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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Laymanby Brian H. Edwards
2008-10-17

성경의 진리를 풀기

(Unlocking the Truth of Scripture)


      성경은 보물 상자다. 그 안에 가득히 든 보물을 열기 위하여 크리스천들은 특정한 열쇠, 즉 성경해석학 또는 해석법칙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성경의 정확한 해석은 거의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 자체의 교리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말씀들을 해석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과 성경의 인간 저자가 의도한 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크리스천들은 먼저 ”이것은 어떤 종류의 구절인가?”를 질문하여야 한다.


성경 구절의 여러 유형들

성경은 역사적인 서술, 시, 비유, 서신, 예언 등 여러 종류의 다른 문학형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만일 성경의 어느 구절이 분명하게 역사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목적이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만일 어느 구절이 시이면 비유적인 언어를 기대하여야 한다. 예를 들자면 시편 104편 3절은 하나님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다른 성경에 비추어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문자적 사실보다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음을 안다.
 
아마도 예언이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성경구절의 유형일 것이다. 성경에서 예언을 대하면 그 예언의 뒤에 있는 배경적 상황과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와의 관련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잡이는 그 예언이 신약에서 설명되어진 방식이다. 성경에 대한 신중한 연구와 성경 해석학 원리를 적용하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글을 고찰하고 있는지와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방법을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문맥이란 무엇인가?

1 . 성경의 문맥

절(verse) 전후의 구절들을 반드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 즉 신자인가 비신자인가, 젊은이인가 노인인가, 순종하는 자인가 불순종하는 자인가? 등등. 이 구절에서는 어떤 논제를 다루고 있는가? 성경의 이 특별한 책(낱 권)의 통합적 주제는 무엇인가? 주변의 절들은 이 절을 설명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등과 같은 것들을 파악해야 한다.


2. 역사적인 맥락

본문이 기록될 때, 또는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시대에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 주변으로부터 가해지고 있었던 위협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예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다윗은 광야에서 사울 왕에게 쫒기고 있던 중에 시편의 일부를 썼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시편들은 더욱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올 것이다. 역사적 맥락은 성경 그 자체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좋은 성경 주석이나 성경 백과사전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참고 서적들은 많은 성경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당시의 지역적 관습들, 예를 들어 목동, 고기잡이, 혼인, 의복, 희생제사 등과 같은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명백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공부하는 성경 구절의 문학적 종류와 그 맥락을 파악한 후에는, 그 단어의 문법적인 의미와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다소 확실하지 않거나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보통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문자적 의미가 사리에 잘 맞으면, 다른 의미를 찾지 말라는 것이 건전한 충고이다. 예수께서는 가끔 ”너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성경은 근본적으로 그 뜻이 명확하다고 생각하셨다.

모든 언어는 문법적 규칙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규칙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젊은 크리스천들은 요한일서 3:9절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해석은 만일 네가 죄를 범하면 너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어 동사가 ”현재 진행” 시재로 사용되었고,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아무도 삶의 방식으로서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라도 그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개개 단어의 뜻을 연구하면서, 그 단어가 그 문장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같은 저자에 의해서 다른 구절들에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등을 연구하라. (Strong's 과 같은 좋은 성경공부 컴퓨터 프로그램의 성구사전, 또는 일반 웹상의 성경공부 도구들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여느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일상적인 언어들을 사용한다. 일상 언어들을 인지하는 것이 성경의 바른 이해에 있어 필수적이다. 성경이 직유나, 은유 또는 과장법과 같은 일상 언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그와 같은 언어의 정상적인 용법에 따라 해석되어야만 한다. 다른 말로하면, 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취해지도록 의도되어졌지만, 말의 비문자적 유형은 문맥 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문자적인 역사(literal history)로서 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문맥은 결정적이다.
 

이것이 다른 성경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성경해석학의 또 다른 원칙은 성경의 조화를 포함한다. 진리의 하나님이 성경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바르게 해석했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여야 한다. 만일 한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한 절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절들과 모순되면 우리는 틀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더욱 신중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적용(application)이 전문적으로 해석 과정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성경은 단순히 지적 자극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을 개조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성경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지적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0-13)


잡상인들을 조심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의 유전을 좇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5-13)

바울은 그들 자신들의 목적대로 가끔 물질의 취득을 위해 성경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반대하며 고린도 교인들을 경고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7)

베드로는 성경의 어려운 구절을 억지로 비틀어서 그들 자신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고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크리스천들은 성경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위험은 성경 이야기를 미화시키고, 그리고 나서 그들이 마치 자기들 뒤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첨가 사항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변하는(정확하게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결론

하나님은 우리들이 말씀의 보화를 정확히 알고 삶에 적용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의미로 성경이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것과 그분이 의미했던 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해석학의 상식적인 원칙들을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 이들 원칙들은 따르기가 쉽고,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그 원칙들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unlocking-scripture

출처 - Answers Magazine, September 18, 200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30

참고 : 4374|4058|4423|3055|666|2797|4380|4375|3591|4401

미디어위원회
2008-09-17

아르박삿의 아들은 누구인가? : 가이난, 셀라? 

(Who was Arphaxad’s son : Cainan or Shelah?)

Stacia McKeever


      만일 당신이 성경 관련 잡지에서 족보 도표를 대조해 본다면,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경들에 기록되어있는 누가복음 3:36절의 가이난(Cainan)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이 이름이 창세기 10:24, 11:12, 그리고 역대상 1:18,24절에 있는 상응하는 족보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딤후 3:15-17), 이 모순은 무오 했던 성경 원본에서는 오류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 삽입(insertion)은 후대의 70인역(Septuagint, LXX) 필사본들(비-영감된 히브리 필사본들)에서 발견되어진다.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삽입된 것에 대해서는 2 가지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가이난은 원본 사본에는 들어 있었는데, 히브리 필사자들이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을 필사하던 중에 이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모리스 박사가 지적했던 것처럼[1] 히브리 서기관들은 필사 과정에 매우 신중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낮은 설명이다. 또한 그 이름은 구약성경의 다른 고대 판(사마리아역, 불가타역, 가장 오래된 70인역 등)들에서도 빠져있다.

두 번째의 설명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누가의 편지를 필사한 70인역 필사자들이 부주의로 인해 아르박삿(Arphaxad, 아박삿)과 셀라(Shelah, 살라) 사이에 가이난을 실수로 삽입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1:12). 따라서 그 사이에 가이난이 들어가는 것은 나이 상으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중의 70인역 필사자들이 누가복음에 있는 명단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에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을 삽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래리 피어스(Larry Pierce)는 이러한 설명이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38 – 약 100)의 자료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를 편집하기 위해 분명히 70인역을 사용했지만, 가외의 가이난을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그는 입증하였던 것이다 :

만약 요세푸스가 ‘70인역(LXX)’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70인역에 기초하여 쓰여진 어떤 다른 문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저술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70인역의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가이난이라는 가외의 세대가 70인역 또는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문서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세푸스는 그(가이난)를 넣었을 것이다! 만일 70인역에 가이난의 이름이 포함되어있었다면, 요세푸스가 착오로 그것을 누락시켰거나(가능성 없음), 그 자료를 가볍게 취급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롬(Jerome, 약 AD 347~419/420)은 벌게이트 성경(Vulgate, 성경의 라틴어 판)을 AD 5세기에 번역하였을 때,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롬은 70인역이 너무나도 부정확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히브리 텍스트(Hebrew text)를 사용했다[2]. 

피어스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 AD 약 180~ 약 250)로부터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누스도 그가 분명히 70인역의 부풀려진 연대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대표(AD 220년에 쓰여짐)에 가이난을 누락시켰다. 가외의 가이난의 추가는 AD 22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

... 요세푸스는 크리스천 저술가가 아니었고 누가복음 족보의 필사본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에 반해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아리스티데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Aristides) 3장에서, 그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족보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 사실 그는 누가복음 3:25절을 인용하고 있었다[3]. 따라서 아프리카누스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사본들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리카누스가 누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이 가짜 가이난이 들어 있었다면, 아프리카누스는 분명히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연대기를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누가복음 사본이라고 알려진 P75 (AD 175-255년 사이[4])라 불려지는 보드머 소장품(Bodmer Collection)의 파피루스 사본(papyrus codex) 102 페이지(원래는 144 페이지)에는 가이난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3:36절에 있는 내용은 AD 220년 이전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개혁주의 침례교파 신학자인 존 길(John Gill)은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 더해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 가이난은 창세기 11:12절에서 모세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았고, 구약의 어떤 히브리어 사본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또한 사마리아어 판(Samaritan version)이나, 탈굼어 판(Targum version)에도 없다. 또한 요세푸스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가계의 족보가 반복되고 있는 역대상 1:24절에도 없고, 베자(Beza)의 가장 오래된 누가복음의 헬라어 판에도 없다. 그 이름은 정말이지 현대의 70인역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원래는 거기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료로부터 누가가 취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어떤 부주의한 누가복음 필사자의 탓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위 있는 70인역에 부주의하게 삽입되어진 그때부터, 많은 헬라어 판들(Greek copies), 라틴어 판인 벌게이트(Vulgate Latin), 모든 동방 판들(Oriental versions),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판(Syriac)에도 가이난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셀라의 아버지가 되는 그러한 가이난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의 어느 사본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5].

 

Footnotes

[1] Morris, H.M., The Genesis Record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1976, p. 282.
[2] Pierce, L., Cainan in Luke 3:36: insight from Josephus, CEN Technical Journal 13(2):76, 1999.
[3] Ante-Nicene Fathers 6:126, Hendrickson, Peabody, MA, 1994.
[4] Geisler, N.L. and Nix, Wm. E.,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Bible, Moody Press, Chicago, revised and expanded, pp. 390–391, 1986.
[5] Commentary available online.

 

*참조 : What about Caina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41-43.pdf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Inspired Writers and Competent Copyists

https://apologeticspress.org/inspired-writers-and-competent-copyists-209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chronology-conundrums

출처 - AiG, 2006. 9. 14.

미디어위원회
2008-08-27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요세푸스는 말했다. 

(Josephus says, ‘Genesis means what it says!’)

Frank Luke 


      창세기의 분명한 의미에 대해서 타협하고 있는 사람들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은 현대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신하여, 과거의 대부분 주석가들은 오래된 연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을 보통의 날(24시간으로 된 하루)들이라고 해석했다. 더군다나, 오리겐(Origen)이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과 같은 사람들조차 오래된 연대 사상을 신랄하게 공격하였고, 지구의 나이는 수천 년에 불과하다고 단언했었다.[1] 유대인 주석가들 중 1세기에 살았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약 100)는 여타 사람들 중에서 두드러졌다.

유대(Judea)에서 태어나서 성장기를 거기에서 보냈던 요세푸스는 의심의 여지없이 성경 밖의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사가였다. 만일 요세푸스가 아니었다면, 유대 역사의 전체 기간이 세월의 뒤안길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여느 선량한 유대인처럼, 요세푸스도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한 우선적인 이해가 없다면, 유대인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경이 유대교를 정의한 바와 같이, 요세푸스는 먼저 성경을 정의함으로써 유대교를 설명하였고, 그들의 거룩한 경전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랑을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서로 불일치하고, 서로 모순 되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 시대의 모든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는 22권의 책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당연히 신성한 것으로 믿어지며[2], 그들 중 5권은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모세가 죽을 때까지의 인류 기원에 관한 전승들과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간은 3,000 년 보다 약간 짧은 기간이다... 예언서들은...13권이 있다. 나머지 4권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인생들에 대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3].

