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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Ken Ham
2017-05-30

하나님은 정말로 계시나요?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Is there really a God? How would you answer?)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볼 때, 모든 것에는 시작(beginning)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태양이나 별들처럼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들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태양은 1초마다 수 백만 톤의 연료를 소모한다. 즉 태양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으며, 이는 태양에도 역시 시작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 전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기독교인들이 주장할 때, 몇몇 사람들은 마치 논리적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서 온 건가요?"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이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다. 또한 영원하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무한한(infinite) 분이시다! 또한 무한하신 지적 능력으로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1]

이것은 논리적인 것인가? 현대 과학이 이러한 개념을 허용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하면 지적 창조주(intelligent Creator)에 대한 증거를 인식할 수 있을까?


지성(intelligence) 인식하기

과학자들이 어떤 동굴에서 돌로 만들어진 연장을 발견하게 된다면, 매우 흥분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연장을 만든 지적인 존재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장들은 스스로 설계되어 만들어질 수 없다. 누구도 루시모어 산(Mt Rushmore)에 있는 대통령들의 얼굴 조각들이 수백 만년에 걸쳐 우연한 침식 작용에 의해서 새겨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에서 사람의 지성, 즉 설계(design)의 흔적을 인식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매우 유명한 윌리엄 펠리(William Paley)의 논증을 보면 '시계(watch)'는 시계를 만든 사람(watch maker, 이하 시계공)이 있음을 알게 해 준다.[2] 그러나 현재 저명한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식물과 동물 그리고 심지어는 시계나 자동차 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매우 복잡한 사람의 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지적인 하나님에 의해 설계 되었다기 보다는 비(非)지성적인 진화론적 과정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고 있다. 과연 이와 같은 생각은 옹호받을 만한 것일까?


생명체 안에 들어있는 설계

불가지론자(agnostic)인 분자 생물학자 마이클 덴톤(Michael Denton) 박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생명체의 분자 기계를 보노라면, 가장 발달 되었다는 20세기 최고의 기술 조차도 어색하고 서툴게만 보인다.... 우리가 생물학적 설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기본적 생물학 연구 분야들을 들여다 보면 설계의 흔적과 복잡성의 정도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또한 그 설계의 흔적과 복잡성이 계속 가속화될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3]

세계적으로 저명인사이고 다윈주의와 무신론의 선봉장인 리차드 도킨슨(Richard Dawkins) 교수도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생명체가 매우 놀랍고도 너무도 아름답게 우연히 '설계된(designed)'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4]

이처럼 가장 열렬한 무신론자조차도 우리의 주변 곳곳에 설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주변의 모든 설계 흔적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성경과 완전히 일치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흔적이다

그러나 도킨슨과 같은 진화론자들은 이와 같은 설계자(designer)에 대한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며 덧붙여 말했다.

"모든 현상과는 반대로, 자연계에 있는 유일한 시계공(watchmaker)은 비록 매우 특별하게 보일지 몰라도 바로 무목적(blind)적인 물리 에너지이다. 진짜 시계공은 다음과 같이 예견하였다. 그가 마음의 눈(mind's eye)에 있는 미래에 대한 목적에 맞추어 톱니바퀴와 스프링을 설계하고 그것들의 조합을 계획하였다.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은 다윈이 발견한 것처럼 무목적적이고 무의지적인 자동적 작용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존재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얼핏 보기에 목적 지향적인 형태를 띠는모든 생명체들이 실은 목적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마음(mind)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인 것이다.”[5]


선택과 설계 (Selection and design)

생명은 DNA의 유전자 안에 저장된 정보(information) 위에 세워졌다. 도킨스는 자연선택과[6] 돌연변이(DNA의 무목적적이고 눈 먼 복제 에러)가 함께 작용하면 생명체 안에 들어 있는 마치 설계된 듯한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생산해내는 메커니즘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7]

자연선택은 관측이 가능한 논리적 과정(process)이다. 그러나 선택(selection)은 이미 유전인자 안에 정보가 들어 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선택에 의해 새로운 정보(new information)가 생산되지는 않는다.[8] 실제로 이것은 성경의 기원에 관한 기사와 일치되는데, 하나님은 동물과 식물을 각각 자신의 종류(kinds)대로 번식시킬 수 있도록 하여 종류대로 완전히 다르게 창조하셨다.

누군가가 어떤 종류 안에서 일어난 큰 변화를 관측할 수도 있고, 이를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딩고(dingoes), 늑대, 그리고 코요테와 같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개 또는 늑대 종류의 유전인자 속에 있었는 정보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개량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가 생산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본래적으로 개 종류(dog kind)에 들어 있는 정보들이 재배치, 또는 분류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한 종류가 이전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정보들을 갖추고 완전히 새로운 다른 종류로 변화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자연선택이 정보의 양을 증가시키는 방식을 규명하지 않고는 진화의 메커니즘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진화론자들도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돌연변이가 어떻게든 하여 자연선택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돌연변이는 새로운 정보(new information)를 생산할 수 있을까?

분명히 말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정보와 통신 이론을 가르쳤던 이 분야에 매우 권위 있는 과학자 리 스페트너(Lee Spetner) 박사는 최근 자신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 굉장히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번 장에서 나는 진화, 특별히 돌연변이에 대한 몇 가지 예들을 들 것인데, 이것들은 절대로 정보가 증가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모든 생명과학 문헌에서 돌연변이가 정보를 증가시켰다는 것은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9]

"돌연변이에 관한 분자 수준에서의 모든 연구들을 보면, 돌연변이가 유전적 정보를 감소시켰지 증가시키지는 않았다.”[10]

"신다윈주의 이론(neo-Darwinian Theory, NDT)은 어떻게 진화에 의해 생명체의 정보가 만들어지는지 설명할 것으로 여겨졌다. 생물학적으로 사람과 박테리아의 본질적 차이는 내재되어 있는 정보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그 외의 모든 생물학적 차이점들도 이러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람의 게놈은 박테리아의 게놈 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돌연변이는 정보의 양을 감소시킬 수 있을진 몰라도 새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손해를 보는 장사로 돈을 벌 수는 없는 것이다.”[11]

스페트너 박사를 포함한 진화론을 지지하는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에게 이르게 될 결론을 피해갈 길이 없다. 돌연변이는 진화론을 보호하는 메커니즘이 될 수 없다.


문제는 더 있다!

과학자들은 세포 하나 속에 수천 개의 ‘생화학 기계(biochemical machines)'들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기계들은 모든 부품이 동시에 제자리에 자리잡고 있어야만 작동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간단한 기계라고 여겨지는 것들, 예를 들면 빛을 감지해서 전기 충격이 가해지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들도 사실은 매우 복잡한 구조를 띠고 있다.

생명은 바로 이러한 '기계들(machines)'을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단순히 자연적인 작용들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생화학자 마이클 베히(Michael Behe)는 이러한 '생화화적 기계들(biochemical machines)'을 설명하기 위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한 요소도 제거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이론을 사용하고 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복잡한 시스템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 세포 속에 존재한다. 이것은 생명이라는 현상이 지성(intelligence)에 의해 설계 되었다는 깨달음을 도출시키는데, 이는 20세기 들어 생명체가 단순한 자연 법칙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 왔던 우리들에게는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시 다른 시대들 마다 놀라운 일들은 있어 왔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실(생명이 지성에 의해 설계 되었다는)을 반드시 회피해야만 할 특별한 이유도 없다.”[12]

리차드 도킨슨도 생명에 이러한 '기계장치(machinery)'가 필요하다는 문제를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눈먼 시계공(blind watchmaker) 이론은 우리에게 매우 강력히 유전인자의 자기 복제(replication)가 누적적인 선택(cumulative selection)에 의한 것이라는 가정을 하게 한다. 그러나 만약 유전인자가 자기 복제를 하기 위해서 복잡한 기계 장치를 필요로 한다면, 복잡한 기계 장치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법이 누적적인 선택(cumulative selection)이기 때문에, 이는 우리에게 문제가 된다.”[13]

이것은 정말 문제이다! 우리가 생명 현상을 좀 더 관찰해 보면 그 복잡성은 한 층 더해지고, 생명체가 스스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을 더 이해하게 된다. 생명 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맨 처음부터 필요한 정보들의 원천(source)과 생명의 복잡한 생화학 기계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야만 한다!


아직도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맨 처음 세포에 들어 있는 기계장치가 순수하게 우연에 의해서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예를 들어 보면, 모자 안에 알파벳 카드를 집어 넣고 연속적으로 바닥에 던져보면 때때로 'BAT'와 같이 간단한 단어가 배열될 수도 있기 때문에[14], 긴 시간이 주어졌을 때 왜 좀 더 복잡한 정보들이 만들어지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BAT'라는 단어가 독일인과 중국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요점은 만약 언어를 해석하여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그 지시된 문자들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세포 속에는 어떤 지시(order)가 DNA에게 의미 있도록 만드는 그런 시스템이 있다. 그런 언어 번역 시스템이 없는 DNA는 의미가 없으며, 또한 이러한 시스템들은 DNA 없이 작동하려 하지 않는다.

또 다른 복잡성이 있는데, 그것은 DNA에 있는 '문자(letters)' 지시들을 읽어내는 번역 기계 장치가 DNA에 의해 그것 스스로 특정화(specified)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완성된 상태에서만 비로서 작동하게 되는 또 따른 '기계(machines)'를 뜻하며, 그런 기계가 없을 경우 생명 현상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을 것이다.


정보가 '정보 아닌 것'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을까?

독일 연방 물리 기술 연구소(German Federal Institute of Physics and Technology)의 베르너(Werner Gitt) 박사는 무질서로부터 우연하게 정보가 생겨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우리도 과학적으로 매우 확신하는 바이다. 정보가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정보가 지성(intelligence)의 산물임 나타낸다.

"코드 시스템(a code system)은 언제나 정신적 작용(그것은 지적인 기원 또는 발명자를 요구한다)의 결과물이다 물질(matter)같은 것은 어떠한 코드(code)도 발생시킬 수 없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모든 경험에 비추어 봤을때, 생각하는 존재는 스스로의 자유 의지, 지각 그리고 창의력을 자발적으로 훈련해야 한다.”[15]

"물질(matter)로 하여금 정보를 만들게 하는 자연 법칙, 물리 작용 또는 물질적인 현상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16]


정보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과학자들이 매일같이 밝혀 내고 있는 생명체 안의 엄청난 정보들이 어떤 초월적인 지성(intelligence)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런 정보의 근원이 단지 우리 보다 조금 더 뛰어난 정보 또는 지성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누군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단지 조금 더 뛰어난 정보 또는 지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 보다 더 상급 단계의 정보 또는 지성은 또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런 식으로 무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무한한 지성의 원천(source)만이 우리의 유한한 이해의 폭을 넘어 선다. 그러나 이 무한한 지성이 성경이 가리키는 '태초에 하나님이? 에서의 하나님일까? 성경의 하나님은 시간, 공간, 지혜 또는 그 외의 어떤 것으로도 제한받지 않는 무한하신 존재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논리적인 것일까? 즉, 어떤 물질이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고(혹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고), 그 물질이 실제 과학에서 관측되는 모든 정보 시스템들로 자체적으로 조직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무한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존재가[17] 생명이 존재하도록 정보 시스템들을 실제 과학과 합치하는 방법으로 창조한 것은 아닐까?

대답은 명확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지적인 과학자들이 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마이클 베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중요한 위치에서 널리 인정 받는 여러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초자연적인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자연계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 아주 조금 또는 아무리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물질적 세계(physical world)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규정시키는 과학에게 선험적(a priori), 철학적 의무까지 짊어지게 한다. 때때로 이것 때문에 상당히 이상한 행동이 유발되기도 한다.”[18]

요컨대, 만약 어떤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또한 하나님의 소유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야만 한다는 규칙을 세울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 들어 있다. 죄라고 불리는 이 반역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죽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 없이 심판 받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good news, 복음)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그리하여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오면 거룩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창조하였는가?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누가 하나님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위대한 구절인 '나는 존재한다(I am)'와 같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19] 그 분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사실 그 분에 의해 시간(Time)이 창조되었다.

