었다면, 'dying die” 또는 'die die”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어가 반복 사용될 때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문법적 구조를 가지는 영어권의 독자들에게 어려울 수 있다. 그러한 문법적 구조를 허락한 제롬(Jerome)의 라틴어 번역본(Latin Vulgate)은 이것을 ”dying die” 또는 ”dying you will die” (morte morieris)로서 번역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더 동적인 의미를 갖는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죽지는 않지만, 확실히 죽음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2:17절의 네가 먹는 '날(day)에는'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욤(yom)에 관해 말하면, 그 단어는 나중에 나오는 단어 ”정녕 죽으리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행동(eating)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2:37절에서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말할 때, 거의 동일한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왕상 2:37)

여기서도 창세기 2:17절처럼 ”날(yom, day)에는”과 ”죽임을 당하리니(dual muwth)”가 사용되었다. 창세기 2:17절에서 욤이 행동(먹는 것)과 관련한 것과 똑같이 여기에서도 행동(나가서 건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두 경우에서 모두 그것은 그들이 죽을 특별한 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솔로몬도 또한 시므이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그 날에 즉시 죽는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부터 시므이의 날은 카운트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날에 그들(아담과 시므이)의 행동은 마지막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죽음은 시작되었다. 그들의 행동의 결과로서 그들은 정녕 죽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2:17절에 나오는 날은 그들이 먹었던(불복종했던) 날에 관한 것이고, 그들이 죽는 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참조 : Why Didn't Adam Die Immediately?

https://apologeticspress.org/why-didnt-adam-die-immediately-797/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0/20/contradictions-time-of-death 

출처 - AiG, 2008.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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