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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9-09-21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른 이유는?

(Contradictions : What’s in a Father’s Name?)

Bodie Hodge 


      왜 요셉(Joseph,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예수님의 부친)은 마태복음 1:16절과 누가복음 3:23절에서 다른 이름의 두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6)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누가복음 3:23)

먼저 몇 가지 사전 설명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의 족보(genealogy)는 완전한 계보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족보는 단지 선택되어진 계보이다. 마태복음 1:17절에서 특별히 14대 씩으로 나뉘어져 있는 마태복음의 족보는 완전한 계보라고 볼 수 없다.

이 두 족보는 다윗의 두 아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둘 다 아브라함까지 이어진다. 마태는 다윗을 통해 내려온, 궁극적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부터 내려온 왕의 계보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누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계속 추적을 하였다. 누가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아담으로부터 창조세계 안으로 죄와 죽음이 들어왔고, 그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 하나 주목해야할 점은 두 족보 모두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태는 ”..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좀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as was supposed) 요셉의 아들이니...”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는 요셉의 두 아버지에 관해서,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사이의 차이는 꽤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마리아의 계보를 통해서 추적하였고, 반면에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통해 추적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의 족보.

마태가 요셉의 혈통을 기록하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여고냐(Jeconiah, 여고니야, 고니야, 여호야긴) 때문이다. 그는 마태복음 1:11절에 등장한다. 여고냐의 악한 행동 때문에, 그의 자손 중 다윗의 왕위에 앉을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게 되었다.(렘 22:30) 동정녀 탄생은 명백히 이것을 방지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족보가 요셉의 족보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은 의미심장한 여성형 용어(feminine verbiage)의 사용으로 확인되고 있다. 마태가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를 족보의 마지막에서 언급했을 때, 그는 예수님의 부모님에 대하여 여성형(feminine form)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정말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족보.

누가복음 3장을 살펴보면, 족보의 목록은 마태복음의 족보(다말, 룻 등과 같은 몇몇 여인들을 포함)에서처럼 엄격하게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남자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족보가 마리아의 족보라면, 그러면 그녀는 목록에 올라가게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족보에서 헬리(Heli)는 요셉의 아버지로서 기재되어져 있다. 헬리는 2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 한 딸은 마리아였고, 다른 딸은 세베대의 부인(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이었다.(마 27:56, 요 19:25). 모세의 법에서 기업을 물려 줄 아들이 없을 때(민 27:1–11, 36:1–12), 사위는 결혼 후에 가계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였을 때, 모세의 법에 따라 헬리의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족보에 합법적으로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의 족보에서 그 형태는 마태복음의 족보 형태와 다르다. 마태복음의 목록은 누가 누구의 아버지가 되는지(begot, 그리스어로 gennao)로 표현되고 있다. (한글 성경은 ”낳고”로 번역됨).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그 형태는 다르다. 그곳에서 ”그 위는”(영어성경은 X is the son of Y)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son(아들)’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헬라어) 성경에는 없던 것이었다.(한글 성경에는 ”그 위는”으로 번역함). 단지 우리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영어성경에서 삽입되어졌던 것이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son’이 사용된 유일한 곳은 23절로서,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son)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는 구절이다.


누가는 매우 정확했다. 예수님은 헬리의 아들이었던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누가는 그리스어로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었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라. 이것은 예수님의 족보 기록이 성경적 오류라는 주장을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족보는 마리아의 족보였으며(요셉의 이름은 물려받은 기업에 기인하여 기재됨), 마태복음의 족보는 요셉의 족보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Footnotes
[1] Evangelicals have pointed out other explanations for this alleged contradiction. But for the sake of brevity, we went with the most common satisfactory explanation.


*참조 : Who Was Joseph’s Father in Jesus’ Genealogy?

https://apologeticspress.org/who-was-josephs-father/

The Genealogies of Matthew and Luke

https://apologeticspress.org/the-genealogies-of-matthew-and-luke-932/

Jesus’ family tree

https://creation.com/family-tree-of-jesus

On the genealogies of Jesus
http://www.christian-thinktank.com/fabprof4.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3/02/contradictions-whats-in-a-fathers-name 

출처 - AiG–U.S. 2009. 3. 2.

미디어위원회
2009-09-18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기간은 밤낮 사흘이 될 수 없는가?

