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황디’는 누구였을까?
중국인들은 어디서 왔을까!
(Who was ‘Huang Di’ the Yellow Emperor?
Where the Chinese came from!)
서론
우리는 역사적 기원에 대해서 에우헤메로스설((Euhemerism, 신화는 실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가설)을 적용한다. 다행히도 현대의 중국 학자들도 이것을 따르고 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므로 '신화(myths)'들은 진정한 역사적 사실을 미화한 ‘꾸며진 전설(embellished legends)’로서 전해지고 있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실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들은 인간 숭배와 신격화를 통해서 초자연적으로 미화되었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자신들을 미화하기 위해서, 일부러 근거 없는 공상적인 원시적 족장들을 지어냈다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진화론적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Wicked Pedia)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히 이 전설적 인물들을 다른 민족들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12 묘족(Miao, 먀오족, Hmong, 몽족)의 족장 치우(Chi You, 蚩尤, Txiv Yawg, 탁시우 야우그)는 중국인들에게 염제(Yan Di, 炎帝)의 아들로 언급되어 있지만, 철자가 다르고 신격화되지는 않았지만 주올루 전투(Battle of Zhuolu)에서 황제(Huang Di, 황디)에게 패배한 '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증거는 아래 한나라 부조( Han dynasty relief)에 기록되어 있다. 아래의 더 멋진 묘족(몽족) 조각상과 비교해보라).
황제(Yellow Emperor, 黃帝 -누를 황, 임금 제, Huang Di, 황디)는 중국 민족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 황제의 일족(Huangdi zu, 黃帝族, 황제족)과 그의 동생 염제(Yan Di, 얀디)의 일족(Yandi zu, 炎帝族, 염제족)은 오늘날의 간쑤성과 산시성의 치자문화(Qijia culture, 齊家文化, 제가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이들 부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원(Central Plain, 中原)의 문화를 중국 문명의 기본 문화로 확립했으며, 이후 화하(華夏, 간단히 화(Hua, 華)나 하(Xia, 夏))라는 이름을 딴 사람들이 다유(Da Yu, Yu the Great, 大禹, 대우)을 옹립하고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夏, Xia dynasty)를 건국했다!
황제(Yellow Emperor)의 또 다른 후손으로는 희(Ji, 姬) 일족이 있는데, 이들은 후에 주나라(Zhou Dynasty, 周)를 세웠다. 종종 황제를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것은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후에 중국 외의 부족들도 그들이 황제의 후손임을 주장하게 된다.
황제의 아버지는 소전(少典, Shao Dian)이고, 황제(황디)의 실제 이름은 공손헌원(公孫軒轅, Gongsun Xuanyuan, 헌원은 그의 씨족이 살았던 곳 이름)이었다. 그의 거주지(또는 주)는 유웅(有熊, You Xiong)이었다. 황제는 복희(Fuxi), 여와(Nüwa, 누와), 신농(Shen Nong)과 함께 그들의 발명으로 존경받는 문화 영웅들 중 첫 번째 인물이었다.
황제(황디)는 대신(ministers)들의 도움으로, 우물, 회반죽, 활과 화살, 소 사육, 수레, 선박 건조, 의복, 점(divination), 수학, 천문과 달력, 악보(minister Ling Lun, 링룬, 伶倫), 의학, 문자(minister Cang Jie, 창제, 倉頡)을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초기 중국에서 모든 통치자들은 오행(Five Processes or Five Phases, 五行) (*만물의 변화를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의 다섯 가지 기운으로 설명하려 했던 사상) 중 하나의 축복을 받았는데, 땅은 황제의 것이었고, "황제"로부터 임명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황제(Yellow Emperor, 황디)는 만인의 통치자로서, 주올루 전투(Battle of Zhuolu, 탁록지전, 涿鹿之戰)에서 치우(Chi You, 蚩尤)를, 북쪽의 훈저우(Hunzhou, 葷粥, 흉노의 조상), 반취안 전투(battle of Banquan, 阪泉之戰, 판천지전, 주올루 전투와 같은 사건일 수도 있다)에서 적제(Red Emperor, 赤帝, Chi Di, 치디, 불의 황제)와 같은 반항적 지배자들과 부족들을 제압했다. 황제는 신농(Shennong, 神農) 이후에 그를 대체하여 세계의 통치자가 되었다. [AP: See our later chapter Titanomachy]
황제의 부인은 방적과 직조를 발명한 누조(Lei Zu, 嫘祖, *누에의 신(잠신, 蠶神)으로 추앙됨)였다. 황제의 무덤(Huangdi Ling, 黃帝陵, 황제릉)은 산시성 황링현의 차오산(Qiaoshan, 橋山, 교산)에 있다. <지금까지 울리히 테오발드(Ulrich Theobald)의 글을 인용하였다>.
우리 웹사이트 Ancient Patriarchs에서 제공하는, 유일한 고대 중국 시조들의 그림은 삼황오제(三皇五帝, Three Augusts(Sovereigns), the Five Emperors)에서 시작되어, BC 2070년경 시작된 실제 역사적 왕조로 여기고 있는 하왕조(Xia dynasty, 하나라) 사이에 있었던, 최초의 중국 제국들의 실제 왕조, 족장들, 후손들과 친족들, 나라, 그들의 직계 후손과 자손과 씨족, 종족들 사이의 긴밀한 가계도를 보여준다.
.초기 중국에 있었던 조상들과 제왕들의 표. (더 좋은 화질의 그림은 여기를 클릭)
이 시각적 도표에서 떠오르는 것은, 초기 중국 가계의 족장들이 모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함께 일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제왕(emperors)들의 왕위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직접 계승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적어도 황제(황디)와 염제의 아버지인 소전(少典, Shao Dian)의 후손들로서 적어도 조카나 사촌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예를 들어, 황디의 증손자인 제왕 전욱(Emperor Zhuan Xü)의 8~10명의 아들들이 모두 그들의 팔촌 조카(3rd cousin)인 제왕 순(Emperor Shun, 제순)의 밑에서 일하는 정부의 대신들이었다. 그것은 긴밀한 친족처럼 보인다.
황제 또는 '황디'의 이름은 왜 황(Yellow)으로 지어졌을까?
수천 년 동안 중국인의 피부가 약간 노란색으로 변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비록 밝은 갈색이지만, 중국인은 자신들의 피부를 "황색"이라고 표현한다.
이제 그들의 위대한 조상의 이름이 '황디' 혹은 '황제'인 것은 우연일까? 그의 아버지 소전(Shao Dian)은 그런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황디가 아마도 최초로 황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었을까? 그들의 DNA가 그런 특성을 띠게 된 후, 처음으로 황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한 사람, 혹은 세대일까? 우리는 천국에서 진정한 역사를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황디(황제)가 황하(Yellow River)라고 불리는 "중국 문명의 요람"이 되는 강에 도달한 최초의 개척자였고, 중국 초기 역사에서 가장 번성했던 그 지역에 정착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황하강은 유명한 황토고원(Yellow Earth Plateau, Huangtu Plateau, 黃土高原, 황투고원)을 통해 굽이굽이 흐르면서, 오늘날까지도 그 강물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는 황토(loess, 뢰스) 퇴적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황하강 유역
황인종의 피부와 황토, 그리고 황하강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황토 퇴적물이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황디와 그의 일족들은 아마도 마실 물을 얻기 위해 우물들을 충분히 파낼 수 있을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그 강물을 마셔야 했을 것이다. 중국 전설에 의하면, 황디는 그들의 첫 우물을 발명하고 판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이 지역의 황토는 "지구상에서 가장 침식성이 강한 토양"이라고 불려왔다. 그것은 대부분 바람에 날리는 미사(silt)로 구성되어 있고, 매년 황사 먼지가 대만까지 날아온다! 그것은 20%의 점토, 모래, 미사가 알칼리성인 탄산칼슘에 의해서 느슨하게 굳어져 있는데, 탄산칼슘을 너무 많이 흡수하면 고칼슘혈증(hypercalcaemia)을 일으킬 수 있다
중국인들은 황색 피부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름기도 다소 많다. (매우 추운 온도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 이것이 중국 여성들이 덜 번뜩이며 건조하고 매끈한 얼굴을 얻기 위해서 기름흡수 종이를 자주 얼굴에 접촉시키는 이유이다. 또한 중국인들의 눈은 보통 눈꺼풀이 하나만 있는데, 이는 위쪽 눈꺼풀 아래에 여분의 지방 조직 때문이다.
노아 홍수 이후 고대 중국인들의 유전적 변화는 아마도 그들이 원래의 수메르(Sumer) 지역에서 중국 시안(Xian) 근처인 그들의 마지막 위치까지 이동하면서, 극한의 내륙기후를 보여주는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겨울에 얻어졌을 수 있다.
우리는 누비아(Nubia)나 에티오피아에 정착한 노아의 손자(함의 아들)인 구스(Cush, Kish, Kush)의 후손들이 적도 근처의, 뜨겁고 태양 빛이 강한 곳에서 곧 검게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초기 사람들의 피부와 DNA는 극적인 기후 변화와 환경 변화로 인해, 홍수 이전의 세계에 비해 훨씬 더 민감해졌던 것 같다. 특히 함의 후손들은 거의 즉시 붉은 태양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렬해진 태양 빛으로 인해 대부분의 아프리카, 남인도, 남아시아로 흩어진 사람들의 피부는 거의 검게 변하거나, 최소한 더 어두워졌다.
.이집트 세티 1세(Seti Ⅰ)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를 본떠서 그려진, 여러 피부색의 인종들을 그려놓은 그림. 왼쪽에서부터 리비아인, 누비아인, 아시아인, 이집트인.
우리는 앞의 글에서 묘족이 기록해놓은 역사에 도움을 받아(여기를 클릭), 황제(황디)의 17대 위의 선조였던 신농(Shen Nong, 神農, divine farmer, 신성한 농부)이 셈(Shem, 600살까지 살았다)이었거나, 노아의 다른 아들이었거나, 누와(Nüwa or Noah)와 복희(Fuxi)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신농(Shen Nong)은 가나안(Canaan)의 아들이자, 헷(Heth, 히타이트족과 캐세이족의 조상)의 형제인 신(Sin, 신 족속)의 중국 버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성경에서 신(Sin)은 모세에 의해 언급된 후, 헷이나 그의 히타이트족(Hittites)과는 달리, 다시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초기 중동 국가의 역사나 전설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신-농은 함의 손자이자, 노아(누와)의 증손자인, 신 족속(Sin-ite)의 족장 신이었을까? 그것은 흥미로운 이론이다.
.사무엘 노아 크레이머(Samuel Noah Kramer)의 책, '역사는 수메르(Sumer)에서 시작되었다. 기록된 역사에서 39개의 최초'
비록 황디와 그의 선조들이 많은 발명품들을 발명한 공을 인정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러한 새로운 발명품들의 대부분을 실제로는 수메르에서 기원했던 것을 도입했다는 강력한 증거들이 있다. 역사는 대부분의 독창적인 발명품들은 수메르(Sumer or Sumeria)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성경 창세기는 그곳을 시날(Shinar) 평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아 홍수의 생존자들은 방주가 도착한 아라랏산으로부터 그곳으로 이동해왔다.
최초의 폭군 니므롯(Nimrod)의 세계 정부와 바벨탑 건설이 실패한 이후, 그곳에서 바빌론(Babylon, 혼란(Confusion)이라는 의미)이 시작되었고, 인간의 한 언어는 하나님에 의해 많은 언어들로 혼잡하게 되었고, 여기서 "babble(중얼거리다,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내다)!"이라는 동사가 기원한다. 중국어는 바로 그곳에서 유래되었음에 틀림없으며, 그후 그들의 종족은 빠르게 동쪽으로 이동했다.
신 족속의 동방 중국으로의 이동 경로
초기 족장이었던 황디(Huang Di), 즉 중국의 황제(Yellow Emperor, 黃祖)는 신 족속의 동방으로의 긴 이주 동안에 아마도 어린 아기였을 것이다. 신 족속은 8명의 홍수 생존자(Eight Flood survivors)들과 그들의 씨족의 직계 후손이었다. 그들의 친족들은 모두 수메르에 정착했고, 티탄(Titans, 타이탄) 족이라고도 불려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서로를 알고 있었고, 초기 전설과 역사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진화론적 인류 역사에 의하면, 이러한 이야기는 맞지도 않고 불합리한 것이 된다. 현생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동굴인(혈거인)으로서 수렵채집을 하며 원시적으로 살아왔고, 이미 오래 전에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역사는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최초' 중국인들은 신(Sin)이라 불려졌던, 신 족속(Sinites) 아버지의 후손들인 '시님(Sinim)'이었으며, 심지어 가나안의 아들이었던 히타이트족의 아버지 헷(Heth)의 캐세이(Cathay) 또는 키타이(Khittae)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히타이트인의 신발.
신 족속(Sinites)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사실상 사라졌고, 중국인(Sinae or Chinese)들의 조상일 수 있다. 히타이트인들은 몽골인들처럼, 위로 뾰족한 신발(upturned shoes)과 양갈래머리(pig tails)로 유명했고, 그들의 그림에서 정중하게 인사하고 예를 표할 때, 중국인들처럼 손을 앞으로 모으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 발견된다. 또한 그들은 독특한 머리 두건을 착용하고 있었다. 아래 히타이트의 유적지 보가즈쾨이(BoghazKeui)에서 발견된 조각상에서 노란색으로 강조해놓은 부분을 보라.
.히타이트의 보가즈쾨이(BoghazKeui)에서 발견된 조각상.
