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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8-01-18

 모세의 장인의 이름은?

김홍석


   모세의 장인의 이름은 출애굽기 2:18과 민수기 10:29절에는 ‘르우엘’로, 출애굽기 3:1, 4:18, 18:1,2,5,6,12 절에는 ‘이드로’로, 사사기 4:11절에는 ‘호밥’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성경의 오류인가?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출 2:17~18)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민 10:29)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출 3:1)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출 18:1)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삿 4:11)


모세가 살았던 당시에는 이름이 개명되거나 또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우리 조상들도 정식 이름 외에 어릴 때 부르는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어서 ‘아명’이라고 했고, 또한 그 사람의 특성이나 바라는 뜻을 담아 별도로 ‘호’라고 지어 부르기도 했다. 출 2:16절부터 3:1까지의 기록을 보면 문맥의 흐름상 ‘르우엘’과 ‘이드로’는 한 사람의 이름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이 두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예들은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호수아의 이름은 호세아였는데 모세가 여호수아로 고쳐 부름으로써 그 이름이 여호수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고쳐주신 적도 여러 차례 발견되는데,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고쳐주셨다. 

그러면 사사기 4:11절의 호밥이라는 이름은 무엇인가? 개역개정, 개역한글,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등의 한글 성경들은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으로 번역하고 있고, 현대인의성경은 “모세의 처남인 호밥”으로 번역하고 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 구절에 각주를 달아서 장인은 히브리어로 처남이라는 뜻도 있고, 호밥에 대해서는 민수기 10:29절을 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어성경들을 살펴보면 

[KJV]Judges 4:11, Hobab the father in law of Moses, 

[NKJV] Hobab the father-in-law of Moses, 

[NASB] Hobab the father-in-law of Moses, 

[RSV] Hobab the father-in-law of Moses, 

[NRSV] Hobab the father-in-law of Moses, 

[YLT] Hobab father-in-law of Moses, 

[DBY] Hobab the father-in-law of Moses, 

[Webster] Hobab the father-in-law of Moses 등과 같이 대부분은 모세의 장인 호밥이라고 번역하였으나, 


[NIV] Hobab, Moses' brother-in-law, 

[ASV] Hobab the brother-in-law of Moses, 

[NLT] Moses' brother-in-law Hobab, 

[BBE] Hobab, the brother-in-law of Moses, 

[WEB] Hobab the brother-in-law of Moses 등과 같이 모세의 처남이라고 번역한 역본들로 더러 있다.


이러한 혼동은 다양한 뜻을 가진 히브리 단어의 번역 시에 일어나곤 한다. 통상 구약성경의 경우 히브리 단어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 때문이고, 신약성경의 경우는 사본들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이 구절에서 통상 장인으로 번역된 ‘하탄’이라는 히브리어는 ‘결혼시 (딸을) 넘겨주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결혼으로 친척이 되다 - 친척이 되다, 시아버지, 혼인하다, 시어머니, 사위, 사위가 되다, 사위 삼다’, 또는 ‘처남’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기록된 것은 그리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때에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민수기 10:29절에서와 같이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라고 호밥을 설명하는 문구를 넣어주고 있다. 비슷한 예로 신약에서도 이름 앞에 ‘나사렛 예수’, ‘구레네 사람 시몬’ 등 출신 지방을 수식어로 사용하여 정확히 누구인지를 알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의 오류 문제가 아니라, 번역상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는 모세의 장인이 ‘미디안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사기 1:16절은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겐 족속이 미디안 족 내의 소 부족이었거나, 정치적 동맹을 맺은 족속이었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보고 있다. 따라서 이것도 성경의 오류가 아닌 것이다.  


*참조 : Different Names, Same Person

https://apologeticspress.org/different-names-same-person-786/


*모세 장인의 이름은 르우엘인가? 이드로인가? 호밥인가? – 성경의 오류? (2017. 3. 12. 기독일보)




미디어위원회
2007-10-30

성경의 내용들이 신화인가? (Biblical Myths?)

: 오늘날 주요 신학대학에서 골격가설(Framework Hypothesis)이 가르쳐지고 있다. 

by John D. Morris, Ph.D.


      구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주 그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기억하도록 상기시키셨다. 때때로 그들의 기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가령 요단강 가운데서 취한 돌들로 쌓아올린 돌무더기와 같은 가시적인 기념물들을 세우게 하셨다. (여호수아 4:5-9). 그것은 하나님이 요단강의 흐름을 끊어 물들을 쌓이게 하시고 그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하신 것을 후손들이 영영히 기억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비상한 사건은 실제로 발생한 일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시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신화(myth)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근거해 중요한 명령들을 내리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믿음과 신뢰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극제로서 자주 사용하셨던 두 개의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기를 특별히 원하셨다. 