늘 그렇듯이, 요세푸스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의 분명한 단어들은 명확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인류는 모세의 시대까지 단지 3,000년 정도 되었다고 그는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성경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또는 성경의 신적 교리들 중 어떤 것이라도 바꾸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하고 있었다.[4]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인 ‘유대 고대사’의 서문에서, 요세푸스는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을 더 깊이 설명하고 있었다. 왜 모세가 성경을 창조 기사로부터 시작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요세푸스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모세가 이 교훈을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열망했을 때, 그는 다른 입법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약이나 다른 권리들에 관하여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율법의 제정을 시작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존중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우리 인간들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함으로써 시작했다. 이제 그가 일단 그들을 신앙에 순복하도록 인도하였을 때, 그는 다른 모든 일에도 순복하도록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우리의 입법자는 어떤 일을 지혜롭지만 수수께끼 같이, 어떤 것들을 점잖은 풍유로 말하고 있지만[5],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6]. 

요세푸스는 그의 방법론을 설명한 후, 창조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간다. 그는 모세의 설명이 전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었다 : ”이것은 정말로 첫째 날이었다[7], 그리고 단지 6일 동안에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8]. 요세푸스는 그가 이런 말들이 수수께끼 같다거나 우화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어떠한 지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논평은 창세기에 기록된 모세의 말만큼이나 의미가 분명하였다.

요세푸스는 에덴동산에 이어, 아담의 타락과 아담에서 노아까지 10 세대를 기록하고 있었다.[8] 요세푸스는 위에서 모세와 아담 사이의 시간이 3,000년이라고 언급했던 바와 같이[10], 아담에서 홍수까지 사이에 어떠한 시간적 간격도 허용하지 않았다.[9] 요세푸스는 대홍수에 관한(그는 물이 모든 곳을 덮었던 전 지구적 홍수로서 기록하고 있다[11]) 그의 글에서, 창세기 5장의 계보들 사이에 간격이 없음을 여러 번 확인하고 있었다.[12].

요세푸스는 그의 저술 전반에 걸쳐서, 그가 기록하고 있었던 핵심적인 입장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유대 분파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 사이의 교리 차이를 말하고 있었지만, 창세기 1-11장에 대한 이런 핵심적 해석에 대한 유대인들의 단 한 마디의 다른 의견도 기록하지 않고 있었다.[13]. 만약 어떤 다른 의견이 있었다 할지라도, 요세푸스는 그 의미가 애매하지 않고 명백하였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언급할만한 가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히브리 성경을 설명하는 동안, 오늘날의 안티기독교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말하고 있었던 반유대주의자들과 직면했었다. 요세푸스의 시대에 이교적인 헬라 역사가들은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의 역사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동일과정설적 과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부인하고 있고, 지구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진정한 역사를 부인하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오늘날의 교회가 문자적 창세기의 반대자들(오직 세속적 과학만이 기원에 관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해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들에 대해 대답하고 있었다 :

”무엇보다 나는 오로지 헬라인들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고대의 역사들에 대해 알고 싶어질 때, 우리 자신의 것에서부터 그 진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서,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헬라의 역사가들은 자료들을 쉽게 수집할 수도 없었고, 그들이 기초할 수 있는 어떤 좋은 기록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추측으로부터 그들의 역사를 썼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쓴 책들을 두고 서로 논박하고 있으며, 동일한 사건들에 대하여 매우 상충된 설명을 하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14].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현대 교회가 창세기와 지구의 시작에 관한 성경의 기록에 강력히 서 있어야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예수님의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창세기에 대한 일관된 견해는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 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This is thoroughly documented in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ch. 3, Master Books, Arkansas, USA, 2004, which includes sections on Josephus.
2. The Jewish canon contains the same books as the Protestant Old Testament, but they are numbered and grouped differently (for example, they counted all the minor prophets as one book—The Book of the Twelve).
3. Against Apion, 1.8, p. 776, emphasis added. All quotations from Josephus taken from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Josephus, Complete and Unabridged,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Hendrickson Publishers, Inc., Massachusetts, USA, 1987. These books are also available in the Online Bible.
4. Against Apion, 1.42. And many Jews have died rather than compromise Scripture and God’s commands. The Maccabean revolt started when one man and his five sons refused to let Hellenists sacrifice to Greek gods in the Jewish Temple.
5. Josephus uses ‘allegory’ as we would use ‘typology’. The difference is that typological events really happened and have a deeper, spiritual meaning underneath the literal one (you might think of it as the ‘preaching point’). By his own account, Josephus prefers the literal over any figurative meaning and uses ‘allegory’ exactly as Paul does in Galatians 4:24.
6. Antiquities Preface, 4.
7. Antiquities 1.1.1, emphasis added.
8. Antiquities 1.3.2, emphasis added.
9. The Flood occurred 2,656 years after Creation in most copies of Antiquities 1.3.3. This agrees with the Greek Septuagint translation (ca. 250 BC), while our English Bibles are mainly translated from the standard Hebrew (Masoretic) text, which says 1,656 (see also Hansen, P., Real History: The Timeline of the Bible, Creation 27(4):28–29, 2005). Dr Pete Williams shows why the Masoretic Text is likely to be closer to the original Hebrew in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 Journal of Creation 12(1):98–106, 1998; <www.creationontheweb.com/chronology>. It is possible that Josephus couldn’t find a Hebrew manuscript in the heart of the Empire, or else later scribes changed Josephus’ Hebrew numbers to conform to the Septuagint. Indeed, a few very old manuscripts of Josephus agree with the later Masoretic text. Those manuscripts report 1_56 years between Creation and the Flood (the centuries marker is smudged beyond recognition).
10. Indeed, the book’s heading is, ‘Containing the interval of three thousand eight hundred and thirty-three years: From the Creation to the death of Isaac.’ Once again, the expanded figures are due to Septuagint numbers, but the point is still that there is no room for millions of years since creation.
11. Antiquities 1.3.5.
12. Antiquities 1.3.3–4.
13. The groups themselves record some few differences amongst individual members, but the vast majority follow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11.
14. Against Apion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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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누구였는가?


요세푸스의 본명은 요세프 바르 마티아스(Joseph bar Matthias)였다. 그는 사두개인(Sadducee)으로 출생했고, 엣세네파(Essenes) 사람들의 친구였지만, 바리새인(Pharisee)으로서 훈련을 받았다. 요세푸스는 또한 예루살렘에서 외교 사절로서 로마에 가기도 하였고, 나중에 열심당 민병대(Zealot militia)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AD 66년의 유대 반란(Jewish Revolt) 동안에 그는 로마에 대항해서 갈릴리를 방어했다(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AD 67년에 그의 주둔지에서 집단학살을 간신히 피했으나, 포로로 잡혀서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넘겨졌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누스가 후에 황제가 될 것이라고 통찰력 있게 예언했다. 이런 일이 AD 69년에 실제로 일어났을 때, 베스파시누스는 요세푸스를 방면해 주었다. 저항운동이 희망 없음을 깨닫고,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매국노로 낙인 찍혔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AD 70년 처참하게 점령되었다. 곧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요세푸스의 학식과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인정하였다.

황제의 보호 아래,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역사에 관한 각각 여러 권들로 이루어진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즉 한 권은 ‘유대 전쟁사(Wars of the Jews)’ (약 BC 145년부터 AD 70년까지의 마카비 혁명(Maccabean revolt, 마카베오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함락까지 초점을 맞춘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 (창조로부터 BC 145년까지를 망라하는 유대인의 성경, 전통, 민속에 관한 해설서)이다. AD 100년에 어느 시민의 후원으로, 그는 ‘아피온을 반박함(Against Apion)’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삶(The Life of Flavius Josephus, 자서전)’을 출판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69/ 

출처 - Creation 29(3):15–17, June 2007.

Don Landis
2008-08-20

“하나님이 가라사대”

(“And God Said”)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라고 말했던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받고, 공격당해 왔다. 뱀의 말은 성경의 정확성(Bible’s accuracy)과 성경의 권위(Bible’s authority)라는 두 가지 요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성경의 정확성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은 사람에 의해 쓰여졌고, 따라서 오류(errors)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수 세기 동안의 필사들을 통해 사람들이 많은 오류들을 도입했다고 말한다.

성경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한 가지 중요한 목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것을 정확하게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성경이 과거에 정확하게 필사되었다는 한 가지 증거는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의 발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7년 한 목동에 의해서 발견된 이 두루마리 성경은 BC 250-150년 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발견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오래된 성경 본문을 약 1,000년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본의 내용이 그 이후의 필사본들과 비교되었을 때, 어떠한 중요한 차이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필사가들이 거의 1,000년 동안 매우 정밀하게 필사작업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이 놀라운 발견은 우리를 성경 원본에 1,000년을 더 가까이 데려다 주었다.

또한 하등비평, 문법, 문맥상의 증거들에 근거하여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건전한 주장들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필사가들이 성경 본문을 필사할 때, 매우 신중하였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고, 수많은 신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성경의 특성과, 성경 본문의 역사적 정확성을 증거로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성과 속성에 근거하여, 성경의 정확성에 대한 또 하나의 성경 안에서의 논거가 있다. 그리고 이 논거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숨을 불어넣었으며(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여, 벧후 1:2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신뢰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분은 무한한 지혜를 갖으셨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 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신뢰할만하고, 정확하고, 무오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분 자신의 본성을 반영하기 때문에, 성경의 정확성은 보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의 기록을 보존키 위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이신 그의 친 아들을 구속의 목적을 위하여 인간의 형상을 취하여 보내셨다.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시고 하나님이 지불하신 비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분의 아들의 목숨이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 우리의 죄 값을 그 분이 갚으심, 그리고 그 분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진리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여기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고, 인간의 구속을 위하여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값을 치렀고, 모든 미래의 세대들이 알 수 있도록 기록하셨다면, 하나님은 성경의 본문에 오류가 생겨 훼손되고, 메시지가 망쳐지도록 놓아두었겠는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하나님이 성경의 본문이 분실되고 메시지가 혼란스럽게 되도록 허용하셨다면, 그 분은 자신의 목적과 그 분의 독생자와 십자가상에서의 희생에 대한 목적에 불성실하다 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사역에 대한 완전한 기록을 인간들에게 잃어버려지도록 허용하시지도, 허용하실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 분은 오는 세대들에게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대속을 무효화시킨 것이 된다.

하나님의 본성, 특성, 그리고 속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서 절정을 이룬 그 분의 뜻과 약속과 계획에 대한 신실한 증인일 것을 요구한다. 


