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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설계

손기철
2004-07-26

생명 존재의 신비 '광합성' 

: 산소발생설은 비과학적이며 모순덩어리


      식물은 빛에너지를 이용한 광합성 공장을 가동시킴으로써 그 결과 산소를 발생시킨다. 식물은 광합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탄수화물을 다시 산소를 이용해 산화시켜(호흡하면서) 에너지를 만들고 골격을 형성하면서 생명을 유지한다. 이러한 호흡은 비단 식물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호흡하는 모든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이 세상에 산소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어떠한 생명체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산소는 생명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파장이 짧은 빛이나 다른 흥분된 고에너지 분자와 결합하면 무차별적인 유해산소 형태(흔히 활성산소종이라 함)로 변하여 생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물질로 변하고 만다.

특히 빛을 가장 잘 흡수하는 엽록체는 산소와 반응하기 쉬우며 따라서 조금이라도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환경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면 활성산소종은 유전물질인 DNA나 단백질 그리고 세포를 이루는 세포막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여 파괴시킨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는 산소에 의해서 살지만 이 산소 때문에 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들어서는 생물의 노화나 암에도 유해산소가 치명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이러한 산소독성을 피하기 위해 정교한 보호기제들을 가지고 있으며 식물체 또한 정교한 방어기제를 살아있는 동안에 가동시킨다. 즉 세포는 이러한 피해를 주는 활성산소종을 중화시키거나 분해하는 특수한 효소를 가지고 있으며 엽록체 내에 있는 카로티노이드나 비타민 E, 비타민 C 등과 같은 항산화제는 우선적으로 산소의 공격을 당하면 먼저 산화됨으로써 방어작용을 한다. 또한 식물체는 광합성 작용시 광호홉(C2 경로)이라는 진화론적으로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경로를 가동시킨다.

광호홉(photorespiration)이라는 것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일반적 호흡과는 달리 광합성의 명반응 동안 발생된 산소와 ATP 및 NADPH 라는 에너지가 이미 만들어진 탄수화물을 엽록체 퍼록시좀 그리고 미토콘드리아를 거치면서 다시 이산화탄소로 전화시키는 것으로 에너지 측면에서 볼 때 사치적이고 낭비적인 경로이다.

 

산소발생설은 비과학적이며 모순덩어리

유해 파장 걸러주는 오존층 없으면 치명적

일반적으로 고등식물의 대부분(C2 식물)이 광호흡을 한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과정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광호흡은 잠재적으로 유해한 활성산소종의 형성을 막거나 억제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강한 광선 하에서 온도가 높을 때 일순간 광합성 속도는 빨라지나 곧이어 식물체는 지나친 증산작용을 막기 위해서 기공을 닫게 되고 마침내 이산화탄소의 고갈을 초래한다. 따라서 탄수화물을 만들어내는 캘빈 회로(합성과정 혹은 암반응)는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다. 이 경우 식물체는 과도한 빛에너지에 의해서 명반응에서 많은 에너지를 생성하나 이산화탄소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탄소의 합성과정은 일어나지 못하게 되고 빛에너지는 계속적으로 엽록소에 차게 된다. 한편 세포 내 발생된 산소는 방출되지 못하므로 활성산소종이 발생되어 세포가 파괴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식물에는 합성반응(암반응) 중 가장 중요한 효소인 루비스코가 기묘하게 작용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즉 세포 내 이산화탄소와 산소의 비율이 온도의 영향에 의해 산소가 높아지면 루비스코라는 효소는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캘빈 회로(C3)를 작동시키지 않고 산소와 결합하여 광호홉경로(C2)를 작동시키게 한다. 이로 인하여 명반응에서 생성된 과잉에너지가 소비되고 이에 따라 지나친 산소가 소모되는 것이다.

하나의 소기관이 아니라 엽록체, 포록시좀 그리고 미토콘드리아의 여러 소기관들을 거치면서 일어나는 놀라운 자체방어를 어찌 진화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광호흡 경로가 진화의 산물이라면 이것이 진화되기 전의 식물체는 어떻게 살아났을까?

