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자에게 물 한 잔 – ‘HydroAfrica’가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 이 원고는 3월 22일 물의 날을 맞이하여 쓰여진 글입니다.
7년 전 이맘때, 세계 물의 날을 맞이하여 ‘한국 물안보의 현주소’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조선말에 있었던 대가뭄을 고려하여 국가의 장기 수자원 계획을 재해석함으로써 물부족에 대한 위기의식을 일깨워 각성을 유도하려는 제시경발(提撕警發)의 노력이었다. 이미 미디어를 통해서도 홍보되었듯이 한국은 ‘물부족 국가’이다. 지난 한 세기동안에 심각한 가뭄이 없었지만, 과거 240여 년간의 강수기록은 우리나라가 극심한 가뭄국가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선각자들로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하여 비의 양을 측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관측을 지속하고 파발마를 통해 모은 자료들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승정원일기에 남아있는 영조 46년(1770년) 이후의 자료는 오늘날 세계적 강수기록으로서 평가받고 있다. 21세기 프런티어연구사업인 ‘수자원의 지속적인 확보기술개발사업단’에서 ‘HydroKorea’ 세부과제 책임을 맡고 있었던 나로서는 지난 240여 년간 서울에서 관측된 연강수량 자료에 나타난 극심한 가뭄 사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880년대 초반에 시작되어 약 25년간 지속되었던 이 대가뭄은 동학란, 임오군란 등 사회혼란과 더불어 결국 조선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주요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놀라운 가뭄자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던 중, 나는 문득 구약성경의 열왕기상에 기록된 엘리야의 가뭄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부터 약 3000년 전 북이스라엘, 한 선지자가 왕궁의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경비대원들을 제치고 질풍같이 왕의 보좌가 있는 방안으로 뛰어들어 악한 아합 왕을 마주 대하여 선포한다.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 여기서 우리는 이 말을 선포하고는 황급히 사라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만나게 된다. 그가 왜 이렇게 폭발적인 선포를 감행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살고 있던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는 나태함과 안일함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있었고 아합 왕과 아내 이세벨은 더욱 그러했다. 야고보는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약 5:17)라고 말하고 있다. 엘리야는 왕과 정면 대결할 용기를 어디서 얻었을까? 그것은 그의 기도 생활의 산물이라고 하워드 헨드릭스 교수는 말한다. 무엇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일까? 신명기 11:16-17에 의하면 우상숭배는 가뭄을 가져오게 되어 있었고, 엘리야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배역하는 백성에게 비를 내리지 않으심으로써 자신의 말씀을 지키실 것을 확신한 엘리야는 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께 비를 내리지 마시도록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던 것이다.
대가뭄이 시작되기 전인 1860년대 말의 조선은 천주교 박해가 절정을 이룬 시기였고, 불길에 싸인 셔먼호에서 뛰어내려 대동강 강변에 오른 토머스 목사가 참수 직전 군인에게 성경을 주고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며 개신교의 첫 순교자가 된 시기이다. 가뭄이 시작된 1880년대는 천주교의 대박해가 계속되는 가운데, 알렌, 언더우드, 스크랜톤, 아펜젤러 등의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온 시기이다. 그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에는 ”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 . .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즈음 시작된 조선의 대가뭄은 그 누군가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야와 같이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결과가 아닐까?
”많은 날을 지내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지면에 비를 내리리라”(왕상 18:1). 이제 엘리야는 갈멜산 위에서 큰 비를 위해 다시 간절히 기도한다. 제단에 불을 내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고백하게 한 것도 기도였고,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부터 작은 구름으로, 작은 구름에서 결국 큰 비를 내리게 한 것도 일곱 번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진전이었다. 이로부터 약 삼천년 후에 하나님은 또 다른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조선 땅에 비를 내리신 것이 아닐까?
조선의 대가뭄이 해갈되던 시기인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의 기간은 독로회(獨老會)가 설립되어 한국 교회의 독자적 발전이 기약되는, 한국 그리스도교 사상 가장 희망적인 시기인 동시에 통감정치가 시작되어 일본침략의 마수가 최종 단계에 이르는 한국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깨닫게 된 것은 1907년 1월에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온 조선 땅을 덮었고, 이 사건 이후 고백과 뉘우침, 새로운 삶을 선언하는 운동이 전국의 교회로 확산되면서 조선의 기독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실로 엘리야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조선 땅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이시고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역사이래, 인류는 전례 없는 속도로 지구 환경을 망가뜨려왔고 이제는 자연의 정화능력의 한계를 넘어선지 오래이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네 말 탄 기사의 말씀을 통해서도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와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일곱 개의 봉인된 두루마리 중에서 이미 네 개가 열렸는데 네 말 탄 기사는 각각 과잉인구, 지속불가능한 경제발전, 기아와 빈곤, 그리고 환경파괴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대로 갈 경우 2030년까지 지구가 적어도 두 개는 더 있어야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고서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삼월에 영국 런던에서 열린 ‘압박받는 지구(Planet Under Pressure)’ 라는 중요한 전 지구적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수천 명의 과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한 주간동안 함께하며 지구를 살리고 다음 세대에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모두가 힘과 정성을 다해 청지기의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선포하는 자리였다. 사실 이러한 지구환경을 돌보는 청지기의 삶의 모범이 바로 교회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는 없을까?
이제 우리는 리처드 라이트 교수가 강조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특권과 책임을 다시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 28절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다스리고, 지배권을 갖고, 경작하는 일들은 모두 문화의 발달을 의미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라고 한 것은 이러한 문화적 통치 위임의 수행이 새벽이슬처럼 나아올 미래의 후속세대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말한다. 즉 우리의 지배권은 위임된 권한이며 이는 문화를 발달시키는 것과 피조물을 보살피는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청지기적 사명은 창세기 2장 15절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다스리며' 라는 히브리어는 일하다, 섬기다, 경작하다, 예배하게하다 등의 여러 의미를 지닌다. 또한 '지키게 하시고‘의 경우, 보호하다, 선지자로 지키다, 보존하다, 파수꾼으로서 경계하다, 앞을 내다보며 자세히 들여다보다 등의 뜻을 지닌다.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피조물에 대한 섬김과 보존의 태도를 암시한다. 이 말씀을 21세기를 사는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우리의 특권은 하나님의 문화적 통치위임을 받은 청지기로서 맡겨진 각자의 영역(가정, 마을, 교회, 학교, 직장, 사회, 국가, 지구, 우주)에서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을, 양을 돌보는 선한 목자와 같이, 지키고 경계하되, 멀리 내다보며, 선지자적 파수꾼으로서 섬김과 보존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십 년간 한국의 물부족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앞서 언급한 ‘HydroKorea’라는 국책연구사업을 수행하였는데, 매년 40여 명의 학생들과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그 중에서 지하수 분야로 석사학위를 받은 한 젊은 과학도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케냐와 수단의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비록 연구 프로젝트는 종료되었지만, 이들은 HydroKorea의 비전을 넘어, ‘HydroKenya’로, 더 나아가 이제 ‘HydroAfrica’의 비전을 품은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었다. 아프리카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수백 개의 우물을 파서 맑은 물을 공급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그 젊은 과학도는 편지에 이렇게 전했다.
”여러분,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가 지구를 지키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각자 거하는 처소에서 열심히 땀 흘리기를 소망합니다. 연구하시는 분들은 HydroAfrica의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전 지구적 협력에 땀을 흘리시고, 저희들은 현장에서 유목민들과 호흡하며 땀을 흘리고,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편지의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썼다.
”우리가 기쁜 일이 한 두 가지이겠냐 마는 그 중의 제일은 맑은 물 한잔 마시는 일, 맑은 물 한 잔 나누어 주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아마도 '마음의 성실함'과 '손의 공교함'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긴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주님이 맡겨 주신 작은 일에 열심과 열정으로 묵묵히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새벽이슬처럼 더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굳게 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이 세대에 영향력을 끼치시도록 그들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09
참고 : 3136|5141|2734|597|318
토양의 중요성과 청색혁명
(Soil, Sustainability, and the Blue Revolution)
David F. Coppedge
생명을 지탱해주는 원천은 바로 우리의 발아래에 있다고 한 수문학자(hydrologist)는 말했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토양수문학 교수인 헨리 린(Henry Lin)은 물이 부족한 세상에서 물의 가용성을 걱정하는 환경론자들에게 몇 가지 좋은 소식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는 펜실바니아 주립대학의 보도 자료(2013. 2. 1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면서, 우리 주변의 모든 아름다움과 모든 풍요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지속가능성의 열쇠가 바로 우리의 발밑 땅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잊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린은 말했다.
그는 토양 생태학(soil ecology)에 관한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나누었다:
• 토양은 ”지나친 영양분, 중금속, 기타 불순물 등을 추출해냄으로써, 물을 정화하며, 물을 흡수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 ”토양은 또한 담수(freshwater)의 저장 컨테이너로 작용할 수 있다”.
• ”세계의 년간 강수량의 약 60%는 이 토양존(zone)에 머물러 있다”.
• ”사실, 호수나 강 같은데서 보이는 소위 ‘푸른 물’보다 지하에 보다 많은 양의 물이 들어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우리는 토양에 대하여 잊고 있는 경향이 있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제 그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
”물이 없으면 생명체도 없다”, ”지하수가 없다면, 깨끗한 물도 없다”고 린은 말한다.
농부들은 홍수를 예방하며, 건물 설계자는 지표를 흘러가는 빗물을 최소화하여 지하수를 풍부하게 하며, 도시 계획가는 지하수의 오염을 최소화 시키는 '청색혁명(Blue Revolution)”을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한 혁명은 ”전 세계에 깨끗하고 안전한 물의 공급으로 물 안전성 확보를 위한 노력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토양에 대해 언급하면서, PhysOrg(2013. 2. 18) 지는 어떻게 천연의 토양 항생제가 농약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까를 논의하고 있었다.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은 미생물 군집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 연구자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식량 문제의 해결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깨끗한 물에 대해 말하면서, 아인트호벤 기술대학(Eindhoven University of Technology, 2013. 1. 21)의 연구자들은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강수가 적은 지역에서 대기로부터 깨끗하고 신선한 물을 자기 무게의 340%까지 함유할 수 있는 목화(cotton)로 된 코팅 장치를 개발해 왔다. 그들은 안개로부터 물을 수집하는 사막 딱정벌레(desert beetles)와 거미(spiders)로부터 이 아이디어를 얻었다.
토양은 전 세계 강수량의 60%를 보존하고 그것을 정화시키는 거대한 스폰지라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단순해 보이는 토양이 분해되는 식물재료, 수많은 동물들, 셀 수 없이 많은 미생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복잡한 생태시스템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토양은 인간을 보호하며, 보존 또는 파괴시킬 수 있는 경이로운 설계된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많은 제3세계의 국가들은 깨끗한 물을 얻기 위하여 필사적이다. 몇 가지 상식적인 계획을 통해 토양이 주는 혜택을 증진시킬 수 있으며, 그 혜택은 넘치도록 풍부한 생명체들로 되돌아 올 수 있다. 새로운 생체모방공학 기술은 대기 중에서 깨끗하고 순수한 마실 수 있는 물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과학은 관측 불가능한 먼 과거에 대한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러한 종류의 과학이다. 이제 지금부터 진화 이야기를 집어 치우고, 실제적으로 사람들을 돕는 과학을 연구해보자.
번역 - 문흥규
링크 - http://crev.info/2013/02/soil-sustainability-and-the-blue-revolution/
출처 - CEH, 2013. 2. 20.
허리케인은 더욱 파괴적이 되고 있는가?
(Are Hurricanes getting more destructive?)
서론 (Introduction)
2005년 8월에 뉴올리언즈(New Orleans)를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Hurricane Katrina)는 미국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가져온 자연 재해였다. 그리 오래지 않은 1992년에 허리케인 앤드류(Hurricane Andrew)가 마이애미를 관통했었는데, 그때는 가장 큰 피해로 악명을 떨쳤었다. 그러나 카트리나에 바로 뒤이어 허리케인 리타(Hurricane Rita)가 발생했는데, 대서양에서 발생한 시속 155마일(248km)을 넘는 지속적인 바람을 동반한 5등급 허리케인이 두 개가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은 역사상 2005년이 처음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왜 이렇게 강력한 허리케인들이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새로운 동향일까, 아니면 단지 강력한 허리케인이 발생하는 일시적인 새로운 순환주기에 들어온 것일까? 본격적인 지구 온난화와 강풍을 동반한 최근의 수많은 허리케인들에 대한 최근의 관심사는 온난화 된 기후의 결과인가?
허리케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연력 중의 하나이다. 분출 에너지의 양은 지진, 화산, 쓰나미, 혹은 핵무기의 에너지 방출량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지구물리학적 사건처럼, 그것의 발생을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것의 형성에서 육지로의 접근경로는 꽤 불규칙적이다. 허리케인의 강도를 약화시키거나 인구밀집 지역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경로를 전환하려는 시도들은 대개 실패했다. 허리케인에 관한 대부분의 조사는 그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고 강도, 빈도 및 지리학상 분포를 기록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우리는 대서양 허리케인에 대한 가장 최근의 일부 조사 결과들을 보고하고, “허리케인이 점점 더 파괴적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것이다.
시간적 및 공간적 분포 (Temporal and Spatial Distributions)
열대성 저기압은 대개 남대서양과 남동 태평양을 제외한 위도 5도에서 30도 사이의 전 해양에서 형성된다. 그런데 적도 바로 부근에서는 코리올리 힘(Coriolis force, 지구자전으로 발생하는 회전효과)이 없기 때문에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위도 30도가 넘는 극쪽 위도에서는 해수면온도(SST, sea surface temperature)가 너무 차갑기 때문에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되지 않는다. 열대성 저기압을 대서양에서는 허리케인이라 부르고, 대서양이 아닌 다른 대양에서는 태풍(typhoons), 혹은 단지 열대성 저기압(tropical cyclones)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해수면온도가 섭씨 26.7도(화씨 80°)를 초과하고 열대성 기류의 교란으로 말미암아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충분히 오랜 시간동안 모아서, 약한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그것이 발전하여 열대성 저기압이 될 때 만들어진다. 북반구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여름의 열기가 연장된 기간인 늦여름과 가을에 발생하며, 9월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에서는 2월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빈도 (Frequency)
일반적으로 1년에 약 85개의 열대성 저기압이 형성되는데, 그 가운데 대략 절반이 충분히 발달한 허리케인이나 태풍으로 진행한다. 대서양에서는 매년 약 9개의 허리케인이 형성된다. 그림1은 1851년 이래로 대서양에서 형성된 열대성 저기압 중 시간당 최대 풍속이 63km(39마일)을 초과하는 것의 연간 개수를 나타낸다. 이 자료는 열대기상센터(Tropical Prediction Center)에서 제공한 것으로, 특히 1800년대와 1944년-1969년의 허리케인에 대해서는 통계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최량-항로(best-track) 보정을 포함하고 있다.[1] 허리케인 연간 최대발생수와 최소발생수는 1933년과 1914년에 각각 21번과 1번이었다. 그림을 보면 153년에 걸쳐 연간 허리케인의 수가 30년마다 한 개씩 증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1에 나타난 경향선(trend line)은 1851년에서 2004년까지의 최소자승회귀선(least squares regression line)이다.
그림1. 1851년 이후 대서양 허리케인의 빈도 (Frequency of Atlantic Hurricanes since 1851)
이러한 경향은 1944년에서 1994년까지의 50년에 대해 허리케인의 빈도가 감소된 것으로 조사된 랜씨 등(Landsea et. al.)의 결론과 대조적이다.[2] 이 새로운 분석에 대한 결론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평균 허리케인의 수가 더 많은 (매년 약 14개) 다른 10년간의 자료를 추가한 것과, 훨씬 더 오랜 기간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 영향일 것이다. 전체 자료를 놓고 보면 허리케인의 단기간의 빈도 변화는 잘못된 해석을 초래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1880-1900년 사이와 1945-1960년 사이에는 단기간의 높은 빈도수를 보여준다. 반면, 1910-1930년 사이의 빈도수는 이례적으로 낮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95-현재까지 기간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매 30년마다 허리케인이 1번 증가하는 장기추세는 통계적으로 잘 뒷받침되어 있다.
사람의 활동에 의한 지구 온난화가 허리케인 빈도의 증가를 야기했을 수도 있다는 일부 사람들의 제안은 이 자료로는 증명될 수 없다. 열대성 저기압 발생(tropical cyclogenesis)의 문제는 극히 복잡하여 열대기후에 대한 커다란 의문중의 하나로 남아있다.[3] 거기에는 허리케인이 생성된 이후에 허리케인이 성장하는 것뿐 아니라, 초기 열대성 저기압을 형성하는 대기내의 유인(triggers)의 발달도 포함시켜야 한다. 이러한 유인들은 따뜻해진 해수면온도에 의해 두드러졌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해수면온도의 온난화에 대한 다른 가능한 원인으로 인간 활동과 무관한 자연적인 변동일 수도 있다.
강도 (Intensity)
허리케인 발생의 빈도는 파괴력을 측정하는데 있어서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에마누엘(Emanuel)은 허리케인의 세력 소산(power dissipation)을 계산하는 공식을 제안했다.[4] 그 공식에는 공기저항 계수(drag coefficient), 표면 공기 밀도, 표면 풍량 등급, 폭풍의 크기 및 폭풍의 지속기간 등의 항이 들어있다. 비록 그가 제안한 세력 소산의 계산이 파괴력에 대한 뛰어난 측정치를 줄 수 있을지라도, 폭풍의 규모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과거 자료를 사용하여 그것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는 계산을 단순화하였고 세력소산지수(Power Dissipation Index, PDI)라 불리는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한 허리케인의 전 지속기간 중 최대 풍속의 세제곱을 적분하고 약간의 평활(smoothing)을 수행한다.
에마누엘은 그 방법을 대서양 허리케인들에 적용하였을 때, 그의 지표가 1970년대 이래로 30년에 두 배 이상이 됨을 알았다. 이것은 폭풍이 평균적으로 더 거세졌고, 오랜 기간동안 높은 강도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에마누엘은 또한 그의 방법(technique)을 다른 자료에도 대입시켜보았다. 비록 이것이 보고 과정에서의 변화를 부분적으로 반영할 수도 있지만, 그는 대서양과 북태평양 서쪽을 합친 누적된 폭풍의 연간 지속기간이 1949년 이래로 거의 60% 증가했음을 알아냈다. 대서양과 북태평양에 걸쳐 합쳐진 연간 평균 폭풍 최고 풍속도 또한 이 기간동안에 약 50% 정도 증가했다. 그러므로 지속기간과 최고 강도의 경향 둘 다 최종 세력의 소산에서 전반적인 증가에 기여하고 있다. 증대와 소산의 비율을 고정시키면 태풍이 최강 풍속에 도달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이며, 또한 소산하는 데에도 더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강한 폭풍이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결론 (Conclusions)
빈도, 강도 및 지속기간의 증가로 말미암아 허리케인이 더욱 파괴적이 되어간다는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특히 해안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걱정거리가 될 것이다. 역사 기록은 과거에 짧은 간격동안에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 어떤 해에는 많은 수의 폭풍이 발생했었고, 또 어떤 해에는 매우 격렬하고 파괴적인 폭풍이 일어났었다. 허리케인 빈도와 강도가 평균보다 약했던 1970년에서 1995년 사이엔 잠들 수 있을 만큼 잦아들었다. 하지만, 허리케인의 파괴력은 최근에 평균치 이상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장기간의 평균도 넘어서서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같은 기간 동안에, 광범위한 발달이 전 해안선을 따라 일어나기도 했다. 30년 전과 같은 빈도와 강도의 허리케인이 육지로 접근하게 되면, 이제는 그 당시보다 훨씬 더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게 될 것이다. 만약 허리케인의 파괴력이 증가하고 있다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해진다.
