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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기독교

Lita Cosner
2017-05-30

파라카스 두개골 : 그들은 외계인(또는 네피림)이 아니다.

(The Paracas skulls: they’re not aliens (or nephilim)!)


.Flickr/ Marcin Tlustochowicz (CC BY 2.0)
 

우리는 사람의 두개골처럼 보이나 변형된, 페루의 파라카스 두개골(Paracas skulls)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왔다. 그들은 사람은 고사하고 지구상의 어떤 생물과도 같지 않은 DNA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고 있다. 영국의 한 독자에게서 온 편지는 전형적인 예이다 :

”페루 파라카스의 두개골에 관한 기사를 실어주면 안될까요? 당신들은 그것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은 사람인가요, 유인원인가요? 그들의 DNA는 기록된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해집니다.”

”이것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위 외계인이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파라카스 두개골의 시기에 페루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비정상적으로 키가 컸고, 그들의 두개골도 비정상적으로 컸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두개골의 크기를 유발한 일부 유전질환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신체 크기를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은 135cm 정도이지만, 농구선수들은 2m가 넘는다). 그리고 두개골은 의도적으로 변형될 수 있다. 일부 멕시코와 남미 문명은 아기의 부드러운 두개골에 무거운 무게를 위치시켜 이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문명에서는 이러한 두개골 모양을 만들기 위해 아기의 두개골을 천으로 단단히 묶어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실행은 종종 어떤 종류의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서 수행되었다. 따라서 질병에 의해서 또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변형된 사람의 두개골을 발견했다고 해서, ”외계인이 발견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행성에 외계인의 존재로 비약되기도 한다. 외계 행성에서 생명체가 우연히 만들어지고, 진화해서, 사람과 같은 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이다. 설사 생명체가 다른 외계 행성에서 진화되었다 하더라도, 엄청난 거리 때문에 그들이 정상적인 수명 하에서 지구로 여행해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라카스 두개골에 관한 주장과 그러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자세히 조사했을 때, 그러한 주장을 의심할만한 많은 이유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한 발표는 과학 저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저 언론 매체들에 의해서 다뤄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주장을 했던 브리엔(Brien Foerster)은 사설 박물관에서 일하는 공신력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페루에서 초자연적 현상 투어를 안내하고 있다. 검사를 실시했던 유전학자는 익명을 원하고 있어서, 자신을 공개할 때까지 그의 전문성은 인정될 수 없다.

그리고 파라카스의 DNA는 우리가 지금껏 본 어떤 DNA와도 같지 않다는 주장은 매우 의심스러운 주장이다. 먼저, 왜 외계인은 DNA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만약 생명체가 다른 곳에서 진화되었다면, 왜 DNA처럼 보이는 것에 우연히 정보가 보관되어 있었단 말인가? DNA도 우연히 같이 진화로 생겨났는가? 그리고 왜 사람 두개골처럼 보이도록 진화했는가?

이러한 DNA 주장은 '아타카마 미라(Atacama child)'와 유사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우리의 글 Sirius the documentary을 보라. (관련기사 : 아타카마 미라, 15cm 사람 형상 생명체? 미스터리 증폭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250649). 사실, 아타카마 미라에 대한 DNA 분석은, 그 아기가 외계인이 아니라, 사람이었음을 나타냈다.

또한 어떤 크리스천들은 그 두개골을 노아 홍수 이전의 네피림(nephilim)의 유골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였는가?(Who were the ‘sons of God’ in Genesis 6?)”라는 상세한 글을 게재했었다. (그 글은 게리 베이츠의 책 'Alien Intrusion: UFOs and the Evolution Connection”에서 발췌한 것임). 그것에 대해서는 그 글을 읽어보라.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자극적인 주장이 있을 때에,  특히 그 결론이 반성경적일 때에는 주의해야만 한다.

 


* 참조 : There Were Giants in Those Days (과거 지구상에 거인이 살았다는 증거들)
http://s8int.com/giants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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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
Alien Life / UFO Questions and Answer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com/paracas-skulls

출처 - CMI, 2014. 4. 2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971

참고 : 5303|311|310|2661|491|489|2017|763|5003|4997|4993|5592|4612|4522|3626|3012|2641|2741

10만 개의 은하들 내에서 생명체의 흔적은 없었다 

: SETI의 외계문명 탐사는 실패를 계속하고 있었다. 

(100,000 Galaxies Without a Sign of Life)


     궤도 적외선 망원경의 탐사결과, 10만 개의 은하들에서 어떠한 생명체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만약 우주가 137억 년이 되었다면, 지적 생명체가 지구에서 출현했던 것처럼, 외계에서도 생명체가 여러 번 출현했을 것이라고 진화론자들은 믿고 있다. 많은 은하들은 지구의 나이보다 더 오랫동안 진화할 시간을 가졌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보다 더 진화하여, 그들의 기술로 은하들을 점령하고,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신호를 우리에게 보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대한 많은 추측과 상상들이 있어왔다. 미국 NASA는 이에 대한 1차 조사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지구 궤도에 있는 WISE(Wide field Infrared Survey Explorer) 망원경(그 목적을 위해 발사된 것은 아니지만)의 데이터를 사용하여, 펜실베니아 대학의 천문학자들은 10만 개의 은하들 중에 높은 중-적외선 파장(mid-infrared wavelengths)에 대한 검사를 수행했다. 왜 적외선인가?

”먼 은하의 외계행성들에 우주여행을 할 수 있는 발달된 외계문명이 있어서, 컴퓨터 전력, 우주 비행, 통신, 또는 우리가 아직 상상하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 인해 다량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기본적인 열역학에 의해서, 이 에너지는 중적외선 파장에서 열로서 발산되어 나올 것임에 틀림없다.” 라이트(Wright)는 말했다. ”이것은 당신의 컴퓨터를 켰을 때, 열이 발산되는 이유와 동일한 물리학이다.”

프리먼 다이슨(Freeman Dyson)은 충분히 발달된 문명은 그 항성의 모든 에너지를 수집체인 '다이슨 스피어(Dyson Sphere)' 안에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것은 천문학적 거리에서도 충분히 감지될 수 있을 것이다. 연구팀은 평균보다 높은 중-적외선 방사선을 보이는 50개의 은하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자연적 과정이 아닌 지성적 흔적에 기인한 것들을 찾아내는 것에는 실패했다. Science Daily(2015. 4. 14) 지는 말했다. ”우주의 천체들로부터 이러한 방출되는 방사선을 측정할 수 있는 WISE 위성과 같은 우주 망원경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그러한 일은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연구의 공동 저자이며,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외계행성 탐사 센터의 천문학자인 제이슨 라이트(Jason T. Wright)는 말했다.

어떤 경우에서든, 외계인으로 가득한 은하들을 연구팀이 탐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고, 새로운 과학적 결과라고, 라이트는 말했다. ”우리의 결과는 은하들의 별빛들을 사용하여 WISE가 충분히 상세히 살펴볼 수 있었던 10만 개의 은하들 중에서 외계인의 문명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은하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흥미로운 결과이다. 왜냐하면, 이들 은하들은 수십억 년의 나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시간은 은하들을 외계 문명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확인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를 아직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트는 말했다. 

그 조사는 몇몇 흥미로운 천체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전 조사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은하수에서 성운(nebulae)과 같은, 대부분 자연적인 것이었다. 공동 저자인 스테인 시거드슨(Steinn Sigurdsson)은 말했다. ”가장 최신의 가장 민감한 기술로 극히 먼 곳의 현상을 살펴보았을 때, 그것이 찾던 것이 아닐지라도, 예상치 못했던 발견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일차적 조사는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조사는 외계인들이 무엇을 구축할 것인지를 알고 있다는 개념과, 우리의 탐측 장비가 그것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포함하여, 많은 가정들에 의존하고 있다. 충분히 발달된 문명은 그들의 존재를 숨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할 수 있다. 관측적인 기초가 결여되었을 때, 모든 것이 추정 가능하다.



SETI(Search for Extra Terrestrial Intelligence,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는 지난 50년 이상 지속적으로 실망적인 결과에 직면해야만 했다. 진화론자들의 가정에 의하면, 우주에는 어떤 발달된 외계 문명이 있어야만 한다. 장구한 진화론적 시간 틀은 그러한 외계생물체들을 마법처럼 출현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 너머에는 지적인 외계 생명체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신처럼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자 그러면, 그들은 어디 있는가? 그들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페르미 역설(Fermi Paradox, 그들이 거기에 있다면, 지구를 방문했을 것이라는)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우주에 인간이 홀로 있다는 생각은 불합리한 생각인가? 많은 사람들에게 우주에 거주할 수 없는 은하들이 너무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도 낭비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놀랄만한 이유인가? 만약 당신이 진화론자라면 놀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성경의 기록처럼, 하나님께서 지구에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분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광대한 우주를 만드셨다.(계 5:12). 그 분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별들을 만드셨다. 왜 많은 별들을 만드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들은 지구에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발견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고서 말이다. 몇 개 안되는 은하들과 몇 개 안되는 별들을 가진 훨씬 적은 우주는 그 분의 무한하신 능력과 권능을 감소시킬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은 그렇게 작은가? 창조주가 설정해 놓은 물리적 법칙을 감안할 때, 우리의 크기가 이 정도여야만 하는 물리적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안정적인 항성(태양)으로부터 적절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지구 크기의 행성 위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거기에서 여러 종류의 생물들을 즐기며 관계를 가지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가 행성처럼 크다면, 서로 접근하는 경우에 중력으로 인해 서로 충돌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에 두셨던지 상관없이, 우리는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왜 여기인가?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멋진 곳에 두셨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태양계는 장엄한 은하수의 중심부근에 있지 않아서, 방사선이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너무 멀리 있다면, 우리 행성에는 생명체에 필요한 무거운 원소들이 부족할 것이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은하의 생명체 거주 가능 지역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다.

우리의 작은 크기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과학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크기는, 은하(galaxy) 규모와 쿼크(quarks) 규모 사이에 중간쯤 크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광대한 우주에서 우리의 중요성을 숙고할 때, 고려해야만 하는 사실이다. 원자들의 수준으로 보면 우리들은 믿을 수 없도록 거대한 존재들이다. 미생물들에게 인간은 산과 같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공간과 모든 시간에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그 너머에 계시다가, 부분적으로 이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분은 모든 곳에 충만하게 계시는 것이다.      

성경은 거의 전적으로 인간(human life)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광대한 우주와 수많은 은하들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가 작은 행성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죄와 행위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시편 8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관심은 성경 아모스 서에서도 볼 수 있다. 목동이었던 부르심을 받은 이 선지자는 우상 숭배하는 부요한 지도자들에 의해서 그들의 권리를 짓밟히고 곤경에 처해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강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그가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르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암 5:8~9) 다른 말로 해서, 강한 자들에게 갑자기 패망을 주시는 것은 묘성과 삼성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성경을 믿는 자들에게 우리가 은하 내에서 비교적 작은 크기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잡한 생물체를 이루는 데에는 제한된 범위의 크기가 있다. 원자 스케일에서 모든 것들은 단지 몇 개의 입자들과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별들의 스케일에서, 대부분의 천체들은 중력에 의해서 상호 작용을 하는 구형의 천체들이다. 우리와 같은 존재가 허락되는 크기는 매우 좁은 범위의 크기 스펙트럼을 가진다. 이웃들과 같이 살아가며, 대기 중에서 음파를 이용해 소통하며, 책을 쓰고, 음악을 연주하며, 산을 오르고, 성도들이 모여 집회를 할 수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우리의 신체 크기를 폄하하지 말라. 우리는 은하에 비하면 작지만, 원자들에 비하면 거대하다. 그리고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외계 생명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의 관측은 제한적이고, 성경도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신 29:29)), 그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무수한 천사들이 있으나, 그들의 도달 한계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외계 행성에 푸른 잔디와 메뚜기를 꾸며 놓으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떠한 지적인 외계 생명체도 탐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지구상에 생물들이 진화되었기 때문에, 외계 모든 곳에서도 생명체들이 진화했을 것이라고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외계생명체를 탐사해왔던 진화론자들에게는 이러한 새로운 연구 결과는 실망스런 일일 것이다.   


