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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6-07-15

마지막으로 성취될 예언

 : 예수님의 재림, 요시아 왕에 대한 예언 

김무현 


마지막으로 성취될 예언 : 예수님의 재림 (The Final Prophecy To Be Fulfilled: The Christ's Return)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재림이나 마지막 때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상징적으로 막연하게 또는 조금 부정적인 시각(이단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 부분을 강조함으로)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성경과 우리의 믿음의 절정(climax)이며 모든 예언들의 마지막 성취이며 이 땅 위에서의 삶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과 영생에 관한 소망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성경이 얼마만큼 증거하고 예언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 성경은 30구절 당 1번 정도의 빈도수로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 신약의 총 216장(chapter) 중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 3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 27권의 신약 중 단지 4권만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인용이 없습니다. 신약전체의 1/20정도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됩니다.

• 구약의 선지서들뿐만 아니라, 욥기, 모세 오경, 시편 등에도 마지막 때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 예수님 자신도 재림에 대하여 빈번히 말씀하셨습니다.


요시아 왕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King Josiah)

열왕기상 12장에서는 여로보암이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신상들을 만들어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느 익명의 선지자를 보내어 여로보암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선포하십니다. 즉 열왕기상 13:1-2에는 먼 훗날 요시아의 탄생과 그의 생애에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예언이 나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열왕기상 13:1-2)

이것은 요시아가 탄생하기 300년 전인 약 B.C. 930년에 예언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시편 139:16). 특별히 그 이름까지 정확히 부르시면서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시는 그분은 그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간의 사건들을 다루십니다. 그분의 뜻은 예언된 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작은 머리로 그분을 판단하려 하며 그분 앞에 무릎꿇고 굴복하기를 거절할까요? 왜 그분을 창조주로, 역사의 주관자로, 왕 중의 왕으로 높이지 않는 것일까요?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6:9-10)

열왕기상 13:1-2의 예언은 300년 후 열왕기하 23:15,16,20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어떻게 그 예언들이 성취되는지 정리해 보십시오.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열왕기하 23:15,16,20)

특히 열왕기하 22장에서는 그 동안 분실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분실되었다니 참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 그 시대의 혼탁한 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요시아의 개혁의 의지에 대해 기술한 23장 내용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요시아의 개혁은 느헤미야의 개혁과 어떤 점에서 유사하며 또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오늘날 우리 주위의 영적 상황은 어떠합니까? 요시아의 개혁이 오늘날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이러한 영적 부흥과 삶의 변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4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예수님 사역의 모형 

김무현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예수님 사역의 모형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 The symbolism of ceremonial sacrifices)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명한 3대 명절은 유월절(Feast of Passover)[무교절(Feast of Unleavened Bread), 초실절(Feast of First Fruits: barley)], 칠칠절(Feast of Weeks)[맥추절(Feast of Harvest, the day of first fruits; wheat, 민수기 28:26), 오순절(Feast of Pentecost)], 초막절[수장절, 장막절(Feast of Tabernacles, Feast of Ingathering, Day of Atonement, Day of Trumpets)]입니다. 레위기 23장을 정독하시고 이 절기들에 대해서 정리해 보십시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출애굽기 34:22)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에 칠일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찌니라. (신명기 16:13-15)

어느 미국의 중형교회 목사가 그 이웃에 있는 개척교회 목사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자기교회에서 성도들을 좀 보내고 싶은데, 무작정 교회를 옮기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합니다. 「레위기」강해 설교를 6개월 동안 하니까 적지 않은 성도들이 이웃교회로 옮기더라는 것입니다. 성경 일독을 결심하고 창세기부터 시작할 때 이 레위기가 최대의 고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복음이나 우리의 삶과 무관하다고 선입견을 갖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성경말씀에는 필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이 레위기에서도 많은 영적 보화를 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천국의 제자로서 구약과 신약을 열심히 연구하려는 성도에게는 풍성하도록 열린 눈과 깨달음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신약)과 옛것(구약)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52)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절기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너희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lasting ordinance)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며 그 가운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십니다. 이 절기들에서 우리는 3중적 의미(triple reference)를 찾아야 합니다. 즉 구약의 역사 속에서의 의미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예언적/상징적 의미 또한 성도의 삶에 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즉, 단 한번의 완전한 제사로 말미암아 구약시대의 절기와 제사는 더 이상의 의미가 없고,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초림을 기념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성찬으로 대체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통한 예언의 성취와 성도들의 삶에 대한 교훈과 같은 보화들을 캐낼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시편 119:160)

레위기 23장을 통한 여러 가지 교훈이 많이 있겠으나 이 장에서는 성경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나 에만 초점을 맞추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들은 바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적/상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한가지 예 만 들겠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깊이 묵상하면서 각자 연구해 보십시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히브리서 9:1)

정월 십 사일의 유월절(Passover)은 구약의 출애굽 전야에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안에 거함으로서 죄의 권세가 넘어갔다(pass over)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출애굽기 12:5-18).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13)


