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죽었는가?
(Did Plants Die Before Adam Sinned?)
Dr. Kent Hovind
젊은 지구론을 비판하는 휴 로스(Hugh Ross)같은 오래된 지구론자들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도 죽음(death)이 있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담이 식물들을 먹을 때에 식물들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죽음이 있었는지를 결정하기 이전에, 우리는 생명(life)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할 필요가 있다. 식물들은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도 없고 '피(blood)'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과 동물들이 ”죽는(die)' 것과 같은 의미로 죽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식물을 사람과 동물들에게 먹을 거리로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29-30)
”....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8)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동물들을 사람의 먹을 것으로 추가하여 주셨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창 9:3-4)
'생명(life)'은 피에 있음에 주목하라. 식물은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또 다시 언급되어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레 17:11)
하나님은 가인이 땅의 소산인 식물(plants, fruits of the soil)로 드린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으나, 아벨이 양(lamp)으로 드린 제물은 열납하셨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창 4:3-5)
식물과 관련된 구절들에서 ‘피’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식물들은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죽지 않고, 시들고, 마르고, 쇠잔한다고 표현되어있다.
”... 저희는 마치 들의 풀 같고 나물 같고 지붕의 풀 같고 자라기 전에 마른 곡초 같으니라” (왕하 19:26)
”...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르느니라” (욥 8:1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 37:2)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시 104:14)
생명은 땅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동물들은 항상 같은 종류의 부모들로부터 생겨난다.
”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사 42:15)
”...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렘 12:4)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creationtoday.org/plant-death/
https://answersingenesis.org/death-before-sin/was-there-death-before-adam-sinned/
시간과 공간 내에서의 복음
: 더 높은 차원과 기적, 그리고 인간의 한계
(The gospel in time and space)
Russel Grigg
현대과학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3차원(길이, 폭, 높이)이 실재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개념에 어려움이 없다. 이를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원에 거하시며(사 57:15), 하늘에 거주하시고(예, 신 26:15), 또한 빛에 거하신다고(딤전 6:16) 말해준다. 편의상 우리는 이것을 합하여, 하나님이 하늘의 차원 또는 영원의 차원에 거주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3차원 공간(길이, 폭, 깊이)과 1차원 시간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1]
비록 하나님이 영원의 차원과 우리가 사는 우주에 편재하시지만(모든 곳에 존재하시지만), 그분은 또한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타나셨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령은 창조시에 물 위를 이동하셨으며(창 1:2), 여호와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출 3:4-14), 아들 하나님은 성육신 하실 때에 영원의 차원을 떠나서(요 1:1-2, 빌 2:5-7)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세상으로 들어오셨다(마 1:18, 눅 1:35, 요 1:14).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문이 닫힌 방에 두 번 나타나신 것이 포함되며(요 20:19-30), 승천하실 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세상을 떠나셔서 하늘의 차원으로 돌아가셨다(요 20:17, 행 1:9).
이 글의 목적은 평지(Flatland)의 우화를 이용하여 이들 현상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에 있다. [2]
평지(Flatland)
길이와 폭을 가지며 높이가 없는 2차원의 땅을 생각해 보자. 이를 평지(Flatland)라 부르며 그림 1에서 ABCD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 O안의 ▲로 표시된 지적인 존재가 살고 있는데, 그들 모두는 역시 2차원만을 점유한다. 어느 날 평지의 사람이 일어나 보니까 누군가 미지의 사람이 자기들 땅을 가로질러 선 EF를 그려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들의 나라를 사실상 두 개로 갈라놓았다. 왜냐하면, 높이의 차원이 없는 경우에는 아무도 그 선을 뛰어 넘거나 그 밑으로 터널을 뚫거나 하여 다른 쪽으로 건너갈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의 이쪽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저쪽에 있는 사람과 정보를 교환할 수 없다. 따라서 EF는 사상(事象)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다(부록1. box 안의 글을 보라). [3]
어느 날 ABFE 영역에 어떤 모양(발자국의 외곽선)이 나타났는데(그림 2), 평지사람이 생각하는 한 그것은 분명히 저절로, 그리고 아무 원인이 없이 생겨난 것이다. 다음번에 그 모양이 다시 나타났을 때, 평지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 주변에 선을 그렸다(그림 3). 2차원에 사는 평지사람들에겐 이것이 사상의 지평선이었으며, 이는 원으로 둘러싸인 영역에서는 밖으로 아무것도 나갈 수 없고 그 안으로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의 일부를 제거하고 조사해 보았을 때 그 모양은 사라졌다. 이제 평지사람들은 세 가지의 상황을 처리해야 한다 :
1. 그 모양은 아무런 원인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2. 그 모양은 사상의 지평선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았다.
3. 똑같은 사상의 지평선이 평지사람들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이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낸 사람은 별난 성격을 가진 Zweisteinus 박사이다. 그는 먼저, 평지사람들에게 그들이 과학적 물질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상기시켰다. 즉, 그들은 평지의 2차원이 일반적으로 현실을 표현하는 전부라고 믿었으며, 그들의 생활양식은 이러한 비진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평지는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니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양은 그들이 알고 있는 길이와 폭이라는 2차원 이외에 최소한 세 번째 차원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지적해 준다고 말한다. 그는 이 세 번째 차원을 ‘고도’ 또는 ‘깊이’ 또는 ‘높이’라고 했다.
그는, 발바닥 모양을 만들었던 3-D의 존재는 2-D의 감옥(2-D의 사상의 지평선) 위로 발을 옮겨 놓는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이 거기로 들어가기도 하며 나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3-D의 존재는 2-D의 평지사람들이나 구속시키는 2-D의 장벽에 못 들어가거나 못나올 수 없다. ‘2차원은 3차원의 인질을 잡아두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낮은 차원의 사람들에게는 그 이외의 차원이 있어야만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2] 따라서 3-D의 존재는 평지에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나타낼 수 있으며, 평지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상세히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다른 평지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내부 ▲까지도 볼 수 있다.
이제 차원 이론(dimension theory)이라는 이 개념을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 사건과 관련시켜보자.
창조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공간과 시간의 밖에서, 그리고 그것(공간과 시간)들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 즉, 말씀(Logos)의 마음 가운데 존재했다(요 1:1, 그리스어 logos = 말씀). 즉, 모든 창조는 ‘창세전에’(엡 1:4, 벧전 1:20)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존재했으며, 따라서 영원의 차원에 존재했다. 하나님은 창조를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정보(및 능력)를 사상의 지평선을 통해, 각각의 양 또는 분량만큼씩, 창세기 1장에 기록된 6일에 걸쳐 보내셨는데, 이 사상의 지평선은 영원과 공간-시간을 가르는 것이다.