태초의 원시대기에 산소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식물이나 인간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태초의 대기에 산소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문제는 성경말씀이 거짓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흔히 과학자들이 따지는 원시대기의 산화성 혹은 환원성에 관하여 논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명의 기원에 관한 중요한 논제이다. 대부분의 전공서적에 있는 전통적 진화론자들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의 과학적 사실은 산화성 대기 중에선 중요한 생화학적 화합물의 합성이 일어나지 않으며 또한 안정하지 못하다. 생명의 탄생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환원성 물질이 원시대기의 구성분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이론들은 대부분 원시대기가 환원성이었던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이는 원시지구 자체에 관한 연구의 결과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유기물의 형성에 유리한 조건으로 선택된 데에 불과하다. 원시대기는 지구상에 있어서 화학진화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므로 보다 정확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진화론자들조차도 태초의 대기상태는 과학적 증명이 아니라 진화론적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태초의 원시대기는 환원성이며 산소가 없다고 한다. 최초의 산소는 수증기가 분해되거나 광합성 세포에 의해 발생됐다고 본다. 그러나 광합성을 하는 생물은 이산화탄소를 물과 결합시켜 에너지를 만드는 반면 호흡을 하기 위해서 똑같은 양의 산소를 흡수한다. 따라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공기의 21퍼센트를 차지하는 산소는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산소가 없던 태초의 대기에는 오존층이 없으므로 자외선 및 고에너지의 파장을 지닌 복사선이 지구 표면까지 도달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최초의 분자들이 서로 반응하여 화학진화, 단분자에서 고분자 물질로, 그것도 무질서에 질서로 변화할 수 있었을까? 최초의 물을 분해하여 산소를 발생시키는 광합성 박테리아나 식물들이 진화해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생물들은 지금의 수천 배에 달하는 위험에 직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빛이 발생된 산소와 결합하여 무서운 유해산소를 발생시키고 마침내 체내의 모든 분자들이 파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날 식물들이 과거의 생물들에서 계속적으로 진화된 것이라면 유해산소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오늘날 식물들에서 볼 수 있는 기제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해산소 억제기제들과 광호홉경로(C2)는 진화의 산물인가? 아니면 퇴화의 산물인가? 초기의 대기 상태를 오늘날과 같은 상태로 가정하지 않으면 생명체가 살아날 가망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태초부터 모든 생물이 존재하였으며, 산소를 이용한 호홉작용을 하였다는 성경적 사실이 우리의 지적 교만에 상치되는 것 외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에 위배되는 것이 무엇인가?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사40:26)


출처 - 도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79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7-26

태양 에너지와 식물 생리학 (성경에 나타난 광합성의 원리)

이웅상 


       생태계의 가장 중요한 생산자인 녹색식물들은 어디서 어떻게 영양분을 얻어 성장하고 열매를 맺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소비자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줄 수 있는 것인가. 1630년까지 생물학자들은 식물이 뿌리를 박고 있는 토양으로부터 모든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결국 식물이 성장함에 따라 토양은 점차로 소모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3년에 식물학자인 헬몬트(Van Helmont)는 식물이 자신의 유기물질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지, 토양으로부터 단순히 흡수하는 것이 아님을 실험을 통해 입증하였다. 그는 200파운드의 토양을 화분에 채운 뒤 버드나무를 심었다. 5년 후에 이 버드나무의 무게는 성장으로 인해 164파운드로 늘어났으나, 토양의 무게는 단지 2온스 밖에 줄지 않았다. 이 실험으로 헬몬트는 식물을 성장시키는 요인은 그가 준 물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날 우리는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유기물들이 다양한 물질대사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세포의 70% 이상이 물로 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식물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과학자들이 이 사실을 밝히기 전에 이미 물의 중요성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에스겔 31장4~5절에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신긴 곳을 둘러 흐르며 보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높으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빼어났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물에 의하여 식물의 키와 굵기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가지의 수와 길이도 물에 의해 자라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사야 44장14절에도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비가 식물 성장의 주 요인임을 밝힌 구절이다.

물만으로 식물의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헬몬트에 이어, 1772년 프리스트리(Joseph Priestley)는 식물이 탁한 공기를 맑게 정화시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779년에 인겐하우츠(Jan Ingenhousz)는 식물이 해가 비치는 동안만 탁한 공기를 정화시킬 수 있으며, 정화 정도는 일조량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빛이 없이는 오히려 공기를 더욱 탁하게 만들뿐이다. 이렇게 해서 생물학자들은 빛이 식물에 어떻게 이용되는지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1782년에 스위스의 목사였던 세너비어(Jean Senebier)는 광합성에 이산화탄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이어서 1796년에 인겐하우츠(Jan Ingenhousz)는 식물이 흡수한 이산화탄소는 식물의 영양분으로 이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1804년에 이르러서야 스위스의 과학자 소셔(Nicholas Heodore de Saussure)에 의해서 광합성의 전반적인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다. 소셔는 식물에 빛을 쪼여준 결과 증가된 식물의 양은 공기로부터 소모된 이산화탄소의 양보다 크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으며, 이 차이는 바로 물 때문에 생긴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광합성 원리의 대략적인 윤곽이 이산화탄소에 물과 태양에너지가 첨가되어 산소와 탄수화물이 생성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때까지 생물학자들은 광합성의 결과 생성되는 산소는 이산화탄소가 분해되면서 생겨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와 영국의 생화학자인 힐(Robin Hill)에 의해 산소는 이산화탄소가 아니라, 물이 분해되어 생성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1961년에 이르러 캘빈(Melvin Calvin)은 식물이 어떻게 태양에너지를 이용해 물과 이산화탄소를 재료로 탄수화물을 합성하는가에 대해 그 과정을 생물학적으로 확실히 밝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과학자들은 물 외에도 태양에너지가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주 요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보다 약 3400여 년 전에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아 하늘의 보물인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과 태양이 결실케 하는 보물과..." (신33:13~14) 라고 말씀하셨다. 즉 이슬과 땅 아래 저장한 물(지하수) 이외에 또 태양이 식물 성장에 필수적 요건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태양은 식물의 성장뿐만 아니라 결실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식물이 물과 햇빛으로 자란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학자들의 연구로 알게 되었지만, 어떻게 정한 시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일에 걸친 학자들의 또 다른 연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햇빛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은 1920년에 이르러 가너(W. W. Garner)와 알라드(H. A. Allard)의 연구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즉 식물은 낮과 밤의 길이가 변하는 것을 감지하여 일 년 중 정해진 때에 개화한다는 광주기(光週期)에 관한 이론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비록 성경이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과학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자연의 질서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많은 성경구절에서 우리는 과학을 수천 년 앞선 진리들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되고, 그분의 말씀 앞에 또 다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진화론은 식물의 광합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손기철 