당신은 "이것은 내가 이해할 수 없으며, 오로지 믿음으로만 받아들이라는 것 아니냐” 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성경의 히브리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히브리서 11:6)

그러나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맹목적적인 믿음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정보가 우연히 무질서에서부터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과학적인 사실을 믿어야만 하는 진화론자들이야 말로 맹목적적인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의 믿음은 눈 먼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핑계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로마서 1:20)

 


References and notes

1. Psalm 90:2; 106:48; 147:5. Notice that it is only things which have a beginning which have to have a cause. See J. Sarfati, If God created the universe, then who created God?, CEN Technical Journal12(1)20-22, 1998.
2. W. Paley, Natural Theology, 1802. Reprinted in 1972 by St Thomas Press, Houston, Texas.
3. M. Denton, Evolution: A Theory in Crisis, Adler and Adler, Maryland, p. 342, 1986.
4. R. Dawkins, The Blind Watchmaker, W.W. Norton & Co, N.Y., p. 43, 1987.
5. Ref. 4, p. 5.
6. Natural selection—the concept that some variants in a population will be less ‘fit’ to survive and/or produce offspring than others in a given environment. .
7. See C. Wieland, Stones and Bones, Creation Science Foundation Ltd, Australia, 1995, and G. Parker, Creation: Facts of Life, Master Books, Green Forest, Arkansas, 1996.
8. L. Lester and R. Bohlin, The Natural Limits to Biological Change, Probe Books, Dallas Texas, pp. 175–6, 1989.
9. L. Spetner, Not by Chance, The Judaica Press Inc, Brooklyn, New York, pp. 131–2.
10. Ref. 9, p. 138.
11. Ref. 9, p. 143.
12. M. Behe, Darwin’s Black Box, The Free Press, New York, 1996, pp. 252–253.
13. Ref. 4, pp. 139–140.
14. Actually, generating words is far simpler than sentences or paragraphs. Simple calculations show that even a billion years would not be enough time to generate even one protein ‘sentence.’
15. W. Gitt, In the Beginning was Information, CLV, Bielenfeld, Germany, pp. 64–7.
16. Ref. 15, p. 79.
17. Thus, capable of generating infinite information, and certainly the enormous, though finite, information of life.
18. Ref. 12, p. 243.
19. Exodus 3:14; Job 38:4; John 8:58, 11:25 et a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0/i3/answer.asp

출처 - Creation 20(3):32–34, June 1998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35

참고 : 3067|2520|354|2359|2698|2055|2309|2589|2533|164|2660|2040|1981|1905

Daniel Criswell
2017-05-30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What Makes Us Human?)


      인간은 정말로 피조 세계의 나머지 피조물들과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다른가? 인간을 다른 형태의 생물들과 구별 짓는 결정적인 특징이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단지 수백만 년에 걸쳐 일어난 무작위적인 과정의 결과로써 다른 동물의 체제에서 향상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명백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람과 비슷하게 닮은 침팬지나 고릴라와 같은 동물로부터 사람을 구별 짓는 어떤 특징을 정의하는 것이 세속 과학으로는 여전히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창조를 연구함으로써 그 답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성경적 진리의 조명 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고생물학자들은 인간과 원숭이(침팬지, 고릴라, 그리고 오랑우탄) 화석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인간 골격의 독특한 많은 특징들을 확인했다. 예를 들면, 원숭이와 사람은 턱에서 같은 이빨 모양을 갖는다. 즉, 두 개의 앞니, 한 개의 송곳니, 두 개의 소구치(작은 어금니), 그리고 세 개의 어금니. 그러나 이빨이 붙어있는 인간의 턱뼈(하악골)는 두개골에 비해 작으며 V자 형태인 반면, 원숭이의 것은 U자 형태이다. 또 다른 골격 특징으로, 인간의 골반은 지속적인 직립 자세의 결과로 복부 장기를 지지하도록 되어 있어 유인원의 골반보다 우묵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골격의 특성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완전히 정의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지 인간을 “담고 있는 용기”의 일부 특성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고고인류학자들은 인간 유물을 확인하고 기술하며,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을 결정하도록 돕기 위해서 문화적 증거들을 찾아왔다. 인간은 한 때 다른 모든 동물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가진 도구 사용자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연구한 결과, 침팬지와 또한 최근엔 고릴라도 도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됨으로써 천연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유일한 특성일 수는 없음을 나타냈다. 심지어 해달(sea otter)도 조개껍데기를 벌리기 위해서 돌멩이와 같은 천연적 도구를 사용한다. 불을 사용하는 것과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도 또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의 증거로 인용된다. 불을 사용하는 것과 매장의 증거가 인간에게 유일하다는 것은 명백히 주장될 수도 있으나, 이러한 활동은 인간 내의 영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불의 사용과 종교(장례)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현재, 분자유전학자들은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DNA 염기서열 차이에 근거해서 인간을 정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 DNA의 배열, 서열 및 발현 정도는 위에서 언급된 골격 특징과 행동의 차이를 포함해서 인간을 다른 피조물로부터 유일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고생물학의 연구처럼, 그것도 단지 우리에게 정말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인간이 들어 있는 “그릇(vessel)”에 대해서 말해줄 뿐일 것이다.

성경에서, 창세기 1:27절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의 창조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개 인간 안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특성에 대한 토론으로 이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신데, 사람도 비록 건물, 운송수단, 예술작품 및 온갖 종류의 기계장치와 같은 새로운 물체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사용이나 즐거움을 위해 상상력을 통해 전에 결코 본 적이 없는 물체를 창조할 수 있다. 하나님의 특성이라고 생각되는 감정도 또한 사람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사람은 이러한 감정을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용서는 인간이 창조주와 공유하는 또 다른 특질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특성은 창조의 때에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성에 대한 반영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동물과 공유하는 특성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의 속성의 결합인가? 아니면, 무엇이 더 있는가?

위에서 언급된 정보들은 분명히 우리 인간의 특성에 기여한다. 그러나 다음의 단락들은 다른 어떤 창조물의 속성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현재의 주제인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인류의 유일한 관점을 나타내는 몇 가지 사항들이다.


섬기는 자로서의 우리의 위치

사람은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 자기 자신을 섬기는 것이 목적인 인간의 야망은 분명히 아무에게도 그들이 찾는 만족을 줄 수 없다. 유명하고 부자가 된 사람 중에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야망의 만족을 얻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 개인적인 목표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그 결과가 실망스럽고 성취되지 못했을 때, 그것은 종종 개인적인 절망 혹은 심지어는 자살로 이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 왕은 인간의 유일한 의무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면서(전도서 12:13), 인간의 야망을 “헛되고, 바람을 좇는 것”으로 묘사했다. 분명히, 설계된 대로 역할을 하지 않으며 보낸 삶은 단지 좌절과 비참함으로 이르게 할 뿐이다. 섬기는 자로서의 인간의 역할은 창조의 시작에서부터 나타난다.

아담이 창조되어,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있게 되었다(창세기 2:15).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기록된 임무는 하나님이 세우신 동산을 돌봄으로써 그의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섬기는 자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2)고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여러 번 강조하셨다. 그는 계속해서 그를 따르는 자가 될 사람들을 묘사하기 위해서 종의 개념을 동의어로 사용하셨다(마태복음 24:25; 25:21; 요한복음 12:26). 그리스도는 “가장 커다란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39)고 말씀하심으로 답하셨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섬기는 자의 태도를 반영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쉬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때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요구되는 것은 그 만큼 분명하지 않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대개 적대적이었던 민족의 범죄 피해자의 필요를 자신의 비용으로 섬겼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셨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은 침팬지가 그들과 관계가 없는 다른 침팬지들의 필요에 안중이 없음을 보여주는 침팬지 행동에 대한 최근의 연구와 대조적이다. 폴 브랜드 박사와 필립 얀시의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이라는 책에서, 그들은 “문명에 대한 증거는 치유된 대퇴골이 발견되었을 때이다”라고 하면서 고고인류학자인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의 말을 전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부상당한 사람을 보살폈음이 틀림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섬기는 자였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 서로 서로를 섬기도록 창조된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가 섬기기 위해서 창조되었음을 기억하고 그렇게 하느냐, 혹은 우리가 하도록 설계된 것을 실행하지 않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가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가치 

인간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인류 역사에서 한 때, 노예 상인들은 인간의 가치를 마치 그 사람이 동물인 것처럼 똑같이 한 개인이 그의 ‘주인’을 위해 수행할 수 있는 일의 종류와 양에 기초해서 평가했었다. 오늘날, 인간의 가치는 개인의 질적인 삶에 대한 장래성과 사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원하지 않은 태아, 노인과 장애인들에 대한 대우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합법화된 낙태를 통한 대량 학살, 의사조력 자살(doctor-assisted suicide), 그리고 배아줄기세포의 사용은 인간의 가치가 사회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윤리적 악에 기초한 인간의 가치에 더하여, 우리의 문화는 윤리적, 사회적, 혹은 경제적 지위에 기초해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사회적 병폐로 가득 차 있다. 인종차별적 법집행(racial profiling)과 차별은 쉽게 인식할 수 있을지 모르나, 직업이나 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대우받는가? 폐품 수집인(trash man)이나, 심판원, 혹은 판매 점원이 박사나, 연예인, 혹은 목사와 똑같이 대해지고 있는가? (야고보서 2:2-4, 9-10)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말씀은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인간의 생명은 수정에서부터 노인 때까지 소중하고(출애굽기 21; 마태복음 19:14),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더 소중하며(마태복음 10:29; 12:12), 각 개인은 하나님께 동등하게 소중하다(골로새서 3:11). 하나님의 눈에 인간의 가치는 로마서 5:8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간은 얼마나 소중한가? 인간은 너무나 소중해서 우주의 창조주가 자신을 인간으로 낮추셨고, 그 자신을 자신의 가장 소중한 피조물과 화해하기 위해서 잔인한 죽음을 겪으셨다.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무한한 가치이다('What makes us human' is our incomprehensible value to God).


구원에 대한 우리의 필요

미국 남부, 인도네시아, 그리고 파키스탄을 침범한 최근의 자연 재해는 고통의 시기에 있는 인간을 구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salvation)는 단지 모든 물질적 소유물을 잃어버린 누군가의 물리적 신체나 물리적 필요에 대한 구제를 제공하는 일시적인 것이다. 구원에 대한 인간의 진정한 필요성은 영원한 영적 죽음으로부터이다. 물리적 필요를 대번에 알 수 있게 만드는 자연 재해에 대한 반응과 달리, 많은 이들은 계속해서 다른 종류의 재해, 즉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은 채 종종 무시되는 그들의 영적인 필요성을 내버려두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 사람이 이러한 영적인 필요성을 해결하기를 선택하거나 하지 않을 권리를 주셨다. 이러한 권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제외한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고 하셨던 때부터 인류에게 주어졌다(창세기 2:16-17).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들의 모든 후손들은 선례를 따랐다. 로마서 3:10-18절에서는 인간 종족의 절망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구약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1절), “다 치우쳐”(12절),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17절). 이러한 처참한 상황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자비 가운데 구원의 계획을 준비하셨다. 구원은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각 개인의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심으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다(에베소서 2:8-9; 요한복음 1:12). 이 선물을 소유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한복음 13:35)고 언급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다르게 표현했다.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일서 3:10). 더 나아가 바울은 갈라디아서 5:16-24절과 골로새서 3:1-11절에서 구원의 선물을 받은 자의 행동과 그렇지 않은 자의 행동을 식별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영원히 살거나 혹은 그의 임재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채 존재할 영원한 영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세상에서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은 구원이 필요하고 (로마서 5장)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선택권을 주셨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삶 속의 영적인 재앙에 대해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할 것인가, 아니면 그 선물을 거절하고 영적인 죽음의 결과를 경험할 것인가?



Reference

Silk, J. B. et al., 2005. 'Chimpanzees are indifferent to the welfare of unrelated group members,' Nature 437:1357-1359.

* Dr. Daniel Criswell has a Ph.D. in molecular biology and is a biology professor at the ICR Graduate School.



번역 - 길소희

링크 - http://www.icr.org/index.php?module=articles&action=view&ID=2597

출처 - ICR, Impact No. 391, 200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23

참고 :

이은일
2017-05-30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선교


1. 인간에 대한 상반된 개념

  성경은 인간이 위대한 존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진화론은 인간은 동물과 다를바 없으며, 삶의 목적도 생존과 번식이고,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이런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갖고 있다. 첫째는 잘못된 과학개념으로 몸에 퇴화기관이 있다는 것이다. 왜 사람은 꼬리가 없는데 꼬리뼈가 있는지? 사실은 꼬리의 퇴화기관이 아니라 등뼈 끝에 있는 매우 긴요한 뼈가 꼬리뼈인 것이다. 편도선과 맹장도 과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면역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제 알려졌다. 과거 생물학이나 의학교과서에는 퇴화기관이 350개나 있다고 하기도 했지만, 이제 퇴화기관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있다. 뇌를 해부했을 때 뇌 속에 있는 작은 뇌하수체를 당연히 퇴화기관으로 생각했었지만, 이것이 우리 몸에 필수적인 중요한 호르몬들이 분비되는 중요한 기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두 번째 잘못된 개념은 관계 개념이다. 진화론은 당연히 우열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우열은 있을 수 없다. 단지 독특한 존재일 뿐이며, 서로 간에 차이가 우열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런 잘못된 개념들 위에 두 가지 다른 주장들이 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해야한다는 우파적인 주장과 약자가 곧 정의라고 주장하는 좌파적인 주장들이 있다. 인간의 삶을 경쟁을 몰고, 우열을 결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며, 약자를 보호하는 것에서 지나 마치 약자가 정의이고 강자가 타도의 대상인 것처럼 극단화하는 좌파적인 생각들도 경계해야한다.