하나는 출애굽(Exodus) 사건으로서, 그 분의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들은 애굽(Egypt)에서 처참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출애굽을 하게 되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되어져서, 큰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자주 그들은 그 사건을 들어왔다 :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 5:15).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심지어 이스라엘 학자나 복음주의적 학자들 중에서도) 이 출애굽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세속적 고고학에 의해서 확립되어진 이집트 연대기(Egyptian chronology)와 성경적 역사가 서로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대부분의 학자들이 성경을 완전히 무시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고고학적 사실들은 성경과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아래의 관련자료 링크 1번과 그 외의 글들을 보라)

최근의 한 고고학 집회에서, 유대인 강사는 이스라엘 민족은 기록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즉각적으로 물었다. '만약 출애굽이 역사가 아니라면, 그러면 우리는 누구 입니까? 무슨 권리로 존재해야만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만약 출애굽 사건과 이스라엘 역사가 신화라면, 어떻게 그들은 그 사건들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오직 실제로 발생한 진정한 사건만이 기억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명령을 신화(문자적 진실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에 기초하여 내리셨다면, 그 백성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심지어 복음주의적 신학대학의 일부 교수들도 (얼마나 교회에 손상을 입히고, 자신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출애굽이 실제로 성경의 기록과 같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또는 비유적 표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주요 교파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부정해왔었다. 그러면서 성경의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들로 몰아붙이고 있다. 

두 번째로 반드시 기억하라고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건은 창조(creation)이다.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 새기셔서 말씀하고 있는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출애굽기 20:8,11) 이다. 마지막 날까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며,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잊어버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직접적인 불복종이다.  

(* 그 돌판은 하나님이 친히 직접 새기신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출애굽기 24:12).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출애굽기 31:18))

출애굽 사건을 믿지 않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믿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무시하고, 왜곡하고, 첨가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주요한 복음주의적 신학교들은 골격가설(Framework Hypothesis)을 가르치고 있다. 창세기는 진정한 역사가 아니라, 막연히 하나님의 개입을 나타내는 신화나 비유라는 것이다. 그러한 교사들은 네 번째 계명에 대한 순종을 바르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조 사건을 단순히 비유적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는 명백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실제 역사에서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은 신화 속에 등장하는 만들어진 신이 아니다.   


*참조 : What’s Wrong with the Framework Hypothesis?

https://answersingenesis.org/creationism/old-earth/whats-wrong-with-the-framework-hypothesis/

Problems in methods of interpretation—Genesis 1–11: Part 2

https://creation.com/problems-in-methods-of-interpretation-genesis-1-11-part-2

An Understanding of Genesis 2:5

https://creation.com/images/pdfs/tj/j11_1/j11_1_106-110.pdf

Is Genesis poetry? and Who was the father of hermeneutics?

https://creation.com/genesis-poetry-father-hermeutics

The Framework hypothesis, missionary societies and the Gospel

https://creation.com/framework-missionary-societies-gospel

From Chaos to Cosmos : A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http://www.westminsterreformedchurch.org/ScienceMTS/Science.Pipa.Framework.Critique.htm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http://hermeneutics.kulikovskyonline.net/hermeneutics/Framework.pdf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3464/

출처 - ICR, BTG, 2007. 9. 1.

미디어위원회
2007-06-09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은? 

(The world’s most dangerous book?)

Ken Ham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이것은 AiG(Answers in Genesis) 에서 발행한 글이기 때문에, 몇몇 독자들은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the Species)'을 가장 위험한 책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다윈은 세상에 침투된 모든 악한 사상들의 기초를 형성하는 한 철학을 유행시켰다. 예를 들면, 다윈의 진화론은 인종차별주의에 불을 지폈고, 히틀러는 이를 이용하여 소위 인종차별적 입장을 과학적으로 합리화했다. 과학자들은 호주 원주민들을 학살하여 박물관 표본으로 수집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이 모든 악한 행위들은 진화론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누군가 하나님은 없고, 모든 생물체들은 다윈의 책에서 기술된 것처럼 자연적 과정을 통해 진화된 것으로 확신한다면, 그러한 기원관적 신념 위에 세워진 세계관은 무신론적 철학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은 상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은 절대적 권위란 없다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옳음’과 ‘그름’ 또한 상대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한 철학은 마르크스주의(Marxism)에서 실제적으로 적용되었다. 결국 스탈린과 다른 독재자들에 의해 수천만의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그렇다. 다윈은 위험한 책들과 사상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다윈의 책이 오늘날 가장 위험한 책은 아니다.

