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는 1941년 2월 20일 전남 고흥군 남양면 침교리의 한 조그만 마을 화담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나는 태어나던 해에 가까운 도시인 순천으로 이사를 해서 어린시절 , 초 중 고등학교시절을 이곳 순천에서 지내며 자랐다.


하나님께서 나를 처음 교회로 인도하셨던 때가 국민학교 5학년 때이다. 크리스마스 때 친구들과 같이 나가게 된 것이 계기가되어 그 후 계속 7년간을 순천제일장로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순천에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잘 마칠 수 있도록 복을 주셨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순천 매산중고등학교이다. 이 학교는 미국 남장로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서 당시 학교에서는 매일 한 시간의 예배를 드리고 수업을 시작하며 매학기 성경을 한 과목씩 배우고 주일에 교회출석은 의무적이었다. 이 6년간의 교육은 나의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었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성장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학금을 받아서 어려운 시절에 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모교에 대한 은혜를 늘 잊지 못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많은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르치셨다. 그중에 특히 나덕환 목사님과 김형모 교장선생님은 내 신앙과 인격 형성에 가장 큰 감화를 끼치셨다. 순천제일장로 교회에서 일생을 바쳐 목회를 하신 나덕환 목사님의 온유하시고 인자하신 성품과 신앙은 나의 신앙생활의 시작단계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또 김형모 교장 선생은 신학박사이시며 목사이시지만 시골의 조그만 중고등학교에서 일생을 헌신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교훈으로 삼고 많은 제자를 양육하셨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선생님의 가르치심과 신앙인격은 나의 삶 속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 기도를 많이 했다, 문제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과 등록금 등 생활에 필요한 돈이 없었다. 고등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벚꽃나무가 도로 양쪽에 7~8m 간격으로 늘어서 있고 나무 등걸마다 표어나 성구가 걸려 있었다. 그중에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리고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 등이 있었다. 적은 믿음이지만 이 말씀을 생각하고 매일 새벽이면 교회에 가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셔서 1959년에 대전대학 (현 한남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전대학은 미국 남장로교단에서 1969년 3월에 대전시 오정골에 세운 조그만 대학으로 입학자격은 시험치는 것 외에 세례교인 증명이 있어야만 했다, 제1회로 입학한 신입생은 총 90여명이었는데 나는 그중의 한 사람으로 화학과에 입학하였다. 전공학과는 2학년 때 화학에서 수학으로 바꿨다.


