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ile background

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6-07-01

제5장 성경의 예언과 성취 I  - 서언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됨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김무현


서언

앞장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성령님의 인도 하에 기록되었으며, 1500여 년에 걸쳐 40인 이상의 저자를 통하여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일관성이 있고, 서로 모순이 없다는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며 공부하였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성령님이라는 가장 확실하고도 분명한 증거는 성경의 예언들로 드러납니다. 성경은 어떠한 중요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선포하고 그의 성취를 통하여 역사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증거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 전 수 백년 전에 다 완성되어 그 사본이 널리 배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오신 후, 그 이루어진 일들을 보고 배포된 사본들을 모두 거두어들여 수정하고 조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3:19)

성경에는 1817개의 예언(for 737 separate subjects)이 8,352 구절에 들어있으며 이는 전체 성경 내용의 27%나 된다고 합니다. 그 예언들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된 것을 보면서 역사와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예언들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괜히 예언들을 임의로 적어놓았다가 나중에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위험을 또한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성령님의 강권적 인도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수많은 내용의 예언들이 기록되었고 또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는 앞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수백 구절에 달합니다. 이 장에서는 먼저 예수님에 관한 구약의 예언과 성취에 관한 몇 개의 예만을 함께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지면의 제약 상 더 많이 살펴보지는 못하지만 이 예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이사야42:9)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한복음 16:13-14)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15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 III. 토의 및 적용

김무현 


보화 캐기에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어느 미국 사람이 죽은 아버지가 몇 백만 불의 유산을 본인 이름으로 남겨 놓은 것을 모르고, 일생동안 거지처럼 살다가, 죽기 전에야 그 사실을 알고, 억울해 땅을 치고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값을 메길 수 없는 엄청난 보화, 즉, 우리의 인생을 정말 풍성하게 해 줄 성경을 유산으로 남겨 주셨는데, 그 말씀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노력하지 않은 채, 영적으로 거지처럼 살다가 일생을 마감하는 이름뿐인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땅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 보화 캐기에 오늘부터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왜 쓸데없는 내용이 있지?

당신은 간혹 성경을 읽는 도중 ‘왜 이런 쓸데없는 내용이 있지?’라고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말씀은 “원대한 창조의 목적과 과정”, “우리를 향하신 계획”, “사랑과 권면의 메시지” 등 너무도 많을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마음 중 꼭 필요한 것만 성경에 담아 놓으셨습니다.(성경이 팔만대장경이 아님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내용 중에 필요 없는 말씀은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너무도 자세히 나오는 성막의 구조양식이나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 제사들, 그리고 여러 절기들 이 모든 것들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그런 내용 같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과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성도의 삶 등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속의 보화를 캐내는 사람에게만이 그에 합당한 큰 감동과 깨달음이 있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119:103)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헛 그물질만 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게 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11절에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고기가 일 백 쉰 세 마리라.” 이 구절을 묵상하던 중 ‘왜 성경에는 이런 쓸데없는 내용들이 있지? 도대체 물고기수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어느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었습니다. 모나미 볼펜 사장이 처음에는 사업에 번번이 실패하여 가지고 있던 자본과 재산을 다 날리고 실의와 고뇌에 빠져 자살을 결심하기까지에 이르렀답니다. 그 때 마지막으로 기도원에 올라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며 요한복음을 읽어내려 가던 중 바로 그 21장에서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실의에 빠져있는 제자들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함께 하실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큰 고기가 153마리나 가득한 그 물, 그곳에 눈이 멈추어지며 “네가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때 사업에 재기하고 이 같은 수확을 얻으리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슴이 벅차 오르며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오더랍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후로 주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뛰어 성공했고, 그래서 모든 모나미 볼펜에는 “153”이라는 표시가 찍혀있다고 합니다.  (참고 : 153 이란 수는 각 숫자의 3제곱을 더한 합이 자기 자신이 되는 특이한 수이다. 즉, 13+53+33 = 1+125+27 = 153 )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시편 119:50)

이 설교를 들은 후에 ‘정말 성경에는 쓸데없는 내용이 없구나. 내가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구절에서 다른 사람은 새 생명을 얻고 인생이 전환되는 그러한 능력이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필요 없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 한자 한자에서 성령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부(wealth)와 귀(honor)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역대상 29:12)

[나눔] 당신은 일반적으로 필요 없어 보이거나 그냥 넘어가기 쉬운 성경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한 예를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How do we know the Bible is inspired?)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숨결로 영감되어 대언자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흔히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증거가 있으면 말해보시오.”라고 질문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경우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앞에서 공부한 바와 같이 성경이(디모데후서 3:16 등)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증거 하지만 그것은 아래 예와 같이 순환이론(circular reasoning)이므로 논리적으로 그들을 설득시키기가 힘이 듭니다.

•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진리이며 권위이다. (The Bible is inspired, therefore true and authoritative.)

• 그렇다면, 성경이 영감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How do you know it is inspired?)

• 그건,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지. (Because the Bible says so.)

• 그러면, 그 성경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How do we know it is right about this?)

• 그건, 성경이 영감 되었기 때문이지. (Because the Bible is inspired.)

……

이러한 논리적 설득이 어려운 이유는 성경을 이미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졌다고 받아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사이에 생각하는 전제 및 견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효과적인 대응방안은 무엇일까요? 어떤 식으로 불신자들의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 함께 토의해 봅시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15) Always be ready to give an answer to everyone who asks you to give the reason for the hope that you have. But do this with gentleness and respect. (I Peter 3:15)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14

성경은 과연 비과학적인가? 