물론, 우리는 허리케인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허리케인 파괴력의 그러한 증가는 해수면온도의 증가와 일치한다. 하지만, 해수면온도의 작은 증가는 인간이 일으킨 영향이라기보다 자연의 변화로 인한 것일 것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대양에서는 7-10년 주기의 엘니뇨와 남방진동(Southern Oscillation)과 같이 많은 주기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현재 조사된 경향은, 그와 유사한 오랜 기간의 변화의 결과일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또한 1958년 이래로 마우나로아(Mauna Loa)에서 측정된 대기 내 이산화탄소의 증가로 인한 것일 것이다. 따뜻해지고 있는 해양은 해양으로부터 이산화탄소를 내보내어 대기 내 이산화탄소의 양을 증가시킬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작은 온도변화 중 어떤 것도 창세기 대홍수 후에 일어났을 수도 있는 것들과 비교되지 않는다. 창세기 대홍수가 끝날 무렵의 해양 온도는 섭씨 37.8도(화씨 100도) 이상 정도로 따뜻했었을 것이다.[5] 해양이 그렇게 따뜻했기 때문에 대기 중으로 물이 엄청나게 증발하였고, 극지방과 그때 생겨난 산 정상에 눈이 쌓임으로 빙하기가 왔다는 것의 설명이 될 수 있다. 해수면 온도가 섭씨 37.8도이거나 그 이상인 해양에서는, 오늘날의 어떠한 허리케인보다 더 잦은 빈도와 강도의 허리케인을 발생시켰을 것이다. 특급허리케인(hypercanes)이라 불리는 거대한 허리케인들이 지구 전반부에 걸쳐 발생했었을 것임을 보여주었다 [6]. 그것들은 지름이 수백 마일 정도로 성장했으며, 시간당 483km(300마일)이 넘는 수평 바람을 일으켰고, 시간당 161km(100마일)의 수직 바람을 만들었으며, 시간당 254mm(10인치)보다 더 많은 속도로 비를 뿌렸을 것이다. 많은 양의 미고결된 퇴적물의 침식이 대홍수에 뒤이어 대륙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오늘날 허리케인의 활동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약 5,000년의 냉각이 끝날 무렵의 정상 상태에서 하나의 작은 진동을 나타낸다.
References
1. Landsea, C. W., 1993, A Climatology of Intense (or Major) Atlantic Hurricanes, Monthly Weather Review, 121, 1703-1713.
2. Landsea, C. W., N. Nicholls, W. M. Gray, and L. A. Avila, 1996, Downward Trends in the Frequency of Intense Atlantic Hurricanes during the Past Five Decades, Geophysical Research Letters, 23, 1697-1700.
3. Emanuel, K., 2005, Divine Wind: The History and Science of Hurricanes ,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NY, 285 pp.
4. Emanuel, K., 2005, Increasing Destructiveness of Tropical Cyclones over the Past 30 Years, Nature, vol. 436, no. 4, pp. 686-688.
5. Vardiman, L., 1996, Sea-Floor Sediment and the Age of the Earth, ICR Technical Monograph,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El Cajon, CA, 94 pp.
6. Vardiman, L., 2001, Climates before and after the Genesis Flood: Numerical Models and Their Implications, ICR Technical Monograph,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El Cajon, CA, 110 pp.
* Dr. Vardiman is Chairman of the Astrogeophysics Department at ICR and Chief Operations Officer.
번역 - 길소희
링크 - http://www.icr.org/index.php?module=articles&action=view&ID=2589
출처 - ICR, Impact No. 390, 200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083
참고 : 2116|248|1472|1474|2249|2199|2141|2459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3부
본 논문은 3부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4. 시간의 끝(종말)과 생태 신앙
(1) 시간의 끝(종말)에 관한 보편적인 믿음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끝나면서 우주와 세계 역시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들의 삶과 생각을 지배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떤 계기로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까? 전 세계를 덮쳤을지도 모르는 홍수나 화산 폭발, 이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산불 등의 자연 재앙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던 인류는 이렇게 세상이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 신의 이름을 붙이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도모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구상에 존재해 왔던 무수한 종교들은 시간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종말 의식을 갖게 되고 또 종교에 의지하게 된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인간의 죽음에 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시간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만큼 사실적이고 엄정한 종말은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행복, 기쁨 등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물질, 가족, 재산 등 모든 것을 한꺼번에 빼앗아가 버린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자신의 삶과 시간으로부터 완전히 추방되고 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절대적인 상실로부터 도피하지 못한다. 죽음은 정말 두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죽음은 인간의 삶 속에 불안이라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죽음과 종말의 시한이 못 박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사람들을 찾아오고야 말 것이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었던 이러한 종말 의식은 과학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라고 예외일 수 없다. 오늘날의 사람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과 종말을 자각하면서 산다. 현대인들에게도 시간의 종말인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 뿐이 아니다. 시간의 종말에 대한 인식 및 그로 인한 두려움은 역설적이게도 과학적인 사실들로부터 주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종말에 대하여 갖는 두려움은 두 가지 요인들로부터 생겨난다. 그 하나는 외부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것이다. 화산 폭발, 대홍수, 지진, 태풍 등의 자연 재해, 그리고 행성과 지구의 충돌 및 이로 인한 지구의 대격변 등이 외부적 요인에 해당한다면,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 및 사회적 병리의 급속한 확산 등은 내부적 요인에 해당한다. 이것은 시간의 종말에 대한 인식이 종교와 같은 어떤 특정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을 포함한 총체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참으로 시간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최첨단 과학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똑같이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시간의 종말이란 주제가 직선적 시간 개념에 익숙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실제로 구약성서에서 발견되는 직선적인 시간 표상은 참으로 시간과 역사가 일회적인 것이요, 유한한 것임을 함축하며, 정해진 끝을 향해 직선적인 진행을 계속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직선적 진행의 한복판에 시간의 창조자이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시간과 역사의 모든 과정, 곧 그 시작과 중간 과정 및 끝 일체를 주관하시고 결정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32).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시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하심과는 달리 끝을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여 시작된 시간과 역사는 그가 정하신 최후의 심판을 향해 나아가되, 결코 되돌아오거나 반복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진행할 뿐이다. 하루나 1주일, 한 달, 1년 등의 기본적인 시간 단위야 늘 되풀이되겠지만, 그 안에서 운행되는 인간의 삶과 역사까지 항상 똑같이 되풀이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한 번 흘러간 시간과 같을 수가 없다. 시간의 틀은 순환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되는 인간의 삶과 역사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죽음이나 종말을 향해 직선 형태로 계속 전진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에서 시간의 끝에 대한 생각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단 종말에 대한 인식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찾아오는 죽음에 직면하여 생긴 것이요,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각종 자연 재해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전자는 맨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그에 대한 죽음의 형벌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며(창 2:17; 3:22-24), 태곳적 사람들의 수명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창세기의 족보들(창 5:1-31; 11:10-32)에서 금방 확인된다.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노래하는 시편의 몇몇 노래들(시 39:4-5; 90:9-10)도 개개인에게 닥치는 시간의 끝을 매우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간의 시작에 관한 고대 이스라엘의 창조신앙 자체가 시간의 끝-완전한 끝은 아니지만-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홍수 이야기를 시작하는 창세기 6:13이나 홍수 이야기를 끝맺음하는 창세기 8:22 본문이 그렇다. 6:13은 모든 생명체의 “끝날”이 이르렀음을 강조하며, 8:22는 홍수 이후에 이루어질 새로운 세계의 안정적인 질서를 창조 질서의 시각에서 서술하는 바, 서두에 있는 “땅이 있는 한”이라는 표현은 땅이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시작된 것이기에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을 것이다33). 하지만 이 본문은 시간과 역사의 끝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시간의 끝에 대한 인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겠지만, 그것이 끝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한 것은 비교적 후대에 이르러서이다.
단순히 개개인의 죽음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종말의 공동체적이고(communal) 우주적인(cosmic) 차원을 선명하게 강조하는 이른바 종말 신앙이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주전 8세기의 문서 예언자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중론이다34). 종말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과 종말 신앙의 기본 형태가 그들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예언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종말 신앙은 예언의 시대가 끝나고 묵시의 시대가 오면서 제대로 발전했다고 보는 견해가 옳을 것이다. 예언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종말 신앙이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 일정 시간의 끝을 의미하는 반면에, 묵시가들의 종말 신앙은 문자 그대로 시간과 역사 모두가 끝나는 한 시점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32) 이 점은 특히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사건(수 10:12-14)과 해 그림자를 열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한 사건(왕하 20:8-11; 사 38:7-8)에 매우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던지신 다음의 질문 역시 하나님 아닌 다른 누구도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네가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에게 명령하여, 새벽이 제자리를 지키게 한 일이 있느냐?”(욥 38:12).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고 보는 시편 74:17 의 고백이나,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또 추수 기한을 정하신다는 설명(신 11:14; 호 6:3; 렘 5:24; 욜 2:23) 역시 같은 맥락에 속한 것이다.
33) Westermann, Genesis 1-11, 457; Geerhardus Vos, The Eschatology of the Old Testament (Phillipsburg: P & R Publishing Company, 2001), 81-83.
34) 박준서, “구약성서를 통해 본 종말론의 이해,” 『구약 세계의 이해』 (서울: 한들출판사, 2001), 168.
(2) 문서 예언자들의 종말 예언과 생태 신앙
주전 8세기에 이스라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문서 예언자들은, 왕이나 특정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예언 메시지를 선포했던 초기 예언자들과는 달리,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메시지, 곧 이스라엘의 완전한 파국(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을 처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전 예언자들이 개개인의 범행을 들추어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재난으로부터 보존하려고 한 반면에,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무조건적인 파멸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초기 예언자들의 예언 메시지가 단편적이고 부분적이었던 반면에, 주전 8세기 이후에 활동한 문서 예언자들은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예언 메시지를 선포하되, 특히 국가 전체의 완전한 파멸, 곧 예루살렘의 함락, 성전 파괴, 왕정 붕괴 등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사실상 시내산 계약의 저주 규정에 따른 것으로서, 기존의 국가 형태를 완전히 끝장낸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35).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은 생태학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암 8:8; 9:5-6; 호 4:3; 사 13:9, 13; 24:18-20; 나 1:4-5; 습 1:2-3; 렘 9:10-12; 겔 38:19-22; 학 2:6, 21 등). 물론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범죄 행위가 주변 환경인 생태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기본적인 사실36)에 기초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시간 개념과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심판 메시지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최초의 문서 예언자인 아모스의 심판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심판 선고에 의하면, 야웨는 근본적으로 “묘성(Pleiades)과 삼성(Orion)을 만드신 분, 어둠을 여명으로 바꾸시며, 낮을 캄캄한 밤으로 바꾸시”는 분(암 5:8)이지만, “대낮에 해가 지게 하고, 한낮에 땅을 캄캄하게 하는” 분이기도 하다(암 8:9). 이것은 야웨가 겨울과 여름의 계절 변화를 주도하는 분이요, 낮과 밤의 시간 변화를 주관하는 분이시면서도, 때로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기 위하여 천체를 중심으로 하는 생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자신이 창조한 시간 질서를 뒤집을 수 있는 분임을 암시한다(참조, 암 5:18; 렘 15:9; 습 1:15; 욜 2:2 등)37).
만일에 아모스가 예언한 바와 같은 생태 질서와 시간 질서의 혼란이 생겨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시간 질서를 담당하는 천체의 제 기능 상실은 아마도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정상적인 생명 활동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천체의 기능 마비로 인하여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이 뒤집어지는 상황에서는 생태계의 대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창조하신 시간 질서가 생태계의 유지와 존속에 대하여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모스의 이러한 심판 메시지는 신명기 28:29(“너희는 마치 눈이 먼 사람이 어둠 속에서 더듬는 것처럼 대낮에도 더듬을 것이다”; 참조, 사 59:9-10)에 있는 저주 규정의 성취에 해당하는 바, 비슷한 시기에 남왕국에서 활동한 이사야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이사야는 야웨의 날에 있을 심판의 한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하늘의 별들과 그 성좌들이 빛을 내지 못하며,
해가 떠도 어둡고, 달 또한 그 빛을 비치지 못할 것이다. (사 13:10; 참조, 사 8:22)
이사야의 이 본문 역시 아모스가 선포한 심판 메시지와 똑같이 천체의 시간 기능 상실과 그로 인하여 예상되는 생태계의 대혼란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백성에게 드러내시는 야웨 신현(theophany)의 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조주이신 그의 심판 임재로 인하여 발생하는 피조 세계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38).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의 결과를 혼돈으로의 복귀와 관련시키고 있는 예레미야의 심판 메시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없으며,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습니다.
둘러보니, 기름진 동산마다 황무지가 되고...
이 일 때문에 온 땅이 애곡하고,
하늘이 어두워질 것이다.... (렘 4:23, 25-26, 28; 참조, 사 34:4).
예레미야의 이러한 심판 선고는 유다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태초의 혼돈에로 복귀한 것과도 같은 상황을 초래할 것임을 뜻한다. 그것은 곧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상황, 곧 혼돈과 어둠이 지배하는 상황을 가리키며, 아직 아무 것도 창조되지 않은 상황을 암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계의 완전한 붕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할 것임을 이처럼 비유적인 언어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 시간의 소멸과 그로 인한 생태계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포로기 이후의 요엘도 비슷한 메시지를 선포한 바가 있다. 그는 야웨의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해 언급하면서, 메뚜기처럼 많은 군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쳐들어오면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며(욜 2:10; 참조, 마 24:29), 끔찍스럽고 크나큰 야웨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붉어질 것”이라고 말한다(2:31). 그는 또한 야웨께서 판결의 골짜기에서 주변 나라들을 심판하실 때에도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을”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3:15). 요엘의 이러한 심판 메시지는 아모스나 이사야, 예레미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간조차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할 것이요, 그 결과 온통 어둠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생태계의 붕괴와 파멸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말한 태초의 혼돈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39).
그러나 이처럼 공포스러운 하나님의 심판을 계기로 하여 도래할 끝날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끝이면서 또 다른 시작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그들의 끝이 가까웠다고 설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러한 사실은 파멸 이후의 새로운 창조 세계에 대해서 말하는 예언자들의 종말론적인 메시지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끝난 후에 인간의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새로운 창조 세계가 전개될 것임을 확신에 찬 어조로 선포하는 바, 변화된 그 세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끝장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에 힘입어(호 11:8; 습 3:17) 다시금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선포한 새로운 시대, 그리고 희망의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 야웨께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남은 자”; 암 3:12; 9:8-10; 사 1:9; 6:13; 7:3; 10:20-22; 11:11-16; 28:5; 30:17; 겔 6:8-10; 습 3:12-13 등)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요, 그들은 고향 땅에서 이상적인 지도자의 통치 아래 샬롬의 나라를 이루며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남은 자들이 살게 될 샬롬의 나라가 하나님께서 주실 온갖 풍요와 번영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요(암 9:11-15; 호 1:10-11; 14:4-8; 욜 3:18 등), 그 결과 이전에 심판으로 인하여 파멸과 무질서에 빠진 생태계가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때, 홍수 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과 우주적인 계약을 맺은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더 정확하게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계약을 맺음으로써40) 자연계와의 사이에 우주적인 계약을 맺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호세아의 구원 메시지(호 2:18)41)나, 동물들의 세계에까지 확대 적용될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평화를 선포하는 이사야의 구원 메시지(사 11:6-9; 참조, 65:17, 25)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불어 평화의 계약을 맺으실 것임을 강조하는 에스겔의 구원 메시지 역시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에덴 동산과도 같은 생태계의 회복과 관련시켜 설명한다(겔 34:25-29; 36:8-11, 35; 47:1-12)42). 이러한 구원 메시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인간과 자연 모두를 포함한 새로운 창조 질서의 회복-더 정확하게는 생태계의 회복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이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새로운 창조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조화로운 상호 공존의 세계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자연 안에 새겨진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 시간의 운행이 이제는 모든 피조물들 사이에 사랑의 사귐과 나눔이 있는 평화의 세계 안에서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시간 질서의 회복을 생태학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예언자가 바로 호세아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연 질서-시간 질서를 포함하는-의 회복과 풍요로운 농산물 수확으로 귀결되는 새로운 창조의 복을 주실 것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을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 (호 2:21-22)
이 본문에 의하면 자연 질서의 회복은 전적으로 야웨 하나님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야웨의 자비로운 응답은 자연계의 모든 영역들에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에 있는 하나님-하늘-땅-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스르엘 등의 순환 구조가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이 순환 구조에 의하면, 창조주이신 야웨께서 하늘에 응답하신 결과 하늘이 햇빛과 비를 땅에 내려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하늘이 땅에 응답한 결과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등의 풍요를 이스르엘에게 제공할 것이다. 호세아는 이를 통하여 계절의 순환과 곡물의 생장을 통해 구체화되는 새로운 시간 질서의 회복이 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구원 은총(2:23)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복인 생태계의 회복이 시간 질서의 회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35) 특히 북왕국과 남왕국의 “끝”을 강조하는 아모스 8:1-3; 에스겔 7:1-13 두 본문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36) 이를테면 아담과 가인에게 내린 생태학적인 성격의 형벌(창 3:17-18; 4:12)이나 노아 시대에 임한 우주적이고 생태학적인 차원의 홍수 심판, 출애굽 당시의 각종 생태학적인 재앙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 T. Frymer-Kensky, “Pollution, Purification, and Purgation in Biblical Israel,” in C. L. Meyers and M. O'Connor (eds.), The Word of the Lord Shall Go Forth: Essays in Honor of David Noel Freedman (Winona Lake: Eisenbrauns, 1983), 399-414; H. H. Schmid, “Creation, Righteousness, and Salvation: ‘Creation Theology’ as the Broad Horizon of Biblical Theology,” in B. W. Anderson (ed.), Creation in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102-117; G. Friedrich, “생태학과 성서,” 이정배 (편), 『생태학과 신학-생태학적 정의를 향하여』 (서울: 종로서적, 1989), 44-50.
37) Shalom M. Paul, Amos: A Commentary on the Book of Amos,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1991), 168, 262. 예레미야 13:16(“주님은 빛을 어둠과 흑암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도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자연 질서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J. A. Thompson, The Book of Jeremiah,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85), 369.
38) R. E. Clements, Isaiah 1-39,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94), 136.
39) 이 점에 있어서는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심판 재앙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 재앙들은 한결같이 창조 질서가 자신의 정상적인 경계선으로부터 이탈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재앙 이야기에 의하면, 이집트 심판의 도구가 된 자연계의 모든 요소들은 피조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한계를 깨뜨리고 있다. 그것은 마치 피조 세계가 광란에 사로잡힌 것과도 같은 그림을 보여 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삼일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된 아홉 번째의 어둠 재앙은 빛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한 상황, 아니 더 정확하게는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이 혼란에 빠진 상황 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태초의 혼돈과도 같은 상황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더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필자의 다음 글을 참조: 『오늘의 눈으로 읽는 구약성서』, 72-79.
40) M. DeRoche, “The Reversal of Creation in Hosea,” VT 31 (1981), 400-409.
41) R. Murray, The Cosmic Covenant (London: Sheed and Ward, 1992), 31-32, 39; G. I. Davies, Hosea (Grand Rapids: Eerdmans, 1992), 84.
42) A. DeGuglielmo, “The Fertility of the Land in the Messianic Prophecies,” CBQ 19 (1957), 308; Ronald A. Simkins, Creator and Creation: Nature in the Worldview of Ancient Israel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4), 235-237.
(3) 묵시문학의 종말 진술과 생태 신앙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주전 8세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악을 심판하실 끝날이 곧 올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끝임을 강조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죄악과 탈선으로 오염된 역사의 끝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옛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은 철저하게 역사와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그들이 설교하는 끝 또는 종말은 당연히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다43). 이른바 역사 내적인(within history) 종말론이 문서 예언자들의 신앙과 신학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내지는 희망의 미래가 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도무지 실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고통과 절망의 상황이 계속 강화되면서, 예언신학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묵시 사상이 생겨나게 된다. 묵시 사상은 일반적으로 세계의 종말과 천상 국가에 관한 신적인 비밀을 밝히는 것을 뜻하는 바, 이러한 묵시 사상은 고통과 절망의 현실이 극대화되던 주전 2세기에 이르러 다니엘서를 필두로 하는 본격적인 묵시작품 내지는 묵시문서들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고통과 탄식 및 가난 등의 사회ㆍ정치ㆍ경제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으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한편으로, 그들로 하여금 극도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44).
