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늘 내게서 멀리 계셨다, 도대체가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인생의 모든 부분이 그 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더욱 불가해한 일이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의 많은 수가 그렇듯이 전통적인 관념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면서 나는 저절로 불교적 사생관, 윤회관에다 유교적 습속이 몸에 배여 있었다.
대학시절엔 불교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니 천수경이니 하는 등의 불경에 대하여 깊이 공부하기도 하고, 수행록이나 승려들이 쓴 수상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군 복무하는 동안엔 불교도인 전우들과 함께 인근 사찰에 주일마다 예불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보초로 서 있을 때도 가끔씩 비가 오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 초소 옆의 갈대들이 부딪치며 음산한 무속적 음향을 내어 기분이 묘해지면 염불을 하며 이겨내기도 하였다.
한 번은 군종사병이 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확신에 차서 열심히 예수님을 자랑하였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내가 몹쓸 말을 했기 때문에, ‘니하고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며 그는 그만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결혼이란 사건(?)을 통해 찾아 오셨다. 같은 직장에 처녀 선생님이 부임하였고, 그녀는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청혼하였고, 그녀는 예수 믿어야 한다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은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보통 불교도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내게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결혼을 위하여 종교와 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통념상 남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교회를 강조하였기에 도대체 교회가 어떤 곳인지, 결혼의 전제조건이 될 만큼 중요한 예수는 누구인지를 알아볼 겸해서 한번 교회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통성기도 시간,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지르고 뭐라 뭐라 하면서 온통 교회당이 시끄럽고 어찔어찔해 오는 것이 처음 본 사람에겐 정신이 없는 풍경이었다. 감사헌금을 하는데 보니 국외자의 입장에서 볼 때 별것 아닌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송아지 낳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 교회란 정상적인 사람은 다니는 곳이 아니구나’라고 속으로 짐작하였다.
그래도 사람이 중요하지 종교가 무슨 대수랴 싶어 개종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결혼 이외의 방법으로 내가 개종한다는 것은 뿌리 깊은 불교가정에서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9년 12월 23일부터 지금도 다니고 있는 삼일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처음은 교회에 앉아서 기도시간에 마음속으로 ‘부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였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학습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성경에 쉽게 접근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구약성경을 볼려고 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바로, 내 과학지식의 에너지 보존 법칙에 걸려 읽혀지지 않았고, 신약성경을 대할 때면 마태복음 1장에서 족보 읽다가 그만 두곤 하였다.
그래도 집사람의 간절한 바램을 저버릴 수 없어 교회 예배엔 열심히 출석하였고, 그런 가운데 나는 목사님의 설교에 차츰 감화되어 가고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생각이 차츰 변화되어간 것이다.
교회에선 안한다소리 하지 말라는 어떤 분의 충고를 듣고 세례도 받고 중·고등부 교사로 서리집사로 임명 받아 나름대로 직분에 성실하려 하였으나, 신앙이 쑥쑥 자라간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창조과학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온 한 직장 동료가, 진화론이 잘못된 것이고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바른 것이라 하더라고 말해 주었다. 학생시절에 온통 진화론과 진화론적 관점에서 확립된 과학을 배워 과학교사가 되었고, 과학과 종교는 별개의 것이며, 상호불가침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그 분의 주장은 허황된 것이었다. 듣기 거북한 괴설이었다. 그 분은 내가 교인이라고 그 말을 들려주었다가, 창조론이 아무리 성경에 나오는 것이라도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진화론과 창조론은 받아들이는 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흥분하던 나에게 심히 실망하였을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이럴 즈음, 교회 청년회지인 ‘로고스’지의 편집장이 나에게 원고를 청탁하였다. 내가 시조공부를 하고 있음을 알고 부탁해왔으나, 기독교에 대해서 말할 거리가 별로 없는 당시의 나로서는 신앙수필을 쓴다는 게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교회에선 안한다 소리하지 말라’는 충고를 기억하고 그러마고 약속을 덜렁 해 놓고는 걱정이 되었다. 