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7-11-07

강력한 생쥐가 태어났다.

 (Mighty Mouse Has Arrived)

David F. Coppedge


      BBC News의 한 보도(2007. 11. 2)에 따르면,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의 유전학자들은 쳇바퀴(treadmill)에서 멈추지 않고 6시간 동안이나 분당 20m의 속도로 5-6km를 달릴 수 있는 유전공학적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생쥐들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리처드 한슨(Richard Hanson) 교수는 설명했다 : “그들은 물질대사 측면에서 피레네 산맥을 자전거로 넘었던 란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주로 지방산(fatty acids)을 이용하고, 매우 소량의 젖산(lactic acid)을 만듭니다.” 또한 그 쥐들은 더 긴 수명을 가지며, 평범한 생쥐들보다 더 늦게 짝을 짓습니다. 그 비밀은 어떤 한 유전자의 과도 발현에 의해서 증가되어 만들어진 세포 안의 발전소(powerhouses)들에 있다는 것이다 : 

“이들 생쥐들의 근육에는 훨씬 많은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작은 ‘엔진’들이다. 몇몇 이유로, 미토콘드리아의 수는 친척들의 근육에 있는 것보다 대략 10배 정도 더 많다.”  

만약 이 기술이 사람에게까지 적용되어진다면, 올림픽 경기는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올림픽은 최고의 유전공학적 처치를 받은 사람들이 수상하게 될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성취가 가능하다면, 이것은 고대인(ancient people)들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에는 수백 년을 살았으며, 80대에 첫 아이를 얻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우리는 60kg의 허약한 인류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 유전공학적 재료를 콜라나 사이다에 넣을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보자.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7/11/mighty_mouse_has_arrived/

출처 - CEH, 2007. 11. 6.

미디어위원회
2007-10-13

성경은 오류로 가득한가?

 (I'snt the Bible Full of Errors?)

Paul Taylor 


       아마도 당신은 나와 같은 유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나는 성경이 모순된 것들로 가득하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인터넷에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성경의 모순(contradiction)을 3가지라도 지적해보라고 했을 때, 그는 40여 가지 이상을 제시했다. 나는 성경의 오류(errors)라고 지적한 각 항목들에 대해서 하나씩 답변을 게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30초도 안 되어 나의 대답이 난센스라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그의 목록이 한 웹 사이트로부터 가져온 것임을 발견하였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은 자주 성경을 믿지 않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 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성경을 읽지 않았거나, 실제로 그것이 모순인지 아닌지를 세밀하게 분석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명백한 모순으로 보이는 구절을 읽게 될 때, 기독교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 글에서 나는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어지는 3 가지의 사례를 사용해서, 이 주제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그 3가지 부류는 모순이 아니거나(false contradictions), 잘못된 번역(mistranslations)이거나, 세속적 과학에 근거한 소위 과학적 오류(scientific errors)라는 것들이다.


비모순의 법칙

성경은 비록 오랜 기간에 걸쳐서, 다양한 그룹의 저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이라는 진정한 한 분의 저자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순되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 분의 말씀은 진실로 모순되는 점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만 한다.

한 전문가가 말한 것처럼,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시라면... 성경의 두 부분이 서로 반대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질 때, 이 두 부분 또는 한 부분에 대한 우리의 해석(our interpretation)에 오류가 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1]

많은 추정되는 불일치들은 두 구절을 서로 잘못된 반대(false opposition)로 위치시킬 때임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도서 7:29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편 51:5절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전도서 7:29절의 말씀은 원래 정직하도록 창조되었던 아담과 이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 왕은 아담의 타락한 후손들 중 하나로서 그의 개인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모순은 없는 것이다.


잘못된 번역

성경을 공격하는 주장들은 자주 번역작업 동안에 생겨난 일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만약 당신이 성경 원문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직접 찾아보거나, 그 언어들을 다룰 수 있는 동료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레위기는 박쥐(bats)를 ‘새(birds)’로서 기술하고 있다 : ”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찌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레위기 11:13-19)

만약 당신이 좋은 번역본을 가지고 있다면, 의심스러운 단어를 간단히 다른 구절들과 비교해 봄으로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서 킹제임스 성경(the King James Version, KJV)은 ‘birds’ 대신에 ‘fowls’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fowls’ 이라는 단어는 다시 20절에서 ‘곤충(insects)’을 묘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명백히 ‘insects’라는 단어는 현대적 의미에서 ‘birds’가 아니다. 따라서 당신은 히브리어 성경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히브리어로 그 단어는 ‘owph’ (Strong’s reference number 05775) 이다. ‘owph’를 번역한 ‘새’ 라는 단어도 좋은 번역이지만, 원래 뜻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 ‘날개를 가진 생물(a winged creature)’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단어는 새, 날아다니는 곤충, 박쥐 등에 사용되어질 수 있는 단어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날아다니는 파충류(flying reptiles)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오류들?

성경 비판가들은 흔히 세속적 과학자들의 생각을 근거해서 성경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 구절들이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 얼마나 모순되는 지를 찾고자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모세는 곤충의 다리를 4개로 말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곤충의 다리가 6개인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레위기 11:20-23절에서 모세는 말했다 :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찌니, 곧 그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레위기 11:20-23) 

사실 이 구절이 오류라고 생각하기 전에, ‘네 발로’ 라는 어구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전체 발의 수를 가리키는 것 보다는, 생물체의 걸어가는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성경은 메뚜기와 유사한 곤충들의 행동을 매우 정확히 기술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곤충들은 정말로 네 발을 가지고 기어(creep) 다닌다. 그리고 또 다른 두 발(뛰는 다리)로는 도약(leap)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저자가 새가 무엇처럼 보이는지 잊어버렸다거나, 메뚜기의 다리 수를 잘못 세었을 것이라는 가정들은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세(Moses)는 바로의 궁전에서 그 당시에 가장 훌륭한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 이유 하나만 가지고도, 성경에 대한 편견이 없는 독자라면 모세가 어떤 단어들을 선택했을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저자들이 진실을 말했을 것이며,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 했는지를 저자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론

오류로 보여지는 성경 구절들을 해결하는 데에 동일한 방법들이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즉각적인 설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믿음 위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그리고 좀 더 배우고 살펴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지(ignorance)와 교만을 청소해 내기만 한다면, 모든 경우에서 논리적인 설명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오류를 범하셨다는 생각은 가능성이 없는 생각이다.