*참조 : 자료실/ UFO와 외계생명
http://www.creation.or.kr/library/listview.asp?category=D03


*관련기사 : 슈퍼 문명이 진정 원하는 것은? (2015. 5. 16. 허핑턴포스트)
http://www.huffingtonpost.kr/seth-shostak/dddddddd_b_7295904.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v.info/2015/04/100000-galaxies-without-life/

출처 - CEH, 2015. 4. 19.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156

참고 :

Gary Bates
2017-05-30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 왜 하나님은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가? 

(Understanding death. Answering the question,

 "Why does God allow bad things to happen?")


       우리들 대부분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우리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껄끄럽게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결국에는 죽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우울한 전망이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이것이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중의 아무도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장수하시다 돌아가셨건, 너무 젊을 때 죽었건, 우리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몹시 슬퍼한다. 상실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아마도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게 한다. ”결국 먼지가 될 것이라면,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리고, ”왜 나인가?” 혹은 ”왜 우리인가?” 내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이 질문과 싸우고 있다. 우리는 사랑이 많으시고 전능하신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 왜 그분의 귀한 자녀들이 고통을 겪고, 때로는 번민하다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시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단순히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재앙들을 보고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비극적인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갈등은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죽음을 진화론적으로 이해할 때(종종 자기가 진화론적 생각에 젖어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상황은 더 악화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개념을 포함하여, 약간의 틀린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한 개념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제공할 수 없다.

직설적인 간결한 해답은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진화론이 주는 잘못된 이해가 아니라, 올바른 역사에 의한 성경적 이해를 제공한다. 더욱이,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아시고, 그에 관해 실제적으로 무언가를 행하셨다는 것을 실감할 때, 우리는 커다란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진화론에서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세상의 진화론적 장구한 시간 개념에 영향을 받고 있다. 즉, 모든 생물들은 죽음의 곡조에 맞춰 춤을 춰왔고, 수억 수천만 년 동안 고통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교과서, 대학, 언론매체, 잡지, 박물관, 심지어 아이들 책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세뇌시켜 왔다. 이 ‘오랜 시간과 죽음’이라는 주제는 일종의 교리가 되어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자이며 천문학자였던 칼 세이건(Carl Sagan)은 그가 진행했던 매우 유명한 TV 과학 시리즈인 ‘코스모스(Cosmos)’에서 이렇게 말했다 :

”진화의 비밀은 시간과 죽음이다. 최초 세포로부터 우리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은 실이 연결되어 있다.”[1]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의 진화론적 관점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유명한 책 ‘종의 기원’이 보급시켰던 사상을 단순하게 반향하는 것일 뿐이다. 다윈은 이렇게 썼다 : ”따라서 자연의 투쟁으로부터,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존재인 고등한 생물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2]

다윈에게 왕은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다윈이 그의 이론을 주장하게 됐던 동기에 관해 많은 글들이 쓰여졌다. 다윈은 그의 자녀 세 명이 일찍 죽은 것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았다. 많은 주석가들은 그가 사랑했던 10살짜리 딸 애니의 죽음이 궁극적으로 그가 가졌던 기독교 신앙의 흔적마저 파괴해 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교회 출석을 그만 두었는데,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난 후에, 그렇게 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다윈은 이 세계는 무한히 오래 되었으며, 처음부터 죽음이 존재해왔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죽음과 고통을 만드신, 잔인하신 분이 되는 것이다. 다윈에게 왕(king)은 삶과 죽음의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이 아니라(요한계시록 1:18), 죽음(사망)이었다.

이 "죽음이 왕이다"라는 주제는 심지어 대중 영화에서도 볼 수 있다. 공상과학 소설가로서 많은 영향을 주었던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 등을 씀)는 ‘다윈의 불독(Darwin’s bulldog)’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의 밑에서 훈련받은 열렬한 진화론자였다. 2005년에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phen Spielberg)가 리메이크 했던 웰스의 공상과학소설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은 죽음과 투쟁에 관한 진화론적 교훈에 진정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웰스에게서 반기독교적인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 이야기는 (진화론적인 시간 틀로) 오랜 연대를 가진, 따라서 기술적으로 진보된 화성인들이 인류를 멸절시킬 목적으로 지구를 공격한다는 착상을 도입한다. 웰스는 이들 ‘우월한 외계인(superior aliens)’들이 인류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사람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긴 하지만, 사람보다 더 위대한 지성적 존재가 이 세상을 날카롭게,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여러 관심사로 바빴지만, 그들은 자세히 조사당하고, 분석당했다. 마치 한 방울의 물속에서 떼를 지어 이동하고 번식하는 덧없는 원생생물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살펴보듯이, 그렇게 세밀하게 사람들을 관찰했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란 덜 진화된 존재로서, 더 우등한 종에 의해 멸종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화성인들은 지구상의 감염병에 걸려 죽고, 인간들은 면역되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 (웰스의 소설을 각색한) 그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수십억 명의 죽음을 대가를 치르고, 인간은 면역력 즉, 이 행성의 무수한 생물들 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헛되이 살거나, 헛되이 죽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시간과 죽음’이고, 진화였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헛되이 죽는다. 개인에게 죽음 이후의 미래에 대한 소망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에 관한 두 개의 대조되는 역사

진화론적 관점에서 죽음(death)은 우리를 진화시킨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논할 수도 없을 것이다.[4]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들을 통해서, 우리 주변에서 죽음을 볼 때, 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한 잔학행위에 의한 죽음을 볼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일들이 ‘자연적인’ 일이며, 하나님은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성경적으로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우리는 성경의 렌즈를 통해서, 이러한 ‘악한 일’들은 보시기에 좋았던 이 창조세계에 무언가 비극적으로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31). 진화론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사망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로 설명하고 있다.(고린도전서 15:26). 죽음이 하나님의 원래의 인간 창조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자연적이거나 ‘좋은’ 것일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이전에는 죽음과 고통이 없었다고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5]
 

그것은 죄다!

인간의 동료 인간들에 대한 잔학행위이든지, 아니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연재해이든지, 근본적인 원인은 같다. 그것은 죄(sin)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로마서 6:23). 창세기에 의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저주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세기 3:17). 이것은 신약성경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로마서 8:20~22절은 말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런데 이 신약성경 구절에서는 어떤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더 이상 사망이 없는, 새롭게, 회복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를 말한다(요한계시록 21:4). 무언가를 회복한다는 것은 원래의 조건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왜 ‘우리 주변에 죽음’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줄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해 준다. 창세기 역사의 적절한 기초 위에 지어진, 죽음에 관한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죽으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죽음과 고통이 있는가?” 등과 같은 인생의 큰 문제를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 이제 죽음은 선한 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갖기 위함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죄가 우리를 망쳤기 때문에,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창조의 정점에 있었으며,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창조에 대해 큰 책임이 있었다(창세기 1:28). 우리의 행동이 그분의 창조 전체를 망쳐버렸다.

이것이 복음, 즉 전능하신 예수님의 바로 그 희생이 장엄하게 보여지는 이유이다. 하나님이 죽음의 저주를 제정하셨을 때, 그것은 사실상 인간이 이 타락한 세상에서 구출되고, 그들의 창조주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창조를 망쳐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자신이 그분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행동에 대한 치욕을 겪으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일이 아닌가?

칼 세이건 역시 코스모스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어딘가에 어떤 믿기지 않는 일이 알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이 말은 옳았다. 그는 실제로 그러한 큰 질문을 숙고하고 있었지만, 슬프게도 죽음에 대한 진화론적 관점 때문에, 단순하고도 간단한, 복음의 진리에 대해 눈이 멀었던 것이다. 확실히 그는 무신론자로 죽었으며, 비극적이게도 지금은 불신자로서 ‘둘째 사망’을 겪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1; 20:6; 20:14; 21:8).
 

”왜 내가 아닌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5:45).[6] 신자나 불신자 모두 죄로 저주받은 이 행성을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으며, 그 영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신자의 차이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죽음과 고통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조건에 대해 무언가를 행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다!(요한복음 3:16).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우리에게 나타내신 방법이다. 은혜란 공로 없이 받는 호의라고 되어 있다. 얼마나 맞는 말인가!

따라서 (죽음에 대해) ”왜 나인가?”라고 묻는 대신에, ”왜 내가 아닌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끔찍한 죽음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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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ther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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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Segments from the TV shows of both Sagan and David Attenborough, featuring statements endorsing evolution, have been put to music in a video series called Symphony of Science. This one of Sagan’s is in the episode titled The Unbroken Thread.
2. Darwin, C., The Origin of Species, Sixth Edition, p. 463, Everyman’s Library, London and New York, 1956.
3. See Darwin’s bulldog—Thomas H. Huxley; creation.com/huxley.
4. There is a problem for those who reject evolution but accept the alleged geologic record of millions of years. The rock layers reveal countless fossils showing death and suffering of creatures. If the millions of years for the layers are correct then death would have been something that God has permitted well before any human appeared and hence before sin. This violates the necessity for the Gospel and a Saviour.
5. Though this verse in context specifically zeroes in on human death, the Scripture unmistakably indicates that this applied to all nephesh (soulish) life. See Sarfati, J., The Fall: a cosmic catastrophe, J. Creation 19(3):60–64, December 2005; creation.com/plant_death (including the ‘further reading’ web articles listed there).
6. This applies equally to rain as a blessing (e.g. watering crops, where unbelievers share in ‘common grace’) or a disaster (e.g. flood damage).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creation.com/understanding-death

출처 - Creation 35(1):42–44, January 2013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657

참고 : 3589|5076|3689|6642|6283|6639|6351|3967|3628|5886|5869|5628|5627|5723|2996|2245|3046|4351|6035|2365|6145|4451|2291|5903|5835|1897|2633|2329|161|2888|3262

Henry Morris
2016-03-25

그리스도의 부활 : 확증된 역사적 사실

(The Resurrection of Christ - The Best-Proved Fact in History)


부활의 중요성 (Importance of the Resurrection)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은 기독교의 최종적 승리를 장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물론이고 그의 사도들이 하신 말씀이나 사역의 모든 내용들도 그 중요도 측면에서 볼 때, 부활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허구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확실하다면, 그리스도는 틀림없이 하나님이시며, 크리스천의 신앙은 절대 진리에 대한 믿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최대의 적인 죽음은 그리스도만을 빼고는 모든 인간을 정복했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죽음을 속일 수는 없다. 아무리 큰 부자라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살 수는 없다. 또 아무리 힘센 사람도 죽음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 무덤은 언제나 승리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조만간 다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사실상 죽음의 불퇴전의 승리는 사람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동물도 죽을 것이며, 식물도 죽는다. 심지어 모든 생물체의 종 전체가 퇴화하다가 마침내 멸종할 수도 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시나 국가도 태어나서 한 때나마 성장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가정이나 승용차, 그리고 의복까지도 닳고 해지다가, 결국에는 제 주인처럼 흙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우주 자체도 팽창 수축하다가, 종국적인 '죽음의 열'을 향해 나아간다.

바로 이 쇠퇴와 죽음의 보편적 권세의 지배하게 있는 인생을 성경에서는 '썩어짐의 종노릇'이라고 불렀다(로마서 8:21). 과학은 죽음을 '열역학 제2법칙'으로 인식하고 있다. 동시에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도) 증가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이 법칙은 과학에서는 일종의 보편법칙으로 인식되어있고, 이 법칙의 굴레를 벗어나는 예외는 전혀 관측된 적이 없다. 이 법칙을 간단히 요약하면, 모든 시스템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질되는 경향이 있어서, 스스로 마모되어 결국에는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시스템에서 무질서의 척도인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썩어짐과 죽음의 보편성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절대적 유일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표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 물론 위인이나 성인들까지도 안 죽은 사람은 없다. 석가모니, 마호메트, 조로아스터, 공자, 씨이저, 마르크스... 등 나름대로 세계에 충격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도 모두 다 죽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 물론 그도 보통사람들처럼 죽었으며, 또 매장됐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명부(冥府)로부터 다시 돌아와 당신 자신의 육신의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의 썩지 않은 몸으로 무덤에서 나오신 이후 영원히 살아계신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 이후 기적중의 최대의 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도 단언하셨던 바대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셨기에 이루실 수 있었다.

