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빛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 창 1:15절은 성경의 오류인가?
(Contradictions : By the Light of the Moon,
Does Genesis 1:15 say that the moon emits its own light?)
John UpChurch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15)
오랫동안 회의론자들은 이 구절을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해왔다. 성경이 정말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달이 빛을 비추라(방출하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실수를 범하지 않았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달은 어떤 종류의 빛도 방출하지 않는다. 대신에 암석질의 달은 단순히 태양빛을 반사할 뿐이다.
달이 열발광(thermoluminescence)을 통해서 자신의 빛을 생성한다는 일부 주장도 있지만, 이 구절에 대한 그러한 색다른 설명을 조사할 필요가 없다. 사실, 우리의 현대적 어휘를 살펴봐도 이 주장되는 모순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지구 중심적으로 말하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우리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며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태양이 뜨고, 태양이 진다 라고 말한다. (기상예보 시에도 일출 시각과 일몰 시각으로 표현한다). 또한 우리는 별들이 항상 그곳에 있음을(태양빛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임을) 알면서도 밤에 별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주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말할 때가 있다.
우리가 볼 때, 달은 지구로 빛을 비춘다. 태양빛이 달 표면에 부딪쳐서 지구로 반사됨으로서 말이다. 창세기 본문은 달이 자체적으로 빛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하거나 제시하지 않고 있다. 사실 말하고자 하는 점은 빛의 근원(출처)이 아니라, 지구에 빛을 비추고 있는 상태이다. 하나는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것은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 만약 달이 빛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근원이었다면, 달이 주관하는 시간은 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거울을 가지고 우리 눈에 빛을 반사시켰을 때를 상상해보면 이 개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거울은 빛의 근원이 아니다. 그러나 거울은 순간적으로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빛을 비춘다. 이것은 성경 비판론자도 인정할 것이다. 그 빛이 어떤 사람의 눈을 일시적으로 멀도록 했을 때, 그 빛이 어떻게 사람의 눈에 도달했는지는 빛의 근원만큼이나 중요할 수 있다.
문맥 밖으로 떼어내어 그 구절만을 본다면 회의론자들의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문맥 안에서(창 1:14-18) 읽으면 그 구절의 목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태양과 달을 창조하실 때, 빛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징조와 계절(seasons)과 날(days)과 해(years)를 나타내도록 하셨다. 태양과 달은 이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작동되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측 과학을 통해서 이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의 목적은 세부사항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그리고 원시적 인간을 위한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신 개관과 그 이유를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빛을 비춘다는 묘사는 상세한 설명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이다.
이 구절이 전하고 있는 진정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두 놀라운 천체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을 기억하게 한다. 이 구절은 우리(지구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태양과 달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그것들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정확히 알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answersingenesis.org/astronomy/moon/by-the-light-of-the-moon/
출처 - AiG, July 20, 2009.
창세기와 축축했던 사하라
(Genesis and a 'Wet' Sahara)
by Brian Thomas, Ph.D.
한 팀의 연구원들은 위성사진들에 대한 지화학적 분석을 통해서 지금은 모래에 파묻혀있지만 한때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Sahara desert) 가운데에 있었던 한 호수와 하천에 대한 존재를 입증하였다.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게재된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사하라 호수로부터 지중해까지 이르러있는 담수가 흘렀던 통로(freshwater corridor)를 발견했다는 것이다.[1]
중동(Middle East)은 항상 그렇게 건조하지 않았다. 그곳의 기후는 과거에 훨씬 습윤했다. 이것에 대한 많은 지질학적, 고고학적, 역사적 증거들이 존재한다. 북아프리카의 암석 노두들에 새겨진 암각화들에는 푸른 초원에 한 떼의 큰 포유동물들과 악어들이 살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뜨겁고 건조해져서 그러한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2] 담수 통로의 발견은 중앙아프리카에서 진화되어졌다고 추정되어지는 초기 인류의 가능성 있는 이주 경로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한때 중동지역이 물들이 풍부했던 축축한 지역이었다는 위성사진들과 지화학적 발견들은 또한 창세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숙고해 보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또한 출애굽기 33:3절에는 푸르른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약 성경의 이러한 기록이 정확한 것이라면, 오늘날 대부분이 건조한 어떤 지역들은 과거에 식물들이 무성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사하라에서 발견된 증거가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만약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논리적으로 인류의 기원과 같은 성경 기록들도 신뢰할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역사 기록들은 불완전하다. 그리고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든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리고 단지 화석들만 가지고 과거를 정확하게 복원할 수 없다[3]. 그러나 기원에 관한 질문들이 생겨날 때, 성경은 과거를 재구성하기 위한 신뢰할만한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류의 기원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목적과 운명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주고 계시는 것이다.
References
1. Osborne, A. H. et al. 2008. A humid corridor across the Sahara for the migration of early modern humans out of Africa 120,000 years ago.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5 (43): 16444-16447.
2. Vardiman, L. 2008. A Dark and Stormy World. Answers. 3 (4): 80.
3. Morris, J. 2008. Creation Evangelism. Acts & Facts. 37 (11): 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4174/
출처 - ICR, 2008. 11. 3.
삼위일체 우주
(The Tri-Universe)
Dr. Henry Morris
이전의 ‘창세기로 돌아가자(Back to Genesis)’ 컬럼 란의 '삼위일체의 놀라운 진리(The Wonderful Truth of the Trinity, Acts & Facts, November 2005)”라는 제목의 글에서, 삼위일체 하나님(Trinity)에 대한 성경적 교리와 그것에 대한 성경의 핵심 구절들을 함께 간략히 기술했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3 페이지의 글로는 분명히 불가능하다(이 주제에 관한 한 권의 책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본질적 진리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은 한 분의 하나님(one God)으로서, 성부(Father), 성자(Son), 성령(Holy Spirit)의 세 위격(three Persons)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확실히 가장 독특한 것이다. 이것은 세 명의 하나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다. 성경 속에 사용된 '하나님(God)”이란 단어는 가장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성자와 성령 역시 하나님으로서 인식된다. 이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세 분의 분명한 개체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실 수 있는 세 가지 모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틀린 발상이다. 예를 들자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서로 대화하시는 기록이 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들의 생각으로 완전히 이해되기는 어렵다(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장으로부터 그것을 믿어야 한다. 회의론자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비웃을 수 있다. 왜냐하면 1+1+1은 1이 아니라 3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세 위격의 한 하나님) 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순전하게 잘 믿고 있는가?
