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린 그림은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음을 말해 준다. 도시의 크고 작은 빌딩들은 그 빌딩을 건축한 건축자가 있음을, 거리를 누비는 자동차들은 디자이너가 있음을 증거해 준다. 누구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고 수긍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는 저절로 되었을까, 아니면 정말 창조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 때가 있다. 그러한 의심은 그 피조물들이 디자인되었다는 증거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진보된 과학기술를 통하여 대자연의 피조물들은 그 하나 하나가 고도의 지성과 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들을 보면서 저절로 되었다는 것은 마치 그림을 보고 작가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의사는 임산부에게 우유를 많이 마셔서 다양한 영양을 섭취하도록 권유한다. 그래야 태아에 있는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아에 있는 아기는 우유의 영양소를 통하여 자란다는 것이다. 분자의 수준에서 이 이야기를 확대해 보자. 아기는 우유를 먹고 자란다. 그 우유는 젖소가 만든다. 젖소는 초목을 먹고 영양소를 섭취한다. 그러니까 우유는 초목의 원소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면 초목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물론 흙에서 자라났다. 그러므로 초목이 흙의 원소로 이뤄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결국 초목이 흙으로 이루어졌다면, 우유를 마시는 아기는 흙의 원소로 된 우유를 섭취하므로 결국 흙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지나친 확대라고 할지 모르지만 분자의 수준에서 그렇게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고 말씀한다. 대표적인 말씀을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9),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욥기 33:6),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29),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 146:4),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전 3:20)…등 성경 곳곳에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그리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려서 필자가 시골에서 살 때 당시 어른들은 저녁에 먹고 남은 음식 쓰레기를 양계장에 있는 닭들에게 주곤 했다. 닭들은 그 쓰레기를 잘 먹는다. 그리고 아침에 양계장에 나가 보면 닭들은 계란을 만들어 놓고 주인을 기다린다. 누가 계란을 만들었는가? 물론 닭이다. 좀 과장하면 닭들은 음식쓰레기로 계란을 만든 것이다. 사람이 쓰레기로 계란을 만들 수 있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닭이 사람 보다 지능이 높은가? 아니다. 닭은 닭대로 제각기 동물들은 고유한 특성과 기능으로 종류대로 다양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종류대로 모든 피조물을 6일 동안 창조하였노라고 선포(창 1:1-31)하고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장 11절에 다시 6일 창조를 선언하여 거듭 확인해 준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지식에 갇혀있는 많은 이들이 아직도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한다는 진화론을 믿고 있다. 물질계에서는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적 사실로 계속 밝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신약성경의 로마서(1장:19-20)에는 이미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즉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으며 아무도 그 사실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 없는 작품을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분류:창조설계-생명
출처:
벽에 걸린 그림은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음을 말해 준다. 도시의 크고 작은 빌딩들은 그 빌딩을 건축한 건축자가 있음을, 거리를 누비는 자동차들은 디자이너가 있음을 증거해 준다. 누구나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다고 수긍할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는 저절로 되었을까, 아니면 정말 창조되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 때가 있다. 그러한 의심은 그 피조물들이 디자인되었다는 증거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진보된 과학기술를 통하여 대자연의 피조물들은 그 하나 하나가 고도의 지성과 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들을 보면서 저절로 되었다는 것은 마치 그림을 보고 작가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의사는 임산부에게 우유를 많이 마셔서 다양한 영양을 섭취하도록 권유한다. 그래야 태아에 있는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태아에 있는 아기는 우유의 영양소를 통하여 자란다는 것이다. 분자의 수준에서 이 이야기를 확대해 보자. 아기는 우유를 먹고 자란다. 그 우유는 젖소가 만든다. 젖소는 초목을 먹고 영양소를 섭취한다. 그러니까 우유는 초목의 원소들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면 초목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물론 흙에서 자라났다. 그러므로 초목이 흙의 원소로 이뤄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결국 초목이 흙으로 이루어졌다면, 우유를 마시는 아기는 흙의 원소로 된 우유를 섭취하므로 결국 흙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지나친 확대라고 할지 모르지만 분자의 수준에서 그렇게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고 말씀한다. 대표적인 말씀을 살펴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 3:19),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욥기 33:6),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29),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 146:4),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전 3:20)…등 성경 곳곳에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그리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려서 필자가 시골에서 살 때 당시 어른들은 저녁에 먹고 남은 음식 쓰레기를 양계장에 있는 닭들에게 주곤 했다. 닭들은 그 쓰레기를 잘 먹는다. 그리고 아침에 양계장에 나가 보면 닭들은 계란을 만들어 놓고 주인을 기다린다. 누가 계란을 만들었는가? 물론 닭이다. 좀 과장하면 닭들은 음식쓰레기로 계란을 만든 것이다. 사람이 쓰레기로 계란을 만들 수 있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닭이 사람 보다 지능이 높은가? 아니다. 닭은 닭대로 제각기 동물들은 고유한 특성과 기능으로 종류대로 다양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종류대로 모든 피조물을 6일 동안 창조하였노라고 선포(창 1:1-31)하고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 20장 11절에 다시 6일 창조를 선언하여 거듭 확인해 준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지식에 갇혀있는 많은 이들이 아직도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한다는 진화론을 믿고 있다. 물질계에서는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지 않는다는 것이 과학적 사실로 계속 밝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신약성경의 로마서(1장:19-20)에는 이미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즉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으며 아무도 그 사실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 없는 작품을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분류:창조설계-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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