그렇다면 이처럼 극심한 탄식과 절망의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묵시작품들은 시간과 종말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가? 묵시작품들은 무엇보다도 현실 역사 내지는 현 세대에 대한 강한 비관주의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묵시문학은 극도의 절망과 비탄의 현실을 밑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묵시작품들은 인간의 삶이 진행되는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자리임을 부정한다. 도리어 그것들은 악의 세력이 현실 세계와 역사의 무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악의 무리가 지배하는 현 세대가 빠른 시일 안에 종결되리라고 봄으로써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기도 하다45).
이러한 확신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왕국을 강조하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묵시작품들이 강조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예언자들의 설교하는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왕국과는 달리, 그 본질에 있어서 초월적이고 초지상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46). 따라서 묵시문학의 종말론은 시간과 역사가 끝을 본 다음의 시대를 내다본다는 점에서 역사 초월적인(beyond history) 종말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묵시작품들이 한시적인 현 시대(world-age)와 미래의 영원한 시대(eternal age)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두 시대 이론 내지는 시간적 이원론(temporal dualism)을 전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47). 물론 다가올 새 시대는 현 시대의 완결이 아니라 현 시대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옛 시대 안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옛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 까닭에 본격적인 묵시작품들이나 묵시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품들은 한결같이 현존하는 세계와 역사가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임을 강조한다(사 65:17):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사 65:17)
이 본문은 창세기 1:1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실 세계가 이전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이룰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벧후 3:10-13; 계 21:1).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이전 세계가 그 안에 새겨진 시간 개념을 포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는 기존의 시간 개념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간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점은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같은 차원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66:22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새로운 세계가 영원의 차원과 맞닿아 있는 것이고 볼 경우, 새로운 시간 역시 같은 차원에 속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간은 구체적으로 이전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대체 어떻게 새로워진다는 것인가? 우리는 그 암시를 초기 묵시에 해당하는 스가랴 14:6-7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날이 오면, 햇빛도 차가운 달빛도 없어진다.
낮이 따로 없고 밤도 없는 대낮만이 이어 간다.
그 때가 언제 올지는 주께서만 아신다.
저녁때가 되어도, 여전히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시간 개념이 창조적으로 변형될 것임을 뜻한다. 이를테면 첫 번째 창조의 첫날에 이루어진 낮과 밤의 교체 주기, 곧 시간 구분의 기초를 이루는 낮과 밤의 주기적인 반복이 사라질 것이요, 항상 낮만이 지속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또한 홍수 이야기의 결론 부분(창 8:22)이 묘사하고 있는 다양한 시간 질서가 사라지거나 완전히 새롭게 변화될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운행에 기초하여 정하신 기존의 시간 질서는 본래 파괴와 소멸의 위협-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발생하는-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저주가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추위와 더위의 반복이나 낮과 밤의 순환 같은 기존의 시간 질서가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위 본문은 첫 번째 창조의 열매인 시간의 주기적인 순환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추위도 어둠도 없는 따스함과 밝음-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비롯되는-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참조, 사 60:19-20; 계 21:22-25; 22:5)48). 이러한 시간 개념의 변화는, 마지막 때가 되면 시간 질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적인 메시지들(마 24:29-31; 막 13:24-27; 계 6:12-14; 8:12; 20:11)에 의해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43) 박준서, “구약성서를 통해 본 종말론의 이해,” 170; 왕대일, 『묵시문학 연구: 구약성서 묵시문학 다니엘서의 재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29-30.
44) J. J. Collins, “The Apocalyptic Technique: Setting and Function in the Book of Watchers,” CBQ 44 (1982), 107-109. 묵시문학은 위기 상황에 놓인 자들을 위로하는 위기관리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기존질서에 맞서는 저항문학이기도 하다: 왕대일, 『묵시문학 연구』, 70-80.
45) Walter Schmithals, The Apocalyptic Movement: Introduction and Interpretation, tr. John E. Steely (Nashville: Abingdon Press, 1975), 77-84.
46) 그리고 이 왕국 개념은 모든 인간과 피조 세계 전체를 포함하는 재창조와 관련된다: D. S. Russel, The Method and Message of Jewish Apocalyptic: 200 BC-AD 100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4), 280-284.
47) 박준서, “구약 묵시문학의 역사이해,” 155; 왕대일, “묵시문학 운동의 역사 이해,” 기독교사상 편집부 엮음, 『종말론의 올바른 이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82.
48) R. L. Smith, Micah-Malachi, WBC (Waco: Word Books, 1984), 288-289. 묵시적인 경향을 보이는 이사야 30:26 역시 비슷한 어조로 “달빛은 마치 햇빛처럼 밝아지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서 마치 일곱 날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이 밝아질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낮과 밤의 주기가 필요없는 때, 곧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강한 빛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날이 올 것임을 강조한다(참조, 희년서 1:29; 19:25; 에디오피아 에녹서 91:16): O. Kaiser, Isaiah 13-39: A Commentary, OTL, tr. R. A. Wilson (London: SCM Press, 1974), 303. 더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다음을 참조: D. E. Gowan, Eschatology in the Old Testament, 홍찬혁, 『구약성경의 종말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200-204.
5. 나가는 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창조의 첫째 날에 빛이 창조되면서 시간이 창조되었고, 그로 인하여 시간이 없었을 때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가 사라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낮과 밤의 기본적인 시간 단위뿐만 아니라 계절과 날들 및 해 등의 보다 큰 시간 단위들이 만들어졌다고 봄으로써,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시간이라는 틀에 의해 규정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시간 자체와 시간의 다양한 단위들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계 시간과는 다른 자연 생태계의 리듬, 곧 농산물 수확의 시기와 기온의 변화, 계절의 순환, 낮과 밤의 반복 등의 자연 시간에 기초하고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그들은 자연계의 주기적인 순환을 측정하고 계절과 기온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달력을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농사를 비롯한 다양한 생산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자연계의 주기적인 순환을 그대로 따르는 축제와 절기를 개발함으로써, 그들은 인간의 삶을 압박하는 세속의 시간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곤 했으며,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전인적인 교류를 통하여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시켜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생태계의 리듬에 기초한 시간의 주기적인 순환이 무한정하게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직선적인 시간관에 기초한 종말 신앙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시간이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통치 하에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목표, 곧 시간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 예로써 주전 8세기 이후의 문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면서, 천체의 기능 상실과 그로 인한 생태 질서와 시간 질서의 대혼란이 그에 수반될 것임을 자주 예언하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생태 질서의 회복과 그로 인한 시간의 정상적인 운행을 가능케 할 것임을 예언하기도 했다. 반면에 묵시작품들은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현실 역사와 세계가 완전히 끝장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생태계와 그 안에 새겨진 시간 개념이 사라지거나 완전히 변형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생태 질서와 시간 개념으로 자리잡게 될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간의 창조자요 주인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시간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 흐름 일체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 질서를 부여하여 시간을 창조하신 분이요, 오염된 세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시간과 역사 및 세계 전체를 끝장내시고 새로운 시작을 이루실 수도 있는 분이다. 어떻게 보면 묵시가들이 예고한 종말은 우주적인 대파멸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구원을 강조하는 희망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그들이 선포한 시간과 역사의 마지막은 파괴와 전멸을 목표로 하는 때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통한 회복과 완성을 목표로 하는 때인 것이다.
시각을 달리하여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주목해 보자. 계몽주의 이후 한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힘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오늘날에는 과학과 산업기술의 발달로 누리게 된 풍요의 뒷자리에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위기, 전쟁 빈발 등의 다양한 부작용과 역기능이 자리 잡고 있는 탓에, 인류와 우주의 전면적인 파멸이 불가피할 것임을 조심스럽게 예견하는 견해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낮과 밤의 구분마저도 무너뜨린 채로, 계량화된 시계 시간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 모두를 지배하고자 하는 고도 산업사회의 비인간적인 모습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 문명은 자연과 세계로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을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동식물을 포함한 각종 생명체에 시간이나 계절의 변화와 무관한 각종 유전자를 삽입하거나 인간의 시간 스케줄에 적합하게 유전 정보를 조작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렇다.
이로 인하여 이제는 시간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으로 충만해 있던 자연이 이제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잃고서 인간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연계의 각종 생명체들과 관련된 언어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특히나 생태계의 시간을 표현하는 각종 시간 언어들이 그 자취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 언어들의 실종은 역으로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제거함으로써 생태계 위기를 한층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 뿐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자연 시간에 맞춘 축제조차도 사라지고 없다. 설령 축제가 있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생태계 시간에 맞춘 것이 아니다. 생태학적인 축제가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현상 역시 생태계에 대한 무관심을 증폭시킨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적어도 우리가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한에는,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는 불가피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그 자체가 비극적인 종말로 귀결될 수도 있는 과학기술 문명의 폐단을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우리는 비록 성서 저자들이나 당시의 공동체가 오늘날 고도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처럼 생태 문제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거나 생태주의를 하나의 주의나 주장으로 제창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다양한 신앙고백과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보여 준 생태학적인 시각이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만큼 생태적 원리에 충실하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이제는 녹색의 눈으로 성서를 읽고 녹색의 입으로 신학을 말하고자 함은 물론, 녹색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생태계를 온전하게 지키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류사 이래 가장 힘겨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제대로 가꾸고 보전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올바른 실천을 통해 구체적인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출처 - 2004. 11. 27,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00
참고 :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2부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본 논문은 3부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3. 생태계 시간의 인식과 그 확장
(1) 태양 중심의 생태계 시간과 일상 생활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시간은 철저하게 자연계의 운행을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시간과 자연계(또는 생태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참으로 시간은 피조 세계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 속에도 있고 자연 안에도 있다. 생체 리듬에 맞추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의 생명 작용이나, 태어나서 자라고 잠을 자고 음식물을 취하고 짝짓고 번식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살아가는 동물의 생존 리듬은 한결같이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져 있다. 이른바 생체 시간(body-time)이라는 것이 우주 만물 안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21). 시간이 이처럼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시간이 무엇이라고 규정하지는 못하면서도, 인간의 삶이나 자연계의 운행이 본질적으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나 자연계의 운행은 결코 시간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시간의 이러한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시간을 의식하던 때부터 그들은 자연 속에 감추인 시간을 찾아내고자 애썼다. 시간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할 때에만 자기들의 삶이 효율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냥이나 채집 또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계절의 변화나 시간의 흐름을 잘 살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해와 달과 별 등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체의 움직임 안에 깃들인 시간을 이해하려고 애썼고, 나무와 꽃과 각종 동물들의 몸에 새겨진 생태계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고자 했다. 적어도 옛날에는 그랬다. 인간은 온갖 시간으로 충만한 생태 환경과 일체가 되었으며, 자연계 안에 깃들인 시간을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였다. 곧 천체의 운행과 동식물의 생명 활동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과 그 리듬을 같이하고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인식은 자연 안에 새겨져 있는 시간의 흐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들은 해와 달 및 별들의 운행, 추위와 더위, 썰물과 밀물, 동식물의 생명 운동 등을 통하여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그에 기초하여 삶을 영위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창세기 1장에 묘사된 해와 달과 별 등의 움직임이요, 하루 주기의 시간 단위이다. 그래서인지 하루 주기를 기본으로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간 인식은 자주 천체의 운행과 관련하여 서술된다. 자연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생명체가 일출과 일몰에 맞추어 깨어나서 활동하다가 날이 저물면 자는 존재임을 고려한다면, 하루 주기의 시간 서술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사실상 천체의 운행과 삶의 리듬을 함께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천체의 운행 중에서도 가장 자주 언급되는 해의 경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의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한창 더운 대낮에”(in the heat of the day), 즉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 하나님을 만난다(창 18:1). 그리고 사울이 소집한 이스라엘 군대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햇볕이 뜨겁게 내리쬘 때쯤에(by the time the sun is hot) 그들을 암몬 족속의 압제로부터 건져낼 것임을 통보하며(삼상 11:9),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한창 더운 대낮에”(about the heat of the day) 낮잠을 자다가 자기 밑에 있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에게 죽임을 당한다(삼하 4:5). 그런가 하면 느헤미야는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until the sun is hot)”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라고 명함으로써 성문을 여는 시점을 태양의 운행과 관련하여 규정한다(느 7:3).
시편 19:5-6은 하루의 변화를 태양의 뜨고 짐과 관련시켜 시적으로 표현하며(“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제 길을 달리는 용사처럼 즐거워한다.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니, 그 뜨거움을 피할 자 없다”), 104:20-23은 해가 지고 돋는 시점에 따라 짐승과 인간의 삶이 교체되어 나타남을 다음과 같이 운치 있게 노래하고 있다:
주님께서 어둠을 드리우시니, 밤이 됩니다.
숲 속의 모든 짐승은 이 때부터 움직입니다.
젊은 사자들은....해가 뜨면 물러가서 굴에 눕고,
사람들은 일을 하러 나와서, 해가 저물도록 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처럼 태양의 운행과 관련하여 생태계 시간의 흐름을 인식했다는 것은 아하스와 히스기야 치세 때에 해시계(日影表)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왕하 20:9-11; 사 38:8). 그리고 하루를 새벽과 아침, 낮, 저녁, 밤 등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천체의 운행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해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때가 새벽이라면(출 14:24, 27; 삿 19:25 등)22), 해가 지평선으로부터 완전히 떠올랐을 때가 아침이고(삿 19:25-26), 낮은 해가 높이 떠있을 때이며(삼하 4:5), 저녁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의 어스름한 때(창 15:12; 신 16:6)를 가리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밤은 해가 완전히 지고 달과 별이 떠있는 때를 가리킨다(창 15:5, 17; 느 4:21). 저녁 때는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때”로 묘사되기도 한다(창 24:11).
21) 이에 대해서는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151-160을 참조. 흔하지는 않지만 구약에서는 야곱이 하란 지역의 목자들에게 하는 말, 곧 “아직 해가 한창인데, 아직은 양 떼가 모일 때가 아닌 것 같은데...”(창 29:7)라는 표현이나,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는 예레미야의 비판 메시지, 곧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렘 8:7)라는 표현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배신 행위를 설명하실 때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 26:34; 눅 22:34; 요 13:38; 참조, 막 13:35)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22) 새벽은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때”로 묘사되기도 한다(룻 3:14). 그런가 하면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새벽에 관하여 한 다음의 말은 고통스러운 시간의 정지를 간절히 원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 밤에는 새벽 별들도 빛을 잃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도 밝지를 않고, 동트는 것도 볼 수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욥 3:9).
(2) 달 중심의 생태계 시간과 고대 이스라엘의 달력 체계
고대 이스라엘은 위에서 보았듯이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생태계 시간을 중심으로 하루 주기의 삶을 영위하였지만, 이것만으로는 안정된 삶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자연계의 다양한 리듬들과 계절의 변화 및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 등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생산 활동을 비롯한 모든 삶의 차원들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이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춘 한층 확대된 생태계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달의 운행을 기초로 하여 만든 달력이다. 그것은 일종의 생태 달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어디에서도 고대 이스라엘의 달력 전체를 완성된 형태로 보여 주지 않는다. 이는 이스라엘의 달력 체계가 주변 나라들과의 역학 관계 속에서 오랜 변화와 실험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구약성서 안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달력 자료들을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자료들과 비교하면서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한 족장들이 어떠한 달력 체계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이주한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족장 시대의 인물들은 봄(spring)을 한 해의 시작으로 계산하는 바벨론 지역의 달력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나안 정착 이후부터는 어느 정도 상황이 바뀌었을 것이다. 가나안 지역의 농경 생활 리듬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가을(fall)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는 가나안 지역의 농사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1908년에 마칼리스터(Macalister)가 발견한 게제르(Gezer=수 10:33; 12:12; 삿 1:29 등의 ‘게셀’) 달력이다. 이 달력은 1월부터 12월까지를 2개월 단위로 또는 1개월 단위로 구분하고서 해당 기간에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서술하되, 가을철을 한 해의 시작으로 설정하고 있다23).
분열왕국 시대 초기에 속한 이 달력은 가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봄으로써 당시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들의 농사력을 채용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아울러 구약 본문들 중에 가나안 농사력에 속한 주요 달들의 이름이 나타난다는 것도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빕(Abib)월과 시브(Ziv)월, 에다님(Etanim)월 및 불(Bul)월 등의 네 이름들이 그렇다(출 12:2; 신 16:1; 왕상 6:1, 37-38; 8:2). 주로 유월절 및 솔로몬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이상의 네 이름들은 초기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농사력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아빕월이 양력의 3~4월에 해당하는 달로서 한 해의 첫 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출 12:2)은,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봄철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족장 시대의 달력 체계가 가을철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가나안식 달력 체계와 더불어 사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가나안 달력의 네 이름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본문들이 포로기 이후에 편집된 것들로서, 바벨론 달력 체계가 상용화된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24).
어느 경우에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부터 완결된 달력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과, 가나안 정착 이후로부터 왕정 말기에 이르기까지는 대체적으로 가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가나안 달력 체계가 우세하였으리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달력 체계는 포로기 이후에 가서는 봄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는 바벨론의 달력 체계로 크게 바뀐다. 이 점은 포로기 이후 시대에 기록된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스가랴 등의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25).
불완전하기는 해도 이러한 달력 체계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달력 체계가 30일-더 정확하게는 29.53059일-을 주기로 하여 규칙적으로 차고 기우는 달의 운행에 기초하고 있으며, 계절의 순환과 맞물려 있는 자연 생태계의 변화를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달력 체계가 자연 안에 새겨진 시간, 곧 생태계 시간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더욱이 각 달에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은 인간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각종 농작물의 재배와 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바, 이는 이스라엘의 달력이 당시 사람들의 일상 생활-특히 농경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자연계의 생명 활동을 달의 변화에 맞추어 정리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생태계 시간은 이렇게 해서 일찍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중요한 생존 조건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3) R. A. S. Macalister, The Excavation of Gezer (1912), II, 24-28; W. F. Albright, “The Gezer Calendar,” BASOR 82 (1943년 12월), 18-24; ANET, 320.
24) S. J. De Vries, “Calendar,” IDB 1, 484.
25) De Vries, “Calendar,” 486.
(3) 생태계 시간과 제의 활동
고대 이스라엘은 주변 세계의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1년 열두 달을 기준으로 하는 달력 체계를 운영하면서, 한 달 내지는 1년을 주기로 하는 각종 축제들을 지켰다. 이 축제들이 반영하는 시간은 종교적인 시간(religious time) 또는 제의 시간(cult time) 26) 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 달 주기의 제의 시간이 월삭(매월 초하루)을 가리킨다면, 1년 주기의 제의 시간은 이스라엘의 삼대 축제(절기)들을 가리킨다. 새해맞이 축제는 후자에 속하지만, 월삭과 비슷한 성격의 축제라 할 수 있다.
먼저 월삭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 월삭은 달(moon)을 기준으로 하는 축제요, 자연의 시간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축제이다. 매월 초하루는 달이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기에, 달의 운행에 새겨진 생태계 시간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달의 새로운 시작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월삭을 지키면서 자기들의 삶이 늘 새로워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 날에 다른 축제일들의 경우와 똑같이 축제의 성격을 나타내는 나팔을 분 것을 보면(민 10:10; 시 81:3) 월삭이 축제의 날인 것은 분명하다27). 여느 축제일들처럼 명시적인 축제 규정이 없지만, 민수기 28:11-15는 매월 초하루에 드려야 할 제물에 대해서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참조, 사 1:13; 겔 46:1-7). 또한 예언서를 비롯한 여러 구약 본문들이 안식일과 더불어 월삭에 대해 언급하는 바, 이 본문들을 종합해 보면, 월삭은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모든 일을 중단하고서(암 8:5)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날이요(호 2:11; 참조, 삼상 20:5, 18, 24), 금식이나 애곡함이 없는 날이기도 했다(유딧 8:6). 온 인류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을 대망하는 종말론적인 희망이 이루어지는 날도 월삭이었다(사 66:22-23). 특히 일곱 번째 월삭은 매우 중요한 달로 간주되었다(레 23:24). 에스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토라를 낭독해 들린 날은 바로 7월 초하루였다(느 8:2).
