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관들 2. 성경적 세계관의 의미와 적용 - II. 주제연구 (4)

4) 다른 세계관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를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르게 성경적으로 사고해야합니다. 맹목적인 신앙은 위험합니다. 사고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세속의 논리나 주변의 문화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흡수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경에 기초한 지성의 훈련은 매우 중요하고도 필수적입니다.


인류역사의 물줄기 중 가장 큰 두 흐름은 인본주의(헬레니즘)와 계시(성경/헤브라이즘) 와의 갈등입니다. 원죄도 인간 스스로가 모든 것의 주인이 되어보려는 인본주의적 발상에서 시작되었고, 그러한 성향은 홍수 심판과 바벨탑 심판이후에도 끊임없이 인류의 죄성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 계시가 카톨릭 교회에 의해 왜곡되어 있던 중세이후에도 두 가지의 큰 흐름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르네상스(문예부흥)를 통하여 다시 태어나고 꽃 피우기 시작한 인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참 계시인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입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이성으로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는 합리주의, 즉 진보주의적 낙관론으로 힘차게 출발하였으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허상에 불과하였음이 밝혀진 현대에는 비관론이 주류를 이루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세속적 시대정신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편, 성경으로 돌아가자던 종교개혁의 흐름도 진화론이나 성경비평학 등 자유주의신학의 맹공으로 한때 주춤하였으나, 몇 차례의 리바이벌 및 복음주의 운동의 노력으로 그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성경적 세계관이 아닌 역사적으로 계속 변천의 과정을 밟아왔던 여러 세상적 세계관들을 제임스 사이어의 저서와 프랜시스 쉐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양승훈 교수의 『기독교 세계관의 이해와 적용』이라는 저서에 설명되어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세속적 세계관들에 대해 다 살펴보는 것은 본 교재의 목적과 다르며, 그러한 내용들은 일반 철학교재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우리의 신앙에 직접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쳐 왔던 중요한 것 몇 가지만 간략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① 이신론(理神論, Deism)


이신론은 전통적 기독교에서 제시한 섭리, 예지, 의지, 운명에 대해 장황한 논쟁을 하던 이들이 신학과 철학의 혼란한 논쟁을 벗어나 어떤 지적 통일을 이루고자하는 시도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욕구와 더불어 하나님은 이성적 신이기에 그가 만든 우주도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하며, 따라서 연구의 대상이라는 근거에서 우주의 형태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연구는 하나님이 만든 세계의 상(image)을 질서정연한 거대한 기계로 보았고, 이는 더 많은 탐구와 발견을 자극하였고 근대 과학을 탄생시켰습니다.


이들 사조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 중 첫째,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관하여 제1원인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그 이후 스스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운행하도록 버려 두셨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순리대로 돌아가도록 시계 태엽만 감아놓고 뒷짐지고 보고만 계심). 따라서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고, 인간사의 주권자도 아니시며, 섭리자도 아니라고 전제함으로써, 하나님을 인간과 분리되고 소외된 존재로서 간주하여 (즉, 이신론은 초월적 신만을 인정하였을 뿐 그의 임재와 내재성을 부인함으로 인해) 인간에게 엄청난 고독감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우주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폐쇄체계 안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정론적 성격을 지니며,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가 없다고 봄으로써, 인간은 그 체계 안에서 어떠한 변화도 창출할 수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간론에 있어서도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중의 하나인 부품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결정력을 잃게되고 인간의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고 해석하였고, 윤리에 관해서는 우주는 정상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 옳은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며,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창조시 정해졌기 때문에 역사는 직선적이고 재조정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신론이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로, 윤리 면에서 타락하지 않은 정상적인 우주를 가정하여 우주는 자연히 모든 것이 선으로 흐른다면 윤리의 독특한 내용은 설 땅을 잃게 되었고, 인간 본성 면에서 인간의 재조정에 대해 닫혀진 세계에서는 그 인격과 존재의 중요성을 유지할 수가 없는 문제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는 형제/자매들 중에서도 “태초에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우주-지구-생명의 진화가 일어나도록 시계태엽을 감아놓고 그 후로는 과학적 원리/자연적 법칙만이 지배하도록 방관하고 계시며, 우리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고 어떠한 조정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신론의 세계관은 분명히 성경적 세계관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멸하리니 (스바냐 1:12)