9.11 사태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코란(Koran)이 가장 위험한 책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악한 행동을 저지른 테러리스트들과 세계적 테러리스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단지 코란이 지시한다고 믿는 바를 수행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코란의 언급을 통해 말한다. ”... 어디서든 이교도들이 보이거든 그들과 싸우며, 죽이고, 포로로 잡고, 괴롭히고, 모든 전략을 동원하여 그들을 기다리며 있어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규칙적으로 자비를 행하거든,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어라...”(9:5) 또한 ”...나는 불신자들의 마음에 공포를 불어넣을 것이다: 그들의 목을 치고 손끝을 잘라라”(8:12).

오늘날, 많은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코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슬림이 득세하는 나라에서 기독교인들이 예배할 수 있는 자유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슬람교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코란이 위험한 책임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수억 명의 사람들을 그릇된 종교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이 아니다.


정답

나는 여기에서 오해받고 싶지 않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은 사실 ....성경(The Bible)이라고 제안한다. 

베드로후서 3:15-16에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숙고해 보자. 베드로는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로 서신서들을 기록했다고 말하면서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왜곡하여)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신령한 책이고 가장 위대한 책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베드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읽어서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는 스스로 멸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관하여 몇몇 사람들이 가졌던 오해에 대하여 말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두고 어떤 이들이 비방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므로, 우리 마음이 원하는 대로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바울이 가르쳤다고 거짓 주장을 했다. 고린도서에서 바울은 몇몇 사람들이 그가 장차 일어날 일로서 말했던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서에서는 어떤 이들은 주의 날이 이미 온 것으로 바울이 가르쳤다고 주장했던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모두 성경을 억지로 풀거나 왜곡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우리의 죄인 신분과 구원의 필요성, 구원의 방법과 미래의 심판 등을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 읽으면 성경을 왜곡하여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의 예배에서도 성경이 인용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결과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다. 정통 유대교도 구약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렀고, 결국 예수를 메시야(구약성경에서 예언되고 말씀되어진)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성경은 구원받는 유일한 길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 롬10:9), 그 메시지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위험한 책이다. 결국 구원의 메시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메시지는 각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서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AiG는 단순히 창조/진화 이슈를 다루는 사역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과 교회가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하는 데에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이다.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 수십억 년이라는 시간과 진화론적 사고와의 너무도 많은 타협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세대에 걸쳐 성경을 잘못 읽도록 가르쳐져 왔다. 그러한 일이 더 많이 일어날수록, 성경의 가르침은 더 많이 왜곡되었고, 더 이상 성경을 경외하지 않는 그래서 스스로 멸망의 길로 걸어가는 젊은 세대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그것을 세상의(또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이론과 합치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겸손한 영을 가지고 성경 앞에 나와야 하며,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의 길로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8)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hermeneutics/the-worlds-most-dangerous-book/

출처 - AiG, 2002. 3. 2.

미디어위원회
2006-09-07

역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 

(Where does history begin?)

Clifford A. Wilson Ph.D 


      얼마 전에 나는 고대 역사의 어떤 기간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 책에 창조와 홍수의 신화들에 대한 참고문헌들이 포함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기뻐했었다. 그러나 나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창세기 앞부분의 장들은 실제적 역사이다. 그리고 다른 문헌들과 비교하였을 때,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창조, 타락, 홍수, 긴 수명, 민족들의 이름, 바벨탑 등에 대한 기록들은 극도로 우수한 기록이다.

바빌로니아의 창조 이야기에는 마르두크(Marduk)라는 신이 등장한다. 그는 악어 여신인 티아마트(Tiamat)를 둘로 잘라 그녀의 잘려진 몸으로부터 하늘과 땅을 창조한다. 길가메쉬 서사시(Epic of Gilgamesh)에는 바빌로니아의 노아인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이 홍수 이후 제단을 쌓고, 홍수물이 창일하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배고프고 가난한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드렸을 때, 파리 떼처럼 나오는 신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길가메쉬(Gilgamesh). 길가메쉬 서사시는 진정한 홍수 이야기로부터 많은 세부사항들을 빌려서 쓰여 있다.

키쉬(Kish)에서 발견된 수메르 왕의 목록(Sumerian King List)에는 10,000년에서 64,000년을 살았던 왕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숫자들은 아마도 잘못 번역된 것으로 보여진다. 번역가가 사용했던 60진법을 10진법에 기초한 년대로 바꾼다면, 그 숫자들은 성경적인 연대와 놀랍도록 가까워진다.