김무현


성경은 과연 비과학적인가?(Is the Bible Scientifically Unreliable?)


이 세상의 진리나 과학적 패러다임은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변해 갑니다. 하지만, 성령님에 의해 기록 된 성경은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참 진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무오성은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현 과학의 패러다임으로 뿌리를 내린 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면 창세기의 창조내용이 근거 없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결론이 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진화론의 문제점들만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2권 『성경적 창조관 세우기』에서 더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무디과학연구소의 소장이었던 어윈 문(Erwin Moon) 박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일생동안 성경의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수 차례에 걸쳐 과학적으로 어떤 문제나 모순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하여 보았으나 그러한 오류를 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에스겔 7:2과 이사야 11:12에 '땅 사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네 구석들(four corners)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지구가 사각형으로 되어있다 하니 비과학적이고 오류가 있다"라고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corners'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나프'의 일반적인 의미는 '극한(extremity)'입니다. 이 '카나프'는 욥기 37:3과 38:13에서도 쓰였는데, 그곳에서는 땅 끝(ends)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땅 끝이란 번역도 땅에 끝이 있는 것처럼 잘못 전달될 위험이 있습니다(실제로 중세 및 그 이전의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음.). 즉 욥기 37:3의 '빛으로 아주 먼 곳(extremity)까지 이르게 하시고'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4 corners를 가진 사각형을 말하고자 했다면 '파무드'라는 정확한 의미의 히브리 단어를 주셨을 것입니다. 히브리 원어의 부적절한 번역 표현으로 발생된 오해들입니다.


또 간혹 성경에 지구가 평평한 것 (flat earth)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성경에는 그런 구절들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욥기 26:7에는 "그는 땅을 공간에 다시며(He suspends the earth over nothing: NIV)"와 같이 우주 공간 속에 아무런 지지도 없이 중력에 의해 떠있는 지구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이사야 40:22에는 "그는 땅 위의 궁창에 앉으시나니(NIV: He sits enthroned above the circle of the earth)"와 같이 지구가 원형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circle'이라는 말은 구상/원형을 의미하는 히브리 원어 '쿠그(khug=sphericity or roundness)'를 번역한 것입니다. 잠언 8: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을 두르실 때"에서도 같은 원어 '쿠그'가 'compass'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여튼 성경에서는 분명히 지구가 구상으로 되어 있으며 우주 공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히려 더욱 놀라는 것은 B.C. 700년 경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가 어떻게 지구가 구상임을 알았으며, 아브라함 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욥이 어떻게 지구가 이 우주 공간에 덩그마니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는 그리이스나 로마 사람들, 심지어 중세의 사람들까지도 지구를 거대한 코끼리나 거북이 또는 헤라클레스등이 받치고 있다고 이해했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그들의 손을 빌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34-35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재림시 지구의 한편에서는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낮에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은 순간적이며 전지구적 사건일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당시 어느 누구도 지구가 구상이며 자전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지구상에 밤과 낮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은 이미 열성/우성에 관한 멘델의 법칙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예로 성경은 욥기 36:27-28에 물의 순환과 강우(Hydrologic Cycle and Precipitation)에 관한 정확한 과학적 표현이 나옵니다. 욥기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아브라함의 부족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욥기 36:27-28). "He draws up the drops of water, which distill as rain to the streams; the cloud pour down their moisture and abundant showers fall on mankind." (Job 36:27-28)

심지어 중세(Middle Ages)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구름이 어떻게 생기며 비가 왜 오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신비로움으로 여겨왔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B.C. 2000년 경의 욥이 어떻게 그렇게 물의 순환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는지 경이롭기만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할 수 있었겠지만…….


시편 8:8에는 바다의 흐름(해류)에도 길이 있다고 합니다.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The birds of the air, and the fish of the sea, all that swim the paths of the seas).” 이사야 43:16에도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pathways in the seas)” 라고 하였습니다. 바다에 해로가 있다고 처음 발견된 것은 해양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매튜 모리(Matthew Maury)에 의해서이며 19세기 중엽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편 8편에는 이미 바다에 해류가 있다고 선포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조에 관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3)라고 증거하였습니다. 현대물리학의 아버지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에너지(E)와 물질의 질량(m)이 E=mc2 (c: 빛의 속도)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보이는 것들(질량)이 보이지 않는 것(에너지)으로부터 창조될 수 있음(matter can be made from energy)을 증명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확장되는 우주 (expanding universe: 시편 104:1-2, 이사야 42:5, 45:12) 나 공기에 무게가 있다는 것 (욥기 28:25) 등 성경이 쓰여졌을 그 당시 지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과학적, 의학적 기록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갈릴레오는 후일 종교재판의 압력에 의해 자신의 견해를 외적으로 수정한바 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성경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많은 불신자들의 “성경과 과학은 충돌한다”라는 편견과는 달리 프랜시스 쉐퍼 (Francis Schaeffer) 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습니다. "근대 과학의 등장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와 대립하지 않았다. 사실상 결정적으로 과학혁명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에 근거했다." 20세기의 저명한 두 석학 화이트헤드 (Whitehead)와 오펜하이머(Oppenheimer)교수는 불신자이면서도 정직한 관점으로 "근대 과학의 중요한 기초가 성경적 세계관에서 탄생하였다"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즉 "인격적 초월자의 지적 합리성에 대한 신념이 근대 초창기 과학자들의 연구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과학의 역사에는 3번의 큰 혁명이 있었습니다. 뉴턴에 의한 중력장의 발견이요, 맥스웰의 전기장과 자기장의 통합이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통일장이론(unified field theory: not completed yet)입니다. 모두 창조를 믿는 과학자들입니다.


