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Andrew A. Snelling
2008-04-18

회의론자 다루기 

(Dealing with Skeptics)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후서 3:3-7)

   나는 몇 년 전 어느 주일날 밤에 창조론의 타당성을 설교하기 위해서 호주 멜버른에 있는 한 교회에 도착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회중들과 내가 교회로 들어가려고 할 때, 내가 진짜 과학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는 전단지를 나누어주던 안티창조론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이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성경을 믿고 있으며, 그러므로 지구는 젊고, 지구의 지질학은 전 지구적인 대홍수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과학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베드로후서 3장을 본문으로 하여) ”창조와 기롱하는 자들(Scoffers)”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강단에 섰을 때, 회의론자들은 바로 정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방해받지 않고, 베드로가 말세에 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기롱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식별할 수 있는지를 지적하면서 설교를 해나갔다.


여기에서 기롱하는 자들이란 온 세계가 전 지구적이고 산들을 덮었던 창세기 홍수(Genesis Flood)에 의해 파멸되었고, 다시 재건되었다는 지질학적 증거들을 일부러 거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신 오늘날과 같이 느리고 점진적인 지질학적 과정들이 수억 수천만 년 동안에도 동일한 율로 느리게 일어나, 지형들의 모습을 만들었고, 화석을 포함하고 있는 암석지층들을 퇴적시켰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물론 내가 이 말세의 기롱하는 자들은 우리 시대의 동일과정설적 지질학자들(오랜 연대를 주장하는 진화론자들)과 일치한다고 말했을 때, 회의론자들로부터 항의와 야유가 있었다.
 
수년 전에 내가 배웠던 한 가지 교훈이 그날 밤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예배 후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당연히 이들 회의론자들은 이 시간을 나를 사기꾼으로 비난하기 위한 연장된 기회로 삼았다. 그들은 수백만 년 동안의 느리고 점진적인 지질학적 과정들이 화석을 포함하는 암석지층들을 퇴적시키는 것을 ”입증했다”는 추정되는 과학적 증거들과 짧은 기간 동안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되는 지질학적 사례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많은 반증들을 제시해도 그들이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베드로후서 3장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했던 것과 똑같이, 이들 기롱하는 자들은 대홍수에 대한 압도적인 지질학적 증거들을 부러 무시하며 잊으려했다. 그들의 본질적인 문제는 영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롬 1:18-32).

그래서 그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더 많은 과학적 증거들을 가지고 어떻게든 확신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성령께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될 때에만 땅의 기원과 역사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모든 분야에서 그 권위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주위의 세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들만 납득한다는 것을 항상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만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유한하고, 오류가 있게 마련이고, 늘 배워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계셨고(편재), 무한하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전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지구의 역사에 대해 그가 친히 목격하신 것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나 지질학자들은 하나님이 온 지구를 대홍수로 심판하실 때 거기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전 지구적인 대홍수는 의심할 여지없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을 안다. 설령 내가 어떤 증거도 직접 볼 수 없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주변 모든 곳에 대홍수에 대한 수많은 압도적인 증거들을 남겨 놓으셨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u/dealing-with-skeptics

출처 - AiG, 2008. 2. 12.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243

참고 : 4198|4235|2104|3948|4211|4214|4087|4052|1493|1464|2050|3119|4217|3346|3272|2922

미디어위원회
2007-09-06

스코프스 재판을 되돌아보며 

(A Look Back at the Scopes Trial)

John D. Morris Ph. D


       1925년의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 일명 원숭이 재판)은 미국 역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 그 재판은 우리가 다시 되돌아보고 배워야할 가치가 있다.

그 재판은 1900년대 초 진화론의 수용이 증가되는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 진화론은 수십년 동안 과학에 영향력을 끼쳐오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세속적 진화론이 의미하는 종교적 도덕적 암시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한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도록 강요하였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테네시주를 포함한 몇 개의 주들은 공립학교에서 인간이 동물 조상들로부터 진화했다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새롭게 조직된 ACLU(American Civil Liverties Union, 미국 시민자유연맹)의 지도자들은 다윈주의적 자연주의(Darwinian naturalism)에 기초한 완전히 세속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이 법안을 바꾸기를 원했다. 스코프스 재판은 그것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이었다.

땅을 뒤흔들었던 ACLU의 많은 소송들처럼 이 소송에도 효과적인 전략이 이용되었다. 몇 개의 테네시주 신문들에 그 법안을 시험하길 원하는 선생님을 찾는다는 광고가 실렸다. 테네시 주 데이톤(Dayton)이란 작은 마을의 실업가들은 그들의 지역사회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존 스코프스(John Scopes)를 권유하였다. 스코프스는 생물학 교사는 아니었지만, 가끔 대리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진화를 언급했던 기억을 생각해내지 못했으나, 그가 체포된 후에 그 법을 확실히 위반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 변호사들은 그가 한 학생에게 개인적으로 진화를 말한 것으로 각색하였다.

과연 데이튼은 전국으로부터 신문 기자들이 몰려오고, 라디오 보도들로 인해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저명한 과학자들이 진화를 입증하기 위해서 모여들었지만, 판사는 단지 스코프스는 법을 위반하였는가? 라는 그 소송에 관한 사실 증언으로만 한정하였다. 그리하여 법정에서 제지되어진 진화론을 가르쳐야한다는 압박들은 언론매체들을 통해서 전 세계로 보도되었고,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커다란 경멸과 신랄한 조소로 이어졌다.

결국 몇몇 왜곡과 변질, 그리고 더러운 속임수들이 난무한 가운데 존 스코프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후에 절차상 문제로 번복되었다). ACLU는 유죄 선고를 환영했다. 왜냐하면 항소하여 이 재판을 연방대법원으로 끌고 가서 진화론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려고 계획했기 때문이었다. 재판 결과가 뒤집어지면서, 항소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벌어진 그 재판은 기독교의 쇠약과 패배를 가져다주었다. 크리스천들은 교회 안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학교, 언론, 공공장소 등에서의 영향력을 세속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오늘날 기독교적 원리들이 조직적으로 배척받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후퇴로부터 고통 받고 있다. 미국 국민들의 대부분이 크리스천들임이 확인되고 있음에도 미국은 완전히 세속화된 길을 걸어왔다. 스코프스 재판은 그러한 변화의 전환점(turning point)이었다.

많은 크리스천 활동가들, 국회의원들, 교육자들은 이러한 재판 결과를 뒤엎기를 원했지만 잘못된 시도들을 해왔다. 적절한 전략의 부재로 그들 모두는 실패해왔다. 이에 반해 ICR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률적 또는 법적 해결책을 주장하지 않아왔다. 대신에 장기간에 걸친 교육적 접근 방식을 추천한다.

그러나 ICR이 법률적 해결책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 나도 유용한 소송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ACLU가 스코프스 재판을 위해 시도했었던 방식처럼,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법률학자들과 함께 앉아 승리의 전략을 논의하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증거들이 가리키는 것처럼 진실은 우리 편이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다수의 교육계, 과학계, 언론계의 인사들과 법적 판례들은 우리와 반대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목표를 가진 신중한 계획은 스코프스 재판에서 입은 손상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세심하게 그리고 기도하면서 이 일을 이루어나갈 것이다.


*Dr. John D. Morris is the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3385/ 

출처 - ICR, 2007. 7. 1.

Jerry Bergman
2007-08-15

창조적 진화 : 노벨상을 받은 반다윈론 

(Creative Evolution: An Anti-Darwin Theory Won a Nobel)


서론

신다윈주의(neo-Darwinism)의 주된 개념은 생물학적 다양성(biological variety)의 창조와 더 적응한 유기체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다.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적자의 도착(arrival)과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변화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어려움으로 남아있다. 다윈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해결책이 단지 "일시적인 가설이나 추정(a provisional hypothesis or speculation)"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은 설명이 나오기 전까지, 그것이 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고안되어진 최고의 이론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이론이 다른 동인(efficient cause, 작용인)에 의해서 분리된 채 현재 남겨져 있는 다수의 사실들을 한 데 묶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Darwin 349-350).

1900년 무렵의 수십 년 동안, 몇몇의 신다윈주의적 이론들이 새로운 생물학적 정보(new biological information)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개발되었으나, 대부분의 이론들은 현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Bowler 1990). 지난 세기에서, 새로운 생물 형태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개발된 가장 성공적인 비다윈주의적(non-Darwinian) 이론들 중의 하나는,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에 의해 체계화된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였다.

베르그송의 주된 저서인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 1944)"는 2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수차례에 걸쳐 재출판이 이루어진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의 성공은 부분적으로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프랑스 철학자였던 베르그송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Fiero 1998). 1921년에서 1926년까지 프랑스 대학(Collége de France)의 철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이었던 베르그송은, 그의 저서들로 인해 프랑스 한림원(French Academy)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에는 노벨상을 수상을 했던 사람이었다.


창조적 진화

창조적 진화론(creative evolution theory)은 그 당시 다윈주의의 주된 어려움으로 간주되었던 것들을 다루기 위해서 베르그송에 의해 개발되었다. 베르그송이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가장 중점적인 내용은, 다윈주의는 자연선택이 선택한 새로운 유전적 정보의 근원(source of new genetic information)에 대해서 어떠한 만족할 만한 설명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베르그송의 이론은 자연선택을 포함해서 잘 알려진 메커니즘들이 기능을 하도록, 새로운 유전정보를 생산해 내는 비다윈적 메커니즘을 제안했다 (Bothamley 2002).

