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사건은 홍수 후 불과 100여년 후인데,
건설하는 데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가?
고대에는 많은 자녀들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노아는 세 아들과 자부로부터 16명의 손자를 두었다. 손자만 16명이므로 손녀도 16명으로 보면 한 부부가 평균 10.7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후부터 한 쌍이 대략 12명의 자녀(6명의 아들과 6명의 딸)를 두었다고 하면, 그리고 셈, 함, 야벳서부터 5세대 후라면 얼마가 될까? 방주에서 나온 후 1세대(노아의 손주들)는 32명(16쌍), 2세대는 192명(96쌍), 3세대는 1,152명(576쌍), 4세대는 6,912명(3,456쌍), 5세대는 41,472명이 될 것이다.
바벨탑을 건조하는 시기는 홍수 이후 대략 100 여년이 지난 시기이므로 4세대 정도가 흘렀을 것으로 본다면, 수천 명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들도 아직 살아있을 것이므로, 바벨탑을 건설하기에 충분한 숫자였을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 3:36 절에는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셈의 손자인 가이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만약 한 세대가 빠졌다면, 그 숫자는 더욱 많았을 것이다. [보완설명] 벨렉의 시대에 땅이 나뉘어졌다는 기록을 통해 이 때에 바벨탑 사건이 일어났던 것으로 본다. 하지만, 벨렉은 홍수 후 100여년 후에 태어나서 239세를 살았기 때문에,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대략 홍수 이후 100여년부터 330여년까지의 기간 내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점에 따라 인구의 숫자는 위의 계산보다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 참조 : Was the Tower of Babel Dispersion a Real Event?
https://answersingenesis.org/tower-of-babel/was-the-dispersion-at-babel-a-real-event/
Babel: More Historical Confirmation of the Bible
https://apologeticspress.org/babel-more-historical-confirmation-of-the-bible-5498/
므두셀라는 어떻게 969살 까지 살았나?
창세기 전반부 기록의 가장 놀랄만한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노아홍수 이전의 사람들 수명에 관하여 거침없이 쓰여졌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 창세기가 최근에 쓰여졌다면 여기에 몇 마디 설명을 추가했던지, 아니면 경이로운 표현들을 섞어가며 써나갔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나중 세대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등의 설명조차 없이 이러한 부분들을 단순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써내려 갔다.
창세기 5장은 첫 인간 아담부터 노아까지 홍수 이전의 족장들의 계보를 단순하게 보여준다. 이들이 탄생했을 때의 나이와 죽었을 때의 나이가 순서대로 적혀있다. 아담은 930세까지,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으며, 9명의 홍수 이전의 족자의 평균나이는(죽지 않은 에녹을 제외하면) 912세다. 이 나이들은 분명히 “년”의 개념으로 쓰여졌으며, “달”의 개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마할랄렐의 경우 65세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는 달의 개념으로 똑같이 적용하면 6세 이전에 아들을 낳게 되는 더 괴상한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홍수 이후에 노아가 950살에 죽은 것과 데라가 205세에 죽을 때까지 수명이 단계적으로 천천히 감소하여다는 것을 보여준다.
분명히 홍수의 기간에 인간 수명이 단계적으로 감소하는 영향을 주는 어떠한 사건이 일어났었음에 틀림없다. 확실치 않더라도 적어도 과학과 성경 모두에게 만족할 만한 암시가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먼저 나누어보자. 오늘날 어느 과학자도 과연 무엇이 죽음을 일으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이 왜 100년 이하 밖에 살지 못하는지 알지 못한다. 생명이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하여는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단지 과학자는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를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자가 왜 죽는지 모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과학자는 아직까지도 왜 사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생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들이 아는 것은 단지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점을 나열하는 정도이지 “왜”에 대하여는 손도 대지 못한다. 순서적으로 왜 사는 것을 알아야 왜 죽는지 접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성경에서는 원래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벌로서만 죽음이 왔다고 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로마서 5:12). 현대 수명을 연구하는 학문에 의한 놀랄만한 사실은 어떤 사람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것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이를 먹는다”는 말과 “늙는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과 관계없이 시간이 지나감을 의미한다. 반면에 “늙는다”는 의미는 한마디로 노화되는 것이다.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가 희거나 빠지고, 아픈 곳이 많아지고 이런 등등의 것을 늙는다고 말할 수 있다.
노화에 대하여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가장 확실한 증거는 체내돌연변이설이다. 체내돌연변이는 체내 세포구조 안에 갑작스럽고 불규칙한 변화를 말한다. 거의 모든 돌연변이는 해로우며, 여러 기관과 조직세포에 점차적으로 누적된다. 이는 어쩔 수없이 신체 효율을 감소시키고 신체 성분들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또한 지금의 여러 환경요소가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방사능인데, 이는 태양과 다른 방사능 근원지로부터 온다. 생식세포는 체내세포보다 훨씬 잘 보호되지만 방사능은 생식세포 안에서도 유전돌연변이를 일으킨다. 이 유전돌연변이는 항상 해로우며, 개인뿐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체내돌연변이와 유전돌연변이 모두는 노화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영향을 주지만 이들이 가장 넓게 수용되고 있는 원인으로 꼽힌다. 노아 홍수 이후에 인류는 8명으로 줄어들면서, 유전자 풀이 줄어드는, 유전적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여기에 일어난 돌연변이들은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노아홍수 이전에 “궁창 위의 물”(창세기 1:7)이 상부 대기층에 투명한 수증기 층으로 있었다. 이것은 훌륭한 “그린하우스 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온화하고, 온순한 기후를 유지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지구 밖에서 오는 치명적인 방사능을 아주 효과적으로 여과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노아홍수 이전에 환경 방사능은 현재보다 훨씬 적었고, 홍수 이전 사람들의 긴 수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 궁창 위의 물이 홍수동안에 모두 쏟아졌다고 했다. 그 훌륭한 기능은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홍수 후에 일어난 갑자기 변한 기후와 궁창 위의 물이 사라진 지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수명감소를 일으켰을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도 성경에 기록된 홍수 후에 수명이 단계적으로 감소하였다는 것에 의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참조 : 아담은 정말 930년을 살았는가? : 사람 수명의 감소곡선은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가리킨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29&bmode=view
노아 홍수 이전 사람들의 긴 수명에 관해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83&bmode=view
900년의 수명 : 홍수 이후 단축된 인간 수명의 원인은?
http://creation.kr/Genesis/?idx=1289068&bmode=view
노아의 아들로부터 백, 흑, 황인종이 생길 수 있나요?
미디어위원회
성경에 의하면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노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들과 자부들로부터 기인하며, 그 이전의 기원은 아담과 이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진화론자들도 여러 인종들이 각기 다른 기원을 지니지 않는다는 데에는 견해가 일치한다. 즉 그들이 다른 종류의 동물로부터 각기 진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일치된 입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도 동일한 고유의 집단으로부터 모든 인종이 유래하였다는 데에 관하여는 성서적 창조론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다.
오늘날 다양한 모습을 지닌 인종과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피부색깔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단 한가지 피부 색소만 존재한다. 즉 그것은 멜라닌 색소인 것이다. 약간의 멜라닌만을 만들어 낸다면 유럽계 백인을 의미하며 다량의 멜라닌을 만들어 낸다면 매우 검은 피부의 흑인이 될 것이다.【그림4-7 참조】
물론 이중에는 갈색 피부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른 피부의 색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짧은 기간 동안에 어떻게 다양한 피부색깔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가지 관찰을 해보자(여기서 피부색깔이라는 의미는 엄밀히 말해 하나의 피부색깔에서 나오는 다른 색조를 의미함이 더 정확하다).
피부색은 적어도 두개조(組)의 유전자로부터 지배받고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것을 A와 B로 부르고 여기에 대하여 열성인 유전자는 a 와 b로 부르기로 하자(이 경우 소문자는 소량의 멜라닌을 나타내는 유전자 암호이다). 그러므로 상호 결혼하여 오직 검은 피부의 2세만을 낳는 검은 피부의 사람은 AABB로 표시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백색 피부를 지닌 사람의 경우는 aabb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흑백혼혈(AaBb)인 경우에는 퍼닛구획법(punnet square)에 의하여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를 보면 놀랍게도 단지 한 세대동안에 완전한 백인으로부터 완전한 흑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범위를 망라한 피부색깔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지 특별한 유형의 중간 갈색피부를 지닌 양친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AABB를 지닌 자녀들은 피부에 전혀 밝은 색조가 없는 유전자를 지닌 완벽한 흑인이다. 만일 그들이 결혼하여 그들의 후손들이 다른 피부색깔을 지닌 사람들과는 전혀 결혼할 수 없는 지역으로 이주한다면, 그들의 모든 자녀들은 검은 피부일 것이다. 즉 완전한 흑인혈통이 될 것이다.
aabb의 사람들은 흰 피부이다. 만일 그들이 서로 결혼하여 다른 피부 색깔의 사람들과 서로 결혼할 수 없는 지역으로 이주한다면, 그들은 완전한 백인의 혈통이 될 것이다. 그들은 검게 되도록 하는 유전자 즉 다량의 멜라닌을 만들 수 있는 유전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두 사람의 중간 갈색피부를 지닌 양친으로부터, 모든 피부색깔뿐 아니라 영원히 피부색이 다른 인종들이 손쉽게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볼 수 있는 항상 중간 유색을 지닌 인종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도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aaBB 라든지 AAbb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더 이상 다른 인종의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항상 중간 갈색 피부의 후손을 낳는 일이 가능해진다.
만일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자유로이 서로 결혼하고 자연스럽게 결합하여 스스로 지켜왔던 종족간의 결속을 깨뜨린다면 모든 종류의 새로운 조합이 나타날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어떤 특정한 인종 내에서 종종 다른 인종과 결합된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목격이 된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때때로 납작코를 지닌 유럽인이나 매우 창백한 피부의 중국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특징들을 연구하는 유전학자들은, 이제 각 인종간의 평균적인 유전적 차이라는 것은 각 인종간에 존재하는 상이점만큼 그렇게 큰 것이 아님을 잘 안다. 이것은 역시 각 인종이 오랜 기간 개별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것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참조 : 흑백 쌍둥이와 인류의 기원.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37&bmode=view
흑백 쌍둥이가 태어났다.
http://creation.kr/Variation/?idx=1290378&bmode=view
다른 피부색의 쌍둥이가 연속해서 태어났다.
http://creation.kr/Variation/?idx=1290401&bmode=view
인종의 분화와 다양성
http://creation.kr/Human/?idx=1291513&bmode=view
인류는 3 조상 가족으로부터 유래했음을 유전자 연구는 가리킨다.
http://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408&bmode=view
사람의 인종 간 차이에서 어떠한 진화도 발견되지 않았다.
http://creation.kr/Apes/?idx=1852078&bmode=view
어떻게 인종들이 달라지게 되었는가? :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의 기원
http://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08&bmode=view
애굽의 열 가지 재앙 2 : 여호와 대 애굽의 신들, 10 대 0
(The ten plagues of Egypt 2 : Yahweh 10, Egyptian deities 0)
Russell Grigg
출애굽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들을 애굽(이집트)에 보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출 3:8,19-20, 6:1,5)
2.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겠느냐’고 물은 바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출 5:2, 7:5, 8:22, 9:14)
3.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해서 (출6:7, 10:2)
4. 이 땅(earth)은 애굽 신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출 9:16,29, 11:7, 시 24:1)
5.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출12:12, 민33:4)
다음으로 이 재앙들이 애굽의 여러 신들에 대하여 어떻게 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재앙은 애굽인들이 생명의 근원으로 경배하고 있던 나일(Nile) 강 자체를 향하여 내려졌다. 이 재앙은 크눔(Khnum, 나일의 수호신), 하피(Hapi, 나일의 악령이며 다산의 신), 오시리스(Osiris, 지하세계의 신, 피로 변한 나일 강물은 그의 피로 여겨졌다) 등을 포함한 많은 강의 신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나일 강을 피(blood)로 변하게 하고, 물고기(Hathor와 Neith에 의해 보호받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던)들을 죽임으로, 모세는 애굽의 경배의 대상을 부끄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손으로만 생명이 유지됨을 보여 주었다.
두 번째 재앙인 무수한 수의 개구리(frog) 재앙은 풍요로운 곡식(나일의 물로부터 유래된)과 다산의 상징인 애굽의 여신 헤퀫(Heqet)을 공격했다. 헤퀫은 보통 개구리 머리를 가진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시스(Isis)는 또 다른 다산의 여신(fertility goddess)이었다. 개구리는 애굽인에게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굽의 여신들은 이들 생명의 상징들이 시체더미가 되어 썩어가는 것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애굽의 술객들도 그들의 술법으로 피와 개구리의 재앙을 흉내 내었다 (출7:22, 8:7). 이것은 속임수 일수도 있지만, 악마의 기적들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능력과 같지는 않지만, 사단도 기적들을 일으키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나님은 술객들이 이 두 가지 재앙을 흉내 내는 것은 허용하셨지만 되돌리는 것은 허락치 않으셨다.
세 번째 재앙인 땅의 티끌이 이(lice, or gnats or mosquitoes)로 변한 재앙은 땅의 모든 신(예로 Akhor)들에 임하였다.
이것과 네 번째 재앙인 파리(flies) 재앙은 케프리(Khepri) 라고 하는 그들이 좋아했던 쇠똥구리(scarab, dung beetle) 신에게도 임했다. 쇠똥을 땅에 묻는 쇠똥구리의 작업은 파리들이 쇠똥 속에서 자라나는 것을 막기 때문에, 파리 재앙은 쇠똥구리 신들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는 것처럼, 이 신은 또한 하늘을 가로 질러 태양을 굴리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섯 번째 재앙인 생축(livestock, 이것들은 식량, 우유, 의복 및 운송을 제공한다)들의 악질 재앙은, 신성한 황소신 아피스(Apis), 암소 모양의 어머니 여신으로 다산의 상징인 하토르(Hathor), 다산의 상징인 황소신 므네비스(Mnevis), 암소 임에도 머리에 뿔을 가지고 있는 신들의 여왕 이시스(Isis) 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였다. 그 신들은 모두 무능한 사기꾼(imposters)들임이 드러난 것이다.
