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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이재만
2004-08-06

창세기 1장 (6) -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시고" (창1:6)

첫째 날 만드신 물로 구성된 지구(watery earth)를 꾸미고 계시는 모습이다. 궁창이란 단어는 히브리 단어는 raquya 인데, firmament 또는 expanse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넓게 퍼진 공간을 의미한다. 즉, 물로 된 지구를 둘로 나누시는데 바로 궁창이라는 것으로 나눈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궁창은 3일에 걸쳐 언급되는데 둘째, 넷째, 다섯째 날이다. 둘째 날은 물을 아래 위로 나누시면서 만드신 궁창(a firmament in midst of the waters)이다.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들을 있게 하신 하늘의 궁창(the firmament of the heaven)이다. 다섯째 날은 새가 나는 땅 위 하늘의 궁창(above the earth in the open firmament of heaven)이다. 여기서 어렵지 않게 둘째 날의 궁창과 다섯 째 날의 궁창은 같은 오늘날의 대기권이며, 넷째 날의 궁창은 대기권을 벗어난 우주의 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말에도 “하늘을 나는 새”와 “하늘의 별들”과 같이 하늘이란 단어를 함께 사용한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어쨌든 궁창이란 말은 “넓게 퍼진 공간”을 총칭을 뜻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궁창은 대기권을 의미한다.


순수한 건조대기는 질소 78%, 산소 21%, 기타 1%가 일정한 비율로 혼합되어 있으며, 지표에서 지상 80km 까지 특별한 성분을 제외하고는 비율이 거의 일정하다. 대기중에 가장 풍부한 기체인 질소는 모든 생물에게 필요한 영양소의 공급원이다. 비가 온 후에 식물들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이유는 비가 대기 중의 질소를 공급하여 주기 때문이다. 식물에게 다량이 필요한 질소는 토양 만으로는 충분치가 않은데, 가뭄이 오래 지속될 경우 수분 자체의 부족도 있지만, 질소의 부족이 심각하게 뒤따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특히 번개가 칠 때 발생하는 고온은 질소를 화학적 반응시켜 질산염으로 전환시키고, 비로 인해 식물에게 제공된다. 이 벼락이나 번개에서 힌트를 얻어 인공적으로 암모니아를 합성하여 만든 것이 바로 질소비료인 것이다. 욥기에 보면 “그가 번개 빛으로.. 식물을 풍비히(in abundant) 주시느니라 (욥 36:30-31)” 란 표현은 놀라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산소는 생물의 호흡에 절대적이다. 산소가 없으면 물론 생물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산소 양이 지금보다 더 많으면 좋을 듯 하지만, 그럴 경우 산소의 다른 역할로 불이 너무 잘 붙게 된다. 또 일단 불이 나면 소화하기도 어려워, 지구는 곧 불바다로 변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산소의 양이 지금보다 적어져도 그 반대 현상으로 불을 붙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뿐 아니라, 당장 호흡이 힘들어진다.


대기의 완전함을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다. 대기의 조성을 보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창조과정 가운데 시간이 들어갈 틈이 없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처음에 조화롭지 못한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의 대기로 점점 조화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해야 되며 이 완전성은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롬 1:20) 만을 보여준다. 


창조주 앞에 섰던 욥의 고백은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42:3-4).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을 통하지 않고 창조에 관하여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오직 처음부터 계셨던 분에게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물어보고 그분의 답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답을 통해서 오늘날의 모습을 보고 이해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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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
2004-08-05

창세기 1장 (5)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5).

진화론적 사고가 들어온 이래로 성경은 이전에 겪지 못했던 어려움을 맞아왔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인데 그 중에 "욤(day)” 즉 하루에 대한 논쟁이다.  즉 고생대 중생대 하는 진화론적 지질학과 빅뱅과 같은 천문학의 진화론적 가설로 교육을 받으면서이다.


챨스 스펄전은 ”과학이 무엇인가? 과학이 사람의 무지함을 숨기려는 방법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담대히 단언한다. 그리고 우리의 어떤 것보다 (그들의 말을) 훨씬 경솔하게 믿도록 요구한다”라고 하며, 과학자들 역시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 갈 수 없음을 경고했다.


종교개혁 시대에 신부들이 오히려 모든 것이 6일이 아닌 하루에 또는 순간에 창조되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이때 마틴 루터는 ”모세가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했다 라고 썼다면, 6일 전체가 하루였다는 식의 어떤 주석도 감히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행하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당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아시는 성령께 의지하라…… 그의 말씀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고 사람의 생각에 성경을 맞추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비슷하게 존 캘빈도 이야기 했다. ”…지금 세상은 끝으로 가고 있으며, 아직 6천년에 도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순간이 아니라 6일 동안에 완수 되었다.”  루터나 칼빈 모두는 당시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게 한 개신교의 분수령을 이룬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는 창세기 1장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지구의 역사도 성경의 역사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창세기 1장 밖에서 저녁과 아침이란 말이 욤과 함께 쓰였을 때나 아닐 때나, 보통의 하루가 아닌 적은 찾아볼 수 없다. 히브리어 '욤(day, 약 1200번)” 또는 '야밈(days, 약 700번)”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보통의 날로 사용되었는데, 시간의 의미로 사용되더라도 문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더 이상의 내용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창세기 1장의 하루 만을 특별히 취급할 이유가 없다.


요나가 물속에 3일 있었을 때나, 여리고 성을 일곱바퀴 돌았을 때에 대하여는 반대하지 않으면서(즉 기적은 인정하면서), 창세기 1장을 오늘날의 하루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기존의 진화론적 편견이 남아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직도 성경으로 순수하게 들어가고자 준비가 덜 됐던지, 과학에 의해 성경이 흔들릴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가 태양이 없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한다면 아직도 천동설에 갇혀있는 사람이다. 태양과 상관없이 지구가 한 바퀴 돌 때 저녁과 아침이라고 한다. 지구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욥의 말 중에 ”땅을 공간에 다시며(26:7)”라는 말이나, 잠언의 ”궁창으로 해면에 두루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When He set a compass upon the face of depth, 깊음의 표면 위를 둥글게 에워쌀 때, 8:27), 이사야서의 ”그는 땅 위 궁창에 않으시나니 (He sit upon the circle of the Earth, 지구의 원 위에 앉으시나니, 40:22)” 등은 둥근 지구가 허공에 떠 있음을 묘사한다. 그 둥근 지구가 처음부터 돌고 있다는 것을 창세기 1장은 계속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의 하루를 오늘날의 하루로 고백하는 것은 믿음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바로 나의 어떤 생각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토를 달지 않겠다는 자세인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내 (한정된) 생각에 집어 넣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완전한) 하나님 말씀에 맞추겠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이 있는데, 그 고백의 순간에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함이 넘치는 것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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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
2004-08-05

