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때
(When God Became Man)
Henry M. Morris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
(요한복음 1:1,3,14).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는지, 그 육화(肉化)의 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유한자의 이해력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교리를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기뻐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그 교리를 믿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요한일서 4:3) 라고 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한복음 8:24) 하고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확실한 많은 증거로…”(사도행전 1:3), 특히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셨다가 다시 몸이 살아나신 증거로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도행전 17:31) 하셨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명의 창조주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었다. 석가모니도 죽었다. 마호메트도 죽었다. 그리고 공자와 플라톤은 물론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위인이나 성자들도 다 죽었다. 그러나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베드로전서 3:18) '육화의 말씀'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요한계시록 1:18).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7:25).
창조주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만물이 다 그[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고”(골로새서 1:16) 지어졌다. 그가 ”육신으로 태어났을 때” 스스로가 그 안에 거하실 바로 그 육신을 지으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육신의 탄생은 인간 생식의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육신의 탄생일 수 없었다. 그것은 영의 본래적인 죄, 또는 육체나 정신의 원초적이며 유전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은 흠집이 전혀 없는 육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육체이어야만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오래 전에 아름다운 에덴동산에다 지으셨던 최초의 사람의 육신과 같이 완전무결하야만 하였다. 그는 사실상 ”마지막 아담” (고린도전서 15:45) 으로 불려질 것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 아담”이 지어졌던 것처럼 지어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초의 아담과 최후의 아담과의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최초의 아담은 지어질 때에 이미 성숙한 남자로 창조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담은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어야만”(히브리서 2:17) 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잉태에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은 … 자로되 죄는 없으신” (히브리서 4:15) 이었다. 특히 그의 피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이…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19) 이어야만 하였다. 그것은 그 피가 ”하나님께 드린 흠 없는 피어야 …”만 하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14).
그와 같이 해서 두 번째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어 처녀의 자궁 안에 착상시켜야만 하였다. 이 사실은 최초의 아담이 세상에 죄와 죽음을 초래케 한 이후 제일 먼저 하신 바로 그 약속의 내용이다. ”여자와…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노라 … ”(창세기 3:15)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거짓말로 하와를 꾀어 죄로 인도한 사탄에게 주는 약속이었다. 두 번째 아담의 경이로운 육신은 모든 인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씨에서 자라지도 않을 것이며, 여자의 난소에서 자라지도 않을 것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어쩔 수 없이 죄와 돌연변이를 수반하는 태아가 생기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별히 창조주 당신이 손수 지으시는 씨이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씨는 처녀의 자궁에 착상되야만 했다. 그 곳은 당장에 그의 '성소(tabernacle)'가 되어 거기서부터 자신의 행성인 이 지구에 오셔서 당신이 구원하려는 인간들과 함께 33년 동안 살았던 것이다.
”내가 왔나이다 …” 하고 그는 나중에 다윗의 입을 통하여 약속한 것이었다 (시편 40:7). 이사야를 통하여서 그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리고 그 아기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이사야 7:14, 9:6)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중에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선지자는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예레미아 31:22) 라고 하였다.
선택된 여인 안에서 '새 일이' '창조될' 것이라는 말을 주목함이 마땅하다. 때가 이르매 천사가 마리아에게 확언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하였다. 그런 다음 ”세상에 임하실 때에…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브리서 10:5). 무엇보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예비하였도다(희랍어 katartizo)” 라는 똑 같은 말을 사용한 점으로서, 그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히브리서 11:3)고 증언하고 세계를 지으신 바로 그 살아계신 말씀이 그 자신의 인간의 육신도 지은 것을 인정할 때에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그 조그만 자궁 안에 는 그 자신이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정보뿐만 아니라, 창조와 보존과 전 피조물의 구속의 정보까지도 담겨있었다. 그것은 창조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의 것이었으며, 또 곧 구속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배(倍)로 그의 것이 될 것이었다.
창조주는 언제 사람이 되었는가?