  세 번째로 잘못된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셨는데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는 것으로 지음 받았다는 개념이다. 인간의 죄로 인해 우리가 한계를 갖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경향이 있지만, 죄 문제를 제외하고는 우리에게 버릴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모두 거룩해질 수 있으며 축복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


2. 하나님의 설계의 증거들

  로마서 1장 20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인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만물이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설계의 증거들을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것은 모든 것의 설계를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설계자의 존재는 그 설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설계가 복잡하고 정교해서 우연히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설계는 설계자의 존재를 강력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설계에 의해 지음 받는 존재의 목적이 분명할 때, 그 설계가 제대로 된 설계라고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날기 위한 비행기의 설계가 아무리 복잡하고 정교해도 실제 하늘을 날 수 없다면 그 설계는 실패한 설계일 것이다.

  설계도 없이 만든다면 아무리 위대한 기술자라도 제대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이 우주와 물질의 모든 법칙들은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변화되면, 이 우주와 물질의 존재 자체가 없어질 수 밖에 없다. 생명이 살고 있는 지구 환경 자체가 우연히 성립될 수 없는 정교한 설계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3. 생명의 설계도, 인간의 설계도

  생명과학의 발전은 생명체 내에 바로 설계도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런 설계도의 발견은 곧 설계자가 계심을 의미한 것임에도, 사람들은 설계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설계도를 발견한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고 있다.


< 인간 게놈 프로젝트란? >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바로 인간 세포 속에 있는 DNA를 분석하여 인간의 유전정보를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2003년 4월 15일 역사적인 게놈프로젝트의 완료 선언과 함께 게놈 프로젝트 자체는 종결되었다. 실제로 100% 해독된 것은 아니고, 프로젝트 책임자인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99.99% 해독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유전자 수 및 기능에 대한 정보 및 31억개가 넘는 각 염기들의 구체적인 위치 확정 등에는 아직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과학자들은 예측하고 있다. 2000년 6월 26일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와 민간연구기업인 셀레라제노믹스 회사의 크레이그 벤터 박사와 나란히 서서 역사적인 인간 게놈 해독이 거의 완성되었음을 발표하였고, 2001년 2월 12일 거의 100% 해독이 완료되었다고  발표했었는데, 아직도 인간 게놈의 완전한 해독은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인간 유전자에 대하여 인간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생명과학의 발전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발전될수록 새롭게 알게 되는 많은 지식과 정보가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인간 유전자의 95%에 해당되는 유전자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 수가 생각보다 적은 3-4만개인 것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인간의 유전자 수는 작지만, 다른 생명체와 달리 훨씬 창조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셨고, 육체적인 생명 창조의 설계도가 바로 유전자에 담겨있다. 과학자들은 유전자의 염기만 해석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었지만, 인간 게놈프로젝트가 완료된 이 시점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은 게놈 프로젝트 완료와 같은 발표가 있을 때마다 과학 진보의 위대함을 역설하고 인간 생명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처럼 과장되게 이야기한다. 인간 유전정보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존경은커녕 인간의 위대함을 자랑하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흘러가면 그런 오만한 주장은 자취를 감추고 더 연구를 계속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무병장수의 비밀을 열수 있다고 말을 바꾸곤 한다. 

   게놈 프로젝트는 인간 복제 기술(수정란 복제 기술)과 같이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생명을 죽이는 과학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나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도리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놀라운 유전정보의 세계를 드러내어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낼 수 있는 과학기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교만한 과학자들은 자신의 부족한 지식을 가지고 위험한 행동을 한다. 전체 설계도를 모르면서 일부 유전정보를 바꾸는 실험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고, 유전정보에 의해 낙태를 자행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과학의 영역에 대하여 외면하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모두 알 수 없듯이 인간이 만든 과학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모두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과학이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고, 또한 과학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과학에 대한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지만, 과학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인간의 생명이나 존엄성을 해칠 때는 선지자적인 자세로 경고해야하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사명이다.



 세포의 핵 속에 있는 DNA는 풀어서 보면 핵 직경의 4000만 배가 넘는 엄청난 길이다. 이 DNA에 30억쌍의 염기가 있으면서 유전정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유전정보와 컴퓨터를 비교해보면 컴퓨터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컴퓨터는 2개의 부호를 8개, 16개, 32개를 짝지어 정보의 기본 단위를 구성하는데 반해, 유전정도는 4개의 부호를 이용하여 정보를 구성하며 그 정보의 구성 능력도 다양하다. 아미노산의 경우는 4개 중 3개의 부호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염기서열해독이라는 것은 정보의 기본 단위인 4개의 부호가 어떤 순서로 되어 있는 지를 조사하는 것이고, 유전자 해독은 그 뜻, 즉 유전정보를 조사하는 것이다. 2001년 발표된 결과를 보면 진화론적 개념에서 95%기 쓸모 없다는 등, 박테리아로부터 진화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인간의 지식으로는 생명의 설계도에 대하여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일 뿐이다.

  유전정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정보를 생산한 지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아직도 해독하지 못한 정교하고 복잡한 설계도를 만드신 분은 분명 인간의 지식과 능력보다 뛰어난 분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예레미야 1:5, 시편 139:16 절에도 인간 존재가 태 속에서 형성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아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질이 지음받기도 전에 그 설계도를 갖고 계시며, 독특한 창조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른 동물과는 달리 단순히 흙으로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생기를 넣으셔서 창조하셨다. 따라서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알 수 있는 유전정보가 사람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가 유전정보가 같다고 같은 사람이 아니듯 유전정보는 사람의 일부분이며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4. 독특한 당신, 특별한 당신

   유전정보가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유전정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를 얼마나 특별하고, 독특하게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일부 유전자에 대한 분석결과이지만) 99.9% 동일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지만 0.1%로 차이로 모두가 다른 각자 독특한 정보를 갖게 된다. 복잡한 유전정보를 몰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런 독특한 정보를 갖게 되는지를 야곱 가문을 보면서 생각해보자.

   야곱의 4명의 부인으로부터 다양한 아들들이 나온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레아가 낳은 6명의 아들이 모두 독특하다. 6명 계속 아들을 낳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아들과 딸을 결정하는 남성의 Y염색체를 기준할 때 자녀의 남녀 비율은 1:1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레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6명 내리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의 반의 유전정보와 어머니의 반의 유전정보가 서로 조합되는 것만 생각하면 그렇게 다양한 아들이 나올 수 없다. 그런데 유전정보에는 우성인자와 열성인자가 있다. 멘델의 유명한 유전법칙 실험에 의하면 우성인자 보라색 꽃과 열성인자인 흰 꽃이 서로 결합하면 첫 세대는 모두 우성인자인 보라색꽃만 나타난다. 그러나 속에 열성인자를 가진 보라색꽃끼리 결합시키면 3:1의 비율로 열성인자인 흰꽃이 나타나게 된다. 

  우성인자와 열성인자에 대한 유전 지식은 놀랍게도 야곱과 라반의 재산투쟁에서 나타난다. 창세기 30장 32-36절에 야곱은 자신의 일한 몫을 받기 위해 라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라반의 욕심을 잘 알고 있는 야곱은 자신에 매우 불리한 제안을 한다. 우성인자인 흰 양과 흰 염소가 아닌 열성인자인 점있고 아롱진 것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몫으로 해달라는 것이다. 라반은 야곱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야곱에게 그런 양이나 염소를 주지 않기 위해 점있고 아롱진 것들은 자신의 아들의 손에 붙이고 사흘 길을 뜨게 하여 열성인자를 가진 양이 다른 양들과 교배하지 않도록, 그래서 야곱에게 주어야할 양이나 염소가 없도록 치밀한 작전을 펼쳤다. 야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양이 새끼를 밸 때 껍질을 벗겨 흰 무늬가 있는 것을 보이게 하여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밴 것이 얼룩하거나 점 있거나 아롱진 것이 태어나도록 하였다. 그 결과 라반의 몫은 점차 작아지고 야곱의 몫이 많아져 라반의 불만은 커져갔다.

  과학 상식이 조금만 있다면 야곱이 나무 껍질을 벗겨 흰 무늬가 있게 한 것으로 그런 양과 염소가 태어난다는 것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야곱의 그런 행위를 통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나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라반으로부터 도망한 야곱이 추적해온 라반을 만났을 때 이렇게 고백한다. 꿈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양떼를 탄 수양이 겉으로는 흰양이지만 실제로는 얼룩무늬, 점과 아롱진 것이 있는 열성인자를 가지고 있는 수양이라는 것이다. 또한 열성인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이런 열성인자를 가진 양들이 많이 태어나도록 하신 것이다. 라반의 욕심 앞에서 빈털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야곱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야곱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다.

  우성과 열성인자만으로는 그렇게 다양하고 독특하게 한 부모로부터 많은 자식들이 태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정자와 난자가 형성될 때 유전자가 재조합되어 유전정보가 다양해지도록 함으로써 닮았지만, 서로 다른 다양한 자녀들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하셨다.


5. 인간 생명의 신비

  생명은 그 자체가 신비하지만, 인간 생명은 신비할 뿐 아니라 존귀하다. 인간이 되기 위해 정자와 난자가 합쳐져 수정란이 되는 순간이 바로 생명의 시작이다. 정자와 난자 그 자체는 생명이 아니다. 수정란이 형성될 확률을 정자와 난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수조분의 1의 확률이다. 또한 수정란의 15%가 자연유산 된다. 지금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

  생명은 수정란부터 시작되며, 오직 하나의 정자만이 난자와 합쳐지게 된다. 한 개의 정자가 난자로 들어가는 순간 난자 막이 변화되어 다른 정자는 들어올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한 사람의 난자는 사람의 정자만이 들어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종류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같은 종류가 아닌 정자와 난자가 합쳐지지 않는다.

  일반 세포는 분열하면 떨어져서 두 개의 세포가 되지만 수정란은 그 자체 내에서 계속 분열하여 나무 열매처럼 세포가 가득 차게 된다. 이런 세포 덩어리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하나 설계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것을 “분화”라고 부르며 아직도 과학자들이 그 신비를 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과정은 이미 하나님께서 설계하셔서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이다.

  수정란은 이렇게 분열되면서 이동하여 어머니의 자궁에 착상되어야 이제 본격적으로 아기로 자랄 수 있게 된다. 자궁 착상 후 수일 만에 형태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5주째 손의 형태가 나오기 시작해서 11주에는 완벽한 손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6주째 팔의 형태가 갖춰지고 11주때는 손과 팔이 완전히 갖춰진다. 8주째 귀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하다 4개월이 되면 완전한 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5개월만 되면 이미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다.


6.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과학의 발전으로 어머니의 태안에서 형성되고 있는 발생과정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의 수정란으로부터 시작되어 발생과정을 거쳐 예수님이 되셨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나의 세포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얼마나 겸손하신지! 히브리스 4:15 말씀처럼 우리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동일한 경험을 하신 분이셨다. 예수님이 우리와 동일하게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 그래서 스스로 인자(사람의 아들)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엄청난 사실과 아울러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큰 도전을 주는 것이다.


7. 인간복제의 문제점

  사람들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령님께서 하신 것은 믿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불완전한 인간복제 기술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복제 또는 생명복제라는 것은 핵 바꿔치기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생명은 정자와 난자가 합쳐지면서 소프트웨어인 유전정보가 하나가 되고, 발생과정으로 갈 수 있는 하드웨어인 난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난자에서 핵을 제거하고 대신 하나의 유전정보를 이미 갖고 있는 다른 세포의 핵을 넣어서 소프트웨어를 완성시키고, 하드웨어인 난자와 합침으로써 수정란과 같은 형태의 세포를 만든 것이다.

  인류 최초의 포유류 복제양인 돌리도 같은 과정으로 된 것이다. 얼굴 검은 양의 난자에서 난자의 핵을 제거하고, 흰 양의 젖샘세포의 핵을 넣고 전기 충격으로 하나가 되게 한 것이다. 수정란과 같은 이 세포를 얼굴 검은 양의 자궁에 착상시켜 태어나게 한 것이 바로 돌리라는 복제양이다.