과학의 여러 분야의 박사학위를 가진 윌더스미스(A. E. Wilder-Smith)는 그의 『성경의 신뢰성(The Reliability of the Bible)』이라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성경은 과학교과서도 아니고 과학적 전문 용어로 쓰여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성경은 여러 과학적 현상들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어휘들로 명확하고도 무오하게 기록하였다."

당신은 당신의 친구로부터 성경은 오류가 많고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이러한 조롱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태복음 22:29)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12

성경이 참 역사의 기록임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들 

김무현


 성경이 참 역사의 기록임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들 (Archeological Evidences of the Bible's Historical Records)


당신은 누구에게 의심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있었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불쾌했던 경우 중에 하나였겠지요. 당신은 성경을 읽으면서 또는 기도를 드리면서 의심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야고보서 1:6~8을 묵상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야고보서 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성경의 많은 기록들을 과학적/합리적이라는 미명 하에 인간의 작은 머리로 재해석하려는 운동이 자유주의 신학입니다. 이러한 자유신학은 동정녀탄생이나 예수님의 모든 기적들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예수님을 부처나 공자와 같은 훌륭한 도덕선생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자유주의 신학이야말로 오늘날 진화론과 함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가장 큰 사단의 무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진화론과 인본주의, 자유주의가 팽배했던 유럽의 교회들은 지금 화려한 건물과 간판만 존재하지 신앙은 죽은 채로 남아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4을 묵상하십시오.

그 중에 이 세상 신(사단)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4)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로마서 16:17-18)

성경은 비과학적인 책이 아니라 초과학적인 책입니다. 지어낸 역사가 아닌 참 역사입니다. 과학으로서는 영의 세계(spirit)나 초월자를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최근까지 발달된 과학은 오히려 진화보다는 창조를 더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2권에서 더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도 정확한 기록임이 계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과학에 관한 저서보다 신학에 관한 저서를 더 많이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심도 있는 성경 연구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의 역사적 기록들은 세속의 어떤 역사문서보다 더 사실이며 진리이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45년 간 고대 문서들을 연구한 윌슨 교수(Prof. Robert Wilson)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세속의 대부분의 역사 문서들은 편견적이거나 부정확하다. 하지만 오직 성경만은 신뢰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많은 고고학자들이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에 의심을 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앗수르 최대의 성읍이며 요나서에 나옴으로 유명한 니느웨의 유적을 고고학자들이 19세기까지 발견하지 못하여 그것과 관련된 성경의 내용을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큰 홍수의 범람으로 잠겨버린 니느웨성의 흔적과 유적들이 발견되고 소 선지서 중의 하나인 나훔 1:1, 1:8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에 다시 한번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에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자면, 1970년경에 시리아에서는 B.C. 2300년경으로 추정되는 Ebla 점토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성경을 비판하는 일부 고고학자들이 창세기에 나오는 “가나안(Canaan)”이라는 이름이 구약의 후대에서나 쓰인 이름으로 모세 오경이 모세에 의해서 기록되어졌다는 유대전승에 회의적 반응을 보여 왔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창세기 1:2의 “테홈(the deep)”이라는 히브리 원어가 구약의 후대에서나 쓰였던 단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Ebla 점토판에 의해서 “Canaan”과 “Tehom”의 히브리원어가 이미 모세 전에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Ebla Tablet

또한 이사야 20:1에는 “앗수르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비평하는 많은 고고학자들이 다른 근동의 어떤 역사적 문서에서도 사르곤 왕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역사성에 오류가 있음을 주장하여 왔습니다. 최근에 이라크의 코사밷(Khorsabad)라는 곳에서 사르곤 왕의 궁전의 일부가 발굴되어 아스돗을 포획한 사실이 그 궁전 벽에 새겨져 있음으로 인해서 성경의 정확한 역사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비슷한 예로 성경에 나오는 헷족속(Hittites)에 대한 기록이 다른 근동지방의 문서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음으로 인해서, 성경의 저자가 역사에 없는 민족을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되었었습니다. 최근에 터키의 보가즈코이 (Bogazkoy)라는 곳에서 헷족속의 도시와 역사적 기록들이 발굴됨으로써, 성경의 정확한 역사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예를 더 들자면, 다니엘 5장에 바벨론의 마지막 왕으로 나오는 벨사살 왕(Belshazzar)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다른 근동의 문서에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 나보니더스 (Nabonidus)로 나와있음으로 해서 성경을 비평하는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경이 없는 사실을 지어낸 것으로 간주하여 왔었습니다. 19세기 중엽에 벨사살이 나보니더스 왕의 아들로서 그 당시에 나보니더스 왕과 바벨론을 공통으로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적힌 토판(Tablet)들이 발견됨으로써 성경의 정확한 역사성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특히 다니엘서의 예언들이 너무나 정확하게 성취되기 때문에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이 그 책이 다니엘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 후대에 쓰여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자료는 거의 없으며 그저 다니엘서에 헬라어 단어 3개가 들어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그리스의 악기 이름으로서 그와 같은 자유신학적 주장에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여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대 바벨론의 유적들은 『다니엘』서의 내용들이 모두 역사적 사실들임을 증거합니다. 예를 들어 발굴된 한 바벨론 건물의 비석에는 다니엘서 1장의 내용처럼 포로로 잡혀온 왕족과 귀족에게 갈대아(바벨론)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건물이라 적혀있고, 다른 곳에서 발굴된 거대한 용광로에는 다니엘서 3장의 내용처럼 바벨론 신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화형 시키는데 사용되는 용광로라 적혀있었습니다. 한편 발굴된 느브가넷살 왕의 명각에는 다니엘서 4장에 느브가넷살 왕이 제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했던, 그 공백기에 대한 기록이 있었는데, 그 내용과 시기가 성경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최근에 고대 역사를 연구한 데이비드 롤(David Rohl)의 문명의 기원 (The Genesis of Civilization)과 피터 제임스(Peter James)의 책 암흑의 세기들 (Centries of Darkness) 에 의하면, 성경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고대 초기 이집트의 역사의 일부가 조작/변개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합류하여 영국 케임브리지 (Cambridge) 대학의 렌프류(Coli Renfrew) 교수는 “고고학의 시대 추정에 새로운 혁명이 진행 중에 있다.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할 것이다. (A chronology revolution is on its way. History will have to be rewritten.)”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간에는 불신자들까지도 성경을 토대로 연구하고 탐험해야만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성경이 과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오류 없이 기록된 책임을 믿습니까?

