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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4-06-22

저희가 별을 보고 2 (When They Saw the Star)

 : 베들레헴 별에 관한 과학적 추적

Dr. Henry M. Morris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태복음 2:10)
When they saw the star, they were overjoyed (Matthew 2:10)

 

(4) 그의 별 (His Star)은 과연 진짜 별이었을까?

신성이나 초신성은 원래 창조 주간의 네 번째 날에 창조된 기존의 별들로서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 갑자기 폭발하는 별을 일컫는다. 하지만 신성의 폭발은 아주 드문 경우다. 어쨌거나 보통의 별이 갑자기 엄청나게 광도(光度)를 높이며 수개월 동안 폭발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그 빛이 사그라진다.

초신성의 폭발은 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어쨌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때에 발생하기 때문에, 점성술에서는 별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 은하계 안에서 초신성의 폭발의 기록은 겨우 두 세 번뿐이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경우가 중국의 천문학자들이 AD 1054년에 보고한 예이고, 그 다음 것은 티코 브라헤(Tycho Brahe)가 AD 1572년에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번의 경우는 케플러(Kepler)가 AD 1604년에 보고한 경우이다. 그밖에 몇 번의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대형 망원경의 도움으로 관찰된 것들이었기에 그 Magi 들이 보았던 별에 해당되지 않는다.

비록 그리스도의 탄생 당시 가시적인 초신성의 폭발이 있었다는 확고한 공식적인 천문학사 중에 기록은 없지만, 그와 같은 별의 출현이라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소임으로는 더없이 적절했을 것이다. AD 1054년 이전에도 초신성의 폭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존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그냥 침묵시키려 해서 생기는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무려 50년 동안 Royal Greenwich Observatory의 태양부(太陽部)의 총감독으로 있었으며, 또 영국의 천문관측소의 총재직에 있던 위대한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E.W. Maunder)는 그와 같은 별(그 당시는 '새로운 별' 또는 '임시 별'이라고 불렸다)이야말로 베들레헴에 나타났던 그 별에 대한 유일한 논리적인 설명을 가능케 하는 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1908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천문학 그리고 성경(Astronomy and the Bible)'에서 한 장(chapter)을 할애하여 이 주제를 강하게 주장했다.

사실상 다른 곳에서도 희미하게나마 그 별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 별에 관한 언급은 오직 마태복음 2:1-12절에만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초기 크리스천 저술가들은 이 이야기에 매료되어, 자기들 나름으로 성경 밖의 자료들을 들춰서 당시의 사건을 조사했던 것 같다.

한 예를 들어보면, 한때나마 신약성경의 저자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107년에 사망)는 그 별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별은 너무도 밝게 빛나서 하늘에 있는 그 모든 별들의 빛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 새로운 모습은 가히 흥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야고보의 원복음서(The protoevangelium of James)로 알려져 있던 성경의 외경에 담겨있는 기록은 동방박사들이 헤롯왕에게 했다는 말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우리들은 많은 별들 속에서 빛나던 믿을 수 없이 큰 별이 다른 별들의 빛을 흐리게 하여 마침내 더는 빛이 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스라엘 왕이 태어났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AD 4세기 초에 활동하던 박학다식한 교회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자기가 살던 시대보다 몇 세기 전에 있던 문헌들에 대하여 상당한 연구증거를 남기면서, ”그 별은 하늘에 있는 보통의 빛들 속에 새롭고 이상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보통의 별들 속에 섞인 그 별은 진정 이상하고 낯설었다. 알려진 그 어떤 별과도 전혀 닮지 않았으며 새롭고 신선한 별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 맥가이버(Robert mcIver)는 이 주제를 최근 30여 년 동안이나 조사한바 있다. 그는 1998년에 출판된 자기 저서 '베들레헴의 별 - 메시아의 별 (Star of Bethlehem - Star of Messiah)' 에서 중국과 한국의 천문학자들이 각기 그리스도의 탄생 즈음에 관측되었다는 비정상적인 새 별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그때 즈음에 관측되었다는 이상한 별을 묘사하고 있는 로마의 지하묘지의 벽화와 여러 나라의 주화 속에 그려진 그림에 관해서도 검토했다. 그는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 별이 관찰되었을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가 제시하는 증거들의 많은 부분이 그와는 달리하는 의견에 취약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은 말고도,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있었다는 이상한 새 별에 대한 징후들이 전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최소한 흥미진진한 우연의 일치이다.

어쨌거나, 크리스마스 별은 두 개나 그 이상의 행성의 합이라든가, 하층 대기권에 생긴 어떤 움직이는 특별한 불빛이라고 하기보다는 진짜 별이었다는 주장이 독단에 흐를 가능성이 없는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별과 별이 아닌 다른 것과의 차이를 소상히 알고 있을 Magi들은 결국 그것을 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페르시아의 Magi들은 점성가들이기 보다는 유능한 천문관측자들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아니었다면 (어느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들은 배화교도(拜火敎徒; Zoroastrians)였으리라. 그리고 배화교는 많은 측면에서 유대교와 닮았다. 그 중에서도 점성술에 대한 혐오감이 그랬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의 예언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임은 거의 확실하다. 특히 이스라엘에 위대한 왕이 오실 것을 알리는 새로운 별에 관한 발람의 예언을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발람 그 자신도 아마 Magi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며, 어쩌면 Magi라는  신분계급을 창시한 사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배화교도들은 심지어 발람의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의 기간에 활동하던 초기 Magi들 중의 한 부류였을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성령에 감화된 발람의 예언과 성령에 감화된 마태의 역사기록은 둘 다 그것을 하나의 별 - 실은 '그의' 별! - 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 때에 진정 새로운 별을 하나 창조(하려고만 하셨다면 할 수 있었을 테지만)하셨던 것이 아니었다면, 그 별은 신성이나 초신성(신성의 가능성보다 더 가능성이 농후한)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현실적이다. 초신성이란 무엇인가? 이미 창조된바 있으면서도 일찍이 알려지지 않던 별 하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별이 아니던가!

앞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이 설명은 이미 고인이 된 영국의 천문학자 몬더(E.W. Maunder)가 내린 결론이다. 그는 그 별을 단순히 '새 별'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신성(nova)이라든가, 초신성(supernova)이라는 학술어가 그가 살던 시대엔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들어 1976년 12월판 Science Digest 지에 실린 '베들레헴의 별(The Star of Bethlehem)'이라는 기사에서 제임즈 멜라니(James Mullaney)는 ”이 문제를 연구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크리스마스 별에 관해서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거의 모든 설명들 가운데서 신성이 아니면, 초신성이었다는 설명을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의견으로 여기고 있다.”고 하였다(p.65).

멜라니는 또 한번 강력히 자기 소견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 ”진실로 왕의 탄생이 아니고는 그렇듯이 경이로운 천상(天上)의 고지서(告知書)를 보내올 만큼 중요한 사건이 있었겠는가?!”(ibid). 하나의 초신성의 폭발로 방사되는 에너지는 폭발 정점 때에는 우리의 은하수에 있는 별 전체가 방사하는 에너지의 총합보다도 크다! 창조주께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들 속에 등장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당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능한 가장 장엄한 고지 방법을 선택하셨을 것이 아니겠는가! 천군천사가 그 현장에 나타나서 알리기를 - 온 세상에 보내준 강대한 별이다! 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와 같은 신성의 폭발원인과 후속 효과에 대한 세부 내용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아직까지는 모호하다. 그리고 신성의 발생 위치와 시점은 전적으로 예측불허이다. 그렇다면 발람은 메시아의 탄생이 있을 때, 신성의 폭발이 있을 것을 1400년 전에 어떻게 예측할 수 있었을까?

그 정보는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이것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점성가들이 혜성이나 유성들, 그리고 행성들의 합은 물론 '새' 별들까지도 위인들의 부침(浮沈)과 연관시켜 말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 어떤 점성가도 수백 년 후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한 자는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라도 원하실 때 어느 별이고 선별하여 폭발시킬 수 있으셨을 것이고, 또 원하시면 먼 훗날에 세워놓으신 사건을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예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설명 - 발람의 유명한 예언(비록 발람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반(反)하는 예언이었지만!)과 하나님 당신 자신이 선택하신 때에 기적적인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그 예언을 결국 이루셨다는 설명 - 보다 더 훌륭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관절 Magi들은 어떻게 이 별, 즉 이 초신성(그 별이 초신성이었다는 가정 하에)이 그의 별━오래 전에 발람이 예언했던 별━이었다는 것을 알아보았을까? 요컨대  다른 '새 별들'이 때때로 발생했다면, 그 별은 절대로 최초의 초신성은 아닐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혹시 그 별이 최초의 초신성은 아니었을까? 옛날에 있었던 혜성들과 행성들의 합의 경우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일종의 점성술적인 전조로 간주되어왔었다. 그러나 옛날에 그 어떤 형태로건 초신성이 있었다는 확실한 근거가 발견된 바는 없다. 사실상 성경의 연대기는(진화론적 천문학자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별들은 창조된 지가 겨우 주전 수천 년밖에 안 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별들은 대체적으로 그렇게도 빨리 폭발을 수반하는 분열의 과정에 함입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렇게 제안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 초신성의 발생을 촉발하지 않으셨다면, 그 별은 없었을 것이다! 라고. 그 때 이래로 많은 신성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또한 몇 번의 초신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와 같은 별들을 만드신 데는 그런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리려고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별들은 최소한 그의 창조사역이 과거에 완성되었다는(창세기 2:1-3) 그의 계시된 진실성을 최소한 공고히 하고 지지한다. 그의 창조 내용은 현재 양적으로 보존되고 있으나, 질적으로는 엔트로피 원리에 의해서 쇠퇴하고 있다(시편 102:25-27을 비교하라). 이 원리는 죄로 인해서 인간의 모든 영역에 내린 하나님의 최초의 저주에 의해서 설정되어있는 것이다(창세기 3:17; 로마서 8:20-22 등). 그리고 이 원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간에 Magi들은 (그리고 그들 말고도 그의 별을 고대하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도 또한) 이 새로운 별이야말로 발람이 예언했던 그 별이라고 식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니엘 선지자의 7주간의 예언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예언을 알고 있었을 그들은, 주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정상적인 천문관측을 통하여 그 별의 출현을 살펴보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별은 장차 구세주를 보내겠다던 하나님의 최초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어떤 한 특정 성좌에서 발생했을 개연성이 매우 현실적이다. 바로 이 'protoevangel (최초의 복음)'이 뱀(사탄)과 여자의 후손(그리스도)과의 사이에 벌어질 장구한 원수지간의 갈등을 예언했던 것이다. 뱀은 여자의 후손에게 상처를 입히겠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가 사탄을 영원히 멸할 것이다(창세기 3:15).