창세기 1장 (4) - 빛이 있으라 하시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3)

빛은 무엇인가?  물리학적으로 파동적 성질과 입자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가운데 파동성에 주목하여 볼 때,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가시광선)은 3900-7700 Å(옹스트롬=10^-8cm)이다. 이 범위 내의 파장의 크기에 따라 규정지은 것이 바로 보남파초노주빨 무지개 색이다. 뉴턴이 처음에 일곱 무지개 색으로 표현했지만, 후에 바우마(Bouma P.J, 1947)가 남색을 제외시켜 파장에 따라 여섯 색으로 구분했다. 모든 파장의 가시광선이 한꺼번에 와 닿을 때 색감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가시광선을 소위 백색광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물체를 보고 있다는 것은 반사된 빛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란색 색종이를 보고 있다는 것은 그 색종이가 노란색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은 흡수하고 노란색의 파장만을 반사하기 때문이다. 만약 파란색의 안경을 쓰고 흰 종이를 볼 때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안경이 파란 빛의 파장 만을 통과시키고 나머지 빛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가시광선 영역에서만 우리가 인식한다.


반면에 가시광선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사람이 그 빛을 볼 수 없다. 이 보이지 않는 빛은 가시광선보다 짧은 파장의 자외선, X선, 감마선 등이며, 긴 파장은 적외선, 마이크로파, 전파 등에 해당한다. 이러한 빛은 보이진 않지만 일상생활에서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는 있다. 선블락 크림을 바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바닷가에서 하루를 지낸 후에 그 피부의 그을린 차이를 보고 자외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맨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병원에서 X-선 촬영을 하고 필름을 통해서 그 존재를 알 수 있다. 적외선은 열로서 다가오는데, 화로에서 따뜻하게 느끼게 하는 복사 에너지가 바로 적외선이다. 열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 열을 발하는 물체가 붉은색을 띠는 것은 적외선의 파장과 가시광선의 가장 긴 파장인 붉은색이 겹치기 때문이다. 또한 더 긴 파장을 통해 우리는 라디오를 수신할 수 있다.


그러면 빛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전자기적 '에너지”의 모든 영역이다. 빛은 가시광선뿐 아니라, 자외선, X선, 적외선, 전파를 포함하며, 열, 소리, 전기, 자기, 분자상호운동의 영역에까지 해당하는 포괄적인 에너지다. 빛은 에너지의 가장 기본이며, 전자기적인 모든 형태를 활성화 시키는데 필수적이다. 이러한 면에서 성경이 태양과 다른 별들을 언급하기 전에 빛을 먼저 언급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실제로 빛이 먼저 없었다면 별들이 빛을 비추지도 못할 뿐 아니라, 별 그 자체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 빛이 넷째 날 해, 달, 별들보다 훨씬 근본적인 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시편 74편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에 대해 "빛과 해를 (따로) 예비하셨다"(16절)고 찬양한 것은 재미있는 표현이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4:6). 물질의 가장 근본 된 빛을 창조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말씀 그대로 영적인 면에도 적용하신다. 우리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영광의 소망의 빛(계 21:23)을 우리의 마음 속에 비춰 주셨다. 바로 어두워진 세상에 빛이신 예수님을 보내셨다(요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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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이재만
2004-08-05

창세기 1장 (3) - 간격이론 (gap theory)


    "Gap Theory (간격이론)” 창조과학 사역을 할 때 의외로 많이 받는 질문이다. 창세기 1장을 다루면서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기에 한 회를 할애하고자 한다. 간격이론이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이론이다. 간격이론의 대부분은 화석을 포함하는 지질시대의 수억 년이 이 두 절 사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이를 재창조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화론이 대두된 이래로 기독교인 가운데 진화론적 지질학과 창세기 1장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간격이론도 그 중에 하나인데,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창세기 1장 어딘가에 긴 기간을 넣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간격이론은 Dutchman Episcopius(1583-1643)가 처음 언급했지만, 당시 내용도 불분명했고 신학계에 영향력도 없었다. 간격이론이 알려지게 된 것은 Thomas Chalmers(Scottish, 1780-1847)에 의해서이며, 지질학자이면서 목사인 William Buckland가 대중화시켰다. 그 후에 이 이론에 대한 여러 글들이 등장했는데, 19세기 지질학자 Hugh Miller가 더 자세한 이론을 전개했다. 즉 진화론적인 지질학 개념을 가진 기독교인이 자신의 진화론적 지질학 이론과 창세기 1장을 엮으려는 노력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Arthur C. Custance가 'Without form and Void”이라는 책에서 간격이론을 옹호한 것이 크게 파급되는 계기가 됐다.


위의 글들은 어김없이 기존 진화론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주석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Scofield Study Bible에는 ”화석은 원시창조로 설명되며, (그러면) 창세기의 우주진화 모양과 과학은 모순이 없다” 고 설명했다. Dake’s Annotated Reference Bible에는 ”(진화론적)지구 나이에 동의할 때,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수백만년을 놓는다. 그러면 창세기와 과학사이에 모순이 사라진다.” 라고 전형적인 간격이론에 기초한 해석을 썼다.


”이는 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출20:11)” 속에 긴 기간이란 것이 들어갈 틈이 없다.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분명히 사람의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라고 했다. 간격이론대로라면 아담 이전에 지질계통표에 근거한 유인원이 죽었어야 했다. (사실 유인원의 어떤 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 놓았을까 고민하는 웃지 못할 신학자도 있다)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성경은 분명히 죄로 인해 피조물이 고통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간격이론은 죄 이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고 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무엇보다 간격이론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부터 죽음이 있었다고 하며 복음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 또한 이는 노아홍수를 제거함으로 동일한 말씀으로(벧후 3:7) 심판하신다는 말씀도 막연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사45:7)”  2절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깜깜한 세상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간격이론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사실인 성경이 아니라, 사실이 아닌 진화론에 기초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지질계통표의 역사는 있지도 않고 우주의 나이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다. 창세기 1장을 통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very good”를 통해서도 화석과 같은 잔인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서 나온 해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안타깝다. (더 자세한 내용은 Answers Book, Ken Ham, 2000; Earth’s Earliest Ages, G. H. Pamper, 1900 참고바람)

 

*참조 : God of the Gap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4/n1/god-of-gaps

The gap theory—an idea with hole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294/

Morning has broken … but whe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86/

Unbinding the rules (critique of John Sailhamer’s sophistic version of the gap the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59/

What about the ‘gap’ and ‘ruin-reconstruction’ theorie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cabook/chapter3.pdf

‘Soft’ gap sophist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53/

Gap theory revisited
http://creation.com/gap-theory-revisited

Creation compromises—Gap Theory
http://creation.com/creation-compromises#gap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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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만
2004-08-05