베르그송의 이론은 다윈주의가 가르쳤듯이 모든 생물체들은 기계적 힘으로부터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진화를 야기시켰던 ‘생명의 추진력(vital impulse)’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Fiero 1998). ”진화의 실제 사실은 부적응한 개체의 기계적 제거에서가 아니라, ‘생명의 약동(élan vital)’ 안에서 생물체의 창조적 고조(creative surge)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Edman 1944, xii). 사실상 베르그송의 이론은 특정한 방향으로 진화를 이끄는 비물질적인 생명력(vital impetus)에 호소하는 목적론적 견해(teleological view)이다. 이 생명의 약동은 모든 물질들 내에 불어넣어져 있으며, 거의 무한히 다양한 생물체들의 근원이라고 베르그송은 결론 내렸다. 그것은 또한 최초 생명체를 탄생시킨 원래 추진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Goudge 1967).

베르그송이 설명했던 ‘생명의 약동’은 중력이나 전자기력과 같은 기본적인 힘으로써, 그것들과 다른 많은 물리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기원(origin)은 설명되어질 수 없다. 베르그송은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철학적 논의뿐만 아니라 상세한 과학적 논점까지" 사용했으며,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와 철학자인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를 포함하여 그를 따르는 많은 지식인들을 얻게 되었다 (Bothamley 2002). 하지만, 자연주의적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그의 이론에 대한 지속적인 추종자들을 얻지는 못했으며, 오늘날 그의 기원에 관한 이론은 전반적으로 경험적 증거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폐기되어졌다.

비록 베르그송의 이론이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존 스튜어트 밀(John Stewart Mill), 찰스 다윈(Charles Darwin) 등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은 대개 그들의 철학과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었다. 혹자는 그가 진화론과 유신론(theism)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글을 보면 생명의 약동이 다윈니즘의 매우 실제적이고 심각한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임을 보여주면서, 그 자신을 다윈주의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르그송의 이론이 다루려고 노력했던 다윈주의의 많은 문제점들 중 하나는, 한 다세포 기관(a multicellular organ)은 ‘공동으로 작용하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능적 전체(functional whole made up of coordinated parts)’라는 것이고, 만약 "그 부분들 중 하나나 몇에서 우연한 변이가 일어난다면, 전체의 기능은 손상될 것이다”라는 사실에 있었다 (Goudge 1967, 292). 현재 ‘한 요소도 제거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으로 알려져 있는 이 개념은 현대 지적설계 운동(Intelligent Design movement)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베르그송도 또한 한 요소도 제거 불가능한 복잡성으로 말미암아, 한 동물의 역사와 발달의 모든 단계에서,

동물의 모든 장기들과 복잡한 기관들이 효율적 기능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가 반드시 동시에 변이가 일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다윈도 인정했던 것처럼, 이러한 상호 조화가 필요한 변이들이 무작위적인 복제 실수인 돌연변이들에 의해서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완전히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생물 형태들의 연속적인 변화 과정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기능을 유지하도록, 자연선택 외의 다른 어떤 힘이 작동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Goudge 1967, 292).

베르그송은 또한 다윈주의는 생명체가 점점 더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실패했다고 결론 내렸다.

가장 초기의 생명체는 그 자체로는 단순하지만, 환경에 잘 적응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진화적 과정이 이 단계에서 멈추지 않았는가? 왜 생물체는 (잘 적응했음에도) ‘점점 더 위험하게’ 그 자신을 계속해서 복잡하게 만들면서 진화해 나갔을까? (Goudge 1967, 292).

더 나아가 베르그송은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은, 진화론의 심각한 문제인 더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높은 단계의 생물체로 나아가도록 이끌었음에 틀림없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Goudge 1967, 292). 그런데 그 어떤 것이 생명의 약동이라는 것이다.

베르그송이 다루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주요한 문제점은, 이 생명력(vital force)의 기원에 대한 설명과, 새로운 생물 형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기능했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 이론이 가지는 다른 많은 문제점들 중 하나는, 진화가 무질서한 길 대신에 그 길을 택한 이유를 잘 설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Bothamley 2002).

비록 일반인들은 베르그송의 노벨상 수상이 직접적으로 "그의 걸작인 창조적 진화"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의 노벨상은 사실상 창조적 진화라는 생각과, 그의 생물학적 업적, 그리고 그의 이론에 대한 암시를 다룬 미학적 글들을 포함해서, 그의 철학적 업적 전반에 대한 수상이었다 (Schlessinger and Schlessinger 1986, 56). 노벨상 증서에는 "그의 풍부하고 활력이 넘치는 생각들과 그것들과 함께 제시된 놀라운 기술을 인정하여” 라고 씌어있다.


토의

베르그송의 이론은 많은 학자들에게 자연선택이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는 유전적 다양성의 근원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의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 이론이 폐기처분되었을 때, 베르그송의 이론을 믿었던 사람들은 또 다른 메커니즘을 가정하도록 강요당했다.

수십 년간 널리 유행했던 한 메커니즘은 정향진화(orthogenesis)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진화는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나도록 이끄는 내부의 유기적 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생물체는 배아가 내부적인 힘(internal forces)에 의해서 성체로 발달하도록 인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벽함으로 인도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 또한 힘을 공급하거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어떠한 메커니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폐기되어졌다.

다양성의 근원에 대한 또 하나의 주요한 이론은 대돌연변이(macromutations)이다. 드브리스(Hugo De Vries, 1848-1935)는 달맞이꽃(evening primrose)에 대한 그의 연구로 극적으로 새로운 변종들과 특성들이 설명 없이 갑자기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와 다른 이들은 이러한 대돌연변이가 마침내 진화론자들에게 새로운 유전적 특성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뒤따른 연구를 통해, 드브리스의 변화들은 돌연변이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변종들을 만들어 잡종식물(hybrid plants)들이 나타나도록 하는, 달맞이꽃 내의 부등염색체수(unequal chromosome numbers)에 기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돌연변이라는 개념은 1940년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유전학자인 골드슈미트(Richard Goldschmidt)에 의해서 간단히 부활되었다. 그는 새로운 주요한 동식물 다양성의 기원은 ‘희망적 괴물(hopeful monsters)’에 기인하였다는 것이다. 즉 복잡하고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돌연변이들이 단 한 차례 모두 발생하여 갑자기 새로운 생물체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동물 목(order)이 진화하는데 필요한 변화를 위해서는 수백 혹은 수천의 돌연변이들이 요구되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덧붙여, 대돌연변이를 만족시킬만한 그 어떠한 만족할만한 메커니즘도 오늘날의 신다윈주의자들에 의해서 제안되어진 적이 없다.

오늘날, 많은 진화론자들은 다수의 작은 돌연변이들이 대진화(macroevolution, 종을 뛰어 넘어 다른 생물 종으로 변화되는 것)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러한 결론은 실험적 증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소진화(microevolution, 종 내에서의 작은 변화들)에 대한 증거들이 대진화로 외삽되어질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경험적 증거들은 대진화든지 소진화든지 어떠한 것도 새롭게 획득해야할 유전정보의 중요한 근원을 제공할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돌연변이의 축적(mutation accumulation)은 새로운 생물 종은 물론, 심지어 새로운 장기나, 조직조차도 만들어낼 수 없다” (Margulis and Sagan, 2002, 11). 돌연변이는 결국 질병과 죽음으로 이끈다. 마굴리스(Margulis)가 과학자들의 영예로운 단체인 미국과학연구학회(Sigma Xi)의 회장이었을 때, 그는 "많은 생물학자들이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목적이 없는 우연)들이 새로운 종의 생물체를 발생시키는 유전적 변화의 근원임을 확신한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아니다!’ 라고 말하겠다”고 덧붙였다(Margulis, 2006, 194). 지적설계 운동가들은 하나의 지적인 근원을 가정하고 있고, 창조론자들은 그 근원을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창조주(Creator)라고 결론짓고 있다.


요약

베르그송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신다윈주의자들은 여전히 대진화를 일으킨 새로운 유전정보의 근원(source of new genetic information)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Sterelny 2001). 이러한 사태는 가설들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창조적 진화론과 같이 "다윈주의적 메커니즘을 대체하는" 다른 이론들(Bothamley, 2002, 127)이 널리 지지를 받았지만, 주의 깊게 조사되었을 때, 결국 모든 대체 이론들은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폐기되어져 버렸다. (Bergman, 2003).

지금까지, 어떠한 후다윈주의적 이론(post-Darwinian theory)도 신다윈주의적 이론의 주된 결점이었던 새로운 생물학적 유전정보의 근원을 다룰 수 없었다. 하버드 대학교의 한 생화학자가 언급했듯이, "오늘날 진화론은 다른 많은 견해들이 패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떠들썩한 분야(tumultuous field)인 것이다.” (Esensten 2003, 2).