여섯 번째 독종의 재앙은 하이크(Hike)나 토쓰(Thoth, Imhotep) 등과 같은 마술과 치료의 신들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술객들을 독종으로부터, 즉 여호와의 능력으로부터 막아줄 수 없었다.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재앙과,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바람에 불려온) 재앙은 곡물들을 파괴하였고, 날씨를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러 하늘 신들, 예를 들면 공기의 신인 슈(Shu), 습기의 신인 테프눗(Tefnut), 하늘의 신인 누트(Nut) 등과 같은 신들을 공격하였다. 곡물들의 손실은 초목, 농사, 수확의 신들, 예를 들어 겝(Geb), 셋(Seth) 등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은 애굽 최고의 신인 태양신 라(Ra), 또는 아몬-라(Amon-Ra, 철자를 Re로 쓰기도 함)를 공격하였는데, 그 신들은 땅에 빛과 따뜻함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또한 호러스(Horus), 세커(Seker), 케프리(Khepri), 무트(Mut), 누트(Nut) 등과 같은 다른 하늘 신들도 무기력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은 바로(Pharaoh)의 신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애굽인들은 바로를 생명을 주는 오시리스(Osiris) 신과 태양신의 화신(incarnation)으로 믿고 있었다. 바로의 임무는 신들의 은총을 유지하고, 질서의 여신 마아트(Ma'at)의 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의 죽음도 막지 못하는 무능한 자였음이 드러났다. 그의 아들은 ‘신성한 통치자’의 자리를 계승할 자였고, 애굽 땅의 어떤 아들과도 다른 아들이었다. 따라서 여호와만이 홀로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YHWH' or Johovah, the sacred name of the one true GOD (Exodus 3:14).
2. Cf. Revelation 13:14, 16:14, 19:20
3. The magicians could not copy the 3rd plague and said 'it is the finger of GOD[Elohim]'. They were not honoring Yahweh here, but acknowledging that there existed a greater spiritual power than their own. They had had prior experience of this when Aaron's staff became a 'serpent' (Hebrew; tanniym)and swallowed their staffs (Exodus 7:8-13).
4. The firstborn Israelite children were protected by the lambs' blood which God told them to sprinkle on the doorposts and lintels of their houses. This prefigured the sacrifi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his N.T. title of 'the Lamb of God' e.g. John 1:29.
참조 : The Plagues of Egypt
Egyptian history and the biblical record: a perfect match?
Perspectives on ancient chronology and the Old Testament—part 1
Perspectives on ancient chronology and the Old Testament—part 2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출처 - Creation 27(1):36-37, December 2004.
모세를 찾아서 2
(Searching for Moses)
David Down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 (The Ten Plagues on Egypt)
바로는 이집트 땅에 내려진 10가지 파괴적인 재앙과 악질로 인해서, 모세의 요구대로 그의 노예들을 놓아주었다.(출애굽기 7~12장). 성스러운 나일강물은 핏물로 변하였고, 모든 생축은 악질로 죽었으며, 번갯불은 가연성 물질들을 모두 태웠고, 우박이 내려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치고, 과일 나무를 꺾었으며,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 남아있던 지상의 모든 식물을 먹어치웠다. 이집트의 경제가 그토록 피폐했었다면, 어디엔가 그와 같은 국가적 대재난에 관한 기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런 기록이 있다.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 박물관에는 한참 나중에 기록했을 파피루스 기록이 보관되어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파피루스 기록은 어떤 초기 왕조 때의 파피루스 기록을 복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재앙이 휩쓸고 간 이후에 풍미했을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그 기록은 제13왕조 때의 것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 기록은 이렇다. 즉,
”아니, 그 보다는 심정이 광포하다. 재앙이 땅을 휩쓸었고 방방곡곡은 유혈이 낭자하다…. 아니, 그 뿐이랴. 강은 핏물이 범람한다. 사람이 그걸 마실까? 인간으로서는 못 마시리라.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 아니, 그 뿐이랴. 지체 높은 집 아들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 …. 외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애굽으로 들어왔으니…. 아니, 그 뿐이랴. 알곡은 곳곳에서 말라죽는다. 사람들은 옷조차 걸치지 못한 알몸이고, 향수나 기름은 어림도 없다. 사람들은 입을 떼면, "더는 못 참겠네.” 다들 한숨이다. 곡간마다 텅텅 비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곤궁한 백성들은 마침내 왕을 끌어내렸다.” 20
출애굽기의 바로 (The Pharaoh of the Exodus)
이집트 제12왕조의 말기를 통치하던 왕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 세소스트리스(Sesostris) 3세, 아메넴헤트(Amenemhet) 3세, 그리고 소벡네페루(Sobekneferu) 여왕이다. (여기에 소벡네페루를 앞서 아메넴헤트 4세로 알려진 모호한 인물을 포함시키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소벡네페루 여왕의 죽음과 함께 제12왕조도 막을 내렸음은 그녀한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양자인 모세마저도 미디안(Midian)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제12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한참동안 불안정한 기간이 이어졌다. 14명의 왕이 숨가쁘게 대를 바꿨다. 초기에 속하는 왕들은 아마도 제12왕조의 몰락 이전부터 나일강의 삼각주 (the Delta)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13왕조의 왕들은 삼각주의 북동 지역을 이미 통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들이기에 제12왕조가 몰락하자, 곧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제13왕조를 열었다. (왕조[dynasties]라는 개념은 당시의 이집트의 관념이 아니었다. 그 개념은 나중에 마네토(Manetho)가 창안한 관념이다. 마네토는 BC 3세기에 살던 이집트의 승려로서 이집트 역사라는 기록을 남기고, 왕들을 왕조 별로 분리시켜 계보를 만들었다).
온 이집트를 통치하기 위한 권좌에 등극하기 위해 이 왕들 간에는 맹렬한 정권쟁탈전이 전개되었고, 한 나라의 군주로서는 짧은 통치기간으로 이어지는 결과들을 초래했다. 이와 같은 정권쟁탈전은 네페르호텝(Neferhotep) 1세의 즉위와 함께 가라앉아, 그의 재위 11년의 기간동안 상당부분 안정을 회복하였다.
나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였던 상대자 바로를 카섹엠르-네페르호렙(Khasekemre-Neferhotep) 1세로 산정한다. 내가 그렇게 믿는 데는 페트리가 발견한 카훈에 있던 예전 왕들의 부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21 그런데 페트리가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발견한 부적은 네페르호텝의 것이었다. 이 네페르호텝은 힉소스(Hyksos) 족이 이집트를 ‘전투 없이’ 점령하기 전에 이집트를 마지막으로 통치했던 왕이었다. 전투 없이 점령하였다고? 이집트 군대는 어디에 있었을까? 홍해의 바다 밑바닥에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4:28). 카섹엠르-네페르호텝(Khasekemre-Neferhotep) 1세는 아마도 출애굽 당시의 바로였을 것이다. 그의 미라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 카섹엠르-네페르호렙 1세의 동상. 그는 이집트가 힉소스에 의해 점령되기 전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그의 시체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그는 출애굽 당시의 바로였을지 모른다.
우드(Wood) 교수는 자기의 강의에서 창세기 47:11과 출애굽기 1:11, 12:37에서 언급되는 라암세스(라암셋, Rameses)의 이름을 ‘도로의 출입문’이라는 뜻을 가진 이집트의 단어 ‘RW3TY’22에 연관시켰다. 그는 그것을 텔엘다바(Tell eld-Daba, (힉소스족의 수도인 Avaris)에 있는 새로운 인구 중심지의 Stratum d/222에 연결시킨다. 이곳은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 맨프레드 비텍(Manfred Bietak)에 의해서 발굴되고 있는 현장이다. 비텍에 의하면 이 지층(stratum)에는 가나안(Canaan) 인들의 요소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우드 교수는 Stratum d/2가 이집트에 있었던 이스라엘인들과 연관시킨다.12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를 라암세스 2세로 산정하는 사람들은 ‘라암세스(Rameses)'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성경의 바로가 이 라암세스와 동일인임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에 라암세스가 출애굽기의 바로라고 하면, 그의 시체는 홍해의 해저 바닥에 누워있어야 할 것인데, 그의 시체가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있다. 우드의 주장은 라암세스의 이름을 성경의 구절에 연결시켜야할 필요성을 거부한다.
결론 (Conclusion)
만일 우리가 그 때 당시를 올바르게(맞게) 들여다본다면, 이집트에는 이스라엘 노예들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이스라엘 노예들의 돌연한 실종, 10가지 역병과 재앙으로 인한 이집트의 피폐, 이집트 군대의 괴멸.. 등등. 그래서 고대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는 당시(시점, time)가 중요한 요소이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출애굽은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를 놓은 해보다 480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열왕기상 6:1). 이것으로 출애굽은 BC 1446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430년 앞선 때였기에 (출애굽기 12:40, 갈라디아서 3:16, 17), 그 때는 BC 1850년경이 된다. 노아의 선조의 시대로부터 창세기 12-13 장에 걸쳐서 주어진 연대들을 따져보면, 전 지구적 대홍수는 427년 앞선 BC 2302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계산된다. 그러나 이집트 연대기에 관한 대부분의 권위자들에 의하면 피라미드들은 BC 1550년경에 건축되었으며, 이집트 최초의 왕조는 BC 3100년경에 통치한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23
이와 같이 해서, 일반적으로 해석되는 이집트 연대기와 성경 기록과의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게 된다. 이집트의 최초의 왕조는 물론 피라미드들의 건축도 대홍수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내가 믿고 있는 바와 같이 성경이 역사적으로 믿을 수 있는 기록이라면,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표준 이집트 연대기에는 오류가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기에, 수 세기를 삭감하여 계산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 사안은 명백하다. 이집트 역사에서의 현재 통용되는 연대기를 인정하고 성경의 연대기를 거부하는 것은, 엿새 만에 완성하셨다는 창조의 기록을 포함하여, 성경의 초기 기록의 잔여 부분에 대한 회의론에 문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연대기의 오류가 증명되면, 성경 기록을 인정하는데 중요한 장애의 하나가 제거될 것이며, 그 때에 가서는 창세기 역사가 정당시 될 것이다.
*데이비드 다운(David Down)은 현장 고고학자로서 매년 관광객 그룹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안내하고 있다. 관광여행의 마감 때 즈음해서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의 발굴 사역을 지지하는 편에 서게 된다. 그의 발굴 사역은 이스라엘 고고학 당국의 지원 하에 진행되고 있다. 그는 'Diggins' 라는 월간 고고학 뉴스레터와 전 호주를 커버하는 신문 발행인을 통하여 보급하고 있는 'Archaeological Diggings' 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그는 또한 Moscow Radio를 포함하여 전 세계에 있는 10여 방송국을 넘는 방송국들을 통하여 주당 15분짜리 고고학 토크 쇼를 녹화한다. 그리고 시드니(Sydney) 소재 Wesley Mission에서 고고학 클럽을 매달 주관한다. 그는 시드니 라디오 방송국 2GB를 통하여 Gordon Moyer 박사에 의한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 소식을 방송하고 있다.
References
1. Kenyon, K., Archaeology on the Holy Land, Praeger, New York, p. 198, 1964.
2. Garstang, J., The Story of Jericho, Marshall, Morgan and Scott, London-Edinburgh, p. 136, 1948.
3. Kenyon, Ref. 1, p. 210.
4. Mazar, A., Archaeology and the Land of the Bible, Doubleday, New York, p. 369, 1992; Ben-Tor, A., The Archaeology of Ancient Israel, Yale University Press, p. 304, 1994.
5. James, P. et al., Centuries of Darkness: A Challenge to the Conventional Chronology of the Old World Archaeology, Rutgers University Press, p. 318, 1991; Rohl, D., A Test of Time, Century Ltd, London, p. 143, 1995.
6. Edwards, I.E.S. et al.,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 II, part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43, 1975; David, R., Ancient Egypt, Harper Collins, p. 20, 1988.
7. Diggings, Vol. 1, No. 3, p. 2, March 1985.
8. Velikovsky, I., Ages in Chaos, Doubleday, New York, 1952.
9. Courville, D.A., The Exodus Problem and its Ramifications, Challenge Books, Loma Linda, 1971.
10, James, Ref. 5, p. 318.
11. Rohl, Ref. 5, p. 143.
12. Wood, B., New evidence for Israel in Egypt, Newsletter of the Horn Archaeological Museum, p. 3, Winter—Spring 1999.
13. There are two main schools of thought on the 430 years of Exodus 12:40. One regards the period as commencing with the entrance of Israel into Egypt or the beginning of slavery, and the other commencing with the covenant with Abraham. As translated in the KJV, the Exodus 12:40 text seems to suggest the entrance of Israel into Egypt, but I consider the Hebrew in Exodus can be translated to support either view. I prefer to build on Galatians 3:17, which seems to place the period as beginning with the covenant with Abraham. Based on the ages of the patriarchs involved, I would consider it 215 years from the covenant with Abraham till Jacob entered Egypt and 215 years in Egypt. It is not possible to determine the years spent in slavery but, based on the pharaohs involved, I would think about 100 years.
14. See also: Beechick, R., Sojourn of the Jews; Williams, P., Reply to Beechick, Letters to the editor, TJ 15(1):60—61, 2001.
15. David, A.R., The Pyramid Builders of Ancient Egypt: A Modern Investigation of Pharaoh’s Workforce, Guild Publishing, London, p. 191, 1996.
