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토의문제
1) 창조주의 분명한 계시인 성경보다 신비한 체험이 더 중요?
성경말씀에 믿음의 근거를 두지 않고 신비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이 왜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인지 함께 토의해 봅시다. 가능한 한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의견을 제시하십시오.
2) 구원 그 이후: 세계관과 삶의 변화
앞에서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서론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에 대해서 토론해 보십시오.
로마서 1:17절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단지 그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일까요? 아니면 복음을 믿고 예수님/성령님을 내 마음속의 주인으로 영접하여 삶이 변화되는 것까지 포함할까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는 말은 전인격적인 것입니다. 즉 지적으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정적으로는 진정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격하며 깨닫는 것이고, 의지적으로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나의 세속적 가치관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매일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주인으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고 동행하신다면 우리의 세계관/인생관, 삶의 목적 등이 믿기 전의 그것들과는 조금씩 달라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달라진 세계관/인생관 및 가치체계는 반드시 그 삶으로 조금씩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완전히 죄 없이 완전한 삶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믿기 전이나 믿은 후 한참 후에도 가치체계나 삶의 모습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도색잡지(pornography magazine) 허슬러『Hustler』의 사장인 플린트(Larry Flynt)씨는 어느 Cable TV 인터뷰 쇼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그는 계속 포르노 사업에 종사하고 그의 삶은 전혀 변화된 것이 없습니다. 그의 믿음을 순수한 믿음으로 볼 수 있을까요? 외식적인 입술신앙이 아닐까요? 야고보서 2:19에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등 감정적으로도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9:27에 보면 일곱 번째 우박의 재앙 때, 애굽 왕 바로는 모세와 아론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서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그는 자기가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자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임을 알고 입술로는 고백하였으나 진정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디도서 1:16)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잘못된 진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이요, 기독교 이단들이요, 코란을 믿고있는 이슬람교도 등을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4:6)
마태복음 7:21 (오직 구원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지만)을 암송하십시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선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변화된 삶은 참된 회개와 믿음의 외적 증거입니다. 교회출석, 세례증서 그런 형식적인 것들이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조화는 생화와 외적으로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재로는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꽃입니다. 향기도 나지 않고 벌도 모이지 않습니다. 열 처녀는 다 외형적으로는 똑같은 등을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가지만, 그 안에 기름(성령님)을 소유하지 못 한자는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입만 움직이는(lip service) 우리들의 신앙고백이나 몸으로만 행하는 금식이나 형식적인 제물, 베옷 등에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삶 속에서 바뀌어진 세계관과 삶의 변화로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4)
•구원에는 세 가지의 시제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을 믿고 주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영접함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고(과거시제: 칭의(justification), 요한복음 1:12, 3:16, 5:24), 우리의 삶 속에서 성화과정을 통하여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며(현재진행시제: 성화(sanctification), 빌립보서 2:12),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하여 영생으로 완전히 이룰 것입니다(미래시제: 영화(glorification), 요한계시록 21:3-4, 22:3-5).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성경적 세계관과 삶에 관심을 갖고 그 길을 향하여 걸어가도록 견인하십니다. 때로는 실족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그 방향으로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은 자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도록 그대로 내 버려 두십니다. 삶과 세계관의 변화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2-4에 위의 세 가지 시제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찾아보고 당신의 삶과 믿음 안에서 그 의미를 나누어 보십시오.
3) 성경말씀은 다양한 윤리적 표준들에 대해서 반드시 최종 권위가 되어야만 한다! (The Bible Should Be the Final Authority for Various Ethical Standards!)
현 시대를 다원화와 윤리의 상대주의 시대, 즉,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절대적 진리나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합니다. 당신은 절대적 도덕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덕기준이나 가치체계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프랜시스 쉐퍼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만일 도덕이나 진정한 가치가 존재할 수 있으려면 절대자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인간을 초월하는 절대자가 없다면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판단이 충돌할 때, 어떠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최종적인 권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상충하는 견해들 속에 다만 방치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절대자가 없다면 우리들에게서 사라질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도덕, 가치, (인간의 의미를 포함한) 존재의 의미, 그리고 지식의 기초이다.
-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The Word of the Lord stands forever)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25)
만일 어는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혼인적령기 남녀비율이 1:1.5가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이런 경우 1부 2처제를 허용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일까요? 아니라면 성경적 대안은 무엇일까요?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참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9:4-9
말라기 2:14-16
창세기 2:24
에베소서 5:31-33
신명기 17:17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부분 출산 낙태 (Partial Birth Abortion)이라는 낙태방법이 “산모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법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아이를 반쯤 분만(delivery)한 후에 그 머리를 흉기로 찔러서 아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완전히 해산된 후에 이와 같은 일을 하면 그것은 살인죄로 취급됩니다. 즉 살인이냐? 아니면 법으로 보호받는 의술행위냐? 하는 그 경계를 사람들이 편리한 대로 투표해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 경계는 또 어디서부터가 사람이냐? 라는 질문과도 연관됩니다. 현 시행법대로라면 아이가 완전히 엄마의 자궁을 빠져 나오기 전까지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사람들이 임의로 합의한 것입니다.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가 그 기준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시편 139:13,14,16
우리 믿는 형제들은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어떠한 가치체계나 도덕기준에서 살아야 하는지 가장 잘 아시며 그것들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Has God spoken and revealed His truth to us, or is truth something we have to find, even invent, for ourselves?)