     지금까지 아무런 비판이나 의심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던 진화론적 결과들이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창조론적 입장에서 자연계, 그 예로 지구상 생물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식물을 살펴보자.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자연을 특히 식물을 진화론적인 측면에서 생각하고 연구하고 보아왔다. 즉 모든 식물은 우연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적응과 돌연변이, 그리고 자연도태와 양육강식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근본은 실용주의적 혹은 이기주의적(egoism), 그리고 자기 보존적인 것이며, 자연을 인간중심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에 비하여 창조론적인 사고방식은 자연이 처음부터 한 설계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완벽한 피조물로서 조화, 균형, 그리고 질서 속에서 서로 상호화합하여 아름다움을 유지해 가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인 이타주의와 자기 희생적 상리상생(相利相生)으로 보는 관점이다. 

식물은 진화론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관찰하는 식물의 외관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외관적인 면에서 몇 가지만 관찰해보자.

 

꽃은 '생존' 보다 아름다움이 더 큰 존재 이유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114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 :29).

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꽃들이 존재한다. 들 위나 산야에 피는 이름 모를 꽃들에서부터 우리가 정원과 실내에서 재배하는 화초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어떠한 과학적 방법도 그 자연의 아름다운 색을 흉내내지 못한다. 또한 꽃은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과 다양한 형태를 지니며. 종류에 따라 향기와 꿀까지 지니고 있다. 

꽃은 왜 피는가? 너무나 당연한 질문일지 모르겠다. 진화론적으로 꽃은 종족번식을 위한 수단으로 암술과 수술이라는 배우체를 만들며, 수분과 수정을 통하여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따라서 꽃은 수분을 해주는 벌과 나비 등 많은 충매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각기 독특한 아름다운 색과 다양한 형태들로 진화되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수분만이 목적이라면 색깔과 형태, 그리고 향기에 있어 그렇게 다양함이 필요할까? 

꽃은 색깔과 형태에 있어 매개체와 상호 진화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같은 매개체를 이용하는 꽃들의 색과 형태의 다양함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가? 또한 매개체를 이용하지 않는 수많은 꽃들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굳이 생존만을 위한 것이라면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치장이다. 또한 단지 바람에 의해서 전파번식 되는 그러한 식물들은 왜 꽃을 가지기 위한 방향으로 진화되지 않았을까?

 

과실, 식물체의 잉여영양분 저장소 

과실을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꽃으로부터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꽃피는 식물은 열매를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부분 열매란 자방이 성숙한 것으로 그 속에 씨를 가지고 있다. 열매 중에는 아몬드와 같이 딱딱한 것도 있고, 사과나 배와 같이 신선한 과실도 있다. 과실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진화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씨는 새로운 종자이고, 나머지 우리가 먹는 부분은 자손번식을 위한 영양분을 저장한 것이라고 한다. 나무에 달린 과실은 때가 되어 땅에 떨어지면 그 영양분을 이용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단지 과실의 존재가치가 번식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수많은 과일이 각기 아름다운 색깔, 맛, 향기는 왜 생겨나며, 그리고 필요 이상의 풍성한 영양분은 왜 간직하는 것일까? 생존과 적응만이 목적이라면 각각의 독특성과 다양함을 지닐 이유가 없다. 사실 과실이란 식물체가 자기의 생명유지와 성장을 위한 필요성을 다 채운 다음, 또 다른 목적을 위한 잉여 영양분의 저장소인 것이다. 

가을날의 단풍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색의 조화를 이루는가? 황홀할 지경이다. 이러한 조화와 아름다움이 우연히 생긴다는 말인가? 흔히들 우리는 추위가 오기 전에 나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엽록소를 파괴하고, 영양분을 체내에 보관하며, 그러한 일련의 과정의 산물로서 단풍이 든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단풍의 색을 내기 위해서는 화청소(anthocyanin)라 불리는 일종의 플라보노이드 계통의 물질들이 새로 합성되어야 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러한 생합성을 하는 이유는 자기 보존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진화론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광합성은 생물권 성립의 핵심 

이제는 내면적인 면에서 생각해보자.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나가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누구나가 의심없이 태양에서 오는 빛에너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는 그 빛에너지를 그냥 이용할 수 없으며,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전환한 후에야 사용할 수 있다. 이때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꾸는 최초의 기작이 바로 녹색의 식물체가 행하는 광합성이다.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벋어가며”(욥816). 식물은 태양을 향하여 녹색을 띤 잎을 벌리고, 태양 에너지를 받고, 기공을 통하여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뿌리에서 흡수한 물을 사용해 광합성을 하며, 그 결과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원인 탄수화물을 합성하고 동시에 산소를 발생시킨다. 