*Paul F. Taylor graduated with his B.Sc. in chemistry from Nottingham University and his masters in science education from Cardiff University. Paul taught science for 17 years in a state school but is now a proficient writer and speaker for Answers in Genesis-UK.


Reference

1. Boice, J. M., Foundations of the Christian Faith (Downers Grove, Illinois: IVP, 1986), p. 91.

 

 *참조 : Get Answers: Countering the Critics

https://creation.com/countering-the-critics-questions-and-answers

Countering the Critics Questions and Answers

https://creation.com/countering-the-critics-questions-and-answers

Apologetics Press : Alleged Discrepancies

https://apologeticspress.org/category/alleged-discrepancies/

Biblical Inerrancy

https://apologeticspress.org/biblical-inerrancy-41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isnt-the-bible-full-of-errors 

출처 - Answers Magazine, 2007. 9. 24.

신동수
2006-10-23

과학과 편견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9-12)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but when the perfect comes, the partial will be done away. When I was a child, I used to speak as a child, think as a child, reason as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did away with childish things. For now we see in a mirror dimly, but then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but then I shall know fully just as I also have been fully known.” (1 Corinthians 13:9-12, NASB)

인간은 모순과 편견을 딛고 산다고 할 수 있다. 객관성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학 분야에도 편견은 많이 있었고, 있으며, 또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존하고 있는 몇 가지 과학에 있어서의 편견을 지적하고 그 형성원인과 영향 등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온도의 눈금에는 섭씨와 화씨가 있다. 섭씨눈금은 1742년 셀시우스(Celcius)가 1기압에서 물의 빙점과 비점을 각각 0℃와 100℃로 정하여 만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비교적 편리한 것의 하나지만 그 뒤 발견된 절대온도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온도이다. 인간에게 물로 된 바다가 없고 대신 암모니아로 된 바다가 있었다면, 암모니아의 빙점인 -77.7℃를 0도로, 비점인 -33.4℃를 100도로 택했을 것이다. 화씨온도는 더욱 큰 편견을 가지고 있다. 1714년 파렌하이트(Fahrenheit)가 수은온도계를 만들고 눈금을 새길 때, 그 당시에 얻을 수 있었던 최저온도를 0℉로 하고 자기의 체온을 100℉로 하였다. 그 결과, 물의 빙점은 32℉가 되고 비점은 212℉가 되었다. 인간의 정상체온은 98.6℉이므로, 온도계의 눈금을 매길 당시의 파렌하이트는 아마 열이 좀 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자구조를 공부하는 사람은 1s, 2p, 3d 등으로 전자궤도를 표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차례대로 a, b, c, d라 하지 않고 왜 s, p, d, f라 했을까? 이것도 과학자들의 편견이 빚어낸 결과의 하나이다. 1930년경의 분광학자들은 스펙트럼선을 연구하면서 sharp, principal, diffuse, fundamental 등의 형용사로 그 이름을 붙이고, 그 첫 글자를 따서 s, p, d, f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 뒤에 발견된 것은 알파벳 순서를 따라 g, h, i 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이야말로 폴링(Pauling)이 지적한 대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등신같이 만들어 놓은 것’(So poorly did foolish Gelehrte have it.)이다. 첫 글자를 따 보라. s, p, d, f, g, h, i가 된다. 그러면서도 이런 이름을 붙인 다수의 학자들이 각각 노벨상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는 주양자수 1, 2, 3에 따른 전자껍질의 이름을 K, L, M 껍질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들 수 있다. A, B, C라고 하지 않고 K부터 시작한 것은 영국의 물리학자 바클라(Barkla)의 짓이다. 그는 1911년 몇 가지 금속판에 X선을 비춰서 그 투과력을 측정하였다. 구리판에서 얻은 복사선 중에서 투과력이 더 강한 것은 K, 약한 것은 L이라 하고, 그보다 투과력이 더 큰 것이 나타나면 A부터 차례로 이름 붙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K보다 투과력이 더 강한 복사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바클라가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K와 L을 택한 것이나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도 역시 노벨상을 받았다.


원자번호 2번인 헬륨(helium)은 희랍어 helios(태양)에서 이름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구의 대기층에 있는 헬륨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전혀 아니다. 지구가 탄생할 당시 태양에서 얻어 나온 헬륨은 이미 우주공간으로 다 흩어져 버렸고, 지구에 있던 방사성물질이 알파붕괴를 할 때 생긴 헬륨만이 공기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묵과할 수 있다고 하지만 끝이 ‘ium’으로 된 것은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불활성기체는 헬륨을 제외하고는 모두 ‘on’으로 끝난다. 네온(neon), 아르곤(argon), 크립톤(krypton), 크세논(xenon), 라돈(radon) 등이 다 그렇다. 그런데, 헬륨만은 나트륨(sodium), 마그네슘(magnesium), 이리듐(iridium) 등의 금속원소와 같은 어미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1868년 로키어(Lockyer)가 이 원소를 발견했을 때 금속이라고 생각하고 붙인 이름이다. 헬륨이란 태양에 있는 금속이란 뜻이다. 태양의 스펙트럼에서는 헬륨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수소와 리튬(lithium) 사이에 있으니까 당연히 금속이라 생각한 것이다. 남자에게 ‘숙’이나 ‘자’ 자로, 아니면 여자에게 ‘식’이나 ‘수’라고 이름 붙인 것과 같다. 더 좋은 이름을 짓는다면 헬리온(helion)이라고 해야 하나, 이미 헬리온은 헬륨의 원자핵(알파입자)의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1811년 아보가드로(Avogadro)는 ‘같은 조건 하에서 같은 체적의 기체에는 같은 수의 분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가설을 발표하였으나, 돌턴(Dalton)을 비롯하여 그 당시의 세계적인 과학자들은 이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실험보다 이론이 앞섰던 그 당시에도 분자니 원자니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론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현대의 과학은 그 정반대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실험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으나 이론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이론과학이 더욱 발달하여 다시 실험과학을 앞지를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자연과학사도 인류역사와 마찬가지로 나사선 함수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다. 인류역사를 나사선 함수로 보는 가장 간단한 실례로는 여자의 옷차림을 들 수 있다. 옛날 역사의 시작 무렵에는 발가벗고 살다가 중세에는 완전히 가리고 살았다. 그 뒤에는 차츰차츰 벗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옛날처럼 완전히 싹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벗는 것이다. 그래서 원함수라기보다 나사선 함수로 보는 것이다.


