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우주, 그리고 하나님
(Einstein, the universe, and God)
타임(Time) 지가 '세기의 인물(Person of the Century)'[1]로 선정한바 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2] 여러 가지 면에서 유명하다 (그의 텁수룩한 모습 이외에). 그의 특수상대성 이론 및 일반상대성 이론과 질량 에너지 등가 공식인 E = mc2 는 시간과 공간, 빛과 중력,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영원히 바꾸었다. 그가 ”하나님은 우주를 우연에 맡겨두지 않으셨다” 라고 언급한 것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말한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과 어느 정도라도 유사한가?
어린 시절의 영향
독일계 유대인 부모에게서 1879년에 태어났지만, 알버트는 유대교 신앙으로 길러지지는 않았다. 그는 뮌헨의 가톨릭 초등학교에 다녔고, 그 후에는 근처의 일반 고등학교에 다녔다. 약간 느리고 꿈 많은 학생이었던 알버트는 비과학적인 주제에는 흥미가 없었고[3], 19세기의 엄격한 군대식 독일 교육시스템에서 거의 배운 것이 없었다. 그는 규율을 혐오하며 성장했고, 일생동안 모든 권위들을 의심했다. 11세 때 그는 강한 종교적 교육과정을 거치며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하여 학교 가는 길에 부르곤 하였다.[4]
12살 때부터 알버트는 유명한 과학책들을 읽었고, 자습으로 대수, 기하, 미적분을 공부하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반신앙적 책인 ‘순수이성 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을 공부했다. 이 시절에 관하여 그는 나중에 술회하기를,
”유명한 과학책을 읽으면서 나는 곧 성경 이야기의 많은 것들이 사실일 리가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 결과로 나는 국가가 어린이들은 의도적으로 거짓말로 속이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적극적으로 자유분방함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소망과 희망과 소박한 느낌이 지배하던 어린 시절의 종교적 천국은 잃어버리게 되었고, 나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질 수 있었다” 라고 했다.[4]
알버트는 반권위주의 생각과 아마도 17세에 징집을 피하고 싶은 욕망으로 그는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1896년 1월 28일에 그는 16살의 무국적자가 되었다. 그는 1900년 2월 21일에 스위스 시민권을 얻었다.
고등교육, 아버지가 되고 결혼하다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알버트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좋은 기술학교인 스위스에 있는 츄리히 공대(Zurich Polytechnic)에 다녔다.[5] 그는 거의 강의실에 출석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훌륭한 물리실험실에서 그 자신의 실험을 수행하거나, 당시의 과학계 선구자인 헤르츠(Hertz), 헬름홀츠(Helmholtz) 등과 다른 과학자들이 쓴 물리학의 첨단 연구결과들을 읽으며 보냈다. 그는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아들러(Friedrich Adler, 1918년에 오스트리아의 총리를 암살하여 유명해졌음)에게서 혁명적 사회주의(revolutionary socialism)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교실에서 헝가리 출신의 홍일점 학생이었던 밀레바 마릭(Mileva Maric)에게 반하였다. 그녀는 평범했지만 다리를 절었고, 경박하지 않았으며, 알버트와 지적인 대화를 할 정도로 물리학을 알고 있었다. 1901년에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1903년에 베른에 있은 스위스 특허청(Swiss Patent Office)에서 특허심사관의 자리를 얻은 후 밀레바와 결혼했다.[6]
1905년에 저명한 베를린 저널 Annalen der Physik 는 알버트가 쓴 4편의 논문을 실었는데, 이것들은 그해 3월 17일에서 6월 30일 사이에 그가 여가시간에 쓴 것이었다![7] 첫 번째 논문은 어떻게 빛이 파동(wave)의 성질과 입자(particles)의 성질을 모두 가지는지를 설명했는데, 그는 이 논문으로 16년 후에 노벨상을 받았다. 두 번째 논문은 원자의 크기(the size of atoms)에 관한 것으로, 그는 이 논문으로 취리히 대학교(Zurich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8] 세 번째는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에 관한 것이었으며, 현대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의 기초가 되었고, 네 번째는 그의 특수상대성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의 기반이 되었다. 이 네 번째는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 안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볼 수 없을지에 대하여 ‘생각만의 실험(thought experiments)’을 한 결과이다.
1916년에 알버트는 '일반상대성 이론의 기초(The Foundation of the General Theory of Relativity)'를 발표했다. 이것은 중력(gravity)과 가속(acceleration)이 동일한 효과를 나타내며, 중력이 공간과 시간을 휘게(뒤틀리게) 한다는 또 하나의 ‘생각만의 실험’에 의한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당황했다. 이 이론은 그 후 1919년 5월 29일에 서인도 제도에서 일식을 관측하는 동안 확인되었다.[9] 세계의 언론은 알버트를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알버트와 엘사
알버트와 밀레바의 결혼생활은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고, 1914년에 그들은 별거하였다. 한 때 알버트가 병들었을 때 간호를 해주었던 이혼녀인 그의 사촌 엘사 루웬탈(Elsa Löwenthal)과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1918년에는 이혼절차를 밟기 시작했다.[10] 취리히 법정은 1919년 2월 14일에 이혼을 허락하면서, 특히 알버트가 노벨상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11] 밀레바에게 위자료를 지불하도록 판결했다.[12]
알버트는 1919년 6월 2일에 엘사와 결혼했으나, 또 다시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않았다.[13] 훗날에 그는 사망한 어느 친구가 긴 세월을 한 여자와 평화롭고도 조화로운 일생을 산 것을 칭찬하면서, 자기는 부끄럽게도 두 번이나 그 일에 실패했다고 썼다.[14]
노벨상
1922년에 알버트는 그의 이론물리학에 관한 연구결과와 광전법칙(photoelectric law)으로 1921년도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공식 뉴스를 접했다. 그 당시 아직도 매우 논쟁의 여지가 많았던 상대성이론은 이 상에서 특별히 제외되었다.[15]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에게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회신의 어떤 부분들은 그의 심술궂은 유머 감각을 보이고 있다. 베를린에 있을 때 그는 뉴욕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에 그 사람은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가요, 아니면 다른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라는 것이었다. 알버트는 회신하기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이 결코 아니고, 중력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16]
또 한 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성공의 공식을 물어왔다. 그는 대답하기를 ”A를 성공이라고 치면 그 공식은 A = X + Y + Z 가 될 터인데, 여기서 X는 일이고, Y는 노는 것이며, 그럼 Z는 뭐지? 그것은 입을 닥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7]
1933년에 히틀러(Adolf Hitler)가 권력을 잡고 나서, 나치당은 유대인들이 과학을 연구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에 착수했고, 알버트의 암살에 20,000 마르크의 상금을 내걸었다.[18]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Princeton)에 정착했고, 1940년 10월 1일에 이 대과학자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
대부분의 생애를 통하여 그는 유순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독일 과학자들이 우라늄 원자를 쪼개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1939년 8월 2일에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새로운 현상을 이용하여 폭탄을 만들 수 있으므로 미국이 빨리 원자탄 연구를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19]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가 2 년 후에 시작되었으나, 알버트는 안보상의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이 연구에서 제외되었다.[20] 원자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폭발하고 난 후에, 그는 그 편지를 자기의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했다.
1952년 11월에 알버트는 이스라엘의 벤구리온(David Ben-Gurion) 수상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되기를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12]
그는 일생의 마지막 30년 동안의 대부분을 전자기력(예를 들어 빛)과 중력간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확립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의 목표는 하나의 공식으로 전자부터 항성까지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소위 통일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1955년 4월 18일에 잠자던 중 복부 동맥파열로 숨을 거두었다.
아인슈타인과 '하나님'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의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믿는 것에 대하여 아무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종교와 하나님에 관한 그의 시각은 진화론과 범신론이었다.
그가 쓴 글에 의하면
”나는 자기가 지은 피조물을 상주기도 하고, 벌하기도 하는 신을, 또는 의도적으로 우리가 현세에서 당하는 이러한 경험을 하게 하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육체적 죽음 후에도 살아남는 개인을 상상하기도 싫고 원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이나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가득한,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이나 그런 생각을 하라.”[22]
”보호받고 사랑과 도움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또는 도덕적인 신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보편적인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라면, 세상사를 간섭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한 순간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상주기도 하고 벌하기도 하는 신은 상상할 수가 없다....”[23]
”인류의 정신적 계발의 초기단계에서 인간의 공상이 인간과 닮은 신들을 생각해 내었다.... 설파되는 종교에서의 하나님은 그 오래된 개념의 신들을 승화한 것이다. 윤리적인 선을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개인적인 신의 교리 대신 내세울만한 상징이 있어야만 했다.”[24]
아인슈타인은 과학적인 진리에 대하여 그에게 문의한 어느 일본 학자에게 회신하기를,
”모든 고도의 과학적 업적의 바탕에는 이성적 세계관이건 지적 세계관이건 종교적 측면의 확신이 깔려 있음이 틀림없다. 세상의 경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초월자의 존재에 대하여 마음 속 깊이 느끼는 이 확신이 내가 이해하는 신이다. 흔한 표현으로 이것은 범신주의(pantheistic) 라고도(Spinoza)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썼다.[25]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하나님’ 즉, ”하나님은 우주를 우연에 맡겨두지 않는다” 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악의적이진 않다”[26] 고 했을 때의 하나님은 우주의 합리성을 지칭하는 뜻이었다. 그는 또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우주에 나타나 있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감성적인 확신이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이다”[27]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는 결단코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통치자, 심판자, 구세주인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1939년 5월 19일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연설하면서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종교계에서 성경 기록이 절대적인 진실임을 주장하면 분쟁이 일어난다.”[25, 28]
기독교 호교주의자인 휴 로스(Hugh Ross, 점진론적 창조론자) 박사는 주장하기를, 비록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은 동료 과학자들과의 입장과는 달리 창조주의 존재에 대하여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29]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의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볼 때,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믿음을 갖지 않았다. (별빛과 시간에 관한 아래의 글 참조).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설교나 글에서 부적절하게 아인슈타인을 인용하게 된다면, 그들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크게 훼손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노트 : 아인슈타인은 그의 과학논문과 대부분의 그의 서신을 독일어로 썼으므로, 위에 사용한 인용들은 번역자에 따라 약간 다를 수 있다.