이들 최초 중국인(proto-Chinese)들이 수메르를 떠났을 때, 그들은 분명히 처음에 이란 북부 카스피해 남쪽을 거쳐 동진했고, 그 다음에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을 지나, 파키스탄 북쪽의 파미르 고원(Pamir Mountain)으로 이동했는데, 중국 전설에 따르면, '서왕모(Mother of the West, Xi Wang Mu, 西王母)라고 불렸던, 가장 초기의 여자 조상이 살았다!
.서왕모(Mother of the West, Xi Wang Mu)
명심해야 할 것은, BC 2250년경에는 이 지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막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 홍수로 높아진 해수 온도에 의한 많은 증발로, 많은 구름과 비가 내렸고, (화산들의 대규모 폭발로 화산재가 햇빛을 차단하여) 한 번의 빙하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 남쪽에 있는 고누르(Gonur)라는 매우 발달된 도시는 예전에는 많은 강들 위에서 번성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사막인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화론적 역사는 바다가 식고, 구름의 양이 줄어들고, 강수량이 적어지고, 지구의 표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기후 메커니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BC 1500년경 빙하기가 끝나가면서, 태양이 만년설을 녹였고, 위의 지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모래 색깔의 지역들이 사막으로 변했다! 그리고... 도거랜드(Doggerland, 오늘날의 북해 자리에 있었던 땅)와 같은 많은 해안 지대들과 아틀란티스(Atlantis), 순다(Sunda), 무 대륙(Land of Mu)과 같은 지역들은 물에 잠겼고, 마을들은 파도 아래로 가라앉았다. (참조 : Atlantis history, people, ±1500 BC flooding & end of ice age hydrology, ancient Europe!)
파미르 고원에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다음 정착지는 티베트 북쪽에 있는 '쿤룬산(Kun Lun Mountain, 곤륜산)'으로, 여와(Nüwa, 누와), 복희(Fuxi), 신농(Shen Nong)이 홍수 이후의 거주지로 정했다고 추정되는 곳이다. 마침내 황제와 염제 형제와 그들의 일족들은 황하강의 시안(Xian) 근처 '황토고원(Yellow Plateau)'에 정착하게 된다.
시안(Xian)은 이전에 중국의 수도였던 산시(Shensi or Siang-fu (Sin father?), Hang’an)이라고 불렸다. 오늘날 이곳은 "영원한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의 시안(Xi’an)이라고 불린다. 이곳은 또한 실크로드(Silk Road)가 시작되었던 장소이고, 통일된 제국의 첫 번째 수도의 역할을 했다. 또한 황제(황디)의 후손들은 결국 황하 유역 아래에 있는 시안으로부터 더 동쪽에 있는, 황하강 분지 아래 지역에, 고고학적 발굴로 유명한 얼리터우(Erlitou) 지역에 정착했는데, 그곳은 아마도 대홍수 이후의 심각했던 홍수 문제를 치수 사업으로 해결했던 다유(Da Yu)가 일했던 곳으로 하왕조(Xia Dynasty, 하나라)가 시작되었던 지역일 것이다.
그래서 동방으로의 이동 경로는, 노아의 방주가 착륙한 아라랏산에서 멀지 않은 수메르와 같은 서쪽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노아의 후손들이 처음 정착하기 위해 내려갔던 이라크의 '시날 땅(Land of Shinar)'의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이주했던 중국인들은 여러 산맥들에 의해서 분리되어, '서방'이라는 곳에 있었던, 다른 모든 원래의 정거장들의 장소와 이름들을 곧 잊어버렸다.
수메르에서 쿤룬산맥까지, 최초 중국인들은 BC 2200년 경에 분명히 고누르(Gonur)와 마르구쉬(Margush)를 통과했을 것이다. 그 도시들은 표면적으로 오늘날에는 카라쿰 사막(Karakum Desert)이라고 불리는,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 아프가니스탄 북쪽)의 카라쿰 중앙부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시대에 발달했던 두 도시들이다! 아마도 초기의 신(Sin), 친(Tsin), 또는 퀸(Qin) 중국인들이 그 도시들이 발달하도록 도움을 주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아래 방패에 새겨진 글자들은 지금까지 해독할 수 없지만, 중국 한자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노아 홍수가 일어나고 겨우 200여년이 조금 지난 후인 BC 2200년경, 이 마을들은 복잡한 도기로 된 하수관(ceramic pipe sewers)을 갖춘 문명과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들은 BC 1200년경 '청동기 시대의 붕괴(Bronze Age Collapse)' 이후 폐허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많은 강수량을 초래했던 노아 홍수 이후의 빙하기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 이후 무르갑 강(Murgab River)은 말라버렸고, 그것은 그들의 문명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황디의 조상들과 친족들은 계속 동쪽으로 나아갔고, 오늘날 산시성에 있는 시안(Xian)을 발견했다. 시안은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추정된다. 심지어 시안에는 많은 피라미드들이 있다! 그것들은 황디와 그의 친족들에 의해서 지어졌을까?
.중국 시안(Xian)에 있는 피라미드(Xian Pyramid). (더 많은 사진은 여기를 클릭)
'다유', BC 2070년 하나라의 위대한 선구자
(앞에서 제시됐던) 초기 중국의 조상들과 제왕들의 표에서, 여러분은 황디(Huang Di, 황제)의 왕위가 샤오하오(Shao Hao, 少昊, 소호)에서 디 쿠(Di Ku, 帝嚳, 제곡, 구)로, 다시 야오(Yao, 요, 堯, 요제)에서 순(Shun, 舜, 순제)으로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순은 곤(Gun, 鯀)으로 하여금 잦은 홍수와 그로 인한 역병을 조절하도록 치수 사업을 시켰다. (제방이 완공되고 처음에 물을 잘 막았지만, 제방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곤은 실패했고, 그 대가는 그의 죽음이었는데, 염제(Yan Di)의 증손자인 주롱(Zhu Rong)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그 후, 곤의 아들 유(Yu, 우, 禹)는 중국의 제멋대로인 강들과 계속되는 홍수 물의 저류지와 호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한 호수들은 마침내 터져나가, 수백만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고 주장되는 커다란 협곡들을 일주일도 안 걸려 파버렸을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BC 1920년경에 황하강에 거대한 홍수가 발생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우)는 마침내 중국 동부의 치수 사업에 성공했고, 순제는 그에게 다유(Da Yu, 大禹, 대우, Great Yu)라는 이름을 주고 다음 황제로 만들었다! 다유는 시안의 동쪽에서 하왕조(Xia Dynasty, 하나라)를 건국하게 되었고, 태평양에서 가까운 곳에 정착했다.
바다와의 근접성은 중국인들을 세계의 바다로 나아가게 했고, 전 세계의 바다를 누볐던, '참의 땅(land of Cham)' 또는 베트남의 참파(Champa), 그리고 캄보디아(Chambodia)에 정착했던, 참(Cham)과 그의 아들들과 같은 해상왕(Sea Kings)들과 접촉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하나라의 중국인들이 콜럼버스보다 3,000년이나 앞서 바다를 건너기 시작하도록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오래된 중국 돌 닻(Chinese stone anchors)들이 미국 샌디에고 근처 태평양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다음의 상나라(Shang dynasty)는 멕시코에서 중국 옥(Chinese jade)을 거래했음에 틀림없는데, 이것은 BC 1,200년 경의 올멕(Olmec) 유물들 중에서 발견되었다! (더 많은 사진들은 여기를 클릭).
노아의 아들 함(Cronus, Cham/Charma/Ham)과 그의 아들들은 지금의 레바논에 있는, 가나안과 시돈의 삼나무(cedars, 백향목)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고 있었다. (아틀란티스의 건국자 아틀라스(Atlas)처럼!)
그들은 홍수 이전의 천문학과 다른 과학적 지식을 사용하여, 지구 전체를 삼각법으로 지도화했고, 인도의 참베이(Chambay), 시리아의 참의 땅(Land of Cham)과 같이 멀리 떨어진 곳의 이름을 자랑스러운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중국 고대인과 티탄족
황디와 신농과 누와 같은 그의 조상들은, 노아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두 집단 간의 10년 전쟁인 티타노마키아(Titanomachy) 전쟁(또는 티탄의 전쟁)에서 싸웠던 티탄족(Titans) 또는 올림포스족(Olympians)이었을지도 (혹은 적어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 불멸의 신들(immortal gods, 그들의 장수 때문에 그렇게 명명된)인 나이든 늙은 세대는 그들의 후손인 죽는(mortals, 그들은 일찍 죽었기 때문) 젊은 세대와 지중해와 그 너머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싸웠다.
.제우스(Zeus)
제우스(Zeus), 또는 오시리스(Osiris), 또는 미스라임(Mizraim, 함(참)의 아들, 이집트의 건국자, 많은 아들들을 둠) 하의 올림포스족은 그 전쟁에서 이겼다! 나이든 티탄족은 패배했고, ‘타르타로스(Tartarus)’로 추방당했다! 그곳은 당시 포세이돈(Poseidon)의 지중해 북쪽, 또는 아틀라스의 대서양 너머에 있는 지역이다.
티타노마키아 전쟁은 플라톤이 쓴 크리티아스(Critias)에서 묘사한 전쟁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집트 사이스(Sais) 출신의 사제가 전해준 것을 그의 할아버지 솔론(Solon)이 그에게 전해준 지식이다. 그는 아틀란티스가 그리스와 이집트를 상대로 큰 전쟁을 벌였고, 결국 그리스 군대가 아틀란티스인들을 무찌르고, 두 나라를 노예 상태에서 구했다고 말했다. 트로이 전쟁(Trojan war)이 일어나기 전, 에렉테우스(Erechtheus)와 같은 초기 그리스 왕들의 시대에 그 일이 일어났다.
그 후, 아틀란티스의 일부 지역들은 실제 빙하기 말의 대대적인 융해(melting)로 인해, BC 1500년경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침수되었다. 아틀란티스는 아마도 북아프리카 튀니지(Tunisia)의 트리톤 호수(Triton Lake) 남쪽(지금은 사막이다!)에 중심부를 뒀던 바다속으로 가라앉은 제국이다. 람페두사(Lampadusa) 근처의 시칠리아(Sicily)와 튀니지 사이의 육지다리 위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해안(카디스(Cadiz) 근처), 영국, 아일랜드, 도거랜드 및 그 밖의 많은 장소들, 도시들, 마을들, 건축물들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참조 : The Theory of the Tunisian Atlantis - Beneath the Sands of Africa!)
묘족(Miaozu)은 노아를 '누아(Nu-Ah)'라고 불렀는데, 누아의 아들 야푸(Yaphu, 야벳)는 고멘(Gomen, 고멜, Gomer)이라 불리는 아들을 두었다. 그는 '투탄(Tutan)'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이는 '티탄(Titan)'과 매우 비슷하게 들린다.
.티탄의 전쟁(The Battle of the Titans)
황디(황제)와 그의 조상들은 티탄, 또는 올림포스의 후손들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친족들은 수메르에서 동쪽으로 멀리 여행했고, 결국 중국을 세웠다. 한족(Han tribe)은 주올루 전투(Battle of Zhuolu) 이후 족장 치우(Chi You)가 이끄는 묘족(Miao tribe)을 몰아냈고, 그들 중 많은 부족들은 남쪽으로 윈난(Yunnan)과 구이저우(GhuiZhou)로 이주했다.
그들의 조상 노아는 960년, 셈은 600년 등 장수했을 뿐만 아니라, 더 똑똑했으며, 홍수 이전부터 축적된 오래된 과학 기술과 예술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홍수 물이 충분히 빠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참)과 가나안은 남스페인, 호주, 영국, 북아일랜드, 그리고 다른 많은 곳을 새로운 배를 타고 다녔을 수 있었다.
동일과정설과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화론적 고대 인류 역사를 완전히 다시 쓰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의 거짓 인류 역사와 다르게, 진정한 인류 역사가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평안하시길 빌며.
루(Lu).