References

  1. Bergman, Jerry. 2003. The century-and-a-half failure in the quest for the source of new genetic information. T.J. Technical Journal 17 (2): 19-25.
  2. Bergson, Henri. 1944. Creative evolution. New York: The Modern Library.
  3. Bothamley, Jennifer. 2002. Dictionary of theories. Canton, MI: Visible Ink Press.
  4. Bowler, Peter J. 1990. Charles Darwin: The man and his influence. UK: Blackwell Publishers.
  5. Darwin, Charles. 1896. The variation of animals and plants under domestication. Vol. 2. New York: D. Appleton.
  6. Edman, Irwin. 1944. Foreword to Creative evolution, by Henri Bergson. New York: The Modern Library.
  7. Esensten, Jonathan H. 2003. Death to intelligent design. The Harvard Crimson Online Edition, March 31. http://www.thecrimson.com/article.aspx?ref=347206.
  8. Fiero, Gloria K. 1998. The humanistic tradition, book 5: Romanticism, realism, and the nineteenth-century world. 3rd ed. New York: McGraw-Hill.
  9. Goudge, T. A. 1967. Henri Bergson in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1. New York: Macmillan.
  10. Margulis, Lynn, and Dorion Sagan. 2002. Acquiring genomes: A theory of the origins of species. New York: Basic Books.
  11. Margulis, Lynn. 2006. The phylogenetic tree topples. American Scientist 94 (3): 194.
  12. Schlessinger, Bernard, and June Schlessinger. 1986. The who's who of Nobel prize winners. Phoenix, AZ: Oryx Press.
  13. Sterelny, Kim. 2001. Dawkins vs. Gould: Survival of the fittest. Oxford, Cambridge: Icon Books.

*Jerry Bergman is on the Biology faculty at Northwest State College in Ohio.



번역 - 창조과학회 대구지부

링크 - http://icr.org/article/3383/

출처 - ICR, Impact No. 409, 200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991

참고 : 3800|3856|3841|3808|3744|3736|3729|3679|3677|3606|3598|3586|3593|3591|3426|3391|3360|3341|3293|3262|3109|3107|3059|3051|3012|2859|2748|2763|2752|2579|2504|2334|2125|2153|2114|2067|2061|1912|1914|1907|736|730|729|657|658|659|696|653|654|551|328|201|202|45|3847|3859|3779|3375|3712|3727|3732|3718|3652|3607|3608|3409|3413|3355|3373|3315|3266|3202|3214|3174|3097|2513|2347|2157|2169|2025|2089|664|695|442|498|423

조정일
2007-05-07

우리는 왜 창조과학을 지지하는가? 

: 과학, 성경, 그리고 윤리와 관련하여


       「기독교 사상」 2007년 4월호 신학기고 란에 게재된 "기독교인이 창조과학을 지지할 수 있는가?” (원 제목은 Can a Christian be a Creationist? 로서 정확한 번역은 "기독교인이 창조론자가 될 수 있는가?" 이다) 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과학과 창조과학의 본성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껴 본 글을 쓰게 되었다. (기독교 사상) 편집자는 독자들에게 위 제목의 글을 쓴 커트 놀 (Kurt Noll)의 신앙관을 비판하기보다는 창조과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다. 어떤 글이든지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고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그 글이 내 관점에 맞지 않는다고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창조과학에 대한 우리 학회의 관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커트 놀은 창조과학과 관련된 세 가지 주제를 제시했는데, 첫째, 과학 혹은 과학적 방법, 둘째, 성경, 셋째, 윤리이다. 이 세 주제는 창조과학자들에게는 사역의 중요한 세 축이며, 그런 점에서 커트 놀이 잘 지적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본 저자는 커트 놀이 자신의 글에서 보여준 과학(진화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비판하고, 창조과학이 왜 쓰레기 과학이 아니라 바람직한 과학인지와 성경이 진화와 무관하지 않은지를 보이고자 한다.


커트 놀(Kurt Noll)의 과학관 고찰

커트 놀이 자신의 글에서 과학과 관련하여 언급한 구절들을 통해 그의 과학관을 짐작할 수 있다. 몇 문장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다윈의 이론이 진실이라면......그런 이유로...공립학교에서의 생물학적 진화론 교육을 지지하는 것이며...” (pp.180-181)

"과학적 방법론은 오직 과학적 가설에 한해서만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을 뿐이다.” (p.188)

"과학적 방법론은 그 어떤 종교로부터도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 (p.192)

커트 놀은 또한 과학을 "자연에 관하여 질문을 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과학적 방법을 "자연에서 관찰된 특정 사항들을 기본으로,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가설을 세운 후, 그 가설을 시험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개발해 내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p.182) 커트 놀의 과학과 과학적 정의는 수용할 만하지만, 그의 글에 나타난 과학에 대한 묘사는 매우 고전적인 과학관을 반영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과학철학자와 과학교육학자들은 과학이 객관적이거나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 가설과 과학 이론은 참과 거짓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을 보다 잘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 능력 정도에 따라 그 가설과 이론의 선택 여부가 결정된다고 본다. 그래서 과학 가설과 이론은 ‘증명’의 의미를 함축하는 참이나 진실(혹은 진리)란 단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커트 놀의 정의대로 과학적 방법은 가설-연역적 논리에 기초하여 수행된다. 과학자들이 가설을 만들 때, 가설들이 가치와 신념이 배제된 객관적 지식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는다. 가설은 과학자가 살고 있는 사회의 사조, 과학자 자신의 신념, 그리고 과학자 사회의 패러다임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과학은 그 본성상 종교를 포함한 신념과 가치로부터 독립된 영역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람, 특히 과학자의 지식은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지식 구조를 구성하며 그 안에서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지식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통합적 지식 구조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커트 놀이 쓴 논문은 그의 종교관, 과학관, 성경관을 아우르는 통합적 지식체계에서 나오는 것이며, 각 요소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통합적이고 일관적인 한 편의 논문을 만들어내기란 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의 매우 소박하고 극히 수용적인 과학에의 관점이 논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데,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창조과학과 성경에 대한 그의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


창조과학과 과학

과학적 방법의 정의를 엄격하게 적용하자면 과학의 대상은 관찰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다시 말하면 재현 가능한) 자연현상이어야 한다. 창조과학은 현재 관찰할 수 없는 생명과 종의 기원에 대한 증거와 그에 대한 추론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위의 정의를 엄격히 적용하면 창조과학은 과학이라기보다는 역사이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진화과학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진화는 커트 놀의 표현처럼 45억년의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생물이 발달한 과정이고, 지구 역사를 48시간으로 줄여 놓았을 때 인류는 막 1초 전에 발을 내디딘 긴 과거를 가진다. (p.189). 이 시간을 초로 환산해 보면 172,800초 중 172,799초 동안에 일어난 일은 인간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기에 현재 사람들이 학문 주제로 다루는 모든 진화가 이미 일어나 버렸다. 즉 진화과학은 현재 관찰 가능한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고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을 다루며, 앞에서 창조과학에 적용했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진화과학 역시 과학이 아니라 역사라고 보아야 하지 않은가?

창조과학이 과학의 정의에 비추어 미달하는 부분은 창조과학은 이미 답을 갖고 있으며, 이 답은 어떤 연구 결론에 의해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렇다. 창조과학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종류대로 생물들을 창조했으며,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하여 지금 관찰되는 지층과 화석의 대부분이 형성되었다는 가정으로 구성된다. 그런 점에서 창조과학은 과학 지식의 일반적 특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은 내구적이면서 동시에 가변적이다. 만일 어떤 과학 이론이 절대 불변의 참 혹은 진리라고 인정되면 그 이론은 과학적 지식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한다. 그 지식은 형이상학적 지식이지 경험적 지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커트 놀이 약간 애매하게 표현했지만, 진화론을 진리라고 하였다.(p.180-181) 사실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지, 진화 자체를 의심하고 감히 그 가정을 검증해 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화는 단순한 과학 이론 이상이다.

프란시스코 아얄라(Francisco Ayala) (1977)는 도브쟌스키에 대한 묘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브쟌스키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에 있어서 생물학적 진화의 위치는 그가 가끔 인용했던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글로서 잘 표현된다. ‘진화는 모든 이론, 모든 가설, 모든 체계가 그 아래 복속되어야 하고, 그것들이 고려할만하고 참이기 위해서는 만족시켜야 하는 대 전제이다. 진화는 모든 사실을 비추는 빛이고 모든 사고 과정이 따라야만 하는 길이다.” (p.3)

유명한 진화론자인 후투이마 (Futuyma) (1983)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조와 진화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가능한 모든 설명을 다 포함한다. 생물은 완전히 발달한 채로 지구에 나타났던지 아니면 그렇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것들이 완전히 발달한 채로 지구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이미 존재하는 종으로부터 변화의 과정을 거쳐 그 이전의 종으로부터 발달했어야 한다. 그것들이 충분히 발달된 상태로 나타났다면 그것들은 실제로 어떤 전능한 지적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어야 한다.” (p.197)

진화론을 인정하는 과학자들은 진화를 불변의 진리로 믿으며, 기원에 대해 창조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진화를 바라본다. 그들에게 진화론은 창조론과 마찬가지로 유일한 답이며 변할 수 없는 전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창조론자인 듀에인 기쉬 (Duane Gish)의 말은 이 점에서 참으로 적절하다. 그는 말하기를 "창조는 진화만큼 과학적이며, 진화는 창조만큼 종교적이다.” (Gish, 1995, p.9)

여기서 논의가 끝난다면 창조와 진화는 함께 역사나 종교 시간에만 다루어야 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그 선을 넘는다. 사람은 창의적이며 호기심이 많다. 비록 관찰되지 않는 과거의 사건일지라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 현상을 밝혀보고자 하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 더욱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며 이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는가에 따라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에 관한 두 모델 중 어느 것이 현재 통용되고 있는 과학적 기준에 더 부합되는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적 방법을 보다 넓게 정의하자면, 자연 현상에 대한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다양한 과정들이다. 그리고 이 과정의 핵심은 여전히 가설-연역적 사고이다. 즉 가정에 일관적인 가설을 세우고 경험적 예측이 과거와 현재의 실제 데이터에 어느 정도 일치하느냐를 가지고 그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다. 예측과 증거가 자주 맞으면 그 가설은 살아남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가설은 폐기된다.

