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의 힌트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


지금은 다른 마을과 별 차이 없이 전기가 들어오고, TV, 냉장고 등 웬만한 문화시설을 누리고 살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남포불도 흔치 않고 라디오가 동네에 한 집 정도 있을 때였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한 동네에 살았는데, 나는 많은 사촌 형제들과 시골의 전원생활을 만끽하면서 자라났다. 나무 막대기 하나나 수수대궁 하나만 있어도 하루를 신나게 놀았고, 팽이치기와 연날리기에 손발이 얼어 논둑에 불을 놓아가며 한 겨울을 지내곤 하는 천진한 분위기에 파묻혀 살아 왔다.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모든 다른 친척들이 다녔던 서석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또 그분들이 다녔던 서석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매일같이 10여리 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고, 특히 교회가 우뚝 선 동산을 넘어 다니곤 했지만, 그 교회 건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혀 생각지 않고 지나다녔을 뿐이었다. 시골에 고등학교가 없어 외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바로 윗형이 방학 때 돌아와 신비스런(?) 도회지 이야기며, 학교 이야기, 또 형과 함께 친구집을 찾아온 형 친구의 이야기를 밤새워 가며 듣는 것이 유일한 외부세계의 자극이었다,


 


시골교회의 탁구대가 인연


그 형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단다. 아마도 그때 처음 교회라는 단어가 뇌리에 들어왔던 것 같다. 거의 비슷한 시기 중학교 2학년 2학기 중 어느 토요일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나와는 다른 마을에 사는 친한 친구가 우리집 방향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이유인즉 교회의 학생예배에 참석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에 ‘나도 가도 되느냐’고 물었던 것이 최초로 교회에 발을 디딘 것이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 탁구대가 그 교회 안에 있는 것에 마음이 끌려 매주 토요일 탁구도 칠 겸 정기적으로 학생예배에 참석하다가 좀 더 지나 주일예배에도 참석하는 이른바 ‘교인’이 된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아래 동생들도 주일학교에 다니게 되어 지금은 온 가족이 다 교회에 나가고 있지만, 그때엔 일단 우리집 형제들만 교회에 다녔다.


교회 다니는 것은 시골생활에 색다른 묘미를 가져다주었다. 매우 열심 있는 학생교인이 되어버렸다. 치열한 고교입시의 경쟁에서 교회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다. 수십 년 중학교밖에 없던 시골에 서석농업고가 설립되게 되었는데, 바로 내가 고등학교 입학할 시기에 생겨나게 된 것이다. 지방의 유지로, 또 중학교의 서무과장으로 여러 모양으로 그 지역에 상급학교 설립을 위해 애쓰신 아버지와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드디어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아버지의 위치에서 다른 학생들은 이 시골학교에 입학하라고 하면서 아들인 나를 다른 도시로 보낼 수가 없으시다는 아버지의 주장에 얼마나 담임선생님과 나와 또 가족 사이에 논쟁이 있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아버지의 결정에 순종하여 서석농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훌륭한 농학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며 착실히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으나, 건물도 완성 안된 채 노천수업에 매일같이 밭에 나가 농업실습으로 시간을 보내는 고급 일꾼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줄곧 시골에서만 자란 나에겐 다르게 비교할 상대가 없으니 그럭저럭 만족한 채 재미난 1년을 보냈다.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온 옛 중학교 동창들로부터 들은 그들의 학교생활은 나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남에게 뒤지지 않고 중학 생활을 보냈던 내가 비참하게 생각됐고, 독학을 해서라도 뒤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새 학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큰 갈등 없이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과 다른 여건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환경을 보고 그냥 주저앉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주일 낮 설교말씀 중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는 말씀은 듣는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내 것으로 해보고 싶은 강한 충동과 확신에 용기를 얻게 되었다. 비록 교과과정이 다르고 지도해 줄 분도 없고 자극을 받을 것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믿음이 나로 하여금 껍질을 깨고 나오듯 그 현실에서 도약을 시도하게 되었다.


1969년 6월 25일, 농고 2학년생으로 대학입시를 위해 학교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부모의 헌신적 도우심과 학교 선생님들의 격려로 1년 후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때의 신앙에 힘입어 계속 대학원 진학 - 미국 유학을 거처 이곳 원자력 연구소에까지 오게 되었다. 한 마디의 성경말씀과 그것을 신뢰하는 믿음이 불가능한 것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그 어려움을 이겨내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한 작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생활에 있어서 또 한번의 큰 변화는 대학에 입학하여 CCC에 다니면서 착실한 성경공부와 신앙훈련으로 구원의 확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법, 전도실습 등을 배우고 익힌 것이었다. 범죄와 좌절, 근심과 무기력 속에서 처참한 자신의 모습에 슬퍼할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적인 힘과 도움이 되었다. 어디서도 체험하지 못하는 기쁨과 만족, 마음껏 속에서 우러나는 웃음을 웃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된 최고의 유익이다.