References and notes
1. Time, pp. 42-67, December 31, 1999.
2. Albert was born in Ulm, Germany, on March 14, 1879. The family moved to Munich in 1880.
3. His interest in science stems from age five. His father gave him a compass. 'Why does the needle always point one way?', Albert wanted to know. 'Magnetism.' 'How does an invisible force pass through space?' Albert lay awake that night pondering the mystery. His life-long interest in asking and solving scientific questions had been awakened.
4. Pais, A., Einstein Lived Here, Oxford Uni. Press, New York, NY, USA, pp. 114-15, 1994.
5. Eidgenossische Technische Hochschule or ETH (the Federal Institute of Technology).
6. This lasted from June 1902 to July 1909.
7. Translated titles: 1. On a Heuristic Viewpoint Concerning the Production and Transformation of Light. 2. A New Determination of the Size of Molecules. 3. On the Motion of Small Particles Suspended in a Stationary Liquid According to the Molecular Theory of Heat. 4. On the Electrodynamics of Moving Bodies.
8. He received the first of his many honorary doctorates in 1909.
9. According to Einstein's theory, light from distant stars should be deflected when it passed through the strong gravitational field of the sun. During the eclipse, the light from stars previously not visible because of the sun's brilliance appeared to be bent, i.e. the stars appeared to be in a different position from when their light did not pass close to the sun. The amount that the starlight was bent by the sun's gravity agreed with Einstein's predictions.
10. Ref. 4, p. 19 states that Albert 'admitted adultery' in a letter dated August 31, 1918.
11. Albert was nominated for the Nobel Prize for Physics every year from 1910 to 1921, except 1911 and 1915.
12. This he did in 1923. It was then worth about US$32,000. Mileva bought a house in Zurich and lived there for most of the rest of her life. She died in 1948.
13. Ref. 4, p. 20 states that one 'extramarital affair came to an end in 1924. Several others appear to have occurred in later years.' See also p. 38.
14. Ref. 4, p. 25.
15. Ref. 4, p. 63.
16. Ref. 4, p. 88.
17. Ref. 4, p. 152.
18. Ironically, this anti-Semitism may have kept the Nazis from developing an atomic bomb.
19. He signed another letter about the atomic bomb, intended for Roosevelt, on March 7, 1940.
20. Ref. 4, pp. 218-19.
21. Fölsing, A., Albert Einstein, Viking, New York, NY, USA, p. 734, 1997.
22. Ref. 4, p. 118.
23. Ideas and Opinions by Albert Einstein, Crown Publishers, New York, NY, USA, pp. 36-39, 1954.
24. Ref. 23, pp. 46, 48.
25. Ref. 23, pp. 261-62.
26. He was objecting to the random unpredictable element in quantum mechanics, where one cannot calculate what will happen, only what will probably happen.
27. Barnett, L., The Universe and Dr. Einstein, Victor Gallancz Ltd, London, UK, p. 95, 1953.
28. Albert overlooked Psalm 14:1.
29. The Creator and the Cosmos, Navpress, CO, USA, p. 49, 1993.
‘자연에 나타난 신성’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믿음
범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이 신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신은 모든 것을 달리 표현하는 것일 뿐이며, 아무런 실질적 의미가 없어 모든 것이 징크스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허치슨 백과사전(The Hutchinson Softback Encyclopedia) 1996년판에 소개된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명백히 스피노자(Spinoza)의 범신주의에 공감하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마음과 물질은 우리가 신, 또는 자연(Nature)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한한 것의 두 가지 형태이며,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뉴에이지(New Age)와 동양 사상처럼, 이것은 일원론적(monistic) 믿음이며,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창조주, 즉 모든 피조물 이전에 존재하였고, 피조물과 독립적이며, 피조물 외부에 존재하는, 그런 창조주를 부정한다.
상대성과 도덕성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의 도덕적 쇠퇴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 비난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자연을 보는 관점에서 절대적인 공간과 시간을 절대적인 빛의 속도로 대체하였다. 그는 그의 이론을 불변이론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상대성(relativity)’ 이라는 용어가 고착되었다.
도덕성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하나님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때문이 아니고, 진화론적 가르침 때문이다. 진화론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진리와 인간은 그 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거부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이 결정하도록 가르친다.
과학은 단지 우리에게 현상만을 설명할 뿐, 무엇이 옳은지를 말해주지 못한다. 예를 들면, 과학은 어떤 사람의 심장을 쏘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것과, 어떤 성적 행동은 AIDS의 전파를 촉진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그러한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말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상대성과 먼 곳에서 오는 별빛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 GR)은 중력 이론에 관하여 가장 실험적으로 잘 인정된 이론이다. 그것은 뉴턴의 법칙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더 큰 규모(우주적 규모)의 일부로 포함되게 하여, 어떤 상태에서는 더 정확하게 중력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상대성 이론에는 직관과 어긋나는 개념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빛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질량이 집중된 영역인 블랙홀(black holes)이 그것이다. 또 다른 개념은 중력이 시간을 변화시키므로,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리학자인 러셀 험프리(Russell Humphreys) 박사가 제안한 대표적인 창조론적 모델은 일반상대성 원리를 사용하여, 젊은 우주에서 먼 곳의 별빛이 어떻게 지구에 도착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인들을 위한 험프리 박사의 책, ‘별빛과 시간(Starlight and Time)’에 (기술적 부록도 포함)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많은 점진론적 창조론자들이 험프리 박사의 논리를 강하게 공격해 왔지만, 그는 지금까지는 무리 없는 설명을 해 왔다. 이 책의 내용을 잘 아는 독자들은 논쟁의 내용이 실려 있는 Technical Journal 이나 질의응답 란의 'Countering the Critics'을 참조하기 바란다.
*관련기사 : 아인슈타인 '무신론' 자필편지 경매 나왔다 : 독일어로 "성경은 원시전설들 집대성" (2012. 10. 8.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210/h2012100821013191560.ht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3/i1/einstein.asp
출처 - Creation 23(1):50–53, December 200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42
참고 :
과학과 신앙이 만나는 자리
1985년 달라스에서, 과학과 종교에 관한 회의가 열렸었다. 토론의 주제는 우주의 기원이었고, 토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뉠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과학자라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의외로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유신론자가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관측우주론자인 앨런 렉스 샌디지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전설적인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의 사사를 받은 사람으로서, 퀘이사(quasar, 준항성 전파원)의 신비를 풀었으며, 구상성단(globular cluster, 수십만 개에서 수백만 개의 별들이 공 모양으로 모여 있는 항성의 집단. 우리 은하계 안에는 100개 이상의 구상성단이 있다)의 나이를 밝혔고, 멀리 떨어진 은하계의 거리도 알아냈으며, 우주 팽창량도 측정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어릴 때부터 무신론자였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 샌디지는 유신론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빅뱅에 대해 발언하던 도중에 50세의 나이에 기독교인이 되기로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빅뱅이 기존의 물리학 영역에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학은 우리를 제1사건까지 데려다 주었지만, 더 멀리 있는 제1원인까지는 데려다 줄 수 없다. 물질, 시간, 공간, 에너지의 갑작스런 출현은 태초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샌디지 이외에도, 하버드의 저명한 천체물리학자 오웬 깅그리치도 빅뱅이 유신론적 세계관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생화학자인 케니언도 과거에 자연주의적인 시각으로 저술한 자기 책의 결론을 부정하고, 세포 분자의 엄청난 복잡성과 정보를 포함하는 DNA의 특성들은 생명의 설계자를 대변하는 증거라고 믿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스티븐 마이어는 우연히 그 회의에 들렀다가 샌디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젊은 지구물리학자인 그는 인생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던 끝에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과학이 신앙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과학적 증거를 무시한 믿음의 도약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과학을 전공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몰랐던 것이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두 번째 인터뷰 : 스티븐 마이어 박사
스티븐 마이어 박사는 물리학과 지질학을 공부했고,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분자생물학, 물리학사, 진화론 연구에 집중했으며, 그 후에는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과학적, 방법론적 쟁점들을 분석한 논문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신생 지적설계운동의 가장 박식하고 강력한 대변자 중 한 사람이다.