짧은 본 고찰(考察)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질적인 증거들을 적게나마 주의 깊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만약에 이 모든 사건들이 망상에 지니지 않고, 나사렛 예수가 죽음에서 진정 다시 살아나시지 못했다면, 그 때엔 그도 결국에는 죽었던 다른 위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그들보다 더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의 절대적 신성을 걸고 죽음에서 부활하리라고 했던 약속으로 인해서, 허풍쟁이 아니면, 미친 사람이라고 낙인찍혀 마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만약에 그의 부활이 진정으로 역사상 논증될 수 있는 사실이었다면, 그 때엔 그의 주장뿐만 아니라, 그의 약속도 입증된다. 죽음은 결국 최대의 승리자가 아니고, 패배한 적에 불과해진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베드로전서 1:3).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0,22).

 

기독교 신앙의 기초 (The Foundation of Christianity)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 교회도 없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들의 교주가 보잘 것 없는 죽음을 죽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자기네 목숨 보전에 급급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 하에서는, 그들은 남을 설득하여 그들을 따르게 할 수는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앙의 교사로서의 사역을 계속하리라고는 엄두도 못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그들은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공표하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그들의 주님을 믿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을 한번 읽어보면, 초기 교회의 설교에서 부활의 의미가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알 수 있다. (참조: 사도행전 2:22-36; 3:13-18; 4:10-12,33; 5:29-32; 10:37-43; 17:23, 30-32; 23:6; 24:14-16; 25:19; 26:68, 22-23: 등등).

이에 못지않게 사도들의 서한에서도 부활의 의미는 중요했다. (예 로마서 1:3,4; 6:39; 고린도전서 15:1-58; 고린도후서 4:10-14; 갈라디아서 2:20; 에베소서 1:19-23; 빌립보서 2:5-11: 골로새서 2:12; 데살로니가전서 1:10; 4:14; 디모데전서 3:16; 디모데후서 2:8-11; 히브리서 13:20; 베드로전서 1:21; 등등). 부활이 뚜렷하게 강조되지 않은 곳에서도 부활의 내용은 언제나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그 첫 장을 열면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로 확인하고, 이어서 당신 자신이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밝히고 있음을 본다 (요한계시록 1:5, 18).

 

부활의 예언들 (Predictions of the Resurrection)

그리스도의 부활에 제자들은 완전히 허를 찔렸었다. 그리스도가 죽은 다음 그들은 한 가닥의 희망도 갖지 못했던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누가복음 24:37).

그런데 그들은 성경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그가 죽을 것이며, 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다시 살아나신 그를 만났을 때 하나같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나중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신 적도 있었다(누가복음 24:44).

비록 피상적인 독자한테는 구약에 있는 그의 부활에 관한 예언들이 명백하게 들리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에서 성경을 성실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것이다. 창세기 3:15, 시편 2:7, 시편 22:14-25, 시편 30:29, 시편 40:13, 시편 110:1, 시편 118:21-24, 이사야 53:9-12, 호세아 5:15-6:3, 스가랴 12:10, 등등에서 보이는 예언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는 죽음에 처해졌다가, 다시 살아나신다는 예언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구약에서 부활의 말씀을 그에 해당하는 예언으로 해석할 수 없는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서 이 뜻이 명백하게 담긴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조: 요한복음 2:19. 마태복음 12:38-42, 17:22-23. 20:17-19, 26:30-32, 요한복음 10:17-18, 16:16, 그리고 4복음서의 많은 말씀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제자들이 부활의 이야기를 제 나름의 상상으로 꾸며낼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부활에 관한 그 많은 예언을 성경과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서 듣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지부식 간에 부활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이 마침내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부활을 간증한다고 할 수 있다.

 

빈 무덤 (The Empty Tomb)

제자들이 확인한 부활의 첫 번째 증거는 속이 텅 빈 무덤이었다. 그리고 이 증거는 지금까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겹겹이 감쌌던 세마포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요한 19:39, 40). 그리고 시신만이 빠져나가 사라지고 폭삭 주저앉은 수의만이 그대로 남겨진 채로 있었다. 그 때에 요한이 무덤 안에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한복음 20:8) 라는 기록으로 보아 그들이 놀랬던 것도 당연하다. 현장에서 느꼈던 요한의 의심과 두려움은 당장에 놀라운 믿음으로 변했다. 폭삭 주저앉은 수의를 보고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리스도의 육신이 다시 살아나서 세마포의 묶음을 빠져나가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오르셨다는 사실말고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요한의 집으로 내달렸다. 그 놀라운 소식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알려주려고 그랬을 것이다(참조. 요한복음 19:27, 20:10). 얼마쯤 후에 무덤에 먼저 왔었던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들도 또한 무덤이 비어있음을 알게 되었다(누가복음 24:3).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영혼만의 부활이 아니고, 육신의 부활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영혼의 부활이라는 주장은 실질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영혼은 죽지 않으므로 '부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부활은 육신을 실제로 떠났던 영혼이 육신으로 되돌아왔을 때 일어난다.

빈 무덤의 간증이 너무도 극명한 까닭에, 그리스도의 적들은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부활을 깔아 뭉개버리기 위하여 사람을 아연실색케 하는 수많은 황당한 설명들을 고안해냈다. 그 첫 번째 고안은 제자들이 시신을 훔쳤다는 허구이다 (마태복음 28:11-15). 그따위 설명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제자들은 제 목숨이 아까워 다들 몸을 숨기는 일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더욱이 밀폐된 그 무덤 입구를 큼직한 바위덩어리가 가로막고 있었던 데다가, 로마 병사들의 경비도 삼엄했을 것이다 (마태복음 27: 62-66).

이 허구만큼이나 무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황당한 다른 고안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던 것이 아니고, 다만 쇠잔한 몸을 지탱하지 못한 나머지 졸도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주장이다. 예수는 죽었던 것으로 오해되어 매장되었다가 무덤 속에서 의식을 되찾고 일어나서 무덤을 떠났다는 줄거리다. 그토록 쇠잔한 상태에 있던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인가? 시신을 겹겹이 감싼 세마포와 몰약의 엄청난 무게를 그가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었으며, 로마의 봉인을 부수고,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큼직한 바위를 굴려버리고, 망을 보던 로마 병사를 어떻게 물리치고 제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인가? 이 어이없는 허구를 지지하는 사람들한테까지도 이 이론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 뿐만 아니다. 수없이 얻어맞고 무의식 상태에서 다시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다 흘리시고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쇠약해진 예수가 어떻게 겁에 질린 제자들 속에 온전한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나서 그들을 위무할 수 있었겠는가? 백보 양보해서 그랬다고 쳐도, 그는 조만간에 다시 쓰러져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그 이후의 부활의 설교는 허위가 아니면, 위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모든 조작들과는 달리,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빌라도는 로마 백부장에게서 이 보고를 받았다 (마가복음 15:43-45). 로마 병사의 창끝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옆구리를 잔인하게 꿰뚫어 (요한복음 19:34) ”곧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게” 하였다고 하는 내용으로 보아, 그의 심장이 완전하게 주저앉아버렸음을 증언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필두로 하여 베드로와 요한, 그 다음에 다른 여인들이 모두 엉뚱한 무덤에 들어갔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토록 멍청한 실수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당시 그곳에는 다른 무덤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곳은 아리마대의 요셉이 소유하고 있던 정원으로서(마태복음 27:60, 요한복음 19:41), 다른 사람의 무덤은 전혀 없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뿐만 아니다. 만약에 시신이 여전히 어디엔가 묻혀있었다면, 로마나 유대 당국에 의해 어렵지 않게 시신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주가 지난 후, 무리를 이룬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영접할 때, 로마와 유대 당국은 새로운 기독교 신앙의 확산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써봤으나 전적으로 실패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그들이 그냥 예수의 시신을 내놓기만 했어도, 기독교도들의 부흥운동은 하루 밤새에 송두리째 괴멸되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없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는 바로 그 몸으로 천국에 오르셨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The Appearance of Christ)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증거가 전부는 아니다. 그가 무덤을 떠난 이후 최소한 열 번에 걸쳐 여러 곳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들의 주님을 실제로 만났던 것이다. 아마 그의 나타나신 순서는 아래와 같이 되었던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요한복음 20:11-18; 마가복음 16:12)

다른 여인들에게 (마태복음 28:8-10)

베드로에게 (누가복음 24:34; 고린도전서 15:5)

엠마오로 가는 노상에서 두 사람에게 (누가복음 24:13-35; 마가복음 16:12)

열 명의 제자들에게 (누가복음 24:36-43; 요한복음 20:19-29)

여드레 후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20:24-29)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곱 명의 제자들에게 (요한복음 21:1-23)

오백여 그를 뒤좇는 형제들에게 (고린도전서 15:6)

야고보에게 (고린도전서 15:7)

승천하는 곳에서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사도행전 1:3-12)

그밖에도 그리스도는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다. 실제로 누가는 ”해(害)받으신 이후에 또한 저희에게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라고 했다(사도행전 1:13). 그는 확실히 스데반에게 나타내셨으며 (사도행전 7:56), 마지막으로 그는 드디어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 (사도행전 9:38, 고린도전서 15:8). 그리고는 다시 한번은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일이 있다(요한계시록 1:12-18).

자, 그런데 회의론자들은 여섯 곳에서의 나타났던 상황들에서 다양한 모순점이 드러난다고 지적하면서, 부활 후 그리스도의 나타나신 증거들을 부인하려 노력하였다. 그들의 지적한 내용은, 마태복음 28:8-20, 마가복음 16:9-20, 누가복음 24:13-15, 요한복음 20:11-21, 14; 사도행전 1:1-11, 그리고 고린도전서 15:5-8절의 기사들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저자들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주장한다. 물론 겉으로 나타나는 단순한 사실만을 보면 이야기 속에는 많은 피상적 모순점들과 탈락이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제자들이 그 어떤 모의 같은 불순한 일을 꾸미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일 수 있다. 만약에 그들이 이야기를 꾸며냈다면, 각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과는 독립적으로 제 나름의 이야기를 꾸몄을 것임이 확실하다. 이 대목이 진정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특히 지적되는 모순점들도 서로를 상세히 비교 분석하여보면, 봄눈 녹듯이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목격자들이 제 각기 유리한 입장을 내세우는 증언들이 피상적인 모순점들을 드러낼 때, 그것들을 면밀히 비교 분석해보면, 문제가 오히려 더 잘 풀린다는 사실이 증언의 법칙처럼 알려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현상이 바로 부활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의 경우에 해당한다.

부활 후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부인할 수 있는 마지막 한 가지 그럴듯한 책략은, 부활의 증언들을 몽땅 약물이나 최면 또는 히스테리가 원인이 된 단순한 망상이나 환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따위 황당한 가정은 확실히 자가당착적이다.

그들이 보았던 부활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만약 망상이나 환상이었다면, 그 환상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현상이 될 것이기에 최대의 주의를 경주한 정신분석적 논리적 정밀조사를 시도해봄이 옳을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집단 속에 섞인 수많은 개인들에게 나타나셨던 부활의 그리스도는 모두가 같은 모습이었다. 어떤 때에는 실내에서 또 다른 때에는 실외에서, 언덕 위에서, 한 길 가에서, 또는 호숫가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셨다. 더욱이 그들은 애당초 예수를 찾으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전에는 그들은 최소한 한번은 그를 실질적인 유령으로 오인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당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손에 상처를 알아보았다 (요한복음 20:27; 누가복음 24:39). 그들은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기도 했다 (누가복음 24:41-43). 한 번은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보았던 적도 있었다 (고린도전서 15:6), 그들 중 대부분은 그 때의 그의 나타나신 사실에 대한 증언이 필요할 때 살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환상이었다는 이론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여러 번에 걸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빈 무덤과 더불어, 그가 모습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은, 그의 부활을 어떤 역사적인 사실에 못지않게 확실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귀착시키고도 남는다.

 

사도들의 증언 (The Witness of the Apostles)

사도들이 설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더없이 진지하고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자신있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을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 그들이 비겁한 도망자로부터,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그의 부활을 선언하는 담대한 설교자로 변신하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즉각적이었다. 그렇게 열정적인 설교를 하려면, 그들은 재산상 손실이나 엄청난 박해는 물론이고, 끝내는 생명까지도 걸어야한다는 것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힘닿는 데까지 설교를 계속했다. 그들의 설교를 믿었던 군중들도 그들과 똑같은 박해를 받았다.