아담이 만들어지고 그가 죄를 짓기 전까지 그는 (차원적으로 말할 때) 혼성물(hybrid)이었다. 에덴동산에서 그는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걸었으므로, 따라서 그는 여러 차원의 영원에 대한 일부를 체험하였으나, 그는 역시 공간-시간 안에 존재했다. 그가 하나님께 불복종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그로 하여금 죄를 지은 상태로 생명나무를 먹고 영원히 사는 것을(창 3:22; 3:24) 막으셨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졌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다시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셨다. 아담의 죄가 인류로 하여금 하늘의 차원에 도달하게 하는 사상의 지평선을 닫아버린 반면, 죄 용서하심은 이 사상의 지평선을 열어놓는다. 이 용서는 죄의 값을 치러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온다. 이것은 오직 각 개인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는데(요 1:12; 17:23), 아담이 원래 가졌던 것보다는 훨씬 못 미치지만, 다음 세상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연합할 것이다.
부활 - 예수님이 나타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을 때, 그분의 부활하신 육체는 이 공간-시간 세상을 떠나셔서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가셨는데, 수의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통과하셨다.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딴 곳에 감겨져 있어서(즉, 여전히 감긴 채, 시체를 썩지 않게 처리하는 데에 사용하는 몰약과 향료의 끈적거리는 혼합물로 인하여 뻣뻣한 채로), 사도 요한은 이를 보고 부활을 믿었다(요 19:39-40; 20:7-8). 비록 요한은 차원 이론을 몰랐을 테지만, 그는 사실상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초월하셨다는 것을 실감했다. 평지에서의 발자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는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전적으로 금지된 사상의 지평선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문이 잠긴 방에 나타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실 수도 (예를 들면, 엠마오 도상에서처럼) 있었다.
승천하실 때(행 1:9) 예수님은 공간-시간과 천국의 사이에서 사상의 지평선을 통과하셨다. 지금은 신자들이 기도를 할 때에, 믿음에 의해 신자들에게 거하는 성령을 통하여, 올라가신 주 예수님께 다가간다(요 14:16-17).
천국과 지옥, 그리고 심판
사람이 죽을 때 그의 혼(soul)과 영(spirit)은 죽음이라는 사상의 지평선을 통과하여 이 공간-시간의 세상을 떠난다. 이것이 공간 및 시간이 끝나고 시간의 초월이 시작하는 경계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죽음 이후에는 천국 및 지옥과 다가올 심판이 있다고(히 9:27)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심판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이 세상에서의) 믿음에 근거하여, 우리가 최후에 천국으로 갈 지 지옥으로 갈 지를 결정한다. 천국과 지옥과 마지막 심판은 모두 영원의 차원 안에서 존재하고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모두 사상의 지평선 뒤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부록1 참고), 과학으로는 절대로 알아낼 수 없다.4) 그러나, 이것은 그것들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개념은 완벽하게 과학적이며, 그것들은 사실상 최고의 현실이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물질주의적 신조, 즉,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공간-시간 연속체가 유일한 실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합리한 것으로 보인다. 회의론자와 무신론자 등의 사람들은 위험을 각오하고 이것을 무시한다.
References and notes
1. As our space-mass-time universe (sometimes called the space-time continuum) was created by God, He is therefore beyond or transcendent to it—i.e., not subject to its limitations (Genesis 1:1).
2. Adapted from A.E. Wilder-Smith, The Scientific Alternative to Neo-Darwinian Evolutionary Theory, Word for Today Publishers, CA 92704, USA, pp. 159–191, 1987. Used with permission.
3. Note that black hole event horizons are one-way, while the Flatland event horizon is two-way.
4. God, on the other hand, is omnipresent and intimately aware of all that we say and do (cf. the 3-D being vis-a-vis the Flatlanders). He is ‘nearer than breathing, closer than hands and feet.’ See Psalm 139:7–14.
(부록 1) 찬사 (A tribute)
여기서 제시한 평지(Flatland), 가외의 차원(extra dimensions), 사상의 지평선(event horizon) 등의 개념은 1987년에 고(故) 와일더 스미스(Arthur E. Wilder-Smith) 박사-교수(1915-1995)가 쓴 책, The Scientific Alternative to Neo-Darwinian Evolutionary Theory에서 나온 것이다.
와일더 스미스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그의 동년배 가운데 거물로서, 세 개의 박사 학위를 얻었다. 7개 국어를 마스터한 그는 또한 창조과학에 대한 최초의 사상가이며 위대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타 잘 알려진 그의 작품으로는, Man's Origin, Man's Destiny, He Who Thinks has to Believe, The Creation of Life, The Natural Sciences Know Nothing of Evolution 등이 있다.
평지(Flatland)에 대한 생각은 (비록 기독교인들이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1884년에 에드윈 아보트(Edwin Abbott)가 Flatland: A Romance of Many Dimensions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주장했다.
(부록2) 다차원과 하나님 - 경고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차원 이외에 또 다른 차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성경적인 개념을 보다 확실하게 해주는 흥미로운 방법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때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순간마다 변화하는 관점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등 생각이 지나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급진적인 창조론자’(그들 역시 와일더 스미스의 ‘평지’ 개념을 종종 사용한다)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확하게 10차원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며, 이 발견은 다소간 성경을 확증해준다고 생각하게끔 하고 있다.
첫째로, 이것에 관하여 얘기해 주는 성경적 가르침은 없다. 둘째로, 이 불확실한 관념은 끈 이론(string theory)라고 하는, 고도로 추상적이며 이론(異論)이 분분한 분야의 물리학에 근거한 것이다. 이 이론은 11차원을 가정하는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 이론 역시 실험적인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론의 제안자에 따르면, 이들 가정상의 차원 중 일부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상당히 작은 공간으로 말려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이 사고(thinking)에 있어서 오늘날의 과학(예를 들어, ‘빅뱅’, 10차원 등등)과 결혼한다면 내일은 홀아비/과부가 될 것이라는 말이 맞다.
(부록 3) 블랙홀과 사상의 지평선
우주비행사들이 달에 갔을 때, 그들의 우주선은 속도가 소위 탈출속도라고 하는 11.2km/sec(25,000mph) 이상이어야 했다. [1] 그래야만 지구의 중력이 잡아당기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질량이 충분히 큰 항성을 생각해 보자. 그 중력이 매우 커서 탈출속도가 빛의 속도인 300,000km/sec (186,000 miles/sec)이 되기 전까지는 중력 붕괴(천체가 중력의 작용으로 수축해 가는 현상)를 받는다고 생각하자.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원리로 예측해 보면 그러한 영역에서는 공간이 매우 만곡되어 빛이나 혹은 그 아무것도 탈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항성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따라서 근처에 있는 물질에 미치는 중력의 영향으로만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블랙홀이 될 것인데,[2] 스테픈 호킹(Stephen Hawking)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중력이 매우 강해서 그것으로부터 심지어 빛까지도 탈출할 수 없는 공간-시간의 영역” [3]
빛의 광선이 밖으로부터 블랙홀 근처로 향한다면, 블랙홀의 중력 인력에 의하여 편향될 것이며, 아주 근접한다면 블랙홀 주변의 궤도로 들어올 것이다. (그것이 블랙홀로 향한다면, 흡수될 것이다.)