  대단한 성공처럼 보이는 이런 복제 기술은 사실 불완전한 기술에 불과하다. 성공 확률이 매우 낮고, 성공하더라도 사산되거나, 기형동물들이 출산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난자의 핵을 제거하고, 다른 세포의 핵을 넣은 과정에서 유전정보의 손상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복제는 성공가능성이 더욱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고 있다. 인간복제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크로노이드 회사의 주장은 거짓이다. 조금만 이해타산을 따져도 인간복제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복제를 위해서는 난자를 대량 구입하고 핵치환이 성공한 복제 수정란을 착상시킬 대리모가 필요하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들 뿐 아니라 기형아가 출산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에 대하여 복제회사가 책임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적인 아기가 출생되더라도 자신의 부모가 존재하지 않고, 정상적인 가정도 존재하지 않은 상태로 성장한다는 것은 비극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복제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아기를 태어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태어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8. 인간배아 실험의 문제점

   인간복제는 성공할 가능성도 거의 없고 상업적으로 이익을 남길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을 죽이는 인간배아 실험에 대한 것은 허용하고 있다. 인간 배아복제 실험이란 수정란이 사람의 형태를 갖춘 태아가 되기 전단계인 배아단계에서 세포를 추출해서 실험을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배아는 죽고 만다. 배아에 있는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많은 난치병들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실험을 하겠다는 것이다. 

   인간배아에 있는 줄기세포를 추출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정란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정상적인 수정란인데 산부인과에서 불임부부를 치료하기 위해 만든 수정란 중에 쓰고 남은 잉여수정란을 이용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복제기술로 수정란을 만들어서 복제 수정란을 이용하는 것이다. 잉여수정란이든 복제수정란이든 발생과정을 거치면,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인간이 되지 못하도록 없애고 그 안에 있는 줄기세포를 꺼내어 실험하겠다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며, 누구도 그럴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세포 덩어리 같은 생명을 죽여서라도 다른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수의 이익을 위해 배아가 희생되어도 된다는 공리주의적 주장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파괴하는 매우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생명을 죽이지 않고도 줄기세포를 추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 배아가 아닌 사람에서도 성체줄기세포가 있기 때문이다. 배아 줄기세포보다는 어려운 점이 있지만, 그래도 생명을 죽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9. 인간 생명 파괴(낙태, 배아실험등)에 대한 회개와 중보기도 필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런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창 9:6).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동물의 경우도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다 (창 9:4). 우리나라에서 배아실험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명을 죽이는 행위에 대하여 매우 관대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미 우리나라에 그 이상의 살인행위가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배아를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다 자란 아기들도 무참히 죽이고 있다. 1년에 백만명 이상의 아기들이 낙태수술에 의해 생명을 잃고 있다. 교회에서 이 나라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책망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교회에서 조차도 낙태수술을 죄의식 없이 행하고 있으며 이런 생명을 죽이는 행위에 대하여 회개와 중보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10. 인간의 정체성 회복과 선교

   낙태를 통해 죽는 아기들,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결국 죽고 마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미래에 우리는 해같이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며 (마13:43), 아담의 타락 전에 우리는 빛나는 존재였다 (창 3:11). 그렇기 때문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고,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상실되고 나서는 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통해 보여주셨고(출 34:29), 또한 예수님이 친히 변화산상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시면서 우리의 진면목을 보여주셨다 (마 17:2).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 스스로에서 찾을 때는 허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찾게 되면 우리의 존재가 분명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고 (사 43:7),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고(요 1:12), 또한 세세토록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계22:5).

   얼굴이 모두 다르고, 유전정보가 모두 다르듯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독특한 사명을 주셨다. 예레미야는 태어나기 전부터 열방의 선지자로 부름 받았듯이,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기업으로 허락하셨다. 나만의 것이기 때문에 줄로 재어서 다른 사람의 것과는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하게 된다고 한다 (골 1:28).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우리는 3가지 영역의 삶을 갖고 있다. 첫째는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철저하게 복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섬기는 것이다. 특히 작고 연약한자들을 섬겨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구현하여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안으로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영역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명령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모습이 되길 원하시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길 간절히 바라는 사랑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시작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고, 곧 나에 대한 정체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이 시대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시키는 것이다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95

참고 :

이은일
2017-05-30

선하신 창조


1.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하나님의 창조가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성품이 피조세계에 완벽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에 그분의 신성과 능력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1:20)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 질병과 죽음과 재난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 있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 모두가 선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를 통해 계시된 말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창조, 타락, 구원, 심판 등의 기본적인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성경에서 찾지 않고 과학이나 이성에서 찾으려고 한다. 과학지식을 통해 성경말씀이 진리가 아니고 단순히 교훈적 이야기나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거짓된 주장의 정체를 파악하고, 진리의 말씀이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 자신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2. 죄와 타락, 그리고 그 결과

  로마서 1장 20-31절은 인간의 타락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타락의 시작은 분명히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거부하면 인간은 다른 것으로 그 빈 부분을 채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상숭배가 시작된다. 온갖 죄악이 등장하고 마침내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고 옳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즉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를 망치고 있는 것은 바로 죄를 범하는 인간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다. 질병과 죽음도 사실상 죄의 결과이다. 죄로 인해 세상이 망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만드신 법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대로 살면 영생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인 것이다. 마치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진 모든 사람에게 중력의 법칙이 적용되어 추락하듯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모든 사람에게 사망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3. 회복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의 능력이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주이신 예수님 전에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먼저 알려주어야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진화론이 과학적 증거가 전혀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열린 마음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이 특별히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불분명한 개념으로 복음이 불분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대한 통치권을 받은 엄청난 존재이며, 이 통치권이 아담의 타락으로 사단에게 빼앗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통해 회복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18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시다고 말씀하셨다. 복음은 바로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모든 권세가 회복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서 죽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께로 돌아온 영원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영역이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4. 현대의 거짓된 주장들

  현대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짓 주장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고, 세상은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인본주의와 진화론이 진리인 것처럼 대접받는다. 창조주 하나님은 과학적으로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인본주의자들과 진화론자들은  “과학”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유일한 과학적 사실로 가르치고 있고, 이에 따라 신학도 병들고, 교회의 기초인 창조론이 무너지면서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는 신화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모든 질서의 기초가 되는 창조주 하나님을 신화로 만든데 성공한 결과 이 세상은 질서와 법칙이 무시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고, 급기야 21세기는 아무렇게도 살아도 되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되어버렸다.


5. 회복을 위한 창조과학 사역

  과학의 이름으로 무장되어 있는 진화론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창조과학 사역을 사용하시고 있다. 창조과학은 진화론이 과학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지, 창조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다는 의미가 아니다. 창조과학은 과학을 도구로 해서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며, 과학자체가 성경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창조과학은 풍부한 설계의 증거와 홍수 심판의 증거를 통해 과학과 성경이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들과 성경이 부합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창조과학 사역은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창세기로부터 출발한 온전한 회복에 있음을 증거함으로써 복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사용되게 되었다. 이 시대에 특별히 과학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의 영향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는데, 진화론 과학을 통해 지식과 교육이 변화되었던 것처럼 과학을 통해 다시 지식과 교육, 사회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 진화론의 역사와 허구

   진화론은 19세기 다윈에 의해 제기된 이론이지만 그 시대 상황에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이론이었다. 그것은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 시대에 하나님을 배제할 수 있는 이론이었으며, 생명체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기도 했다. 맬서스의 인구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진화론은 치열한 생존경쟁이 생명체를 진화로 이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생명의 우열, 인종의 우열에 대한 개념은 제국주의 확장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진화론은 돌연변이 자연선택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동식물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세가지 단계적인 진화를 주장한다. 첫째는 무기물이 유기물이 되는 단계이고, 둘째는 유기물이 생명체가 되는 단계이고, 셋째는 생명체가 진화하여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단계는 모두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각각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 단계는 무기물이 유기물로 합성되었다는 것이다.  학생들 교과서에는 “밀러의 실험장치”를 보여주면서 무기물이 유기물로 합성된 과학적 증거가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밀러의 실험장치”는 진화론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이다. 이 실험장치는 단지 인간의 지혜와 경험에 의한 무기물 성분의 결정(산소가 있으면 합성이 일어나지 않고, 특정한 성분 조성을 해야 하므로), 이런 일이 가능하도록 인간이 고안한 실험장치(전기충격, 냉각장치 등)에서 가능한 것이다. 무기물이 유기물로 되기 위해서는 지혜, 지식, 에너지, 실험장치가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에 가까운 실험일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더욱 황당하다. 일부 아미노산이 합성되는 것을 가지고 엄청난 유기물들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이것이 오랜 시간 있다가 우연히 생명체,  세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미노산이 아무리 많아도 한 개의 단백질도 우연히 생성될 가능성이 없는데 그토록 복잡한 생명체가 우연히 생겼다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주장일 뿐이다. 

  세 번째 단계는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진화이다. 어떤 종류의 생명체가 진화되어 다른 생명체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관찰된 적도 없는 일이다. 만약 이런 진화가 실제로 있었다면 진화를 뒷받침해줄 화석이 무진장 나왔을 것이다. 처음 진화론을 만든 다윈은 화석을 증거가 무척 많을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러나 그 예언은 틀리고 말았다. 그렇게 화석을 조사했지만, 진화를 보이는 어떤 생명체도 발견된 적이 없다. 도리어 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만이 풍부할 뿐이다.  현재도 살아있는 것들이동시에 화석으로도 발견된다. 진화론자들은 이런 화석이 수억년 전의 화석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생명체들을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억년의 생명체가 왜 전혀 변화(진화)되지 않고 지금도 동일한 모양을 가지고 있을까?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살아있는 화석의 수수께끼라고 부르는 것이다. 진화를 증거할 수 있는 어떤 화석도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은 이제는 진화의 증거가 화석에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도리어 왜 진화는 일어났는데 화석의 증거가 없는지에 대한 설명에 몰두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파충류가 조류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파충류의 비닐이 변해서 깃털이 되고, 앞다리가 날개로 변하기 위해 얼마나 큰 도약이 필요할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믿는 다는 것은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학생들 교과서에는 시조새 화석을 소개하면서 파충류로부터 조류로 진화된 증거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시조새라는 것은 부리에 이빨과 같은 것이 있고, 날개에 발톱이 달린 독특한 새일 뿐이며, 이와 같은 새들은 지금도 있다. 또한 시조새 화석이 새의 화석과 같이 발견되고, 심지어는 더 오래된 지층에서 새의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새의 조상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학생들 교과서에 나오는 진화의 증거 중 헤켈의 배발생도는 이미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밀러의 실험, 시조새화석 등 중요한 증거들이 이미 진화론을 지지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진화론자들도 중간단계의 화석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음에도 진화론은 버려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진화론 이외는 세상, 우주, 생명, 인간등의 시작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창조론이나 지적설계이론은 초월적인 존재를 전재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에는 하나님이 없어야 된다는 “자연주의”를 과학자들을 지배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에 진화론이 아무리 증거가 없어도 진화론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진화에 대한 오해는 다양성을 진화라고 주장하는데 있다. 3 단계 진화론이 전혀 증거가 없는데 반해 다양성은 눈앞에 나타난 현상이다. 진화론자들은 이런 다양성을 소진화라고 부르고, 소진화가 누적되어 대진화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어떤 기독교신자들은 대진화는 말이 안 되어도 소진화는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진화도 틀린 이론이다. 왜냐하면 동물의 다양성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현상은 관찰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인해서 생명체의 다양성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런 다양성은 각 종류들 내에서 유전자의 교환, 환경에의 적응 등 복잡한 기전에 의해 이뤄진 것이며, 종류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성경은 종류대로 생명체가 창조되었고, 각 종류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되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즉 종류대로 창조된 생명체가 번성하면서 다양해진 것이다. 마치 가지가 뻗어져 가면서 거리가 서로 멀어지듯이 모양이 더욱 다양해지는 것이다. 사람도 여러 인종이 있지만, 동일한 사람이듯이 다양성은 종류대로 창조된 생명체의 풍성한 번식과 다양한 환경에 의한 결과이며,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극히 일부 기여할 수 있을 뿐이고,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이 대부분이다.  즉,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은 관찰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진화를 일으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라는 것은 유전자의 정보가 변화하는 것인데, 유전자의 정보가 변화하면 다양해지는 것이 아니라 열등한 것이 생길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진화하는 중간단계의 생물이 발견된 적도 없고, 화석도 없는 것이 과학적으로 확실하게 되었는데, 오직 사람만이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되는 중간단계 화석이 있다고 주장되고 있다. 인류의 조장이라고 주장되는 여러 화석들이 있었고, 수백만년 전의 인류 조상의 화석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주장한 과학자도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되는 화석이나 뼈들은 원숭이 뼈이거나, 지금의 사람과 구분할 수 없는 사람 뼈이다.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되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유명한 해부학자이며, 진화론자인 쥬커만 경도 멸종한 원숭이 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네안데르탈인이나 크로마뇽인, 북경인등은 사람이다. 사람이면 사람이고, 원숭이면 원숭이지 중간 단계 생명체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적도 없다. 진화론자들은 이런 중간단계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중간 단계의 생명체를 억지로 찾으려고 한다. 쟈바인과 필트타운인등이 그것이다. 