만약에 사도들이 이 모든 것을 조작했다면, 만약에 그들이 예수의 시신을 은닉하고 있었다면, 만약에 예수께서 어디에선가 병상에 누어 쇠잔한 생명을 겨우 이어가고 계셨다면, 혹은 만약에 그들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또한 만약에 그들이 만나본 대상이 예수님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허깨비인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들 모두가 (그들의 설교로 개종한 많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목숨을 내놓고 그와 같은 사기극을 계속할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세상 것으로 믿어지지 않는, 그 무엇이 그들에게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사건이야말로 세상 것이 아닌, 그런 것이었던 것이다!

빈 무덤과 더불어 여러 증거들, 부활의 그리스도의 거듭된 나타나심과 제자들의 변화, 출처 확실한 기록들, 그리고 당연히 2000년에 걸친 기독교 역사의 간증들을 종합하여 살펴본 견지에서, 러그비와 옥스퍼드의 역사 교수였던 세계적 역사학자인 토머스 아놀드 (Thomas Arnold) 와 같은 석학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한 사람의 공정한 조사자가 알고 있는 한에서, 인류 역사에서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하셨다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보다 더 확실하고 전폭적인 증거가 어떤 형태로서도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1]  

이와 비슷하게, 우리나라의 유능한 법학자들 가운데 한사람이며, 확고한 증거요건의 구성 문제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이고, 하버드 대학교의 법학과의 개척자인 시몬 그린리프(Simon Greenleaf)는 4 복음서를 객관적 증거물로서의 타당성 유무를 감안한 철저한 평가를 거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예수가 실제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에 못지 않게 확실하게 이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진술한 내용이 진실이라고 그토록 끈질기게 증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이 그 어떤 역사상의 사실에 못지 않게 확실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만약에 우리가 절대적 확신을 가지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천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서 무덤 속에 묻혔다가, 죽음을 이기시고 마침내 다시 살아나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창조와 부활 (Creation and Resurrection)

오늘날의 세계에서 죽음의 보편적 권세는 오직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저주와 지배의 관점에서만이 설명이 가능하다 (창세기 3:17-19). 이 죽음의 보편적인 법을 인간에게 씌우신 이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만이 그 법을 빼앗을 수도, 바꿀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한하였던 유일했던 육신의 부활은 그가 인간이었음과 동시에 하나님이셨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창조주께서 인간의 아들로 오셨음은, 그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었기에 죽음이 그를 묶을 수 없었다!

창조주의 최초의 사역인 창조는 세계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끝을 맺었다 (창세기 2:1-3; 히브리서 11:3). 창조의 사역은 애초부터 완벽하고 온전했다. 완성된 창조는 완벽했기 때문에, 덤으로 그 사역을 끝내기 위한 그 어떤 진화라는 허황된 과정 따위로부터의 도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그의 두 번째 사역인 속죄의 사역도 또한 완벽하고 온전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의 죄 값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시고 죽으시면서, 지옥 그 자체인 영혼의 죽음을 감당하신 후에 그는 승리를 외치셨던 것이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그 분은 당신의 영을 놓아주어 그의 죽음이 육신의 죽음이었다는 확증을 세우신 가운데, 시신과 함께 무덤 속에 묻히도록 허락하셨다. 삼일 후 그가 육신으로 다시 돌아와 육신에 영광과 영원한 부활의 삶을 나타냈을 때,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들 앞에, 당신 자신이 진정으로 창조주이심과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그리고 죽음은 영원히 그 독아(毒牙)를 잃어버렸음을 극명하게 알리셨던 것이다.

속죄의 값은 치러졌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그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요한계시록 21:5) 그날까지,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한테, 용서와 구원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다짐하신 그 분의 약속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Author : Henry M. Morris (Ph.D., Minnesota) is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This booklet is adapted from a section one of his books on scientific Christian evidences, Many Infallible Proofs (San Diego: Master Books, 1974, 381 pp).


1. Thomas Arnold Sermons on Christian life, Its Fears and Its Close, (6th ed., London, 1854), p. 324.
2. Simon Greenleaf,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New York, 1874), p.2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home/resources/resources_tracts_troc/

출처 - ICR, BTG,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72

참고 : 2970|638|3967|2942|5163|4870|5578|666|886|887|543|3795|669|2233|4439|4462|3334|3177|2044

Henry Morris
2016-03-23

스스로 있는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 성경에서 반복되고 있는 ”I am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25).

주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없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다면, 한 번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호된 꾸중을 하실 때, 그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진술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한복음 8:56). 그리고 그들이 그 확증을 대라고 요구하자, 예수님은 이어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8:58)고 하셨다.

스스로의 신성(神性)을 언명하는 예수님의 주장이 하도 대담해서 그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라고 단정하고, 당장에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대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든 '숨어' 몸을 피하셨다.(59절).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주장은 당연히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 죄에 대한 벌은 모세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한다.(레위기 24:16). 예수님은 이 대목에서 스스로를, 모세가 불꽃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던, 바로 그 분이라고 실질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who I am)”(NIV) 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3:14). 즉, 하나님은 시간은 물론 공간과 물질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그 분이라고 주장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아브라함이 서로 만났다고 하고, 아브라함이 그의 때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신 예수님의 주장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아브라함의 시대는 모세의 시대보다도 수 세기나 먼저 있었지 않았는가!

이 주장은 아마, ”여호와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육화(肉化) 이전에]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셨던 바로 그 중요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창세기 15:1).

이것은 낯설고 적의(敵意)마저 흉흉한 남의 땅에서 외로운 아브라함에게 보호자가 되고 부양자가 되겠노라 약속하실 때,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하신 최초의 엄청난 자기 주장의 말씀이다.


성경 안에서 ”나는 …이다 (I am)”라 하신 이 최초의 주장이 있은 이후, 나타난 빈도를 주목하여보면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나타나는 빈도가 7 회씩을 한 묶음으로 중첩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설계한 결과로 보기보다는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설계한 것 같다. (이것은 물론 나의 독단적인 계산에 근거한 가정이 정확하다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진 추론이다).

예컨대, 창세기 안에 ”나는 … 이다 (I am)” 라는 말씀이 일곱 번 기록되어 있다. 그 첫 번째가 창세기 15장 1절의 말씀으로서 이미 위에서 언급되었다. 두 번째는 창세기 15장 7절의 말씀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단순히, ”나는 여호와다 (I am the Lord)” 라고 하셨다. 이 'Lord' 라는 단어는 물론 히브리어 'Yahweh' (혹은 Jehovah)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본질적으로 'I am' 또는 'The One Whom Is (스스로 있는 자)'를 뜻한다.


그 다음에 ”나는 … 이다 (I am)” 라는 구절이 출애굽기에서는 21번 (3×7) 보인다. 그 속에는, 위에서 언급된바 있는,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that I am)” (KJV) (출애굽기 3:14) 도 포함되어 있다.


경이로운 책, 시편에는 ”나는 … 이다 (I am)”가 7번 보이는데, 그 말의 뜻은 육화된 그리스도의 미래의 고난을 예언적으로 슬프게 말하고 있다. 그 예가 아래와 같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I am a worm, and no man)” (시편 22:6).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I am poor and needy)” (시편 40:17).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I am....a stranger unto my brethren)” (시편 69:8).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I am full of heaviness)” (시편 69:20).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I am poor and sorrowful)” (시편 69:29).

”내가 밤을 세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I....am as a sparrow alone upon the house top)” (시편 102:7).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I am withered like grass)” (시편 102:11).

이 예들은 모두 시편에 있는 말씀으로서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어서) 특별히 메시아적인 시편(詩片)들인 것은 이 구절들이 그렇게 신약에서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서에서는 ”나 여호와는” 이라는 진술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의 뒷부분(40장-66장) 안에는 35(7×5) 번에 걸쳐 그와 같은 주장이 보인다. 첫 번째는 이사야 41장 4절의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가 그것이다. 마지막 번째는 이사야 60장 16절의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뒷부분의 주제와는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이사야서 앞부분에서는 ”나는…이다 (I am)” 라는 구절이 없다.


에스겔에서는 70번이나 (이 보다 더 많이 들어있는 단일 책은 없다) 그 위대한 주장이 들어있다. 예레미아에서는 이 주장이 21번 들어있다. 그 다음, 선지자들의 비교적 작은 소예언서들 속에는 21번에 걸쳐서 ”나는…이다 (I am)”의 주장이 들어있다. 전체 예언서들을 총 망라하고 보면, 총 154번(22×7)이나 하나님이 이 엄청난 ”나는…이다 (I am)” 주장을 언명하고 있는 셈이다.


구약성경 안에서 마지막으로 그런 주장을 한 곳은 말라기 3장 6절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 여호와는 변치 아니하니… (I am the Lord, I change not …)”라고 적절하게 당신의 영원하심을 재삼 새겨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 (I am)”, 즉 자존의 하나님이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 개개인의 구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똑같은 그 위대한 ”나 스스로 있는 자 (I am)” 되심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아름답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쓰인 ”나는 … 이다 (I am)” 라는 구절이 보이는 곳은 요한복음이다. 이 복음서에는 7번 보인다.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요한복음 6:35, 48, 51).

”… 나는 세상의 빛이니 … ” (요한복음 8:12).

”… 나는 양의 문이니 …  ” (요한복음 10:7, 9)

”… 나는 선한 목자라 …” (요한복음 10:11, 14).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요한복음 11:25).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요한복음 14:6).

”    내가 참 포도나무요 … ” (요한복음 15:1, 5)

이와 같은 주장들을 듣고 보았던 사람이 어떻게 그 주장들을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주장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글쎄…, 어쩌면 미친 사람이나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는지…?! 이도 아니라면, 뻔뻔스러운 사기꾼 같은 족속이 그럴 수 있을까? 어쨌든 간에 그 주장들이 진실이 아닌 다음에야 정직하고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주장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선택의 기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미친 사람이나 사기꾼으로 믿든지, 아니면 그를 진정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는가의 기로이다. 그 둘 중 택일하여야 할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의 내용이 육화되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진실로 유일한 분이시다. 누구라도 이 7 가지 위대한 ”나는…이다 (I am)” 주장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음미해본다면, 이 결론에 이를 것이다.


옛 사도신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very God of very God)” 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created all things by Jesus Christ)고 기록되어 있다.(에베소서 3:9). 그리고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사도행전 17:28). 더욱이 그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로새서 1:20).


요한복음 11:25-26절에 있는 놀랄만한 주장을 주목하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죽음은 언제나 인간에게는 엄청난 원수로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정말 참기 어려운 비극이요 슬픔이다. 대개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가능한한 장수를 위해 애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그의 생명을 되돌려줄 수 있으며, 그리고 영원히 그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신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한 말이라면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가!

그렇지만 그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되살아나 죽음을 물리침으로써 그에게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즉 자존하시는 존재다! 그러므로 그는 용서와 구원을 구하기 위하여 그에게로 오는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조금도 빠트리지 않고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하고 말하신다.


요한계시록에도 그 위대한 ”나는 … 이다 (I am)” 주장이 일곱 번 나타난다. 그리고 이 뜻으로 쓰인 중요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는 그의 부활과 관련이 있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요한계시록 1:18).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묻고 계신다. 오래 전에 마르다가 그녀의 동생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할 때, 예수님이 마르다를 보고 물으셨던 질문이다(요한복음 1:26). 이것을 보고,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어느 누가 감히 의심할 수 있겠는가! (텅 비었던 무덤, 부활 이후 수없이 많은 나타나심, 제자들의 변화, 그리고 또한 20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그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변화된 수많은 신도들의 간증 등... 그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또한 많다. 그런데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 없이 보내야하는 영겁의 시간이 을씨년스럽게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If you believe not that I am He [그러나 원전에는 'He' 로 되어있지 않았다; 예수는 'I am' 이라고 말씀했다 로 되어있다.]” (요한복음 8:24).

요한계시록에 있는 나머지 6 번의 ”나는…이다 (I am)” 구절도 역시 그 분의 영원하신 존재, 즉 영원에서 영원까지 존재하심을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다. 아래 열거된 예문을 주목해보라. 