월삭이 이렇듯이 매월 초하루에 갖는 축제로서 한 달을 주기로 하여 되풀이되는 절기라고 한다면, 새해맞이는 1년을 주기로 하여 되풀이되는 신년 초하루 축제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을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는 가나안의 달력 체계를 사용하던 때에는 가을의 시작인 7월 1일이 바로 새해의 시작이요, 새해맞이 축제(신년 축제, New Year's Festival)가 열리는 날이었다(민 29:1-6). 이스라엘에는 이날 역시 노동을 중단하고 거룩한 모임을 열었으며, 같은 달 10일의 속죄일과 15일부터 시작되는 초막절을 예비하였다(레 23:24-25).
1년 주기의 축제들에는 이 외에도 이른바 순례 축제들(pilgrim feasts)로 알려진 유월절(무교절), 칠칠절, 초막절 등의 삼대 절기가 있다. 슈미트(W. H. Schmidt)는 이들 순례 축제들이 농경 사회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추수기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순환과정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본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정착 생활에 들어가면서 가나안 땅의 주변 원주민들로부터 그 땅의 성소들에서 행해지던 절기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28). 그 중 첫 번째인 유월절은 봄철이 시작되는 아빕월(바벨론 달력으로는 니산월) 14일 밤에 지키는 것으로(출 13:3), 본래 유목민들이 초원의 겨울 목초지에서 경작지의 여름 목초지로 이동하기 전에, 이동 과정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막기 위해 행하는 피뿌림의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희생제물의 피가 사람과 짐승을 광야에 있는 악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정기적으로 피뿌림의 예식을 거행했었다29). 유월절의 이러한 유래는 그것이 유목에 필요한 생태 환경의 변화 시기에 맞추어 지켜지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유월절은 초목의 생장과 관련된 생태 시간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종교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빕월 다음날인 15일부터 21일까지 7일 동안 계속해서 지키는 무교절은 본래 가나안 지방에서 곡물 수확을 시작하기에 앞서 곡물의 첫 이삭(보리)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성공적인 곡물수확을 기원하는 농경 정착 사회의 종교 의식이었다(레 23:9-11)30). 이러한 사실은 문화권이 다르긴 해도 무교절 역시 유월절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시간, 곧 생태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켜지던 절기였음을 보여 준다. 비록 이스라엘이 이를 출애굽과 관련된 초태생의 구속과 관련지어 이해하였지만 말이다(출 13:1-16). 삼대 축제의 두 번째인 칠칠절도 생태계 시간에 충실한 축제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교절이 수확(보리)의 시작과 더불어 지키는 축제라고 한다면, 맥추절(출 23:16)로도 불리는 칠칠절은 처음 익은 곡식(밀)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레 23:21; 민 28:26) 수확(밀)의 종결을 기념하는 축제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칠칠절은 무교절에서 시작된 곡물 수확을 종결짓고서 성공적인 수확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농경 축제였던 것이다. 농산물의 생장과 수확이라는 생태계 시간의 흐름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가 하면 수장절로 알려진(출 23:16; 34:22) 초막절은, 나중에 광야 유랑 중의 초막 생활을 기념하는 축제로(레 23:39-43; 느 8:13-18), 그리고 시내산 계약의 갱신 의식으로 발전하여(신 31:9-13) 계약 갱신(covenant renewal) 축제의 성격을 갖기에 이르렀지만31), 본래는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 곧 과일과 올리브 열매 및 포도 등을 저장하는 것을 기념하는(신 16:13; 레 23:39ff.) 가나안의 농경 축제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초막절의 이러한 유래 역시 그 축제가 각종 농산물을 저장해야 하는 일정 시기, 곧 생태계 시간에 맞춘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상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주요 축제들은 전반적으로 가나안 정착 이후 가나안 문화와 종교와의 접촉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이 팔레스타인의 농경사회를 반영하는 농경축제요, 자연계의 순환과 생태계의 시간을 따르는 민간축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그것들을 야웨(Yahweh) 신앙의 입장에서 재해석함으로써 철저하게 역사화, 신학화하고 있기는 해도, 그 축제들이 지켜지는 시기만큼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자연의 시간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이로써 그 축제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 질서 내지는 생태학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것들로 그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갈 수 있었다.
26) Snaith, “Time in the Old Testament,” 177.
27) 월삭은 예언자의 자문을 구하기에 적합한 날로 여겨진 듯하며(왕하 4:23), 에스겔은 종종 초하루에 환상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겔 26:1; 29:17; 31:1; 32:11). 학개 역시 다리오왕 2년 6월 초하루에 예언의 말씀을 받았으며(학 1:1), 바벨론 지역에서는 매월 초하루에 예언하는 자들이 활동하고 있을 정도였다(사 47:13). 그런가 하면 모세는 정월 초하루에 성막(tabernacle)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출 40:2, 17).
28) W. H. Schmidt, 『역사로 본 구약 신앙』, 강성열 옮김 (서울: 나눔사, 1989), 179-180.
29) J. C. Rylaarsdam, “Passover and Feast of Unleavened Bread,” IDB 3, 663.
30) Schmidt, 『역사로 본 구약 신앙』, 182.
31) J. C. Rylaarsdam, “Booths, Feast of,” IDB, 1, 457.
출처 - 2004. 11. 27,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99
참고 :
시간과 자연, 그리고 생태학 - 제1부
호남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본 논문은 3부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 파괴와 생태계의 위기는 인류 전체의 생존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쟁점임에 틀림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21세기의 인류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최근 몇 년 사이에 환경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들과 정보들을 거의 매일같이 대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 환경 문제가 피할 수 없는 전 지구적인 관심사가 되어 버렸음을 뜻한다. 신학적인 논의라고 예외일 수 없다. 신학함이 본질적으로 신앙공동체가 마주하는 온갖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려는 작업일진대, 환경 문제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세계 신학계는 1990년대 이후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 또는 ‘생태신학’(eco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생태계 문제에 관한 폭넓은 논의를 전개해 왔다. 목회상담학 분야에서조차 ‘생태요법’(ecotherapy)을 주창하고 있는 것을 보면1), 그러한 논의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국내의 성서신학 분야에서는 가장 최근에 성서를 ‘녹색의 눈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기까지 하다2).성서신학이 이제는 녹색신학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필자 역시 부족하지만 구약성서의 창조론을 생태학적인 시각에서 읽으려는 작업을 시도한 바가 있다.3)
그다지 새롭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작업에서 필자는 국내외 성서신학자들의 생태신학을 참고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갖는 생태학적인 의미를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개괄적으로 추적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서 필자는 열 가지 재앙을 포함하는 출애굽 사건을 생태학적인 시각에서 이해하려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4).
이러한 방법을 확대 적용한다면, 아마도 창조 세계 내지는 자연계와 관련된 구약 본문들을 일일이 찾아 그 생태학적인 의미를 천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동의어 반복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솔직히 말해서 구약성서와 관련된 녹색신학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논구한다는 것이 조금은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많이 연구되어서일 것이다. 환경문제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론적인 탐구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올바른 실천을 목표로 하는 과제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면 이제 끝인가? 그렇지는 않다. 성서 본문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항상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감추어진 의미를 색출해내는 힘겨운 작업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생태계와 관련된 논의에 시간 개념-넓게 보아 종말을 포함하는-을 도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시간과 종말의 문제를 다루는 일반 서적들을 다수 접하면서, 하나님의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는 시간이 또 다른 피조물인 자연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부연 설명하자면,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시간 개념이 창조의 동반자인 자연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나름의 생태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본 논문은 바로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시간이나 자연이 똑같이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속한다는 평범한 인식을 생태학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 내보면,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소박한 생각으로부터 본 논문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고자 한 것이다. 필자가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아직은 이러한 접근 방식이 충분히 공론화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필자의 연구가 아직은 일천한데다가, 이 글의 주제와 관련된 문헌이 충분치 않다는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본 연구로부터 몇 가지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부족하기는 해도 그러한 결론이 앞으로의 연구에 하나의 디딤돌이 될 뿐만 아니라, 성서를 녹색으로 칠하고 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녹색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자 하는 노력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주)
1) Howard Clinebell, 『생태요법: 인간치유와 지구치유』, 오성춘ㆍ김의식 옮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8).
2) 기독교환경운동연대, 『녹색의 눈으로 읽는 성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3) “구약성서의 창조론과 생태학,” 『생태학과 기독교 신학의 미래』(서울: 한들출판사, 1999), 9-48. 이 글은 필자가 쓴 『오늘의 눈으로 읽는 구약성서』(서울: 쿰란출판사, 2003), 12-56에 그대로 실려 있다.
4) “생태학적 창조론의 시각에서 보는 출애굽 사건,” 『신학이해』 제19집 (2000), 9-38. 이 글 역시 『오늘의 눈으로 읽는 구약성서』, 57-91에 그대로 실려 있다.
2. 자연과 더불어 창조된 시간
(1) 시간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
시간 개념의 생태학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시간은 인간의 삶과 자연의 운행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에 해당한다. 참으로 우리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철저하게 시간에 의해 한정되며, 시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뿐이 아니다. 해와 달과 별 등에 의해 대표되는 천체의 운행과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다양한 생명 활동 중에서 시간의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떻게 보면 시간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의 근본적인 특성에 해당하는 것5) 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철저하게 시간은 인간과 자연 가까이에 있다. 아니 그 안에 확고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누구나 눈에 보이지 않은 채로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움직임에 매우 친숙하다. 친숙할 정도가 아니다. 시간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리의 삶이 시간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음을 누구나 깊이 인식하고 있다. 오랜 옛날에도 그랬지만, 요즘 사람들 치고 시간을 배제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술 더 뜨는 사람들도 있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대신에 그 반대로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시간을 한없이 잘게 쪼개어6) 사용함으로써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계량화되고 계수화된 시간 개념-이를테면 각종 식료품의 유통기한 같은-으로 인간의 삶과 일상생활을 규정하기까지 한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명제는 그런 사람들의 시간 지배 욕구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시간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간의 본질 또는 시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애매모호하다고 해야 할까? 굳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7)을 빌지 않더라도, ‘시간은 이런 것이다’라고 몇 마디의 말로써 시간을 규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시간이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요, 그 지나온 길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아무런 냄새도 형체도 남기지 않은 채로 그저 쉼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인지 20세기의 탁월한 시간 연구가인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시간(과 자연)의 형성 과정이나 진행 과정이 갖는 신비로움에 대해서 명상할 때마다 인간 지성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고 말한 바가 있다8).
시간은 이처럼 모호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쉽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시간의 정체를 깨닫고서 그것을 찾아내고자 애썼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삶과 자연계 안에 새겨진 시간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때만이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 그러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시간 개념이 인간의 삶과 역사에 있어서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썼고, 그 기원이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시간의 진행 과정과 그들의 삶은 결코 둘일 수 없었다. 시간의 진행 과정을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창조 질서에 가장 부합된 삶이요, 따라서 가장 안정된 삶이라는 것을 그들은 절실히 느끼곤 했다. 그 증거를 우리는 구약성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간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시간이 어떻게 진행되다가 또 언제 어떻게 끝나는지를 나름대로 정리하고자 한 다양한 노력들이 그렇다. 이른바 시간의 시작과 진행 과정 및 끝(종말)에 관한 신학적인 반성이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시간의 시작-창조된 세계의 기초
시간은 정확하게 언제 시작된 것일까? 아무도 이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자들이 있다. 과학자들이 그들이다. 한 예로 영국의 유명한 이론물리학자인 호킹(S. Hawking)은 시간과 우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우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밀도가 무한히 큰 상태의 특이점이 150억년 전에 대폭발(big bang)을 함으로써 지금의 우주가 생겨났으며, 우주가 그 때 이후로 계속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팽창하다가 언젠가는 급격한 수축 과정을 거치면서 밀도 무한대의 상태로 복귀함으로써 붕괴될 것이라는 견해를 내세웠다9).
아울러 그는 “시간이란 신이 창조한 우주의 특성이고, 우주가 시작되기 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10)을 빌어, 시간이란 개념은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11). 우주의 시작이 곧 시간의 시작이라는 얘기다.
필자로서는 물리학자들의 이러한 설명이 옳은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단지 그들의 주장이나 이론이 점차 우주의 기원과 운명을 규명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뿐이다. 정작 필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구약성서의 창세기가 시간과 우주의 시작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1656년에 영국의 어셔(James Ussher) 대주교는 지구가 주전 4004년 10월 22일에 창조되었다고 말했지만(인간 창조는 10월 23일)12), 이것 역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연대 추정에 관심이 없다. 당시 사람들이 연대 추정을 할 수 있을 만큼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창조의 시초와 그 과정 및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갖는 신학적인 의미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시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 세계에 속한 것이요, 자연과 더불어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맨 처음 책인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창세기 1:2에 의하면, 하나님의 우주 창조는 맨 처음의 혼돈과 무질서 상태에서 출발한다. 이 본문이 말하는 태초의 혼돈은 아직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무질서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시간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는 얘기다. 시간이 창조되기 전의 상태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한데 엉켜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상태요, 온통 혼돈과 어둠이 지배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주 창조-혼돈과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세우시는-가 본격화되는 첫째 날에 시간이 창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론이 틀린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3절이 시간의 창조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3절의 설명에 의하면, 첫째 날에 창조된 것은 어디까지나 빛이었지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둠으로부터 분리되어 낮으로 칭함 받게 되었고, 그 상대자인 어둠은 밤으로 칭함 받게 되었다(4-5절). 3-5절의 이러한 서술은 빛이 생겨남으로써 태초의 혼돈과 어둠이 제거되고, 그 결과 질서 있는 우주와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서로 분리되고 그로 인하여 낮과 밤의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빛의 창조와 더불어 시간이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13).
빛과 어둠의 구분으로 인하여 비로소 시간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 해당하는 낮과 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4a절)는 빛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시간 창조의 기초가 된 빛의 질서 부여 기능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14).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낮과 밤이 오늘날과 같은 24시간 단위의 시계 시간이 없던 당시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시간 단위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까닭에 창조의 날들을 셈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이 둘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5b, 8, 13, 19, 23, 31절). 여섯째 날까지 계속되는 이러한 날짜 서술 방식 역시 낮과 밤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우주 창조의 첫째 날에 빛과 함께 창조되었음을 암시한다. 시간은 빛과 더불어 하나님의 맨 처음 창조물에 해당하는 셈이다15).
아울러 빛과 시간의 창조는 이후에 이어질 다른 모든 창조-공간을 포함하는-의 시발점을 이루는 것이요, 엿새 동안 이루어지는 창조의 시간적인 연속을 가능케 하는 사건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3) 자연 안에 새겨진 시간
첫째 날에 창조된 시간은 넷째 날의 창조에 이르러 한층 구체화된다. 첫째 날(3-5절)이 낮과 밤의 가장 기본적인 시간 단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넷째 날(14-19절)은 낮과 밤뿐만 아니라 계절(seasons)과 날(days) 및 해(years) 등의 보다 큰 시간 단위들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넷째 날의 창조에 대한 설명은, 동물과 인간의 창조에 관해 설명하는 여섯째 날의 설명(여덟 절)을 제외하면, 엿새 동안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설명들 중에서 가장 긴 편(여섯 절)에 속한다. 저자가 보기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해와 달의 기능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까닭에1 내용 서술이 다른 날에 비해서 길다16).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에 이스라엘의 주변 세계인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신들로 폭넓게 숭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세계의 한복판에 있던 이스라엘 역시 하늘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숭배하는 일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신 4:19; 17:3; 왕하 17:16; 23:5; 렘 8:2; 9:13 등).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규범적인 창조신학은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부연하자면, 그것들은 단지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구분 짓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바로 이 마지막 대목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자연계의 일부로 창조된 천체가 첫째 날에 만들어진 시간을 구분하거나 반영하는 것들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이들 천체, 곧 광명체들(luminaries)에게는 몇 가지의 과제가 주어진다. 14-15절의 명령 진술에 의하면, 그 첫 번째 과제는 가장 기본적인 시간 단위인 낮과 밤을 구분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과제는 크고 작은 시간 단위들, 곧 계절-더 정확하게는 절기(cultic festivals)-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데 있었다. 시편 104:19는 달이 절기를 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마지막으로 궁창의 광명체들에게 주어진 세 번째 과제는 땅을 비추는 데 있었다(15절). 해가 낮에 지상 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달과 별은 어두운 밤을 비추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던 것이다(참조: 렘 31:35).
그런데 16-18절의 행위 진술은 해와 달과 별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14-15절의 명령 진술에서 보는 것과는 구별되는 낱말들로 표현한다. 16절은 첫 번째 과제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해로 하여금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달로 하여금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주관하다’로 번역된 낱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다스리다’ 또는 ‘통치하다’는 뜻을 가진 ‘마샬’ 동사를 가리킨다. 18절도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다. 시편 136:8-9도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낮을 다스릴 해를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밤을 다스릴 달과 별을 지으신 분께 감사하여라.
창세기 본문과 시편 136편의 이러한 내용들은 부분적이나마 해와 달에게 통치 기능이 수여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 세계의 종교에서 천체를 대표하는 자연 신들(nature gods)이 인간의 삶과 세계를 통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해와 달에게 통치 기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통치, 곧 신적인 존재로서의 통치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완전한 통치 기능을 행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피조물인 이들에게는 단지 제한된 기능-시간 구분을 위해 봉사하는 기능-만이 부여될 뿐이다. 그러한 기능을 통하여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이 된다17).
창조 세계의 다양한 시간 구분은 노아 홍수 이야기의 결론 부분(창 8:20-22)에서도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구절인 22절은 홍수 이후에 새롭게 시작될 세계의 안정적인 지속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되, 자연계 안에 새겨진 네 가지의 시간 단위들을 소개한다. 이처럼 세계의 지속을 굳이 시간 단위를 빌어 표현한 것은, 아마도 시간의 일정한 반복과 되풀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계의 안정적인 지속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이 본문에 언급된 네 가지 시간 쌍들(pairs) 중에서 처음 세 가지가 1년 주기로 반복되는 시간 단위를 가리킨다면, 마지막 네 번째인 낮과 밤은 하루 주기로 반복되는 시간 단위를 가리킨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해와 달이 이끌어 가는 낮과 밤의 순환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창조 세계의 호흡18)과도 같은 것이다. 1년 주기와 하루 주기에 기초한 이러한 시간 개념은 시계 시간을 알 턱이 없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 구분이 수확의 시기와 기온의 변화, 계절의 순환 및 낮과 밤의 반복 등과 같은 자연계의 리듬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연 시간(natural time) 또는 생태계 시간19) 에 해당하는 셈이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든 시간은 예외 없이 이러한 자연 시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이 위의 본문에 반영된 시간 구분은, 창세기 1장이 소개하는 시간 구분과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 안에서 시간 개념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자연계 안에 새겨진 시간을 크게 1년 주기와 하루 주기로 이해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인간을 포함하는-의 삶은 1년과 하루라는 자연계의 기본적인 시간 리듬에 따라 유지된다. 이것은 시간의 순환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고대 이스라엘의 시간 개념이 시작과 끝(종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연 질서에 기초한 순환적인 시간관 역시 배척하지 않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20).
(주)
5)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서울: 통나무, 1999), 40.
6) 오늘날 과학자들은 1/10-15초인 펨토초를 사용한다: Jay Griffiths, 『시계 밖의 시간』, 박은주 옮김 (서울: 당대, 2002), 19.