셋이 하나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자체가 삼위일체인 거대한 우주(universe)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우주는 놀랍게도 각각이 또한 많은 삼위일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설명을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우리 인간들이 이해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하나의 모델로서(또는 유형이나, 유사하게) 우주를 창조하셨던 것은 아닐까?
숙고해 보라. 창조된 우주는 공간(Space), 물질(Matter), 시간(Time)이 서로 조화되면서 전체를 나타내고 있는 삼위일체 우주로 되어있다. 우주는 부분적으로 공간만으로, 부분적으로 물질만으로, 부분적으로 시간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삼위일체는 3인조 또는 3화음이 아니라, 삼위가 하나를 의미하며, 각 부분이 전체를 구성한다. 그래서 3개 모두가 전체를 만드는 데에 요구된다. 그래서 우주는 공간 모두, 시간 모두, 그리고 물질(물질의 한 형태인 에너지를 포함하여) 모두로서 이루어진다. 사실 많은 과학자들은 우주를 공간-물질-시간의 연속체로서 말하고 있다.
더군다나 세 구성 요소의 논리적 순서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삼위일체 우주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공간은 우주 모든 곳의 배경으로서 어느 곳에나 편재한다. 그러나 물질(그리고 에너지)은 우주의 실체로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은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공간, 물질, 시간 대신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대체해서 집어넣고 위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라. 정확히 그 뜻이 통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은 삼차원으로 되어있고 각 차원은 모든 우주에 충만하기 때문에 공간은 그 자체가 삼위일체이다. 공간의 어떤 부분의 크기는 삼차원(가로, 세로, 높이)을 함께 곱함으로서 얻어질 수 있다. (삼위일체 수학은 1+1+1=1 이 아니라, 1×1×1=1 이다). 더 나아가, 공간은 일차원에서 확인되며, 이차원에서 보여지고, 삼차원에서 체험된다. 같은 문장에서 일차원, 이차원, 삼차원 대신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대체해 보라.
마찬가지로, 시간은 미래, 현재, 과거로 구성되어 있다. 미래는 시간의 보이지 않는 근원이며, 현재는 순간순간 명확히 볼 수 있고, 과거는 이해될 수 있다. 다시 한번 미래, 현재, 과거의 단어들을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대체해서 읽어 보라.
마지막으로, 물질은 보이지 않으나 모든 곳에 편재하는 에너지이며, 여러 형태의 측정할 수 있는 움직임으로 관측되며, 관련 현상들을 통해 체험된다. 예를 들어, 빛 에너지는 빛의 파동을 만들어내며 빛을 봄으로서 체험된다. 소리 에너지는 음파를 발생시키며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음으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우주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관계를 모델화하여 각 요소들의 내부적 관계들을 맺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삼위일체들의 삼위일체(trinity of trinities)’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다”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앞에서 주의를 준 것처럼).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놀랄만한 사실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리고 그분 자신을 반향하여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일부분이라도 설명할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사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른 어떤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앞에서의 몇 개 단락은 ‘방어자의 스터디 성경(The Defender's study Bible, 헨리 모리스 저)’에서 로마서 1:20절을 지지하는 각주로부터 주로 인용되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이 놀라운 유사성은 고든 대학(Gordon College)의 전 총장이었던 나단 우드(Nathan H. Wood) 박사가 쓴 책 ‘우주의 비밀(Secret of the Universe)’에서 처음 확인되어진다. 그 책은 20세기 초의 가장 위대한 영국의 성경주석가 중 한 명인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 박사가 매우 칭송하는 서문을 썼던 책이다. 또한 그 책은 1978년 크레겔(Kregel)에 의해서 ‘우주의 삼위일체(The Trinity of the Universe)’라는 제목으로 재인쇄 되었다.
그러므로 물리적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삼위일체들의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 우주인 생명체는 어떠한가? 많은 주석가들이 사람은 몸(body), 혼(soul), 영(spirit)의 삼위일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들 각 실체들은 실재하며 구분된다. 그러나 각각이 완전한 사람 안에 포함된다. 기도의 사람 바울은 최초에 쓴 서신서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3-24)
‘혼(soul)’은 사람의 한 부분으로 몸을 활동하도록 하는 실제적 생명(life)이다. 그리고 ‘몸(body)’은 물질들의 구성체로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이 둘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구절은 레위기 17:11절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the life of the flesh is in the blood)”. 이 구절에서 ‘생명(life)’이라는 단어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혼’과 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몸을 통한 피의 순환이 몸에 생명을 유지시켜준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편 몸의 영(spirit)은 몸의 ‘호흡(breath, 생기)’ 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호흡’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헬라어의 신약에서 ‘영’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끔 혼과 영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혼과 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히브리서 4:12절에서 확인되고 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히 4:12).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이다(창 1:27). 하나님의 호흡(생기) 때문에 흙으로 된 사람의 몸과 살아있는 혼에 하나님의 형상이 불어 넣어진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사람의 이러한 유사성은 꽤 명백해 보인다. 혼은 몸의 생명이 된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으나, 사람의 존재와 행동들에 기초가 된다. 이에 반해 몸은 혼의 보여지는 만져질 수 있는 현시(manifestation)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람의 영은 (혼처럼)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도 없지만, 도덕적 및 심미적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하나님과 이성적으로 교감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동물들도 또한 혼(즉 생명)과 몸과 영(단지 호흡의 의미에서)을 소유한다. 동물들도 본능의 수준을 넘어서서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서 다른 동물들과 심지어 사람들과도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한, 동물들은 도덕적이거나 정신적인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태초에 동물 삼위일체가 사람 삼위일체와 비록 관련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거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죽음은 사람과 동물 모두에서 발생하고,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고, 인생의 혼(영, spirit)은 위로 올라가서.... 신(영, spirit)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전도서 3:20-21, 12:7).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울의 기록과 일치된다.