세례요한은 요한복음 1:29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어린양 예수께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유월절 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피의 은혜와 보호 안에 거함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3-5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모여 예수를 잡아죽일 것을 공모하되 명절(유월절)에는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월절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때문에 자칫 민요(riot)가 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예언대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사태가 급전되고, 유래 없는 야밤의 날치기 불법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되며, 결국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사로잡히실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그 날 밤에 사로잡혀 유월절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56)

즉, 아무리 세상의 권세자들이 회의를 하여 법과 제도를 만들고 계획표를 만들어 논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시간표대로 세상의 모든 정황을 움직이시며 신실하게 그 분의 계획과 그 모든 언약들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을 두려워 마십시오. 그리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무교절 기간 중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하신 무교병(unleavened bread)이란 누룩(yeast)없는 빵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마가복음 8:15)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고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대속의 피로 우리의 죄가 사함(가려짐)을 받을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3일 후(안식일 이튿날; 무교절 둘째 날) 첫 이삭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라고(요제, wave offering: waving a sheaf of barley before the Lord) 하셨습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뒤 3일 후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그 첫 이삭을 통한 요제를 드린 날로부터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오십 일을 계수하여 칠칠절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7번 지난다 하여 칠칠절이요, 오십 일이므로 오순절(오=5, 순=10)이라고 불립니다. 이 날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거 하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대로 모여서 기도 중에 있던 제자들에게 폭발적인 성령의 강림을 주신 날이기도 합니다(사도행전 2:1-4). 칠칠절을 기념함은 바로 이 신약시대의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올 것임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때에 드리게 되는 떡 2개(레위기 23:17)와 두 어린 양(레위기 23:20)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성자와 성령의 공동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계속해서 절기들을 더 연구하심으로 그 속에 숨어 있는 보화들을 캐시고, 성경의 예언들은 반드시 성취되었고, 또,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오심으로 해서 신약시대에서는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신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와 찢겨진 살을 기념하며 떡과 포도주로 성만찬을 하라고 명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14-20, 고린도전서 11:23-29). 특히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리라.”를 묵상하십시오. 당신은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고 계십니까? 이사야서 11:9과 하박국 2:14에 기록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에 대한 비전과 흥분이 있습니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3

성경예언의 이중적/삼중적 조명,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예언 

김무현

성경예언의 이중적/삼중적 조명 (Double/Triple Reference in Prophecy by the Holy Spirit)

성경의 예언에는 두 개의 사건이 한 곳으로 모여지며 하나의 예언이 다중적 성취를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먼저의 성취는 나중의 더 큰 의미의 성취를 그림자처럼 조명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구약의 예언 중에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인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의 메시아에 대해서 그렇게 혼동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61:2에 초림과 재림이 이중적으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은혜의 해”는 예수님의 구속의 초림을 말하며 “신원의 날”은 심판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멀리서 조망했을 때 마치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 BSF (Matthew) -

성경의 많은 예언들이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초림 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나 또 많은 경우에는 초림과 재림이 혼합되어 이중적 조명(double reference)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금방 이후에 일어날 역사적 사건, 초림과 재림 그 셋을 삼중적으로 조명하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4장에는 앞으로 A.D. 70년경에 닥칠 예루살렘의 멸망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과 말세에 이 세상이 멸망될 것에 대한 예언이 섞여서 이중적 조명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성경 예언의 이중적, 삼중적 조명에 대한 예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예언 (Prophecy about Virgin Birth of Jesus)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만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씨로 이 땅에 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잉태하셨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50년 전에, 오실 메시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신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Therefore, the Lord himself shall give you a sign; Behold, a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Isaiah 7:14, King James Translation)

'virgin'(헬라어로 '파르테노스')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알마(almah)는 일반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인(unmarried young woman)'을 의미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이의 이름을 임마누엘(God with us,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메시아 예언(Messianic prophecy)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편, 성령으로 잉태되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관한 최초의 예언은 이미 창세기 3:15에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7:14와 일맥 상통하는 예언임을 보여줍니다.

내가 너(사단)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you(Satan) and the woman, and between your seed and her seed; it shall bruise your head, and you shall bruise his heel.' (Genesis 3:15, King James Translation)

사단이 동정녀에서 탄생한 예수 (her seed)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지만, 그 때문에 결국에는 치명타를 당할 것임을 암시한 내용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나 히브리 어느 문학서에서도 여자의 씨 ('her seed')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잉태케 하는 씨는 남자의 정자('his seed', 'the sperm of a man')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씨로부터 초자연적으로 탄생할 메시야에 대한 선포는 그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전례가 없는 아주 특별한 표현 방식 이었습니다.

