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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4-06-03

루터교도들은 코페르니쿠스를 도왔다.

 (Lutherans Helped Copernicus)

David F. Coppedge


      우리가 '알고(know)' 있는 것들이 진실(true)인지를 재검토해보게 될 때, 진실은 그 반대와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그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를 공전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서 교회를 위협했던 용감한 과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너무도 두려워해서 죽을 때에도 그의 ‘이단적인(heretical)‘ 견해를 출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시리즈물 ‘우주(Cosmos)’ 에서 칼 세이건(Carl Sagan)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는 루터교도들에 의해서 조롱당했다는 도시의 전설(urban legend)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자이며, 역사가인 오웬 징거리치(Owen Gingerich)는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역사 기록을 바르게 정립하는데 바쳤다. 징거리치는 'An Annotated Census of Copernicus’ De Revolutionibus' 라는 제목의 이전 책에서 30년 동안의 프로젝트 결과를 출판하였다. 그 책은 알려진 원본들에 대한 각각의 복사본들을 게재하였고, 코페르니쿠스의 책(‘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이 전 유럽에 걸쳐 배포되었고 토론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꼼꼼하게 그 당시의 독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수백의 주변 노트들을 분석하였다. 이제 징거리치는 그의 결과물들을 새로운 책, 'The Book Nobody Read : Chasing the Revolutions of Nicolaus Copernicus” (Walker, New York, 2004) 으로 출판함으로서 더 재미있고 접근 가능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책은 2004. 4. 28일자 사이언스(Science)1 지에서 피터 바커(Peter Barker)에 의해 리뷰되었다. ('De Revolutionibus 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the book nobody read)' 이었다는 아더 코스틀러(Arthur Koestler)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징거리치는 책의 제목을 코스틀러의 주장으로부터 취했다). 여기에 바커의 리뷰에서 나타난 도시 전설의 몇 가지 수정사항들을 제시한다.


●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원고를 젊은 루터교인이며, 수학자인 레티쿠스(Georg Joachim Rheticus)에게 위탁했다.

● 책은 루터교인인 인쇄업자에 의해서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출판되었다.

● 한 루터교 성직자는 책에 사인 없이 서문을 추가했다.

● 프러시아의 군주는 루터교도였고, ‘De Revolutionibus’를 출판했던 사회에서 후원자였다.

● ”나이 많은 가톨릭교도가 교황에게 헌정된 그의 천문학 책을 일단의 개신교도들에게 위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커는 묻고 있다. ”뉘른베르크 인쇄업자들의 전문적 지식이 확실히 한 요인이었다. 아마도 코페르니쿠스는 지방의 주교(bishop)로부터 그가 보호되기 위해서 프러시아의 군주를 또한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가톨릭의 반대가 아마도 지역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루터교의 수학자들은 열망하여 그 책을 얻었고, 그것을 공부했고, 그것에 기록을 했고, 그들의 친구들에게 복사본들을 건네주었다. 많은 루터교도들은 아직도 고정된 지구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받아들였고, 감사해했다.

● 루터교도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는 그 책의 많은 복사본들을 소유했다. 바커는 말한다. 징거리치 연구에서 ‘매우 놀랄만한’ 점은, 브라헤는 그의 태양중심적인 대체 모델을 신사이며 여행가였던 폴 위치(Paul Wittich)로부터 얻었다는 것이다.

● ”프톨레미의 천문학은 그것이 주전원(epicycles)들에 과도한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 바커는 말한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전 후의 천문학자들은 단순한 하나의 주전원 계를 사용했는데, 가끔 코페르니쿠스 자신에 의해서 사용된 하나의 작은 주전원에 의해 증대되곤 했다.”

●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은 엄밀하게 말하면 태양중심설이 아니다. ”사실, 그의 계의 중심으로서 어떤 지점을 간주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꽤 어렵다.” 그 모델은 관측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수학적인 것이었다.