창세기 1장 (2) - 1절의 믿음


     창세기 1장을 순수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먼저 몇 가지 기본 방해 요소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 진화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지질계통표, 즉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하는 진화론적 역사를 머리 속에서 제거해야 한다. 실제로 지구상에 이러한 지층을 순서대로 보여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수억 년 되었다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연대측정 결과에서도 자유해야 한다. 결과가 숫자로 나왔다 할지라도 그들은 진화론과 지질계통표의 신뢰 하에 얻어진 무의미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점은 그 동안 많이 지적되었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졌다면 창세기 1장으로 들어갈 최소한의 준비작업은 마쳤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인 창세기 1장을 순수하게 보려면 비진리인 어떠한 개입도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사실이 아닌 진화론, 지질계통표,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난 상태라야 창세기 1장을 읽을 사전작업이 되었다 할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창 1:1). 성경 66권 중에 첫 번째 책인 창세기, 그 중에서도 첫째 장 첫 문장이다. 이 첫 번째 구절은 "시작(beginning)”, "하늘(heaven)”, "지구(earth)”를 동시에 "창조”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바로 시간, 공간, 물질을 동시에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 중 첫번째 물질이 바로 우리가 거하는 지구인 것이다. 어려운 물리이론을 펴지 않더라도 시간 없이 공간과 물질의 존재는 불가능 하다. 공간 없이 시간과 물질이 있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물질이 없이 시간과 공간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 첫 행위가 '시간”, '공간”, '물질”을 동시에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세 가지 중에 공간에 대하여만 나누어보자. 공간이라는 것은 기능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인력이라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이라는 것은 물질 존재에 필수 불가결한 매개 기능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38:38). 누군가가 처음부터 그 공간의 기능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우주의 물질은 그 모양도 갖출 수 없다.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동시창조라는 의미는 언제나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말한다. 실제로 "창조(bara)” 라는 단어는 항상 하나님의 일에만 사용되는 단어인데, 존재하지 않는 것(no existence)에서 존재하는 것(existence)으로의 무에서의 창조(ex nihilo)를 의미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가? 무에서 시간과 공간과 물질,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Nothing impossible”로 다가온다. 우리는 Nothing impossible 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고백하며, 더 나아가 그의 6 일간의 모든 창조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갖출 수 있다. 더 나아가 성경 전체에서 말하는 이적을 포함한 하나님의 구원사역까지 받아들일 자세가 된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는 창세기 1장 1절은 믿지만 연이어 행하신 6일간의 창조는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창세기 1장 1절을 확실히 이해한 것이 아니며, 1장 1절 그 자체도 바르게 믿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러한 확실한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도 바로 직결된다. 눈 앞에 응답이 없이 보일 때도, 하나님께서는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기에 참으시거나 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1장 1절이 사실이라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완전히 주관하심을 믿는 것이다. 순서상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이 먼저이지, 나의 경험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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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이재만
2004-07-30

창세기 1장 (1) - 진화론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정말 진화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창세기를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진화론은 안 믿어” 라고 하는 말이 진화론적 사고를 벗어났다는 의미일까?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학교에서 진화론적 교육만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진화론이란 무엇인가? 기원에 대하여 하나님 없이 생각하는 것이 진화론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기원에 관하여 진화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앞선 장에서 1절을 나눌 때 창세기 1장을 순수하게 읽으려면 진화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언급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정말로 가능하냐 말이다. 실제로 우리 스스로 진화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창세기 1장을 완전히 믿어야만 진화론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만약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만큼 진화론적 사고가 남아있다는 것이 거의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진화론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교육을 그렇게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의 한정된 사고로는 도저히 완벽한 창조를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만물의 창조하던 모습을 말하는 창세기 1장을 통해서다. 이러한 사고로 2절을 대하여 보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2)”  1 절에는 지구를 地 한자로, 2 절에서는 한글인 땅으로 번역을 하여 마치 다른 대상으로 느낄 수 있지만, 영어번역과 원어는 모두 Earth(erets, 에레츠)로 번역되어있다. 즉 1 절 지구에 대한 묘사를 보여준다. 그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영어와 원어는 formless(tohu,토후) and void(bohu, 보후), 즉 형태를 정할 수 없고 비어있다는 물리적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chaos)와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적 순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인간의 타락으로 무질서하게 된 것이지, 하나님께서 무질서를 먼저 창조하지 않으셨으며, 무질서의 과정을 사용하셨다는 것도 완전하게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대치되는 것이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롬 3:8)” 즉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기 위하여 혼돈을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묘사는 아직까지 빛의 창조 이전이기 때문에 온 세상이 깜깜한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한다. 다음 구절이 재미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surface of water)에 운행하시니라” 이다. 처음으로 특정한 물질인 “물(水)”이 언급된다. 과학자로서 눈이 번쩍 뜨이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는 물의 지구(Watery Earth)였다는 것이다. 물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화학식으로 H2O 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처음 언급된 물질이 물질 중에 가장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보다 더 단순한 것들이 많이 있다. 수소, 산소, 핵, 소립자, 미립자….  만약에 우주의 시작이 이와 같은 물보다 더 단순한 물질로 시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한 답은 그 이상의 진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수소나 산소에서 시작했다면 폭발만 일어났을 것이고, 핵에서 시작했다면 더욱 말이 안되고, 소립자에서 시작했다면? 미립자에서 시작했다면…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분명한 것은 시작이 단순한 것부터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창조방법과 위배된다. 진화론자들은 자꾸만 단순한 것부터 시작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기원에 대한 인간 생각의 한계인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자신의 좁은 사고를 통해서 나올 때 갖게 되는 한계이다.


여러분이 지구는 처음에 뜨거운 불덩이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아직도 진화론적 지질학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마치 태양이 뜨겁기 때문에 지구도 처음에는 뜨거웠을 것 같은 “느낌”일 뿐이다. 아직도 진화론적 별의 기원에 영향을 받았던지, 지구가 원시 태양에서 분리되었다는 지 하는 상상의 이야기가 아직까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구가 처음에 뜨거웠을 것이라는 생각은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에서 나타났다고 믿는(히 11:3) 믿음이 없는 인간들의 한계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서 지구는 처음에 불이 아닌 물이었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오히려 불은 지구의 시작이 아니라 끝이라고 한다.