성경비평가들은 이사야 7:14의 전후 문맥으로 보아 그것이 메시아적 예언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서나 다른 여러 선지서에서 흔히 나타나는 성령의 이중적, 삼중적 조명(double and triple reference by Holy Spirit, 즉 가까이 이루어질 역사적 사건을 비추어서 앞으로 도래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예언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아하스 왕과 이사야 선지자가 아는 젊은 처녀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 여자가 그 후에 결혼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지었고 그와 관련하여 그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는지 의도적으로 보여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그 사건을 통하여 훗날 다윗의 가계에 참 “임마누엘”되시는 메시아가 동정녀로부터 오실 것임을 이중적으로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이중적이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히 이 예언이 아하스 왕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윗의 가계에 대한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not to King Ahaz but the house of David, the entire kingly line).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데 들을지어다. (이사야 7:13)

더욱이 마태복음 1:21-23에서 성경이 직접 이사야 선지자의 그 예언이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 하리라 하셨으니 (마태복음 1:22-23)


성경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만 가두어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5:1-11을 묵상하십시오.

•5절과 8절에서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어떻게 바뀝니까?                                         

•왜 8절에서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백했을까요?                                 

이 본문은 흔히 「베드로가 자기의 경험과 생각을 접어두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큰 축복을 받았다」라는 주제로 설교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밤새도록 그물질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였습니다. 새벽에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훌륭한 랍비로서(5절) 존경하던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였습니다. 오랜 경험과 지식을 통하여 그 시간에 깊은 곳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바로 얼마 전, 더 잘 잡힐만한 시간과 장소에서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친 후였습니다. 5절에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베드로가 믿음으로 순종한 것」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속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되뇌었을지 모릅니다. “흥 내가 이곳에서 어부생활 몇 십 년인데 목수인 당신이 무얼 안다고 그러시오? 전문가인 내가 이 시간에 깊은 곳에서 고기가 안 잡힐 것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랍비인 당신이 하라고 하니, 당신의 체면을 보아서 하는 척은 할 것이요!”하며 그물 하나를 마지못해 내렸을 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지도록 그리고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9절에 보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라고 되어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서 충격 받은 것을 보면 믿음으로 순종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5절과 비교하여 “주여(호칭이 바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즉 “예수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단지 당신을 전능하신 주님이 아닌 훌륭한 랍비 정도로 생각했었고 그물을 내리라고 명하였을 때 당신을 정말 전능자로 인정하지 못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을 창조주인 메시아로 믿고 따르겠습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소위 지성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베드로와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믿기는 믿는데 ‘선생’ 정도로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또는 그 일부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지식이나 상식이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깊은 곳으로 가십시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의 눈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하며 깊게 묵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발견하곤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 정말로 나를 용서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성경을 내 머리로 판단하며 정말 무시했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말씀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시로 믿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확신을 가지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습니다. 주여 나를 써주소서.”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1

성경의 예언과 성취 II

: 성경은 인간의 머리로 만들어낸 종교경전이 아니다!

김무현


서언

제 5장에서는 수많은 성경의 예언과 성취 중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본 장에서는 예수님에 관한 예언을 조금 더 공부한 후 그 외에 또 다른 여러 가지 구약의 예언과 성취들에 대하여 더 살펴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이사야 41:21-22)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 시대의 아니 또한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신지 아닌지 재판을 한번 해 보자고 하십니다. 진화론을 믿고있는 과학자들에게 또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불신자들과 자유신학자들에게 확실한 증거를 대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피조 세계에 창조의 흔적을 남기셨으며(로마서 1:20),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고, 또 그것을 역사 속에서 성취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심을 분명히 성경을 통하여 증거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지성인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잘 연구하여 확신으로 전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피조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심을 세상에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머리에서 만들어낸 종교적 경전이 아닙니다. 창조주의 참 계시입니다. 만약 성경이 창조주의 참 계시가 아니고, 어느 한 민족이 자기들의 역사와 생각을 적어놓은 것에 불과 하다면 성경적 세계관도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이 과를 공부하여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시편 46:10)