*관련 글과 기사 : 황제(黃帝)는 바빌론에서 왔다 – 라쿠페리의 ‘중국 문명 서래설’과 동아시아로의 전파 - (개념과 소통, 2010, vol., no.5, pp. 79-126)
후대 국가를 위해서라면…당대의 ‘적’도 사이 좋은 형제로 기억된다 (2017. 9. 27.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article/201709272127005
중국 산시성 황링현에서 황디 기리는 행사 치러져 (아시아넷, 2021. 4. 7)
https://v.daum.net/v/cgUlGeerzx
황제 위한 2022년 칭밍제 추모행사, 산시성에서 개최 (2022. 4. 7.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RPR20220407011200353
계묘년 Memorial Ceremony to Ancestor Huang Di in His Native Place 성대하게 거행 (2023. 4. 24. KIPOST)
https://www.kipost.net/news/articleView.html?idxno=309000
“복희와 여와가 인류 낳고, 신농이 경작 알려줬느니라” (2023. 11. 23. 국제신문)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231124.22016007445
*참조 ; 전 세계의 홍수 전설에는 "8명"의 홍수 생존자들에 대한 공통된 기억이 남아있다.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49755429&bmode=view
중국의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한 기원 : 고대 상형문자인 한자 속에 나타나있는 성경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288709&bmode=view
한자에 숨겨져 있는 창세기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288703&bmode=view
3000년 전 가장 초기의 중국 갑골문자의 3D 모델 제작 : 한자와 창세기의 관련성이 확인될 것인가?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142&bmode=view
중국 삼성퇴(싼싱두이)의 청동나무 : 창세기를 묘사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288735&bmode=view
묘족에게 전승되어온 창조 이야기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288700&bmode=view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1&bmode=view
세계 곳곳의 홍수 전설들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96&bmode=view
대홍수에 의한 격변의 증거 : 여러 민족의 전설과 세계 도처에 남아있는 대홍수의 흔적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7&bmode=view
전 지구적 홍수를 가리키는 성경적, 과학적 증거들과 전 세계의 홍수 설화, 그리고 에누마 엘리쉬
https://creation.kr/Genesis/?idx=2851501&bmode=view
후알라파이 사람들의 홍수 전설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417&bmode=view
비아미 족의 전설들 비아미 족의 전설들 : 파푸아 뉴기니 식인종족에게 전해져 온 창조와 홍수 이야기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9&bmode=view
언어의 혼잡에 관한 전 세계의 전설들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288743&bmode=view
노아와 사람의 어원 : Manu, Man, Maru, Mano, Anu, Marine...단어들의 기원과 대홍수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3&bmode=view
고대 이집트에서 노아와 대홍수를 찾아서 – 1부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5703689&bmode=view
고대 이집트에서 노아와 대홍수를 찾아서 - 2부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5850972&bmode=view
고대 이집트에서 노아와 대홍수를 찾아서 – 3부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5886160&bmode=view
고대 이집트에서 노아와 대홍수를 찾아서 – 4부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6097725&bmode=view
이집트의 태양신 호루스는 신격화된 함이다 : 1부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5221417&bmode=view
이집트의 태양신 호루스는 신격화된 함이다 : 2부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6067923&bmode=view
고대사의 연대기적 틀 - 1부 : 문제점, 자료, 및 방법론 ; 고대 근동 및 이집트 역사는 크게 부풀려져 있다.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5978817&bmode=view
출처 : Ancient Patriarchs, 2015. 11. 19.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길
Lita Sanders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언젠가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맹목적인 낙관주의적 믿음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적 믿음은 선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복음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의존한다.
여자의 후손 중 한 명이 뱀(사탄)을 이기게 될 것이라는 약속 이후, 성경 기록에서 그 약속이 어떤 계보로 이어졌는지는 분명하다.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살해한 후, 셋은 약속의 후계자가 되었다. 셋의 여러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전해졌고, 노아를 시작으로 약속의 계보가 그의 아들 셈을 통해 이어졌다.
그러나 바벨에서 사람들은 약속의 계보가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상태로 흩어졌다. 인류 전체의 반역은 겉으로 보기에 모든 인류의 심판으로 이어졌다. 몇 세대 후, 하나님은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으로부터 새로운 민족을 세우겠다고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전, 아브라함은 우상숭배자였다(수 24:2~3).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에서 자신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에 순종하여, 가족들과 함께 멀리 떨어진 곳을 향해 떠났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노년에 한 아들을 주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진실한 믿음은 그를 약속의 계보를 잇는 다음 조상으로 세우게 했으며, 아브라함을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아브라함은 오늘날 우리보다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훨씬 적게 받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모세의 율법서나 기록된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우상숭배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참 하나님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갖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믿고 순종으로 응답했다.
아브라함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아내 사라와의 관계에 대해 두 번이나 거짓말을 하여, 사라를 두 번이나 위험에 빠뜨렸다. 아들을 얻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에 조바심을 냈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스마엘을 낳았다. 아브라함을 비난하기보다는,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믿음도 때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용기를 얻어야 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계시를 갖고 있고,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으심으로 깨끗해짐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하도록 도와주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오직 바라며 기대했던 것보다, 우리는 영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친족들을 구한 요셉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세기 45:7,8)
부모의 편애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셉의 형들이 갖고 있었던 심정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곱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을 노골적으로 편애하여, 다른 형제들처럼 육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옷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형들과 부모가 그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게 하는 등 편애하는 것처럼 보였다. 형들은 그를 질투하고 미워하여 그를 죽일 것을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집트에서도 하나님은 요셉에게 계속 복을 주셔서, 보디발의 집안을 섬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셨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곳에서도 복을 받게 하셨다. 감옥에서도 요셉은 제반 사무를 맡아 처리했지만, 여전히 억울하게 노예가 되어 투옥되어있는 상태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 있었을까?
감옥에서 요셉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석해줄 수 있었다. 이는 나중에 바로가 해석이 필요한 꿈을 꿨을 때, 바로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바로의 꿈을 성공적으로 해석한 요셉은 수년간의 풍년 이후 닥칠 큰 흉년에 대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기근이 시작되고,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와서, 형들이 요셉에게 절할 때, 요셉의 꿈은 이루어졌다.
요셉의 형들은 그들의 동생이 아직 살아 있고, 결국 이집트의 2인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두려움에 떨었다. 요셉은 오랜 세월 전에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의 악한 행동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하지만 요셉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많은 생명들을 살리기 위한 계획으로서, 형들의 미워하는 마음까지도 사용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뿐만 아니라, 고센 땅은 이스라엘이 한 가족에서 민족으로 성장하기에 좋은 풍요로운 장소였다.
약속의 계보는 요셉이 아닌 유다(요셉의 형제 중 한 명)로 이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사용하셔서, 그의 집안의 생존을 보장하셨고, 이는 메시아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면, 당시에는 참혹했던 상황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악을 주관하셔서, 선한 방향으로 바꾸신다는 것을 신뢰하려면, 많은 믿음이 필요할 수 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시에는 좋지 않았던 상황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셨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려운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로마서 8:18~30)
그분의 백성을 구출한 모세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이르되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5:1,2)
구약성경의 공통된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왕들이 일어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동안,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러한 나라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모세 시대의 이집트는 아마도 이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의 노예가 되겠지만, 큰 민족이 되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애굽의 바로는 히브리인들이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기근의 때를 대비해 풍년의 시기 동안 곡식을 저장해 두겠다는 계획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도 살릴 수 있었다. 게다가 곡물 판매로 이집트는 경제적으로 매우 강력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셔서 그들이 빠르게 번성하도록 하셨고, 이로 인해 훗날 바로는 이집트 내의 이 외국인들이 적과 동맹을 맺어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근심하게 되었고, 갓 태어난 남자아이는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래서 훗날의 잠재적인 군대를 없애려고 했다.
레위 족속 아므람은 자신의 아버지의 누이인 요게벳과 결혼했다. 세 번째 아이, 아름다운 아들을 낳았을 때, 그녀는 아들을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역청을 바른 '갈대 상자'에 태워 나일강의 적당한 곳에 띄웠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에서 구해 주신 것처럼, 아기에게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랐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대한 억압, 노예화, 살해 정책은 파라오 한 사람의 일시적인 악행이 아니라, 모세가 80세가 되었을 때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일부 이집트인들은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이 가혹하다고 생각했고, 히브리인들을 믿고 함께 이집트를 떠난 ’수많은 잡족‘(출 12:38)도 있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는 것이 불법인 많은 나라들이 있고, 그곳에서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세속적 공격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서구 기독교인들은 정통 기독교 신앙과 전통적인 기독교 관습을 고수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없고 편협하다는 비난에 직면하고 있다.
한때 미국과 다른 서방 국가들에서 많은 지도자들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공언했고, 법과 전통이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상황은 급변했고, 성경에서 '가증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밖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을 지키고 쓰임 받은 룻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한때 나오미는 고대 세계에서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안정된 삶을 살았다. 부유한 지주였던 남편 엘리멜렉과 남편이 없을 때 그녀를 돌볼 수 있는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근이 닥쳤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할 때,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 기근을 보내셨다. 엘리멜렉의 가족은 하나님을 믿고 약속의 땅에 머무르는 대신에, 그곳을 떠나 식량이 있는 모압으로 갔다. 모압에서 엘리멜렉은 죽었고, 아들들은 모압 여인들과 결혼했다. 이는 영적으로 신실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두 아들 모두 죽게 되었고, 나오미는 이국 땅에서 과부가 되어 두 며느리와 함께 남께 되었다.
나오미는 과부가 된 며느리들에게 친정집으로 돌아가 재혼하고, 형편이 좋아질 수 있게 하라고 말했다. 오르바는 마지못해 떠났지만, 룻은 나오미에게 매달렸다. 룻은 더 이상 자신이 모압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룻은 모압의 생활 방식을 따르면서, 모압의 우상을 섬기고 싶지 않았다. 룻은 비록 시어머니 나오미만 홀로 남아있었지만, 자신이 결혼한 그 집안과 그들의 하나님께 충성하고 싶었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들들보다 며느리 룻을 통해 나오미를 축복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룻은 밭에 나가서 힘들고 부끄러운 일인 이삭 줍는 일을 했다. 룻은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의 밭으로 갔다. 보아스는 룻의 보호자가 되었고, 결국 엘리멜렉의 친척으로 기업 무를 자가 되었다. 룻이 정혼 관습에 따라(신명기 25:5~10) 보아스(살몬과 라합의 아들)와 결혼했을 때, 룻의 맏아들 오벳은 엘리멜렉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했고, 나오미는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비참한 상황조차도 그분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실 수 있는지는 몇 년이 지나야 알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종종 극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 룻만 데리고 돌아오게 되는 비참한 상황을 맞았다. 그러나 나오미는 이 상황 속에서, 궁극적으로 룻이 적절한 장소와 시간에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메시야가 나시는데 쓰임받을 것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했던 다윗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편 8:3,4)
다윗은 성경에 있는 많은 시편들을 썼다. 그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의 신앙과 무엇이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게 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의 삶은 쉽지 않았다. 사울의 부하들에게 쫓기기도 했고, 나중에는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그의 부하들에게 쫓기기도 했다. 때로는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징계를 받기도 했다. 다윗의 시편에 따르면, 그는 인생의 상당 부분을 두려움과 슬픔, 원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정의를 구하는데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탓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평화로운 관계로 되돌려 주시기를 간구했다.
다윗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는데, 당시에는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인 토라(Torah, 모세오경)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창조, 타락, 홍수에 관한 이야기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편은 출애굽기 33장에서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묵상하는 데 시간을 보냈음을 나타내며, 시편에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시편은 예배와 기도에 사용될 수 있는 요소들과, 우리의 예배와 기도의 모델로서 모두 훌륭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갖고 있으며, 성경을 묵상하고, 그 가르침을 삶에 적용하는 것은, 더욱 풍성한 예배와 더 깊은 기도 생활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시편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한 가지 방법은 기도 생활의 맥락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윗의 기도에는 분노, 절망, 깊은 슬픔,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감정들을 경험할 때에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이었다.
*참조 : 성경의 아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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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솔로몬의 역사적 사실성! : 최근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계속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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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복음만 전하는 것! 창세기 없는 복음은 무신론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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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에서 이루어지는 교묘한 우상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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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지대의 삶 : 예수님 시대와 유사한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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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iG, December, 2024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abrahams-faith/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joseph-saves-his-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moses-delivers-his-people/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ruths-faith/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davids-psalms-praising-the-creator/
번역 : 미디어위원회
<리뷰> 크리스마스에 교회가 전해야 할 메시지!
(Christmas Sermons—Are Churches Preaching an Irrelevant Message?)
Bodie Hodge
일상적인 '크리스마스 메시지'가 불신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목회자와 교회에 유익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오랜 기간 동안 이 절기에 나는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몇몇 크리스마스 설교들을 들어왔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관을 잃어버린 서구 문화에서, 크리스천들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이 시점에서 사람들이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교회는 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크리스천 신앙에 갈등을 겪고 있는 한 친구를 크리스마스 시즌에 교회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고, 함께 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감격했었다. 우리가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나에게 본인이 생각해왔던 질문을 했다. 그는 내게 예수님, 말구유, 동방박사,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목동들, 천사들에 관해서 묻지 않았고, 대신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 땅에 악한 것들이 존재하는가? 왜 육식동물은 다른 동물을 잔인하게 잡아먹고 살아가도록 만드셨는가? 공룡을 비롯한 멸종된 생물들을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다가, 왜 멸종시키셨는가?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을 거슬러 생명을 길게 연장하려고 노력하는가?” 그는 계속해서 ”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천국에 가면 되지 않겠는가? 왜 이 땅에서 계속 살아남으려고 애쓰는가?” 였다.
그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오늘날 공교육과 교육시스템, 그리고 언론 매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적 진리로서 성경을 거부하도록 계속 유도하며, 세속적 문화로 인해 점점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과 성경을 믿는 믿음은 공격받고, 조롱당하며, 비난받고 있다. 왜냐하면, 소위 과학(진화론)이 그것이 사실일 수 없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성경 '창세기'는 실제 역사가 아닌, 신화들과 비유들을 모아 놓은 '이야기 책'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내 친구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그러한 질문은 수년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답을 들을 수 없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방법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질문과 같이 죽음의 기원과 의미를 설명하는 창세기에 기록된 이 세계의 참된 역사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어야하는 크리스마스 설교는 성경의 창세기를 신화로 여기지 않고 있는 목회자가 전하는 설교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한 목회자는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는지를 상기시켜줄 수 있다. 내 친구는 대답이 필요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상세히 대답을 해주었고, 그는 설교를 듣기 전에 성경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묻어두고 있었던 질문들을, 그의 기독교 신앙을 방해했던 의문들을 나에게 물어주어서 기뻤다.