이 태초의 약속이 성좌들 안에 있는 많은 별-그림(相)들 속에, 특히 황도대의 12궁성과 그것들의 데칸(decans, 12궁성과 관련된 성좌들) 속에 잘 반영되어있다. 이 별자리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은 후대의 점성가들이 부여한 점성술적인 의미로 말미암아 잘못 훼손되었지만, 실제로는 점성가들의 해석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성경의 여러 책들 자체가 그 별자리 궁성들과 그들의 최초의 의미들은 본래가 하나님 당신 자신께서 설정한 것이라는 사실이 고대 족장들(특히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 [유태인 역사학자 Josephus의 말에 의하면])을 통해서 잘 알려져 있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별들을 창조하시고 그 별들의 광명으로 ”징조(徵兆)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고 하셨다 (창세기 1:14). 그 다음, 욥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통하여, ”12궁성(Mazzaroth)을 계절에 따라 이끌어낼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었음(욥기 38:32)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마자로스(Mazzaroth)는 특별히 황도대의 12궁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좌들을 일컫는데, 예컨대 처녀자리(Virgin), 저울자리(Balances), 물고기자리(Fishes), 사자자리(Lions) 등등을 대표하도록 지정되어있는 것들이다.

어떤 성좌들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으로 언급된 것들도 있다━즉, '아르크투루스(목자 별자리)' '오리온 자리' '플레이아데스 성단'(욥기 9:9), '날랜 뱀' 자리(욥기 26:13), 그리고 그밖에 여럿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별들의 이름도 지으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시편 147:4; 이사야 40:26). 이에 관련된 성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성좌들의 이름을 지으신 데는 어떤 목적하는 바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그 목적은 결코 점성술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하늘 위에 당신의 목적하는 바와 약속하는 바를 새겨놓으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다. 약속과 목적하는 바가 언제나 모든 나라의 백성에게, 특히 당신의 말씀이 글로 기록되기 전부터 알려지게 하려하셨다는 추론이다. 그렇게 해서, 태초부터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하셨던 것이다 (시편 19:1, 2).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점성가들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고대 성좌들은 하나님이 주신 태초의 약속을 지금도 명료하게 발하고 있다. 위대한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W. Maunder)가 이 점을 주목하였음은 세대를 통해 이어오는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처녀궁성은 처녀의 몸에서 출산되실 구세주의 약속을 암시하고 있음은 '여자의 후손' 이라는 바로 그 구절 속에 함축되어있었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닌 한 여자가 출산할 후손이기 때문에 한 여자만이 그 기적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자별자리의 궁성은 정복자다운 사자가 도망치는 뱀을 죽이는 그림을 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다른 별자리 궁성에서 그림으로 연역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오늘에 이르러 그 별이 나타났던 성좌가 어느 성좌였었는지를 꼬집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일도 분명치 않다. 그리고 그 별이 출현한 성좌 또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별은 약속된 구주의 오심을 묘사하는 성좌로 Magi들이 알고 있던 그 성좌에 출현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 박사들은 신실한 사람들로서 창조의 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별들에게 부여하셨던 애초의 징조와 상징에 친숙했을 것이기에, 하늘에 갑자기 불타듯 빛나는 이 새 별이 '그의 별', 즉 약속된 왕의 탄생을 선포하는 별이 틀림없다고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그를 찾아서 경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까지 긴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그런 여행길은 하루 낮 밤에 준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행할 시종들과 호위병들의 진용을 조직하는 한편 일행의 보급품을 마련하고 거룩한 아기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하는데도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마도 같은 목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모여든 Magi들과 회합을 위한 준비에도 많은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들은 마침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드디어 긴 여행길을 떠났던 것이다.

 

(5) 그의 별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초신성들은 여러 달 동안 빛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빛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그것은 붕괴 과정에 있는 별로서 결국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또한 지구가 태양 주변의 궤도를 공전함에 따라서 밤하늘도 변한다. 어떤 한 해 동안 하늘에 보이던 별들이 낮 시간동안에 태양 광선 때문에 가려지다가 그 하루 해가 저물 무렵에 자취가 없어지는 수도 없지 않다. 아마도 박사들이 보았던 별도 이렇게 되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긴 여로에서 그 별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별이 장차 오실 이스라엘 왕을 선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할 무렵이면 그 아기가 예루살렘에 태어났을 것을 예상하였기에, 그들은 그 별의 더 이상의 안내가 없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마리아와 요셉은 요셉의 조상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실시하고 있는 로마 당국의 호구조사에 등록하기 위하여 갈릴리의 나사렛 집을 떠나 유대 땅으로 길을 떠났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당도하자 때맞춰 아기 예수가 탄생하였다.

비록 베들레헴의 하늘에 나타난 천군들이 선포하고 또 새 별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지만, 그 어느 선포도 예루살렘을 특별히 동요케 하지 않았었다. 목동들이 천군천사한테서 들은 그 소식을 베들레헴 근처에 퍼트리고, 나중에는 시므온과 안나가 그 소식을 예루살렘 근교(누가복음2:17; 2:38)에 퍼트렸지만, 그 사건의 중요한 참 뜻을 인식했던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기도 할 것이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사람이 벌써 여럿이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 별을 보았을 사람이 많았을 테지만, 그들도 그 별과 메시아와 연관된 흥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점성술이나 천문학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발람의 별에 관한 예언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발람이 모세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살해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그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던 때는 그들이 처음으로 그 별을 본지 여러 달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어쩌면 두 해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중에 헤롯왕이 아기들을 살해한 때를 감안해 추산된 수치다. 참고: 마태복음 2:16). 예루살렘에 도착한 박사들은 갓난아기 왕이 이미 예루살렘으로 모셔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헤롯왕이 아기 왕이 있는 곳을 알려줄 수 있을 것으로 추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그냥 '소동'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그들은 파르티아 인과 페르시아 인이 유대 나라의 옥좌에 이 새 왕을 옹립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관들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증거로 미가 5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자, 헤롯은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갓난아기를 찾아보게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6마일 떨어진 베들레헴을 향하여 길을 떠나자 갑자기 그 별이 다시 나타났다.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는 동안에는 그 별은 보이지 않았었지만, 여전히 그들을 앞서 가고 있다가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으리라. 아마 꼭두새벽 하늘이었던 것 같다.

성경의 말씀으로는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고 되어 있다(마태복음 2:9). 이 말로 미루어보아 그 별이 천정(天頂)에 다다랐을 때가 바로 베들레헴의 중천에 왔던 때에 해당한 것 같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는 길에 특별히 길잡이 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 별이 다시 나타나자, 그들은 ”가장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내린 성경해석이 옳았을 뿐만 아니라, 이 별이야말로 진정 그의 별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정말 같은 옛날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그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들어서자마자, 어느 우물에 비치는 별의 반사를 보고 그들은 그 별이 실질적으로 베들레헴 마을의 중천에 수직으로 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줄거리다. 이 이야기는 비록 확인된 바는 없지만, 크리스천 천문학자 몬더(Maunder)에 의해서 진실한 이야기로 인용됐었다. 물론 성경은 그 별이 실질적으로 그 집 위에 머물렀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곳이 큰 마을이 아니었기에 마을 사람들한테서 아기가 있는 곳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를 본 그들은 ”엎드려 그를 경배하였다” (마태복음 2:11).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참조 : What Was the Christmas Star?
https://answersingenesis.org/holidays/christmas/what-was-the-christmas-star/

The Star of Bethlehem : A Supernatural Sign in the Heave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star-of-bethlehem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home/resources/resources_tracts_whentheysawthestar/

출처 - ICR



미디어위원회
2004-06-22

저희가 별을 보고 1 (When They Saw the Star) 

: 베들레헴 별에 관한 과학적 추적

Dr. Henry M. Morris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마태복음 2:10)
When they saw the star, they were overjoyed (Matthew 2:10)


 매년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말없이 간증하면서,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했다는 그 유별난 별에 관한 '해설' 기사들이 세속적이건 종교적이건 구별 없이 출판되고 있다. 문필가들은 마태복음 2:1-12절에 기록된 이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려고 많은 논설을 내놓는다. 비록 이 책자와 같이 조그만 책으로서는 그 많은 연구들을 진정 옳게 평가하기는 역부족이겠지만, 그런대로 그 가정하는 '별'이 '별'임을 인정하며,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입장에 서 그들의 연구들을 요약하여 평가하는 일에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 별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기 전에, 이 놀라운 사건에 관해 제기되는 최소한 두 가지 흥미진진한 의문을 검토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것은 크리스마스 시즌인데도 불구하고 별로 토론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지만, 실은 중요한 주제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그 '박사들'은 누구였으며, 왜 그들만이 그 별이 중요한 별임을 인식했던 것일까? 그들이 먼 나라로부터 느닷없이 예루살렘에 나타날 때까지, 유대의 종교계, 정치계 지도자들은 그 별의 중요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2. 그 세 명의 나그네가 나타나 질문을 하고 다닌 일로 인해서, 헤롯왕의 조정과 유대의 지도자들이 동요할 만큼 자극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박사들이 베들레헴 상공에 떠있는 그 별을 보고 모두 기뻐했는데도, 왜 헤롯왕과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과 기쁨을 함께 하지 않았을까?