과학을 공부한 사람 중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과학만이 합리적이고, 과학만이 진리를 밝히며, 다른 모든 것은 신념과 의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이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말은 자기모순인 철학적 가정이다. 과학적 지식이 다른 지식들보다 반드시 앞선다고는 할 수 없다. 과학은 우리에게 많은 참된 것을 가르쳐 주는데,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과학적 증거는 실제로 유신론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한다. 지난 50년 동안 폭넓은 과학 분야에서 밝혀진 증거들은 유신론의 확고한 논거를 제공해 주었다. 유신론만이 이 모든 증거들에 대해 지적으로 만족할 만한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NOMA의 문제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교도권‘ 아래에서 서로 다른 영역을 차지한다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말을 따르고 있다. 굴드는 이 철학을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 교도권의 분리)라고 부르며, ‘과학의 그물은 경험적 우주에, 종교의 그물은 도덕적 의미와 가치의 문제들에 펼쳐져 있다‘고 말하며, 과학은 변치 않는 사실로, 종교는 변덕스런 믿음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NOMA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과학과 종교는 분명 관심과 초점의 대상이 다르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문제 등에서는 과학과 형이상학이 상호작용을 하는 영역이 있으며, 이와 같이 세계관의 문제가 걸려있는 영역에서는 과학의 발견이 필연적으로 세계관의 문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NOMA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NOMA에 따르면 과학은 사실의 영역이고, 종교는 도덕과 믿음의 영역이다. NOMA가 제 역할을 하게 하려면, 과학이나 신앙을 희석해야 한다. 그래서 굴드는 종교란 그저 윤리적인 가르침 정도로 생각하고,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우화로 취급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존립 여부는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신에 달려있다. 성경적 기독교는 신앙만이 아니라, 사실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마이어의 결론은 "과학의 증언이 유신론을 지지한다. 제대로 하기만 하면, 과학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과학이 유신론을 지지하는 증거
1) 우주론 : 우주에는 분명한 시작점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에너지, 물질, 공간과 시간에 시작점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반유물론적인 믿음이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 자연법칙 등으로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우주론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유신론 가설을 제거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2) 인위적 미세 조정 : 근본적인 물리 법칙과 매개 변수들이 정확한 수치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어떤 초지성적 존재가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끼어들었고, 자연에는 이렇다 할만한 맹목적 힘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처럼 우주가 미세하게 조정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미세조정자가 있기 때문이다.
3) 생명의 기원과 생명이 생겨나는 데 필요한 정보의 기원 : DNA와 단백질 분자에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유전자의 기계어 부호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컴퓨터와 유사하다. 컴퓨터는 지적 공학자가 만든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정보들은 지성적 존재의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모든 생물의 모든 세포 속에 들어있는 정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4) 생물 속에 있는 통합적이고 복잡한 분자 체계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 생물학적 기계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분들이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무작위적 변이에 가해지는 자연선택의 과정으로는 그런 체계를 만들 수 없다. 자연선택은 일단 만들어진 체계를 보존할 따름이다. 한 요소도 제거 불가능한 복잡한 체계들의 문제는 체계 안의 모든 부분이 다 갖춰지고 긴밀한 조정을 통해 서로 협력하기 전까지는 작동을 하지 않는다. 진화가 순전히 우연에 의해 거대한 도약을 해서 한 번에 그런 체계를 만들어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5) 캄브리아기의 대폭발 : 캄브리아기에는 20가지에서 35가지에 이르는 전혀 새로운 구조의 몸체를 갖는 생물들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것은 엄청난 복잡성의 증가인데, 그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고, 이행단계의 중간 형태가 없다. 도대체 진화가 얼마나 빨리 일어나야 그것을 더 이상 진화라고 부르지 않을 것인가. 다윈 또한 자연이 갑작스런 도약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윈주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설계가 더 나은 설명이다. 따라서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은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하는 부정적 논거일 뿐 아니라, 설계를 지지하는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논거가 된다.
6) 인간의 의식이 인간본성에 대한 유신론적 견해를 지지함 :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인간은 단순한 물질 이상의 존재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존재이며, 자기반성, 재현예술, 창의성과 같은 능력이 있다. 뇌 속에 있는 물질의 물리적 상호작용만으로는 이런 종류의 의식을 설명할 수 없으며 유신론이 최선의 설명이다. 자연주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말했던 19세기 과학자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난 50년 동안의 발견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 과학과 신앙은 적대관계가 아니다. 과학적 증거와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해석할 때, 그 둘은 서로 지지할 수 있고 서로를 뒷받침하게 된다.
최선의 설명을 찾는 추론 : 창조주 가설(God Hypothesis)
1998년 수학자 윌리엄 뎀스키와 마이어는 유신론적 믿음을 뒷받침하는데 쓰일 수 있는 추론 모델을 밝히는 논문을 썼는데, 그것을 "최선의 설명을 찾는 추론"이라고 불렀다.
이 추론은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실용적인 형태로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고 싶을 때, 먼저 광범위한 가설을 검토하고, 그 중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만한 가설을 세운다. 즉, 가능한 설명들을 남김없이 분석하고 주어진 자료들을 모두 담아 낼 수 있는 설명이 하나 남을 때까지 계속 정보를 더해간다. 더 좋은 가설을 고르는 방법은 그 가설이 증거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보는 것이다.
앞서 우주론, 물리학, 생물학, 인간의식을 거론하며 언급한 증거를 살펴볼 때, 유신론이 훨씬 더 폭넓고 놀라운 설명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존재는 자연주의나 범신론 등 주요 경쟁세력을 포함한 다른 어떤 세계관 보다 더 간단하고, 적절하고, 포괄적으로 폭넓은 증거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유신론을 보강하고 보충하는 증거들이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창조주 가설‘은 지난 100년 내 어느 시기보다 더 인정받고 있으며, 그냥 인정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 증거가 충분히 강력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평결을 보증한다.
몇 가지 반론들
1) 유신론에 대한 증거가 그토록 강력하다면 왜 더 많은 과학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 새로운 발견들이 퍼져 나가 그 함축하는 바가 충분한 고려의 대상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유신론에 대한 최고의 증거 중 일부는 아주 최근에 등장했으며, 그래서 구체적인 한 분야에 집중하는 과학자들은 유신론의 증거가 되는 다른 분야의 발견들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유물론이 지난 150년 넘게 주도권을 행사해 왔고, 그것을 반대한 과학자들은 적대와 박해를 받아왔다. 과학자들은 과학이 자연주의적 설명만 허용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며, 설계 가설을 고려의 대상에서 아예 배제하고 있다.
2) 과학자들이 기적의 가능성을 설명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로 인해 추가 연구 의욕을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 유물론적 과정을 포함하는 답만을 허용하겠다는 주장은 오히려 폭넓은 연구를 저해하는 발언이다. 과학은 자연주의적 설명만 고려해야 한다는 제멋대로 된 일방적인 규칙은 옳지 않다. 과학자는 증거가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3) 불완전한 설계가 하나님의 존재를 반박하는 증거가 아닐까? → 예를 들어, 맹점 등을 보면 "우리 눈의 구조가 어설픈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에게는 눈이 두 개 있고 맹점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눈은 실제로 엄청난 설계물이다. 사람들은 한 가지 변수만 보고 더 낫게 설계될 수 있었다며 그것이 잘못된 설계라고 말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결국 최고의 기능 설계(소비자가 요구하는 기능상의 요건을 고루 갖추도록 제품을 설계하는 행위)가 된다.
4) 완벽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세상도 완벽할 것인데,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 성경은 자연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악이 세상에 들어와서 원래의 설계를 망가뜨렸기 때문에 쇠퇴와 악화가 일어나고 있다. 로마서에는 자연계가 구원을 바라며 신음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묘한 미소
"하나님 없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실재하시고, 창조주시며, 우리가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시기 위해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내가 그 분과 더욱 깊고 충만한 관계를 누리도록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과학적 증거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내 삶과 별개가 아닙니다. 그 일은 나의 신앙 경험 속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거나 DNA 분자의 구조와 정보를 품고 있는 성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경배하는 시간입니다.”
"광대한 우주와 고생물학의 먼지 나는 유물과 복잡한 세포 속에서 우리가 그분의 지문을 발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과학적, 역사적 증거를 탐구하는 일은 인지적 활동만이 아니라, 예배 행위입니다. 창조주께 합당한 공로와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리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창조를 자연적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우리 모두 빠지기 쉬운 우상숭배입니다.”