1887년 마이켈슨(Michelson)과 몰리(Morley)는 우주에 에테르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엄청난 비용을 들여 거대한 실험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실험결과는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실패했기 때문에 이 실험은 물리학사상 최대의 실험으로 평가받게 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낳게 되었다. 편견 중에서는 그 결과가 너무도 찬란한 것의 하나라 하겠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편견이 형성되고 그들이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공존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편견이 귀찮기는 하지만 때로는 편리한 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익숙한 것이 10진법인데도 시간은 60진법을 쓴다. 하루는 스물 네 시간이며 크고 작은 달이 있고 해마다 달력을 바꿔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복잡한 진법을 그냥 쓰는 것은 고치기가 힘들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런 대로 편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편견의 형성원인 중에서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정치적 또는 사회적 압력이다. 중세기에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한 학자들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사회적 압력 중에서 비교적 근대의 예로는 노벨상을 들 수 있다. 노벨상을 받으면 세계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지만 노벨상 자체도 그리 공정한 것이 되지 못한다. 주기율표를 발견한 멘델레예프(Mendeleev)는 분명히 제1회 노벨상을 받아야 했지만 제외되었고,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 때문에 노벨상을 받은 게 아니라 빛의 양자설로 받은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노벨상을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한 말도 이해가 간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자연계에는 어떤 방법을 써서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인간이나 관찰 도구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에 있다. 그런 유한성을 지닌 인간이 방대한 자연의 메커니즘을 관찰하고 설명하고 예언하는데 편견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모순이 발견되면 또 수정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다른 기하학을 기초로 우주선을 개발하였다. 삼각형의 안각의 합이 180도가 넘는다고 보는 타원기하학과 180도 미만이라고 보는 쌍곡선 기하학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도 0도선과 한국을 지나는 동경 127도선, 그리고 적도를 연결하면 큼직한 삼각형 하나가 생긴다. 이 삼각형의 안각의 합은 분명히 180도가 아니라 307도나 된다. 원은 삼각형으로 보아도 좋다. 원에 반지름 하나를 그리고 그 반지름이 두 변을, 원둘레가 다른 한 변을 대표하는 이등변 삼각형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작은 아메바 한 마리를 원호 위에 기어가게 하면 그 아메바는 원호가 직선과 같다고 생각한다. 원호와 같은 곡선도 미분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수학이 이렇게 서로 모순인 기초 위에 놓여 있는데도 그 계산결과가 모두 정확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언어가 다르고 수학이 다르지만 실체에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 문제만 더 다루고 싶다. "우주의 크기는 무한한가?"’ 하는 물음이다. 우주에 끝이 있다고 대답하면 그 밖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또 물을 것이다. 편견이라고 공박을 받으면서도 나는 우주가 유한하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물질과 복사에너지로 되어 있다. 물질이란 광속 이하의 속도로 움직이는 존재이고, 복사에너지는 광속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다. 이 두 가지의 존재가 차지하는 공간이 우주이다. 그런데 안과 밖이라는 개념은 우주의 크기를 생각할 때에는 전혀 가치가 없는 개념이다. 벡터장이론에 나오는 one-sided surface를 생각하면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우주의 한 방향을 향하여 계속해서 나아가면 결국 우주를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에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주의 끝에서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어서 어느 쪽으로 가거나 마찬가지로 우주의 안쪽으로만 들어오게 되어 있다. 북극을 출발한 한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가든지 그는 남쪽으로만 간다는 것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이런 방법으로 우주의 크기를 계산하여 그 직경이 얼마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천문학자들은 이 우주가 팽창한다고 한다. 항성들이 서로 후퇴하기 때문이다. 팽창하는 광막한 우주의 지극히 작은 한 점 지구 위에 사는 작은 존재인 듯한 인간이 우주만물의 존재법칙을 다룬다고 하는 것 자체가 편견의 양상이요 실태이다. 진리를 맛보지도 못하고서 진리를 향하는 행자(行者)가 진리를 논하는 것부터가 모순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그 모순과 편견으로 빚어진 지식체계가 인류의 복지와 문화형성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다.


출처 - 대구지부 월간소식지 창조 제48호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681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6-09-15

일각수(유니콘) 

: 성경은 상상의 동물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The unicorn : The bible does not refer to fantasy animals)

Carl Wieland 


     권위있는 성경 번역본(KJV)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욥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들 소(unicorn)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 소(unicorn)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욥 39:9,10)

일각수(unicorn, one horn)는 욥기 39:9,10절을 포함하여 신명기 33:17, 민수기 23:22, 24:8, 시편 22:21, 29:6, 92:10, 이사야 34:7 등에 언급되어있다. 이들 구절들에서 일각수는 실제 동물이 아닌 어떤 상상의 동물로서 묘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각수는 발견된 적이 없는, 우화에서나 등장하는 전설상의 동물로서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성경을 공격하는 데에 이것을 사용하여 왔다. 즉 이것은 성경의 저자가 널리 믿어지고 있던 신화들을 개작하여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일각수 이야기는 시리아, 중국, 인도, 고대 그리스, 중세 유럽 등 세계 많은 지역들에서 전해져오고 있다. 항상 한 뿔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몸체(보통 유럽 이야기에서는 갈라진 발굽을 가진 말로서)는 양, 염소, 심지어 산토끼 같은 많은 다양한 모습들로 묘사되고 있다. 일각수와 관련해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는 고결함과 처녀성이다. 비록 그것은 야생이지만, 기도하는 처녀의 무릎에 머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그 뿔은 자신들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모두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잡을 수 있는 꼬챙이 끝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이 일각수를 조사했다. 그리고 코뿔소(rhinoceros)는 이 동물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거칠고, 추하고, 흙투성이의 머리를 가진 동물이 소녀의 하얀 옷이 있는 무릎에 머리를 두고 누워있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일각수의 뿔(unicorn horns)이 상당히 중요시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 뿔들은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선원들은 수컷 일각고래(narwhal)의 이빨이 물가로 밀려 올라온 것을 발견하였고 (일각고래는 북극 지방에 사는 고래로서 수컷은 하나의 긴 나선형으로 휘어진 어금니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한때 살았던 일각수의 남아있는 유일한 부분이었다고 가정했었다. 이것에 대해 엄청난 가격이 지불되곤 하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이것 하나에 10만 파운드를 지불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선박 수송이 더 광범위해지면서, 이들 일각수의 뿔들은 사실 고래의 이빨이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이것은 시장 가격에 극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성경에 ‘일각수(unicorn)’로서 기술된 동물은 무엇이었는가? 기억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성경의 저자들은 영감을 받았고 오류가 없이 기록하였지만, 번역은 또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사용된 단어는 re’em 이다. 이것은 monoceros, unicornis, unicorn, einhorn, eenhorn 과 같은 여러 단어로 번역되어져 왔다. 이들 모두는 ‘하나의 뿔(one horn)’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어 re'em이 하나의 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많은 유대 번역들은 그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남겨놓았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가리키는 동물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은 사실 re’em의 의미가 무엇일 것인가에 대한 강력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인의 부조(Mesopotamian reliefs)에는 앗슈르나시팔 왕(King Assurnasirpal)이 한 뿔을 가진 황소(oxen with one horn)를 사냥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 발굴되었다. 관련된 문헌들은 이 동물이 rimu 라고 불려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동물이 성경에 기록된 들소(wild ox)인 re’em 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아시리아인의(이집트인이 아닌) 그림에 한 뿔(one-horned)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던 이유는 rimu/re'em에 있는 이 매우 대칭적인 뿔들에 대해서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적인 방법에 기인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동물을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그 뿔들은 하나로 보여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이 최초로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아마도 번역자들은 rimu/re’em가 한 뿔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monoceros (one horn)으로 번역했다. 