3. 마지막으로, 그 별은 무엇이었기에 그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떠나게 했으며, 또 정확한 위치까지 올 수 있게 인도했을까? 특히 메시아가 오리라고 약속된 도시에 살고있던 사람들은 그 별의 나타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지 않았는가!?

이 흥미진진한 질문들에 대한 가능한 대답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1) 그 동방박사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었을까?

그 동방박사들에 대한 일반적인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세 사람으로서, 이름은 멜키올(Melchior), 발다살(Balthasar), 가스발(Gaspar)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나라(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에서 왔다. 초기의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들을 세 왕이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하며, 결코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2:1,7절에 기록된 '박사들(wise men)'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Magi (또는 Magoi)'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어는 특별한 승려집단에 속하는 사람에 적용된다. Magi(오늘날의 'magic' 이라는 단어의 유래) 라고 불렸던 학자 신분은 원래 Medina에 살던 어떤 특정 부족에서 유래했을 것 같다. 나중에는 페르시아의 통치 집단의 일부가 됐을 가능성도 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들은 특별히 천부적으로 점성술과 예언의 '지혜'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결국 일종의 승려 신분이 되어,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는 물론 아라비아와 인도와 같은 먼 나라의 조정에까지 출사하여, 그 나라 귀족의 전속 고문과 자문직에 종사했다.

심지어 메소포타미아 출신으로 악명 높던 선지자 발람(Balaam)은 초기 Magi 집단의 일원이었음은 물론, 어쩌면 Magi의 창시자였는지 모른다는 전설이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리스도의 탄생 당시의 Magi들은 하나님이 구세주의 탄생을 특별한 별을 통해서 이 세상에 알린다는 예언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론을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성경에 기록된바와 같이 장차 나타날 별에 관한 예언도 발람의 예언이었음은 물론이다. 아래에 그의 예언을 인용해본다. 그 예언은 실질적으로는 예언자 자신의 의사에는 반(反)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강제에 못 이겨 진술한 것으로 되어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민수기 24:17-19).

이와 같이 해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발람의 예언은 이스라엘과 연관된 특별한 별이 세계를 통치할 미래의 홀(笏)(즉, 왕)같이 나타날 것임을 계시하고 있었다.

후대의 Magi들, 특히 (다니엘은 물론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Magi들은 심오하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예언은 물론 다니엘의 다양한 예언들까지도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이 누군가? 그는 느부갓네살 왕과 키루스 왕의 조정에서 '박사들' 중 가장 존경받던 예언자가 아니던가!) (참고: 다니엘서 2:45; 6:28).

Magi들 중 일부는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닐지라도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다. 에스더 왕비의 집권기간 중에 하나님이 페르시아에서 유태인들을 구출할 때, 그 나라의 많은 백성들이 유대인이 되었다.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에스더 8:17). 이 사건 그 자체로서도 페르시아의 Magi들을 수없이 자극하여, 당시 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성전(聖典)들, 특히 다니엘의 메시아 예언들을 연구하도록 충동했을 것이다. 이 민담(民譚)은 Magi의 전통적인 학습의 주요 부분이 되어 세대를 이어 전수되어 오다가,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때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다니엘 선지자의 예언들 가운데에는 메대 사람 다리우스 왕(페르시아의 왕 550-486 BC)의 통치 기간에 했던 그의 '70 주간'에 관한 위대한 예언이 있는데, 이 예언은 페르시아의 황제가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을 재건토록 명령(다니엘서 9:24, 25) 한 지 483년 후에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것을 계시하고 있었다. 약속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페르시아의 Magi들이 발람의 예언들과 다니엘의 예언들을 겹쳐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그의 별'이 나타나기를 기대에 찬 눈으로 살피고 있었을 것이다.

뭔가 이와 같은 상황이 페르시아 Magi들이━헤롯 왕당파들과 합리주의적인 사두개 교인들(당시 유대교의 지도급 인사들의 대부분 이에 속하고 있었다)이 아닌━그 별의 출현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는 이유를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바빌론과 다른 나라(심지어 아라비아나 인도)의 조정에서 고문직을 감당하면서 이름을 높인 이 승려신분 계급에 속한 'Magi'도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페르시아의 Magi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의 Magi들도 이 약속된 '유대의 왕'을 찾아 예루살렘까지 긴 여행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 일행들 속에 합류했을 개연성도 있었던 것 같다.(사실상 전설은 그렇게 전한다). 찾아온 Magi들은 셋 뿐이었다는 것을 믿어야할 이유는 없다. 아기 예수 앞에 바쳐진 선물이 세 종류였다는 사실로, 선물을 증정한 사람이 셋 뿐이었다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성경에는 몇 사람이 거기에 왔었다는 내용은 없다. 그렇지만 세 사람보다 많았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2) 왜 헤롯왕과 유대인들은 박사들의 방문에 그토록 동요했을까?

세 사람의 순회 '점성가들'의 방문이 예루살렘을 그렇게도 심각한 동요를 야기시켰다는 이야기는 어찌 생각하면 괜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 이 외국인들은 헤롯왕을 배알하기 위해서 어떻게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그들이 왕의 탄생을 물었다는 것이 왜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을 '소동시키는' 원인이 되었을까?(마태복음 2:3).

그러나 이 의문은 내방한 외국인 '점성가'는 셋이 아니라 더 많았다고 전제할 때에만 풀린다. (많은 현대의 성경번역가들이 그들을 '박사들'이라고 호칭한 것처럼). 그 Magi 집단은 세 사람 이상으로 구성되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아마도 12명이나, 아니면 그보다 많았던 것 같다. 그들은 '동방'에서 왔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한 나라는 하나뿐만 아니라고 말했다. 이로 미루어 그들은 경호병들과 상당한 수의 시종들을 대동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추측이 맞는다 해도, 그들의 방문 사실이 왜 강력한 왕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었을까? 헤롯왕은 당시 전 세계를 지배하던 위대한 로마제국의 비호 하에 있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이 아닌 로마 제국의 위대한 씨저 아우구스투스 황제 자신이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가 왜 이 동방의 귀인들의 내방 때문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켰을까?

하지만 로마제국이 당시 실제로 알려진 것처럼 전 세계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유대의 '동쪽'에 있는 여러 나라들은 -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등 - 로마제국의 일부가 아니고, 오히려 강력한 거대 제국 파르티아의 일부였던 것이다. 파르티아 제국은 로마와는 심각한 경쟁 대상에 있었으며, 정복 목적으로 침범한 로마 군단을 여러 번 물리쳤었다 (한 번은 왕위등극 전의 헤롯이 직접 로마군단을 인솔하고 침범한 적도 있었다). 이 당시에 파르티아(페르시아를 포함하여)는 로마제국에 근접한 경계선에서 로마제국을 실질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로마제국에서 하사된 헤롯의 공식 명칭은 '유대인의 왕'이었다. 그런데 지금 강력한 적성국에서 내방한 대표단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에 관한 정보를 묻고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2:2). 헤롯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더욱이 그 수행원들이(크리스마스 카드에 자주 묘사되는 것처럼) 낙타를 타고 온 것이 아니고, 건장한 말을 타고 왔던 것이다. (페르시아 귀족들이 다 그렇게들 하고 여행을 하질 않던가!).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나라의 미래의 왕이 이미 탄생되었음을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새 왕의 오심을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 별을 띄워 알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헤롯왕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도 동요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적성국의 침입이 임박한 것으로 오해하고 크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까닭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걱정뿐만 아니라 당황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 자신이야말로 외국 내방객보다 먼저 메시아의 출현에 관한 정보를 들어 알고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실제로는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고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수지맞는 직업이 흔들릴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최소한 메시아 출현에 관한 예언을 숙지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에돔 사람의 후손이었던 헤롯왕은 그 예언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제사장과 사관(史官)들에게 그 예언에 관해서 물었을 때, 그들은 오시는 왕이 어디에 태어날 것인가를 알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미가 5장2절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면서 그들은,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태복음 2:5, 6) 라고 알렸다.

이 유대의 지도자들이 발람의 별에 관한 예언들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쨌거나 실질적으로 그 별이 출현했을 때 그들도 틀림없이 보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3) 그 특별한 별은 무엇이었을까?

만약 성경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별은 진짜 별일 수밖에 없다. 그 박사들은 그 별을 무슨 천사라든가, 어떤 기적적인 대기권에 나타난 불빛 같은 현상이 아니고, 그냥 '별'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어 단어 'aster' 는 신약성경 속에 통틀어 24번쯤 보인다. 이 단어와 유사한 단어 'astron' 은 4번 쓰였다. 이 두 단어는 문맥에서 별도로 언급이 없는 한, 단적으로 진짜 별을 뜻한다.