 


②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


이신론(理神論)은 유신론(有神論)과 자연주의(自然主義)라는 두 개의 큰 대륙을 연결하는 점이지대(漸移地帶)에 불과했지만, 자연주의는 지금도 많은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중대한 사조중의 하나입니다. 이신론에서는 하나님을 창조주 또는 인격은 없지만 우주의 암시적 유지자로 보는 반면 자연주의에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실제적 가치가 없는 이론적 실재로만 생각합니다. 자연주의는 초월자를 배격하는 인본주의의 필연적 동반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만만하게 인본주의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자율적인 위대한 존재로 만들고자 했지만, 더 위대해지기는커녕, 자신이 분자의 덩어리로 끝나고 말았음을 발견할 뿐이었습니다. 자연주의의 기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존재의 본질에 대해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에서 본질의 중심 요소가 하나님에서 우주로 옮겨가게 되었고, 실재는 화학과 물리학을 통해 그 관계를 알아낼 수 있는 불변의 ‘법칙률’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우주를 보는 관점에서 이신론과 유사한 사상체계를 가지지만, 이신론과는 달리 사건의 발생 순서와 그들의 의존관계 및 사물의 존재 양식 등이 고정 불변의 필연적 단계가 논리적으로 구현된 것(Deism: Design)이 아니고, 불확정적으로 결합(chance, randomness and probability)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셋째로, 인간과 인격에 관해서는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이고, 인격이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화학적, 물리적 성질의 상호관계라고 전제함으로써, 인간의 이해력은 순수한 신비가 아니고 기계의 복잡성에서 유래한 결과로 간주합니다.


넷째로, 죽음은 인격과 개체성의 완전한 소멸로 간주하며, 전인격이란 사회적, 물리적, 상황 안에서 활동하는 생물학적 유기체의 작용이며, 인간의 존재란 사망시에 소멸한다는 생각을 하여, 인간을 덧없는 존재로써 규정짓고 말았습니다.


다섯째로,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며, 전체적 목적성은 없다고 전제합니다. 유신론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의도하신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는 목적론에 근거하고 있지만, 자연주의는 그 과정이 자율적이어서 단지 역사는 인간이 계속 존재할 때까지만 ‘지속’할 뿐이고, 만일 인류가 소멸하면 자연의 역사만 계속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여섯째로,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을 가치의 부여자로 보는데 반하여, 자연주의자들은 윤리를 인간의 의식과 함께 생긴 것이기 때문에 윤리도 인간과 함께 성립했다고 주장함으로써(인본주의), 인간 이전의 선악의 분별력에 관해서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연주의와 인본주의는 필연적인 동반자입니다.


이상에서 자연주의의 주요 내용들을 다루어 보았는데, 이 사상이 과학적 연구방식과 교육 및 사회분야에 아직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자연주의는 정직하고도 객관적이라는 인상과 함께 일관성이 있는 학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 예로는 “진화론”을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연주의 내부에도 서로간의 불일치를 노출하고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목저과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또한 그처럼 불분명한 기원, 즉 진화의 기원, 을 갖고 있는 존재가 자신의 지적능력을 신뢰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인간 스스로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야기 시키게 되어, 결국은 허무주의와 진리의 상대주의인 포스트 모더니즘을 낳게 되었습니다.


초월자의 존재와 계시를 절대적으로 배격하는 자연주의/인본주의는 실용주의적 성향을 띠게 됩니다. 실용주의(Pragmatism)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이 옳은 것이다. 행위나 정책은 오로지 실용적 근거에 비추어 판단되어야 한다. (Whatever works best is right. Actions and policies are judged on utilitarian grounds alone.)” 즉 인간적 판단에서 사용가치가 있으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실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인간이 결정하여 정책을 세우거나 행동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성취적 효율성의 장점이 있는 반면, 이러한 실용주의는 성경적 세계관과 대립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극도의 실용주의는 ‘선한 목적이나 결과를 위해서는 악한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의 경향을 띄게 됩니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번져가고 있는 “계약결혼/혼전동거”나 “장애자 정책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는 것”등이 모두 실용주의적 사고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인본주의자들은 “계약결혼”의 장점을 들며 “살아보고 결정하는 것”의 정당성을 떠들어대기도 하지만, 사람을 “한번 써보고 마음에 들면 취하고 마음에 안 들면 버린다.”는 식의 생각은, 인격대 인격의 고귀한 만남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엄숙한 언약을 무시한 진화론적 실용주의의 위험한 발상입니다.