창조과학은 이러한 역동적인 과학적 방법을 통해 수행된다. 칼 포퍼의 말처럼 형이상학적 명제를 검증 가능한 경험적 가설로 과감히 전환시킴으로써 과학은 발전한다 (Johnson, 1991/1993). 창조과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창조과학은 커트 놀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의 존재 여부(p.183)나 종교적 이상이나 종교적 주장(p.183)을 검증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 생명, 지구, 우주를 비롯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특히 생명체의 창조와 인류의 창조 등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노아 시대 전 지구적 홍수 결과 그 흔적이 지층과 화석 그리고 다양한 지형으로 남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창조과학이 사실 혹은 참으로 믿는 가정들이다. 가정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이지 과학은 아니다.

창조과학은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추론된 경험적 가설들로 구성된다.

첫째, 우주, 에너지, 생명의 무로부터 갑작스러운 창조.
둘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기구들은 한 원시 생명체로부터 현재의 모든 종류들을 출현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매우 불충분하다.
셋째, 원래 창조된 식물과 동물의 변화는 그 종류 안에서의 변화에 국한된다.
넷째, 사람과 원숭이는 별개의 조상을 가졌다.
다섯째, 전 세계를 덮는 홍수 사건을 포함하는 격변에 의한 지구 지질학의 설명.
여섯째, 지구와 생물의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

위의 가설들은 현재 관찰 가능한 현상들, 과거 이미 일어난 사건의 흔적들, 그리고 이제까지 밝혀진 과학적 법칙, 이론, 원리들에 기초하여 검증될 수 있다. 과학 이론과 모델의 속성상 증거에 의해 진위가 증명될 수는 없지만, 정말 엉뚱한 주장인지 아니면 진화론보다 더 좋은 설명을 제공하는지는 비교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종교적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생명의 기원, 종의 기원, 화석의 형성과 지구의 나이 등에 관한 살아있고 가능성 있는 설명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과학자가 검증하고자 하는 가설이 어디에서 왔든지 그 원천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각 없이 가설을 세울 수도 있고,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 올 수도 있고, 꿈속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고 물론 성경에서 유래할 수도 있고 자신의 일상 경험과 관찰에서 가져올 수도 있다. 과학에서 상관하는 것은 그 가설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느냐가 아니고, 그 가설이 경험적 증거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가이다. 다른 것보다 훨씬 뛰어난 설명과 예측 능력이 있는 가설이라면 수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원에 관한 창조모델과 진화모델은 이미 일어나버린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보다는 간접적인 증거에 의해 그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하게 된다. 이 경우 아무리 많은 증거가 쌓여도 그 가설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참, 혹은 거짓으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다만 더 효과적이고 유력한 가설이라는 위상을 가질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과학철학자와 과학교육자들이 생각하는 과학이다. 그 점에서 창조과학은 매우 과학적이며, 진화과학만큼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과학은 과학의 영역과 시야를 확장시키며, 과학의 역동적 본성을 경험하는 아주 좋은 소재이며 방법이다.

창조과학을 종교라고 하여 과학적 고려대상을 삼지 않는 것은 철학, 과학, 교육의 어떤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이런 생각은 오직 자연주의 세계관, 즉 모든 현상은 오직 자연적 원인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에게는 신, 성경, 종교의 함축을 지닌 창조과학이 아무리 기원과 다른 자연 문제를 잘 설명한다 하여도 그것을 용납하고자 하지 않고, 차라리 매우 부족하지만 진화과학을 고수하려고 한다. 그들은 창조과학을 수용하면 곧 창조주의 존재에 직면해야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신론적 자연주의자들의 발상을 그리스도인이 동조할 이유가 없다. 과학이 진정 자연 세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검증하기 위한 엄격한 방법이라면, 설령 하나님의 존재를 대면하게 되더라도 진실이면 수용하여야 하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존재와 부딪히기 싫어 자연주의적 설명 체계인 진화론을 고집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또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진화론자 과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과학의 방법론으로 물질주의를 채택했다고 하지만, 방법론뿐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물질주의, 자연주의 세계관만이 인정되는 세계관적 선택을 한 것이다.

1961년 『창세기 대홍수』가 출판된 후, 저자인 헨리 모리스 박사는 미국지질학회의 초청을 받아 수백 명의 회원들 앞에서 지질 형성에 대한 격변론을 소개하였다. 그 뒤 지속적인 연구들은 지형, 지층의 형성 모델로서 격변론이 우수함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현재 지질학에서는 동일과정설에 관한 호소가 약화되고 대신 소위 신격변론이 매우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격변론은 지층의 형성은 매우 급격히 짧은 기간 내에 형성되었음을 인정하지만, 지층과 지층 사이의 긴 기간을 삽입함으로써 오랜 지구 연대 주장을 계속 지지하는 이론이다. 어쨌든 현재 지질학계의 이러한 변화는 결국 창조론자들의 격변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지난 7년간에 걸쳐 미국창조연구소(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에서 수행된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에 대한 연구 보고서는 오랜 지구 연령의 기초가 되어 왔던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의 가정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헬륨 기체의 확산, 방사능 훈(radioactive halos), 엄청나게 가속화된 방사능 붕괴 속도, C-14에 의한 석탄의 나이 등이 젊은 지구 모델과 격변 모델의 설명과 일치하는 흥분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DeYoung, 2005; Vardiman, Snelling & Chaffin, 2005). 이 연구들은 창조과학이 종교이며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려고 하는 시도가 아니라, 성경에서 이끌어낸 설명 모델이 자연 현상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유용하고 좋은 것이며, 창조를 인정하고도 하나님에게 호소하지 않고 과학의 본성에 충실한 연구가 정말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오직 진화 모델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창조모델과 진화모델 둘 모두에게 개방적인 사람들보다 더 교조적이고 종교적이다.

창조모델에 기초한 연구는 현재 유전자 염기 서열에 대한 연구로 확장되고 있다. 돌연변이율은 한 종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가정된다. 즉 그 종이 처음 출발부터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에 비례하여 그 안에 유전자의 염기 돌연변이가 축적되어 있을 것으로 가정한다. 인간지놈이 밝혀졌기 때문에 서로 격리된 인구 집단 간의 염기 서열의 차이는 곧 얼마나 오랫동안 분화가 일어났는지를 지시한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같은 종 내에서 그리고 비슷한 종 사이에 과거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창조과학자들은 성경의 신실성을 믿기에 자신들의 가정이 옳다는 확신이 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연구를 추진하며 실험 조건과 연구 방법 및 기술이 갖추어지기만 하면 그들의 예측과 일치하는 결과를 얻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제까지 이 확신은 실현되어 왔으며 앞으로 더 많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창조과학과 성경, 그리고 윤리

우리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며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글과 역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신 책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도 전 인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이 읽고 그 뜻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실 수 있는 뛰어난 문장 능력과 화법을 갖고 계시다고 믿는다. 창세기 6장과 7장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되, 길이가 300규빗, 너비가 50규빗, 높이가 30규빗되는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 또한 홍수는 노아의 나이 600세 되던 해 그해 2월 17일부터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방주의 규모는 이러 했으며, 홍수는 이때 시작되었구나 하고 읽고 이해한다. 이렇게 분명한 묘사가 어느 책에 나오든지 어떤 조건이나 제한이 분명히 제시되지 않았다면 문자 그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을 가상적 이야기라고 믿을 어떤 근거도 그 문장에서 찾을 수 없다. 저자가 그 글이 비유나 교훈으로 읽히길 바라면서 그렇게 자세하고 명확하게 기술했다면 그는 사기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행동을 하셨을 리 만무하다.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6일 창조 (막10:6), 노아의 홍수 (마24:37-39)를 구약에 쓰여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셨고, 베드로 사도 역시 베드로후서 3장에서 분명히 모든 세계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다고 함으로써 그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을 분명히 하였다. 그 정도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노아의 홍수의 역사적 사실을 믿어야 한다. 설령 믿지 않을 수는 없지만 문자 그대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서 국지홍수설이나 평온홍수설을 주장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지난 주일이 부활주일이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년 전에 살았던 다윗을 통해 시편 16편 6-9절에 잘 예언되어 있다. 2천년 전의 역사적 정황, 성경의 선포, 내주하시는 성령의 확신과 우리의 삶 가운데 경험하는 부활의 능력이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일어났던 사건임을 증거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하면 증명할 수는 없다. 우리 눈앞에서 예수님이 다시금 육체로 오셔서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지 않고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증명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증거가 있기에 믿는 것이지 증명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저자는 매우 비판적인 톤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증명’했다고 하여 그것이 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다시 질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창조과학을 비판할 때 사람들은 항상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비판을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과학적 증거, 혹은 고고학적 증거, 혹은 성경적 증거가 창조과학을 부정하는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판자들의 한계이고 그 비판이 신뢰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과학 뿐 아니라 여타 학문에서 비판은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정당화되어야 하지 단지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커트 놀이 성경의 신실성과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기록에 대해 접근하는 그 만큼의 정밀함과 엄격함을 가지고 과학적 방법과 과학에도 접근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과학적 방법과 과학은 성경에 비하면 풋내기에 불과하다. 고작 역사라고 해봐야 2~3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그 동안에도 과학적 지식은 계속 변하는 게 그 특징이라고 할 만큼 거듭 변해 왔다. 특히 진화론은 1859년 자연선택설이 나온 이래로 1900년대 초 신다윈설, 그리고 1950년대 이후 현대 종합이론과 1980년대 이후 단속평형설로 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이론들 또한 매우 불안정한 위상을 갖고 있고 확률과 우연에 의한 종의 분화를 믿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비적 힘을 의지하는 가이아(대지의 여신) 가설 등에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과학은 무조건 수용하면서 (p.187), 약 3500년 전부터 여러 기자들에 의해 기록된 후 한 번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지금 우리 손에까지 오면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진리로서 위력을 떨치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는 단 한 점의 실증적 신뢰도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혹시 커트 놀이 성경을 연구하려고 접근할 때부터 성경은 신화이고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에 맞춰 증거를 찾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떤 진리든지 그것이 진리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라고 한다면, 커트 놀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과학적 진리와 성경의 진리를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p.188) 커트 놀에게는 진리가 그렇게 철저하게 구획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

