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바인의 실체
유익동
1. 서론
인류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연구는 주로 고생물학자 및 인류화석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어 왔는데 지금까지는 화석의 형태적 특징과 추정연대를 근거로 발전하여 왔다. 그러나 인류진화의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증거품으로는 침팬지나 원숭이로부터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 중에 있는 중간단계의 화석의 발견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도 그와 같은 가장 확실한 증거품이 될 수 있는 진화과정 중의 화석은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많은 인류진화론 학자들은 원숭이로부터 사람으로 진화하는 중간단계의 화석(혹은 빠진고리, 잃어버린 고리, missing link)를 찾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왔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리하게 빠진고리를 끼워 맞추려 한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가 교과서에서 인류원인이라고 배워온 쟈바인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인류원인으로 우리에게 접근하여 왔던 쟈바인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소개되었는가?
2. 쟈바인이 인류原人으로 알려지게 된 동기
네덜란드의 외과의사였던 듀보아는 인류 진화의 빠진 고리를 볼 수 있는 진화단계의 화석을 발견하기 위하여 군에 입대한 다음, 인도네시아의 쟈바섬으로 파견을 원하여 화석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891년의 어느 날 듀보아는 트리닐(trinil)지방의 솔로강(solor river) 언덕에서 부서진 두개골의 파편조각과 2개의 어금니를 발견하였고, 그 후 약 1년이 지난 그 다음해에는 두개골의 파편을 발견한 곳으로부터 약 15m 떨어진 곳에서 넓적다리뼈하나를 발견하였다. 발견된 두개골은 이마가 낮고 경사졌으며, 눈두덩이가 두터웠다. 또 뇌의 용적은 900cc 정도로 판단하고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인류진화의 빠진고리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고 1895년 독일의 라이덴에서 열린 국제동물학회 (International Congress of Zoology)에서 이 화석이 인류원인인 쟈바인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때부터 쟈바인은 원숭이로부터 사람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인류의 原人이라고 결정지어 졌고, 오늘날까지 국내의 교과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오고 있는 쟈바인은 실제적인 인류원인이며, 지금도 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쟈바인은 인류의 원인이 아니라 침팬지나 긴팔원숭이의 화석으로 밝혀졌고, 또 학계에서도 그렇게 통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 쟈바인에 대한 문제점의 제기
이상과 같은 쟈바인의 학설은 실제는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었다. 듀보아에 의해서 쟈바인이 처음으로 보고되었을 때 제일 먼저 지적되었던 것은 부서진 두개골 파편과2개의 어금니 그리고 약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한 넓적다리뼈 등이 동일한 생물의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 듀보아는 수집된 쟈바인의 뼈들은 악어에게 잡혀 먹다가 남은 뼈 중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아마도 그 뼈들이 강물에 휩쓸렸기 때문에 각각 15m쯤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의견을 달았다. 그러자 또 많은 학자들은 쟈바인의 뼈들이 묻힌 그곳이 50만년전에도 강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난 것이다.
고생물학자로 유명한 헥켈의 전임교수이었던 루돌프 휠쇼는 듀보아가 상기의 두개골 파편과 넓적다리뼈를 공개하기 위하여 1895년 독일을 방문하였을 때, 그 회의의 좌장 맡기를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문제의 두개골 파편과 넓적다리뼈는 듀보아가 수집하였을 당시 주장한 것과는 달리 두개골에서 보여주는 봉합선은 사라져버린 유인원과 동일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나의 판단으로는 쟈바인은 인류 原人의 뼈가 아니라, 커다란 긴팔원숭이의 뼈에 불과하다. 게다가 두개골 파편과 넓적다리 뼈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까지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권위있는 전문가 교수로부터의 공격을 받게 된 듀보아는 차츰 자신이 발견한 쟈바인 화석에 대한 주장이 줄어들게 되었고, 나중에는 적당한 거짓말로 그냥 덮어버릴 때가 많게 되었다.
듀보아가 쟈바섬에서 귀국한 당시 그는 215 상자에 달하는 많은 화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화석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쟈바인 화석은 두개골 파편과 넓적다리뼈 각 1개, 그밖에 몇 개의 다리뼈와 2개의 어금니만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듀보아는 그 화석들이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原人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듀보아는 두개골 파편의 뇌용적을 900cc로 측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두개골의 파편조각으로 그와 같은 정확한 뇌용적을 계산해 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의문지워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듀보아는 발표하지 않고 감춘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쟈바인을 발견하였던 그 전해에 거의 같은 지층에서 현재의 인간의 두개골과 같은 화석 2개를 발견한 것이었다. 듀보아는 그 인간의 두개골 화석을 발표하면 혹시 쟈바인으로 발표한 두개골 파편조각의 화석도 현재의 인간의 것으로 인정이 되고 그렇게 되면 강하게 비판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염려한 때문이었다. 듀보아는 또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나 그 밖의 넓적다리뼈 조각과 다른 이빨 한 개를 다른 화석들과 함께 부엌의 선반에 감추어두고 있었다. 그것들도 결국은 고생물학자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1920부터 1930년대에 걸쳐서 계속 발표하였다.
4. 쟈바원인의 제2차 탐색
당시 고생물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폰·퀘니그스발트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가 듀보아의 뒤를 이어 새로운 화석의 발견을 위해 쟈바섬로 출발하려고 할 때였다. 그가 듀보아의 집을 방문하였을 당시 놀란 것은 수집한지 40년 정도는 지났을 것으로 보이는 보존상태가 아주 나쁜 화석컬렉션들이었다. 더구나 그 화석들 중에는 라벨이 없어 무슨 화석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하였던 것이다. 1906년 폰·퀘니그스 발트에 의한 쟈바에서의 2차 발굴은 듀보아의 발견에 더욱 많은 의혹을 줄 뿐이었다. 그는 듀보아가 쟈바인을 발견한 장소와 동일한 곳에서 지하 12m까지 파 내려가 총 10,000입방야드의 흙을 체로 쳐가면서 새로운 화석의 발굴을 시도하였으나 쟈바인의 뼈는 1개도 발견치 못하였다. 결국 그 장소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사람의 뼈 1개와 타다 남은 목탄뿐이었다. 그 후 1930년대에 들어와 폰·퀘니그스발트는 이번에는 그곳으로부터 약 65㎞ 떨어진 지점에서 새로운 두개골의 파편조각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듀보아가 발견한 두개골과 아주 비슷하였으나, 크기가 약간 적고 복원시키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었다. 또 1953년과 1961년에도 이와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었는데 이와 같은 조사 결과, 듀보아가 발견한 쟈바인의 화석은 단지 커다란 긴팔원숭이나 침팬지의 화석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5. 결론
침팬지나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중간단계의 인류원인이라고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는 쟈바인의 실상은 알고 보면 무리하게 빠진 고리를 끼워 맞추려한 한 외과의사의 선입견과 명예욕 때문에 빚어진 잘못이었던 것이다.
분명히 성경말씀에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신 의지와 창조의 섭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창세기1장 26절~31절)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자기모습을 닮은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많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내가 온 땅의 씨맺는 식물과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으니 그것이 너희 양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에게는 푸른 풀과 식물을 내가 먹이로 주었다. 하나님이 자기가 창조한 것을 보시니 모든 것이 아주 훌륭하였다” (창세기 1장 26절~31절).
출처 - 창조지, 제 69호 [1990. 5~6]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가? 원숭이의 후손인가?
진화론은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화의 과정을 뒷받침하는 유인원의 화석들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진화론에 대해서 가장 큰 반발심이 생기는 부분이 바로 인류의 진화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일 것이다. 적어도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요, 동물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자부하던 인간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일텐데도,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에 쉽게 수긍하고 있다는 점도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화론의 주장은 과연 타당성이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확보되어 있는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의 진화는 두 가지의 측면에서 그의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즉 도구를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 직립보행으로 이행되는 과정과, 지능의 발달에 따라 뇌의 용적이 확대될 것이므로 그것을 담는 두개골의 용적이 커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류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는 상상도들을 보면 구부정한 모습에서 점차로 꽂꽂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서의 변화와 두개골의 모양이 원숭이의 모습에서 점차로 현대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과정의 중간에 서 있는 유인원들이 과연 화석으로 발견되었고, 그것이 진짜로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형태의 것이라는 명백한 해석이 내려지고 있는지를 판단해 볼 필요가 있다. 유인원의 화석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들은 대개 완벽한 전신의 원형을 추론하기에는 훨씬 미흡한 두개골의 일부분 또는 신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들은 턱뼈, 치아, 부숴진 두개골의 일부 조각, 환도뼈 등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로부터 직립보행의 정도나 두개골의 정확한 윤곽 및 용량 등을 추론한다는 것은 완전한 무리이다. 즉 어느 정도가 사람에 가깝고 어느 정도가 원숭이에 가까운 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는 매우 간접적인 기준이 발견된 화석에 대한 평가에 적용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턱뼈에 있는 치아의 배열형태나 두개골의 안면경사각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전문치과의사들도 고릴라의 턱뼈와 사람의 어린아이의 턱뼈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고, 안면의 경사각은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아서 그들이 인류의 진화의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생물학 관련 서적에 버젓이 그림으로 소개되고 있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 대한 상상도는 진짜로 상상도에 불과하지,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거의 초기의 인류로 소개되고 있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화석은 두개골의 용적에서나 외형상 완전히 원숭이과에 속하는 하나의 동물의 것이고, 치아의 배열형태를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인간적인 특징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쥬커만 경은 그 화석을 원숭이의 것에 불과하며 인류의 기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분석한 바도 있다. 결국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대한 분석들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인류의 조상도 아니고, 원숭이와 인류의 중간형태도 아닌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되는 자바인의 경우는 그것을 발견한 듀보아라는 화란의 외과의사가 죽기 전에 스스로 긴팔원숭이의 것에 불과했다고 고백했듯이 인류의 진화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특히 자바인의 경우는 두 번에 걸쳐서 15미터 떨어진 곳에서 각각 발견된 두개골의 윗부분과 대퇴골 그리고 두 개의 어금니를 모아서 구성된 것이었으니, 자료 자체의 신빙성에서부터 열악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하겠다. 북경인의 경우 30개의 두개골과 11개의 턱뼈, 그리고 147개의 턱뼈를 기초로 구성되었는데, 이들 자료는 치아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분실되어 버렸으므로 그당시 진화론자들로만 구성된 학자들의 견해만으로는 인류의 기원에 관한 논쟁의 증거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겠다.
어처구니 없었던 인류의 진화에 대한 연구는 네브라스키인과 필드다운인을 들 수 있다. 네브라스키인은 후에 멸종된 멧돼지의 어금니로 판정된 치아 한 개로 구성되었던 유인원이고, 필트다운인은 원숭이의 턱뼈와 인간 두개골의 윗부분을 교묘하게 조합해서 조작했던 유인원이었다. 이들 예는 인류 진화론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할만한 화석자료에 빈곤을 느꼈었는가를 반증해 주는 사건이었다.