호주고고학연구소(Australian Institute of Archeology)의 소장이었던 윌슨(Clifford Wilson) 박사는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의 어느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과 상반된 적이 없었다. 성경은 이 세상이 소유한 어떤 역사책보다도 가장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고고학의 가장 위대한 권위자 넬슨 글루에크(Nelson Gluek)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찾아낸 수십 가지의 고고학적 발굴들은 한결같이 성경의 역사기록들이 개괄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아주 정확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경의 내용을 자세히 연구함으로 인하여 종종 놀라운 고고학의 발견들이 이루어졌습니다.” (Dr. Nelson Glueck, Archeologist, from his book “Rivers on the desert”)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9

성경은 왜 다른 역사책이나 자서전들과 다른가? 

김무현

 

성경은 왜 다른 역사책이나 자서전들과 다른가? (Why the Bible Is Distinctively Different from Other Historical or Biographical Books?)


우리는 흔히 역사책에서 배우는 역사적 기록을 무비평의 자세로, 마치 그 속의 모든 내용이 확실하고 객관적인 기록인양 받아들이려 하며, 그 역사적 기록들이 개인의 편견이나 관점 또는 민족의 유익여부에 따라 얼마나 많이 변조되고 위조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하지만 성경은 성령님의 인도 하에 기록된 책이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압제 당하고 사로잡혀 가는 일들, 그리고 민족의 영웅이나 왕들이 조금도 미화되지 아니하고 추잡하고 부끄러운 것까지도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어떤 개인이나 민족의 유익에 따라 변조되어서 기록되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시편 33:4)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는 모두 다섯 명의 여인들이 나옵니다. 즉, 다말, 라합, 룻, 밧세바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 중 마리아를 제외한 네 명의 여인이 이방인 출신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의 성관계를 통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의 천한 기생이었습니다. 룻도 모압여인이었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왕과 간통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흠많은 여인들과 부끄러운 사실들을 굳이 예수님의 왕의 계보에 포함시킨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특별한 목적과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마태를 그와 같이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계시를 받은 저자들의 입과 손을 통하여 기록된 책입니다. 모세는 창세기 1:26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리고 창세기 3:22에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창세기 11:7 바벨탑 사건에서도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라고 기록했습니다. 창조주를 가리키면서 ‘우리’라는 복수형을 씀으로써 이방민족의 다신교와 유사하다는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기록했을까요? 분명히 유일하신 하나님(Mono God)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모세가 왜 ‘우리’라는 말을 썼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왜 ‘엘로힘’(Elohim의 접미사 him은 3이상의 복수인 경우에 쓰임. 하지만 엘로힘은 단수동사와 함께 쓰였음)이라는 이름을 썼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며 모세가 절대로 써서는 안될 것 같은 단어가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임의로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그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한 분이면서도 세 위(성부, 성자, 성령)를 가지신 인간의 두뇌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에 동참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개념을 모세가 그의 두뇌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조명하여 주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경도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함께 창조사역을 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령)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만물이 그(예수 그리스도)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6-17)

비슷한 예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중에 의아한 내용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사도행전 2:38-39)

베드로는 욥바에서 고넬료에 대한 직접적인 계시를 받기 전까지는 이방인의 구원이나 성령 받음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할례 없는 이방인의 구원을 외쳤던 사도 바울과의 혼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고넬료 사건전인 오순절 설교에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으로 죄사함을 받는 약속에 모든 이방인이 포함된다”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설교 중에 강권적으로 그렇게 인도하여 주셨고 그것을 누가가 기록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사주를 받은 발람의 입에서 엉뚱하게도 이스라엘을 축복한 사건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 같은 일들, 즉, “성령이 너희 생각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한복음 16:13)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7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시길 원하셨나? 

김무현


    성경을 비아냥거리며 비웃기를 좋아하는 불신자들 가운데에는 만일 전지 전능하신 창조주가 계시다면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왜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을 오늘날 보여주시지 않는가? 라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실제로 기적을 보느냐 안 보느냐가 믿음의 결정적인 동기가 됩니까? 출애굽기의 바로 및 애굽백성 그리고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민수기 14:22-23)은 어떠합니까? 여리고성의 백성들(여호수아 2:10-11)은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및 따르던 사람들은 어떠하였습니까?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29:3-4)

신명기 29:3-4에서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는 등 여러 가지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도 하나님을 깨닫는 마음과 영적인 눈과 그 음성을 듣는 귀를 갖고 있지 못함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영적인 눈을 허락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며, 동행하고 인도하여 주시는 그 은혜가, 그 많은 기적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 때보다도 얼마나 더 풍성 한지요.