7)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쉽게, 그리고 간략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것을 잘 이해하여 그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St.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성한용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395.
8) Whitehead, The Concept of Nature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20), 73; 오영환, 『화이트헤드와 인간의 시간경험』, 41에서 재인용.
9) Stephen Hawking, 『시간의 역사』, 현정준 옮김 (서울: 삼성출판사, 1988), 69-92, 175-213; 『호두껍질 속의 우주』, 김동광 옮김 (서울: 까치, 2001), 69-79.
10) Augustine,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393-395.
11) Hawking, 『시간의 역사』, 32.
12) Jack Finegan,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Principles of Time Reckoning in the Ancient World and Problems of Chronology in the Bible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1999), 403-405; Stuart McCready 엮음, 『시간의 발견』, 남경태 옮김 (서울: 휴머니스트, 2002), 214, 220-222.
13) C. Westermann, 『창조』, 황종렬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1), 66.
14)어둠도 시간 창조와 관련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4-5절은 어둠에 대한 언급 이전에 빛에 대한 긍정 평가를 서술함으로써, 빛이 어둠보다 우선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C. Westermann, Genesis 1-11: A Commentary, tr. John J. Scullion (Minneapolis: Augsburg Publishing House, 1984), 113.
15)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서울: 문예출판사, 2001), 80.
16) 14-15절의 명령 진술(command-account)과 16-18절의 행위 진술(action-account)이 그에 해당한다: Westermann, Genesis 1-11, 127-129. 명령 진술의 14절은 행위 진술의 16절 및 18절과 일치하며, 15절은 17절과 일치한다.
17) Westermann, Genesis 1-11, 127; 『창세기 주석』, 강성열 옮김 (서울: 한들출판사, 1998), 31-32.
18) 왕대일, “생태계 안에서 오경 다시 읽기,” 『녹색의 눈으로 읽는 성서』, 22.
19) Griffiths, 『시계 밖의 시간』, 25-32; Wolfgang Achtner, Stefan Kunz & Thomas Walter, Dimensions of Time: The Structures of the Time of Humans, of the World, and of God, tr. Arthur H. Williams, Jr. (Grand Rapids: Eerdmans, 2002), 9.
20) Norman H. Snaith, “Time in the Old Testament,” in F. F. Bruce (ed.), Promise and Fulfilment (Edinburgh: T. & T. Clarke, 1979), 176-179; R. E. Murphy, “History, Eschatology, and the Old Testament,” Continuum 7 (1970), 583-593; Westermann, Genesis 1-11, 458.
출처 -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97
참고 :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진단과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3
김정욱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V. 지구적인 환경문제 진단
인류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삶을 살아나가면 이 환경문제는 머지않아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현재 60억의 인구가 21세기 말에는 100억 내지 140억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지구의 경제규모는 지난 100년 동안에 50 배가 증가했다 35). 특히 2차 대전 이후에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 단지 50년 동안에 인구가 20억에서 62억으로 36), 지구 경제가 15 배 37), 화석연료의 사용이 25 배 38), 공업생산이 40 배 늘었다 39) 성장하지 않으면 파탄이 날 수밖에 없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구조 아래서는 지금과 같은 성장이 당분간은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21세기 말이면 지구 경제는 다시 10 배 혹은 50 배가 성장할 수도 있다. 경제규모가 10 배 커진다는 말은 생산을 10 배 많이 한다는 말과 같고 생산이 10 배 많아지기 위해서는, 인류가 지금과 꼭 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에너지와 자원이 10 배 더 필요하고 폐기물이 10 배 더 생기며 환경파괴행위도 10 배 더 커진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10 배, 혹은 50 배나 더 커진 경제를 뒷받침할 만한 에너지와 자원이 이 지구상에 있느냐 할 것 같으면 한 마디로 말해서 없다. 이러한 경제는 대부분이 재생이 불가능한 에너지와 광물자원 그리고 삼림, 흙, 바다 등으로부터 얻게 되는데 이러한 자원은 한정이 되어 있어서 언젠가는 고갈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지구가 지금보다 열 배나 더 커진 환경파괴행위를 감당할 수 있나 할 것 같으면 그것도 한 마디로 말해서 아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환경용량도 일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석유의 매장량은 지금대로 파내 쓰면 30년 쓸 것밖에 없고 더 찾으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희망 매장량까지 보태서 한 60년을 보고 있다. 그래서 2010년 이전에 생산량이 최고에 달했다가 2050년이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석탄도 2100년대에 이르러 고갈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40). 우라늄도 알려진 매장량은 25년 쓸 것밖에 없다. 희망 매장량까지 보태서 약 50년을 볼뿐이다 41).
에너지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원도 다 마찬가지이다. 선진공업국들이 처음에는 다 자국에서 나는 자원으로 산업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후진국으로부터 수입한 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고 지금은 후진국으로 있는 자원수출국들이 산업이 성장하면서 더 이상 자원을 수출할 수가 없게 될 때, 그 때 지구의 경제는 파탄이 나고 말 것이다. 로마클럽이 1972년에 발표한 ‘성장의 한계’에 의하면 알루미늄, 구리, 납, 아연, 텅스텐, 니켈 같은 광물 자원들의 알려진 매장량도 거의 석유, 석탄, 우라늄 정도에 지나지 않아 수십 년 정도 쓸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무한한 자원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한 가지 자원이 모자랄 때마다 과학자들은 대체자원을 찾곤 하지만 대체자원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끝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무한한 줄 알았던 물이나 흙까지도 유한하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절실히 깨닫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닥치게 될 환경의 변화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적외선을 흡수하여 지구를 따뜻하게 하는 기체들인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냉매로 쓰이는 CFC 등이 지난 100년 사이에 갑자기 늘어남으로 인하여 생기는 지구의 기후변화현상, CFC(chloro-fluoro-carbon: 염화불화탄소)의 사용으로 인한 성층권의 오존층 파괴, 과다한 벌목과 무리한 목축과 농업으로 인한 지구의 사막화, 삼림과 습지와 같은 서식지의 파괴와 남획으로 인한 생물의 멸종, 환경호르몬과 같은 독성물질의 축적으로 인한 생태계 교란 등이 지구의 앞날을 어둡게 한다. 21세기에도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이 계속 되고 그에 따라 에너지와 자원이 고갈되고 지구는 더워지며 사막이 늘어나고 오염이 축적되고 생물들이 죽어가고 생태계가 위협받을 때에 인간이 지금처럼 생존이 가능할 것인가? 답은 절망적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구의 경제가 무한정 계속 성장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지구가 크지 않고 가만있는데 지구의 경제가 어떻게 계속 커질 수가 있는가? 이 지구 생태계에서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성장하는 것은 암 밖에 없다. 암의 종말은 죽음이다.
VI.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국토환경 방안
국토는 단지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되고 환경생태학적인 측면에서 황폐해지지 않고 풍성한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안정될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한다. 경제정책은 때에 따라 변할 수가 있지만 우리 자손만대가 살아야 할 국토 생태계의 기본적인 골격은 변해서는 안 된다. 영구히 이 땅이 사람과 생물들을 부양하기에 부족함이 없이 풍성한 생태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변하지 않는 목표를 가지고 지켜나가야 한다. 이 목표는 국가의 어떤 정책보다도 우선순위가 앞서야 한다.
국토를 가꾸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곳이 산림, 갯벌, 농지, 세 곳이다. 산림은 육상 생태계를 지탱하는 기반이고, 갯벌은 해양 생태계의 기반이며, 농지는 사람이 먹고 살 식량을 생산하는 기반이다.
산림은 필요한 강수량을 얻고 적당한 하천용수를 유지하며 바람직한 수질을 유지하고 생물들에게 서식지를 제공하고 깨끗한 공기를 유지하고 기상을 적당하게 조절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지난 수천년간 역사상에 많은 고대문명국가들이 망해왔는데 그 나라들은 모두가 산림이 황폐해지면서 나라들도 같이 망해왔다. 산림을 어디에 얼마나 확보하고 가꾸어야 하는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확고한 목표가 세워져야 한다. 지금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산지개발은 다시 검토가 되어야 한다.
지난 수천 년간을 인류가 산림을 훼손해온 역사라고 한다면 지난 백년 동안에는 해양생태계가 급격히 파괴되어 왔다. 그 이유는 갯벌을 파괴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긴 해안선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다. 이 해안선만 잘 지키면 수산자원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서해안에다가 무턱대고 간척사업을 벌이고 공단을 조성해서는 안 된다. 지금 간척 예정지로 되어 있는 곳들은 대개가 만으로서 어족들의 산란지들인데 이들을 무분별하게 없앨 때 서해의 해양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평가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서남해안 어족의 약 2/3는 생애 주기에 한번씩은 반드시 갯벌을 거쳐야만 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간접적으로 갯벌과 연관되어 있는 어족까지 합치면 90% 이상의 어족이 갯벌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2).
하구에다가 무조건 둑을 세우는 것은 위험하다. 해양 생태계의 기반이 갯벌이고 갯벌 중에서도 가장 생산성이 높아 핵심이 되는 곳이 바로 하구 갯벌이다. 그런데 지금 서해안에는 하구가 거의 다 막아져 간척되었고 새만금 지역의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가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구 갯벌인데 이 갯벌도 사라질려고 한다. 지금 해운대를 비롯해서 많은 해수욕장에서 모래가 사라지고 있는데 이의 주된 이유도 하구에 둑을 세워 모래의 유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특히 서해안의 해수욕장들은 거의가 뻘밭으로 변해가고 있다.
농경지는 일정량을 반드시 확보해 놓아야 한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쌀 농사를 포기하고 대신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만 IMF를 맞으면서 이런 주장들은 쑥 들어갔다. 인류 역사상 도시국가들은 대개가 백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다 망했는데 그 이유는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계의 강대국들은 다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스위스나 이스라엘 같은 작은 나라들도 식량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태국, 러시아, 브라질 같은 나라들은 경제위기가 닥쳐 무역을 못하게 되더라도 농사를 지어먹고 살면 된다. 그러나 식량자급율이 25%도 안 되는 우리는 다 굶어죽게 되어 있다. 경제위기는 앞으로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너무 많고 땅이 좁아 농사는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꼭 그렇지 않다. 농사는 잘만 지으면 한 사람이 먹고사는데 200평이 필요 없다. 지금 식량자급율이 25% 미만이라 하지만 축산만 안 해도 자급율은 70%까지 쉽게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수입하는 식량의 대부분이 사료이기 때문이다. 담배나 술 같이 급하지 않은 농사를 줄이고 품종을 잘 계획하여 재배하면 훨씬 더 올릴 수 있다. 이스라엘은 전국토의 절반이 사막이고 나머지 절반도 강우량이 우리의 절반 밖에 안 된다. 그것도 비가 겨울에만 내리고 여름 농사철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물 사용량은 우리의 1/3도 안되어 1인당 하루 170 리터의 물로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로 쓰고 또 이 물로 농사까지 지어 식량이 자급자족하고도 남아 수출을 한다 43).
비록 쌀 농사가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갯벌을 간척해서 논을 확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식량에서 가장 생산이 잘 안되고 부족하기 쉬운 것이 단백질이다. 단백질이 가장 비싼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육지에서는 단위면적당 단백질 생산을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방법이 쌀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쌀 농사보다 훨씬 더 단백질을 많이 생산하는 방법이 수산자원을 얻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산자원은 비료나 농약을 칠 필요도 없고 밭 갈고 김맬 필요도 없고 해안선을 가만히 놓아두기만 하면 저절로 생기기 때문에 농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새만금 사업으로 28,000 ha의 농지를 만들더라도 여기에서 나는 농업 소득보다는 갯벌이 사라짐으로서 잃게 되는 어업 손실이 더 큰 것으로 평가된바 있다.
VII. 지속가능한 지역사회
그리고 각각의 지역사회를 국토의 전체적인 환경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재생 에너지에 기반하여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고, 자원을 순환하며, 환경을 깨끗이 지킬 수 있도록 생태학적으로 가꾸어 나가야 한다. 즉,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지역사회 안에서 최대한으로 공급하고 지역사회에서 나오는 폐기물도 그 안에서 최대한 처리를 하되 최소한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고 물질순환체계를 구축하고 환경오염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으로 지역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캘리포니아를 이상형으로 삼아 용도지역들을 멀찍이 띄어 놓고 각 지역들을 거미줄처럼 도로로 얽어 자동차로 다니게 하고 에너지와 자원을 무한정 투입하고 쓰레기는 딴 데다 갖다 버리는 그런 도시는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경제가 지구화된 지금 세상은 일면 편리한 점도 있으나 다른 일면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세상이다. 지구촌의 어느 구석에서 금융이나 에너지나 자원의 흐름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이는 우리나라의 지역사회에도 곧 영향을 미쳐 기능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곧장 우리나라의 위기로 이어졌고, 아시아의 위기가 세계를 위협했던 몇 년 전의 금융위기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런 판에 세계화를 부르짖고 우리나라의 구석구석을 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파랑에 휩쓸리도록 방치해 놓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지구화 혹은 세계화된 현실에서 다른 나라에는 위기가 닥치더라도 그것이 우리나라에는 그대로 전파되지 않도록 완충 혹은 차단장치를 잘 갖추어 놓는 것이 현명한 대책이다.
올바른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시작해야할 일은 지역사회의 규모를 줄이는 일이다. 도시가 지금처럼 천만 명이 넘는 규모가 되면 이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만들 수가 없다. 어느 정도의 인구가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에 적합한가에 관한 과학적인 답이 나와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에서 인구 20만명 정도의 도시 환경이 가장 살기에 쾌적하다는 평을 자주 듣고 있다. 환경친화적인 도시로 거론되고 있는 도시들도 대개 그 정도의 규모이다. 도시가 어느 정도 작아야만 주위의 농촌과 어우러져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고 순환형의 지역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 서울의 인구가 조선시대의 19세기 말 이전에는 항상 20만에서 일정하게 유지되었었다 44). 이 규모가 자원순환형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크기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도시 자체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외부로부터 식량과 에너지와 자원 등을 공급받아야 하고 또 폐기물을 내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도시로 식량과 자원을 공급할 수 있고 또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넓은 생산지를 끼고 있어야 생태학적으로 안정될 수가 있다. 도시에서 나오는 하수나 음식 쓰레기 같은 많은 폐기물들은 농지로 돌아가야만 할 것들이 많다. 농지에서는 그런 자원이 없어서 농토가 척박해지고 도시는 그런 지원이 낭비되어 오염이 발생한다. 그리고 농촌에서 발생하는 많은 쓰레기들도 그것을 재활용할 수 있는 산업시설들은 도시에 있다. 도시와 농촌이 공동체로 묶어져야 농촌은 농산물을 필요한 만큼 정성껏 생산하고 도시는 농촌이 생산한 농산물을 올바로 소비하게 된다. 그래서 자원순환사회를 만들려면 도시는 생산지인 농촌과 협동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사회라 하는 것은 도시와 농촌이 따로 독립적으로 지역사회를 만들기보다는 서로 연계하여 공동 지역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도시들이 광역화하면서 인근의 농촌을 행정구역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새로운 에너지원에 대비하여 지역사회는 교통체계를 개편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어떤 형태의 국토개발도 그에 따라 발생하는 교통수요를 공급해 주면된다는 방식, 즉, 공급위주로 교통문제를 해결해 왔으나 새 천년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방법이다. 첫째는 가장 교통 수요가 적도록 지역사회를 구축해서 교통을 가장 적게 이용하고도 불편 없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당이나 일산 같이 일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 bed town 을 만드는 방법은 환경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그리고 안산이나 창원 같이 자동차를 타야만 다닐 수 있는 도시도 적절하지 못하다.
그 다음은 가장 에너지가 적게 들고 오염이 작도록 교통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래서 지역사회 내에서는 자전거, 혹은 소형 자동차를 이용하고 지역사회간에는 기차(혹은 소형 자동차를 실을 수 있는 기차)를 중심으로 하는 교통체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자동차 연료로는 태양 에너지 혹은 수소 전지가 거론이 되고 있다 45). 이들 연료로는 자동차를 대형화하거나 고속화하기가 어렵다.
물질순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을 쓰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빗물도 지금처럼 되도록 빨리 배수해서 하천을 범람하도록 하여 홍수를 조장하기보다는, 되도록 많은 양을 지하로 흡수시켜 홍수를 막을 뿐만 아니라 지하수를 채우도록 해야 한다. 외국에 새로이 건설되는 도시 중에는 아예 우수관을 깔지 않고 자연배수가 되도록 시도를 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빗물을 시민들이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하천 옆의 유수지들은 단지 홍수를 막기 위해서 물을 가두어 둘 뿐만 아니라 모은 물을 처리해서 중수도로 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각 가정이나 빌딩들도 빗물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수도를 만들어 생활하수를 처리해서 쓸 뿐만 아니라 지하철이나 큰 빌딩에서 나오는 지하수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지금 30% 이상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상수관도 잘 정비하여 쓸데없이 많은 물을 멀리서 가져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역사회의 환경문제는 그 지역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지역사회도 다른 지역의 환경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역의 쓰레기는 그 지역 안에서 처리를 해야지 광역 쓰레기 처리장을 지어 딴 데다 부담을 안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녹지도 그 지역 내에서 그 지역주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지역의 환경문제는 그 지역 안에서 완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역사회가 혐오시설을 기피하고 환경파괴 행위를 반대할 때에 이것을 단순히 지역이기주의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것이 바른 환경정책이 못되기 때문에 그런 마찰이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환경문제는 지역 내 소수의 시민들이 불평을 할 때에 이를 해결해 줘야 한다. 만약 환경문제가 다수 시민들의 문제로 번질 때에는 이미 해결하기에는 늦기 때문이다. 지역의 환경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지역의 주민들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환경운동을 활성화해야 한다.
VIII.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인류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계속 나아간다면 인류의 앞날은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는 그 흐름이 너무나 도도하고 거세기 때문에 이 세대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듯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물결 따라 흐르지만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르듯이 산 믿음을 가진 교회는 세상 풍습을 따를 것이 아니라 망해가는 세상에 소망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잘못한다고 탓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 본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을 실천하고 새로운 지역사회를 가꾸어 나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세상이 경제적인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해서 교회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린벨트 같은데 땅 사다 놓고 규제가 풀리고 땅 값 오르기를 기다린다든지, 교회 헌금 수입으로 성공여부를 따진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입으로 아무리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다 헛일이다. 오히려 가장 소중한 땅을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시민들에게 녹지로 내 놓는다든지,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생태계를 구입해서 자연에 돌려준다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자 없는 은행을 운영한다든지 하여 세상의 경제적인 논리를 뛰어 넘는 그런 가치관을 교회가 실천으로 보여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세상이 할 수 없는 참신한 방법으로 보여 줘야 한다.
그리고 돈과 정성을 쏟는 곳도 세상 풍습과는 달라야 한다. 세상에서는 돈이 벌리는 곳에 그리고 사람과 생물을 죽이는 데에 온갖 돈과 정성을 다 쏟지만 교회는 달라야 한다. 선교사업에 돈을 썼다고 자랑하지만 실은 자기 교회에 성도들을 끌어 모아 자기 교회 키우는데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는 교회가 많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돈을 자꾸 긁어모아 자기 사업 확장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교회 건물 짓는데 돈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데 그래서 결국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남긴 것은 수많은 십자가와 교회 건물뿐이고 기독교 정신은 부패한 사회에 파묻혀서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교회는 사회를 위해서는 유익하지만 수익이 없는 그런 사업에도 열심히 투자를 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돈도 아니고 자기과시도 아니고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교회는 돈이나 재산이 나고 사랑을 모아두는 곳이 아니고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부동산 투기로 번 돈을 하나님의 축복인양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런 식으로 가만 앉아서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는 세상에 대해서 세금제도를 공평하게 하라고 큰 소리를 칠 수가 없다. 그리고 정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돈을 올바로 쓰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부터가 헌금을 바로 써야 한다. 성경이 십일조를 말할 때에는 내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거두어들인 십일조를 어떻게 써서 고아와 과부들을 구제하라는 것까지도 다 말하고 있다(신14:28-29). 교인들을 향하여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거두어들인 십일조를 올바로 쓰지 않는 교회는 도적질하는 교회이다.