어쨌든 우리는 사람 생명체와 동물 생명체가 사실상 삼위일체(논리적으로 삼위일체의 순서를 가진 3개의 구성요소가 각각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로 구성되어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회복될 것이나, 동물(몸, 생명, 호흡)은 그렇지 않다. 오직 남자와 여자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우주에서 삼위일체의 모습들은 현저하게 퍼져있고, 창조된 생물체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물론 어떤 것도 완벽한 것은 없다. 어떠한 삼위일체 모델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만큼 완벽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주는 실제로 각각의 삼위일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각 단위는 각기 자신의 기능을 가지고 구별된다. 그러면서 이들 세 개의 요소들은 모두 전체의 구성을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각각은 전체에 퍼져 있다.
피조물들에 나타나 있는 이들 삼위일체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완벽하게 반향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멋진 그리고 현실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놀라운 사실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됨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나의 설득력 있는 설명은 우주 만물이 삼위일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신중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2590/
출처 - ICR, BTG 204, 2005. 12. 1.
강력한 생쥐가 태어났다.
(Mighty Mouse Has Arrived)
David F. Coppedge
BBC News의 한 보도(2007. 11. 2)에 따르면,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의 유전학자들은 쳇바퀴(treadmill)에서 멈추지 않고 6시간 동안이나 분당 20m의 속도로 5-6km를 달릴 수 있는 유전공학적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생쥐들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리처드 한슨(Richard Hanson) 교수는 설명했다 : “그들은 물질대사 측면에서 피레네 산맥을 자전거로 넘었던 란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주로 지방산(fatty acids)을 이용하고, 매우 소량의 젖산(lactic acid)을 만듭니다.” 또한 그 쥐들은 더 긴 수명을 가지며, 평범한 생쥐들보다 더 늦게 짝을 짓습니다. 그 비밀은 어떤 한 유전자의 과도 발현에 의해서 증가되어 만들어진 세포 안의 발전소(powerhouses)들에 있다는 것이다 :
“이들 생쥐들의 근육에는 훨씬 많은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작은 ‘엔진’들이다. 몇몇 이유로, 미토콘드리아의 수는 친척들의 근육에 있는 것보다 대략 10배 정도 더 많다.”
만약 이 기술이 사람에게까지 적용되어진다면, 올림픽 경기는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올림픽은 최고의 유전공학적 처치를 받은 사람들이 수상하게 될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성취가 가능하다면, 이것은 고대인(ancient people)들에 대한 어떤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에는 수백 년을 살았으며, 80대에 첫 아이를 얻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우리는 60kg의 허약한 인류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 유전공학적 재료를 콜라나 사이다에 넣을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보자.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7/11/mighty_mouse_has_arrived/
출처 - CEH, 2007. 11. 6.
성경은 오류로 가득한가?
(I'snt the Bible Full of Errors?)
Paul Taylor
아마도 당신은 나와 같은 유사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에, 나는 성경이 모순된 것들로 가득하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인터넷에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내가 그에게 성경의 모순(contradiction)을 3가지라도 지적해보라고 했을 때, 그는 40여 가지 이상을 제시했다. 나는 성경의 오류(errors)라고 지적한 각 항목들에 대해서 하나씩 답변을 게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30초도 안 되어 나의 대답이 난센스라고 말했다. 나중에 나는 그의 목록이 한 웹 사이트로부터 가져온 것임을 발견하였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은 자주 성경을 믿지 않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 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성경을 읽지 않았거나, 실제로 그것이 모순인지 아닌지를 세밀하게 분석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명백한 모순으로 보이는 구절을 읽게 될 때, 기독교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 글에서 나는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되어지는 3 가지의 사례를 사용해서, 이 주제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그 3가지 부류는 모순이 아니거나(false contradictions), 잘못된 번역(mistranslations)이거나, 세속적 과학에 근거한 소위 과학적 오류(scientific errors)라는 것들이다.
비모순의 법칙
성경은 비록 오랜 기간에 걸쳐서, 다양한 그룹의 저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이라는 진정한 한 분의 저자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순되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 분의 말씀은 진실로 모순되는 점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만 한다.
한 전문가가 말한 것처럼,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시라면... 성경의 두 부분이 서로 반대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여질 때, 이 두 부분 또는 한 부분에 대한 우리의 해석(our interpretation)에 오류가 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1]
많은 추정되는 불일치들은 두 구절을 서로 잘못된 반대(false opposition)로 위치시킬 때임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도서 7:29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편 51:5절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전도서 7:29절의 말씀은 원래 정직하도록 창조되었던 아담과 이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 왕은 아담의 타락한 후손들 중 하나로서 그의 개인적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모순은 없는 것이다.
잘못된 번역
성경을 공격하는 주장들은 자주 번역작업 동안에 생겨난 일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만약 당신이 성경 원문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직접 찾아보거나, 그 언어들을 다룰 수 있는 동료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레위기는 박쥐(bats)를 ‘새(birds)’로서 기술하고 있다 :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찌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레위기 11:13-19)
만약 당신이 좋은 번역본을 가지고 있다면, 의심스러운 단어를 간단히 다른 구절들과 비교해 봄으로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서 킹제임스 성경(the King James Version, KJV)은 ‘birds’ 대신에 ‘fowls’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fowls’ 이라는 단어는 다시 20절에서 ‘곤충(insects)’을 묘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명백히 ‘insects’라는 단어는 현대적 의미에서 ‘birds’가 아니다. 따라서 당신은 히브리어 성경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히브리어로 그 단어는 ‘owph’ (Strong’s reference number 05775) 이다. ‘owph’를 번역한 ‘새’ 라는 단어도 좋은 번역이지만, 원래 뜻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 ‘날개를 가진 생물(a winged creature)’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단어는 새, 날아다니는 곤충, 박쥐 등에 사용되어질 수 있는 단어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날아다니는 파충류(flying reptiles)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오류들?