가장 최근의 인류의 조상으로 소개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들은 어떠한 면에서도 인간이 아닌 원숭이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두개골의 용적이 현대인들보다 100cc 가량이나 크고, 전체적인 체격도 현대인들보다 커서 오히려 진화의 방향을 역행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창조과학회에서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 아주 좋았던 환경에서 살아가던 인류들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로서는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진화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없다. 더우기 최근의 분자생물학적 연구는 오늘날의 모든 인류가 모두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분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 지구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 역시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아담과 이브를 만드셔서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삼으셨다는 성경의 계시 이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들과는 다르며 하나님을 섬기고 나머지 피조계를 다스릴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2/e29/e29c1.htm
출처 - 창조지, 제 98호 [1996. 7~8]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74
참고 :
원숭이(중간형태)인간 루시, 럭키, 어린 루크의 복원
이러한 '상상적인' 복원은(위의 그림) 합리적인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진화라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 자기 도취적인 신념에 의하면 인류는 원시적인 조상으로부터 오늘날의 현대인인 Homo sapien sapien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복원들 모두가 서로 다르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 대답은 진화론적 신념에 의한 자유로운 진화논리적 해석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학문적인 엘리트들은 그들의 행동을 함께 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차이는 다음과 같이 일어난다. 한 지체 높은 학자는 루시와 럭키는 사람보다는 원숭이에 가깝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원숭이 보다 사람에 가깝다고 말한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그들은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말들에 대해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것을 입증할 명백한 경험적인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원들 모두는 단지 루시와 럭키의 조각난 두개골 파편의 불완전한 화석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아래)
여기에서 제시된 그림은 '인류의 시작 (Beginnings of human kind)' 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과학자가(Tim White) '여러 개체의 부분들을 사용해서' 하나의 두개골을 재복원하고, 전 세계의 과학자 집단들은 그것을 '인류 진화의 증거' 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성적으로 부정직한 것이며, 학문적인 사기인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omniology.com/LUCY-LUCKY-LittleLUKE.html
출처 - The California Institute of Omniology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75
참고 : 577|1457|2769|3419|3643|5768|5796|6292|6425|6476|6423|6305|6271|6243|6190|6052|5952|5948|5819|5818|5802|5701|5528|5525|5507|5496|5492|5455|5406|5375|5349|5334|5218|5180|5155|5157|5129|5051|5025|4880|4847|4842|4833|4824|4820|4812|4785|4763|4751|4720|4709|4682|4660|4650|4626|4593|4563|4499|4498|4432|4410|4372|4315|4266|4176|4053|4007|4000|3989|3988|3890|3867|3848|3834|3656|3431
네브라스카인의 재조명
: 돼지 이빨 하나로 인류의 조상이 되었던 유인원
(Nebraska man revisited)
Ian Taylor
돼지 이빨(pig's tooth)을 가지고 인류의 진화론적 조상인 유인원으로 재구성되었던, 지금은 폐기된 네브라스카인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뉴욕 자연사 박물관(New York's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의 고인류학 책임자였던 헨리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 박사가 1922년 2월 이 화석 이빨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떠한 신도 믿지 않았지만 그것을 신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주의자며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저명한 멤버였던 그는, 미국 공공학교에서 진화론의 가르침을 법적으로 금지하려는 기독교인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연맹에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1925년 테네시주 데이톤(Dayton)에서 열릴 재판(스코프스의 원숭이 재판(Scopes Monkey Trial)으로 알려지게 된)에서 귀중한 증거로서 그 이빨을 바라보았다.
재판은 준비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빨은 의견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증거로서 제출되지는 않았다. 1923년 1월 6일 미국 박물관 수련생(American Museum Novitiates)들에 의해서 진실은 천천히 그리고 희미하게 새어나가고 있었다. 9 명의 권위자들은 그 이빨이 영장류와 관계된다는 주장에 대한 그들의 반대 주장을 인용했다. 더 많은 연구가 1927년 원래 발견 장소였던 Snake Creek에서 이루어졌는데, 진화론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그 이빨은 오늘날의 멧돼지(peccary) 또는 야생 돼지(wild pig)와 관련이 있는 멸종된 종(species)인 Prosthennops 라는 동물의 것이었다고 결론내려졌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개 뉴스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아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Science 지에 개제되었다. (1927, 66:579).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14판(1929, 14:767)에서도 그것은 실수였으며, 이빨은 또 다른 목에 속하는 것이라고 어렵게 인정하였다. 당혹감에 대한 부담은 지금은 은퇴한 헨리 오스본에게는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다. 학자들은 그 이빨은 멸종된 돼지의 것이었다고 믿으며, 그 일을 잊어버렸으나, 1972년 Ralph Wetzel는 한 떼의 이러한 동물들이 파라과이의 챠코(Paraguay's Chaco)에 잘 살아있음을 발견했다. Wetzel은 이 발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Science (1975, 189:379) 지에 보고하였다. 거기서 이 동물은 Catagonus wagneri 속(genus)으로 승인되었다. 이 새로운 종은 멸종된 종인 Catagonus wagneri 와 유사함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화석 기록은 단순한 어제의 기록이 되어버렸다.
.네브라스카인과 그 이름을 명명한 Henry Fairfield Osborn.
* Ian Taylor, A.I.M., is a Toronto-based writer and researcher. A university graduate from London, England, he spent 20 years as a researcher in North America. He is author of the popular book, In the Minds of Men (above).
*참조 : Pig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627/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human-evolution/piltdown-man/nebraska-man-revisited/
출처 - Creation 13(4):13, September 1991.
유인원의 허구 5 : 신구인의 실상
임번삼
(4) 신구인(新舊人)의 실상
진화론자들은 호모 에렉투스가 10만 년 전에 아프리카(짐바부웨)와 중동지방(이라크)에 나타난 구인(舊人) 네안델탈인(Neander Valley, Germany 3-20만 년 전)과 교체가 되었는데, 이들은 해부학적으로 현대인과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구인들은 다시 3만5천 년 전부터 유럽지역으로 진출했으며, 크로마뇽인과 같은 신인(新人)으로 대체되었는데, 이 신인이 현대인류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구인의 멸절 이유는 당시에 공존했다는 다른 호모 사피엔스와 혼혈이 되어 현생인류로 진화했다는 주장과, 신인에 의해 멸절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신구인들은 현대인과 허리가 약간 굽은 것 이외에는 거의 유사하므로, 원시인으로 판단하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ce)라 부르게 되었다. 현생인류는 이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ce sapience)라는 긴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진화론자들은 이러한 신구인을 통합하여 호미니드라 부르고 있다.
① 네안데르탈인 (The Neanderthal Man, Homo sapience neanderthalensis)
네안데르탈인은 라인강변의 네안델동굴(Neander Valley, Dusserdorf, Germany)의 채석장에서 발굴한(1856) 두개골 상부와 다른 유골을 토대로 한 것이다(그림 17). 이것은 인근 학교의 교사인 훌롯(Fuhlrott)의 손을 거쳐 본 대학의 해부학 교수인 샤프하우젠(Schaffhaugen)에게 전달되었다. 아일랜드의 해부학자인 킹(King 1864)은 이 유골의 주인공을 호모 네안델탈렌시스라 명명하였다.
작은 키(152cm)에 뇌의 용적(1600cc)은 현대인(1450-1500cc)보다 오히려 약간 컸다(Robert Charroux et al 1974). 전반적으로 현대인과 유사하면서도 두개골은 좁았으며, 넓은 뺨과 뒷머리에 토끼뼈와 같은 융기를 가지고 있으며(Carl Hodge 1988), 완만한 안면경사각과 원숭이처럼 굽은 척추뼈 때문에 구인(舊人)으로 명명이 되었다. 평균수명은 29.4세로 추정하였다. [한국일보타임-라이프, p180, 1978]. 그 후, 이태리의 한 동굴속의 습지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발자국화석을 발견하였다(사진 20). 이들은 작은 키에 짧은 다리, 큰 머리와 큰 코를 가졌으며 구석기인 무스티에 석기(Mousterian Stones)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장례와 종교의식 및 식인습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어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은 1908년에도 프랑스의 라샤페르(La Chapelle-aux-Saints)에서 발굴되어는 데, 파리 인류학연구소장인 부울(Marcellin Boule)은 유인원으로 판단하고 반인반원의 상상도를 그렸다. 부울은 네안데르탈인이 원숭이도 사람도 아닌 진화의 별도의 가지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등이 꾸부정한 <동굴사람>(Cave man)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진화고생물학자인 윌포프 교수 등은 여러 고고학적 자료들을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 네안데르탈인이 유럽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지적수준은 현대인과 동일하며, 두 종족이 이스라엘 인근의 중동지역에서 5만 년간 공존했었다고 주장하였다. 크링스(Krings et al 1997) 등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채취하여 유전자증폭실험(PCR)을 한 결과, 이들이 현생인류와 다른 인종임을 확인하고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s)로 분류하였다. [Cell, 90, pp 19-30, 1997]
그러나,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을 현대인으로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크링스의 실험은 샘플의 채취과정에서 오는 오염가능성과 유전자증폭장치(PCR)의 측정에러 외에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mtDNA) 간의 차이가 현대인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mtDNA에 대한 실측결과 현대인과 네안데르탈인 간의 오차(22-36 base pairs)가 현대인 간의 오차(1-24 base pairs)의 크기와 비슷하게 나타난 것이다.
독일 본대학의 마이어 교수(F. Mayer)는 이들이 1814년에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했던 러시아의 코사크족 군인의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비타민 D결핍에 의한 골연화증으로 동굴에서 쉬다가 죽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저명한 세포학자이면서 병리학인 베를린의 버효(Rudorf Verchow of Berlin 1821-1902)는 병리학적 관점에서 수많은 네안델탈인의 유골들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이들에게 공통적인 사항은 관절염을 앓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유는 비타민의 섭취부족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허리가 굽은 것은 이 때문이며, 이들의 신장은 170cm 이상이었고 뇌의 평균크기(1,600cc)도 현대인들(1,500cc)보다 더 큰 인종이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들은 현대인의 두개골보다 평균 13%가 크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진화론자인 도브잔스키(T. Dobzhansky)는 "현생인류라 할 수 있는 네안델탈인의 두개골 용적은 현대인과 같거나 더 크며...두개골 용적으로만 본다면 현대인보다 더 진화된 존재”라 하였다. [T. Dobzansky; Changing Man, Science, No. 155, 1965]
이러한 발견 후 50여년이 경과한 후 죤스홉킨스 대학의 병리학자인 스트라우스(Straus 1957)는 이 유골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부울이 주장한 긴 발톱이 물건을 잡기에 적합하다고 한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이 구루병으로 척추와 턱뼈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 내었다. 이렇게 하여 버효가 주장한 이론이 부울보다 옳았음이 판명되었다.
미국 미시간 대학의 인류학자인 브레이스(C. Loring Brace 1979)는 이 유골이 서북 유럽인과는 다른 독립된 두개골의 형태로 분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Loring C. Brace; The stage of human evolution, 2ed., Englewood Cliffs, N.J., Prentice Hall, 1979] 그리고, 홋지(Hodge)는 덴막인, 노르웨이인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하였다.
최근, 렌스버거와 메턴스(Boyee Rensberger & Jay Matterns 1981) 및 아이반호(F. Ivanhoe 1970)도 이 유골의 주인공이 비타민 D부족으로 곱추병을 앓은 환자라고 하였다. 아이반호는 "네안데르탈인이 굽어 있는 것은 큰 유인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꼽추병 때문이었다. 3만5천 년동안 동굴에 살면서 섭취한 음식물에는 분명히 비타민D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Nature, August 8, 1970]. 이러한 이유로 네안데르탈인들이 살았던 시대는 항상 빙하기였을 것이라는 추리가 나오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이들이 최후의 빙하기가 시작된 11만 년 전 지중해 연안과 유럽에 출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그림 18).