(Contradictions : Three Days and Nights)

Paul F. Taylor 


      만약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밤낮 사흘(three days and nights)을 계셨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성 금요일과 부활하신 일요일 사이에서 적합시킬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몇 가지 해결책들이 있다. 몇몇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안식일이 발생했었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목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해결책은 정말로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하루를 세는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에스더 4:16절에서,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자기를 위하여 유대인들이 금식하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Neither eat nor drink for three days, night or day)”(에스더 4:16). 허락 없이 왕 앞에 나아가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단지 두 절 뒤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제삼일(the third day)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에스더 5:1). 만일 밤낮 삼 일을 오늘날 우리가 계산하는 방법으로 계산한다면, 에스더는 4번째 날이 될 때까지 왕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던 상황과 완전히 유사하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0)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 28:1)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눅 24:5-7)  

만약 밤낮 사흘을 우리가 계산하는 방식으로 계산한다면, 예수님은 4번째 날에 부활하셨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구절들을 비교하여 볼 때, 성경이 기록되던 시기의 사람들은 ‘3번째 날(the third day)‘은 ’3일 후(after three days)’와 동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이 계산했던 방법은 이것이다. 즉 부분적인 하루도 1일(one day)로서 계산했던 것이다. Christian Apologetics and Research Ministry(CARM)의 웹사이트에 있는 아래의 표는 그 계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고 있다.[1]

1 일 (Day One)2 일 (Day Two)3 일 (Day Three)
목요일의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하여금요일의    해가 지면서  끝남금요일의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하여토요일의    해가 지면서  끝남토요일의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하여일요일의    해가 지면서  끝남
십자가에 달리심안식일부활


이 표는 예수님이 성 금요일에 돌아가셨음을 가리킨다. 그 날은 1 일(day one)이다. 예수님은 낮에 돌아가셨다할지라도, 1 일은 전날 밤과 낮을 포함한다. 그래서 금요일의 한 부분에서 시작하였지만, 그것은 첫 번째 밤과 낮으로 계산되어지는 것이다. 토요일은 2 일(day two)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 그 날은  3 일(day three)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계산 방법에 의해서 사흘 밤낮이 되는 것이다.(장례 시의 3일장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예수님을 3번째 날에 부활하셨다.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계산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놀라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계산 방법을 적용한다면, 사흘 밤낮이라는 성경적 문제와 관련하여 추정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Footnotes
[1] Christian Apologetics and Research Ministry, 'How Long Was Jesus Dead in the Tomb?” http://www.carm.org/diff/Matt12_40.htm.


*참조 : The Interval Between Christ’s Death & Resurrection

https://apologeticspress.org/the-interval-between-christs-death-and-resurrection-5977/

Did Jesus Rise “On” or “After” the Third Day?

https://apologeticspress.org/did-jesus-rise-on-or-after-the-third-day-75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6/29/contradictions-three-days-and-nights

출처 - AiG, 2009. 6. 29.

미디어위원회
2009-09-16

신명기의 마지막 장에는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모세는 그 책의 저자가 될 수 없는 것인가? 

(Contradictions : Dead Man Writing)

Roger Patterson 


      신명기(Deuteronomy)의 마지막 장인 (비교적 적은 12절로 된) 34장에는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가 될 수 있는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신명기 34:1-12)

모세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 모세오경(Pentateuch)의 저자로서 간주되고 있다.(신 31:24).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모세가 이들 책의 진정한 원저자라는 주장과 풍부한 증거들을 거부해왔다. 모세오경에는 우주 만물의 창조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스라엘)을 통한 택하신 민족의 부르심과 함께 모세의 삶과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을 하고 광야 생활의 방황 끝에,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모세가 가지고 있던 지도자의 권위는 여호수아에게 넘겨졌다(신 31:23). 여호수아는 모세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새로운 땅으로 이끌고 들어갔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신 34:4)

