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Headlines
2004-06-03

루터교도들은 코페르니쿠스를 도왔다.

 (Lutherans Helped Copernicus)


      우리가 '알고(know)' 있는 것들이 진실(true)인지를 재검토해보게 될 때, 진실은 그 반대와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그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를 공전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서 교회를 위협했던 용감한 과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너무도 두려워해서 죽을 때에도 그의 ‘이단적인(heretical)‘ 견해를 출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시리즈물 ‘우주(Cosmos)’ 에서 칼 세이건(Carl Sagan)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는 루터교도들에 의해서 조롱당했다는 도시의 전설(urban legend)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자이며, 역사가인 오웬 징거리치(Owen Gingerich)는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역사 기록을 바르게 정립하는데 바쳤다. 징거리치는 'An Annotated Census of Copernicus’ De Revolutionibus” (08/15/2002 headline을 보라) 라는 제목의 이전 책에서 30년 동안의 프로젝트 결과를 출판하였다. 그 책은 알려진 원본들에 대한 각각의 복사본들을 게재하였고, 코페르니쿠스의 책(‘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이 전 유럽에 걸쳐 배포되었고 토론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꼼꼼하게 그 당시의 독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수백의 주변 노트들을 분석하였다. 이제 징거리치는 그의 결과물들을 새로운 책, 'The Book Nobody Read : Chasing the Revolutions of Nicolaus Copernicus” (Walker, New York, 2004) 으로 출판함으로서 더 재미있고 접근 가능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책은 2004. 4. 28일자 사이언스(Science)1 지에서 피터 바커(Peter Barker)에 의해 리뷰되었다. ('De Revolutionibus 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the book nobody read)' 이었다는 아더 코스틀러(Arthur Koestler)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징거리치는 책의 제목을 코스틀러의 주장으로부터 취했다). 여기에 바커의 리뷰에서 나타난 도시 전설의 몇 가지 수정사항들을 제시한다.


●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원고를 젊은 루터교인이며, 수학자인 레티쿠스(Georg Joachim Rheticus)에게 위탁했다.

● 책은 루터교인인 인쇄업자에 의해서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출판되었다.

● 한 루터교 성직자는 책에 사인 없이 서문을 추가했다.

● 프러시아의 군주는 루터교도였고, ‘De Revolutionibus’를 출판했던 사회에서 후원자였다.

● ”나이 많은 가톨릭교도가 교황에게 헌정된 그의 천문학 책을 일단의 개신교도들에게 위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커는 묻고 있다. ”뉘른베르크 인쇄업자들의 전문적 지식이 확실히 한 요인이었다. 아마도 코페르니쿠스는 지방의 주교(bishop)로부터 그가 보호되기 위해서 프러시아의 군주를 또한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가톨릭의 반대가 아마도 지역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루터교의 수학자들은 열망하여 그 책을 얻었고, 그것을 공부했고, 그것에 기록을 했고, 그들의 친구들에게 복사본들을 건네주었다. 많은 루터교도들은 아직도 고정된 지구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받아들였고, 감사해했다.

● 루터교도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는 그 책의 많은 복사본들을 소유했다. 바커는 말한다. 징거리치 연구에서 ‘매우 놀랄만한’ 점은, 브라헤는 그의 태양중심적인 대체 모델을 신사이며 여행가였던 폴 위치(Paul Wittich)로부터 얻었다는 것이다.

● ”프톨레미의 천문학은 그것이 주전원(epicycles)들에 과도한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 바커는 말한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전 후의 천문학자들은 단순한 하나의 주전원 계를 사용했는데, 가끔 코페르니쿠스 자신에 의해서 사용된 하나의 작은 주전원에 의해 증대되곤 했다.”

●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은 엄밀하게 말하면 태양중심설이 아니다. ”사실, 그의 계의 중심으로서 어떤 지점을 간주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꽤 어렵다.” 그 모델은 관측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수학적인 것이었다.

● 바커는 놀라움을 표하며 언급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상외의 발견은, 갈릴레오 사건의 여파로서 (Galileo biography을 보라),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정정하려는 교회의 시도는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징거리치의 평가에 의해서 재강조되는 점은, De Revolutionibus의 인쇄된 원본은 400에서 500권 사이였는데, 그의 조사(Census)에 의하면 이들 중 277권이 남아있는 것으로 살펴볼 때, 책이 실제로 파괴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밖에서, 심지어 가톨릭의 국가에서도 교회의 명령으로 수정된 복사본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커는 우주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던 획기적인 책에 관한 진실을 밝혀보기 위한 징거리치의 ”놀라운 추적”을 칭찬하고 있다. ”그의 서술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초기 현대 과학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일으킬 것이다.” 