별이라는 단어는 천사(요한계시록 1:20; 12:4,7)나 사람(유다서 1:13)을 상징할 때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당시 점성가들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 자신도 행성이나 유성(流星), 그리고 혜성들을 분명히 '별'로 간주하고 있었음(마태복음 24:29)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뜻으로 쓰였을 때는 언제나 문맥 안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박사들의 설명은 단순한 역사적인 기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그 박사들은 동시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별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별' (실제로는 그의 별)이라고 불렀지, 천사라든가 길을 인도하는 그 어떤 불빛 같은 것으로는 호칭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 휘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광야에서 인도하던 그 영광의 구름기둥(the Shekinah; 神座에 나타난 하나님의 示現; 예: 민수기 14:14)의 기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구름기둥의 기록이 발람의 별의 기사가 담겨 있는 Torah 안에 함께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들은 그것을 별이라고만 불렀지, 영광의 구름기둥이라든가, 하늘 가운데를 움직이는 어떤 불빛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천에 머문 별이(심지어 행성이나 혜성처럼 움직이는 별이) 어떻게 박사들을 아기 그리스도가 있는 베들레헴의 그 집까지 실질적으로 어떻게 인도할 수 있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성경 교사들이 많이 있다. 비록 자질이 훌륭한 교사들이지만, 그들은 그 별은 틀림없이 천사이던가, 아니면 여호와의 모습(Shekinah: 영광의 구름기둥)이었을 것이라고 믿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어떤 움직이는 기적적인 불빛으로서 오직 그 외국 박사들한테만 보였을 것이라고 단정하기 일쑤다.

그런데 그 '별'이 진짜 별이 아니라는 생각은 순수한 '별' 이라는 솔직한 단어 때문에 생기는 해석상의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예를 들어보면, 하나님은 왜 그와 같은 특별한 천상의 메신저를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사람들한테 직접 보내지 않고 600마일이나 떨어진 페르시아에 보냈을까? 물론 유대인 지도자들이 메시아를 실제로 기다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의 그 구유 근처에 있던 일단의 목동들에게 천군천사를 보내어 '주님의 영광'을 비춰주고, 그들로 하여금 나아가 구주 탄생을 고하도록 시켰던 것이다(누가복음 2:9-12). 그렇다면 예루살렘과 다른 지방에 살고 있던 다른 신실한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이 이야기라면,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졌다”(누가복음 2:38)는 설명과, 특별히 시므온과 안나에 관한 이야기를 참고해 보는 것도 가치가 있겠다. 성령의 감화를 받은 이 두 사람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출산 40일 후 정결케 되어(레위기 12:2-6을 참조) 요셉과 함께 아기 예수를 주님에게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마리아와 요셉을 만났을 때, 아기 예수가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누가복음 2:22). 그들에 못지않게 메시아를 기다리던 신실한 유대인들은 왜 그가 베들레헴에 태어난 사실을 몰랐을까?  

더욱이 멀고 먼 땅 페르시아의 Magi들은 어떻게 그 움직인다고 생각되는 불빛이 유대인 왕의 표시임을 알아보고 그를 경배하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떠나려는 충동을 일으켰을까? 그리고 그 불빛은 왜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직접 인도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왕의 조정으로 인도했을까?

사실상 마태의 설명 중에는 그 별이 (어쩌면 정말로 움직이는 불빛이었다면, 그 불빛이) 그들을 '인도하였다'는 구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태의 설명에는 그냥 그들이 그 별을 두 번 보았다고만 되어있다━한번은 '동방에 있는' 그들의 고향의 밤하늘에 떠있는 별이었고, 그 다음은 나중에  ”아기 예수가 있는 집 바로 위에 머물러 선 별”이었다 (마태복음 2:2,9). 그러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긴 여로 중에 그 별을 보았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다.

길잡이 불빛 가설은 많은 복음주의자들한테 크게 호소력을 갖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성경 안에 있는 작은 기적들(그리스도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일, 또는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기꺼이 수용하려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지어 많은 복음주의자들까지도, 노아의 시대에 있었던 전 지구적 규모의 대홍수나 여호수아의 긴 하루와 같은 전 세계 규모의 기적들은 그렇게 쉽게 믿으려하지 않고, 가능한 그런 기적에는 물질적인 설명을 가해보려고까지 한다.

좋은 예가 있다. 그 별에 대한 설명에서 많은 사람들한테 인기가 있는 설명은 이런 것이다. 즉, 그 '별'은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있었을 둘 또는 세 개의 행성의 동시적 합(合; conjunction)으로 생긴 자연현상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천문학의 거두 요한 케플러(Johann Kepler)야말로 이런 형태의 이론을 제창한 최초의 학자인 것 같다. 1605년에 그는 B.C. 7세기에 세 행성들(토성, 목성, 그리고 화성)의 동시적 합(conjunction)이 있었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생각을 뒤좇아 이런 행성의 합이 크리스마스의 별이었다는 가정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 가설에 의하면, 당시 물고기(Pisces) 별자리에 그런 행성의 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성가들은 이 별자리야말로 황도대 위의 이스라엘과 관련된 궁(sign)이라고 믿었다.

다른 한편 B.C. 3세기에 있었던 목성과 금성, 그리고 사자별자리(Regulus)의 합이 크리스마스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행성의 합이 크리스마스 별이었다는 이론들은 예외 없이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실제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을 Magi들이 그와 같은 별들의 집단(행성들의 합)을 '그의 별 (His Star)'! 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이 행성들 가운데 어떤 경우에도 두 행성이 마치 하나의 별로 보일 만큼 접근한 경우가 아직까지는 알려진바 없다 - 서로 아슬아슬하게 보일 만큼도 근접해 본적이 없었다. 더욱이 행성의 합이 되는 경우의 빈도가 어느 정도 주목을 끌만큼은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이 경험이 많은 천문학자들이라면 알려진 행성들의 궤도에서 쉽게 계산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왜 그런 행성들의 합의 어느 특정된 경우가 약속된 이스라엘의 왕과 연관이 있는 어떤 특별한 '표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것일까? 사실상 행성의 합의 경우에는 그 어떤 기적 따위로 해석될 이유는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일(별이나 행성 또는 황도대의 위치를 지구상에 벌어지는 사건에 연관시키는 일)은 점성비술(秘術)에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성경은 점성술을 구제불능이라고 비난한다(이사야 47:13-15; 등등). 하나님께서 약속한 당신의 화신(化神)과 관련된 별에 점성술이라는 의사과학을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속들에게 점성술을 피하라고 극구 경고하지 않았던가!

옛날의 문필가들처럼 오늘날의 작가들 중에도 크리스마스의 별이 혜성이었다는 암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앞에서와 유사한 반박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혜성까지도 행성이나 행성들의 합과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궤도를 따라 상당히 빈번하게 떠돌고 있어서 혜성의 출현은 예측이 가능하다. 혜성은 일종의 꼬리를 달고 있어서, 그 모습도 역시 보통 별이나 행성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그런고로 Magi들이라면 틀림없이 혜성을 진짜 별과 구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혜성이 출현하면 그때마다 점성가들은 예언의 계기로 이용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있는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별(His Star)을 보내는 목적으로 진정으로 혜성을 택하셨을 이유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거론된 현상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이 안 되는 특별한 형태의 별에 대한 검토가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신성(nova, 'new stars' 라 불려지는)과 더욱 흥미진진하며 아주 희귀한 초신성(supernova, 변광성의 일종)이라는 별들이다. 이 별들은 진짜 별들로서 행성들의 합이라든가, 혜성이 아닐뿐더러, 하늘에 생긴 어떤 현상도 아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2 (When They Saw the Star)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05&bmode=view


*참조 : What Was the Christmas Star?
https://answersingenesis.org/holidays/christmas/what-was-the-christmas-star/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home/resources/resources_tracts_whentheysawthestar/

출처 - ICR


미디어위원회
2004-06-22

가인의 아내는 누구인가?

김희택 


     이 질문은 성경 비판학자들이 제기한 질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가 확신하기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피상적인 모순을 성경의 원저자들이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다는 점이다.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중요한 사실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①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었다 (창 2:7,18~19).

② 아담은 930년 동안 살았다 (창 5:5).

③ '이브' 라는 이름은 모든 산 자들의 어미이기 때문에 주어졌다 (창 3:20).

④ 아담과 이브는 많은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창 5:4).

⑤ 창조시에 모든 것들은 가장 좋은 상태이었다 (창 1:31).

⑥ 아담의 죄로 인하여 창조물들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 (창 3:17, 롬 8:20~22).

⑦ 아브라함은 그의 이복누이와 결혼했다 (창 20:12).

⑧ 근친상간을 금하는 법은 모세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레 18~20). 


이상의 9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이 가인이 그의 여동생 중의 하나와 결혼했음이 틀림없음을 제안하는데 실마리가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최초의 인류였다. 창세기의 그들 각자의 창조기원을 알려주고, 또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을 지시 받게 된 것에 대하여 기록한다.


성경에는 아담과 이브의 자녀들 중에서 단지 '가인', '아벨', '셋'의 세 명의 이름만 거론한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우리가 꼭 알아야 될 중요한 사건들 때문에 자세하게 언급된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5장 4절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는 많은 아들과 딸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담이 첫 번째 인간이었다는 사실과 아담은 930 년 동안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참고로 창세기 5 장 족보에 열거된 홍수 이전의 족장들의 평균수명은 912 년이다. 가족의 크기나 평균수명 등에 관한 보수적인 가설에 근거해서 가인의 죽음 이전에 이 땅에 이미 많은 인구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이 가인이 몇 세에 아우를 살해했는지, 또 몇 세에 아내를 취하고 성을 세웠는지 지적하지 않음으로 기록상 아무 모순이 없다. 