광합성! 이 놀라운 생명 에너지의 비밀은 가장 작은 수은 전지보다 천만 배나 더 작은 보이지 않는 식물세포 세계의 소공장에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그리고 소음없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을 먹여 살리는 지상 최대의 공장에 주인이 없으며, 소음하나 없다니 참으로 기적 중의 기적이다. 따라서 식물의 광합성이야말로 생물권(biosphere)을 성립시키는 핵심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직물원료, 재목, 고무, 섬유, 유지, 연료 등 사람을 위한 모든 생산물은 바로 이 광합성이라는 신비스러운 과정을 통하여 생산되어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아직도 광합성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이타주의와 상리상생의 창조질서 회복해야 

20세기 말 현재 눈부신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이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 누릴수록, 지구의 생물권은 몸살을 앓게 되었으며. 마침내 오늘날에는 그 정도가 심화되어 위기의식까지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이상적인 기후변화와 더불어 대기오염이나 산성비, 이산화탄소의 증가에 의한 지구의 온난화 및 이상기후 발생, 오존층 파괴에 의한 유해 자외선 량의 증가 등으로 말미암아 생태계의 파괴가 점차 진행 중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땅을 정복하라”(창 1:27,28) 라는 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땅을 지배하라는 하나님의 신적 위임을 마치 우리 인간에게만 귀속된 속성으로 잘못 판단하여, 인간이 피조물이기를 (자연과 화합하기를), 과학의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포기함으로 마침내 인간과 환경과의 바른 관계를 상실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과학의 물밑에서 움직이는 진화론적인 사고방식 즉, 개인화, 소유화, 전문화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전체 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오늘날 환경보호론자와 범신론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인간만의 행복과 건강만을 위한 생태계의 보호 및 환경보호에 대한 기독교인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에덴동산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곳으로 모든 생물체가 협력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식물에 관한 신비를 단 몇 줄의 하나님 말씀으로 확연히 깨달을 수 있다. 창세기 1장 11-12, 29절과 2장 9절의 말씀으로부터 1)하나님은 식물체를 처음부터 각기 그 종류대로 만드셨으며, 2)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울 정도로 조화, 균형, 질서와 다양함을 갖춘 식물들을 만드셨으며, 3)식물들이 인간이나 동물들의 식물(음식물)이 되도록 만드셨으며, 나아가 4)인간 혼자가 아니라, 식물과 동물이 상호 공존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미디어위원회
2004-07-26

식물의 창조섭리

손기철 


1.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는 성도

과학의 발달로 인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인간의 생활수준을 급격히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의식주 해결이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소위 '생리적' 생활양식이, 경제적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자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보다 높아진 '사회적' 생활양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약간의 여유만 있어도 도시를 탈출할려고 노력하며, 지금 생활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삶의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의 내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이미 우리가 저질러 놓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미해결된 생활환경문제로 신음하고 있다. 대기오염, 수질오염, 쓰레기, 범죄, 녹지의 감소, 정신과 육체의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적 범죄 등으로 우리 생활주변의 '환경의 질'은 '삶의 질'을 항상 위협하고 있는 '이카루스(Icarus)'적 삶을 살고 있는 실정이다.

 

2. 식물의 창조와 이해

1) 창조의 시기

[개역](창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개역](창 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개역](창 1: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2) 음식물로 주심

[개역](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개역](창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 식물을 통한 자연의 아름다움

[개역](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개역](창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4) 삶의 환경

[개역](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개역](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5) 생명체의 에너지원(광합성)

욥 8:16,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벋어가며, 이 지구상의 모든 기식하는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기작은 바로 녹색의 잎이에 일어나는 광합성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이 광합성의 기작을 알게된 것은 채 100년도 되지 않습니다. 즉, 이산화탄소와 물이 태양광선을 받아 잎에서 우리가 먹는 탄수화물을 만들고 산소를 방출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욥기 8장에 이미 광합성의 신비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식물의 치료효과

 자연을 우리의 유익만을 위해서 마음대로 훼파하고 정복해도 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자연에 행했던 모든 일에 대한 반대급부로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 오존층 파괴, 지진과 홍수 등 환경파괴의 벌을 혹독히 받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실내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sick building syndrome'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실내에 식물을 둔다면 얼마나 많은 유익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실내볼륨의 약 5-10%정도의 식물만 두면, 겨울철에는 습도를 20-30%까지 높일 수 있으며, 여름철과 겨울철 각각 실내온도를 약 3도 정도 떨어뜨리거나 올릴 수 있다. 또한 식물체는 광합성을 할 때 공해물질을 동시에 흡수하여 어떤 공기 청정기보다 효과적이다. 더욱이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컴퓨터나 TV에서 발생되는 유해 전자파를 제거하는데 다른 어떤 기기보다도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식물이나 원예활동은 단지 육체적인 면뿐만아니라 정신적인 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이것을 통한 치료, 재활, 회복, 그리고 삶의 질을 높이는 원예치료(horticultural therapy)라는 학문이 국내외적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예를 들어 창밖으로 식물을 볼 수 있는 입원실과 그렇지 않고 단순히 건물만을 볼 수 있는 입원실에서 수술한 환자가 회복되는 것을 비교해 보면 두통, 아픔, 불평, 회복기간 등 모든 면에서 식물을 본 환자가 나은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식물을 볼 때, 뇌파의 델파파가 감소되고 알파파가 증가되어져 단순히 식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료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식물은 과거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덜 진화된 하찮은 생명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심신의 불균형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신 식물의 소중함을 알고 원예생활의 즐거움을 맛보자.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이땅에 에덴동산과 에덴마음의 회복을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4. 식물은 그리스도인에게 왜 중요한가?