성경 비판가들은 흔히 세속적 과학자들의 생각을 근거해서 성경을 공격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 구절들이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 얼마나 모순되는 지를 찾고자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모세는 곤충의 다리를 4개로 말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곤충의 다리가 6개인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레위기 11:20-23절에서 모세는 말했다 :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찌니, 곧 그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레위기 11:20-23)
사실 이 구절이 오류라고 생각하기 전에, ‘네 발로’ 라는 어구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지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전체 발의 수를 가리키는 것 보다는, 생물체의 걸어가는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성경은 메뚜기와 유사한 곤충들의 행동을 매우 정확히 기술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곤충들은 정말로 네 발을 가지고 기어(creep) 다닌다. 그리고 또 다른 두 발(뛰는 다리)로는 도약(leap)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저자가 새가 무엇처럼 보이는지 잊어버렸다거나, 메뚜기의 다리 수를 잘못 세었을 것이라는 가정들은 매우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세(Moses)는 바로의 궁전에서 그 당시에 가장 훌륭한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 이유 하나만 가지고도, 성경에 대한 편견이 없는 독자라면 모세가 어떤 단어들을 선택했을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저자들이 진실을 말했을 것이며,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 했는지를 저자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론
오류로 보여지는 성경 구절들을 해결하는 데에 동일한 방법들이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즉각적인 설명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성경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믿음 위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그리고 좀 더 배우고 살펴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지(ignorance)와 교만을 청소해 내기만 한다면, 모든 경우에서 논리적인 설명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오류를 범하셨다는 생각은 가능성이 없는 생각이다.
*Paul F. Taylor graduated with his B.Sc. in chemistry from Nottingham University and his masters in science education from Cardiff University. Paul taught science for 17 years in a state school but is now a proficient writer and speaker for Answers in Genesis-UK.
Reference
1. Boice, J. M., Foundations of the Christian Faith (Downers Grove, Illinois: IVP, 1986), p. 91.
*참조 : Get Answers: Countering the Critics
https://creation.com/countering-the-critics-questions-and-answers
Countering the Critics Questions and Answers
https://creation.com/countering-the-critics-questions-and-answers
Apologetics Press : Alleged Discrepancies
https://apologeticspress.org/category/alleged-discrepancies/
Biblical Inerrancy
https://apologeticspress.org/biblical-inerrancy-416/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isnt-the-bible-full-of-errors
출처 - Answers Magazine, 2007. 9. 24.
과학과 편견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9-12)
“For we know in part, and we prophesy in part; but when the perfect comes, the partial will be done away. When I was a child, I used to speak as a child, think as a child, reason as a child; when I became a man, I did away with childish things. For now we see in a mirror dimly, but then face to face; now I know in part, but then I shall know fully just as I also have been fully known.” (1 Corinthians 13:9-12, NASB)
인간은 모순과 편견을 딛고 산다고 할 수 있다. 객관성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과학 분야에도 편견은 많이 있었고, 있으며, 또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존하고 있는 몇 가지 과학에 있어서의 편견을 지적하고 그 형성원인과 영향 등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온도의 눈금에는 섭씨와 화씨가 있다. 섭씨눈금은 1742년 셀시우스(Celcius)가 1기압에서 물의 빙점과 비점을 각각 0℃와 100℃로 정하여 만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비교적 편리한 것의 하나지만 그 뒤 발견된 절대온도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온도이다. 인간에게 물로 된 바다가 없고 대신 암모니아로 된 바다가 있었다면, 암모니아의 빙점인 -77.7℃를 0도로, 비점인 -33.4℃를 100도로 택했을 것이다. 화씨온도는 더욱 큰 편견을 가지고 있다. 1714년 파렌하이트(Fahrenheit)가 수은온도계를 만들고 눈금을 새길 때, 그 당시에 얻을 수 있었던 최저온도를 0℉로 하고 자기의 체온을 100℉로 하였다. 그 결과, 물의 빙점은 32℉가 되고 비점은 212℉가 되었다. 인간의 정상체온은 98.6℉이므로, 온도계의 눈금을 매길 당시의 파렌하이트는 아마 열이 좀 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자구조를 공부하는 사람은 1s, 2p, 3d 등으로 전자궤도를 표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차례대로 a, b, c, d라 하지 않고 왜 s, p, d, f라 했을까? 이것도 과학자들의 편견이 빚어낸 결과의 하나이다. 1930년경의 분광학자들은 스펙트럼선을 연구하면서 sharp, principal, diffuse, fundamental 등의 형용사로 그 이름을 붙이고, 그 첫 글자를 따서 s, p, d, f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 뒤에 발견된 것은 알파벳 순서를 따라 g, h, i 라고 이름 지었다. 이것이야말로 폴링(Pauling)이 지적한 대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등신같이 만들어 놓은 것’(So poorly did foolish Gelehrte have it.)이다. 첫 글자를 따 보라. s, p, d, f, g, h, i가 된다. 그러면서도 이런 이름을 붙인 다수의 학자들이 각각 노벨상을 받았다.
그 다음으로는 주양자수 1, 2, 3에 따른 전자껍질의 이름을 K, L, M 껍질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들 수 있다. A, B, C라고 하지 않고 K부터 시작한 것은 영국의 물리학자 바클라(Barkla)의 짓이다. 그는 1911년 몇 가지 금속판에 X선을 비춰서 그 투과력을 측정하였다. 구리판에서 얻은 복사선 중에서 투과력이 더 강한 것은 K, 약한 것은 L이라 하고, 그보다 투과력이 더 큰 것이 나타나면 A부터 차례로 이름 붙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K보다 투과력이 더 강한 복사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바클라가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K와 L을 택한 것이나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도 역시 노벨상을 받았다.