"자연과 성경에서 하나님의 증거들을 볼 때, 나는 거듭해서 그 분이 누구신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분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번역 - 이종헌
링크 - ,
출처 - 창조과학회 대구지부 월간소식지 '창조' 제36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62
참고 :
창조주 찬양주일 설교
- 창조주 하나님 (본문 : 사 44:21,24 45:12)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성도님 여러분! 오늘은 창조주 찬양주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창조신앙을 확고히 다지는 날입니다. “라브리윤!” 이스라엘에서는 옆 사람이 기침만 해도 “라 브리윤!”(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때의 건강을 회복하세요) 이라고 인사합니다. 가장 귀한 인사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생기를 동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영’인 생기는 바로 생의 고동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의인화했을 때,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의 말씀은 생기요ㆍ영이요ㆍ영감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활동장소요, 무대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 갈등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기에서 벗어나고 갈등문제가 없어지게 합니다. 딤후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합니다. 이때 감동(inspiration)은 헬라어로 theopneustos(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 된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광주사립동물원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악어들이 뭍으로 올라오더니 3일이나 꼼짝하지 않았으며, 뱀들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꽈리를 틀고는 3일이나 움직이지 않아 사육사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하게 생각했답니다. 그로부터 3일째 되는 날에 일본의 강진으로 한국에도 그 여파가 몰려왔습니다. 동물들은 지진이 발생할 것을 감지했으나, 사람들은(지진 측정 장비 없이는) 그 징조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의 신비에 있습니다. 바다 물고기의 측선에는 파이프 같은 홈이 파여 있으며, 거기에 있는 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나 진동을 쉽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 지진계입니다. 즉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동물들을 만들자 그것들은 그 즉시 움직였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흙으로만 지음을 받은 동물들은 땅의 상태(진동…)를 잘 알 수 있어 이에 대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산 존재, 사람)이 되었다고 창2:7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된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아 가야 정상이고 그렇지 못하면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및 바다의 고기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설명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욥12:7-8). 정직한 과학은 성경과 일치합니다. 이제 몇가지 예를 들어 ‘성경의 신빙성의 증거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욥기26:7 절에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에서 펴다는 히브리어로 ‘기울(이)다’란 뜻을 가진 ‘나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북편 하늘을 허공에 기울게 하시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사람의 모든 생존 조건을 아시고 지구를 빈 공간에 23.5˚ 기울게 하여 자전과 공전을 하게 하므로써 가장 살기좋은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이보다 조금이라도 가감하여 기운다면 더위와 추위로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고 과학자들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케플러(Kepler) 역시 우주에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와 조화가 있음(렘33:25)을 확신하고 태양계의 ‘별들의 운행법칙’을 발견한 것은 기본적인 앎의 욕구에서 출발한 기원에의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바다의 고기’를 연구하면 할 수록 놀라운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정확한 생명의 말씀임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마17:24-28절에는 ‘입 안에 은화를 물고 다니는 물고기’가 나오는데, 이 동화같은 이야기가 사실임을 밝혀주는 증거자료가 있습니다.(참고: ‘성서기행’ 신약편. 한길사 p276). 2000년 6월 이스라엘 현지 탐방시 예수님 당시의 배를 복원한 ‘Jesus Boat'를 타고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간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이 호수의 대표적인 어종인 ’베드로 물고기‘를 찾아보니 큰 것은 무려 120cm 나 되고, 이 물고기가 은화나 금화를 입속에 물고 다닌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물고기는 새끼들을 입 안에 넣어 기른다는 것입니다. 그 새끼들이 다 자랐을 때 토해내기 위한 수단으로 작은 돌도 함께 입 속에 물고 다닌다고 합니다. 작은 돌이라고 생각하여 입에 물고 있는 것 가운데는 호수에 떨어뜨린 금화나 은화가 섞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고기를 지으신 이가 베드로에게 세금 낼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은 과학적이라고 어류학자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동화처럼 들릴 수 있는 ‘요나를 삼킨 물고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군산대 어류학자 최윤 교수는 ‘요나를 삼킨 물고기’를 7년간 연구한 결과 그 물고기는 백상아리(흰색 상어)로 판단된다고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참고: 2004년도 창조과학 학술대회 논문집 p203. 한국창조과학회 발간). 요나 1장에서 요나가 살 수 있는 조건의 물고기는 첫째, 씹지 않고 그냥 삼켜야 하고 둘째, 3일 이상의 저장능력이 있고, 셋째 가끔 토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고래도, 고래상어도 아닌 식인 상어중의 하나인 백상아리(흰색상어)를 양어장에서 60일 이상 관찰한 결과, 이 물고기는 먹이를 주면 통째로 삼키며, 30일 이상 먹이를 소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뱃속에 저장하는 경우도 있고 때때로 위속의 먹이를 토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식인 상어는 이스라엘의 수도가 위치해 있는 지중해나 우리나라의 군산을 비롯한 육지 가까운 연안에서 자주 출현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 백상아리는 남자 어른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 2장 4절에 보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개역개정 성경)라고 한 것은 ‘미워도 다시 한번’(?) 성전을 바라보며 해저신학교(?)에 입학한 요나가 마치 졸업성명서를 발표하듯 기도할 때 그 성명서에 대한 답사(?)로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10)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할 때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백상아리로 판단된다고 최윤교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고전2:15) (‘판단하다’의 원뜻은 평가, 즉 ‘시험하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분별하다’). “들의 百合花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6:28)(‘보라’의 헬라어의 뜻은 ‘주목해서 생각하다’.‘주목해서 관찰하다’)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과학적인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에레모스산의 70~90 종류의 百合花를 잘 관찰하여 그 아름다움, 그 기이함, 그 완벽함이 누구의 솜씨요, 걸작품인지 알아내라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들의 선언문’에는 ‘학교에서 창조의 증거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인본주의자들도 창조의 증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척 콜슨은 “지난 수십 년에 걸친 교회의 실패는 성경의 진리를 모든 윤리와 피조 세계의 질서를 설명해 주는 종합적인 삶의 체계 및 세계관으로 정립시키지 못한 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교회마다 창조론을 분명하게 가르쳐서 철저한 창조신앙을 회복하고 견지(堅持)하게 하므로써 과학시대에 살고있는 청년들을 살리는 영적 쇄신 운동에 교회가 앞장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과학자(사람)는 모방’ ‘창조는 과학, 진화는 비과학’입니다. 성경은 비과학적인 책이 아니라, 초과학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연구ㆍ적용해 나가므로써 우리의 영ㆍ육이 건강한 복된 생애를 누리시길 원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worthless things)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renew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시119:37)
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 복된 생애를 누리시고 인생의 목표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참 창조주로 온전히 믿고 인정하며 그 이름을 높여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대전 카이스트교회
김수웅 창조과학 담당목사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40
참고 :
목사님과 평신도, 그리고 창조과학
창조과학 사역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가 교회 강연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 창조과학이 처음 선을 보일 1980년 당시부터 사실 창조과학은 전국의 각 교회마다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크고 작은 창조과학 강연을 통해 오늘의 발전된 모습으로 성장해 왔다. 초창기 한국 창조과학을 이끌어온 김 영길 현 한동대 총장을 비롯하여 수 많은 헌신된 한국의 기독교 과학자들이 교회의 요청이 있을 때면, 모이는 인원에 상관 없이 산간 벽지를 멀다하지 않고 강연을 하며 일궈온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 사실을 과학자의 객관적인 입으로 증거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쌓는데 도움을 줄 뿐만아니라, 궁극적으로 창조의 역사성에 기초한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국창조과학회의 그 신념과 열정은 오늘도 하나의 전통처럼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가면 갈수록 진화론적 과학주의에 물든 이 시대에 창조과학이 갖는 그 시대적 사명의 중요성이 더 해 가고 있다.
그러면, 창조과학 사역은 과연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첫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요, 둘째는, 비록 교회 안에는 있지만 성경의 내용을 부분적으로만 믿거나 그 역사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별명답게 수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성경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모세오경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먼저 소개하며 그 기초 위에 예수의 부활과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설명하였던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행 14:8-18; 17:22-31).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날 학교의 일방적인 인본주의 교육으로 인해 진화론을 자연스럽게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고려해야할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는 이유를 파고 들어 가면, 결국은 그들의 마음 속에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어떤 내용들이 비과학적으로 비쳐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창조의 사실만 하더라도, 마치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인양 세뇌적 교육을 받아온 상태에서는 성경의 내용을 거부감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것이 불보듯 훤한 것이다. 이것은 비록 예수의 복음을 어떤 경로로든지 믿게되어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해당되는 중요한 문제인데,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말씀에 기초한 균형잡힌 신앙이 되지 못하고, 그 신앙이 실생활과 따로 존재하거나 급기야는 위기가 닥쳤을 때 쉽게 신앙을 잃어 버리기가 십상이다. 결국, 이말은 창조과학 사역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 교회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세상 밖의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전도하고자 할 때는 물론이고, 교회내의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인류의 참 역사적 기록임을 확신을 갖고 믿게 하는데, 창조과학 사역만큼 적절한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교회가 이러한 사실을 숙지하고 헌신된 창조과학 사역자들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경우에 교회의 창조과학 강연을 일반인 보다는 청년부를 주 대상으로 하거나, 주일의 정규 성경 과목으로 채택하여 지속적으로 교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기 보다는 주중에 단회성 특강으로 그치거나, 그나마 성도들은 모아 놓고 담임 목사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전도사나 부목사가 대신하여 얼굴을 내비치는 지나가는 행사 정도로 가볍게 치루고 마는 경우들이 있다. 청년부는 청년부대로 필요한 집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오히려 일반 성도들에게 강연이 필요한 경우가 더 많다. 교회의 사정상 단회성 특강이라도 계획한다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창조과학 사역은 교회내에 정규 프로그램으로 정착하여 자녀 및 일반 성도들의 신앙 교육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는게 필요하다. 전도사나 부목사가 행사를 진행해도 창조과학을 통해 은혜를 받는데는 달라지는게 하나도 없지만, 그 교회에 가장 큰 책임을 맡고 있는 담임목사의 참석과 관심은 결국은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창조과학 강연을 다녀 보면, 일반적으로 평신도들의 반응이 데체로 더 뜨거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다른 성경 공부에서 깊게 다루지 않고 지나간 부분들이나, 과학적 혹은 이성적 경험과 상충된다고 여겨졌던 성경의 부분에 대하여 성경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시원한 답을 얻게 되었을 때 그들의 표정이 밝아짐을 많이 보게 된다. 반면, 교역자들의 경우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다.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책을 맡은 교역자들이 어찌 창조를 믿지 않겠냐마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창조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뜻 밖에도 진화론과 혼합된 창조의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쉽게 이야기 하면,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었다는 진화론적 가정하에 성경의 6일 창조에 나오는 하루를 지질학적 긴 연대로 인식 한다든지, 하나님께서 진화의 가정을 거쳐서 생물을 만드셨다든지, 심지어 노아의 전 지구를 덮은 홍수를 그저 중동지방에 있었던 지역 홍수 정도로 취급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런 사고 방식들은 모두 인본주의 학문의 영향을 받은 신학의 결과로써, 많은 수의 신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기독교 대학에서도 버젓이 교과 과정으로 가르쳐 지고 있는 내용들이다. 실례로 필자가 L.A.에 있을 때 다니던 A 교회에서는 교회행사의 하나로 외부 사람을 초청하는 광고를 내고 창조과학 강연을 준비한 적이 있었는데, 강연을 일주일 앞둔 어느날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부터 느닷 없이 지구의 나이가 젊다는 증거가 무엇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중에 보니 그 목사님은 성경의 6일 창조와 진화론에서 가르치는 오래된 지구의 연대 사이에 본인 자신이 상당한 갈등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만년 이내의 젊은 지구를 증거하는 많은 지질학적 증거 앞에서 자신의 갈등을 모두 해소하고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사실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해 들은바 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다른 목사님들도 많이 계실지 모르겠다.