다음은 창조과학자이며 성경변증학자인 헨리 모리스(Henry Morris)박사의 간증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은 수백 종류나 되며 그 외의 증거들도 무척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책들을 읽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으며, 이것은 크리스천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오류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합당하지 않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속임수 곧 인기 있는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경에 오류가 전혀 없으며 가장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습니다. 사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40여 명의 성경 기록자들이 이 점에서 모두 잘못 되었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쟁이였든지 아니면 미치광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책보다도 가장 훌륭한 문학 서적이요, 가장 완전한 도덕 법전이며 또한 전 시대에 걸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이 사람을 속이는 광신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일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진지한 마음으로 자세히 조사해 보기만 한다면 누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성경 기록자들의 주장이 지극히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경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이모저모로 무려 3,000번이 넘게 언급했습니다. 성경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들 가운데 하나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수많은 성경의 예언들이 상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성취되어 오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예언을 했던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 매우 오랜 후에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예언되어 있으며, 이 모든 예언들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300가지가 넘는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그분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예언들은 전 세계로 기독교가 퍼져나가는 것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거짓 종교들을 포함한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동서고금을 통해 성경과 같은 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딕슨(Jeane Dixon)이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케이스(Edgar Cayce) 등의 거짓 예언자들은 애매 모호하며 허점 투성이인 예언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성경과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없는 것들이며, 코란이나 논어 및 기타 비슷한 종교서적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이처럼 놀라운 예언의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그 규모가 어찌나 엄청난지 성경이 하나님께서 직접 드러내 주신 계시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그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도 이집트나 아시리아 그리고 그 외 다른 고대 국가들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뛰어납니다. 참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성경의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확증된 것만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를 들자면, 과학자들이 현대 과학의 많은 법칙들을 실험적으로 확증하기 오래 전부터 성경에는 이미 이런 것들이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사야 40:22), 거의 무한대로 큰 우주(이사야 55:9), 질량 에너지 보존 법칙(베드로후서 3:7), 물의 순환(전도서 1:7), 엄청나게 많은 별(예레미야 33:22), 물질과 에너지의 동등성(히브리서 1:3),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시편 102:25-27), 생명체의 활동에 있어서 피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레위기 17:11), 대기의 순환(전도서 1:6), 중력장(욥기 26:7) 등등.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 과학의 전문 용어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한 사실들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이나 과학이나 역사나 기타 다른 어떤 분야에 속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잘못되었음을 증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오류들을 지적하긴 했지만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이 모든 지적 사항들에 대해 언제나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해 왔습니다. 성경의 구조 역시 매우 놀라운 것으로 마땅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거의 2천 년의 기간에 걸쳐 각기 다른 40명 남짓한 사람들이 기록한 책으로, 모두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완전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한 권의 책입니다. 각각의 성경 기록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들의 메시지가 결국에 가서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람의 메시지는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각각의 독특한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우연이나 공모로는 성경의 놀라운 구조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며, 그 안에서 놀랍도록 조직적이고 수학적인 구조와 대칭성과 복잡 미묘함 등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장엄하게 전개되는 성경의 일괄된 주제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 즉 하나님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만물의 창조와 구속(救贖)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는 이 말씀을 믿은 사람들의 간증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바는 성경의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이며, 성경의 교훈은 건전하며, 성경의 명령과 권고는 지혜로우며, 성경의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by Henry Morris, from www.inchristjesus.net)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김무현
2006-07-10

5. 성경의 예언과 성취 I - III. 토론 및 적용


III. 토론 및 적용

1) 확신을 가지고 증거 해야

자기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증거 하기는 참으로 힘이 듭니다. 이를 위하여 매일 매일의 성경묵상에 더 큰 믿음과 깨달음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만일 한시간 후에 사무실 동료인 불신자나 이슬람이나 불교신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믿지 않는 형제들이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21-24과 2:13-14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1-24)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3-14)

[적용] 주위의 한 형제/자매를 선정하여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전도할 용기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 형제/자매에게 나를 통하여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성령님께서 그 열매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21)

 

2) 성경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How to defend the Bible?)

성경은 하나님의 참 계시이므로 그 자체가 스스로를 방어합니다. 수세기에 걸친 신랄한 비평의 포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참 진리의 말씀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효과적으로 중개자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불신하는 사람들로부터의 비판과 공격에 대응하여 설득력 있는 답변을 제공하는 연구가 성경변증학(apologetics)입니다. 성경변증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경전체의 일관성 (Consistency)

•예언의 성취 (Prophecy & fulfillment)

•부활의 역사성 (Historical evidence of resurrection)

•사도들의 변화와 순교 (Change/Martyrdom of disciples)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격과 삶이 바뀜 (Christians' change of life)

본 장에서는 특히 수많은 성경의 예언과 성취 중 그 일부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의 27% 정도가 예언이며 그 예언들은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임의로 나온 예언들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성경을 변증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당신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던 중 “참으로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의 참 계시이구나!”라는 강력한 확신이 들 때가 있었습니까? 그 경험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베드로후서 3:18)

 

3) [적용] 얼마 전 요한계시록 내용을 중심으로 한 “Omega Code”라는 성서내용의 스릴러물 영화(biblical thriller movie)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못지 않은 작품이라는 선전에 기대가 컸었는데 기대만큼 영화가 잘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내용을 가지고 비슷한 영화를 만들었으면 얼마나 잘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크리스천 100명이 열심히 노력하여 성경적 영화 한 편을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스티븐 스필버그 한 명을 전도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하고, 그 감동으로 그를 통하여 성경적 영화를 만들게 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악가 조수미를 전도하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얼마나 큰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 12:3)

하나님 나라에서는 미국의 큰 부흥을 일으킨 무디에 대한 상급도 크겠지만 그 무디를 주일학교에서 회심케 한 이름 모를 주일학교 선생의 상급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디는 될 수 없더라도 무디가 될 사람을 전도할 수는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큰일 일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두메산골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하여 작은 농촌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의 상급이, 대리석으로 장식된 대형교회의 목회자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마태복음 25:23)

•당신이 오늘날 감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10)

•하나님나라의 사역을 위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enlarge the territory), 그를 위하여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달라는 비기복적 야베스(Jabez)의 기도(역대상 4:10)가 매일 당신에게 있습니까?                    

