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믿음으로만이 이해될 수 있다.
로마서 1장 18-20절을 보면 자연인이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배울 수 있고 창조된 만물에 의해 알 수 있다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있다. 두 가지의 성경구절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로마서의 구절은 거대하고 복잡한 우주가 결코 우연히 발생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초월적인 것들은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창조주와 설계자를 배후에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도 접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내면에 이루어진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 그렇다. 성경에 나타난 지식으로만이 그리고 성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믿음으로만 우리는 우주의 창조 방식을 알 수 있다.
15.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과 그의 본질에 대한 진술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그의 정체성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 이전에 또는 그보다 상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시간, 공간과 물질에 한정시킬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과 영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영의 정신적 이미지를 포착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영을 말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인간의 몸 어디엔가 영의 위치를 설정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우주의 어디엔가 설정해 놓을 수 없다. 우리의 눈이 우주 밖에 수백만 마일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현존에 그리고 어디에나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체성과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영은 인간의 몸에 제한되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한 우주를 초월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변함없고 영원한 동시에 완벽하며 은혜로운 등등의 자비로우신 분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진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읽고 공부함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알아가도록 권하고 있다.
16. 하나님의 특성
1)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하시고 불가해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해 오셨다. 그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 그는 시간과 물질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셨다. 시편 90:2 절을 보면: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102:27 절을 보면: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활동(물질적 우주의 존재와는 별도로)은 불가해하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광대함 때문에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145:3). 그의 무한성과 광대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우주와 같은 유한한 공간에 제한될 수 없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봉헌할 때 표현했듯이(왕상 8:27) 하나님은 우주보다 상위에 존재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비록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셨지만 하나님은 항상 시간과 공간보다 초월해서 존재하신다.
2)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분이시다.
예레미야 23:24 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비록 하나님이 우주에 계시고 거기서 활동하신다 하더라도 그는 모든 공간을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은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는 있으나 부분 부분으로 흩어져 있는 방식이 아니다. 전체의 하나님은 동시에 어디에나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모든 필요한 순간마다 현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어떤 죄도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전지하시다.
시편 147:5 절을 보면: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알고 계신다. 시편 139:2 절은 다음과 같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분, 우리의 감정과 우리 마음의 의도를 알고 있다. 히 4:12 절을 보면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간파하신다.
4)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과 조화를 이룬다.
시 19:1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렇다. 하늘, 우주, 지구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낸다. 롬 11:33을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구별된다. 여기의 두 단어는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비슷한 단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며 보존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술과 판단이다. 인간은 쉽게 하나님의 역사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신의 지혜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고 거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한 동작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영원히 움직이는 장치를 수세기 동안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 특히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를 창조할 때 그런 장치를 창조했다. 우리의 태양계와 별들은 로프나 줄도 없이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영원히 작동하며 우주를 운행한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그러한 창조를 고안한 점에서 최고의 지혜를 소유한 건축가이다.
1972년에 천문학자인 유진 써난(Eugene Cerna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당신이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지구의 완벽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모든 논리를 바라볼 때,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게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이 누구시든지 간에 하나님이 창조할 때 마음에 품었던 것을 당신은 바라볼 수 있다. 나는 돌아가서 다시 한번 그러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
진화론자들이 달 여행에서 정반대를 증명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써난과 다른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배후에 창조주의 위대한 지혜를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끊임없는 번식활동을 통하여 모든 동식물들을 영속시켜 서로의 먹이를 제공하는 먹이사슬의 방식을 생각해보자.
비록 지금은 퇴보한 걸작이지만 장엄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몸을 가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신체는 창조의 목적에 잘 부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네 개의 손가락과 엄지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의 손을 보라. 손은 집을 짓고 일을 하기에 적합하며, 글을 쓰고 타이프를 치기에도 적합하며, 물건을 들어올리기에도 적합하고, 피아노 건반, 여러 종류의 스포츠, 그리고 수천 가지의 다른 목적에 쓰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의 눈과 그 밖의 다른 기관들을 창조한 점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해 보자. 눈은 인치에서 마일에 이르는 다양한 거리를 볼 수 있도록 조정될 수 있다. 그래서 가까운 책이나 조그만 사물을 관찰할 수 있으며, 수마일 밖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1/2인치 정도의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새와 같은 조그만 동물과 산과 같은 거대한 사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은 산야에 펼쳐진 다른 크기, 형태, 색깔, 위치 등의 다양한 사물을 식별할 수 있다.