역사 속에서 사람의 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역사 속에서 사람의 입으로 고백되는 말을 통해 영광받길 원하신다. 만물 속에 깃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찾아내어 마땅한 경배를 창조주께 드리기를 참으로 기대하고 계신다 (시19편; 롬1:20; 시104편; 계4:11, 14:6~7).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특별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어려우며, 결국 진화론적 윤리관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본다. 진화론은 다름 아닌 양육 강식, 죽음, 고통, 기형의 토대 위에서만 구축되는 잔인한 구조물이다. 『종의 기원』의 마지막 단락에서 찰스 다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리하여 만물의 투쟁에 의해, 기근과 죽음에 의해, 우리가 보기에 가장 우수한 개체, 즉, 더 고등한 동물들 (예를 들면 사람)이 잇따라 출현했다.”

도브쟌스키(1974)는 진화론적 윤리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적자생존은 자기 본위, 쾌락주의, 비겁함...속임수와 약탈...을 뒷받침할 수 있다. 윤리학은 인간의 윤리학이다. 그것들은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다.”

차라리 진화론자들은 기독교와 진화론이 어떻게 서로 상충되는지에 대해 커트 놀과 같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잘 깨닫고 있는 것 같다.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한 사람의 말을 들어 보자.

"기독교는 진화론에 대항해서 필사적으로 과학(자연주의를 의미함)과 싸웠으며 아직도 싸우고 있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예수의 지상 사역 및 죽음이 필요한 이유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원죄를 파기해 버려라. 그러면 그 잡석 속에 버려진 신의 아들의 불쌍한 유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죽음의 의미를 거절하라. 만일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은 구속자가 아니라면-이것이 진화가 의미하는 것이다-기독교 신앙은 허구이다.” (American Scientists, 1978, Feb. 19, p.30)

커트 놀이 진화론적 윤리관을 마음껏 환영하면서, 하나님의 본성에 기초한 윤리관을 저버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보면 1700년대에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대부분이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창조론자들이었다. 1800년대 말 경에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대부분이 창조, 노아의 홍수, 젊은 지구설을 거부하고, 성경에는 오류가 있으며,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받아들였다.

1700년대 말 제임스 허튼, 1800년대 초의 찰스 라이엘이 균일론(동일과정설)과 오랜 지구를 주창하였고, 1859년에는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성경에 대한 신뢰를 제거했다. 무엇이 대세를 바꾸어 놓았는가? 성경에 대한 반대를 주도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많았다. 1800년대 초부터 신학자들이 처음에는 오랜 지구 사상을 수용하더니, 다음에는 노아의 홍수 대신 균일론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당시 성경을 진리로 믿는 과학자들은 신학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옹호하려고 노력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창세기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확신은 점차 사라지고, 한 세대 후에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였을 때는 과학자들까지도 그의 함정에 빠져, 과학자이건 신학자이건 더 이상 창조론을 인정하는 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게 되어 버렸다.

20세기 들어와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상의 기초가 된 그의 책『자본론』을 찰스 다윈에게 헌정하였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현대 유럽역사를 가르치는 리처드 웨이카트 교수는 그의 저서 『다윈에서 히틀러까지: 진화적 윤리학, 우생학 그리고 독일에서의 인종주의』에서 미국의 우생학자들이 어떻게 독일의 나치에 영향을 주어 인종학살을 감행하게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현재 생명공학자들은 철저한 다윈론자였던 어네스트 헥켈의 진화재현설(발생반복설)을 굳게 믿고 배 발생 초기의 상태는 인간이 아니며 동물의 배나 다를 바 없다고 여겨, 그것을 가지고 실험 조작을 하려고 벼르고 있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진화론은 항상 인류에게 피해를 주어왔고 현재도 주고 있다. 다윈의 말에 따르면 그런 피해를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인자와 진리가 풍성하신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 분이 인간과 생물에게 이토록 심한 고통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생물들을 만드셨다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 아담이 진화하기 까지 수십억 년 동안의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을 거쳐 출현한 아담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얼마나 잔인하고 나쁜 신인가? 진화는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진화론자는 될 수 있다. 그러나 진화론과 기독교 진리가 둘 다 진리일 수는 없다.


요약

과학은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지만, 본성상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지식 체계를 구성한다. 우리가 과학을 수용하는 것은 자연 세계를 설명하고 예측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과학 이론은 항상 증거 앞에 노출되어야 한다. 과학의 본성은 가설-연역적 사고이며, 가설은 과학자 개인, 과학자 사회가 지지하는 가정에 기초하여 생성된다. 이 모든 점이 과학을 가치 내재적이고 상대적으로 만든다.

창조과학은 기원(생명, 종, 화석과 지층)에 있어 검증 가능한 예측을 제공하는 모델 아래서 수행되며, 진화 과학에 대비되는 모델이다. 창조과학은 역동적 과학의 특성을 보여주며 실제 여러 분야에서 유용한 결과가 산출되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창조 모델을 뒤따라오는 유신론적 함축 때문에 창조모델을 채택하지 않지만, 유신론자들은 그것을 채택함으로써 받는 과학자로서의 불이익도 감수하며 창조 모델을 포기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기원에 관한 한 모든 측면에서 창조모델은 진화모델보다 훨씬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

성경은 영적 진리일 뿐 아니라, 피조세계를 다루고 있고, 그 일부는 과학의 원리로서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때로 형이상학을 경험적 가설로 바꾸어 검증에 노출시킴으로써 과학을 수행한다. 가설의 타당성 여부는 그 원천(source)이 아니라 증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여러 경쟁 이론이나 가설 중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많고 예측이 보다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채택되는 것이 과학의 관행이다.

과학을 다른 영역과는 별개의 독립적 영역으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은 과학 및 다른 학문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이 처음 아담을 창조하신 후,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복을 주신 것은 사람에게 피조세계를 탐구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학과 공학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참고문헌

.Ayala, F. J. (1977). Nothing in biology makes sense except in the light of evolution, Theodosius Dobzhansky: 1900-1975. Journal of Heredity, 68(Jan/Feb), 3-10.
.DeYoung, D. (2005). Thousands not billions. El Cajon, CA: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Dobzhansky, R. (1974). Ethics and values in biological and cultural evolution. Zygon, the Journal of Religion and Science.
.Futuyma, D. J. (1983). Science on trial. New York: Pantheon Books.
.Gish, D. (1995). Teaching creation science in public schools. El Cajon, CA: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Johnson, P. E. (1993). 심판대 위의 다윈 (이수현 역). 서울: 과학과 예술 (원전은 1991년에 출판됨).
.Vadiman, L., Snelling, A. A., Chaffin, E. F. (2005). Radioisotopes and the age of the earth, Vol. II: Results of a young-earth creationist research initiative. El Cajon, CA: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참조 : '기독교인이 창조과학을 지지할 수 있는가?” (Kurt Noll. 이병권 번역. 2007년 4월호 기독교사상) (원제 : ‘기독교인이 창조론자가 될 수 있는가’. )
http://www.clsk.org/gisang/index.asp


출처 - 기독교사상, 2007년 5월호.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893

참고 : 3887|3242|3241|3244|3164|2314|2039|85|540|3586|2359|3800|201|180|2334|3035|1784|3591|192|2445|3808|2579|2114|659|3771|3688|696|551|1912|1914|2527|2535|3391|2531|2443|3107|3679|2706|2235|548|2346|2412|2332|2566|653|3682|3812|3249|2797|2330|3055|6107|4487|6480|6639|3782|4241|6211|6356|6169|6473|6096|5083|5274|6461|6075|6634|5796|6292|6476|2647|6174|5718|6180|905|6165|6618|6631|6633|6636|6566|6638|6468|6449|6582|6553

미디어위원회
2006-12-08

컴퓨터가 진화를 입증했다는 도킨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

(Weasel words)

Werner Gitt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아마도 진화론의 가장 우두머리 사도일 것이다. 확실히 그는 전 세계에 있어서 가장 목소리 크고 영향력 있는 신다윈주의자(neo-Darwinists)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또한 진화론의 논리적 결과인 무신론(atheism)을 매우 공격적으로 부끄러움 없이 선전하고 있다. 그의 책 ‘눈먼 시계공(The Blind Watchmaker)’은  아마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전에 가졌던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 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책에서 자연 세계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명백한 설계들은 무작위적으로 일어난 운 좋은 유전적 실수들이 자연선택 되어 무계획적으로 축적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1]

살아있는 생물계에서 보여지는 경이로운 공학적 디자인들은 암호 형태로 저장되고 전달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양의 정보(information)들에 의해서 발현된다. 도킨스는 지적으로 만족해하기를 원하는 무신론자들이 받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도전인, 어떻게 이 모든 정보들이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서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지를 설명해보려고 시도했다. 우리의 기트(Gitt) 박사가 전공한 정보과학(information science)에 의하면, 진정한 정보가 무작위적인 과정을 통해서 생겨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킨스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인가?