1Peter Barker, 'A History Recorded in the Margins,” Science Vol 304, Issue 5671, 686, 30 April 2004, [DOI: 10.1126/science.1097380].

 --------------------------------------------------------------------------------------

 

징거리치 박사는 잘못 알려졌던 도시 전설에 대한 이러한 정정을 해줌으로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16세기 과학적 전진의 적대세력은 루터교인도 아니고, 가톨릭교인도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말하자면, 루터(Luther)가 코페르니쿠스를 바보(fool)라고 불렀다는 도시의 전설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루터가 말했던 것들, 또는 의미했던 것들은 한참 후까지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미의 전달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도날드 코브에 의한 Leadership U 분석을 보라.


De Revolutionibus이 현대의 코페르니쿠스 원리를 이끌어 냈는지는 또 하나의 의문이다. 최근까지, 천문학자들은 지구는 우주의 물질 체계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외삽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De Revolutionibus 만큼 혁명적일 수 있는 새로운 책에 의해서 도전받고 있다. 그 책은 곤잘레스(Gonzalez)와 리챠드(Richards) (see website)에 의해서 쓰여진 ‘특별한 행성(The Privileged Planet)‘ 이다. 우리는 이것이 웹 사이트의 대화방 등에서 어떠한 주변 노트를 얻게 될 지, 또는 다윈의 교회가 그 책을 무시하는데 성공할 것인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afaris.com/crev0404.htm 

출처 - CEH, 2004. 4. 30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030

참고 :

Henry M. Morris
2004-04-28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잠언 30:4).

 

어떤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독생자의 이름을 짓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흥미진진한 이름짓기 가운데서도 선지자 아굴(Agur)(잠언 30:1)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하던 이름은 물과 바람과 그리고 땅의 모든 끝을 정하신 바로 그 우주창조의 주재자의 아들의 이름이었다.

실제로는 그도 어쩌면 하나님이 아들을 가졌다는 것을 처음 알고 상당히 놀랬을는지 모른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그로서는 모세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물론, 신명기 6:4에 담긴 위대한 단정의 말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를 여러 번 인용하였을 것이기에 하는 추측이다. 어떻게 창조의 하나님이 아들을 가진다는 말씀인가? 하고.

하나님께서 아굴을 시켜 솔로몬 왕의 잠언 중 매혹적으로 독특한 제 30장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말고는 그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지혜로운 사람인 것은 분명하였다. 그리고 아마 솔로몬이 잘 알고 신임하였던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다윗과도 아는 사이였었던 것 같다. 최소한 다윗의 시편(詩片)들에 친숙하였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2장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이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2:7, 8).

아굴도 다윗의 미래의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서 아마 다윗이나 솔로몬한테서 들었던 것 같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사무엘하 7:13, 14; 또한 역대상 17:13). 이 수수께끼 같은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 같으나, 그 영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솔로몬을 넘어 다윗의 보다 더 위대한 후손으로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 분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신약(히브리서 1:5)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고 우리는 이제야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특정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굴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물었던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또한 그는 모세의 책에서 이미 하나님을 일컫는 여러 이름들에 - 특히 '하나님 (Elohim)'과 '주님(여호와)' 그리고 '주님(Adonai)' - 틀림없이 친숙하였으면서도 새삼 창조주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있어야만 했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아굴은 물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The Name of the Father)

비록 아굴의 특정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구약성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새 이름은 '아버지'보다 더 아래격인 호칭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아버지' 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아브(ab))가 구약성경에 500번이 넘게 보이지만, 저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브 (또는 아바(abba), 아브와 동일한 뜻의 아람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때때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예컨대, 예레미아 3:19에서 미래의 왕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시면서) 하셨다. 언젠가 한 번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시고 노예로부터 건지셨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아브가 되신다는 것을 환기시킨 적이 있다 (신명기 32:6). 그러나 구약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가 있다면 -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언급을 제외하고 (사무엘하 7:14; 역대상 17:13) - 이것이 아마도 아굴이 자기 생전에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예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아들은 드디어 이 세상에 나타나시자, 상황은 온전히 변하고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그는 당신의 재판과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의로우신 아버지여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요한복음 17:1, 6, 11, 25, 26) 하셨다. 그 이름은 명백히 '우리 아버지'였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특별히 기도 서두를 '우리 아버지'로 시작할 것을 일러 주셨다. (마태복음 6:9).

'아버지' (희랍어로는 pater)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약 500번 보이는데, 인간의 아버지들은 물론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 모두가 빈번히 사용하였다. 한 번은 긴급한 상황에서 주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드릴 때, "아바 아버지여(Abba, Father)" (마가복음 14:36)하고 불렀다. 이 기도는 그의 체포가 있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다. 비록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 '아바' 라고 불렀던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神格의 제일 깊숙한 자리에 앉아 계실 당신의 아버지를 부르는데 더없이 친밀한 호칭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진 우리들까지도 - 상황이 허락할 때면 - 우리들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똑같이 그 경이로운 호칭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5).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6).