진화론은 처음부터 완벽한 것들을 창조했다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결국에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 논리에서도 사실인 성경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결국에 성경을 통하는 것이 진화론의 근본적인 허점을 발견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성경을 믿지 않는 한 우리는 진화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성경을 그대로 믿어야만 진화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창조사실을 믿고 배우는 것이지, 우리의 경험과 한계 있는 지식을 통하여 완전한 창조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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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이재만
2004-06-30

가인의 아내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창4:16,17) 

   가인은 아내를 어디서 얻었을까?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질문 중에 하나이다.  많이 나오는 질문이니만큼 궁금한 부분인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리 어려울 것이 없는 질문이다.  선택의 여지 없이 가인의 누이동생과 결혼을 할 수 밖에 없다 (또는 다른 가까운 친척).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sons and daughters)를 낳았으며” (창5:4) 라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사람은 구백년 가까이 살았을 뿐 아니라, 노아를 보더라도 오백 살이 지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5:32)고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기간이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가까운 친척과 결혼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이런 질문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탑 사건 직후 그들의 배우자 관계를 보면 지금 우리의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배다른 동생(my sister, the daughter of my father, but not the daughter of my mother)인 사라를 아내로 삼고 있었다 (창20:12).  이삭은 삼촌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 즉 오촌하고 결혼을 한다 (창24:15, 24).  더군다나 아브라함은 이삭의 배필을 찾을 때 자신의 친족(relative)에게 가서 결혼을 하라고 명한다 (창24:4).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외삼촌 라반의 딸인 라헬과 레아, 즉 사촌과 결혼을 한다(창29:12, 24, 25). 더군다나 두 아내가 서로 자매 아닌가! 여기서도 이삭이 직접 야곱에게 사촌과 결혼할 것을 명한다 (창28:2).  바벨탑 사건 직후에 이들은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했고 그러기를 장려했음을 알 수 있다. 홍수 직후의 배우자 관계를 이해하면, 또한 더 소급해 올라가 홍수 이전의 배우자 관계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후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할 때 친척끼리의 성 관계를 금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너희는 골육지친(blood relative)을 가까이 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레18:6).  어쨌든 성경적으로 배우자가 relatives에서 no relative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으로 볼 때 근친결혼일 경우 서로 유전자 상태가 비슷하며 유전자 결손 상태도 유사하게 된다.  근친결혼이 서로의 유전자 결손을 상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기형아, 저능아, 또는 병약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였으므로 유전적 결함인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가인이 누이동생과 결혼한다 할지라도 과학적으로 문제가 될 리 없다.


더군다나 노아홍수 이후에 궁창 위의 물이 제거되는 사건으로, 몸에 해로운 빛이 직접 지구상에 도달하여 체내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더 심하면 유전자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홍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즉 유전자 돌연변이가 덜 축적되었던 족장시대는 한동안 가까운 친척과의 결혼이 가능했을 것이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행17:26) 라고 성경은 말한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지구상에 살았던 적이 없다. 가인도 역시 이들의 후손에서 아내를 취하였을 것이고, 첫 아들 가인은 당연히 누이동생 중에 하나를 아내로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우리와 맞지않는 윤리의 문제이지, 과학적으로 문제되는 얘기는 아니다.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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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V. Taylor
2004-04-30

언어학과 창세기, 그리고 진화론 - 제 1부

(Linguistics, Genesis and Evolution - Part 1)


     수많은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이 진화론을 주장할 때 대개는 의인화한 언어를 (사물에게 인간의 특성을 부여한) 사용한다. 예컨대, 과학자들의 주장들은 이렇다. 즉, "... 그래서 깃털은 이중목적을 가진 물갈퀴 발톱으로 진화되었다", 라든가, "...인간이 허리를 굽히고 살던 조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등등. 그들은 또한 각각의 유기물 안에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작동하고 있다고 가끔씩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든 사물이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생기도록 정해졌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념의 패턴을 사회학자들은 물활론적(animistic) 이라고 부른다.


과학자들만 자기 나름의 주의주장을 펼치는 것은 아니다. 성경도 또한 수천 년 전부터 있었던 주장들을 담고 있다. 성경의 주장들도 매우 인간화된 것임을 또 한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엔 인간화된 대상이 실질적으로 인격적인 대상이란 사실이다. 그 어떤 맹목적인 힘이나, 또는 당연히 변화하는 유기체가 아니다. 더욱이 이 인격은 사물이 생기라고 말씀하는 하나님이시다. 소위 진화론이라는 운명론이 믿기 어려운 관념인 것처럼, 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관념도 역시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경말씀을 거부하도록 세뇌된 사람들한테는 더욱 믿기가 어렵다. 그것은 성경이 담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전혀 과학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성경의 말씀이 담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언어학이, 즉 인간의 말을 연구하는 학문이 풀어야 할 부분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내가 지금 고찰하고자 하는 주제가 언어학적 측면에서 관찰하는 성경의 문제들이다.


창세기1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언어학적 문제는 창조의 '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날들 (days)' 을 우리는 글자 그대로의 날들 (days)로 이해하여야 할까, 아니면 시적이든가 은유적으로 표현된 시대(epoch)로 이해하여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은 창세기가 시로 쓰인 글이기 때문에 상징적인가? 아니면 그냥 서술문체이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인가를 판단하면 얻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창세기가 시로 쓰인 글인가 아니면, 서술문으로 쓰인 글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마냥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창세기 장(章)1은 히브리어로 쓰였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서술문구조와 시문(詩文)구조는 일관되게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이다. 언어학자들은 세계의 여러 언어들을 문학적 표현 방식과는 다른 보통의 실용언어구조에 따라서 언어학적 집단(groups)으로 구분한다. 모든 언어는 문장(sentence)을 가진다. 문장을 가지지 않는 언어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었다. 모든 문장은 우리가 주어(S), 동사(V), 그리고 목적어(O) 라고 부르는 문법적인 기능부분(bits)들을 가지고 있지만, 문장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이 세 부분을 반드시 동시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언어도 내부에서 이것들이 끼어 맞춰져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언어들 간에는 매 기본적인 문장 속에 이 문법적인 기능부분들의 배열 순서에 따라서 외형적인 차이가 있다. 영어는 SVO 언어라고 불리는가 하면, 히브리어는 VSO 언어로, 일본어는 SOV 언어라고 불린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예로 들어보자. "Our cat caught a mouse". 이 문장을 표현하는 세 언어들 사이에 형식이 이렇게 다르다. 즉' 영어 ━ our cat (S) caught (V) a mouse (O); 히브리어 ━ caught (V) our cat (S) (a) mouse (O); 일본어 ━our cat (S) (a) mouse (O) caught (V).....

어느 누구도 위 문장들에 나오는 our cat 는 주어(subject)임을 말하면서, 이 세 언어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를 왜 VSO 언어라고 부르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S) 하였다(V) 무엇을(O)?' 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이 내용을 꿰맞춰보면 이 세 언어 간에 외형적인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어는 언제나 위에서 예시한 어순으로만 쓰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영어는 VSVO 언어이기도 하다. 'Did our cat catch a mouse?' 또 멋스러운 문장이나 시(詩),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서 쓰이는 그 많은 환상적인 표현에서 어느 나라의 언어이건 예외 없이 어순을 한결같이 다 바꾼다. 히브리어는 서술문에서는 일반적으로 VSO 어순을 사용했는데, 성경 시편의 저자 다윗처럼 히브리어 시인들은 영어의 어순처럼 SVO구조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 문장이 SVO 구조인 경우는 시적 구조라고 하겠다.