내 친구는 죽음과 고통과 죽어감이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죽음이 원수(enemy)이며, 죄로 인해 들어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린도전서 15:26). 하나님이 죽음을 만드시고 창세기 1:31절에서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죽음은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온 죄의 결과였다. 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고 설명했고, 아담이 처음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로서 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해주었다. 말해지고 있는 것처럼 지구는 수십억 년이 되지 않았고, 사람 이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죽음, 질병, 고통, 육식 등은 있지 않았다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계속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의롭고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죽음으로 죄를 심판하셔야만 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사람이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분의 권능을 일부 거두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질병과 고통과 같은 일들을 허락하시지만, 이것에 대해 비난받아야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비난받아야할 대상은 죄를 범한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내 친구의 머리에 전등이 켜지는 것과 같았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자, 성경은 그에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창세기에 기록된 진리 대신에, 수십억 년의 장구한 시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교회 내에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 친구와 같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정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대신 그들의 질문과는 거리가 먼, 구유에서 나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관계없는 메시지만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The 'god” of an Old Earth'을 참조하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친구와 마찬가지로, 역사와 삶의 의미에 대한 진정한 설명으로 성경을 거부하도록 하는 교육을 받았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는 데에 주요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많은 비-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에 교회로 올 수 있다. 나는 목회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크리스마스 설교로 이 이슈를 들려줄 것을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성경이 진리임을 그들에게 확신시켜줄 수 있다.
크리스마스의 기초
내가 전에 들었던 한 크리스마스 설교에서 목사님은 ”크리스마스의 기초를 알아보기 위해 성경을 찾아봅시다”라고 말하면서 누가복음 2장으로 갔다. 나는 즉시 ”거기는 크리스마스의 기초가 아닌데, 거기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일 뿐인데”라고 속삭였다.
크리스마스의 기초는 훨씬 더 후퇴한다. 그것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초기 언급은 창세기 3:15절에 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직후에, 예수의 동정녀 탄생(여자의 후손)의 예언이 있었다. 그들은 사망 선고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처녀에게서 태어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초는 창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많은 언급은 예수님이 이삭의 후손이라는 창세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창 28:13~14).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기초는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크리스마스 설교가 시작되어야하는 곳이다. 특히 성경의 이 부분이 사실일 수 없다고 세뇌된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사람들이 베들레헴, 목동들, 동방박사에 관한 설교를 들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성경은 신뢰할 수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다.
창세기는 죽음이 창조된 세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한, 아담의 죄에 관한 나쁜 소식에 대해 우리가 먼저 배워야하는 곳이다. 오늘날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창세기에 있는 나쁜 소식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좋은 소식(복음)을 거부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세기의 나쁜 소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받아들여야할 필요성을 이해시키기 전에, 그들이 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를 이해하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적절한 기초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창세기에서부터 가르칠 필요가 있으며, 현대 과학은 이 역사적인 문서를 반증하지 못했으며, 과학은 창세기의 기록이 실제로 사실임을 확인하고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 창세기의 기본 진리에 대해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왜 동정녀의 몸에서 오셔야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크리스마스와 그 기초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크리스마스는 무엇인가?(What Is Christmas?)”을 읽어 보라.
왜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는가?
창세기로 돌아가서, 나쁜 소식은 아담의 죄로 인해 죽음이 이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창 2:17). 로마서 6:23절은 죄의 대가가 죽음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다. 그래서 죄를 갚기 위해 무엇인가가 죽어야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갚기 위해 동물을 죽이신 이유이다(창 3:21). 어떤 동물이 희생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종종 어린 양으로 묘사되어, 복음을 예표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한 마지막 희생 제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순종의 죄를 갚기 위해, 동물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이 패턴을 따랐다. 그러나 동물은 사람의 죄를 없앨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생물과 관련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누군가가 자신의 범죄함으로 형벌을 받아야할 때, 그 형벌을 스스로 당신이 감당하시는 것은 은혜와 자비이다. 이것이 우리의 창조주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이다. 그는 인간으로 오셔서(그러나 신성을 가지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사망을 선고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이 그 형벌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을 확증해주셨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갖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갚기 위한 마지막 희생제물이 될 수 있도록 완전한 삶을 사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이유이며,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고린도전서 15:45)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새 아담', '완벽한 아담'이 되셔서, 아담의 자손을 위해 죽으실 수 있었고,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성경은 사랑의 가장 위대한 행동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요 15:13). 성경의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정말로 동정녀에서 태어나셨는가?
창세기 3:15절 외에 이사야서에는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며, 이것이 징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이 예언은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다. 그녀는 아기를 낳았고,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이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God with us)”이라는 의미였다. 동정녀 출생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Is the Perpetual Virginity of Mary a Biblical View?”를 보라.
특히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마태복음 1:1~16절에 있는 요셉의 족보는 여호야긴(여고냐)이 요셉의 직계 조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예레미야서에서 여호야긴에게 주어진 저주를 읽어 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22:30)
다윗의 왕좌에 영원히 앉아계시는 예수님께서 여호야긴의 후손이 될 수는 없었다. 여호야긴의 후손은, 따라서 요셉의 후손은 다윗의 보좌를 상속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처녀가 되어야 했다.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왕좌에서 다스리실 것임을 확인해준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7)
동방박사의 중요성
몇 명의 동방박사들이 왔었을까? 우리는 모른다. 단지 두 명 이상이고, 그들이 세 가지 선물을 가져왔다는 것만 안다.(더 자세한 정보는 ”We Three Kings”을 참조하라.) 마태복음 2:1~11절은 이 동방박사가 이스라엘로 인도한 별을 따라 동방에서부터 여행해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What Was the Christmas Star?” 참조)
이 박사들은 약속된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다. 박사들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동쪽에서 왔다. 아마도 페르시아일 가능성이 있지만, 동양일 가능성도 있다. 아기 예수님께 선물과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렇게 먼 거리를 왔다는 사실은, 이 사람들이 창세기 역사와 관련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먼 타국에서도 약속된 메시아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사람들은 바벨탑에서 흩어지면서, 지구의 모든 지역으로 분산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6대륙에 흩어져 살 때까지 계속 이주해 나갔다 ('Flood Legends” 참조). 또한 솔로몬 시대에도 하나님에 관한 정보가 세상의 많은 곳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동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중국인은 창세기 기록과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그들의 문자(한자) 속에 상징으로 들어있다. 심지어 그들은 거대한 홍수 동안 창조주이시며 사람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상제)께 희생제물을 드렸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The Original ‘Unknown’ God of China'을 참조).
이것은 바벨탑 이후 어떤 시점까지 동쪽으로 이주해갔던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을 실제로 알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며 귀중한 정보들을 잃어버렸지만,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방박사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명한 사람들이었다.(아마도 페르시아에서는 다니엘이 영향력을 끼쳤을 가능성). 이 사람들은 성경의 역사를 잃어버린 동시대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성경적 역사와 성경의 신뢰성과 대한 확증은 바벨탑에 대한 성경적 기록이 정확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진실한 역사를 잃어버렸다. 그들은 '수십억 년'의 역사를 받아들였고, 동방박사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기 예수의 중요성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먼 곳에서부터 와서 예물을 드리고(시편 72:10), 지역 목동들이 그 앞에 굽히고(시편 72:9)와 같은 성취된 예언, 헤롯 왕이 두 살 아래 아기들을 죽인 사건(예레미야 31:15, 마태복음 2:16~18), 한밤중에 애굽으로 피하라는 현몽(마태복음 2:13~15) 등은 이 아기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몇 가지 징조였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권좌에서 내려와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 그 분은 우리 중 한 사람으로 사셨지만, 하늘의 완전함을 이 땅에 남겨놓으셨다. 이 아기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러 오셨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예수님께서는 지구 역사상 매우 중요한 시점에 이 땅에 오셨다. 과거를 숙고해보고, 이 중요성에 대한 큰 그림을 얻자. 아래 다이어그램을 참조하라.
아담과 하와가 지상에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을 때, 100%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신뢰하지 않았다. 노아 시대에 그의 가족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던 유일한 지상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인구가 계속 증가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 비율은 매우 낮아진다. 하나님이 홍수를 보내신 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은 지상에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으므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던 사람들은 다시 거의 100% 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다. 궁극적으로 지구의 인구가 재번성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비율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탄생 직전에 세계 사람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신뢰하지 않았다. 위의 그림은 이러한 일반적인 원칙을 설명한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의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조차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따랐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실제로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았다. 믿었다면 메시야를 기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했던 동방박사들, 마리아, 요셉, 안나, 시므온, 세례 요한의 가족들과 소수의 사람들만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렸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매우 낮은 비율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때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것은 역사상 가장 낮은 비율의 시점이었기 때문에, 오신 시기는 매우 중요했다. 그 사명을 완벽하게 완수하셨으며,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값없는 구원의 선물로 인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
크리스마스 날에 축하해야 하는가?
어셔 대주교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BC 4년 경에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어느 날에 태어났을까? 우리는 알지 못하며, 성경은 그 날을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크리스마스(12월 25일 그레고리력)로 선택된 날짜는 예수님이 태어난 날짜가 아닐 것이다 ('The Origin of Christmas” 참조). 회의론자와 비판론자들은 크리스마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Defense of Christmas’를 읽어 보기 바란다. 문제는 실제 날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는 악하고, 그것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내게 말했다. 다음은 내 개인적 견해이며, AiG의 공식 견해가 아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 24:1)
우리가 크리스마스 날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면(롬 14:5-6), 그 날이 어떻게 악한 것일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크리스마스로 축하하는 날은 로마 이교도의 축일에서 왔음을 상기시켜주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는 매일 날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드려야한다고 말했다. 왜 우리 크리스천들이 이 날에 하나님을 경축하는 것을 거절해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사실 성경은 이것을 장려한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시 86:12)
'영원토록'은 크리스마스로 축하하는 날도 포함된다.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아 10:1~6절에서 장식된 나무(트리)를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나는 죄가 되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거짓된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임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면, 그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장식된 나무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면(거짓 신과 반대로),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탄생일을 휴일로 기념하도록 사람들에게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내게 말했다. 나는 예수님이 그 반대도 금지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제 내가 틀렸다고 하지 말라. 나는 이 글에서 크리스마스 날을 축하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을 금지시킬 이유는 없다.
크리스마스에 전할 메시지에 대한 결론
목사님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이 특별한 연휴 기간 동안,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메시지를 전해줄 것을 요청한다 :
▶ 크리스마스는 아담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억하는 때가 되어야 한다.
▶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위해 태어나시고, 살다가, 고통당하시고, 죽으셨음을 기억하는 때가 되어야 한다.
▶ 크리스마스는 우리 크리스천들 모두가 예수님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일상생활의 안락함을 떠나야할 의무가 있음을 기억하는 때가 되어야 한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올 때, 그들이 묻는 질문들에 우리가 답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에 관해서는 Answers의 글들을 참조하라.
크리스마스 설교나 일상 대화에서, 크리스마스에 관한 모든 토론은, 복음서에 나오는 좋은 소식(복음)과 함께, 창세기의 나쁜 소식도 같이 설명해 주어야할 필요가 있다. 그 경우에 불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선물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불신자들에게 요청하라.
번역 - 미디어위원회
출처 - AiG, 2017. 12. 14.
<리뷰>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
Dr. Henry M. Morris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잠언 30:4).
어떤 가정에서도 독생자의 이름을 짓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흥미진진한 이름짓기 가운데서도 선지자 아굴(Agur)(잠언 30:1)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갖고 알고 싶어했던 이름은, 물과 바람과 그리고 땅의 모든 끝을 정하신 바로 그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아들의 이름이었다.
실제로는 그도 어쩌면 하나님이 아들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고 상당히 놀랬을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그로서는 모세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물론, 신명기 6:4절에 담긴 위대한 단정적인 말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를 여러 번 인용했을 것이기에 하는 추측이다.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이 아들을 가지신다는 말씀인가?
하나님께서 아굴을 시켜 솔로몬 왕의 잠언들 중 매력적이고 독특한 제 30장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 말고는, 그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던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마 솔로몬더 잘 알았고 신임했던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다윗과도 아는 사이였던 것 같다. 최소한 다윗의 시편들에 친숙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2장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이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편 2:7, 8).
아굴도 다윗의 미래의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서, 아마도 다윗이나 솔로몬한테서 들었던 것 같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사무엘하 7:13, 14; 또한 역대상 17:13). 이 수수께끼 같은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 같으나, 그 영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솔로몬을 넘어 다윗의 보다 더 위대한 후손으로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 분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신약(히브리서 1:5)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고 우리는 이제야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특정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굴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던 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그는 모세의 책에서 이미 하나님을 일컫는 여러 이름들에 - 특히 '하나님(Elohim)'과 '주님(여호와)' 그리고 '주님(Adonai)' - 틀림없이 친숙했으면서도, 새삼 창조주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있어야만 했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아굴은 물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비록 아굴의 특정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구약성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새 이름은 '아버지'보다 더 아래격인 호칭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아버지' 라는 단어(히브리어로 아브(ab))가 구약성경에 500번이 넘게 보이지만, 저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브(또는 아바(abba), 아브와 동일한 뜻의 아람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때때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예컨대, 예레미아 3:19절에서 미래의 왕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시면서) 하셨다. 언젠가 한 번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시고 노예로부터 건지셨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아브가 되신다는 것을 환기시킨 적이 있다(신명기 32:6). 그러나 구약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가 있다면 -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언급을 제외하고(사무엘하 7:14; 역대상 17:13) - 이것이 아마도 아굴이 자기 생전에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예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아들은 드디어 이 세상에 나타나시자, 상황은 온전히 변하고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그는 당신의 재판과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의로우신 아버지여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요한복음 17:1, 6, 11, 25, 26)고 하셨다. 그 이름은 명백히 '우리 아버지'였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특별히 기도 서두를 '우리 아버지'로 시작할 것을 일러 주셨다.(마태복음 6:9).