이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최초의 인류인 두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에 의해 창조되었고, 아들들과 딸들의 많은 자녀들을 가졌으며, 확실하게 아들들은 자손들의 번성을 위해 딸들과 결혼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가인의 아내는 그와 아주 가까운 근친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의 결론을 근친상간을 금하는 법을 들어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법은 모세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보다 약 400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이복누이와 결혼했음을 성경은 말해준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금지법이 출현하게 되었는가? 이런 금지에 대한 과학적인 이유는 그런 결혼의 결과로 나타나는 자녀들이 일반적인 결혼보다 더 기형아이거나 저능아인 가능성이 많다는데 있다. 두 사람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들의 유전인자에 더욱 유사한 결함을 가지게 될 확률이 커지게 된다. 만약 이들이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게 될 경우, 자녀들중 어느 아이인가는 부모로부터 각각 결함을 갖는 유전인자를 상속받게 되고, 이것으로부터 형성된 유전자쌍이 기형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두 사람의 관계가 멀면 멀수록 그들의 유전인자는 서로 다른 결함을 갖게 될 확률이 크며, 이들로부터 유전인자를 전수 받은 아이들은 각 쌍에 서로 다른 하나의 결함인자만을 갖는 결과가 되어, 앞의 경우에서와 같은 완전한 기형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예로 완전히 기형인 귀를 갖는 대신 단지 꼬부라지기만 한 귀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들은 완전했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창 1:30). 이것은 그들의 유전인자가 완전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세상을 저주하셨고 완전했던 창조세계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즉 죽음과 타락으로 인한 고통을 겪게 된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퇴보는 생명체의 유전인자 재료에 각종의 잘못을 발생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더욱이 이러한 퇴보는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크게 가속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홍수 이후의 기후 조건이 극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홍수 이후에 돌연변이를 유발할 수 있는 해로운 우주복사선(cosmic radiation)의 양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 돌연변이는 발생한 이후에 다음 세대에 계속 전달되게 되며, 그래서 그것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되는 것이다. 약 2,500 년이 지난 모세의 시대에 와서 비로소 형제자매간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법을 만드는 것이 필요할 만큼 인간종족에 축적되었음을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가인은 태어난 첫 번째 아이였다. 그는 아마도 아담과 이브로부터 사실상 거의 손상 받지 않은 완벽한 유전인자를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형제와 자매는 어떤 기형의 자손을 낳을 가능성이 없이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항상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의 기록뿐 아니라, 잘 알려진 모든 과학적 사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출처 - 창조지, 제 79호 [1992. 9]

미디어위원회
2004-06-03

루터교도들은 코페르니쿠스를 도왔다.

 (Lutherans Helped Copernicus)

David F. Coppedge


      우리가 '알고(know)' 있는 것들이 진실(true)인지를 재검토해보게 될 때, 진실은 그 반대와 더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그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를 공전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서 교회를 위협했던 용감한 과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너무도 두려워해서 죽을 때에도 그의 ‘이단적인(heretical)‘ 견해를 출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시리즈물 ‘우주(Cosmos)’ 에서 칼 세이건(Carl Sagan)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는 루터교도들에 의해서 조롱당했다는 도시의 전설(urban legend)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자이며, 역사가인 오웬 징거리치(Owen Gingerich)는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역사 기록을 바르게 정립하는데 바쳤다. 징거리치는 'An Annotated Census of Copernicus’ De Revolutionibus' 라는 제목의 이전 책에서 30년 동안의 프로젝트 결과를 출판하였다. 그 책은 알려진 원본들에 대한 각각의 복사본들을 게재하였고, 코페르니쿠스의 책(‘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이 전 유럽에 걸쳐 배포되었고 토론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꼼꼼하게 그 당시의 독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수백의 주변 노트들을 분석하였다. 이제 징거리치는 그의 결과물들을 새로운 책, 'The Book Nobody Read : Chasing the Revolutions of Nicolaus Copernicus” (Walker, New York, 2004) 으로 출판함으로서 더 재미있고 접근 가능한 형태로 만들었다. 이 책은 2004. 4. 28일자 사이언스(Science)1 지에서 피터 바커(Peter Barker)에 의해 리뷰되었다. ('De Revolutionibus 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the book nobody read)' 이었다는 아더 코스틀러(Arthur Koestler)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징거리치는 책의 제목을 코스틀러의 주장으로부터 취했다). 여기에 바커의 리뷰에서 나타난 도시 전설의 몇 가지 수정사항들을 제시한다.


●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원고를 젊은 루터교인이며, 수학자인 레티쿠스(Georg Joachim Rheticus)에게 위탁했다.

● 책은 루터교인인 인쇄업자에 의해서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출판되었다.

● 한 루터교 성직자는 책에 사인 없이 서문을 추가했다.

● 프러시아의 군주는 루터교도였고, ‘De Revolutionibus’를 출판했던 사회에서 후원자였다.

● ”나이 많은 가톨릭교도가 교황에게 헌정된 그의 천문학 책을 일단의 개신교도들에게 위탁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커는 묻고 있다. ”뉘른베르크 인쇄업자들의 전문적 지식이 확실히 한 요인이었다. 아마도 코페르니쿠스는 지방의 주교(bishop)로부터 그가 보호되기 위해서 프러시아의 군주를 또한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가톨릭의 반대가 아마도 지역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루터교의 수학자들은 열망하여 그 책을 얻었고, 그것을 공부했고, 그것에 기록을 했고, 그들의 친구들에게 복사본들을 건네주었다. 많은 루터교도들은 아직도 고정된 지구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게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받아들였고, 감사해했다.

● 루터교도인 티코 브라헤(Tycho Brahe)는 그 책의 많은 복사본들을 소유했다. 바커는 말한다. 징거리치 연구에서 ‘매우 놀랄만한’ 점은, 브라헤는 그의 태양중심적인 대체 모델을 신사이며 여행가였던 폴 위치(Paul Wittich)로부터 얻었다는 것이다.

● ”프톨레미의 천문학은 그것이 주전원(epicycles)들에 과도한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았다.” 바커는 말한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전 후의 천문학자들은 단순한 하나의 주전원 계를 사용했는데, 가끔 코페르니쿠스 자신에 의해서 사용된 하나의 작은 주전원에 의해 증대되곤 했다.”

●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은 엄밀하게 말하면 태양중심설이 아니다. ”사실, 그의 계의 중심으로서 어떤 지점을 간주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은 꽤 어렵다.” 그 모델은 관측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수학적인 것이었다.

● 바커는 놀라움을 표하며 언급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상외의 발견은, 갈릴레오 사건의 여파로서 (Galileo biography을 보라),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정정하려는 교회의 시도는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징거리치의 평가에 의해서 재강조되는 점은, De Revolutionibus의 인쇄된 원본은 400에서 500권 사이였는데, 그의 조사(Census)에 의하면 이들 중 277권이 남아있는 것으로 살펴볼 때, 책이 실제로 파괴되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밖에서, 심지어 가톨릭의 국가에서도 교회의 명령으로 수정된 복사본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바커는 우주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던 획기적인 책에 관한 진실을 밝혀보기 위한 징거리치의 ”놀라운 추적”을 칭찬하고 있다. ”그의 서술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초기 현대 과학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일으킬 것이다.” 


1Peter Barker, 'A History Recorded in the Margins,” Science Vol 304, Issue 5671, 686, 30 April 2004, [DOI: 10.1126/science.1097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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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거리치 박사는 잘못 알려졌던 도시 전설에 대한 이러한 정정을 해줌으로서, 역사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위대한 공헌을 하였다. 16세기 과학적 전진의 적대세력은 루터교인도 아니고, 가톨릭교인도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말하자면, 루터(Luther)가 코페르니쿠스를 바보(fool)라고 불렀다는 도시의 전설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루터가 말했던 것들, 또는 의미했던 것들은 한참 후까지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미의 전달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도날드 코브에 의한 Leadership U 분석을 보라.


De Revolutionibus이 현대의 코페르니쿠스 원리를 이끌어 냈는지는 또 하나의 의문이다. 최근까지, 천문학자들은 지구는 우주의 물질 체계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외삽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De Revolutionibus 만큼 혁명적일 수 있는 새로운 책에 의해서 도전받고 있다. 그 책은 곤잘레스(Gonzalez)와 리챠드(Richards)에 의해서 쓰여진 ‘특별한 행성(The Privileged Planet)‘ 이다. 우리는 이것이 웹 사이트의 대화방 등에서 어떠한 주변 노트를 얻게 될 지, 또는 다윈의 교회가 그 책을 무시하는데 성공할 것인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4/04/lutherans_helped_copernicus/

출처 - CEH, 2004. 4. 30.


미디어위원회
2004-04-28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

Dr. Henry M. Morris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잠언 30:4).

 

어떤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독생자의 이름을 짓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흥미진진한 이름짓기 가운데서도 선지자 아굴(Agur)(잠언 30:1)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하던 이름은 물과 바람과 그리고 땅의 모든 끝을 정하신 바로 그 우주창조의 주재자의 아들의 이름이었다.

실제로는 그도 어쩌면 하나님이 아들을 가졌다는 것을 처음 알고 상당히 놀랬을는지 모른다.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그로서는 모세의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물론, 신명기 6:4에 담긴 위대한 단정의 말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를 여러 번 인용하였을 것이기에 하는 추측이다. 어떻게 창조의 하나님이 아들을 가진다는 말씀인가? 하고.

하나님께서 아굴을 시켜 솔로몬 왕의 잠언 중 매혹적으로 독특한 제 30장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말고는 그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지혜로운 사람인 것은 분명하였다. 그리고 아마 솔로몬이 잘 알고 신임하였던 사람인 것 같다. 그는 다윗과도 아는 사이였었던 것 같다. 최소한 다윗의 시편(詩片)들에 친숙하였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2장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이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2:7, 8).