창조와 지혜의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수박을 주목해 보라. 수년 전에 윌리엄 J. 브라이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수박 하나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수박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나는 씨앗 몇 개를 가지고 와서 말린 후에 무게를 달아 보았다. 나는 5,000개의 씨앗의 무게가 1파운드 나가는 사실을 알았다. . . 이러한 씨앗 가운데 하나의 씨앗을 땅에 심었다. 태양과 비의 도움으로 그 씨앗은 껍질을 뚫고 싹이 나기 시작하고 줄기로 뻗어 자신의 무게에 20만 배에 달하는 수박이 열리게 되었다... 어떤 건축가가 이런 계획을 짜겠는가? 그러한 조그만 씨앗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가? 그러한 화려한 색채-검은 색, 적색, 녹색과 하얀 색-가 나오는가? 씨앗이 어떻게 수박이 되는가?”
하나님이 최고의 지혜로 창조해서 수세기 동안 스스로 번식해 지금까지 이어져내려 오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라. 우리가 자연, 즉 식물과 과일, 동물의 세계, 그리고 심지어 곤충의 세계를 어디에서 바라보든 간에 우리는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바보만이 만물의 배후에 계신 최상의 지혜와 설계자를 부인할 것이다.
5)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질.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하는 하나님의 특성에 관하여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그리고 창조와 인간에 대한 애정,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희생시키며 인간을 죄에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용서에 관한 많은 언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신성, 정의, 불변성, 인내와 박애에 관한 하나님의 특성 역시 엿볼 수 있다.
17. 세상에서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놀라운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창조주 사이에 만사가 형통한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인간에서부터 창조주에 대항하는 인간의 반역이 지금까지 있어왔다. 아담과 이브로 시작해서 최초의 아들인 가인, 그들의 후손에게로 이어져 결국 하나님의 분노로 노아 가족을 제외하고는 수십억의 인류를 홍수로 쓸어버렸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통해 인류에게 약속한 구세주를 준비하도록 요구되었다.
바벨탑 사건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바와 같이 홍수가 지나가자마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 계속 발생했다. 그러한 반역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하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다 뚜렷하게 계속되었다.
아담과 이브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역, 즉 죄가 항상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롬 3:10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구절은 이를 명백히 잘 나타내 준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과 의지에 대항하는 반역이라는 죄 때문에 세상에는 죄와 악독이 가득하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는 탐욕, 증오, 싸움, 타락, 욕정 그리고 허위로 가득하다. 창조주에 대한 반역 때문에 인류의 악은 인간으로 하여금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숭배”(롬 1:10)하도록 하는 것이다.
18. 구원자-구세주
이러한 반역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은총과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에서 구원의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를 보내 주셨다. 구원자와 구세주를 통해서 하나님은 용서와 만민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었다. 고후 5:21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속자-구세주는 인류가 죄에 빠지자마자 언약되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
인자이신 인간의 구세주에 관하여 콜롬비아 대학의 버나드 벨은 『지친 기계공을 위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시대의 성자들이 바보가 아니며 교회의 신앙고백이 많은 영리한 자들이 생각하듯이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 나타난 전지전능한 하나님이고 영원히 살아 계시다는 점과 진리 속에서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들에게 능력과 우정으로 하나님을 계시해 줄 것이다.”
“예수님은 중력과 에테르처럼 인정될 수 있는 막연한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 사이에 걸어 다니시고,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으시며, 세례로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의 병약함을 어루만져 주시는 자비로운 친구인 예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만 신의 신, 만 빛 중의 빛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매우 아름답게 설명해 준다. 이러한 진술은 오늘날 스스로를 과학적 천재인 동시에 영적인 바보라고 자칭하는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표현이다. 최고의 지성인들이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지혜는 바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시 111:10)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경외함이란 창조주와 그의 말씀에 대한 겸손한 경외를 뜻한다. 최고의 무식은 시편 14:1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아무리 교육 수준이 뛰어나다하더라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고 말하는 자이다.