진짜 re'em 또는 들소(wild ox)는 오록스(aurochs, Bos primigenius)로서 또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유명한 라스코(Lascaux, Cro-magnon)동굴 그림에서 묘사된 오리지날 야생 황소(wild bull)였다. 이 힘세고 무서운 짐승은 이제는 멸종되었고, 유전적으로 허약하게 된 후손들만이 목장에서 소(cattle)들로 살아가고 있다. 더 상세한 정보는 오록스에 대한 글 ”멸종된 오록스를 다시 창조하기(Recreating the extinct Aurochs?)”를 보라.


*“사람과 공룡이 함께 살았다는 증거들 8 : 유럽의 역사와 예술품에 등장하는 용은 공룡이었다!”에서 거의 끝 부분에 있는 “일각수가 새겨져 있는 트라키아인의 투구” 참조

http://creation.kr/Dinosaur/?idx=1294634&bmode=view


Further reading
Naaktgeboren, C., Unicorn—fact or fantasy? World Magazine, pp. 70–76, September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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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March 2004)

옛 히브리어 단어 re'em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은 KJV 성경 자체로부터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신명기 33:17절에서 모세는 요셉 자손들을 축복하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wild ox, Heb: re’em)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KJV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His glory is like the firstling of his bullock, and his horns are like the horns of unicorns: with them he shall push the people … .”

이 비유는 만약 비유하는 동물이 오록스(aurochs) 또는 들소(wild ox)라면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하고 긴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다른 모든 곳에서 re'em을 일각수(unicorn)로 결정했던 KJV 번역가들에게 딜레마가 있었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에서 ‘뿔들(horns)’이라는 단어는 복수형(plural)이다. 그러나 단어 re’em은 단수형(singular)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단수형으로 번역했었다면, 그것은 ”His horns are like the horns of a unicorn”로 읽었을 것이고, 이것은 일각수가 하나의 뿔보다 많은 뿔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분명히 용어에 있어서 모순이 된다. KJV 번역가들은 일각수에 있는 하나의 뿔과 소에 있는 한 쌍의 뿔들을 비교함에 있어서 불일치를 분명히 확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번역 시에 일각수의 복수형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KJV 마지막 노트에 기록되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unicorns’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히브리 원본에 대한 권위보다 영어 번역본의 권위를 더 인정한다면 몰라도, 이것은 re’em이 한 뿔을 가진 생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re’em은 또한 들소(wild ox)를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 참조 : 전설의 유니콘? 머리 ‘뿔’ 달린 멸종동물 화석 발견 (2016. 3. 23. 나우뉴스)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323601010

Unicorns in the Bible?

https://answersingenesis.org/extinct-animals/unicorns-in-the-bible/

The unicorn : The Bible does not refer to fantasy animals

https://creation.com/the-unicorn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creation.com/the-unicorn

출처 - Creation 14(2):14–15, March 1992.

미디어위원회
2006-08-31

아담과 이브의 혈액형은?

 (It's in your blood)

Don Batten 


질문 : 만약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라면,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혈액형을 가져야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4가지의 혈액형(A형, B형, AB형, O형)을 가질 수 있는가?

답 : 사람에게는 ABO 혈액형을 조절하는 하나의 유전자가 있다. 그리고 A, B, O의 3개의 대립유전자(alleles)가 있다. 유전자는 항상 한 쌍(한 쪽 부모에게서 하나씩)의 대립유전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두 개의 대립유전자가 항상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라도 가능한 유전적 구성은 AA, BB, AB, AO, BO, OO 로서 존재한다.


O 대립유전자는 A 또는 B에 비해 열성(recessive)이다. 즉 A 또는 B 대립유전자의 존재하에서 혈액형은 A 또는 B 대립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AO의 사람은 A형 혈액을, BO의 사람은 B형 혈액을, 그러나 OO의 사람은 O형 혈액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O형 혈액을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나 피를 줄 수 있는 공여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피는 A 또는 B 단백질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A, B 또는 AB 형의 사람들에게 피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A형 혈액이 B형 혈액을 가진 사람에게 수혈되었을 때, 알레르기 반응은 그 수혈자를 죽음으로 초래할 수도 있다.


남편과 아내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모든 대립유전자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A, B, O 대립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다음과 같은 유전적 구성들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AO 와 BO, 또는 AB 와 OO, 또는 AB 와 AO, 또는 AB 와 BO, 또는 AA 와 BO, 또는 BB 와 AO.

만약 아담과 이브가 유전적으로 AO 와 BO 였다면, 그들의 자녀들은 AB, AO, BO, 또는 OO의 유전적 구성을 가져서, AB형, A형, B형, 또는 O형 혈액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정말로, 그들 자녀들의 약 25% 정도는 각 혈액형 타입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유대인들의 전승처럼 56명의 자녀들을 가졌다면, 각 혈액형들은 약 16명씩 나타내었을 것이다.  

 

*참조 : ABO Blood and Human Origi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id/v4/n1/abo-blood-human-origins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its-in-your-blood

출처 - Creation 18(1):45, December 1995.