하나님께서 믿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심지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을 볼지라도 믿지 않게 됩니다. 누가복음 16:31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믿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6:31)

요한복음 6: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전후하여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참으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라지신 예수님을 열심히 찾으러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낸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한복음 6:28)”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 가장 중요하고 그러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성령의 자연스러운 역사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무리들은 그 교훈을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로 체험한 그 다음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요한복음 6:30)” 즉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합니다.

기적 때문에 흥분하며 믿으려하는 사람들은 계속 기적을 요구하게 되어있습니다. 믿음의 기반이 기적이기 때문에 그 기억이 희미해지면 또 다른 기적을 찾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메시아의 참 의미며 그 안에 영생이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리고는 그런 어려운 말씀은 잘 이해가 안가니 표적이나 보여달라고 수군대는 무리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복음의 메시지)이 영이요 생명이나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책망하십니다. 즉 표적을 봄으로써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그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에서는 그 기적을 체험한 무리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예수님)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러라(요한복음 6:66)”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무엇인가 얻어내기를 바라며 따라다니던 무리들은 진리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던 제자들마저도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흩어지고 숨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나의 신앙에 혹시 이러한 모습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요?

최근 인간 유전자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를 통하여 지극히 미세한 유전자(gene) 속에 실로 엄청나게 복잡하고도 정교한 정보들이 신묘막측 하게 담겨져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DNA를 모두 연결하면 지구와 태양을 10번 이상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된다고 합니다. 그 안에 인체의 생명현상을 만들어가고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엄청난 양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체의 구조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저 우리가 숨쉬고 사는 것이 기적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능자의 지적 설계를 보면서 모든 진화론자들이 신앙을 가지게 됩니까?

로마서1:20에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창조주의 손길을 분명히 보되, 그를 인정치 않으려는 죄성이 그 믿음의 시야를 가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그 뿌리깊은 죄성 말입니다.

이 세상신(사단)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고린도후서 4:4)

로마서 1:21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로마서 1:21-25)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성경을 통하여 주어지기 전에는, 그러한 기적들이 하나님의 유일한 신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필요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완전한 계시(성경 66권)가 주어진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대에 기적의 역사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완전한 계시가 주어졌으므로 극히 제한적으로 (특히 자연계의 기적) 사용하실 뿐입니다. (완전한 계시가 미미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한 일선 선교지 등에서도 기적의 역사가 복음전파의 일익을 담당함을 볼 수 있음).

로마서 1:17을 묵상하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무엇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 이르게 합니까?

고린도전서 1:21-24를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1-24)

유대인과 헬라인은 각각 무엇을 구한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까? 왜 좀 더 드라마틱한 방법대신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쓰실까요?

이 시대에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역사 하실 때 회심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through the living and enduring Word of God)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사실 성경을 통한 완전한 계시가 주어진 후에 가장 놀라운 기적중의 기적은 그 말씀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인격과 가치관이 완전히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의 변화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냐 사단의 능력이냐를 분별하는 리트머스 테스트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실재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살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새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과연 필요할까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17:31)

로마서 16:26에 의하면 우리의 신앙을 능히 견고케 하는 것은 계시된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로마서 16:26)

다음의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정리하는 기분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길 원하셨나?”에 대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7-29)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4:1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22:18~19에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도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복음의 내용이 요한계시록으로 마쳐졌다고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다른 것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에 부가되거나 비슷한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 카톨릭에서 교리문답서를 성경과 같은 위상에 둔다거나 교황청의 명령을 성경과 같은 권위에 둔다면 그것은 오류일 것입니다. 모슬렘들은 마호메트에게 알라신이 특별히 계시하셔서 성경 위에 코란을 주셨다고 합니다. 몰몬교도들은 조셉 스미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계시하셔서 성경 위에 몰몬경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이 요한계시록 22:18에 비추어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예레미야 23:30)? 성경의 전체적 내용을 확실히 알고 이단의 교리에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리고 주위에 이단의 교리에 현혹된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에게 정확하고 바른 복음을 전할 지혜와 담대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5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김무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성경의 참 저자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다음 구약의 성경구절들을 찾아보시고 그 핵심적 내용을 정리하십시오.

여호와께로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0:1-2, 33: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출애굽기 17:14, 24:4)

제 구년 시월 십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 (에스겔 24:1-2)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이사야 30:8)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Then, the Lord put forth His hand and touched my mouth, and the Lord said to me; 'Behold, I have put My words in your mouth.') (예레미야 1:9)


예수님/성령님께서 말씀하시길…

40명이 넘는 성경의 저자(실제로는 대언자)들은 성경에서 3,000번 이상이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대언해서 적고 있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찾아보며 성령님이 성경의 참 저자임과 그로 인한 권위와 무오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정리하십시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요한일서 1:1-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라디아서 1:11-12)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에베소서 3:3-4)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The Scripture cannot be broken) (요한복음 10:35)

마태복음 22:43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육체적 저자는 다윗이지만, 참 저자는 성령님이었음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36:4에 보면 바룩이 예레미야서를 기록했으며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실질적 저자입니까? 한편 예레미야가 구술한 내용은 여호와께서 직접 이르셨다고 했습니다. 결국 누가 예레미야서의 저자입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사도)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마태복음 10:20)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한일서 5:7)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3

성경의 저자는? 