모세는 약속의 땅을 본 후에 죽었고, 하나님에 의해서 묻혔다(신 34:5-6). 만약 모세가 죽었다면, 어떻게 그의 죽음을 기록한 신명기가 그가 쓴 책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구약의 책들이 기록되던 시기에, 책들은 두루마리(scrolls)로 쓰여졌다. 한 책의 끝과 다음 책의 시작은 명확한 구분을 가지지 않았다. 구약에 대한 현대 번역본들에서, 어떤 장의 마지막 구절이 다음 장의 첫 구절로 간주되는 많은 예들이 있다. 이것은 실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 구분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완전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신명기의 마지막 장은 쉽게 여호수아의 첫 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이 추론되는 모순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신명기 33:29절에서 모세의 마지막 축복의 말들을 기록했던 또 다른 저자가 모세가 죽은 이후에 그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영감된 그는 이 모세의 마지막 활동들을 기록하였고, (모세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 적어 넣었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사람이 여호수아일지, 에스라일지, 엘르아살일지, 아니면 어떤 다른 사람일지 모르지만, 그가 모세의 삶을 간단한 설명으로 마무리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장(chapter)들을 재조정하거나(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을 여호수아로), 또 다른 저자가 신명기에 작은 부분을 마지막에 추가하였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 성경의 진실성은 이 문제에 관한 이러한 설명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어떤 책을 쓰고 있다가, 또는 개인적 메모들을 남기고 있다가 죽었다면, 그리고 어떤 이가 당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거기에 마지막으로 추가하였다면, 아직도 그 책의 저자는 당신으로 간주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2/23/contradictions-dead-man-writing 

출처 - AiG–U.S. 2009. 2. 23.

미디어위원회
2009-09-09

마태는 스가랴의 예언을 예레미야의 것으로 잘못 인용하였는가?

: 성경의 오류로 자주 주장되는 구절에 대한 반론. 

(Contradictions : Mixed Prophets)

Paul Taylor and Bodie Hodge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성경 비판가들은 마태복음에 하나의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태가 스가랴의 예언을(슥 11:12–13) 예레미야가 한 것으로 잘못 인용하였다는(마 27:9) 것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태복음 27:9-10)

은 삼심에 대한 이 인용문은 스가랴서의 구절을 매우 연상시킨다. 그래서 마태는 실수를 범하였다고 가정되고 있다. 만약 마태가 실수를 범하였다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개념은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오류는 어떻게든 성경의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 구절을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는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주장되어지는 이 문제에 대한 그동안 논의되어져왔던 여러 가능성 있는 설명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요약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다 :  

1. 예레미야에 의해서 말해졌지만, 후에 스가랴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2. 시몬 베드로(Simon Peter)를 베드로(Peter)로 칭하는 것처럼, 스가랴의 세컨드 네임(성)이 예레미야이다.
3. 필사자의 실수이다. 모든 그리스어 번역본에는 예언자의 이름이 존재하지만, 시리아와 페르시아어 번역본에는 이 이름이 없다.
4. 이것은 유다(Jude)가 에녹서를 인용한 것처럼, 예레미야에 대한 외경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5. 스가랴서의 마지막 4 장은 실제로는 예레미야에 의해 쓰여졌다.
6. 유대 경전(Jewish canon)에서 책들은 다른 순서로 되어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다른 어떤 소선지자들보다 적절한 신뢰가 주어졌을 수 있다.
7.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와 스가랴서의 두 부분이 인용되었는데, 단지 예레미야만 언급된 것이다.

1-5 번까지의 설명은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6, 7번이 보다 일반적인 설명이 되고 있다. 이 설명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언서들의 모음집 (6)

이 가능성은 모음집에서 첫 번째 책의 이름으로 그 모음집을 부르는 잘 확립된 랍비적 방식(rabbinical formula)을 마태가 사용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눅 24:44절에서 비슷한 방식을 사용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글들을 (잠언과 같은 다른 책들도 포함하고 있었을지라도) 시편으로서 언급하셨다.  

유대 성경(Jewish Tanakh)에서, 예언서들은 기독교의 성경 순서와는(모든 책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다른 순서를 가지고 있다. 예언서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의 첫 번째 책은 이사야서가 아니라, 예레미야서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스가랴서에서 인용한 말이지만 예레미야서에서 인용하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전후 문맥 (7)

이 설명은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에 있는 한 구절보다 전체적인 문맥을 인용하여 많은 구절들을 자주 암시하는 방법을 포함하고 있다. 스가랴서의 인용에는 필요한 많은 기초적인 정보들이 있어야한다.