1) 사람들이 산소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지내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물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거리외의 역할을 생각해 보신적이 있나요?

2)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계의 자연, 그 자연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환경관련 연구단체에서는 식물을 통한 환경회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우리 인간의 유익만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한 결과로서, 환경오염과 이상기후와 같은 여러 가지 재난을 받고 있습니다.

3) 비그리스도인은 진화론을 믿고 있지만, 진화론(원숭이들이 살던 숲속)을 믿든 창조론(에덴의 동산)을 믿든 간에 우리 인간 삶의 시작은 녹색의 동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현대인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불균형은 궁긍적으로 녹색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녹색은 치유의 색이며, 하나님이 우리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색이라는 사실입니다.

4) 천지창조 6 일중 제 3일째 육지를 만들고 식물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인간의 자유의지에 사용한 도구가 바로 생명나무라는 점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생명체는 바로 식물입니다. 이 식물을 우리가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가 하나님의 나라를 그분이 보시기에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5) 21세기를 향한 오늘 시점에서 지구의 환경보전에 가장 책임을 지며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타락시 인간뿐만아니라 피조계 전부가 타락되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인만이 올바른 환경관을 가지고 이 피조세계를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인간이 세상에 대해서 오감을 통하여 배우는 첫 대상이 바로 식물이라는 것입니다.

 

5. 결론

자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보존 즉 생존일 것이다. 왜 모든 생물체는 진화되어와야 하는가? 진화의 결과로 얻어지는 득이 무엇인가? 진화론의 핵심은 바로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화론적으로 태초의 한 하등생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왜 이 생물체는 고등한 생물체로 진화해야만 하는 것일까? 진화하지 않아도 엄연히 생존하는데 말이다. 아메바에게는 생의 목적도 사랑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더 편하게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과학의 발달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의 탐욕을 슬그머니 진화론에 끼여넣어 모든 생명체에게 확대적용하는 것은 왜일까? 오늘날 수없이 많은 생물체를 보고, 그것의 복잡함을 따져서 우리는 진화의 서열을 정한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사실은 오늘날은 진화가 잘된 생물체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등생물까지도 엄연히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우기 그것도 서로 직,간접으로 상리상생하면서 말이다. 어느 생물체가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의 관계 즉, 생존만이 중요하다면, 아메바가 가장 진화된 생물일 것이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상의 적응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진화론은 하등에서 고등으로 진화의 필연성에 대한 답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손기철
2004-07-26

식물의 신비 (1)


     식물은 진화론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많은 수수께끼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관찰되는 식물의 외관뿐 아니라 내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 지구상에 수없이 많은 꽃들이 존재한다. 그 꽃들은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과 다양한 형태를 지니며, 종류에 따라 향기와 꿀도 있다. 그러나 어떤 과학기술로도 산야에 피는 이름 모를 꽃에서부터 우리가 정원과 실내에서 재배하는 화초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흉내내지 못한다. 

꽃은 왜 피는가? 진화가설은 꽃이 종족번식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암술과 수술이라는 배우체를 만들며, 수분과 수정을 통하여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따라서 꽃은 수분을 해주는 벌과 나비 등 많은 충매들을 유인하기 위해 각각 독특한 아름다운 색과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수분만이 목적이라면 색깔, 형태 그리고 향기가 그렇게 다양할 필요가 있을까?

진화론자들은 꽃은 색깔과 형태에 있어 매개체와 상호 진화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같은 매개체를 이용하는 꽃이 색깔과 형태가 다양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환경에 적응하도록 진화되어 왔다면 같은 장소에서 자라는데, 어떤 식물은 일년생이고 어떤 식물은 다년생이 되는가? 또한 매개체를 이용하지 않는 수많은 꽃들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바람에 의해 전파번식되는 식물들은 왜 꽃을 피우는 방향으로 진화되지 않았을까? 

과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진화론자들은 꽃에서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꽃피는 식물은 열매를 가진다고 생각하며 그 속의 씨는 새로운 종자이고 나머지 우리가 먹는 부분은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영양분을 저장한 것이라고 한다. 나무에 달린 과실은 때가 되어 땅에 떨어지면 그 영양분을 이용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실의 존재가치가 단지 번식이 목적이라면 수많은 과일의 아름다운 색깔, 맛과 향기는 왜 생겨나며 필요이상의 풍성한 영양분은 왜 간직하는 것일까? 생존과 적응만이 목적이라면 각각의 독특성과 다양함을 지닐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과실이란 식물체가 생명유지와 성장을 위한 필요성을 다 채울 뿐 아니라, 또 다른 목적-동물의 영양-을 위한 잉여영양분의 저장소인 것이다. 