이상의 자료들로부터 네안데르탈인은 불을 사용하고 사냥을 하며 장식품을 시체와 함께 부장하는 완전한 현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노아홍수 직후에 아라랏산으로부터 유럽쪽으로 이동한 인류의 후예들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나, 확인할 방법은 아직 없다. 네안데르탈인의 어금니의 마모도를 측정한 결과 이들이 평균적으로 150-220세를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는 보고가 이러한 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 인도의 한 부족인 문다족(Munda, India, 사진 21)과 유사한 인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Taylor; ibid. p 215]
최근에 새로 개발된 연대측정법인 전자스핀공명법(Electron-spin Resornance Method)으로 갈릴리지역(Galili, Israel)에서 발굴한 유골들을 측정한 바에 의하면 타분지역(Tabun)지역에서 나온 네안데르탈인이나 스쿨(Skhul) 및 콰체(Qafzeh)에서 나온 현대인의 유골들이 꼭 같이 12만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은 83개 지역에서 345개가 발굴되었는데, 이중 53%에 해당하는 183개는 매장된 것이었다. 이러한 조사결과에 의한다면 네안데르탈인과 현대인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종족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타임 지는 <인류의 조상>이라는 특집기사에서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부울이 진화론의 압력으로(p 40) 네안데르탈인을 인류와 원숭이의 중간고리로 만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네안데르탈인이 원숭이처럼 발을 곧바로 펴지 못했고, 척추도 곧게 펴지 못했으며, 두뇌가 작았다고 했으나, 미국과 영국의 조사단(1957)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연구가 진행될수록 이들은 인류와 다른 종임이 입증되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p 41).
이 기사는 결론적으로 "현재로서는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주장은 사실 데이터에 입각한 과학적 주장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하였다(p 41). [Michael D. Lemonick; How Man Began?, Time, March 14, pp 35-41, 1994]
② 크로마뇽인(The CroMagnon Man)
크로마뇽인은 프랑스의 인부들이 프랑스 서남부의 베제르 계곡을 통과하는 철로변에 있는 레제이지(Les Eyzies)마을의 크로마뇽 동굴(CroMagnon, Dordogne, South France)에서 발굴한(1868) 커다란 두개골과 작은 다섯개 유골의 주인공을 일컫는다(그림 19). 그들은 크로마뇽 동굴의 벽화를 그렸다 하여 크로마뇽인이라 명명되었으며, 두개골의 모습이 현대인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였다 하여 신인(新人)으로 분류하게 되었다. 크로마뇽이란 그 곳 방언으로 ‘큰 구멍’(big hole)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학명도 현대인처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ce sapience)로 명명되었다.
이들의 유물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는데, 유인원에서 현대인으로 연결되는 고리라고 부르지 않고 항상 동굴인(cave man)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180cm의 큰 키(여자는 165cm)에 유럽인처럼 긴 다리와 높은 이마, 그리고 돌출한 턱을 가진 이들은 홍적세의 빙하 후기인 3만5천년전에 나타나 아시아와 중동지역에서 유럽, 더 나아가 미주대륙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진화학자들은 이들이 구인과는 다른 구석기를 제작했으며, 구인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의 유골이 완전한 형태로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출현한 것일까?
그들은 주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포함한 남부유럽의 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동굴벽화들을 남겼는데, 특히 사우투올로(Marcelino de Sautuolo 1879)가 발견한 알타미라 동굴(Altamira Cave, Santander, Spain)의 들소 그림은 역동성과 섬세함으로 유명하다(그림 20). 사우투올로는 이 유골의 주인공이 현생인류라고 했으나, 발견 당시에는 이 유골의 주인공이 현생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진화론자들의 조소를 받으며 1888년에 서거하였다 한다(Schiller 1971).
그로부터 61년이 지난 1940년 9월 12일, 하버드 대학의 할람 L. 모비우스를 포함한 네 명의 청년들이 개(犬)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라스꼬 동굴(Lascaux, France)을 발견하였다(사진 22). 그 곳에는 600점의 채색화와 1,500점의 선각화(線刻畵)가 그려져 있어, 거대한 고대박물관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 이 동굴은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나, 조류에 의한 침식으로 1963년부터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이 동굴의 연대를 추정하는 과정에서 동굴에 살았던 주인공들이 맘모스와 같은 선사시대의 동물들과 공존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인정을 받기까지는 수십 년이 소요되었다. 오늘날, 예술사(藝術史)를 포함한 여러 교재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진과 그림들은 벽과 천장의 굴곡을 이용하여 입체적으로 그려진 지능적으로 배부분을 둥글게, 그리고 눈부분은 깍아내린 정교한 모습을 재현하지 못한다. [Taylor; ibid, pp 219-220]
크로마뇽인의 유골은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된 완벽한 현대인이라 할 수 있다. 마쉑(Marshack 1972)은 크로마뇽인들이 뛰어난 화가였을 뿐 아니라, 천체의 운동과 달의 위치를 매일 기록한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였다. 영국의 스톤헨지(Stone Henge)나 프랑스의 카르낙Carnac)을 건설한 것도 이들이 아닐까 신중히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Thom 1971). 여기에서 확실히 하여 둘만한 일은 크로마뇽인들이 동굴속에서만 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물가죽만을 옷감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직조한 옷감도 사용하였으며, 머리스타일도 멋을 부려 했다는 것이다. 타임-라이프 잡지에 소개된 미네테다 모녀도(母女圖, Mineteda, Spain)를 보면(그림 21) 이들이 직조된 옷과 땋은 머리를 하고 있다(Prideaux 1973).
이 벽화들을 방사선 탄소원소로 측정한 결과 최소 8천 년 이상 경과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동굴 속에서 고기를 불에 구어 먹었다면 연기때문에 그림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깨끗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그림의 역사가 의외로 짧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과 맘모스가 같이 그려져 있는 벽화가 발견됨으로써 이들은 맘모스와 같이 살았으며, 맘모스는 최근까지도 지상에 생존했던 거대한 포유동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림 22).
진화론자들이 봉착한 또 한가지 문제는 네안데르탈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크로마뇽인의 두뇌가 1,550-1,750cc로 현생인류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진화론적으로는 뇌용적이 커지는 쪽으로 진화하여왔다고 주장해 왔는데, 현생인류부터는 뇌가 다시 작아지는 방향으로 역진화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인지 캠벨은 반문한다. [B.G. Campbell; CroMagnon Man, Encyclopedia Britanica, P 792, 1965]. 그래서, 진화론자이면서 고생물학자인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1857-1935)은 말하기를 "진화적 과정에서 볼 때 크로마뇽인은 우리와 꼭 같은 존재이며, 머리와 두개골은 도덕적 및 정신적 수준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뛰어난 용사이자 사냥꾼이었고 화가였으며 조각가였다”고 피력하였다. [Henry F. Oborn; Revised Guide Leaflet, No. 52, American Museum of National History, 1923]
③ 두개골에 총탄 구멍이 있는 로데시아인(The Rhodesian Man)
일명, <브로큰 힐 맨>(Brocken Hill Man)으로 불리우는 이 유골의 주인공은 항상 인종학계의 수수께기와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지금은 교과서나 일반서적에 거의 실리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이 유골 역시 다른 경우에서 보듯이 선입관에 의한 상상의 작품이었다. [Taylor; ibid. pp 229-230]
옛날의 영국 식민지였던 로데지아(지금의 잠비아)에 있는 부로큰 힐의 아연탄광에서 완전한 형태의 인골이 우연히 발견되었다(1921). 묵직한 눈두덩이와 움푹 패인 이마 때문에 고대인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그림 23). 이 시기는 중간형의 호미니드가 발견되지 않아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발굴된 것이었다. 광부들은 그 후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길옆에서 3-4인의 뼈들도 발견했으나 발굴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두개골은 1,280-1,325cc로 현대인의 평균치보다 약간 작았다. 진화론자들은 현재 이 유골을 네안데르탈인의 변종으로 보기도 한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그로스(Wilfrid Le Gros 1928. 12)가 밝힌 바에 의하면, 이 유골들도 부로큰힐 개발(The Brochen Hill Development Co.)에 의해 영국의 런던박물관(British Musium of National History)으로 바로 보내졌으며(1921), 필트다운인 사기사건에 연루된 우드워드(Arthur Smith Woodward)가 이끄는 팀에 의해 재조립이 되었다. 그는 물고기화석(논문 600편 발표)과 인류화석(논문 30편 발표)에 가장 권위있는 학자였다. 다윈학설을 신봉한 우두워드는 이 유골의 주인공이 원숭이처럼 허리가 굽은 모습으로 걸었으리라 상상하고 이러한 방향으로 재조립작업을 하도록 동물학관리자(assistant keeper of Department od Zoology)인 파이크라프트(W.J. Pycraft)에게 주문하였다. 우드워즈나 파이크라프 모두가 해부학자들은 아니었다. 우두워드는 왜 많은 인류학자들을 외면하고 동물학자에게 이러한 작업을 하도록 부탁했는지 쿠퍼(Bill Cooper)는 의문을 제기한다. [Bill Cooper; Rhodesian Man, Ex Nihilo Technical Journal, Vol 3, p 149, 1988]. 그들은 같은 곳에서 발굴한 허리골반 줄기뼈들을 부착하여 사이판트로푸스(Cyphanthropus, Stooping Man)라는 학명을 부여하였다. 이처럼, 재조립된 유골은 진화론자들에 의해 인류의 조상이라 하여 호모 로데시안시스(Homo rhodesiansis)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British Museum of National History; Rhodesian Man and associated remains, British Museum(National History) Publication, pp 1-17, London, 1928]. 이러한 명명은 우두워드가 7편의 관련논문들을 발표하기까지 그의 눈치를 보느라 7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1928).
우드워드는 로데지아인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얼굴의 섬세한 구조로 보건데 인간진화의 마지막 단계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피엔스의 진정한 조상이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새로운 증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로데지아인의 얼굴은 뇌와 해골의 모습이 네안데르탈인의 것과 거의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네안데르탈인이 다음 단계로의 진화된 모습이다” [Arthur S. Woodward; A new cave-man from Rhodesia, South Africa, Nature, 108, pp 371-372, 1921] 즉, 로데지아인이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진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유골은 두 가지 특색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두개골이 광물화된 것을 보면 오래된 것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리그씨병(Rigg's disease)과 치석(齒石)을 앓았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치아배열이 현대인과 다르게 바뀐 것이지 오래된 치아가 아니라고 로링은 확신한다. [Lohring C. Brace; The stages of human evolution, 2nd, Englewood Cliffs, Prentice Hall, 1979]. 둘째는, 두개골 양편에 서로 다른 크기의 구멍이 나 있는데(사진의 검은 점), 이는 전형적인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라고 마이어 교수(Mair of Berlin)은 진단한다. [Herbert Went; From ape to Adam, Bobbs-Merrill, New York, 1972]. 이에 반해, 프린스(Prince & Molleson 1974) 등은 충치에 의해 종양(cholesteatoma)을 앓다가 구멍이 뚫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J.L. Price, T.I.Molleson; A radiographic examination of the left temporal bone of Kabwe Man, Brocken Hill Mine, Zambia, Journal of Archeological Science, 1, p 285, 1974].
오늘 날, 진화론자들이 발행하는 대부분의 화보들은 오른 쪽의 구멍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행히 필빔의 화보(Pilbeam 1970)에도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조작된 흔적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필트다운 사건에서 유골조작을 주도했던 샤르뎅은 이 그림들을 담은 화보집을 <인류의 출현>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는데, 그는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로데시아인에 대해 해설하고 있으며, 두 장의 화보를 반페지에 실어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개골의 구멍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그 구멍을 아예 삭제하고 게재하였다. [Teilhard De Chardin; The appearance of man 1956, Translated by J.M. Cohen 1965] 그는 필트다운인의 유골조작에 이어 로데시아인의 그림도 조작한 것이다.