혹자는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숫자들은 년 수가 아니라 달 수가 아닌가?”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 이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3살과 5살에 아버지가 된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키쉬 목록은 홍수 이전에 살았던 왕들의 목록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 후에 훨씬 짧은 기간동안 전해져 왔다.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사람의 몸집을 작게 만든 무엇인가가 발생했다. 많은 화석들은 어떤 사건 이전에는 커다란 몸집으로 살았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도 "당시에 땅에 네피림(giants)이 있었고”(창 6:4) 라고 기록하고 있다. 거대한 사람들이 한때 살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동물들과 파충류들이 있었다.


홍수 이후의 새로운 환경적 상황

홍수 이후, 명백하게 대기와 기후 상황은 변화되었다. 그리고 모든 창조된 생물체들의 수명들은 극적으로 감소되었다. 크라머(Samuel N. Kramer) 교수와 같은 고고학자들은 바벨탑 시점에서 발생했던 분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지적하여 왔다. 저명한 알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 교수는 창세기 10장에 기록되어있는 ‘민족들의 표(Table of Nations)’가 놀랍도록 정확한 것에 대해서 책을 저술하였다. 창조와 홍수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편적인 아트라하시스 서사시(Epic of Atrahasis)는 일부 학자들에게 창세기 1-11장의 기록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literal history)로서 기록되었음을 인정하도록 하게한 원인이 되었다. 역사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성경의 기록에 대해서 신화(myth)라는 용어를(철학적 의미에서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모세 이전에 쓰여진 기록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초기 창세기의 기록들은 모세의 시기 이전에도 문자 형태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그것들을 하나로 모아서 편찬하였다). 1948년에, 와이즈만(P. J. Wiseman)은 ‘바빌로니아에서 창세기에 관한 새로운 발견들(New Discoveries in Babylonia About Genesis)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아들로서 런던 대학에서 아시리아학(Assyriology) 교수를 역임했던 도날드 와이즈만(Donald J. Wiseman)은 최근 ‘창세기에서 창조에 대한 단서들(Clues to Creation in Genesis)’ 라는 책에서, 그의 아버지의 기초 이론을 지지하며 그의 아버지의 작업을 보완하였다.

초기의 기록들은 점토판(clay tablets)들에 기록되었다. 각 점토판들의 끝은 마침을 나타내는 문자적 고안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어구는 "....의 계보(사적, 대략, 후예)가 이러하니라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KJV)”이다. (참조: 창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노아의 방주에 운반됨

이들 점토판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 의해서 방주에 실려져 시간을 건너 운반되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민족들의 기록은 파괴되었다 (후대에 단편적이고 와전되어 남게 되었다). 오직 창세기만이 우리들에게 아담과 하와에 대한 분명한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설적인 신화가 아니다. 우리들의 최초 부모에 대한 실제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기록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그 진리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Clifford Wilson, Ph.D., is perhaps best known for his archaeological studies and his book refuting Erich von Daniken’s ‘gods from outer space’ theory. He has been in charge of Psycholingusitics at Australia’s Monash University and was Professor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at the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4/i3/history.asp 

출처 - Creation 14(3):44–45, June 1992.

미디어위원회
2006-07-21

성경이 창조주의 참 계시임을 믿는 성도들의 삶 

김무현


성경이 창조주의 참 계시임을 믿는 성도들의 삶

지금까지 계속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과 인본주의 철학이라는 미명아래 성경을 창조신화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의 편견으로 기록된 역사책이나 도덕책 정도로 전락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참 진리입니다. 성경의 권위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학문과 문화, 가치체계, 도덕 기준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 그 기준을 두지 않으면, 우리의 가치관은 거짓된 이론이나 세속철학에 미혹되고, 그 삶도 세속화 해버릴 것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우리나라에는  25%정도의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하는데 사회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대형 부정/사기 사건에 교회 직분자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2%정도의 소금이 바닷물을 썩지 않고 짜게 유지시킵니다. 왜 25%나 되는 크리스천들이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할까요? 그 주원인은 이원론적(삶 따로, 신앙 따로) 가치체계 속에서 모순된 삶을 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많은 기독인들이 세상에서는 세속적 가치관, 진화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우상을 섬기며(황금만능주의 아래), 육신적으로(쾌락을 추구하며, 이기적으로) 자기 욕심만을 채우며 살고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열왕기하 17:33)

세상 사람들과 신앙인들이 도무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돈과 건물을 섬기는 모습을 봅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로마서 2:23-24)

성경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세상 속에서의 영적 전투에 임하십시오. 호세아 4:6을 묵상하십시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또는 잊은 채로, 다른 어떠한 인간이 만들어 낸 논리나 가치체계를 따르고 있지는 않은 지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세아 4:6)

호세아 6:3과 6:6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6:3,6)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빌립보서 2:13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It is God who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according to his good purpose)”고 했습니다.