원자번호 2번인 헬륨(helium)은 희랍어 helios(태양)에서 이름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구의 대기층에 있는 헬륨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전혀 아니다. 지구가 탄생할 당시 태양에서 얻어 나온 헬륨은 이미 우주공간으로 다 흩어져 버렸고, 지구에 있던 방사성물질이 알파붕괴를 할 때 생긴 헬륨만이 공기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묵과할 수 있다고 하지만 끝이 ‘ium’으로 된 것은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불활성기체는 헬륨을 제외하고는 모두 ‘on’으로 끝난다. 네온(neon), 아르곤(argon), 크립톤(krypton), 크세논(xenon), 라돈(radon) 등이 다 그렇다. 그런데, 헬륨만은 나트륨(sodium), 마그네슘(magnesium), 이리듐(iridium) 등의 금속원소와 같은 어미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1868년 로키어(Lockyer)가 이 원소를 발견했을 때 금속이라고 생각하고 붙인 이름이다. 헬륨이란 태양에 있는 금속이란 뜻이다. 태양의 스펙트럼에서는 헬륨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수소와 리튬(lithium) 사이에 있으니까 당연히 금속이라 생각한 것이다. 남자에게 ‘숙’이나 ‘자’ 자로, 아니면 여자에게 ‘식’이나 ‘수’라고 이름 붙인 것과 같다. 더 좋은 이름을 짓는다면 헬리온(helion)이라고 해야 하나, 이미 헬리온은 헬륨의 원자핵(알파입자)의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1811년 아보가드로(Avogadro)는 ‘같은 조건 하에서 같은 체적의 기체에는 같은 수의 분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가설을 발표하였으나, 돌턴(Dalton)을 비롯하여 그 당시의 세계적인 과학자들은 이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실험보다 이론이 앞섰던 그 당시에도 분자니 원자니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론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현대의 과학은 그 정반대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실험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으나 이론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이론과학이 더욱 발달하여 다시 실험과학을 앞지를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자연과학사도 인류역사와 마찬가지로 나사선 함수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다. 인류역사를 나사선 함수로 보는 가장 간단한 실례로는 여자의 옷차림을 들 수 있다. 옛날 역사의 시작 무렵에는 발가벗고 살다가 중세에는 완전히 가리고 살았다. 그 뒤에는 차츰차츰 벗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옛날처럼 완전히 싹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벗는 것이다. 그래서 원함수라기보다 나사선 함수로 보는 것이다.
1887년 마이켈슨(Michelson)과 몰리(Morley)는 우주에 에테르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엄청난 비용을 들여 거대한 실험을 하였다. 그러나 이 실험결과는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실패했기 때문에 이 실험은 물리학사상 최대의 실험으로 평가받게 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낳게 되었다. 편견 중에서는 그 결과가 너무도 찬란한 것의 하나라 하겠다.
이렇게 여러 가지의 편견이 형성되고 그들이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공존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편견이 귀찮기는 하지만 때로는 편리한 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익숙한 것이 10진법인데도 시간은 60진법을 쓴다. 하루는 스물 네 시간이며 크고 작은 달이 있고 해마다 달력을 바꿔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복잡한 진법을 그냥 쓰는 것은 고치기가 힘들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런 대로 편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편견의 형성원인 중에서 무시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정치적 또는 사회적 압력이다. 중세기에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한 학자들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사회적 압력 중에서 비교적 근대의 예로는 노벨상을 들 수 있다. 노벨상을 받으면 세계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지만 노벨상 자체도 그리 공정한 것이 되지 못한다. 주기율표를 발견한 멘델레예프(Mendeleev)는 분명히 제1회 노벨상을 받아야 했지만 제외되었고,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 때문에 노벨상을 받은 게 아니라 빛의 양자설로 받은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노벨상을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한 말도 이해가 간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불확정성원리에 의하면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자연계에는 어떤 방법을 써서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는 인간이나 관찰 도구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에 있다. 그런 유한성을 지닌 인간이 방대한 자연의 메커니즘을 관찰하고 설명하고 예언하는데 편견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고, 모순이 발견되면 또 수정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다른 기하학을 기초로 우주선을 개발하였다. 삼각형의 안각의 합이 180도가 넘는다고 보는 타원기하학과 180도 미만이라고 보는 쌍곡선 기하학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경도 0도선과 한국을 지나는 동경 127도선, 그리고 적도를 연결하면 큼직한 삼각형 하나가 생긴다. 이 삼각형의 안각의 합은 분명히 180도가 아니라 307도나 된다. 원은 삼각형으로 보아도 좋다. 원에 반지름 하나를 그리고 그 반지름이 두 변을, 원둘레가 다른 한 변을 대표하는 이등변 삼각형으로 보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작은 아메바 한 마리를 원호 위에 기어가게 하면 그 아메바는 원호가 직선과 같다고 생각한다. 원호와 같은 곡선도 미분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수학이 이렇게 서로 모순인 기초 위에 놓여 있는데도 그 계산결과가 모두 정확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언어가 다르고 수학이 다르지만 실체에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한 문제만 더 다루고 싶다. "우주의 크기는 무한한가?"’ 하는 물음이다. 우주에 끝이 있다고 대답하면 그 밖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또 물을 것이다. 편견이라고 공박을 받으면서도 나는 우주가 유한하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물질과 복사에너지로 되어 있다. 물질이란 광속 이하의 속도로 움직이는 존재이고, 복사에너지는 광속으로 움직이는 존재이다. 이 두 가지의 존재가 차지하는 공간이 우주이다. 그런데 안과 밖이라는 개념은 우주의 크기를 생각할 때에는 전혀 가치가 없는 개념이다. 벡터장이론에 나오는 one-sided surface를 생각하면 안과 밖이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우주의 한 방향을 향하여 계속해서 나아가면 결국 우주를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에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주의 끝에서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어서 어느 쪽으로 가거나 마찬가지로 우주의 안쪽으로만 들어오게 되어 있다. 북극을 출발한 한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가든지 그는 남쪽으로만 간다는 것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이런 방법으로 우주의 크기를 계산하여 그 직경이 얼마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천문학자들은 이 우주가 팽창한다고 한다. 항성들이 서로 후퇴하기 때문이다. 팽창하는 광막한 우주의 지극히 작은 한 점 지구 위에 사는 작은 존재인 듯한 인간이 우주만물의 존재법칙을 다룬다고 하는 것 자체가 편견의 양상이요 실태이다. 진리를 맛보지도 못하고서 진리를 향하는 행자(行者)가 진리를 논하는 것부터가 모순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그 모순과 편견으로 빚어진 지식체계가 인류의 복지와 문화형성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다.