이 유골의 또 다른 조작 부위는 엉덩이뼈의 조립이다. 이 뼈들은 면밀한 조사결과 다른 동물의 것을 부수어 조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인류학자인 클라크(Clark 1928)는 말한다. "엉덩이뼈가 다른 데서 온 것이라는 사실은 희한한 일일 뿐 아니라, 포유류 해부학자들의 눈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Le Gros Clark; Rhodesian Man, Man, 28, pp 206-207, 1928]
그들이 죽은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로데지아인의 사기극에 관여한 사람은 파이크라프트 외에 필트다운인 사기극에 연루되었던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보고서를 감독한 홉우드(A.T. Hoopwood), 각 사람들에게 조작업무를 부여한 박물관의 지질학 책임자였던 베더(F.A. Bather), 그리고 얼굴을 나타내지 않은 박물관의 고위 책임자들이었다고 한다. [Cooper; ibid, p150].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쿠퍼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로데지아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쿠퍼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Bill Cooper; Rhodesian Man, EN Technology, vol. 3, pp 137-151, 1988].
④ 구아델로우프에서 온 숙녀(Lady from Guadeloupe)
이 숙녀의 유골은 지난 50년간 많은 교과서들에 게제되어 왔을 뿐 아니라, 대영박물관에도 전시되었던 것이므로 소개하고자 한다(Konig 1814). 이 해골은 1812년, 프랑스의 구아델로우프(Guadeloupe)라는 섬에서 발견한 것으로, 다리와 머리만 제외하고는 완벽한 형태로 발굴되었다(사진 23). 유골의 주인공은 5.2피트의 신장을 가진 여인으로 추정되었다. 이 유골의 특징은 뼈들이 뒤틀리고 관절들이 제위치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뼈들이 적절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과서나 박물관에서는 모두 퇴거되고 말았다.
이 유골은 2,800만 년 전의 것으로 측정된 석회암에서 발굴된 것이었다. 아직 유인원에서 호미니드들이 나오기도 전에 거의 완전한 형태의 현대인과 유사한 인골이 발견되자, 진화론자들에게는 큰 혼란이 오게 되었다. 다윈은 인간이 아프리카의 옛 원숭이(Old Monkey)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들이 미주대륙으로 이주한 시기는 수천 년 전이었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보다 훨씬 오래전에 현대인과 유사한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⑤ 기타
이 밖에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가지의 발견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산타 바바라에서의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한 인골의 발견이다(1923). 이 유골의 연대는 네안데르탈인의 이주 시기와 전혀 맞지 않는다. 이 유골들은 현대 인디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도 판명되었다.
이와 유사한 다른 발견이 필레오세 지층(200만 년 전)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지질학 조사위원회 위원장인 휘트니(J.D. Whitney 1866)가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California)에서 이루어졌다. 현대인의 모습을 한 ‘칼라버라스 두개골’(Calaveras Skull)이 그 주인공이다(사진 24). 200만 년 전의 유골로 연대측정치가 나왔는데, 유골의 모습은 현대인과 닮았다.
이러한 현상을 진화론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유골이 지금까지도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진화론자들의 고민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만 하지만, 자신들의 주장에 맞으면 공개하고, 맞지 않으면 비공개하는 자세는 객관성을 잃은 행위라 할 수 있다. 진화론자들이 세계의 주요한 박물관의 직책들을 독차지한 결과가 가져다 주는 기이한 현상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유인원의 허구 4 : 호모 에렉투스 (Homo erectus)
- 쟈바인, 북경원인, 네브라스카인, 필트다운인, 하이델베르그인
임번삼
(4) 의문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그 후, 불을 사용하고 육식을 하면서 정상적인 직립보행(erect)을 한 호모 에렉투스(160-250만년 전)가 나타나 1백만년 전부터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이동하였으며, 30-40만년 전 구인으로 대체되기까지 번성했다고 진화론자들은 주장한다. 이들은 큰 키(5.5피트)에 더 커진 뇌(750-1,000cc)와 작은 치아를 가졌다고 한다. 사람쪽으로 더욱 진화했다는 주장이다.
처음으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는 쟈바인(Trinil, Indonesia 100만년 전)과 북경원인(Choukutien, China 50만년 전) 및 프랑스의 선사학자인 앙리 드 류므레(1966)가 아라고 동굴(동부 피레네의 도타벨, 1971)에서 발굴했다는 인골(45만년 전), 네브라스카인 등이 있다. 진화론자들은 이 시기가 빙하기 초기이므로 불을 사용하고 주먹도끼를 포함한 아츄리언 돌도구(Acheulean stones)도 사용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현생인류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같은 쟈바의 솔로강변에서 발굴한 인골(25만년 전)은 뇌용적이 1,100-1,200cc인 반면 같은 지역에서 발굴한 다른 유골(홍적세 중기의 호모 에렉투스)은 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근의 많은 연구결과 이처럼 주장되어 왔던 호모 에렉투스의 유골들이 동물의 것이거나 심한 경우 새로운 뼈들을 가공한 사기극으로 판명이 되어 우리에게 놀라움을 더하게 하고 있다. 이제 그 중 몇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① 쟈바인(The Java Man)
듀보아(Eugene Dubois 1858-1940)는 화란의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세에 독일의 예나 의과대학(Jena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사진 10). 거기에서 7년간 독일인 스승 헤켈(Ernst Haekel)의 영향을 받아 진화론자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인류진화의 ‘빠진 고리’를 찾고자 결심하였다. 헤켈은 '빠진 고리‘의 이름을 피테칸트로푸스 알라루스(Pithecanthropus alulus)라고 미리 이름까지 지어 놓은 상태였다(Wendt 1972). 그 뜻은 ’말없는 유인원‘(speechless ape-man)으로 호미노이드는 사람과 외관은 같으나 단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상상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헤켈은 막스(Gabriel Max)라는 화가로 하여금 이 유인원의 상상도를 그리도록 하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상상력으로 듀보아를 교육하였다.
마침내, 듀보아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좋은 취직자리들을 물리치고 화란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es)와 해군군의관 신분으로 8년간 근무하기로 계약하고 인도네시아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쟈바섬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수마트라에서 50명의 현지인을 고용하여 400상자분의 유골을 발굴하였다. 유골은 화란으로 보내어 조사토록 했으나, 대부분 동물의 뼈들로 확인되었다. 그는 친구(van Rietschoten 1889)가 쟈바섬의 와드잭에서 발견한 인골을 기증받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1889년부터는 쟈바의 솔로강변에 위치한 내륙지방(그림 12)을 중점적으로 탐사하였다.
그러던 중 제4기 지층에서 문제의 와드잭(Wadjac)에서 두개골(Wadjac skull 1,550-1,650cc) 두 개를 추가로 찾아 내었다. 그리고, 와드잭에서 6마일 거리에 있는 트리닐(Trinil) 지역으로 이동하여 7년간(1891-1898) 집중적으로 답사하였다. 1891년, 마침내 모래언덕 속에서 문제의 두개골(900cc 추정, 사진 11)과 어금니를 한 개씩 발굴하였다. 다음 해(1892년)에도 15m 인근에서 사람의 대퇴골과 어금니(10월)를, 1898년에는 앞어금니를 추가로 발굴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하여 인부들이 3년간 일만톤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제방을 파 헤쳤다. 대부분의 뼈들은 동물의 것이었고, 연구의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치아 단 한 개(1891.9), 다른 치아 한 개와 두개골(1891.10), 넓적다리뼈 한 개(1892.8), 이어서 발견한 치아 한 개(1892. 10)뿐이었다. 더구나, 두개골은 넓적다리뼈가 발견된 곳에서 15미터 떨어진 곳에서, 치아들은 두개골 지점에서 3미터 밖에서 발굴한 것들이었다(Bowden 1977).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보아는 이 유골들이 한 사람의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조립하여 연구 검토한 결과 50-100만년 전에 직립보행을 한 현생인류의 조상의 것이라 판단하고 안드로피테쿠스 에렉투스(Anthropithecus erectus)라 명명하였다. 이는 ‘직립 유인원’이라는 뜻이다. 그 후, 넓적다리등의 모습이 인간쪽을 닮았다 하여 ‘직립원인’을 의미하는 피테칸트로프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로 개칭하였다(그림 13).
1893년, 복무기간이 지나자 그는 일단 귀국하여 유럽각지를 돌면서 자신의 탐사내용에 대하여 강연하며 다녔다. 그 결과 명성은 얻었지만, 그 유골들이 과연 한 사람의 것이냐는 의문 때문에 학계와 교회들로부터 배척되었다. 1895년에 열린 화란의 국제동물학회(The 3rd International Congress of Zoology, Leyden, Holland)에서 그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참석한 전문가들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영국학자들은 유골의 주인공을 사람의 것으로 본 반면, 독일 학자들은 원숭이로 해석하였다. 프랑스 학자들만이 그 중간형태의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발표가 있은 후 유럽의 인류학자 24인이 다시 모여서 이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그 결과, 10명은 유인원(동물)으로 판정하였고, 7명은 원인(猿人)이라 하였다. 독일의 영장류 해부학자인 버효(Rudolph Verchow)는 두개골과 대퇴골이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으므로 한 동물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견에는 진화론자인 웰스(H.G. Wells)도 동의하였다.
그 후, 그는 감정을 숨기고 곧잘 화를 내는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발굴한 유골들을 외부에 일체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화석들은 지금도 화란 라이덴의 자연사박물관(Leiden Natural Museum)에 비밀스럽게 보관된 채 어떠한 연대측정도 한 적이 없이 보관되고 있다. 비록 부정확한 연대측정법이라 할지라도 이를 이용하여 하루 빨리 듀보아의 유골에 대한 연대를 측정하여 의구심을 풀어야 마땅할 것이다. [Taylor; ibid, p 24] 그는 1898년에는 생계를 위해 비전공 분야에 박봉인 암스텔담 대학의 결정학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1907년, 독일 과학아카데미의 세렌카 교수(Selenka)가 이끄는 조사팀이 듀보아의 발굴내용을 확인하려고 쟈바를 방문하였다. 듀보아는 그들에게 아무런 협조도 안 했을 뿐더러 유골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연구팀은 트리닐에서 만여톤에 달하는 흙을 파 헤치면서, 43박스에 달하는 화석을 발굴했으나, 듀보아가 발견했다는 내용물들은 전혀 확인할 수 없었고,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고 보고하였다(Keith 1911). 그들이 확인한 흥미로운 일 중 한가지는 듀보아가 파 내려갔던 화석들이 나오는 지층은 인근지역의 화산에서 흘러 내리는 용암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이는 쟈바인을 50만년전으로 추정한 방식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14년, 듀보아의 쟈바인은 호주에서 몇 년전에 발굴한 탈가이 두개골(Talgai Skull)의 발굴소식에 가리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엔 이미 진화인류학자들의 활동으로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가 인류의 연결고리로 인정되어 가고 있었던 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듀보아는 다시 와드잭 두개골을 공개함으로써 학계에 복귀를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도 듀보아는 자신이 와드잭 인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감추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듀보아는 자신이 발굴한 유골들이 인류의 직계조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당시 와드잭(Wadjac)에서 발굴한 인골(Wadjac skull 1550-1650cc)을 30년간이나 숨겨왔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많은 학자들도 같은 지역(Trinil, Sangiran)에서 듀보아가 발굴한 것과 비슷한 수많은 동물뼈와 더불어 현대인의 인골을 발굴하였다.