아굴도 다윗의 미래의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서 아마 다윗이나 솔로몬한테서 들었던 것 같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사무엘하 7:13, 14; 또한 역대상 17:13). 이 수수께끼 같은 예언은 부분적으로는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 같으나, 그 영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솔로몬을 넘어 다윗의 보다 더 위대한 후손으로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실 분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상 신약(히브리서 1:5)의 관점에서 조망해 보고 우리는 이제야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특정한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아굴이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물었던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또한 그는 모세의 책에서 이미 하나님을 일컫는 여러 이름들에 - 특히 '하나님 (Elohim)'과 '주님(여호와)' 그리고 '주님(Adonai)' - 틀림없이 친숙하였으면서도 새삼 창조주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있어야만 했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아굴은 물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The Name of the Father)

비록 아굴의 특정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구약성경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새 이름은 '아버지'보다 더 아래격인 호칭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아버지' 라는 단어 (히브리어로 아브(ab))가 구약성경에 500번이 넘게 보이지만, 저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브 (또는 아바(abba), 아브와 동일한 뜻의 아람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때때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예컨대, 예레미아 3:19에서 미래의 왕국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시면서) 하셨다. 언젠가 한 번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지으시고 노예로부터 건지셨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아브가 되신다는 것을 환기시킨 적이 있다 (신명기 32:6). 그러나 구약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예가 있다면 -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언급을 제외하고 (사무엘하 7:14; 역대상 17:13) - 이것이 아마도 아굴이 자기 생전에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예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아들은 드디어 이 세상에 나타나시자, 상황은 온전히 변하고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그는 당신의 재판과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의로우신 아버지여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요한복음 17:1, 6, 11, 25, 26) 하셨다. 그 이름은 명백히 '우리 아버지'였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특별히 기도 서두를 '우리 아버지'로 시작할 것을 일러 주셨다. (마태복음 6:9).

'아버지' (희랍어로는 pater)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약 500번 보이는데, 인간의 아버지들은 물론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 모두가 빈번히 사용하였다. 한 번은 긴급한 상황에서 주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드릴 때, "아바 아버지여(Abba, Father)" (마가복음 14:36)하고 불렀다. 이 기도는 그의 체포가 있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다. 비록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 '아바' 라고 불렀던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神格의 제일 깊숙한 자리에 앉아 계실 당신의 아버지를 부르는데 더없이 친밀한 호칭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진 우리들까지도 - 상황이 허락할 때면 - 우리들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똑같이 그 경이로운 호칭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로마서 8:15).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라디아서 4:6).

아마 이것으로서 세상 끝까지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새 이름에 관한 아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다. 이제는 아굴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무어라 불러야 합니까?"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불려지게 될 것이다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의 선지자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서 보내셨던 때가 솔로몬과 아굴이 세상을 떠나고 근근 300년이 지난 후였다. 그 때에 하나님이 놀라운 선지자 이사야를 시켜 저 두 가지 위대한 예언을 보내주셨던 것이다. 그 예언이라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성탄절 때마다 두고두고 낭송하는 말씀이다. 즉,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임마누엘'은 물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기에 그것은 곧 태어날 처녀의 아들은 다름 아닌 인간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다음 얼마 후에 하나님은 이 아들의 이름에 관해서 놀라운 예언을 보내주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기억하라] 되었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얼마나 경이로운 이름인가! 하지만 이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이름을 가진 분에게 이 이름들처럼 합당한 이름들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이 분이야말로 약속되기를 유다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사람이면서도 또한 하나님,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신 하나님, 우리를 닮은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이시다! 이 어찌 경이롭다 하지 않으리오.

그의 이름을 '기묘자 (the Wonderful)' 라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리 없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에 '기적적'이라는 뜻이 있다. 기적적인 개념과 처녀 몸에서의 탄생을 빼고서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결코 육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인간의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을 것이기에 유일하게 거룩한 하나님이 될 수 없었으리라. 그의 이름은 진정 '기묘자'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인류의 위대한 모사로서 타락한 인간성을 되찾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완벽하게 전해줄 수 있는 분임이 틀림없다. 인간-하나님이신 그가 마침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지만 무한히 지혜로운 뜻을 담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적들까지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한복음 7:46)하고 탄복하였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 예언의 뜻은 실질적으로 그 두 단어 - '기묘자 (Wonderful)'와 '모사 (Councillor)' - 를 합쳐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도 또한 맞는다. 그는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모든 주제들에 대한 '기적적인 조언자' 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기에, 어떤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해도 그는 결코 외면하든가 얼버무리지 않았다. 그분이야말로 하늘이 보내주신 가장 기묘한 참 상담자였기에, 모든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 임을 또한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그가 神格 중에서 (삼위일체 가운데서) 두 번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육화 이전의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 (빌립보서 2:6). 심지어 그는 스스로 해(害) 받음을 허락하신 다음에도 그는 죽음 그 자체를 정복하였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 - 또는 수많은 권위자들이 번역한 바를 따르면 '영원의 하나님' 이기도 하다. 그는 공간과 물질은 물론 시간의 창조자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로새서 1:16), 그리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 그리고 비록 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지만,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만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의 왕자 (The Prince of Peace)'의 자격이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성공적인 참 중보가 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5).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19) 세계에 참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로새서 1:20). 그러므로 "그는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이시다 (마태복음 5:9).

이 다중차원의 이름들이 어찌도 영광스러운지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인간이신 바로 이 분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아 23:6) 라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Thou Shalt Call His Name Jesus)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예언의 내용이 이루어질 시간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마리아라는 천사 같은 유다의 처녀와 약혼 중에 있던 어느 소박한 목수한테 가브리엘 (Gabriel)천사를 보내셨다. 이 두 약혼자들은 천년 전에 살았던 다윗 왕의 후손들이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비록 임신 중이지만 여전히 청순한 처녀이고, 이사야의 위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룰 사명을 부여받았노라고 알렸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이 때보다도 먼저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보내져서 비슷한 말씀을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누가복음 1:31) 라고 전했다. 그런 다음 그는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라고 놀라운 진술을 부언하였다.

'예수 (Jesus)' 라는 이름은 이사야와 예레미아가 예언하였던 고매한 이름보다는 훨씬 단순한 이름 같이 보인다. 유대인들 중에서 이미 그 이름 -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아, 예수아 (Joshua, Isaiah, Hosea, Jeshua) - 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다 바로 그 이름의 변형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 모든 이름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이름이 단순히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리라" 또는 "우리의 구주 여호와" 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인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타락한 세상과 죄에 빠져 용서와 화평과 영생을 소망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의 총체적 전도사역을 내포한다.

아직도 남은 이름들이 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이름이 신약의 최초의 장에 언급되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태복음 1:16). 이를 보면 그는 예수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다.

즉, 그는 바로 그 '그리스도 (the Christ)'로서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 기다리던 '메시아(Messiah)' 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이름은 실질적인 직함으로서, 희랍어와 히브리어로서는 각각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육신을 입은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영원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의 영원하신 선지자이신 그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1, 14) 이 되어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세세무궁토록 선언하신다"(요한복음 1:18).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되신 그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브리서 7:25). 마침내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요한계시록 19:16). 그리고 그가 우리의 영원하신 왕으로서 돌아오실 때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요한계시록 11:15).

이와 같이 하여 그의 인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아직은 또 다른 이름이 하나 있다 - 말하자면, 세례명이라 할까 - 그 이름은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그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0:13) 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일 뿐만 아니라, 주님 (Lord)이시다. 그의 부활이 있은 후, 베드로 사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36) 하였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그의 온전한 이름은 언필칭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도 그에게 봉사하고 그를 존경하려면 앞에 언급된 여러 가지 경이로운 이름들을 다 사용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그런데 그가 다시 오시는 날, 그를 명예롭게 받들어야 하는 이름이 또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하시고, 또 당신의 보혈로 되찾은 이 세상으로 언젠가는 권세와 영광 속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개선하시는 모습을 예언적인 환상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허락 받았었다. 그 때 그는 주님이 앞으로 오실 세상에서 불릴 경이로운 이름 세 가지를 들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요한계시록 19:11). 그는 지금도 우리들의 '충성된 대제사장'(히브리서 2:17) 되시고, '미쁘신 조물주' (베드로전서 4:19)가 되시며, 그리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요한계시록 3;14) 이다. 그의 영원한 이름 중의 하나는 충성되고 참되신 이 이시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포함되었다. 즉,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요한계시록 22:6), 그것은 그 말을 하시는 분이 영원히 신실하시고 참되신 이이시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13)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는 "태초의 창조하시는 이름"(요한복음 1:1-3)이었다. 그리고 "육신이 되어 우리한테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14)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원수를 이기고 우리 지구에 개선하실 때 다 이루심을 나타내는 장엄한 승리의 말씀이다.

그러고도 마지막 남은 이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한계시록 19:16)가 되심이다. 그 위대한 날에 전 우주는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이름을 주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9-11).

아굴이여, 여기 그대에게 줄 대답이 있소.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은 믿을 수 없을 만치 위대하여, 그 이름을 다 일컫는 데는 필설이 부족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Wonderful)' 말고도 우리가 그의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이름들이며, 또한 틀림없이 영원의 시간 중에서 더 많은 이름들을 가지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일러준 그의 인간의 이름을 특별히 사랑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Lord Jesus Christ)' 이시다. 그리고 그 많은 그의 이름들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하나님의 책을 마치는 데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아들이 하신 이 아름다운 말씀으로 마감하는 것이 적절하였으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20, 21).

 

*Henry M. Mo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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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nameofchrist/

출처 - ICR

미디어위원회
2004-04-27

예수님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는 발견된 적이 있는가?

(Has Archaeological Evidence for Jesus Been Discovered?) 

Dr. John D. Morris 


     회의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적이 없다는 점을 가끔 지적하곤 한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최소한 현재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최근의 발견이 어쩌면 그들의 말을 잠재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부차적인 문제가 있는데, 우선은 이 문제부터 먼저 고려하여야 할 것 같다. 그와 같은 유물이나 비명 따위를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인간 예수는 어느 정부의 특출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거의 무일푼의 유랑 설교자로서, 결국에는 보통의 무법자의 죽음을 죽었던 것이다. 로마 사람들이 그의 비명이나 동상이라도 세워 기록할 이유가 있었을까? 확실히 없었다.