식물은 크게 꽃, 열매, 잎, 줄기, 뿌리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수많은 식물들은 모두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삶을 영위하고있다. 진화론자들은 식물의 다양함은 환경에 따른 적응과 변이의 결과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구마는 뿌리가 진화한 것이고, 감자는 줄기가 진화한 것이며, 완두는 잎이 진화하여 덩굴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왜 감자는 줄기가, 고구마는 뿌리가 진화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같은 환경에 사는 식물들이 잎과 줄기, 뿌리 그리고 열매가 서로 다른 것은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 우리가 흔히 알뿌리 식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식물들은 양분을 저장하는 독특한 땅속 저장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같은 환경속에서도 어떤 것은 뿌리가, 어떤 것은 잎이, 어떤 것은 줄기가 변형되어 저장기관을 형성한다. 형태 또한 다양하기 그지 없다. 우리가 먹는 마늘, 양파에서부터 백화, 수선화,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등의 조화를 생각해보라. 이런 것을 어떻게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흔히 환경에 맞게 변화되어 왔다고 한다. 차후에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우리는 적응과 진화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환경에 적응할 수는 있으나, 그 변화가 축적되어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가을의 단풍은 아름다운 색의 조화로 우리에게 황홀감을 준다. 이러한 조화와 아름다움이 우연히 생겨난 것일까? 진화론자들은 나무가 추위가 오기 전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엽록소를 파괴하고, 영양분을 체내에 보관하며, 그러한 과정의 산물로서 단풍이 든다고 한다. 그러나 단풍의 색을 내기 위해서는 당이 잎속에 축적되어야 하며, 카로틴과 크산토필, 그리고 화청소라 불리는 일종의 플라보노이드 계통의 물질이 새로 합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합성을 하는 이유를 자기보존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진화가설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나뭇잎의 떨어짐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토양의 비옥함을 위한 자기희생이며, 떨어진 나뭇잎은 토양 속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들에 의해 다시 식물체가 이용할 수 있는 무기물로 분해되고, 지력의 밑거름이 된다. 이러한 모든 상호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 처음부터 설계된대로 완벽한 조화와 질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1장 11-13절, 29-30절 그리고 2장 9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각기 그 종류대로 만드셨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울 정도로 조화, 균형, 질서와 다양함을 갖춘 식물들을 만드셨으며, 식물이 인간이나 동물의 음식물이 되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알의 종자가 죽어서 완전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일련의 과정과 들에 핀 백합화의 아름다움을 보노라면 하찮은 식물에게까지 미치는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섭리를 알 수 있다. 창조주의 섭리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경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어찌 이와 같은 조화와 균형과 질서, 그리고 한치 오차없는 통합성과 합리성이 자연계에 편재할 수 있는가? 

모든 것에 확신과 믿음으로 일관해 온 과학자들일지라도 자연만물의 증거자료를 분석종합하여볼 때 과학적 탐구로는 지혜의 존재 그 자체는 알 길이 없으나, 놀라운 지혜의 손길은 의심할 수 없으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보여 주셨던 보이지 않는 그분, 그 사실을 우리의 유추적인 논리로서도 넉넉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1:20) 이다. 

과학이란 하나님의 활동을 관찰하고 그를 통해 좀더 그분을 알고, 그분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는 활동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중 약 20%는 쌀을 주식으로 한다. 아시아의 경우 약 6천년 전부터 쌀이 경작되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모든 식물 중 쌀만큼 지속적으로 우리의 모든 노력을 경주한 것도 없을 것이다. 즉 가장 오랜 동안, 가장 인위적이고, 가장 극단적인 처리를 한 식물이라면 벼를 들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수천년 간, 증산과 품질향상을 위해 일반 재배법의 개선에서부터 방사선처리까지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왔다. 그러나 얻은 것은 무엇인가. 키가 크든 작든, 잘 생겼든 못 생겼든, 또는 생산량이나 저항성이 크든 작든 간에 결국 쌀을 얻었을 뿐이다. 

자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보존, 즉 생존이다. 그런데 왜 모든 생물체가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진화의 결과 얻어지는 이득이 무엇인가?

진화가설의 핵심 주장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화가설대로 태초의 한 하등동물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는 접어두고, 진화하지 않아도 생존하는데 이 생물체는 고등한 생물체로 진화해야 하는가?

아메바에게는 생의 목적도 사랑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소위 과학의 발달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의 탐욕을 슬그머니 진화가설에 끼워 넣어 모든 생명체에게 확대하는 것은 왜일까? 

오늘날 수없이 많은 생물체를 보고, 그것의 복잡함을 따져서 진화의 서열을 정한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점은 오늘날 진화가 잘된 생물체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등생물까지도 엄연히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도 서로 직, 간접으로 상리상생하면서 말이다.

어느 생물체가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의 관계, 즉 생존만이 중요하다면 아메바가 가장 진화된 생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단순하면서도 최상의 적응으로(가장 경제적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화가설은 필연성에 대한 해답을 전혀 주지 못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에 의해서, 몇 개의 원소가 모여 분자가 되고, 그것이 마침내 하나의 독립세포로 이루어졌다는, 순전히 물질론적인 진화가설로는, 무목적성 생명체인 아메바가 선택압에 의해서 최상의 생명체로 진화되어 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인간이 가지는 생명체 내부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삶에 대한 성스러운 명령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이나 돌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둘 다 분해해보면 똑같은 재료요, 더 따져보면 똑같은 분자나 원자로 이루어진 것 아닌가! 진화가설은 삶에 대한 성스러운 명령(인생의 목적)에 대해서는 이처럼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계속)

 


출처 - 창조지 제 101호 [1997. 1~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3

참고 : 5772|5775|5788|5823|5855|5933|5938|5956|5978|6024|6050|6053|6056|6057|6114|6200|6236|6269

David Catchpoole
2004-05-14

유연한 식물들 

(Pliable plants)


      많은 식물들은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여러 종의 열대성 박쥐들은 살아있는 큰 나뭇잎으로 텐트와 같은 피난처를 만든다. 박쥐들은 어떤 부위에서 나뭇잎을 깨물어 측면을 무너뜨려서, 자신과 새끼들을 보호하는 보금자리를 만든다.