그 때 착안한 것이 과학적 법칙 사실과 성경을 연결하는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고, 이 기회는 내가 거듭나는 귀중한 기회였다. 글을 쓰기 위해선 성경을 읽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1년여를 부지런히 이 작업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 동안에 눈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완독하게 되었고, 여기서 창조주 되시며,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1985년 1학기 초에 창조과학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창조’지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 잡지는 분량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바로 읽을 수 있는 것이었고, 이제는 눈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린 뒤라서 그런지, 이 창조지를 읽는 동안에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개념 정리가 되기 시작했고, 드디어 내가 배워온 과학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진화론에서 창조론으로 급선회하게 된 나는 창조과학회에 가입하였고, 예전에 창조론을 내게 말해주시던 박문수 선생님과 우신고 선생님, 하계수 선생님과 함께 창조과학회에 입회하였다,
그 해 여름 삼일교회 중·고등부 수련회 때 ‘창조론특강’을 하면서 스스로 많이 부족함을 느껴, 경북대학에서 열린 창조과학회 연수에 참석하여 더 바른 개념을 배우고, 진화론의 잘못된 점과 진화론이 각 분야에 미치는 영향의 심각함을 깨닫고, 이젠 내가 창조론을 전파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과학에선 신앙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지만, 신앙에선 과학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고 말한 것을 새삼 떠올리면서, 하나님 지으신 창조세계의 질서와 법칙을 배우는 과학도의 자리에 정위치하게 되었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선 또 다른 연단을 시키실 작정이셨던 모양이다. 1987년 1월, 시계(視界)가 흐려지게 된 것이다. 시력이 더 나빠진 줄 알고 안경을 바꾸어야겠다 생각하고 안경 처방하러 병원 안과에 들른 나는 의사로부터 전혀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혈액검사, 뇨검사, X선 촬영을 받았고 의사는 시신경 마비로 오는 현상이라며, 불편하겠지만 한 쪽 눈을 가리고 다니라는 것이었다. 수술해도 앞만 볼 수 있지 좌우를 보는 것은 불편하게 된다고 하였다. 눈의 상태는 두 눈동자가 초점을 한곳에 맞추지 못하고 각각 따로 따로 물체의 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물체는 하나인데 나에게는 두 개로 보이는 것이다.
의사는 요즘 그런 증상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고, 한 6개월 정도 있으면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해 주었지만,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눈을 사시처럼 해서 겨우 물체를 분간할 수 있는 그 형편은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살아야 할 인생길이 아득히 남아 있고, 보아야 할 사물, 읽어야 할 책,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젊은 청년으로서의 나에게는 시신경마비라는 것이 기막힌 일이었다. 그때는 방학 중이었지만 당장 개학을 하면 학생들과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을 것이니 수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치료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개학하던 날 거리로 나섰을 때 완전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리며 물체들이 보였다. 길을 걸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했던가, 2월 9일엔 거처가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형체만 남은 가재도구를 앞에 두고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탈감에 빠져 있는 내게 하나님은 창조과학회원인 동료들을 보내 위로해 주셨고 기도하게 하셨다.
두어 달 정도가 걸린 복구기간 동안에 나는 하나님께 나의 시신경의 완전한 회복과 내 장막 복구 문제를 두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고, 그 응답을 받아 시력은 정상을 회복하게 되었고, 나의 장막은 전보다 더 깨끗하게 단장이 되었다.
예전에 가끔씩 즐기던 술과 하루에 두 갑씩이나 피우던 담배를 주님을 영접한 후 완전히 끊게 되었고, 냄새조차 역겹게 되었으니 은혜 아니고 그 무엇이랴. 결혼이란 사건을 통하여 내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글 쓰는 달란트를 내게 주셔서 신앙수필 쓰는 일과 창조과학 활동을 통해 참 진리에 접근하게 해 주셨고, 시신경 마비와 화재를 통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셨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운행 법칙을 만드신 분이시며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분류:창조신앙-중요성
출처:'열리는 영의 세계'(1991년 간) 중에서
하나님은 늘 내게서 멀리 계셨다, 도대체가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인생의 모든 부분이 그 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더욱 불가해한 일이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의 많은 수가 그렇듯이 전통적인 관념을 가진 가정에서 자라면서 나는 저절로 불교적 사생관, 윤회관에다 유교적 습속이 몸에 배여 있었다.