창조주의 육화를 12월 25일로 정하고 그날에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축하하는 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인 관례로 되어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집단들이 다양한 날들을 기념하기도 하고, 여러 작가들은 제 각기 다른 날들━예컨대, 정월의 어느 날이든가, 또는 춘삼월이나 시월의 어느 날을━권장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전혀 기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12월 25일을 예수탄생의 날로 정한 것이 4 세기 경의 어느 때부터였다. 사실상 크리스마스의 행사는 근본적으로 고대 로마의 농신제(農神祭; 12/17일 추수감사제)나, 또는 한 해 중에서 밤 시간이 가장 긴 동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이교도들의 축제행사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명백한 사실은 그의 탄생일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제에 관한한 어느 누구도 독단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매우 흥미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던 날 밤, 목동들이 들에 나가서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고 하였다 (누가복음 2:8). 이 사실로 해서 그 때가 늦은 동짓달 어느 날일 가능성은 희박하고, 차라리 이른 가을 어느 날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의 탄생도 또한 가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기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특히 영국이나 서유럽에서는, 미가엘마스로 불리는 고대 크리스천의 축제일인 9월 29일을 축하하였다는 것은 의미 있게 볼만한 대목이다. 이 이름은 후대에 와서는 어떤 법정이 개정 중에 있는 가을의 어는 시기를 식별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미가엘마스(Michaelmas)” 라는 이름은 ”미가엘이 보내졌다”는 의미로서 ”크리스마스”의 뜻이 ”그리스도가 보내졌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가엘은 목동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언명하기 위하여 천국에서 보내진 ”여호와의 천사” (누가복음 2:9)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가엘마스의 축제는 이와 같이 해서 인간으로 탄생하는 예수를 환영하기 위하여 보내진 미가엘과 천사들의 내왕을 축하하려고 시작한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이 미가엘마스는 바벨론 포로 시절 이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을이면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기 위하여 축제를 벌이는 위대한 초막절보다 몇 날 앞서 벌어지던 축제였다. 초막절 때에는 이스라엘 가족들이 한 때나마 천막, 즉 '초막(tabernacle)'에서 지내는(dwell, 거하다) 습관이 있었다.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dwelt)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거하다 (dwell)' 라는 뜻을 담은 통상적인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글자 그대로 말씀이 (즉, 창조주가) 한 때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다' 라는 말을 'tabernacled' 이라고 명사를 과거형 동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즐거운 초막 축제에 맞게 적절한 때에 이 세계에 오시기라도 한 것 같았다. 미가엘과 천사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온 백성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라고 노래한 것이 그것을 말한다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무리 영광된 일이라고 하여도, 이 탄생일이 그의 육화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는 아홉 달 전에 이미 ”사람들의 형체와 같이 되어”(빌립보 2:7) 있었다. 그 때는 그가 당신 스스로의 육신을 지으시고 마리아의 자궁 안에 당신의 거처를 정하신 시점이다. 그 때가 ”말씀이 육신이 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크리스마스' (즉, 그리스도가 보내진 때), 즉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좌로부터 보내져서 육신의 '초막' 안에 들어오게 되던 때가 미가엘과 천사들이 그의 탄생을 선언하기 위하여 보내졌던 '미가엘마스'보다 아홉 달이 앞선 때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시 12월 25일의 날짜를 다시 돌이켜 생각하게 된다! 두 날 짜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좌에서 내려오셔서 마리아의 자궁 속에 착상된 날과 미가엘과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날과의)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278 일의 간격이 있다. 이 기간이야말로 인간의 태아 성장에 있어서 이상적인 기간이다.
이 추론의 정확성 여부 (그리스도의 진짜 탄생일이 언젠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를 별개 문제로 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적적인 잉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한 해 중에서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의 시기를 그가 이 세계에 오시는 시점으로 정한 것은 너무도 적절하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빛' (요한복음 8:12)으로 오셔서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시기”(디모데후서 1:10)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기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飮酒方歌나 이교도의 貪食이 아닌)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크리스마스의 놀라운 선물을 기억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한일서 4:9).