먼저, 예레미야 18장은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진흙임을 말하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유명한 부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나라에 대한 재앙을 경고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은 그 분의 죽음을 은 삼십 개와 바꾸었다. 그리고 나서 복음의 메시지는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특별히 예루살렘)은 곧 폐허로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예레미야 19:1-4절은 토기장이의 밭에 관한 보다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그곳은 예루살렘의 하시드 문(Potsherd Gate) 어귀 곁으로서, 그곳에서 대참사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구절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으며, 무죄한 자의 피가 흘려졌음을 언급하고 있다. (결코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피까지).  

그리고 예레미야 32:9-12절은 토지 및 구매 계약을 논하고 있다. 마태복음 27:9-10절의 최초 인용문이 스가랴서의 구절과 어느 정도 유사하지만, 두 번째 인용문인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라는 구절은 토기장이의 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예레미야 32:9-12절을 시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예레미야서에 언급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가랴는 그 위에 구축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전체 구절이 예레미야와 관련된 토기장이의 밭에 관한 문맥 속에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씀으로 마태가 언급한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가능성 있는 설명 (8)

그리고 마태복음과 스가랴의 이 두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그 구절들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서로 일치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Then was fulfilled what was spoken by Jeremiah the prophet, saying, 'And they took the thirty pieces of silver, the value of Him who was priced, whom they of the children of Israel priced, and gave them for the potter’s field, as the LORD directed me.)” (마태복음 27:9-10)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Then I said to them, 'If it is agreeable to you, give me my wages; and if not, refrain.” So they weighed out for my wages 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e LORD said to me, 'Throw it to the potter”—that princely price they set on me. So I took the 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rew them into the house of the LORD for the potter.)” (스가랴 11:12–13)

마태복음에는 은 삼십을 ”가지고”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스가랴서는 ”달아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스가랴서는 ”토기장이에게 던지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미 마태복음 27:5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태복음은 ”토기장이의 밭 값”이라고 되어있는데, 스가랴서에는 그러한 말이 없다(‘품삯’으로 되어있다). 이외에도 다른 여러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만 해도 충분하다. 즉, 마태복음의 구절은 스가랴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비판가들은 마태가 이 인용문을 스가랴의 것으로 잘못 인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가랴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가랴의 말은 일부 유사한 면은 있지만, 마태복음에서 인용한 말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마태가 이것을 예레미야의 말씀으로 인용하였다면, 그것은 예레미야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정말로 예레미야가 말했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상고해 보라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 21:25)

따라서 마태가 인용한 이 구절은 스가랴서의 구절이 아니라, 예레미야에 의해서 말해진 기록되지 않은 말씀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마태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레미야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되(written)”라 하지 않고, ”하신 말씀(spoken, rheo)”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다가 유다서(9장)에서 천사장 미가엘에 관한 기록되지 않은 정보를 포함시킬 수 있도록 영감되었던 것처럼, 성령님께서 마태에게 영감을 불어 넣으셔서 예레미야가 말한 예언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셨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예언의 말씀이 주어진 후, 성령님께서는 후에 비슷한 예언을 스가랴에게도 주시어서 그의 기록된 책(스가랴서)에 기록되게 하셨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구절에 대한 8 가지의 가능한 설명들이 존재한다. 마지막 3 가지(6-8번) 설명은 이 구절이 성경의 오류라는 주장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조 : Who was Matthew Quoting?

https://apologeticspress.org/who-was-matthew-quoting-65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4/27/contradictions-mixed-prophets 

출처 - AiG, 2009. 4. 27.

미디어위원회
2009-09-03

가롯 유다의 죽음에 관한 성경 기록은 오류인가?

(Contradictions: How Did Judas Die?)

Georgia Purdom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Judas Iscariot)는 목매어 죽었는가(마 27:5), 아니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는가?(행 1:18)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5)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행 1:18)

어떤 사람들은 마태와 누가(사도행전의 저자)가 유다의 죽음에 대해서 서로 틀리게 기록하고 있음으로 이 구절들은 성경의 오류라고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마태는 목매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그렇다면 마태와 누가는 같은 사건을 두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보행자가 자동차에 치는 장면을 목격했다면, 나는 그 보행자는 자동차에 치어 죽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 장면을 보지 못하고 이후에 그 장소에 도착한 검시관은 시체의 손상을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나와 검시관은 같은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기술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유다는 목매어 죽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반면에 의사였던 누가는 목매어 죽은 이후에 발생한 일을 자세하게 묘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그렇게 추론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만약 어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내장이 터져 나왔다면 목매어 죽을 수 없다. 둘째, 어떤 사람이 매우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할지라도 일반적으로 내장이 터져 쏟아져 나오지는 않는다. 피부는 매우 강인하여서 심지어 복부가 칼에 찔린다 하더라도 내부 장기는 대게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유다가 단지 떨어져 죽은 것만으로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왔다고는 보기 힘들다.