•당신은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십니까?



성경적세계관세우기

출처 -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中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88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6-07-07

칠십이레의 예언 

김무현


칠십이레의 예언 (Prophecy about Seventy Sevens)


우리들은 하나님의 예언과 그 성취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올바로 보기 위해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시공을 초월하심과 무소부재하심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제한 하려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서에는 앞으로 일어날 왕국들과 그 미래에 대한 놀라운 예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백미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유대 백성들의 장래의 운명과 메시아의 죽음을 예언한 칠십 이레의 예언이라 생각됩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한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노라 (베드로 전서 1:10-11)

먼저 성경을 펴서 다니엘서 9:21~27을 자세히 묵상하며 읽으시고 중요한 내용들을 메모해 두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엇을 어떻게 선포하고 계십니까?                                                   

먼저 9:24절에 보면 “유대백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셨다.”했습니다. 칠십 이레란 70년 x 7 즉 490년의 기간을 말합니다. 25~26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total = 69이레 즉 69 x 7=483년) 지날 것이요, 그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를 예언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483년 기간의 시작은 느헤미야 2:1-9에 기록된 바와 같이 바사(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20년 즉 BC 444년에 예루살렘의 성을 중건하라는 칙령이 날 때였습니다(다니엘 9:25).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이에 대해서는  AD 30년과 AD 33년의 2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유대 월력으로 정월 (아빕월, 니산월)십사일)의 예비일(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 요한복음 18:39, 19:31, 마태복음 27:62)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AD 30년을 전후하여(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었던 시기= AD 26-36) 유월절과 예비일이 겹치는 경우는 딱 2번 AD 30년과 AD 33년입니다. 누가복음 3:23에 예수님이 공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가 삼십 세쯤 되었다고 했고,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유월절이 3번 지나므로, 그 공사역 기간이 약 3년 정도라 생각됩니다. 최근까지 많은 성경학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AD 30년이라 주장하여 왔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예수님의 탄생 후 바로 헤롯 대왕이 죽은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마태복음 2:19), 요세푸스(Josephus)의 유대 역사 사본에 의하면 헤롯 대왕이 BC 4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BC 4년, 예수님의 죽음을 AD 30년으로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 몇몇의 고고학자들이 런던대영박물관(British Museum of London)에 보존되어 있는 요세푸스의 역사 원본과 사본을 다시 대조 검토하여 나가는 중에 헤롯 대왕의 사망연도가 1544년 이후의 사본부터 BC 1년을 BC 4년으로 잘못 기록된 오기(copy error)를 발견하였습니다. 즉, 헤롯 대왕의 사망과 예수님의 탄생은 BC 1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연도도 AD 33년으로 수정되어 가고 있습니다(참고: 다른 로마의 역사와 그 정황들은 AD 33년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중요하고도 놀라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칠십 이레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칙령이 날 때부터(BC 444)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AD 33년)까지 483년의 기간이 지난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유대 월력(우리나라의 음력과 비슷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유대 월력의 1년은 360일입니다. 즉 BC 444년부터 AD 33년까지 476년이 있는데, 이를 유대 월력으로 환산하면 476×(365/360)=483년이 됩니다(더 자세한 연구에 의하면 윤달을 포함하여 날짜까지 정확히 성취).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의 예언이 말씀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참으로 역사를 그의 뜻대로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역대상 29:11)


•칠십이레 예언에 관한 역사적 배경 (Further Historical Background about Seventy Sevens)

앞에서 칠십 이레의 예언에 대해서 살펴볼 때, 예수님이 AD 33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다른 로마의 역사와 그 정황들이 그것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황제는 티베리우스 시저(Tiberius Caesar)이었습니다. 그가 60세를 넘기자 몸이 쇠약해지고 그래서 AD 26년에는 카프리섬(Island of Capri)에서 요양하며 부분적으로 정계에서 은퇴하는 식으로 되어 있었고, 그를 대신하여 로마를 다스릴 집정관(regent)으로 세자누스(Sejanus)를 임명하였습니다. 이 세자누스는 유대인 탄압자로 유명하였고 빌라도(Pilate)는 그에 의해 유대의 총독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초창기의 빌라도는 세자누스의 정책과 보조를 같이하여 티베리우스황제의 우상을 성전에 세우는 등 유대인을 미워하고 포악하게 다루는 반유대사상(Anti-Semitism)으로 일관했습니다(누가복음 13:1). 한편 세자누스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로마에서 쿠데타 음모를 계획하다 티베리우스황제에게 발각되어 A.D. 31년에 처형되고 맙니다. 그 후 다시 정계에 복귀한 티베리우스황제는 유대에 대해 세자누스와는 달리 그들의 정치적, 종교적 독립권을 조금은 인정해 주는 “Let the Jews alone.” 정책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자누스의 권력을 등에 업고 유대민족에게 포악한 정치를 하였던 빌라도 총독은 A.D. 31년 세자누스의 처형 이후 매우 어정쩡한 정치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유대민족에게 어느 정도 자율권을 주라는 티베리우스황제의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독의 자리도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요한복음 19장을 정독해 보십시오. 이 당시 유대인에 대한 빌라도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포악하게 힘으로 권세를 휘두릅니까? 아니면 그들의 자율권을 조금 인정하는 가운데 그들의 눈치도 살핍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아무런 혐의도 찾지 못해서 놓아주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의 어떤 말에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꿉니까? 그 때의 정치적 상황과 어떻게 결부가 됩니까?