그의 책에 있는 가장 효과적인 고안 중 하나는(그가 텔레비전 청취자들에게 반복했던 논증), "Methinks it is like a weasel (내가 보기에 그것은 교묘한 속임수(족제비) 같다)" 라는 세익스피어의 햄릿(Hamlet)에 나오는 영어 문장(English sentence)을 사용한 진화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다.[2]

그의 컴퓨터 프로그램은 28개의 철자와 띄어쓰기에 대한 무작위적인 배열(random sequence)을 시작한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복사를 하고, 재생 문장을 만들어 낸다. 무작위적인 복사 실수(돌연변이를 나타내는)가 허락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모든 ‘딸(daughter)’ 문장들을 점검하고, 목표 문장(target sequence)인 "Methinks it is like a weasel"과 가장 비슷한 문장을 선택한다. 이것은 자연선택을 나타낸다고 말해진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목표 문장은 짧은 세대 안에(아래의 예에서 43과 64번째 만에) 도달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정보가 지성(intelligence)에 의해서가 아니라,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자연적인 과정(natural processes)들을 통해서 우연히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에 반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잘못된, 그리고 사악한 책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부도덕한 사제였다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신학교(Heidelberg School of Theology)의 교수였던 클라우스 버거(Klaus Berger)는 ”그러한 책을 한 권 사서 읽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얼마나 속아오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도킨스의 ‘weasel’ 예는 그 글을 읽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종류의 컴퓨터 게임은 누구나 수행할 수 있는 것이고, 항상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전체 디자인은 목표 문장에 더 가까운 것을 선택하도록 사전에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프로그램은 사전에 입력되었고, 목표 문장은 부여되었다. 심지어 철자의 수까지 주어졌다.

그러므로 도킨스의 예는 정보가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정보(‘Methinks it is like a weasel’라는 문장)는 미리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3]


도킨스의 예

미리 결정된 목표 문장 : METHINKS IT IS LIKE A WEASEL


첫 번째 테스트 :

Gen. 01 WDLTMNLT DTJBKWIRZREZLMQCO P
Gen. 02 WDLTMNLT DTJBSWIRZREZIMQLO P
Gen. 10 MDLDMNLS ITJISWHRZREZ MECS P
Gen. 20 MELDINLS IT ISWPRKE Z WECSEL
Gen. 30 METHINGS IT ISWLIKE B WECSEL
Gen. 40 METHINKS IT IS LIKE I WEASEL
Gen. 43 METHINKS IT IS LIKE A WEASEL


두 번째 테스트 :

Gen. 01 Y YVMQKZPFJXWVHGLAWFVCHQYOPY
Gen. 10 Y YVMQKSPFTXWSHLIKEFV HQYSPY
Gen. 20 YETHINKSPITXISHLIKEFA WOYSEY
Gen. 30 METHINKS IT ISSLIKE A WEFSEY
Gen. 40 METHINKS IT ISBLIKE A WEASES
Gen. 50 METHINKS IT ISJLIKE A WEASEO
Gen. 60 METHINKS IT IS LIKE A WEASEP
Gen. 64 METHINKS IT IS LIKE A WEASEL


References and notes

1. His later books River out of Eden and Climbing Mount Improbable continue his atheistic evangelising. See online refutations of River out of Eden and Climbing Mount Improbable.
2. For technical details on the reasons why random processes cannot give rise to information, see Werner Gitt, In the Beginning was Information .
3. There are many other serious problems with Dawkins’ ‘demonstration’. See Walter ReMine, The Biotic Message, St Paul Science, St Paul, USA for a detailed treatment. 

 

*참조 : Dawkins' weasel revisited

http://www.answersingenesis.org/tj/v12/i3/dawkins.asp

Weasel words, genetic algorithms and coarse acknowledgements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1/j18_1_78-85.pdf

The weasel returns: Truman replies to Curti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49

Why Dawkins’ weasel demonstrates mutations cannot produce a new functional gen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5_2/j15_2_69-76.pdf

Was Dawkins Stumped?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12/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weasel-words-critique-of-dawkins

출처 - Creation 20(4):20–21, September 1998.

미디어위원회
2006-10-18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에 관해 밝혀진 몇 가지 사실들 

(Some Facts about the Scopes Monkey Trial)

Stephen Caesar


        일명 ”원숭이 재판(Monkey Trial)”이라고 불리는 스코프스 재판은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였다. 1925년 테네시주 데이톤(Dayton)에서, 공립학교 교사 존 스코프스(John Scopes)는 테네시 주에서는 일찍이 가르치는 것이 금해졌던 진화론을 가르침으로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로 인한 법정에서의 싸움은 서로의 입장을 옹호하는 두 명의 거장들의 싸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창조론을 대변했던 사람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하였던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었고, 진화론을 대변했던 사람은 유명한 변호사이며 이성주의자였던 클러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였다.

많은 부정확한 내용들과 오해들이 이 유명한 사건에 관해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확한 내용들과 오해들은 거의 대부분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연극과 영화 ”바람의 상속자(Inherit the Wind)”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2005년 4월에 스미소니언(Smithsonian) 지에 게재된 한 기사는 이 사건들로 발생했던 잘못 알려져 있던 일부 신화들을 정리했다. 신화들 중 하나는 스코프스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마녀 사냥에 의한 희생자였다는 것이다. 스미소니언 지의 글은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

”인기 있었던 연극과 영화 '바람의 상속자'에 의해서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철저히 믿는 광신자들에 의해서 존 스코프스라는 이름의 24살 된 젊은 과학 교사가 인간과 영장류가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침으로서 법정에 세워졌고, 이 때문에 데이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재판은 진화론이 가르쳐지는 것이 저지되는 것 때문에 데이톤에서 발생했다. 테네시 주는 그 당시 진화론이 가르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률을 얼마 전에 통과시켰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은 그 법령에 도전하는 누구라도 방어할 것이라는 발표를 하였고, 그 제안을 받아들일 자원자를 발견하는 것은 침체되어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부 데이톤의 사업가들이 생겨났다.”

”5월초 어느 날 아침, 사업성 많은 바람잡이들이 고등학교 뒤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던 스코프스의 게임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그를 중심가에 위치한 로빈슨 약국(Robinson’s Drug Store)으로 데리고 가서 후원자들을 만나도록 주선하였다. 청량음료가 건네진 후에, 그들은 젊은 교사에게 진화 단락을 포함하고 있었던 테네시 주의 표준생물학 교과서를 사용한 적이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스코프스는 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게 그들이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으로 체포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알기 원했다. 최근에 켄터키 대학을 졸업한 스코프스는 다윈의 진화론을 확실히 믿고 있었지만, 그가 그의 수업에서 실제로 진화론을 가르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절하게 그 책략대로 따라갈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는 테니스 코트로 돌아갔다.” (Kemper 2005: 52, 54).  

재판에 관해서 잘못 알려진 또 다른 부정확한 사실은, 스코프스를 변호했던 클러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는 언론의 자유와 교회와 정부의 분리를 주장하고 있던 편견이 없는 법률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로우는 공개적으로 ”미국은 편협하고, 비열하고, 참을 수 없고, 뇌가 없는, 그리고 무정한 종교적 편견을 가진 광신도들에 의해서 설립된 것이 아니라, 자유의 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대대적인 승리 이외에 아무것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Ibid. 57) 라고 말한 것처럼, 이러한 강령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다른 오해들도 스미소니언 기사에 의해서 정리되었다 :

”1960년의 영화 ‘바람의 상속자’에서, 브라이언(영화에서 프레드릭 마취(Fredric March)가 연기함)의 명성은 증언대 위에서 무너져 내려서 비참할 정도로 지리멸렬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브라이언은 매우 잘 책임을 수행하였고, 대로우(영화에서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y)가 연기함)의 질문에 지혜롭게 그리고 현명하게 빠져나가며 대답하였다.”(Ibid. 58).

모든 법정 소동 후에, 존 스코프스는 감옥에서 결코 조금의 시간도 갇혀있지 않았다. 그는 100달러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 판결도 후에 절차상의 문제로 뒤엎어졌다. 따라서 그는 대중적인 문화 속에서 알려진 것처럼 결코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아니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스코프스가 가르쳤다는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되던 것들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The New Yorker 에 따르면, ”스코프스의 교과서는 우생학을 기초로 하여 ‘정신박약자’들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Anonymous 2006: 83). 따라서 악하고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광신도들이 선하고 과학적인 진화론자들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 벌인 사건이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이었다는 단순한 시나리오는 정밀조사 하에서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Reference :
Kemper, S. 2005. 'Evolution on Trial.” Smithsonian, vol. 36, no. 1.
Anonymous. 2006. 'Briefly Noted.” New Yorker: 27 February.