'아버지'(헬라어로는 pater)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약 500번 보이는데, 인간의 아버지는 물론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 모두가 빈번히 사용했던 단어이다. 한 번은 긴급한 상황에서 주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드릴 때, "아바 아버지여(Abba, Father)"(마가복음 14:36)하고 불렀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다. 비록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 '아바' 라고 불렀던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위격의 제일 깊숙한 자리에 앉아 계실 당신의 아버지를 부르는데 더없이 친밀한 호칭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진 우리들까지도 - 상황이 허락할 때면 - 하늘에 계시는 우리들의 아버지를 똑같이 그 경이로운 호칭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5).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6).
아마 이것으로서 세상 끝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새 이름에 관한 아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이제는 아굴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무어라 불러야 합니까?"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불려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의 선지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서 보내셨던 때가 솔로몬과 아굴이 세상을 떠나고 대략 300년이 지난 후였다. 그 때에 하나님이 놀라운 선지자 이사야를 시켜 저 두 가지 위대한 예언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 예언이라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성탄절 때마다 두고두고 낭송하는 말씀이다. 즉,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임마누엘'은 물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곧 태어날 처녀의 아들은 다름 아닌 인간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다음 얼마 후에 하나님은 이 아들의 이름에 관해서 놀라운 예언을 보내주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기억하라] 되었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
얼마나 경이로운 이름인가! 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이름을 가진 분에게 이 이름들처럼 합당한 이름들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이 분이야말로 약속되기를 유다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사람이면서도, 또한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우리를 닮은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이시다! 이 어찌 경이롭다 하지 않으리오.
그의 이름을 '기묘자(the Wonderful)'라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리 없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에 '기적적'이라는 뜻이 있다. 기적적인 개념과 처녀 몸에서의 탄생을 빼고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결코 육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인간의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을 것이기에 유일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이름은 진정 '기묘자'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인류의 위대한 모사로서 타락한 인간성을 되찾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완벽하게 전해줄 수 있는 분임이 틀림없다. 인간-하나님이신 그가 마침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지만 무한히 지혜로운 뜻을 담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적들까지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한복음 7:46)하고 탄복했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 예언의 뜻은 실질적으로 그 두 단어 - '기묘자(Wonderful)'와 '모사(Councillor)' - 를 합쳐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도 또한 맞는다. 그는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모든 주제들에 대한 '기적적인 조언자' 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기에, 어떤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해도, 그는 결코 외면하든가 얼버무리지 않으셨다. 그분이야말로 하늘이 보내주신 가장 기묘한 참 상담자였기에, 모든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 임을 또한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그가 神格 중에서 (삼위일체 가운데서) 두 번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육화 이전의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빌립보서 2:6). 심지어 그는 스스로 해(害) 받음을 허락하신 다음에도 그는 죽음 그 자체를 정복하였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 - 또는 수많은 권위자들이 번역한 바를 따르면 '영원의 하나님' 이기도 하다. 그는 공간과 물질은 물론 시간의 창조자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로새서 1:16), 그리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 그리고 비록 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지만,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만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의 왕자(The Prince of Peace)'의 자격이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인간이시다. 그러므로 그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성공적인 참 중보자가 될 수 있다(디모데전서 2:5).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린도후서 5:19) 세계에 참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로새서 1:20). 그러므로 "그는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이시다(마태복음 5:9).
이 다중차원의 이름들이 어찌도 영광스러운지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인간이신 바로 이 분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예레미아 23:6) 라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5: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예언의 내용이 이루어질 시간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리아라는 천사 같은 유다의 처녀와 약혼 중에 있던 어느 소박한 목수한테 가브리엘(Gabriel) 천사를 보내셨다. 이 두 약혼자들은 천 년 전에 살았던 다윗 왕의 후손들이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비록 임신 중이지만, 여전히 청순한 처녀이고, 이사야의 위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룰 사명을 부여받았노라고 알렸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이 때보다도 먼저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내져서 비슷한 말씀을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31) 라고 전했다. 그런 다음 그는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라고 놀라운 진술을 부언하였다.
'예수(Jesus)' 라는 이름은 이사야와 예레미아가 예언하였던 고매한 이름보다는 훨씬 단순한 이름 같이 보인다. 유대인들 중에서 이미 그 이름 -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아, 예수아 (Joshua, Isaiah, Hosea, Jeshua) - 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다 바로 그 이름의 변형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 모든 이름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이름이 단순히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리라" 또는 "우리의 구주 여호와"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인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타락한 세상과 죄에 빠져 용서와 화평과 영생을 소망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의 총체적 전도사역을 내포한다.
아직도 남은 이름들이 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이름이 신약의 최초의 장에 언급되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태복음 1:16). 이를 보면 그는 예수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다.
즉, 그는 바로 그 '그리스도(Christ)'로서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 기다리던 '메시아(Messiah)' 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이름은 실질적인 직함으로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로서는 각각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육신을 입은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영원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의 영원하신 선지자이신 그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1, 14) 이 되어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세세무궁토록 선언하신다"(요한복음 1:18).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되신 그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브리서 7:25). 마침내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요한계시록 19:16). 그리고 그가 우리의 영원하신 왕으로서 돌아오실 때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요한계시록 11:15).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인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아직은 또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있다 - 말하자면, 세례명이라 할까 - 그 이름은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그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3)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일 뿐만 아니라, 주님(Lord)이시다. 그의 부활이 있은 후, 베드로 사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36) 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그의 온전한 이름은 언필칭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그에게 봉사하고 그를 존경하려면 앞에 언급된 여러 경이로운 이름들을 다 사용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그가 다시 오시는 날, 그를 명예롭게 받들어야 하는 이름이 또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하시고, 또 당신의 보혈로 되찾은 이 세상으로 언젠가는 권세와 영광 속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개선하시는 모습을 예언적인 환상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 받았었다. 그 때 그는 주님이 앞으로 오실 세상에서 불릴 경이로운 이름 세 가지를 들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요한계시록 19:11). 그는 지금도 우리들의 '충성된 대제사장'(히브리서 2:17) 되시고, '미쁘신 조물주'(베드로전서 4:19)가 되시며, 그리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요한계시록 3;14) 이다. 그의 영원한 이름 중의 하나는 충성되고 참되신 이 이시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포함되었다. 즉,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요한계시록 22:6), 그것은 그 말을 하시는 분이 영원히 신실하시고 참되신 이이시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요한계시록 19:13)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는 "태초의 창조하시는 이름"(요한복음 1:1-3)이었다. 그리고 "육신이 되어 우리한테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14)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원수를 이기고 우리 지구에 개선하실 때 다 이루심을 나타내는 장엄한 승리의 말씀이다.
그러고도 마지막 남은 이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한계시록 19:16)가 되심이다. 그 위대한 날에 전 우주는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이름을 주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9-11).
아굴이여, 여기 그대에게 줄 대답이 있소. '그의 아들의 이름(His Son's name)'은 믿을 수 없을 만치 위대하여, 그 이름을 다 일컫는 데는 필설이 부족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Wonderful)' 말고도 우리가 그의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이름들이며, 또한 틀림없이 영원의 시간 중에서 더 많은 이름들을 갖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일러준 그의 인간의 이름을 특별히 사랑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Lord Jesus Christ)' 이시다. 그리고 그 많은 그의 이름들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하나님의 책(성경)을 마치는 데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아들이 하신 이 아름다운 말씀으로 마감하는 것이 적절하였으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0, 21).
*Henry M. Mo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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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nameofchrist/
출처 - ICR
믿음이 시험될 때
: 욥기가 주는 메세지
(When faith is tested : The Book of Job)
by Peter Howe
성경에서 욥기(the book of Job)는 영감을 주는 책일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으로도 세계적 걸작 중 하나이다. 저자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배경은 족장 시대였다.
욥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으며,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욥 1:1) 그러나 참소자(사탄)는 하나님이 보호하고 번영을 주시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한다 :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1:11).
하나님은 그러한 참소가 거짓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도전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욥이 소유한 모든 것, 즉 가축들, 하인들,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과 딸들까지 잃게 되는 일련의 재앙들을 허용하신다.
욥은 슬픔에 빠졌지만, 참소자가 주장한 것처럼,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떠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욥은 참소자의 첫 번째 공격을 견뎌내며,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자신에 대한 축복과 풍요로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러나 참소자는 여전히 욥의 믿음이 모든 상황에서도 확고하게 유지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한다 :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2:5) 다시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고, 욥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셨다(욥 2:6). 욥은 온몸에 "종기“가 나는 고통을 받았다.(욥 2:7). 욥의 아내는 그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충고한다.(욥 2:9). 그러나 욥은 이렇게 가슴 뭉클한 대답을 한다 :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
욥의 '위로자들'
두 번째 공격도 실패했다. 이제 참소자는 장면에서 사라지고,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러 왔다. 욥의 상태는 너무도 참혹했고, 그들은 그를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밤낮 7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아 있었는데, 욥의 고통이 심히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욥 2:13).
시간이 지나고 욥은 감정을 분출한다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욥 3:11~13)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미스터리한 질문인 '왜?'가 욥의 입에서 터져나오게 된다.
이제 그의 세 친구들이 말하기 시작한다. 차례로 세 번 욥에게 연설을 하고, 욥은 즉시 대답을 하며, 그의 고뇌를 쏟아낸다. 처음에 그들은 부드럽게 그를 대하며, 믿음이 뛰어나고 다른 사람들을 잘 훈계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대우가 너무도 실망스러워서 놀라움을 표한다(욥 4:3!5).
욥이 자신의 무결성을 옹호하는 대답을 계속하자, 그의 친구들은 욥에게 점점 더 조바심을 낸다. 그들의 주요 주장은 모든 개인들의 고통은 각자의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욥 4:7~8; 8:4; 11:13~15). 욥의 고통은 매우 크므로, 욥의 죄는 실제로 매우 컸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욥은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한다.(욥 7:21; 9:2). 그러나 과거에 욥이 자신도 모르게 저질렀던 과오가 무엇이든 심판하실 때에 입증되고, 그 죄에 비해 고통의 정도가 너무 과도함을 입증하기를 원했다.(욥 9:16). 그러나 절망에 빠진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려는 것조차 의심한다.(욥 9:16). 대신 하나님은 그분의 뛰어난 지혜와 능력으로 욥을 압도하실 것이었다.(욥 9:3~4,17~19). 욥은 자신의 주장을 주장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언할 중재자를 간절히 갈망한다.(욥 9:33~34).
때때로 욥은 한탄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메모를 남긴다. 그는 이 생애는 아니더라도, 육체 밖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옹호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한다 :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 19:25~27).
욥과 그의 친구들은 입장을 바꿀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논쟁을 계속한다. 결국 그들은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진다. 세 친구는 욥이 끔찍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기 때문에, 마침내 침묵한다(욥 32:1).
지치고 좌절한 욥의 친구들은 욥을 자신들의 견해로 끌어들이지 못하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이 시점에서 독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게 된다. 그러나 대신 엘리후의 연설이(32~37장) 연달아 나온다. 그는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젊은 사람으로, 이전이나 이후에 언급되지 않았던 것을 말한다. 그의 연설은 고통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훈련시키고 단련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욥 33:14~30; 36:8~12).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욥의 오만한 무지를 비난하고(욥 35:16; cf. 38:2), 하나님의 전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장엄한 주권을 선포함으로써(욥 34:12~15; 36:24~37:24). 하늘의 신비를 헤아릴 수 없다는 지상의 최종 증거로 제시한다.[1]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셨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면담을 간청했다.(욥 13:3,22; 31:35~37). 이제 하늘의 침묵은 깨졌다. 주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대답하셨다.(욥 38:1)
하지만 처음에는 이상한 대답인 것처럼 보인다. 욥이 자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고, 끔찍한 신체적 고통에 대한 설명도 없고, 욥이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답도 없으며, 왜 죽도록 허용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답도 없었다. 대신 주님은 욥에게 하나씩 수사적 질문을 던지며,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신다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욥 38:4~7,17~18).
이것은 두 장(38장과 39장) 전체에 걸쳐 진행된다! 이 질문들 각각에 대해 욥은 무지를 주장할 수밖에 없다. 주님의 장엄한 발표에 완전히 누그러진 욥은 더 이상의 어물쩍 대답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욥 40:3~5).
그러나 주님은 만족하지 않으신다. 욥은 일찍이 세상의 끔찍한 불의에 대한 전능하신 분의 명백한 무관심에 대해 불평했었다.(욥 21:7~15; 24:1~12).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악을 심판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욥 40:8~14). 이것은 분명히 욥의 능력이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법을 그는 배워야만 한다.
경이로운 창조
하나님이 악인을 벌하시고 쫓아내시기에 너무 약하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욥기 40장과 41장에서 두 마리의 크고 강력한 동물인 베헤못(Behemoth)과 리워야단(Leviathan)을 장난스럽게 언급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성경 속 공룡', Dinosaurs in the Bible’ 참조).
<Photo 44518447 © Tomas1111 | Dreamstime.combeautiful-creation>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동물들이 실제 동물이 아니라, 상상의 동물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이 자이언트들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만, 여전히 강력한 창조주의 통제하에 있다는 바로 그 점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욥! 너는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니? 그것의 코를 밧줄로 꿰거나, 아가미를 갈고리로 꿰어 집으로 가져와서, 애완동물처럼 키우거나, 시장에 가서 장사꾼들에게 팔 수 있겠니?(욥 41:1~6). 무기를 갖고 나가서 한 마리를 공격해보는 것은 어떻겠니?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 작살을 그 머리에 꽂을 수 있겠니?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면, 다시는 싸울 생각을 못할 것이다! 그 모습 자체가 압도적이다.(욥 41:7~9). 하나님이 유머 감각이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러한 담론(38~41장)이 끝날 무렵, 욥은 자신이 심하게 어리석게 말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대면한 욥은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2~3, 5~6).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욥의 마음 문제에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욥에게 대답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셨고, 그의 마음에 조용한 체념을 가져왔다. 이 상태는 '겁에 질리거나' '무엇에 맞은' 사람이 아니라, 영원하신 팔이 실패하실 수 없기 때문에, 세상과 함께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2]
현재와 관련성
욥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첫째,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오른다는 것이다. 고통은 피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고뇌는 어느 정도는 선택 사항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날씨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면의 삶의 기후에 대해서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덜 중요하다.