아마 이것으로서 세상 끝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새 이름에 관한 아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이제는 아굴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무어라 불러야 합니까?"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불려지게 될 것이다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의 선지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서 보내셨던 때가 솔로몬과 아굴이 세상을 떠나고 근근 300년이 지난 후였다. 그 때에 하나님이 놀라운 선지자 이사야를 시켜 저 두 가지 위대한 예언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 예언이라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성탄절 때마다 두고두고 낭송하는 말씀이다. 즉,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임마누엘'은 물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곧 태어날 처녀의 아들은 다름 아닌 인간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다음 얼마 후에 하나님은 이 아들의 이름에 관해서 놀라운 예언을 보내주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기억하라] 되었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얼마나 경이로운 이름인가! 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이름을 가진 분에게 이 이름들처럼 합당한 이름들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이 분이야말로 약속되기를 유다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사람이면서도 또한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우리를 닮은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이시다! 이 어찌 경이롭다 하지 않으리오.

그의 이름을 '기묘자 (the Wonderful)' 라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리 없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에 '기적적'이라는 뜻이 있다. 기적적인 개념과 처녀 몸에서의 탄생을 빼고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결코 육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인간의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을 것이기에 유일하게 거룩한 하나님이 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이름은 진정 '기묘자'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인류의 위대한 모사로서 타락한 인간성을 되찾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완벽하게 전해줄 수 있는 분임이 틀림없다. 인간-하나님이신 그가 마침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지만 무한히 지혜로운 뜻을 담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적들까지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한복음 7:46)하고 탄복하였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 예언의 뜻은 실질적으로 그 두 단어 - '기묘자 (Wonderful)'와 '모사 (Councillor)' - 를 합쳐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도 또한 맞는다. 그는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모든 주제들에 대한 '기적적인 조언자' 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기에, 어떤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해도 그는 결코 외면하든가 얼버무리지 않았다. 그분이야말로 하늘이 보내주신 가장 기묘한 참 상담자였기에, 모든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 임을 또한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그가 神格 중에서 (삼위일체 가운데서) 두 번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육화 이전의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 (빌립보서 2:6). 심지어 그는 스스로 해(害) 받음을 허락하신 다음에도 그는 죽음 그 자체를 정복하였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 - 또는 수많은 권위자들이 번역한 바를 따르면 '영원의 하나님' 이기도 하다. 그는 공간과 물질은 물론 시간의 창조자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로새서 1:16), 그리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 그리고 비록 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지만,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만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의 왕자 (The Prince of Peace)'의 자격이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성공적인 참 중보가 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5).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19) 세계에 참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로새서 1:20). 그러므로 "그는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이시다 (마태복음 5:9).

이 다중차원의 이름들이 어찌도 영광스러운지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인간이신 바로 이 분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아 23:6) 라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Thou Shalt Call His Name Jesus)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예언의 내용이 이루어질 시간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리아라는 천사 같은 유다의 처녀와 약혼 중에 있던 어느 소박한 목수한테 가브리엘 (Gabriel)천사를 보내셨다. 이 두 약혼자들은 천년 전에 살았던 다윗 왕의 후손들이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비록 임신 중이지만 여전히 청순한 처녀이고, 이사야의 위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룰 사명을 부여받았노라고 알렸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이 때보다도 먼저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내져서 비슷한 말씀을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31) 라고 전했다. 그런 다음 그는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라고 놀라운 진술을 부언하였다.

'예수 (Jesus)' 라는 이름은 이사야와 예레미아가 예언하였던 고매한 이름보다는 훨씬 단순한 이름 같이 보인다. 유대인들 중에서 이미 그 이름 -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아, 예수아 (Joshua, Isaiah, Hosea, Jeshua) - 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다 바로 그 이름의 변형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 모든 이름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이름이 단순히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리라" 또는 "우리의 구주 여호와" 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인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타락한 세상과 죄에 빠져 용서와 화평과 영생을 소망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의 총체적 전도사역을 내포한다.

아직도 남은 이름들이 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이름이 신약의 최초의 장에 언급되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태복음 1:16). 이를 보면 그는 예수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다.