Bruce Malone
2006-06-24

물리학은 6일 창조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Physics Show That Six Day Creation is Possible)


      출애굽기 20:11절은 성경 기록 중에서 가장 믿어지기 힘든 구절 중의 하나이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하나님이 전 우주를 창조하시는 데에 얼마나 걸리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이 구절보다 더 명백히 표현할 수 있는 구절을 생각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절은 크리스천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우주론은 우주가 형성되는 데에 수십억 년이 걸렸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약 성경의 이 명백하고 직설적인 말씀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성경의 다른 말씀들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러셀 험프리 박사(Dr. Russell Humphreys, 샌디아 국립실험실의 물리학자)에게도 수수께끼였다. 그는 성경이 우주의 형성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연구함으로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는 ‘빅뱅(Big Bang)’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폭발의 결과라고 배워왔다. 이 폭발에 의한 팽창 동안, 우주의 모든 물질들은 작은 것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팽창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대의 모든 우주론 모델들은 우주는 중심도 가지고 있지 않고, 가장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가정들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과 연결될 때, 그 결과는 모든 위치에서 수십억년 된 팽창하고 있는 우주이다. 


험프리 박사는 이러한 임의적인 가정(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들로 출발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분명한 의미로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떤 우주 모델을 발전시켜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왜곡되어서는 안 되며, 이해가 안 된다고 필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서도 안된다. 성경은 ‘길 위에 남자’, ‘뛰어난 물리학자’, ‘신학자’ 와 같은 표현처럼 명백하고 분명한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것에 대해서 3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첫째, 지구(the earth)는 우주에서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함축적으로, 지구는 아마도 우주의 중심 부근에 위치할 수 있고, 따라서 사람은 모든 방향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주(물질과 공간 둘 다)는 ‘펴지고(stretched out or spread out)’ 있어왔다.(참조: 사42:5, 사45:12, 사51:13, 렘10:12). 셋째, 우주는 경계(boundary)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만약 이들 세 가정들이 현재 물리학에서 인정되고 있는 법칙들과 연결된다면, 그리고 수학적 연산들이 행해진다면, 우리들은 위치에 따라서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우주에서 살게될 수 있다.   


게다가 우주가 초기부터 팽창하고 있는 중임으로, 시간의 확장 효과(time dilation effect)는  엄청나게 확대되었을 것이다. 우주가 팽창됨으로서, 시간이 바깥 가장자리에서는 매우 빠르게 흘러가고, 중심 부근에서는 거의 멈춰있던 지점이 있었다. 우주가 팽창되는 이 지점에서, 중심부 근처는 단지 수 일이 지나갔지만 하늘에서는 수십억 년이 흐르게 될 수 있다. 이것은 현재의 물리학 지식에 기초한, 그리고 임의적인 가정들이 아닌 성경적 가정들에서 출발한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성경이 문자 그대로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적인 과학책들을 읽는 것을 통하여, 나는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이 사실일 수 없다는 신념에 곧 도달했다.” 가장 조롱을 받고 있는 성경 이야기(최근의, 문자 그대로의, 우주의 6일 창조)가 정확하게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통해 전적으로 가능할 수 있음이 밝혀진 그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참조 : .[신학과 과학의 만남] 시간의 창조 (上)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304/091972341623111111.html

.[신학과 과학의 만남] 시간의 창조 (中)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311/091973106623111111.html

.[신학과 과학의 만남] 시간의 창조 (下)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318/091973856923111111.html

.[신학과 과학의 만남] 태양창조 이전의 지구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729/091987829223111111.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drdino.com/articles.php?spec=31

출처 -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63

참고 : 2833|2834|2464|2274|514|334|35|914|3943|4428|4429|6281|6188|6577|6581

미디어위원회
2006-05-24

재생되는 갈비뼈 : 아담, 그리고 그의 ‘잃어버린’ 갈비뼈

(Regenerating ribs : Adam and that ‘missing’ rib)

Carl Wieland 


       연료를 가득 적재한 탱크차와 고속도로의 제한 최고 속도로 정면충돌한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나는 거기서 살아났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위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1]

병원에 있었던 5개월 보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수년간, 특히 얼굴 뼈 등을 포함하여 신체 여러 부분을 개조하기 위한 수술을 여러 번 받았다.[3]

이들 수술에서 때로는 이식을 위하여 내 자신의 뼈를 사용했다. 나는 성형외과 의사가 항상 내 흉곽의 오른쪽으로 가서, 수평으로 난 흉터 꼭 그 자리를 통해서만, 수술을 위한 뼈를 취하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왜 뼈가 바닥나지 않는지’를 물었다. 그는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더니, 그와 그의 팀은 매번 갈비뼈 전체를 끄집어낸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골막(periosteum)을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겨둡니다. 그러면 보통의 경우 갈비뼈는 다시 그 자리에 자라납니다.”

나는 가정의(家庭醫)의 훈련을 받고 시무도 했지만 새롭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전에는 이것을 전혀 몰랐었다. 골막(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뼈의 주변’ 이라는 뜻이다)이란 모든 뼈를 감싸는 막이다. 예를 들면, 양고기 다리를 갉아먹을 때 이빨 사이에 무언가 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골막에는 새로운 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세포가 들어 있다. 특히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 갈비뼈의 골막은 다른 어떤 뼈보다도 더욱 뼈를 재생시키는 굉장한 능력을 갖고 있다.[4]

흉부외과에서는 갈비뼈를 제거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면 대개 이들은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다시 자라난다. 재생되는 양은 갈비뼈를 제거할 때 얼마만큼 조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골막이 가능한 한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도록 잘 ‘벗겨내야’ 한다. 갈비뼈가 그러한 재생에 대한 이상적인 위치가 되는 주 이유는 거기 붙어있는 늑간(肋間)의 근육이 피의 공급을 잘 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의사가 처음에 내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나에게 즉시 떠오른 생각은 “와, 정말 멋지다. 아담은 결함을 가진 채로 돌아다닌 것이 아니구나!” 이었다. 창세기 2:21절에 하와의 창조에 관하여 이렇게 적혀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놀랍게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남자가 여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적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일부 반창조론자들은, 남자에게는 잃어버린 갈비뼈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사용하여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비웃고 있다.

내가 사고를 당하기 수년 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곤 했다 :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원형 톱에의해 손가락을 잃었다면, 그의 모든 자녀들도 역시 손가락이 하나 모자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딸들은 괜찮고 그의 모든 아들들만? 물론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DNA 명령은 글씨와 같은 암호의 형태로 들어있는데, 갈비뼈(혹은 손가락) 하나를 제거한다고 해서 그 암호화된 명령을 변화시키지 않으므로, 모든 자손은 갈비뼈(혹은 손가락)를 전부 갖게 됩니다.”