블랙홀의 경계, 즉, 외부로부터의 빛이 궤도로 들어오는 곳, 또는 블랙홀 안으로부터 빛의 광선이 탈출하기를 실패하는 그곳을 사상의 지평선이라고 한다. [4, 5] 그것은 블랙홀 주변의 돌아오지 않는 점을 나타낸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어떤 사상의 발생이라도 전달할 수단이 없으므로, 아무런 사상도 이 영역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랙홀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그 밖에 있는 관측자가 알 수 없으므로 과학으로는 알 수 없다. 이런 현상을 ‘우주의 검열(censorship)’이라고 한다.[6]
References and notes
1. 탈출속도란 동력이 없는 물체가 행성 또는 항성의 중력장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속도이다. 그것은 다음 식ve = √2GM/R 로 주어지며, 여기서 G는 만유인력상수이고, M은 행성 혹은 항성의 질량이며, R은 그 반지름이다.
2. ‘블랙홀은 단순한 이론적인 개념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수많은 실험적 증거로서 뒷받침 된 일반상대성으로부터 직접 예상한 것이다.’ Russell Humphreys, Starlight and Time, Master Books, CO. 80936, USA, 1994, p. 22.
3. Stephen Hawking, A Brief History of Time, Bantam Books, London, 1988, p. 194.
4. Ref. 3, p. 90.
5. 블랙홀 주위의 사상의 지평선의 반지름을 Schwarzschild 반지름이라고 하며, 다음 식 RS = 2GM/c2로 주어진다. 여기서 c는 진공에서 빛의 속도이다. 그것은 독일의 천문학자 Karl Schwarzschild(1873-1916)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1916년에 방사능을 방출하지 않는 붕괴된 항성체의 존재를 예측했다. 만약 태양이 블랙홀로 붕괴된다면 그 사상의 지평선의 반지름은 3 km(2 miles)밖에 안될 것이다.
6. Ref. 3, p. 93.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1/i2/gospel.asp
출처 - Creation 21(2):50–53, March 1999.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정보 이론적 접근
(Information Theoretic Approach to Providence of God)
요지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방식이 물리적(physical)이며 모든 정보(information)는 양자 상태(quantum state)로 표현 된다"라는 가정 하에 우주 내의 모든 물질이 얽힘 상태(entangled state)로 존재한다면 시간적, 공간적 제약 없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가능함을 보인다. 이는 얽힘 상태를 이용하여 선택내용의 결과가 공간적, 시간적 제약 없이 전달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양자역학의 중요 정리인 삭제 불가정리(No deleting Theorem)와 복제 불가정리(No cloning Theorem)에 따라 얽힘 상태의 수를 감소시킬 수도 증가시킬 수도 없음을 살펴본다. 이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무지(無智)의 이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설명할 수 있는(실제와 매우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법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Abstract
We assume that Providence of God might be physical and every information is expressed in the quantum state. Under the assumption, if everything in Universe exists in entangled state, we find that God can control everything without any limitation. It implies that the result of selection can be transmitted by the entangled state, without spatial and temporal limitation. We can see that ,according to No deleting theorem and No cloning theorem, there cannot be any change in numbers of entangled state. It means that even in our ignorance there exists an method to explain Providence of God.
출처 - 창조과학 학술지 2005 제2권 제1호 PP. 11-15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263
참고 :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기적을 설명해보려는 과학자
(Scientist Tries to Explain Away Miracle of Jesus Walking on Water)
David F. Coppedge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다. 회의론자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훼손시키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는 계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올 해 들어 첫 번째 시도가 플로리다 주립대학(Florida State University)의 도론 노프(Doron Nof)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떠다니는 얼음 조각(an isolated patch of floating ice) 위를 걸었다고 주장한다. 갈릴리 호수(Sea of Galilee)는 극히 드물게 일부분이 얼음 층(sheets of ice)을 형성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이 얼음 위를 서있는 것을 물 위에 서있는 것으로 제자들이 착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해수면 아래에서 얼음 층이 형성되는 상황은 오늘날에는 거의 발생하지 않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30~160년 만에 한 번 꼴로 발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그는 추정하고 있다. The Guardian(2006. 4. 6) 지의 보도를 보라. 이 이야기는 JPL을 포함하여 많은 신문 뉴스들에 게재되었다..
어찌하여 과학자들은 이러한 그들의 괴상한 과학 이론을 기독교인들이 반대 없이 그냥 앉아서 받아들여주기를 기대하는가? 그러면서 진화론이라는 그들의 괴상한 과학 이론에 누군가가 도전하면 편집증적인 반응을 보이며 소송을 하겠다고 위협을 하는가? 이 가설은 너무도 우스꽝스럽다.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기 위해서, 이 장면을 헐리우드의 어떤 영화배우가 재현한다고 상상해 보자.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배우는 불안정한 얇은 얼음 조각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애를 쓰며 서있다. 제자들의 역을 맡은 배에 있는 배우들은 그들의 지도자가 얇은 얼음 조각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흔들흔들하며 애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경외스러운 느낌을 갖는 것처럼 표정을 지어야 한다. 갑자기 그가 비틀거리며 미끄러져 풍덩 빠진다. 무서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배우들이 갑자기 우하하 웃어버린다. 컷!
두 번째 장면.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얼음 위의 배우는 그의 발 받침대를 유지하고 서있다. 베드로 역을 맡은 배우가 배에서 뛰어 내린다. 그러나 그의 얼음 판은 그의 발 아래에서 미끄러져 버린다. 그는 물 속으로 풍덩 빠져 버린다. 다시 다른 배우들이 우하하 웃는다. 그는 얼음 판 위에서 수영하다가 점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소리를 지른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얼음 위에 있던 배우가 물 속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리려고 하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져 풍덩 둘 다 물 속으로 빠져 버린다.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론 노프는 전에도 홍해가 갈라진 것을 설명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성경의 기적을 완전히 자연적인 현상으로 해석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신뢰할만한 목격자들의 말을 믿는 것보다 더 많은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을 믿고자 한다. 다음 번에는 예수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하신 것은 특수 효과였다고 말할 것이다.
*관련기사 : 예수 그리스도 얼음 위를 걸었다? (2006. 4. 6. 전북일보)
https://www.jjan.kr/article/20060405182917
예수가 걸은 것은 물이 아닌 얼음? (2006. 4. 5.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060405/8292610/1
예수 그리스도 물 위가 아니라 얼음 위를 걸었다? (2006. 4. 8.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06040576018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6/04/scientist_tries_to_explain_away_miracle_of_jesus_walking_on_water/
출처 - CEH, 2006. 4. 4.