김무현


      성경은 성경의 저자가 오직 성령님이심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6, 베드로후서 1:21, 요한복음 14:2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義)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참고> “감동하다”의 헬라어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다”의 뜻임.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후서 1:2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하나님께서는 계시와 영감의 기록인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친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는 지도자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애굽기 20:19).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두렵건데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신명기 18:16).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명기 18:18). 이것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약속이지만 또한 앞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택하시고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고 기록할 것임을 약속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우리가 참 선지자인가를 구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명기 18: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나 대언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계시나 영감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나 대언자들은 다만 성경기록의 도구나 매체로 쓰여졌을뿐 성경의 저자는 아닙니다. 성경의 참 저자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6-02

 성경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 - I. 서언

 김무현 


서언

제 1, 2장에서는, 참 기독인이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계시하여 주신 성경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가치와 윤리체계를 세우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구원의 범위를 넘어, 다른 사람의 구원과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사회와 문화의 구속에까지 열정을 갖고 있는 자이어야 함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건강한 성경적 세계관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inerrancy)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18에서 다음과 같이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해 증거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8)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특별히 다르게 창조된 것은 영적인 존재(창세기 2:7)로서 사고 할 수 있다는 것과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어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사랑과 그 계획들을 기록하여 놓으셨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의 시작과 끝은 어떠한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들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육체적 죽음 뒤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을까? 절대적 윤리 기준은 과연 존재하며 누가 그것을 만들 수 있나?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고민하며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명확한 해답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붙드시며, 그의 뜻대로 운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도록(stewardship, 창세기 1:28, 시편 8:6) 창조된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을 알려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15에서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창세기 1:26)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하여 언어로 기록하여 넣으셨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베드로후서 1:2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서 그의 말씀을 보존토록 하셨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로마서 3:1-2)

이스라엘 서기관(Jewish scribes; Masoretic)들이 양피지 두루마리에 하나님 말씀을 사본으로 기록하고 보존하는데 어찌나 철저했던지, 획수를 정확히 세어 중간에 한 획이라도 잘못되면 그 두루마리 전체를 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본을 만드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붓을 깨끗이 빨고 경건한 자세와 마음으로 기록했다 합니다. 다른 민족이 이 사명을 부여받았더라면 이렇게 정성스럽게 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튼 이러한 정성스런 기록의 보존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사야 2:3)

성경의 원본은 지금 남아있지 않고(신약원본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약 사본 사이에는 약 100년 정도의 간격이 존재함) 사본(codex)들도 손상된 부분이 있는 채로 보전되어, 여러 사본을 서로 비교 검토하여 오늘날의 성경전체가 완성된 것입니다. 1947년 아랍의 양치기 소년에 의해 쿰란 동굴에서 구약전체가 거의 손상 없이 보존된 사해사본(Dead-Sea scroll: copied around 200 B.C. by Essenes(에세네파))이 발견됨으로 성경전체가 특별한 문제없이 사본으로부터 잘 만들어졌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편 신약성경은 지금까지 일부 또는 전체가 수록된 고대 헬라어 사본들이 5,000개 이상 발견되었으며, 교리상의 문제에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의 일부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한 예로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A.D. 100년경 사본으로 보이는 요한복음(A.D. 90년경에 기록)의 일부분이 보존된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현재 사용되고 있는 Nestle Greek New Testament와 거의 완전히 일치함이 밝혀졌습니다. 원어로 된 성경(구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신약은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됨)이 사본으로 만들어지거나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극소량의 누락이나 주석을 위한 첨가 및 그 의미 전달이 조금 모호해 질 수는 있겠지만, 그 원본이 성령님의 인도 하에 오류 없이 만들어 졌음을 믿는 것은 흔들리지 않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바뀌어도 성경말씀은 진리로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 (이사야 40:8)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4:35)

구약 39권은 AD 90년 얌니아 종교회의에서(예수님 생존시에도 구약 39권은 이미 정경으로 인정되고 있었음), 신약 27권은 AD 397년에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e)에서(AD 367년 아타나시우스 감독 등에 의해 신약 27권이 합본으로 편집됨) 정경으로 채택되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정경의 선택과정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셨음을 조금도 의심치 말아야겠습니다. 40인이 넘는 저자가 1500년이나 되는 기간에 걸쳐 기록한 성경 66권이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consistent)이고 내용이 서로 완벽하게 맞는 것을 보면, 성령님이 정경 66권의 참 저자이시며 정경으로 채택케 하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님이 참 저자임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 예언의 성취에 있습니다. 즉 먼저 말씀하시고 나중에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 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노라.” (요한복음 13:19)

 

요약 (Summary)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저자들을 통하여 그 성경 원본에 자신의 말씀이 오류없이 기록 되도록 성령으로 주관하시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의 믿음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이 최종 권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놀라운 예언의 성취들은 역사와 모든 만물과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그가 계시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3-29

다빈치코드 : 비밀스런 감춰진 진실? 

; 성경을 공격하고 있는 반기독교적 베스트 셀러

 (The Da Vinci Code : secret hidden truth?)

Alexander Williams 


      악마(Devil)는 거짓말쟁이며 모든 거짓의 아비이다. 사람의 마음(heart of man)은 무엇보다 미혹되기 쉬우며 극도로 부패한다. 이 둘이 합치면 정말로 매우 해로운 독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적들이 성경(Bible)을 불신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전략들을 시도해 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해야만 한다. 이런 토대 속에 최신 베스트셀러 책(저자의 웹 사이트에서는 고금을 통해 가장 널리 읽히는 책 중의 하나라고 주장함)은 댄 브라운(Dan Brown)이 집필한 다빈치코드(The Da Vinci Code)이다. 영화판권은 이미 소니 영화사에 팔렸고, 총 감독은 2005년 영화상영을 목표로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론 하워드 감독, 톰행크스 주연의 영화 ‘다빈치코드’가 2006년 5월 19일에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개봉 예정이다).