성경의 권위

하나님은 모든 권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성경은 권위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경의 원저자이시기 때문에(딤후 3:16), 성경은 권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근거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메시지의 전달을 보증하셨고, 자신의 권위로 이 메시지를 강화하셨음으로, 인간은 오직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즉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은 성경이 정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가 정확한 성경을 갖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확신할 수가 있다. 성경은 진리이며, 그의 아들 안에서 믿음에 대한 그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자들에게 용서와 영생을 주시겠다는 그 분의 제안과 약속을 신실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biblical-authority-god-said

출처 - Answers Magazine, October 30, 200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374

참고 : 4329|4258|4237|4148|4071|4100|4043|3974|3945|3935|3932|3898|3872|3812|3783|3731|3730|3707|3739|3689|3654|3641|3628|3633|3623|3589|3372|3311|3302|3289|3249|3242|3233|3220|3218|3208|3206|3204|3186|3170|3168|3166|3162|3155|3148|3101|3097|3065|3036|3022|3020|2996|2982|2970|2960|2942|2805|2797|2746|2737|2688|2643|2549|2545|2534|2530|2525|2515|2458|2425|2323|2321|2362|2030|1805|1793|1790|1756|1430|1412|1413|921|721|720|666|629|630|568|522|521|528|512|3931|3055|3024|2330

미디어위원회
2008-05-30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Evenings and mornings)

Andrew Kulikovsky 


      역사적인 실제 이야기로서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흔히 부딪치는 문제는, 넷째 날에 태양이 창조되었는데 어떻게 창조의 첫 3 일 동안에 저녁과 아침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 분명해 보이는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창세기 1장을 명백한 역사로서가 아니라, 문학적인 글로서 보도록 하였다.[1]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사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가능성 있는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들이 있다.[2]  
 

일시적인 빛의 근원

창조 첫째 날에 하나님은 빛(light)을 창조하셨지만, 어떠한 빛의 근원(light sources)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그 빛은 어디서 기원된 것일까? 무엇이 그 빛을 만들고 있었는가? 창세기 1:4 절은 우리에게 힌트를 주고 있다 :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이 구절을 14절과 비교하여 보라 :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하나님은 최초의 3일 동안 하나님이 ‘낮(day)’과 ‘밤(night)’으로 각각 이름을 지으셨던(5절) 빛과 어두움을 나누는 일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계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일째 이후에 그 일은 새롭게 창조되어진 해와 달에게 맡겨졌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빛의 근원이 존재하게 된 4일째 이전까지 빛과 어두움이 나뉘어져 있어서,  처음 3 일 동안은 일시적인 어떤 종류의 낮과 밤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태양과는 독립된 초기의 빛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었던 랍비들의 해석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 빛은 후에 철수되어졌고,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되어졌다.[3] 정말로 요한계시록 21:23, 22:5절은 이 견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보다 하나님 스스로가 새 예루살렘을 어떻게든 밝게 비추게 될 것이다.


일반적인 시간의 표시물

이들 용어(저녁과 아침)들은 실제로 특별한 사건을 설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반적인 시간의 표시물(general markers of time)들이 될 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단어들과 같이, ‘저녁(evening)‘과 ’아침(morning)‘이라는 단어는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저녁‘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을 때의 짧은 기간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한 그 단어는 자주 하루 일의 끝을 나타내는 시간, 즉,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기간 사이의 시간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된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 기간의 시간 동안 저녁 식사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태양이 지고 있을 동안에 먹는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침'이라는 단어는 태양이 지평선으로부터 출현한 때의 짧은 시간의 기간만이 아니라, 정오 이전의 어떤 시간에 대해 언급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창세기 1의 문맥과 매우 잘 어울린다. 천지창조의 각 날들은 그 날에 하나님의 활동(activities)들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라는 구절에 의해서 마쳐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을 마치시기(‘저녁’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이전 한 기간 동안 일하셨다. 그리고 다시 일을 시작하셨던 때인 ‘아침’까지 활동을 안 하시는 기간을 가지셨다. 바꾸어 말하면, ‘저녁(evening)’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활동하지 않으시는 기간의 시작을 일컫는 말이며, ‘아침(morning)’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비활동 기간의 종료를, 그리고 다음 날 일의 시작을 나타내는 때를 일컫는 말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녁과 아침은 일몰과 일출을 가리키기 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기술했던 것처럼 하나님 일하심의 시작과 종료에 대한 단순한 시간의 표시물(markers)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있을 수 있다.

더군다나, 일몰과 일출은 지역과 계절에 따라 많은 시간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북극권 안에 있는 라플란드(Lapland, 스웨덴 북부)에 있는 옐리바레(Gällivare) 지역은 여름 한 달 동안 하루 24 시간 내내 낮을 경험한다. 라플란드는 ‘한밤중 태양(midnight sun)’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옐리바레는 겨울 한 달 동안은 긴 밤만 계속된다.[4] 일몰과 일출은 이 기간 동안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출과 일몰의 의미로서 저녁과 아침은 결코 발생되지 않는다! 햇빛 또는 어두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녁과 아침(또는 낮 시간과 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은 일몰과 일출을 가리키기 보다는,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오히려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시작과 종료를 가리키는 단순한 시간의 표시물(time markers)로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어떤 경우든지, 창조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에 저녁과 아침의 발생은 특별한 창조를 기술하고 있는 성경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Related articles

How could the days of Genesis 1 be literal if the Sun wasn’t created until the fourth day? 

Light, life and the glory of God

Morning has broken ... but when?


Further reading
Astronomy and Astrophysics Questions and Answers


References
1. For a detailed refutation of such views see Kulikovsky, A.S.,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CRSQ 37(4):237–244, 2001.
2. Other solutions have been suggested by Hugh Ross and John Sailhamer, but their interpretations are forced and stretch the text beyond breaking point. See Sarfati, J., Genesis questioned by billions of years beliefs; a review of The Genesis Question by Hugh Ross, Journal of Creation 13(2):22–30 1999, and Kulikovsky, A., Unbinding the rules, a review of Genesis Unbound by John Sailhamer, Journal of Creation 14(3):35–38, 2000.
3. Lewis, J.P., The Days of Creation: an historical survey, J.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2(4):433–455, 1989; p. 449. Scholar Victor P. Hamilton holds to a similar view in his commentary on Genesis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Eerdmans, Grand Rapids, p. 121, 1990).
4. The north and south poles experience six months of daylight and six months of darknes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599/ 

출처 - Creation, 16(2):83, August 2002.

미디어위원회
2008-03-10

태양이 있기 전의 햇빛 

: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 이전의 하루는 하루가 될 수 없는가? 

(Sunlight Before the Sun)

by John D. Morris, Ph.D.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 주간의 첫째 날에 하늘과 땅(the heaven and the earth)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사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어두웠다 (3절). 둘째 날과 셋째 날에 바다, 궁창(대기), 대륙이 나타났고, 식물이 창조되어, 마치 땅이 인간의 거주를 위해 점차 준비되고 있는 것과 같았다. 넷째 날에 하나님이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14절)”라고 선언하시면서, 해, 달, 그리고 별들을 창조하셨고, 이것의 목적은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였다.(15절).

이 빛은 방향성이 있었고, 특정 광원으로부터 왔다. 지구는 분명히 그 빛 아래서 회전하고 있었으므로, 빛과 어둠의 시간이 교대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5절).

회의론자들은 이 점에서 성경적 창조론의 과학성을 오랫동안 비웃어 왔다.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어떻게 지구에 빛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은 성경의 오류임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이 명백한 오류로 보이는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관련된 과학적, 성경적 자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실제로 태양만이 아니라, 많은 광원(sources of light)들이 있다. 또한 가시광선뿐만이 아니라, 많은 형태의 빛들이 있다. 단파장의 빛들로서 자외선, X선, 그리고 다른 빛들이 있다. 장파장의 빛으로는 적외선, 라디오파 등이 포함된다. 빛은 마찰에 의해서, 불에 의해서, 수많은 화학반응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뿐만아니라 태양에서처럼 원자분열 및 융합의 핵반응에 의해서도 빛은 생성된다. 하나님은 그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손가락 끝에 많은 선택사항들을 가지고 계신다. 빛은 자동적으로 태양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창조 이야기에 사용된 히브리 단어(Hebrew words)들에서 중요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3절에서 '빛(light)'을 창조하셨을 때, 사용된 단어는 오직 빛의 존재만을 의미하는 반면에, 넷째 날에 '빛들(lights)'을 위해 사용된 단어는 '빛을 지닌 것들(light bearers)', 또는 영원한 빛의 근원(permanent light sources)들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것들의 목적은 빛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창조된 인간들을 위한 시간기록계(timekeepers)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장 유용한 별 창조 이론에 따르면, 넷째 날 우주의 모든 곳에서 창조된 별들로부터의 빛은 지구 시간으로 이틀 걸려 지구에 도착했을 것이고, 여섯째 날에 아담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정보를 위해서 www.icr.org에 있는 러셀 험프리(Russell Humphrey) 박사의 우주론 기사를 참조하라.)

명심해야할 것은 창조 주간(Creation Week)은 유일하게 기적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적적인 사건들은 오늘날의 자연법칙을 초월해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방하다. 특히 ”하나님은 빛이시라(God is light)”(요한일서 1:5)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 지구 밖에 자연 광원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창세기 1장의 하루(days)들이 오랜 기간(long periods)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준창조론자(semi-creationists, 오랜 지구 연대를 믿는 창조론자)들에게는 좀 더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창세기는 분명히 식물들은 셋째 날에 나타났고 태양은 넷째 날에 나타났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식물들은 광합성을 위한 태양 없이 수백만년 동안을 암흑 상태로 견딜 수 없다. 만약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 이전의 하루는 24시간의 하루가 될 수 없다는) 문자적 창조 주간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창조주간의 하루가 오랜 시대라면, 식물들은 생존할 수 없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더 적절하고 만족스런 설명인가. 성경이 현대의 과학적(진화론적) 견해를 따라 이해되고 설명되어질 필요는 없다. 그저 성경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만 필요할 뿐이다.

* Dr. Morris is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참조 : Morning has broken … but whe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86

Light, life and the glory of God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6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3620/ 

출처 - ICR, 2008. 1. 1.

창조과학미디어
2007-07-07

성경이 들려주는 기원의 연대

: 한국창조과학회가 젊은 지구 연대를 주장하는 성경적 이유


김홍석(구약학 박사)


     I. 서론

     창조과학회는 공식적으로 우주와 지구의 연대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긴 연대가 아니라, 매우 짧은 연대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 짧은 연대가 과학적으로 몇 년인지는 현재의 과학수준에서는 알 수 없다. 빅뱅이 아닌,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에 의해 우주가 탄생한 후, 우주의 연대가 얼마나 지났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국창조과학회회는 우주의 연대 자체에 대하여 과학적으로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지만, 빅뱅에 의한 우주탄생은 과학적 허구가 매우 많다고 생각한다.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매우 젊다는 주장에 대하여, 100억 광년 크기의 우주를 보고 있는 지금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빅뱅에 의해 100억 광년 크기의 우주가 되었다는 주장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여러 가정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관찰되는 우주는 빅뱅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높은 질서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은하도 이미 성숙한 완벽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주의 빅뱅이론도 계속 변해서 최근에는 가속 팽창하는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모르는 물질(dark matter)과 모르는 에너지(dark energy)로 96%를 설명해야 한다.

     우주에 대한 연구가 증대되면서 우주는 기존의 우주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 등이 발견되고 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관찰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우주가 팽창한다고 해서 과거 한 번의 대폭발로 시간, 공간, 물질, 생명, 질서가 나왔다는 주장은 참으로 수긍이 가지 않는 단지 가설에 불가하다. 우주는 신비하다. 우주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아직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신비 앞에서 다만 하나님의 창조의 놀라우신 능력과 지혜를 만나게 될 뿐이다.