이러한 텐트들은 살아있는 나무의 잎들로 만들어짐으로서, 그것들은 오랜 기간 지속되기 때문에, 박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잎들은 수분의 공급이 상당부분 차단되었으면서도, 어떻게 건강하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코스타리카의 박쥐를 사용하여 여러 식물 종들의 나뭇잎을 연구한 연구자들은1 나뭇잎들의 수분 공급 도관들이 박쥐의 건축학적 이상한 행동으로 손상을 받았을 때라도, 몇몇 수분 공급 요소들이 남아있는 한2, 물 공급은 잎을 유지하는데 적절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그렇게 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적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동물의 먹이로 정하신 것들은(창세기 1:29-30) 정기적으로 가지가 잘라지고, 뜯어 먹혀지고, 씹어 먹혀지고, 짓밟혀진다 해도 견딜 수 있도록 되어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식물들이 햇빛 에너지를 변환시켜 동물들의 먹이와 과일로 변환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산물로 호흡할 수 있는 공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체 설계자가 우리들에게 남겨 놓은 것이라는 것이(로마서 1:20)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모든 것들은 우연히, 그리고 경쟁력이 원동력이 되어 생겨나게 되었다는 확실치 않은 추론적인 이야기(speculative story)로 이와 같은 것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한 종이 다른 종에게 제공되는 어떠한 '봉사(service)‘도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유익이 됨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위에서의 ‘박쥐 텐트’의 경우, 연구자들은 식물의 ‘진화론적 이점’을 규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식물들도 유익한 점이 있었다고 제안한다. 그 제안은 박쥐에 의해서 눌려져 무너진 잎사귀들은 대신 바람과 강한 비에 손상을 적게 입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이 엄청나게 복잡하다는 증거들이 끝없이 증가하고 있는데도, 이러한 우리 주변의 모든 세계들을 모두 우연히 저절로 생겨나게 되었다는 절름발이적 시도들로만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면 할수록, 더 많은 정교함과 복잡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3

이것은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의 설계자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신실하신 분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시편91:1)

  

References and notes

1. Lincoln, T., Greensleaves, Nature 410(6826):318, 2001, reporting on a paper by Cholewa E., Vonhof, M.J., Bouchard, S., Peterson, C.A., Fenton, B., The pathways of water movement in leaves modified into tents by bats, Biological Journal of the Linnean Society72(2):179–191, 2001.

2. The complexity of the leaf vein system is striking, described as having ‘an apparent hierarchy of some five conducting elements.’  Ref. 1.

3. For example, recent research has overturned the traditional scientific view that plant water-conducting tubes (xylem vessels), being composed of dead cells, function merely as pipes, passively supplying water to thirsty leaves.  Instead, researchers have uncovered a (previously unsuspected) sophisticated water transport regulation system, able to change flow rates both rapidly (within seconds) and reversibly, and which frequently repairs breaks in its water column.  Zwieniecki, M.A., Melcher, P.J. and Holbrook, N.M., Hydrogel control of xylem hydraulic resistance in plants, Science 291(5506):1059–1062, 200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4/i1/plantdesign.asp

출처 - Creation 24(1):56, December 200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006

참고 :

손기철
2004-01-20

단풍과 낙엽


     이 가을에 삶의 숲속길을 걸어가며 숲속의 삶을 머릿속에서 그려본다. 단풍과 낙엽! 단풍은 우리들에게 지난 여름을 되돌아보며 마지막 화려함을 뽐내는 정열의 색이지만,낙엽의 파스텔풍색은 못내 아쉬웠던 일들의 추억들을 되새기며,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색이다. 또한,낙엽과 단풍의 색조는 혹독하고 검은 겨울을 담담히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순화(acclimatization)시켜주는 색이기도 한다.


녹색잎에서부터,오렌지색,붉은색,노란색,갈색에 이르는 단풍은 여름에서 겨울로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잎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생화학 반응의 결과로서,밤의 길이와 계절의 변화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서 잎에 있는 색소의 분해와 합성에 영향을 받는다. 봄ㆍ여름 동안에는 식물체가 좋은 환경하에서 생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기 위해서 광합성을 왕성히 하게 되는데,이때 잎에 녹색을 띠게하는 엽록소(chlorophyll)라는 색소(pigment)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녹색에 가리워 잘 나타나지 않지만 노란색을 나타내는 카로티노이드(carotenoid)와 같은 색소도 존재한다. 한편,가을이 되어 광과 기온이 떨어지면 식물체의 활력이 감소되고,결국 광합성도 점차적으로 감소된다. 이러한 결과로 녹색색소인 엽록소는 분해ㆍ소실되어지고 대신에 카로티노이드 색소들이 발현하여 노란색의 단풍이 생기게 된다.

이와 더불어 식물체는 축적된 에너지를 이용하여 플라보노이드의 일종인 안토시아닌(anthocyanine)과 탄닌(tannin)을 합성하게 되는데,이 색소가 바로 다양한 단풍색을 내는 주원료가 된다.