[적용]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요소가 있습니까? 아니면 형식적인 예배행위나 따로 신앙으로 눈먼 제사만 드리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2:15-16에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이 세대 가운데서 두 가지 무엇을 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당신은 이웃에게 빛들로 나타내며(마태복음 5:16), 생명의 말씀을 형제, 자매들에게 밝히고 있습니까? 그를 위해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에 말씀을 더 조명해 주시고 심어 달라고, 그리고 그것을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20

구약의 마지막 예언과 하나님의 침묵,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믿을만 한가? 

김무현


구약의 마지막 예언 (The Last Prophecy of Old Testament) 과 하나님의 침묵


구약성경의 마지막 예언이 말라기 3:1과 4:5-6절입니다. 말라기 4:5의 엘리야란 누구를 말합니까?(참고 마태복음 11:10-1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말라기 3:1)

“See, I will send my messenger, who will prepare the way before me. Then suddenly the Lord you are seeking will come to his temple;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whom you desire, will come,” says the Lord Almighty. (Malachi 3:1)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라기 4:5-6)

이전에 한글 개역성경으로 말라기서를 공부할 때 말라기 3:1 말씀 때문에 혼란이 있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길을 예비하는 주님의 사자는 분명히 세례요한을 가리킬진데 새 언약을 주실 주님이 “그 전에 임하리니”라고 되어있어 왜 주님이 세례요한 전에 오신다고 잘못 예언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을 한동안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성경을 읽다가 문제의 “그 전에”라는 단어가 시간의 “before that time”이 아니라 주님의 성전(His temple)임을 깨닫게 되었고 역시 성경은 오류 없이 예언된 것임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그래서, 한․영이 같이 있는 성경을 사용하실 것을 추천합니다.) 더욱이 말라기 3:1 말씀은 예언의 이중적 조명이 내포되어 있음도 잊지 마십시오. 마지막 날에 홀연히 심판주로 재림하실 주님을 예표하기도 하니까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태복음 11:11,13,14)

마가복음 1:2-4 절에서는 신약성경이 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을 성취시키며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이사야서 40:3에도 그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마가복음 1:2-4)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이사야 40:3)

[적용 및 나눔] 신구약 중간기 400년 동안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며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침묵의 기간동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복음이 세계로 퍼지게 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즉,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한 준비기간이었습니다. 먼저 헬라제국을 통하여 문명과 언어의 통일을 이루셨고, 로마제국을 통하여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도록 길을 닦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 생애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그래서 답답해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때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훈련시키시는 기간이라는 믿음 아래, 그 역경들을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답답해하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 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습니까? 함께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믿을만 한가?

당신은 한때 서점가를 휩쓸었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의 예언에 관한 책들을 읽으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그러한 것들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갖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그 대부분의 내용은 뉴에이지 저자(New-Age writer)들에 의해서 상업적 목적으로 지극히 과장되고 왜곡되어 출판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노스트라다무스가 독일에 히틀러(Hitler)의 이름과 출현을 예언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히틀러와 가장 근소한 이름 “Ister”에 근거한 것이며, 실제로는 유럽의 다뉴브강(River Danube)의 지류인 Ister River에 관한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몹시 과장하고 부풀린 것이지요. 물론 사람이 낸 몇 가지 예언이 확률적으로 우연히 맞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예언 성취는 확률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이며, 그를 통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자를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8:21-22에 예언의 신뢰성과 관련하여, 어떻게 가짜 선지자와 하나님의 선지자를 구별 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다른 종교 경전이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 등이 성경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9

여리고 성에 관한 예언 

김무현


여리고 성에 관한 예언 (Prophecy at Jericho)


여호수아 6:26절에 어떠한 예언이 선포되었으며, 열왕기상 16:34절에 그 예언이 어떻게 정확히 이루어지는지 묵상해 보십시오.(참고: 계자=youngest son)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호수아 6:26)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열왕기상 16:34)

여호수아 6:26에 여리고 성의 정복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고 강력하게 선포하십니다. 아합 시대 벧엘 사람 히엘이 그 예언에 불순종하여 (열왕기상 16:34)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려다가, 여호수아서의 저주의 예언대로 정확히 첫째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습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까지도 강력하게 경고하시고 심한 처벌을 주셨을까? 여리고 성의 유적과 폐허는 하나님의 승리와 심판에 대한 분명한 증거로서 후대에 남겨 놓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심정은 여호수아 4:6-7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여호수아 4:6-7)