태평스런 독자들은 이 작품이 단지 가톨릭 교회의 오푸스 데이(Opus Dei) 회(會)에 반대하는 성배를 지키려고 하는 자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살인 미스테리를 다룬 흥미진진한  공상 소설에 지나지 않는데, 왜 항의를 하냐고 질문한다.

첫째 이유는 이 소설이 역사적인 사실(fact)에 의거한다는 대담한 진술 때문이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이 소설에 기술되는 모든 예술품, 건축, 문서와 비밀의식들은 정확 합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겨우 1명의 비평가가 동의하면서, '그의 연구에는 오류가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오류가 없는 연구?

그러나 분명 오류가 있다 [1]. 예를 들면, 다빈치코드에 등장하는 영웅 중의 한 명은 레이 티빙(Leigh Teabing) 경(卿)이라는 저명한 역사가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배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첫 번 째로 성경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천국으로부터 팩스로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무수한 번역, 추가와 개정을 통하여 생성되었습니다. 역사는 결코 그 책의 최종적인 버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방황하던 하나의 역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수 천의 추종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80개 이상의 복음서들이 신약성경에  포함되는 것이 고려되었습니다. 어떤 복음서가 성경에 포함될지를 누가 결정했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성경은 이교도인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에 의해 집대성되었습니다." (다빈치코드 p.231)

굉장히 많은 역사적 오류들은 계속 나열하고 있지만, 이 한 페이지만 보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는 데에 충분하다.

모든 성경은 그 자체가 정말로 "하나님의 감동으로(God-breathed) 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3:16).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며 (베드로후서 1: 21),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4:35, 마가복음 13:31, 누가복음 21:33). ‘무수한 번역본들'에 의해 그 의미가 소실되거나 와전되지 않았다. 최초의 언어는 히브리어(구약성경 , 일부는 아람어)와 그리스어(신약성경) 였다. 예를 들면 성경의 현대 영어 번역본은 고대 그리스어와 옛 히브리어 필사본의 세밀하게 준비된 기록들(수 천의 필사본으로 퍼져나감)에 의거한다. 기원전 1 세기에 쓰여진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은 구약성경 책의 필사본들이 1000 년이 지나도 최초 히브리 성경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필사 중에 생겨난 약간의 오류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성경의 최종 버전(definitive version)’을 확실히 가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라틴 불가타 역본(Latin Vulgate, 4세기에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한 성서)은 1000년 이상 최종적인 버전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 버전으로의  갈림은 주로 신학적 교리에 의해서였지, 필사본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 개신교와 카톨릭 성경의 내용은 구약성경에서 약간 다른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사한 필사본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도 주요한 교리는 필사본의 차이로 인해 애매해지지 않았다. 정말로, 유사한 고대 필사본들이 많다는 사실은 최초의 원본들이 매우 정확했음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삶은 수천 명의 추종자에 의해 기록되었던, 불안한 영향을 끼치던 한 역사적인 인물이었으며, 그 당시 로마 제국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지척거리 내에서 살았고 죽었던 무명의 목수였다. 그의 '불안한 영향'은 몇  세기가 지난 후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결국 잘못된 많은 복음들을 만들어내었고, 아무도 그와 경쟁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선택하도록 했다는 생각은 웃기는 일이다.

신약 성서 문서들에 대한 수집은 1 세기 이내에 시작되었다. 바울은 누가복음을 '성경(scripture graph)‘으로서 참조했다 (디모데전서 5:18절에는 신명기 25:4절과 누가복음 10:7절을 성경에 기록된 예로서 인용하고 있다).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이 '성경(scripture)'이었고, 베드로후서 3:15-17절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을 권위가 있는 것으로 인정했고, 수신자들에게  '다른 성경(the other scriptures)'과 같이 그 의미들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틀린 경전들로부터 진정한 경전들을 찾아내고 분리해내려는 작업은, 이단자였던 마르시온(Marcion)이 권위가 인정된 책들을 매우 축소시켜 자신의 목록을 만든 2세기에 동기를 부여받게 되었다. 모방은 항상 원본 이후에 출현하므로, 신약성경 수집의 주요 형태들은 그 당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콘스탄틴 황제가 소집했지만 결정을 내린 것은 318명의 주교 모임이었다)에서, 그 의제는 토의조차 되지 못했다. 공의회의 토의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집중되었고, 그 주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4복음서의 권위는 참석한 모든 주교들에게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갖고있는 신약성경 27권의 책(우리가 소위 정경(Canon)이라고 부르는)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종적인 성명은 AD 393년과 397년에 아프리카 교회회의(African synods, 히포와 카르타고에서 개최)에서 선포되었다 [2].

정경(Canon)은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고, 단지 사람들에 의해 인정될 뿐임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명한 신약성경 학자인 브루스(F. F. Bruce)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

"신약 성경의 책들은 정경 목록에 형식적으로 포함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권위를 갖게된 것이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신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것을 교회가 인정했기 때문에 교회의 정경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교회] 공의회들은 기독교계 내에 어떤 새로운 것을 강요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기독교 사회 내에서 이미 일반적으로 실행되고 있던 것들을 집대성했던 것일 뿐이다.” [8]

그리스 신약성경(Greek New Testament)의 세계적인 권위자 중 하나인, 브루스 메트져(Bruce Metzger)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

"여러분은 정경이 교회 정치가 관여한 일련의 싸움의 결과가 아니었다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정경은 책들의 권위있는 목록이기 보다는 권위있는 책들의 목록이다. 이 책들의 권위는 선택되었기 때문에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 각 책들은 누군가가 그것들을 함께 모으기 전에 이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4]

(성경의 오류없음과 정경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 Q&A: Bible을 보시오).