듀보아가 70세가 되던 해, 독일의 저명한 진화인류학자인 케닉스발트(G.H.R. von Koenigswald 1902-1982)는 4년간에 걸쳐(1935-39) 듀보아와 같은 지역(Sangiran)에서 듀보아가 발견한 것과 유사한 유골들을 발굴하였다(사진 12). 그러나, 손발뼈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치아가 붙은 턱뼈와 두개골의 윗조각을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ropus Ⅱ, Ⅲ, Ⅳ)라 명명하면서 "듀보아가 발견한 두 어금니는 오랑우탕의 것이며, 앞의 어금니와 대퇴골은 사람의 것이고, 치아는 원숭이의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리고, "쟈바인은 원숭이와 비슷한 동물”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Franzen J.L.; In Memoriam Gustav H. R. von Koenigswald, Seckenbergiana lethaea, 64(5/6), pp 381-402, 1984], [P.V. Tobias; The Life and Work of G.H.R. von Koenigswald in auf denSpuren des Pithecanthropus, Ges., 34, pp 25-96, Frankfurt, 1984]
듀보아는 돌연히 자기가 발굴한 두개골은 원숭이의 것이며, 쟈바인은 커다란 기본원숭이(Gibbon ape)의 일종이라고 문서로 발표하였다. [W. Homells; Mankind in Marking, pp155-156, 1935]. 이는 그의 주장을 원숭이와 현대인의 중간지점으로 옮겨 놓으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고백내용은 벤트(Herbert Went 1955), 브레이스와 몬태규(C. Loring Brace & Ashley Montagu 1955), 버드셀(Joseph B. Birdsell 1975) 등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두개골 화석연구의 권위자인 부울과 발로아(Marcellin Boule & H. M. Vallois)는 듀보아가 발굴한 두개골의 윗부분을 철저히 분석한 후 "이들은 침팬지나 긴팔원숭이를 닮은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독일의 저명한 인류학자인 버효(Verchow of Berlin)는 두개골의 안와(眼窩)의 후면이 협착된 것으로 보아 원숭이의 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뼈들이 모두 한 생명체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하였다. 즉, 여러 동물의 뼈들을 조립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W.A. Criswell; Did Man Just Happen?, Zondervan Publishing Co., Grand Rapids, p 86, Michigan, 1973].
듀보아가 죽은 후(1940), 진화론자들은 쟈바인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른다(Mayr 1950). 지금도 학자들간에는 쟈바인이 신종(중간종)인지 인간의 변종(현대인)인지 대립하며 논쟁중이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이러한 유골들이 과연 한 사람의 것이었느냐는 하는 것이다. 원숭이의 두개골과 사람의 대퇴골이 함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들을 간직한 채 쟈바인을 진화학자인 톰슨(Thompson 1958)은 <다윈의 기원론>의 복사판에서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왔던 원숭이와 현생인류의 연결고리라고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경원인은 또 하나의 '빠진 고리'로 주장되어 온 대표적인 호모 에렉투스 중 하나이다(사진 13). 스웨덴학자 즈단스키(Otto Zdansky 1921)는 북경근교(45Km)의 쵸우코우티엔(Choukoutien 周久店)의 한 언덕(龍骨山)에서 사람의 것과 유사한 치아 두개와 많은 동물뼈들을 발굴했으나, 그는 아무런 설명없이 고국으로 돌아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카나다의 내과의사였던 블랙(Davidson Black)은 마튜(William Mathew)가 쓴 <기후와 진화>(Clime & Evolution)를 읽고서 인류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한다. [Dora Hood; Davidson Black: A biography,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64)]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1914) 필트다운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학자중 하나인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로부터 필트다운인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는 아직 필트다운인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다. 그는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 설립한 북경 유니온의과대학(Peking Union Medical Colledge)에 인류탐색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교수에 취임키로 하고, 1919년 부인과 함께 북경에 도착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쟈바인을 발굴하려 했던 유진 듀보아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비유되곤 한다.
이들은 다음 해부터 석회석 채굴장이 많이 있는 북경서남쪽 45Km지점의 주구점일대(龍骨山)를 탐사했다. 그러나, 찾던 유골은 나타나지 않았다. 1926년부터는 중국학자인 비중문(裵文中)과 양종건(揚鐘健)을 비롯하여 프랑스 신부로서 중국지질학부 고문인 샤르뎅 신부와 미국인 지질학자인 바바 등이 참여하였다(사진 14). 여기에서 주목할 사실은 영국의 필트다운사건 때 거짓유물을 묻은 것으로 판명된 샤르뎅이 1923년부터 북경인의 발굴에도 참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당시에 교황청으로부터 일체의 저술활동을 하지 않도록 금지령을 받고 있던 때였다. 사진중앙의 세 번째 사람이 비중문이고, 중앙에 키가 가장 큰 사람이 샤르뎅이며, 그 옆에 담배대를 물고 있는 사람이 블랙이다. [南條郁子譯; 人類ノ起源, p 97, 創元社, 大阪, 1995, 원문은 Thomas Herbert; L'Homme avant l'Homme].
이들은 재정이 고갈되어가던 1927년에 마침내 그는 이빨 한 개를 발견하였다. 불랙(1927)은 이러한 치아의 주인공이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의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50-100만년 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라 단정하고, 시난트로푸스(Sinanthropus pekingsis)라 명명하였다. 치아 하나로 이렇게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명명한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저 놀랍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 후, 이곳에서는 인골(10)도 발견되었으나 이러한 사실은 일체 발표되지 않았다.
이러한 발표에 고무된 북경유니온대학의 설립자인 록펠러 재단은 인류화석의 연구기금으로 8만불을 추가 지원하게 되었다. 당시에 거금이었던 이 돈으로 그는 100명의 인부를 발굴현장에 투입하였다. 한 암석에서 떼어낸 두개골의 용량은 1,000cc 보다 작았으나, 블랙은 이 두개골이 자기가 명명한 시난트로프스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블랙처럼 인류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 헤메고 있었던 샤르뎅을 위시하여 진화인류학들인 스미스, 부울, 케닉스발트 등은 이 두개골을 보고서 원숭이의 것과 유사하며, 듀보아가 쟈바에서 발견한 것과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쟈바인과 북경인을 한 데 묶어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 명명하였다.(Koenigswald & Weidenreich 1939, Teilhard de Chardin 1965).
그 후에도 블랙은 1929년부터 2년간 비문중 및 스웨덴의 인류학자인 앤더슨과 같이 화석화된 두개골 파편(30개, 800-1,100CC)과 아래턱뼈(11), 대퇴골(7), 팔뼈(2), 치아(147)를 발굴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뼈들을 연결하고자 수백톤의 암석들을 폭파하였다(Day 1977, T. Chardin 1965). 그러나, 코끼리, 사슴 등의 동물뼈들만 나올 뿐 시난트로프스의 뼈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150피트까지 지층을 파내려 갔지만,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한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934년, 블랙은 41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북경인의 유골조각들을 조립하던 바이덴라이히(Frantz Weidenreich)였다. 그가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립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북경인(Peking Man)으로 알려진 모조품인 것이다. 뇌용량 1,000cc에 50만년 전에 살았다는 원인(猿人 hominoid)으로 발표하였다. 그들은 북경인의 치아가 현대인과 약간 다르며, 불과 연장을 사용하였고 식인습관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유골의 발굴작업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까지 계속되어 45개의 인골을 추가로 발굴하였다. 그러던 중, 북경인 유골에 관하여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발생하였다. 중일전쟁(1937)전까지 수집한 유골들을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이송하려고 북경에서 해안지방인 진황도(秦皇島)로 이송하던 중(1941.12.7) 치아 두개를 남기고는 유골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한 설에 의하면 이 유골을 실은 배가 황해에서 전복되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더구나, 1932년부터 발굴작업에 참여한 바이덴라이히가 만든 리스트에 기재된 14개의 두개골과 나머지의 모든 유골들도 2차세계대전 중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다. 이차 분실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진화학자들이 관리하여 오던 많은 유골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지고 지금은 출처불명한 주형물들(casts)과 치아 두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잃어버린 고리’가 된 것이다. 따라서, 북경원인의 연구를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h)와 같은 진화학자들이 남긴 연구논문과 그림 및 플라스틱 모조품에 의존해야하므로 학술적 검증이 현재로서는 어려운 실정이다(Patrick O'Conell 1969, Shapiro 1971, Janus & Brashler 1975).
그 후, 1966년까지 추가로 발굴된 22구의 인류화석들(남19, 여3)도 모두 파손되거나 분실되었다고 한다. 삼차 분실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세 번에 걸친 이러한 의문스러운 증발사건은 진화론자들이 역사적으로 자행했던 다른 조작사례들과 관련하여 상기할 때, 그들이 프라스틱모조품을 만들 때 사용했다는 뼈조각들이 과연 진품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은 프랑스 인류학연구소의 구석기연구교수인 헨리 부루일(Henry Breuil 1931)이 샤르뎅이 발굴했다는 동일한 장소에서 현대인이 일한 작업장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마일 밖에 있었던 돌과 뿔사슴들의 뼈들이 이 작업에 이용되었으며, 불을 지피는 용광로의 흔적도 발견했다고 한다. 이러한 흔적을 부루일은 잿더미가 7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H. Breuil; Le Feu l'industrie de pierre et d'os dans le gisement de 'Sinanthropus' a Chou K'ou Tien(The Fire and the Industry of Stone and Bone in the Layer of Sinanthropus at Chou K'ou Tien), L'Anthropologie(Paris), 42(March), p 1-7, 1932]. 이처럼 현대인이 사용한 잿더미를 진화론자들은 북경원인이 흡사 불을 사용했던 것으로 각색시켰던 것이다. [David Pilbeam; The evolution of man, Thames and Hudson, London, 1970].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하려고 대영박물관에 근무하던 마우리스(Maurice 1950)의 지휘하에 북경인이 굴속에서 불을 집히고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그림 14). 그리고, 대영제국박물관 입구의 층계길에 걸도록 하였다. 이 그림은 전혀 사실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 아니다. 불의 이용에 관하여 그들의 일원인 샤르뎅(1934)은 후일 "불의 흔적은...수미터의 깊이까지 쌓여 있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Teilhard de Chardin(1956); The appearance of man translated by Cohen, 1965]
그리고, 진화학자인 루캉(Rukang & Shenlong 1983) 등도 불의 흔적은 6미터나 되는 대규모의 것이라고 확인하였다. [Taylor; ibid, p 239] 그러나, 블랙과 샤르뎅(1933)은 그러한 보고내용(1932)은 무시한 채, 자기들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내 보낸 것이다. 그들은 이 글 속에서 용광로작업을 ”인공적 불의 흔적"이라는 간단한 한 마디의 표현으로 무시해 버렸다. [Taylor; ibid. pp 238-239]. 부로일은 그 밖의 다른 작업장의 유물도 추가로 발굴하여 그 지방에 조그마한 박물관을 만들어 전시하였으나, 그 진열품들 역시 어느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Bouden 1977).