16. David, Ref. 15, Plate 16.
17. If the sex of the babies could be determined to be all or mostly male, that would harmonise with Pharaoh’s edict to kill all the male babies. When Dr Rosalie David visited Australia two years ago, I asked her if the sex of the babies found by Petrie was known. She replied that unfortunately Petrie had only sent three skeletons to European museums and they have all been lost. None of them can be traced. Petrie buried the remainder of the skeletons in a sand dune, but no one knows which sand dune as he left no record of it.
18. David, Ref. 15, p. 195.
19. David, Ref. 15, p. 199.
20. Erman, A., Ipuwer Papyrus, Leiden Museum, quoted from The Ancient Egyptians, a source book of their writings, Harper and Row, New York, pp. 94—101, 1966.
21. The term scarab in archaeological reports refers to seals used for sealing documents though they were often used as ornaments. In either case, they were made of stone, metal or even pottery, with the shape of the scarab beetle on top and the name and title of the king engraved underneath, so when it was pressed down on the soft clay it left his seal impression.
22. After archaeologists have completed their reports they identify the strata or layers of occupation from the bottom up, so that the lowest layer may be early bronze, the next up middle bronze, the next up late bronze and the top layers iron age or later. But when they first start digging they cannot know what lies beneath, so they number the strata from the top down numbering them 1, 2, 3 etc. These are likely to be later subdivided with letters, so d/2 would be the second layer down and the 4th (d) subdivision of that layer or stratum.
23. Gardiner, Sir A., Egypt of the Pharaohs: An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pp. 430, 434, 1964.
*참조 : Biblical Archaeology : Evidence of the Exodus from Egypt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htm
Biblical Archaeology : The Date of the Exodus According to Ancient Writers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exodusdate.htm
Biblical Archaeology : Mt. Sinai
http://www.bibleandscience.com/archaeology/mtsinai.htm
Problems with ‘Searching for Moses’ articl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2/j20_2_52-pro.pdf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tj/v15/i1/moses.asp
출처 - TJ 15(1):53–57, April 2001.
갈릴레오의 재판
최인식
갈릴레오로 알려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세익스피어가 출생한 1564년 이태리 피사의 부유한 상류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파듀아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기하학, 물리학, 천문학 등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구의 자전과 해를 중심으로 한 공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당시의 천문학적인 이해는 BC 4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그대로 전수받은 일 세기의 천문학자 톨레미의 천동설이었습니다. 천동설은 해와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교황청과 종교 지도자들도 이 주장에 편승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천동설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세속의 과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론적 자연주의 사상이 모든 학문 심지어 신학에도 깊이 관여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태어나기 21년 전이었던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는 자기의 논문 '천체의 회전'을 교황 바오로 3세에 증정했습니다. 그는 정평 있는 학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제시한 논문의 내용은 1500년 이상을 군림해온 톨레미의 천문학적인 이해를 도전하는 혁명적 이론이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지동설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엉뚱하여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 후 56년이 지난 1609년에, 갈릴레오가 화란의 안경 제조상이 만든 작은 망원경에 착안하여 천체를 30배 이상 확대하여 볼 수 있는 망원경을 만들기까지는 이 새로운 이론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616년에 교황청이 코페르니쿠스의 저서와 갈릴레오의 지동설 주장에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와 과학의 상반성(Incompatibility)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과는 실제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예로 1633년 종교재판 중에 인용된 성경구절(수 10:13, 시 19:1-5, 시 104:1-5, 사 40:22)을 살펴 보면 해와 별들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을 표현하는 구절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사야서 40장 22절(땅 위 궁창에; upon the circle of the earth)은 둥근 지구의 지동설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처음에 갈릴레오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계의 고위층 인사들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쯤에는 종교계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있던 때라 원래 친분이 좋은 과학자인 갈릴레오가 영향력 있는 종교계의 인사들의 특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은 1633년 6월 22일 당시의 교황 어반 8세(1568-1644)의 명령에 의해 열린 종교재판의 결과에서도 드러납니다. 10명의 재판관 중 3명의 재판관이 판결문에 서명을 거부합니다. 재판을 강요한 교황 어반 8세는 교황이 되기 전에는 갈릴레오와 신분이 두터운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는 집권 초반(1624년)에는 갈릴레오와 여섯 차례나 장시간의 접견을 허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 대한 염려는 결코 하지않아도 된다고 장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단된 이유 중의 하나는 1632년에 출판된 갈릴레오의 '두 개의 세계관에 대한 대화'라는 책이었습니다. 책 내용은 저자인 갈릴레오가 어떤 사람을 접견하여 서로 세계관을 토론하는데, 교황을 암시하는 가상적인 인물을 써서 교황에게 모욕적인 공격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교황청이 금지령을 내린 또 다른 원인은 독일의 수학자 요한 케플러와 같이 갈릴레오의 주장에 동조를 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자기들의 권위와 사고의 틀에 도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반발로 말미암아 그들이 교황청에 압력을 가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방법대신 갈릴레오의 관찰을 강조하는 새 방법은 그들에게 불안과 불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갈릴레오와 교황청의 관계를 질시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과학계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몰아넣는 길 만이 그를 파멸시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판결문에는 ”이단적인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고 교황청이 지정하는 주택에 삼년 동안 연금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일곱 참회시를 외울 것”을 형벌로 받았습니다. 1638년에 완전히 실명한 그는 그로부터 3년 후 1641년 1월 8일에 77세를 일기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칩니다.
한 개인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사회의 전통적으로 기존하는 구조에 변화를 조만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하는 측의 반발은 당연합니다. 이때는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을 포함한 모든 자연학문 분야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인 사상에 근거하고 있었으므로, 관찰과 실험이 연구방법의 중심이 되는 갈릴레오의 주장에 과학자들이 동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어떤 한 세대가 전체적으로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계관은 종교적인 신념과 성경에 대한 이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 당시에는 중력에 대한 이해가 아직 없던 때라 지구가 빠른 속도로 자전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날고 있다는 것을 상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하바드 대학이 1636년에 설립 될 당시에도 전교수진이 톨레미의 천동설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이 신앙과 과학의 상반성에 대한 역사적인 사건 같이 인식되어 있는 것은 오류입니다. 마찬가지로 진화론도 신앙과 과학의 상반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세계관과 비성경적인 세계관의 대결일 뿐입니다. 틀린 과학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습니다. 세속의 과학이 어떻게 말하던 성경을 말씀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가르친다면 교회는 흠 잡힐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자연주의에 기초한 진화론 일색의 과학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냉철히 판단하여, 유신론적 진화론을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가톨릭교회는 말할 필요도 없고, 대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회들이 진화론적 과학에 근거한 성경해석을 과감히 배격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합니다. 톨레미의 천동설과 다름없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은 다시 한번 성경과 진화론의 물과 기름 같은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참조 : The Galileo affair: history or heroic hagiograph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25
Galileo Quadricentennial : Myth vs fact
http://creation.com/galileo-quadricentennial
갈릴레오 재판
김창환
갈릴레오는 전제주의 정권의 악을 보여 주는 고전적인 실례로 남아 있다. 그는 독립적인 사고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았고 고발당했다. 갈릴레오는 성경을 의심하였고, 자기만의 독립적인 해석을 시도했으며, 그리하여 교회의 종교적 권위를 직접적으로 거스렸다......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들의 체계를 파괴할 수 있었던 한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취하였다. 즉 그들은 그 불화의 씨를 원천 봉쇄하였던 것이다.1) - Colin A. Ronan
필자는 과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6살부터 예수님을 만난 17살까지 대략 십 년간을 이성지상주의자로 살았다. 당시의 내가 이해한 과학과 종교의 - 특히 기독교와의 - 관계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대표되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갈릴레오 재판이었다. 그리고 그 재판 이야기가 내게 준 인상은 위 인용문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비합리적이게도 성경을 신봉하는 교회가 분명한 사실을 보려하지 않으며 온갖 부당한 압제를 가하는 데 맞서 자유로운 과학 연구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다 희생당하였으나 결국 그가 옳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는 식이었다. 따라서 종교가 다시 과학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불행한 일은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따라나왔다.
내 경우가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아이라면 자라나면서 갈릴레오 재판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평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는 선입견이 생길 만큼 강한 인상을 받기가 쉬울 것이다. 대단히 불행하게도 이런 선입견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비단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이러한 뿌리깊은 생각 때문에 눌려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경우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한동안은 반지성적인 경향을 띄었었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라는 뿌리깊은 선입견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시대에 과학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갈릴레오 재판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관해 흔히 말해지는 바가 전부 사실이라면 말이다.
나는 반지성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 그렇게 살 수 없도록 하신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영성을, 한편으로는 지성을 추구하면서2) 그 두 가지 사이의 갈등을 어느 정도 느끼면서 계속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여러 자료를 찾아 볼 능력이 생긴 후에 재판 이야기를 다시 검토해 보니 십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결론을 얻게 되었다. 자료 속에서 내가 본 갈릴레오의 모습은 압제자에 맞서는 투사의 모습도 아니었고, 이성을 신뢰한 나머지 주제넘게 성경의 진리에 도전한 교만한 인본주의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모습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던 한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그의 단순한 관측은 하나하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의 기둥을 흔들어 놓았다. 갈릴레오는 이제, 자신의 눈으로, 그의 능력으로는 세어 볼 수 없는 무수한 항성들을 본 것이다. 우주는 무한한 것인가? 달은 지구와 마찬가지로 그 형태가 완전한 것이 아님을 그는 보았다. 결국 실체에 있어서 천체와 지구 사이에는 아마도 차이가 없는 것인가? 은하수는 헤일 수 없이 많은 별들의 집단에 불과한 것이 드러났다. 천체는 고귀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인가? 천체의 과정이 본질적으로 지상의 과정과 다를 바 없는 것인가? 이러한 간단하고 우연한 관측들이 전통적인 독단론의 방해물을 제거하기 시작은 하였으나, 아직 그 어떤 것도 실제로 코페르니쿠스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에게 있어서는 그가 본 것이 그를 전향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케플러는 그를 설득시킬 수 없었으나 이제 망원경이 그를 설득시킨 것이다.3) - Daniel J. Boorstin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에 피사에서 출생하였다. 1589년에 피사대학에서 3년 기한의 수학교수가 되었고, 기한이 끝난 1592년에는 파두아대학에서 수학교수가 되었다. 갈릴레오가 언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1597년 파두아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실제로 지지하였고 그 때 그가 집필중이던 '우주론; Cosmography'에서도 전통적인 우주론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표명하지 않았다.4) 하지만 1595년에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가정한 지구의 두 가지 원운동(자전과 공전)을 필요로 하는 조수에 대한 역학적 설명을 고안해내었고,5) 1597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공격하는 편지를 피사의 옛 동료에게 보냈다.6) 같은 해에 독일에서 온 한 방문자가 케플러의 첫 번째 책인 Cosmographic Secret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 덕택에 일찍이 새로운 천문학을 받아들였다고 갈릴레오는 인정하였다.7) 그러나 케플러가 그에게 새로운 새계관에 대해 언급해 줄 것을 재촉했을 때 갈릴레오는 이것을 거부하였다.8) 그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단지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설로 생각한 것인지, 또는 그것이 실제로 맞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확신이 깊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깊이 확신하면서도 좀 더 확실한 근거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인지 모르지만 대략 십 년간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공적으로 변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망원경이었다.