*Stephen Caesar holds his master’s degree in anthropology/archaeology from Harvard. He is a staff member at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and the author of the e-book The Bible Encounters Modern Science, available at biblepm@hotmail.com.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rae.org/essay-links/scopestrial/

출처 - Revolution against Evolution, 2006. 6. 21.


미디어위원회
2006-08-02

진화론과 기독교는 물과 기름 같다. 

(Evolution and Christianity Mix like Oil and Water)

Bruce Malone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과 현대 과학의 설립자들 대부분은 과학이 기독교적 믿음을 대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함 없이, 현상 세계의 모든 것들이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 탁월한 과학자들은 그들의 지식 때문에 질서정연한 우주는 설계자가 있어야만 한다는 과학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복잡하고 조화로운 이 우주를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개인적인 신뢰는 과학적 질문들을 계속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과학의 목적에 대한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를 잃어버렸다. ‘과학(science)‘에 대한 정의는 "추론, 실험, 관측에 의해서 입증된 인정받은 진리들과 법칙들”(1934년, Webster's New School 사전)에서 "물질세계와 그 현상들에 관한 지식”(1983년, Webster's Collegiate 사전)으로 변경되었다. 이러한 정의는 ‘진리(truth)’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제거하였고, ‘자연적인 현상(natural phenomena)’들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현대적인 정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간섭은 과학으로서 고려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과학은 이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도록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사람들의 의견과 관계없이 작동한다. 이것은 중력이 사람들의 믿음, 이해, 또는 해석과 관계없이 작동하는 것과 같다. 만일 우주와 인류를 하나님께서 직접 친히 창조하셨다면, 사람들이 어떠한 해석을 하든 창조의 진리를 감소시키지 못할 것이다.

창조의 증거들이 일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교육 체계가 인본주의적 철학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어있기 때문이다. 인본주의(humanism) 철학의 기초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man)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판단 기준이 된다. 진화론은 이러한 믿음 체계를 정당화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은 공립학교 체계 내에서 사실로서 존재하게 되고, 진화론을 지지하는 증거들만이 오로지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성경적 세계관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1. 성경은 반복적으로 생물체들은 그 종류대로 만들어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 주변의 생물 세계를 관찰해 볼 때 이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개는 개로 머물러 있고, 사람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모든 생물체들은 진화의 연속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성경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이타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27)

3. 이와 동일하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약육강식, 멸종, 적자생존을 사용하셨을까?

4.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산업혁명, 나치의 유대인 학살,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출현을 정당화했다. 또한 진화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현대 진화론자들이 사회적 영역 안에서 그들의 이론을 도입하려는 것에 스스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역사적인 잔학한 행위들은 이러한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진화론적 철학을 받아들인 결과였던 것이다. 만약 인간이 (적자생존으로 살아남은) 생물학적 힘의 산물이라면, 왜 우리 자신의 힘을 다른 인간들을 다루는 데에 확장해서는 안 되는가?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물어뜯고 죽여도 슬퍼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진화 과정의 단지 한 부분에 있다면, 그러면 왜 우리는 동물들과 똑같이 행동해서는 안 되는가? 창조는 결국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가치는 그를 사랑하셔서 위하여 죽으시기까지 하신 창조주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대진화(macro-evolution)가 지금까지 결코 발생하지 않았다는 풍부한 과학적인 증거들이 있다. 화석 기록(fossil record)들은 식물과 동물의 주요한 그룹들 사이에 어떠한 신뢰할만한 연결 고리도 보여주지 않는다. DNA의 화학 구조에서 볼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정보들은 무작위적인 우연한 돌연변이로 생겨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진화론적 동일과정설과 모순되는 풍부한 전 세계적인 대홍수의 증거들이 있다. 진화론은 대부분의 과학적 관측들과 일치되지 않는 철학이다. 진화론은 사회의 발전과 진정한 과학의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drdino.com/articles.php?spec=4

출처 - Creation Science Evangelism 



미디어위원회
2006-07-12

의사들이 다윈을 거부하다. 

: 의사들의 60%는 진화론을 믿지 않고 있었다.

 (Doctors Deny Darwin)

David F. Coppedge


      의사들과 의학 전문가들은 진화론에 관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가장 큰 과학자 집단일지도 모른다. Finkelstein poll 여론 조사에 의하면, 의사들 중 평균 60%가 생명체가 지시되지 않은 무작위적인 우연한 과정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진화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새로운 조직인 ‘과학적 완전성을 위한 의사들 모임(Physicians and Surgeons for Scientific Integrity, PSSI)은 Doctors Doubting Darwin라는 웹 사이트를 시작하면서, 의학 전문가들이 아래의 성명에 동의하면 서명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의사(medical doctors)들로서 우리는 무작위적인 돌연변이(random mutation)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으로서 생물체의 복잡성과 기원을 설명하는 주장을 의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현 가능한 이론으로서 다윈주의적 대진화(Darwinian macroevolution) 이론을 반대한다. 이것은 어떠한 대안적인 이론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volution News(2006. 5. 4)는 이러한 전개 상황을 보도하였다.

또 다른 의사는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의 열매에 대하여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침례교도 신문(Baptist Press)의 기고글에서, 미첼(C. Ben Mitchell) 박사는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이 "의학기술(유전자 증진) 분야의 차세대 과제들을 위한 가이드라인 개발"로 한 학교에 773,000 달러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다. 미첼은 나치의 대학살을 유도했던 우생학(eugenics)의 공포를 잊지않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은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것은 위험한 개발이라고 말하고 있다.

좋은 의도로 시작했던 것이 얼마나 잔학하게 변하게 되었는지를 그의 독자들에게 일깨운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이것을 승인한 것은 모래 위에 한 도덕적 기준선을 그어 놓고 단순히 그것을 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과 나의 세금을 사용하여, 3m 폭의 벽돌담을 부수어 돌부스러기로 만드는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유전적 증진(genetic enhancement) 연구라도 우리의 세금이 사용되는 것에 저항해야만 한다.”



우리는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는가?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2개월 전 독일의 Deutsche Forschungsgemeinschaft(DFG)의 총장인 윈나커(Ernst-Ludwig Winnacker) 교수는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나치당에 자발적으로 협조했던 사실을 통회했다. 

"나는 과거의 일들이 나를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DFG에서 우리는.... 대학에서 유태인 과학자들을 쫓아내고 추방했던 일에 대해서 어떠한 저항의 흔적도, 어떠한 외침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범죄적 목적으로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농업과 인간성을 파괴한 일에 대해 어떠한 머뭇거림도 없었으며, 잔인한 의학실험이 실행되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나치당에 협조하며, 진행되었던 과학의 급진화는 의심없이 명백히 지지되었다.”

존 케케스(John Kekes)가 City Journal에 기고한 글에는, 교육받은 그리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사악한 인간 행위의 끔찍한 깊이까지 얼마나 빠르게 내려갈 수 있는지가 충격적으로 나타나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기간 동안 독재자였던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1758-1794)에 관한 이야기를 재조명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이성와 자유라는 명목하에 인간의 폭력, 잔학, 방탕 등의 사악한 행동을 합리화하였다. 케케스는 프랑스혁명 이후에 등장한 공산주의 사상가들, 그리고 오늘날의 테러리스트들을 유사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그러한 일들은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 글은 반드시 읽어봐야만 하는 글이다.

한편에서는 근본주의적 진화론자들이 새로운 개념의 우생학을 도입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급진적 테러리즘이 조장되고 있는 이 시기에, 양보와 무관심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조심(vigilance)은 자유, 그리고 삶을 지키기 위해서 지불해야할 비용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v.info/2006/05/doctors_deny_darwin/

출처 - CEH, 2006. 5. 5.

Chris Tingle
2006-05-13

컴퓨터가 보여주는 진화론의 정보 문제 

(Creation’s amazing computer)


       가령 비늘(scales)로부터 깃털(feathers)이 되었다는 것과 같이, 어떤 생물학적 구조가 다른 구조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진화론적인 믿음에는 하나의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정보(information)’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은 컴퓨터를 사용하여 설명될 수 있다.

컴퓨터의 두 가지 주요한 구성물은 하드웨어(hardware)와 소프트웨어(software)이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본체, 키보드, 스크린, 전선, 마우스, 디스켓, 기타 만져질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에 비해 소프트웨어는 컴퓨터를 사용해서 원하는 작업, 또는 일련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들의 모음이다. 

소프트웨어는 음악 카셋트 테이프처럼 디스켓 또는 CD에 기록된다. 자기 표면에 기록된 소프트웨어이건 아니건 간에, 어떤 패턴이 디스켓 위에 존재한다. 이러한 패턴을 만드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어떤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컴퓨터를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다. 

공 디스켓과 소프트웨어가 들어있는 디스켓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고 공테이프와 음악이 녹음되어있는 테이프 사이에 차이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는 물리적으로, 그리고 화학적으로 같다. 차이는 단지 정보이다. 소프트웨어를 디스켓에 쓰기 위해서, 우리는 이들 패턴들을 조정하는 방법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야만 한다.

자연에서도 같은 기본적인 요소들을 보게 된다. 동물들의 몸을 구성하는 살, 혈액, 뼈, 그리고 나무를 구성하고 있는 잎, 가지, 뿌리 등과 같은 하드웨어들이 있다. 소프트웨어는 생물체의 이러한 기본 벽돌들을 잘 정렬시켜 살아있는 생물체가 되도록 하는 정보이다.