 


역사적 사실 바탕 둔 성경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라는 책을 읽고 지금껏 신앙은 다른 학문과 논리나 증거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닌 줄로 알았다가 성경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수많은 사실 위에 기록된 귀중한 자료임을 깨닫고 성경의 위대함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과학적인 증거들을 기술한 서적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때마침 ’80 세계복음화대회의 ‘창조냐 진화냐’ 세미나를 개최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어 선물로 주신 과학 분야의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의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들어 하나님을 전파하며 살게 되었다.


대학교 때 CCC에서 6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하게 된 아내는 내 신앙생활에 큰 도움과 자극을 주었다. 목사님 가정에서 태어나 틀에 박힌 신앙생활에서 별다른 신앙의 묘미를 맛보지 못했던 자매가 전도훈련을 통해 변화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왜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 나는 그런 만족스런 삶을 살지 못하는가 하는 회의가 왔었다.


틀에 박힌 기도나 예배가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깊이 알고 싶었고, 일반적인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문제를 하나님께 말하고 싶게 되었다. 대학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실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그 후로 확신에 찬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면 어떤 기적도 불가능한 것이 없지 않았겠는가? 그때껏 나에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지가 않았었다. 그것보다는 윤리나 도덕적 면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의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실제 기록을 자세히 공부할 기회를 갖고 보니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이 땅에 태어나 살아 있었던 인물이며, 엄연한 법정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비록 그것이 불법적인 재판이었다 할지라도)  당시 실재 인물들에 의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해 목숨이 끊어진 것이 여러 차례 확인되었으며, 신실한 추종자에 의해 조촐하지만 예식에 맞게 장례가 치러져 돌무덤에 장사되어 있었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하게 무덤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3년간 동고동락하며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실제로 그 무덤을 찾아 온 사람들은 처음 3일간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생생한 증인들에 의해 알려진 바에 의하면 무덤 속의 시체가 살아나서 40여 일간을 다니신 것이다. 그 증인이 너무나 많고, 그 기록이 너무나 확실하며, 나중에 눈여겨 본 일이지만 그 사건이 오래 전부터 이미 예언되어왔던 주지의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평상시 우리의 경험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지만, 반면 나타난 증거들은 평상시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안 믿을 수도 없는 사실인 것이다. 과학은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증거 위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로 보아 너무나 확실한 것이다. 여하튼 이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나에게 온전한 기쁨과 확신에 찬 생활을 하게 해 주었고, 성령의 살아 역사하심과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게 되었다.


한번은 미국에서 대학원생으로 실험에 몰두해 있을 때인데, 중요한 화학반응이 여러 차례 반복실험을 해도 예상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아 깊은 실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남들은 모두 추수 감사절 휴가라고 부산하게 떠나가는데 나는 하나의 반응이 진행되지 않아 힘이 빠져 있었다. 해볼만한 다른 방법들도 다 강구해 본 때라 만일 이번에도 원하는 물질이 얻어지지 않으면 실험 테마를 바꾸어서 새로 시작해야만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아마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엔가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텅 빈 실험실에 밤늦게 앉아 다시 차분히 마지막 시도를 해보기에 앞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번 실험 결과, 앞으로의 계획을 재정리하려고 하니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해달라고 실험 장치 앞에서 기도하고 여러 차례 실패했던 똑같은 실험을 다시 차분히 시작하였다.


그 때 불현듯 이 중간화합물을 짧은 실리카겔 칼럼에 통과시켜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여러 기기들을 이용해 확실하게 중간화합물이 만들어 진 것은 언제나 확인이 되었고, 그 기기들이 보여 주는 결과로 보아 매우 순수한 물질임을 알 수가 있었으므로, 실리카겔 칼럼을 사용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조작이며, 또한 불안정한 상태의 물질이므로, 그 상태에서 시간을 끈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못됨을 알 수 있었음에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여러 차례 실패해 왔던 실험이니 아무려면 어쩌겠나 하는 생각에 짧은 관을 이용해 재빨리 통과시키고 다시 확인해 보니 그 전과 달라진 것은 전혀 나타나지가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 중간물질에 최종반응을 시켜 원하는 물질을 얻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다.


반응이 시작되고 잠시 후 조사해 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바로 원하는 그 물질의 성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흥분된 마음으로 반응물질을 정제하여 분석해 보니, 지난 몇 달 동안 그렇게도 바라고 바라던 그 목적화합물이 생겨난 것이다. 그날밤 나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남은 실험을 정리하여 동이 훤히 터오는 새벽공기를 마시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직도 왜 그 작은 관을 통과시켜야만 원하는 대로 반응되는지는 모른다. 지금껏 반응에 있어서는 그 관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영감 때문에 역사상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한결 같이 창조주 하나님과 그로부터 오는 영감을 그렇게도 높이 찬양하고 귀하게 여겼나 보다. 화학자로서 비록 짧지만 연구생활을 돌이켜 보면 이 신비한 자연을 다스리시는 그 오묘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겸손하게 그 분의 지도와 안내를 받아야만 되는 존재임을 깨닫곤 한다.


분류:창조신앙-중요성
출처:'열리는 영의 세계'(1991년 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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