1609년, 망원경에 대한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곧 직접 제작하기도 하였고 그것으로 천체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놀라운 것들이 망원경을 통해 관찰되었는데, 달의 표면은 매끈한 것이 아니라 지구표면처럼 굴곡이 있으며, 은하수는 수많은 별들이고, 태양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검은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9)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목성의 4개의 위성이 관측된 것이었다. 이것은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고, 자기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다른 천체를 가진 지구와 같은 개체가 그 자신도 다른 천체를 회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10) 이러한 발견들은 1610년 3월에 '별의 사자; Starry messenger; Sidereus Nuncius'11)라는 24쪽짜리 책자를 통해 보고되었다. 갈릴레오는 또한 금성의 위상과 겉보기 크기가 변하는 것을 관찰하였다.12) 이 결과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는 조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성경과 자연은 다같이 신의 말씀으로부터 나왔다. 전자는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며 후자는 신의 명령을 가장 잘 준수해서 집행한 것이다. 또한 이들을 일반 백성들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절대적 진리와는 다르게 보이는 것(말의 의미에 대하여)을 많이 얘기하고 있는 반면, 자연은 냉혹하고 불변하며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감추어진 이유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자연이 그에게 주어진 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감각적 경험을 통해 우리 눈앞에 놓여진 물리적 결과나 또는 필요한 논증의 결론은 그 어떤 이유로도, 말이 또다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성경의 구절 때문에 의심해서는 안된다...... 두 개의 진리는 결코 서로 모순될 수 없다......13) - Galileo Galilei
1610년대 초반을 전후해서 과학적 논쟁은 신학적 논쟁으로 비약된다. 처음으로 이 논쟁에 성직자를 끌어들인 것은 지오반니 마기니였는데 그는 젊고 열정적인 종교인이었던 프란체스코 시지를 자극하여, 행성은 단 일곱 개밖에 있을 수가 없다는 준 종교적인 주장을 제기하고, 목성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되는 달들은 환상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믿을 수 없는 책을 출판하게 하였다. 플로렌스의 철학자 루도비코 델레 콜롬브는 1611년에 이탈리아어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에 대한 전통적인 반론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지구의 운동이 성경과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인용문들로 마쳤다. 그는 '리가 Liga'라고 알려진 갈릴레오에 대항하는 은밀한 조직운동을 지도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갈릴레오가 순전히 과학적 논의에 의하여 패배될 수 없다면, '리가'는 그 전투를 신학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14)
1613년 대공 코시모 2세가 베푸는 관례적 만찬 자리에서 비공식적인 논쟁이 일어났다. 거기서 코시모 보스타글리아 교수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그것이 성경과 모순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갈릴레오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카스텔리는 그날의 상황을 갈릴레오에게 자세히 써보냈다. 갈릴레오는 같은 해 성탄 직전에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신; Letter to Castelli' 에서 과학자와 카톨릭 교도로서 자신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성경의 진리와 권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재확인하고, 성경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성경은 때때로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적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물리적 결과에 관한 논쟁에 성경을 끌어들이는 일”에 대해 걱정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권의 책 - 성경과 자연의 책 -을 주셨는데, ”그 두 가지 진리는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하였다.15)
1614년 12월 20일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교수들과 연관이 있는 도미니카파 수사 토마소 카키니 신부는 태양이 멈추었던 여호수아의 기적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상은 이단에 매우 가깝다고 강하게 정죄하였다. 도미니카파 지도자가 공식적인 사과문을 보내오기는 하였으나 갈릴레오에 대한 반대는 점점 강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니콜로 로리니 신부가 '카스텔리에게 보낸 서신'을 읽고 그 사본을 1615년 2월 7일에 로마로 보내면서 ”갈릴레오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사적인 빛에 비추어서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며......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을 짓밟는다...... 나는 갈릴레오주의자들이 온전한 사람들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의견이 다소 교활하고 건방지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개신교의 성경 해석 때문에 사적인 성경 해석에 대해 민감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이 소식을 들은 갈릴레오는 그 편지는 자기가 급히 쓴 것이라고 변명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확대한 새로운 편지 '대공 부인 크리스티나에게 보내는 서신; Letter to the Grand Duchess Christina'을 써보냈다.16)
로마에서는 위원회가 소집되어 로리니 신부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심의를 하였다. 단 며칠의 심의 후에 1616년 2월 24일 태양이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며, 공식적으로 이단적이라고 판결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와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한편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은 단순한 오류에 불과하다고 주장되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7)는 달력이 그것에 기초해 있으므로 금지되지 않고 다만 '수정을 위하여 출판이 중지'되었다.18) 3월에 갈릴레오는 벨라르미노 추기경 앞에 소환되었고 '실제적인'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우주론으로서 옹호하는 일을 중단하도록 권고받았다. 갈릴레오가 이 권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는 논증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는 것만 금지되었을 뿐 유죄선고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의 책이 금서가 된 것도 아니었다. 며칠 후 갈릴레오가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 교황은 그의 정직한 행위와 대적들의 음모가 알려졌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확신시켰으며,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문서를 만들어달라는 갈릴레오의 요청에 따라, 갈릴레오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도 않았고 회개하도록 강요받지도 않았다는 취지의 사적인 편지를 주었다. 다만 코페르니쿠스의 가르침은 ”성경과 모순되며 따라서 변호되거나 주장될 수 없음”을 지적받기만 했다고 썼다.19)
따라서 모든 추기경과 모든 신앙심 깊은 교인들의 마음으로부터 정당하게 나에게 품게 된 이 의심이 제거되기를 희망하면서, 진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신앙으로 나는 맹세코 전기의 잘못과 이단, 그리고 거룩한 교회와 반대되는 모든 잘못과 이단을 버리고 저주하고 배척할 것이며, 또한 앞으로는 이와 비슷한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입으로나 글로 말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어떠한 이단이나 이단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이를 이 성스러운 교회 재판소 또는 내가 있을 곳의 어느 교회에나 고발하겠습니다......20) - Galileo Galilei
1623년 8월에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으며 그의 견해에 호의적인 마페오 바베리니가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1624년에 갈릴레오는 로마로 가서 교황을 만났다. 교황은 따뜻하게 갈릴레오를 맞아주고 그의 새 책을 칭찬하였을 뿐 아니라 다섯 번이나 더 그를 만나주었다. 갈릴레오는 조수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지구의 운동에 관한 주제를 교묘하게 다시 끄집어내면서 적들의 악의와, 자기가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연구를 하는가를 넌지시 이야기하였다. 갈릴레오는 1616년의 결정이 취소되기를 기대했지만 교황은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지구의 운동이 가설로만 간주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다면 조수 이론에 관하여 출판하여도 좋다는 조건부 승낙을 얻어내게 된다. 갈릴레오는 이에 따라 1624년부터 1630년까지 '대화; Dialogue on the Two Principal World Systems'를 집필하였다. 그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한 전문가와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또 한 전문가가 제3의 중립적인 인물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내용의 대화체로 되어있다.21) 갈릴레오는 1630년 5월에 출판 허가를 위하여 로마로 갔으며, 허가가 난 것은 1631년 6월이었고, 1632년 2월에 초판 인쇄본을 대공에게 바쳤다. 그 책은 독자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8월에 판매가 금지되었고 10월 1일에는 갈릴레오가 로마로 소환되었다.22) 악명 높은 재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종교 재판소에 서명 없는 문건이 하나 접수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23) ”갈릴레오는 상기위원(벨라르미노 추기경)에 의하여, 교황 성하와 교리 성성의 전체 회중의 이름으로, 전술한 견해 즉 태양은 세계의 중심으로서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견해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말로든지 글로든지 어떤 형태로도 주장하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약 이를 어길 때에는 교리 성성이 그에 대하여 합당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 이 금령에 대하여 갈릴레오 본인은 수락하였으며 순종하기로 약속하였다.”24) 이에 갈릴레오는 공적인 금령을 받은 바 없고 ”말로든지 글로든지 어떤 형태로도”라는 말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사적인 편지를 제출하였다. 재판의 초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1616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한 말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후자에 관해서 갈릴레오는 ”이 책에서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정지해 있다는 견해를 주장하거나 변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코페르니쿠스의 견해에 대한 반대 견해를 주장하였으며, 코페르니쿠스의 논증이 약점이 있으며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재판관들로 하여금 그가 자기들을 우롱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재판부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견지하고 변호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25)
그리고 심의는 수주일 동안 더 지속되었다. 열 명의 재판관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교황의 사촌이었던 프란체스코 바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4월 30일 갈릴레오는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였고, 5월 10일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상황으로 보아 가벼운 선고로 끝날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최후 결정을 위하여 더 높은 권위자들에게 올라갔을 때 상황은 갑자기 갈릴레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6월 16일에 선고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교리 성성의 심의회에서, 강한 이단의 의혹이 있는 것으로 선언되며, 따라서 성성이 정하는 대로 구금의 형에 처해지며, 어떤 형태로든지, 말로든지 글로든지, 지구의 운동과 태양의 정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그는 재범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대화'라고 명명된 책은 금지된다.”26) 최악의 결과였다.27)
과학과 종교는 어떤 관계인가?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그 둘 사이가 몹시 나쁘다거나 또는 무관하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쁘다고 하는 생각을 심어 준 데에는 갈릴레오 사건이 큰 몫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료 연구는 이 사건이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종교가 진보적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과학자에 대해 일방적으로 탄압을 가한 것이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그것은 다른 인간 관계에서 흔히 보듯이, 여러 가지 정치적, 외교적, 개인적, 종교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여 빚어진 결과일 따름이라고 규정한다.28) - 김명자
어쩌면 이 절의 제목을 '불운'이라고 한 것은 적절치 않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갈릴레오의 '불운'은 어느 정도는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만약 갈릴레오가 로마 대학의 호의를 계속해서 받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는 여전히 자유롭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공전을 포함한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9) 지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갈릴레오에게는 토론상대자를 화나게 만들어 적으로 돌려버리는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렇다.
지오반니 마기니는 1592년 피사대학의 교수 자리를 놓고 갈릴레오와 경쟁하였으나 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마기니는 갈릴레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는 '별의 사자'가 출간되었을 때 갈릴레오를 신랄하게 비판했을30) 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직자를 논쟁에 끌어들였다. 루도비코 델레 콜롬브는 1604년 신성(new star)에 대한 자신의 책을 갈릴레오가 공격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고, 1611년 부유물에 대한 논쟁을 벌이면서 갈릴레오를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예수회 천문학자 크리스토퍼 샤이너가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을 관찰하여 1612년에 보고서를 냈을 때 갈릴레오는 그 해석에 반대하여 '태양의 점들에 관한 서신; Letters on Sunspots'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서 갈릴레오는 자기가 먼저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여 샤이너를 화나게 했으며, 다른 많은 예수회파 사람들도 기분이 상했다.31) 1618년 가을에 나타난 세 개의 혜성에 대해 오라지오 그라시 신부가 예수회파 천문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였을 때, 갈릴레오는 거기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라시에 대해 다소간의 인격적인 모독도 주었던 모양이다. 이 일로 인해 갈릴레오는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될 수 있었던 예수회파 천문학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다. 샤이너와 그라시는 저 악명 높은 재판이 열리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32)
이외에 정말 '불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난다. '대화'의 출판업무를 맡은 리카르디는 원고를 비스콘티에게 보냈는데, 비스콘티는 교황이 일찍 서거할 것이라고 예언한 모란디의 친구였다. 비스콘티와 모란디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갈릴레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갈릴레오는 문제의 예언에 대해 잘 몰랐다고는 하지만 그의 평판에 큰 영향을 미쳤다.33) 지오반니 치암폴리는 갈릴레오의 확고한 지지자로서 우르바누스 8세가 즉위할 때 바티칸의 훈령 비서관에 임명되어 갈릴레오에게 희망을 품게 한 인물로서34) '대화'의 승인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스페인 주교 보르기아가 교황의 지위에 공식적으로 항의한 것이 화근이 되어 추방되고 만다.35) 갈릴레오의 후원자였던 체시 백작은 '대화'가 승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세상을 떴다.36)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재판 당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1616년의 상황에 대해 간단히 확인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불운'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역사적, 정치적 상황과 관계가 있다. 16세기 이탈리아는 혼란스러웠다. 1527년 로마의 피침, 1530년 플로렌스 공화국의 몰락, 이탈리아에 대한 스페인의 통치, 이러한 혼란은 권위를 강조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렌트 종교회의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데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37) 오직 교황청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대응으로서 집안단속의 의미가 있었다. 갈릴레오가 성경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시 시대 상황으로 보아서는 대단히 위험한 일일 수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갈릴레오의 '불운'에서 정점에 위치해있다. '대화'를 출판한 출판사는 물고기 세 마리가 그려진 그들의 통상인지를 찍었는데 이것이 교황의 세 조카에 대한 명예훼손에 대한 증거라는 말이 돌았다. 또한 '대화'에 등장하는 바보스러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교황을 풍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38) 예수회파는 '대화'가 수사학적 가면을 쓰고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힘있게 변호한다고 교황에게 말하였고, 또한 교황이 조소당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국제 정치는 우르바누스 8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개신교도인 스웨덴 왕과의 비밀연합이 그 왕의 죽음으로 인해 알려지게 되어서 오스트리아와 멀어지고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악용당했다. 국내에서는 갖가지 비판을 받고 있었다. 교황은 여러 가지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갈릴레오와 친분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교황은 속았다고 생각하며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위신을 회복하며 교회의 머리인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기 위하여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39) 그 결과는 갈릴레오의 지독한 '불운'이었다.
나아가서 나는 만약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따라서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참된 증거가 있다면, 그러한 과학적 증명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을 설명할 때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겠다. 우리는 어느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모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증명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데, 이는 아무도 나에게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천체들 중에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상을 구제할 수 있음을 논증하는 것과, 실제로 태양이 중심에 있으며 지구가 천체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40) - Roberto Berlarmino
위에서 쓴 것처럼 1633년의 재판에서 초점이 된 것은 1616년에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무엇을 말하였고 갈릴레오가 그것을 어겼는가 하는 것과 '대화'가 교황이 허락한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설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이 재판에서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성경과의 관계 같은 것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문제가 다루어진 것은 1616년이었고 그 때 교황청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벨라르미노 추기경이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은 위 인용문에 집약되어 나타나 있다. 그는 아마도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의 권위가 자명하고 확실한 추론과 배치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성서를 해석하는 이들이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와 배치되는 것은 성서의 의미가 아니라 성서 해설자가 성서에 부여하고 싶어했던 그 의미인 것이다. 즉 성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해석자가 자의적인 믿음으로 성서에 부여한 의미가 바로 진리와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41)
벨라르미노는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실제적이고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 옳은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성경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42) 만약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확실히 증명된다면 성경에 근거하여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틀렸다고 단언해서는 안되며 성경을 신중히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것도 어려우면 차라리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실제적으로 입증되지 않고 단지 추측과 가정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과 양립하는 형태로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성경해석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건이 되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과학적 증명의 여부였다. 벨라르미노가 요구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단지 관측가능한 자료들을 짜 맞추기 위한 수학적 고안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참된 물리적 설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들을 평가하는 가운데, 갈릴레오는 그 발견들이 지구의 운동을 입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철회하였고, 금성의 위상들을 예언하고 다른 많은 일들을 설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반대하는 주장들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그의 논리 전개는 추론과 리트로덕션(오늘날 가설 연역적 방법이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 : 각각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함에 따라 더욱 그럴 듯하게 되는 가설적 모델을 시험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다른 신학자들이 보기에 갈릴레오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귀납적이었으며,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 임시적인 논거는 성경에 대한 재해석을 강요할 만큼 힘이 없었다.43) - Charles E. Hummel
피에르 뒤앙(Pierre Duhem)이나 칼 포퍼(Karl Popper)같은 사람은 현대 과학철학자이면서도, 실증주의에서 입각해 보면,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보다는 더 진리에 가까웠다고 주장하였다.44)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발견한 것들, 즉 울퉁불퉁한 달 표면, 태양의 흑점, 목성의 4개의 위성, 금성의 위상변화와 같은 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한 반증임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직접 입증하느냐 하면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벨라르미노 추기경도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가정하면 현상이 더 잘 설명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올바르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가르멜회 신부 파올로 안토니오 포스카리니 신부에게 쓴 편지의 사본을 입수한 갈릴레오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리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의미하는 '증명'이란 단어의 의미로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증명을 고안하는 것이 갈릴레오의 당면과제가 되었다.