대학시절엔 불교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니 천수경이니 하는 등의 불경에 대하여 깊이 공부하기도 하고, 수행록이나 승려들이 쓴 수상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군 복무하는 동안엔 불교도인 전우들과 함께 인근 사찰에 주일마다 예불하러 다니기도 하였다. 보초로 서 있을 때도 가끔씩 비가 오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 초소 옆의 갈대들이 부딪치며 음산한 무속적 음향을 내어 기분이 묘해지면 염불을 하며 이겨내기도 하였다.
한 번은 군종사병이 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확신에 차서 열심히 예수님을 자랑하였지만, 동정녀 탄생에 대하여 내가 몹쓸 말을 했기 때문에, ‘니하고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며 그는 그만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결혼이란 사건(?)을 통해 찾아 오셨다. 같은 직장에 처녀 선생님이 부임하였고, 그녀는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 청혼하였고, 그녀는 예수 믿어야 한다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은 대단히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왜냐하면 보통 불교도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내게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결혼을 위하여 종교와 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통념상 남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교회를 강조하였기에 도대체 교회가 어떤 곳인지, 결혼의 전제조건이 될 만큼 중요한 예수는 누구인지를 알아볼 겸해서 한번 교회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통성기도 시간,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지르고 뭐라 뭐라 하면서 온통 교회당이 시끄럽고 어찔어찔해 오는 것이 처음 본 사람에겐 정신이 없는 풍경이었다. 감사헌금을 하는데 보니 국외자의 입장에서 볼 때 별것 아닌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송아지 낳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아, 교회란 정상적인 사람은 다니는 곳이 아니구나’라고 속으로 짐작하였다.
그래도 사람이 중요하지 종교가 무슨 대수랴 싶어 개종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결혼 이외의 방법으로 내가 개종한다는 것은 뿌리 깊은 불교가정에서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79년 12월 23일부터 지금도 다니고 있는 삼일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처음은 교회에 앉아서 기도시간에 마음속으로 ‘부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였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학습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성경에 쉽게 접근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였다.
구약성경을 볼려고 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바로, 내 과학지식의 에너지 보존 법칙에 걸려 읽혀지지 않았고, 신약성경을 대할 때면 마태복음 1장에서 족보 읽다가 그만 두곤 하였다.
그래도 집사람의 간절한 바램을 저버릴 수 없어 교회 예배엔 열심히 출석하였고, 그런 가운데 나는 목사님의 설교에 차츰 감화되어 가고 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생각이 차츰 변화되어간 것이다.
교회에선 안한다소리 하지 말라는 어떤 분의 충고를 듣고 세례도 받고 중·고등부 교사로 서리집사로 임명 받아 나름대로 직분에 성실하려 하였으나, 신앙이 쑥쑥 자라간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창조과학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온 한 직장 동료가, 진화론이 잘못된 것이고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바른 것이라 하더라고 말해 주었다. 학생시절에 온통 진화론과 진화론적 관점에서 확립된 과학을 배워 과학교사가 되었고, 과학과 종교는 별개의 것이며, 상호불가침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그 분의 주장은 허황된 것이었다. 듣기 거북한 괴설이었다. 그 분은 내가 교인이라고 그 말을 들려주었다가, 창조론이 아무리 성경에 나오는 것이라도 믿을 수 없는 것이고, 진화론과 창조론은 받아들이는 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흥분하던 나에게 심히 실망하였을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이럴 즈음, 교회 청년회지인 ‘로고스’지의 편집장이 나에게 원고를 청탁하였다. 내가 시조공부를 하고 있음을 알고 부탁해왔으나, 기독교에 대해서 말할 거리가 별로 없는 당시의 나로서는 신앙수필을 쓴다는 게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교회에선 안한다 소리하지 말라’는 충고를 기억하고 그러마고 약속을 덜렁 해 놓고는 걱정이 되었다. 