창조과학 사역은 창조의 주제에 전문적인 사역이다. 과학적 이면서도 동시에 성경적으로 모순이 없는 내용만을 소개하며,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게 궁극적인 존재의 목적이다.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들여다 보면,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에 어떤 교육을 받았던, 그래서 어떤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건, 창조의 문제는 그 전문 동역자에게 도움을 받는게 현명한 목회의 방법일 듯 싶다.
사실, 한국 창조과학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셨던 분은 다름 아닌 CCC의 김준곤 목사였으며, 그 뒤 하용조 목사께서 시무하시는 서울 온누리 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뒤 따름으로 오늘의 창조과학이 있기 까지 크게 공헌 하였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나 20 세기 최고의 설교가 중의 하나로 존경 받는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성경의 창조를 조금도 기록된 바대로 의심 없이 믿었던 사람들이다. 문제는 평신도냐 목사냐가 아니라, 결국 우리의 믿음의 분량인 것이다.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가?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가? 나의 이성으로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 나오더래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임으로 사실로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되집어 물어 봐야 될 질문이 아닌가 싶다. 차마 드러내 놓고 고민 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창조 기록에 웬지 자신이 없는 목사님들이나, 물어 봐도 시원한 대답을 어디서도 구하지 못해 답답해 하던 평신도들이나,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자연의 경이를 통해 말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맘껏 그 분을 찬양하기 원하는 주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창조과학 사역이 자그마한 도움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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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합하여 세워질 기독 지성인의 성막
이곳 College Station에서는 BSF (Bible Study Fellowship) 성경공부 'Life of Moses' 가 진행중 입니다. 출애굽기 31장을 묵상하던 중 다음의 구절에서 한 비젼(vision)을 보게 되었습니다.
“브사렐(하나님의 그늘(보호)속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Spirit of God)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skill) 와 총명(ability)과 지식(knowledge)과 여러 가지 재주(crafts)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출 31:3-4).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출31:6)
“무릇 내가 네게 명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 (출31:11)
즉 하나님께서 믿음의 지성인들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그들의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재주를 총동원하여 하나님께서 임재 하실 성막(Tabernacle)을 지음으로 만천하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학문과 교육과 예술과 기술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그 연구와 창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되 세속적 생각대로 임의로 하지말고 계시하여주신 성경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니” (고후 10:5)
“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자연과학, 형이하학, 예술)과 보이지 않는 것들(인문사회 과학, 형이상학)과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그(예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 2:3)
“이는 너희가 그(예수)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고전 1:5)
지금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모든 학문의 패러다임은 진화론적 인본주의입니다. 즉 지금의 학문이란 인본주의의 바벨탑을 쌓고 창조주 하나님께 대적하여 높아진 것입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패러다임 아래서, 교육현장에서, 연구실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이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는 삶의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의 장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기독 지성인들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공급하여 줄 것이니 공교한 일들을 연구하여 보라고 지명하여 부르시며 약속하십니다. 세상 학문의 패러다임에 끌려 다니지 말고 내가 명한 대로 즉 성경말씀으로 계시된 내용을 중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성막의 건축은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함께 동참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25:2-9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 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한 두 사람의 힘이 아닌 모든 자원하는 기독지성인들의 합력된 손과 발과 머리와 재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학문과 문화/예술의 장막을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작은 금이나 홍색, 자색실을 바쳤을 때, 과연 그것이 성막을 짓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어우려져 결국 광야에 성막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한 적은 재물과 작은 학문적 노력들이 합하여 졌을 때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바벨탑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현 학문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릴수있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학문과 예술의 참 진리의 성막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곳에 주님이 모든 학문과 예술의 주인으로 영광 중에 거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과학, 철학, 학문, 예술들이 다 무용한 것이므로 버려져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12장 35-3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고 말씀 하십니다.
성막을 지을 수 있었던 모든 재료들이 결국 애굽사람들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창세기 15:13-14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예언적으로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애굽사람들로부터 받은 재료를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위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애굽의 재물들이 그 전까지는 피조물/우상들을 숭배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쓰여졌던 것들입니다. 똑같은 재료들인데 앞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막을 세워가는데 사용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지금까지의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지적, 예술적 활동들은 다 쓸모없는 것이니 쓸어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축적된 연구와 자료들을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기술, 예술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은 배경신념의 문제입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도 과학이 절대적 진리가 지배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지배한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인간과 우상과 피조물을 숭배하는데 쓰였던 애굽의 재물들을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막 건축의 재료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 두 사람의 헌신이 아닌 모든 기독 지성인들의 각 분야에서의 공헌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금이나 놋이나 청색실이나 홍색실 각각의 모습으로 바쳐질 때는 도대체 성막을 언제 세울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바쳐지지 않고는 성막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에 자원하는 사람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은 모세시대 사람들의 손과 발을 통하여 광야에 세워졌습니다. 당신은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학문과 예술의 성막에 대한 비젼을 갖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 시대의 브사렐로 지명하여 부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구분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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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창조 복음주의 (창조의 타당성 제 2부)
(Creation Evangelism, Part II of Relevance of Creation)
Ken Ham
주님은 왜 세계적인 규모로 창조과학 선교를 일으켰을까? 그런 조직이 왜 중요할까? 창조과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진화론을 박살내는 일을 우리한테 맡기시려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 사회 안에 복음을 수용할 수 있는 기초를 다시 복원하시려는 것도 주님의 목적이라는 것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교회가 사회 속으로 창조 복음운동을 전개하려 할 때면, 인본주의 철학이라는 역류와 맞닥뜨릴 뿐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이교에 물들어가는 문화 속에 뿌려진 우상숭배의 씨앗들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진화론과 사회
오늘날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동성도착행위의 증가, 임신중절행위에 대한 지지율의 증가, 권위에 불순종하려는 사람들의 증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 옷을 벗으려는 사람들의 증가, 포르노 음란물들의 증가, 등등 어찌 이런 현상들뿐일까! 우리는 또한 이런 것들도 알게 된다. 즉, 교회는 예전처럼 효과적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크리스천들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복음운동가들은 예전에 받았던 반응들을 이제는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자진해서 자녀들을 주일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교육제도는 더 이상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교회들은 신도 수가 유지될 정도이거나, 아니면 문을 닫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교회부흥이 극적으로 일어난 경우는 거의 없다. 무디 (Moody)는 생전에 자기 주일학교에 수천을 헤아리는 학생을 더 받았었지만, 오늘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만 하여도 비웃고, 복음에 열린 마음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 수없이 많은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창조에 대한 믿음이 사회의 기초였다. 각급 학교와 대학교에서 창조의 믿음을 가르쳤다. 창조신앙의 기초는 절대적 가치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규범을 만드시는 권리를 가지고 계셔서, 우리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 주신다는 믿음이다. 사람들은 주일학교에서 이러한 기독교적 절대 가치를 가르쳐주기 때문에 자진해서 자녀들을 주일학교에 보냈었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도 전반적으로는 성경에 기초한 이러한 율법들을 인정하고 준수하였다. 동성행위자들은 투옥되었고, 임신중절은 살인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찰스 다윈이라는 사람으로 인해서 사기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가 자연선택과 종의 변이 문제에 어느 정도 공을 세웠던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조부로부터 배웠던 진화론적 이념을 적용시켜 과거에 관한 학설을 창출해내기 위하여 모든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하나로 묶으려하였다. 그런 다음 다윈은 진화론 학설을 일반화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이론을 그대로 믿게끔 오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크리스천들도 진화론에 속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신앙이다. 교회는 그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고 해야 옳다.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진화론을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론은 우리 사회에 만연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 같이 사람은 죄 많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인본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빛보다는 어둠을 사랑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한테는 옳은 것보다는 그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플레이보이 잡지와 성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사람이 어떤 쪽을 집어들고 읽는가를 지켜보면 누구라도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비-크리스천들은 진화론 사상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념체계로 쉽게 수용하였다. 그들은 우리도 과거도 현재도 우연의 존재라고 우긴다. 예컨대 우리를 소유하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우리가 소유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람이란 어떤 누구한테도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상이 사회 속에 확고히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묻기 시작하였다. 즉, '만약 진화론이 진리고 창조주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혼에 관한 법률은 왜 있는가? 성적 탈선행위를 규제하는 법률이 왜 있는가? 우리가 옷 벗기를 원하면서도 왜 옷을 벗을 수 없는가? 왜 우리는 임신중절을 해서는 안 되는가? 여하튼 태아를 죽이는 행위는 필요하지 않는 동물을 제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시 말해서, 진화론의 신념체계가 사람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기 때문에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인본주의 도덕률의 기초로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더 이상 옳고 그른 기준은 없었고, 또 현재도 없다고 주장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근본적인 대결은 창조신앙에 기초를 둔 기독교 신앙, 즉 절대론과 '모든 것은 우연이' 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인본주의적 종교관, 즉 상대적 도덕률과의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이다.
이 두 체계 중 어느 하나가 결국에는 다른 하나를 압도하고 퇴출시키게 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오랫동안 사이좋게 공존할 수는 없다. 창조신앙이 사회의 기조를 이루고 있을 때에는 임신중절 지지자와 포르노 산업 지지자들과 같은 부류들, 다시 말해서 절대 가치를 부인하는 자들이 형무소로 갔었다. 그런데 진화론이 우리 사회의 기조로 수용된 이 마당이고 보면, 과연 앞으로는 누가 형무소행이 될 것인가? 성경의 절대적인 말씀들을 순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이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은가?! 이 말은 결코 과장된 한탄이 아니다. 만약 현재 우리 사회의 진행방향에 그 어떤 변화의 계기를 가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여러 가지 입법안들이 그러한 추세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루마니아의 최대 성결교회의 목사였던 요셉 톤 (Josef Ton)은 1982년 4월 15일, 목요일자 호주의 크리스천 신문 'New Life'에 이렇게 진술하였다. '서유럽의 기독교가 파괴된 것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 중 하나는 진화론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유주의 이론이다... 자유주의 이론은 성경과 우리의 신앙에 적용된 진화론 바로 그것이다.'