1615년 말경에 갈릴레오는 마침내 조수의 운동을 통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증명을 고안해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증명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45) 갈릴레오는 무역풍도 지구자전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제대로 된 증명을 구성할 만한 배경지식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46)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한 증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올 때까지는 150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다. 연주시차와 푸코의 진자가 그것들로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진 발견들이다.
조수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증명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자 이것이 결정타가 되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마음을 굳혔다. 그가 ”아무도 나에게 그런 증명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앙이나 포퍼가 갈릴레오가 틀렸다고 말하려 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실증주의에 입각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과학철학이 발달한 20세기를 지나온 우리는 물론 실증주의가 지지되기 어려운 과학철학임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은 확실히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과학철학을 몰랐다는 이유로 그를 탓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그것은 편견, 뿌리깊은 증오, 그리고 온갖 종류의 특수하고 집단적인 이익이 일차적 원인이 된 혼란스러운 난전이었다...... 교회 지성인들의 주요부는 갈릴레오 편이었다. 반면에 갈릴레오에 대한 가장 분명한 반대자는 세속 사상에서 왔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갈릴레오뿐만 아니라 교권자들 자신까지도 희생양이 된 그 구성의 결과가 비극이었다 - 그것은 모호하고도 상이한 인물들이 기묘한 연합을 이루어서 실행한 음모였다.47)
-- Giorgio de Santillana
갈릴레오 재판에 대하여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도 모든 면에서 철저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소 왜곡되기는 하였어도 모종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가 권위주의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은 정확하다. 다만 그 권위주의가 카톨릭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 ”갈릴레오의 몰락을 몰고 온 진짜 권위주의는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과학의 조망이었다.” 48)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유한하고 구형이라고 믿었으며, 지구는 그 중심에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달 아래와 하늘을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달 아래 세상은 물, 불, 흙, 공기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지상적 물체는 가변적이며 파괴될 수 있어서 생성되고 소멸된다. 한편 그것들은 자연적으로 아래, 위로 움직이는데, 물과 흙은 아래로, 불과 공기는 위로 움직인다. ”자연적인 운동”은 내재적인 것으로 본래의 위치를 찾아가게 하는 것이며, ”억지의 운동”에는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이 없어지면 물체는 ”자연적인 운동”을 하게된다. 한편 천체는 지상의 원소들보다 훨씬 우월한 제5원소 '에테르aether'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자연적인 운동”ㅍ은 처음이나, 끝 또는 한계가 없는 완전한 형태의 원운동이다. '에테르'는 가변적이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영원하다.49) 따라서 달 아래와 하늘은 서로 다른 법칙이 지배한다.50) 이 체계에 히파르쿠스는 이센트릭(eccentric)51)을, 아폴로니우스는 주전원(epicycle)을, 프톨레마이오스는 이퀀트(equant)52)를 도입함으로써 관측자료와 맞출 수가 있었다.53)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받아들여 기독교화 하였다.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혼동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우선 고대 이래로 우주의 중심이었던 지구가 태양과 자리바꿈하여 한낱 행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지옥의 위치가 지구의 중심이라는 보편적인 믿음을 혼란시켰다. 그리고 예수의 승천에 대한 사실적 기초를 위태롭게 했으며, 창조의 목적이 인간 중심이었다는 관념을 약화시켰다. 즉 그것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늘 바깥에 신이 거주한다는 전통적인 우주 구조의 붕괴를 뜻했던 까닭에, 조화된 우주의 붕괴가 교리 자체에 손상을 입히게 됐던 것이다.” 54)
오늘날과는 매우 동떨어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신앙과 아주 오래된 우주론을 분리할 수 없었던 갈릴레오의 재판관들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 더구나 그 이론이 아직 결정적으로 입증된 것도 아닌 상태에서 - 본질상 가톨릭 전통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잘못 믿었으며 그 이론의 가르침을 금지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명백한 이러한 재판의 이러한 주관적 오류는 그들 재판관들로 하여금 ”갈릴레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징계처분으로 이끌어 가게 했습니다. 성하께서 요구하신 것처럼 이러한 잘못은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56) - 폴 푸파르 추기경
1979년 11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청 과학원에서 열린 아인슈타인 탄생 백주년 기념행사에서 ”신학자, 학자, 사학자들에게 갈릴레오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것과 오류가 어느 편에서 오든지 이 오류를 공정히 받아들임으로써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신앙과 과학 사이의 내실 있는 조화에 대한 의혹을 척결할 것을 촉구”하였다.57) 이에 따라 1981년 7월 3일 ”갈릴레오 사건이 속한 16-17세기 천동설-태양 중심설 논쟁의 연구를 위한 교황청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92년 10월 31일 교황청 과학원에서 폴 푸파르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을 설명하였다.58)
추기경은 먼저 위원회의 기원, 구성, 목적, 조사방법, 참고한 문헌들에 대해 잠깐씩 언급한 다음,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입장을 설명하고 갈릴레오가 자신의 입장을 반박의 증거없이 명백하게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59) 그러나 갈릴레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에 대한 납득할 만한 반론이 없었다고 지적하고, 상황이 명확해지자 1741년에는 갈릴레오 전집에 교회 인가가 부여되고, 1757년 판 금서목록에서는 지동설을 옹호하는 저서들이 삭제되었다고 하였다. 1820년에 천문학과 관련된 어떤 책의 교회인가가 거부되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1822년 교황은 저자에게 호의적인 판결을 내린 사건도 간결하게 언급한다. 추기경이 설명하는 결론은 ”모든 소송 관련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훌륭한 신앙의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는 것과 지동설에 대해 ”그릇된 철학적 신학적 성격을 부여한 것은 천문학 지식 영역의 과도기적 상황의 결과였으며, 우주론에 대한 주석학적 혼돈의 결과”라는 것이었다.60)
이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서해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진실한 신자이던 갈릴레오는 이 점에 대해 그의 반대파 신학자들보다 더 진지하고 예리했다”고 평가하면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일으킨 혼란은 성서학에 있어서 인식론적 숙고를 촉구하여 결국 현대적 성서 해석에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가르침은 진리에 부합되어야 함이 분명하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신앙의 진리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과학적 자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하면서, ”신학자들이 그들의 성찰에 참고할 점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수정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과학의 발전들에 관해 규칙적으로 알고 지내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까지 말하였다.6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오 사건으로부터 두 개의 교훈을 끌어내었다. 먼저 그는 아인슈타인을 언급하면서 ”편파적이고 대립적인 두 개의 관점을 뛰어넘어 서로를 포함하면서도 서로를 초월하는 더욱 폭 넓은 관점이 있음”을 첫 번째 교훈으로 꼽았다. 두 번째 교훈은 ”지식의 다양한 문화는 방법의 다양성을 요구한다”는 것으로서, ”지식에는 계시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과 이성 스스로의 능력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의 두 영역이 있으며 이 두 영역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이 두 영역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며 서로 만나는 공통점이 있고 각 영역의 고유한 방법론들은 실재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62)
계몽주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 사건은 일종의 '신화'가 되어 왔는데 그 신화 속에서 사람들이 그려 왔던 모습은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갈릴레오 사건은 과학의 발달에 대한 교회의 거부, 혹은 진리에 대한 자유로운 탐구를 반대하던 '독단적' 반계몽주의의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신화는 상당한 문화적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 신화는 훌륭한 신앙을 지닌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과학의 정신과 그 탐구의 규칙을 한편으로 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그 사이에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극적인 상호간의 이해부족이 과학과 신앙 사이의 근본적 대립의 반영으로 해석되어졌습니다. 최근의 역사적 탐구로 이루어진 해명으로 이 불행한 오해는 지나간 과거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63)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험멜은 과학자 갈릴레오와, 상징으로서 존재하는 갈릴레오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을 좀 길게 인용해보자. ”그는 자신의 생애 동안에 이미 거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갈릴레오는 편견과 권위에 대한 이성의 도전의 상징, 그리고 중세 신학의 깜깜한 의견들에 대항한 과학의 확실성의 상징이 되고 있다. 최초의 과학사가들, 18세기 말기의 프랑스 백과전서파들은 갈릴레오의 연구를 옛 과학 방법과 새로운 과학 방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그리고 과거와 예리한 창조적 결별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이 과학자는 상징이었다. 그들은 갈릴레오를 암흑의 종교적 권위주의로부터 지적인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싸운 순교자의 전형과 해방자로 제시하였다.” 64)
갈릴레오 이야기는 계몽주의를 선전하기에는 안성마춤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을 신뢰하며 계시를 거부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갈릴레오 재판에서 계시의 핍박을 받는 이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대에는 이미 갈릴레오가 옳다는 것이 명백해졌으므로, 이성이 승리하였고 계시의 핍박은 부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성이 신앙과 공존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들은 이 이야기를 계시를 핍박하여 추방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 1832-1918)는 1896년에 출판된 그의 책 '과학과 기독교 신학의 전쟁사;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에서 ”기독교는 자연과학의 정상적인 발전을 천오백 년 동안 묶어두고 있었다”고 썼다. 그보다 앞서 드레이퍼(John William Draper; 1811-1882)는 1874년에 출판된 그의 책 '종교와 과학의 투쟁사;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에서 ”사고의 절대적인 자유가 있어야 한다. 성직자는 그가 택한 영역안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고 철학자를 탄압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썼다.65) 이러한 사고방식은 20세기에도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류가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는 저 유명한 재판의 중심인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처구니없는 것임에 틀림없다. 재판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지속적인 평안의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나의 글 속에는 거룩한 교회에서 빗나감에 대한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둘째로, 오직 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완전히 아는 나 자신의 양심의 증거가 있다. 그리고 내가 고통을 당하는 이 대의에서도 비록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말을 할지라도, 아무도, 심지어 옛 교부들까지라도, 나만큼 많은 경건과 교회를 향한 열심을 가지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신다.” 66)
성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어도 성서 해석자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로 오류를 범한다.67) - Galileo Galilei
하지만, 진리의 말씀도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이것만이 모세의 주장이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주시여, 주의 종을 살펴보소서. 주님의 말씀으로 찬양의 제사를 드리고자 하오니 나의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한 말씀에 다른 뜻이 전혀 없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혹 그때 모세의 의향에 다른 것이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태초에'라고 기록하면서 그는 창조의 첫 시간을 생각할 수도 있었고, 같은 말에서 아직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무엇을 만들기 전에 창조의 의도만을 가진 때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말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그것들이 어찌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겠습니까. 그가 무엇을 말했건간에 당신의 위대한 종으로써 기록한 것인데 어찌 그것이 바른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68)
-- St. Augustinus
벨라르미노는 엄밀한 반증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과학의 발전은 누적적이 아니어서 이론은 종종 버려지기 마련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러한 것은 20세기 과학철학이 밝혀낸 것이므로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핑계를 댈 수 없다. 험멜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몇 권의 책들은 성경의 과학적 신빙성을 입증하려고 시도하였으며, 그 결과 나는 그 책의 메시지를 경청하게 되었다. 그런 논증으로 무장하고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과학을 공부하여, 회의주의적인 친구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깨달았다. ”과학적 법칙들은 개정되기도 하고 버려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현대과학과 일치하는 데서 그 신빙성의 근거를 찾게 되면, 그 과학적 이론이 묵은 것이 될 때, 결국 성경도 그 과학 이론과 함께 역사적 유물로 남고 말 것이다.”69)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해석을 가하지 않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어떠한 식으로든지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믿지만 내가 성경을 읽고 이해했을 때 내가 이해한 바가 오류가 없다고는 믿지 않는다.70)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과학 이론을 조화시키고자 할 때 성경해석과 과학이론 둘 다 임시적이고 버려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다.
오히려 우리가 의혹의 눈을 돌려야 할 곳은 과학이론의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갈릴레오를 압제하였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이론들, 예컨대 다윈주의의 배경에 깔려있는 철학은 자연주의이다. 갈릴레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은 기독교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과 비슷하게, 오늘날 자연주의적이 아닌 과학을 상상하기는 솔직히 어렵다. 갈릴레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대한 비판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단죄한 것처럼, 오늘날 자연주의 체계(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과학 자체를 공격한다는 누명을 쓰고 있다.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
주
1) Colin A. Ronan, Galileo (New York : G. P. Putnam's Sons, 1974), p.253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황영철 역, 과학과 성경 갈등인가 화해인가, IVP, 1991, p. 16에서 재인용.
2) 이러한 표현은 마치 지성과 영성이 서로 대립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줄 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글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3) Daniel J. Boorstin, 이성범 역, 발견자들 II, 범양사출판부, 1987, p. 56.
4) Ibid., p. 54.
5) Charles E. Hummel, Op. Cit., p. 101.
6) Daniel J. Boorstin, Op. Cit., pp. 54-55.
7) Charles E. Hummel, Op. Cit., p. 101.
8) Daniel J. Boorstin, Op. Cit., p. 55.
9) Charles E. Hummel, Op. Cit., p. 104. 이런 것들은 그저 그런 발견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의하겠다.
10) Daniel J. Boorstin, Op. Cit., p. 56.
11) Hummel은 이 소책자는 '결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였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공하지 않았다'(Charles E. Hummel, Op. Cit., p. 105.)고 한 반면, Boorstin은 '이 작은 책자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동의한다는 것을 과감히 표명하였다'(Daniel J. Boorstin, Op. Cit., p. 56)고 한 것은 흥미롭다.
12) Charles E. Hummel, Op. Cit., p. 105.
13) Daniel J. Boorstin, Op. Cit., p. 59.
14) Charles E. Hummel, Op. Cit., p. 107-108.
15) Ibid., pp. 110-111.
16) Ibid., pp. 111-112.
17)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책이다. 그 체계는 수학적 편의를 위한 가설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18) Charles E. Hummel, Op. Cit., p. 127.
19) Ibid., p. 130.
20) Daniel J. Boorstin, Op. Cit., p. 64.