곤충의 다리 숫자에 관한 성경 기록은 오류인가?
(Four Legs Good, Six Legs Bad : An Entomological Error?)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찌니, 곧 그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레위기 11:20-23)
”All fowls that creep, going upon all four, shall be an abomination unto you. Yet these may ye eat of every flying creeping thing that goeth upon all four, which have legs above their feet, to leap withal upon the earth ; Even these of them ye may eat; the locust after his kind, and the bald locust after his kind, and the beetle after his kind, and the grasshopper after his kind. But all other flying creeping things, which have four feet, shall be an abomination unto you.” (Lev. 11:20-23)
곤충(insects)은 다리가 넷이 아니라 여섯이고, ‘조류(fowl)’는 다리가 둘 이므로, 위의 성경 구절은 오류인가? 성경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fowl’을 ‘조류’로 해석하지만, 20절과 21절의 원래 단어 ‘owph‘ 는 날개가 있는 생명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곤충을 뜻한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이라는 구절을 시적 표현쯤으로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나은 그리고 더 정확한 해석이 있다.
명백히 메뚜기의 커다란 뒷다리(big back legs)는 나머지 다리들과 같은 의미의 '발(feets)'들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동물농장(Animal Farm)' 에 유사한 예가 있다. 돼지 스노우볼(Snowball)은 인간을 동물농장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Four legs good, two legs bad)” 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는데, 거위와 다른 새들이 자신들도 다리가 두 개라고 반대하자, 스노우볼이 (영화에서보다 소설책에서 더 명확히) 설명하기를, 동물사회에서 새의 날개는 몸을 움직이는 사지이고, 인간처럼 조작을 하는 팔이나 손이 아니므로 다리로 간주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 위의 레위기 본문을 다시 살펴보면 ‘뛰는 다리(발 위의 다리, legs above their feet)’를 별도로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리이긴 하지만 단지 '발'의 기능만 하는 '네 개의' 다리와는 다른 의미의 다리인 것이다. 즉, 두 가지 종류의 다리가 있는데,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데 이용되는 다리와 (본문에서는 '다리'라 하지 않고 '발' 이라고만 되어있다 (20, 21절)) '뛰는 다리(21절)'가 그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메뚜기와 그 유사한 곤충 (우리는 여기서 '딱정벌레(beetle)'를 '귀뚜라미(crickets)'로 해석한다)의 두 개의 크고 뛰어오르는 뒷 다리가 수직으로 운동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돌아다니는데 사용하는 나머지 네 다리와는 별도로 취급하였음이 분명하다.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그렇다면 대안은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께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여 이것들을 먹게된 사람들) 곤충들이 6개의 다리를 가지는 것을 몰랐다고(못봤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메뚜기를 먹기 전에 모두 눈을 감았을런지도 모른다(?).
(어떤 회의론자들은 이 지적에 대하여, 이런 곤충들은 때때로 발견하기도 힘들고, 일부 곤충들은 수 십 년 동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레위기의 저자가 잘 몰랐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전인수격의 헛소리는 바르게 지적해줄 필요가 있다. 이런 종류의 곤충들이 어느 기간동안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으며, 고대 사회에서 레위기의 저자라면 당연히 오랜 경륜의 소유자였을 것이므로, 이미 이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우연히 메뚜기를 볼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다거나, 그가 메뚜기의 다리 숫자를 알지못할 만큼 똑똑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어떤 회의론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 중에서도 일부는 곤충의 다리가 여섯 개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11명 중에서 8명이 정답을 맞추었는데, 이중 2 명은 맞추기는 했지만 자신이 없어했고(아마 십중팔구는 질문자가 어리석은 질문으로 자신들을 놀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2명은 모른다고 했고(아마도 종잡을 수 없는 회의론자의 변덕에 휘몰려봤자 더 좋을 것이 없다는 의미로), 1 명은 다리가 여덟 개라고 완전히 틀리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설문조사는 일부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과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증명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이 아이들이 반찬으로 곤충을 먹는지, 그리고 히브리 사람들처럼 늘 곤충을 대하고 살았는지도 의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조사는 적절치 않다.)
미심쩍어하는 독자들을 위한 메모
* 여기서 사용된 성경은 King James Version (KJV)이다.
*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 (all other flying creeping things, which have four feet, 11장 23절)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부분의 독자들은 유추를 통하여 알아낼 수 있겠지만, 일부 독자들에게는 답변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날개 달린 많은 곤충들의 뒷부분에 있는 한 쌍의 다리는 뛰어오르거나, 이륙하도록 특별 제작되어서 다른 4 개의 다리와는 다른 기능을 보여준다. 이 세상의 몇백만 종이나 되는 곤충들로부터 단지 소수 (6개)만을 선택하고, 이들이 레위기 11장 23절의 말씀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해 보이는 듯하다. 꿀벌의 예를 들어보자. 여기 꿀벌의 해부학적 구조에 관한 인터넷 사이트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http://www.captted.com/bees/beemanual/cb05.htm). 꿀벌의 뒷다리는 나머지 네 다리와 전혀 다른 방향임을 알 수 있다. 좀더 전문적으로 얘기해 본다면, 다른 기능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
”뒷다리는 다른 다리보다 크고 넓고 평평하며, 그 크기는 여왕벌, 일벌, 수벌에서도 서로 다르다. 일벌만이 꽃가루를 모아서 뒷다리의 꽃가루 저장통에 넣는다. 뒷다리에는 길고 구부러진 털이 있는데, 이 털로 둘러싸인 공간을 꽃가루 저장통이라 한다. 꽃가루는 앞다리와 중간다리로 모아서 뒷다리 안쪽 평평한 면에 있는 잔털에 붙어서 벌통에 옮겨진다. 각각의 뒷다리는 뒤쪽으로 뻗어있는 열 개의 가로줄의 딱딱한 돌기로 덮여있다.”
