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대홍수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도착하였다면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는 기록은 고대와 중세의 많은 문헌에 나타나 있다.(20) 먼저 BC 275년경 베로수스는 바빌로니아라는 역사책에서 '아르메니아에 있는 고르디엔 산맥에는 아직까지 배의 일부분이 남아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역청의 조각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부적으로 사용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배의 일부분은 아르메니아에 아직 남아있으며... 사람들은 역청을 가져다가 부적으로 사용한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이 장소를 방주가 보존된 하강한 곳으로 부르며, 오늘날까지 그 곳의 거주민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4세기경 살라미스의 주교 에피파네스는 '노아의 방주의 잔해가 쿠르드의 나라에서 지금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산기슭에서 노아가 방주를 떠날 때, 주 하나님께 정결하고 살찐 짐승을 희생 제물로 제사를 지낸 제단의 잔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초대교회 교부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노아의 방주가 있는 아르메니아의 산이 그것의 증거가 되지 않는가? 그리고 또한 노아의 방주 잔해가 요즘까지 우리에게 경고로서 거기에 남아 있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15세기말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는 아라랏산 근처를 통과하면서 '아르메니아 중앙에 아주 크고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위에는 노아의 방주가 남아 있다고 하며 그래서 이 산은 방주의 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라고 기록하였으며, 1647년 아라랏산 근처에 살았던 아담 올리어리우스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방주 잔해들은 단단하게 되어 그들은 완전히 석화된 것처럼 보인다. 우리들은 메디아 페르시아에 있는 샤마키에서 검고 단단한 나무 십자가를 보았는데, 그 곳 주민들은 그것이 방주의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확신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방주를 가장 많이 목격한 사람은 프랑스 보르도의 사업가, 페르난도 나바라 이다. 그의 첫 탐험은 1952년 8월로서, 세상에 방주가 존재하고 있다고 증거하는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빙하의 얼음 덩어리 밑에 있는 배 모양의 거대한 검은 물체는 방주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되었다. 1953년 7월에 터키 사진사, 알래딘 세커를 동반하고 두 번째 탐험을 하였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방주의 파편을 가져오거나 사진을 찍는데 실패했다. 1955년 6월에 세 번째의 탐험이 이루어졌다. 1955년에 나 바라는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함께 터키에 돌아왔다. 여행의 목적은 오직 아라랏 산에 올라 방주를 보았거나 만져보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마침 1955년은 수십년만에 빙하가 가장 많이 녹는 해로 탐험하기에는 적당하였다. 아내와 두 아들을 뒤에 두고, 이제 11살인 그의 막내아들 라파엘과 함께 나바라는 아라랏 산에 등정하였다. 마침내 이 부자는 방주 사진을 찍었던 곳에 이르렀다. 나바라 혼자서 로프 사닥다리를 타고 빙하의 갈라진 틈으로 내려가서 흙 속에 묻혀있는 방주를 찾아냈다. 거기에는 잘 잘려지고 손으로 다듬어진 나무 버팀목들이 있었다. 상당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5피트의 나무 조각을 잘라내어 들어 올렸다. 이 파편이 실제 방주의 것인지는 파편의 연대에 달려있다. 나바라는 몇몇 관계 당국에 나무 파편들을 보냈다. 이집트의 농무성은 이 시커먼 나무 파편의 연대를 약 BC 5,000년이라고 추정하였으며, 재질은 참나무라고 발표했다. 또한 나바라는 카이로 박물관의 고고학부서에도 이 나무 파편을 보냈다. 카이로 박물관에서는 약 5,000년에서 6,000년 되었다고 발표했으며, 이들은 방사성 연대측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주를 탐사하는 데에는 아직도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고 있었다. 정부의 통제, 신체적인 어려움, 악천후의 날씨, 각종 동물들의 공격, 빙하 등이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였다. 유대-로마 역사가인 조세푸스(Josephus)나 칼디안 역사가인 베로수스(Berosus)와 같은 고대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노아의 방주가 실존한다고 언급하였고, 마르코 폴로도 아르메니아의 산악지역에 노아의 방주가 있음이 보고되었다고 쓰고 있다. 서기 200 ~1700년대에 살았던 기타 십여명의 기독교인 그리고 유대교 지도자들도 노아의 방주가 자신들이 살던 그 시대까지도 실제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56년경 노아의 방주를 믿지 않는 세 명의 영국과학자들과 두 명의 아르메니아 안내자들이 방주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아라랏 산에 올랐다. 방주는 아마도 발견되었던 것 같은데, 영국과학자들이 현지 안내자들에게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몇 년이 지난 후 당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고있던 등반안내원인 아르메니아인중 한사람과 등반에 참가했던 영국인 과학자중 한 사람이 따로 따로 자기들이 등반당시 노아의 방주를 찾았었다고 보고했다.



19세기의 유명한 영국의 학자이며 여행가인 제임스 브라이스 경은 방주에 관한 대규모의 자료수집과 연구를 수행했다. 이 연구 후 그는 방주가 아라랏산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확신케 되었다. 결국 1876년 그는 아라랏 산 정상까지 올랐고, 해발 13,000 피트 (timber line에서는 2,000 피트)에서 4 피트나 되는 손으로 만든 나무도구 조각을 발견했는데, 그는 이를 방주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1883년 일련의 신문기사들은 일단의 터키 위원회회원들이 이상기후로 유난히 더웠던 그 해 늦여름에 아라랏산의 산사태 상황을 조사하던 중 얼음 덩어리 밖으로 삐쭉 튀어나온 방주를 발견케 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방주의 잔해 안으로 들어가 조사했었다고 주장했다.