출처 - 대구지부 월간소식지 창조 제48호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681
참고 :
일각수(유니콘)
: 성경은 상상의 동물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The unicorn : The bible does not refer to fantasy animals)
Carl Wieland
권위있는 성경 번역본(KJV)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욥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들 소(unicorn)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 소(unicorn)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욥 39:9,10)
일각수(unicorn, one horn)는 욥기 39:9,10절을 포함하여 신명기 33:17, 민수기 23:22, 24:8, 시편 22:21, 29:6, 92:10, 이사야 34:7 등에 언급되어있다. 이들 구절들에서 일각수는 실제 동물이 아닌 어떤 상상의 동물로서 묘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각수는 발견된 적이 없는, 우화에서나 등장하는 전설상의 동물로서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성경을 공격하는 데에 이것을 사용하여 왔다. 즉 이것은 성경의 저자가 널리 믿어지고 있던 신화들을 개작하여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일각수 이야기는 시리아, 중국, 인도, 고대 그리스, 중세 유럽 등 세계 많은 지역들에서 전해져오고 있다. 항상 한 뿔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몸체(보통 유럽 이야기에서는 갈라진 발굽을 가진 말로서)는 양, 염소, 심지어 산토끼 같은 많은 다양한 모습들로 묘사되고 있다. 일각수와 관련해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는 고결함과 처녀성이다. 비록 그것은 야생이지만, 기도하는 처녀의 무릎에 머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그 뿔은 자신들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모두 사람들에게 안전하게 잡을 수 있는 꼬챙이 끝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이 일각수를 조사했다. 그리고 코뿔소(rhinoceros)는 이 동물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거칠고, 추하고, 흙투성이의 머리를 가진 동물이 소녀의 하얀 옷이 있는 무릎에 머리를 두고 누워있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일각수의 뿔(unicorn horns)이 상당히 중요시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그 뿔들은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선원들은 수컷 일각고래(narwhal)의 이빨이 물가로 밀려 올라온 것을 발견하였고 (일각고래는 북극 지방에 사는 고래로서 수컷은 하나의 긴 나선형으로 휘어진 어금니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한때 살았던 일각수의 남아있는 유일한 부분이었다고 가정했었다. 이것에 대해 엄청난 가격이 지불되곤 하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이것 하나에 10만 파운드를 지불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선박 수송이 더 광범위해지면서, 이들 일각수의 뿔들은 사실 고래의 이빨이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이것은 시장 가격에 극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성경에 ‘일각수(unicorn)’로서 기술된 동물은 무엇이었는가? 기억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성경의 저자들은 영감을 받았고 오류가 없이 기록하였지만, 번역은 또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사용된 단어는 re’em 이다. 이것은 monoceros, unicornis, unicorn, einhorn, eenhorn 과 같은 여러 단어로 번역되어져 왔다. 이들 모두는 ‘하나의 뿔(one horn)’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어 re'em이 하나의 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많은 유대 번역들은 그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남겨놓았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가리키는 동물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은 사실 re’em의 의미가 무엇일 것인가에 대한 강력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인의 부조(Mesopotamian reliefs)에는 앗슈르나시팔 왕(King Assurnasirpal)이 한 뿔을 가진 황소(oxen with one horn)를 사냥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 발굴되었다. 관련된 문헌들은 이 동물이 rimu 라고 불려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동물이 성경에 기록된 들소(wild ox)인 re’em 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아시리아인의(이집트인이 아닌) 그림에 한 뿔(one-horned)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던 이유는 rimu/re'em에 있는 이 매우 대칭적인 뿔들에 대해서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적인 방법에 기인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동물을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그 뿔들은 하나로 보여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이 최초로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아마도 번역자들은 rimu/re’em가 한 뿔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monoceros (one horn)으로 번역했다.
진짜 re'em 또는 들소(wild ox)는 오록스(aurochs, Bos primigenius)로서 또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유명한 라스코(Lascaux, Cro-magnon)동굴 그림에서 묘사된 오리지날 야생 황소(wild bull)였다. 이 힘세고 무서운 짐승은 이제는 멸종되었고, 유전적으로 허약하게 된 후손들만이 목장에서 소(cattle)들로 살아가고 있다. 더 상세한 정보는 오록스에 대한 글 ”멸종된 오록스를 다시 창조하기(Recreating the extinct Aurochs?)”를 보라.
*“사람과 공룡이 함께 살았다는 증거들 8 : 유럽의 역사와 예술품에 등장하는 용은 공룡이었다!”에서 거의 끝 부분에 있는 “일각수가 새겨져 있는 트라키아인의 투구” 참조
http://creation.kr/Dinosaur/?idx=1294634&bmode=view
Further reading
Naaktgeboren, C., Unicorn—fact or fantasy? World Magazine, pp. 70–76, September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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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March 2004)
옛 히브리어 단어 re'em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은 KJV 성경 자체로부터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신명기 33:17절에서 모세는 요셉 자손들을 축복하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첫 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wild ox, Heb: re’em)의 뿔 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리니...” KJV 번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His glory is like the firstling of his bullock, and his horns are like the horns of unicorns: with them he shall push the people … .”