● 바커는 놀라움을 표하며 언급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상외의 발견은, 갈릴레오 사건의 여파로서 (Galileo biography을 보라),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정정하려는 교회의 시도는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징거리치의 평가에 의해서 재강조되는 점은, De Revolutionibus의 인쇄된 원본은 400에서 500권 사이였는데, 그의 조사(Census)에 의하면 이들 중 277권이 남아있는 것으로 살펴볼 때, 책이 실제로 파괴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밖에서, 심지어 가톨릭의 국가에서도 교회의 명령으로 수정된 복사본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커는 우주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던 획기적인 책에 관한 진실을 밝혀보기 위한 징거리치의 ”놀라운 추적”을 칭찬하고 있다. ”그의 서술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초기 현대 과학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일으킬 것이다.” 


1Peter Barker, 'A History Recorded in the Margins,” Science Vol 304, Issue 5671, 686, 30 April 2004, [DOI: 10.1126/science.1097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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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거리치 박사는 잘못 알려졌던 도시 전설에 대한 이러한 정정을 해줌으로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16세기 과학적 전진의 적대세력은 루터교인도 아니고, 가톨릭교인도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말하자면, 루터(Luther)가 코페르니쿠스를 바보(fool)라고 불렀다는 도시의 전설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루터가 말했던 것들, 또는 의미했던 것들은 한참 후까지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미의 전달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도날드 코브에 의한 Leadership U 분석을 보라.


De Revolutionibus이 현대의 코페르니쿠스 원리를 이끌어 냈는지는 또 하나의 의문이다. 최근까지, 천문학자들은 지구는 우주의 물질 체계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외삽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De Revolutionibus 만큼 혁명적일 수 있는 새로운 책에 의해서 도전받고 있다. 그 책은 곤잘레스(Gonzalez)와 리챠드(Richards)에 의해서 쓰여진 ‘특별한 행성(The Privileged Planet)‘ 이다. 우리는 이것이 웹 사이트의 대화방 등에서 어떠한 주변 노트를 얻게 될 지, 또는 다윈의 교회가 그 책을 무시하는데 성공할 것인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4/04/lutherans_helped_copernicus/

출처 - CEH, 2004. 4. 30.


미디어위원회
2004-04-27

예수님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는 발견된 적이 있는가?

(Has Archaeological Evidence for Jesus Been Discovered?) 

Dr. John D. Morris 


     회의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적이 없다는 점을 가끔 지적하곤 한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최근의 발견이 어쩌면 그들의 말을 잠재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부차적인 문제가 있는데, 우선은 이 문제부터 먼저 고려하여야 할 것 같다. 그와 같은 유물이나 비명 따위를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인간 예수는 어느 정부의 특출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거의 무일푼의 유랑 설교자로서, 결국에는 보통의 무법자의 죽음을 죽었던 것이다. 로마 사람들이 그의 비명이나 동상이라도 세워 기록할 이유가 있었을까? 확실히 없었다.


실제로 그 시대 전반에 걸친 유대의 고고학적 유물들은 오히려 희박한 편이다. 로마 제국의 도시들과, 헤롯(Herod) 왕, 빌라도(Pilate) 총독, 그리고 베스도(Festus) 같은 지도자들에 관한 적절한 비명이 기록된 거대하고 광범한 유물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가야바(Caiaphas)와 같은 영향력이 있는 유대 인사들의 유물도 역시 남아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삶에 관한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후 70년대에 예루살렘은 티투스 로마황제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대로 남아있던 유물들도 현대의 번창하는 도시건축으로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모든 조건들은 유물보전에 친화적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에 관한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전무한 사실은 풍부한 그의 역사적 증거와는 대조적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기록한지 얼마 후, 뒤이어진 바울의 편지들이 그 때에 살던 사람들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복사되고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리스도/메시아로 불려졌던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James)라는 사람의 사형집행 사건을 포함하여 중요한 민사사건들에 관해 언급했는데, 그의 언급에서 그는 틀림없이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야고보는 초기교회의 지도자였으며,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는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새로 발견된 유물은 중간 크기의 상자로서, 죽은 자의 살이 완전히 삭은 후 인골만을 추려서 영구 매장하는 납골궤(ossuary, 뼈단지)였다. 이 매장제도는 BC 20년대에서부터 AD 7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시행되었다. 그 궤는 그 지방에 흔한 부드러운 백악질의 석회석으로 되어있었다. 그 내용물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궤의 한 쪽 측면에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 글은 당시의 아람어로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아우 (James, son of Joseph, brother of Jesus)' 라고 되어있었다. 전자현미경 스캐닝을 포함하여 세밀한 분석조사 결과 그 각명(刻銘)은 진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궤의 표면에 고루 녹슨 녹청은 각인된 글자들의 내면까지 덮고 있었다. 고고학적 유물평가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앙드레 러맬 박사 (Dr. Andre Lemaire)는, '이 고대유물이 가짜가 아닌 진품이라는 나의 판단을 보고하게 되어 나는 기쁘다' 라고 말했다.