둘째, 인간의 생각은 고난과 역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참소자와 하나님 사이의 일어났던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토론을 계속했다. 그들은 모든 퍼즐 조각들을 갖다 놓지 않고, 퍼즐 조각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욥기는 고난의 복잡한 문제를 깔끔한 공식으로 줄여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3]
셋째, 이 책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법과 위로하지 못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의도는 좋았지만, 친구들의 조언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욥이 친구들을 신랄하게 질책했던 것은 이해될 수 있다 :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욥 13:4~5).
욥의 친구들은 말을 할 때보다, 침묵할 때, 욥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다.(욥 2:13)
마지막으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내용을 욥기를 읽는 데에 너무 빠르게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욥의 생각처럼 자신의 관점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쉽게 보물을 제공한다. 그의 손은 하나님이 미래에 은혜롭게 베풀어 주실 더 확실한 형태의 계시를 움켜잡도록 내뻗게 된다. 그러나 욥은 그것들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4] 욥은 중재자를 간절히 원하면서, "존재하는 공허, 즉 모든 곤경에 처한 마음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구세주(Saviour)의 오심을 기대했다.[5] 욥기는 과도한 고난을 겪으면서, "완벽한 삶을 살되, 큰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고통과 죽음을 견뎌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앞선 메아리(advance echo)'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5]
Posted on CMI homepage: 28 August 2024
References and notes
1. La Sor W., Hubbard, D., and Bush, F.., Old Testament survey: The message, form, and background of the Old Testament, Eerdmans, Grand Rapids, MI, p. 567, 1982.
2. Heavenor, E.S.P., ‘Job’ in: Guthrie, D., Motyer, J.A., Stibbs, A.M., and Wiseman, D.J. (Eds.) The New Bible Commentary revised, IVP, London, p. 443, 1970.
3. While suffering and calamity are mostly not the result of individual, specific sin (Luke 13:2–5), they are ultimately the result of sin’s entry into a once-perfect world at the Fall of the first human pair (Genesis 3, Romans 8:19–23). See also creation.com/why-death-suffering.
4. Bullock, C.,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poetic books, Moody Press, Chicago, IL, pp. 84–85, 1979.
5. Yancey, P., The Bible Jesus read, Zondervan, Grand Rapids, MI, p. 72,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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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룡과 사람이 함께 살았던 증거들 : 아메리카
출처 : Creation 45(3):36–39, July 2023
주소 : https://creation.com/job-faith-tested
번역 : 미디어위원회
오병이어의 기적은 호수에 죽어서 떠오른 물고기들이었는가?
(The Miracle of the Loaves and Fishes Not So Miraculous Say Scientists)
by Ken Ham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것은 기적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현상이었던 것일까? 최근 일부 과학자들은 한 과학 저널에 게재한 논문에서(Water Resources Research, 2024. 10. 24) 주장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Phys.org. 2024. 11. 4). 그들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공급 대신에, 떡과 물고기로 5,000명과 4,000명을 먹이신 일이 "단지 우연히 일어났던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과학자들은 신약성경의 갈릴리 호수인 키네렛 호수(Lake Kinneret)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호수 깊숙한 곳에 온도 센서와 산소 모니터링 장치를 설치하고, 수면의 풍속과 풍향을 모두 테스트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물고기 떼죽음에 대한 현대의 역사적 기록"을 조사했다. 그들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그들은 호수 표면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호수 깊은 곳에서 산소를 끌어올릴 만큼 강해서, 수생 생물이 살 곳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짧은 기간을 발견했다.
그 결과 갑작스러운 죽음이 일어났는데, 해안이나 배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물고기 무리가 천천히 호수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고,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이 연구자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동안 호수 위로 바람이 불었고, 열적 계층화(thermal stratification)로 인해 물속 산소가 감소했고, 많은 물고기들이 죽어 수면으로 떠올라, 해안으로 밀려왔고, "배고픈 사람들이 쉽게 잡을 수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지친 제자들에게 호수 반대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물고기들의 대량 죽음이 있었고, 많은 물고기들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시점에서 당신은 아마도 웃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성경의 기록과 비교하면 정말로 어리석다.
예를 들어, 그 과학 기사는 물고기가 "성경의 기록에 있는 것처럼" 쉽게 잡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이 오병이어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과 맞을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마태복음 14:13-21)
성경 본문에서 물고기가 "쉽게 잡혔다"는 말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빈 들에서 그저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건네주셨고, 제자들은 음식을 나눠 주었다.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힌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번째도 기적적으로 양식을 나눠 주셨는데, 이번에는 4,000명이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마가복음 8:1-9)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나 누군가가 해변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주워 모았다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해변에 죽어있는 냄새나는 물고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떤 어부가 해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부패했을 수도 있는 물고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음식으로 나눠줄까? 군중들은 토하고 불평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 기적에 대한 그들의 자연주의적 설명에 대한 또 다른 문제점은 떡이다. 떡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분명히 호수 바닥에서 떠올라 해안으로 밀려오지 않았다!
또한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신 후에, 군중들이 놀라서 예수님을 강제로 임금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요한복음 6:14,15). 어떤 사람들이 해변에서 죽은 물고기를 모아서 나눠주는 사람에 대해 왜 그렇게 놀랐으며,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한 왕으로 삼으려고 했겠는가? 이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잡았다는 것은 어떨까? 물고기들의 죽음과 떠오름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사건은 두 번 일어났다. 한 번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누가복음 5:1-11) 일어났고, 두 번째는 부활하신 후에 일어났다(요한복음 21:1-14). 그래서 이 연구자들은 예수의 사역 중에 희귀한 물고기 떼죽음 사건이 네 번 일어났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매번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기 잡는 것이 직업이었던 노련한 어부 제자들은 죽은 물고기들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해변에 있던 예수님이 그 물고기들을 보았다는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세부 사항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의 기적은 그럴듯한 이야기나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존재하게 하셨다. 한 줌의 빵과 물고기로 수많은 군중들을 먹이실 수 있으시며, 물고기 떼를 그물로 헤엄치도록 명령하시는 것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인하고,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인간의 생각과 이론을 더 앞세울 때,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은 무엇이든 거부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행하셨고 우리에게 전달하신 것을 부인하기 위해, 어떤 괴상한 이야기를 내놓을지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AiG의 아베리 폴리(Avery Foley)와 트로이 레이시(Troy Lacey)가 쓴 글 "초자연 또는 과학 : 기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Supernatural or Science: How Do We Explain Miracles?)"에서 성경의 기적들을 설명해보려는 시도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또한 CEH에서도 오병이어 기적이 죽은 물고기들을 모은 것이라는 글에 대한 반박 글을 게재했다 : Demythologizing Bible Miracles Creates Absurdities. (CEH, 2024. 11. 19)
*참조 :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기적을 설명해보려는 과학자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64&bmode=view
애굽의 열 가지 재앙 : 기적인가, 자연현상인가?
https://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43&bmode=view
창조주와 기적 - 차원을 이용한 이해
https://creation.kr/Faith/?idx=1293753&bmode=view
▶ 성경의 오류 논란
▶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
https://creation.kr/Topic502/?idx=6828823&bmode=view
▶ 성경 속 과학
https://creation.kr/Topic502/?idx=6815547&bmode=view
▶ 성경적 역사를 지지하는 발견들
▶ 성경을 지지하는 고고학
출처 : AiG, 2024. 11. 18.
번역 : 미디어위원회
인간은 거대한 ‘아르마딜로’를 사냥했다.
: 인류는 2만 년 전에 남미에 진출했는가?
(Humans Butchered Giant “Armadillos”)
by Jake Hebert, PH.D.
아르헨티나에서 발굴된 거대한 아르마딜로(armadillo)와 유사한 빙하기 글립토돈트(glyptodont)의 뼈들에 나있는 잘린 자국을 분석한 결과, 인간들이 이 생물들을 죽이고 식량으로 사용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1, 2] 이 뼈들은 아르헨티나 동부 레콩키스타 강(Reconquista River)의 강둑에서 발견된 네오스클레로칼립투스 속(genus Neosclerocalyptus) 글립토돈트 화석 잔해들 속에 있었다. 뼈들의 나이는 20,0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는데, 잘린 자국들은 다른 화석 뼈들에 나있는, 석기(stone tools)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국들과 일치했다.
통계 분석에 따르면, 골반, 꼬리, 몸체 갑옷 부분에 나있는 절단 자국들은 석기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자국과 일치하며, 이러한 자국의 위치는 육질이 촘촘한 부위를 대상으로 한 도살 순서와 일치한다.[1]
글립토돈트(glyptodonts)는 거대한 아르마딜로 유사(armadillo-like) 동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에 따르면, 글립토돈트는 아르마딜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실제로 자이언트 아르마딜로일 수 있다.[3, 4] 가장 큰 글립토돈트 중 하나인 도에디쿠루스(Doedicurus)는 1톤 정도 무게가 나갔다고 여겨지고 있다. 네오스클레로칼립투스(Neosclerocalyptus)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아르마딜로에 비하면 여전히 거대한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네오스클레로칼립투스는 길이가 1.8m였으며, 무게는 300kg 정도였다.[5]
이 뉴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흥미로울 수 있다. 첫째, 주류 연구자들은 인간이 그렇게 "초기" 시기에 남아메리카에 있었다는 이 증거에 놀랐다.[5] 물론 창조론자들은 2만 년 정도의 이 연대도 크게 부풀려졌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화석들은 불과 몇천 년 전인 노아 홍수 이후 초래된 빙하기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홍수 이후 빙하기 동안, 인간은 바벨에서 흩어진 후, 배와 육지 다리를 사용하여, 중동으로부터 유라시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로 이동했다.[6, 7]
두 번째 이유는 아르마딜로처럼 생긴 글립토돈트의 거대한 크기인데, 살아있는 동물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은 자이언티즘(giantism)과 성숙 지연(delayed maturation)이 종종 장수(greater longevity)와 관련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8] 실제로 창조 연구가인 도날드 패튼(Donald Patten)과 그렉 비즐리(Greg Beasley)는 수십 년 전에 그러한 관련성을 언급했다.[9, 10] 성경은 창세기 족장들의 오랜 수명이 초자연적이었다는 어떠한 암시도 주고 있지 않다. 만약 정말로 그 설명이 자연스럽다면, 동물의 장수를 증가시킴 없이, 인간의 장수만을 증가시켰을 메커니즘(원래 완전했던 유전체, 풍부한 음식(먹이), 다른 대기 조성... 등)을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화석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자이언티즘의 증거들은 홍수 이전 세계와 홍수 직후 세계에서, 동물들이 장수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일부 화석에서 발견된 성숙 지연의 증거도 마찬가지이다.[11~13]
또한 흥미로운 것은 빙하기 말에 이르러 포유류의 몸체 크기가 전 세계적으로 분명히 감소했다는 강력한 화석 증거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40여 년 이상 전의 진화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발견됐었다.[14, 15] 홍수 이후 빙하기 동안 인간의 수명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물의 수명도 감소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장수와 몸체 크기 사이의 상관관계를 고려할 때, 장수의 감소는 또한 몸체 크기의 감소를 동반할 수 있다.
ICR의 연구는 동물들이 한때 그들의 현대 후손들보다 훨씬 더 큰 장수를 경험했다는 직간접적인 증거들을 천천히 그러나 체계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연구는 끝나지 않았다! 두 개의 전문적 논문과 두 개의 짧은 논문이 이미 출판을 위해 제출되었고, 우리는 이러한 결과들을 앞으로 대중적 수준의 기사들로 공유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References
1. PLOS, “Evidence of Butchery of Giant Armadillo-Like Mammals in Argentina 21,000 Years Ago,” ScienceDaily, July 17, 2024, https://www.sciencedaily.com/releases/2024/07/240717162440.htm.
2. Mariano Del Papa et al., “Anthropic Cut Marks in Extinct Megafauna Bones from the Pampean Region (Argentina) at the Last Glacial Maximum,” PLoS ONE 19, no. 7 (2024): e0304956.
3. Frédéric Delsuc et al., “The Phylogenetic Affinities of the Extinct Glyptodonts,” Current Biology 26, no. 4 (2016): 155–156.
4. “Extinct Glyptodonts Really Were Gigantic Armadillos, Ancient DNA Shows,” Phys.org, February 22, 2016, https://phys.org/news/2016-02-extinct-glyptodonts-gigantic-armadillos-ancient.html#google_vignette.
5. Katie Hunt, “Giant Armadillo Fossil Reveals Humans Were in South America a Surprisingly Long Time Ago,” CNN, July 17, 2024, https://www.cnn.com/2024/07/17/science/giant-armadillo-fossil-early-humans-americas/index.html.
6. Brian Thomas, “Boats and Jewelry: ‘Stone Age’ People Were Surprisingly Modern,” Creation Science Update, January 25, 2010, https://www.icr.org/article/boats-jewelry-stone-age-people-were.
7. Timothy Clarey, “The Ice Age and the Scattering of Nations,” Acts & Facts, August 2016, 9.
8. See summary in Leo Hebert III, “Allometric and Metabolic Scaling: Arguments for Design . . . and Clues to Explaining Pre-Flood Longevity?”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Creationism 9, no. 18 (2023): 206–227.