실제로 그 시대 전반에 걸친 유대의 고고학적 유물들은 오히려 희박한 편이다. 로마 제국의 도시들과, 헤롯(Herod) 왕, 빌라도(Pilate) 총독, 그리고 베스도(Festus) 같은 지도자들에 관한 적절한 비명이 기록된 거대하고 광범한 유물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가야바(Caiaphas)와 같은 영향력이 있는 유대 인사들의 유물도 역시 남아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삶에 관한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후 70년대에 예루살렘은 티투스 로마황제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대로 남아있던 유물들도 현대의 번창하는 도시건축으로 매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모든 조건들은 유물보전에 친화적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에 관한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전무한 사실은 풍부한 그의 역사적 증거와는 대조적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기록한지 얼마 후, 뒤이어진 바울의 편지들이 그 때에 살던 사람들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이미 복사되고 널리 전파되었던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리스도/메시아로 불려졌던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James)라는 사람의 사형집행 사건을 포함하여 중요한 민사사건들에 관해 언급했는데, 그의 언급에서 그는 틀림없이 예수의 아우인 야고보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야고보는 초기교회의 지도자였으며,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는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새로 발견된 유물은 중간 크기의 상자로서, 죽은 자의 살이 완전히 삭은 후 인골만을 추려서 영구 매장하는 납골궤(ossuary, 뼈단지)였다. 이 매장제도는 BC 20년대에서부터 AD 7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시행되었다. 그 궤는 그 지방에 흔한 부드러운 백악질의 석회석으로 되어있었다. 그 내용물은 오래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궤의 한 쪽 측면에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 글은 당시의 아람어로 '야고보, 요셉의 아들, 예수의 아우 (James, son of Joseph, brother of Jesus)' 라고 되어있었다. 전자현미경 스캐닝을 포함하여 세밀한 분석조사 결과 그 각명(刻銘)은 진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궤의 표면에 고루 녹슨 녹청은 각인된 글자들의 내면까지 덮고 있었다. 고고학적 유물평가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앙드레 러맬 박사 (Dr. Andre Lemaire)는, '이 고대유물이 가짜가 아닌 진품이라는 나의 판단을 보고하게 되어 나는 기쁘다' 라고 말했다.

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습관은 그 지역에서는 보통이었다. 그러나 형제가 유명인사가 아닌 이상, 죽은 자의 형제의 이름은 사용하는 예는 드물었다. 기록되어 있는 세 사람의 관계가 성경에 기록된 관계와 꼭 들어맞게 되어있는 것을 보면, 납골궤에 수장된 주인공은 성경의 야고보일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고 하겠다.

납골궤는 물론 다른 고고학적 유물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그 사건들이 참이라는 우리의 확신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크리스천의 믿음은 역사적 사실들 위에 근거한 합리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성경은 온전히 정확한 기록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has-archaeological-evidence-for-jesus-been-discove

출처 - ICR, 2002. 12. 1.


미디어위원회
2003-10-09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을 때 

(When God Became Man)

Henry M. Morris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요한복음 1:1,3,14).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되셨는지, 그 육화(肉化)의 교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유한자의 이해력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교리를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기뻐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그 교리를 믿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요한일서 4:3) 라고 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한복음 8:24) 하고 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확실한 많은 증거로…”(사도행전 1:3), 특히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으셨다가 다시 몸이 살아나신 증거로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사도행전 17:31) 하셨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명의 창조주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었다. 석가모니도 죽었다. 마호메트도 죽었다. 그리고 공자와 플라톤은 물론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위인이나 성자들도 다 죽었다. 그러나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베드로전서 3:18) '육화의 말씀'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요한계시록 1:18).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7:25).

 

창조주가 어떻게 인간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만물이 다 그[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고”(골로새서 1:16) 지어졌다. 그가 ”육신으로 태어났을 때” 스스로가 그 안에 거하실 바로 그 육신을 지으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육신의 탄생은 인간 생식의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육신의 탄생일 수 없었다. 그것은 영의 본래적인 죄, 또는 육체나 정신의 원초적이며 유전적인 결함으로 말미암은 흠집이 전혀 없는 육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육체이어야만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오래 전에 아름다운 에덴동산에다 지으셨던 최초의 사람의 육신과 같이 완전무결하야만 하였다. 그는 사실상 ”마지막 아담” (고린도전서 15:45) 으로 불려질 것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처음 아담”이 지어졌던 것처럼 지어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초의 아담과 최후의 아담과의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최초의 아담은 지어질 때에 이미 성숙한 남자로 창조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담은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어야만”(히브리서 2:17) 하였던 것이다. 사실상 잉태에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은 … 자로되 죄는 없으신” (히브리서 4:15) 이었다. 특히 그의 피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이… 보배로운 피”(베드로전서 1:19) 이어야만 하였다. 그것은 그 피가 ”하나님께 드린 흠 없는 피어야 …”만 하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14).

그와 같이 해서 두 번째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어 처녀의 자궁 안에 착상시켜야만 하였다. 이 사실은 최초의 아담이 세상에 죄와 죽음을 초래케 한 이후 제일 먼저 하신 바로 그 약속의 내용이다.  ”여자와…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노라 … ”(창세기 3:15)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거짓말로 하와를 꾀어 죄로 인도한 사탄에게 주는 약속이었다. 두 번째 아담의 경이로운 육신은 모든 인간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씨에서 자라지도 않을 것이며, 여자의 난소에서 자라지도 않을 것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느 경우에 있어서도 어쩔 수 없이 죄와 돌연변이를 수반하는 태아가 생기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별히 창조주 당신이 손수 지으시는 씨이어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그 씨는 처녀의 자궁에 착상되야만 했다. 그 곳은 당장에 그의 '성소(tabernacle)'가 되어 거기서부터 자신의 행성인 이 지구에 오셔서 당신이 구원하려는 인간들과 함께 33년 동안 살았던 것이다.

”내가 왔나이다 …” 하고 그는 나중에 다윗의 입을 통하여 약속한 것이었다 (시편 40:7). 이사야를 통하여서 그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리고 그 아기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이사야 7:14, 9:6)라고 말씀하셨다. 더 나중에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선지자는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예레미아 31:22) 라고 하였다.

선택된 여인 안에서 '새 일이' '창조될' 것이라는 말을 주목함이 마땅하다. 때가 이르매 천사가 마리아에게 확언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누가복음 1:35) 하였다. 그런 다음 ”세상에 임하실 때에…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브리서 10:5). 무엇보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그가 ”예비하였도다(희랍어 katartizo)” 라는 똑 같은 말을 사용한 점으로서, 그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히브리서 11:3)고 증언하고 세계를 지으신 바로 그 살아계신 말씀이 그 자신의 인간의 육신도 지은 것을 인정할 때에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그 조그만 자궁 안에 는 그 자신이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정보뿐만 아니라, 창조와 보존과 전 피조물의 구속의 정보까지도 담겨있었다. 그것은 창조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의 것이었으며, 또 곧 구속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배(倍)로 그의 것이 될 것이었다.

 

창조주는 언제 사람이 되었는가?

창조주의 육화를 12월 25일로 정하고 그날에 예수가 탄생한 것으로 간주하여 축하하는 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인 관례로 되어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집단들이 다양한 날들을 기념하기도 하고, 여러 작가들은 제 각기 다른 날들━예컨대, 정월의 어느 날이든가, 또는 춘삼월이나 시월의 어느 날을━권장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전혀 기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12월 25일을 예수탄생의 날로 정한 것이 4 세기 경의 어느 때부터였다. 사실상 크리스마스의 행사는 근본적으로 고대 로마의 농신제(農神祭; 12/17일 추수감사제)나, 또는 한 해 중에서 밤 시간이 가장 긴 동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이교도들의 축제행사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명백한 사실은 그의 탄생일을 정말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제에 관한한 어느 누구도 독단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매우 흥미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다. 그리스도가 태어나던 날 밤, 목동들이 들에 나가서 양떼를 돌보고 있었다고 하였다 (누가복음 2:8). 이 사실로 해서 그 때가 늦은 동짓달 어느 날일 가능성은 희박하고, 차라리 이른 가을 어느 날로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의 탄생도 또한 가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기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특히 영국이나 서유럽에서는, 미가엘마스로 불리는 고대 크리스천의 축제일인 9월 29일을 축하하였다는 것은 의미 있게 볼만한 대목이다. 이 이름은 후대에 와서는 어떤 법정이 개정 중에 있는 가을의 어는 시기를 식별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미가엘마스(Michaelmas)” 라는 이름은 ”미가엘이 보내졌다”는 의미로서 ”크리스마스”의 뜻이 ”그리스도가 보내졌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미가엘은 목동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언명하기 위하여 천국에서 보내진 ”여호와의 천사” (누가복음 2:9)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가엘마스의 축제는 이와 같이 해서 인간으로 탄생하는 예수를 환영하기 위하여 보내진 미가엘과 천사들의 내왕을 축하하려고 시작한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이 미가엘마스는 바벨론 포로 시절 이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을이면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기 위하여 축제를 벌이는 위대한 초막절보다 몇 날 앞서 벌어지던 축제였다. 초막절 때에는 이스라엘 가족들이 한 때나마 천막, 즉 '초막(tabernacle)'에서 지내는(dwell, 거하다) 습관이 있었다. 요한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dwelt)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거하다 (dwell)' 라는 뜻을 담은 통상적인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글자 그대로 말씀이 (즉, 창조주가) 한 때 우리들 가운데 '거하셨다' 라는 말을 'tabernacled' 이라고 명사를 과거형 동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그가 즐거운 초막 축제에 맞게 적절한 때에 이 세계에 오시기라도 한 것 같았다. 미가엘과 천사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온 백성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라고 노래한 것이 그것을 말한다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무리 영광된 일이라고 하여도, 이 탄생일이 그의 육화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는 아홉 달 전에 이미 ”사람들의 형체와 같이 되어”(빌립보 2:7) 있었다. 그 때는 그가 당신 스스로의 육신을 지으시고 마리아의 자궁 안에 당신의 거처를 정하신 시점이다. 그 때가 ”말씀이 육신이 된”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크리스마스' (즉, 그리스도가 보내진 때), 즉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좌로부터 보내져서 육신의 '초막' 안에 들어오게 되던 때가 미가엘과 천사들이 그의 탄생을 선언하기 위하여 보내졌던 '미가엘마스'보다 아홉 달이 앞선 때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시 12월 25일의 날짜를 다시 돌이켜 생각하게 된다! 두 날 짜 (그리스도가 천국의 왕좌에서 내려오셔서 마리아의 자궁 속에 착상된 날과 미가엘과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린 날과의) 사이에는 실질적으로 278 일의 간격이 있다. 이 기간이야말로 인간의 태아 성장에 있어서 이상적인 기간이다.