1934년에는 현대인의 두개골(세 개는 완전한 형태)도 발굴되었으나, 샤르뎅(1965)은 '윗 동굴'(upper-cave)에서 발견된 것처럼 고쳐 기술하였다. 사실적 기록을 조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대인류의 두개골 발견사실을 감추려고 바이덴라이히(1939)는 5년간 활동하였다. [F. Weideneich; On the earliest representation of modern mankin recovered on the soil of East Asia, Peking Natural History Bulletin, 13, p 161, 1939]. 그러한 두 사람의 활동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부로일이 발견했던 방대한 잿더미나 현대인의 두개골에 대해서는 일체 소개하지 않고 있다. 진실이 이처럼 조작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은 학문적인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우든(Bouden 1977)은 브루일의 보고서가 모든 교과서와 책자에 인용되는 것을 억압하기 위하여 진화론자들이 갖은 노력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Macolm Bouden; Ape-men: Fact or fallacy? Sovereign Publications, Bromley, UK, 1977]
지금까지 전해지는 에피소우드 중 하나는 샤르뎅이 스승인 부울을 주구점에 초청했을 때 부울은 부스러진 원숭이의 두개골을 보고서 매우 불편해 했다고 한다. 그는 지적하기를 현대인들이 (과거에) 주구점에서 모종의 산업에 종사했으며, 두개골들은 단순히 원숭이의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그리고, 원숭이의 두개골이 부스러진 것과 다른 두개골 부위가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작업자들이 원숭이의 뇌를 먹고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울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과욕을 부려서 시난트로프스를 주구점의 지배자라고 추리한 것은 아닌지 (그것이) 동물이라는 기준에서 다시 자문해 보아야 한다.” [Marcellin Boule and H.V.Balloise; Fossil man Translated by M. Bullock, Rerint, Thames and Hudson, London, 1957]
더욱, 흥미있는 일은 이 발견에 관여했던 샤르뎅 자신도 북경원인이 큰 원숭이라고 고백했으며, 듀보아도 자신이 발견했던 쟈바인이 원숭이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 [F. Weidenreich; Pithecanthropus and Sinanthropus, Nature, 141(Feb. 26), p378, 1938]. 그 후, 바이덴라이히(1948)와 샤르뎅(1955)이 모두 죽자 그들의 추종자들이 북경인의 공식명칭을 호모 에렉투스 페킹시스(Homo erectus pekingsis)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우든(1984)은 말하기를 이러한 유골들의 주인공이 당시의 석회석을 채굴했던 사람들과 이들이 채굴작업을 하면서 원숭이를 비롯한 동물들을 사냥하여 잡아 먹은 후 불속에 버린 동물들의 뼈들이 혼합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주구점 일대는 지금은 거의 채석장으로 변하였고 동굴들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다만, 작은 전시관에 몇 점의 화석인골과 그 곳에서 출토하였다는 유물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을 뿐인데, 이러한 화석뼈들은 주로 동물들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영문으로 기록된 수많은 북경인에 관한 서적들을 살펴 보면,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커다란 차이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두개골의 숫자는 14-40개, 손발의 뼈들은 3-11개, 발굴지점은 ‘윗 동굴’에서 ‘아랫 동굴’로 다양하나, 현대인의 거주흔적에 대해서는 일체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다만, 샤르뎅은 두개골이 큰 원숭이의 것이라고 하여 유인원일 가능성을 부각시킨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한다면 북경인은 진화론자들이 선입관을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유골들을 자기들이 상상한 방향으로 조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Taylor; ibid, p 241]
주구점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동굴에서는 사암의 물고기 화석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한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에 석회석 채굴업자들이 그 곳에 거주하면서 동물이나 물고기를 잡아 먹고 버렸거나, 홍수와 같은 대격변에 의해 사람과 동물들이 갑자기 같이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③ 멧돼지 이빨과 네브라스카인(The Nebraska Man)
북경인의 발견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지질학자인 쿡(Herold J. Cook 1922)은 네브라스카주의 필리오세(Piliocene)지층에서 어금니 하나를 발굴하였다. [Henry F. Osbourn; The origin and evolution of life,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18]. 이것을 당시의 저명한 고생물학자이며 미국의 국립자연사박물관장이었던 오스본(Henry Fairfield Osborn 1922)과 그의 동료들은 침팬지와 사람사이를 연결하는 40만년 전에 살았던 현생인류의 조상이라 하여 헤스페로피테쿠스 헤롤드쿠키(Hesperopithecus harold cooki)라 명명하였다. 일명 네브라스카인(The nebraska Man)은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다. 그의 발표가 전해지자 고생물학자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1922, 1924)와 윌더(Harris Fairfield Wilder 1926)와 같은 수많은 진화론자들이 이를 지지하였다.
그 중에서도, 필트다운인의 발굴에 관여했던 영국의 그라프톤 스미스는 전세계에 배포되는 런던화보사(Illustrated London News)를 설득하여 네브라스카인 부부의 상상도를 그리도록 설득하였다(그림 15). 어금니 한 개로 전체적인 인물화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화가에게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모양으로 그리도록 주문하였다. 이렇게 하여 두 페이지를 장식한 기상천외한 상상도가 런던화보집에 실리게 되었다. [G. Elliot Smith; Hesperopithecus: The ape-man in the western world, Illustrated London News, 160(Jun. 24), p 944, 1922]. 스미스는 후일(1935) 과학발전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영국정부로부터 기사작위를 받게 된다. 그러나, 1953년에는 필트다운인의 사기극 공모자로 지목되었으니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들은 그 후에 사실을 왜곡케 한 재판정의 자료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1925년 7월에 미국 테네시주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 하여 법정에 기소됐던 한 주립고등학교의 진화론교사 스코프스(John Thomas Scorpus)에 대한 원숭이재판(Monkey Trial, Dayton, Tennessee)에서 진화의 증거로 제출된 것이다. 이 재판은 진화론을 지지하는 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에 의해 더욱 선동되었다. 당시의 주법은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코프스는 주법을 위반한 셈이었던 것이다. [J.T. Scoupes & James Presley; Centre of the storm: Memories of John T. Scoupes, Holt, Rinehart & Winston, New York, 1967]
테네시 법정에서 진화론측 변호자인 대로우(Clarence Darrow)는 창조론자인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ian)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고 한다. "See Brian, even in your own state of Nebraska has a fossil that shows there are missing links and that evolution is variable (브라이언씨, 당신의 고향 네브라스카에서도 진화론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잃어버린 중간고리인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소?)"
진화과학자들은 네브라스카인의 자료로 브라이언을 맹렬히 조소하며 비난하였고, 브라이언은 아직 자료가 빈약하므로 연구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북경윈인과 또 다른 사기극으로 판명된 필트다운인의 증거까지 제시된 이 재판에서 결국 진화론을 가르쳤던 스코프스는 불과 100달러의 벌금형만을 선고받음으로써, 이 재판은 실질적으로는 진화론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후, 테네시주에서의 진화론교육의 금지규정은 1965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진화론과 다른 견해는 가르쳐지지 못하고 추방되는 현실을 맞고 있는 것이다(Davidheiser 1971).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옳은 일인지 혼란스러운 생각뿐이다.
그러다가 재판이 끝난지 3년 후(1928), 매우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되었다. 네브라스카인의 어금니와 완전히 동일한 이(齒)를 가진 멧돼지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더구나, 그 이빨의 주인공은 그 곳에선 멸종되었으나 지금도 파라과이의 샤코지방(Chaco)과 에쿠아돌에서 서식하는 멧돼지(Prosthennops serus->Catagonus ameghino)의 것으로 여러 학자들(William K. Gregory 1927, Ralph M. Wetzel 1975, Tim White 1983]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R.M. Wetzel et al; Catagonus, an 'extinct' peccary, alive in Paraguay, Science, 189(Aug.1), p 379, 1975]. 이처럼, 네브라스카인은 멧돼지의 어금니 한 개와 출처불명의 유물 몇 점을 근거로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네브라스카인은 교과서는 물론 브리타니카 사전(14판, p 767, 1929)에서도 삭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자료를 사용하고 있어 시급한 시정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필트다운인, 쟈바인, 북경인, 그리고 라마피테쿠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네브라스카인과 유사한 사건이 그 후에도 서남콜로라도인(Southwest Colorado Man) 사건에서 재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콜로라도에서 발굴했다는 이빨 한 개로 진화론자들이 현생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한 이 이빨의 주인공은 후일 말(馬)의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W.A. Criswell; Did Man Just Happen?, p 85, Zondervan Publishing Co., Grand Rapids, Michigan, 1973].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제 아무리 권위있는 진화학자들이 학문을 빙자하여 새롭게 발표하는 주장들이라 할지라도, 앞으로는 일단 의심하고 철저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러한 엄청난 과오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나 반성없이 학문의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쉼없이 새로운 이론과 변명의 자료를 개발하는데 급급해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학문이며, 무엇을 연구하려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④ 필트다운인(The Piltdown Man)
필트다운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희대의 학문적 사기사건으로 유명하다. 저명한 고생물학자이며 진화론자였으며 대영제국의 런던박물관장이던 우드워드(Arther Smith Woodward)와 그의 친구이며 아마추어 고생물학자인 도오손(Charles Dowson)은 (Reader 1981)은 1908년부터 1912까지 다윈의 생가에서 수마일 떨어진, 영국 동부의 필트다운 마을(Piltdown, East Sussex)의 자갈 구덩이에서 40-50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의 파편들과 치아 및 턱뼈들을 발견하고(사진 15) 이안트로푸스 도소니(Eoanthropus dowsoni)라 명명하였다. 이 이름의 뜻은 ‘도오손이 발견한 첫 사람’ 이라는 말이다. 두개골은 사람에 가깝고 아래 턱뼈는 원숭이와 비슷하여 현대 인류의 ‘첫 사람’(Dawn Man) 이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그림 16). 이들은 런던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 1912.12.18)에 초기인류의 화석을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그들의 발표내용은 세계적으로 권위를 자랑하는 사이언스지의 표지기사로 실리게 되었고(Science1938. 12),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부울(Marcellin Boule 1886-1942)과 미국 고생물학자인 오스본(Harris F. Osborn 1857-1935)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리타니카 사전에도 인류의 중간종으로 기재되기에 이르렀다. 왕립아카데미소속의 연구원인 쿡(John Cook)이 그린 필트다운인의 대형 유화가 런던의 지질학회에 걸리게 되었다.이러한 사실이 보도되자 필트다운인을 주제로 한 학술논문도 500건 이상이 쏟아져 나왔다. [Gary E. Parker; Origin of Mankind, Impact No. 101,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California, p 4, Nov., 1981] 그리고, 세계 여러나라의 교과서에 인류의 조상으로 기재되었으며, 세계 각국의 주요 박물관들에서도 전시가 되었다. 이러한 발견의 공로로 영국정부는 1916년에 이미 죽은 도오손을 제외한 케이스(1921), 우드워드(1924), 스미스(1926?) 등에게 기사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그러나, 이 유골들에 대한 진위성이 계속 문제가 되어 마침내 8인으로 구성된 제1차 진상조사위원회(1916)가 결성되었다(사진 16). 이 회의에는 도오손과 우드워드를 비롯하여 영국의 왕립협회회원으로서 저명한 해부학자이며 의사인 케이스(Arthur Keith) 등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조사위원회는 이 유골들을 진품으로 판정하였다. 여기에 소개한 사진은 일차 조사위원회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중앙에 흰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이 케이스이며, 그의 오른편에서 화석골을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유골발견자의 한 사람인 도오손이다.[南條郁子; ibid, p 39]
그러던 중, 1953년에 다시 2차 조사위원회가 재소집되었다. 소집이유는 새로운 유골분석방법인 불소측정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회의에는 대영자연사박물관의 오클리(Kenneth Okley), 인류학자인 와이너(Joeph Weiner), 옥스퍼드대학의 치과해부학자인 클라크(LeGros Clark), 뇌연구자인 스미스(Grafton Elliot Smith) 등 10인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와이너와 오클리(사진 17)가 회의를 주도하였다. 이 방법으로 검토한 결과 필트다운인의 유골은 5년이 경과한 원숭이 턱뼈와 사람의 두개골을 조립하여 만든 것임이 드러났다. [The Great Piltdown Hoax, Popular Science, Oct, 1956].
불소측정법이란 영국 킹스칼리지의 해부학자인 워터스톤(David Waterston 1871-1942)이 화석뼈에 대한 연대측정법으로 개발한 것인데, 이는 오래 된 뼈일수록 흙 속의 불소(F)가 뼈속으로 스며들게 되므로, 오래된 뼈속에 불소함량이 점점 더 많아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트다운인의 두개골 속에는 불소 함량이 매우 적어 전문학자들이 재조사한 바 그 뼈들은 불과 수천년 전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턱뼈에는 인이 거의 없었으며, 더욱 놀라운 일은 해골이 중크롬산카리로 변색처리되었고, 치아에서는 줄톱으로 연마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Criswell; ibid. p 89]
뒤늦게 밝혀진 바에 의하면, 턱뼈가 정상인의 해골에 걸맞지 않게 컸으며, 아래턱뼈, 턱뼈관절, 아래턱의 송곳니 및 얼굴 부위가 없었다. 더구나, 두개골의 중간 부위가 없었기 때문에 두뇌의 용적을 측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드워드는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치인 1,070cc라고 임의로 추정한 반면, 케이스(사진 18)는 자신이 설명한 대로 커다란 턱뼈에 부합하도록 1,500cc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측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하자 중재에 나선 사람이 샤르뎅 신부였다. 그는 같은 필트다운 지역에서 발굴한 송곳니 하나를 그 유골의 주인공의 것으로 삽입하도록 제안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측이 만족할만한 뇌용적인 1,200cc 라는 숫치가 타협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사람과 유인원의 중간크기에 상당하기 때문에 모두가 수용하였다. [Taylor; ibid. pp 227-228] 뇌용적을 실험치가 아닌 상상과 추리로 만들어 낸 것이다.