그런데 위의 모든 내용은 지극히 당연하고 꼭 들어맞지만, 갈비뼈가 다시 자라난다는 정보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차원을 덧붙여 준다. 하나님은 갈비뼈를 골막과 함께 설계하셨다. 그분은 오늘날에 갈비뼈가 다시 자라나듯이, 갈비뼈를 어떻게 제거하면 나중에 다시 자라나는지를 알고 계셨다. 특별한 종류의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다.[5]

아담은 그의 흉곽 안에 결함 부분을 한때 가졌을 뿐 영구적으로 가진 것이 아니며, 그의 생애의 수백 년 동안 당신과 내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수의 갈비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각주
1. 1986년 당시 충돌속도의 합은 시속 약 180km(112miles) 이었다.
2. 뿐만 아니라 그 당시 11살이었던 내 딸 리사(Lisa)는 기적적으로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3. 사고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나는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을 55번이나 받았다 (대다수의 경우 갈비뼈 제거를 포함하지 않음).
4. 성형외과 의사 David Pennington, 개인 서신, 5월 7일, 1999.
5. 물론, 진짜 특별한 기적은 살과 뼈로부터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왜 이런 방법을 택하셨을까? 왜 아담처럼 흙이나 혹은 단순한 요소로부터 직접 만들지 않으셨을까? 우리 모두는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구속받을 수 있다(고전 15:45). 따라서 하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0 

출처 - Creation 21(4):46–47, September 1999.

미디어위원회
2006-05-19

식물들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죽었는가? 

(Did Plants Die Before Adam Sinned?)

Dr. Kent Hovind


      젊은 지구론을 비판하는 휴 로스(Hugh Ross)같은 오래된 지구론자들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도 죽음(death)이 있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담이 식물들을 먹을 때에 식물들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 이전에 죽음이 있었는지를 결정하기 이전에, 우리는 생명(life)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할 필요가 있다. 식물들은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도 없고 '피(blood)'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과 동물들이 ”죽는(die)' 것과 같은 의미로 죽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식물을 사람과 동물들에게 먹을 거리로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29-30)

”....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8)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동물들을 사람의 먹을 것으로 추가하여 주셨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창 9:3-4)

'생명(life)'은 피에 있음에 주목하라. 식물은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또 다시 언급되어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레 17:11)

하나님은 가인이 땅의 소산인 식물(plants, fruits of the soil)로 드린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셨으나, 아벨이 양(lamp)으로 드린 제물은 열납하셨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창 4:3-5)

식물과 관련된 구절들에서 ‘피’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식물들은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죽지 않고, 시들고, 마르고, 쇠잔한다고 표현되어있다.

”... 저희는 마치 들의 풀 같고 나물 같고 지붕의 풀 같고 자라기 전에 마른 곡초 같으니라” (왕하 19:26) 

”...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르느니라” (욥 8:1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 37:2)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시 104:14)

생명은 땅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동물들은 항상 같은 종류의 부모들로부터 생겨난다.

”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사 42:15)

”...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렘 12:4)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creationtoday.org/plant-death/

          https://answersingenesis.org/death-before-sin/was-there-death-before-adam-sinned/

미디어위원회
2006-04-24

시간과 공간 내에서의 복음 

: 더 높은 차원과 기적, 그리고 인간의 한계

(The gospel in time and space)

Russel Grigg 


      현대과학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3차원(길이, 폭, 높이)이 실재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개념에 어려움이 없다. 이를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기 쉽게 해준다.


   성경은 하나님이 영원에 거하시며(사 57:15), 하늘에 거주하시고(예, 신 26:15), 또한 빛에 거하신다고(딤전 6:16) 말해준다. 편의상 우리는 이것을 합하여, 하나님이 하늘의 차원 또는 영원의 차원에 거주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3차원 공간(길이, 폭, 깊이)과 1차원 시간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1]


비록 하나님이 영원의 차원과 우리가 사는 우주에 편재하시지만(모든 곳에 존재하시지만), 그분은 또한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타나셨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성령은 창조시에 물 위를 이동하셨으며(창 1:2), 여호와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출 3:4-14), 아들 하나님은 성육신 하실 때에 영원의 차원을 떠나서(요 1:1-2, 빌 2:5-7)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세상으로 들어오셨다(마 1:18, 눅 1:35, 요 1:14).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는 문이 닫힌 방에 두 번 나타나신 것이 포함되며(요 20:19-30), 승천하실 때에 예수님은 우리의 세상을 떠나셔서 하늘의 차원으로 돌아가셨다(요 20:17, 행 1:9).

이 글의 목적은 평지(Flatland)의 우화를 이용하여 이들 현상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에 있다. [2]


평지(Flatland)

길이와 폭을 가지며 높이가 없는 2차원의 땅을 생각해 보자. 이를 평지(Flatland)라 부르며 그림 1에서 ABCD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에 O안의 ▲로 표시된 지적인 존재가 살고 있는데, 그들 모두는 역시 2차원만을 점유한다. 어느 날 평지의 사람이 일어나 보니까 누군가 미지의 사람이 자기들 땅을 가로질러 선 EF를 그려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그들의 나라를 사실상 두 개로 갈라놓았다. 왜냐하면, 높이의 차원이 없는 경우에는 아무도 그 선을 뛰어 넘거나 그 밑으로 터널을 뚫거나 하여 다른 쪽으로 건너갈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의 이쪽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저쪽에 있는 사람과 정보를 교환할 수 없다. 따라서 EF는 사상(事象)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다(부록1. box 안의 글을 보라). [3]


어느 날 ABFE 영역에 어떤 모양(발자국의 외곽선)이 나타났는데(그림 2), 평지사람이 생각하는 한 그것은 분명히 저절로, 그리고 아무 원인이 없이 생겨난 것이다. 다음번에 그 모양이 다시 나타났을 때, 평지사람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 주변에 선을 그렸다(그림 3). 2차원에 사는 평지사람들에겐 이것이 사상의 지평선이었으며, 이는 원으로 둘러싸인 영역에서는 밖으로 아무것도 나갈 수 없고 그 안으로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원의 일부를 제거하고 조사해 보았을 때 그 모양은 사라졌다. 이제 평지사람들은 세 가지의 상황을 처리해야 한다 :

1. 그 모양은 아무런 원인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2. 그 모양은 사상의 지평선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았다.
3. 똑같은 사상의 지평선이 평지사람들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이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낸 사람은 별난 성격을 가진 Zweisteinus 박사이다. 그는 먼저, 평지사람들에게 그들이 과학적 물질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상기시켰다. 즉, 그들은 평지의 2차원이 일반적으로 현실을 표현하는 전부라고 믿었으며, 그들의 생활양식은 이러한 비진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평지는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니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양은 그들이 알고 있는 길이와 폭이라는 2차원 이외에 최소한 세 번째 차원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지적해 준다고 말한다. 그는 이 세 번째 차원을 ‘고도’ 또는 ‘깊이’ 또는 ‘높이’라고 했다.