교회가 세상의 잘못된 사회구조를 바로 잡는데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분야는 아마도 지역사회를 가꾸어 나가는데 있을 것 같다. 교회는 지역사회의 주민들이 적어도 매주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교회만큼 지역사회에서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교회는 지역사회가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고 또 지역사회의 주민들의 생활이 또한 지속가능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올바른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먼저 시작되어야 할 운동 중의 하나는 흩어지는 운동이다. 도시가 지금처럼 천만 명에 이르는 규모가 되면 이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가 되기에는 너무나 크다. 성경은 우리더러 항상 흩어지라고 하고 있는데 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떼로 모여서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고 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도시가 어느 정도 작아야만 주위의 농촌과 어울어져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고 순환형의 지역사회를 만들 수가 있다.
도시 자체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아니다. 외부로부터 에너지와 자원과 식량 등을 공급 받아야 하고 또 폐기물을 내 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도시로 식량과 자원을 공급할 수 있고 또 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넓은 생산지를 끼고 있어야 생태학적으로 안정될 수가 있다. 따라서 도시의 지역사회는 생산지인 농촌과 협동을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역사회라 하는 것은 도시와 농촌이 따로 독립적으로 지역사회를 만들기보다는 서로 연계하여 생활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도시교회와 농촌교회가 맺어져서 생산과 소비를 이어주고 순환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역할을 교회가 해야 할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서로 유대관계가 맺어져서 생산과 소비의 양태가 다 올바른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 자체도 지역사회 안에서 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재활용센터를 운영한다든지, 환경상품을 판매한다든지, 환경시설을 정직하게 운영하여 지역에 봉사한다든지, 환경교육을 한다든지, 그 밖에 교인들의 생활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활동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벌이는 이런 활동을 꼭 교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하여 기독인들이 땅의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겠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는 세상과 꼭 같이 돈과 권력을 따르고 거짓과 위선에 빠져있어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이 허망하게 파괴되어가는 땅을 구하는 사명을 교회가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가치관을 돌려야 한다. 나라의 경제를 우선시하고 부자가 되는 것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땅을 망치는 일에 앞장서고 협력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인 판단은 사물을 크게 왜곡할 수가 있다. 돈 가진 사람과 사업 시행주들이 경제성을 평가하기 때문에 대체로 이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경제성을 왜곡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효율성을 따지는 가치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자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금전적인 가치를 현재 시점에서의 가치로 환산하는 데에 있다. 이자 혹은 할인율은 현재를 중요시하고 미래를 무시한다. 지금과 같은 이자율로 경제성을 계산하면 우리나라가 백년 후에 통째로 망해도 현가로는 전혀 손해로 계산되지 않고 천년 후에 지구가 통째로 망해도 현가로 계산하면 하나도 손해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가치판단은 항상 미래의 환경파괴를 대가로 현재 돈벌이가 되는 그런 사업을 조장하게 되어 있다. 산을 깔아 엎고 갯벌을 간척하면 개발업자는 당장 큰돈을 번다. 그러나 나라는 결국에는 망하게 되어 있다. 경제성을 평가해서 할 일 안 할 일을 정해 나가면 결국은 지구는 망하게 되어 있다. 미래 세대는 이런 평가과정에 참여할 수도 없고 또 정책결정과정에 투표를 할 수도 없다. 경제적인 논리가 아니라 먼저 환경적인 논리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지구의 자원을 착취하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온 정성을 다 기울여 왔다. 그래서 크고 편리하고 빠르고 아름답고 비싼 상품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개발되었지만 환경적으로 타당한 상품들은 찾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 땅의 법칙에 맞게 환경적으로 올바로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도 과학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모를 만큼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연구할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과학기술의 목표가 사람들을 일 안하고 편하게 살도록 만드는데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 땅에서 환경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찾는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어야 한다.
IX. 맺는 말
오늘날의 환경문제가 ‘땅을 정복하라’는 기독교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한 16세기 영국의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이란 것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져야 하고 인간은 이 자연을 길들이기 위해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서 미국의 청교도들은 자연이 인간의 적이라도 되는 듯이 자연과 싸워 이기는 정신을 ‘개척정신’이라고 하여 미덕으로 기렸던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제일 먼저 내린 명령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생물을 다스리라’이다. 많은 사람들은 땅에 ‘충만하라’ 했으니 땅이 비좁도록 자식을 많이 낳아 퍼뜨리고, ‘땅을 정복하라’ 했으니 백두산이고 한라산이고 다 불도저로 깔아 엎어 버리고, ‘생물을 다스리라’ 했으니 생물을 다 잡아 먹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이 땅에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다고 한데서 잘 나타나듯이, 인간이 땅을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성경에 없다. 히브리 원어에서 ‘충만하라’는 것은 채워라, 충족시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땅이 제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순리대로 채워주라는 것이다. 우리가 땅의 필요를 채워 주면 땅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준다는 뜻이다. 또 ‘정복하라’는 것은 히브리 원어에서 가꾸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땅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면 우리의 삶도 아름답고 풍성하게 되고 북 아프리카나 북한 같이 땅을 황폐하게 만들면 우리의 삶도 황폐하게 된다는 뜻이다. ‘생물을 다스리라’고 한 것은 생물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보살피면 우리의 삶도 보살핌을 받는다는 뜻이다.
지금 이 땅의 많은 기독인들이 큰 착각들을 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만 열심히 일하면 할 일을 다 한 줄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바깥 세상을 향하여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들을 전도하고 구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을 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착각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막 16:15, 롬 8:21, 골 1:23). 이 땅이 오염되고 그 안에 피조물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천만이나 되는 기독인들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야 참다운 기독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들에게 진정 기쁜 소식은 인간의 죄악으로 고통 받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도록 실천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순리대로 이 땅을 가꾸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파괴되어 가는 이 땅을 바로잡아 후손들에게는 우리가 물려받았던 것보다 더 나은 환경을 물려 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이 땅에서 생존할 뿐만 아니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길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르는 길이다.
참고문헌
1) 금표(禁標)는 돌에 금표라고 쓰고 그 아래에 법규를 새겨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마을에 세워 둔 비석 같은 것이다. 환경청, 환경보전의 길, 1990, p. 13.
2) 이숭녕, 한국의 전통적 자연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5, p.201.
3) 내무부, 자연보호, 1978.
4) 최창조, “최창조의 땅의 눈물 땅의 희망: 12. 금수강산 그린벨트” 한겨레 신문, 2000. 2. 24, p.21; 환경청, 앞의 책.
5) 구약성경, 신명기, 25장 3절.
6)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Seoul Metropolitan Administration, 1988, p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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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Kim, Jung Wk, Growth-Oriented Economic Development and Its Environmental Consequences in the Republic of Korea: Focusing on the National Policy Projects, Proc. 4th. Asia-Pacific NGOs Environmental Conferenc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1999, pp. 27-39.
11) Kim, Ji-Hyun, Consumption Patterns as an Emerging Contributor of the Environmental Degradation in Korea: Focusing on the Generation of CO2 and SO2 Emissions, Ph.D. Dissertation, Graduate School of Environmnetal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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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Kim, Jung Wk, 앞의 논문, 1999.
15) 김종달, 에너지 수요관리강화를 위한 중.장기 정책방안 연구,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보고서 94-07, 1994, p.44.
16) 건설교통부에서 제시한 이 수치는 물사용량이 크게 부풀려 있어서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를 근거로 댐건설계획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에 이 수치를 그대로 인용한다(건설교통부, 수자원장기종합계획(1997-2011), 1996).
17) 건설교통부, 수자원장기종합계획(Water Vision 2020), 2001.
18) Viegand, J, “Implementation of Energy Efficiency Measures in Denmark towards Sustainability”, 지속가능한 국토환경의 보전 및 개발전략을 위한 국제 세미나 논문집,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개관기념 세미나, 2000. 5.
19) Wang, Y.D., Byrne, J, Kim, J.W. et al, 'Less Energy, a Better Economy, and a Sustainable South Korea: An Energy Efficiency Scenario Analyis', Bulletin of Science, Technology & Society, 22(2), 2002, pp.110~122.
20) Lloyd, A.C., 'The Power Plant in Your Basement', Scientific American, 28(1), July, 1999, pp 64~69.
21) 김정욱, “영종도신국제공항 건설사업: 무엇이 문제인가?”, 대한토목학회지, 42(1), 1994, pp. 93~105.
22) Dasgupta, M. et.al., Impact of Transport Policies in Five Cities, Transport Research Laboratory, 1994.
23) 새만금사업환경영향공동조사단, 새만금사업 환경영향공동조사 결과보고서(수질분과), 2000.
24) 새만금 사업환경영향공동조사단, 새만금사업 환경영향공동조사 결과보고서(경제성분과), 2000.
25) 유근배, “서해안 간척사업과 환경문제”, 서울대학교 사회정의연구실천모임 세미나 발표자료, 1991.
26) 새만금사업환경영향공동조사단, 새만금사업 환경영향공동조사 결과보고서(환경영향분과), 2000.
27) 건설교통부, 수자원 장기 종합계획(1997-2011), 1996, pp. 18~85.
28) 건설교통부, 수자원장기종합계획(Water Vision 2020), 2001, p.34.
29) 전영신,심재면,김철희,김병곤, “장거리 수송 모형”, ‘대기관리모형연구’ 교과목 report, 1993.
30) 우정헌, 「동북아 월경성 대기오염 해석을 위한 통합모형체계의 개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1999.
31) The Korea Herald, “Scientists say coal fumes poisoning millions in China”, April 6, 1999.
32) 강동근, 「동북아시아 대기오염물질의 장거리 이동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3.
33) 김태엽, 「중국의 아황산가스 배출이 한반도의 대기오염에 미치는 영향」,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3.
34) 환경부, 「환경백서」,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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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United Nations, World Population Prospects, the 1998 Revision, New York, UN, December, 1998.
37) World Bank, Development and the Environment,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38) Brown, L., et al, State of the World 1994, A Worldwatch Institute Report on Progress Toward a Sustainable Society, Norton, 1994.
39) Curran, T.P., “Sustainable Development: New Ideas for a New Century”,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특강 강의 원고, 2000. 3.
40) 김영길 외, 자연과학, 생능, 1990, pp. 378-382.
41) 통상산업부, 한국전력공사, 1995년 원자력발전백서, 1995, p. 108.
42) 유근배, 같은 글, 1991.
43) Giora,A., “Water Resource Management Pracyices in Israel towards Sustainability', 지속가능한 국토환경의 보전 및 개발전략을 위한 국제 세미나 논문집,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개관기념 세미나, 2000. 5.
44)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Seoul Metropolitan Administration, 1988, pp. 2~4.
45) Appleby, A.J., The Furure of Fuel Cells: The Electrochemical Engine for Vehicles, Scientific American, 281(1), 1999, pp. 58~63.
출처 - 2004. 11. 27.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진단과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2
김정욱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III. 국책사업들과 환경문제
1. 발전소 건설사업
우리나라의 중장기 전력수급계획에 현재 19기 있는 원자력 발전소를 앞으로 2020년까지는 14기 더 건설할 예정으로 있다. 원자력 발전소 외에도 영흥도에 세계최대의 석탄발전소 단지를 계획하고 있고, 이들 발전소와 아울러 전국 곳곳에는 고압송전탑이 세워지고 고압송전선 깔리고 있다. 이들 발전소가 건설되면 2020년까지는 전기 생산이 두 배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비는 1기당 3조원 이상이 들기 때문에 이들 발전소를 짓는 데는 총 40조원 이상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우리보다 소득이 훨씬 높으면서도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은 적은 선진국들이 모두 앞 다투어 에너지 사용량을 지금보다도 더 줄이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에너지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이런 에너지 과소비를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해 나가서는 나라의 앞날이 크게 우려된다. 덴마크는 1970년대에 석유파동이 일어난 이후 줄곧 에너지 효율개선과 절약정책을 편 결과 지난 30년간 큰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사용량이 하나도 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재생 에너지가 전체 에너지의 12%를 점한다. 그리고 앞으로 2020년까지는 에너지 사용을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고 에너지의 전량을 재생 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18). 일본도 1970년대에 산업구조조정을 하면서 에너지와 자원을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쓰도록 개조하면서 환경오염문제를 해결하고 또 동시에 경제가 크게 일어서고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1970년대에는 일본도 큰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사용이 늘지 않았다. 결과로 일본은 지금도 선진국 중에서도 에너지 효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에너지를 거의 전량 수입하는 나라가 에너지 효율은 OECD에서 가장 낮고 국산인 재생 에너지 사용율은 0.2% 밖에 안 되고 그러면서도 에너지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이는 방법만 찾고 있으니 나라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한전이 발전소 짓느라고 진 외채가 300억 달러에 이르는데, 1997년에 외환위기를 맞게 된 데 대해서는 바로 한전도 크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때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IMF에서 빌린 돈이 600억 달러가 되지 않는다. 우리도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는데 투자를 하고 노력을 하면 이룰 수 있다. 조명기구, 산업체의 전동기, 건물의 냉난방 등 가정, 산업, 상업, 교통 등의 부문에 현재 상업화가 되어 실용화되고 있는 에너지 절약 기술만을 도입하더라도 2020년까지는 우리나라 전체 에너지 수요의 29%를 절약할 수가 있다 19). 이 에너지를 절약하면 50조원이 드는 17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지을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에너지 효율을 향상시키는데 드는 투자비는 연간 5조원 정도인데, 이 투자비는 에너지 절감으로 인하여 5년 안에 회수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를 많이 낭비하는 나라가 미국인데,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에 의하면, 앞으로 건물의 냉난방에 쓰이는 에너지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고 교통 에너지는 1/3 수준으로 줄이는 것이 미국의 목표라고 하였다. 이 담화는 백악관을 친환경적으로 리모델링 한 후에 백악관의 에너지 사용이 절반으로 줄은 것을 확인한 후에 발표한 것이다.
지금과 같이 대형 발전소를 국토 끝에다 짓고 큰 소비처는 또 다른 국토 끝에다가 만들어 전기를 보내면 에너지 손실이 대단히 크다. 송전손실까지 보태면 에너지 효율을 29%까지 올린 예가 없다. 그러나 에너지를 필요한 곳에서 만들어 쓰면 그 효율을 70% 이상으로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20). 재생 에너지는 그 생산 밀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멀리다 큰 공장을 지어 멀리 대량 수송을 하기가 어렵다. 필요한 곳에다 만들어 써야 한다. 그리고 에너지 효율을 올리고 에너지원을 다양화하여 서로 보완할 수 있도록 분산형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에너지 정책에 가깝다.
2. 경부고속철도
경부고속철도는 서울과 부산을 두 시간에 잇기 위한 사업이다. 하루 30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현재 1시간에 한 대 정도 다니는 열차를 앞으로는 지하철 타듯이 5분에 한 대씩 다니게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이 고속철도의 승객은 7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승객 30만 명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속 350 km로 기차가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고속철도를 위해서 원자력 발전소를 하나 더 가동해야 할 것이다. 서울에서 서울까지 두 시간 걸리고 부산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걸리는 나라에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리고는 고속철도를 만들고는 중소도시의 교통이 오히려 대단히 불편해졌다. 그래서 국토의 균형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사업비도 애초에 5조원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20조원도 훨씬 더 든 사업이다. 건설되고 난 후에는 운영하는 데에도 큰 재정적인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런 고속철도를 가진 나라는 세계에서 일본, 스페인, 프랑스, 독일 정도인데 서울-부산 정도의 거리이면 편도 요금이 10~15만원에 이른다. 우리가 이들 나라보다 건설비가 결코 싸지 않았다. 현재 경부간 편도요금을 4만원 정도로 받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부족분은 정부에서 보조를 해 주어야 한다. 그 많은 승객에게 정부가 이런 보조를 해주려면 얼마나 많은 예산이 여기에 들어가야 할 것인가?
그것보다는 서울-인천, 서울-수원, 부산-울산, 부산-마산 간에 급행전철을 놓는 것이 훨씬 더 급하고 유용하다. 서울-부산, 서울-광주 간에는 복복선 철도를 놓아서 지금보다 기차가 좀더 자주만 다니게 해주면 된다. 그것은 고속철도에 비하면 돈도 얼마 들지 않고도 교통문제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고 대기오염을 개선하는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3. 인천국제공항
인천 국제공항은 동아시아의 중심공항으로 연간 1억 명을 수송할 수 있는 공항으로 계획하고 있다. 이 규모는 현재 세계 최대 공항인 시카고의 O'Hare 공항보다 두 배나 크다. 원래 계획을 하면서 정부에서 홍보하기로는 인천에서 미국이나 유럽을 2-3 시간에 나를 수 있는 극초음속 초점보기를 위한 공항이라고 국민에게 홍보를 했으나 실제는 그런 공항이 아니다. 지금 항공 교통의 추세는 대륙의 중심공항에서 갈아타는 것이 아니라 출발지와 목적지 공항간을 직접 연결하는 것이다. 인천 국제공항은 대륙의 중심공항이기 이전에 먼저 우리나라의 중심공항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종도는 우리나라의 중심공항이 되기에 부적합한 지역이다. 아무것도 없는 국토의 서북쪽 끝에다가 세계에서 제일 큰 공항을 만들어서 도로며 철도며 전기며 물이며 모든 부대시설들을 완전히 새로 건설해서 공급하고 그 많은 승객들을 오가게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의 낭비가 따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국토를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원은 이 인천국제공항이 2032년까지도 적자를 면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21).
국제공항은 첨단산업의 발달에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공항을 제대로 이용할 수가 없는 대전, 청주, 광주, 대구 같은 곳에는 정부가 계획한대로 첨단산업을 발달시키지를 못하고 있고, 인천 공항 인근에 이들의 입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지를 못하고 수도권 집중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김포공항을 확장하고, 이미 국제공항으로 착공했다가 축소한 청주공항을 다시 확장하여 두 공항을 보완적으로 사용하면 훨씬 경제적이고 환경피해도 적다. 충청권으로 행정수도가 이전되면 어차피 그 지역에도 공항이 필요하기 때문에 청주공항을 쓸 수 있도록 하면 경제적이다. 아니면 지금 공군 비행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오산이나 수원의 공군기지를 국제공항으로 활용하든지, 아니면 오산이나 수원의 공군기지 인근에 공항을 만들었다가 통일 후에 공군기지를 흡수하는 방안 등을 고려했더라도 기존의 시설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건설비도 영종도공항의 1/5 내지 1/10 미만으로도 충분하고 환경피해도 훨씬 적다.
4. 고속도로 건설사업
정부는 또 자동차로 전 국토를 반나절에 갈 수 있도록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있다. 그래서 국토를 남북으로 달리는 고속도로를 7개,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9개, 소위 ‘7x9’ 고속도로망을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각 도시에서 이들 고속도로로 연결하는 도로가 곳곳에 뚫리고 있다. 이렇게 도로가 많이 건설되는 탓에 우리나라의 자동차 대당 주행거리가 선진국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이런 교통정책이 결국 에너지 소비를 촉진하고 환경오염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정부의 교통정책은 자체적으로 모순에 빠져 있다. 공항은 마치 국민들이 모두 비행기를 탈 듯이 계획하고 있고, 철도는 철도대로 또 국민들이 모두 철도를 탈 듯이 기대하고 있고, 고속도로를 계획할 때에는 또 모두가 자동차를 탈 것으로 보고 계획을 한다. 교통은 많이 다니지 않고도 해결되도록 국토를 계획해야 교통이 편리하고 경제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통계획은 쓸데없이 많이 다니도록 유도하고 있어서 이것이 바로 국토를 고비용-저효율 구조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도로는 아무리 많이 뚫어도 도로가 막힐 때까지 차를 몰고 가기 때문에 자동차 도로로서는 교통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좋은 도로가 뚫리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더 멀리 가서 살려고 한다. 도시내 교통혼잡을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도로를 더 뚫는 것이 아니고 주차장을 줄이고 주차비를 올리는 것이다. 많은 연구결과들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22). 교통은 공급을 잘 해주는 것이 잘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적게 다니고도 해결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통문제를 가장 잘 푸는 방법이다. 도시간은 철도, 도시 내에서는 도보, 자전거, 발자동차, 에너지 절약형 소형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대기오염을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고속도로로 전국을 뚫기보다는 철도망을 깔아야 한다. 백만명을 1 km 수송하는데 승용차는 30.8 TOE(석유환산톤)가 들지만 전기철도는 3.5 TOE 밖에 들지 않아 철도를 이용하면 에너지 사용량을 1/9로 줄일 수가 있다.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의 선진국들의 장래 교통계획도 바로 이렇다.