비록 이 다리들은 (메뚜기의 경우에도 그렇듯이) 걷는 데에도 이용되기는 하지만, 기능과 형태적으로 명확히 구별된다. 특별한 '독심술(mind-reading)'을 사용하지 않아도, 히브리 사람들이 (메뚜기, 여치 등에서 사용했던 같은 분류방식을 적용하여) 메뚜기 이외의 날아다니는 곤충들에서도 뒷다리를 특별히 취급하여 앞의 네 다리만 본래 발로 부르고, 나머지는 '뛰는 다리(발 위의 다리)' 등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회의론자들에 의해서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던 곤충의 다리 숫자에 관한 히브리 본문은 기능이 다른 다리들에 대해 다르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조 : Get Answers: Countering the Critics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aq/critics.asp#contradictions
Apologetics Press :: Alleged Discrepancies
http://www.apologeticspress.org/allegeddiscrepancies/
http://www.apologeticspress.org/allegeddiscrepancies/sort-2-26-25-title
http://www.apologeticspress.org/allegeddiscrepancies/sort-2-51-25-title
http://www.apologeticspress.org/allegeddiscrepancies/sort-2-76-25-title
http://www.apologeticspress.org/allegeddiscrepancies/sort-2-101-25-title
http://www.apologeticspress.org/allegeddiscrepancies/sort-2-126-25-titl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tektonics.org/af/buglegs.html
구분 - 5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218
참고 : 2805|3020|1790|1756|2530|2321|2688|2996|3065|921|2362|1793|2030|3022|2525|2643|3166|3249|2737|2960|3220|3218|3208|3206|3170|3162|3036|2942|2797|2970|2425|2982|2549|666|1430|640|886|887|1922|2016|2936|303|87|777|416|930|2638|2378|902|3589|3331|3363|3233|2323|1412|1413|629|2746|1805|528|2545|2515|2458|522|521|3148|3289|3372|2793|2796|2799|2552|2534|910|2245|1798|1812|2135|939|370|655|77|617|665|2432|67|3101|3264|3302|3611|3135|3237|3398|3097|2710|2311|2313|3242|3241|3244|3164|2330|3055|3186|3155
성경의 기록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는가?
(Did Bible writers believe the earth was flat?)
ChristianAnswers.net
아니다. 이 잘못된 생각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 성경 비평가들은 요한계시록 7:1절에서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 있다고 말하는 것을 근거로 성경은 지구가 평평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사실 이 구절은 동, 서, 남, 북의 방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현대에도 사실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어법으로 태양이 뜨고 진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출시간, 일몰시간 같은 용어). 성경의 기록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로 말하는 언어(language of appearance)’를 사용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의도한 메세지가 잘 전달되지도 않고 어색하며, 잘 이해되지도 않았을 것이다.[DD]
구약성경 욥기 26:7절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라는 말씀에 의하면, 지구는 공간에 매달려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형의 태양과 달과 함께 지구가 구형이라는 분명한 예시이다.
욥기 26:10절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He described a circle upon the face of the waters)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 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수면에 둥근 경계를 그으셨으되...”이다. 이사야 40:21,22절에서도 구형의 지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땅 위 궁창(the circle of the earth)”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잠언 8:27절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a circle on the face of the deep)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에서도 원(circle)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둥근 지구임을 말하고 있다(NKJB, NASB). 만일 바다를 공중에서 바라본다면 수평선은 둥글게 보일 것이다. 이러한 둥근 수평선은 욥기 26:10절에서도 나타나 있다. 물 표면이 둥글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사용했던 둥근 지구에 대한 증거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여기 욥기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인들 이전 세대가 그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욥기 26:10절은 빛이 끝나는 곳에 어둠이 시작됨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구형을 가진 지구에서의 낮과 밤을 말하고 있다.[JSM]
히브리 기록은 가장 오래된 것인데, 왜냐하면 욥기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잘못되게) 처음으로 구형의 지구를 제안했던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BC 6세기에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했다. [JSM] 알렉산드리아의 에라스토테네스(Eratosthenes)는 지구의 둘레를 ‘현재 추산되는 것의 80km 이내’의 오차 안에서 계산해냈다. [Encyclopedia Brittanica]
그리스 사람들은 또한 위선(parallels)과 경선(meridians)도 그렸다. 그들은 극점, 적도, 회귀선 등을 확인했다. 이러한 둥근 지구에 대한 개념은 아직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즉 로마인들은 지구를 바다가 둘러싼 평평한 원반의 형태로 그렸다. [JSM]
우리 행성의 둥근 모양은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일식(혹은 월식)의 그림자 관측을 통해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이므로 이러한 정보가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지구의 둥근 모양은 당연히 크리스토퍼 콜럼부스(Christopher Columbus)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DD]
둥근 지구에 대한 암시는 누가복음의 예수님께서 그의 재림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또한 볼 수 있다. 누가복음 17:31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에(In that day)”에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34절에서 ”그 밤에(on that night)”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지구의 한쪽은 낮(day)이고 동시에 반대편은 밤(night)인 것에 대한 암시인 것이다. [JSM]
추가로 다음의 글들을 읽어보라..
.그러나 성경은 '땅의 네 모퉁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어떻게 둥근 지구가 모퉁이를 가질 수 있는가? Answer...
.누가 평평한 지구의 개념을 창안했는가? Answer...
*참조 : Is the ’erets (earth) flat?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14
The flat-earth myth and creationism
http://creation.com/the-flat-earth-myth-and-creationis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hristiananswers.net/q-eden/edn-c015.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뱀은 흙을 먹는다!
(Snakes do eat dust!)
창세기 3:14절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뱀들은 실제로는 흙(dust)을 먹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구절은 사람들의 편견에 의해서 명백한 비유의 말씀이거나, 아니면 성경의 오류로서 간주되어져 왔다.
미가서 7:17절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더 많은 정보들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성경은 정확할 뿐만이 아니라, 세밀한 사항까지도 정확함을 보여주고 있음이 밝혀졌다. 뱀들은 신중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흙을 먹고, 핥는다.
뱀의 입 천장에는 ‘야콥손기관(Jacobson’s organ)‘이라고 불리는 기관이 있다. 이것은 뱀이 그 코와 함께 냄새를 맡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뾰족하고 갈라진 뱀의 혀는 그 끝으로 약간의 흙을 찍어 시료를 채취한다. 그리고 그것을 입 안쪽에 있는 한 쌍의 감각기관에 가져간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냄새를 맡는 것이다. 그리고 혀가 깨끗하게 청소되어지면 즉각적으로 그 과정을 반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말로 뱀은 흙을 핥고, 먹는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0/i4/snakes.asp
출처 - Creation 10(4):38, September 1988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70
참고 : 2793|2796|2799|2552|2534|910|2245|1798|1812|2135|939|370|655|77|617|665|2432|67
첫 번째 아담 대 마지막 아담
(First Adam—last Adam)
Russel M. Grigg
둘 다 복음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정확히 어떻게 중요한가?
성경은 아담을 첫 번째 사람이라고 말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the last Adam)’ 이라는 묘한 명칭을 부여한다 (고전 15:45). 이 용어는 무엇을 의미하며, 어째서 그런 명칭이 주어졌나? 아담과 예수님 사이의 유사성은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예수님에게 이런 명칭이 주어졌을까?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
1. 기적적인 시작
첫 번째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땅의 흙으로부터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그가 생령이 되었다.(창 1:26-27; 창 2:7)
그러므로 아담은 어떤 형태의 유신론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다.[1] 하나님은 그를 원숭이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지 않았으며, 또한 유인원으로부터 기나긴 세월에 걸쳤다거나 또는 갑작스러운 돌연변이에 의해 만들지도 않으셨다.[2] 오히려, 하나님은 창조 주간의 여섯째 날 어느 시간에, 그분의 말씀에 의해(즉, 이것이 일어나기를 원하시거나 명령하심으로) 즉각적인 행동으로 아담을 창조하셨다.[3]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반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골 1:15).