목매달아 죽은 유다의 사체가 예루살렘의 뜨거운 태양아래 매달려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몸 안에 있던 세균들은 활발히 번식했을 것이고, 사체가 부패하면서 조직과 세포들을 파괴했을 것이다. 세균 대사의 한 부산물은 종종 가스(gas)이다. 부패하면서 생겨난 가스의 압력은 세포와 조직 밖인 복강 내부에 축적되어 높아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체는 부풀어 올랐을 것이다. 또한, 조직의 부패는 피부의 약화와 손상을 일으켰을 것이다. 유다의 사체는 부풀어진 풍선처럼 팽창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체는 땅에 떨어졌고(목매달았던 나뭇가지나 밧줄의 끊어짐으로 인해) 사체의 피부는 쉽게 파열되었고, 가스의 압력으로 배는 터졌고, 내부의 창자는 다 흘러나왔던 것이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성경 기록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 단지 두 저자가 같은 사건을 다른 측면에서 묘사하고 있었을 뿐이다. 


.참조 : Did Judas Die Twice?

https://apologeticspress.org/did-judas-die-twice-176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5/25/contradictions-how-did-judas-die 

출처 - AiG–U.S. 2009. 5. 25.

미디어위원회
2009-09-02

마태는 예수님 족보의 대 수를 잘못 계산하였는가? 

(Contradictions : Problems with Basic Math?

Was Matthew incapable of basic math in his genealogy?)

Bodie Hodge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에 의하면, 아브라함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세 번의 열네 대가 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계보에 기록된 사람들을 수는 모두 42명이 아니라, 41명이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마태복음 1장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마태복음 1:17)

이것을 논하기 전에,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절          아버지        아들  수
 아브라함(Abraham)
   2아브라함(Abraham)이삭(Isaac)   1
   2이삭(Isaac)야곱(Jacob, Israel)   2
   2야곱(Jacob, Israel)유다(Judah)   3
   3유다(Judah)베레스(Perez)   4
   3베레스(Perez)헤스론(Hezron)   5
   3헤스론(Hezron)람(Ram)   6
   4람(Ram)아미나답(Amminadab)   7
   4아미나답(Amminadab)나손(Nahshon)   8
   4나손(Nahshon)살몬(Salmon)   9
   5살몬(Salmon)보아스(Boaz)   10
   5보아스(Boaz)오벳(Obed)   11
   5오벳(Obed)이새(Jesse)   12
 다윗(David)
   6다윗(David)솔로몬(Solomon)   1
   7솔로몬(Solomon)르호보암(Rehoboam)   2
   7르호보암(Rehoboam)아비야(Abijah)   3
   7아비야(Abijah)아사(Asa)   4
   8아사(Asa)여호사밧(Jehoshaphat)   5
   8여호사밧(Jehoshaphat)요람(Joram)   6
   8요람(Joram)웃시야(Uzziah)   7
   9웃시야(Uzziah)요담(Jotham)   8
   9요담(Jotham)아하스(Ahaz)   9
   9아하스(Ahaz)히스기야(Hezekiah)   10
  10히스기야(Hezekiah)므낫세(Manasseh)   11
  10므낫세(Manasseh)아몬(Amon)   12
  10아몬(Amon)요시야(Josiah)   13
 여고냐(Jeconiah, 여호야긴, Jehoiachin)
  12여고냐(Jeconiah)스알디엘(Shealtiel)   1
  12스알디엘(Shealtiel)스룹바벨(Zerubbabel)   2
  13스룹바벨(Zerubbabel)아비훗(Abihud)   3
  13아비훗(Abihud)엘리아김(Eliakim)   4
  13엘리아김(Eliakim)아소르(Azor)   5
  14아소르(Azor)사독(Zadok)   6
  14사독(Zadok)아킴(Achim)   7
  14아킴(Achim)엘리웃(Eliud)   8
  15엘리웃(Eliud)엘르아살(Eleazar)   9
  15엘르아살(Eleazar)맛단(Matthan)   10
  15맛단(Matthan)야곱(Jacob)   11
  16야곱(Jacob)요셉(Joseph)   12
  16요셉(Joseph)요셉의 아내 마리아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심.   13