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습관은 그 지역에서는 보통이었다. 그러나 형제가 유명인사가 아닌 이상, 죽은 자의 형제의 이름은 사용하는 예는 드물었다. 기록되어 있는 세 사람의 관계가 성경에 기록된 관계와 꼭 들어맞게 되어있는 것을 보면, 납골궤에 수장된 주인공은 성경의 야고보일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고 하겠다.

납골궤는 물론 다른 고고학적 유물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그 사건들이 참이라는 우리의 확신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크리스천의 믿음은 역사적 사실들 위에 근거한 합리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성경은 온전히 정확한 기록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has-archaeological-evidence-for-jesus-been-discove

출처 - ICR, 2002. 12. 1.


미디어위원회
2003-10-09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때 

(When God Became Man)

Henry M. Morris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요한복음 1:1,3,14).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는지, 그 육화(肉化)의 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유한자의 이해력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교리를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기뻐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그 교리를 믿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요한일서 4:3) 라고 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한복음 8:24) 하고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확실한 많은 증거로…”(사도행전 1:3), 특히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셨다가 다시 몸이 살아나신 증거로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도행전 17:31) 하셨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명의 창조주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었다. 석가모니도 죽었다. 마호메트도 죽었다. 그리고 공자와 플라톤은 물론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위인이나 성자들도 다 죽었다. 그러나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베드로전서 3:18) '육화의 말씀'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요한계시록 1:18).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7:25).

 

창조주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만물이 다 그[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고”(골로새서 1:16) 지어졌다. 그가 ”육신으로 태어났을 때” 스스로가 그 안에 거하실 바로 그 육신을 지으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육신의 탄생은 인간 생식의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육신의 탄생일 수 없었다. 그것은 영의 본래적인 죄, 또는 육체나 정신의 원초적이며 유전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은 흠집이 전혀 없는 육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육체이어야만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오래 전에 아름다운 에덴동산에다 지으셨던 최초의 사람의 육신과 같이 완전무결하야만 하였다. 그는 사실상 ”마지막 아담” (고린도전서 15:45) 으로 불려질 것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 아담”이 지어졌던 것처럼 지어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초의 아담과 최후의 아담과의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최초의 아담은 지어질 때에 이미 성숙한 남자로 창조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담은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어야만”(히브리서 2:17) 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잉태에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은 … 자로되 죄는 없으신” (히브리서 4:15) 이었다. 특히 그의 피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이…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19) 이어야만 하였다. 그것은 그 피가 ”하나님께 드린 흠 없는 피어야 …”만 하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14).

그와 같이 해서 두 번째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어 처녀의 자궁 안에 착상시켜야만 하였다. 이 사실은 최초의 아담이 세상에 죄와 죽음을 초래케 한 이후 제일 먼저 하신 바로 그 약속의 내용이다.  ”여자와…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노라 … ”(창세기 3:15)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거짓말로 하와를 꾀어 죄로 인도한 사탄에게 주는 약속이었다. 두 번째 아담의 경이로운 육신은 모든 인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씨에서 자라지도 않을 것이며, 여자의 난소에서 자라지도 않을 것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어쩔 수 없이 죄와 돌연변이를 수반하는 태아가 생기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별히 창조주 당신이 손수 지으시는 씨이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씨는 처녀의 자궁에 착상되야만 했다. 그 곳은 당장에 그의 '성소(tabernacle)'가 되어 거기서부터 자신의 행성인 이 지구에 오셔서 당신이 구원하려는 인간들과 함께 33년 동안 살았던 것이다.

”내가 왔나이다 …” 하고 그는 나중에 다윗의 입을 통하여 약속한 것이었다 (시편 40:7). 이사야를 통하여서 그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리고 그 아기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이사야 7:14, 9:6)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중에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선지자는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예레미아 31:22) 라고 하였다.