이 비유는 만약 비유하는 동물이 오록스(aurochs) 또는 들소(wild ox)라면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하고 긴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다른 모든 곳에서 re'em을 일각수(unicorn)로 결정했던 KJV 번역가들에게 딜레마가 있었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에서 ‘뿔들(horns)’이라는 단어는 복수형(plural)이다. 그러나 단어 re’em은 단수형(singular)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단수형으로 번역했었다면, 그것은 ”His horns are like the horns of a unicorn”로 읽었을 것이고, 이것은 일각수가 하나의 뿔보다 많은 뿔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분명히 용어에 있어서 모순이 된다. KJV 번역가들은 일각수에 있는 하나의 뿔과 소에 있는 한 쌍의 뿔들을 비교함에 있어서 불일치를 분명히 확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번역 시에 일각수의 복수형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KJV 마지막 노트에 기록되어있다). (그래서 그들은 ‘unicorns’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 히브리 원본에 대한 권위보다 영어 번역본의 권위를 더 인정한다면 몰라도, 이것은 re’em이 한 뿔을 가진 생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re’em은 또한 들소(wild ox)를 의미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 참조 : 전설의 유니콘? 머리 ‘뿔’ 달린 멸종동물 화석 발견 (2016. 3. 23. 나우뉴스)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323601010
Unicorns in the Bible?
https://answersingenesis.org/extinct-animals/unicorns-in-the-bible/
The unicorn : The Bible does not refer to fantasy animals
https://creation.com/the-unicorn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s://creation.com/the-unicorn
출처 - Creation 14(2):14–15, March 1992.
아담과 이브의 혈액형은?
(It's in your blood)
Don Batten
질문 : 만약 우리가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라면,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혈액형을 가져야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4가지의 혈액형(A형, B형, AB형, O형)을 가질 수 있는가?
답 : 사람에게는 ABO 혈액형을 조절하는 하나의 유전자가 있다. 그리고 A, B, O의 3개의 대립유전자(alleles)가 있다. 유전자는 항상 한 쌍(한 쪽 부모에게서 하나씩)의 대립유전자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두 개의 대립유전자가 항상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라도 가능한 유전적 구성은 AA, BB, AB, AO, BO, OO 로서 존재한다.
O 대립유전자는 A 또는 B에 비해 열성(recessive)이다. 즉 A 또는 B 대립유전자의 존재하에서 혈액형은 A 또는 B 대립유전자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AO의 사람은 A형 혈액을, BO의 사람은 B형 혈액을, 그러나 OO의 사람은 O형 혈액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O형 혈액을 가진 사람은 누구에게나 피를 줄 수 있는 공여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피는 A 또는 B 단백질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A, B 또는 AB 형의 사람들에게 피를 제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A형 혈액이 B형 혈액을 가진 사람에게 수혈되었을 때, 알레르기 반응은 그 수혈자를 죽음으로 초래할 수도 있다.
남편과 아내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모든 대립유전자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A, B, O 대립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는 다음과 같은 유전적 구성들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AO 와 BO, 또는 AB 와 OO, 또는 AB 와 AO, 또는 AB 와 BO, 또는 AA 와 BO, 또는 BB 와 AO.
만약 아담과 이브가 유전적으로 AO 와 BO 였다면, 그들의 자녀들은 AB, AO, BO, 또는 OO의 유전적 구성을 가져서, AB형, A형, B형, 또는 O형 혈액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정말로, 그들 자녀들의 약 25% 정도는 각 혈액형 타입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만약 아담과 이브가 유대인들의 전승처럼 56명의 자녀들을 가졌다면, 각 혈액형들은 약 16명씩 나타내었을 것이다.
*참조 : ABO Blood and Human Origins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id/v4/n1/abo-blood-human-origins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its-in-your-blood
출처 - Creation 18(1):45, December 1995.
물리학은 6일 창조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Physics Show That Six Day Creation is Possible)
출애굽기 20:11절은 성경 기록 중에서 가장 믿어지기 힘든 구절 중의 하나이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하나님이 전 우주를 창조하시는 데에 얼마나 걸리셨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이 구절보다 더 명백히 표현할 수 있는 구절을 생각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절은 크리스천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우주론은 우주가 형성되는 데에 수십억 년이 걸렸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약 성경의 이 명백하고 직설적인 말씀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신뢰할 수 없다면, 어떻게 성경의 다른 말씀들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러셀 험프리 박사(Dr. Russell Humphreys, 샌디아 국립실험실의 물리학자)에게도 수수께끼였다. 그는 성경이 우주의 형성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연구함으로서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는 ‘빅뱅(Big Bang)’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폭발의 결과라고 배워왔다. 이 폭발에 의한 팽창 동안, 우주의 모든 물질들은 작은 것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팽창되고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대의 모든 우주론 모델들은 우주는 중심도 가지고 있지 않고, 가장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가정들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과 연결될 때, 그 결과는 모든 위치에서 수십억년 된 팽창하고 있는 우주이다.
험프리 박사는 이러한 임의적인 가정(중심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들로 출발하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분명한 의미로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떤 우주 모델을 발전시켜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왜곡되어서는 안 되며, 이해가 안 된다고 필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서도 안된다. 성경은 ‘길 위에 남자’, ‘뛰어난 물리학자’, ‘신학자’ 와 같은 표현처럼 명백하고 분명한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주를 만드신 것에 대해서 3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첫째, 지구(the earth)는 우주에서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함축적으로, 지구는 아마도 우주의 중심 부근에 위치할 수 있고, 따라서 사람은 모든 방향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주(물질과 공간 둘 다)는 ‘펴지고(stretched out or spread out)’ 있어왔다.(참조: 사42:5, 사45:12, 사51:13, 렘10:12). 셋째, 우주는 경계(boundary)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주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만약 이들 세 가정들이 현재 물리학에서 인정되고 있는 법칙들과 연결된다면, 그리고 수학적 연산들이 행해진다면, 우리들은 위치에 따라서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우주에서 살게될 수 있다.