대전대학은 장로교 대학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춘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고 세례교인만을 입학시킬 뿐만 아니라 매일 수업 시작 전 한 시간씩 예배를 드리고 매학기마다 성경을 한 과목씩 택하도록 되어 있었다. 4년간 예배에 성실하게 참석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경건의 훈련을 잘 쌓았다. 하나님께서는 4년 동안 등록금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학교 장학금을 통해서 공급해 주셨다. 학교는 작고 미비한 점도 많이 있었지만 앞에는 커다란 과수원과 뒷산의 늘 푸른 숲 등이 있다. 나는 아름다운 교정을 좋아하였고 귀한 친구들을 아주 친밀하게 사귀게 되었으며 교정을 거닐 때마다 하나님과 학교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하였다. 지금도 모교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대학생활에서 다음 두 가지는 나에게 귀중한 일들이었다. 첫째는 2학년 때 전공을 화학에서 수학으로 바꾼 것이다. 고등학교 때에나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수학을 전공하리라고는 계획 한 적도 없고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2학년 올라갈 무렵부터 수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며 그 이후로 수학을 공부하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해 왔다. 아직까지도 수학분야에서 극히 적은 공부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동안의 훈련과정을 통해서 어떤 문제를 대할 때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쌓게 되었다. 이러한 훈련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며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 사건은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만나게 해 주신 것이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인 1959년 7월말이었다. 학교의 추천으로 서울 영등포 산업지역에서 열리는 ‘노동문제 연구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연구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산업 전도부 사업으로 실시되었던 모임이었다. 여러 대학에서 참가한 30여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영등포 산업지역 내의 한 교회에서 한 달 동안 생활하면서 낮에는 공장에 각각 배치되어 노동자로서 일하고 밤에는 토론과 리포트와 주제에 대한 발표 등을 하는 상당히 고된 훈련이었다. 이 모임에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의 예과 1학년에 다니던 한 자매가 참석을 해서 알게 되었다. 이 자매는 모임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될 때 대전대학 화학과로 전학을 했다. 그 이후 같은 캠퍼스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며 10년이 지난 1968년 12월에 미국에서 결혼을 하였다. 내가 신앙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어려운 처지에 있었을 때 이 배필을 통해서 크게 돕도록 하신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대학과 연세대학원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면서 전과 같이 계속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문제는 미국에 가서 계속해서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셨다. 1968년 9월에 풀브라이트 (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위스콘신주 메디슨에 있는 주립대학 수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경비나 학비 생활비 등을 전부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먼저 와서 생화학 분야 석사학위를 받고 음대에 다니던 현재의 아내와 결혼을 하여 안정된 생활 속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970년 여름이었다. 첫 아들도 낳고 메디슨에 있는 한 미국인 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한국에 파견됐던 감리교선교사가 일시 귀국하여 순회선교보고를 하던 중 이 곳 교회에서 선교보고를 하게 되었다. 선교사가 설교 도중 한국의 잘못된 태도에 대한 미국인들의 지적하는 말이 나왔을 때 교인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 들으면서 기분이 굉장히 상했다. 이때부터 교회에 나가는 것을 중단했다. 이것이 사탄의 시험인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때부터는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도도 하지 않았다. 또 실제로 공부도 잘 되고 생활도 여유가 있었으므로 기도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때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교만으로 가득찬 생활이었고 하나님은 잊어버렸다. 1971년도로 기억된다. 어느 한국인 목사님이 오셔서 메디슨에 한국인 교회를 창립하시겠다고 찾아오셨다. 나는 그 교회 세우는 일에 반대했고 나중에 교회가 설립된 뒤에도 참석치도 않았을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해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는 위스콘신대학에서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석사학위만 취득한 다음 가족과 떨어져 앤아버에 있는 미시건대학교로 옮기게 되었으며 1974년에는 아내가 학위를 먼저 받고 서울대학교로 오게 되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 멋대로 배은망덕한 생활을 하는 중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미시건대학교에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수학에서 박사학위를 얻도록 인도하셨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하여 문제를 놓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던 때였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부탁을 드렸다. 이 문제를 풀어서 학위를 받게 해 주시면 귀국해서 성경을 공부하고 또 대학에서 가르칠 때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자 그렇게 오래 끌던 문제가 며칠 되지 않아 바로 풀려 학위를 받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국해서도 방황하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하나님과 약속은 하였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잘 모르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몇 년이 지났다. 1980년 여름이었다. 휴가기간 오산리 금식기도원엘 찾아가서 기도하던 중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주부터 창조과학회의 발단이 되는 모임에 참여하도록 인도하셨고 나는 영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특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창조과학회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면서 믿음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획기적인 전환점은 1980년 8월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는 여러 믿음의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쌓였음을 빼놓을 수 없었다. 특히 아내는 6년 전부터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남편을 위하여 늘 기도했다, 남편이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오랜 세월을 기도하였고 또한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아내의 기도를 응답하셨고 또한 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기도를 들으셔서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셨으며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2년간 주셨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말씀을 더 깊이 깨닫는 은사를 주셨으며 필요한 자료도 계속 공급해 주셨다. 그리고 온누리교회가 생기면서 하나님은 이 교회에 나가도록 인도하셨으며 1988년 5월에는 안수집사로 피택되었다. 8월에는 교환교수로 미국에 1년 동안 가게 되었는데 20년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유학을 갔었던 위스콘신주 메디슨으로 다시 가도록 인도하셨다. 18년 전 교회설립을 반대했었던 그 교회는 와서 보니 그동안 자라서 200여명이 넘는 아름다운 교회로서 성장해 있었다. 이 교회에 참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출석하던 중 1989년 1월 15일에는 장로로 안수를 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참으로 놀랍다.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장로로서, 학교선생으로서, 그리고 창조과학회 회원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분류:창조신앙-중요성
출처:'열리는 영의 세계'(1991년 간) 중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3

대표전화 02-419-6465  /  팩스 02-451-0130  /  desk@creation.kr

고유번호 : 219-82-00916             Copyright ⓒ 한국창조과학회

상호명 : (주)창조과학미디어  /  대표자 : 박영민

사업자번호 : 120-87-70892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21-서울종로-1605 호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5

대표전화 : 02-419-6484

개인정보책임자 : 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