2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주장은 바보스럽고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그 책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고 상상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Hummel은 갈릴레오가 '1616년의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권고에 대하여는 문자적으로는 순종하였지만 그 정신에는 순종하지 않았다'(Charles E. Hummel, Op. Cit., p. 134.)고 표현하였고, Boorstin은 만약 이것이 '검열관을 속이기 워한 것이었다면 그는 실패한 것이다'(Daniel J. Boorstin, Op. Cit., p. 61.)라고 하였다.
22) Charles E. Hummel, Op. Cit., pp. 134-136.
23) 갈릴레오의 적대자가 꾸며낸 허위문서가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김명자, 과학과 신앙, '과학사에서 본 카톨릭의 기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36.
24) Giorgio de Santillana, The Crime of Galile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 p. 262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Op. Cit., pp. 13-14에서 재인용.
25) Charles E. Hummel, Op. Cit., pp. 14-15.
26) Ibid., pp. 136-137.
27) Boorsti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6월 16일로 기록된 교황의 선고는 모든 대안 가운데 가장 굴욕적인 것이었다.' Daniel J. Boorstin, Op. Cit., p. 63.
28) 김명자, Op. Cit., pp. 31-32.
29) Charles E. Hummel, Op. Cit., p. 133.
30) Ibid., p. 105.
31) Ibid., pp. 108-110.
32) Ibid., pp. 131-133.
33) 김명자, Op. Cit., pp. 35-36.
34) Charles E. Hummel, Op. Cit., p. 132.
35) 김명자, Op. Cit., p. 36.
36) Charles E. Hummel, Op. Cit., p. 135.
37) Ibid., pp. 121-122.
38) Daniel J. Boorstin, Op. Cit., pp. 62-63.
39) Charles E. Hummel, Op. Cit., pp. 141-142.
40) Ibid., p. 128.
41) 요한 바오로 2세, 과학과 신앙, '신앙과 이성은 결코 대립될 수 없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 12.
42) 폴 푸파르, 과학과 신앙, '갈릴레오 사건의 해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pp. 18-19.
43) Charles E. Hummel, Op. Cit., p. 129.
44) Daniel J. Boorstin, Op. Cit., p. 60.
45) 나는 조수의 운동에 관한 갈릴레오의 증명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대략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지구의 공전으로 인해 바닷물은 한 방향으로 쏠린다. 버스가 출발할 때 몸이 뒤로 쏠리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한편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해변이 바닷물이 쏠린 방향을 지날 때에 밀물이 되고, 그 반대 방향을 지날 때 썰물이 된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밀물은 지구의 정반대되는 위치에서 동시에 밀물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조수의 주기도 24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실제와는 다르다. 조수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뉴턴에 의해 주어졌으며 그 원인은 달의 인력 때문이다.
46) 폴 푸파르, Op. Cit., p. 19.
47) Giorgio de Santillana, Op. Cit., pp. xii-xiii의 내용을 Charles E. Hummel, Op. Cit., p. 144에서 재인용.
48) Charles E. Hummel, Op. Cit., p. 143.
49) 이것이 울퉁불퉁한 달 표면이나, 태양의 흑점이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반증이 되는 이유이다. 목성의 4개의 위성을 사람들이 믿지 않은 이유도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50) Ibid., pp. 31-32.
51) 행성의 원궤도의 중심이 지구와[또는 태양과] 일치하지 않고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한다. 김영식, 과학혁명, 민음사, 1984, p. 30-31.
52) 행성이 원궤도의 중심에서 보았을 때 등속운동을 하지 않고 그로부터 벗어난 점을 중심으로 그 각도에 있어서 등속운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김영식, Op. Cit., p. 31.
53) Charles E. Hummel, Op. Cit., pp. 40-43.
54) 김명자, Op. Cit., p. 33.
55) 필자는 개신교인이기는 하지만 카톨릭에 대해서 문제가 될만한 어떠한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편견이야말로 정말로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다.
56) 폴 푸파르, Op. Cit., p. 21.
57)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 9.
58) 폴 푸파르, Op. Cit., p. 17.
59) 여기서 폴 푸파르 추기경이 설명한 바는 위의 '벨라르미노 추기경'과 '과학적 측면'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비슷하다.
60) 폴 푸파르, Op. Cit., pp. 17-20.
61)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p. 10-12.
62) Ibid., pp. 13-14.
63) Ibid., p. 13.
64) Charles E. Hummel, Op. Cit., p. 113.
65) Mark A. Kalthoff, Man and Creation, 'God and Creation: An Historical Look at Encounters Between Christianity and Science', Hillsdale College Press, 1993, pp. 10-11.
66) Charles E. Hummel, Op. Cit., p. 146.
67) 요한 바오로 2세, Op. Cit., p. 10.
68) St. Augustinus, 오병학 임금선 공역, 참회록, 예찬사, 1991, p. 281.
69) Charles E. Hummel, Op. Cit., pp. 21-22.
70) 그렇다면 인식론적으로 보았을 때,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혹시 누군가가 물을지 모르겠다. 명백히 큰 차이가 있다. 이 질문은 마치 과학이론의 절대적 증명이 불가능한데 과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두 과학이론이 실제 세계에 대한 완벽한 상황을 알려주지는 못할지라도 분명 중요한 측면을 알려준다고 믿는다.
출처 - 창조지
예루살렘의 독특한 기후
(Jerusalem's Unique Climate)
Larry Vardiman, Ph.D.
추위로부터의 탈출
꽁꽁 얼어붙은 땅을 심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대지방의 겨울철 동안, 상쾌한 열대 해변에 대한 환상은 지친 직장인들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가까이에 모래사장이 있고 시원하고 푸른 바다와 작열하는 햇빛 속에서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아마도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또는 카리브 해안에서의 휴가가 그들에게 손짓할 것이다. 겨울철 북쪽지방의 추위, 바람, 눈을 피해 북부인들을 태양이 내리쬐는 열대지방으로 운송하는 것이 하나의 주된 산업으로 발전했다. 소수 여행자들은 이스라엘로 떠나는 여행을 이런 겨울의 혹독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여겼다.
몇년 전에 텔 아비브(Tel Aviv) 대학의 유대인 기상학자인 파인하스 알퍼트(Pinhas Alpert)는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는 시편 48:1,2절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를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터(situation)’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가 ‘노프(nof)’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단지 한 번만 나타나며, 그것의 설명은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nof’ 는 환경, 전경, 혹은 높은 곳이나 원거리에서 관찰되는 풍경을 의미한다. 알퍼트(1991)는 한 주석자가 그 단어가 ‘기후(climate)’를 의미한다고 제안했으며, 예루살렘의 기후가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 글은 예루살렘이 실로 독특하며 아름다운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업상이나 휴가차 왔던 방문자들에게도 주님의 특별한 축복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태양과 비의 이상적인 조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사막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하라 사막의 모래 벌판을 밟고 지나가는 낙타 캐러밴들의 사진과 그림들을 봐왔기 때문에, 그런 장면을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해석한다. 샌들을 신고 이스라엘을 가로질러 다녔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발 씻을 물의 결핍, 식수의 부족, 기근에 관한 성경 이야기들을 읽어왔으며, 모세 시대에 이집트 사막과 시내 광야에서 출애굽을 하던 할리우드 영화를 보아왔다. 이런 모든 이미지들을 통해 지독히 덥고 뜨거운 날씨와 내린다 해도 거의 적은 수량의 비를 연상케 되는 것이다.
네게브(Negev) 지역의 이스라엘 남부와 요단강 골짜기(Jordan River Valley) 동부에 매우 건조한 날씨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호수 근처의 중북부 연안과 예루살렘이 있는 고지들을 따라 위치한 지역의 기후는 훨씬 더 시원하고 풍부한 강수량을 보인다. 이스라엘 북부와 고지들이 있는 지역의 평균 연강수량은 보통 380mm(15인치)를 초과한다. 이스라엘의 이런 지역에서는 감귤류, 올리브류, 무화과류 및 곡류와 같이 풍부한 농작물들을 생산한다. 사막지역과는 달리, 이스라엘에서 이들 지역들은 굉장히 비옥하다.
이상적인 기후를 만드는 조건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도만 너무 높지 않다면, 많은 햇빛이 최우선 순위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한 햇빛이 너무 강해서 구름이나 비가 전혀 생기지 않으면 이상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 기후가 너무나 건조하고 덥기 때문에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열대 기후도 너무 습하므로 이상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적당한 양의 구름과 비, 그리고 많은 양의 햇빛이 잘 섞여진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이 받고 있는 햇빛과 비의 양은 이런 기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1의 X 축은 지구상에 있는 69군데의 기상 관측소에서 조사한 일조량이고, Y 축은 연간 강수량(mm/yr)을 나타낸다. 연간 3250 일조시간에서의 수직선과 연간 300mm 강수량에서의 수평선은 이 차트를 4등분으로 나눈다. 예루살렘의 두 관측소는 많은 양의 일조시간과 적당한 양의 강수를 가지고 있어, 이 도표의 오른편 상부에 속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이런 이상적인 조건에 접근하는 다른 유일한 관측소는 아리조나주의 플래그스태프(Flagstaff)로, 이곳은 예루살렘에 비해 상당히 높고 서늘한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의 기후
이스라엘의 기후가 오늘날처럼 항상 따뜻하고 건조하지만은 않았다. 성경의 몇몇 구절에 의하면 그 땅은 과거에 더 촉촉했으며, 오늘날 중동지역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관개수로 없이 농사짓기에 적합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세기 13: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애굽기 3:7,8)
지중해, 북아프리카, 중동지역 전반에 걸친 토지이용(land-use)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BC 1000년 경에 이 지역은 서늘하고 습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농작물들과 숲들이 무성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Crowley & North, 1991).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 전체의 호수 수면(lake levels)은 오늘날과 비교하면 ‘빙하기’ 때 더 높았다 (Street-Perrott & Harrison, 1985).
오늘날에는 사막이 된 북부 아프리카 지역 도처에는 농업과 초원지대가 흔했다. 무성한 초원 지역에서 서식하는 기린, 얼룩말, 사자 등의 암각화(petroglyph)가 사하라 중부의 바위투성이의 암석 노두(outcrops)에서 발견되었다. 사하라 사막을 찍은 콜럼비아 우주선의 레이더 영상은 과거의 많은 강우량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모래 아래에 묻혀있는 완전한 지류계(tributary system)를 가진 수로들을 보여주었다 (Jet Propulsion Laboratory, NASA).
전 세계 기후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 ‘빙하기(Ice Age)’ 동안에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기후는 완전히 달라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북미와 북유럽을 덮은 빙상은 북반구에 제트기류를 야기시켜 폭풍의 궤도(storm track)를 남쪽으로 더 이동하도록 하여 북부 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이동하도록 했다. 이렇게 남쪽에서 부는 폭풍 궤도는 이스라엘 도처에 습하고 시원한 기후를 만들어냈었다 (Kutzbach & Wright, 1985).
만약 ‘빙하기’가 창세기 대홍수에 이어 기원 전 3000년과 1000년 사이에 발생했었다면, 그 다음 아브라함 시대 동안의 기후는 오늘날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오늘날 사막이 존재하는 남부 이스라엘과 요르단 열곡(Jordan Rift Valley)에서의 기후 변동이 아마도 가장 컸을 것이다. 북부 이스라엘과 고지들을 따라서는, 강수량의 차이가 그만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기후 변화가 오늘날보다 극단적이었을 같다. ‘빙하기’가 후퇴함에 따라, 온도차가 크고 습도차가 큰, 매우 변동이 심한 기후를 초래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요셉과 엘리야와 같은 여러 족장들의 시대 동안 성경에 기술된 가뭄, 기근, 전염병, 그리고 다른 극단적인 날씨 현상들과 일치될 수 있다.
날씨와 기후의 차이
날씨(weather)는 매일 매일의 기상 현상인 반면에, 기후(climate)는 일정한 지역에서의 전반적으로 장기적인 기상 현상이다. 비록 예루살렘의 기후가 이상적일지라도, 이것이 온도와 강수량에 있어서 극한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예를 들면, 1998년 ICR에서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동안, 강한 한랭전선의 발달로 인해 이스라엘 전 지역에 강한 바람과 기온 하강 및 눈이 내렸었다. 40년 만에 가장 강한 바람(50노트 이상)이 몰아쳤고, 예루살렘에는 15cm의 눈이 내렸다. 비록 일반적인 기후가 매우 상쾌할지라도, 예루살렘에서 매년 눈을 경험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아름다운 기후
하지만, 오늘날 예루살렘은 전반적으로 균일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곳은 이상적인 기후를 경험하기에 특별히 선호되는 지역이다. 예루살렘은 그렇게 덥지도 않고, 그렇게 춥지도 않으며, 그렇게 건조하지도 않고, 그렇게 습하지도 않다. 예루살렘의 기후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성경을 확실히 뒷받침 해준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시편 48:2).
References
.Alpert, P. 1991: The Uniqueness of the Jerusalem Climate. Bulletin of the American Meteorological Society, vol. 72, no. 2, pp. 228-231.
.Crowley, T.J. and G.R. North, 1991: Paleoclimatology, Oxford Monographs on Geology and Geophysics #18, Oxford University Press, 349 pp.
.Kutzback, J.E. and H.W. Wright, 1985: Simulation of the climate of 18,000 yr BP: Results for the North American/North Atlantic/European sector and comparison with the geologic record. Quaternary Science Reviews, 4, 147-187.
.Street-Perrott, F.A. and S.P. Harrison, 1985: Lake levels and climate reconstruction, in Paleoclimate Analysis and Modeling, A.D. Heckt, Ed., John Wiley and Sons.
* Dr. Vardiman is Administrative Vice President and Chairman of the Astrogeophysics Department at ICR.
번역 - 한국창조과학회 대구지부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320.htm
출처 - ICR, Impact No. 320, 2000.