즉, 그는 바로 그 '그리스도 (the Christ)'로서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 기다리던 '메시아(Messiah)' 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이름은 실질적인 직함으로서, 희랍어와 히브리어로서는 각각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육신을 입은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영원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의 영원하신 선지자이신 그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1, 14) 이 되어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세세무궁토록 선언하신다"(요한복음 1:18).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되신 그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브리서 7:25). 마침내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요한계시록 19:16). 그리고 그가 우리의 영원하신 왕으로서 돌아오실 때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요한계시록 11:15).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인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아직은 또 다른 이름이 하나 있다 - 말하자면, 세례명이라 할까 - 그 이름은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그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3)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일 뿐만 아니라, 주님 (Lord)이시다. 그의 부활이 있은 후, 베드로 사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36) 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그의 온전한 이름은 언필칭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그에게 봉사하고 그를 존경하려면 앞에 언급된 여러 가지 경이로운 이름들을 다 사용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그런데 그가 다시 오시는 날, 그를 명예롭게 받들어야 하는 이름이 또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하시고, 또 당신의 보혈로 되찾은 이 세상으로 언젠가는 권세와 영광 속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개선하시는 모습을 예언적인 환상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 받았었다. 그 때 그는 주님이 앞으로 오실 세상에서 불릴 경이로운 이름 세 가지를 들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요한계시록 19:11). 그는 지금도 우리들의 '충성된 대제사장'(히브리서 2:17) 되시고, '미쁘신 조물주' (베드로전서 4:19)가 되시며, 그리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요한계시록 3;14) 이다. 그의 영원한 이름 중의 하나는 충성되고 참되신 이 이시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포함되었다. 즉,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요한계시록 22:6), 그것은 그 말을 하시는 분이 영원히 신실하시고 참되신 이이시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13)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는 "태초의 창조하시는 이름"(요한복음 1:1-3)이었다. 그리고 "육신이 되어 우리한테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14)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원수를 이기고 우리 지구에 개선하실 때 다 이루심을 나타내는 장엄한 승리의 말씀이다.

그러고도 마지막 남은 이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한계시록 19:16)가 되심이다. 그 위대한 날에 전 우주는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이름을 주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9-11).

아굴이여, 여기 그대에게 줄 대답이 있소.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은 믿을 수 없을 만치 위대하여, 그 이름을 다 일컫는 데는 필설이 부족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Wonderful)' 말고도 우리가 그의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이름들이며, 또한 틀림없이 영원의 시간 중에서 더 많은 이름들을 가지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일러준 그의 인간의 이름을 특별히 사랑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Lord Jesus Christ)' 이시다. 그리고 그 많은 그의 이름들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하나님의 책을 마치는 데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아들이 하신 이 아름다운 말씀으로 마감하는 것이 적절하였으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0, 21).

 

*Henry M. Morris

You may use the print links at the top and bottom of this page to print out copies of this tract for personal use or evangelical purposes. They may not be resold. If you would like to purchase paperback booklets of this tract, use our online store.


Other Booklets of Interest :

The Amazing Prophetic Claims of the Lord Jesus Christ - by Henry M. Morris, Ph.D.

The Bible Is a Textbook of Science - by Henry M. Morris, Ph.D.

Christ Our Life - by Henry M. Morris, Ph.D.

Creation & Composition: The Apollo Mission - by Duane T. Gish, Ph.D.

Creation and Its Critics - by Henry M. Morris, Ph.D.

A Creationist's Defense of the King James Bible - by Henry M. Morris, Ph.D.

His Son's Name - by Henry M. Morris, Ph.D.

The Gifts of God - by Henry M. Morris, Ph.D.

God's Only Begotten Son - by Henry M. Morris, Ph.D.

Impact of the Empty Tomb - by Henry M. Morris, Ph.D.

The Resurrection Of Christ - by Henry M. Morris, Ph.D.

The Scientific Case Against Evolution - by Henry M. Morris, Ph.D.

Smile ... The Future's On Its Way - by C. J. Horn

When They Saw the Star - by Henry M. Morris, Ph.D.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bible/tracts/hissonsname.html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40

참고 : 2942|2797|2970|2425|2982|2549|666|1430|886|887

John D. Morris
2004-04-27

예수님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는 발견된 적이 있는가?


     회의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적이 없다는 점을 가끔 지적하곤 한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최근의 발견이 어쩌면 그들의 말을 잠재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부차적인 문제가 있는데, 우선은 이 문제부터 먼저 고려하여야 할 것 같다. 그와 같은 유물이나 비명 따위를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인간 예수는 어느 정부의 특출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거의 무일푼의 유랑 설교자로서, 결국에는 보통의 무법자의 죽음을 죽었던 것이다. 로마 사람들이 그의 비명이나 동상이라도 세워 기록할 이유가 있었을까? 확실히 없었다.