유별나게 무더웠었던 1902년 여름, 조지 하고피안이라는 한 아르메니안 소년과 그의 삼촌이 아라랏 산을 등반했는데 앞서 보도되었던 얼음 덩어리 밖으로 튀어 나와있던 방주의 잔해를 찾았다. 그 소년은 방주 위로 올라갔었으며,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보았다. 1904년에 이 소년은 그 방주를 다시 한번 방문했다. 1972년 그가 죽기 직전, 그의 증언이 자세히 녹음되었다. 이 녹음 테이프는 음성분석시험을 통과했는데, 이는 그의 증언이 상당히 신뢰할 만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아라랏산 상공을 비행했던 한 러시아 조종사는 자신이 방주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발견소식은 러시아황제에까지 보고되어, 그 장소로 대규모의 조사단이 파견되었었다. 군인들은 그 배를 발견하여 조사까지 했으나, 그 결과가 황제에게 보도되기 전에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그들의 보고서는 분실되었고 그 조사대의 군인들도 흩어졌다. 그들 중 몇 명은 미국에 정착케 되었는데, 그들의 얘기를 들은 많은 그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이러한 사실을 확인했다.



1916년 다섯 명의 터키 군인들이 아라랏 산을 가로지르는 중에 방주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30일이 지나서, 자신들이 한 미국 탐험대를 그곳으로 안내할 때가 되어서야 이 얘기를 밝혔다. 그 탐험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활약상은 그들이 죽은 후까지도 추적되지 않았다. 1943년 7월, 미 육군 중사인 에드 데이비스는 이란에 근무하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루드족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노아의 방주가 지척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아라랏산에 보존되어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데이비스가 이 방주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저들은 그를 먼저 자신들의 마을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는 방주의 몇 가지 잔해들을 보았다고 주장했는데, 이 잔해들은 마른 콩, 양 지팡이, 기름 램프, 그릇 종류, 아직도 꿀을 담고있는 항아리였다. 이 모슬렘 족들은 이 방주를 외부사람들로부터 보호해야함을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로 생각했었고, 필요하면 죽이기까지도 불사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저들과 예외적으로 친했었던 관계로 데이비스는 살아 나올 수 있었다. 그 부족의 지도자였던 아바스-아바스(Abas-Abas)와 데이비스의 친구였던 그의 아들은 제 삼일째에 아라랏산의 북동쪽을 등반했다. 급하고 미끄러운 바위와 설상가상으로 내린 비로 인해 그들은 방주에 0.5 마일 이내로 접근할 수 없었다. 안개와 구름이 걷히자 그들의 좌우로 약 0.5 마일 가량씩 떨어져있는 두 개의 방주의 부서진 잔해를 볼 수 있었다. 나무기둥들, 갑판, 그리고 방들을 볼 수 있었다. 아바스-아바스는 데이비스에게 방주에 대해 상세하게 말했다. 사용된 나무는 아주 단단한 나무이며, 방주 건조에 못 대신 나무못이 사용되었고, 대형 옆문은 헛간의 바깥문같이 배의 밑 부분에서부터 위로 열리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사용하는 지역은 최상갑판의 중앙에 4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85년에서 1986년까지 데이비스는 약 80여명의 방주 연구가들과 7가지의 광범위한 면담식 질문회의를 성공적으로 통과했으며, 1989년 거짓말탐지기의 시험을 통과했다.



석유탐사 지질학자인 조지 그리인은 1953년에 헬리콥터에서 방주의 사진을 몇 장 찍어왔고, 방주의 그림을 몇 장 그려왔다. 미국으로 귀환하는 여행 중에 그리인은 자신의 사진과 그림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육상탐험을 위한 후원금을 모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그는 남아메리카를 여행 중에 죽었다. 비록 그의 사진과 그림들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3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산 절벽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녹고있는 얼음덩이로부터 돌출되어 나와있는 방주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진들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레고르 슈빙햄머는 1950년 말에 터키의 아다나에 위치했던 428 전략비행연대에 속해 있을 당시 F-100 비행기로 비행중 방주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슈빙햄머는 그 방주가 마치 아라랏산의 높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골짜기에 누워있는 거대한 상자처럼 보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라랏산 탐험자인 윌리암 크로스와 '산 위 매우 깊은 협곡에 보이는 거대한 기차화물칸이나 또는 직사각형 배' 처럼 생긴 방주를 목격한 조종사인 공군 대위 그레고르 슈빙햄머 사이에 우연치고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름아니라 크로스가 방주의 목격자 하고피안 아래에서 아라랏산을 탐험했던 엘프레드 리가 그린 방주 전경 스케치를 담고 있는 '노아 방주 탐험' 이란 제목의 소책자를 슈빙햄머에게 보냈을 때에 일어난 것이다. 전에 한번도 방주의 사진을 보지 못했던 슈빙햄머가 그가 보았던 방주를 그려달라고 그의 친한 사람중 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했다. 산 정상의 눈 속에 묻혀있는 방주와 비행기에서 보면 아주 작아 보이지만 배의 상판을 따라 있는 창문만 빼놓고, 보통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직사각형 배 모양을 하고 있는 방주의 두개의 모양은 똑같았다. 그러나 두 개의 그림사이에 일어났던 우연의 일치는 방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자료로서가 아니라, 단지 같은 물체를 보고 그렸다는 증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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