하나님이 없는 상태의 본능적인 인간은 영적으로 맹인이며 무지한 영의 시체로 구별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이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는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의 논리 때문에 망한다. 왜냐하면 논리는 자신의 어리석은 잘못된 생각-우주의 기원, 바로 진화론적 방식에 적용된 지구와 인간의 이야기-을 규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이 그런 천국으로의 길을 선택하셨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악마들의 반역에서처럼 다시 하늘에서의 반역을 원치 않으신다. 그는 아담과 이브 이후에 하나님을 거역해서 대홍수로 인한 파멸의 길을 걸었던 인간의 후손들처럼 천국에서 다시 그 길을 원치 않으신다. 천국의 아름답고, 화려하고 웅장하며 영광스러운 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경이로워서 하나님은 천국의 축복에 저해되는 어떤 것도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 천국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이룬 보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기쁨으로 노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는 자랑과 영광은 천국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다. 사도 바울은 엡 2:6-9에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얼마나 분명하게 지적된 표현인가? 우선 하나님은 천국에서 자만하는 호모 사피엔스들이 천국을 어지럽히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
분류:창조신앙-중요성
출처: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
14.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믿음으로만이 이해될 수 있다.
로마서 1장 18-20절을 보면 자연인이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배울 수 있고 창조된 만물에 의해 알 수 있다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되어있다. 두 가지의 성경구절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로마서의 구절은 거대하고 복잡한 우주가 결코 우연히 발생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초월적인 것들은 초월적이고 전지전능한 창조주와 설계자를 배후에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도 접근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내면에 이루어진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 그렇다. 성경에 나타난 지식으로만이 그리고 성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믿음으로만 우리는 우주의 창조 방식을 알 수 있다.
15.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과 그의 본질에 대한 진술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그의 정체성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 이전에 또는 그보다 상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시간, 공간과 물질에 한정시킬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과 영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영의 정신적 이미지를 포착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영을 말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인간의 몸 어디엔가 영의 위치를 설정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우주의 어디엔가 설정해 놓을 수 없다. 우리의 눈이 우주 밖에 수백만 마일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현존에 그리고 어디에나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체성과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영은 인간의 몸에 제한되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한 우주를 초월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변함없고 영원한 동시에 완벽하며 은혜로운 등등의 자비로우신 분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진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읽고 공부함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알아가도록 권하고 있다.
16. 하나님의 특성
1)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하시고 불가해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해 오셨다. 그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 그는 시간과 물질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셨다. 시편 90:2 절을 보면:
시편 102:27 절을 보면:
우리는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활동(물질적 우주의 존재와는 별도로)은 불가해하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광대함 때문에 우리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시145:3). 그의 무한성과 광대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우주와 같은 유한한 공간에 제한될 수 없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봉헌할 때 표현했듯이(왕상 8:27) 하나님은 우주보다 상위에 존재한다.
비록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셨지만 하나님은 항상 시간과 공간보다 초월해서 존재하신다.
2)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분이시다.
예레미야 23:24 절을 보면:
비록 하나님이 우주에 계시고 거기서 활동하신다 하더라도 그는 모든 공간을 초월해 계신다. 하나님은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고는 있으나 부분 부분으로 흩어져 있는 방식이 아니다. 전체의 하나님은 동시에 어디에나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모든 필요한 순간마다 현존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어떤 죄도 하나님으로부터 숨길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전지하시다.
시편 147:5 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에 품은 생각들을 알고 계신다. 시편 139:2 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분, 우리의 감정과 우리 마음의 의도를 알고 있다. 히 4:12 절을 보면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간파하신다.
4)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과 조화를 이룬다.
시 19:1을 보면;
그렇다. 하늘, 우주, 지구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낸다. 롬 11:33을 보면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구별된다. 여기의 두 단어는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비슷한 단어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며 보존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술과 판단이다. 인간은 쉽게 하나님의 역사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신의 지혜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고 거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한 동작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영원히 움직이는 장치를 수세기 동안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 특히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를 창조할 때 그런 장치를 창조했다. 우리의 태양계와 별들은 로프나 줄도 없이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영원히 작동하며 우주를 운행한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그러한 창조를 고안한 점에서 최고의 지혜를 소유한 건축가이다.
1972년에 천문학자인 유진 써난(Eugene Cernan)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진화론자들이 달 여행에서 정반대를 증명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써난과 다른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배후에 창조주의 위대한 지혜를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끊임없는 번식활동을 통하여 모든 동식물들을 영속시켜 서로의 먹이를 제공하는 먹이사슬의 방식을 생각해보자.