”…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 (요한계시록 1:8).

”…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 1:11)

”…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계시록1:17).

”…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라…” (요한계시록 21:6).

”…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요한계시록 22:13).

”…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요한계시록 22:16).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영혼을 내맡긴 영광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오래 전에 자기 믿음을 위해 순교한 한 사람의 위대한 종교적인 스승 이상의 존재이시다. 그 분은 죽음을 영원히 이기시고 살아서 천국에 있는 그 분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 분은 우리의 위대한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시고, 왕이시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btg-a/btg-172a.htm

출처 - ICR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38

참고 : 3967|2942|5163|4870|5578|666|3376|3379|3381|3393|3395|3397|3425|3587|3592|886|887

Ivan Bowden
2011-12-28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

(The Creator God of the Bible)


      이 주제는 무궁무진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짧은 읽을 거리에 붙일 논설의 제목으로는 너무 무겁다. 그것은 마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논설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논하려한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요한계시록 21:1) 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베드로후서 3:13에서도 언급되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의 창조 이야기를 확실한 근거도 없이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옛날이야기, 또는 일종의 우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려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우화의 선량한 인물들과는 달리, 그들은 ”이후 영영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성경은 창세기를 우화는 고사하고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로도 지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창세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드린다고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의 생각을 전폭 수용할 것이다.

다시 베드로후서 3장과 요한계시록 2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왜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한지 묻게 된다. 슬프게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첫 번째 하늘과 땅은 뭔가 몹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오로지 의로움만이 거할 것이라는 찬란한 생각을 하면 소망에 부푼 우리 기운은 하늘을 찌를 것 같다. 이 세상이 잘못된 것 중에서도 특히 나쁜 것은 불의가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를 괘념하시는 동안에도 사람은 전적으로 의에 무관심하였다.

하나님이 첫 번째 세상을 만드실 때 사람이 살기에 단순히 좋은 곳을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뭔가를 일러두셨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때 말씀하신 메시지를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시편 95장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그리고 그렇게 해야할 이유는 이렇다.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104:1-7은 이렇게 읊고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세우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10절...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13절... 저가 그 누각에서 사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19절...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24절...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훌륭한 시편으로서, 그 시작을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라고 읊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실로 광대함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응답은 경배와 경외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대한 사람의 반응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전일성을 경배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두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다. 그런 마음의 메시지는 시편 33:6-8에 담겨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여기서 언급된 '경배 (worship)'의 개념을 고찰하여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보자. 교회에서의 주일날 아침예배는 '경배'의 예배라고 한다. 그런데 '경배'의 참 뜻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 인데 반하여, 예배 순서(Order of Service)에서는 많은 시간이 '얻는 것'에 소진되고 있다. 이에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권속들이 모두 모여 다 함께 하나님에게 자연발생적인 경모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는가!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기에 크게 칭송받아 마땅하시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속이라면 진정한 경배에서 당연히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하나님의 몫을 크리스천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심각할 정도로 빼앗고 있지는 않았을까? 심지어 하나님과 독대하고 있을 때에서까지 너무도 쉽게 크리스천은 ”하나님 이렇게 저렇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제발 이런 걸 주옵소서! 저를 보전하여 주옵소서. 저를 지켜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선교를 축복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이름에 마땅한 영광을 하나님에게 드리기 위하여 얼마큼 우리의 헌신적인 삶을 하나님에게 드렸는가를 자문하여야 할 것이다.

'경외' 라는 단어의 뜻은 새겨보아야 한다. 성경의 용어색인을 펼쳐들고 '경외' 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수련도 유용하리라─이 단어는 성경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인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시편 34: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언 9:10) 등등. 나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의 결여로 인하여 영적 이해의 분야에서 길 잃은 미아의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두렵다'. 오늘날 우리들 사이에는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수준에 있는 '친구' 급의 그 어떤 존재쯤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친숙함이 팽배하다. 때로는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도 격이 없어서 어쩌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 이웃집 어느 양반보다도 못한 것 같은 인상을 받기 쉽다. 유인물 안에서 하나님을 호칭 할 때 '그대를 (Thee),' 또는 '그대는 (Thou)'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 대한 찬반에 관한 말다툼이 아니고, 우리들보다 영원히 높으신 존재에 대한 숭배와 존경을 위한 강력한 논쟁이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하나님은 전소(全燒)하시는 불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그는 ”거룩, 거룩, 거룩하도다, 만군의 하나님이시요” 라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너무도 부정하다는 자격지심에 '내게 화 있을진저!' 하고 외쳤다.

계시록의 기록을 보면, 늙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그리스도의 환영을 만났을 때, 그는 죽은 사람처럼 주님의 발끝에 엎드렸다. 밤새껏 허탕을 친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만선을 채운 다음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는 ”오 주님이시어 저를 떠나옵소서! 저는 죄 많은 자이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의 사랑이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시기에 하나님의 당연한 몫인 거룩한 외경과 존경, 그리고 숭배의 감정을 일으키게 하시는 대상이신 까닭에 그가 느낀 두려움은 결코 비참한 두려움일 순 없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저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마땅히 경배하는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할 것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25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였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모시지 않고 제각각 뭔가를 경배하며 다른 것을 모시고 있다. 바울 사도가 사람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한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로마서 3:18절은, ”저희는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1:32절은 이와 같은 두려움의 결여를 강조하면서,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20세기 보통의 인간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10계명을 자의로 위반한 후 입맛을 한 번 쩍 다시고는 그 죄를 다시 범한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를 따라 죄를 범해보라고 다른 사람을 서슴없이 부추긴다.

오늘날 도덕적 가치에 대한 경박한 태도를 가져다준 책임의 일단이 텔레비전의 영향에 있다 할 것이다. 텔레비전은 천박한 비도덕적 기준을 마치 인간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인양 그리고 더할 나위없는 만족감과 쾌락을 가져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불행한 일이지만, 시청자는 TV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본을 연출하는 배우들에 불과하고, 연극 이야기의 일부분으로서의 결과는 좀처럼 죄스러운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특히 간음사건일수록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간음사건은 매혹적이며 재미있게 그려진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이 죄스러운 삶의 스타일이 행복과 만족으로 가는 길로 받아들이게끔 세뇌되고 있다. 그렇게 된 젊은이들은 인생의 안녕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고 자기네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치부하고 영영 잊어버리고 만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비웃다 못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배우지 못하고 만다.

 

창조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창조를 통하여 사람에게 주시는 또 다른 하나의 메시지는 로마서 1:20절에 이렇게 시작된다. 즉,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찌니라”

이사야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리고 21절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진실한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이 경배해 마지않는 숲이나 돌의 신들과 다른 점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늘과 땅이 그가 하나님이심을 그리고 그의 신성하심을 증명하고 있다.

 

사람의 응답은 복종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사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사야 45:22절은 그것을 명료하게 밝힌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응답은 몸과 마음을 바쳐 복종하는 뜻으로 그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어느 크리스천 사역자가 골프 코스에서 친구에게 간증하는 중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 하나님으로 자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자, 그의 친구는 즐거운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즉, ”나는 내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찾을 수 없어” 하자 그 크리스천 친구는, ”문제는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든지 않든지 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자네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기에 그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것이야.” 라고 대답했다.

풍요로운 20세기 인간은 자족감에 탐닉하기 일쑤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는 하나님이다. 모든 이는 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라고 하신다. 세속적인 제왕 (예컨대 헨리 7세)은 자기 백성 중의 누가 ”나는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면, 이를 순순히 봐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헨리 7세는, ”짐도 또한 너를 필요로 하지 않네... 이 자를 끌어내어 참수하라!” 라고 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사람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2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사람의 응답을 훌륭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진화론을 주장하는 주요 이유들 중 한 가지는 하나님이 진화론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인정한다는 암시이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없다. 우리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그의 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마치 사실처럼 가르치는 반면 하나님을 알리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무릎을 꿇지도 말며 머리를 조아리지도 말라”고 가르치는 구실로 삼는다.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한다.

세 번째로, 천지 창조는 하나님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앞서 시편 104절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거듭거듭 찬양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이루신 그 모든 경탄스러운 역사들을 일일이 열거한 다음 저자는 31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라고, 다시 시편 97:6절에서는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라고 소리높이어 읊는다. 어두운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의 향연을 쳐다보고 섰노라면, 우리들은 불현듯 ”하나님은 어찌 그리 영광스러운지요! 참으로 찬란하시며, 정말 웅대하시다!”라고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응답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 대목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시편 96:3-6절의 내용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같은 장 7절은,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라고 명령한다. 인간의 응답은 영광의 하나님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일이어야 한다. 계시록 4:11절의 말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그 이유인즉슨)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라고 읊으면 이 아니 좋은가!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자를 영광되게 하여야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장려함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그렇지 못하니 어찌 비극이 아닐까! 로마서 1장은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이러하여야 한다고 다시 일러주고 있다. 즉,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기에 저들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할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하여 인간에게 보내신 메시지 (하나님의 광대하심, 신성하심, 영광되심)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이 경배와 경외, 그리고 영광을 기쁘게 바치기를 기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로마서 1장을 통하여 보아온 바로는 하나님의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경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로마서 1장은 우리 세상이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인간사회에 죄가 없다면 인플레이션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지고 산다. 별 생각 없이 파손한 물건들을 수리하는 데만 쓰이는 돈이 매년 수백만 불이 넘는다. 생각 없이 긁어 상처를 낸 객차들이나 무심코 파손한 전화부나 공중전화 박스들로 해서 드는 비용이 매년 엄청나다. 뜻 있는 크리스천 경제학자한테는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죄스러운 행위로 인해서 드는 비용에 관한 책을 저술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에 당연히 합당한 방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오늘날처럼 절망적인 상태에 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로 인간에게 보낸 메시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부적절하게 보시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로마서 1장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즉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니” 라고 한다. 사람의 반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요약해서 '진노'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이 그의 창조의 역사에 드러난다. 그러나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의에 관한 마음을 나눌 수는 없다. 비록 경이롭지만, 창조의 메시지는 한정적이다. 따라서 사람은 계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새길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불의에 대한 의의 대응은 '진노' 라는 한마디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진노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부합하기에는 너무도 몰취미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점잖은 양반' 정도로 간주하고 있으며 진노의 마음은 얼토당토않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속성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에게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한다. (시편 7:11). 그리고 에베소서 2:3에 우리는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쓰여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대하여 진노로 반응하신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의 신경들 중의 하나에는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 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인간들한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발작적인 노기나 돌발적인 분노의 폭발 같은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불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그의 의로움의 반응이며, 인간의 죄에 쏟아 붓는 그의 거룩함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반응의 일단을 우리는 인간적인 경험을 통해서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다. A. H. Strong의 설명을 증폭하여 보자. 하나님이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법정을 상상해보라. 재판관 앞에 선 범인한테 변론의 여지가 없는 살인의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 때 방청석에서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얼굴을 한 어떤 남정네가 뛰쳐나와서 재판관 (하나님)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재판관님, 내 친구를 풀어주면 내가 10000불을 드리리다' 한다. 재판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의로운 재판관이라는 그가, ”내일 아침 차 마시는 시간에 보세”라고 할까? 천만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경관! 당장 이 자를 체포하여 법정에서 끌어내라!” 하실 것이다. 또한 이런 경우도 상상해 보자. 어떤 불한당이 원칙적으로 사는 의로운 사람한테 다가와서 그의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에 대하여 은근한 제안을 비춘다면, 그는 크게 격분하여 누이동생에 대한 자기 애정을 내비칠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인 이상, 불의에 거부감으로 반응할 것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경에서는 그러한 반응을 '진노' 라는 단어로 나타낸다.

그런데 어쩌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참으로 비참한 모습니다. 로마서 3장은 사람마다 너나없이 로마서 1장에 열거된 행동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를 경외하지도 않았다. 우리들은 그 앞에 자복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우리들의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의 '진노'다.