제임즈 헬피와 마르티 헬피 (James and Marti Helfi)의 저서 'By Their Blood-Christian Martyrs of the 20th Century' (Most Media 판)의 49쪽과 50쪽에 보이는 해설을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서방세계로부터 유입되던 새로운 철학과 학설들은 기독교에 대한 중국인의 신앙을 좀먹고 말았다. 소위 주류 개신교 교파들의 물결은 진화론을 가르치면서 성경의 초자연성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감리교파, 장로교파, 조합 교회주의자파, 그리고 북침례교파가 특히 타격을 받았다. 영국의 버트런트 러셀 (Bertrand Russel)은 무신론과 사회주의를 설교하였다. 그와 같은 선생들의 파괴적인 저서들은 정통 기독교 교리를 훼손하였다. 그 결과로 정통 복음 선교단들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던 중국의 지식인층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에 취약한 체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진화론은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이 사실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바울과 희랍인들
자, 그러면 이 일을 위해 무엇을 하여야 하겠는가? 주님은 대단히 강력한 도구를 마련해 주셨다 ━ 그것은 바로 창조 복음운동이다. 오늘날 교회가 예전에 비해 그토록 비능률적이 된 주요 이유는 교회가 펼치고 있는 복음전도 방법이 옳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교회는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뜻을 선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전처럼 효과적이 아니다. 이 점에 관해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14장과 17장에 희랍인들한테 벌렸던 복음전도 운동에서 두 가지 특별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유태인들한테 벌렸던 전도운동과는 사뭇 달랐다. 바울이 그리스로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고 창조주이신 참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거기서부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희랍인들은 일종의 진화론을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들은 자기 자신들 위에 권능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다. 우리는 또한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23)에서 이교도들(희랍인들) 한테는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십자가의 설교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들한테는 그것은 장애물이었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왜 바울이 희랍인들한테는 창조론적 기초 위에서 접근하였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희랍인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고, 그 대신에 일종의 진화론적 형태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기본을 갖게 하였던 것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사색을 잘못된 틀 속에 묶이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십자가의 설교는 그들한테는 순전한 엉터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희랍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전에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바탕을 그들 속에 마련하여야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선교의 기초로 창조의 메시지를 먼저 설교하였다. 거기서부터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메시지를 설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태인들에게 설교를 할 때마다 그는 창조의 메시지보다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가르침을 먼저 설교하였다. 유태인들은 이미 올바른 기초가 되어있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고의 올바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니 어쩌겠는가!
지금이야말로 교회는 각성하고 예전에는 유태인들의 사회와 같았던 우리 사회가 더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희랍인들의 사회처럼 되어버린 사실을 직시하여야 할 때이다. 예전에는 창조사상이 우리 사회의 기초에 자리하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도하는데 크고 긍정적인 반응을 효과적으로 거둘 수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 기초가 거의 무너져버리고 그 자리에 진화론 사상이 차지하고 들어앉은 꼴이 되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교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창조메시지의 기초를 구축하여야 할 것이다 ━ 복음을 온전히 세울 수 있는 기초가 그것이다.
우리는 다량의 신약성경과 시편, 그리고 잠언을 배포하는 전도가 유행처럼 되어버린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이들의 선교활동에 창세기 1장에서 11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면, 바울이 사도행전 14장과 17장에서 사용하였던 것과 같은 뜻으로의 복음전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 중에서 이 부분을 읽었던 사람들의 삶에 복음전도의 효과가 더욱 크게 나타날 것을 믿는다.
복음전도의 방법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것, 회개의 필요성, 그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모든 결과는 성령님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설교는 충분하다고 느끼는 크리스천이 많다. 그렇지만 초기의 복음전도자들은 전도 대상에 따라 설교를 다르게 하였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실예들이 사도행전과 복음들 속에 잘 나타나있다.
요한 4장 -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생명수'를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2장 - 베드로는 설교를 오순절 날에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3장- 베드로는 일으켜 세워주었던 절름발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게 하였다.
사도행전 7장 - 스데반은 유태의 산헤드린 (Sanhedrin) 평의회에 역사를 교습하였다.
사도행전 17장 - 바울은 이방인 (희랍인)에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해 설교하였다.
주님은 창조과학 선교를 세계적인 규모로 펼치시어 우리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도구가 준비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들 하나님의 권속들이 창조신앙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때엔 우리들은 이웃에게 효과적인 진리 전도 방법을 소홀히 취급하였던 결과로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창조과학을 이용한 전도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도방법에 속한다고 믿는 우리의 입장이다━창조과학 전도는 기독교 교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초에 관계하기 때문이다━문제는 그 기초가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 제거된 채로 있지 않은가!
우리가 이 메시지를 호주와 미국, 그리고 여타 다른 지역에서 선교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곳 사람들에게 창조(Creation)와 같은 창조선교 자료들 배포하였다. 그들도 창조론 분야에 관한 문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할 때 이 자료들을 사용하였던 결과로 상대방들이 복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이 나올 때면 그냥 조소로 대응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창조 복음전도가 효과를 나타난 것이다.
씨뿌리기와 추수
씨 뿌리는 자의 우화를 생각해 보자. 씨가 자갈밭이나 가시밭에 떨어졌을 때, 씨는 싹을 내어 자랄 수 없다. 씨는 준비된 토양에 떨어졌을 때에만 자랄 수 있다. 우리는 씨를 뿌린다, 복음을 상징하는 씨다. 우리가 뿌린 씨가 진화론 철학이라는 가시밭 토양에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뿌린 씨가 동일과정론 지질학이라는 자갈밭에 떨어지고 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준비된 토양이 필요하다. 창조 전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온전히 밭을 갈아서 파종과 추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사회로 나아가 창조 전도를 시작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한 번 상상해보자! 창조전도는 교회부흥에 기여할 수 있는 전도의 방법 중의 하나로 기대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교인이 교회를 찾아오면, 제일 먼저 성경 중에서도 창세기를 읽을 것을 권해야 옳다. 그래야만 새 교인은 기독교에 관해 모든 것을, 특히 기독교 교리의 기본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만 가지고서는 아무런 결과도 거둘 수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속에 기독교 창조 신앙의 잔영이 아직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은 우리 사회 속에 하나님이 지존한 존재이시고, 성령님은 인간의 전도사역의 실패여부에 의해 전혀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창조 신앙의 잔영도 매우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서, 사회의 반응은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서 옛 희랍사회처럼 되어가는 우리 사회에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도구를 사용하여서 기독교 교리의 기초가 온전히 회복되어, 교리의 구조가 건전하게 설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주장들이 들린다. 즉, '당신은 모든 종교의 교리와 신앙 그리고 활동의 자유(tolerance)를 인정하여야 한다.' 이 말에 이렇게 대응하는 크리스천의 말도 들린다. 즉, '나도 그래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야 한다.' 호주에는 '신앙의 자유 (Toleration)' 라고 호칭되는 단체가 있다. 그들의 주목적은 호주 안에서 모든 종교의 교리와 신앙, 그리고 활동의 자유를 신장하는데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반대하는 내용을 일일이 내걸었다. 예컨대, 그들은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다. 모든 종교의 교리와 신앙, 그리고 활동의 자유라고 하는 그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의 행동은 절대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는 '나는 길이요'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여러 길 중의 하나의 길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나는 진리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진리로 가는 여러 가지 다른 길과 수용할만한 여러 가지 접근 방법 중의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만약 누구라도 절대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것은 창조론 대 진화론의 대결이라는 과학에 관한 학술적인 토론에 한정된 대결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 교리의 창조론적 기초 위에서 표방하는 절대 가치론을 위해 진화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인본주의의 상대론적 도덕률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다른 두 종교 간의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속아서 인본주의 종교의 기초가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 아니다. 진화론은 과거에 관한 일종의 신념체계다. 그들은 그들이 세운 이 신념체계를 이용하여 세상에 그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원하는 것이면 어떤 것도 할 수 있으며, 우리를 지배하는 왕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리를 지배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 종교를 정당화한다. 이런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돌이다. 이것이 우리가 싸우려는 대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일러준 일을 해낼 준비가 되었을까? 분연히 일어서서 성경의 가르침을 죽기로 지킬 각오가 되어 있을까? 우리는 지금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들이 교수하는 내용에 분연히 반대할 준비를 다 갖추었을까? 교수들이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일어섰을 때 그들이 하나님에게 역행하는 편견을 가진 죄 많은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베드로후서 3:3-7은 흥미있는 예언으로, 말세에 사람들은 진리를 '부러 잊으려' 할 것이라고 하였다━그들은 그 어떤 증거를 대어도 진리를 고의로 거부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그들이 자진해서 다음의 세 가지를 거부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 창세에 지구는 물에서 나와 물로 덮였었다━창세기에 기록된바 그대로다. (현대 지질학은 지구가 용해된 덩어리 [molten blob] 이던가, 그와 비슷한 고체형으로 시작되어 지구가 완전히 냉각되기 전 수 백만년 동안은 물이 없었다고 한다.)
(2) 지구는 노아의 홍수 당시 물로 덮였었다. (현대 지질학은 물론 수많은 교회들까지도 지구 역사상 전 세계적인 규모의 대홍수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한다.)