즉 빌라도 총독의 유대인들에 대한 우유부단한 태도와 그의 불안했던 정치적 입지를 볼 때, 요한복음 19장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은 세자누스가 처형된 A.D. 31년 이후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과 정황들은 A.D. 33년에 예수님이 돌아가셨음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 (시편 93:5)

다니엘 9:26에는 “메시아가 끊어 없어진 후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 하려니와” 즉 A.D. 70년 로마의 타이터스(Titus)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훼파 되고(마태복음 24:2) 그 이후 유대민족은 온 세상에 흩어져 유리 방황하게 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재판 시 본디오 빌라도에게 “이 사람(예수)의 피에 대하여 나(빌라도)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복음 27:24-25)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 저주 맹세한대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비롯하여 “앤티세마이티즘”이라는 유대인 핍박이 예수님 이후의 역사 속에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은혜의 교회시대( church age of grace)는 유대민족에게는 버림받고 잊혀진 기간입니다. 이리하여 은혜의 복음은 온 이방 세상 끝까지 전파될 것이고(누가복음 21:24, 마태복음 24:14)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회심하게 되고(호세아 3:5, 로마서 11:25-26) 유대백성은 7년 대 환란(Jacob's 7-year tribulation)의 중심역할에 서게 될 것입니다(7년 대 환란의 시작에 예수님의 공중재림과 모든 믿는 성도들의 휴거가 일어날 것임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의 회심이 있게 하여(이사야 45:17), 그들을 복음전파의 마지막 도구로 쓰셔서 결국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시키실 것임).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44:21)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라기 3:6)

유대백성의 마지막 한 이레(490-483=7년)에 대해서 다니엘 9:27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의 계시와 예언은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한번 확인이 됩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다니엘 12:1)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예언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시키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그의 가족들이나 제자들이 어서 메시아로서 세상에 드러내실 것(Messianic manifestation)을 옆에서 부추겼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때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요한복음 12:23)고 하시며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Your time is anytime but my time is God-appointed and my hour has not yet come.(John 7:6)” 즉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은 시간대가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한 예언의 성취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우주와 생명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시고 그의 뜻대로 역사를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시고 무릎꿇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창세기 및 구약의 많은 부분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판단하기에 비과학적인 요소들이 있다하여 “신화 (mythology)”로 전락시키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33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 당신에게도 있습니까?


앞에서 살펴 본 예들 외에도 성경에는 수많은 예언들과 그의 성취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인도아래 기록된 것임을 하나님의 결재 도장까지 찍어가면서 증거 하신 것입니다. 주위의 작은 개미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 개미들은 3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 사람들이 철학이나 언어를 구사하고 컴퓨터나 비행기를 만들고 하는 것들을 아무리 천재 개미라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개미가 되어 그들의 표현 방식으로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같은 피조물인 사람과 개미 사이에도 이와 같이 엄청난 격차가 있다면, 초월자인 창조주와 피조물인 우리 사이의 차원적 격차는 정말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우리들의 작은 머리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이사야서 10:15를 묵상하십시오. 그 크고 높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짖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사야 29:16)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6

모형과 풍유 

김무현


모형과 풍유 (Type and Allegory)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상징을 통하여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모형론(typology)과 풍유법(allegory)이 있습니다. 모형(types)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예언적 상징(prophetic symbol designed by God prefiguring something to come)이고 풍유(allegory)는 확장된 은유법(extended metaphor)입니다. 모형론은 앞에서의 멜기세덱의 예와 같이 객관적인 상징성이 있고 또 성경이 그를 증거 해 주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성막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등이 모형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하는 것 등입니다.

저희가 (제사장들이 성막 안에서)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브리서 8:5a)

로마서 5:12-21을 정독하여 보십시오. 로마서 5:14의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NASB 성경에 “Who is a type of Him who was to come.”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로마서 5:18-19)

위의 성경말씀에 의하면 왜 아담이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합니까?