대영박물관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며 치과해부학자였던 클라크(LeGros Clark)는 필트다운인이 사기극으로 판명되었을 당시에 메모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치아들을) 마모시킨 흔적들이 바로 눈에 띄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뚜렷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왜 일차조사시 그것을 발견치 못했는지 질문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Ronald Millar; The Piiltdown man, Paladin, St. Albans, UK, 1974]. 그는 1916년도의 조사시 그러한 사실이 발견되어 상부에 보고된 적이 있었으나, 지도층인 케이스와 우드워드가 무시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C.W. Lyne; The significance of the radiograps of the Piltdown teeth, Proceedings of Royal Society of Medicine, 9(Ondontological section), p 33, London, 1916]
이와는 별도로 방사선동위원소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이 뼈들은 오래된 것이 아니며, 사람의 두개골과 오랑우탕 암컷의 턱뼈를 조립한 것으로, 턱뼈들은 중크롬산카리 용액으로 처리하여 색소가 입혀져 있다는 사실도 판명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엄청난 과학적 사기극을 주도한 사람이 부울(Marcellin Boule)에게 사사받은 27세의 샤르뎅(Gould 1979)과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라고 추정하였다(Winslow & Bouden 1983). [Stephene J. Gould; Piltdowm revisited, Natural History, 88(March), p 86, New York, 1979], [J.H.A. Winslow, Meyer; The Perpetrator at Piltdown, Science 83(Washinton), 4(September), p 33, 1983]. 보우든(Malcolm Bowden 1977)은 필트다운이 발견된 구덩이에 가짜 화석들을 집어 넣은 사람이 유신진화론자인 샤르뎅(S. J.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M. Bouden; Ape-Man: Fact or Fallacy, pp 35, 46-47, Sovereign Publications, Bromley, Kent, Canada 1977] 이렇게 하여 40여년간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군림하여 왔던 필트다운인은 희대의 학술적 사기극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표 5).
최근에, 스펜서(Frank Spencer 1990)가 추가로 밝힌 바에 의하면, 호주 시드니 대학의 한 역사학자의 조사결과 이러한 사기극을 도운 또 다른 공범이 필트다운진상조사위원이었던 케이스(Arthur Keith 1866-1955)였다고 밝히고 있어 충격을 더 하고 있다. 결국, 허위진상조사위원들의 과반수가 사기극을 주도했던 공범자라는 이야기이므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케이스는 철저한 진화론자로서 일찌기 서젼로얄대학 해부학탐색교수(Hunterian Professor of Anatomy at Royal University of Surgions 1908)로 취임시 "나의 포부는 영국의 인류학역사를 새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피력한 바 있었다. [Arthur Keith; An Autobiography, Philosophical Library, New York, 1950]. 이러한 사기극의 진상은 이차진상조사위원회를 주도하였던 와이너(Joseph S. Weiner 1955), 오클리와 와이너(Kenneth P. Oakley & J.S. Weiner 1953, 1955)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으며, 런던지질협회(1954. 7. 10)와 밀러(Ronald Miller) 등에 의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사태가 이렇게 확대되자 진화학자인 쥬커만은 "앞으로 인류화석에 대한 발견이 보고될 때에는 일단 그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필트다운인 사건은 인류진화를 믿고자 한 진화인류학자들이 진화론의 약점인 ‘빠진 고리’를 발굴하고자 만들어 낸 잘못된 열심과 학문적인 명예욕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허황된 자작극이라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상상이나 선입관에 의한 유골발굴작업은 지금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키, 요한슨 등의 학자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Taylor; ibid. p 229]. 최근에 타임지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난주, 영국의 고생물학자인 가디너(Brian gardiner)는 자신과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커런트(Andrew Currant)는 (필트다운인 사기극의) 범인이 당시에 박물관에서 동물학부 책임자로 일했던 힌턴(Martin A.C. Hinton)이었음을 확인하였다” [Time, June 3, 1996]
⑤ 하이델베르그인(The Heidelberg Man)
하이델베르그인은 진화론자들이 1907년 독일의 하이델베르그 인근 마우어지방의 라인강변 모래구덩이에서 턱뼈의 화석을 발굴하였다(사진 19). 화석을 분석한 결과 25-60만년 전에 그 곳에 살았던 초기인류라고 주장하고 일명 마우어인(The Mauer Man)이라 불렀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큰 턱뼈가 유인원과 유사하나 치아의 배열은 사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뼈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치아는 현대인과 같으며, 턱뼈는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사람들과 같고, 두개골은 흑인들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진화 인류학자인 허들리카(A. Herdlika)는 하이델베르그인의 치아는 사람의 것으로 이 유골의 주인공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람’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출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네안데르탈인들의 엄지손가락
(Thumbs up for Neanderthals)
'원숭이-인간'에 관한 해묵은 전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수많은 진화론자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네안데르탈인들을 완전한 인간으로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도 인간 이하의 털 많은 야수인간이라는 이미지를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다.
2003년 3월 27일 Nature 지는 ”네안데르탈인의 손재주에 대한 디지털 분석”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 신비의 인간들에 관해 갖고 있던 또 하나의 잘못된 가정을 폭로하였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은 손재주가 서툴러 발달된 도구제작이 불가능하였던 것이 원인이었다는 결론을 주장했던 동물학자들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네안데르탈인의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에 대한 새로운 3차원 컴퓨터 시물레이션 실험결과, 그들은 현대인의 손과 맞먹는 '정밀한 쥐기(precision grip)'를 가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의 쥐기의 표본을 만들기 위하여, 조사자들은 프랑스의 라페라시(La Ferrassie)에서 발견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의 화석의 형상(image)을 스캐닝 하여, 그 형상(image)에 대한 완전한 운동표본을 도출해 냈다 (그것은 오늘날 컴퓨터 그래픽으로 할 수 있는 애니메이터와 매우 흡사하다). 비록 네안데르탈인의 손이 현대인간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은 더 많은 섬유질 근육과 더 넓은 손가락 끝을 가졌다), 그들은 엄지손가락을 집게손가락 끝에 붙이는데━인간의 정밀한 손재주의 중요 요소━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놀랍게도, 조사자들은 네안데르탈인들의 손가락의 운동 범위를 매우 온건하게 선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라면 실제로는 그들의 솜씨가 우리들의 전형적인 솜씨보다 훨씬 더 좋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1
이 개연성은 네안데르탈인들의 뇌가 평균적으로 오늘날의 인간의 뇌보다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만큼이나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원숭이를 닮은 짐승이란 공연한 말인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다!
직접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을 조사할 수 없는 현실에서, 연구자들은 지식과 현실간의 괴리를 일대 가정으로 메울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인간의 화석연구에 대해 진화론자들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을 동물학자들의 결론이 성급하고 조잡하다는 평가를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Making Monkeys out of Man을 참조하시오.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4371gc8-28-2000.asp). 이것이 동물학자들이 네안데르탈인에 관해서는 다소나마 조심스러워진 이유 중의 하나다.
네안데르탈인 연구의 권위자 에리크 트린카우스(Erik Trinkaus)는 이 분야에 대한 역사가 편향적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화나게도, 화석은 말이 없다. 화석에 생명을 불어넣은 자들은 실험과학자들로서, 그들은 제 나름으로 최선 아니면, 최악의 특성을 화석에 부여하였다. 매 세대마다 과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공포, 문화, 심지어 개인 역사까지도 투영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비록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펼쳐 보이는 대신에 그들의 비밀을 펼쳐 보인다고 스스로 자부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네안데르탈인들을 우리 자신의 본성을 비밀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는 말없는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네안데르탈인을 왜곡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 즉 우리의 해석에서, 특히 완벽하게 살(肉)을 입혀서 재구성한 데서 명백하다 … ” 2
진화론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확신이 없다. 즉, 네안데르탈인이 현대인의 선구자인가, 아니면 멸종된 인간의 곁가지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에게는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독특한 생명체 '종류'를 ━ 즉,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 안에서 여러 변종들을 발견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아담의 후손들로서 닮은 후손을 낳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말고도 다른 종의 생명체, 즉 원숭이도 창조하셨다. 원숭이 종은 그 안에서 중요한 변종들을 파생시켰지만, 그 많은 그들의 변종들 중에 있는 그 어떤 변종도 인류와의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Notes
1. '네안데르탈인의 'trapezial-metacarpal-1 (사다리꼴 손바닥-1 관절)을 펼치면, 모든 네안데르탈인의 엄지손가락은 어쩌면 현대인간의 손가락보다 더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을는지 알 수 없다' 라고 Nature 지가 보고하였다. (2003년 3월 27일 Nature 지)
2. Trinkaus, E. and Shipman P. The Neanderthal, Alfred A. Knopf, New York, 399, 199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3/0404neandertal.asp
출처 - AIG, 4 April 2003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74
참고 : 6190|5525|5025|5918|5819|5528|4682|4820|4410|6127|6052|4812|5884|5818|5802|5792|5796|5768
16만년 전의 인류조상에 대한 의견 (보도 반박)
최근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에서 16만년 전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현생인류의 화석을 발견하고 이것이 현생인류의 조상일 것이라 주장하며 아파르어로 '조상'의 뜻을 가진 '이달투'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번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와 동경대의 연구진에 의하여 발견된 두개골이 현재의 인류 모습과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모사피엔스에 속하지만 계보상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아닌 '호모사피엔스 이달투'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발표에 의하면 이들의 연대측정방법은 탄소-14(C14)에 의한 방법이었다. 이 방법에 의한 연대측정은 많은 오차가 있다는 것이 잘 알려진 방법이다. 이바노프 박사(러시아) 등이 발표한 연대측정 방법에 의하면 현재까지 우리가 들어 믿고 있는 연대와는 전혀 다른 연대가 나오고 일관성이 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일반화되지는 않아서 이번의 발표와 같이 탄소-14를 이용한 연대측정법만으로 발표된 경우 아쉬움이 크다고 하겠다.
침프맨(Chimp-Men)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유전자의 결함으로 거의 침팬지와 같은 모양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는 분명 현재에 태어난 단지 큰 결함을 가진 사람이다. 참고로 인간과 침팬지는 분석방법에 따라 유전자의 95-99.7%가 같다고 한다. 미래의 학자가 이 사람의 유골을 보고 인류에 대하여 어떠한 결론을 내릴 지 궁금한 일이다. 골격은 개인차를 무시할 수 없다. 현재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원숭이 같은 모양으로부터 온갖 유형의 골격이 다 나올 수 있다.
진화론을 믿는 학자들 간에도 우주의 기원 또는 지구의 기원에 대한 연대를 말함에 있어 종종 기존의 설과는 또 다른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는 의견이 발표되어왔다. 이번의 최신 인류의 조상에 대한 발표 또한 이런 현상의 일면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앞으로 많은 조사가 더 필요한 사건이 아닌가 한다.