왜 창조주는 인간이 되었는가?
'왜 (Why)?' 로 시작되는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은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나 대답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들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답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 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 (디모데전서 1:15).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의 최초의 오심은 뒤이어 희생의 죽음과 육신의 부활, 그리고 영광의 승천으로써 그의 두 번째의 오심에 관한 그의 약속을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가 최초로 오셔서 계셨던 잠간 동안, 그는 우리들 속에서 '거하셨다 (tabernacled).' 그의 두 번째의 오심에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요한계시록 21:3, 4).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영광스럽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구주를 거부하고 또는 무시한다는 사실은 슬프기 한량없다. 그들은 지금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와 축복을 잃어버렸을 뿐만이 아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그를 맞이하기 전에는, 그들은 지금 다가오고 있는 영광의 빛으로 싸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와는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246.htm
출처 - ICR, Impact No. 246, 1993.
베들레헴의 별은 무엇이었을까?
(What was the Star of Bethlehem?)
Don DeYoung
크리스마스 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세 가지가 언급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 별은 왕들의 탄생과 같이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일들이 발생할 때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혜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혜성의 관측 기록은 주의 탄생과 합치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헬리 혜성은 기원 전 11년에 있었고, 첫 크리스마스는 BC 5~7년 사이에 일어났다.
다른 학자들은 베들레헴의 별은 밤 하늘에 일어났던 행성들의 근접 현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행성들은 태양의 둘레를 각각의 거리에서 다른 속도로 공전하기 때문에 행성들은 때때로 서로 근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여러 행성들이 단일한 광원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행성 직렬은 다소 자주 있으며 그렇게 드문 편이 아니다. 기원전 6년에 목성과 토성의 근접이 있었지만, 훨씬 전인 기원전 66 년에 훨씬 더 가까운 근접현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별을 설명하기 위해 폭발하는 별, 또는 초신성(supernova)이 제안되었다. 어떤 별들은 불안정하여 밝은 빛을 내며 폭발한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기록에는 예수님이 탄생하던 시기에 초신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베들레헴 별에 대한 위 세 가지 설명 모두 다 민수기 24장 17절에 예언되었고,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12절까지 기록된 본래 이야기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두 사건은 특별히 흥미가 있다.
첫째는 본문에 따르면 동방박사들만 그 별을 보았다는 것이다. 혜성의 출현이나, 행성 직렬, 혹은 초신성이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 별이 동방박사들 앞서 갔으며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그들을 인도했다는 것이다. 이 거리는 약 10km (6마일)이며 북쪽에서 남쪽 방향이다. 그렇지만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는 지구의 자전으로 동에서 서로 움직이므로 별이 어떤 특별한 집으로 길을 인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론은 베들레헴의 별은 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시적인 초자연적인 빛이었다. 첫 크리스마스는 기적의 시간이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채웠던 영광 (출애굽기 40:34-38), 성전을 채웠던 영광(열왕기상 8:11)과 사도 바울을 비췄던 빛(사도행전 9:3)처럼 종종 초자연적인 빛으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현전에 대한 그러한 가시적인 징조는 세키나 영광(Skekinah Glory), 혹은 하나님의 임재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별한 광채는 신성의 위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첫 크리스마스의 위대한 신비는 특별한 별의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세주께로 인도하는 별을 따라가도록 동방박사들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똑같은 초대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참조 : The Star of Bethlehem : A Supernatural Sign in the Heave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star-of-bethlehe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2/1224star.asp
출처 - AIG, 24 December 2002.
노아 방주에 탄 정결한 짐승들의 수는 성경의 오류인가?