그렇지만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 반항적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진노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즐겁고 고무적인 뉴스이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인 이상, 인류는 반드시 두 가지 일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죄를 벌하신다는 것과, 둘째, 그는 의를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이 둘은 다 합리적인 기대다. 로마서 3:25절은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 죄는 구약성경을 믿는 자들의 죄로서 지나가 버린 것들이다.) 다윗이 간음과 살인을 범하였기에 율법에 따르면 당연히 투석으로 응징하여야 마땅한 그의 죄를 풀어주신 하나님은 진정 의로운 이신가? 하나님이 다윗을 풀어주신 것으로 보아 의롭지 않으신 이처럼 보인다고도 하겠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예수를 내가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웠으니...” 라는 말씀 속에 담겨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 가운데에는 '공공연히' 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골고다의 사건을 예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형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려고 그랬다. 그것은 하나님이 저 구약의 사람들이 저지른 죄들을 눈감아 주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의롭다 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들이 지은 그 모든 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죄시키려 예견하셨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의 독생자를 골고다의 제물로 세우기 위해 저들의 죄를 눈감아 주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 그 모든 형벌을 혼자 감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의 사람들이 지은 죄를 눈감아 주셨던 일에 대한 정당화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인간의 문제는 명백하다. 만약 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벌하여야만 하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였으니” (로마서 3:23),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피하려는 희망을 어느 누가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개념을 싫어하는 신학자들은 '위무(慰撫, propitiation)' 라는 단어 (어떤 번역에 있는 속죄(贖罪, expiation) 라는 단어와 대조하여)가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을 위무한다. 그런데 '위무' 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려놓는다는 생각을 내포한다.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라는 책에서 리온 모리스 (Leon Morris)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즉, 이것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닭을 죽여 하늘에 드리는 제례 과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이 지은 죄에 내려질 징벌을 혼자서 감당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처리를 바꾸게 하였다. 하나님은 진노 대신에 이제는 긍휼로 반응하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그의 진노와 그의 율법 그리고 그의 의가 이제는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이로운 뉴스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즉,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무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신앙을 가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대신에 긍휼을 받을 것이다.

어쨌거나 의로운 하나님은 의를 요구하신다. 그는 진정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모던니스트들은 비록 동전의 한 쪽만을 보고 있다지만 옳은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영원히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모두가 다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그렇지만 그의 의는 의를 요구하신다. 그런데 어느 누구가 하나님께서 설정해놓으신 완벽한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시 이런 질문이 우리를 찌른다. 즉, ”어떤 희망이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한 팔로는 우리를 영원히 함께 하자시며 사랑의 포용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지만, 다른 한 팔로는 완벽한 순수성을 요구하는 그의 의로 인해서 우리를 밀어내며 곁을 안 주신다. 하나님의 애증의 양면성 속에 내재하는 이와 같은 갈등도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 로마서 3:2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용서를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선언한다. 정당화하는 역사는 (로마 가톨릭 교리가 가르치는 바처럼)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해서 발표하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관해서 언급되는 그 무엇이다. 피진 신약성경(Pidgin New Testament)은 의롭다 하려 하시는 (justification) 행위를 ”하나님은 그가 옳다고 말씀하신다. (God say him all right.)” 로 번역하였다. 가히 정곡을 찌른 표현이 아닌가!

클로이든 성경학교(Cloydon Bible College)의 전임 학장, 차스 롤즈 박사 (Dr. Chas. Rolls)는 의롭게 하는 행위 (justification)에 대해서 아주 괄목할만한 해설을 한 적이 있었다. 겟세마네 정원에서의 사건(예수가 배신을 당하던 날 밤)이 벌어질 때, 용감한 베드로가 검을 휘둘러 말고(Malchus) 라는 사람의 귀를 잘라버렸다. 이 자는 바로 대제사장의 하인이었다. 예수님은 다정하게 당신의 손으로 그 떨어진 귀를 집어 들고 제 자리에 갖다 붙이셨다. 그런데 말고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호의를 아직은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돌아가 대제사장에게 이와 비슷하게 보고했을 것이다. 즉, ”저는 예수의 추종자들 중 한 사람에게 원한이 있습니다.” ”아, 그래! 무슨 짓을 하였던고?” 대제사장이 대꾸를 하자, 그는 ”그놈이 제 귀를 잘라내었습니다.” 했을 것이다. 그 대제사장은 그의 한 쪽 귀를 쳐다보고는 다른 귀도 살폈다. 그리고는 이 자가 혹시 세 번째 귀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고 의아해 하였을 것이다. 그의 두 귀는 말짱하였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 베드로에게 어떤 죄목을 과하여야 하겠는가? 당연히 유죄 판결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는 무죄판결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 귀를 복원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법은 그를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람의 문제다. 만약에 의로운 하나님이신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조건으로 의로움을 요구한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다가가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이 자격을 딸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그 중 한 가지는 로마서 3:25-26절에서 말씀하신 의다. 즉, ”예수를 화목 제물로 받아드림으로 인해서 하나님 당신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의로우심이고, 다른 한 가지는(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고, ”선물로 받은 의롭게 됨”을 말한다. (로마서 5:1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다 여기신 의(로마서 4:3)가 그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제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내기 어려운 문제의 해법을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경이로운 대답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 얻은 의로움이 아니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로움으로 인해서 천국 입국사증을 얻게 된 것이다.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따져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나선 우리들의 일차적 모습은 무한대의 마이너스였다... 천국 입국자격 심사에서는 아득히 먼데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로 인한 죽음이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나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그리고 구세주로 영접할 때면, 하나님은 예수의 그 죽음으로 얻는 이익을 내 계산서에 기재하시어 나의 죄를 하나님께서 온전히 용서하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다. 사실 그 결과로 내 죄의 기록은 영(零)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경이로운 일은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된 일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는데─그것은, 내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계산서에 계상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내 계산서에 계상되어 나도 또한 사랑받는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드려진다는 일이다. 내가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은 나를 보다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안(聖眼)으로 보시기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서 그가 정당하게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당하지 못하게 아무한테나 천국입국사증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범인이 50만 불을 횡령하고 도주한 죄벌로 형기를 다 마쳤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그가 출감하였을 때에도 그 오명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예전에 근무하던 은행에서 그를 받아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권속으로 받아드려진 이상 우리의 죄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진다.

애미 카밍클 (Amy Carminchael)의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이 아니고
내가 죽을 죽음이 아니고
또 다른 삶, 또 다른 죽음에
나는 나의 영원을 온전히 걸리라.

당신은 과연 어디에 당신의 영원을 쓰시려 하십니까?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쓰시렵니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 곳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이 사람은 확신한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3/i3/creator.asp

출처 - Creation 3(3):36–45, August 198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43

참고 :

김무현
2004-11-12

과학과 종교의 싸움이 아닌 세계관의 싸움


      흔히 일반대중들에게는 창조와 진화의 논쟁이 주관적인 종교와 객관적인 과학의 갈등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종교는 윤리적으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고, 과학은 물질세계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니 서로 갈등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인간의 머리에서 만들어낸 윤리적 경전이나 모범적 도덕교과서 정도로 생각한다면, 성경과 진화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창조주에 의한 무에서 유로의 창조와 성경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참 계시임을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과 진화를 동시에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화란 모든 것에 초월적 전능자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자연주의(naturalism)에 입각해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기원 이론이 동시에 참일 수는 없다. 만약 성경과 진화를 동시에 믿는 분이 있다면, 성경이나 진화론이 무엇인지 아직 확실히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진화론은 참 과학이 아니다. 진화란 창조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관찰할 수도 없으며 실험실에서 증명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는 과학적 가설 및 추론이고 배경신념이지, 과학적 이론이나 법칙이 될 수 없다. 창조와 진화는 두 배경신념, 즉 두 세계관의 싸움이지, 종교와 과학의 싸움이 아니다. 차라리 기원에 관한 두 종교의 싸움이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일반 대중들과 마찬가지로, 진화론이 마치 객관적으로 충분히 증명된 과학적 사실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다. 그래서 창조와 진화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면 될 수 있는 대로 회피하려 한다. 성경을 대하는 입장도 창세기를 포함한 전체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 믿지 않고, 대신 구속에 관한 중심내용만을 계시로 보는 그런 추세로 가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시편 33:4)

하지만,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성경의 많은 저자들이 성령님의 인도로 창세기를 포함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참 계시로 기록되었다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예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요한복음 5:46-47)

크리스천들의 그러한 회피와 패배의식 때문에 교육기관과 교과서에서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진화론 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우리들의 자녀들은 그 안에서 더욱 자연주의로 세뇌되며 신앙의 혼란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진화론으로 세뇌된 자녀들에게는 창세기의 창조는 사람이 만들어낸 그리스-로마 신화정도로 들릴 것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고린도전서 1:21)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기원에 관한 한 오직 창조와 진화의 두 가능성밖에 없다. 즉 초월의 전능자가 다 이루셨느냐, 아니면 철저히 자연현상으로 150억 년에 걸쳐 분자들이 부딪히다 보니 확률에 의해 여기까지 왔느냐는 두 가능성뿐이다. 후자를 믿으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동시에 믿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폐가 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무에서 유로의 창조(히브리어 바라(bara))를 선포하고 있다. 특히 생물의 종들도 진화된 것이 아니라, 종류대로 창조된 것(bara-min)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미국의 지성인들을 위한 주요 잡지들 중 하나인 『American Spectators』 2001년 1월 판에는 진화론의 기둥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제목의 특집호가 실렸다. 그 내용인 즉, 진화론을 입증하는 핵심적 증거라고 교과서에 실려있는 내용들의 대부분이 이미 전문과학자들 사이에서 부정되었거나, 부정되어 가는 추세거나, 또는 적어도 지지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항들이, 아직도 중•고교뿐만 아니라 대학의 과학 교과서에 내용이 수정되지 않은 채 과학적 사실로서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틀린 내용들이 아직도 교과서에 남아있는 것일까? 만약 그러한 근거 없는 자료들을 현행 교과서에서 모두 제외시켜 버린다면 진화론 Chapter는 오직 서론만이 남기 때문일 것이다.


섬세한 과학적 연구는 우리가 현재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는 진화론이 잘못된 것임을 계속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의 과학에서의 현 위치가 과연 맞는 것인지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이 기존의 진화론의 핵심요소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라면, 그 핵심사항들의 거의가 틀렸거나 잘못 해석된 것이라면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진화론은 과연 과학인가, 신화인가? (Is evolution science or myth?)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312

참고 :

김무현, 유상수
2004-08-27

세속적 세계관 부수기


     주) 이글은 김무현, 유상수 공저 도서인 「세속적 세계관 부수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도서안내를 보실 수 있습니다.

 

1. 무엇이 문제인가?

몇 년 전 한국 해군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던 한 캐나다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방송되고 있는 TV 프로그램 중에 동성 연애자의 생활을 소재로 한 내용이 흔히 나오며, 더욱이 동성 연애자들의 법적인 보호는 어떤 수준을 넘어서서 만일 어떤 사람이 동성 연애자라는 이유로 피해를 당할 경우, 그 가해자는 소수인들에 대한 차별로 가중 처분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성 연애에 대해서 우호적이던 캐나다가 급기야 2003년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이어 세 번째로 동성간의 결혼을 합법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전반적인 가치 기준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때때로 발견하곤 합니다. 그것도 약간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정반대의 가치 판단이 새로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옆 그림에서 보듯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힘들게 이 거대한 문제들을 떠받들고 있는 한 사람. 그리고 기초는 어디론가 사라져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도 부족해서 계속해서 이 모든 문제들을 지탱해야만 하는데 드는 땀과 수고.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는 단지 인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가치관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성경은 과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19-22)

한국도 이미 예외는 아닙니다. 동성 연애, 음란 문화, 낙태, 안락사 등 다양한 문제들의 우리 곁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등장은 아마도 큰 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중세의 타락한 교권의 남용에 의해서 억압당했던 인간의 자유로운 이성이 표출되면서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면에서 인본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창조주의 존재와 계시를 부정하고 자연주의에 기초한 인간 이성의 바벨탑을 다시 쌓기 시작하였다는 것과, 또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근본적이고도 새로운 사회 문제들의 생겨나기 시작하였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한 ‘인간 위주의 생각’이 인간 자체와 피조세계에 대한 가치 기준을 전혀 다르게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며 확실하지 않은 한 ‘생각’이, 지금은 학문 전체의 기초가 되는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아 과학 분야 뿐만 아니라, 인문학 및 사회학 전 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여러 사회 제도 및 가치관들을 세워 나가는 데에도 그 배후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을 근거로 하나씩 조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동성 연애

미국의 200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약 60만이나 되는 동성 부부(same-sex couple; gays and lesbians)들이 전 50주에 걸쳐 존재하며 캘리포니아주에만 16%가 살고 있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통계가 이 정도이니 실제로는 더 많은 숫자가 존재하리라 생각됩니다.