비록 지금은 퇴보한 걸작이지만 장엄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몸을 가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생각해보자. 인간의 신체는 창조의 목적에 잘 부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네 개의 손가락과 엄지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의 손을 보라. 손은 집을 짓고 일을 하기에 적합하며, 글을 쓰고 타이프를 치기에도 적합하며, 물건을 들어올리기에도 적합하고, 피아노 건반, 여러 종류의 스포츠, 그리고 수천 가지의 다른 목적에 쓰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의 눈과 그 밖의 다른 기관들을 창조한 점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해 보자. 눈은 인치에서 마일에 이르는 다양한 거리를 볼 수 있도록 조정될 수 있다. 그래서 가까운 책이나 조그만 사물을 관찰할 수 있으며, 수마일 밖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도 1/2인치 정도의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새와 같은 조그만 동물과 산과 같은 거대한 사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인간의 눈은 산야에 펼쳐진 다른 크기, 형태, 색깔, 위치 등의 다양한 사물을 식별할 수 있다.
창조와 지혜의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수박을 주목해 보라. 수년 전에 윌리엄 J. 브라이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하나님이 최고의 지혜로 창조해서 수세기 동안 스스로 번식해 지금까지 이어져내려 오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라. 우리가 자연, 즉 식물과 과일, 동물의 세계, 그리고 심지어 곤충의 세계를 어디에서 바라보든 간에 우리는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바보만이 만물의 배후에 계신 최상의 지혜와 설계자를 부인할 것이다.
5)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질.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하는 하나님의 특성에 관하여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그리고 창조와 인간에 대한 애정,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희생시키며 인간을 죄에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용서에 관한 많은 언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신성, 정의, 불변성, 인내와 박애에 관한 하나님의 특성 역시 엿볼 수 있다.
17. 세상에서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놀라운 특성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창조주 사이에 만사가 형통한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인간에서부터 창조주에 대항하는 인간의 반역이 지금까지 있어왔다. 아담과 이브로 시작해서 최초의 아들인 가인, 그들의 후손에게로 이어져 결국 하나님의 분노로 노아 가족을 제외하고는 수십억의 인류를 홍수로 쓸어버렸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통해 인류에게 약속한 구세주를 준비하도록 요구되었다.
바벨탑 사건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바와 같이 홍수가 지나가자마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서 계속 발생했다. 그러한 반역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하게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사람들에게 보다 뚜렷하게 계속되었다.
아담과 이브의 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역, 즉 죄가 항상 이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롬 3:10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구절은 이를 명백히 잘 나타내 준다.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과 의지에 대항하는 반역이라는 죄 때문에 세상에는 죄와 악독이 가득하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는 탐욕, 증오, 싸움, 타락, 욕정 그리고 허위로 가득하다. 창조주에 대한 반역 때문에 인류의 악은 인간으로 하여금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숭배”(롬 1:10)하도록 하는 것이다.
18. 구원자-구세주
이러한 반역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은총과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에서 구원의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를 보내 주셨다. 구원자와 구세주를 통해서 하나님은 용서와 만민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었다. 고후 5:21을 보면:
이 구속자-구세주는 인류가 죄에 빠지자마자 언약되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인자이신 인간의 구세주에 관하여 콜롬비아 대학의 버나드 벨은 『지친 기계공을 위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매우 아름답게 설명해 준다. 이러한 진술은 오늘날 스스로를 과학적 천재인 동시에 영적인 바보라고 자칭하는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표현이다. 최고의 지성인들이 배울 수 있는 최고의 지혜는 바로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시 111:10)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경외함이란 창조주와 그의 말씀에 대한 겸손한 경외를 뜻한다. 최고의 무식은 시편 14:1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이 없는 상태의 본능적인 인간은 영적으로 맹인이며 무지한 영의 시체로 구별된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는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의 논리 때문에 망한다. 왜냐하면 논리는 자신의 어리석은 잘못된 생각-우주의 기원, 바로 진화론적 방식에 적용된 지구와 인간의 이야기-을 규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이 그런 천국으로의 길을 선택하셨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악마들의 반역에서처럼 다시 하늘에서의 반역을 원치 않으신다. 그는 아담과 이브 이후에 하나님을 거역해서 대홍수로 인한 파멸의 길을 걸었던 인간의 후손들처럼 천국에서 다시 그 길을 원치 않으신다. 천국의 아름답고, 화려하고 웅장하며 영광스러운 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경이로워서 하나님은 천국의 축복에 저해되는 어떤 것도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 천국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이룬 보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기쁨으로 노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는 자랑과 영광은 천국과는 전적으로 거리가 멀다. 사도 바울은 엡 2:6-9에서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했다.
얼마나 분명하게 지적된 표현인가? 우선 하나님은 천국에서 자만하는 호모 사피엔스들이 천국을 어지럽히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이다.
분류:창조신앙-중요성
출처: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그 32가지 이유들]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