김홍석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창 7:2-3)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창 7:8-9)
자주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구절은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정결한 짐승들의 수에 관한 것이다. 히브리 성서 맛소라 텍스트는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보여준다. 창 7:2절에서 정결한 짐승은 “쉬브아 쉬브아 이쉬 이솨”(일곱 일곱 수 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수컷 일곱 마리 암컷 일곱 마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쌍이다. 부정한 것은 “쉐나임 이쉬 이솨”(둘 수 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수컷과 암컷(을 합하여) 두 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한 쌍이다. 또한 창 7:3절에서 공중의 새도 “쉬브아 쉬브아 자카르 네케바”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수컷 일곱 마리 암컷 일곱 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곱 쌍이다.
그렇다면 창 7:8절에서 노아 방주로 들어갈 때 둘씩 들어갔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 7:8절에서 “암수 둘씩”이란 “쉐나임 쉐나임”(둘 둘) 나아와서 “자카르 네케바”(수 암)가 방주로 들어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암수 둘씩(two and two)이란 의미는 노아에게 나아오는 모습과 방주로 들어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한 무신론자의 주장 <James Patrick Holding의 글>
한 무신론자는 노아 방주에 7쌍의 암수가 태워진 것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고 있었다 :
“암수 7쌍을 취하는 이러한 생각은 여호와가 축산업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농부나 목장주도 소, 양, 말 등의 동물을 키우는 사업을 할 때 암수의 숫자를 똑같이 구매하지 않는다. 1 마리의 숫소와 13 마리의 암소, 또는 1 마리의 숫양과 13 마리의 암양을 구매하는 것이, 암수 각각 7 마리씩 구매하는 것보다 초기 투자 시에 매우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1 마리의 수컷이 13 마리의 암컷과 교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러한 이야기가 쓰여졌다는 것은 그 저자가 동물들의 번식에 대해 빈약한 지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한 번에 많은 새끼들을 낳는다. 코끼리를 생각해 보자. 아프리카 코끼리는 14살 정도에 번식할 수 있는 연령이 된다. 코끼리의 임신 기간은 평균 670일 이다. 반면에 인도코끼리들은 좀 더 일찍 성숙하고 좀 더 짧은 임신기간을 갖는다. 그래서 한 쌍의 코끼리가 25살의 나이에 4마리의 자손을 가졌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코끼리의 개체 수는 100년 동안에 줄잡아 4번이나 2배가 될 수 있다(새끼들이 젖을 뗀 후, 부모 세대들이 곧 죽었다할지라도). 개체 수가 2배로 되는 것이 22번 일어나면 800만을 넘어선다. 이 숫자는 단지 550년(22×25)이면 도달될 수 있는 숫자이다.”
그리고 방주에 수컷을 한 마리만 태우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을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다.
또 다른 성경비판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의 인구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바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에서, 바로는 모든 신민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 아기를 낳으면 죽이고, 여자여든 살려두라고 명령한다(출 1:22). 이것은 인구수를 줄일 수 없는 멍청한 계획이다. 왜냐하면 인구성장률은 임신이 불가능한 남자의 수가 아니라, (그 그룹에 임신을 시킬 수 있는 적어도 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임신이 가능한 여자들의 수에 의존한다. 바로는 그 당시에 태어난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데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남아 성숙해진 여자들은 이미 살아있었던 많은 나이든 남자들과 민족의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서 기꺼이 그들의 의무를 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든 남성이 ”이 사랑스런 여인은 너무 젊어서 아내로 맞이하기에는 부끄럽소“ 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바로가 약간의 상식을 가졌었다면, 또는 이 허풍적인 이야기를 지어낸 작가가 약간의 상식을 가졌었더라면, 그 이야기는 바로가 히브리 여인들에서 태어난 모든 여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었다고 썼을 것이다.”
의견을 구했던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말 바보스러운 말이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바로가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있는가? 그리고 바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본 후에도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남자들은 무기를 잡고 전쟁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노예로서 많은 일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이 우둔했다’ 라고 말하는 것 외에도 연대기적 속물근성이 비판론자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다. 오! 바로는 여자들이 태어나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여자들이 인구성장률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