풍유법적 해석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 외의 감추어진 은유적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즉, 객관성은 결여되지만 주관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도 있는 비유적 표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생 라합이 여리고성 함락시 자기 집 창문에서 붉은 밧줄을 내림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여호수아 2:21), 그 붉은 밧줄은 십자가의 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 피로 물든 밧줄을 붙드는 자는 살 것이요, 그렇지 않은 자는 죽으리라.”는 등의 해석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마라의 쓴 물로 인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좌절하고 원망할 때(출애굽기 15:22-27)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질 때, 쓴 물이 단물로 바뀐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을 풍유적 표현으로 “예수님의 몸(이새의 가지, 이사야 11:1; 하나님의 싹(Branch of the Lord), 이사야 4:2)이 십자가(나무)에 던져짐으로 고통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쓴 물) 영생과 거듭남의 참 기쁨(단물)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24)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은 특히 개인의 묵상시간에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되어 큰 은혜로 다가올 수는 있지만 다른 성경구절에서 뒷받침해주는 객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학적 의미로 객관화하는 데에는 많은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풍유적 해석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11에는 동방박사들이(Magi) 갓 태어난 아기 예수에게 보배합을 열어 황금(gold)과 유향(incense)과 몰약(myrrh)을 예물로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예물들은 앞으로 일어날 예수님의 사역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황금은 왕관 즉 왕(kingship)에게 적합한 예물이며, 유향은 분향에 사용되므로 제사장(priesthoodship)에게 적합한 예물입니다(요한계시록 8:4, 출애굽기 30:34-37). 앞에서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예수님을 상징했었음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또한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것으로(요한복음 19:39-40) 스스로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축하하는 선물로서 시체에 바르는 몰약을 준비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예수님의 사역을 드러내시기 위해 특별히 동방박사들의 예물을 그와 같이 미리 정하여 놓으시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모형(type)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형(type)과 풍유(allegory)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NASB성경에는 갈라디아서 4:24의 “이것이 비유니”가 “This is allegorically speaking(NASB)”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4:22-31에, 이삭과 이스마엘을 각각 새 언약 안에서의 자유 자율법 안에서의 종 된 자로 조명하고 있는데, 무엇이 무엇에 대한 알레고리적 상징인지 정리하여 보십시오. (만약 위의 창세기의 내용이 특별히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상징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선포하신 것으로 본다면 모형(type)에 해당할 수 있겠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5

멜기세덱 : 오실 예수님의 모형 

김무현 


멜기세덱 : 오실 예수님의 모형 (Melchizedek: The Type of Jesus Christ)


창세기 14:17-20에는 족보에도 없고 역사에도 없었던 왕이며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나타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창세기 14:17-20절을 읽으시고 왜 멜기세덱이 예수님의 type(모형)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7-20)

•멜기세덱의 신분은 왕이며 또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왕 중 왕이시며 오늘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성찬시 예수님의 찢긴 살과 흘린 피를 기념합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하였습니다. (모든 믿음의 후손들에게 축복권을 가진 분)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하였습니다. (모든 믿음의 후손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으실 분)

그 답을 히브리서 7장에서 찾아보십시오.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은 각각 무엇을 말하며 무엇에 대한 상징입니까?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예수님)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옛언약)도 반드시 변역(새언약)하리니 (히브리서 7:11-12) (If perfection could have been attained through the Levitical priesthood, why was there still need for another priest to come - one in the order of Melchizedek, not in the order of Aaron? For when there is a change of the priesthood, there must also be a change of the law.)

히브리서 7:3은 멜기세덱에 관하여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고 증거합니다. 생명의 끝도 없으시고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편 110편을 묵상하시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편 110:1,2,4)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고 있었던 다윗은 멜기세덱이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예표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그 시대의 레위 제사장의 관례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영원한 제사장이 되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사무엘하 23:2)와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살렘 왕의 문자적 의미는 “평화의 왕”(이사야 9:6, 미가서 5:5)이고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사야 11:4, 예레미야 23:5-6)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6-7)

평화의 왕의 상징은 나귀를 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예루살렘 입성 시 나귀새끼를 타리라는 것은 스가랴 선지서에 예언되어 있으며 신약의 마태복음 21:5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스가랴 9:9-10)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1:5)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왕 중 왕으로 오셔서 로마를 비롯한 모든 이방을 심판하고 유대인의 왕국을 세우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초림시에 먼저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과 다시 화목케하는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오셨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 재림의 때에는 전능하신 심판 주, 왕 중 왕(Almighty Warrior, King of kings)으로서 나귀대신 백마를 타고 오시며(요한계시록 19:11-14)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불꽃같은 눈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요한계시록 19:11-13)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4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언 

김무현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예언 (Prophecy about Death of Jesus)

인자는 (구약에)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죽거니와) (마태복음 26:24)

성경은 예수님께서 왜, 어떻게 죽으셔야 하는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찾아보시고 정리하여 보십시오.