창세기의 문장1:1은 어떤가? At start created God the heavens and the earth / created(V) subject(S) object(O), (태초에 창조 하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이 순서가 표본적인 VSO 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시가 아니라 서술문이다. 창세기에서 각 날에 따라 창조하신 피조물에 관해 언급할 때 이 문장 패턴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술문으로 된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에 창세기 편찬자가 그냥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는 문장에 멋을 부리기도 하였을 것이며, 그밖에도 많은 기교를 사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어학자로서 나는 이 창세기 기사는 역사라고 이해한다. 내 말은 창세기 문장들은  다른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고, 글자 그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히브리어 'Yom' (day, 날)의 뜻을, 우리가 이웃한테서 'day, 날' 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이해하는 뜻으로의 'day, 날'과 같은 뜻으로 취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yom (히브리어의 'day'라는 뜻)을 단연코 가장 빈번하게 번역되는 뜻이 'day' 라는 사실이 빈번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 단어가 압도적으로 자주 쓰이는 뜻은 하나의 'earth-day (지구의 날)' 이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나는 하나의 '2 hour day (2 시간짜리 날)'을 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지구의 날' 이라고 하는 것은 지구가 꼭 한번 자전하는 시간을 의미하려 하기 때문이다. 노아의 홍수가 지구의 자전을 뒤흔들어 놓았을 가능성이 있었을지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기에, 오늘날의 24 시간인 지구의 날이 아담의 시절에 하루의 길이와 정확하게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결코 지질연대적인 한 시대와 같은 장구한 기간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물어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제기 된다.

1. 히브리어 Yom (day)은 상징적으로 사용된 적은 없었을까? 그리고

2. Yom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내용은 알아보기 쉬웠을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Yes' 이다.


사람들이 어휘사용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쉬운 매우 중요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한 단어가 이미 글자그대로의 뜻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결코 상징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단어나 영어 단어의 '날'이라는 단어는 이미 글자그대로의 뜻이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으면 추상적인 뜻으로는 물론 상징적인 뜻으로도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성경의 저자가 창세기 2장과 민수기 7장에서 단어 Yom (day)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매우 흥미로운 방법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창세기 2:4-5, "in the day that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every plant of the field before it was in the earth.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에.....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민수기 7:10, "단에 기름을 바르던 에, 족장들은 단의 봉헌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히브리어 저자는 민수기 7장 나머지 부분을 서술하면서 족장들이 예물을 봉헌하는 데 글자그대로 열두(12) 들이 소요되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장에서는 그 열두 들을 총괄하여 'Yom'(day, 날) 이라고 부르는데 만족하면서, 그 날들 간에 개재한 공통분모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 그룹을 구성하는 각기 분리된 날, 즉 Yom(day)에 벌어진 일을 명시하면서 총괄적으로 'Yom'(day; 날) 이라고 불렀다.

이와 유사하게, 창세기 2장에서 글자그대로의 엿새 (6 days) 동안 각 날마다 창조의 사역을 하셨다는 공통분모에 근거하여 'Yom' 즉,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하신 그 날 (day)'라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의 문체 (style)는 일반적인 영어 독자들은 물론 심지어 전문 언어학자들한테까지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사역에 임하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말씀을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근래에 와서 대두하는 창조 신화들과는 사뭇 다른 문체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3569.asp

출처 - Creation 4(1):18–20, March 198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09

참고 :

Henry M. Morris
2003-11-25

창조와 십자가 (Creation and the Cross)


    전 인류역사를 통해서 두 번의 위대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세계의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세계의 구속이다. 이 두 사건은 각기 거룩한 창조 사역의 위대한 한 주간(週間)과 하루의 쉬는 날을, 그리고 구속의 한 주간과 하루의 쉬는 날을 포함하고 있다. 창조주간은 인간창조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성주간(聖週間), 또는 수난주간(아마 구속주간이 보다 적절한 이름일 것이다)은 인간구속의 사역으로 완성되었다.

창조주간에는 완벽한 세계(창세기 1:31)의 창조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뒤이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세상에 내려졌다 (창세기 3:17). 완벽한 세상을 지으신 이를 죽이고 장사하였던 수난주간은, 인간의 구속과 이 세상에 내려졌던 하나님의 저주가 궁극적으로 걷히는 일로 그 절정을 이룬다 (요한계시록 22:3). 나무 한 그루(창세기 3:6)가 인간을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만든 매개물이었는데,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베드로전서 2:24)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구원하는 매개물이었다.


창조주간과 수난주간 (The Two Weeks)

창조주간의 일곱 날들과 수난주간의 일곱 날들을 각기 대조하고 비교하여보는 일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수난주간의 사건들에 대한 연대학적 순서 매김은 학자들 사이에 크게 의견 차이가 있었던 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수많은 세부 사항들을 확실히 매김 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래에 전개될 토론은 어떤 교의(dogma)를 펼쳐 보이자는 뜻에서가 아니고, 다만 그 세부 내용들을 이해하고 조화시키는데 도움이 될만한 추가적인 영역을 제공하자는데 있다. 예컨대, 금요일이 십자가형의 집행일이었다는 전통적인 견해가 이 연구에서 제공되는 상호관계에 의하여 더욱 굳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 첫째 날 

바로 창조의 그 첫 날에 우주(universe) 자체가 창조되었다 (창세기 1:1). 우주질서(cosmos)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의 창조의 엄명(嚴命)에 응답했다. 태초에 공간-물질-시간 (즉, 하늘, 땅, 시간의 시작)의 연속체가 오직 기본적인 원소의 형태로 창조되었으나, 그 구조는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어 (창세기 1:2), 펼쳐진 물로 된 모체(母體)만이 정적(靜的) 정지 상태에 있었다 (베드로후서 3:5). 하지만 성령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우주질서(cosmos) 안에 인력작용(引力作用)과 전자기력(電磁氣力) 체계가 활성화되었다. 물과 정지상태에 있는 모체는 거대한 구형의 행성으로 유착되었다. 그리고 전자기력의 힘의 스펙트럼 중심부에 가시적(可視的) 발광체(發光體)가 불빛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1:3).

아래의 유추(analogy)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수난주간의 첫째 날에, 우주(universe)의 창조주이신 왕은 그의 구속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이 선택한 수도로 입성 하였는데 (스가랴서 9:9-10; 마태복음 21:1-9), 이것은 오래 전에 그가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우주로 등장하신 것과 같다. 그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지도자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심지어 그가 창조한 바로 그 원소(元素)들(누가복음 19:39, 40)은 그의 권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2) 둘째 날 

지구를 창조하시고 가동시키신 다음, 하나님은 거기에 경이로운 대기권과 수계(水界)를 마련하셨다. 나중에 대기권과 수계 안에는 조류와 어류가 삶을 영위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물론, 지구를 제외하고는 어떤 행성도 그토록 풍족하게 대기와 물을 갖추지 못했다. 이것이 지구가 유일하게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수계는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분리되었다. 궁창 (히브리어를 직역은 “펼쳐진 공간” 이라는 뜻이다) 위의 물은 아마도 광대한 투명성 수증기 융단을 이루고 있어서, 전 세계의 기후를 완벽하게 유지하여 인명 장수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해주고 있었던 것 같다.