이것이 생물 진화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정보 문제이다. 우리들은 어떤 구조가 다른 구조로부터, 예를 들어 비늘이 깃털로, 아가미가 폐로, 지느러미가 발로 진화되었다는 것을 믿으라고 요청되고 있다. 자 그러면 비늘과 깃털(서로 대체되었다는 두 구조)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1. 비늘을 만들기 위해 유전적으로 암호화 된 정보.
2. 깃털을 만들기 위해 유전적으로 암호화 된 정보.
3. 생식, 성장, 복구를 통해 유전 정보들을 처리하는 정보.

여기에 문제가 있다. 1과 2의 정보는 다르다. 1의 정보는 2의 아류가 아니고, 2의 정보는 1의 아류가 아니다. 1에 들어있는 정보와 2에 들어있는 정보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3에 들어있는 정보, 즉 유전 정보들을 처리하는 정보는 1의 정보로부터 2의 정보로 변화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3의 과정은 1의 자료 또는 2의 자료들에 의해서 충실하게 일어나는 재생과정이다.

컴퓨터 산업에서 무작위적인 변이(random mutations)들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많은 점검 시스템들이 그러한 시스템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컴퓨터에서 이러한 시스템 오류가 일어난다면, ”귀여운 미키 마우스 손목시계” 라고 쓰여져야 할 것이 "궝ㅎ사믾컻ㅅ탗ㅊ손”와 같이 쓰여질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 글자가 ”선이 없는 고성능 전동 드릴”로 쓰여질 수는 없다. 그 프로그램은 결코 자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는 자기 스스로 자료들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의미가 없는 쓰레기 자료만을 만들 것이다. 의미가 있는 정보는 오직 지적인 근원에 의해서 정보가 추가될 때에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살아있는 생물체의 유전 프로그램은 유전 자료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최초의 패턴이 정확하게 복사되는 것은 매우 신뢰할만한 것임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는 오직 유전 자료들에 혼란과 오류만을 야기 시킨다. 그것은 결코 새로운 형태의 정보를 창조하지 않는다. 깃털을 만드는 유전 정보와 비늘을 만드는 유전 정보가 다른 것은, ”귀여운 미키 마우스 손목시계”가 ”선이 없는 고성능 전동 드릴”과 다른 것처럼 다르다. ”선이 없는 고성능 전동 드릴”은 더 고등한 형태로 진화된 것이 아니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도 또한 유전 자료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단순히 같은 자료들의 서로 다른 강조나 재배치를 초래할 뿐이다.

요약하면, 정보 문제는 진화론의 허구성을 나타내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당신은 종들의 유사성, 전이 형태들, 자연선택 등과 같은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 메커니즘에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놓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정보(new information)의 추가는 지적인 근원(intelligent source)에 의해서만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최초에 정보를 제공한 창조자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진화론자들이 우리가 믿기를 바라는 그러한 구체적인 변화들이 실제로 일어났었다면, 요구되는 정보들은 그들이 존재를 거부하고 있는 창조주로부터 왔어야만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저절로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내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생물체에 있는 유전 프로그램들도 저절로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다. 그것도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프로그램 되어야만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물건들을 주변에 그렇게도 많이 보면서도, 왜 사람 자신은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일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로마서 1:20).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우리의 눈을 감지 말자. 그리고 생명체에 프로그램을 넣어놓으신 분,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자!


* Chris Tingle, B.Sc., works for a large computer equipment manufacturing firm in the United Kingdom. He is a keen creationist, and has recently moved with his family from Australia to the UK to work with a growing church. 

 


*참조 : Genetic code optimisation: Part 1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90-100.pdf

Genetic code optimisation: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84-92.pdf

Inheritance of biological information—part I: the nature of inheritance and of informatio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9_2/j19_2_29-35.pdf

Inheritance of biological information—part II: redefining the ‘information challeng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9_2/j19_2_36-41.pdf

Can recombination produce new genetic informatio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9_1/j19_1_61-64.pdf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8/i4/computer.asp

출처 - Creation 18(4):24–25, September 1996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293

참고 : 2520|591|354|735|1612|753|2698|2621|2859|164|8|1633|589|2185

미디어위원회
2006-02-23

데이튼에서 도버까지

(From Dayton to Dover)

John D. Morris  Ph.D


      1925년 테네시주 데이턴에서 열렸던 유명한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을 상기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2005년 12월 20일, 미국 지방재판소 판사인 존 존스(John Jones)는 공립학교 과학 수업에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 ID)를 다루는 것을 포함시킨 펜실베니아주 도버(Dover) 교육위원회의 노력에 반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어떠한 형태로든 창조론적 사고가 가르쳐지는 것을 반대하는 광범위하고, 상세하고, 때로 화가 나는, 그리고 때로는 틀린 139 페이지의 판결문을 발표하였다.

판사인 존 존스의 책 두께의 판결문에는 사건과 판결을 위해서 선택적으로 발췌된 과학의 긴 역사인 것처럼 보이는 글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판결의 결론은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법정에서와 과학자들에게서 사용되어지고 과학의 정의(definition of science)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과학은 진리의 탐구(search for truth)가 아니다. 과학은 모든 사물들에 대한 (저절로 우연히 생겨났다는) 자연주의적 설명(naturalistic explanations)의 탐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원인이나 작용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과학으로 볼 수 없으며, 교회와 정부의 분리 하에서 그것은 공립학교에서 허락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시스템적으로 유물론적인(materialistic) 사상이 아닌 다른 어떠한 사상도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판결문의 한 부분에서 존스는 쓰고 있었다.

”ID의 주장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ID는 과학이 아니다.” (p.64.)

판결문을 통하여 ID는 창조론(creationism)과 동등한 것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러나 동등하다는 것은 양 진영이 서로 거부하고 있다. 사실, 모든 크리스천 창조론자들은 지적설계를 믿는다. 그리고 수십년 동안 그렇게 주장해 왔다. 그러나 모든 지적설계 주장자들이 창조론자는 아니다. ID 진영은 동방종교, 불가지론자(agnostics), 창조론을 일부 인정하는 진화론자들을 포함하는 커다란 텐트이다. 판사는 ID 옹호자론자들이 모두 종교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일부는 그렇게 동기를 부여받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것은 무엇이 틀렸는가? 미국에서 정부는 국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몇 차례의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들의 대다수는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된 기원을 믿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법정은 현재 존재하는 우주의 본질과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다루는 작용과학(operations science)과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다루는 기원과학(origins science)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는데 실패하였다. 오늘날 관측되는 모든 과학은 자연주의적인 기원에 반대되어 관측된다. 대진화(macroevolution)는 오늘날 발생되지 않는다. 그리고 과거에 대진화가 발생하였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법칙(natural law)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없다. 다른 과정들이 사물의 기원을 설명해야만 한다. 젊은 지구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나 지적설계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처럼 자연법칙을 믿는다. 아무도 현재 사물에 작용되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초자연적인 과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자연적 과정들은 진화론적이지 않다. 자연법칙을 가르치는 데에는 또한 적절히 그것의 한계도 가르쳐질 필요가 있다. 자연 법칙이 모든 것을 완성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과학적인 관측들을 검열할 필요가 있게 되는 것이다. 판사의 판결에 의하면, 우리의 어린 학생들은 다른 어떠한 과정도 안 되고 오직 진화론적 설명만을 배워야만 한다.

명백히, 창조론, 진화론, 지적설계론은 관측되지 않는 먼 과거에 대한 기원을 다루는 역사관이다. 그러나 각 진영들은 현재의 사물들에 매우 복잡한 설계가 들어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추론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물체에 명백한 설계가 있다는 것은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모든 진영들이 그것에 동의한다. 차이는 역사관에 있는 것이다. 관측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 말하는 이야기는 역사관적 재구성물인 것이다. 선도적인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물학(biology)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설계되어 왔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복잡한 사물들에 대한 연구이다” (Blind Watchmaker, 1987, p.1.). 진화론자들은 오늘날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설계의 원천을 무작위적인 돌연변이(random mutation)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으로 돌린다. 지적설계론자들은 그것을 어떤 설계자(unidentified designer)로 돌린다. 창조론자들은 그 설계자를 성경의 하나님(God)으로 믿는다. 

법정은 또한 믿음(faith)과 과학(science) 사이에 잘못된 이분법을 사용하였다. 여기에는 지지되지 않는 믿음의 영역에 있는 것과, 관측되는 진실의 영역에 놓여있는 믿음이 있다. 창조론자들은 그들의 믿음은 관측에 기초한 사실적인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창조 사건은 관측될 수 없다 (진화론자들도 생물체들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그 기원을 관측할 수 없다). 그러나 관측되는 과학적 사실들은 완벽하게 창조와 일치하며, 진화와 일치하지 않는다.  관측되는 사실들을 기원관에 따라 검열하는 것은 좋은 교육이라 할 수 없다. 

법정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열쇠는 모든 기원관들은 종교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관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기원됐는지는 관측할 수 없다. 우리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복잡성과 정교한 과정들이 작동되고 있는 것을 현재 보고 있다. 과거의 기원에 관한 어떠한 추측도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견해도 공공 교육을 독점적으로 지배해서는 안 된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from-dayton-dover

출처 - ICR, 2006.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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