실수들, 그것은 늘 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른 소설 책들도 동일한 품위없는 역사적인 실수들을 분명히 자행해 왔다. 그러므로 왜 이 다빈치코드 소설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이 소설은 매우 저명한 일부 실제 인물과 조직인 (그리고 거의 믿을만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오푸스 데이, 진짜보다 가짜 복음서를 더 선호하는 '역사학자들'을 이 음모이론과 함께 등장시켜서 교묘하게 사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이 소설에서 신성한 성배(Holy Grail)는 술잔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이다. 신성한 성배는 예수님과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은 한 여성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 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인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그림 속에(예수님의 오른 편, 명예스러운 자리에)  바로 이 여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 확인해 보라) [5].

댄 브라운은 소설적 기법을 활용하여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한 유혹적인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혼을 포함시켜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도록 주장한다). 

댄 브라운이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서(Gospel of Mary Magdalene)'는 '변경될 수 없는(unaltered)' 사실이고 (p.248), 따라서 이러한 사건들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그러나 그가 인용한 말들은 이 소설이 사기임을 무심코 드러낸다) 주장할 때, 총명한 독자들은 이 소설이 실패작임을 알게된다. 이 영지주의 복음서(Gnostic gospel)는 세 개의 단편적 필사본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 출현은 2 세기 중반으로까지 그 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같은 또는 다른 영지주의 복음서가 기술되기 이전에, 이미 교회는 4개의 정경이라고 인정 받은 복음서들의 권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했던 사람들은 쉽게 이러한 이단 사설에 속았을 수도 있다.

한편, 강한 영향력이 있는 가톨릭 집단인 오푸스 데이회는 그들의 '비밀'이 노출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 조사를 무위로 끝내기로 작정하고 살인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들이 말하는 원래의 '진정한 (true)' 기독교 신앙은 여신 숭배 의식이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독교 역사를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여성혐오(misogynist patriarchal)' 버전으로 대체하여 재구성해 놓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가치

여기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밝혀진 진실(upon revealed truth)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비밀스런 감춰진 진실(secret hidden truth)에 근거하는가? 나의 신앙은 모세로 (정말로 아담으로까지, 창세기 5:1) 거슬러 올라가는 문서화된 밝혀진 진실에 근거한다. 모세는 죽기 바로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명기 29:29)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명기 30:11-14)

말씀이 그들에게 가깝게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그 말씀이 쓰여지도록 보증하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1:18, 신명기 31:9-13, 24-29).

기독교 신앙에는 어떤 숨겨진 원리가 자리잡을 곳이 없다. 숨겨진 심오한 것들이 확실히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문서로 우리에게 원리를 확실히 보여주셔서, 우리가 그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을 때 우리가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판단의 기준은 우리에게 전하셨던 말씀이다 (요한복음 12:48). 따라서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말씀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기록들을 이미 제공하셨다는 것이고, 진정한 역사가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고, 부정할 의도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사용하고 있는 소설가들을 경계해야할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A comprehensive critique with links to other critiques is given at A Review and Critique of The DaVinci Code
2. Schaff, P.,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II Ante-Nicene Christianity A.D. 100325, Eerdmans Publishing Co., Grand Rapids, 1910 & 1992, Ch. 138, pp. 516524.
3. Bruce, F.F., The New Testament Documents: Are they reliable? IVP, Downers Grove, Illinois, 1960.
4. Metzger, B., interviewed in Strobel, L., The Case for Christ, Zondervan, Grand Rapids, MI, 1998.
5. Leonardo Da Vinci was a brilliant 15th century artist and technological genius, not a Bible scholar, and he is described in the book as a 'trickster.' His curious painting displays artistic license, not necessarily biblical truth.


*참조 :

.댄 브라운 '다빈치 암호' 비판 (1)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54019

.댄 브라운 '다빈치 암호' 비판 (2)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54023

.댄 브라운 '다빈치 암호' 비판 (3)

https://m.cafe.daum.net/tulipconference/lmVo/20?

.소설 다빈치코드의 허구 드러낸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33581

.다빈치코드는 신성 모독하는 허구에 불과…이래서 반대한다 (2006. 3. 27. 국민일보)

https://v.daum.net/v/20060327193507044

.다빈치코드 보급판 5백만권 뿌려진다 (2006. 3. 16. 크리스천투데이)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73052

.다빈치코드 공식홈페이지
http://www.sonypictures.com/movies/thedavincicode/

The Historical Basis of Dan Brown's The Da Vinci Code

https://biblearchaeology.org/research/contemporary-issues/3997-the-historical-basis-of-dan-browns-the-da-vinci-code

The Da Vinci Code: Fiction masquerading as fact

https://creation.com/the-da-vinci-code-fiction-masquerading-as-fact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4/0413davinci.asp

출처 - AiG, 13 April, 2004.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3

대표전화 02-419-6465  /  팩스 02-451-0130  /  desk@creation.kr

고유번호 : 219-82-00916             Copyright ⓒ 한국창조과학회

상호명 : (주)창조과학미디어  /  대표자 : 박영민

사업자번호 : 120-87-70892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21-서울종로-1605 호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5

대표전화 : 02-419-6484

개인정보책임자 : 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