실제로 그 시대 전반에 걸친 유대의 고고학적 유물들은 오히려 희박한 편이다. 로마 제국의 도시들과, 헤롯(Herod) 왕, 빌라도(Pilate) 총독, 그리고 베스도(Festus) 같은 지도자들에 관한 적절한 비명이 기록된 거대하고 광범한 유물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가야바(Caiaphas)와 같은 영향력이 있는 유대 인사들의 유물도 역시 남아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삶에 관한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후 70년대에 예루살렘은 티투스 로마황제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대로 남아있던 유물들도 현대의 번창하는 도시건축으로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모든 조건들은 유물보전에 친화적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에 관한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전무한 사실은 풍부한 그의 역사적 증거와는 대조적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기록한지 얼마 후, 뒤이어진 바울의 편지들이 그 때에 살던 사람들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복사되고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리스도/메시아로 불려졌던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James)라는 사람의 사형집행 사건을 포함하여 중요한 민사사건들에 관해 언급했는데, 그의 언급에서 그는 틀림없이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야고보는 초기교회의 지도자였으며,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는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새로 발견된 유물은 중간 크기의 상자로서, 죽은 자의 살이 완전히 삭은 후 인골만을 추려서 영구 매장하는 납골궤(ossuary, 뼈단지)였다. 이 매장제도는 BC 20년대에서부터 AD 7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시행되었다. 그 궤는 그 지방에 흔한 부드러운 백악질의 석회석으로 되어있었다. 그 내용물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궤의 한 쪽 측면에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 글은 당시의 아람어로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아우 (James, son of Joseph, brother of Jesus)' 라고 되어있었다. 전자현미경 스캐닝을 포함하여 세밀한 분석조사 결과 그 각명(刻銘)은 진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궤의 표면에 고루 녹슨 녹청은 각인된 글자들의 내면까지 덮고 있었다. 고고학적 유물평가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앙드레 러맬 박사 (Dr. Andre Lemaire)는, '이 고대유물이 가짜가 아닌 진품이라는 나의 판단을 보고하게 되어 나는 기쁘다' 라고 말했다.

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습관은 그 지역에서는 보통이었다. 그러나 형제가 유명인사가 아닌 이상, 죽은 자의 형제의 이름은 사용하는 예는 드물었다. 기록되어 있는 세 사람의 관계가 성경에 기록된 관계와 꼭 들어맞게 되어있는 것을 보면, 납골궤에 수장된 주인공은 성경의 야고보일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고 하겠다.

납골궤는 물론 다른 고고학적 유물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그 사건들이 참이라는 우리의 확신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크리스천의 믿음은 역사적 사실들 위에 근거한 합리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성경은 온전히 정확한 기록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newsletters/drjohn/drjohndec02.html 

출처 - ICR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48

참고 :

Henry M. Morris
2003-10-09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때 

(When God Became Man)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요한복음 1:1,3,14).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는지, 그 육화(肉化)의 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유한자의 이해력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교리를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기뻐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그 교리를 믿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요한일서 4:3) 라고 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한복음 8:24) 하고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확실한 많은 증거로…”(사도행전 1:3), 특히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셨다가 다시 몸이 살아나신 증거로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도행전 17:31) 하셨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명의 창조주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었다. 석가모니도 죽었다. 마호메트도 죽었다. 그리고 공자와 플라톤은 물론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위인이나 성자들도 다 죽었다. 그러나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베드로전서 3:18) '육화의 말씀'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요한계시록 1:18).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7:25).

 

창조주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만물이 다 그[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고”(골로새서 1:16) 지어졌다. 그가 ”육신으로 태어났을 때” 스스로가 그 안에 거하실 바로 그 육신을 지으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육신의 탄생은 인간 생식의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육신의 탄생일 수 없었다. 그것은 영의 본래적인 죄, 또는 육체나 정신의 원초적이며 유전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은 흠집이 전혀 없는 육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육체이어야만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오래 전에 아름다운 에덴동산에다 지으셨던 최초의 사람의 육신과 같이 완전무결하야만 하였다. 그는 사실상 ”마지막 아담” (고린도전서 15:45) 으로 불려질 것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 아담”이 지어졌던 것처럼 지어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초의 아담과 최후의 아담과의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최초의 아담은 지어질 때에 이미 성숙한 남자로 창조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담은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어야만”(히브리서 2:17) 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잉태에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은 … 자로되 죄는 없으신” (히브리서 4:15) 이었다. 특히 그의 피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이…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19) 이어야만 하였다. 그것은 그 피가 ”하나님께 드린 흠 없는 피어야 …”만 하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14).