성경은 우리에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다(요 1:1-3, 골 1:15-20, 히 1:2).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담이 살기 이전에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이미 계셨다(요 8:58, 미 5: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에 있어서 그분 역시 기적적인 시작을 가지셨다. 그분은 성령에 의해 잉태되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심으로 인간으로 성육신 하셨다(마 1:20-23, 눅 1:26-35).
2. 완전하시고, 흠이 없으시고, 거룩하심
아담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전부 소유한 완전한 사람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심상(心像)을 갖고 있어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었다. 그가 처음에는 흠이 없고, 죄가 없고, 거룩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여자와, 자기 자신과, 및 자기 주변의 자연 세계에 대해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도 역시 완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하나였으며(요 10:30; 17:21-22), 흠이 없고, 죄가 없고, 거룩했다(히 7:26).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두 번째 아담’이라고 잘못 말하고 있는데, 그런 용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를 일컬어 ‘둘째 사람(second man)’ (고전 15:47)이라고 말한다. 아담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있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적으로 죄가 없으신 두 번째 사람이셨다.
첫 번째 아담과는 달리 주 예수님은 그 외에도, 하나님의 속성과 직책과 특권과 이름을 가지신 신성한 분이셨다.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계 5:11-14, 마 2:11, 히 1:6).
3. 인류의 머리
아담은 인류의 머리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된 인간의 머리이시다(예로써, 엡 5:23을 보라).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죽으셨으므로(히 7:27; 9:28; 10:10-14), 더 이상의 ‘아담’이 있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분이 마지막 아담이시다.
4. 둘 다 생명을 주는 자
첫 번째 아담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생명을 주었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빛'을 전하시며,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1-14)를 주신다.
5. 두 지배자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에게는 창조된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권이 주어졌다(창 1:26).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일어나신 후에 하나님의 우편에 올라가셨으며, ‘그분의 발아래 두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받으셨다(고전 15:27, 엡 1:20-22). 첫 번째 아담은 제한된 지배권을 가진 주인(lord)이었고, 마지막 아담은 만유의 주님(Lord)이시다(행 10:36).
6. 깊은 잠이 아름다운 신부를 내다
창세기 2:21-23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때 하나님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아담의 신부인 하와를 만드셨다. 아담 옆구리의 상처가 신부를 생기게 했다! 여기서도 유신론적 진화론이 맞지 않음을 주목하라.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 남자와 여자를 최초에 만드셨다고 말하고 있다(창 1:27; 2:7, 마 19:4).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기 이전에 그들이 유인원이었다면, 그들은 이미 남자와 여자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놓으실 필요가 없게 된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고(요 19:34),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의 잠을 겪으셨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그분은 인류의 죄를 위한 값을 치르셨다(고전 15:1-4).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경이 남편에 대한 그의 신부로 비유하는 관계에 들어오게 된다(고후 11:2, 엡 5:27, 계 19:6-8). 따라서 마지막 아담의 옆구리에 난 상처 역시 신부인 진정한 교회를 생기게 했다. 영광스런 신부이며,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엡 5:27) 신부를.
7. 중대한 시험
아담의 인생 초기에 그는, 그가 하나님을 복종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의 시기를 겪었다.[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마지막 아담의 사역 초기에,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또는 유혹)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눅 4:1).[6]
8. 커다란 실패와 커다란 승리
첫 번째 아담은 시험에 실패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그의 실패에 연루되었고, 인류가 그와 더불어 타락하였다.[7] 결과적으로,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가 죄를 지은 상태이고, 영적으로 파산했으며, 죄에 사로잡혔고, 낙원에서 쫓겨났다(롬 5:12).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죄와 육체와 마귀에 대해 승리하셨다. 결과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신자들은 의로운 상태에 있고 구속받았으며, 영적으로 부요하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하나님의 낙원 안에 속해있다(롬 5:18, 고전 15:21, 계 2:7).
9. 불복종 대 복종
첫 번째 아담은 하나님에게 불복종했다. 마지막 아담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빌 2:8).
10. 심판과 죽음
첫 번째 아담은 하나님의 심판을 겪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죽었으며 그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의 죄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for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Romans 3:23, NIV).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역시 속죄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사 53:5, 벧전 3:18, 히 2:9). 그러나 그분은 죽은 채로 머물러 있지 않으셨으며, 그분의 육체도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다(행 2:27; 13:35-37). 세 번째 날에 그분은 다시 일어나셨으며, 그럼으로써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마귀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고(히 2:14),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가져왔다(고전 15:22-23).
11. 저주와 회복
원래의 창조는 ‘심히 좋았으므로’(창 1:31), ‘마지막 적(enemy)’인 죽음이 없었다(고전 15:26). 심지어 동물들에게도 처음에는 식물이 먹이로 주어졌다(창 1:30). 첫 번째 아담의 행동은 한때 완벽했던 세상에 죽음과 유혈의 지배를 가져왔고, 그때 이후로 고통 가운데 탄식하게 되었다(롬 8:22).[8] 정확하게, 마지막 아담이 죽으시며 흘린 피 때문에 이 죽음과 유혈의 저주가 제거될 것이며, 창조물이 죄와 죽음이 없는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계 21:1; 21:4; 22:3).
결론
우리는 모두 (인류의 자연적, 법적 머리가 되는) 첫 번째 아담과 연결되어, 타락하고 범죄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언하신 죽음의 선고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구속 사역 안에서 회개와 신뢰를 통하여 그분과 연결된 사람들은 모두 용서를 받았고, (값없이) ‘의의 선물’을 받았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골 1:14, 롬 5:17, 요 3:14).
각주
1. 창세기 1~5장에서 ‘아담’이라는 단어는 인류에 대해서 총칭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의의 선물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기인한다고 말했는데, 창조와 타락에 관련하여 ‘아담’이 특정한 한 사람을 지칭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전서 2:13-14에서 아담과 하와가 실제적 개체라고 가르치고 있다.
2. 창세기 2:7에서 ‘되었다’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는 또 다른 생명체로 진화가 된 어떤 생명체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졌을 때에야 살아나게(생령이) 되었다. 일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창세기 2:7에서 아담이 흙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말이 짐승으로부터 인간의 진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만약 그렇다면, 창세기 3:19에서 죽음 이후에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짐승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3. R. M. Grigg의 ‘Creation: How did God do it?’ Creation 13(2):36-38, March 1991을 보라.