최근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한 비교종교학자가 썼다는 『예수는 없다』라는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며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비평한 책으로서, "창조나 노아의 방주나 아브라함이나 여리고 성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 구약성경은 신화에 불과하며, 만일 선하신 신이라면 구원을 여러 다른 길로 베푸실 것이지, 성경대로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으로만 한정지을 리가 없다”는 식의 내용을 설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청년들이 이러한 책을 보면서 신앙이 흔들리며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마태복음 24:4)

만일 그런 분들이 있다면 이 교재를 통하여 자신감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한 책들은 대부분 일부 근거가 희박한 사실을 원하는 목적대로 그럴듯한 논리체계로 부풀려서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마치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사람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성서 고고학의 대가 넬슨 글루엑 박사가 "성서의 기록이 고고학적 발굴에 있어서 확실히 부정된 적은 한번도 없으며 오히려 그러한 발견들은 성경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기록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라고 천명하였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밝힌바 있습니다.

다음은 예일대학 고고학자 버로우스(Millar Burrows) 박사의 고백입니다.

"자유신학자들의 성경에 대한 과도한 의심은 그에 관한 데이터를 섬세하게 분석하여 유추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이미 초월자를 전격적으로 배격하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고고학의 발견들은 성경의 역사적 기록들이 신뢰할만한 것임을 더욱 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세속학자들이나 자유신학자들은 애초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없다는 배경신념 하에서 모든 것을 조사하고 결론짓기 때문에 과연 그러한 편견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앤티적인 비평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의 신뢰성을 더욱 강하게 해 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의 고고학적 발견도 예외는 아닙니다. 1999년 『Creation Ex Nihilo Journal』에 실린 성서고고학의 대가 브라이언트 우드(Bryant Wood)박사의 논문에 의하면, 여리고 성의 고고학적 발굴들이 성경의 내용을 정확히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논문은 1900년대 초기와 중기에 독일과 영국의 탐사 팀 그리고 최근(1997) 이탈리아 탐사 팀에 의해 밝혀진 여리고 성 유적의 발굴에 관한 보고서를 분석한 내용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외벽과 내벽 두 겹으로 되어있으며(그림 참조), 외벽은 5m 정도 높이의 기초성벽(retaining wall) 위에 두께 2m, 높이 7m의 진흙벽돌벽(mud-brick wall)을 세웠으며, 내벽은 지상으로부터 높이가 14m 정도 되는 둑(embankment) 위에 다시 높이 솟아오른 내성벽(inner mud-brick wall)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난공불락의 구조를 가진 이중 벽의 성으로서 양식만 풍부하다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는 그러한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 3:15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에 도달한 시기가 추수가 거의 끝나 그 성안에 양식이 풍부한 때였음을 보여줍니다. 놀랍게도, 고고학자들에 의해 실제로 발굴된 여러 항아리들 속에 성경이 말한 대로 곡식이 가득 들어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렇게 양식이 풍부했던 난공불락의 성이 어떻게 그리 쉽게 함락되었을까?


여호수아 6:20절에 보면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비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리 에너지(acoustic wave energy)는 극히 미약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사는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독일과 영국의 발굴 팀(성경학자들이 아닌 세속학자들)은 한결같이 강력한 지진운동의 확실한 흔적들이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흔들어 벽을 무너뜨렸다는 겁니다. 혹자는, 그렇다면 지진이 우연히 자연현상으로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되묻겠지만, 그와 같이 정확한 장소에 그리고 그렇게 정확한 시각에(온 이스라엘 백성이 합하여 소리 칠 때) 땅을 흔드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으며, 그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위의 "무너져 내린지라(fell down flat)”은 히브리 원어로는 "그 아래로 무너진지라 (fell beneath itself)”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외성벽(outer mud-brick wall)이 수직으로 솟아있는 그 밑의 기초성벽(retaining wall) 바깥으로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성들은 바깥에서 사다리를 올려놓고 밀고 들어오는 침입자들에 의해 안쪽으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쪽으로 무너지면 그 무너진 돌들을 밟고 내려가  그 성을 정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 성을 함락할 만한 사다리도 갖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외성벽이 안쪽으로 무너졌다면 5m나 되는 수직 기초성벽을 올라갈 방도가 없었을 것입니다. 발굴 팀의 조사에 의하면 여리고 성은 특이하게도 기초 성벽 위의 진흙벽돌(outer mud-brick)들이 모두 그 아래의 기초성벽 바깥쪽으로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 무너져 내린 진흙벽돌들이 완만한 경사면(ramp)과 같은 역할을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계단처럼 쉽게 밟고 올라가 그 성을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도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6:5절에 보면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라고 되어있고 또한 6:20에도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The people went up into the city, every man straight before him(straight up and over)"(Joshua 6:20)라고 증거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독일 발굴 팀의 보고서에 의하면, 북방의 외벽에는 집들이 그 벽에 붙여져 지어져 있었는데, 오직 한 부분만이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라합의 집이 외 성벽에 붙어 지어져 있었으며 여리고 정복 시 라합의 가족들은 집 속에 들어가 살아남았다고 되어 있습니다.(여호수아 6:22) 아마 그것이 라합이 살던 곳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또한, 여호수아 6:24에 보면,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라고 되어있습니다. 발굴 팀에 의하면 땅을 파고 들어가면 1m 정도의 두께나 되는 탄재와 그 흔적들이 나오는 층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가장 특이한 사실은 그 탄 것들 중에 곡식이 가득 담긴 저장 항아리(storage jar)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만약 가나안 전쟁을 계속 치러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중요한 군량미를 다 태워 없애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고 상식적으로 난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에 대한 해답이 정확히 나와 있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여호수아 6:17-18)