그는, 발바닥 모양을 만들었던 3-D의 존재는 2-D의 감옥(2-D의 사상의 지평선) 위로 발을 옮겨 놓는 것만으로도 자기 자신이 거기로 들어가기도 하며 나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3-D의 존재는 2-D의 평지사람들이나 구속시키는 2-D의 장벽에 못 들어가거나 못나올 수 없다. ‘2차원은 3차원의 인질을 잡아두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낮은 차원의 사람들에게는 그 이외의 차원이 있어야만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2] 따라서 3-D의 존재는 평지에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나타낼 수 있으며, 평지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상세히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다른 평지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들의 내부 ▲까지도 볼 수 있다.

이제 차원 이론(dimension theory)이라는 이 개념을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 사건과 관련시켜보자.


창조

창조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정보는, 공간과 시간의 밖에서, 그리고 그것(공간과 시간)들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 즉, 말씀(Logos)의 마음 가운데 존재했다(요 1:1, 그리스어 logos = 말씀). 즉, 모든 창조는 ‘창세전에’(엡 1:4, 벧전 1:20)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존재했으며, 따라서 영원의 차원에 존재했다. 하나님은 창조를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정보(및 능력)를 사상의 지평선을 통해, 각각의 양 또는 분량만큼씩, 창세기 1장에 기록된 6일에 걸쳐 보내셨는데, 이 사상의 지평선은 영원과 공간-시간을 가르는 것이다.

아담이 만들어지고 그가 죄를 짓기 전까지 그는 (차원적으로 말할 때) 혼성물(hybrid)이었다. 에덴동산에서 그는 영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걸었으므로, 따라서 그는 여러 차원의 영원에 대한 일부를 체험하였으나, 그는 역시 공간-시간 안에 존재했다. 그가 하나님께 불복종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그로 하여금 죄를 지은 상태로 생명나무를 먹고 영원히 사는 것을(창 3:22; 3:24) 막으셨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졌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다시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셨다. 아담의 죄가 인류로 하여금 하늘의 차원에 도달하게 하는 사상의 지평선을 닫아버린 반면, 죄 용서하심은 이 사상의 지평선을 열어놓는다. 이 용서는 죄의 값을 치러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온다. 이것은 오직 각 개인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는데(요 1:12; 17:23), 아담이 원래 가졌던 것보다는 훨씬 못 미치지만, 다음 세상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연합할 것이다.


부활 - 예수님이 나타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을 때, 그분의 부활하신 육체는 이 공간-시간 세상을 떠나셔서 영원의 차원으로 들어가셨는데, 수의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통과하셨다.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딴 곳에 감겨져 있어서(즉, 여전히 감긴 채, 시체를 썩지 않게 처리하는 데에 사용하는 몰약과 향료의 끈적거리는 혼합물로 인하여 뻣뻣한 채로), 사도 요한은 이를 보고 부활을 믿었다(요 19:39-40; 20:7-8). 비록 요한은 차원 이론을 몰랐을 테지만, 그는 사실상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초월하셨다는 것을 실감했다. 평지에서의 발자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는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전적으로 금지된 사상의 지평선에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문이 잠긴 방에 나타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실 수도 (예를 들면, 엠마오 도상에서처럼) 있었다.

승천하실 때(행 1:9) 예수님은 공간-시간과 천국의 사이에서 사상의 지평선을 통과하셨다. 지금은 신자들이 기도를 할 때에, 믿음에 의해 신자들에게 거하는 성령을 통하여, 올라가신 주 예수님께 다가간다(요 14:16-17).


천국과 지옥, 그리고 심판

사람이 죽을 때 그의 혼(soul)과 영(spirit)은 죽음이라는 사상의 지평선을 통과하여 이 공간-시간의 세상을 떠난다. 이것이 공간 및 시간이 끝나고 시간의 초월이 시작하는 경계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죽음 이후에는 천국 및 지옥과 다가올 심판이 있다고(히 9:27)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심판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이 세상에서의) 믿음에 근거하여, 우리가 최후에 천국으로 갈 지 지옥으로 갈 지를 결정한다. 천국과 지옥과 마지막 심판은 모두 영원의 차원 안에서 존재하고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모두 사상의 지평선 뒤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부록1 참고), 과학으로는 절대로 알아낼 수 없다.4) 그러나, 이것은 그것들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개념은 완벽하게 과학적이며, 그것들은 사실상 최고의 현실이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물질주의적 신조, 즉,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공간-시간 연속체가 유일한 실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합리한 것으로 보인다. 회의론자와 무신론자 등의 사람들은 위험을 각오하고 이것을 무시한다.    



References and notes

1. As our space-mass-time universe (sometimes called the space-time continuum) was created by God, He is therefore beyond or transcendent to it—i.e., not subject to its limitations (Genesis 1:1).

2. Adapted from A.E. Wilder-Smith, The Scientific Alternative to Neo-Darwinian Evolutionary Theory, Word for Today Publishers, CA 92704, USA, pp. 159–191, 1987. Used with permission.

3. Note that black hole event horizons are one-way, while the Flatland event horizon is two-way.

4. God, on the other hand, is omnipresent and intimately aware of all that we say and do (cf. the 3-D being vis-a-vis the Flatlanders). He is ‘nearer than breathing, closer than hands and feet.’ See Psalm 139:7–14.

 


(부록 1) 찬사 (A tribute)

여기서 제시한 평지(Flatland), 가외의 차원(extra dimensions), 사상의 지평선(event horizon) 등의 개념은 1987년에 고(故) 와일더 스미스(Arthur E. Wilder-Smith) 박사-교수(1915-1995)가 쓴 책, The Scientific Alternative to Neo-Darwinian Evolutionary Theory에서 나온 것이다.