5. 간척사업
시화나 새만금 같은 간척사업들은 우리나라에서 필요하다기보다는 수자원공사나 농어촌진흥공사 같은 회사가 있기 때문에 진행되는 사업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에 물을 1년이고 2년이고 담아 둘 수 있는 담수호를 만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고인 물이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지간히 깨끗해 보이는 물이라도 일단 담아 두면 쉬 썩게 마련이다. 시화호나 새만금호는 유입수를 아무리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깨끗하게 처리한다 할지라도 이들 유역의 여건상 담수호 물은 썩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런 물을 이용해서 농업용수나 공업용수로 쓰겠다는 것도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새만금사업 공동조사단의 보고서에 의하면, 새만금호는 그대로 막으면 시화호보다도 수질이 더 나빠지고, 1조원 가까운 예산을 써서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책을 세우고도 우리나라의 어떤 담수호보다도 수질이 더 나빠질 것으로 예측된 바 있다. 특히 만경강 유입의 만경호 수질은 시화호의 수질과 거의 유사할 것으로 예측되어 있다 23).
갯벌을 간척하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손실이 된다는 주장은 벌써부터 있어 왔다. 간척해서 비료 주고 농약 뿌리고 씨 뿌리고 밭 갈고 해서 열심히 농사짓는 것보다는 갯벌을 그대로 두고 저절로 나는 것을 잡기만 하면 되는 수산업이 훨씬 더 쉽고 소득도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만금공동조사단 보고서에 의하면, 새만금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은 소득은 연간 505억원이나 이 갯벌을 농지로 조성할 때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연간 49억원이라고 되어 있다 24). 우리나라 서해의 물고기는 90 % 이상이 갯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25). 그리고 밀물 때 잠기고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을 없애고서는 아무리 많은 하수처리장을 지어 봤자 헛일이라는 것도 잘 알려지고 있다. 새만금 갯벌 2만 ha가 하루에 10만톤을 처리하는 하수처리장 40개의 기능을 한다고 알려지고 있다 26). 간척을 하고 난 뒤에 바닷물 흐름의 변화로 인하여 일어나는 해안선의 변화도 큰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해수욕장들이 지금 모래가 사라지고 있고 특히 서해안 지역에서는 뻘까지 퇴적하여 해수욕장으로서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그밖에도 해일을 막아 준다든지, 해안의 침식을 방지한다든지, 기타 심미적, 생태학적인 여러 기능들을 생각할 때에 간척은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간척은 우리 국토를 규모 있고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간척공사 그 자체로 생존하는 회사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다. 새만금 사업은 식량안보를 위한다며 근 20년에 걸쳐 6조원의 예산을 들여 28,000 ha의 농지(순수 논 18,000 ha)를 조성한다는 사업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매년 30,000 ha 의 농지를 다른 용도로 전용하고 있다. 그리고 새만금 사업 강행을 발표하고는 이후에 곧 쌀이 남아돈다고 발표하였고 이어 과잉생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3만 ha의 농지를 유휴농지로 돌리겠다고 발표하였다. 지금 논이 평당 3-4 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새만금 농지는 평당 조성비가 7만원에 이르러 그 경제성은 계산해보나 마나이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를 원하는 전라북도의 도민들은 정부가 거듭거듭 농지로 조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해도 이를 믿지 않고 복합산업단지가 될 것으로 믿고 있다. 이 간척지를 복합산업단지로 조성하기 위해서는 총공사비가 27조원에 이른다. 이 산업단지의 평당 조성비는 96만원에 이른다. 이래서는 산업단지로서도 타당성이 없다. 지금 그 보다 훨씬 싼 단가로 산업단지로 조성해 둔 곳도 입주업체가 없어서 쉬는 공단이 많이 있다. 갯벌은 그냥 가만히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
6. 다목적댐 건설사업
1996년에 건교부에서 만든 수자원 장기 종합계획(1997-2011)에 의하면 당시 10개의 다목적댐에서 우리나라 전체 물 사용량인 연간 300억 톤의 약 31%에 해당하는 93억 톤의 물을 공급하고 있는데, 앞으로 2011년까지는 20개의 다목적댐을 더 건설하여 65억 톤의 물을 더 공급하겠다고 하였다. 이 계획의 배경에는 우리나라의 물수요량이 현재 연간 300억 톤에서 2011년에 367억 톤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하천으로부터 공급할 수 있는 양이 200억 톤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늘어난 수요를 채우기 위하여 댐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27). 이것이 2001년에 세워진 수자원장기종합계획에 의하면, 물 수요가 2011년에 374억 톤, 2020년에는 381억 톤으로 되어 있어서 지난번 계획과 거의 유사하다 28).
이는 2011년까지 국민 한 사람이 생활용수로 하루에 500 리터, 공업용수로 260 리터를 사용하여 총 760 리터를 쓸 것이라는 계산 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계에 이렇게 물을 많이 쓰는 나라는 없다. 미국이 하루에 625리터를 쓸 뿐 독일은 공업용수까지 보태서 200리터, 이스라엘은 여기에다 농업용수까지 합하여 170 리터를 쓸 뿐이다.
건교부는 재작년에 홍수 피해가 나자 곧 댐을 여러 개 더 지어 홍수를 막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댐이 부족해서 홍수피해가 난 곳은 한 곳도 없다. 둑을 보수를 안 해서 터졌다든가, 펌프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든가, 산을 함부로 훼손하여 산사태가 났다든가, 하천을 침범하여 물이 제대로 못 흐르도록 만들었다든가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지난 몇 십년간 정부에서는 홍수대책을 위해서 댐을 만든다고 수십조 원을 썼으나 홍수피해는 더 커졌다. 그 동안 홍수를 부추기는 공사를 더 열심히 추진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여름에 비가 집중되기 때문에 대형 댐을 만드는 등의 대책이 필수적이라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보다 위도가 아래인 나라들은 여름, 혹은 우기에 비가 우리보다 더 많이 온다. 그들이 모두가 다 큰 댐을 가지고 홍수와 가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도 여름에는 우리보다 더 큰비가 온다 그러나 우리처럼 큰 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 소규모들이다.
큰 댐은 작은 홍수나 작은 가뭄은 잘 관리한다. 그러나 잘못되면 큰 재난의 원인이 된다. 유사시에 이런 큰 댐들이 붕괴되거나 폭파되는 때에는 큰 재난을 불러온다. 큰 댐을 짓는데 돈을 쓰기보다는 물을 절약하는 데에 투자를 하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큰 댐들은 수질관리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큰 댐을 만들어 부영양화가 일어나지 않는 호수가 없다. 그리고 생태계와 기후의 교란이며 이런 등의 이유로 대형댐은 지속가능한 발전 방안이 아니다. 물의 수요를 줄이고 유역의 물순환을 잘 관리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방법이다. 동강댐을 지어서 얻겠다는 물은 우리나라 1,000만 가정에 절수용변기 한 대씩만 설치하면 그 물을 얻을 수가 있다. 동강댐을 짓는데 드는 예산이 1조원이라고 했는데(정부에서 1조원이라고 하면 적어도 3조원 이상이 들어가는 것이 우리나라의 관례다), 절수용변기 1,000만 대를 다는 것은 1,000억이면 충분하다. 댐을 짓는 것은 아주 쉽다. 국민들은 모두 가만히 있고 수자원공사 혼자서만 열심히 일하면 된다. 그래서 외자를 빌려서 댐을 짓고 물 값을 받아서 운영하면 된다. 그러나 상수관 물이 안 새도록 막고, 우수 유수지에 받아놓은 빗물을 이용하도록 하고, 중수도 시스템 만들고, 기업들은 무방류 시스템을 도입하고, 절수용품 보급하고, 이런 일을 하자면 지방 공무원들, 지역 주민들, 지역의 중소기업들이 모두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적은 돈으로도 경제를 튼튼히 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고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세계경제포럼에서 2002년에 세계 각국의 환경지속성지수를 발표를 했는데 우리나라는 142개국 중 136위를 했다. 그 이유는 인구 일인당, 국토 단위면적당 에너지와 자원 소모와 환경오염배출이 세계에서 가장 많았는데 반하여 환경개선의지는 가장 약했기 때문이다.
IV. 동북아 지역의 환경문제 진단
21세기에 우리나라가 겪게 될 환경문제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동북아시아 지역의 환경문제가 바로 우리나라의 환경문제로 직결된다. 동북아시아 지역은 현재 세계에서도 가장 경제밀도가 높은 곳 중의 하나이다. 이 지역에서는 대기오염물질의 월경이동, 해수의 오염, 기업의 이전과 이에 따르는 환경오염문제, 기타 이 지역의 활발한 경제성장과 관련된 각종 환경문제들이 지금 산적해 있다. 이 지역은 다음 세기에 이르러서 계속 성장을 이룰 것으로 예상이 되기 때문에 환경문제도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이 지역에서는 서풍이 주풍이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이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쉽게 이동된다. 예를 들면 황하 상류의 알라샨(Alashan) 사막이나 고비 사막 혹은 타클라마칸(Taklamakan) 사막에서 발원한 황사가 단지 3, 4일이면 우리나라와 일본에 도달한다 29). 최근에 이르러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어서 다음 세기이면 중국은 충분히 세계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엄청난 양의 대기오염물질을 배출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2,000 만 톤 정도의 아황산가스를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0). 이 양은 우리나라 SO2 배출량의 약 15 배에 해당한다. 과거 우리나라가 그랬듯이 중국도 경제성장율과 비슷한 속도나 혹은 그것을 앞질러 오염배출량이 늘어난다면 이는 21세기에 이르러 동북아시아 지역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에너지의 대부분을 자국에서 생산하는 석탄에 의존하고 있는데 중국의 석탄은 열량은 낮고 각종 중금속을 비롯한 오염물질의 함량이 높아 선진국에서는 그대로는 쓸 수 없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1).
이 지역에 부는 바람의 특성을 분석해 볼 것 같으면 중국의 대기오염은 모든 계절을 통 털어서 주로 우리나라로 불어오게 되어 있다 32). 중국에서 발생한 아황산가스가 산성비나 혹은 먼지에 흡수되어 우리나라에 강하하는 양은 전체 발생량의 1-2% 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서 33)이는 우리나라의 대기오염과 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황해는 남북의 길이가 약 1,000 ㎞, 동서의 폭이 최대 700 ㎞, 면적이 약 400 ㎢, 평균수심이 약 44 m, 체적이 17.6 ㎦ 이다. 이 바다는 반폐쇄 해역으로서 표면수와 심층수가 해류에 의하여 활발하게 섞인다. 이와 같이 황해는 수심이 얕고 용적이 작은데다가 비교적 정체된 반폐쇄 해역이기 때문에 오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이 적다. 그런데 황해 연안 일대는 지금 우리나라와 중국이 앞 다투어 다음 세기를 대비하여 활발하게 개발하고 있기 때문에 해양오염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황해에 오염을 배출하고 있는 주요 오염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수도권의 오염을 실어 나르는 한강을 꼽을 수 있고 중국에서는 엄청난 양의 토사와 다른 오염물질들을 실어 나르는 황하와 양자강과 그리고 연안에는 텐진(天津), 다렌(大蓮), 칭다오(靑島), 샹하이(上海) 등의 도시들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한강, 금강, 영산강을 통해 황해에 배출하는 BOD의 부하가 1년에 약 50만톤이다 34). 지금 중국에서는 재래식 변소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앞으로 수세식 변소가 보급되고 하수도가 설치되면 분뇨와 각종 오수가 황해로 흘러들 것이다. 그 때 1인당 배출량이 우리나라에 접근해서 우리보다 약 30배 많은 인구로부터 약 30배 많은 오염물질을 황해에다 배출하게 된다고 가정하면 황해에 유입되는 BOD의 총량은 1년에 약 1500만 톤에 이른다. 이는 황해 물 1㎥ 에 매년 850g의 BOD를 부하시키는 셈이 된다. 물 1㎥ 에 매년 50g의 BOD를 부하시킨 시화호의 물이 어떻게 오염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황하를 통하여 황해로 흘러드는 토사도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황하 하구에는 이들 토사로 인하여 매년 거의 1 km 씩 바다가 메워지고 땅이 생겨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예측들은 환경정책상에 뚜렷한 어떤 방향과 목표가 있지 않으면 새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아니라 21세기에 당장 우리나라의 환경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출처 -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진단과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1
김정욱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I.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환경윤리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선조들은 자연에도 다 이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 이치에 따라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자 노력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환경을 파괴하거나 오염시키는 행위를 천벌을 받을 죄악으로 알아왔고 그런 행위에 대해서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큰 형벌로 다스려 왔었다. 옛날에 공자가 제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어느 나라에서는 재를 버린다고 곤장 스무 대를 치는데 이는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닙니까?” 공자가 대답하기를, “재를 안 버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인데 이런 쉬운 범죄를 엄한 벌로 막아서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옛날 마을에서 발견되는 돌 판에 ‘棄灰者 杖三十, 棄糞者 杖五十’(기회자 장 30, 기분자 장 50 :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30대, 똥을 버리는 자는 곤장 50대), 혹은 ‘棄灰者 杖八十, 放牲畜者 杖一百’(기회자 장 80, 방생축자 장 100 : 재를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 가축을 방목하는 자는 곤장 100대) 이라고 새긴 금표(禁標)가 발견된다 1). 똥과 재를 버린다는 것은 이들이 다 유용한 거름 자원인데 이 자원을 낭비하고 강이나 길에 버려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축을 방목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행위도 엄한 벌로 다스렸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나무에 대하여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집을 짓거나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을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2). 그리고 산림을 보호하되 특히 소나무 숲을 가꾸기 위해 「송금작계절목(松禁作契節目)」이라는 규정을 두고 주민들은 나무를 심기 위해서 계(契)까지 모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만든 숲을 송계림(松契林)이라고 불렀다 3). 지금 우리나라에 그린벨트가 있지만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제도가 있어서 특별히 보호해야할 산림을 금산(禁山) 혹은 봉금구역(封禁區域)으로 묶었었다. 서울 주변의 산들은 대개 금산으로 지정되었고 지방에서도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설정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금산에서 벌목을 하거나 채석을 한 자는 곤장 90대에 벌목한 수만큼 나무를 다시 심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엄격하게 시행하여 세조 때 기록에 의하면 금산의 소나무 한 그루를 불법으로 베어내는 대가는 곤장이 100대, 두 그루면 곤장 100대를 친 후에 군복무를 시키고, 열 그루면 곤장 100대를 친 후 오랑캐 지역으로 추방하기도 했었다 4).
모세의 율법에서 곤장을 40대 이상 때리는 것을 금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형벌이 얼마나 엄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5). 곤장은 20대만 해도 공자의 제자들이 분개할 정도로 엄한 형벌이고 100대면 거의 죽는 것으로 알기 때문에 더 때릴 수도 없을 정도로 극형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나무를 함부로 베면 천벌을 받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제사를 먼저 지내고야 나무를 베었었다. 나무와 산림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예전에는 산에 올라가면 산을 더럽힐까봐 오줌도 누지 않았고 똥은 싸들고 내려 왔다고 한다. 이런 풍습은 지금도 일부 전통을 존중하는 노년층에 전해지고 있다.
환경범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냉엄하고 형벌이 무거웠기 때문에 환경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은 보통사람들로서는 감히 생각하기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문화는 자원을 철저히 아끼고 재활용하며 환경오염을 최소화하도록 생태학적으로 짜여져 있었다. 가정생활에서는 버리는 쓰레기가 생기지 않도록 집집마다 마당을 두어 가축을 기르고 텃밭을 집 가까이 두었었다. 그래서 작은 곡식 알갱이는 닭이 쪼아 먹고, 큰 음식 덩어리는 개나 돼지가 먹고, 설거지한 개숫물은 소여물 삶는데 쓰고, 재나 분뇨는 농지에 비료로 쓰고, 버리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뜨거운 물을 마당에 붓는 것도 땅을 죽인다 해서 용납되지 않았으며 그 밖의 거의 모든 자원이 재활용되었었다. 제주도에서는 인분마저도 돼지에게 사료로 먹일 정도로 자원의 재활용이 철저했다. 만약에 제주도에서 육지에서와 같은 재래식 변소를 만들었다면 투수성이 큰 지질의 특성상 지하수가 오염되어 물을 마시기 어려웠을 것이다. 쓰레기를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았었다. 쓰레기가 없었기 때문에 쓰레기를 국가에서 별도로 치운 적도 없었다.
취락이나 주택구조 자체도 생태학적으로 올바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산꼭대기나 경사가 급해서 생태학적으로 취약한 지역은 보존하고, 그 아래 경사가 좀 완만하지만 다른 용도로는 쓸 수가 없는 곳에 무덤을 두었다. 취락은 그 아래에 산을 북쪽으로 등지고 남향집을 지음으로 가장 에너지 효율적인 취락을 만들었다. 집 뒤에는 대나무 같은 나무를 심어 토사의 유실과 우물을 더럽힐 수 있는 오염물질들을 여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집 자체도 환경친화적이었다. 초가지붕은 썩으면 퇴비로 쓴다. 집을 짓는데 나무는 최소한으로 써서 산림자원을 아끼고 벽은 흙과 짚으로 만들어 보온과 습도 조절이 잘 되도록 만들었다.
특히 온돌은 어떤 난방장치보다도 열효율이 뛰어나고 오염이 작은 난방구조이다. 난방을 따로 하는 것도 아니고 아침저녁으로 밥만 지으면 저절로 난방이 되는 것이 온돌이다. 난방을 우리나라만큼 효율적으로 하는 나라가 세계에 없다. 일본은 두터운 이불에 더운 물통을 안고 자거나 화로를 피우는 정도가 고작이다. 유럽 사람들은 벽난로를 피우는데 이것은 열효율도 형편없고 실내 공기 오염이 심각하다. 유럽 사람들이 난로에 석탄을 태울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피해를 입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부 부유한 집에서는 유럽을 본 떠서 집에 벽난로를 달아 놓는데, 벽난로에 불을 때서 방을 데우자면 에너지 소모가 많고 실내공기 오염도 심해진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도시를 가장 농사짓기 좋은 평야에다 만들어 땅을 낭비를 하는데, 우리나라는 평야는 농사를 짓도록 그대로 아껴두고 도시는 평야 가장자리에 산을 끼고 건설하여 도시가 비대해지는 것을 막았다. 서울의 인구는 1660년에 20만에 이른 후 19세기말에 개방이 이루어지기까지 늘지도 줄지도 않고 항상 20만 명을 유지했다 6). 지금 유럽의 도시들이 환경친화적인 도시 인구의 규모를 20만 명 정도로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울도 주위의 환경에 무리를 주지 않고 환경적으로 건전한 도시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 인구 규모를 유지하지 않았나 하고 짐작이 된다. 도시에 필요한 땔감은 산림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인근 지역으로부터 반입되었고 도시의 분뇨는 인근의 논밭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물도 하천이나 지하수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지역사회를 이루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럽 사람들이 산 모습은 우리와는 전혀 달랐다. 유럽 사람들은 예전에 집에 변소도 없이 살았다. 집을 지으면 벽 하나에 두 집이 같이 지붕을 올려 짓는다. 유럽의 도시에 층수가 꼭 같은 건물들이 죽 늘어선 이유가 바로 벽 하나를 양쪽 집이 같이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을 지으면 마당을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마당이 없는 집에서는 변소를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유럽의 도시 사람들은 오랫동안 변소도 없이 살았다. 호화스럽기로 유명한 베르사이유 궁전에도 변소가 없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분뇨는 요강에 받았다가 길이고 하천이고 아무 데나 창 밖으로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재수 없으면 길 가다가 오물 벼락을 맞는 것이 예사였다고 전해진다. 중절모가 바로 이 오물 벼락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7). 영국의 어떤 도시들은 길 가운데를 아예 파놓고 오물을 그곳에 버리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길에 오물이 하도 많이 널려 있어서 오물을 밟지 않기 위해서 만든 신이 하이힐이라고 전해진다. 부인들은 외출할 때면 변소가 없기 때문에 곤란을 겪어야 했다. 유럽 여자들이 이상하게 크게 벌어진 치마를 입게 된 이유가 변소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치마를 입으면 아무 데나 앉는 곳이 바로 변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하천이라는 것은 냄새가 나서 귀부인들은 코를 막고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도시의 하천은 오물이 두텁게 쌓인 시궁창이어서 한 번 빠지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비해서 서울의 청계천은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말 그대로 깨끗한 물 그대로였다.