마태복음 1:17절에서, 우리는 이 구절이 세 구분(division)으로 특별히 나뉘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2.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3.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이 구절은 또한 그 구분이 누가복음 3장과 같은 족보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14대의 그룹들로 구분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나뉘어진 14 대(generations)는 무엇인가? 총합이 14 대의 각각의 합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성경의 오류가 있는 것인가? 이들의 이름과 구분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자. 거기에 그 답이 있다. 

첫 번째 구분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이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 그리고 그 사이에 12 대를 합하여 모두 14 대가 된다.

두 번째 구분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이다. 그래서 다윗이 다시 계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여고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약 여고냐도 계산에 포함되려면,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유대 사회에서 여고냐는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고냐의 이름은 거명되지 않았다. 오히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가 구분의 명칭으로 되어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여고냐(여호야긴)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왕에 있었다. 그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왕하 24:8,9). 그래서 마태가 여고냐를 바벨론 포로 이전의 하나의 완전한 세대로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여고냐를 포함하지 않고) 14 대인 것이다.

마지막 구분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이다. 여고냐는 이전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의 구분에서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여기에 포함되어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후가 더 길었다. 그의 대를 포함할 때, 여고냐에서 그리스도까지는 14 대이다.  

따라서 마태가 각 열 네 대라고 기록한 것은 전적으로 정확했다. 마태의 분류를 사용해서, 다윗은 두 번 목록에 올랐고, 그의 기록은 주의 깊은 것이었다.

 

*참조 : 마태복음의 족보는 14대, 14대, 13대 인가? – 성경의 오류? (2017. 3. 18. 기독일보)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2/16/contradictions-problems-with-basic-math 

출처 - AiG. 2009. 2. 16.

미디어위원회
2009-08-14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사라지고 있다. 

(Fertile Crescent Disappearing)

David F. Coppedge


      2009. 8. 1일 - 문명과 제국들의 탄생 장소였던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 지역이 황량해져 가고 있는 중이다. New Scientist(2009. 7. 27)는 오늘날 터키에 있는 상류의 댐들로 인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수량이 평상 시의 1/4로 감소되어 이라크가 곤경에 처해있다는 한 걱정스런 이야기를 게재하였다. 강물 수량의 감소는 이들 지역에 이미 가뭄을 초래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하류 습지들은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의 생태계 테러로부터 회복될 수 있다는 잠시의 희망적 기간 후에, 다시 한번 위협에 처해있다는 것이다.(see 06/06/2006). 과학자들은 최초의 제국들이 번성하였던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땅들이 이번 세기 안에 사라져버릴 것으로 평가하였다.



수메르(Sumer), 아카드(Akkad), 우르(Ur), 키쉬(Kish), 바빌로니아(Babylonia), 아시리아(Assyria)... 많은 위대한 제국들이 이곳에서 흥망성쇠를 반복했다. 성경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위대한 왕들과 군대들이 이 지역을 통해 진군해갔다. 커다란 도시들이 출현하였고, 쇠락하였고, 이제는 잊혀져서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기다리며 먼지 아래에 묻혀있다. 강들 사이 숲이 우거졌던 비옥한 땅들이 사막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정치적 상황이 바뀌고, 협약들이 바뀌어져서, 강들이 광대한 이라크 사막 지대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지리적 상황도 보장할 수 없다. 만약 제국들이 이곳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다른 곳에서 일어났었을 것이다.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이라크의 제한적 조치가 풀려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최초 문명의 증거들을 발굴할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진화론자들은 유럽과 아시아로 이주해온 해부학적으로 완전한 현대인이 적어도 4만년 동안 (또는 10만년이나 100만년 동안) 돌 판에 문자를 기록하지 못했으며, 도시를 만들지도 못했고, 말을 타거나, 농사를 짓거나,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다가 문화와 문명, 그리고 많은 발명들이 갑자기 BC 3,000년 경에 폭발적으로 빠르게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노아 홍수 후에 성경적 시간 틀은 그 증거들과 조화된다(창세기 10장의 민족들의 표를 보라). 사람들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서나 호기심, 예술, 언어, 문화, 발명, 종교성, 무역, 폭력, 전쟁의 증거들이 발견된다. 수메르의 최초 문자 기록은 이미 경제적 거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이미 그곳에 사회경제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음을 가리킨다. 수십 수만 년이라는 진화론적 상상의 연대를 제거해버리고, 단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살펴보라. 그곳의 기념비적인 업적들은 그들이 완전한 능력을 가진 완전한 인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9/08/fertile_crescent_disappearing/

출처 - CEH, 2009. 8. 1.