  쟈바인은 듀보아가 발견해서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한 것인데, 15m 떨어져 있는 1년 간격으로 발견한 원숭이 두개골 일부와 사람의 다리 뼈 일부가 한 개체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머리는 원숭이고 다리는 사람인 진화의 중간단계를 발견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미 같은 지층에 사람의 머리뼈가 발견되었지만, 듀보아는 그것을 숨기고, 자신의 믿음에 맞춰서 이런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필트다운인은 사기극이었다. 이것은 사람의 머리뼈에 원숭이의 턱뼈를 교묘하게 결합시킨 것이다. 50여년동안 완벽한 진화의 증거로 인정받았고, 유일한 진화의 확실한 증거였는데 연대측정 결과 불과 수십년밖에 안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폐기처분되었다. 그러나 폐기처분된 이런 거짓증거들이 진화론은 확실한 과학적 증거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7. 진화론의 열매들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일어났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의 두개골이 안면 경사각이 직각으로 진화되었고, 눈위의 튀어나온 부분이 들어가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원숭이 뼈와 사람의 뼈를 자기 마음대로 늘어놓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주장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우열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 정권은 진화론에 입각해서 우수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멸망시키는 것은 자연선택의 법칙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 600만명과 지체 장애자, 정신 장애자 200만명을 학살했다.  지금도 이런 진화론의 영향은 남아있다.

   진화론은 사람을 동물 또는 물질로 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반면에 창조론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통치를 위임했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 보다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지만, 도리어 자신이 존엄하다는 것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진화론에 의존해서 모든 것을 보니 인간은 물질이나 동물에 불과하고, 사람 중에도 진화가 차이가 있어 우수한 것이 있고, 열등한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도 인종청소, 인종학살등 잔인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다양성을 우열로 오해한 진화론은 역사 발전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역사에 많은 악한 영향을 끼쳤다. 

   교육의 효과는 놀랍다. 과학적인 증거가 없는 진화론이 일단 자리를 잡고,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되어 150년 이상 교육되더니, 이제 진화론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학뿐만 아니라, 교육, 역사, 문화, 사회, 정치, 경제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었고, 공식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8. 복음을 통한 선한 창조의 회복

  복음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복종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완성될 것이다.  전도는 미련해 보이지만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또한 성령님이 능력을 주실 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깨어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위대한 하나님이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회복인 것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90

참고 : 2864|548

미디어위원회
2017-05-30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이은일 


서론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니고, 살인사건이 급등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나라가 생명이 위협받고 있는 나라가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나라처럼 인간 생명이 경시되고 있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없기 때문이다. 6.25의 참혹한 전쟁을 겪고, 급작스러운 경제발전을 이루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간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생을 얻을 유일한 기회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 것도 이미 창세기를 통해 말씀하셨다. 이렇게 귀한 인간의 생명이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쉽게 취급되고 있다. 낙태를 통해 세상으로 나오기도 전에 살해당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무감각하게, 쉽게 이뤄지고 있으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죽이는 자살 행위가 미화되거나, 최소한 동정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 교회는 너무나 침묵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나라의 만연한 생명경시풍조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본론

1. 자살할 권리는 없습니다.

1)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

우리나라에서 2004년 한 해 동안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사람의 수는 1만1천5백2십3명이다. 하루에 30명 이상의 사람이 자살로 목숨을 잃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한 해동안 교통사고로 사망한 8천3백3십3명보다 3천1백9십 명이 더 많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편이다. 일본의 경우 2001년 10만 명당 24.1명으로, 우리나라의 2004년 10만 명당 25.2명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고, 미국의 2000년 자살률은 10만 명당 10.4명, 독일은 13.5명(2001년), 핀란드 21.0명(2002년), 네덜란드 9.4명(2000년), 러시아는 38.7명(2002년)등으로,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비교적 자살률이 높다는 일본, 핀란드보다 높고, 러시아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예외적으로 높은 것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는 러시아를 제외하고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보이고 있는 나라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가 급속하게 현대화되고, 선진국화 되면서 자신과 사회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고, 기존의 가치관의 붕괴, 특히 가족 중심의 결속력과 이웃 및 친구와의 인간관계가 약해졌으며, 상대적 빈곤감이 커지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들에 대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망한 사람과 가족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은 아름다운 풍속이지만 지금처럼 자살률이 높은 상황에서 자살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2005년 2월 자살한 유명 여배우에 대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과 사랑을 보내고 있고,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자살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또한 유명 배우의 자살이 많은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하여는 깊은 고려가 없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오죽하면 자살했을까하는 동정론이 우세하고, 자살에 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는 형편이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은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사회 분위기뿐 아니라, 생을 마감한 이후에 또 다른 생이 있을 것이라는 불교적 가치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고등학생이 성적 때문에 비관해서 자살하고, 애인의 변심 때문에 자살하고, 생활이 어렵거나 괴롭다고 자살하는 일들이 하도 많다보니 특별한 자살이 아니면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많은 영화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자살하면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다음 세상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운 세상에서 생을 마감하도 다음 기회를 잡아보자는 것이다. 전생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거나, 다음 생이 있다고 믿는 것은 죽음이후에는 심판만이 있다는 성경적 가르침과는 너무나 틀리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성경적 가르침보다는 다음에 더 나은 삶, 더 나은 만남, 더 나은 자신이 있길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불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또 다른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있지도 않은 다음의 삶은 존재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도 자살할 권리가 없다. 단지 살아야 할 의무만 있을 뿐이다. 자기 마음대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무조건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게 될 기회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삶이 바로 그런 기회가 반복되는 삶이다. 고난, 어려움, 아픔, 고통, 괴로움이 아무리 많더라도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충분하며, 그런 어려운 과정을 통과했을 때 인생은 더욱 빛나는 존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어려움은 인생의 새로운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어려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글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인생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숨쉬고, 심장이 뛰고, 식사가 소화되는 것 등은 모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되고 있다. 이것들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우리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숨을 멈추게 할 때 이 땅에서의 수명이 다하는 것이다.


2) 유일하고 독특한 나

교회는 자살을 죄악시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자살률을 보면서 교회는 그 이상의 역할, 즉 자살을 예방하는 역할까지도 감당해야 한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교회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자살로 사망한 사람에게 법적인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영원한 세계에서는 영원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 책임은 이 세상에 유일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이 위대한 계획을 포기한 것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독특하고, 위대하고, 유일한 존재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각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른 이유는 각 사람이 모두 독특하기 때문이고, 독특한 이유는 각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섭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사람마다 자신만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어떤 삶의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것을 찾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평가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평생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유일한 창조목적 이외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은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줄 뿐이다.  

병에 들었거나, 장애인으로 태어났더라도 그 사람의 삶은 위대하다. 아무도 그의 삶을 천하게 여길 수 없다. 우리가 모르는 창조주 하나님만의 위대한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누가 감히 창조주의 걸작품인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의미에서 사형제도에 대하여도 우리는 심각하게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의 생명을 중단시킬 권리가 과연 인간에게 있는 것일까? 평생 다른 사람들과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일면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지만 사형을 시킨다는 것은 죄에 대한 처벌로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권리인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한 번의 삶밖에 없는 인생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안락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인간다운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없다는 이유 등으로 편안한 죽음을 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인간의 오만을 드러내는 것뿐이다. 인간 생명에 대한 존엄성보다는 인간의 가치관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 가치로만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와 하나님을 부정하고 인간이 주인인 척하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결합된 결과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고에는 사람들 중에 더 나은 존재가 있고, 못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며,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더 나은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적 세계관이 함께 자리를 잡고 있다. 자신만의 유일한 창조목적을 발견하는 삶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도 아니고, 잘나고 못난 것도 있는 것이 아닌데, 거짓된 진화론적 세계관이 교육과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물질이나 동물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에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하여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와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들은 인간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우선 바로 서야하며, 이 일에 교회가 앞장 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2. 낙태시킬 권리는 없습니다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회

우리나라의 생명경시 풍조가 얼마나 심각한 가는 세계 1위의 낙태국이라는 명성(?)에서 잘 나타나있다. 2005년 9월 각 병원들을 직접 조사한 고려대학교 산부인과의 조사에 의하면 연간 3십5만5백9십 명의 낙태가 이뤄짐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 전에는 1년에 150만 명 이상의 아기가 낙태수술로 생명을 잃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는 30만 명보다는 훨씬 더 많은 아기가 생명을 잃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얼마나 부끄러운 수치인지... 이런 보고가 신문지상서 보도되자 법정스님은 낙태수술로 살해되는 어린 생명이 이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 때문이라고 언급하였는데,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기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신문에 보도가 되지 않았을 뿐 많은 교회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심각한 상황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바라보시면 임신 중의 아기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 이상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텐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가 이 문제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낙태를 적극 반대할 뿐 아니라, 인간배아 줄기세포실험도 생명을 죽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적극 반대하였다. 단순한 반대만이 아니라 인간배아 줄기세포 실험의 대안이 되는, 윤리적 문제가 상대적으로 없는 인간 성체줄기세포연구에 100억원을 기부하는 결단을 보였다. 반면에 개신교회측은 낙태 문제에 대하여나,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일부 목사님과 교단은 인간배아줄기세포 연구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해서 가톨릭교회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낙태문제에 대하여 개신교 교회는 좀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수천 명의 아기들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잘 성장하고 있다, 갑자기 기계에 의해 조각나거나, 빨려나가 죽고 있다. 죽어가고 있는 생명들 한명 한명은 창세 이후 그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유전정보, 독특한 창조목적을 갖고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는데 빛도 보지 못하고 죽고만 것이다. 사람들은 생태계의 다양한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여 이런 것들을 보호하기 위한 국제협약을 체결하고 있는데, 독특하고 위대한 인간이 수십만 명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일부 목사님들과 성도들에 의해 낙태반대운동이 이뤄지고 있고, 생명윤리운동도 있지만 거대한 학살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낙태의 58%가 기혼여성에 의해 이뤄지고, 42%가 미혼여성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낙태는 두 가지 종류이지만 낙태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인간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 한다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교회가 보일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낙태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은 매우 완고하고 구시대적으로 보이는 인기 없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를 들어 예외적인 허용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기독교관련 라디오 방송에서 낙태에 대한 내용이 다뤄졌을 때 시청자 한명이 전화를 했다. “어떤 이유에서도 낙태가 허용될 수 없다고 하는데, 당신 누이가 강간을 당해서 임신했는데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지금 내가 강간당해서 임신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으라는 말이냐?”고 항의하는 전화가 왔다. 방송에 출연한 생명윤리전문가들은 확고한 답변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위로를 전달하며 답변을 할 수 있을까 매우 고민이 되었다. 그때 다른 시청자가 전화를 하였다. 자신도 강간을 당해 임신을 했는데, 그 생명을 낙태시키지 않고 출산하였으며, 지금 그 아기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강간한 사람은 밉지만,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자신은 그 생명을 잘 키우고 있다는 감동적인 답변이 나왔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태도는 완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어려운 가정형편, 아기를 키울 수 없는 상황, 아기를 낳더라도 입양해야 하는 미혼모의 입장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과연 아기를 낳는 것만이 최선의 길인가? 만약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차라리 낙태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형체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우리를 알았고, 자궁 내에서 직접 만드셨으며, 하나님의 사명을 태어나기 전부터 주셨다. 어떤 사람도 환경과 부모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지시고 키우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는 세상의 죄악과 가난, 기근, 전쟁, 목마름을 보면서 이런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는 바로 우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교회가 낙태하는 생명에 대하여 중보하며, 그 생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의 역할인 것이다.

2)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음란함

죄가 확대될 때 반드시 성적인 죄가 함께 확대된다. 성적인 죄는 가정을 파괴하고, 성도의 몸을 더럽히며, 결국 사회 전체를 파멸시킨다. 낙태의 42%가 미혼여성에 의해 이뤄지고 있고, 기혼 여성들도 남편이 아닌 남성과의 성관계가 증가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은 음란한 문화에 쉽게 물들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풍조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문화가 여성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낙태 문제에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은 바로 우리나라 사회에 만연한 음란함을 회개하고 가정을 회복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적인 문란함이 마치 선진 문화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런 음란함은 고대 로마가 멸망하기 전의 문화이고, 어느 문명이든 음란한 문화가 창궐하면 그 문명의 몰락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음란한 문화는 선진 문화가 아니라 고대부터 증명되고 있는 사회의 타락을 나타내는 것뿐이다. 기혼 남녀들의 성적 문란함은 사실상 혼전부터 시작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혼전 성관계가 당연한 문화로 정착되고 있다. 혼전 성관계가 젊은이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결혼이 더 이상 존중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결혼 해봐야 많은 사람들이 이혼으로 끝을 맺는 것을 관찰한 젊은 세대는 결혼은 매우 위험스러운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를 우선 해보고 결혼은 나중에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런 문화를 수 십년 간 이미 경험한 선진국에서 내린 결론은 이혼으로 상처를 받나, 동거가 깨져서 상처를 받나 상처를 받기는 동일한 것이고, 도리어 결혼이라는 제도로 보호를 받는 것이 여성들에게 유리하고, 남녀 관계를 지속시키기에도 더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자유로운 성관계는 일시적인 쾌락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 여성들에게 인생의 큰 좌절과 상처만을 남기게 된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음 때문이거나 일시적 쾌락을 즐기겠다는 인간의 죄성 때문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교회 내에서도 이런 음란한 죄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청년들 사이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에서도 이런 죄들이 발견되고 있다. 교회 내에서 이런 죄들이 발견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교회가 회개하고 깨끗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한다.
 