태초에 생명유지에 필요한 대기와 물을 마련하신 사역과 유사하게도, 구속주간의 둘째 날에 그는 (베다니에서 그날 밤을 보낸 다음) 수도로 다시 입성하고 성전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 도시 가까이 당도하셨을 때에,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고 저주를 내리셨다(마가복음 11:12-14). 그리고 성전에서는 돈 바꾸는 자들의 상들을 둘러 엎으셨다 (마가복음 11:15-19). 그가 돈 바꾸는 자들을 내쫒았던 것이 이번이 이틀 동안에 두 번째의 일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병행 비교하여 보면 그가 예루살렘 입성 첫째 날에도 그렇게 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성전을 청소하신 일,” 이 두 행동은 창조주의 왕국에 번지고 있던 불모와 부패의 현상에 대한 숙청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그는 생명을 위한 세계 (호흡을 위한 대기와 생명의 모체를 위한 물)를 창조하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들까지도 그 세계를 척박(瘠薄)하고 불결(不潔)하게 만들어버렸다. 육신의 생명은 무엇보다 먼저 순결한 대기와 물이 있는 세계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이, 참된 영혼의 생명의 세계를 위한 조건은 영적호흡을 위한 순결한 대기와 정화된 말씀의 물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영혼의 참 열매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참 성전을 앞으로 오는 세계에 예비하는 일이다.

 

(3) 셋째 날 

그 다음 날 아침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을 보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에 대한 참 믿음은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다고 단언하셨다 (마가복음 11:20-24). 이에 견줄만하게, 창조주간의 셋째 날에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 산이 바다에서 드러나게 하셨다 (창세기 1:9-10).

그리고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사두개인들하고 맞대결한 사건들 중에서도 가장 껄끄러운 대결이 바로 이 날에 있었다. 그는 그들을 논박하는 많은 말을 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공모하였던 것이다. 이 날 벌어졌던 그들에 대한 그의 도전이 포도원을 다루는 두 가지 우화를 가지고 시작하였던 것은 적절하였다 (마태복음 21:28-32, 마태복음 21:33-43; 마가복음 12:1-11; 누가복음 20:9-18). 그 우화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저들에게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포도원의 관리 책임을 맡겼으나, 그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 무화과나무의 경우처럼 그들의 책임 하에 있는 포도원에는 하나님에게 드릴 열매가 맺히지 않았음으로, 그들은 곧 관리책임에서 물러나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이와 유사하게, 온 지구는 창조의 셋째 날에 아름다운 정원이 마련되어 거기에는 모든 생물을 키울 수 있는 자양분 있는 열매로 풍요로웠다 (창세기 1:11-12), 그리고 그 정원은 인간의 관리에 맡겨졌었다 (창세기 1:28-30; 2:15). 그러나 전체 인간이, 특히 선택된 인간이, 맡은 소임을 다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지구가 회복되어 다시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요한계시록 22:2), 지구는 정화되어야 하며, 믿음이 없는 포도원 관리자는 갈아 치워야만 한다.

수난주간의 셋째 날은 감람산에서 행하신 주님의 위대한 설교가 그 절정을 이룬다. 주님은 그 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무엇보다 먼저 예루살렘이 반드시 파괴되어야하며, 그 연후에라야 그가 권능과 영광 속에 돌아오시어 새 예루살렘에 그의 왕국을 세우겠다고 하셨다 (마태복음 24, 25; 마가복음 13; 누가복음 21). 그런 다음 그 셋째 날 다음 날 밤에 아직도 신실한 몇 명의 제자들과 더불어 그는 감람산에서 지내셨던 것은 적절하였다 (누가복음 21:37). 그것은 바로 그 산이 오래오래 전에 있었던 창조주간(週間)의 셋째 날 그가 바다에서 끌어올렸던 모든 산들을 연상시키고, 감람산 산비탈에 펼쳐진 자그만 포도원이 있는 겟세마네 정원은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창조주간의 바로 그 셋째 날에 육지 곳곳에 그가 심어놓으신 짙푸른 세계를 연상시킬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막 예루살렘에서 이루려고 차비하시는 사역(누가복음 9:31)으로 인해서 언젠가는 이 땅에 내려진 저주가 깨끗이 씻겨지고 모든 것은 다시 새로워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

 

(4) 넷째 날

창조주간의 넷째 날에, 주 예수님은 태양과 달, 그리고 모든 별들을 하늘에 지으셨다. 처음 사흘 동안에도 “빛”은 있었으나, 지금에 생긴 것은 실질적인 빛들이다! 지구와 그 푸른 초원만이 아름다움의 원천이 되고 인간에게 자양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그 빛들까지도 인간에게 기쁨과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더욱이 그 빛들은 인간에게 길을 인도해주고 시간을 보전해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별들은 인간의 사상과 애정을 그의 창조주한테로 돌려드리지 못하고, 대신에 부패된 수많은 거짓 신들과 여신들로 둔갑되어 버렸다. 더욱이, 별들은 모든 천체들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의 장엄함에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자아내지 못하고, 그 대신에 광대하고 진화하는 우주(cosmos) 안에서 지구는 보잘 것 없고 무의미한 존재라는 인간들의 믿음을 오히려 강화시키고 말았다. 어쩌면 우리 주님은 그날 밤 그 산 위에 누워 오래 전에 자신이 어둠을 쫓기 위해 만든 별빛들을 올려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쓰였을는지도 모른다.

아침이 오자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셨다. 거기엔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성전 안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누가복음 21:37 38).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에는 그의 가르침의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 결손은 제 4의 복음서(요한복음 12:20-50)에 있는 성전 안에서 행한 그의 가르침에 관한 삽입구적인 기록으로 명백하게 채워질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은 두 번에 걸쳐 스스로를 자신이 만드신 빛에 비유하셨기 때문이다. 즉,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12:46, 35). 참 빛이었던 그가 어두움이 되어야만 함은 새 세상에는 다시는 밤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 22:5).