어떻게 인종들이 달라지게 되었는가?
: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의 기원
(How Did Human “Races” Develop?)
Walt Brown
단지 하나의 인종이 있다. 그것은 사람 인종(human race)이다. 오늘날 '인종(race)' 이란 단어는 피부 색, 눈 모양, 머리카락 등의 육체적 특성이 구별되는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의미는 늦은 1800 년대에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일어났다. 육체적 특성과 관련된 인종이란 단어는 성경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1 대신 '민족(nation)'이란 단어는 200번 이상 사용되어 있다.
인종이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아이디어이다. 비록 특성들이 폭넓게 다양하다 하더라도, 소위 인종 사이에의 유전적 분자적 변이(variations)는 사소한 것으로 확인되어졌다. 인간의 변이는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과 비교했을 때, 거의 없거나 미미하다. 예를 들어 개(dog)의 가계에는 매우 다양한 특성들이 존재한다. 가축으로 길러지는 개에 있어서 대부분의 다양성은 과거 300년의 동안에 만들어졌다. 개들은 백색, 흑색, 적색, 황색, 점박이, 작은 것, 큰 것, 털이 있는 것, 털이 없는 것, 귀여운 것, 귀엽지 않은 것 등이다. 기질과 능력 또한 매우 다양하다. 길러지는 개는 늑대, 코요테, 딩고, 자칼 등 개 종류(kind)의 거의 모든 종들과 교배할 수 있다.
생명체의 각 종들에 들어있는 방대한 양의 유전자(genes)들은 후손들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이러한 변화들을 허락한다. 이러한 설계된 특성이 없었다면, 멸종은 훨씬 더 흔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게다가 각 종안에 변화가 없었다면, 생물체들은 매우 단순한 모습들이었을 것이다. 다음의 3 가지 메커니즘은2 아마도 대부분의 '인종적'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이들 모두는 홍수 이후인 대략 5000 년 동안에 일어났다.
그림 148 : 몇몇 인종들의 얼굴들. 첫째 열 왼쪽부터 일본, 티벳, 보르네오, 네덜란드, 둘째 열은 아일랜드, 중국, 르완다, 한국, 셋째 열은 뉴질랜드, 발리, 오키나와, 이스라엘, 넷째 열은 미국, 호주, 인도, 이집트, 다섯째 열은 몰루카, 캐나다, 그리스, 과테말라인의 얼굴들이다.
옷과 관계없이 헤어스타일, 나이, 피부색이 다른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은 얼마나 다른가? 대륙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똑같이 웃고, 똑같이 운다. 우리의 차이는 매우 적다. 우리들의 같은 점은 너무도 많다.
1.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이 잘 확립된 현상인 자연선택은 비록 그것이 소진화(microevolution)의 중요한 메커니즘이기는 하지만, 일 세기 동안의 실험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진화(macroevolution)의 메커니즘은 아니다. 자연선택은 부모의 어떤 유전자들이 후대에서 여과되는 현상으로, 약간 다른 특성을 가지지만 유전적 변이가 매우 적은 후손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적도 근처에 사는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피부암과 같은 심각한 위험에 보다 민감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생식 가능한 시기까지 살아서 그들의 후손들에게 밝은 색의 피부색 유전자를 전달할 기회를 적게 가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태양 빛의 흡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피부에서 형성되는 비타민 D3의 결핍 가능성이 크다. 극지방에서 이것은 구루병(rickets)의 원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세대가 지난 후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적도지방 근처에서, 흰 피부의 사람들은 고위도 지방 근처에서 많아졌을 것이다.
예외도 있다. 에스키모 사람(Inuits)들은 어두운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북극의 위도에 산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 음식에는 많은 비타민 D3를 포함하고 있는 물고기-간 기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구루병을 예방했을 것이다.
2. 문화적 선호 (Cultural Preference). 이것은 좋아하거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싫어하는(편견과 같은) 형태에 따라 일어난다.
좋아함. ” 제 눈에 안경'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문화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 종족 계통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거위들에서 확인되었다. 파란 눈 거위(blue snow geese)는 북극의 한 지역에서 산다. 그리고 하얀 눈 거위는 또 다른 지역에서 산다. 각 집단의 알들이 한 부란기에서 부화되었다. 거위 새끼들은 반대 색을 가진 부모들에게 입양되어 키워졌다. 어린 거위들은 후에 자라서 양부모의 색깔을 가진 거위들과 짝지으려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실험에서, 양부모는 분홍색으로 색칠되었다. 색깔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음에도, 새끼 거위들은 자라서 그 색깔을 가진 짝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래된 노래 ” I Want a Girl Just Like the Girl That Married Dear Old Dad' 는 이러한 점을 나타내고 있다.
싫어함.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매우 심하다. 육체적 모습에 기초한 편견은 전쟁, 학살, 강제 격리, 자발적 분리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태인들과 몇몇 인종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키가 크고,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리안 종족에 대해 극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틀러의 인종에 대한 극도의 편견은 유태인 종족의 감소와 아리안 종족의 증가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자발적 분리의 예는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다. 평균 키가 135cm 정도인 피그미(Pygmies) 족은 간혹 210cm의 큰 키를 가지는 와투시(Watusi)족과 분리되어 살고 있다. 그러나 두 종족은 서로 수백 마일 이내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것들과 수천년 동안 계속된 수많은 다른 편견들은 많은 종족들을 육체적 모습에 의해 분리시켜 놓았다.
3. 소수의 고립된 인구집단들. 전체 인구 집단, 또는 여러 생물체들의 전체 집단은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집단 내에 가지고 있다. 만약 이 집단에서 소수가 고립된 지역으로 (예로 섬과 같은) 이동되었다면, 새로운 그룹은 전체 집단에 비해 매우 적은 유전적 특징(또는 유전형질의 적은 범위)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세대가 흐른 후, 섬에는 원래의 집단과는 다른 종족이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리석(marbles, 반은 흰색, 반은 검정색)으로 채워진 통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자, 각 대리석이 사람을 나타내며, 대리석의 색깔은 사람의 피부 색깔에 대한 유전자를 나타낸다고 생각해 보자. 만약 일부의 대리석이 무작위로 취해져서 격리된 섬들에 놓여진다면, 그 섬들은 한 색깔의 대리석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탑 사건 이후 사람들이 분산되고 고립되었을 때도 어느 정도 유사할 수 있다. 각 사람들은 피부색깔에 대해 여러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남편과 아내가 같은 피부색(검은, 또는 흰)의 유전자를 가진 채 고립되었다면, 그들의 후손들은 똑같은 피부색을 가지는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다른 유전적 특성들도 마찬가지로 대리석의 색깔로 설명될 수 있다.
실제, 이 과정에 대한 유전학은 이러한 간단한 설명보다는 더욱 복잡하다. 예를 들면, 피부색을 결정하는 데는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세 가지의 유전자가 관여한다. 또한 수천의 종족들이 있다. 작은 그룹들이 큰 집단에서 떨어져 나갔다면, 그들의 각각은 지리적으로 격리된 지역에서 제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특성들이 쉽게 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수 후 여덟 명의 생존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해 흩어질 때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창세기 10-11장에 나타나는 노아의 후손들의 목록에서부터, 우리는 초기의 이동 형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셈의 직계 후손들은 일반적으로 아라랏산 근처(오늘날의 터키 동쪽)에 머물렀고,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했다. 함의 후손들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반면에 야벳의 후손들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의심할 바 없이, 많은 작은 그룹들이 고립된 지역에서 정착하면서, 그들의 독특한 유전적 특성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발현되었을 것이다.
이 3 가지 메커니즘(자연선택, 문화적 선호, 고립된 인구집단)을 이해하면서, 우리는 이제 몇가지 흥미로운 질문들을 해볼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비슷하게 생겼을까? 분명히 그들의 유전자는 오늘날 모든 종족들(아마도 사라진 다른 종족들까지)이 가지고 있는 모든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가지고 있었던 유전자들의 대부분은 물론 보여지지(발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유전자들이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아담과 하와는 서로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유전학적으로 아담과 하와는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고, 중간의 어떤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담의 히브리어 말은 '붉음(redness)'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가 '붉은(red)', '피를 보다(to show blood)'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담의 피부색은 미국 인디언의 피부색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 140 여년 동안 진화론은 매우 다른 한 그림을 그려왔다. 사람들의 조상은 원숭이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추정해왔다. 진화론에 의하면, 일부의 초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가지가 분리되어서, 그들이 다른 육체적, 정신적, 행동적 특성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민족들을 비인간화 시키고 있는, 그리고 매우 편견적으로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인종우월주의(racism)인 것이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을 인종우월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비록 다윈과 그의 추종자들은 인종우월주의자 였지만). 인종우월주의는 오늘날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대중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 이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진화론은 인종우월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공해 왔던 것이다.3
창세기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 노아와 그의 부인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사촌이라는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고 행동한다면, 세계는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The word 'race,' as applied to groups of people, is never used in the King James translation and is seldom used in modern translations. The two or three uses in these modern translations come from Hebrew and Greek words that mean 'family' or 'offspring,' not a variety or subspecies.
2. A fourth mechanism may play a role. Experiments with a few plants and animals have shown that a hostile environment can switch on preexisting genetic machinery in a parent, so offspring are better protected. (See Item 2 on page 6.) This may partially explain skin color variations in humans.
3. 'Biological arguments for racism may have been common before 1859, but they increased by orders of magnitude following the acceptance of evolutionary theory.' Stephen Jay Gould, Ontogeny and Phylogeny (Cambridge, Massachusetts: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77), p. 127.
* Roger Lewin, Bones of Contention (New York: Simon & Schuster, Inc., 1987), pp. 266-267.
*참조 : 흑백 쌍둥이와 인류의 기원.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37&bmode=view
흑백 쌍둥이가 태어났다.
http://creation.kr/Variation/?idx=1290378&bmode=view
다른 피부색의 쌍둥이가 연속해서 태어났다.
http://creation.kr/Variation/?idx=1290401&bmode=view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reationscience.com/onlinebook/FAQ310.html#wp1249448
출처 - CSC
저희가 별을 보고 2 (When They Saw the Star)
: 베들레헴 별에 관한 과학적 추적
Dr. Henry M. Morris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태복음 2:10)
”When they saw the star, they were overjoyed” (Matthew 2:10)
(4) 그의 별 (His Star)은 과연 진짜 별이었을까?
신성이나 초신성은 원래 창조 주간의 네 번째 날에 창조된 기존의 별들로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갑자기 폭발하는 별을 일컫는다. 하지만 신성의 폭발은 아주 드문 경우다. 어쨌거나 보통의 별이 갑자기 엄청나게 광도(光度)를 높이며 수개월 동안 폭발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그 빛이 사그라진다.
초신성의 폭발은 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어쨌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발생하기 때문에, 점성술에서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 은하계 안에서 초신성의 폭발의 기록은 겨우 두 세 번뿐이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경우가 중국의 천문학자들이 AD 1054년에 보고한 예이고, 그 다음 것은 티코 브라헤(Tycho Brahe)가 AD 1572년에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번의 경우는 케플러(Kepler)가 AD 1604년에 보고한 경우이다. 그밖에 몇 번의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대형 망원경의 도움으로 관찰된 것들이었기에 그 Magi 들이 보았던 별에 해당되지 않는다.
비록 그리스도의 탄생 당시 가시적인 초신성의 폭발이 있었다는 확고한 공식적인 천문학사 중에 기록은 없지만, 그와 같은 별의 출현이라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소임으로는 더없이 적절했을 것이다. AD 1054년 이전에도 초신성의 폭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존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그냥 침묵시키려 해서 생기는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무려 50년 동안 Royal Greenwich Observatory의 태양부(太陽部)의 총감독으로 있었으며, 또 영국의 천문관측소의 총재직에 있던 위대한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E.W. Maunder)는 그와 같은 별(그 당시는 '새로운 별' 또는 '임시 별'이라고 불렸다)이야말로 베들레헴에 나타났던 그 별에 대한 유일한 논리적인 설명을 가능케 하는 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1908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천문학 그리고 성경(Astronomy and the Bible)'에서 한 장(chapter)을 할애하여 이 주제를 강하게 주장했다.
사실상 다른 곳에서도 희미하게나마 그 별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 별에 관한 언급은 오직 마태복음 2:1-12절에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초기 크리스천 저술가들은 이 이야기에 매료되어, 자기들 나름으로 성경 밖의 자료들을 들춰서 당시의 사건을 조사했던 것 같다.
한 예를 들어보면, 한때나마 신약성경의 저자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107년에 사망)는 그 별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별은 너무도 밝게 빛나서 하늘에 있는 그 모든 별들의 빛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 새로운 모습은 가히 흥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야고보의 원복음서(The protoevangelium of James)로 알려져 있던 성경의 외경에 담겨있는 기록은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했다는 말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우리들은 많은 별들 속에서 빛나던 믿을 수 없이 큰 별이 다른 별들의 빛을 흐리게 하여 마침내 더는 빛이 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스라엘 왕이 태어났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AD 4세기 초에 활동하던 박학다식한 교회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자기가 살던 시대보다 몇 세기 전에 있던 문헌들에 대하여 상당한 연구증거를 남기면서, ”그 별은 하늘에 있는 보통의 빛들 속에 새롭고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통의 별들 속에 섞인 그 별은 진정 이상하고 낯설었다. 알려진 그 어떤 별과도 전혀 닮지 않았으며 새롭고 신선한 별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 맥가이버(Robert mcIver)는 이 주제를 최근 30여 년 동안이나 조사한바 있다. 그는 1998년에 출판된 자기 저서 '베들레헴의 별 - 메시아의 별 (Star of Bethlehem - Star of Messiah)' 에서 중국과 한국의 천문학자들이 각기 그리스도의 탄생 즈음에 관측되었다는 비정상적인 새 별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그때 즈음에 관측되었다는 이상한 별을 묘사하고 있는 로마의 지하묘지의 벽화와 여러 나라의 주화 속에 그려진 그림에 관해서도 검토했다. 그는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 별이 관찰되었을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가 제시하는 증거들의 많은 부분이 그와는 달리하는 의견에 취약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은 말고도,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있었다는 이상한 새 별에 대한 징후들이 전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최소한 흥미진진한 우연의 일치이다.