최근에 미국 루터교에서 동성 연애자를 목사 안수함으로써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 문제로 미국 장로교단이 PCA와 PCUSA로 갈라지게 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이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서클 내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 몇 주에서는 공립학교 교과서 안의 가족에 관한 내용 중 “결혼이란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수정하여 교육하고 있다고 합니다.

먼저 동성 연애(Homosexuality)에 대한 세속적 가치관을 이해하기 위하여 『크리스천 헤럴드』에 실린 다음의 기사를 읽어보십시오.

미 캘리포니아 네바다 감리교 연합회가 동성 연애 결혼에 주례를 선 목사들에게 처벌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하면서 ‘동성 연애’가 기독교내에서도 분쟁의 이슈가 되고 있다. 이제 사회적 문제뿐만이 아니라, 교회도 이로 인해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개방주의 종교인들이 최근 모여 작성한 선언문에는 동성 연애자들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가져야 하며, 이는 교회생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적혀져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동성 연애자법은 어떠한가? 교계가 나서서 이를 저지하기에 나서고 있지만 동성 연애자들이 사회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이익을 보장받고 나아가서 동성애를 비난하면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으며, 학교에서도 동성애가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가르치게 되는 이 법이 시행되면 기독교적 윤리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 지경이다.

성경에는 죄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동성 연애가 이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교회까지 물들이고 있다. 이제 동성 연애법이 시행되면 동성 연애가 죄라고 말하는 것도 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니… 이제 하나님의 말씀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인간들의 목소리가 성경의 진리를 억누르게 되는 것인가. 남자끼리, 여자끼리 ‘결혼’을 하고 이들을 ‘부부’라고 부르며, 여느 남-여 커플과 똑같이 대해 주어야만 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그리고 앞장서서 이를 반대해야 할 교계가 사랑과 이해라는 명목으로 이를 눈감아 주고 오히려 나서서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많은 기독교인이 반발하고 걱정하고 있다.

『교회와 동성 연애』라는 책을 발표한 제프리 S. 사이커 장로교 목사는 동성 연애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흔들리고 있다.”며 “불변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위협받고 있다.”고 밝혔다.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꾸짖으며 하나님의 원리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를 다르게 해석하거나 무시한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바뀔 수 있으며 마음대로 해석될 수 있고 사회에 따라 완전히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진리가 무엇이며 기독교가 무엇이 되는가?

교회가 동성애 이슈에 적당히 타협하고 동조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죄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이라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믿고 있다. “동성 연애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동성 연애자들의 권위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점점 교회의 입장은 곤란해지고,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마치 ‘시대적으로 뒤쳐진 한심한 사람들’로 생각되고 있으며, 인종 차별이 사회적으로 지탄받듯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죄가 되어 가는 사회. 이에 동조하는 교회.

교회마저 갈라 놓고 있는 동성 연애.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최대 이슈이며 이번 미국 선거에서도 가장 뜨거운 토픽거리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우리의 삶의 터전이 점점 더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가는 이 시점에서 한인교계라도 나서서 이를 바로잡아 동성 연애법을 반대하며 동성 연애가 교회로 침투해 오는 것을 막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미국인들은 흔들리고 있다. 미국교계도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한인 기독인들이 한 마음을 뭉쳐 나서야 할 때이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법과 사회 규약이 어떤 것을 정하면 그저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요. 궁극적으로는 자신도 그 사회의 패러다임 속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그 법과 규약 안에 구속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크리스천들이 사회의 이런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을 통해 동성 연애에 대해 조망해 보도록 합시다. 동성 연애가 왜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결혼에 대한 기초가 창세기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결혼을 말씀하셨고 정의하셨으며, 그것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임을 발견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하나님께서는 아담(남자)와 하와(여자)를 창조하셨지 결코 아담(남자)과 또 다른 한 남자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남녀 모두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특정한 창조 원리 및 역할과 규칙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 근본 원리를 파괴시키려는 법이나 제도 등에 대해 반대해야만 하는 명백한 이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성 연애는 반 창조 원리적이며 성경적으로 옳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 때문에 틀린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께서 틀렸다고 말씀하시기에 틀린 것입니다.

"너는 여자와 교합(交合)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加增)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 20:13)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신 22:5)

신약성경 말씀에서도 바울 사도께서는 고린도 및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the sexually immoral)나 우상 숭배하는 자(idolaters)나 간음하는 자(adulterers)나 탐색하는 자(male prostitutes)나 남색하는 자(homosexual offenders)나 …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일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4, 26, 27)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롬 1:32)

이 공부를 하는 동안 우리가 꼭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을 사랑하시며 그 죄의 경중이 어떠하든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시고 그 예수님을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믿기만 하면, 그리고 그분을 우리의 마음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들을 살펴보며 우리의 ‘정죄의 눈’을 훈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로 그치지 말고 그들에게도 어떠한 죄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진화론자들은 오히려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고등동물에게 흔히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동물의 세계를 한 번 잘 관찰해 보라고 합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동물을 통하여 발견하려 합니다. 세속적 가치관이 동성 연애를 어떻게 이야기하든 하나님은 동일하게 멸망받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갖고 있는 형제나 자매가 우리 주위에 있다면 그들에게 먼저 그들의 삶의 방식이 분명한 죄악이며, 그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의 용서함이 있을 것이며, 성령님을 마음속의 주인으로 모심으로 그러한 육체적 죄와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동성 연애를 옳은 것이라 인정해 주고, 그들이 계속 죄악 속에서 살도록 방치해 둔다면 이것이 그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일까요?



링크 - http://www.creation.or.kr/library/itemview.asp?no=1932

출처 - 세속적 세계관 부수기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76

참고 :

김무현
2004-08-27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주) 이글은 김무현 저서인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도서안내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 26절에 어떠한 예언이 선포되었으며 열왕기상 16장 34절에 그 예언이 어떻게 정확히 이루어졌는지 묵상해 보십시오(참고: 계자 = youngest son).

"여호수아가 그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수 6:26)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왕상 16:34)

여호수아 6장 26절에 여리고성의 정복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고 강력하게 선포하십니다. 아합 시대 벧엘 사람 히엘이 그 예언에 불순종하여(왕상 16:34)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려다가, 여호수아서의 저주의 예언대로 정확히 첫째 아들과 막내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까지도 강력하게 경고하시고 심한 처벌을 주셨을까요? 여리고성의 유적과 폐허는 하나님의 승리와 심판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서 후대에 남겨 놓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심정은 여호수아 4장 6-7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수 4:6-7)

얼마 전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한 비종교학자가 썼다는 『예수는 없다』라는 책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여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비평한 책으로서, “창조나 노아의 방주나 아브라함이나 여리고성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구약성경은 신화에 불과하며, 만일 선하신 신이라면 구원은 여러 다른 길로 베푸실 것이지, 성경대로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으로만 한정지을 리가 없다.”는 식의 내용을 설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청년들이 이러한 책을 보면서 신앙이 흔들리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 24:4)

만일 그런 분들이 있다면 이 교재를 통하여 자신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한 책들은 대부분 일부 근거가 희박한 사실을 원하는 목적대로 그럴듯한 논리 체계로 부풀려서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사람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성서 고고학의 대가 넬슨 글루엑 박사가 “성서의 기록이 고고학적 발굴에 있어서 확실히 부정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발견들은 성경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기록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라고 천명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밝힌 바 있습니다.

다음은 예일대학 고고학자 버로우스(Millar Burrows)박사의 고백입니다.

자유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과도한 의심은 그에 관한 데이터를 섬세하게 분석하여 유추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초월자를 전격적으로 배격하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고고학의 발견들은 성경의 역사적 기록들이 신뢰할 만한 것임을 더욱 강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세속학자들이나 자유신학자들은 애초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없다는 배경 신념 하에서 모든 것을 조사하고 결론짓기 때문에 과연 그러한 편견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엔티적인 비평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의 신뢰성을 더욱 강하게 해 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도 예외는 아닙니다. 1999년 『Creation Ex Nihilo Journal』에 실린 성서고고학의 대가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 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굴들이 성경의 내용을 정확히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논문은 1900년대 초기와 중기에 독일과 영국의 탐사 팀 그리고 최근(1997) 이탈리아 탐사 팀에 의해 밝혀진 여리고성 유적의 발굴에 관한 보고서를 분석한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리고성은 외벽과 내벽 두 겹으로 되어 있으며(뒷 페이지 그림 참조), 외벽은 5m 정도 높이의 기초 성벽(retaining wall) 위에 두께 2m, 높이 7m의 진흙 벽돌벽(mud-brick wall)을 세웠으며, 내벽은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14m 정도 되는 둑(embankment) 위에 다시 높이 솟아오른 내성벽(inner mud-brick wall)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난공 불락의 구조를 가진 이중 벽의 성으로서 양식만 풍부하다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는 그러한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 3장 15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에 도달한 시기가 추수가 거의 끝나 그 성안에 양식이 풍부한 때였음을 보여 줍니다. 놀랍게도, 고고학자들에 의해 실제로 발굴된 여러 항아리들 속에 성경이 말한 대로 곡식이 가득 들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렇게 양식이 풍부했던 난공불락의 성이 어떻게 그리 쉽게 함락되었을까요?

여호수아 6장 20절에 보면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비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리 에너지(acoustic wave energy)는 극히 미약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사는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의 발굴 팀(성경학자들이 아닌 세속학자들)은 한결같이 강력한 지진 운동의 확실한 흔적이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흔들어 벽을 무너뜨렸다는 겁니다. 혹자는, 그렇다면 지진이 우연히 자연 현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되묻겠지만, 그와 같이 정확한 장소에 그리고 그렇게 정확한 시각에(온 이스라엘 백성이 합하여 소리칠 때) 땅을 흔드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으며, 그것이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위의 “무너져 내린지라(fell down flat).'는 히브리 원어로는 ”그 아래로 무너져 내린지라(fell beneath itself).'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외성벽(outer mud-brick wall)이 수직으로 솟아 있는 그 밑의 기초 성벽(retaining wall) 바깥으로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성들은 바깥에서 사다리를 올려 놓고 밀고 들어오는 침입자들에 의해 안쪽으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쪽으로 무너지면 그 무너진 돌들을 밟고 내려가 그 성을 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 성을 함락할 만한 사다리도 갖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외성벽이 안쪽으로 무너졌다면 5m 나 되는 수직 기초 성벽을 올라갈 방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발굴 팀의 조사에 의하면 여리고성은 특이하게도 기초 성벽 위의 진흙 벽돌(outer mud-brick)들이 모두 그 아래의 기초 성벽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무너져 내린 진흙벽돌들이 완만한 경사면(ramp)과 같은 역할을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계단처럼 쉽게 밟고 올라가 그 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도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 5절에 보면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라고 되어 있고 또한 6장 20절에도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The people went up into the city, every man straight before him(straight up and over, Joshua 6:20)라고 증거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독일 발굴 팀의 보고서에 의하면, 북방의 외벽에는 집들이 그 벽에 붙어 지어져 있었는데, 오직 한 부분만이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라합의 집에 외 성벽에 붙어 지어져 있었으며, 여리고 정복 시 라합의 가족들은 집 속에 들어가 살아남았다고 되어 있습니다(수 6:22). 아마 그것이 라합이 살던 곳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또한 여호수아 6장 24절에 보면,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발굴 팀에 의하면 땅을 파고 들어가면 1m 정도의 두께나 되는 탄재와 그 흔적들이 나오는 층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가장 특이한 사실은 그 탄 것들 중에 곡식이 가득 담긴 저장 항아리(storage jar)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만약 가나안 전쟁을 계속 치러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중요한 군량미를 다 태워 없애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고 상식적으로 난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해답이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수 6:17-18).