 

(5) 다섯째 날

 구속주간의 다섯째 날에 관한 정보가 복음서들 안에는 거의 없다. 셋째 날에 서기장들과 제사장들하고 신랄한 대결을 치른 후, 그리고 아직은 “유월절이 이틀 앞에” (마가복음 14:1) 다가온 날에, 제사장들은 실질적으로 예수를 올가미에 씌워 처형할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날은 유월절 축제(마가복음 14:2)를 지켜야 하는 날이었기에 그런 일을 꾸미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은 음모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 날은 아마도 넷째 날이나, 혹은 다섯째 날이었을 것이다. 그 축제일에 유다가 저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배반하겠다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물욕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견책당한 날 밤부터 이 배신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바로 전날인 안식일 밤에 베다니에 있는 집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한복음 12:1-8). 이 사건은 마태복음 26:6-13과 마가복음 14:3-9에 감람산에서의 설교 이후에 일로 삽입된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는 바로 그 만찬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이 만찬과 유다가 자기 주님을 배반하려는 결심과의 사이에 직접적으로 생긴 우발적 관련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다 (마태복음 26:14-16; 마가복음 14:10-11).

이 유월절 날에 주 예수는 그의 두 제자를 시켜 그 날 밤에 그들만의 유월절을 예비하였다 (마가복음 14:12-17). 성전에서 행하신 그의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 그날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누가복음 21:37, 38), 기록된 바로는 이것이 그날 그가 하신 말씀 가운데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그 다섯째 날에 대한 기록에서 이 이상한 침묵은 아마도 그 유월절을 위한 예비 과정에 생긴 일들이 갖는 의미의 더 큰 중요성을 강조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한이 그날을 유월절의 예비일 (요한복음 19:14)이라고 말한 이유는, 아마도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을 보낸 날 다음 날에 제일로 삼고 있었다는 관습에 비추어 보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수 세기동안 엄청난 수의 양과 여러 동물들이 도살되고 피를 흘렸다. 그러나 이번 것은 마지막으로 봉헌되는 제물이 될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하나님의 양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갈 것이다 (요한복음 1:29). 그는 죄를 단번에 씻는 한번의 제물로 봉헌될 것이다 (히브리서 10:12). 그는십자가에서 흘린 자기 피로써 이 땅 위에 위대한 화평을 이루어 만물의 창조주에게 만물을 돌려드리고 화목하게 하셨다 (골로새서 1:16, 20).

성주간(聖週間)의 다섯째 날에 바로 그 마지막 유월절 희생양의 피를 흘려야할 일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틀림없이 자신이 최초로 동물의 생명을 창조하였던 창조주간의 다섯째 날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움직이는 모든 생물(히브리어 nephesh)을 창조하였다' (창세기 1:21). 이것은 그의 창조사역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창조행위였다. 그 때 그는 의식을 가진 동물의 생명의 실체를 창조했던 것이다. (처음 것은 물리적 원소들이 창조되었다고 창세기 1:1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살아있는 동물들한테는 그 육체의 “생명”이 그들의 피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속죄의 대가(atonement)로 지불하는 것이 그 피였다 (레위기 17:11).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생물(creature),” '영혼(soul),' 그리고 “생명(life),' 이 모든 단어들이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 nephesh 에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그날에 양의 순결한 피를 흘리는 일은 확실히 그 피의 ”생명“이 창조되었던 아득한 옛날을 환기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이신 그는 우리들의 유월절 희생제물이 되려는 참이었기 (고린도전서 5:7) 때문에 죽음 그 자체는 곧 승리와 생명 안에 삼켜질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5:54).

 

(6) 여섯째 날

여섯째 날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절정이고 목표였다 (창세기 1:26, 27). 그런데 이번의 여섯째 날에 인간의 모양대로 육화되어 오신 하나님이 보다 더 위대한 구속 사역을 끝내셨던 것이다.

엄청난 저주 아래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받아 왔었다 (로마서 8:22). 그러나 이제 창조주 그 자신이 저주를 받은바 되어 (갈라디아서 3:13, 이사야 52:14), 마침내 그 창조주도 또한 죽어야만 했던 것 같았다.

비록 그가 첫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으나, 이제는 그도 땅에서 들려야만 했다 (요한복음 3:14), 그리고 온 하늘은 침묵하였다 (마태복음 27:46). 비록 그는 둘째 날에 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요한복음 4:14)이었으나, 목말라 죽어갔다 (요한복음 19:28).

셋째 날에 그는 마른 땅을 창조하셨으나, 구원의 바위가 강타 당했기 때문에 (출애굽기 17:6), 지금은 “그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있다” (마태복음 27:51). 그는 또한 바로 그 셋째 날에 나무와 포도넝쿨로 이 땅을 덮었으나, 지금은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1)가 꺾이고 푸른 나무(누가복음 23:31)가 잘려나갔다. 그는 넷째 날에 해를 창조하셨으나, 지금은 그 해가 빛을 잃었다 (누가복음 23:44). 그리고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은 다 소진되었다. 다섯째 날에 그는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명이었다 (요한복음 11;25,; 14:6). 그러나 지금 그의 육신의 생명인 고귀한 피가 십자가 밑의 땅바닥에 쏟아지고 그는 “사망의 진토로” 끌어내려졌다 (시편 22:15). 여섯째 날에 그는 인간을 짓고 생명을 주었으나, 지금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하고 인자를 죽음에로 들어올렸다.

 

(7) 일곱째 날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사도행전 2:23) 되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창세기 2:2). 더욱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하나님의 장엄한 창조의 사역은 모든 면에서 온전하고 완벽하였다.

그리고 그의 구속사역 또한 그랬다! 이 일이 특별히 요한의 말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니시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 19:28, 30). (강조된 단어들은 모두가 희랍어로는 동일한 어원이다). 예수께서는 하셔야했던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이루어야할 성경의 선지자의 마지막 말씀을 이루셨다. 그 다음에야, 오직 그런 연후에 가서야, 구속의 사역이 완성됐으며, 화목의 대가가 온전히 치러졌음을 알고 그는 “다 이루었다” (마태복음 27:50) 라고 위대한 최후 승리의 외침을 외칠 수 있었다.

창조의 기록은 창조의 전체 사역이 그리고 만물의 창조가 이루어졌음 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1-3). 이와 같은 태도로 요한의 기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업적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이루어진 창조의 사역이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신 것과 같이, 이루어진 우리의 구속 또한 그렇다. 이와 같이 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사역은 “아주 크며 (큰 구원)” (히브리서 2:3), “영원한” 것이었다 (히브리서 5:9). 그래서 그 소망은 “좋은”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6).


끝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시고, 그리스도는 일곱째 날에는 쉬시었다. 그의 시신이 요셉의 무덤에서 잠이 드셨던 것이다. 그의 운명은 신속했었다. 그리고 장사준비도 또한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누가복음 23:54-56). 그것은 그의 시신이 안식일 전에 매장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창조의 사역을 이룬 후 안식에 들어갔었던 것과 같이 지금은 그가 다시 한번 더 안식하고 있었다.