어쨌거나, 크리스마스 별은 두 개나 그 이상의 행성의 합이라든가, 하층 대기권에 생긴 어떤 움직이는 특별한 불빛이라고 하기보다는 진짜 별이었다는 주장이 독단에 흐를 가능성이 없는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별과 별이 아닌 다른 것과의 차이를 소상히 알고 있을 Magi들은 결국 그것을 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페르시아의 Magi들은 점성가들이기 보다는 유능한 천문관측자들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아니었다면 (어느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들은 배화교도(拜火敎徒; Zoroastrians)였으리라. 그리고 배화교는 많은 측면에서 유대교와 닮았다. 그 중에서도 점성술에 대한 혐오감이 그랬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예언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특히 이스라엘에 위대한 왕이 오실 것을 알리는 새로운 별에 관한 발람의 예언을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발람 그 자신도 아마 Magi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며, 어쩌면 Magi라는 신분계급을 창시한 사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배화교도들은 심지어 발람의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의 기간에 활동하던 초기 Magi들 중의 한 부류였을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성령에 감화된 발람의 예언과 성령에 감화된 마태의 역사기록은 둘 다 그것을 하나의 별 - 실은 '그의' 별! - 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 때에 진정 새로운 별을 하나 창조(하려고만 하셨다면 할 수 있었을 테지만)하셨던 것이 아니었다면,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신성의 가능성보다 더 가능성이 농후한)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현실적이다. 초신성이란 무엇인가? 이미 창조된바 있으면서도 일찍이 알려지지 않던 별 하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별이 아니던가!
앞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이 설명은 이미 고인이 된 영국의 천문학자 몬더(E.W. Maunder)가 내린 결론이다. 그는 그 별을 단순히 '새 별'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신성(nova)이라든가, 초신성(supernova)이라는 학술어가 그가 살던 시대엔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1976년 12월판 Science Digest 지에 실린 '베들레헴의 별(The Star of Bethlehem)'이라는 기사에서 제임즈 멜라니(James Mullaney)는 ”이 문제를 연구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크리스마스 별에 관해서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거의 모든 설명들 가운데서 신성이 아니면, 초신성이었다는 설명을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의견으로 여기고 있다.”고 하였다(p.65).
멜라니는 또 한번 강력히 자기 소견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 ”진실로 왕의 탄생이 아니고는 그렇듯이 경이로운 천상(天上)의 고지서(告知書)를 보내올 만큼 중요한 사건이 있었겠는가?!”(ibid). 하나의 초신성의 폭발로 방사되는 에너지는 폭발 정점 때에는 우리의 은하수에 있는 별 전체가 방사하는 에너지의 총합보다도 크다! 창조주께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들 속에 등장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당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능한 가장 장엄한 고지 방법을 선택하셨을 것이 아니겠는가! 천군천사가 그 현장에 나타나서 알리기를 - 온 세상에 보내준 강대한 별이다! 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와 같은 신성의 폭발원인과 후속 효과에 대한 세부 내용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아직까지는 모호하다. 그리고 신성의 발생 위치와 시점은 전적으로 예측불허이다. 그렇다면 발람은 메시아의 탄생이 있을 때, 신성의 폭발이 있을 것을 1400년 전에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을까?
그 정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이것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점성가들이 혜성이나 유성들, 그리고 행성들의 합은 물론 '새' 별들까지도 위인들의 부침(浮沈)과 연관시켜 말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 어떤 점성가도 수백 년 후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한 자는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라도 원하실 때 어느 별이고 선별하여 폭발시킬 수 있으셨을 것이고, 또 원하시면 먼 훗날에 세워놓으신 사건을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예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설명 - 발람의 유명한 예언(비록 발람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반(反)하는 예언이었지만!)과 하나님 당신 자신이 선택하신 때에 기적적인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 예언을 결국 이루셨다는 설명 - 보다 더 훌륭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관절 Magi들은 어떻게 이 별, 즉 이 초신성(그 별이 초신성이었다는 가정 하에)이 그의 별━오래 전에 발람이 예언했던 별━이었다는 것을 알아보았을까? 요컨대 다른 '새 별들'이 때때로 발생했다면, 그 별은 절대로 최초의 초신성은 아닐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혹시 그 별이 최초의 초신성은 아니었을까? 옛날에 있었던 혜성들과 행성들의 합의 경우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일종의 점성술적인 전조로 간주되어왔었다. 그러나 옛날에 그 어떤 형태로건 초신성이 있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발견된 바는 없다. 사실상 성경의 연대기는(진화론적 천문학자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별들은 창조된 지가 겨우 주전 수천 년밖에 안 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별들은 대체적으로 그렇게도 빨리 폭발을 수반하는 분열의 과정에 함입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렇게 제안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 초신성의 발생을 촉발하지 않으셨다면, 그 별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그 때 이래로 많은 신성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또한 몇 번의 초신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와 같은 별들을 만드신 데는 그런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리려고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별들은 최소한 그의 창조사역이 과거에 완성되었다는(창세기 2:1-3) 그의 계시된 진실성을 최소한 공고히 하고 지지한다. 그의 창조 내용은 현재 양적으로 보존되고 있으나, 질적으로는 엔트로피 원리에 의해서 쇠퇴하고 있다(시편 102:25-27을 비교하라). 이 원리는 죄로 인해서 인간의 모든 영역에 내린 하나님의 최초의 저주에 의해서 설정되어있는 것이다(창세기 3:17; 로마서 8:20-22 등). 그리고 이 원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간에 Magi들은 (그리고 그들 말고도 그의 별을 고대하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도 또한) 이 새로운 별이야말로 발람이 예언했던 그 별이라고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니엘 선지자의 7주간의 예언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예언을 알고 있었을 그들은, 주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상적인 천문관측을 통하여 그 별의 출현을 살펴보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별은 장차 구세주를 보내겠다던 하나님의 최초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어떤 한 특정 성좌에서 발생했을 개연성이 매우 현실적이다. 바로 이 'protoevangel (최초의 복음)'이 뱀(사탄)과 여자의 후손(그리스도)과의 사이에 벌어질 장구한 원수지간의 갈등을 예언했던 것이다. 뱀은 여자의 후손에게 상처를 입히겠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가 사탄을 영원히 멸할 것이다(창세기 3:15).
이 태초의 약속이 성좌들 안에 있는 많은 별-그림(相)들 속에, 특히 황도대의 12궁성과 그것들의 데칸(decans, 12궁성과 관련된 성좌들) 속에 잘 반영되어있다. 이 별자리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은 후대의 점성가들이 부여한 점성술적인 의미로 말미암아 잘못 훼손되었지만, 실제로는 점성가들의 해석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성경의 여러 책들 자체가 그 별자리 궁성들과 그들의 최초의 의미들은 본래가 하나님 당신 자신께서 설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고대 족장들(특히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 [유태인 역사학자 Josephus의 말에 의하면])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별들을 창조하시고 그 별들의 광명으로 ”징조(徵兆)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하셨다 (창세기 1:14). 그 다음, 욥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하여, ”12궁성(Mazzaroth)을 계절에 따라 이끌어낼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었음(욥기 38:32)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마자로스(Mazzaroth)는 특별히 황도대의 12궁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좌들을 일컫는데, 예컨대 처녀자리(Virgin), 저울자리(Balances), 물고기자리(Fishes), 사자자리(Lions) 등등을 대표하도록 지정되어있는 것들이다.
어떤 성좌들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언급된 것들도 있다━즉, '아르크투루스(목자 별자리)' '오리온 자리' '플레이아데스 성단'(욥기 9:9), '날랜 뱀' 자리(욥기 26:13), 그리고 그밖에 여럿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별들의 이름도 지으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시편 147:4; 이사야 40:26). 이에 관련된 성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좌들의 이름을 지으신 데는 어떤 목적하는 바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 목적은 결코 점성술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하늘 위에 당신의 목적하는 바와 약속하는 바를 새겨놓으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다. 약속과 목적하는 바가 언제나 모든 나라의 백성에게, 특히 당신의 말씀이 글로 기록되기 전부터 알려지게 하려하셨다는 추론이다. 그렇게 해서, 태초부터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시편 19:1, 2).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점성가들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고대 성좌들은 하나님이 주신 태초의 약속을 지금도 명료하게 발하고 있다. 위대한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W. Maunder)가 이 점을 주목하였음은 세대를 통해 이어오는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처녀궁성은 처녀의 몸에서 출산되실 구세주의 약속을 암시하고 있음은 '여자의 후손' 이라는 바로 그 구절 속에 함축되어있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닌 한 여자가 출산할 후손이기 때문에 한 여자만이 그 기적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자별자리의 궁성은 정복자다운 사자가 도망치는 뱀을 죽이는 그림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다른 별자리 궁성에서 그림으로 연역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오늘에 이르러 그 별이 나타났던 성좌가 어느 성좌였었는지를 꼬집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일도 분명치 않다. 그리고 그 별이 출현한 성좌 또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별은 약속된 구주의 오심을 묘사하는 성좌로 Magi들이 알고 있던 그 성좌에 출현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 박사들은 신실한 사람들로서 창조의 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별들에게 부여하셨던 애초의 징조와 상징에 친숙했을 것이기에, 하늘에 갑자기 불타듯 빛나는 이 새 별이 '그의 별', 즉 약속된 왕의 탄생을 선포하는 별이 틀림없다고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그를 찾아서 경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까지 긴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그런 여행길은 하루 낮 밤에 준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행할 시종들과 호위병들의 진용을 조직하는 한편 일행의 보급품을 마련하고 거룩한 아기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는데도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마도 같은 목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Magi들과 회합을 위한 준비에도 많은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들은 마침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드디어 긴 여행길을 떠났던 것이다.
(5) 그의 별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초신성들은 여러 달 동안 빛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빛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것은 붕괴 과정에 있는 별로서 결국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또한 지구가 태양 주변의 궤도를 공전함에 따라서 밤하늘도 변한다. 어떤 한 해 동안 하늘에 보이던 별들이 낮 시간동안에 태양 광선 때문에 가려지다가 그 하루 해가 저물 무렵에 자취가 없어지는 수도 없지 않다. 아마도 박사들이 보았던 별도 이렇게 되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긴 여로에서 그 별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별이 장차 오실 이스라엘 왕을 선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할 무렵이면 그 아기가 예루살렘에 태어났을 것을 예상하였기에, 그들은 그 별의 더 이상의 안내가 없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마리아와 요셉은 요셉의 조상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실시하고 있는 로마 당국의 호구조사에 등록하기 위하여 갈릴리의 나사렛 집을 떠나 유대 땅으로 길을 떠났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당도하자 때맞춰 아기 예수가 탄생하였다.
비록 베들레헴의 하늘에 나타난 천군들이 선포하고 또 새 별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지만, 그 어느 선포도 예루살렘을 특별히 동요케 하지 않았었다. 목동들이 천군천사한테서 들은 그 소식을 베들레헴 근처에 퍼트리고, 나중에는 시므온과 안나가 그 소식을 예루살렘 근교(누가복음2:17; 2:38)에 퍼트렸지만, 그 사건의 중요한 참 뜻을 인식했던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기도 할 것이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사람이 벌써 여럿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 별을 보았을 사람이 많았을 테지만, 그들도 그 별과 메시아와 연관된 흥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점성술이나 천문학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발람의 별에 관한 예언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발람이 모세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살해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그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던 때는 그들이 처음으로 그 별을 본지 여러 달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어쩌면 두 해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중에 헤롯왕이 아기들을 살해한 때를 감안해 추산된 수치다. 참고: 마태복음 2:16). 예루살렘에 도착한 박사들은 갓난아기 왕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모셔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헤롯왕이 아기 왕이 있는 곳을 알려줄 수 있을 것으로 추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그냥 '소동'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그들은 파르티아 인과 페르시아 인이 유대 나라의 옥좌에 이 새 왕을 옹립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관들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증거로 미가 5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자, 헤롯은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갓난아기를 찾아보게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6마일 떨어진 베들레헴을 향하여 길을 떠나자 갑자기 그 별이 다시 나타났다.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에는 그 별은 보이지 않았었지만, 여전히 그들을 앞서 가고 있다가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으리라. 아마 꼭두새벽 하늘이었던 것 같다.
성경의 말씀으로는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고 되어 있다(마태복음 2:9). 이 말로 미루어보아 그 별이 천정(天頂)에 다다랐을 때가 바로 베들레헴의 중천에 왔던 때에 해당한 것 같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는 길에 특별히 길잡이 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별이 다시 나타나자, 그들은 ”가장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내린 성경해석이 옳았을 뿐만 아니라, 이 별이야말로 진정 그의 별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정말 같은 옛날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그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들어서자마자, 어느 우물에 비치는 별의 반사를 보고 그들은 그 별이 실질적으로 베들레헴 마을의 중천에 수직으로 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줄거리다. 이 이야기는 비록 확인된 바는 없지만,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Maunder)에 의해서 진실한 이야기로 인용됐었다. 물론 성경은 그 별이 실질적으로 그 집 위에 머물렀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곳이 큰 마을이 아니었기에 마을 사람들한테서 아기가 있는 곳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를 본 그들은 ”엎드려 그를 경배하였다” (마태복음 2:11).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참조 : What Was the Christmas Star?
https://answersingenesis.org/holidays/christmas/what-was-the-christmas-star/
The Star of Bethlehem : A Supernatural Sign in the Heave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star-of-bethlehem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home/resources/resources_tracts_whentheysawthestar/
출처 - IC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