그와 같이 해서 두 번째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어 처녀의 자궁 안에 착상시켜야만 하였다. 이 사실은 최초의 아담이 세상에 죄와 죽음을 초래케 한 이후 제일 먼저 하신 바로 그 약속의 내용이다.  ”여자와…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노라 … ”(창세기 3:15)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거짓말로 하와를 꾀어 죄로 인도한 사탄에게 주는 약속이었다. 두 번째 아담의 경이로운 육신은 모든 인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씨에서 자라지도 않을 것이며, 여자의 난소에서 자라지도 않을 것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어쩔 수 없이 죄와 돌연변이를 수반하는 태아가 생기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별히 창조주 당신이 손수 지으시는 씨이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씨는 처녀의 자궁에 착상되야만 했다. 그 곳은 당장에 그의 '성소(tabernacle)'가 되어 거기서부터 자신의 행성인 이 지구에 오셔서 당신이 구원하려는 인간들과 함께 33년 동안 살았던 것이다.

”내가 왔나이다 …” 하고 그는 나중에 다윗의 입을 통하여 약속한 것이었다 (시편 40:7). 이사야를 통하여서 그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리고 그 아기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이사야 7:14, 9:6)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중에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선지자는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예레미아 31:22) 라고 하였다.

선택된 여인 안에서 '새 일이' '창조될' 것이라는 말을 주목함이 마땅하다. 때가 이르매 천사가 마리아에게 확언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하였다. 그런 다음 ”세상에 임하실 때에…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브리서 10:5). 무엇보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예비하였도다(희랍어 katartizo)” 라는 똑 같은 말을 사용한 점으로서, 그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히브리서 11:3)고 증언하고 세계를 지으신 바로 그 살아계신 말씀이 그 자신의 인간의 육신도 지은 것을 인정할 때에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그 조그만 자궁 안에 는 그 자신이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정보뿐만 아니라, 창조와 보존과 전 피조물의 구속의 정보까지도 담겨있었다. 그것은 창조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의 것이었으며, 또 곧 구속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배(倍)로 그의 것이 될 것이었다.

 

창조주는 언제 사람이 되었는가?

창조주의 육화를 12월 25일로 정하고 그날에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축하하는 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인 관례로 되어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집단들이 다양한 날들을 기념하기도 하고, 여러 작가들은 제 각기 다른 날들━예컨대, 정월의 어느 날이든가, 또는 춘삼월이나 시월의 어느 날을━권장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전혀 기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12월 25일을 예수탄생의 날로 정한 것이 4 세기 경의 어느 때부터였다. 사실상 크리스마스의 행사는 근본적으로 고대 로마의 농신제(農神祭; 12/17일 추수감사제)나, 또는 한 해 중에서 밤 시간이 가장 긴 동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이교도들의 축제행사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명백한 사실은 그의 탄생일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제에 관한한 어느 누구도 독단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매우 흥미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던 날 밤, 목동들이 들에 나가서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고 하였다 (누가복음 2:8). 이 사실로 해서 그 때가 늦은 동짓달 어느 날일 가능성은 희박하고, 차라리 이른 가을 어느 날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의 탄생도 또한 가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기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특히 영국이나 서유럽에서는, 미가엘마스로 불리는 고대 크리스천의 축제일인 9월 29일을 축하하였다는 것은 의미 있게 볼만한 대목이다. 이 이름은 후대에 와서는 어떤 법정이 개정 중에 있는 가을의 어는 시기를 식별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미가엘마스(Michaelmas)” 라는 이름은 ”미가엘이 보내졌다”는 의미로서 ”크리스마스”의 뜻이 ”그리스도가 보내졌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가엘은 목동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언명하기 위하여 천국에서 보내진 ”여호와의 천사” (누가복음 2:9)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가엘마스의 축제는 이와 같이 해서 인간으로 탄생하는 예수를 환영하기 위하여 보내진 미가엘과 천사들의 내왕을 축하하려고 시작한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이 미가엘마스는 바벨론 포로 시절 이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을이면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기 위하여 축제를 벌이는 위대한 초막절보다 몇 날 앞서 벌어지던 축제였다. 초막절 때에는 이스라엘 가족들이 한 때나마 천막, 즉 '초막(tabernacle)'에서 지내는(dwell, 거하다) 습관이 있었다.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dwelt)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거하다 (dwell)' 라는 뜻을 담은 통상적인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글자 그대로 말씀이 (즉, 창조주가) 한 때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다' 라는 말을 'tabernacled' 이라고 명사를 과거형 동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즐거운 초막 축제에 맞게 적절한 때에 이 세계에 오시기라도 한 것 같았다. 미가엘과 천사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온 백성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라고 노래한 것이 그것을 말한다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무리 영광된 일이라고 하여도, 이 탄생일이 그의 육화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는 아홉 달 전에 이미 ”사람들의 형체와 같이 되어”(빌립보 2:7) 있었다. 그 때는 그가 당신 스스로의 육신을 지으시고 마리아의 자궁 안에 당신의 거처를 정하신 시점이다. 그 때가 ”말씀이 육신이 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크리스마스' (즉, 그리스도가 보내진 때), 즉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좌로부터 보내져서 육신의 '초막' 안에 들어오게 되던 때가 미가엘과 천사들이 그의 탄생을 선언하기 위하여 보내졌던 '미가엘마스'보다 아홉 달이 앞선 때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시 12월 25일의 날짜를 다시 돌이켜 생각하게 된다! 두 날 짜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좌에서 내려오셔서 마리아의 자궁 속에 착상된 날과 미가엘과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날과의)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278 일의 간격이 있다. 이 기간이야말로 인간의 태아 성장에 있어서 이상적인 기간이다.