결론

교회는 예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한시적으로 살고 있는 인간에게 전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임신한 순간부터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존재이며,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룰 사명을 갖고 태어난 위대한 존재이다. 교회는 이 생명을 사랑하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동역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로 죽어가는 영혼, 낙태로 살해당하는 영혼들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만연된 생명경시풍조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교회에 있기 때문이다.  

 

출처 - 월간 목회

미디어위원회
2017-05-30

성경을 죽기까지 사랑하기 

(Loving the Bible to death)

by Jonathan Sarfati


       무신론자들이 창조과학 사역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진화론자이며 무신론자였던 옥스퍼드 대학의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주장했던 것처럼, 다윈 이전의 시기에 지적인 사람으로서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하고부터, 하나님 없이 생명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제안되어졌다. 그리고 다윈의 이론을 손상시키는 것은 무신론자들의 신앙(atheist’s faith)을 손상시키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 성경 대학과 신학교 등에서도 창조론자들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러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옷을 입고 있는 자유주의자이기 때문보다는, 성경에 대한 선의의 사랑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성경이 과학에 의해서 오류로 판명되어지는 것을 막아 보려는 시도로).         


창세기를 이해하기

히브리어(Hebrew) 학자인 팅왕(Ting Wang)과의 이 주제에 관한 인터뷰에서처럼, 창세기의 히브리어는 연속적이고 정상적인 길이의 6일 창조, 한 번의 전 지구적인 대홍수(a global Flood), 아담의 범죄와 함께 들어온 죽음과 고통(death and suffering)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아버지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압도적인 시각이었다. [1]

그러나 1800년 경부터, 반 기독교도인들은 세계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오래 되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교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반응하였다.

다수의 자유주의 신학자(양의 옷을 입은 늑대)들은 이 미숙한 새로운 과학을 받아들이는 것을 너무도 기뻐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이 말하고자 의도한 것에 대하여 그들의 선조(그리고 오늘날의 자유주의자)들과 완전히 일치하였고, 성경의 명백한 기술들을 과학에 의해서 오류로 판명난 것처럼 간주하였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을 사랑했다. 그리고 성경이 완전히 정확하다고(올바르게) 믿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등장한 오래된 연대를 주장하는 과학에 의해서 협박당했고, 과학과 조화되기 위해서 성경이 언급하고 있었던 것들을 재해석하는 방법을 발명했다. 이것은 날-시대 이론(day-age notion), 간격 이론(gap theory), 골격 가설(framework hypothesis),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과 같은 생각들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성경적 지질학자(Scriptural Geologists)라고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은 성경을 변형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오래된 연대 지질학의 가정들에 도전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된 연대를 주장하는 반 기독교인들과 타협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성경적 지질학자들은 대게 무시당했다 (비록 거부하지는 않았지만).[2]


타협의 결과.

그러한 창세기 역사에 대한 타협이 성경의 신뢰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루어졌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신앙과 도덕성을 비롯한 성경 전체(whole Bible)가 공격을 받게 되었다. 비판론자들은 '만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이 과학과 조화되기 위해서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면, 왜 다른 부분들은 다르게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가?” 라며 지속적으로 주장해오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2).

만약 예수님이 최초의 사건(막 10:6-9)들과 전 지구적인 홍수(눅 17:26-27)에 대해서 틀리게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단지 4구절 뒤에서 언급하신 천국의 일에 대해서도(요 3:16) 틀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말씀이 틀릴 수 없다면, 왜 틀릴 수 없는가?

창세기 역사를 거부하기 시작한 교회와 기구들이 중대한 다른 기독교 교리들도 거부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과학에 의해서 성서적 권위를 거부하기 시작했던 많은 교회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과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사역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과학에 의거해서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처녀는 임신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읽어버린 땅을 되찾아오기

창조 과학은 다양한 방법으로 성서의 권위(biblical authority)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첫째는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조는 침례, 안식일, 교회법 등과 같은 끝없는 토론을 일으키는 영역의 것이 아니다. 이들 토론들은 성서의 권위를 이미 인정하고 있고, 단지 그 의미에 대하여 논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과학과 관련된 이슈는 성경이 더 권위가 있는지, 아니면 과학이 더 권위가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진정한 과학은 성경을 지지한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것을 입증해 오고 있다. 창조의 놀라운 디자인들은 진화론적인 설명을 거부한다. 그리고 관측되어지는 격변적인 매몰의 증거들은 점진적이고 느린 동일과정설 이론들에서는 수수께끼지만, 성서적인 대홍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조과학을 사용하시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신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이러한 소식을 널리 소개해주기 바란다.



References

1.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Master Books, Arkansas, USA, ch. 3, 2004.
2. Until recently—see Mortenson, T., The Great Turning Point, Master Books, Arkansas, USA, 2004.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creation.com/loving-the-bible-to-death

출처 - Creation 27(4):6, September 2005

미디어위원회
2017-05-30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 대 지적설계

(SETI vs. Intelligent Design)

David F. Coppedge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고 있는 일과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계획(SETI,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이 하고 있는 일의 유사성을 자주 지적해 왔다. 예를 들면, SETI는 우주로부터 암호화된 신호(coded signals)에서 지성(intelligence)의 증거를 발견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지적설계 생물학자들은 DNA 코드에서 지성의 증거를 찾아내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SETI 연구소의 책임자인 소스탁(Seth Shostak)은 Space.com에 게재하는 주간 SETI 보고서에서 그 비교에 대해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비교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지적설계 사람들은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의 머리처럼 보였던 감자를 발견했던 코미디언보다 진지한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는 심각해진다. ”SETI는 과학 사회(scientific community)에서 받아들여지지만, 지적설계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중 잣대입니까?”

첫째로, 소스탁은 SETI가 찾고 있는 신호들은 모두가 복잡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암호 또는 메시지는 요구사항이 아니다. 추천되는 신호들의 후보는 알려진 자연적 기원이 아닌 단지 어떤 "지속적인 좁은 영역의 미약한 소리(persistent narrowband whistle)"가 될 수 있다. 왜 SETI는 DNA에서 발견된 고도의 복잡성보다, 훨씬 복잡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지성을 추론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소스탁은 놀라운 말을 하고 있다.

우주로부터 오는 단순하고 좁은 신호는 DNA 코드보다 지성에 대한 더 좋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증거의 신뢰성은 그 복잡성으로 단정할 수 없다. 만약 SETI가 신호를 발견했기 때문에 외계에 지적생물체가 존재한다고 발표한다면, 그것은 인공적인 것(artificiality)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나의 지속적인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톤의) 사인파 모양(sinusoidal)의 신호는 인공적인 것이다. 그러한 톤(tone)은 자연적인 천체물리학적 과정에 의해서 생성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면, 그러한 신호는 우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다른 전파 방출과 같지 않게, 비효율적인 자연이 항상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속물들, 예를 들면 DNA의 정크(junk, 쓰레기)와 군더더기(redundancy)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1967년에 외계문명의 증거라는 생각했던 펄서(pulsar)는 정보(information)를 전달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스펙트럼으로 방출되고 있는 신호의 낭비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너무도 ‘낭비적(wasteful)’이었기 때문에 외계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호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세포(cells)와 바다사자(sea lions)를 살펴보면, 자연은 ”쓰레기(junk), 군더더기, 비효율적인 것”들을 가득 만들고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최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not optimally built)’ 때문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비교함에 있어서 두 번째 오류는, 전후 관계(context)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에 있다. 만약 SETI 연구자들이 지구와 같은 행성(일단의 항성들 대신에)에서 커다란 녹색의 사각형을 발견한다면, 마치 고고학자들이 동굴에서 암석 파편(rock chips)을 발견하였을 때 연장을 만들 수 있었던 원시인을 추론하는 것이 정당한 것처럼, 그것을 인공적인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해서, 소스탁이 말한 SETI와 지적설계 연구의 비교는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다.

 (1) SETI는 지성의 증거로서 메시지(messages)를 찾고 있지 않고, 단지 단순한 인공적인 신호(simple artificial signals)를 찾고 있다.

 (2) SETI는 ‘매우 적당한 복잡성(very modest complexity)’도 기대되지 않고 관측되지 않는 곳에서 인공적인 것을 찾고 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 ”이것은 DNA의 화학적 구조를 보면서 초월적 생화학자의 작품이라고 추론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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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스탁에 대해 너무 많이 비웃지 말고 정면으로 그의 주장을 다뤄야만 한다. 그의 주장은 정밀한 조사를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이 결정해 보라. 우선, 하나의 단순한 신호를 찾는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모든 SETI의 글들은 결국 인간과 외계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로부터 배우고 싶어 한다는 주장으로 가득 차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지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미래의 언젠가 은하계의 외계문명 사회와 연결되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아레시보 메시지(Arecibo message)로부터, 파이오니어 호에 부착된 금속판(plaque), 특히 보이저 우주선에 실려진 기록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보내는 우리의 메시지가 매우 복잡했던 이유이다. 우주선은 능력있는 외계인이 우주선을 발견했을 때, 지구인들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말해주려는 정보들을 함께 담고 있었다. "지속적인 좁은 영역의 미약한 소리"를 발견하는 것은 처음에 인공적인 신호를 탐사 추적하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보다 복잡한 것을 발견하도록 시도될 것이다. 소스탁과 이 세상은 미약한 소리가 멈춘 곳에서 그만두어야 하는 지를 충분히 확신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자, 우리가 지적생물체를 발견했다. 그래서 뭔가를 진행해 보자.”