     사실, 젊은 연대를 주장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다. 그리고 과학적인 발견들 가운데서도 젊은 연대를 지지하는 많은 연구결과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젊은 연대를 지지하는 과학적인 연구결과들 역시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가정(assumptions)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지구와 우주의 기원연대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구들은 실제 나이를 알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세계의 시작상태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적 연구는 이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동일과정설에 입각한 가정들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연구결과들은 가정 하에 겉보기 나이(apparent age)를 측정해낼 수 있는데, 이는 사용하는 시계와 가정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여 수십억 년~수천 년까지 매우 다양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이 세계의 시작은 자연과학 연구가 설정하는 가정들과는 매우 다르다. 창1:14-19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광명체(마오르, lights)들을 ‘하늘’에 두셨다고 하시지 않고 ‘하늘의 궁창’에 두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늘’보다 더 구체적인 공간적 위치를 알려주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심을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늘의 궁창’은 땅과 인접하고 있는 공간으로서 공기가 있어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대기권에 해당하는 특별한 공간이며(창1:7,8,), 이는 하늘에 속해 있으면서 땅과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땅위 하늘의 궁창’(창1:20)이라고 부르는 공간이다.1)

     창1:14-19에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으며,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를 의미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창조된 천체의 빛들이 모두 하늘의 궁창에 위치하여, 창조된 넷째 날 그 즉시로 그 빛들은 땅을 비추었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의 시간해석 차원에서 보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별빛이라 하더라도 그 빛은 창조된 그 날 즉시 땅을 비추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만약 실제로 수억 광년 멀리 떨어져서 창조된 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별로부터 나오는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억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계, 우주의 천체들이 존재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그 빛은 지구의 땅을 비추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수억 광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별빛이 관찰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수억 년 전부터 그 별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아담에게 태아기, 유아기, 소년기가 없이 청년 또는 성년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태양계와 우주의 모든 천체들도 성숙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갑자기 생겨나서 완벽하게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2) 세계의 시작은 과학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는 것이 창세기 1장의 내용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창조신학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초과학적으로 시작된 세계의 기원에 대한 연대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3)

     또한 연대측정을 위하여 다양한 시계(방사성동위원소,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등)를 사용하는데, 시간측정을 위해서는 이 시계들이 일정한 속도로 가야한다. 그런데 이 시계들이 일정하게 가기 위해서는 대기 중의 방사성탄소의 비율 등 대기의 조성 비율이나 온도, 지구자기장의 세기 등의 변인들이 안정된 상태로 지속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잘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지층과 화석 그리고 지구자기장의 세기에 대한 관찰들에 의하면, 과거 지구의 환경조건들이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는 수많은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자연과학이라는 도구는 지구와 우주의 실제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없으며, 다만 일정한 가정 하에 값을 구하는 것이며, 그것이 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실제 세계(real world)는 그러한 가정들과는 달리 선악과 사건, 노아홍수, 바벨탑 사건을 거치면서 환경은 범지구적인 범위를 넘어 우주적으로 격변이 있어왔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지구와 우주의 실제나이에 대하여는 하나님만 알고 계시며, 자연과학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동일한 성경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다양한 주석, 해석, 주장들을 할 수 있으며, 특히 성경에 기록된 시간에 대하여는 다양한 주석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성경연대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까? 성경은 기원의 연대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알려주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기록에 의한 기원의 연대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오직 성경을 통해서 논의해 보고자 한다.


 II. 성경은 기원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려고 의도하고 있을까?


2.1.성경기록상의 시간의 연속성

     창세기 시작 절(창 1:1)에도, 창세기의 마지막 절(창 50:26)에도 공히 시간이 기록되어있다. 특히, 창세기 1장은 시간기록으로 편만해 있다. 첫 단어는 “태초에”(베레쉬트)라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다. 이 단어는 동시에 성경의 첫 단어이기도 하며, 창세기의 히브리어 제목이기도 하다.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에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태초’, ‘낮’, ‘밤’, ‘저녁’, ‘아침’, ‘첫째 날’(또는 하루), ‘둘째 날’, ‘셋째 날’, ‘사계절’, ‘1년’,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이라는 ‘시간 단위’들로 구성된 자세한 시간의 얼개 위에 순서대로 기록한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기록자는 극소수의 특정한 사람들과 관련하여서만 시간을 명시한다. 예를 들면,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았다고 기록한다(창 5:3). 하지만 셋을 낳은 후 800년 동안이나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면서도 셋 이후에 태어난 수많은 자녀들에 대하여는 단 한 사람도 이름이나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창 5:4). 셋도 105세에 에노스를 낳은 후에 807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지만 에노스 이외에는 이름이나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창 5: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는 한 세대에 한 사람씩을 선택하여 해당 아들의 이름과 그를 낳은 나이를 통해 시간들을 빠짐없이 연속적으로 기록함으로써 ‘태초’로부터(창 1:1) 요셉이 죽은 시간까지(창 50:26) 이어지도록 기록한다. 그렇다면 기록자는 시간 기록을 통하여 그 사건이 발생했던 시간을 후대의 독자들 즉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의도했던 것일까? 웬함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역사적인 문제들에 빠지게 된다. 많은 고대인들은 태고에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장수했다고 생각했다. 창세기 5장은 그러한 개념들을 반영하며, 인류 역사가 아주 먼 과거 속으로 소급하고 있음을 반영한다.”라고 한다.4) 영(E. J. Young)은 “땅의 연대는 얼마나 될까? 인간의 연대는 얼마나 될까? 오늘날 거의 보편적으로 가르쳐지는 바에 의하면 인간의 연대는 수백만 년이고 땅의 연대도 수백만 년이다. 성경은 솔직히 인간의 태고성의 주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연대를 제공하지 않는다.”5)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창세기 기록자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일어났던 순서만을 알려주려고 의도했던 것일까? 하지만 성경은 단순히 순서만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지나치게 자세하게 시간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누군가가 사건을 말할 때 시간을 말하는 것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다. 만약 단지 족보만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만 있었다면 창세기 10장이나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과 같이 이름만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 계보, 셈 계보에는 특별하게도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아들을 낳은 나이를 통해 자세하고 정확한 시간을 기록하며, 이삭과 야곱의 출생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시간을 기록한다. 그리고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시간과 애굽에 체류한 시간,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시간을 출애굽기를 거쳐 열왕기의 솔로몬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시간을 전한다. 이러한 실제로부터 성경은 창1:1의 ‘태초’로부터 끊임없이 연속적인 시간을 전하고자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2.2.연대에 관련된 기록들에 위치한 문학적 장치들

2.2.1. 창세기 1장 1절과 5절 사이의 시간

     첫째, 본문의 내부적 관계를 살펴보면,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 최종편집자가 보여주는 본문의 구조에서 분명하고 질서정연한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BHS)에 따르면, “~째 날이니라” 뒤에는 항상 문단나누기 표기(페투하)가 배치되어 있다(창1:5,8,13,19,23,31). 그러므로 맛소라 텍스트의 최종편집자의 의도는 하루 단위로 문단을 나눈 것으로 보이고, 이는 곧 창세기 기자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분명하고 통일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통일된 형식은 기록자의 의도적인 구성으로 보인다. 문단구분 표식 페투하의 배치에 의하면, 창세기 1장 1-5절이 하나의 문단을 이루는 구조로서 하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창세기 1장 2절은 창세기 1장 1-5절이 이루고 있는 하나의 문단 내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이 우연이 아니고 맛소라 본문 창세기 최종편집자의 의도적인 구문론적 구상이라면, 그리고 그것은 최초 창세기 기록자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고 잘 전달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면,6) 창세기 1장 2절은 창조 주간의 맨 첫날에 대한 서술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7)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긴 시간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8) 창세기 1장 1절이 창조 주간의 처음 하루에 포함되는 활동이며 동시에 이는 태초에 있었던 창조 사역의 시작이므로 태초의 창조사역에 대한 선포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전체 서술에 있어서,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라는 서술이 의미하는 위치적인 기능과 범주는 창세기 1장 1절에 창조된 '천지' 가운데 '지'(그 땅)의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서9) 창세기 1장 1절에 언급한 그 땅에 대하여 묘사에 해당한다.10) ‘그 땅’ 즉 첫 날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던 것은11) 이틀 후에 물 밖으로 나와야 할 땅이 아직도 물속에 있었기 때문에 '혼돈'했다고 묘사한 것이며, 앞으로 식물들과 생명체들로 가득 채워져야 할 땅이 아직은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공허'했다고 묘사한 것이다.12)

     둘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2-3장을 통하여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며 그 이전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기록한다.13) 아울러 이 기록은 창세기 2장 17절과 로마서 5장 17절과 6장 23절을 상호 대조함으로써 죽음이 죄의 대가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즉 죽음과 고통은 선악과 사건 이후에 생겨난 ‘죄의 대가’이다.14) 그런데 간격이론은 아담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생물들의 죽음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셋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에 창조의 과정을 낮, 밤, 저녁, 아침, 날 등 시간과 함께 세세하게 기록하였고, 아담 계보와 셈 계보에서는 아들을 낳은 나이와 수명까지 시간에 대하여 면밀하게 기록하였다. 창세기 전반에 걸쳐 창세기 기록자는 이렇게 상세하게 시간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세기 기록자가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심판과 재창조 사이의 장구한 시간을 감추어 놓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창세기 전체적으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시간의 상세도에 비추어 볼 때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2.2.2.창세기 1장의 하루

     창세기 1장의 ‘엿새’는 은유적 의미의 시간인지, 아니면 문자적 의미의 24시간 하루의 연속으로서의 엿새를 의미하는 것인지와 관련하여 본문의 내부적 관계를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창세기 1장의 모든 “~째 날이니라” 앞에 배치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는 창세기 기록자가 창세기 1장의 하루가 24시간 하루임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한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둘째, 창세기 기록자는 ‘첫째 날’을 수식하면서 의미를 한정해 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바로 앞에 저녁과 아침을 설명하고 정의하는 낮과 밤의 정의(definition)를 배치하였다. 이로써 낮과 밤은 일몰과 일출에 의한 문자적 의미의 저녁과 아침임을 한정해 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셋째, 창세기 기록자는 창세기 1장 5절의 ‘첫째 날’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원어 단어를 서수 ‘첫째’(리숀)가 아닌 기수 ‘하나’(에하드) 즉 ‘하루’(one day)라고 기록함으로써 여기서 ‘하루’라는 시간단위가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되고 정의된 하루가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음을 보도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구조 속에 나타나 있는 기록자의 의도를 반영한 장치들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 창세기 1장 “~째 날”에 대한 문학적 장치들>


     넷째, 창세기 1장 14-19절의 하나의 문단 내에는 낮, 밤, 저녁, 아침, 넷째 날, 계절, 날, 해, 넷째 날 등 여러 시간단위들을 공존하도록 배치함으로써 기록자는 ‘넷째 날’이 24시간 하루임을 분명히 한다.