 


③ 허무주의(虛無主義, Nihilism)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감정으로써 모든 가치에 대한 부정이며, 자연주의의 필연적 산물인 극단의 무의미 상태입니다. 인본주의가 인간의 이성의 힘을 과신하고 자연주의/과학주의가 낙관적 진보주의 및 테크노피아(technopia)를 외쳐 왔지만, 그 허상이 드러나면서 회의적이고 허무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 현 시대정신으로 자리잡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더욱이 신의 존재를 전제한다 할지라도 이신론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관계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우주 밖에서 태엽만 감아놓고 뒷짐지고 있는 신이라면 곧 숙명론이나 회의주의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연주의 사고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이성의 결과는 확신할만한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고, 우주의 폐쇄적 성질은 하나의 제한으로 느껴졌으며, 죽음이 소멸이라는 관념은 심리적 불안을 야기시켰고, 자연의 최고산물로써 인간의 지위는 우주로부터 소외나 우주와의 연합(따라서 인간을 해변가의 조약돌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인식론에 있어서 인간이 비인격적인 힘의 결과로 존재한다면, 즉 물질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작용한다면, 물질이 의식적 존재로 하여금 정확한 관찰과 옳은 전제에 기초한 참된 인식이나 논리적 결론에 이르도록 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게되고, 도덕론에 있어서도 자연주의자들은 세계란 단지 거기에 존재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전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도덕적 당위를 느끼게 하지 못하였으며, 또한 윤리의 최고 가치를 인간 생존의 유지에 둠으로서 윤리적 상대주의를 초래케 하였고, 절대적 표준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상에서 자연주의의 인간론과 인식론, 도덕론은 절대적 가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인간에게 극도의 의미 상실을 안겨다 줌으로써 자연히 허무주의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과학주의 및 낙관적 진보주의를 부정함에 있어서는 긍정적이지만, 허무, 죽음, 무, 무의미, 절망 등이 지배하게 되며, 어떠한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수용하지 못하는 상대주의로 귀결됨에 그 반성경적인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결국 현시대정신인 포스트모더니즘을 태동시켰습니다. 세속적 세계관의 여러 모습에 대해서는 3권에서 다시 한번 자세히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작금의 시대에는 이신론과 자연주의, 그리고 허무주의가 교묘히 결합하여 현대인의 신앙을 뿌리채 흔들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풍조를 따르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분을 그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기이한 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망원경의 반대쪽 렌즈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아주 왜소하게 축소시켜 버린 신자들은 결국 왜소한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렸다.


또한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회의주의에 의해 혼란을 겪게 되었다. 3세기 이상 동안 르레상스식 사고방식 안에 있는 자연주의라는 누룩은 서구의 사상에서 암적 존재가 되어왔다. 그 결과,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직접적으로 또한 완전하게 통제하신다는 것을 부인하게 되었으며, 신학과 철학과 과학은 한데 결합하여 그 주장을 따라왔다. 그 결과, 성경은 맹렬한 비난의 세례를 받게 되었으며, 역사적 기독교 내의 많은 사건들 역시 더불어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신적계시와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회의주의는 진리의 통일성에 대한 모든 생각, 그리고 인간이 통합된 지식을 가질수 있다는 소망을 모두 포기해 버리는 좀더 광범위한 회의주의를 낳았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세상 ‘저쪽’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기 영혼’ 속에 계실 뿐이기 때문에 자기가 갖고 있는 종교적인 견해들은 외부에 있는 것들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특징인 하나님에 대한 불확실함과 혼란은 2세기 때 영지주의 접신론이 기독교를 삼키려고 애썼던 이래, 다른 무엇보다도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


 


 


분류:기독교-세계관
출처:`성경적 세계관 세우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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