선택된 여인 안에서 '새 일이' '창조될' 것이라는 말을 주목함이 마땅하다. 때가 이르매 천사가 마리아에게 확언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하였다. 그런 다음 ”세상에 임하실 때에…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브리서 10:5). 무엇보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예비하였도다(희랍어 katartizo)” 라는 똑 같은 말을 사용한 점으로서, 그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히브리서 11:3)고 증언하고 세계를 지으신 바로 그 살아계신 말씀이 그 자신의 인간의 육신도 지은 것을 인정할 때에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그 조그만 자궁 안에 는 그 자신이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정보뿐만 아니라, 창조와 보존과 전 피조물의 구속의 정보까지도 담겨있었다. 그것은 창조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의 것이었으며, 또 곧 구속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배(倍)로 그의 것이 될 것이었다.

 

창조주는 언제 사람이 되었는가?

창조주의 육화를 12월 25일로 정하고 그날에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축하하는 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인 관례로 되어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집단들이 다양한 날들을 기념하기도 하고, 여러 작가들은 제 각기 다른 날들━예컨대, 정월의 어느 날이든가, 또는 춘삼월이나 시월의 어느 날을━권장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전혀 기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12월 25일을 예수탄생의 날로 정한 것이 4 세기 경의 어느 때부터였다. 사실상 크리스마스의 행사는 근본적으로 고대 로마의 농신제(農神祭; 12/17일 추수감사제)나, 또는 한 해 중에서 밤 시간이 가장 긴 동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이교도들의 축제행사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명백한 사실은 그의 탄생일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제에 관한한 어느 누구도 독단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매우 흥미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던 날 밤, 목동들이 들에 나가서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고 하였다 (누가복음 2:8). 이 사실로 해서 그 때가 늦은 동짓달 어느 날일 가능성은 희박하고, 차라리 이른 가을 어느 날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의 탄생도 또한 가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기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특히 영국이나 서유럽에서는, 미가엘마스로 불리는 고대 크리스천의 축제일인 9월 29일을 축하하였다는 것은 의미 있게 볼만한 대목이다. 이 이름은 후대에 와서는 어떤 법정이 개정 중에 있는 가을의 어는 시기를 식별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미가엘마스(Michaelmas)” 라는 이름은 ”미가엘이 보내졌다”는 의미로서 ”크리스마스”의 뜻이 ”그리스도가 보내졌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가엘은 목동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언명하기 위하여 천국에서 보내진 ”여호와의 천사” (누가복음 2:9)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가엘마스의 축제는 이와 같이 해서 인간으로 탄생하는 예수를 환영하기 위하여 보내진 미가엘과 천사들의 내왕을 축하하려고 시작한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이 미가엘마스는 바벨론 포로 시절 이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을이면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기 위하여 축제를 벌이는 위대한 초막절보다 몇 날 앞서 벌어지던 축제였다. 초막절 때에는 이스라엘 가족들이 한 때나마 천막, 즉 '초막(tabernacle)'에서 지내는(dwell, 거하다) 습관이 있었다.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dwelt)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거하다 (dwell)' 라는 뜻을 담은 통상적인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글자 그대로 말씀이 (즉, 창조주가) 한 때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다' 라는 말을 'tabernacled' 이라고 명사를 과거형 동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즐거운 초막 축제에 맞게 적절한 때에 이 세계에 오시기라도 한 것 같았다. 미가엘과 천사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온 백성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라고 노래한 것이 그것을 말한다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무리 영광된 일이라고 하여도, 이 탄생일이 그의 육화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는 아홉 달 전에 이미 ”사람들의 형체와 같이 되어”(빌립보 2:7) 있었다. 그 때는 그가 당신 스스로의 육신을 지으시고 마리아의 자궁 안에 당신의 거처를 정하신 시점이다. 그 때가 ”말씀이 육신이 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크리스마스' (즉, 그리스도가 보내진 때), 즉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좌로부터 보내져서 육신의 '초막' 안에 들어오게 되던 때가 미가엘과 천사들이 그의 탄생을 선언하기 위하여 보내졌던 '미가엘마스'보다 아홉 달이 앞선 때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시 12월 25일의 날짜를 다시 돌이켜 생각하게 된다! 두 날 짜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좌에서 내려오셔서 마리아의 자궁 속에 착상된 날과 미가엘과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날과의)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278 일의 간격이 있다. 이 기간이야말로 인간의 태아 성장에 있어서 이상적인 기간이다.