     다섯째, 창세기 기록자는 천체들이 창조된 바로 그 날부터 천체의 빛들은 지구의 이 땅을 비추면서 우주의 천체들과 지구의 공존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수억 년 이상 멀리 떨어져 보이는 별빛 문제에 대하여 창조신학에 따른 시공간적 이해를 제공한다.

     여섯째, 창세기 기록자는 태양이 만들어진 넷째 날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하루를 여전히 동일하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로 묘사함으로써 창세기 1장의 엿새가 모두 각각 동일한 24시간 하루임을 강조한다.

     일곱째, 기록자는 히브리성서 맛소라 텍스트(BHS)의 문단 구분을 통해서도 창세기 1장의 엿새가 모두 각각 동일한 하루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여덟째, 하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출 20:8~11에서 7일째 안식일로 지켜야 하는 날이 ‘우리의 하루’ 이므로 동일 문단 내 서술된 6일 또한 ‘문자적 24시간이 하루인 6일’이다.15) 만약 이스라엘사람들이 24시간 하루 동안으로 지킨 이 안식일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안식일을 범한 데 대한 엄중한 벌을 내리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벌은 엄중해서 죽이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출 31:15). 그러므로 안식일인 일곱째 날은 24시간 하루임이 틀림없으며, 따라서 동일한 문장 내에 위치하고 있는 엿새 또한 24시간 하루의 연속된 엿새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울러, 출애굽기 31장 15-17절에서도 동일하게 안식일 규례를 주시면서 31장 17절에서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일을 지켰으며 그것은 24시간 하루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엿새 동안이란 24시간 하루의 연속된 엿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16)

     아홉째, 창세기 1장의 그 날들은 헤아려졌으며, 성경에서 이렇게 헤아려진 경우에는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는 150회에 걸쳐 이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다.17)

     열째, 만일 창세기 1장의 하루가 어떤 다른 긴 시간을 의미한다면 그것을 의미하는 분명한 단어들로 다른 문장을 만들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단계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엿새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기록자가 창조주간의 엿새를 긴 시간에 걸친 여섯 단계로 이해하고서도 엿새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그는 창세기 1장에서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20장 11절과 31장 17절에서도 엿새 동안 이라고 기록하였다. 모세는 창세기 1장에서만 하루라는 단어를 다른 곳과 달리 어떤 긴 기간의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째 날”은 문자적인 의미의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2.3.창세기 5장과 11장의 긴 수명들

     창세기 5장의 아담계보 기록 구조는 “A가 x세에 B를 낳았고, A가 B를 낳은 후 y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가 x+y세를 살고 죽었다.”라는 일정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다음과 같은 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에노스는 게난을 90세에 낳았다(창 5:9). 게난을 낳은 나이를 10의 1로 줄이면 9세가 되고, 1개월을 1살로 계산하면 만 7.5세에 낳은 것이 된다. 게난은 마할랄렐을 70세에 낳았다(창 5:12). 이것은 7세가 되어서도 안 되고 5.8세가 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마할랄렐은 65세에 야렛을 낳았다(창 5:15). 짧은 한 문단 내에 65세에 자식을 낳은 사실과 895세를 살았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기록자의 전략이다. 즉 95세가 믿기지 않아서 10분의 1로 줄이거나, 1개월을 한 살로 해석을 시도해보면 65세에 자식을 낳은 것과 조화될 수 없어 다른 어떤 해석도 불가하도록 장치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18)

     야렛은 에녹을 162세에 낳았다(창 5:18). 에녹은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다(창 5:21). 므두셀라는 라멕을 187세에 낳았다(창 5:25). 라멕은 노아를 182세에 낳았다(창 5:28). 그리고 노아는 500세가 되어서야 야벳과 셈과 함을 낳았다(창 5:32). 아들을 낳은 나이를 모두 나열해 놓아도 아무런 수열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야 말로 들쭉날쭉 할 뿐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들을 낳은 나이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구조는 나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도록 배치한 엄격한 장치로서 기능한다. 창세기 기록자가 아담 계보의 모든 족보를 이러한 구조로 족보를 기록한 것은 의도적인 문학적 장치로서, 시간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에 의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담 계보의 시간, 나이와 수명은 구문론적 관점에서 본문의 내부적인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게 된다.

     아울러, 노아홍수 사건에 대한 기록은 사건 발생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연월일을 세심하게 기록하였다. 그것은 노아 600세 되는 해 2월 17일이었다고 기록했다(창7:11). 방주에 타기 시작(2월 10일)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2월 17일), 40일 동안 줄곧 비가 내렸고(3월 27일까지), 150일 동안 물이 땅에 넘쳤으며, 150일 후에 물이 줄어들었고(2월 17일에 시작하여 5개월 동안),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 10월 1일에 산봉우리가 보였고, 40일 후에(11월 11일) 까마귀를 내보냈고 비둘기도 내보냈으나 있을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으며, 7일 후에(11월 18일) 비둘기를 보냈더니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왔고, 또 7일 후에(11월 25일) 비둘기를 보냈더니 돌아오지 않았고, 노아 601세 1월 1일에 땅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하였고, 2월 27일에 땅이 말랐다. 이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에서 내렸다.

     기록자는 이 사건의 시간에 대하여 매우 높은 관심을 가지고 정확히 전달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만약 실제로 그 시간들이 아니라고 가정해본다면 시간들을 기록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기록해서도 안 된다. 만약 정확한 시간이 아니라면 시간적인 모호성을 그대로 남겨둔 채로 얼마든지 충분히 사건을 보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세하게 시간을 기록한 데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보는 타당하다. 그것은 시간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기록된 그대로의 사실성 즉 실제로 그대로 일어났다는 문자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자세한 노아 계보의 이 숫자들은 노아가 600세 되던 해라는 시간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나이는 아담 계보에서 노아가 500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과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노아 계보의 자세한 시간기록이 보도의 사실성을 강변하고 있는 것은 아담 계보의 나이 역시 문자적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셈 계보에서도 본문의 구성을 살펴보면, 자식을 낳은 나이와 함께 이후 몇 년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는지를 일정한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것은 수명이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되도록 지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에벨은 34세에 벨렉을 낳았고 벨렉을 낳은 후에 430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고”(창 11:16-17)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464세를 산 수명을 다른 의미로 줄여서 해석해보려 한다면 34세에 아들을 낳을 나이를 함께 줄여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문자적인 의미의 나이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형식을 문학적 장치로 볼 때, 이는 시간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기록자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노아홍수를 기점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사람의 수명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900대의 나이로부터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대 아담부터 10대 노아까지는 900수를 누렸고, 노아(10대)의 아들 셈은 600세를 살았다(창 5:3-31, 11:10-11). 이후 438, 433, 464세를 살았으며 바벨탑사건이 있었던 때인 벨렉(15대)은 239세, 이후 239, 230, 148세, 19대 데라는 205세를 살았다(창 11:12-32). 이렇게 나이의 점진적인 축소가 이어지면서 기록되어 있는 구조는 아담 계보와 셈 계보에 기록된 수명을 어떤 비율로도 축소할 수 없으며 다만 문자적인 해석만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19)



 III. 성경기록에 의한 기원의 연대 찾아가기


3.1. 아담-야곱까지 아담연대기 산출

     창5:3-32, 7:11, 11:10, 9:28, 11:10-26, 11:32-12:4, 21:5, 25:26을 근거로 아담에서 야곱의 출생까지를 산출하면 다음과 같다.


아담(0)+130(셋)+105(에노스)+90(게난)+70(마할랄레)+65(야렛)+162(에녹)+65(므두셀라)+187(라멕)+182(노아)+502(셈)+100(아르박삿)+35(셀라)+30(에벨)+34(벨렉)+30(르우)+32(스룩)+30(나홀)+29(데라)+130(아브람)+100(이삭)+60(야곱)=2168년20)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130세 때(창:47:9)이며, 그로부터 실제로 애굽에 체류한 기간은 430년(출 12:40)이며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출 12:41) 출애굽하였는데, 그 때는 솔로몬이 왕이 된지 4년이 되는 해였다(왕상6:1).


3.2. 기원의 시간에 대한 B.C. 연대기 산출

     솔로몬은 BC 970년에 왕위에 즉위했다.21) 따라서 다음과 같이 기원의 연대가 산출된다.


     BC 4174 년경으로 산출된 시간에는 공식적인 오차 범위가 내재하고 있다. 즉 누가 몇 세에 낳았다고 했기 때문에 몇 세 몇 개월 되었을 때인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1) 1대 아담에서 22대 야곱까지 21곳의 간격마다 최대 오차범위 1년(몇 세 몇 개월에 낳았는지 알 수 없음).

     2) 노아가 셈을 낳은 나이가 502세인지 503세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여기에 1년의 오차범위.

     3) 애굽으로 내려간 연도에 1년의 오차범위(몇 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년의 오차를 넘을 수는 없음).

     4) 출애굽 연도에 1년의 오차범위.

     5) 솔로몬 왕 제4년에 1년의 오차범위.

이를 모두 합하면, 1+1+1+1+21=25년.

     그러므로 아무리 오차가 크더라도 +, - 25년을 넘지는 않을 것이다.



     IV. 결론


    성경은 많은 문학적 장치들을 사용하여 자세하고 끊임없는 시간을 기록함으로써, 창1:1의 ‘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Reference

1) 이는 노아홍수를 겪으면서 달라졌기 때문에 지금의 지구환경과는 다르다. 따라서 궁창을 지금의 대기권이라고 할 수는 없다.

2) 참조, Wenham, Genesis 1-15, 6. 창세기 1장에는 승인 관용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7회(4, 10, 12, 18, 21, 25, 31절) 사용되었다. 이는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3) Eugine H. Merril, 「구약의 역사적 개요」, 김인환 역(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7), 56을 참조할 것.

4) Gordon J. Wenham, Genesis 1-15 vol. 1,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TX: Word Books, 1987), 134.

5) E. J.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 서세일 역(서울: 한국로고스연구원, 1998), 48. 영은 창세기 1장의 엿새는 사건이 발생한 연대기적 순서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 시간의 길이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6) 창세기의 내용이 창세기라는 이름으로 최종적인 편집을 거치기 전에 기록한 최초의 창세기 기록자와 지금 우리에게 전달된 창세기의 최종편집자는 다르겠지만, 그 의도와 의미의 전달에 왜곡이 없으며 성경 전체를 공시적 관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바라보고 최종편집자를 창세기 기록자와 동일시한다.

7) 김두석. “창세기 1장 1절과 2, 3절과의 관계 연구”, 「칼빈논단」, (2002): 133-158, 136-137, 150-151, 153과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 23-27, 31-33, 43을 참조할 것.

8) 김두석. “창세기 1장 1절과 2, 3절과의 관계 연구”, 「칼빈논단」, (2002): 133-158, 136-137, 150-151, 153과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 23-27, 31-33, 43을 참조할 것.

9) Young, 「창세기 1·2·3장 강의」,33.

10) 참조, Archer, 「성경 난제 백과사전」, 황영철 역(서울 : 생명의말씀사, 1993), 87-89 및 Keil & Delitzsch, 「구약해석 창세기」, 고영민 역(서울; 기독교문화사, 1987), 48-50.

11) Rad, 「창세기」, 50-51.

12) Keil & Delitzsch, 「구약해석 창세기」, 48-50.