게다가 우주가 초기부터 팽창하고 있는 중임으로, 시간의 확장 효과(time dilation effect)는 엄청나게 확대되었을 것이다. 우주가 팽창됨으로서, 시간이 바깥 가장자리에서는 매우 빠르게 흘러가고, 중심 부근에서는 거의 멈춰있던 지점이 있었다. 우주가 팽창되는 이 지점에서, 중심부 근처는 단지 수 일이 지나갔지만 하늘에서는 수십억 년이 흐르게 될 수 있다. 이것은 현재의 물리학 지식에 기초한, 그리고 임의적인 가정들이 아닌 성경적 가정들에서 출발한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성경이 문자 그대로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대중적인 과학책들을 읽는 것을 통하여, 나는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이 사실일 수 없다는 신념에 곧 도달했다.” 가장 조롱을 받고 있는 성경 이야기(최근의, 문자 그대로의, 우주의 6일 창조)가 정확하게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통해 전적으로 가능할 수 있음이 밝혀진 그 이야기라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참조 : .[신학과 과학의 만남] 시간의 창조 (上)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304/091972341623111111.html
.[신학과 과학의 만남] 시간의 창조 (中)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311/091973106623111111.html
.[신학과 과학의 만남] 시간의 창조 (下)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318/091973856923111111.html
.[신학과 과학의 만남] 태양창조 이전의 지구
http://www.kmib.co.kr/html/kmview/2005/0729/091987829223111111.html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drdino.com/articles.php?spec=31
출처 -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63
참고 : 2833|2834|2464|2274|514|334|35|914|3943|4428|4429|6281|6188|6577|6581
재생되는 갈비뼈 : 아담, 그리고 그의 ‘잃어버린’ 갈비뼈
(Regenerating ribs : Adam and that ‘missing’ rib)
Carl Wieland
연료를 가득 적재한 탱크차와 고속도로의 제한 최고 속도로 정면충돌한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나는 거기서 살아났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위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1]
병원에 있었던 5개월 보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수년간, 특히 얼굴 뼈 등을 포함하여 신체 여러 부분을 개조하기 위한 수술을 여러 번 받았다.[3]
이들 수술에서 때로는 이식을 위하여 내 자신의 뼈를 사용했다. 나는 성형외과 의사가 항상 내 흉곽의 오른쪽으로 가서, 수평으로 난 흉터 꼭 그 자리를 통해서만, 수술을 위한 뼈를 취하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왜 뼈가 바닥나지 않는지’를 물었다. 그는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더니, 그와 그의 팀은 매번 갈비뼈 전체를 끄집어낸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골막(periosteum)을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겨둡니다. 그러면 보통의 경우 갈비뼈는 다시 그 자리에 자라납니다.”
나는 가정의(家庭醫)의 훈련을 받고 시무도 했지만 새롭게 흥미를 갖게 되었다. 전에는 이것을 전혀 몰랐었다. 골막(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뼈의 주변’ 이라는 뜻이다)이란 모든 뼈를 감싸는 막이다. 예를 들면, 양고기 다리를 갉아먹을 때 이빨 사이에 무언가 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골막에는 새로운 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세포가 들어 있다. 특히 젊은 사람에게 있어서, 갈비뼈의 골막은 다른 어떤 뼈보다도 더욱 뼈를 재생시키는 굉장한 능력을 갖고 있다.[4]
흉부외과에서는 갈비뼈를 제거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면 대개 이들은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다시 자라난다. 재생되는 양은 갈비뼈를 제거할 때 얼마만큼 조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골막이 가능한 한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도록 잘 ‘벗겨내야’ 한다. 갈비뼈가 그러한 재생에 대한 이상적인 위치가 되는 주 이유는 거기 붙어있는 늑간(肋間)의 근육이 피의 공급을 잘 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의사가 처음에 내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나에게 즉시 떠오른 생각은 “와, 정말 멋지다. 아담은 결함을 가진 채로 돌아다닌 것이 아니구나!” 이었다. 창세기 2:21절에 하와의 창조에 관하여 이렇게 적혀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놀랍게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남자가 여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적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일부 반창조론자들은, 남자에게는 잃어버린 갈비뼈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사용하여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비웃고 있다.
내가 사고를 당하기 수년 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곤 했다 :
“만약 당신의 아버지가 원형 톱에의해 손가락을 잃었다면, 그의 모든 자녀들도 역시 손가락이 하나 모자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딸들은 괜찮고 그의 모든 아들들만? 물론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DNA 명령은 글씨와 같은 암호의 형태로 들어있는데, 갈비뼈(혹은 손가락) 하나를 제거한다고 해서 그 암호화된 명령을 변화시키지 않으므로, 모든 자손은 갈비뼈(혹은 손가락)를 전부 갖게 됩니다.”
그런데 위의 모든 내용은 지극히 당연하고 꼭 들어맞지만, 갈비뼈가 다시 자라난다는 정보는 새롭고도 매력적인 차원을 덧붙여 준다. 하나님은 갈비뼈를 골막과 함께 설계하셨다. 그분은 오늘날에 갈비뼈가 다시 자라나듯이, 갈비뼈를 어떻게 제거하면 나중에 다시 자라나는지를 알고 계셨다. 특별한 종류의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다.[5]
아담은 그의 흉곽 안에 결함 부분을 한때 가졌을 뿐 영구적으로 가진 것이 아니며, 그의 생애의 수백 년 동안 당신과 내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수의 갈비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각주
1. 1986년 당시 충돌속도의 합은 시속 약 180km(112miles) 이었다.
2. 뿐만 아니라 그 당시 11살이었던 내 딸 리사(Lisa)는 기적적으로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3. 사고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나는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을 55번이나 받았다 (대다수의 경우 갈비뼈 제거를 포함하지 않음).
4. 성형외과 의사 David Pennington, 개인 서신, 5월 7일, 1999.
5. 물론, 진짜 특별한 기적은 살과 뼈로부터 하와를 만드신 것이다. 왜 이런 방법을 택하셨을까? 왜 아담처럼 흙이나 혹은 단순한 요소로부터 직접 만들지 않으셨을까? 우리 모두는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구속받을 수 있다(고전 15:45). 따라서 하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아담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0
출처 - Creation 21(4):46–47, September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