그 때 착안한 것이 과학적 법칙 사실과 성경을 연결하는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고, 이 기회는 내가 거듭나는 귀중한 기회였다. 글을 쓰기 위해선 성경을 읽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1년여를 부지런히 이 작업을 하면서 성경을 읽는 동안에 눈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완독하게 되었고, 여기서 창조주 되시며, 생명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1985년 1학기 초에 창조과학회에서 발간하는 ‘월간창조’지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 잡지는 분량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바로 읽을 수 있는 것이었고, 이제는 눈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린 뒤라서 그런지, 이 창조지를 읽는 동안에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개념 정리가 되기 시작했고, 드디어 내가 배워온 과학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진화론에서 창조론으로 급선회하게 된 나는 창조과학회에 가입하였고, 예전에 창조론을 내게 말해주시던 박문수 선생님과 우신고 선생님, 하계수 선생님과 함께 창조과학회에 입회하였다,
그 해 여름 삼일교회 중·고등부 수련회 때 ‘창조론특강’을 하면서 스스로 많이 부족함을 느껴, 경북대학에서 열린 창조과학회 연수에 참석하여 더 바른 개념을 배우고, 진화론의 잘못된 점과 진화론이 각 분야에 미치는 영향의 심각함을 깨닫고, 이젠 내가 창조론을 전파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과학에선 신앙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지만, 신앙에선 과학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고 말한 것을 새삼 떠올리면서, 하나님 지으신 창조세계의 질서와 법칙을 배우는 과학도의 자리에 정위치하게 되었다.
그런 내게 하나님께선 또 다른 연단을 시키실 작정이셨던 모양이다. 1987년 1월, 시계(視界)가 흐려지게 된 것이다. 시력이 더 나빠진 줄 알고 안경을 바꾸어야겠다 생각하고 안경 처방하러 병원 안과에 들른 나는 의사로부터 전혀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혈액검사, 뇨검사, X선 촬영을 받았고 의사는 시신경 마비로 오는 현상이라며, 불편하겠지만 한 쪽 눈을 가리고 다니라는 것이었다. 수술해도 앞만 볼 수 있지 좌우를 보는 것은 불편하게 된다고 하였다. 눈의 상태는 두 눈동자가 초점을 한곳에 맞추지 못하고 각각 따로 따로 물체의 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물체는 하나인데 나에게는 두 개로 보이는 것이다.
의사는 요즘 그런 증상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고, 한 6개월 정도 있으면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해 주었지만,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눈을 사시처럼 해서 겨우 물체를 분간할 수 있는 그 형편은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도 살아야 할 인생길이 아득히 남아 있고, 보아야 할 사물, 읽어야 할 책,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젊은 청년으로서의 나에게는 시신경마비라는 것이 기막힌 일이었다. 그때는 방학 중이었지만 당장 개학을 하면 학생들과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을 것이니 수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치료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개학하던 날 거리로 나섰을 때 완전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리며 물체들이 보였다. 길을 걸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했던가, 2월 9일엔 거처가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형체만 남은 가재도구를 앞에 두고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탈감에 빠져 있는 내게 하나님은 창조과학회원인 동료들을 보내 위로해 주셨고 기도하게 하셨다.
두어 달 정도가 걸린 복구기간 동안에 나는 하나님께 나의 시신경의 완전한 회복과 내 장막 복구 문제를 두고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고, 그 응답을 받아 시력은 정상을 회복하게 되었고, 나의 장막은 전보다 더 깨끗하게 단장이 되었다.
예전에 가끔씩 즐기던 술과 하루에 두 갑씩이나 피우던 담배를 주님을 영접한 후 완전히 끊게 되었고, 냄새조차 역겹게 되었으니 은혜 아니고 그 무엇이랴. 결혼이란 사건을 통하여 내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글 쓰는 달란트를 내게 주셔서 신앙수필 쓰는 일과 창조과학 활동을 통해 참 진리에 접근하게 해 주셨고, 시신경 마비와 화재를 통하여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셨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운행 법칙을 만드신 분이시며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분류:창조신앙-중요성
출처:'열리는 영의 세계'(1991년 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