13) Boice, 「창세기강해I」, 문동학 역(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78-79.

14)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로마서 5장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5)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

16) 참조, Schmidt, Die Schouml der Priesterschrift. 2d Ed.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1967), 5, 68. “Considerations Based on Pentateuchal Sabbath Passages."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

17) Hasel, "The ‘Days’ of Creation in Genesis 1: Literal ‘Days’ or Figurative ‘Periods/Epochs’ of Time", 5-38. Geisler, 「성경의 난해한 문제들」, 42.

18) Geisler, 「성경의 난해한 문제들」, 51-52.

19) Ibid. 아담 계보와 셈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수명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현상을 기록해놓았다. 따라서 아담의 나이를 93세로 10분의 1로 하게 되면 아브라함의 할아버지 나홀의 수명은 15세(14.8세)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줄여서 해석할 수 없게 된다.

20) 노아가 셈을 낳은 나이는, 창7:11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창11: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아하르 함마뿔)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9:28 "홍수 후에(아하르 함마뿔)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에서 ‘홍수 후’는 홍수 시작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홍수 후'를 '홍수 시작으로부터'로 보면 노아 502세에 셈을 낳은 것이 된다. 그런데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내린 시간을 기준으로 ‘홍수 후’라고 했다면 503세가 될 가능성도 있다. 노아가 502세에 셈을 낳았다면(또는 503세에 낳았다고 하더라도) 창 5:32, 창 9:24, 창 11:10을 살펴보면 노아의 아들들은 그 나이대로 야벳, 셈, 함 순이 된다. 히브리성서 맛소라텍스트는 '형인 야벳의 형제 셈'이라고 해석된다. 영어역본 KJV, NKJV, NIV 등은 "형인 야벳의 형제(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라고 번역하고 있다. [KJV]창 10:21 Unto Shem also,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 even to him were [children] born. [NKJV]창 10:21 And children were born also to Shem,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brother of Japheth the elder. [NIV]창 10:21 Sons were also born to Shem, whose older brother was Japheth; 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 데라가 아브람을 낳은 나이는, 창 11: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보여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에서 데라는 아브라함을 130세 낳았음을 알 수 있다.

21) 에드윈 R. 딜레(Edwin R. Thiele), 「히브리왕들의 연대기」, 한정건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5, viii.

미디어위원회
2007-06-11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는 구절은 

'날(day)'을 정의하는데 도움이 되는가? 

(Does the Phrase 'Evening and Morning' Help Define 'Day'?)

by John D. Morris, Ph.D.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는 ‘날(days)’들의 길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창세기 1장의 ‘날’이 과연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태양력의 하루(solar day)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질학에서 말하는 장구한 지질시대들에 버금가는 길고 무한한 기간들을 의미하는 것인가? 후자로 해석한다면, 창세기와 긴 연대와의 조화를 꾀하려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실제로 ‘날(day)’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욤(yom)’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가장 흔한 쓰임새는 문자 그대로 ‘날’이다. 그러나 ‘시대(age)’를 뜻할 수도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이다.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에 대하여 항상 그렇듯이, 특별히 사용된 ‘날’의 의미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도 성경적 문맥(Scriptural context)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그 단어가 처음 사용된 창세기 1장 5절에서, ‘날’은 한 방향에서 오는 빛의 근원(directional light source) 하에서 지구가 회전할 때 갖게 되는 빛/어둠의 주기 (낮/밤을 만드는) 중에서 빛이 비춰지는 부분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정의되고 있다. 또한 둘째 날 또는 여섯째 날에서처럼, ‘날’이 숫자의 수식을 받을 때는 언제나, 태양력상의 진짜 하루를 뜻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히브리어에서도 예외는 없다. 이는 십계명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창조를 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듯이 우리에게도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20:11)

이제 창세기에서의 각 날들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구절로 수식되고 있음을 숙고해 보자. 이들 ‘저녁과 아침(evening and morning)’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그 단어들이 무한한 길이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표준성경 연구 자료를 보면, ‘저녁(evening, ereb)’이란 단어는 단순히 저녁 또는 밤(night)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것은 ‘해가 지는 것 또는 일몰(sunset)’을 내포하는 표현에서 파생되어, 저녁에 드리는 희생 제물과 제사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저녁에 드리는 희생제물(evening sacrifice)’이나 ‘저녁에 돌아간다(returning at evening)’는 식으로 자주 쓰인다. 마찬가지로 ‘아침(morning, bôqer)’이라는 단어도 문자적으로 ‘아침 또는 새벽(dawn), 하루의 날이 밝아 옴’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rising early in the morning)’ 또는 ‘아침까지 모닥불을 피우다’는 식이다. 이 두 개의 단어가 한 쌍으로 ‘한 시대의 끝(the end of an age)’과 ‘한 시대의 시작(the beginning of an age)’을 뜻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성경 연구가나 주석가들은 성경의 기자가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를 주의 깊게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의 편견을 감히 덧붙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서야 한다. 기억해야 것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지혜로우시고, 우리가 알지 못할 수도 있는 진리를 우리에게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또한 분명하게 기록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그분의 생각 아래 복종시키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구절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Dr. John D. Morris is the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3228/ 

출처 - ICR, BTG, 2007. 4. 1.

미디어위원회
2007-01-25

창세기 5장과 11장의 수명변화에 나타난 

생노병사 현상과 열역학

이강래 


서론

첨단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달해 가고 있는 이 시대에서 성경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성도의 신앙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성경과 과학은 서로 배치되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인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선입관이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과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학법칙들의 심오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자칫 맹목적인 신앙으로 치우쳐서 왜곡된 신앙관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은 완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성경은 그 자체로 논리적이며 합리적이다. 자연과학에서 보여주는 관찰과 실험에 의한 제반 법칙을 발견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성경 내에서도 추구할 수가 있다. 성경의 과학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이 가설로 출발하여 완벽한 검증 없이 지속적인 보완을 해나가고 있는 것에 반하여 성경은 자연과학에서 발견되는 법칙들과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구약에서의 이론과 예측이 신약에서 입증되며 완성되고 있지만, 성경전체를 본다면 창세기 1장의 대전제가 구약과 신약에서 더 분명하게 들어나고 적용되어진다.

본고에서는 우주물리과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인 열역학법칙들과 성경내의 말씀과의 관계를 통하여 성경과 과학의 상보적 개념을 밝히고 사이비 과학인 진화론 사상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경의 말씀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특히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타난 수명변화의 연구를 통하여 열역학과 수명곡선 사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생노병사의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여, 과학기술우상화의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


본론

1. 사이비 과학과 참 과학

대폭발 이론에 의하면 혼돈의 극한 상태인 빅뱅(Big Bang)의 순간부터 질서와 법칙들이 나타나 우주의 형태를 이루었으며, 우연한 과정들과 오랜 세월을 통하여 지구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진화론의 주장은 오랜 시간과 우연의 연속이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이 세계가 형성되었다는 가설로 시작된다. 지구 생태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아주 간단한 유기물이 우연히 형성되어 더욱 복잡하고 고등한 생명체로 진화하여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화가설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진화라는 시스템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현재 존재하는 우주와 생명 현상들에 대하여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질서와 구조에 대한 원인은 추구하지도 않으며, 미적 감정도 개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타난 모든 것은 우연한 결과이며 약육강식의 존재 방식을 논리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화론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모호하게 하고 성경을 왜곡시키는 불신앙을 조작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참 과학은 확고부동한 법칙들을 통하여 우주를 이해하고자 한다. 과학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열역학은 전문적인 과학 분야라고 생각되어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게 들리게 되지만, 현대과학이론과 기술의 모든 과정을 포괄하여 우주와 지구를 이해하는 대단히 중요한 법칙이 된다. 특히 이 열역학 법칙은 만물의 기원과 미래에 대하여 성경 말씀의 진실성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조명해주고 있다.


2. 열역학 법칙(Thermodynamics1) law)

열역학 법칙이라 불리는 과학적 사실 혹은 과학법칙은 진화론에 대항할만한 가장 유력한 과학적 증거에 속한다. 두 가지의 열역학 법칙은 주후 1850년, 즉 대략 150여 년 전에 과학적으로 사실로 발견되고 입증되었다. 이러한 법칙은 모든 과학 분야 혹은 과학체계에서 기초가 된다. 그래서 이것은 모든 과학의 가장 보편적이며 기본적인 중요한 법칙이다. 과학에서의 이러한 두 가지 법칙은 지금까지의 어떠한 예외도 없는 보편적 법칙이다.

(1) 열역학 제 1 법칙

제 1 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질량을 에너지와는 다른 한 형태의 실체로 본다면 이 법칙은 ‘우주내의 에너지/질량의 총량은 보존 된다’는 뜻이 된다. 에너지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되기도 하고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전환될 수도 있지만 결코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에서 알고 있는 한, 우주는 그 안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총량들이 항상 보존되지만, 절대로 다시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세계들로 이루어졌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2) 열역학 제 2 법칙2)

제 2 법칙을 ‘무질서도 증가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우주가 계속하여 무질서한 상태를 향하여 진행한다는 뜻으로서 제 2 법칙과 관련하여 엔트로피3)(entropy)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이 용어는 어떤 체계 내의 ‘무질서’나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양을 나타내는 수학적 함수로 정의할 수 있다. 제 2 법칙은 어떤 체계에서든 엔트로피는 증가하거나 증가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 법칙이 시사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우주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제 1 법칙과 제 2 법칙은 보편적인 법칙들이지만, 왜 이 법칙들이 성립하는지, 또 이 법칙이 어디서든 항상 동일하게 적용되는지 아무도 모르며, 그 원인과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

생물학의 진화론은 한 개체가 보다 복잡하고 더 발달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진화론은 이 두 보편적인 법칙에 대하여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다.


3. 열역학 법칙에 대한 성경적 이해

열역학 제 1 법칙에 의하면 우주는 스스로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으나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내며, 열역학 제 2 법칙에 의하면 우주는 죽어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죽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두 법칙이 함께 적용될 때 우주의 미래는 영원히 멸망당한다는 이상한 현상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을 열사상태(heat death)라고 한다. 이 열사상태는 우주 내에 존재하는 태양과 같은 별들의 고단위 에너지체들이 다 타버려서 온 우주 공간이 균등하게 온도가 낮은 상태로 퍼지게 되어 에너지가 소멸하지는 않지만 결코 일을 할 수가 없는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적인 면에서 이 두 법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만약 우주가 영원 전부터 이런 상태로 작용해 왔다면, 이미 우주는 죽어 있어야만 한다. 아직 우주가 죽지 않았고, 시간 내에서 죽어 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출발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 2 법칙은 시간, 공간,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가 적어도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려면 ‘시점(beginning)’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다. 더욱이 제 1 법칙은 우주가 자기 스스로 시작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 2 법칙은 창조가 있었음을 말해 주지만, 제 1 법칙은 우주가 자신이 스스로 창조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참으로 과학적인 언급으로서, 우주의 모든 체계와 과정들을 한데 묶어 표현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교회 내에서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을 견지하는 과학자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수십억 년이나 질질 끌면서 우주가 쇠퇴하길 기다리셨다면, 그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시는데 있어 가장 낭비적이고 비효과적이고 잔인한 과정을 택하신 셈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참 과학을 조명할 때, 우주의 존재 원인과 현재와 미래의 상태가 분명하게 들어 나게 된다. 성경은 오래 전부터 두 법칙이 성립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고, 왜 그것들이 법칙이 되는지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시148:6).