미디어위원회
2009-04-20

여호야긴이 감옥에서 풀려난 날은? 

: 예레미야 52:31과 열왕기하 25:27의 불일치는 성경의 오류인가? 

(Contradictions : Get out of Jail Twice)

Bodie Hodge 


성경의 오류로 주장되는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렘 52:31)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왕하 25:27)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 주장되는 두 성경 구절의 불일치를 하나의 ”필사 오류(copyist mistake)”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숫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숫자들은 다른 사본들로부터 필사될 때, 실수가 일어나기 쉬울 수 있다. 사실 이 주장되는 성경의 오류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제시하고 있는 책이나 인터넷 등에서의 대답은 하나의 필사 오류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필사오류라고 가정하기 전에, 이 두 구절이 말하고 있는 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두 구절에서, 어떤 부분은 동일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동일하지 않다. 그 형태는 아래와 같다 :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이 지났고,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달에 (날짜)... (다른 구체적 정보)”.

만약 날짜가 서로 다르다면, 이것은 진정한 오류가 될 수 있고, 아마도 하나의 필사 오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정보들은 매우 동일하였다. 따라서 이 경우에 이것은 오류가 아닐 수 있고, 다른 정보들은 매우 중요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이상의 다른 정보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예레미야 52:31절은 바벨론 왕이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준 것이 25일 이었고, 그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열왕기하 25:27절은 바벨론 왕이 27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말로 이 날짜들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날들은 서로 다른 날을 말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벨론 왕은 25일에 유다 여호야긴 왕을 석방하라는 포고를 내린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이 실제로 옥에서 나오는 데에 이틀이 걸렸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독자들이 언뜻 넘어갈 수도 있는 구절들까지도 훨씬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에도 어떤 죄수가 정부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아 풀려날 경우에, 실제로 그 사람이 교도소를 나오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리고 있다. 그 명령이 행정적 절차들을 거쳐야할 것이고, 서류 작업들이 이루어져야할 것이고... 등등. 그렇다면 2일의 시간은 비합리적인 기간이 아니다.     

이것은 크리스천들에게 하나의 교훈을 주고 있다. 성경의 모순이라고 주장되는 구절들이 있을 때, 우리는 먼저 성경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그 구절들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answersingenesis.org/contradictions-in-the-bible/get-out-of-jail-twice/

출처 - AiG, 2009. 3. 30.

미디어위원회
2009-02-05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모순되지 않는가? 

(Contradictions : A Time to Kill? 

Is it okay to kill, like David killing Goliath or Joshua eliminating Canaanites? )

Roger Patterson 


”살인하지 말라” (출 20:13)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출 22: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레 24:15-16)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레 24:17)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삼상 17:50)

이 명백해 보이는 모순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을 죽이는 것(killing)과 살인하는 것(murder)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살인은 생명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죽이는 것은 불법적일 수도 있고, 합법적일 수도 있다. 사형(capital punishment)의 확립은 사실 창세기 9장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약속하시면서 선언하셨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 9:5-6).

심지어 이 이전에도, 가인(Cain)은 동생 아벨을 살해한 후에 그를 죽이려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두려워하였다 (창 4:13–15).[1] 이 경우에서 성경은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항상 옳지 않은 것인지, 또는 악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인지에 관한 질문은 딜레마가 될 수 없다. 그 결정의 기준은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취해서는 안 된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에서, 죽어야만 하는 죄들은 상세히 기술되어져 있다. 레위기 19장에는 그러한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내려진 명령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명령에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이해해야한다. 성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반드시 죽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범죄가 증인들에 의해서 분명히 확인되었을 때 만이다. 