(3) 장차 불로서 내리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인류의 멸종은 태양의 냉각으로 인한 지구의냉각으로 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만약에 현대 지질학이 역사상 전 세계적 규모의 대홍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한다면, 그들은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들도 예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였던 것처럼, 다음에는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증거가 아무리 확실해도 일부러 (혹은 고의로) 진리를 모르려고 한다. 그래서 이 싸움은 증거에 관한 싸움이 아니고, 믿음의 싸움이다.
이 창조의 메시지가 전파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 메시지가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왜 무법행위와 동성애가 발호하는지, 왜 임신중절 지지자들이 임신중절을 지지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사회악들이 발호하는 이유를 알게 된 이상,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 열쇠를 가진다는 것은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을 알아내는 도구가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창조의 메시지야말로 진정으로 강력한 도구가 아니겠는가! 우리들의 주된 목적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가능한 한 많은 비-크리스천들은 물론 크리스천들한테 이 창조의 메시지를 전파하는데 열과 성의를 다 해야 할 것이다.
*Ken Ham :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about/ham.asp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6/i2/creationII.asp
출처 - Creation 6(2):17, November 1983.
창조론 대 진화론 -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christiananswers.net
권위 (Authority)
하나님 말씀의 권위 대 인간 의견의 권위
이것이 최우선적인 문제이다. 여타의 문제들은 작거나 크거나 모두 이 문제와 연관된다. 우선, 우리들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 말씀은 과연 인간의 의견과 양립할 수 없는가 하는 측면부터 정립해 둘 필요가 있다. 아래 표는 이 두 화두간에 존재하는 주요한 상충점들을 개관하고 있다.
'인간의 의견' 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우리는 인간의 '기존의' 역사관을 정립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이 기존의 인간 역사관을 옳다고 가르친다. 이 현실을 인정하고, 그 다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라는 화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창세기 1장에서 11장의 내용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구구하게 많은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 문제의 판단을 돕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기준들을 적용하려한다.
1. 가능한 최고의 번역을 통하여 원문이 뜻하는 일차적이며 솔직하고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를 파악한다.
2. 히브리어 원문이 의도하는 의미에 대한 언어학자들의 압도적 의견일치를 확보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자들의 의견을 참고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일반화된 세속적인 의견과 원문을 '조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도출하려 기도하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James Barr 교수는 세계의 유수 대학교의 히브리어 교수들 가운데 창세기 1-11장의 저자의 의도가 글이 읽히는바 그대로 단순하고 솔직하였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 교수는 없다고 썼다. 다시 말해서, 전 지구적인 홍수, 보통 날짜로서의 엿새, 모든 사람들은 참 사람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는 점, 모든 사물의 시작 때부터 기록하는 연대기 (chronology)로서 작성된 가계혈통, 등등.
신약성경도 창세기 초두의 몇 장에 말씀들을 가감 없이 솔직한 이해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려 한다. 요컨대, 일반화된 성경외적 세속적 의견을 무시하고, 종교개혁 이후 시기에 있었던 모든 유서 깊은 해설에서 볼 수 있는 바대로, 무엇보다 먼저 성경적인 판단기준만을 사용하려한다.
중요한 불일치 점 (모두 20 여 가지가 넘는다.)
주제 | 하나님의 말씀 | 사람의 의견 |
출현한 순서 | 태양 이전에 지구, | 지구 이전에 태양, |
최초의 사람 | 흙으로부터 | 이전에 있었던 동물의 후손 |
창조에 걸린 시간 | 만물은 | 모든 것은 |
죄의 심판으로서 | 전 지구적인 홍수 | 지역적인 홍수 |
죽음, 폭력, | 아담의 불순종으로 | 아담 이전에 이미 약육강식과 |
사람의 타락과 저주 | 피조물 모두에게 영향 | 사람 이전에 이미 수 십억 년 동안 |
여기에서 기독교인는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
1. 일반화된 세속적인 관념을 포기한다.
2. 성경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
3. 인간의 의견과 조화를 기도한다.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무오성에 관해서 수없이 많은 의견들이 피력되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 자명하다. 간단히 말해서, 만약 성경이 얼마쯤은 진리를 얼마쯤은 오류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오류인가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 하나님이나 기독교 또는 예수님에 관해서 무엇을 어떻게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어쩌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명제도 하나의 오류일는지 모른다.
'A는 非A가 될 수 없다' 라는 논리의 기본법칙을 어기면서까지 진리를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로 분리하려는 기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죽은 예수는 몸으로 살아났든가, 아니면 살아나지 않았다. 살육행위가 아담 이전의 세상에도 있었든가, 아니면 없었다. 그리스도는 영적 형태로 즉 실존적으로는 진공형태로 인간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의 장구한 혈통의 일부분으로 치밀히 펼쳐놓은 역사의 구조 속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기독교적 신앙이 신임을 받으려면, Schaeffer가 호칭한 '역사와 우주'의 본질에 관해 성경이 언급하는 대목은 반듯이 진실이 틀림없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일을 말할 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나라의 일을 말할 때 믿을 수 있겠는가? 라고.
참 성경에 대한 신앙은 과학 교본이 진리로 인정하는 계시만을 철저하게 주장하여야 한다는 뜻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본성 (The Nature of God)
이 질문은 '신'이 진화의 기능으로 창조의 사역을 하였는가 하는 명제이기보다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셨고, 또 심지어 창조하실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명제다.
1. 하나님의 선하심 - 하나님은 창조하시기 위해 죽음과 투쟁을 이용하셨을까? 또 죄가 이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고통의 오랜 세월을 통해서 강자가 약자를 쓸어버리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살육으로 얼룩진 세상을 보시고, 그런 폭력의 정점에 있는 세상과 또한 병고에 찌든 인생살이를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셨을까?
2. 하나님의 진실하심 - 만약 하나님께서 진화의 기능으로 창조의 사역을 하셨다면, 실질적으로 모든 성경 독자들을 역설적인 인상으로 압도하면서 말씀 중에 사람들을 오도하셨을까?
하나님의 기적 사역의 능력과 지혜.
창세기적 창조를 부정하는 사람은 복음서의 기적들도 동반해서 부정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 만약 어떤 신이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하여 수백만 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인과절차(因果節次)'를 밟아야 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없이 많이 막다른 골목과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뒷골목과 마주친다면, 그런 신은 오랜 동안 시신으로 있던 사람을 눈 깜작할 사이에 되살리고, 수천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의 떡과 물고기를 '無로부터 (ex nihilo)' 창조하고, 지구의 중력을 부정하듯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신은 결코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성경적인 우주의 구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리고 하셨던 세상이 아담의 죄로 인해서 망가졌고 저주를 받아 신음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죄도 죽음도 없는 천국으로 회복될 것이다. 창조/타락/회복이라는 구조는 히브리어나 희랍어 원문의 곡해(曲解)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신 구약의 조직을 통하여 상세하게 짜놓은 구조다.
복음서의 논리적 기초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진정한 이유는 인간의 타락 (Fall) 때문이다. 최초의 참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죽음이 왔지만, 두 번째 참사람으로 인해서는 죽음에서부터 부활이 왔다. 아담의 죄와 죽음으로의 타락이 없었다면, 왜 그리스도가 죽어야만 하는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거대한 간극을 만들어버린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왜 속죄의 피가 필요하겠는가? 복음서에 대한 설교와 일반화된 세속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논리적 모순들은 진화론 사상이 야기한 여러 문제점들에까지 연결된다.
복음주의 (Evangelism)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이 말씀은 아름다운 말씀이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있었던 것으로 (그래서 죄의 응보는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진화된 원숭이 이라는 것으로, 성경은 출애굽기 20:11 (엿새 동안에 내가 모든 것을 만들었으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명히 신화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으로, 죄를 범하는 행동은 동물을 조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그리고 어쨌거나 이런 말들을 담고 있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임하지 않는 문화에서 위의 말씀은 무슨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겠는가?
호교론 (護敎論, Apologetics)
베드로는 우리들을 보고 "소망을 가져야할 이유" 즉 신앙을 지켜야할 이유를 설명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열심히 설득하고 있다. 엄청난 공격으로부터 우리가 꼭 지켜야할 가장 큰 대목은 창세기 내용에 대한 것이다. 창세기는 기원에 대한 책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모든 구조적인 기초를 직 간접적으로 담고 있다. 기독교 교리의 논리적 근거인 이 기초를 파괴하면, 기독교 교리의 구조는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바울은 창조설계의 증거가 너무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학교 어린이들은 자연의 설계를 설명하는 데 설계자의 존재가 필요치 않다고 배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이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의 배후에 있는 동력(dynamic)은 모든 사물은 제 나름의 인과법칙과 고유특성을 지니고 존재한다고 설명하려 한다. 창조된 순서대로 초월적인 하나님의 기적의 간섭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배 (Worship)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경배와 영광, 그리로 권세 (power)를 받으실 자격이 있다고 일러준다. 바울은 피조물 그 자체를 숭배하기 위하여 창조주에 대한 예배를 포기한 자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진화론의 일관된 사상에 의하면 창조에 대한 영광을 받을 자를 '자연' (자연을 창조력으로 보고)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와 윤리 (Society and Ethics)
죄야말로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사회에서는 진화론이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데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 적나라한 예를 우리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사회를 풍미하던 일관된 진화론 사상에서 보았다. (비록 크리스천 사회에서 있었던 종교재판과 십자군의 잔학행위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세계관은 진화론적 세계관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대조적이다). 세계대전 이전의 서방사회의 많은 과학자들조차 정신박약자와 유전병약자들의 제거정책을 '과학적으로 계몽된' 정책이라고 떠받들었던 적이 있었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무법행위 (우리를 소유할 자가 없으니 우리를 지배할 자도 없다), 임신중절 (결국 우리들은 너나없이 모두가 동물이다), 결혼의 파탄 (결혼과 이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언제나 창세기에 기록된 역사적 근본까지 소급한다), 그리고 더욱 대담하고 노골적인 동성간의 성행위, 이 모든 사회적 병폐들은 반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키워온 이 사회가 걷어 들이게된 당연한 결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christiananswers.net/q-aig/aig-c013.html
출처 - christiananswers.net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
(God as Our Creator!)