즉 여리고 성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100% 하나님께서 하셨고 그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즉 우리가 취한 것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쟁을 호르마(Hormah; dedicated by complete destruction)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역대하 20:15)

그와 같이 항아리에 가득 담긴 채 남아있는 탄 곡식의 유적은 성경이 모두 역사적 사실대로 기록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들을 분명히 후세에 남겨놓고 싶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의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세속 성경 비평학자들의 근거 없는 주관적 역사해석에 조금도 흔들리지 마십시오(그 세속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도, 많은 경우, 오차가 있는 탄소 동위원소법에 의한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그 진리가 사실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전에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 앞에는 어떠한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성벽을 무너뜨리실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3)

*참조 :  고고학으로 증명된 여리고 성의 기적 (youtube  동영상)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8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

김무현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King Cyrus)


여기서 참 이상한 의문점이 생깁니다. 왜 이방의 왕인 바사왕 고레스는 아무 대가도 없이 오히려 보호까지 해 주면서 유대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을까요? 자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을 믿는 유대백성들이 언제 다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다니엘의 영향력 때문이었을까요?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정독하며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십시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예레미야 25:1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예레미야 29:10)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4:26-28)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45:1,2,13)

만약 고레스 왕이 위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들을 보았다면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성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말씀으로부터 바벨론 성을 공략할 때 성 주위의 물을 마르게 하신 것(이사야 44:27)과 놋쇠 문을 열어놓아(이사야 45:2) 그 난공불락의 성을 정복케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까지 정확히 부르시며 “그(고레스)가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45:13).” 하시는 예언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경악했을 것입니다. 고레스 왕 때로부터 약 200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부르시며 자기가 이루었던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예언하셨음을 보고 그 하나님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고레스가 그 때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언들과 그것들의 성취를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를 거부하십니까?

역대하 36:22-23와 에스라 1:1-11에 고레스에 관한 그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에스라 1:1-3,7)

유대 사람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돌려보내는데 무슨 대가나 조건이 있었습니까? 위의 예언들의 이중적 조명을 고려할 때, 고레스는 결국, 죄의 권세아래 종 되었던 우리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그 피로 구속하시고, 그 결과로 우리를 사단의 결박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니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역대하 20:6)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재로, 고레스 왕의 치정과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축하라는 칙령(decree)이 새겨진 돌기둥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아직도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우신 능력을 한치라도 의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7)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7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대한 예언

김무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Northern Israel and Southern Judah)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다음의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에 관한 예언과 그의 성취에서 또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서 7:8-9을 읽어보십시오.

육십 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여기서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예: 호세아 4:16-17, 이사야 7:1-2). 이 예언은 아하스 왕 2년에(이사야 7:1, B.C. 734) 선포된 것으로 그로부터 65년 후인 므낫세 왕 22년에(역대하 33:11, B.C. 669) 그대로 성취됩니다. 먼저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고(B.C. 722) 그 후 앗수르는 민족과 종교의 혼합정책을 실시하여(열왕기하 17:23-24) 이스라엘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이 정책은 그 후 계속 진행되어 B.C. 669 앗수르의 오스납발(Ashurbanipal) 왕(에스라 4:9-10)이 수많은 이방 민족을 사마리아에 이주시킴으로써 이사야서에 예언된 것처럼 다시는 북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회복되지 못하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바벨론 유수 기간 중 그 정체성을 보존하고 다시 돌아와 성전과 국가를 회복한 유다와 비교됩니다. 신약시대에 왜 유대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호세아 13:16)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1:6-7)