화성에서 주장된 수로(canals)들이 어떻게 과학자들과 대중들을 광적으로 화성 외계문명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얻으려 했는지를 주목해 보라. 확실히 외계 지성에 대한 확증(confirmation)은 신호에 있어서 훨씬 더 많은 복잡성을 요구할 것이다. 그것은 SETI가 주도한 영화 '접촉(Contact)’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소스탁의 두 번째 주장에 의하면, 하나의 인공적 신호는 효율적이지만, 생명체는 낭비적이고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순환논법(circular reasoning)에 의거해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수법(red herring)이다. SETI에 관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소스탁은 진화론자이다. 그는 생명체는 진화되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진화는 설계 없이 일어나는 낭비적 과정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낭비적이고 군더더기처럼 보여지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오직 그의 가정들만을 주장한다. 이것은 오래된 무목적론(dysteleology), 또는 빈약한 설계(bad design) 논쟁이다. 그러나 그것은 설계자에게 ”만약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지혜롭다면, 왜 그러한 방식으로 일을 했습니까” 와 같이 주제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소스탁은 경이로운 생물학적 분자기계들의 극도의 효율성과 견고성에 대한 분자생물학자들의 글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들은 생물체의 이 놀라운 기계들을 모방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11/19/2005). (미술가들은 쓰레기로 표현할 수 있지만, 공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두 번째로, 그가 말한 '정크 DNA(junk DNA)'는 그것의 필수적인 기능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음에 따라 빠르게 재정립되고 있다. (10/20/2005, 09/08/2005, 07/15/2005). (아래의 글 ”정크 DNA 개념의 사망" 참조). 세 번째로, 외계인들은 그들에게 좁은 영역의 메시지 보다 광대역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네 번째로, 사람의 지성은 낭비적이지도 않고, 군더더기도 없으며, 소모적이지 않다고 가정하고 있다. 일찍이 그러한 사람, 그러한 정부를 본 적이 있는가? 따라서 그는 주제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주장하는 점들도 왔다 갔다 한다. 아무튼 그의 주장은 부적절하다. SETI는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는 복잡성에 대한 대대적인 탐사를 통해서 확실히 어떤 인공적인 흔적을 추적할 것이다. 복잡성이 지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설계측이 주장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적설계측의 주장을 잘못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자기 자신의 주장을 거꾸로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소스탁은 또한 인공성(artificiality)과 복잡성(complexity) 사이에 잘못된 구별(false distinction)을 함으로서 독자들을 오도하고 있다. 이러한 애매한 말(equivocation)은 설계 대 진화(design vs. evolution)에 관한 논점을 교묘히 피하고(begs the question) 있는 것이다. 지적설계 글들에서는, 설계 추론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단지 복잡성이 아니라, 특별한 복잡성(specified complexity)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왔다. 만약 인공적인 신호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충분한 복잡성을 가지고 발견된다면, 그것이 비록 하나의 지속적인 낮은 영역의 휘슬이었다 할지라도, 정의에 의해서 특별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구별은 사라진다. 또한 양 진영은 특별한 복잡성은 전후관계(context)에 의존한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산에서 발견된 줄지어져 있는 돌무더기 같은 작은 복잡성도 설계되었다고 충분히 추론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큰 특별한 복잡성에서 설계자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이 오히려 위법적인 주장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능자에 의해서 설계되지 않았다면, 그러면 인공적인(artificial) 것이란 무엇인가? 소스탁은 여기에서 일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인공성(artificiality)은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설계(non-design)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어떻게 인공성(즉, 설계자의 목적을 가진 행동)이 최초에 진화될 수 있었는가? 어떤 점에서 목적(purpose)과 의도(intent, 즉 자유의지)가 우연(chance)과 필요성(necessity)으로 나뉘어 지게 되었는가? 한 마리의 비버(beaver)는 지적이다. 그러나 댐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나무 가지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정보를 낳는 지적신호를 보내는 것과 동등한 것인가? 까마귀가 무리들에게 까악까악 울며 경고신호를 보낼 때 지적인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 외계 행성에 지속적으로 좁은 라디오파 영역에서 개굴개굴 소리를 내고 있는 개구리들이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SETI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세계 전쟁에서 살아남았는지를 물어볼 것인가? 분명히 다른 범주의 의사소통이 그곳에서 찾아질 것이다. SETI는 우주생물학(astrobiology)을 넘어서서 가고 있다. 그것은 화성에서 박테리아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SETI는 목적, 의도, 지성, 자유 의지 등에 대한 증거, 즉 우연히 또는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정보를 함유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존재의 증거를 원한다. 인간은 항상 이러한 일을 해왔다. 연기신호, 비행기 연막 글씨, 암벽그림, 모래사장에 글씨 쓰기, 하늘에 쏘아 올리는 불빛 등... 소스탁은 어떻게 지적설계를 거부하는 바로 그 척도(criterion)를 가지고, 인공성에 기초하여 설계 추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고 최소한 특별한 복잡성에 대한 몇몇 종류의 척도를 제안함 없이, 어떻게 그가 리차드 닉슨의 머리처럼 보였던 감자를 발견했던 코미디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멋진 시도이다, 소스탁 박사. 얼마간 이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 보고, 다시 시도해 보라. 그리고 당신이 그곳에 있는 동안, 만일 자연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면, 지적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당신 자신의 능력이 어떻게 진화될 수 있었는지, 또 그것이 우연과 자연법칙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었는지 우리에게 말해 달라.

 

*참조 : Imagination as Science (CEH, 2008. 4. 17)

https://crev.info/2008/04/imagination_as_science/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5/12/seti_vs_intelligent_design/

출처 - CEH, 2005.12. 2

미디어위원회
2017-05-30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는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Does God have body parts?)

Russell Grigg 


       최근에 나는 성경협회의 번역자 한 사람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개념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즉시 내게 반문했다. “의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의인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들은 문자적 창세기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과 사람의 특성(God and human characteristics)

의인화(anthropomorphism = <그리스어 anthropos = 사람> + <morphe = 형상>)란 하나님을 인간의 특성과 형상 혹은 인격을 가진 분으로 묘사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의 속성, 능력, 및 활동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온다 ;

• "하나님이 가라사대 (God speaking)" (창1:3) : 이것은 하나님이 성대를 가지셨다는 것을 의미할까?
• "하나님의 보시기에 (God seeing)" (창1:4) : 하나님이 눈동자와 망막이 있는 눈을 가지셨는가?
•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God walking)" (창3:8) : 하나님이 다리를 가지셨는가?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God making clothes for Adam and Eve)" (창3:21) : 하나님이 손을 가지셨는가?
•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God smelling a sweet savour from Noah's sacrifice)" (창8:21) : 하나님이 코와 후각기관(olfactory receptor)을 가지고 계신가?

만약에 우리가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표현들도 역시 문자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면,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가?


저자의 의도 (The author's intention)

이들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야만 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성령의 지시 하에서 모세가 썼다. 모세의 목적은 이런 경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물리적인 묘사를 하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위의 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행동을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행동, 즉, 음성(voice), 시력(sight), 교제(companionship), 일하심(work), 만족(satisfaction)으로 묘사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말씀하심으로 그것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 (예를 들면, 창조의 첫째 날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과, 또한 2일에서 6일까지 각각 그와 유사한 형태로 말씀하심), 하나님은 그 분의 뜻을 표현하심으로 창조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창조가 우연한 임의의 과정의 결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도권(initiative) 하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나타내는 명령의 방식으로 이것을 하기로 선택하셨다.

예술가의 걸작품?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위의 그림에서처럼, 아담의 창조 시에 하나님의 모습을 족장의 모습으로서 묘사함으로서 극단적으로 성경적 의인화를 취했다. 이것은 1508-1512년에 로마의 바티칸에 있는 시스틴 성당(Sistine Chapel)의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33개의 그림 작품 중에 하나이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있다.    


반복되는 구절인 "그대로 되니라(and it was so)"는 우리들에게 각각의 창조 명령이 즉각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관련된 날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라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평가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긴 시대 및 점진적인 창조론(long-age/progressive creation theories), 그리고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 theories)을 반박한다. 그것은 또한 명백히, "그리고 그것이 좋았더라" 라고 단순하게 언급하는 기록보다 더 어조가 강하다. 덧붙여진 "하나님의 보시기에" 라는 말은 신뢰성 있는 평결을 내릴 수 있는, 자격 있는 권위자에 의한 조심스런 평가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행동을 이런 방식으로 묘사하는 데 있어서 모세의 의도는 분명하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담과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에 하와와 대화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다가, 아담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시고, 그 다음에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담화하신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인간이, 그것도 그들이 죄를 저지른 이후에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마찬가지이다.


신의 현현 (Theophanies, 顯現)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기만 하면 그분 자신을 어느 장소에서든, 완전하신 형태를 감하셔서 명백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실 수 있다. 그러한 일시적인 방문을 신의 현현(theophany = <그리스어 theos = 신> + <phaino = 빛나다>)이라고 한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구약의 다른 경우에 이런 식으로 나타난 사람을 종종 ‘여호와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라고 부른다. 때로는 이 분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격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언급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러한 현시는 성육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였다.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정확했다 (Historically true and accurate)

그래서 이것이 창세기의 문자성(literalness of Genesis)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과 상세한 내용들에 대한 기록을 주셨다. 기록된 사건은 우화 또는 신학적인 시가 아니며, 또한 수세기가 지난 다음에 작성한 캠프파이어 이야기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정확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신약의 저자들이 항상 그것들을 그렇게 받아들인다.

모세의 목적은 이들 역사적인 사건과 상세한 내용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행함에 있어서, 그는 필요한 경우에 하나님에 관하여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 마치 그분이 사람인 것처럼 -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흥미롭게도, 교회 지도자들은 일찍이 AD 4세기에 이 문제를 다루었었는데, 그러한 기록들은 "하나님께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성 요한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c. 347-407)은 이렇게 말한다 : “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And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라는 말씀을 들을 때, ‘창설하시고(planted)’ 라는 단어를 하나님께 어울리게 이해하라. 즉, 그분은 명령만 했을 뿐인데, 그 이후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고, 성경에서 지정한 바로 그 장소에 정확하게 동산이 만들어졌다고 믿어야 한다.”

즉, 창조된 것들에 대해, 그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었던 성 바질 대제(329-379)가 말한 것처럼 평범한 의미를 취하라 : “정말로, 성경에서 상식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물이 물이 아니라, 식물 안에서 또는 물고기 안에서 보게 되는 다른 성질로 여긴다. 참으로 엉뚱한 소망이다. 그리고 파충류와 야생동물의 성질을 자기들의 풍유에 알맞게 바꿔버린다. 마치 잠 속에서의 환상이 그들의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꿈 해몽가와 같다. 나에게는 풀은 풀이다. 나는 나무, 물고기, 야생동물, 가축 등 모두를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인다.“

역사를 통하여, 인류는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모습으로 잘못된 신들을 묘사하여 왔다 (이와 같은 제우스의 신상처럼).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영(spirit)이시고, 형체를 가지시지 않은 진정한 창조주 하나님과 대조된다.


창세기에서 모세가 사용한 의인화는 저자가 분명히 의도하는 것으로, 즉, 솔직한 역사로 받아들이는 데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회가 대부분의 교회 역사를 통하여 그런 입장을 취한 이유이다. 반면에,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랜 연대 ‘과학’과 타협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Concerning the authorship of Genesis, see Grigg, R., Did Moses really write Genesis? Creation20(4):43–46, 1998.
2. E.g. Genesis 22:11; Judges 6:11; 2 Kings 1:3; Isaiah 37:36, etc.
3. See Grigg, R., Should Genesis be taken literally? Creation 16(1):38–41, 1993.
4. John Chrysostom, Homilies in Genesis 13(3):106, quoted from Rose, S., Genesis, Creation and Early Man, St. Herman of Alaska Brotherhood, pp. 87–88, 2000.
5. Basil the Great, Hexaëmeron (= ‘Six Days’) Homily IX, <www.newadvent.org/fathers/32019.htm>.
6.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ch. 3, Master Books, Arkansas, USA, 2004.

 



부록 : 하나님은 영이시다 (God is spirit)


신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물질이 아니시며 육체를 갖고 있지 않으시므로, 그분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 보거나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인격적이시며, 초월적인 생명과 존재를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물질적인 우주의 한계와 무관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 이성의 이해력을 넘어선 것이므로, 그 분에 대해 인간이 뭐라고 묘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그러한 초월적인 신성을 묘사할 단어가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특성에 관련된 단어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의인화를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실감하게 해 주며, 그분의 다양한 능력과 관심과 활동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용은 정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분 자신에 관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이 그것을 사용하시며 거기에 대해 권위를 부여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므로(창 1:26-27),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유사성이 있다. - 물론 커다란 차이점도 있기는 하다.

위의 사항들로 볼 때,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에 관하여 이야기 할 때, (어떠한 해명 없이) ‘문자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보다는, ‘평범한’ 또는 ‘문법적-역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번역 - 이종헌

주소 - https://creation.com/does-god-have-body-parts

출처 - Creation 27(2):42–44, March 2005.

유종호
2017-05-30

인간이란 무엇인가? 5 : 다른 행성의 생명체


26. 다른 행성의 생명체

진화론자들은 점점 더 망상에 사로잡혀서, 다른 외계 행성들에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주에는 수백억의 은하들이 있고 각 은하에는 수백억의 항성들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행성들도 존재할 것이다. 진화론자들에게 있어 지구 이외의 장소에서 지능이 발달된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은 수학적 확률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필연적 확실성이다. 만약 지구가 수많은 행성들 가운데 하나의 행성이며, 태양계 안에 있는 달과 화성에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태양계 이외의 다른 별들의 행성에서는 생명체가 진화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다른 행성들에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의 빗나간 가정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첫째는 생명체가 지구상에서 진화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주 어디에선가에 또 다른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둘째로 생명체의 진화가 입증되지 못했고, 무기물에서 생명체가 생겨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주장들로 인해, 지구 밖에서 진화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 외계 생명체를 탐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네소타 맨카토의 1987년 4월 4일자『자유언론』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서 1,200명이 회합했음을 보도했다. 코넬대학의 칼 세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각 수천억의 별들을 포함하는 1천억의 은하계로 구성된 우주에서 우리의 태양만이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별이라는 생각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우리가 우주에서 유일한 생명체라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떨어졌는가?”

이 말은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입증된바 없는 과거의 전제와 결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지구상에 생명체를 발생시킨 화학적 진화 작용이 우주 전역에 걸쳐서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지능이 있는 생명체는 지구를 벗어난 그 어느 곳에서도 100%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이 인용문은 산타 그루즈(Santa Cruz)의 캘리포니아의 대학 자연과학학장인 프랭크 드래크가 한 말이다. NASA에서 은퇴한 알 힙스(Al Hibb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내가 죽을 때까지 지능이 있는 생명체가 지구 밖 어디에선가 존재한다는 증거물을 발견할 것이라는 쪽에 100 달러의 돈을 걸겠소.”

만약 내가 그 정도로 확신을 갖는 입장이라면 훨씬 많은 돈을 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진화론자들은 ‘외계문명의 증거’를 찾기 위해 이미 소비한 수십억 달러 이외에도, 우리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기부금을 요청하고 있다. 그들은 지구 밖에 생명체의 연구를 위해 수세대에 걸쳐 일체가 완비된 이성(異性)의 우주선을 보내려고 한다.