이 추론의 정확성 여부 (그리스도의 진짜 탄생일이 언젠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를 별개 문제로 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적적인 잉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한 해 중에서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의 시기를 그가 이 세계에 오시는 시점으로 정한 것은 너무도 적절하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빛' (요한복음 8:12)으로 오셔서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시기”(디모데후서 1:10)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기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飮酒方歌나 이교도의 貪食이 아닌)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크리스마스의 놀라운 선물을 기억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한일서 4:9).

 

왜 창조주는 인간이 되었는가?

'왜 (Why)?' 로 시작되는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은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나 대답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들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답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 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 (디모데전서 1:15).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의 최초의 오심은 뒤이어 희생의 죽음과 육신의 부활, 그리고 영광의 승천으로써 그의 두 번째의 오심에 관한 그의 약속을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가 최초로 오셔서 계셨던 잠간 동안, 그는 우리들 속에서 '거하셨다 (tabernacled).' 그의 두 번째의 오심에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요한계시록 21:3, 4).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영광스럽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구주를 거부하고 또는 무시한다는 사실은 슬프기 한량없다. 그들은 지금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와 축복을 잃어버렸을 뿐만이 아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그를 맞이하기 전에는, 그들은 지금 다가오고 있는 영광의 빛으로 싸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와는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246.htm 

출처 - ICR, Impact No. 246, 1993.

미디어위원회
2003-10-08

베들레헴의 별은 무엇이었을까?

(What was the Star of Bethlehem?)

Don DeYoung 


     크리스마스 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세 가지가 언급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 별은 왕들의 탄생과 같이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일들이 발생할 때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혜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혜성의 관측 기록은 주의 탄생과 합치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헬리 혜성은 기원 전 11년에 있었고, 첫 크리스마스는 BC 5~7년 사이에 일어났다.

다른 학자들은 베들레헴의 별은 밤 하늘에 일어났던 행성들의 근접 현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행성들은 태양의 둘레를 각각의 거리에서 다른 속도로 공전하기 때문에 행성들은 때때로 서로 근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여러 행성들이 단일한 광원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행성 직렬은 다소 자주 있으며 그렇게 드문 편이 아니다. 기원전 6년에 목성과 토성의 근접이 있었지만, 훨씬 전인 기원전 66 년에 훨씬 더 가까운 근접현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별을 설명하기 위해 폭발하는 별, 또는 초신성(supernova)이 제안되었다. 어떤 별들은 불안정하여 밝은 빛을 내며 폭발한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기록에는 예수님이 탄생하던 시기에 초신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베들레헴 별에 대한 위 세 가지 설명 모두 다 민수기 24장 17절에 예언되었고,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12절까지 기록된 본래 이야기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두 사건은 특별히 흥미가 있다.

첫째는 본문에 따르면 동방박사들만 그 별을 보았다는 것이다. 혜성의 출현이나, 행성 직렬, 혹은 초신성이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 별이 동방박사들 앞서 갔으며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그들을 인도했다는 것이다. 이 거리는 약 10km (6마일)이며 북쪽에서 남쪽 방향이다. 그렇지만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는 지구의 자전으로 동에서 서로 움직이므로 별이 어떤 특별한 집으로 길을 인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론은 베들레헴의 별은 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시적인 초자연적인 빛이었다. 첫 크리스마스는 기적의 시간이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채웠던 영광 (출애굽기 40:34-38), 성전을 채웠던 영광(열왕기상 8:11)과 사도 바울을 비췄던 빛(사도행전 9:3)처럼 종종 초자연적인 빛으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현전에 대한 그러한 가시적인 징조는 세키나 영광(Skekinah Glory), 혹은 하나님의 임재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별한 광채는 신성의 위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첫 크리스마스의 위대한 신비는 특별한 별의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세주께로 인도하는 별을 따라가도록 동방박사들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똑같은 초대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참조 : The Star of Bethlehem : A Supernatural Sign in the Heave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star-of-bethlehe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2/1224star.asp 

출처 - AIG, 24 December 2002.