[적용]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남이 하니 나도 한다”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도덕기준을 성경에 두지 않고 사람들과 사회의 조류나 용납정도에 맞추려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지 않은지 묵상해 보십시오. 혹시라도 있다면 결단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All your righteous laws are eternal.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시편 119:160)
분류:기독교-세계관
출처:`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中
III. 토의문제
1) 창조주의 분명한 계시인 성경보다 신비한 체험이 더 중요?
성경말씀에 믿음의 근거를 두지 않고 신비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이 왜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것인지 함께 토의해 봅시다. 가능한 한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의견을 제시하십시오.
2) 구원 그 이후: 세계관과 삶의 변화
앞에서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서론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에 대해서 토론해 보십시오.
로마서 1:17절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단지 그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일까요? 아니면 복음을 믿고 예수님/성령님을 내 마음속의 주인으로 영접하여 삶이 변화되는 것까지 포함할까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는 말은 전인격적인 것입니다. 즉 지적으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정적으로는 진정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격하며 깨닫는 것이고, 의지적으로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나의 세속적 가치관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고)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매일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주인으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고 동행하신다면 우리의 세계관/인생관, 삶의 목적 등이 믿기 전의 그것들과는 조금씩 달라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달라진 세계관/인생관 및 가치체계는 반드시 그 삶으로 조금씩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완전히 죄 없이 완전한 삶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겠지만). 믿기 전이나 믿은 후 한참 후에도 가치체계나 삶의 모습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믿음은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도색잡지(pornography magazine) 허슬러『Hustler』의 사장인 플린트(Larry Flynt)씨는 어느 Cable TV 인터뷰 쇼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그는 계속 포르노 사업에 종사하고 그의 삶은 전혀 변화된 것이 없습니다. 그의 믿음을 순수한 믿음으로 볼 수 있을까요? 외식적인 입술신앙이 아닐까요? 야고보서 2:19에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등 감정적으로도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9:27에 보면 일곱 번째 우박의 재앙 때, 애굽 왕 바로는 모세와 아론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는 자기가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자연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임을 알고 입술로는 고백하였으나 진정한 회개와 함께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데는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잘못된 진리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이요, 기독교 이단들이요, 코란을 믿고있는 이슬람교도 등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7:21 (오직 구원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지만)을 암송하십시오.
선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변화된 삶은 참된 회개와 믿음의 외적 증거입니다. 교회출석, 세례증서 그런 형식적인 것들이 구원을 이루지 못합니다. 조화는 생화와 외적으로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재로는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꽃입니다. 향기도 나지 않고 벌도 모이지 않습니다. 열 처녀는 다 외형적으로는 똑같은 등을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가지만, 그 안에 기름(성령님)을 소유하지 못 한자는 구원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입만 움직이는(lip service) 우리들의 신앙고백이나 몸으로만 행하는 금식이나 형식적인 제물, 베옷 등에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삶 속에서 바뀌어진 세계관과 삶의 변화로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의 시제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을 믿고 주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영접함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고(과거시제: 칭의(justification), 요한복음 1:12, 3:16, 5:24), 우리의 삶 속에서 성화과정을 통하여 그 구원을 이루어 나가며(현재진행시제: 성화(sanctification), 빌립보서 2:12),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하여 영생으로 완전히 이룰 것입니다(미래시제: 영화(glorification), 요한계시록 21:3-4, 22:3-5).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성경적 세계관과 삶에 관심을 갖고 그 길을 향하여 걸어가도록 견인하십니다. 때로는 실족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은 그 방향으로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은 자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도록 그대로 내 버려 두십니다. 삶과 세계관의 변화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2-4에 위의 세 가지 시제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찾아보고 당신의 삶과 믿음 안에서 그 의미를 나누어 보십시오.
3) 성경말씀은 다양한 윤리적 표준들에 대해서 반드시 최종 권위가 되어야만 한다! (The Bible Should Be the Final Authority for Various Ethical Standards!)
현 시대를 다원화와 윤리의 상대주의 시대, 즉,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절대적 진리나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합니다. 당신은 절대적 도덕기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덕기준이나 가치체계가 시대나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프랜시스 쉐퍼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만일 어는 나라에 큰 전쟁이 나서 혼인적령기 남녀비율이 1:1.5가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이런 경우 1부 2처제를 허용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일까요? 아니라면 성경적 대안은 무엇일까요?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참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9:4-9
말라기 2:14-16
창세기 2:24
에베소서 5:31-33
신명기 17:17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부분 출산 낙태 (Partial Birth Abortion)이라는 낙태방법이 “산모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법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아이를 반쯤 분만(delivery)한 후에 그 머리를 흉기로 찔러서 아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만약 아이가 완전히 해산된 후에 이와 같은 일을 하면 그것은 살인죄로 취급됩니다. 즉 살인이냐? 아니면 법으로 보호받는 의술행위냐? 하는 그 경계를 사람들이 편리한 대로 투표해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 경계는 또 어디서부터가 사람이냐? 라는 질문과도 연관됩니다. 현 시행법대로라면 아이가 완전히 엄마의 자궁을 빠져 나오기 전까지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사람들이 임의로 합의한 것입니다. 당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가 그 기준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시편 139:13,14,16
우리 믿는 형제들은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어떠한 가치체계나 도덕기준에서 살아야 하는지 가장 잘 아시며 그것들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Has God spoken and revealed His truth to us, or is truth something we have to find, even invent, for ourselves?)
[적용]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남이 하니 나도 한다”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습니다. 도덕기준을 성경에 두지 않고 사람들과 사회의 조류나 용납정도에 맞추려 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지 않은지 묵상해 보십시오. 혹시라도 있다면 결단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분류:기독교-세계관
출처:`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