지구 밖 우주 어디엔가 생명체가 있다는 신념과 믿음은 무생물이 화학적 작용으로 우연히 생명체가 등장했다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다. 미네소타의 1979년 9월 10일의『자유언론』은 워싱턴의 AP통신을 인용했다.

“과학자들은 남극에서 발견된 2개의 운석에서 지구 이외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줄 만한 화학적인 생명의 원조를 발견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러한 발견을 통해 지구상의 생명체가 수십억 년 전에 원시 바다에서 화학적 삼투작용을 거쳐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진화론자들에게 화학적 작용에 의해 지구상에 생명체가 등장했다는 말은 단지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명한 가정(Postulate)이란 의미는 증거 없이도 논의의 토대로서 진실이고, 사실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일주일 후인 1979년 9월 17일의 『자유언론』은 미국의 화학학회에 제출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운석의 발견은 지구의 경우 자명하게 여겨지는 화학진화 과정이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는 이론에 과학적인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성급하게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지 주목해보자. 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지구상에서 자명하게 여겨지는 화학진화 과정”에서, 그들은 금방 “화학진화 과정”이 어디에서나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다는 빗나간 결론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시초를 증명하기 위해 수십억 달러를 소비하며 우주로 뛰쳐나가기 전에, 먼저 과연 그런 화학적 작용이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물질에서 발견되는 분자와 비슷한 운석과 우주의 분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우주에서도 생명체의 진화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분자는 결코 살지 못한다. 달과 화성에도 분자와 화학물질들이 있다. 그러나 그곳 어디에도 생명체는 없다.

외계에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외계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현명한 일인가? 만약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라면 그들은 지구에서 직면하는 적들보다도 우리에게 훨씬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어떤 현명한 사람은 “만약 외계에서 전화가 걸려온다면 인류를 위하여 전화를 받지 마라. 오히려 그들의 관심을 끌지 말고 피하라. 가능한 한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고 말했다.

만약 우리가 너무 참견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전에 인용했던 1979년 9월 17일자 『자유언론』은 외계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외계 생명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세우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물질적 증거는 8월 27일에 경찰관인 발 존슨(Val Johnson)이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두 번째 종류의 “외계인과의 만남”에서 나타난다. 존슨은 스스로 표현한 “미확인 존재”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그것이 그의 차로 뛰어들어 앞 유리와 헤드라이트가 깨졌다. 후드에도 조그만 구멍이 생겼고, 차 위의 빨간 등이 깨졌으며, 두 개의 안테나가 거의 90도로 꺾였다. 존슨은 그 물체의 밝은 빛 때문에 눈에 화상을 입어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그러한 근거에 대한 어떤 설명도 주어지지 않았다. 존슨과 그의 순찰차에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차를 내리치고 경찰의 눈을 다치게 한 물체가 외계에서 온 우주인에 의해 조정된 우주선이라는 가설은 그 어떤 다른 설명보다 좋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그런 외계인과 그들의 문명(?)을 피하는 것이 나을 것이며, 그들의 전화도 받지 않고, 그들의 존재를 찾느라고 수십억 달러를 소비하지 않는 것이 훨씬 현명할 것이다.

한편 그것과 비슷한 뉴스 보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비록 인류가 크나큰 과학의 진보를 했다하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감기조차 제대로 치료할 수 없다. 우리는 외계의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지도 모른다. 확실히 인간을 달에 거주시킬 정도의 문명이라면 감기 정도는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빗나간 전제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이러한 진화론자들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몽상가들인가?

이와는 반대로 생명체가 외계에서 진화한다고는 믿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주의 또 다른 장소에 어떤 생명체를 두어 지능이 있는 존재를 창조했는지 어떤지 궁금증을 갖은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는 다른 행성 어디에서도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 바로 정반대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우리는 지구가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3일후에 태양, 달과 별들을 만들었음을 알게 된다. 창세기 1장 16절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빛을 만들어, 하나는 낮을, 하나는 밤을 지배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별들도 만들었다.” 별들에는 행성을 포함된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지구와 인간을 위해 하늘의 전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창세기 1장 14절에는 “그러한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되어있다. 성경에 주어진 모든 지시를 토대로 해볼 때 다른 행성에는 인간과 같은 살아있는 존재는 없다. 시편 115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즉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간의 아들에게 주셨도다.”

더욱이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하늘(별들과 행성들)은 지구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29절에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이제 별들 가까이에 있는 다른 행성들 위에 다른 생물체나 인간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과 그들의 행성까지 파멸케 하는 일이 정당한 일일까? 우주 전체는 단지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파멸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주 전체를 책임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위안이 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침입과 외계인의 출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장중에 시간과 공간도 존재하는 것이다.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17

참고 :

Gary Bates
2017-05-30

외계인에 의한 디자인? 

: DNA 구조의 발견자들은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다. 

(Designed by aliens?)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과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그들의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에 대한 50주년 기념행사를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는 근거로서 사용하였다.[1] 최근 이 노벨상 수상 팀에 관한 영국 뉴스 기사는 ”과학적인 발견들이 불쾌한 종교적 감수성들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왓슨과 크릭은 둘 다 무신론자들임”을 지적하였다.[1]

이러한 논평은 과학이 어느 정도 기독교를 반증하였다는 오래된 허위보도를 재강조하는 시도인 것이다. 창조론자들이 오랫동안 지적해왔던 것처럼, 그 문제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이들 사실들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인 것이다. 이것은 크릭의 믿음에 의해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오래 전에 그가 DNA 구조를 발견하였을 때부터 그는 강한 무신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뉴스 기사도[1] 크릭의 종교에 대한 혐오는 그의 발견을 이끌어내었던 주요한 동기 중에 하나라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DNA 개척자의 종교에 대한 반감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61년에 크릭은 케임브리지의 처칠 대학(Churchill College)의 일원으로서, 대학에 예배당이 지어지도록 제안되었을 때 사임하였다."
 

DNA : 설계(design)에 대한 실제적인 증거

왓슨과 크릭이 발견했던 것은 지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반증하였는가? DNA 분자는 전 우주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보 저장 시스템이라고 자주 기술되고 있다. DNA에 기록되어 배열되어 있는 엄청난 복잡성과 암호들과 그 정확성은 가히 충격적이다. 그것들은 고도의 지성과, 정보를 집적할 수 있는 설계를 강력히 증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복잡한 DNA 암호는 최초의 소위 ‘단순한 세포(simple cell)’라고 추정하는 것에서도 필요하다. 창조 지(Creation magazine)도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 제 50주년 기념으로 DNA의 경이로움에 관한 상세한 기사를 또한 출판했었다.[2]

심지어 크릭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지금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지식들을 가지고 말할 때, 생명체의 기원은 거의 하나의 기적(a miracle)으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으로만 만족해하고 있는 상태이다.”[3]

크릭은 어떤 가상적인 지구 조건 하에서도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질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무신론적 신념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이것을 확인하였다. ”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종교적 개념 없이도 완전히 잘 살아간다.”[1]


크릭의 무신론적 신념은 불합리한 의사과학을 이끌어 내었다.

불행하게도 크릭은 이 점에 대하여 전혀 솔직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신론(atheism)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심오한 질문들에 대답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종교(a religion)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입증되어질 수 없기 때문에, 무신론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믿음 체계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종교적인 관점에서 DNA의 기원과 지구상의 생물체들에 대한 기원을 설명해야만 했다.

그는 이들의 기원을 ‘외계생명체 유입설(panspermia)’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였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인 pas/pan (all) sperma (seed) 으로부터 유래한 단어로서, 생명체의 씨앗은 우주를 통하여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릭은 이 개념을 ‘지시된 외계생명체 유입설(directed panspermia)’로 상세히 논하였다. 무기 화학물질들로부터 생명체로의 진화 사이에 있는 거대한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크릭은 ’Life Itself' 라는 한 권의 책에서, 원시 생명체들의 일부 형태들은 수십억 년 전에 ‘더 진화된(발달된) 외계인'들에 의해서 우주선을 통해 지구로 보내졌다고 주장하였다.[4]

비록 그가 하나님 없이 DNA의 지적 근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지만, 크릭은 단지 그 문제를 우주 밖으로 밀어내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실험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외계인들도 그들보다 더 지적인 근원에 의해서 창조되지 않았다면, 결국 외계에서는 어떻게 무기물로부터 외계생물체가 진화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더군다나 이 인자한 외계인들이 진화의 결과가 무엇과 같을지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가? 진화는 오랜 시간 동안 우연히 일어나는 지시되지 않은 과정 아닌가? 크릭이 극복할 수 없었던 또 다른 문제점은, 진화는 지난 35억 년 동안 발생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지적인 외계종족이 수십억 년 후에 일어날 결과를 기대하면서 그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인가?

크릭은 후에 그 개념의 허구와 엄청난 문제점들을 인정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생명체의 기원에 대한 논문을 쓸 때마다, 다시는 이러한 논문을 쓰지 않겠다고 매번 맹세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너무도 적은 사실들을 가지고 너무도 많은 추론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3]

이러한 모든 사색들 후에, 크릭과 왓슨은 지적설계의 증거를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과 조화시켰는가? 절대적으로 아니다! 왓슨은 아직도 종교적인 설명은 ”과거로부터의 신화”라는 생각을 유지하고 있다.[1]

생명체가 보여주고 있는 극도로 미세한 구조 속에 엄청난 복잡성이 있다는 것은 무신론적  진화 이론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최초 세포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고등한 또는 더 진화된 생물체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새로운 정보(new information)와 증가되는 복잡성(increasing complexity)이라는 더 심각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비기독교인 분자생물학자인 마이클 덴톤(Michael Denton)까지도, 그의 베스트셀러 책인 ‘진화론 위기의 이론(Evolution a Theory in Crisis)’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외계생명체 유입설이라는 개념으로 심각하게 희롱당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생명의 기원 문제가 얼마나 처리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분명하게 예증하고 있는 것이다.”[3]       

어디를 보아도, 생명체들은 설계의 흔적과 창조주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관으로 눈과 귀가 멀어, 명백하고 분별력 있는 이러한 설명들에 대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일부러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References

1. Do our genes reveal the hand of God? <www.telegraph.co.uk/connected/main.jhtml?xml=/connected/2003/03/19/ecfgod19.xml>, 15 July 2003.
2. Sarfati, J., DNA: Marvellous messages or mostly mess? Creation 25(2):26-31, 2003.
3. Panspermia, <www.creationdefense.org/68.htm>, 9 March 2003 (emphasis ours).
4. Panspermia, <www.pathlights.com/ce_encyclopedia/20hist11.htm#Rocket Sperm>, 30 Ma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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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슨과 크릭의 큰 실수 : 자동차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알아낸 것은 만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가?


왓슨과 크릭에 의해서 지적 창조주 개념이 반증되었다는 생각하는 가장 주요한 논지는 무엇인가? 그들은 유전 정보를 복사하는 데에 화학법칙(laws of chemistry)에 의해 기능하고 있는 한 메커니즘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창조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있는 생물체들은 일상적인 물리와 화학 이상의 ‘생명력(vital force)’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활력론(vitalism)이라는 잘못된 믿음의 허수아비를 쓰러트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시각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를 마치셨으며, 이제는 창조하신 만물을 붙들고 계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골 1:15-17, 히 1:3). 성경은 질서의 하나님이 그의 창조물들을 규칙적이고, 반복 가능한 방법으로 유지시키고 계시며, 이것은 자체가 현대 과학의 기초를 태동하게 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 과학적 법칙들은 단지 이러한 붙들고 계시는 활동에 대한 우리들의 묘사인 것이다. 무신론은 과학을 있게 만들었던 우주의 질서에 대해서 어떠한 논리적 기초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왓슨과 크릭의 반유신론적 주장들은 특별히 부적절하다. 이것은 우리가 자동차를 생각해볼 때 쉽게 알 수 있다. 자동차는 물리와 화학 법칙들에 의해서 작동되어진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자동차를 작동시키는 데에는 각 부분들에 대한 세밀한 지식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물리와 화학 법칙들이 최초에 어떻게 자동차가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 지적설계자가 올바른 방법으로 자동차 부속품들을 조직화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 부속품들이 이들 법칙들에 의해서 작동되는 것이다.[2] 


Notes

1. See Wieland, C. and Sarfati, J., The Christian origin of modern science, Creation 25(1):48, 2003.
2. See also Wieland, C., A tale of two fleas, Creation 20(3):45, 1998..



*참조 : 1. 외계생명체 유입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86

2. 2 마리의 벼룩 이야기 : 자동차는 저절로 생겨났는가, 누군가가 만들었는가?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891

3. 진화는 왜 진행될 수 없는가? 자동차 : 진화를 거부하는 증거?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5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5/i4/aliens.asp

출처 - Creation 25(4):54-55, September 2003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860

참고 : 5003|4997|4993|4612|4311|2860|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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