성경의 처음 5권 책들의 저자로서, 모세는 모순적인 개념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어떠한 경우에도 잘못된 것이라면, 한 사람이 사형을 집행했을 때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어떤 사람을 죽이게 되었을 때, 그도 사람을 죽였으므로 그도 역시 죽임을 당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사형시킨 다른 사람도 또한 다시 죽어야할 것이고, 인류가 한 명이 남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성경의 모순이라는 주장이 실제로는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생명을 취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허락된 많은 상황들을 제시하고 있다. 자기 방어를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출 22:2) 문제가 되지 않고 허락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의 죄를 벌하시기 위해서 그 민족과의 전쟁으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경우가 있다.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그 땅에 거주하는 민족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들의 범죄 목록은 근친상간, 아이 희생제물 등을 포함하여 레위기 18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자들에 대한 전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을 때에,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처럼, 하나님의 정의를 대행하는 자로서 그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허락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젊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정당한 것이었다. 사실,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인해 분노하였고, 전투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골리앗을 자신의 손에 부치실 것을 믿고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서 거주 민족들과 벌이는 계속되는 전쟁들 중의 한 사례이다. 

하나님은 엄청난 죄악들을 범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도전했던 민족들과 개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의 방법으로 반복적으로 전쟁과 사형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 분의 목적을 완성시키시기 위해 하나의 처벌로서 죽이는 것을 정하셨다. 

이것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 다시 한번 숙고하게 한다.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단 하나의 죄도 죽을 만큼 큰 것이다(창 2:17).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모두 사형 선고를 언도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없었다면,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사형장에 길게 나있는 죽음의 행렬에 줄서있는 것이다. 살인이나 성경에 기록된 악한 죄들을 저지른 자들은 단지 그 줄의 앞쪽에 서있을 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특히 사람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하는 어떤 상황으로 이끄는 죄들을 미워하신다. 그 분의 거룩하신 본성과 그에 따른 죄에 대한 미워하심은 매우 드문 경우에서만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생명을 취하는 것을 최소화하려고 모색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이유들이 있을 때에만 생명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창조 시에는 어떠한 이유로도 죽음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Footnotes
1. The Lord did protect Cain by placing a mark on him to prevent others from taking his life. After the Flood, things changed.

 

*참조 : Slings and stones
http://christiananswers.net/dictionary/sling.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29/contradictions-time-to-kill 

출처 - AiG, 2008. 12. 29.

미디어위원회
2009-01-21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팡이를 가지지 말아야 했는가? 

(Contradictions: A Staff or Not Did Jesus tell His disciples to take a staff?)

Stacia McKeever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태복음 10:5–10)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마가복음 6:8–9)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누가복음 9:1–3)

이 동일한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그의 12 제자들에게 긴급한 명령을 내리시고 계신다. 즉시 가서 유대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 영어 번역본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이 가지고 갈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의 불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지팡이(staff)를 가지고 가야하는가, 아니면 안 가지고 가야하는가? 이 주제는 헬라어로 기록된 원래의 사본 성경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를 연구해봄으로서 분명해질 수 있다.

마태복음에 사용된 ‘가지고(ktaomai) 라는 단어의 의미는 ”얻다 또는 획득하다(to get or acquire)”이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당장 가도록 재촉하시면서, 다른 지팡이를 구할 시간을 소비하지 말라고,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갖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필요한 것들을 제공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제자들은 수고를 들여 준비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마가는 넓은 의미의 단어인 ‘airo’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들어 올리다 또는 집어 들다(lift or take up)”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 마가는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가기를 원하셨다는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지팡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지팡이를 구하려하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갈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제자들은 신고 있던 신은 신고 가지만, 여벌의 신은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입고 있던 옷은 입고 가지만, 여벌의 옷은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가복음의 구절은 비록 마가복음에 있는 것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마태복음의 구절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몇몇 학자들은 아마도 누가는 그의 정보를 대부분 마태복음에서 얻었으며, 마가복음은 접근할 수 없었다고 제안하고 있다.) 또한 누가는 제자들은 빠르게 출발해야한다는 그리고 많은 것들을 가지고가지 말라는 생각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했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는 주님이 공급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해야했다. 


*참조 : Take It or Leave It

https://apologeticspress.org/take-it-or-leave-it-29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1/12/contradictions-a-staff-or-not 

출처 - AiG. 2009.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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