즉 여리고성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100% 하나님께서 하셨고 그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즉 우리가 취한 것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쟁을 호르마(Hormah ; dedicated by complete destruction)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대하 20:15)

그와 같이 항아리에 가득 담긴 채 남아 있는 탄 곡식의 유적은 성경이 모두 역사적 사실대로 기록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들을 분명히 후세에 남겨 놓고 싶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의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속 성경 비평학자들의 근거 없는 주관적 역사 해석에 조금도 흔들리지 마십시오(그 세속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도 많은 경우 오차가 있는 탄소 동위원소법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그 진리가 사실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전에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 앞에는 어떠한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성벽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참조 : The walls of Jericho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1/i2/jericho.asp



링크 - http://www.creation.or.kr/library/itemview.asp?no=2173 

출처 -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77

참고 :

Henry M. Morris
2004-07-28

진화론과 뉴에이지


       최근에 이상야릇한 종교 하나가 눈에 띄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때때로 '새시대 운동(New Age Movement)' 이라고 왜곡되게 불려지는 이 현상은 실제로는 점성술, 심령과학, 종교적 신비주의, 그리고 자연숭배 사상에다가 시스템 이론, 컴퓨터 과학, 수리 물리학 등이 어우러진 현대 과학과 고대의 이교 우상숭배의 혼합체이다. 이 영향력있는 체계는 표면상으로는 황폐한 서구의 물질주의 사고에 대항해서 그 반작용으로 야기된 것으로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과 지적인 자만심에 호소한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세상의 종교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비록 새시대 운동가(New Agers)들이 종교의 형식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신'은 진정한 창조의 하나님이 아닌 진화(進化)이다. 그들 중 대다수는 Teilhard de chardin 이라는 의심스러운 제사장을 그들의 영적 아버지로 간주한다.1 믿음에 대한 그의 유명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진화론)이야말로 금후로부터 모든 이론들과 가설, 그리고 체계들 위에 설 일반적 원리이며, 또한 이것들은 진화론을 믿을만하고 진실된 것으로 충족시켜 주어야만 한다. 진화론은 모든 사상적 조류가 다 추종해야만 될 궤도 즉 모든 사실을 비추는 빛이다.” 

동양의 민족종교(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 등)들은 대부분 고대 이교숭배의 다신론적 범신론을 유지하여 왔으며, 우주와 생명체들에 대하여서는 진화론적 견해를 오랫동안 신봉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들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용이하게 새시대 철학의 진화론적 골격과 융합된다. 그러나 서구의 가장 탁월한 두 과학적 신다윈이즘의 옹호자인 줄리앙 헉슬리(Julian Huxley)와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ansky)가 사실상 이와 같은 현대 진화론적 종교의 초기 옹호자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도브잔스키의 사망 당시, 그를 기리는 글에서 유전학자 아얄라(Francisco Ayal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도브잔스키는 개인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같이 전통적 종교에 대한 근원적 믿음은 거부하였지만, 그는 종교인이었다. 그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물학적 진화가 자기 인식과 문화의 영역 그 자체를 초월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은 결국 조화와 창조력에 있어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형이상학적인 낙관론자였다.” 2  

도브잔스키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전형적인 새시대 운동의 느낌에 대하여 썼다.

”사람들을 부추기는데 있어, 우주 역사 가운데 비교적 최초의 유일한 시간으로서의 진화 과정이 그 자체적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3  

좀 더 최근의 사회학자인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이와 같은 개념을 다음과 같이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다.

”진화는 더 이상 분별력 없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종(species)과 관재된 것 이상의 어떤 영역으로 확장하는 마음이다.” 4

”이와 같이 하여 사람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물에 대하여 질서와 구조를 감독하고 지휘하며 선사하는 마음(mind)으로서의 우주의 이상에 이르게 된다.” 5 

어느 누구도 이것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같은 우주적 마음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버드 대학의 노벨상 수상자였던 생물학자 조지 왈드(George Wald)는 심지어 문장 가운데서 '하나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싫어한다고 언급하곤 하면서도, 이 우주의 복잡한 조직은 우연에 의한 것일 수는 없다고 하며, 범신론의 이와 같은 현대화된 형태의 옹호자가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과학에 근거한 두 가지 주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다만 과학과는 동화될 수 없는 의식과 우주론이다. 우주는 밝히 드러나 알려지기를 원한다.” 6 

현대 물리학자들은 '엔트로피 원리'라고 불려지는 법칙으로 최근의 진화론적 범신론의 보급에 주된 역할을 하여 왔다.

”적어도 엔트로피 원리는, 생물학과 거의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존재와 물리학의 양상 사이에 관계를 제시한다. 이 강력한 원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지적인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오직 상상 가능한 유일한 세계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7

인류 거주자에 대한 우주의 이와 같은 조화는 그들에게 있어 신의 설계에 대한 증거로서 채택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우주적 마음의 결정적인 소산으로 받아들여진다. 

엔트로피의 원리는 유사 단체인 '새시대' 출판물에 다음과 같이 강조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창세기의 창조주간의 신비보다도 훨씬 더 신비스럽다.” 뉴저지주 프린스턴 과학연구소의 물리학자 프리만다이슨(Freeman Dyson)은 ”어떤 의미에서 우주는 우리가 생겨난 것을 밝혔어야만 했다”고 언급하였다. 8

 이와 같은 현대적 진화에 앞서, 신다윈니즘 체계의 확립에 앞장 선 헉슬리 경은 '계시 없는 종교 (Religion Without Revelation)' 라는 영향력 있는 책을 썼으며, 존 듀이와 함께 미 휴머니스트 협회의 창립 주동자가 되었다. 유네스코(UNESCO)의 최초 의장으로서 그는 그가 바라는 세계적 공인 종교의 원칙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유네스코의 일반적 철학은 과학적 세계 휴머니즘이 된 것으로 보이며, 범세계적이면서도 진화론적 배경을 지니게 되었다.” 9

”경험과 의식과 목적이라는 단일의 일반적 푸울(pool)에 전통을 통합하는 것은 인류진화에 있어서 미래의 주요한 진보에 대한 필수 선행조건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종류의 세계 정부의 정치적 통합이 비록 제한적으로 달성된다고 할지라도 의식의 요소들에 대한 통합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타입의 통합에 대한 길도 열 수 있을 것이다.” 10 

네오다윈이즘의 신봉자들(헉슬리, 도브잔스키, 듀우이 등)은 진화론적 점진론이 다가오는 세계 휴머니즘 종교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새로운 세대의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자들에 의하여 점점 더 폭로되어 가고 있는 점진론의 과학적 결함 때문에 대부분 이성적인 것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바뀌어 '혁명적 진화론'(Punctuationisim)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 진화론은 동양적 신비주의에다가 서구의 과학주의의 융합을 촉진하였다.

”새로운 체제의 생물학은 방황 변이들이 자기조직(self-organization)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은 살아있는 생명 세계의 질서의 기본이다. 즉 정렬된 구조는 리듬있는 형태로부터 기인하며 질서 의기초로서의 변이의 아이디어는 모든 도교(道敎) 경전의 된 주체이다. 모든 실제 양상의 상호 의존성과 비직계 자연(nonlinear nature)의 상호 연관성은동양적 신비주의를 통하여 강조되고 있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카프라 박사(Fritiof Capra)의 말은 인용한 이 글의 저자는 주로 과거와 미래의 진화론의 연구에 대한 현대 컴퓨터 네트웍과 시스템 분석의 응용과 역시 '혼돈을 통한 질서'라는 비과학적 아이디어를 다루고, 프리고진(Ilya Pregogine)에 의하여 현대 사상에 재소개된 고대 이교도의 생각을 다루는 새시대 운동의주요 과학 이론가 중의 한 명이다.

서구 진화 사상과 동양적 종교 진화론의 혼합은 6O명의 학생 진화론자들에 의한 '보병궁 시대'(Aguarian Age)의 강조로 매우 손쉽게 되었다. 모든 과학적 '새시대 운동가'들이 운동의 점성술과 마술적 양상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현상은 범신론적인 차원의 성행함과 함께 점점 더 현저해지며 지적으로도 용납되고 있다.

존 알레그로(John Allegro)는 다음과 갈은 불길한 예측 하였다.

”우리의 훌륭한 이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종교는 사람들에게 생존에 대한 최선의 기회를 제공하며 그렇다면 창조에 대한 자연의 신과 그의 신적인 목적에 대한 고도의 사색적인 도그마에 일반적 동의를 하기보다는 좀 더 다른 어떤 것을 제공하는 믿음이 있어야 함에 틀림없다. 그것은 공공의 예배에 대한 일반적 틀 안에서 사람들의 개인적 필요에 응답할 수 있도록 그 신봉자들에게 살아있는 관계를 약속하여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고대 마법의 종교인 여신숭배(Earth Mother)는 이같은 역할을 충족시키기에 가장 근접된 종교일 것이며, 성적으로는 동양적요소를 통하여 남성의 생물학적 본능에 대한매우 큰 혼돈과 잠재적인 훼방 요소를 지녀왔다.”

'Gaia' 즉 여신숭배(자연의 여신) 종교는 특히 고대의 범신론이다. 이것은 현재 악마적인 힘으로 '기독교의 성역'에 재침투하고 있다. 현대 컴퓨터화한 시스템 기법으로 널리 콘트롤하게 되는 것과 병행하여 진화론적 휴머니즘의 전지구적 목표는 이제 우리에게 매우 긴박감을 주는 것 같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것들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들을 어떤 남의 집의 손님처럼 여기지 않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일련의 선재하는 우주적 법책에 순응하도록 우리의 행위를 복종시켜야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창조이다. 우리는 규칙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실재(定在)의 피라미터(parameter)를 세운다. 우리는 행하므로서 세상을 창조하며, 우리 외부의 힘에 의하여 혜택을 입고 있다고는 더 이상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힘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우주의 설계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외부에 대하여 어떤 책임도 없으며 왜냐하면 우리가 왕국이요, 힘이고 영원한 영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상의 미래임이 확실하다고 리프킨은 말하면서도 그는 낙담하고 있다. 그는 그의 책을 이와 갈은 절망의 언어로 마감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확실하다. 이 우주는 비탄에 젖어 있다.”

새시대 진화론은 결국 새로운 것이 아니며 자연의 여신이란 결국 고대 바빌로 즉 ”땅의 음녀”(Mother of Halots: 계17 : 5)의 여러 얼굴 가운데 하나일 뿐 하나님을 대적하는 고대종교, 즉 ”온 세계를 꾀는 자”(계12:9) 인 것이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혼돈과 양적 특수성을 통한 질서의 불합리한 사상을 지닌 새시대 진화론은 다윈의 점진론적인 진화론 보다도 훨씬 더 방어적이지 못하다. 성서적으로는 어떠한 형태의 진화론도 허구인 것이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출20:11) 비탄에 젖은 우주대신에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 (시19:1). 진정한 의미의 '새 시대'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References

1. Cited in 'Nothing in Biology Makes Sense Except in the Light of Evolution: Theodosius Dobzhansky, 1900~1975.' by Francisco Ayala, in Journal of Heredity (Vol.68, No.3. 1977), p.3.

2. Ibid, p.9

3. Theodosius Dobzhansky, 'Changing Man.' Science(Vol, 155, January 27, 18 1967), p. 409

4. Jeremy Rifkin, Algeny(New York, Viking Press, 1983,) p.188

5. Ibid p. 195.

6. George Wald, as reported in 'A Knowing Universe Seeking to be Known,'by Dietrick E. Thomasen, Science News(Vol, 123, February 19, 1983), p.124'

7. George Gale, 'The Anthropic Principle,' Scientific American(Vol.245. December 1981), p.154

8. Judith Hooper, 'Perfect Timing, 'NewAge Journal(Vol.11. December 1985), p18

9. Julian Huxley, 'A new World Vision,'The Humanist'(Vol. XXXIX, March/April 1979),p.35

10. Ibid, This paper was kept 'in-house' by UNESCO for about 30years, before The Humanist was allowes to publish it.

11. Fritijof Capra. 'The Dance of Life,'Science Digest(Vol.90. April 1982). p.33

12. John M, Allegro, 'Divine Discontent.' American Atheist(Vol.28, September 1986), p. 30.

13. Jeremy Rifkin, op cit, p. 244

14. Ibid, p, 255.

 


출처 - 창조지, 제 40호 [1987. 1]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2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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