9. Donald W. Patten, “The Longevity Accounts in Ancient History,”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19, no. 1 (1982): 40–52.
10. Greg Beasley, “Pre-flood Giantism: A Key to the Interpretation of Fossil Hominids and Hominoids,” Journal of Creation 4, no. 1 (1990): 5–55.
11. Jake Hebert, “Oysters and Pre-Flood Longevity,” Acts & Facts, May/June 2024: 19.
12. Jake Hebert et al., “Crassostrea Oyster Fossils Show Evidence of Extreme Longevity,”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60, no. 3 (2024): 171–190.
13. Jake Hebert, “Giantism and Delayed Maturation in Fossil Sharks: Evidence for Extreme Longevity?”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60, no. 4 (2024): 267–283.
14. Simon J. M. Davis, “The Effects of Temperature Change and Domestication on the Body Size of Late Pleistocene to Holocene Mammals of Israel,” Paleobiology 7, no. 1 (1981): 101–114, especially page 101.
15. Jake Hebert, “Late Pleistocene Body Size Reduction: Evidence of a Post-Flood Decline in Longevity?” Journal of Creation 38, no. 1 (2024): 60–66.
* Dr. Hebert is a research scientist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earned his Ph.D. in physics from the University of Texas at Dallas.
*관련기사 : 무게 2톤 거대 '아르마딜로'…2만년전 아르헨티나서 사냥당했다 (2024. 7. 20. 뉴스웍스)
https://www.newswork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9732
*참조 : ▶ 900년의 긴 수명
▶ 과거 거대생물
https://creation.kr/Topic202/?idx=16050559&bmode=view
▶ 현명했던 고대인
▶ 바벨탑
▶ 대홍수 후 인류 이동
▶ 노아 홍수가 초래한 빙하기
출처 : ICR, 2024. 8. 2.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humans-butchered-giant-armadillos/
번역 : 미디어위원회
시간 추적 : 우리의 달력은 어디에서 왔는가?
(Tracking Time: Where Do We Get Our Calendar)
Liz Abrams
10월 4일은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 제정 기념일이다.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통해 년, 월, 일을 정한다. 그레고리력은 1600년 이상 달력 체계였던 줄리안력(Julian calendar)을 대체하기 위해, 1582년 10월에 교황 그레고리 13세에 의해서 제정되었다. 줄리안력은 여전히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여전히 줄리안력을 사용한다면 2022년 10월 4일은 9월 19일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 중 하나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아는 것이다. 당신의 생일은 1년에 한 번 돌아온다. 크리스마스는 항상 12월 25일이고, 발렌타인 데이는 2월 14일이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인 결혼 10주년,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고, 그러한 커플은 충실한 결혼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달력(calendar, 역법)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아담은 1월 1일에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12월 25일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제 예수님의 탄생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달력의 기원도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난, 창세기에 언급된 최초의 것은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 첫째 날부터 시작된 낮/밤 주기이다. 아직 해와 달이 창조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빛이 있었던 시간이 있었고(아마도 지구에 있는 사람이 경험했을 것으로), 그 뒤에 어둠의 시간이 뒤따랐다. 낮(day)과 밤(night)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오늘날 우리가 태양과 달을 통해서 경험하는 낮과 밤의 길이와 비슷했음을 의미한다.
넷째 날에 하나님은 태양, 달, 별 및 기타 천체를 창조하셨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그것들의 목적을 밝히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14~15)
태양(sun)인 "큰 광명체"는 우리에게 낮과 밤을 분명하게 구분해 준다. 달(moon)은 우리에게 시간의 다음 구분인 월(month)을 제공한다. 달은 햇빛을 반사하는데, 반사하는 달의 반쪽이 지구를 향할 때 보름달이 된다. 달의 대부분이 햇빛을 지구로 향해 반사하지 못할 때, 그것은 초승달(new moon, 신월)이며, 보름달 사이에 여러 단계의 위상 변화가 있다. 초승달에서 초승달까지가 음력(태음력)으로 한 달(a lunar month)이다. 오늘날 서구 세계의 달력(태양력)은 음력과 일치하지 않지만, 고대 달력에서는 일치했다.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사용하여 연도를 측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태양년(solar year)은 태양이 천구의 적도를 지날 때 춘분점(vernal equinox)에서 다음 춘분점까지의 시간으로 365.2422일이다. 항성년(sidereal year)은 천구상을 지나는 태양이 황도상에 고정된 별과 겹친 뒤 다시 겹쳐질 때까지의 시간을 말하며 365.2564일이다. 항성년은 태양년보다 약간 긴데, 그 이유는 춘분점이 천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차 운동으로 인해 조금씩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점년(anomailistic year)은 지구가 근일점에서 다음 근일점에 이르는데 걸리는 시간으로 365.2596일이다. 근점년은 항성년보다 약 5분 정도 더 길다.
고대 달력들
사람들이 언제부터 달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담의 나이는 년 단위로 측정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정확한 측정이라고 믿는다. 즉, 아담이 상당히 일찍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아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어떤 년을 사용하고 있었을까? 달과 날들은 태양력에 잘 맞지 않는다. 음력으로 12월은 태양력보다 11일이 짧다. 음력(음력 12개월 = 354일)을 사용했다면 태양년으로 901세가 된다. 창조로부터 노아 홍수까지의 기간인 1656년을 음력으로 측정하면 1606년이 된다.
창세기 6~7장에 나오는 연대표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모세가 30일씩 12개월로 나눈 360일의 음력 달력을 사용하여 홍수 기간을 계산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은 홍수 연대표에 대 한 성경적 개요(Biblical Overview of the Flood Timeline)를 참조하라.
성경 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초기의 증거는 사람들이 아주 일찍부터 태음력과 태양력의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고, 태음태양력(lunisolar calendars)을 사용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태음태양력에서 달은 음력이지만, 년은 태양력이다. 수메르(Sumer)에서는 달력을 태양력과 일치시키기 위해, 왕들이 주기적으로 윤달(intercalary months)을 선포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천문학적 지식이 윤달들을 표준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때까지, 상당히 임의적으로 행해졌다.
고대 이집트에는 30일로 된 12달에 5일의 윤달이 더해진 365일의 달력이 있었다. 이 달력은 이집트인들이 4년마다 하루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은 히브리 달력을 언제 개편하셨는가?
유월절(Passover) 직전은 하나님께서 히브리 달력을 다루시는 특이한 시기인 것 같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즉시 떠날 준비를 해야 하므로, 애굽 사람들에게 온갖 귀중품을 요구해 가져오게 하시고, 급히 준비한 유월절 음식을 신을 신은 채로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달(후에 니산월이라고 불리는 아빕월, 대략 3월/4월에 해당함)은 그들에게 한 해의 첫 달이 되었다.(출 12:1~2)
왜 하나님께서는 달력을 재설정(reset)하시기 위해, 그 순간을 선택하셨을까? 장자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박해와 노예 생활에 대해 바로와 이집트를 심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거짓 신들에 대한 그분의 우월성을 일련의 심판들을 통해 보여주셨다. 이 거짓 신들은 달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거짓 신들로부터 분리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바로 달력을 바꾸셨다.
대신 히브리력(Hebrew calendar, 유대력)은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그분이 실행시키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구출(deliverance, 해방)은 너무도 특별한 것이어서, 출애굽의 달을 한 해의 시작으로 정했던 것이다.
안식일 원칙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의 일주일을 개편하셨다(reformed). 하나님께서 7일 동안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실 때까지, 창조 주간에 근거한 사람들을 위한 7일 주간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다. 홍수 이야기 중 여러 7일 기간은 사람들이 모세 율법 이전에 7일 주간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여러 문화권에는 길이가 다른 "주(weeks)"들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집트인들은 일주일이 10일이었다. 하지만 유월절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로 일주일은 7일로 정해졌다. 어떤 사람들은 수메르인들이 달이 한 위상에서 다른 위상으로 바뀌는 데 걸리는 시간을 기준으로 일주일이 7일이었고, 바빌로니아인들이 수메르인들로부터 일주일을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 초기에 이스라엘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와의 문화적 교류는 고사하고 중요한 상호 작용도 없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10일제를 지켰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심으로서 7일제를 굳게 세우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실 때,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삼으시려고 여섯째 날에는 두 배로 거둘 것을 모세에게 명하셨다. 사람들은 일곱째 날에 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시내산까지 설명되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히브리인들의 안식일 준수를 창조 6일 후의 하나님의 안식과 분명하게 연결하셨다(출애굽기 20:8~11). 모세는 창세기의 인간 저자/편찬자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특히 수백 년 동안 이집트 신화에 둘러싸여 창조의 역사를 잊어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창세기에 있는 우리의 역사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성경의 형태로 다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역사가 기억됐는지는 알 수 없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준수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애굽기 31장과 출애굽기 35장에서 안식일을 어긴 것에 대해 사형을 제정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엄숙하게 상기시키고, 하나님이 6일 만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에 쉬셨음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주 안식일을 지키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밭에 파종하여 6년 동안 소출을 거둘 것이나, 7년째 되는 해에는 파종하지 말고 밭도 쉬고 종들도 쉬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레 25장). 이러한 관습은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휴식하는 주기를 반영하고 강화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7년째 해에 쉬는 것을 따르지는 못했다.
연례 절기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한 해가 이집트와 가나안의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절기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하셨다. 연초의 무교절, 맥추절, 연말의 수장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공급하심을 경배하고 경축하는 절기였다(출 23:14-17). 이 절기들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애굽기 34장에서 그것들을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이방 관습을 진정한 신에 대한 경배로 대체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염소를 어미 젖에 삶는 것을 금지하는 특이한 금지 사항도 설명된다. 이것은 요리에 관한 금지 행위라기 보다는 땅(소출)의 비옥함을 보장하기 위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이방 관습에 의존하는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추수 초에 맥추절을 지키고, 추수 끝에 수장절을 지켰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이 절기 준수를 더럽혔다. 이사야 시대에 하나님은 정하신 절기까지 거절하셨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1:12~14)
유대력에서 종교적 절기들과 안식일의 휴식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그들의 절기들을 지키는 행동은 위선적인 관습이 되었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달력을 연대기로 바꾸기
어떤 달력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연도를 측정하는 방법이 결정된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측정했을까? 전 지구적 홍수는 창조 후 1656년경에 일어났지만, 창세기는 “창조 후 1656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고 되어 있으므로,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주어진 족장들의 나이들로부터 추적하여 계산해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다음 세대가 태어날 때, 족장들의 나이와 그들의 전체 수명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족보들은 "노아가 600세" 였을 때를 "창조 후 1656년"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세부 사항일 것이다.
노아 홍수와 바벨탑에서의 흩어짐 이후에, 적어도 어떤 곳에서는 통치하는 왕과 함께 문화와 정부 제도를 다소 빠르게 발전시켰다. 그 지역의 제도가 족장들의 수명으로 연대를 계산하는 것에서, 왕의 통치 기간으로 연대를 표시하는 것으로 바뀐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는 모두 연호(regnal years, 즉위년)를 사용했다. 수메르 왕들의 목록(Sumerian King List) 및 왕들의 목록(Canon of Kings)과 같은 문서는 이러한 관행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야곱이 130세에 이집트로 내려와 147세에 죽기 전까지, 창세기에 족장들의 연대기가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들의 연호에 의한 달력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며, 아마도 족장들의 수명에 따라 시간을 계산하는 것을 점차 중단했을 것이다. 성경은 창조 때로부터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충분한 연대기적 표시들을 제공하고 있다. 야곱이 죽은 후부터 연대 표시는 개인의 수명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 달력의 시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시조는, 초승달로 시작하는 달이 태양년과 일치하도록 윤달을 포함시켰던 고대 로마력(ancient Roman calendar)이다. 전설에 따르면 로물루스(Romulus, 로마의 건국자)는 304일을 10개월로 나눈 첫 번째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달력은 태양년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일 가능성은 없다. 이 달력이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도 없다.
대신 가장 초기에 증명된 달력인 로마력(Roman republican calendar)은 현대 달력과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12개월이었고, 그들 중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가 표시하는 달의 이름과 유사하게 명명되었다. 1년의 길이는 특정 간격으로 윤달을 포함하기 때문에, 24년 주기로 다양하다. 그러나 이 보간법(intercalation-윤년, 윤달, 윤일을 중간에 넣어 날짜를 보정하는 방법)은 365.25일이라는 꽤 정확한 1년의 평균 길이를 갖고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BC 46년 달력을 개편하여, 1년의 길이를 365일로 하고, 4년마다 윤년을 두어 366일로 했다. 이것은 365.25일의 1년을 달성하는 더 간단한 방법이지만, 실제 태양년인 365.2422일보다 약간 더 길다. 즉, 율리우스력(Julian calendar)은 128년마다 하루가 늘어난다. 이것은 큰 오차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된다.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 오늘날 사용되는 태양력)은 윤년의 특성을 약간 변경하여 윤년을 태양년과 더 가깝게 조정했다.
100으로 정확히 나누어 떨어지는 해를 제외하고, 4로 나누어지는 해는 모두 윤년이지만, 정확히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윤년이다. 예를 들어 1700년, 1800년, 1900년은 윤년이 아니지만, 2000년은 윤년이다.
세계의 나이 계산
글을 쓰는 시점은 2022년이지만, 무엇으로부터 2022년 후인가? 약어 AD는 라틴어 anno Domini의 약자로, "우리 주님의 해(year of our Lord)"를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몇 년이 흘렀는가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지만, 여러 이유로 몇 년 떨어져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BC 6년에서 2년 사이로 추정한다.