관리자
2002-06-14

노아 방주에 탄 정결한 짐승들의 수는 성경의 오류인가?

김홍석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창 7:2-3)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창 7:8-9)


  자주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구절은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정결한 짐승들의 수에 관한 것이다. 히브리 성서 맛소라 텍스트는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보여준다. 창 7:2절에서 정결한 짐승은 “쉬브아 쉬브아 이쉬 이솨”(일곱 일곱 수 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수컷 일곱 마리 암컷 일곱 마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쌍이다. 부정한 것은 “쉐나임 이쉬 이솨”(둘 수 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수컷과 암컷(을 합하여) 두 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한 쌍이다. 또한 창 7:3절에서 공중의 새도 “쉬브아 쉬브아 자카르 네케바”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수컷 일곱 마리 암컷 일곱 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곱 쌍이다.

그렇다면 창 7:8절에서 노아 방주로 들어갈 때 둘씩 들어갔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 7:8절에서 “암수 둘씩”이란 “쉐나임 쉐나임”(둘 둘) 나아와서 “자카르 네케바”(수 암)가 방주로 들어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암수 둘씩(two and two)이란 의미는 노아에게 나아오는 모습과 방주로 들어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한 무신론자의 주장   <James Patrick Holding의 글>


한 무신론자는 노아 방주에 7쌍의 암수가 태워진 것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고 있었다 : 

“암수 7쌍을 취하는 이러한 생각은 여호와가 축산업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농부나 목장주도 소, 양, 말 등의 동물을 키우는 사업을 할 때 암수의 숫자를 똑같이 구매하지 않는다. 1 마리의 숫소와 13 마리의 암소, 또는 1 마리의 숫양과 13 마리의 암양을 구매하는 것이, 암수 각각 7 마리씩 구매하는 것보다 초기 투자 시에 매우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1 마리의 수컷이 13 마리의 암컷과 교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러한 이야기가 쓰여졌다는 것은 그 저자가 동물들의 번식에 대해 빈약한 지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한 번에 많은 새끼들을 낳는다. 코끼리를 생각해 보자. 아프리카 코끼리는 14살 정도에 번식할 수 있는 연령이 된다. 코끼리의 임신 기간은 평균 670일 이다. 반면에 인도코끼리들은 좀 더 일찍 성숙하고 좀 더 짧은 임신기간을 갖는다. 그래서 한 쌍의 코끼리가 25살의 나이에 4마리의 자손을 가졌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코끼리의 개체 수는 100년 동안에 줄잡아 4번이나 2배가 될 수 있다(새끼들이 젖을 뗀 후, 부모 세대들이 곧 죽었다할지라도). 개체 수가 2배로 되는 것이 22번 일어나면 800만을 넘어선다. 이 숫자는 단지 550년(22×25)이면 도달될 수 있는 숫자이다.” 

그리고 방주에 수컷을 한 마리만 태우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을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다.


또 다른 성경비판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의 인구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바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에서, 바로는 모든 신민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 아기를 낳으면 죽이고, 여자여든 살려두라고 명령한다(출 1:22). 이것은 인구수를 줄일 수 없는 멍청한 계획이다. 왜냐하면 인구성장률은 임신이 불가능한 남자의 수가 아니라, (그 그룹에 임신을 시킬 수 있는 적어도 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임신이 가능한 여자들의 수에 의존한다. 바로는 그 당시에 태어난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데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남아 성숙해진 여자들은 이미 살아있었던 많은 나이든 남자들과 민족의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서 기꺼이 그들의 의무를 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든 남성이 ”이 사랑스런 여인은 너무 젊어서 아내로 맞이하기에는 부끄럽소“ 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바로가 약간의 상식을 가졌었다면, 또는 이 허풍적인 이야기를 지어낸 작가가 약간의 상식을 가졌었더라면, 그 이야기는 바로가 히브리 여인들에서 태어난 모든 여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었다고 썼을 것이다.” 

의견을 구했던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말 바보스러운 말이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바로가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있는가? 그리고 바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본 후에도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남자들은 무기를 잡고 전쟁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노예로서 많은 일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이 우둔했다’ 라고 말하는 것 외에도 연대기적 속물근성이 비판론자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다. 오! 바로는 여자들이 태어나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여자들이 인구성장률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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