이 추론의 정확성 여부 (그리스도의 진짜 탄생일이 언젠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를 별개 문제로 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적적인 잉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한 해 중에서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의 시기를 그가 이 세계에 오시는 시점으로 정한 것은 너무도 적절하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빛' (요한복음 8:12)으로 오셔서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시기”(디모데후서 1:10)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기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飮酒方歌나 이교도의 貪食이 아닌)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크리스마스의 놀라운 선물을 기억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한일서 4:9).

 

왜 창조주는 인간이 되었는가?

'왜 (Why)?' 로 시작되는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은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나 대답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들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답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 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 (디모데전서 1:15).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의 최초의 오심은 뒤이어 희생의 죽음과 육신의 부활, 그리고 영광의 승천으로써 그의 두 번째의 오심에 관한 그의 약속을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가 최초로 오셔서 계셨던 잠간 동안, 그는 우리들 속에서 '거하셨다 (tabernacled).' 그의 두 번째의 오심에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요한계시록 21:3, 4).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영광스럽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구주를 거부하고 또는 무시한다는 사실은 슬프기 한량없다. 그들은 지금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와 축복을 잃어버렸을 뿐만이 아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그를 맞이하기 전에는, 그들은 지금 다가오고 있는 영광의 빛으로 싸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와는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246.htm 

출처 - ICR, Impact No. 246, 1993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38

참고 :

Don DeYoung
2003-10-08

베들레헴의 별은 무엇이었을까?

(What was the Star of Bethlehem?)


     크리스마스 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세 가지가 언급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 별은 왕들의 탄생과 같이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일들이 발생할 때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혜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혜성의 관측 기록은 주의 탄생과 합치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헬리 혜성은 기원 전 11년에 있었고, 첫 크리스마스는 BC 5~7년 사이에 일어났다.

다른 학자들은 베들레헴의 별은 밤 하늘에 일어났던 행성들의 근접 현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행성들은 태양의 둘레를 각각의 거리에서 다른 속도로 공전하기 때문에 행성들은 때때로 서로 근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여러 행성들이 단일한 광원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행성 직렬은 다소 자주 있으며 그렇게 드문 편이 아니다. 기원전 6년에 목성과 토성의 근접이 있었지만, 훨씬 전인 기원전 66 년에 훨씬 더 가까운 근접현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별을 설명하기 위해 폭발하는 별, 또는 초신성(supernova)이 제안되었다. 어떤 별들은 불안정하여 밝은 빛을 내며 폭발한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기록에는 예수님이 탄생하던 시기에 초신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베들레헴 별에 대한 위 세 가지 설명 모두 다 민수기 24장 17절에 예언되었고,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12절까지 기록된 본래 이야기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두 사건은 특별히 흥미가 있다.

첫째는 본문에 따르면 동방박사들만 그 별을 보았다는 것이다. 혜성의 출현이나, 행성 직렬, 혹은 초신성이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 별이 동방박사들 앞서 갔으며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그들을 인도했다는 것이다. 이 거리는 약 10km (6마일)이며 북쪽에서 남쪽 방향이다. 그렇지만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는 지구의 자전으로 동에서 서로 움직이므로 별이 어떤 특별한 집으로 길을 인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론은 베들레헴의 별은 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시적인 초자연적인 빛이었다. 첫 크리스마스는 기적의 시간이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채웠던 영광 (출애굽기 40:34-38), 성전을 채웠던 영광(열왕기상 8:11)과 사도 바울을 비췄던 빛(사도행전 9:3)처럼 종종 초자연적인 빛으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현전에 대한 그러한 가시적인 징조는 세키나 영광(Skekinah Glory), 혹은 하나님의 임재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별한 광채는 신성의 위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첫 크리스마스의 위대한 신비는 특별한 별의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세주께로 인도하는 별을 따라가도록 동방박사들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똑같은 초대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참조 : The Star of Bethlehem : A Supernatural Sign in the Heave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star-of-bethlehe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2/1224star.asp 

출처 - AIG, 24 December 200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924

참고 : 629|630

관리자
2002-06-14

노아 방주에 탄 정결한 짐승들의 수는 성경의 오류인가?