우리는 이 세계의 창조(creation)와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시간 사이에 몇 년이 경과했는지 측정할 수 있는 성경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적 연대표를 세속적 연대표와 일치시키어서 높은 정확도로 세계의 나이를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기록은 우리가 주어진 측정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날짜 또는 정확한 연도까지 세계의 나이를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셋(Seth)이 아담의 130번째 생일에 태어났는지, 아니면 그날과 그가 131세가 되기 전날 사이의 어느 날에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아담의 창조 1주년에, 그는 1살로 계산되었을까? 아니면 2살로 계산되었을까? 비슷한 불확실성이 연대기적 사슬의 모든 연결 고리들에서 발생하며, 이로 인하여 지구의 정확한 나이에 대한 불확실성이 수십 년까지는 아니어도, 최대 몇 년에 이를 수 있다.
역사를 통틀어 성경의 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다양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사용하여 세계의 연대기를 만들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 제임스 어셔 대주교(Archbishop James Ussher)가 가장 유명하며, 그의 세계 연대기는 오늘날까지도 흥미롭게 읽히고 있다. 그는 지구가 BC 4004년 10월 23일에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과학적 천재성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과학보다 신학에 관해 더 많은 글을 썼으며, 지구의 나이도 계산했다. 그는 세상이 BC 3998년에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이 사람들과 비슷하게 지구의 나이를 계산했던 또 다른 사람들도 당시 최고의 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
비록 세상이 타락했지만, 해와 달과 별들은 계절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그들의 창조된 목적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우리의 달력이 태양과 일치하지 않을 때, 달력은 다른 방법이 아닌 태양년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를 염두에 두시고 세상을 창조하셨고, 성경은 우리가 세상의 역사를 측량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역사적 세부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과학적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질서 있는 우주를 창조하셨듯이, 하늘의 질서는 역사적 탐구를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그분과의 특별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기 위해, 안식일과 절기들을 주셨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의 첫날에 예배를 드린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원래 제정하신 안식일을 기념하기 위해 여전히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우리가 예배하는 날은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부활절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부활을, 크리스마스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것도 그렇다. 이것들은 성경에 결코 명령되어 있지는 않지만, 기념일들을 통해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기에 적합하다.
Footnotes
“Introduction to Calendars,” Astronomical Applications Department, US Navy, accessed October 3, 2022, https://aa.usno.navy.mil/faq/calendars.
*참조 : 더 많은 날과 월을 가진 달력들 : 창세기에 기록된 시간 단위와 로마력, 태음력, 이슬람력.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130&bmode=view
기록들은 얼마나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가?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43&bmode=view
오래된 연대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
https://creation.kr/YoungEarth/?idx=1289341&bmode=view
성경 역사가 왜 중요한가?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95&bmode=view
고대사의 연대기적 틀 - 1부 : 문제점, 자료, 및 방법론 ; 고대 근동 및 이집트 역사는 크게 부풀려져 있다.
https://creation.kr/archaeology/?idx=15978817&bmode=view
역사와 거짓 역사 : 창세기 1~11장의 기록은 진정한 역사이다.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105&bmode=view
성경이 들려주는 기원의 연대 : 한국창조과학회가 젊은 지구 연대를 주장하는 성경적 이유
https://creation.kr/Genesis/?idx=13874742&bmode=view
창세기 6일 창조에 대하여
https://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44&bmode=view
잊혀진 대주교, 제임스 어셔 <어셔 주교에 대한 휴 로스와 스테판 굴드의 대조되는 평가>
https://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72&bmode=view
창세기 1장의 날들은 얼마의 시간이었는가? : 하나님은 그 단어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기를 의도하셨는가?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086&bmode=view
창세기 1장의 하루는 여섯 번의 태양일(24hr의 하루)을 가리킨다고 히브리어 교수는 말한다!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143&bmode=view
창세기 1장의 수 패턴 : 날(day, 욤)의 길이에 대한 결정적 단서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090&bmode=view
태양이 있기 전의 햇빛 : 태양이 창조된 넷째 날 이전의 하루는 하루가 될 수 없는가?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079&bmode=view
나무의 나이테는 창세기의 연대를 반증하는가? : 나이테는 매년 하나씩 생기는 것이 아니다.
https://creation.kr/Dating/?idx=13734989&bmode=view
수십억 년의 연대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7 가지 이유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68&bmode=view
지구의 나이는 지엽적 문제인가?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83&bmode=view
성경적 시간 틀로 지질주상도 이해하기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79&bmode=view
어쨌든 믿어라?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4381356&bmode=view
오래된 지구 연대를 믿는 것은 진화론을 수용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78&bmode=view
오래된 지구 지질학에 대한 성경적 지질학자들의 반대
http://creation.kr/Geology/?idx=1290504&bmode=view
지구의 나이 논쟁에 있어서 열쇠 : 노아 홍수는 장구한 시간과 양립될 수 없다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77&bmode=view
교회 내로 침투한 수억 수천만 년이라는 질병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81&bmode=view
창세기에 대한 타협은 성경의 기초를 허무는 일이다.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90&bmode=view
진화론의 확산과 지구 나이의 변화 : 장구한 연대가 결정되는 과정을 추적한 책 ‘연대측정 게임’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94&bmode=view
좁은 길 :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론이 걸어가는 길
https://creation.kr/Genesis/?idx=1289067&bmode=view
출처 : AiG, 2022. 10. 4.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bible-history/tracking-time/
번역 : 양승원
신약성경에 언급된 전 지구적 대홍수
(The global Flood—according to the New Testament)
Lita Cosner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그들의 신학을 세우기 위해 구약 성경의 역사를 자주 인용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역사를 버린다면, 구약에 근거한 신약의 교리 역시 거의 필연적으로 버려지게 된다는 것임을 의미한다. 미국과 다른 지역의 주류 교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구약 역사를 사용하여 기독교의 중요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한 사례는 노아 시대의 전 지구적 대홍수이다.[1]
노아 시대의 세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노아 시대에 사람들은 대홍수가 올 때까지 ‘평소와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38~39).
그러나 그때는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문화가 너무나 부도덕해서, 베드로는 그것을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이라고 불렀다(베드로후서 2:5). 심지어 그 당시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유다서 1:6) 범죄한 천사들(베드로후서 2:4)도 있었다. 신약은 이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했다는 언급과 잘 들어맞는다. 즉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 아내를 취해서 네피림을 낳았다.[2]
방주와 승객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브리서 11:7). 베드로는 방주에서 노아 외 일곱 사람, 즉 여덟 명만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베드로전서 3:20; 베드로후서 2:5). 다른 모든 사람들은 대홍수로 죽었다(누가복음 17:27).
대홍수의 규모
대홍수는 노아가 방주로 가져간 물건들, 기록 및 노하우를 제외하고는 그 당시 존재했던 모든 인류 문명을 파괴했다(마태복음 24:39; 누가복음 17:27; 베드로후서 2:5, 3:5-6). 대홍수의 범위는 전 지구적이었으며, 너무나 격변적이어서, 사실상 창조 둘째 날 하나님이 마른 땅을 드러내시기 이전의, 전 지구가 물로 덮여 있던 상태와 유사하게 물로 뒤덮였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3:6절에서 강하게 언급되어 있다. 거기에서 세상(kosmos)이 멸망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홍수가 전 지구적 규모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
멸망된 것은 “그 때에 세상”이었다. 이것은 다음 구절에서 언급된 “이제 하늘과 땅”과 대조된다. 멸망의 초점은 확실히 그 세상에 거주하던 인간들에 관한 것이지만, 멸망은 모든 “세상”에까지 미쳤다. 즉, 몰려오는 물들은 창세기 1:6~10절의 원상태로 돌려놓음으로써, 창조를 물로 뒤덮인 혼돈으로 돌아가게 하고, 부수적으로 창세기 1:10절 이후에 창조되었던 생물들을 파괴했다.[3]
따라서 ‘점진적 창조론자’ 또는 ‘오랜 연대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아 홍수는 지역적 홍수가 아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 홍수였다.
무지개와 약속
무지개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지구상에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는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는 것으로써,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다(요한계시록 4:3). 전 지구적 대홍수의 개념은 종종 세속주의자들뿐 아니라, 그 역사성을 의심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조롱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보내신 것과 같은 대홍수를 다시는 보내시지 않기로 약속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아의 홍수가 매우 재난적인 지역적 홍수였다면, 그때 이후로 많은 지역적 홍수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어기시는 것이 된다.
대홍수에 대한 신약의 신학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구약성경을 그 자체로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그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믿음을 기본적인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신학적 논증을 뒷받침하기 위한 역사적 사건의 사례나 선례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의 기자들은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들은 드러나게 그것을 역사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창세기 1~11장은 주로 지구와 인류의 초기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신약의 기자들은 주로 이 사건들이 하나님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사건들이 기록된 대로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건들이 실제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해줄 수 없다.(이것이 실제 역사로서 덜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홍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의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을 때 사람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심판하신다(베드로후서 2:4; 유다서 1:6).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아끼신다는 점에서 그분의 자비 역시 분명하다(베드로후서 2:5). 베드로는 대홍수 이야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그러하셨듯이,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동일하게 죄를 심판하고, 의인을 보존하신다고 가르쳤다(베드로후서 2: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심판을 오래 참으신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의 건조를 마칠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베드로후서 3장).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있으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대홍수를 예상하지 못했듯이, 그분의 ‘재림’이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있을 것이며(마태복음 24장, 누가복음 17장), 마찬가지로 시간이 있을 때 믿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너무 늦을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기독교 신학은 역사와 묶여 있다.
많은 현대인들이 신학(theology)과 역사(history)를 분리하기를 원하지만, 신약에서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역사는 올바르게 해석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역사가 정확하지 않으면 신학은 기초가 없는 것이다. 신약의 기자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할 때마다, 그것은 과거에 하나님이 일하신 방식에 대한 선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의 기자는 청중들에게 단순히 ‘노아가 전 지구적 홍수를 피하기 위해 방주를 지었다’는 것만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믿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 요점은 ‘하나님이 세상을 한 번 심판하셨으므로, 다시 그렇게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자가 가르치고 있으며, 그러한 신학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약의 기자들이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였던 사건들을 거부한다면, 그들의 신학적 논증은 기초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전 지구적 대홍수에서 노아 방주에 들어갔던 생물들만 살아남았다고 말한 것은 잘못되었지만, 그의 신학은 정확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성경의 역사(Bible’s history)에 대해 매우 큰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에서 용기를 얻어야만 하며, 우리도 그러한 확신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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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를 인용한 신약성경의 구절들
*(마 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눅 17:26-2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후 2:4-5)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벧후 3:5-6)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유 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계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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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1. Angels are spiritual beings and do not marry in heaven. But they have been known in Scripture to manifest in our realm using corporeal bodies which can eat and so presumably carry out all normal human body functions, including reproduction.
2. Davids, P. H. (2006). The letters of 2 Peter and Jude.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271).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Pub. Co.
3. Morris, L. (1992).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614). Grand Rapids, Mich.; Leicester, England: W.B. Eerdmans; Inter-Varsity Press.
*LITA COSNER, B.A., M.A.
Lita has a B.A. in biblical studies from Oklahoma Wesleyan University and an M.A. in New Testament fro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She is the full-time Information Officer for CMI-USA. For more: creation.com/cos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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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Creation Magazine Vol. 42(2020), No. 2 pp.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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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이종헌
예수님의 부활 : 고고학적 분석
(Jesus’s Resurrection : An Archaeological Analysis)
Matt Dawson
요약 :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유물들이 아직까지 많이 발견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적은 수의 고고학적 유적지와 유물들의 의미와 중요성은 매우 크다. 이 논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된 7가지 고고학적 발견들과 유적지들을 살펴보고 있다.
1)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주님 무덤 성당. 부활 기념 성당)
2) 정원무덤(Garden Tomb, 동산무덤)
3) AD 1세기의 굴림돌 무덤(rolling-stone tombs of the first century AD)
4) 여호하난의 유적(remains of Jehohanan son of HGQWL)
5) 알렉사메노의 그라피토(Alexamenos graffito)
6) 므깃도 모자이크 비문(Megiddo Mosaic Inscription)
7) 나사렛 비문(Nazareth Inscription).
종합적으로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증거들이 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과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7가지 고고학적 발견과 유적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유적지들은 성묘교회, 정원무덤, AD 1세기의 굴림돌 무덤, 여호하난 유적, 알렉사메노의 그라피토, 므깃도 모자이크 비문, 나사렛 비문 등이다. 정원무덤을 제외한 다른 모든 발견들은 종합해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었음을 가리키는 간접적인 증거들을 제공한다. 성묘교회와 나사렛 비문은 부활 이야기와 더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결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들은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묘교회, 예수 무덤의 특성, 기타 유물 등이 부활 이야기의 이해와 개연성을 풍부하게 하는 간접적인 증거라고 강조한다. 이 논문은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은 고고학뿐만이 아니라, 신약성경에 기록된 목격자들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으며, 고고학적 발견들은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고, 부활의 합리성을 옹호하며, 성경 기록의 세부 사항을 확인해주고, 기독교인들을 격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증거만으로는 회의론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부활을 받아들이는 열쇠는 믿음임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고린도전서 15:14~19절에 요약된 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앞에서 논의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크리스천들에게 예수 부활의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강화해줄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4~19)
논문 전문 바로가기 : https://answersresearchjournal.org/resurrection-archaeological-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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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RJ 2021 Volume 14: pp. 125–157,
요약 및 교정 : ChatGPT & 미디어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