유럽의 도시에서 물을 그냥 마신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유럽에서 큰 전염병이 자주 돈 이유도 그곳이 대단히 불결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348년에서 1349년 사이에 페스트가 전염되었을 때에는 인도북부에서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전 인구의 1/3이 죽을 정도였다. 유럽의 도시에서는 맹물을 마신다는 것은 금기사항이었다. 유럽 사람들이 식사 때 포도주와 맥주를 통상 마신 이유도 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술을 안 마시고 물을 마시는 것은 처벌의 대상이었다 8). 근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도시들이 필요 이상으로 엄청난 규모의 하수도를 건설한 것도 물로 인한 전염병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90% 이상이 유럽 사람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인하여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미국에서 몇 명 안 되는 유럽의 이주민들이 전쟁도 안하고 그 큰 나라를 다 뺏을 수 있었던 이유도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옮겼더니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삼림도 제대로 보존이 되지 않았다. 집 짓고 땔감하고 목초지 만들기 위해서 일찍이 거의 다 훼손되어 수종도 몇 십 종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영국에는 600 종 정도의 식물이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최근에 많이 훼손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만여종에 이르는 다양한 수종들이 남아 있다.
옛날 우리나라의 지역사회는 하나하나가 생태학적인 단위로서 기능하여 태양만 있으면 돌아가는 그런 사회였다. 물질은 그 자체 안에서 완전한 순환이 이루어 졌고 폐기물이나 오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고대 문명국들은 땅이 거의 다 황폐해졌다. 중국의 땅도 산림이 황폐하여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사막으로 변했고 황하와 양자강은 하천 바닥이 인근의 지면보다 높아졌으며 농경지들도 많이 척박해졌다. 유럽의 육상 생태계도 그 모습이 크게 왜곡되어 있다. 미국의 농경지들은 그 좋던 땅들이 100년을 견디지 못하고 황폐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수천 년간 이 땅에서 농사짓고 살면서도 농경지와 산림이 비교적 최근까지도 잘 보존되어 왔는데 그 이유가 바로 우리 선조들이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21세기에 들어서 에너지와 자원이 고갈되어 가고 환경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어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때,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로부터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옛날과 똑 같은 삶의 양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과 철학을 배운다는 뜻이다.
II. 우리나라의 환경문제 진단
그러다가 우리나라는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추진하기에 이르러서는 환경윤리관이 완전히 뒤바뀌어 환경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국가적이 반역행위로 간주하였다. 부산수산대학교(지금의 부경대학교)의 원종훈 교수가 수산양식장의 환경오염도를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 대학의 학장은 면직되었고, 그의 제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 교수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몇 년 후에 사망했는데 고문 후유증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밖에도 많은 환경 전문가들이 언론에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공해방지법이 있었지만 이 법은 공해방지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였다. 기준이 너무 느슨하여 기준을 어기기도 어려웠고 기준을 어겼는지 조사를 하여 처벌을 한 적도 전혀 없었다. 이 시기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환경오염의 피해를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발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서 이의 결과로 우리나라는 자원의 낭비가 심하고 환경오염이 심한 사회로 탈바꿈하였다. 우리나라의 GNP당 에너지 사용량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편에 속하여 OECD 평균보다 50%가 높다. 또 환경오염 성장이 경제성장을 앞질러 1982년에서 1996년 사이에 경제가 연 9.6% 성장한데 비하여 산업폐수와 산업폐기물은 연 13% 이상 증가하였다 9). 결과로 우리나라의 환경오염밀도는 다른 어떤 선진국보다도 앞선다. 일본과 비교하자면 우리나라는 인구가 1/3, 국토면적이 1/4, GNP가 1/12 정도이지만 아황산가스 배출밀도가 5배, BOD 배출밀도 20배, 유독성폐기물배출밀도 4.5배에 이른다. GNP당 에너지 사용량은 우리가 일본의 3.5배에 이른다. 1인당 소득은 일본의 1/4 수준이나 1인당에너지 사용량은 일본의 1.2배이다. 우리의 1인당 에너지 사용량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독일을 다 앞질렀다 10).
경제학자들은 1인당 소득이 5,000 달러를 넘으면 환경이 개선된다는 Kuznets 이론을 자주 내세우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소득이 10,000 달러에 이르기까지도 환경오염물질 배출량이 계속 증가하기만 했다 11). 결과로 우리나라의 환경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울산, 온산 공단은 주민 37,000여명을 이주시키는 방법으로서 공단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여천공단에서도 주민들이 환경오염을 이유로 이주를 요구한 바가 있다. 1991년에 낙동강 페놀오염사고가 있은 이후로 정부는 ‘맑은 물 대책’에 17조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했다고 하나 물을 오염시키는 정책이 더 잘 추진되어 물은 더 나빠졌다. 그래서 현재 수돗물을 안심하고 그대로 마시는 사람은 전 인구의 1% 밖에 되지 않는다 12). 또 세계에서도 자동차가 가장 바쁘게 돌아다니는 나라가 되어 대기오염도 세계에서 가장 심한 나라로 항상 선정되곤 한다. 한국 사람들의 승용차 대당 주행거리는 1년에 2만6천 km 인데 반하여 미국의 평균 주행거리는 1만9천 km, 영국이 1만5천 km, 프랑스가 1만4천 km, 독일이 1만2천 km, 일본은 1만 km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 건설되는 도로로 인하여 우리나라 승용차의 주행거리는 앞으로도 이에서 더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예측이 되고 있다 13). 우리나라는 교통 에너지가 전체 에너지 수요의 23%에 이를 정도로 교통 에너지 소모가 많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나라의 도시들을 공기 나쁘고 시끄럽고 교통소통이 안 되는 곳으로 만들게 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런 성장위주의 경제개발정책을 아직도 계속 밀고 나가고 있다. 우리 정부가 세운 2020년까지의 장기발전전략에 의하면, 인구는 장차 5천만에서 안정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020년까지 30,000 달러로 올리고, 자동차는 지금보다 두 배 반이 늘어 2,500 만대를 보급하여 2인에 한 대 꼴이 되도록 하고, 공장면적도 지금의 두 배반이 되도록 380 km2를 공급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14). 이러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에너지는 1990년을 기준으로 2030년까지 4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놓은바 있다 15). 수자원은 또 1996년에 발간된 수자원장기종합계획에 의하면, 1997년 생활용수와 공업용수를 합하여 1인1일당 535 리터에서 2011년에는 760 리터를 공급하기 위하여 대목적 댐 20개를 더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16). 그리고 2001년에 건교부에서 새로이 작성한 계획에 의하더라도 2020년까지 생활용수가 연간 90.21억톤, 공업용수가 45.65억톤이 필요하여 둘을 합치면 여전히 1인1일당 744 리터가 필요한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17).
이런 장기발전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각종 대형국책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국책사업들은 대개가 공개적인 논의를 거쳐 결정된 것이 아니라 먼저 정치적으로 결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어 사업타당성조사보고서가 꾸며진다. 그리고는 사업을 먼저 시작한 후에 환경영향평가를 형식적으로 거친다. 일단 사업이 착수되면 ‘시작된 국책사업은 중단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예산을 서너 배, 대개는 그보다 훨씬 더 크게 올려 현실화한다. 비판의 소리는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사업을 합리화시키고 밀어 부친다. 이들 타당성조사 보고서나 환경영향평가 보고서에는 많은 사실들이 왜곡되어 있다. 다음에 지금 추진되고 있는 몇 가지 국책 사업들의 문제점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다음에 계속 됩니다)
출처 - 창조과학학술대회 논문집
생태계의 창조섭리
이웅상
한국창조과학회 전임 회장 (3대,5대)
명지대학교 교수/교목
1. 타락 이전의 생태계
하나님이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하신 결론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1) 라는 말씀이었다. 창세기 1장6절에 하나님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심으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궁창은 하늘이란 말로 대기권 위에 물층이 있어 지구를 보호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지구와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 때 이 물층이 지구위에 쏟아졌으니, 시간당 1.3cm의 소나기로 계산해도 40일간 내린 강우량은 12m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창 7:1~12). 여기에 지하수가 터져 나와 온 지면을 물로 덮은 것이다.
이 엄청난 양의 물이 대기권 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니, 전 지구는 이상적인 환경을 유지했을 것이며, 대기압은 적어도 2.18기압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궁창위의 물이 존재함으로써 지구환경에 미쳤던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자.
제일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궁창위의 물에 의한 온실효과다. 즉 대기권위에 둘러싸인 물층에 의해 지구는 적도나 극지방이 모두 온화한 이상적인 기온과 습도를 유지했을 것이다. 오늘날 기상학자들은 궁창 위의 물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면, 지구에는 비가 내릴 수 없고 오직 이슬에 의해 수분이 공급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2장5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6절에는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얼마나 정확한 과학적 기술(記述)인가!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한 것이 기상학적 지식이 전혀 없었던 B.C 1450년 경이라면 그는 어떻게 홍수 이전의 보지 못한 지구환경을 이토록 정확히 기술할 수 있었을까?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모세에게 창조의 비밀과 역사를 계시하여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이며 (딤후 3:16, 벧후 1:21),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요 신비인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더욱더 풍성한 자료들로 궁창위의 물에 의한 온화한 지구환경을 증언하고 있다. 북극에서 화석으로 발견된 종려나무, 산호초, 맘모스 등은 과거에 이러한 생물들이 북극에도 살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생물체의 잔유물인 석탄과 석유도 극지방을 포함하여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악어의 화석은 미국 뉴저지주와 영국 뿐 아니라, 남극지방에서도 발견되었다. 최근 북극의 얼음 속에서 발견된 맘모스의 위(胃)에서 연꽃 같은 아열대 식물들의 화분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상상할 수 없는 화석들이 남극의 세이모아라는 섬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남극이 빽빽한 삼림으로 우거졌으며,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었음이 화석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이 모든 자료들은 궁창 위의 물과 이로 인한 온실효과 이외에는 어느 학설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다.
다음으로 궁창 위의 물은 생물체에 해로운 단파장의 방사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자외선과 우주선은 DNA를 파괴해 생물에 해로운 돌연변이를 유발하는데, 이러한 방사선이 완전히 차단됨으로써 지구는 생물이 살기에 이상적인 환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궁창 위의 물로 인해 대기압은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높았을 것이며, 이 높은 대기압은 세포에 보다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게 했을 것이다. 결국 산소를 필요로 하는 생물들의 성장은 더욱 활발했을 것이며, 상처를 입었을 경우에도 훨씬 빨리 치료되었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인류가 대부분 900세 이상 살았다는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놀라운가! 모세 자신은 120년 밖에 살지 못했으면서도 이 놀라운 진리를 기록했으니, 성령의 능력이 아닐까? 오늘날 과학은 지구초기의 이상적인 환경으로 인해 생물들의 수명이 길고, 그 결과로 거대한 크기로 성장한 생물들을 많이 발굴해 왔다. 길이가 30m 정도나 되는 거대한 공룡이 발견되었는가 하면, 길이 1m정도의 잠자리, 키가 4m나 되는 낙타, 키가 3m를 넘는 조류들, 오늘날에는 원숭이 만한 나무늘보가 5.5m되는 거대한 화석으로 발견되었다. 이들의 대부분이 현재의 생태계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이지만, 오늘날 지구의 가뭄, 혹한 등 생장에 불리한 환경의 변화로 인해 궁창의 물로 보호를 받고 있었던 노아의 홍수 이전처럼 빨리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2. 타락 이후의 생태계
죽음도 고통도 없던 완전한 에덴동산의 생태계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후로 지구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8). 종(種)간의 교잡과 돌연변이를 통해 다양한 변이가 생겨나게 되었고, 생태계는 생존을 위한 생물간의 치열한 투쟁터가 되고 말았다. 식물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화학독성물질을 생산해 자신을 보호하기 시작했고(Allelopathy), 유익한 박테리아들도 병원균이 되어 생물을 죽이는 기능을 갖게 되었다. 상호이익을 추구하던 공생관계도 많은 것들이 기생관계로 변해 서로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동물들도 부족한 단백질을 채우기 위해 육식을 시작함으로 오늘날의 생태계의 먹이 피라밋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3. 홍수 이후의 생태계
궁창위의 물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괴되었다. 인간에게 죄가 들어온 후 세상은 마침내 죄가 관영하게 되었고, 인간의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임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근심하셨다(창 6:5,6). 결국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40주야 동안 비를 내리셨는데, 창세기 7장11절에 표현하시길 "하늘의 창들이 열려" 비가 쏟아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의 죄로 파괴된 것이다. 그 결과로 인간의 수명이 갑자기 짧아지기 시작하였으니 노아는 950년을 살았으나, 그의 아들 셈은 602년을, 손자인 아르박삿은 438년을, 그의 11대 손인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다 죽었다. 6백여년 만에 인간의 수명이 900세에서 175세로 줄어든 것이다. 수명의 단축은 현재까지 지속되어 마침내 100세 이하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궁창위의 물이 파괴됨으로써 인간의 수명만이 단축된 것이 아니다. 모든 생물의 수명이 줄어들고 성장률이 떨어졌다. 식물계에 의한 절대 생산량이 떨어져 채식만으로는 생물들이 생활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셨으니(창 9:3), 이 때부터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시작되었으며, 인간 또한 육식을 하게 된 것이다.
궁창위의 물이 없어지자 지각은 일정한 습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물이 증발해 구름을 형성하여 무지개를 이루니 이것을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시지 않겠다는 언약으로 사용하셨다(창9:13-16). 그러나 지구는 궁창 위의 물이 파괴된 이후 계속 퇴락해 오늘날의 많은 생태학적인 지구 종말론을 가져오게 되었으니, 이산화탄소의(CO2) 위기설, 오존층의 파괴, 대기와 수질의 오염, 방사능 오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새 창조를 하고 계시니, 이사야와 베드르, 요한을 통해 예언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그것이다(사 65:17,66:22; 벧후 3:13; 계 21:1). 거기에는 눈물도 애통하는 것도 없으니 사망도 아픈 것도 없을 것이다 (계 21:4). 또한 그곳은 각종 환경오염으로 시달리지 않고 생수와 신선한 공기를 어디에서나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니라"(계 21:27)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을 위한 새 세계가 마치 신부가 단장하듯이 예비되어 있으니(계 2:12)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가! 모든 환경과 생태계가 다시 새롭고 완전하게 창조되는 세상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창조된 생태계를 바라보는 기독인의 바른 자세는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첫째로 성서적 자연관의 확립이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곳곳에서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밝히고 있다.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원시대기에서 우연히 화학반응이 일어나 최초의 생명체가 생겨나고, 여기서부터 오늘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물들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말씀 속에는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진화론의 설명처럼 인간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진화한 가장 고등한 동물이므로 마치 자연의 주인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물과 같이 피조물중의 하나인 것이다. 시편 50:10-12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은 철저히 세계의 소유주는 창조자 하나님이심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맡은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창세기 1:28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주신 명령이 있다. "생육하고 번영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의 직분을 맡겨 주신 것이다. 창조 세계의 주인은 분명히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인 것이다.
청지기로서 인간의 첫 번째 책임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자손번식에는 충실했지만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에는 거역했다. 창세기에서의 인류는 바벨탑을 쌓고 흩어져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동케 하심으로 강제로 흩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편리주의와 산업발전을 핑계로 도시를 건설하고 엄청난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살면서, 온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을 어기며 살고 있다. 결국 자연은 훼손되고, 오염물질의 대량생산으로 지구의 생태계는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해결책은 말씀에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 대도시라는 현대판 바벨탑 건설을 지양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청지기로서 인간의 두 번째 책임은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은 "땅을 정복하라"는 말을 "땅을 소유하라"는 말 내지는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마음대로 개발하고 착취하라는 뜻으로 오해해 왔다. 그러므로 인류역사의 상당부분이 서로 땅을 점령하려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개발이란 명목아래 자연은 말할 수 없이 파괴되어 왔다. 그러나 창세기 1:28절의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법대로 "경작하라"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 땅을 인간이 소유하고 마음대로 훼손하고, 땅의 권리를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잘 관리하며 경작하여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이 번성케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25장에는 땅을 경작하되 7년마다 1년씩 땅을 쉬게 하고, 그동안 저절로 맺힌 열매조차도 거두지 말도록 안식년을 명하시고, 50년째 되는 해에도 동일하게 땅을 경작치 말고 쉬게 하도록 하는 희년 제도를 주셨다. 결국 땅을 경작하되 훼손되지 않고 자연을 보전하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청지기로서 세 번째의 책임은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다스리다' 라는 말은 성경에서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보호하다' 라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섬기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창조자를 대신해서 잘 관찰하고, 관리하며 보호하는 책임이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이시오, 하나님 자신이지만 피조물인 인간이 죄 가운데 멸망해 가고 있을 때 구원하시기 위해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바 된 존재로 자연을 섬김으로 보호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 자연관은 창조신앙에 기초해야 하며, 이는 창조자이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생태계의 특성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생태계는 생물과 무생물과의 끊임없는 물질교환으로 되어 있으며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모든 물질이 순환한다는 것이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무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물이 순환함으로 물에 녹는 모든 물질이 역시 함께 순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오염시킨 모든 물질이 물과 함께 순환하여 결국은 전 생태계를 오염시키게 되고, 그 중의 한 구성원인 인간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도서 1:7에는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고 연하여 흐르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연하여 흐른다'는 말은 그것이 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잠시 편하게 살려고 무심코 버린 오염 물질이 나에게 되돌아오며,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야간 몰래 버린 공장폐수가 인간에게 되돌아온다는 경고인 것이다. 성경은 물뿐만이 아니라 대기도 순환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전도서 1:6절에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무한히 넓은 하늘인데 하고 무심코 방류한 매연이 산성비가 되어 전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으며, 오존을 생성해 식물의 생산량을 감소시키며, 동물의 호홉기 질환을 유발시키고 있다. 또한 과다한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 발생된 이산화탄소가 가져와 전 세계적인 온난기후로 빙하가 녹아 세계가 물에 잠길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 오늘날 지구의 현실인 것이다. 전 기독인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를 바로 이해하고 우리의 우매함을 회개하며, 바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창조자께 지혜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청지기로서 자연보전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 제일 먼저 기독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편리주의를 버리고, 좀더 단순하고 절제하는 생활로 돌아가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야겠다. 그리고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창조자를 증거하여 창조 신앙을 갖고 청지기로 헌신하도록 해야겠다. 이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 뿐 만 아니라, 모든 자연이 고대하는 바인 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로마서 8:19)
*참조 ; Ecology, biodiversity and Crea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068/
출처 - 창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