[말씀]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명을 정하셨도다 (시148:6).


(1) 제 1 법칙에 대한 성경의 조명

현재 새 에너지가 창조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창2:2-3)”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주에서 아무 것도 소멸되지 않는 이유는 창조주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기(히1:3)”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를 마치셨을 때 온 우주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창1:31)”었다. 더 이상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큰 첫 안식일에 그의 보존의 법칙을 입법하시고, 우주의 모든 과정이 그 이후 영원토록 이 법칙에 순응하도록 하셨다.


(2) 제 2 법칙에 대한 성경의 조명

현재 우주의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있으나, 원초의 창조 때는 엔트로피도 에너지처럼 보존되어 전체 세계 내의 엔트로피는 항상 일정했을 것이다. 심지어 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력 때문에 소모되는 열에너지도 온전히 생산에 사용되어 ”낭비되거나 늙어지는” 경우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본래 '땅의 티끌”로부터 엄청나게 복잡한 두뇌를 가진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창조된 생물적 실체들은 육체적인 죽음이 없도록 계획되었다. 그러나 제 2 법칙에 급격한 수정이 가해졌으며, 현재 만물들은 열역학 제 2 법칙에 의하여 먼지로 되돌아가고 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8:22)” 성경은 이를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저주로 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죽게 되리라고 경고하셨다 (창2:16-17).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단의 말을 믿었기 때문에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7-19)” 이 말씀은 타락 이후의 제 2 법칙에 대한 정식 선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이 법칙을 함께 생각해보면, 열역학 제 2 법칙이 적어도 오늘날의 형태로 성립된 시기는 아담이 죄를 지은 비극의 날, 곧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고전 15:21)”라고 한 그 날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이 저주는 훈도적일 뿐 아니라 종말적이다. 이 저주는 비록 미래에 있을 우주의 열사상태를 예시하고 있지만, 한편 사려 깊은 하나님께서 결코 우주를 죽게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임을 암시해 준다 (롬8:20, 21).

[말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0-21).

”다시는 저주가 없을(계22:3)” 그 위대한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에덴 이후 지금까지는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있다 (롬8:22).


4. 과학이 조명하는 성경의 창조와 보존

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시작에 관하여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주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그 분의 초자연적인 능력인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과학이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소위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에 대한 원인이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성경의 권위와 참됨을 객관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생명체가 복잡하고도 난해한 생화학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전능자의 지적설계의 개입이 없이는 생명현상들이 저절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핵심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으로 요약될 수가 있다. 창조는 완벽하고 선하고 아름다웠다(창1:31).

[말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능력의 말씀으로 6일 동안에 온 우주를 포함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 세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을 사모하도록 설계되었고 아름다웠다 (전3:11).

[말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3:11).

오늘날 우주물리과학은 우주가 시간, 공간, 물질의 삼위일체로 구성된 연속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답고 질서가 있는 세상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하는 것에 대하여는 물질은 물론이고 시간이나 공간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 무의 상태에서 한 질점으로부터 대폭발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과학이 밝힌 절대 무의 세계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1) 빠라(bara)와 아사(asah)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선포하신 이 말씀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시간/공간/물질로 된 우주의 모든 체계와 과정들을 한데 묶어 표현하는 참으로 과학적인 언급인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창조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빠라(bara)’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를 뜻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의 가장 심오한 가설인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은 결국 창세기 1장 1절을 규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잘 이해하는 데는 1장에서 사용된 히브리 언어 ‘빠라(bara)’와 ‘아사(asah)’의 두 가지 동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빠라(bara)’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뜻하며, ‘아사(asah)’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이용하여 만든다는 뜻이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와 유에서 유에로의 지으시고 만드시는 두 가지로 구별된다.


(2) 무로부터의 세 가지 창조와 완전한 창조

창세기 1장에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뜻하는 고대 히브리동사 ‘빠라(bara)'는 모두 세 군데에 기록되어 있는데, ‘빠라(bara)'된 세 가지는 물질적인 우주(창1:1), 생명의 우주(창1:21), 하나님 형상의 우주(창1:27)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살아가야 하는 환경적 우주와 생명의 원리들의 실체인 생명체들과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창조(빠라)하셨다.

창세기 1장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현대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열역학 제1, 2법칙으로 창조의 완료(열역학 제1법칙)와 창조의 시점(열역학 제2법칙)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미 논하였지만 현재의 우주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cosmos(질서)의 상태에서 chaos(혼돈)의 상태로 질적인 저하를 가져오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가 완료되었을 때, 그 창조는 완벽하고 좋았을 것이라는 것은 열역학 제2법칙이 입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을 모두 6번씩이나 기록하고 있다.


(3) 인간의 위상

창세기 1장 28절은 인간이 피조세계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말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

모든 동물들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곧 이 우주 만물이 인간을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며, 인간에게 위임되고 상속됨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곧 법이며, 질서이다. 인간에 의하여 정복되지 않는 땅과 다스려지지 않는 동물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게 되므로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며, 도리어 인간을 해롭게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은 창조주가 부여하신 존재 가치가 인간에 의하여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다른 피조물 속에 감추어진 창조주의 영광을 발견하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리는 관계를 통하여 복의 근원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5. 세 가지 창조에 대한 저주

창조 시의 아름답고 완벽한 피조세계는 오늘날 참 과학이 밝히고 있듯이 고통을 동반한 죽음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이상한 현상을 맞이하고 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창조의 중심에 있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의 결과로서 흙으로 돌아가는 저주를 받게 된다(창3:19). 하나님 앞에서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려야할 인간이 그 존재의미를 상실하였으므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던 우주 환경도 저주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으며(창3:17-18), 모든 생물들도 저주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창3:14). 로마서 8장 20절 ~ 22절의 말씀에서 이러한 비참한 피조세계의 고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말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0~22)

완벽하고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붕괴되어갈 때 나타나는 현상은 끝없는 고통과 어둠을 상징하는 생노병사의 세상으로 표현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생노병사는 범신론적인 윤회의 현상이 아닌 일회적이나 종말적인 역사의 반복으로 나타났다.


6. 성경에 나타난 생노병사의 구체적 현상들

열역학 제 2 법칙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세계가 쇠퇴하게 되면서 열사상태에 이르는 생노병사의 현상을 말한다. 그것의 대상이 물리학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사회학적4)이든 이 법칙은 모든 과정에 적용되고 있다. 성경은 나타난 모든 피조세계가 죽어 가는 현상을 과학보다 먼저 예견하고 있다. 여기서 제 2 법칙은 인간을 포함한 생물계에 대하여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데 유전적인 질환인 노화 현상이 병이라는 고통스런 동반자와 함께 치명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1) 우주의 쇠퇴에 대한 성경의 언급

다른 종교의 경전과 달리 성경은 우주에 관한 열역학 제 2 법칙의 심각한 현상을 깨닫게 하는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만이 오직 창조주의 말씀인 것을 확신하게 한다.

[말씀]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룰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5-27).

[말씀]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

[말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말씀]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 8:20-22)”


(2) 인간의 쇠퇴에 대한 성경의 언급

시편 90편 9, 10절의 말씀은 인간의 쇠퇴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다.

[말씀]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9-10).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의 수명의 변화를 살펴본다면 노아홍수를 전후하여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엄청난 수명의 차이가 나고 있다. 이것은 대홍수 전의 장수 현상이 완벽한 지구 환경에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 방사선의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궁창 위의 물에 대한 환경적 역할이 입증5)되기도 하였다. ‘그림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노아는 502세에 셈을 낳았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생각하는 노화현상의 심각성은 홍수 전에는 별로 없었다고 보여 진다. 홍수가 끝났을 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고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6)는 예언의 말씀대로 환경의 변화가 극심하므로 이에 따른 생명의 단축 현상과 노화, 병드는 현상이 심각해져 갔다 (그림2). 창세기 11장을 분석하면 아르박삿과 셀라는 조상 셈보다도 먼저 사망을 하였으며, 벨렉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후손들이 셈과 아르박삿, 셀라, 에벨 등의 조상보다도 먼저 사망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홍수 후에 생노병사에 대한 극단적인 이상 현상이 발현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생물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 진다. 조심스럽게는 이때부터 방주에서 나온 많은 종의 생물들이 멸종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그림1) 창세기 5장과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의 수명변화에 관한 그림

1. (그림1)의 위의 변화선은 각 사람의 수명을 나타내며, 아래 변화선은 족보상에 이어지는 아들을 낳을 때의 나이를 나타낸다.
2. 대홍수 이전의 조상들이 900년 이상을 살았던 사실은 현실적으로는 믿기 어려우나,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홍수전의 기록은 아들을 낳은 나이가 100세 전후로 나타나는 것에 반하여, 홍수 이후의 후손들은 기록상으로 30세를 전후하여 아들을 낳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홍수를 중심으로 달라진 환경으로 인하여 장수에서 단명으로 변화하는 수명감소의 타당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1~24)”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승천한 에녹의 후손들이 다수 있었지만, 구원의 방주에는 오직 노아의 가족만이 들어갔다. 이것은 당시의 좋은 환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등한시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병적인 현상의 일반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던 땅(창1:10)이 대홍수로 멸망을 당하고 궁창 위의 물이 사라진 환경은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들과 생태계에 고통과 고난을 주었을 것이다. 홍수 후에 수명의 급격한 감소 현상이 나타나면서 생로병사에 대한 슬픈 징조가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징조는 점차 확산되어 갔다.

[말씀] 나홀은 이십 구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 십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창11:24, 25)

홍수 후 200년이 지나기 전에 태어난 나홀은 조상이신 노아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망하는데 당시에 수명이 200년 이상을 사는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명은 148년에 지나지 않았다. 나흘의 사망원인은 사고사가 아니었다면 병사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는데 오늘날과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장수였지만, 남편인 아브라함의 향년 175세에 비하면 단명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없이는 자녀도 낳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라의 인체에 이미 병적인 현상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0세까지 장수한 이삭은 아들 야곱이 고향을 떠날 때 약 130세였는데, 에서와 야곱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노안이 빨리(?) 왔다. 그는 거의 50년의 여생을 장님으로 보내야만 했다.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창27:23, 24)

아브라함으로부터 4, 5대에 걸친 후손들이 애굽으로 해방되었을 때, 이미 그들에게는 온갖 질병의 가능성이 있었다.

[말씀]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 (신7:15).

[말씀]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료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멂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신28:26, 27)

더욱이 레위기에 문둥병의 기록이 있다는 것은 홍수 후에 급속한 수명 단축 현상이 나타나면서 대부분의 질병들이 인간사와 함께 동반된 것으로 보여 진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친구 나사로의 병들어 죽은 것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셨고 온갖 종류의 병자를 위한 치료봉사에 힘을 쏟으셨다. 이러한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창조주 하나님도 가슴 아파 하셨던 것이다.