4. 두 아담의 기원을 비교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5. 하나님은 아담이 도덕적 선택의 능력을 갖게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복종은 그가 하나님에 대해 복종할 수도 있고 불복종할 수도 있는 선택권을 가진 상황 하에서만 확증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하나님은 그 결과가 타락으로 나올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할지라도, 아담 인생의 초기에 검증의 시기가 필요했다.
6.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은 단 한번의 시험이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7. 아담은 즐거운 동산에 있었으며, 먹을 것이 풍부했고, 배가 고프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그런데,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에서 살았으면서도 범죄했다. 예수님은 광야에 계셨고, 먹을 것이 없었으며 매우 배가 고프셨다.
8. 이것이 성경을 긴 시대로 해석하는 것이 복음 내용의 논리에 커다란 손상을 입힌다는 유력한 이유이다. 화석은 죽음과 고통과 질병의 증거를 보여준다. 죽음과 고통이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 수백만 년 전부터 이미 존재했었다면, 그것들은 죄를 짓기 이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창조물에 대해 죄로 인한 어떤 저주도 있을 필요가 없고, 만유를 회복하실 때에 어떤 죄도 없고 죽음도 없는 상태도 없는 것이다(행 3:21).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1/i1/adam.asp
출처 - Creation 21(1):37–39, December 1998.
웃는 자의 복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즐겁고 유쾌한 마음으로 살아 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돈이 있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있으면 내가 하기 싫은 구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하며 생활한다. 유쾌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돈을 얻기 위해서 고민하며 즐겁지 않는 일도 해야 하는 아이로니를 경험한다. 그런데 평생을 써도 남을 만큼 충분한 재산을 소유한 자들이 과연 즐겁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억만장자들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많은 재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돈이 있으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하며 돈을 좇아가고 있다. 점심시간 학교 식당에 들어 가면서 게시판에 붙어 있는 행복에 관한 짧은 글을 보았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많이 웃어야 한다고 적힌 포스터였다.
주위를 살펴보면 조그만 일에도 잘 웃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웃는 소리의 크기와 패턴이 달라 웃는 모습과 소리를 통해 우리는 누군지 알아낼 수가 있다. 각 사람에게 고유한 웃음의 패턴은 체질이라기보다 개개인의 성격 차이로 볼 수 있다. 내가 프랑스 파리의 루부르 박물관을 방문하였을 때,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찾았다. 유명한 그림이라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여러 각도에서 그 그림을 감상해 보았다. 희한하게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 본 모나리자는 내가 어느 쪽에 서 있든지 마치 나를 향하여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마음이 있었는데 모나리자의 이러한 은은한 미소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나 보다. 이렇게 얼굴에 잔잔히 피어 오른 미소가 아름다움을 주기도 하지만 크게 소리 내어 호탕하게 웃는 모습도 보기에 좋다. 소리 내어 크게 웃을 때는 신체의 많은 근육이 움직이고 심장이나 뇌에 영향을 주게 된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박사는 웃음의 효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한번 크게 웃을 때 평상시 움직이지 않던 근육 중 230개 이상이 움직인다. 이로 인해 혈액순환이 활발해져 산소와 영양분이 피부 곳곳에 전달돼 피부노화 방지에 효과가 있다. 사람이 1분 동안 마음껏 웃으면 10분 동안 에어로빅이나 조깅 또는 자전거를 탈 때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물리적 화학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몸 안에 일어나게 된다” 라고 자신의 연구결과를 근거하여 말한다. 우리가 크게 웃으면 심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가운데 육체적으로도 많은 근육들로 하여금 운동하게 하는 효과를 갖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크게 웃는 것은 훌륭한 유산소 운동이 되는 셈이다. 손으로 피부와 근육을 두드려 안마하거나 만지는 것을 외부 마사지라고 한다면 웃는 것은 내장을 마사지하는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웃음을 연구한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여섯 살짜리 어린이는 하루에 300-400번이나 웃지만 성인은 평균 17번밖에 웃지 않는다고 한다. 웃음은 인체의 신경계와 면역계 등 다양한 생리기능에 영향을 끼친다. 자율신경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나뉘어 지는데, 놀라거나 두려워 초조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때 활성화되는 것이 교감신경이고 근육이 이완되고 편안할 때 작동하는 것이 부교감신경이다. 기분 좋게 웃으면 부교감신경이 자극을 받게 된다.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심장을 천천히 뛰도록 하고 소화를 돕고 몸을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웃으면 몸과 정신이 편안해 지는 것이다. 특히 배꼽을 빼는 웃음, 즉 포복절도할 웃음은 긴장을 이완시켜 주고 혈압을 낮추며 혈액순환과 질병 저항력 향상에 탁월한 효과를 보아는 것이다. 유쾌하게 웃으면 세균이 침입했을 때 이를 방어하는 T임파구 및 새로운 면역세포의 생산이 증가하고, 면역 기능을 떨어뜨리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감소하여 면역체계가 강화된다. 그래서 웃음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전염성의 질병에 강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웃음은 뇌를 자극하여 특정 화학물질을 생산하게 함으로써 불균형한 신경전달 물질을 정상으로 복귀시켜 준다고 한다. 그리고 웃음은 뇌의 대사에 직접 관여하여 슬픈 생각이 전달되는 경로를 차단시켜 주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에도 웃게 되면 의식이 전환되어 순간적으로 기분이 풀어지는 효과가 있다. 어른이 되면 직장이나 사회적인 위치에서의 책임, 가정에서의 책임 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기가 쉽고 이로 인해 밝게 웃을 일이 적어진다. 반면에 어린 아이들은 어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별로 웃기지 않는 일이라도 금방 까르르 웃는 천진난만한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어른이 되면서 많은 웃음을 잃어 버리며 살고 있다. 어른이라도 어린 아이처럼 300번 이상 웃을 수 있다. 의식적으로 웃기를 연습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 중압감으로 인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웃기를 시도하면 긴장을 이완시키고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웃음은 스트레스를 치료하는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치료 약인 셈이다. 웃음을 참지 말고 호탕하게 웃어 보자. 하루의 시작도 감사함으로 하고 웃으며 일을 진행하면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고 자신 있는 태도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할 수 있다.