Chimp-Men 에 대한 기사
번역 -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2/e29/e29k29.htm
출처 - 기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711
참고 : 5768|5796|6292|6425|6476|6423|6560|6305|6271|6243|6190|6052|5952|5948|5819|5818|5802|5701|5528|5525|5507|5496|5492|5455|5406|5375|5349|5334|5218|5180|5155|5157|5129|5051|5025|4880|4847|4842|4833|4824|4820|4812|4785|4763|4751|4720|4709|4682|4660|4650|4626|4593|4563|4499|4498|4432|4410|4372|4315|4266|4176|4053|4007|4000|3989|3988|3890|3867|3848|3834|3656|3431
유인원
이 화석들은 가장 최근에 발굴된 관절이 분리된 뼈와 이빨들의 화석이다. 이것은 2000 년, 케냐의 Tugen 언덕의 '홍수 퇴적물 (Flood deposits)'에서 발견되었다. 이 13 조각의 뼈와 이빨들은 발견자에 의해서 대담하게도 'Orrorin tugenensis'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Orrorin 은 지방사투리로 'original man(최초의 사람)'을 뜻함)
추상적인 대진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에서 이 'Orrorin'은 '아담'이 되었다. 많은 종교들 내에서 발생되는 것과 같이, 여기에서 우리는 진화론적 신념 내에서의 불일치를 보게된다. 많은 진화론의 신도들, 사제들, 추기경들은 이러한 새로운 계시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 교리적인 문구는 모두에게 가장 계시적인 것이다. 그 안에서 중요한 것은 유인원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과 '전적으로 추상적인 모습' 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마지막 문구는 비난을 받고있다.
아직까지 다윈의 신념에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Orrorin 이라는 원숭이인간의 부활이다. 자기중심적인 내셔날 지오그래픽스의 전적인 주문은 과학에서 진실을 추방할 것이다. 그리고, Orrorin 이라는 원숭이인간의 부활과 같은 이상한 기적들을 수행할 것이다.
의심스러운 뼈들의 하찮은 더미에서, 성체를 만들어내는(Imagolution) 정신은 내쇼날 지오그래픽스의 상상가들의 마음에 가득 차게될 것이다. 그리고 무에서부터, 진화론의 경전인 내쇼날 지오그래픽스 잡지에서 살이 붙어서, 'Orrorin - Millennium Ancestor'가 출현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풍자적인 글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분이 있으면,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여 내쇼날 지오그래픽스의 페이지를 읽어보고 판단하기를 바란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 http://www.omniology.com/ORRORIN-tugenensis.html
출처 - The California Institute of Omniology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74
참고 :
인간의 창조
며칠 전 대전에 다녀오는 길에 동대구역 tmo 앞에서 신병들을 보았습니다. 아직 계급장도 없는 군인들이 줄을 맞추어서 어색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아까운 청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우리가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정의 훈련을 받으면 우리 나라를 지키는 군사로서 우리의 든든한 보호막이 됩니다. 그들을 보면서 어찌나 고마운 생각이 드는지 가슴이 뭉클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도 십자가 군병으로서 세상을 미혹시키려는 많은 사상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과학이라는 포장을 둘러쓰고 그럴듯 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이 시간에는 인간의 창조와 관련된 진화의 허구적인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첫째 날 빛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셋째 날에는 바다와 땅을 가르시고 땅은 식물을 내게 하셨습니다.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들을 만드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 땅의 생물들을 만드시고, 드디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숭이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지를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미리 용서하시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인간의 역사 속에 오실 분이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취하실 인간의 모습대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현재의 인간의 모습은 아무렇게나 진화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사숙고에 따른 결과로서 우리의 모습이 빚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적 사실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는 진화론에서는 다르게 말합니다. 학교의 교과서, 잡지, 신문,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림들은 수백 만년 전에 살았으리라고 추측되는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 형태 생물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최선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모든 증거들을 조심스럽고 완벽하게 연구해 보면, 이들 화석은 원숭이 또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며 부분 원숭이와 부분 사람이었던 그 무엇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이 판명됩니다. 실제로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형태의 화석은 단 하나도 발견된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을 속여왔던 몇 가지 진화론적 증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912년에, 법률가이며 아마추어 화석 탐구가인 찰스 도손(Charles Dawson)은 영국 필트다운 부근의 자갈 채굴장에서 턱뼈 부스러기 몇 개와 몇 조각의 두개골을 발견했습니다. 그 턱뼈는 원숭이의 것을 무척 닮은 것으로 보였고, 이빨과 두개골은 인간의 것을 매우 닮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도손 및 그가 자문을 구한 영국 과학자들은 이들 화석 뼈 모두가 인간의 특징과 원숭이의 특징을 결합한 하나의 개체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이들 화석이 약 500,000년 전에 실존했던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중간 생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여, '최초인간'을 의미하는 Eoanthropus dawsoni라고 명명하였으며 그는 유명한 필트다운인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50년에, 필트다운인은 속임수이며 위조품이었다고 밝혀졌습니다. 누군가가 원숭이의 턱뼈와 현대인의 두개골을 가져다가 화학약품으로 처리를 해서 그것들이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했고, 이빨을 줄로 다듬어서 그것들을 원숭이의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것처럼 보이게 하여, 그 화석 뼈를 자갈 채굴장에 묻어 넣고, 세상의 위대한 전문가들을 속였던 것입니다.
1922년에 서부 네브라스카에서 하나의 이빨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이빨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석 전문가 중의 하나이며 콜롬비아 대학 교수인 헨리 페어필드 오스본 박사에게 보여졌습니다. 오스본 박사와 다른 미국인 전문가들은 그 이빨에서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중간 상태에 대한 확실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Hesperopithecus라는 공식 이름이 주어졌으며, 네브라스카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빨을 발견한지 수년 후에, 그 생물의 뼈가 몇 개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네브라스카인은 원숭이 같은 인간도 아니고 인간 같은 원숭이도 아니라 돼지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이제 네브라스카인은 인간 진화의 증거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다윈이 진화에 관한 그의 책을 출판하던 시기인 1860년에, 네안데르탈인의 최초 화석 조각 몇 개가 독일의 네안데르탈 계곡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후에, 네안데르탈인의 화석들이 유럽의 다른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및 이스라엘에서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 1908년에는 거의 완전한 뼈대가 프랑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연장과 무기를 제조했으며, 현대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송장을 묻었고, 더욱이 그들의 뇌는 현대 사람들의 뇌보다 다소 컸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이 완전한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였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다소 원시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의 두개골은 우리의 것보다 더 납작했으며, 일부는 다소 무거운 눈두덩을 가졌고, 프랑스에서 발견된 뼈대는 네안데르탈인이 완전히 직립하여 걷지 않았던 듯이 활모양으로 굽어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발견에 근거하여, 진화론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유인원이었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에게 Homo neanderthalensis라는 공식 이름을 붙였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의 그림과 박물관 전시물들은, 그들의 팔이 길었으며, 손가락 관절을 질질 끌고, 딱정벌레 같은 이마를 가졌고, 구부러진 어깨, o형 다리의 유인원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해부학자인 Rudolph Virchow 박사는 수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의 원시인 같은 특징은 이 사람들이 유인원이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질병 또는 병리학적인 조건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비타민 D의 결핍으로 야기되는 구루병을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뼈가 물러지고 변형되었던 것입니다. 수년 동안 진화론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진짜 유인원이기를 원했기 때문에 Virchow 박사가 말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완전히 직립하였던 네안데르탈인의 다른 뼈대가 발견되었으며, 프랑스에서 발견된 뼈대는 사실상 관절염을 앓은 노인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의학적 조사에 의하여 밝혀졌습니다.
약 60년 전에, 화석화된 턱 조각과 이빨 몇 개가 인도에서 발견되어, 그 생물에게 Ramapithecus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어떤 유명한 전문가는, 이들 화석은 이 생물이 인간이 되어 가는 도중이었음을 증명해 주며, 그는 인간처럼 직립 보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에 같은 생물의 화석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오랑우탕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제 전문가들은 Ramapithecus가 전혀 인간의 조상이 아니었다고 인정합니다.
아주 최근에 하나의 두개골 뚜껑이 스페인에서 발견되었는데, 스페인의 전문가는 이것이 유럽에서 발견된 것 가장 오래된 화석 인간의 두개골 뚜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부근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것을 Orce인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전문가는 그 두개골 뚜껑이 6개월 된 당나귀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조상이라고 제시되는 다른 것들 중에 Australopithecus(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있습니다. 1924년에, Raymond Dart 박사가 남아프리카에서 Australopithecus의 최초 화석을 발견하였습니다. Australopithecus라는 이름은 '남쪽 원숭이' (australo=남쪽, pithecus=원숭이)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매우 어린 것으로 믿어지는 생물의 두개골이었습니다. 그것은 원숭이를 무척 닮았지만, dart 박사는 그 이빨이 요즘 원숭이에게서 발견되는 것들보다 더 인간의 것을 닮았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그는 이 생물이 인간이 되어 가는 도중에 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959년에는, Louis Leakey 박사와 그의 부인 Mary가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화석 두개골을 발견하였습니다. Leakey 박사는 그의 생물을 Zinjanthropus(동아프리카인)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생물 모두가 원숭이를 매우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그것들이 거의 인간의 방식대로 직립보행 했다는 이론을 세웠습니다.
1973년에 미국의 인류학자인 Donald Johanson 박사는 이디오피아에서 생물의 화석을 발견하여, Australopithecus afarenisis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 생물들 중의 하나는 여성이었는데, 화석화된 뼈대의 약 40%가 본래대로였습니다. Johanson은 그녀에게 'Lucy'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Johanson은 목 위를 볼 때 'lucy'가 원숭이였다고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처럼 직립보행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Lucy' 및 다른 모든 Australopithecus가 직립보행 하였으며, 인간에 이르는 계열에 속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국 버밍햄대학 의과대학의 해부학 과장인 Zuckerman 경이 이끌던 과학자 팀은 Australopithecus의 화석을 15년간 연구했습니다. 수년간의 연구와 조사를 한 이후에, Zuckerman경은 Australopithecus가 직립보행하지 않았으며, 이들 생물이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상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Zuckerman 경의 팀은 그것들이 오늘날 살아있는 현재 원숭이와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원숭이 이상은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Zuckerman경의 초창기 학생 중의 하나이며, 남가주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수이자 대학원장인 Charles Oxnard 박사도 수년 동안 Australopithecus의 후부 두개골 뼈대를 연구해 왔는데, 그의 연구를 통하여 볼 때 이들 생물이 사람들처럼 직립하여 보행하지 않았으며,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중간 상태가 아니고, 분명히 그들은 사람의 조상도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진화론자들이 인간과 현대의 원숭이가 수백 만년 전에 존재했던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고집하던 증거들이 모두 부정되고, 오직 Homo erectus(자바인과 북경인)만 남게 되었는데, 사실 자바인과 북경인은 사람의 조상이 아니라 원숭이입니다. 자바인의 발견자이며 자바인이 인간의 조상이었다고 최초로 주장했던 사람인 Eugene Dubois 박사는 그가 죽기 15년쯤 전에 마음을 바꾸어서, 자바인이 거대한 긴팔원숭이일 뿐 다른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이제 모든 사람들은 크로마뇽인이 현대의 유럽인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최근에, 몇몇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것이 아니라 원숭이가 인간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이론은 사람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진화론적 개념에 정확히 반대가 됩니다. 같은 증거를 놓고 그러한 두개의 모순되는 이론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 과학자들이 진화가 일어났다는 잘못된 기본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진화를 부정하면 창조를 인정해야 하고, 창조를 인정하면 곧 창조주를 인정해야 하므로 사람들은 과학의 증거에 위배되는 진화론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명백한 언어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주 특별한 날에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2/e29/e29c2.htm
출처 - 창조지, 제 105호 [1997. 11~1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82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