흔히들 단풍과 낙엽은 추위가 오기 전에 나무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체내 영양분을 만들기 위해서 엽록소를 파괴하고,그러한 일련의 과정의 산물로서 단풍이 들고,겨울이 오면 얼어죽지 않기 위해서 낙엽이 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관찰하면 식물은 아름다운 단풍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들여 카로티노이드와 화청소(anthocyanin)라 불리는 일종의 플라보노이드 계통의 물질을 합성한다. 또한 단풍잎이 낙엽으로 되지 않으면 땅은 점점 더 메말라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된다. 따라서,단풍색이 아무런 이유없이 합성되는 것과 낙엽이 단지 얼어죽지 않기 위해서 떨어진다는 식의 자기보존적이고,자기중심적인 진화론은 설득력이 없다.

창조론적으로 볼 때 낙엽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토양의 비옥함을 위한 자기희생이며,토양속에 있는 수많은 미생물들에 의해 다시 식물체가 이용할 수 있는 무기물로 분해되고 지력의 밑거름이 된다. 결국,낙엽 그 자체로는 죽음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위한 기초를 놓는 것으로,많은 식물들에게 생명(영양분)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현상인 것이다. 자연의 평범한 현상에서도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롬1:20-21). 얼었던 땅이 녹고 뿌리가 물을 흡수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와 같다 (요7:37-38). 따뜻한 봄을 지나 여름에 녹엽이 우거진다는 것은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아름다움과 풍성함 가운데 거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욥8:16). 예수님에 비유하면,녹색잎은 공생애의 사역이고,단풍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구속사의 마지막 장면과 같으며 (마21:1-11),낙엽은 십자가의 사건인 것이다. 한편,인간에 비유하면,녹색잎이 구원의 감격이라면 단풍은 성령님으로 인한 성숙의 아름다움이요,낙엽은 사역의 순종이다.

가을은 준비의 계절이다. 구원의 기쁨만으로 들떠 있을 때가 아니라, 성숙의 겸손으로 그분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한 준비와 결단의 계절이다 (롬8:17). 주님은 일꾼이 필요하며 (마9:36-38),우리의 준비를 원하신다 (마25:1-13).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와 성령님의 교통하심과 기름부으심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고후13:13). 이 가을! 성령님과 친밀함으로 단풍처럼 아름답게 준비하여,부르실 때 언제든지 낙엽처럼 순종하자.

 

*참조 : Leaves Don’t Fall; They’re Pushed (Headlines, 2008. 9. 22)
http://creationsafaris.com/crev200809.htm#20080922



출처 - 기독공보 2003.11.29.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539

참고 :

손기철
2004-01-16

하나님이 창조하신 꽃


    우리가 본다는 것은 크게 나누어 형태,질감,색채로 구분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중 형태란 결국 색채의 차이에 의해서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에,이런 의미에서 볼 때 자연은 수많은 색의 복사원(radiation source)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색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색이 미치는 심리적,정신적 작용의 영향력을 간과하고 있으나,우리 삶에 의식 혹은 무의식 측면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시각은 오감의 약 87퍼센트를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자극 수용체이다.

한편,우리는 이러한 복사에너지를 어떻게 지각하여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색채는 우리가 정확히 판단하고 언어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이기보다는 오히려 주관적,심리적이며,즉흥적인 기분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짙은 대상이다. 예를 들어,우리가 장미를 생각하면,금방 눈앞에 빨간 장미를 그려볼 수 있지만,실제로는 실외에서 보는 장미색과 실내에서의 색은 다르며,실내에서도 백열등 혹은 형광등 하에서 보는 색이 틀리며,또한 깜깜한 곳에서 보는 색이 틀리기 때문이다. 더욱이,시각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꿈속에서 빨간 장미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결국,이러한 사실은 어떤 색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색채를 나타내는 대상물질뿐만 아니라,색을 띄게 하는 근원 즉,빛과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 모두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인간은 어떤 대상을 통해서 다양한 색채를 인식해 왔을까? 당연히 자연일 것이며,녹색의 바탕 위에 그려진 수많은 다양한 모양을 가진 꽃들의 향연을 통해서 일 것이다. 산과 들에 피는 이름 모를 꽃 색들에서부터 정원과 실내에서 재배하는 화초의 색에 이르기까지,봄에 피는 꽃에서부터 가을의 단풍에 이르기까지,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꽃 색들이 존재한다. 흔히 계절적 변화를 인식하고 적응하는 것은 춥거나 더운 환경변화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지만,실제로는 자연의 색채변화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인류가 타락하기 전 자연의 수많은 꽃들을 바라보며 가장 먼저 지각된 느낌은 무엇일까? 아름다움이 아닐까 여겨진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꽃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와 직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도대체, 아름다움의 근원은 무엇인가? 미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아름다움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지각하는 인간의 본질적 능력이 형상화된 것이라고 한다. 즉,아름다움을 느낀 다는 것은 이 대상 속에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이 직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형상적으로 체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들어,과학적 발견의 극치는 바로 아름다움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거시세계에서부터 미시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에 존재하는 조화,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통일성 속의 다양성,균형,질서 등이 아름다움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꽃이야말로 미학과 과학적 지식을 종국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의 근원적 발로이며,하나님의 창조섭리인 것이다 (창 1:31).



출처 - 기독공보 2003.11.15.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527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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