장사한지 삼일 만에 (그 날은 새 주간의 첫 날이었다), 그는 다시 살아날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16:21 et al). 그의 시신은 안식일 온 종일과 그 전날 일부와 다음날 내내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다. 히브리어 관용구의 용도에 따르면 “삼일 낮과 삼일 밤” 동안이다 (마태복음 12:40). 그러나 죽음은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매어 놓지 못했다. 그는 죽음에서 깨어나서 이제는 영원히 살아계신다. (요한계시록 1:8).

 

*헨리 모리스 박사는 ICR의 창시자이며 명예회장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034.htm 

출처 - ICR, Impact No. 34, 1976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430

참고 :

정순량
2003-11-18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 빛과 소금의 역할


     기독교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사랑' 이라 하겠고, 그리스도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본말로는 '빛과 소금’ 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으로 빛이 어떤 성질을 갖고 있기에 우리가 주위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어떤 대상물을 본다는 것은 두 가지의 경우를 통해서이다.

 

화성의 소저너, 빛에너지로 작동

   첫 번째는 태양, 전등 혹은 불꽃처럼 빛을 방출하는 광원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더 일반적인 경우로서 태양이나 불꽃과 같은 1차 광원에서 방출되는 빛이 물체에서 반사되는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빛이 물체의 표면을 비출 때 이 빛은 진동수가 변하지 않은 상태로 재방출되거나 흡수되어 열로 바뀐다. 보통 이러한 과정은 각 물체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재방출된 빛이 처음에 입사했던 매질로 돌아가면 이 과정을 반사라 하고, 재방출된 경로가 휘어지게 되어 투명한 물질 속으로 진행한다면 이 과정을 굴절이라 한다.

   조용한 웅덩이에 돌을 던지면 물의 표면에 파동이 생겨 번져나가는 것을 본다. 빛도 파동적 특성이 있어 성냥불을 켜면 모든 방향으로 초속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퍼져나간다. 이러한 파동적 성질을 니타내는 것으로 회절, 간섭, 편광의 원리를 설명한다.

   빛은 어둠을 밝힐 뿐 어둠과 공존할 수 없다. 빛은 필연적으로 어둠을 밝게 변화시키는 특성이 있다. 빛은 에너지 덩어리 그 자체이다. 신문지 위에서 볼록렌즈의 초점을 맞추면 햇빛이 모아져 발화하는 것을 본다. 광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변환된 것이다. 지난7월 4일 화성에 도착한 미국 우주선 패스파인더의 탐사로봇인 소저너가 화성표면에서 계획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태양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는 장치 덕분이다. 이 전기 에너지에 의해서 모든 실험기기가 작동되었다.

 

첫째날 빛을 만드신 이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던 6일 중 첫째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때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1:3~4).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빛의 창조 경위다. 또한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어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면서 빛과 어두움을 대응시킨 것을 알 수 있다. 빛은 생명의 원천인 바 모든 식물은 빛에너지를 이용해서 성장하며 여러 가지 형태로 영양분을 저장한다. 이를 미루어보면 첫째날에 빛을 만드신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는 또한 하나님이 빛으로 묘사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요3:19),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요12 :46),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살전5:5),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빛으로 묘사된 데는 빛의 특성 중 광원, 즉 빛의 발원체로서 니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빛이 에너지 덩어리란 말을 했는데, 이 에너지가 생명을 유지시키는 요소임을 알게 한다. 즉 생명의 근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잠재된 에너지란 곧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사랑이시다. 빛의 특성은 어두움을 사루어 밝게 한다는 점이다. 어두움을 악이라 한다면 선이요 진리를 나타내고, 어두움을 거짓이라 하면 빛은 참이요 진실이다. 어두움을 불안과 공포라 한다면 빛은 평화요 평안이다. 어두움을 세상이라 한다면 빛은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된 성경 구절을 몇 군데 인용해 본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사59:9),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렘13:16),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암5:18),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요1:5),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 (요3:19),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요3:20),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요3:21),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4).

   마태복음 5장14~16절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어두움을 밝히는 빛처럼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5장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 빛이 그리스도인의 표본임을 잘 설명하고 있다. 빛을 생명의 원천이라 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처럼 생명의 원천이 되어서 우리를 필요로 하는 세상에서 희생하여 생명을 되살리고 구원시키는 빛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소금의 염소 성분, 독가스로 사용되기도

   소금의 화학명은 염화나트륨(NaCl) 이며 결정구조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바 각 염소 원자는 6개의 나트륨 원자로 둘러 싸여 있고, 역시 각 나트륨 원자도 6개의 염소 원자로 둘러싸여 있다(그림 참조). 이와 같은 화합물은 구성 원소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염화나트륨을 구성하고 있는 각 원소를 살펴보면, 나트륨은 반응성이 큰 금속으로서 칼로 자를 수 있을 만큼 연하며 물과 강렬하게 반응하고 공기 중에서도 쉽게 반응하여 석유 속에 보관한다. 염소는 녹황색 기체로 수돗물과 수영장을 소독할 때 쓰이며, l차세계대전중 독가스로 사용되었을 만큼 독성이 강하다.

   한편 염소 가스가 들어있는 플라스크 안에 나트륨 조각을 떨어뜨리면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흰색의 고체가 생기는데, 이 물질이 짠맛을 갖고 있는 염화나트륨 즉 소금이다. 소금은 신체 내에서 이온평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우리 식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기본적인 재료로 쓰인다. 한국요리에서는 간장이나 된장 등 장류를 사용하여 간을 하고, 서양요리에서는 소금을 사용한다. 음식의 맛은 간을 잘 맞추는 것이 으뜸이다. 또한 소금은 젓갈을 담글 때 새우나 기타 어류를 부패시키지 않고 발효시키는 데 사용한다. 어물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서도 소금으로 간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염장식품에서는 소금 결정이 녹아 부패가 방지된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그리스도인이 소금의 역할을 다할 것을 말씀하셨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한다. 소금의 조화로 맛을 내듯 대인관계에서 화평과 조화를 이루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막9:50).

   소금의 결정구조를 살펴보면 나트륨 양이온과 염소 음이온이 이온 결합으로 안정된 화합물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으로 어우러져 살면서 평안함과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또한 소금이 결정을 녹여 희생하며 부패를 막듯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희생하여 부정과 부패를 막는 소임을 다해야 한다.

   또한 구약에서는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레2:13),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삿9:45),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출30:35) 라는 말씀에서 보듯 소금이 성결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골로새서 4장 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하였는데, 헬라인들은 말의 재치를 뜻하는 데 소금을 사용했다. 즉 여기서는 신선하고 시기적절한 말로 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늘어나지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날로 부정과 부패 등으로 혼탁해가고, 도덕 불감증으로 청소년들의 장래가 걱정스럽다는 분위기다. 이런 때일수록 세상의 빛과 소금된 그리스도인의 참된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부여하신 책무라고 생각한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bible/b1/b14/b14o4.htm

출처 - 기타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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