내(사도 바울)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고린도 교회)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구약의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3-4)

왜?: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 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12:5-13)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10, 3:23-2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사야 53:5-6,11)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어떻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 3:14)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2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3:13-14)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1, 7-8, 16, 18)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사야 53:7, 9, 10)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사단)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세기 3:15)

구약의 여러 예언들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실 것인지 너무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 22편에는 다윗이 성령의 조명 하에 예수님의 죽음을 영감으로 공유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종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사도행전 4:25)

16절에 먼저 손과 발이 뚫리는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Crucified with His hands and feet pierced). 7, 8절의 조롱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그대로 당하셨으며 (마태복음 27:39), 18절의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며 통으로 짜여진 속옷을 제비뽑는 것까지 십자가 아래서 로마군병들이 그대로 행한 것은 실로 놀라울 뿐입니다 (마태복음 27:35). 이사야 53:9절에서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고 예언된 것처럼 예수님의 장례는, 제자들이 아닌, (산헤드린 공회원인 가장 의외의 인물) 부자(rich man) 아리마대 요셉(그리고 니고데모)에 의해서 몰약과 침향 백 근이나 들여서 치러지고 그의 묘실에 장사되었습니다(마태복음 27:57-60, 요한복음 19:38-39).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25-27)

더욱 놀라운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에 의해서 은 30냥(출애굽기 21:32, 노예를 속전하던 정도의 가치)에 팔리실 것과 그 은 30냥이 성전에 던져질 것과 가룟 유다의 자살 후에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데 쓰여질 것이라는 스가랴 11:12-13의 상징적 예언이 마태복음 26:15과 27:6-7에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스가랴 11:12-13)

(Then I said to them, 'If it is agreeable to you, give me my wages; and if not, refrain.' So they weighed out for my wages 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e Lord said to me, 'Throw it to the potter.'; that princely price they set on me. So I took the 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rew them into the house of the Lord for the potter.)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마태복음 26:15)

(What are you willing to give me if I deliver him to you? And they counted out to him(Judas) thirty pieces of silver.)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마태복음 27:5-7)

(Then he threw down the pieces of silver in the temple and departed, and went and hanged himself. But the chief priest took the silver pieces and said, 'It is not lawful to put them in the treasury, because they are the price of blood.' And they took counsel and bought with them the potters field, to bury strangers in.)

왕으로 오실 메시아(예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그 값이 매겨져 노예를 속전하던 값인 은 30세겔에 팔린다는 것이 얼마나 믿기 어려운 예언입니까? 그 시대의 분위기로서는 이 예언이야말로 거의 신성모독을 했다는 질책을 면키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모두 예언적으로 기록되었으니 그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에 관한 300개 이상의 구약의 예언들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200년 전에 기록된 히브리 사해사본과 헬라어 번역 칠십인역 및 수많은 다른 사본들을 통하여 그 기록들이 예언이 성취된 후대에 변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불순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볼 때 죽음을 면했던 것처럼(민수기 21:9)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고 믿을 때, 그리고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집니다(요한복음 5:24). 예수님께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13).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44-4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03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예언 

김무현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가 행한 모든 말씀, 기적과 부활 외에도 성경의 예언으로 확신될 수 있습니다.

그(예수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6-8)

성경(구약)이 곧 내(예수님)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예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로마서 3:21)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한복음 5:46)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예언 (Prophecy about Birth of Jesus)

예수님의 출생지와 출생집안, 출생방법 등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예언하고 있습니까?

출생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테초에니라. (미가서 5:2)

출생집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 11:1-2, 10)

출생방법: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많은 유대 사람들과 모슬렘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현현이 아닌 위대한 선지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내가 하나님이고 메시아임을 성경이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설사 어떠한 사람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가장할 목적으로, 성경에 나와있는 예언의 몇 가지를 흉내내려 해본다 할지라도, 자기의 출생에 관해서는 자기가 임의로 조정(control)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미가서에서 예언된 대로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시는 과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운행하시어 그 뜻대로 이루시는지를 다시 한번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가 5:2)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이새(다윗의 아버지)의 가계(이사야 11:10)에서 동정녀(처녀, 이사야 7:14)를 통하여 잉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 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이 아닌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움직이지 아니하시면 미가서의 예언은 불발로 끝나버릴 위기에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1-7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로마황제의 생각을 움직여 로마의 식민지인 유다 백성에게 호적하라 명을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자손이므로 본적(사무엘상 16:1)이 베들레헴인 요셉은 출산이 가까워 거동이 불편한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에 호적 하러 갑니다. 도착하자마자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합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오는 도중 요셉과 마리아가 늦잠을 잤거나 다른 이유로 여정이 조금이라도 늦추어 졌다면 미가서의 예언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여정과 그 갈길, 그 때와 모든 행사를 주관하시고 주위의 권세자들이나 사람들의 마음과 뜻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번 보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요 (시편 33:13)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시편 33:15)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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