김홍석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창 7:2-3)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창 7:8-9)


  자주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구절은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정결한 짐승들의 수에 관한 것이다. 히브리 성서 맛소라 텍스트는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보여준다. 창 7:2절에서 정결한 짐승은 “쉬브아 쉬브아 이쉬 이솨”(일곱 일곱 수 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수컷 일곱 마리 암컷 일곱 마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쌍이다. 부정한 것은 “쉐나임 이쉬 이솨”(둘 수 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수컷과 암컷(을 합하여) 두 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한 쌍이다. 또한 창 7:3절에서 공중의 새도 “쉬브아 쉬브아 자카르 네케바”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수컷 일곱 마리 암컷 일곱 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곱 쌍이다.

그렇다면 창 7:8절에서 노아 방주로 들어갈 때 둘씩 들어갔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 7:8절에서 “암수 둘씩”이란 “쉐나임 쉐나임”(둘 둘) 나아와서 “자카르 네케바”(수 암)가 방주로 들어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암수 둘씩(two and two)이란 의미는 노아에게 나아오는 모습과 방주로 들어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한 무신론자의 주장   <James Patrick Holding의 글>


한 무신론자는 노아 방주에 7쌍의 암수가 태워진 것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고 있었다 : 

“암수 7쌍을 취하는 이러한 생각은 여호와가 축산업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농부나 목장주도 소, 양, 말 등의 동물을 키우는 사업을 할 때 암수의 숫자를 똑같이 구매하지 않는다. 1 마리의 숫소와 13 마리의 암소, 또는 1 마리의 숫양과 13 마리의 암양을 구매하는 것이, 암수 각각 7 마리씩 구매하는 것보다 초기 투자 시에 매우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1 마리의 수컷이 13 마리의 암컷과 교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러한 이야기가 쓰여졌다는 것은 그 저자가 동물들의 번식에 대해 빈약한 지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한 번에 많은 새끼들을 낳는다. 코끼리를 생각해 보자. 아프리카 코끼리는 14살 정도에 번식할 수 있는 연령이 된다. 코끼리의 임신 기간은 평균 670일 이다. 반면에 인도코끼리들은 좀 더 일찍 성숙하고 좀 더 짧은 임신기간을 갖는다. 그래서 한 쌍의 코끼리가 25살의 나이에 4마리의 자손을 가졌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코끼리의 개체 수는 100년 동안에 줄잡아 4번이나 2배가 될 수 있다(새끼들이 젖을 뗀 후, 부모 세대들이 곧 죽었다할지라도). 개체 수가 2배로 되는 것이 22번 일어나면 800만을 넘어선다. 이 숫자는 단지 550년(22×25)이면 도달될 수 있는 숫자이다.” 

그리고 방주에 수컷을 한 마리만 태우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을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다.


또 다른 성경비판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의 인구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바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에서, 바로는 모든 신민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 아기를 낳으면 죽이고, 여자여든 살려두라고 명령한다(출 1:22). 이것은 인구수를 줄일 수 없는 멍청한 계획이다. 왜냐하면 인구성장률은 임신이 불가능한 남자의 수가 아니라, (그 그룹에 임신을 시킬 수 있는 적어도 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임신이 가능한 여자들의 수에 의존한다. 바로는 그 당시에 태어난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데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남아 성숙해진 여자들은 이미 살아있었던 많은 나이든 남자들과 민족의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서 기꺼이 그들의 의무를 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든 남성이 ”이 사랑스런 여인은 너무 젊어서 아내로 맞이하기에는 부끄럽소“ 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바로가 약간의 상식을 가졌었다면, 또는 이 허풍적인 이야기를 지어낸 작가가 약간의 상식을 가졌었더라면, 그 이야기는 바로가 히브리 여인들에서 태어난 모든 여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었다고 썼을 것이다.” 

의견을 구했던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말 바보스러운 말이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바로가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있는가? 그리고 바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본 후에도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남자들은 무기를 잡고 전쟁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노예로서 많은 일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이 우둔했다’ 라고 말하는 것 외에도 연대기적 속물근성이 비판론자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다. 오! 바로는 여자들이 태어나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여자들이 인구성장률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인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3

대표전화 02-419-6465  /  팩스 02-451-0130  /  desk@creation.kr

고유번호 : 219-82-00916             Copyright ⓒ 한국창조과학회

상호명 : (주)창조과학미디어  /  대표자 : 박영민

사업자번호 : 120-87-70892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21-서울종로-1605 호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5

대표전화 : 02-419-6484

개인정보책임자 : 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