와일더 스미스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그의 동년배 가운데 거물로서, 세 개의 박사 학위를 얻었다. 7개 국어를 마스터한 그는 또한 창조과학에 대한 최초의 사상가이며 위대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타 잘 알려진 그의 작품으로는, Man's Origin, Man's Destiny, He Who Thinks has to Believe, The Creation of Life, The Natural Sciences Know Nothing of Evolution 등이 있다.

평지(Flatland)에 대한 생각은 (비록 기독교인들이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1884년에 에드윈 아보트(Edwin Abbott)가 Flatland: A Romance of Many Dimensions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주장했다.



(부록2) 다차원과 하나님 - 경고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차원 이외에 또 다른 차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성경적인 개념을 보다 확실하게 해주는 흥미로운 방법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때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순간마다 변화하는 관점에 끼워 맞추려고 하는 등 생각이 지나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급진적인 창조론자’(그들 역시 와일더 스미스의 ‘평지’ 개념을 종종 사용한다)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확하게 10차원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며, 이 발견은 다소간 성경을 확증해준다고 생각하게끔 하고 있다.

첫째로, 이것에 관하여 얘기해 주는 성경적 가르침은 없다. 둘째로, 이 불확실한 관념은 끈 이론(string theory)라고 하는, 고도로 추상적이며 이론(異論)이 분분한 분야의 물리학에 근거한 것이다. 이 이론은 11차원을 가정하는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 이론 역시 실험적인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이론의 제안자에 따르면, 이들 가정상의 차원 중 일부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상당히 작은 공간으로 말려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이 사고(thinking)에 있어서 오늘날의 과학(예를 들어, ‘빅뱅’, 10차원 등등)과 결혼한다면 내일은 홀아비/과부가 될 것이라는 말이 맞다.



(부록 3) 블랙홀과 사상의 지평선

우주비행사들이 달에 갔을 때, 그들의 우주선은 속도가 소위 탈출속도라고 하는 11.2km/sec(25,000mph) 이상이어야 했다. [1] 그래야만 지구의 중력이 잡아당기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질량이 충분히 큰 항성을 생각해 보자. 그 중력이 매우 커서 탈출속도가 빛의 속도인 300,000km/sec (186,000 miles/sec)이 되기 전까지는 중력 붕괴(천체가 중력의 작용으로 수축해 가는 현상)를 받는다고 생각하자.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원리로 예측해 보면 그러한 영역에서는 공간이 매우 만곡되어 빛이나 혹은 그 아무것도 탈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항성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따라서 근처에 있는 물질에 미치는 중력의 영향으로만 그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 결과는 블랙홀이 될 것인데,[2] 스테픈 호킹(Stephen Hawking)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중력이 매우 강해서 그것으로부터 심지어 빛까지도 탈출할 수 없는 공간-시간의 영역” [3]

빛의 광선이 밖으로부터 블랙홀 근처로 향한다면, 블랙홀의 중력 인력에 의하여 편향될 것이며, 아주 근접한다면 블랙홀 주변의 궤도로 들어올 것이다. (그것이 블랙홀로 향한다면, 흡수될 것이다.)

블랙홀의 경계, 즉, 외부로부터의 빛이 궤도로 들어오는 곳, 또는 블랙홀 안으로부터 빛의 광선이 탈출하기를 실패하는 그곳을 사상의 지평선이라고 한다. [4, 5] 그것은 블랙홀 주변의 돌아오지 않는 점을 나타낸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어떤 사상의 발생이라도 전달할 수단이 없으므로, 아무런 사상도 이 영역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랙홀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그 밖에 있는 관측자가 알 수 없으므로 과학으로는 알 수 없다. 이런 현상을 ‘우주의 검열(censorship)’이라고 한다.[6]


References and notes

1. 탈출속도란 동력이 없는 물체가 행성 또는 항성의 중력장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속도이다. 그것은 다음 식ve = √2GM/R 로 주어지며, 여기서 G는 만유인력상수이고, M은 행성 혹은 항성의 질량이며, R은 그 반지름이다.
2. ‘블랙홀은 단순한 이론적인 개념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수많은 실험적 증거로서 뒷받침 된 일반상대성으로부터 직접 예상한 것이다.’ Russell Humphreys, Starlight and Time, Master Books, CO. 80936, USA, 1994, p. 22.
3. Stephen Hawking, A Brief History of Time, Bantam Books, London, 1988, p. 194.
4. Ref. 3, p. 90.
5. 블랙홀 주위의 사상의 지평선의 반지름을 Schwarzschild 반지름이라고 하며, 다음 식 RS = 2GM/c2로 주어진다. 여기서 c는 진공에서 빛의 속도이다. 그것은 독일의 천문학자 Karl Schwarzschild(1873-1916)의 이름을 딴 것인데, 그는 1916년에 방사능을 방출하지 않는 붕괴된 항성체의 존재를 예측했다. 만약 태양이 블랙홀로 붕괴된다면 그 사상의 지평선의 반지름은 3 km(2 miles)밖에 안될 것이다.
6. Ref. 3, p. 93.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1/i2/gospel.asp 

출처 - Creation 21(2):50–53, March 1999.

권영헌
2006-04-24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정보 이론적 접근 

(Information Theoretic Approach to Providence of God)


요지

"하나님의 섭리하심의 방식이 물리적(physical)이며 모든 정보(information)는 양자 상태(quantum state)로 표현 된다"라는 가정 하에 우주 내의 모든 물질이 얽힘 상태(entangled state)로 존재한다면 시간적, 공간적 제약 없이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가능함을 보인다. 이는 얽힘 상태를 이용하여 선택내용의 결과가 공간적, 시간적 제약 없이 전달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양자역학의 중요 정리인 삭제 불가정리(No deleting Theorem)와 복제 불가정리(No cloning Theorem)에 따라 얽힘 상태의 수를 감소시킬 수도 증가시킬 수도 없음을 살펴본다. 이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무지(無智)의 이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설명할 수 있는(실제와 매우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법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Abstract

We assume that Providence of God might be physical and every information is expressed in the quantum state. Under the assumption, if everything in Universe exists in entangled state, we find that God can control everything without any limitation. It implies that the result of selection can be transmitted by the entangled state, without spatial and temporal limitation. We can see that ,according to No deleting theorem and No cloning theorem, there cannot be any change in numbers of entangled state. It means that even in our ignorance there exists an method to explain Providence of God.


출처 - 창조과학 학술지 2005 제2권 제1호 PP. 11-15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263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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