(4) 급속한 수명변화의 기록 속에 나타난 숨겨진 사실들에 대한 고찰

(그림2) 천지창조이후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타난 조상들의 출생, 사망연도에 관한 그림


1) 그림2에는 두 가지의 선들이 표시되어 있다. 아래의 점선은 창세기 5장과 11장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이 천지창조 이후 언제 태어났는가를 나타내며, 위의 실선은 그 분들이 돌아가신 해를 나타낸다. 이러한 곡선을 연구, 분석하면 성경전체에 대한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셋’은 천지창조 후 130년에 태어나, 912년 동안 살다가 천지창조 후 1042년에 사망하였다. ‘에노스’는 천지창조 후 235년에 태어나, 905년 동안 살다가 천지창조 후 1140년에 사망하였다.

2)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은 천지창조 후 622년에 태어나, 987년에 승천하였다. 에녹이 태어나서 승천할 때까지 1대이신 아담을 비롯한 모든 조상이 다 살아 있었으니, 그가 아담과 다른 조상들을 만나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실낙원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의 승천 시기는 아담과 셋의 사망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3대 후손인 노아가 만든 방주에는 그의 다른 후손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대홍수 5년 전에 사망하였고, 969세로 최고로 장수하였던 조부 므두셀라는 홍수가 나던 해에 사망하였다. 므두셀라의 이름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의 주장이 있다. 첫째는 ‘창을 던지는 자’란 뜻으로 마을을 대표하는 최고의 창잡이가 결투로 죽으면 마을이 패배한다는 의미에서 ‘그가 죽으면 세상 끝 날이 오리라’로 해석된다. 둘째는 ‘무트(죽다)’ + ‘솰라흐(보내다)’로 분석하여 ”그가 죽으면 홍수 심판을 보내겠다”는 뜻으로도 해석한다. 두 주장 모두가 므두셀라가 돌아가신 이후에 노아의 홍수가 발생하였다고 설명된다.(노아는 1056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나이 600세가 되던 해 2월 17일, 즉 1656년 2월 17일에 홍수가 발생하였는데 이 해가 바로 므두셀라가 사망하는 해였다)

4) 노아는 홍수 후에 350년을 더 사셨는데, 기록상으로는 그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바벨탑을 쌓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시기를 벨렉이 태어난 해로 본다면, 노아홍수 이후 겨우 100년 정도가 지났을 따름이다. 겨우 3, 4세대가 지났을 따름인데 니므롯과 같은 영적 대역적이 나타났다는 것은 부모나 조상의 신앙과 관계없이 그 마음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타락은 항상 신속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5) 셈의 아들 아르박삿과 손자 에벨이 조상인 셈보다 먼저 사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그림에서 작은 원)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그리고 셈과 아르박삿과 에벨 모두는 그 후손들인 벨렉, 르우, 스룩, 나흘, 데라 등이 죽은 후에도 살아 계셨다는 이야기(그림에서 큰 원)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림에는 이 모든 것이 나타나 있다.

6) 홍수 직후의 후손들에게 나타난 생로병사 현상의 심각성들은 바로 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이 지은 심각한 죄의 그림자는 생태계 전체에 나타났을 것이며, 지금은 화석에만 존재하는 많은 종류의 동물들이 비록 방주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건강한 처음 몇 세대를  제외한 그 후손들은 이 이상한 시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을 것이다.

7) 이 그림에서 나타난 중요한 한 가지 해석은 ‘멜기세덱’에 관한 정보이다. 아브라함은 노아 사망 2년 후인 2008년(2183년 사망)에 태어났는데, 그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갈 때(75세, 2083년) 노아의 아들인 셈(2158년 사망)과 셈의 증손자 에벨(2187년 사망)이 살아 있었다. 노아 홍수의 산 증인이며, 후손들과는 달리 장수하였던 그들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많은 제사장들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멜기세덱도 그러한 제사장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건한 제사장이었으며, 가나안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멜기세덱의 축복은 아브라함을 그 지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적인 선포로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인 것이었다.


(5) 생로병사를 허락하신 이유

하나님의 말씀인 질서에서 멀어질 때, 불순종에 따른 저주가 자연과 생태계의 재앙으로 나타나는 영적 법칙에 따라 영적인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어 가는 무질서가 인류 역사에 나타나게 되었다.

홍수전의 사람들이 완전히 멸망당한 것에 대하여 완벽한 환경이 오히려 믿음에 대한 걸림돌이 되어 성령을 거역하는 강포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천년 가까이 살 수 있는 그러한 완벽한 생태계의 환경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심령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도록 그 완벽한 환경을 멸하셨다. 그러나 인간이 계속하여 죄를 짓게 됨에 따라 수명을 더욱 단축시키면서 인생이 병들고 연약하게 되도록 하셨다. 그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노아 홍수전의 세상이 꿈같도록 하시어 하나님의 은혜와 구세주를 갈망하도록 하셨으며, 마지막 날까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학수고대하는 신앙을 갖게 하시고자 함이었다. 그러므로 말세를 살아가는 모든 기도교인들은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말씀과 같이 항상 주 예수의 재림에 관하여 기도할 필요가 있다.

[말씀]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22:20).

 

결론

완벽한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처음 세상은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는 아름답고 선한 세상이었다. 인간은 창조의 중심에 있었으나, 피조세계인 환경적 우주와 생명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상속자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채 불순종의 길을 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 가지에 대하여 모두 저주하시므로 오늘날까지 만물이 고통 하는 가운데 있게 하셨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과학은 열역학 법칙을 통하여 성경을 조명하고 있다. 참 과학은 우주의 영원성과 유한성을 발견하였다. 과학과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서 참 과학과 성경은 서로 상보적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때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만물보다 선재하심과 인간의 불순종에 기인한 우주의 종말이 필연적이라는 당위성을 다시 한 번 깊이 인식하게 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저주는 종말적이지만 훈도적이다. 이 저주는 비록 미래에 있을 우주의 열사 상태를 예시하고 있지만, 한편 사려 깊은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고 계신다.

노아 홍수 이후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수명의 감축현상과 함께 심각한 돌연변이적 유전질환으로 인한 질병 현상이 극심하여 생로병사가 인간의 영원한 과제가 되었다. 열역학 제 1, 2 법칙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세계가 쇠퇴하게 되면서 열사상태에 이르는 생로병사의 현상을 모든 방향에서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창조신앙을 회복하고, 잠깐 동안의 안개와 같은 세상에 애착을 두는 것보다는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저주가 없는 영원한 세상에 대한 소망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의 재림을 학수고대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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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Wood, Nathan R. The Trinity in the Universe. Grand Rapids: Kregel, 1978. 220pp.


주석

1) 그리스어인 ‘Thermo’는 열을 의미한다. ‘Dynamis’는 에너지 혹은 힘을 의미한다. 열역학(Thermodynamics)은 열이 있는 에너지와 힘을 취급하는 학문이다.
2) 열역학 제2법칙은 카노트(Carnot), 클라우시우스(Clausius) 그리고 캘빈(Kelvin)이 1850년에 발전시킨 법칙이다. 그것의 기본 골격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썼을 당시에 형성되었다. 19세기 말경에는 점차 이해될 수 있는 폭넓은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진화론자들은 열역학 제2법칙이 갖는 광범위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3) 월드 북 백과사전에서 엔트로피의 뜻을 살펴보면, ”열역학 제2법칙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기계에너지가 열로 완전히 전환될 수 있지만, 열이 기계에너지로 완전히 전환될 수 없다. 엔트로피는 일할 수 없거나 기계에너지로 변화될 수 없는 무용한 열에너지이다. 에너지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할 것이고,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4) 사회이론가인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 새로운 세계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문제들(통화팽창, 실업문제, 새로운 질병, 환경오염, 성적 문제, 관료주의, 자원의 고갈 등등)은 엔트로피의 증가에 기인한다고 하였다.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윤리 분야에서 모든 일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심지어 몰락하고 있는 것도 이 법칙에 기인한다고 본다.
5) 방사선의학의 발전
6)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 농사를 지었는데 그것은 땅의 황폐화로 인하여 포도즙으로 음료수를 대용하는 일이 시급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홍수 전후의 생태계에 나타난 극심한 변화를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당대의 의인인 노아가 술 취한 기록에 대하여 잘못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조 : Temporal changes in the ageing of biblical patriarch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151

Decreased lifespans: have we been looking in the right place?

https://creation.com/decreased-lifespans-have-we-been-looking-in-the-right-place

The antediluvian patriarchs and the Sumerian King List

https://creation.com/the-antediluvian-patriarchs-and-the-sumerian-king-list

미디어위원회
2006-12-21

므두셀라는 어떻게 죽었을까?

(How Did Methuselah Die?)

by John D. Morris, Ph.D.


      구약성경 중에서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는 969세 라는 가장 오랜 수명을 가졌던 므두셀라(Methuselah)이다 (창 5:27).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ed with God)’고 말해지는 에녹(Enoch)이다 (창 5:24). 에녹은 365세에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은 노아(Noah)를 낳고 홍수 나기 수년 전에 777세의 나이로 죽는다 (창 5:31).

므두셀라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였던 하나님의 사람 에녹은 아들의 이름을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를 가진 ‘므두셀라’로 지었다. 그는 아마도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적으로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매우 흥미롭게도 므두셀라는 하나님이 노아의 대홍수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셨던 바로 그 해에 죽었다. 

노아 홍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지만, 많은 것들은 단지 추측해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노아는 홍수가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를 120년 동안 포기하지 않았다 (창 6:3). 그리고 노아는 방주를 건조하는 동안에도 '의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벧후 2:5). 그러나 단지 여덟 명만이 구원을 받았다 (벧전 3:20). 왜 그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었는가? 마른 땅 위에 거대한 방주를 건조하는 그의 신앙적 순종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을 것이고, 죄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라멕과 므두셀라도 노아의 일을 지지하고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같은 가족인 8명만이 방주에 들어갔다.  

므두셀라가 홍수가 나던 해에 죽었기 때문에, 혹자는 그가 믿음이 없어서 홍수 물로 인해서 죽은 것은 아닌지 궁금해 하기도 한다. 그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단지 므두셀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에녹의 아들이었다는 것과, 노아의 출생 시에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예언을 했던 라멕이(창 5:29) 그의 아들이었다는 것뿐이다. 

여기에 몇 가지 더 숙고해 보아야할 구절들이 있다. 하나님은 장차 여자의 후손이 뱀(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창 3:15). 그리고 그 이후로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음모를 꾸민다 (창 4:7, 6:2). 더군다나 사람의 생각은 항상 악했고(창 6:5), 땅에는 사람들로 인한 강포(violence)가 가득하였다 (창 6:13). 제지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조만간 여자의 후손들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었다.

확실히 강포는 많은 생물들에게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동물들은 사나워지고, 피에 굶주리게 되었다. 사람의 죄악 된 본성이 가득해지면서, 전쟁은 맹렬해졌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강포와 환란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닥쳐왔을 것이다. 아마도 노아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남겨진 사람이 8명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므두셀라에게 일어났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마지막 순교자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살해되었을 때, 하나님의 인내는 끝났던 것이다. 인류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장차 구속주가 오시게 될 여자의 후손을 남겨놓기 위해서, 하나님의 정의는 마침내 촉발되었던 것이다.


*Dr. John D. Morris is the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참조 : Methuselah and the Ark ; Dirt and ‘supergerm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210/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3123/ 

출처 - ICR, BTG 216a, 2006.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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