성경은 또한 유대의 멸망에 관해서도 예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유배되어 있다가 해방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언하고 있습니다(예레미야 25:11, 29:10). 특히 이 멸망을 선포하시며(열왕기하 22:16-17) 아직도 불순종하는 유대백성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예레미야 29:11~14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2-13)

유대의 바벨론 유수는 BC 605년 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투(예레미야 46:2)에서 패한 여호아김 왕 때의 1차 포로로 시작됩니다. 그 후 BC 536년 스룹바벨을 인도자로 한 1차 귀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기간이 정확히 70년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성경이 하나님(성령님)의 말씀대로 오류 없이 기록된 책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시고 그 후에 이루시는(요한복음 13:19) 과정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이나 천상 예배 등의 소망을 확신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다니엘 5:21하)

스토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니엘 9:2을 읽어보십시오. 바벨론 유수의 70년이 거의 마칠 무렵에 1차 포로 때 청년으로 잡혀왔었던 다니엘도 이제는 많이 늙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읽던 도중, 그 25:11, 29:10 말씀을 발견하고는 그 70년의 연수가 거의 차서 이제는 드디어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향할 때가 가까이 왔구나(예레미야 29:14) 하고 흥분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 다니엘은 타락과 불순종으로 나라까지 잃었던 유대백성에 대해서 이렇게 다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니엘의  유대 민족을 위한 그 중보기도가 9장에 나옵니다.

당신은 다니엘과 같이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 회개하는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다니엘의 자기백성에 대한 중보기도를 기뻐 받으신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유대민족의 장래에 관한 칠십 이레의 놀라운 비밀을 계시하여 주십니다(다니엘 9:21~27). 이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바벨론 유수 기간 중,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메대-바사 연합국에 의해서 B.C. 539년 바벨론은 멸망하고, 유대민족은 B.C. 536년 1차 귀환이 이루어지기까지 바사(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됩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19:140) (Your promises have been throughly tested, and your servant loves them.)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6-07-15

마지막으로 성취될 예언

 : 예수님의 재림, 요시아 왕에 대한 예언 

김무현 


마지막으로 성취될 예언 : 예수님의 재림 (The Final Prophecy To Be Fulfilled: The Christ's Return)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재림이나 마지막 때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저 상징적으로 막연하게 또는 조금 부정적인 시각(이단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 부분을 강조함으로)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성경과 우리의 믿음의 절정(climax)이며 모든 예언들의 마지막 성취이며 이 땅 위에서의 삶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과 영생에 관한 소망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성경이 얼마만큼 증거하고 예언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 성경은 30구절 당 1번 정도의 빈도수로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 신약의 총 216장(chapter) 중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이 300번 이상 기록되어 있습니다.

• 27권의 신약 중 단지 4권만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인용이 없습니다. 신약전체의 1/20정도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됩니다.

• 구약의 선지서들뿐만 아니라, 욥기, 모세 오경, 시편 등에도 마지막 때와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 예수님 자신도 재림에 대하여 빈번히 말씀하셨습니다.


요시아 왕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King Josiah)

열왕기상 12장에서는 여로보암이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신상들을 만들어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어느 익명의 선지자를 보내어 여로보암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선포하십니다. 즉 열왕기상 13:1-2에는 먼 훗날 요시아의 탄생과 그의 생애에 일어날 사건들에 관한 예언이 나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열왕기상 13:1-2)

이것은 요시아가 탄생하기 300년 전인 약 B.C. 930년에 예언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시편 139:16). 특별히 그 이름까지 정확히 부르시면서 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주관하시는 그분은 그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간의 사건들을 다루십니다. 그분의 뜻은 예언된 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작은 머리로 그분을 판단하려 하며 그분 앞에 무릎꿇고 굴복하기를 거절할까요? 왜 그분을 창조주로, 역사의 주관자로, 왕 중의 왕으로 높이지 않는 것일까요?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46:9-10)

열왕기상 13:1-2의 예언은 300년 후 열왕기하 23:15,16,20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어떻게 그 예언들이 성취되는지 정리해 보십시오.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열왕기하 23:15,16,20)

특히 열왕기하 22장에서는 그 동안 분실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분실되었다니 참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 그 시대의 혼탁한 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요시아의 개혁의 의지에 대해 기술한 23장 내용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요시아의 개혁은 느헤미야의 개혁과 어떤 점에서 유사하며 또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오늘날 우리 주위의 영적 상황은 어떠합니까? 요시아의 개혁이 오늘날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이러한 영적 부흥과 삶의 변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출처 - 도서 `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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