이 추론의 정확성 여부 (그리스도의 진짜 탄생일이 언젠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를 별개 문제로 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적적인 잉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가져다준다. 한 해 중에서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의 시기를 그가 이 세계에 오시는 시점으로 정한 것은 너무도 적절하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빛' (요한복음 8:12)으로 오셔서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시기”(디모데후서 1:10)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기에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飮酒方歌나 이교도의 貪食이 아닌)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크리스마스의 놀라운 선물을 기억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한일서 4:9).

 

왜 창조주는 인간이 되었는가?

'왜 (Why)?' 로 시작되는 이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해답은 불가능하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나 대답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이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들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답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 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 (디모데전서 1:15).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의 최초의 오심은 뒤이어 희생의 죽음과 육신의 부활, 그리고 영광의 승천으로써 그의 두 번째의 오심에 관한 그의 약속을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가 최초로 오셔서 계셨던 잠간 동안, 그는 우리들 속에서 '거하셨다 (tabernacled).' 그의 두 번째의 오심에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요한계시록 21:3, 4).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영광스럽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구주를 거부하고 또는 무시한다는 사실은 슬프기 한량없다. 그들은 지금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와 축복을 잃어버렸을 뿐만이 아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그를 맞이하기 전에는, 그들은 지금 다가오고 있는 영광의 빛으로 싸인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와는 영영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pubs/imp/imp-246.htm 

출처 - ICR, Impact No. 246, 1993.

미디어위원회
2003-10-08

베들레헴의 별은 무엇이었을까?

(What was the Star of Bethlehem?)

Don DeYoung 


     크리스마스 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세 가지가 언급될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 별은 왕들의 탄생과 같이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일들이 발생할 때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혜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혜성의 관측 기록은 주의 탄생과 합치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헬리 혜성은 기원 전 11년에 있었고, 첫 크리스마스는 BC 5~7년 사이에 일어났다.

다른 학자들은 베들레헴의 별은 밤 하늘에 일어났던 행성들의 근접 현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행성들은 태양의 둘레를 각각의 거리에서 다른 속도로 공전하기 때문에 행성들은 때때로 서로 근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여러 행성들이 단일한 광원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또한 행성 직렬은 다소 자주 있으며 그렇게 드문 편이 아니다. 기원전 6년에 목성과 토성의 근접이 있었지만, 훨씬 전인 기원전 66 년에 훨씬 더 가까운 근접현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별을 설명하기 위해 폭발하는 별, 또는 초신성(supernova)이 제안되었다. 어떤 별들은 불안정하여 밝은 빛을 내며 폭발한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기록에는 예수님이 탄생하던 시기에 초신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베들레헴 별에 대한 위 세 가지 설명 모두 다 민수기 24장 17절에 예언되었고,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12절까지 기록된 본래 이야기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두 사건은 특별히 흥미가 있다.

첫째는 본문에 따르면 동방박사들만 그 별을 보았다는 것이다. 혜성의 출현이나, 행성 직렬, 혹은 초신성이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 별이 동방박사들 앞서 갔으며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그들을 인도했다는 것이다. 이 거리는 약 10km (6마일)이며 북쪽에서 남쪽 방향이다. 그렇지만 하늘에 있는 모든 천체는 지구의 자전으로 동에서 서로 움직이므로 별이 어떤 특별한 집으로 길을 인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론은 베들레헴의 별은 과학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시적인 초자연적인 빛이었다. 첫 크리스마스는 기적의 시간이지 않은가?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채웠던 영광 (출애굽기 40:34-38), 성전을 채웠던 영광(열왕기상 8:11)과 사도 바울을 비췄던 빛(사도행전 9:3)처럼 종종 초자연적인 빛으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현전에 대한 그러한 가시적인 징조는 세키나 영광(Skekinah Glory), 혹은 하나님의 임재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특별한 광채는 신성의 위엄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첫 크리스마스의 위대한 신비는 특별한 별의 기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세주께로 인도하는 별을 따라가도록 동방박사들이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똑같은 초대를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참조 : The Star of Bethlehem : A Supernatural Sign in the Heave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star-of-bethlehe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docs2002/1224star.asp 

출처 - AIG, 24 December 2002.

관리자
2002-06-14

노아 방주에 탄 정결한 짐승들의 수는 성경의 오류인가?

김홍석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창 7:2-3)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창 7:8-9)


  자주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구절은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정결한 짐승들의 수에 관한 것이다. 히브리 성서 맛소라 텍스트는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보여준다. 창 7:2절에서 정결한 짐승은 “쉬브아 쉬브아 이쉬 이솨”(일곱 일곱 수 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수컷 일곱 마리 암컷 일곱 마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쌍이다. 부정한 것은 “쉐나임 이쉬 이솨”(둘 수 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수컷과 암컷(을 합하여) 두 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한 쌍이다. 또한 창 7:3절에서 공중의 새도 “쉬브아 쉬브아 자카르 네케바”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수컷 일곱 마리 암컷 일곱 마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곱 쌍이다.

그렇다면 창 7:8절에서 노아 방주로 들어갈 때 둘씩 들어갔다는 것은 무엇인가? 창 7:8절에서 “암수 둘씩”이란 “쉐나임 쉐나임”(둘 둘) 나아와서 “자카르 네케바”(수 암)가 방주로 들어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암수 둘씩(two and two)이란 의미는 노아에게 나아오는 모습과 방주로 들어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한 무신론자의 주장   <James Patrick Holding의 글>


한 무신론자는 노아 방주에 7쌍의 암수가 태워진 것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하고 있었다 : 

“암수 7쌍을 취하는 이러한 생각은 여호와가 축산업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농부나 목장주도 소, 양, 말 등의 동물을 키우는 사업을 할 때 암수의 숫자를 똑같이 구매하지 않는다. 1 마리의 숫소와 13 마리의 암소, 또는 1 마리의 숫양과 13 마리의 암양을 구매하는 것이, 암수 각각 7 마리씩 구매하는 것보다 초기 투자 시에 매우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1 마리의 수컷이 13 마리의 암컷과 교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이러한 이야기가 쓰여졌다는 것은 그 저자가 동물들의 번식에 대해 빈약한 지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한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한 번에 많은 새끼들을 낳는다. 코끼리를 생각해 보자. 아프리카 코끼리는 14살 정도에 번식할 수 있는 연령이 된다. 코끼리의 임신 기간은 평균 670일 이다. 반면에 인도코끼리들은 좀 더 일찍 성숙하고 좀 더 짧은 임신기간을 갖는다. 그래서 한 쌍의 코끼리가 25살의 나이에 4마리의 자손을 가졌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코끼리의 개체 수는 100년 동안에 줄잡아 4번이나 2배가 될 수 있다(새끼들이 젖을 뗀 후, 부모 세대들이 곧 죽었다할지라도). 개체 수가 2배로 되는 것이 22번 일어나면 800만을 넘어선다. 이 숫자는 단지 550년(22×25)이면 도달될 수 있는 숫자이다.” 

그리고 방주에 수컷을 한 마리만 태우는 것은 유전적 다양성을 위해서도 적절하지 않다.


또 다른 성경비판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의 인구수가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바로의 계획에 대한 이야기에서, 바로는 모든 신민에게 히브리 여인들이 남자 아기를 낳으면 죽이고, 여자여든 살려두라고 명령한다(출 1:22). 이것은 인구수를 줄일 수 없는 멍청한 계획이다. 왜냐하면 인구성장률은 임신이 불가능한 남자의 수가 아니라, (그 그룹에 임신을 시킬 수 있는 적어도 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임신이 가능한 여자들의 수에 의존한다. 바로는 그 당시에 태어난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데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남아 성숙해진 여자들은 이미 살아있었던 많은 나이든 남자들과 민족의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서 기꺼이 그들의 의무를 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든 남성이 ”이 사랑스런 여인은 너무 젊어서 아내로 맞이하기에는 부끄럽소“ 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바로가 약간의 상식을 가졌었다면, 또는 이 허풍적인 이야기를 지어낸 작가가 약간의 상식을 가졌었더라면, 그 이야기는 바로가 히브리 여인들에서 태어난 모든 여자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었다고 썼을 것이다.” 

의견을 구했던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말 바보스러운 말이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바로가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있는가? 그리고 바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본 후에도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남자들은 무기를 잡고 전쟁을 할 수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노예로서 많은 일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이 우둔했다’ 라고 말하는 것 외에도 연대기적 속물근성이 비판론자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다. 오! 바로는 여자들이 태어나는 것을 허락함으로서 여자들이 인구성장률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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