행동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다.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돈이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고 작은 일에도 의미를 찾으며 즐거움을 느끼고 마음껏 웃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성경에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다. 늘 기뻐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것보다 먼저 말씀하셨다. 이는 우리가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고 주안에서 즐겁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웃는 얼굴에게 침 뱉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웃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긴장을 이완시키고 건설적으로 만들어 준다. 웃음은 삶에 활력을 불어 넣고 지친 자에게 위로가 된다. 오늘 우리도 마음껏 웃어 보자. 웃고 싶지 않아도 웃는 연습을 하자. 우리 주위를 웃음으로 전염시키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출처 - '과학으로 하나님을 만나다' 중에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30
참고 :
우는 자의 복
서기 26년, 로마 제국 시대, 로마의 속국 유대나라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던 주다 벤허(Judah Ben-Hur)는 이스라엘의 제일가는 유대인 귀족이었다. 로마의 장군이 된 벤허의 옛 친구 멧살라(Messala)는 이스라엘 주둔 사령관으로 오게 되면서 벤허에게 로마 정부에 항거하는 반란 자들을 색출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한다. 아무리 친구의 부탁이지만 자신의 동족을 팔아 넘길 수 없는 벤허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로 인해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벤허에 대해 앙심을 품은 멧살라는 유대인 반란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응징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단란한 벤허의 가정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만다. 어느 날 이스라엘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오는데, 신임 총독의 부임 축하 행진을 옥상에서 구경하던 벤허의 여동생, 틸자(Tirzah)의 실수로 기왓장이 떨어져 총독이 낙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기와를 붙인 석회가 부스러져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임을 알지만 멧살라는 이를 총독 암살 사건으로 몰아 간다. 그래서 벤허의 어머니 미리암(Miriam), 누이 동생 틸자, 연인 에스터(Esther)를 감옥에 가두고 모든 재산을 몰수한 채 벤허를 로마 해군 전투함의 노 젓는 노예로 보내버린다. 노예로 팔려가는 벤허가 지치고 목말라 쓰러질 때 이를 불쌍히 여겨 우물물을 떠다 주는 마을 사람들의 물바가지마저 발로 차 버리는 로마 호송군의 횡포에 울부짖는 벤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 순간에 가족과 재산을 잃어 버리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게 된 벤허는 물 한 모금마저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멧살라에 대한 증오와 현재의 억울한 처지에 대해 치를 떨며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을 영화 “벤허”에서 찰톤 헤스톤은 너무나 잘 표현하였다. 이렇듯 비통하여 우는 울음이 있는 반면에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도 있다. 어릴 때 길을 잃어 가족과 떨어지게 된 형제가 오랫동안 소식을 알지 못하여 애를 태우다가 30여 년이 지난 다음 TV 방송을 통해 알게 되고 마침내 상봉하여 서로 끌어안고 흐느끼는 울음은 그 동안의 안타까움을 모두 날려 버리는 기쁨의 눈물일 것이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혹은 아파서 울 때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런데 눈물의 성분을 조사해 보면 98%가 물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소금 성분이다. 그리고 항 바이러스, 항균 역할을 하는 미량의 락토페린(lactoferrin)이라는 단백질과 세균을 용해하는 효소 단백질 인 라이소자임(lysozyme)이 섞여 있다. 이 눈물은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흐르기도 하지만 평상시에도 조금씩 나오면서 눈 표면을 적셔주고 코팅해주는 역할을 한다. 평소에 눈에서는 약 6-7μl정도의 눈물이 안구를 적셔주고 있어 눈이 마르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눈물은 주 눈물샘, 부 눈물샘, 결막, 눈꺼풀의 마이봄선 등에서 분당 1.2μl정도 분비된다. 그리고 우리의 눈꺼풀은 5초에 한번 꼴로 깜박여서 눈물을 고르게 펴준다. 이 눈물은 눈 표면이 말라서 상처 나는 것을 막아주고, 영양이나 산소를 공급하고, 항균작용 및 이물질 제거 등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리고 우리 눈이 맑게 보이게 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평소에는 눈물이 아주 미량으로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이것이 흘러 나오지 않으면 안구건조증으로 몹시 괴롭다. 평상시 흐르는 눈물이 부족하면 노화세포나 먼지, 찌꺼기 등과 함께 끈적끈적한 눈곱이 자주 끼게 된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눈물이 흘러 나와 눈의 건강과 작용을 돕고 있다. 한편으로 눈에 상처나 질병 등의 자극이 있거나 또는 슬프거나 기쁨의 감정에 북받쳐 반사적으로 흐르는 눈물도 있다. 이 때는 주로 주 눈물샘에서 눈물이 분비되는데 눈물의 기본 성분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나, 전해질이 약간 많고 단백질은 조금 적다.
만약 눈물이 없다면 눈 표면의 세포가 말라 죽고, 세균이나 먼지 등의 외부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따라서 평상시 흐르는 기본적인 눈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며, 또한 자극에 의해 반사적으로 나온 눈물도 눈에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이물질을 희석하고 배출하는 작용을 하므로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눈물은 소중한 역할을 한다. 양파와 같은 매운 것들을 만질 때 흘리는 눈물과는 달리 슬픈 이야기나 소설 등을 읽으며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대성통곡을 하고 나면 멍해지고 나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기분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고 했다. 마음속에 있던 감정들이 밖으로 분출하여 정화되고 깨끗해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의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고 새로운 생각들을 담을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눈물은 사람들 사이에 많은 교감을 나누게 된다. 특히 여자의 눈물에 남자들은 약하다고 하지 않는가! 미국의 통계를 살펴 보면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경우 한 달에 평균 5회 정도 눈물을 흘리는 반면 남자들은 1-2회 정도로 나타났다. 이는 남자들이 눈물을 보이면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통념에 지배를 받아 우는 것을 억제하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생활하실 때 눈물을 흘리신 경우가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베다니란 동네에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오라버니 나사로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을 존경하며 따랐다. 주님도 이들을 사랑하여 베다니를 지날 때는 이 집에 머무르곤 하였다. 그때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대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며 삼백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되는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김으로 주님에 대해 지극한 존경을 표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친밀하게 지내던 이 집안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오신 주님께서 베다니로 오셔서 마리아를 부르자, 마리아는 달려 나와 주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통곡하며 함께 한 유대인들도 따라 우는 것을 보고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곤 무덤으로 가셔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이미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고 명하실 때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나사로가 병으로 고통당하며 죽기까지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당면했을 두려움과 고통의 과정들을 생각하신 것이다. 그리고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음으로써 겪었을 마리아와 마르다의 근심과 아울러 이들 가족과 삶을 함께 나누던 이웃들의 슬픔을 생각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던 자들의 슬픔에 동참하신 것이다. 나사로 가족뿐만 아니라 나사로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하는 베다니 사람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극적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그들 앞에 흘리는 눈물이야말로 주님의 심정을 더욱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도 불우한 환경으로 속절없이 약자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이웃들을 향하여 울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갑작스런 비극으로 슬픔에 잠긴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 함께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식구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사랑으로 더욱 결속되리라 믿는다.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기를 원한다. 곤경에 처한 친구나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을 붙잡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좀 더 따스한 곳으로 바뀔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출처 - '과학으로 하나님을 만나다' 중에서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126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