오늘날 기독교 사회 속에서,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 종종 소홀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잠시 생각을 해본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많은 중요한 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시 여겨야하는 기본적인 교리가 아닐까 싶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살아야할 의무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였다면, 우리 인간은 구세주 혹은 구원자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며, 이전 것들의 회복에 대한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의 도덕적 규범들은 (예를들어 결혼, 낙태, 동성애,포르노, 불법 등등) 창세기의 창조 사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하신 것처럼, 창조에 대한 믿음은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과 세상의 인본주의적 지도자들은 많은 기독교 국가들에서 보다 더 쉽게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교육적으로, 그리고 사회의 모든 언론 매체들을 통해서, 매우 강압적으로, 효과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신론, 불가지론, 이성주의, 부도덕성, 진화론적 철학, 믿음, 해석 따위로 끊임없는 폭격을 가하고 있다. 진화는 사실(fact)로서, 모든 영역의 사고속에 존재하며, 삶은 진화되어가는 과정 중의 한 부분으로 “설교” 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화를 증명하는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소위 “증거(proofs)” 라는 것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과학적인 관측과 사실들에 대한 진화론에 기초한 해석(interpretations)인 것이다.
화석 기록에 대한 예로 들어보자. 화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존재한다. 화석들이 어떻게, 왜, 그리고 언제 형성 되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실제로 관측된 증거들에 대한 해석인 것이며, 대게 우리의 철학적 믿음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화석 기록(증거)은 느리고, 점진적인, 동일과정설의 '진화론적' 과정에 의하여 해석되어질 수도 있고, 또는 비교적 최근에,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는 격변적인 사건과 과정에 의해서 해석되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지층 나무의 화석들은 여러 석탄층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여러 퇴적지층들을 관통하여 수직으로 서있는 화석화된 나무들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이들 여러 퇴적지층들은 쌓여지는데 수천년이 걸렸다. 그러나 홍수지질학에서는 이 퇴적지층들은 나무들이 썩거나 부패하기 전에,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형성되었다). 잃어버린 전이형태(transitional form)들은 어떠한가? 지난 세기동안에 멸종된 생물 화석들을 포함하여, 수백만개 이상의 화석들이 발굴되었고, 분류되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논란의 여지가 없는 '전이 형태'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전이형태의 생물로 가장 많이 주장되어지는 것이 (아직도 많은 교과서들에는 진화의 '증거' 로서 실려 있다) 시조새(archaeopteryx)이다. 현재 이것은 많은 진화론자들도 완전한 조류(true bird)로 인정하고있으며, 또한 시조새 보다 훨씬 오래된 지층에서(진화론적 시간 틀로) 완벽한 새의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명백하게 새들의 조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은 시조새 화석들이 처음부터 사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좋은 증거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사기로 입증된 여러 '인류의 조상'들과 다르지 않다). 화석 기록에서 진화의 가장 우수한 증거라는 것이, 모든 잃어버린 고리들을 아직도 잃어버렸다는 것이라면, 이제는 진화 모델에 대한 본질과 사실성(?)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아야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화가 먼 옛날에 일어났을 가능성으로 인해, 진화론은 매우 오래된 시간을 요구한다. 이 시간들을 지지하기 위해, 진화론자들은 자주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 결과들을 사용한다. 그것들은 거의 언급이 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사성 연대측정과 관련된 가정(assumptions)들과 비정상적인 결과(anomalies)들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가정들(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신념으로 가지고 있는)의 일부 또는 전부가 사실이 아니라면 (그들은 아마도 사실이 아니다), 연대측정 결과들도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많은 경우에서, 다양한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 방법들에 의해서 측정된 연대들은 서로간에 일치하지 않았으며, 또한 기대했던 연대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측정된 '연대들(dates)'은 간단히 무시되어지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결코 듣지 못하게 된다. 다만,그 결과들 중에 진화론자들의 생각과 목적에 맞아 떨어지는 것들만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유감스럽게도, 과학자들은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으며, 자주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 그 자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화론은 정말 과학적 이론이고, 창조론은 종교적 이론인가? 또는 둘 다 만물의 기원에 대한 종교적인 설명인가? 진화론은 사람들에 의해서 관측되지 않았던, 과거를 다루며,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과학(science)”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것은 예측, 관찰, 반복에 기초하고 있다. 진화론은 이중에서 최소 2 개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진화론은 실제로 과학적이지 않다. 오히려 진화론은 사실상 자연주의적 종교(또는 믿음 체계)인 것이다. 따라서 기원과 관한 두 개의 충돌되는 믿음 체계인, 자연주의적 진화론(naturalistic evolution)과 초자연주의적 창조론(supernaturalistic creation)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둘 중에 어느 것을 믿을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물론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시고, 오직 그의 말씀으로 밝히 드러내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마음을 연다면, 성경적 창조 모델이 이해되고 믿어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 대신 진화론을 선택하는 것일까? 성경적 통찰력을 가지고, 이에 대해 답을 찾는 것은 매우 쉽다.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반역하였다. 진화론은 창조주에 대한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그리고 전능하신 창조주가 정해놓은 절대적 도덕율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진화론적 믿음 체계에서, 인간은 단순히 동물들 중에서 제일 고등한 동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적자생존'의 결과이자,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의 결과로서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지배자“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며, 정의(right)도 스스로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와 세계를 지배하는 철학이 되었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사회적 문제들을 자라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크리스천의 믿음 체계를 신봉하고 믿기 위해서, 이 세상이 인본주의와 진화론에 기초한 믿음 체계를 받아들인 것처럼, 진화론에 관한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믿음 생활을 매우 용기 있고 힘차게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두 체계 모두 “믿음(faith)'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고, 둘 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어질 수 없다. 과학적인 증거들은 두 믿음 체계를 같이 지지하는 것으로 발견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증거들 중 다수는 진실로 완벽하게 창조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적인 믿음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늘 따라 다니는, 그리고 인본주의자들을 깊이 사색케 하는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이곳에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부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셔서 창조를 포함하여 그 분의 진리의 말씀을 밝히 알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번역 - 한동대 창조과학연구소
링크 - http://www.creation-science.sk.ca/GodOurCreator.html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30
참고 :
창조주와 기적 - 차원을 이용한 이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원점을 태초에 시작하심으로써(창1:1) 차원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우주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이시다.
기적은 자연법칙이나 정상적인 자연과정에 위배되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궁금해하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이 행한 기적일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그 분이 행한 창조사역과 기적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은, 예수님의 12 제자중의 하나인 빌립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라는 요구처럼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자연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치 못한다고 했다(롬1:20).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세계는 하나님이 계심을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지만(히13:1), 과학주의가 생활화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조건 믿으라는 주문은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에게서부터 더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차원을 이용하여 하나님과 기적을 동시에 설명함으로써 과학세대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우리는 수학을 통해서 점을 0차원, 점이 모여서 된 선을 1차원, 선으로 이루어진 면을 2차원, 면으로 구성된 공간을 3차원, 공간에 시간을 합한 것을 4차원이라고 배웠다. 4차원에 또 다른 차원요소를 결합하면 5차원이 될 수 있으며, 차원은 무한차원으로까지 연장될 수 있다. 인간은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로서 4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4차원의 세계에서 일어 나는 일들을 알지는 못한다. 즉, 인간은 현재 순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들만 알 수 있을 뿐, 아득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나 미래에 일어 날 일들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것도 우리의 기억력과 역사적인 기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일들이 발생할 지 전혀 알 수 없다.
차원이 낮을수록 하등하고 제한된 세계에 속하게 된다. 1차원의 세계에 사는 동물은 직선운동만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올라가다가 떨어지더라도 계속 벽타기를 즐겨하는 구더기, 앞으로만 가는 지렁이, 뱀 등을 1차원 동물이라 할 수 있다. 일차원 동물들은 2차원 이상의 세계에서 일어 나는 일들을 모른다. 반면에 2차원 세계의 동물은 직선운동뿐만 아니라 전후좌우 방향감각이 있지만 공간의 개념은 없다. 날지는 못하지만 외출했다가 자기 집을 찾아 올 수 있는 동물들이 이에 해당한다(두더지, 거북이 등). 2차원 동물들은 3차원 이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없고 3차원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3차원 세계의 동물은 방향감각과 입체적 공간개념을 갖고 있는 동물들로 정의할 수 있다. 3차원 동물들은 1차원과 2차원 동물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만, 역시 4차원의 세계에서 일어 나는 일들은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1차원 동물과 2차원 동물이 어떤 지점을 출발하여 목표지점까지 갔다 와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런데 가는 도중에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 장애물에 도착했을 때, 1차원 동물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만다. 그러나 2차원 동물은 장애물을 우회하여 목표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여기서 1차원 동물과 2차원 동물의 능력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차원 동물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1차원이라는 세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에 목표지점까지 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1차원 동물의 눈에는 2차원 동물이 장애물 지점에서 갑자기 실종되었다가 몇 시간 후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직선운동만이 가능한 1차원 동물은 장애물을 우회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목표지점을 돌아오는 것은 2차원 동물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일이지만, 1차원 동물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기적)이 두 번(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차원을 한 단계 높여서 깊은 웅덩이(3차원)에 2차원 동물과 3차원 동물이 빠졌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웅덩이에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 곳을 탈출해야 한다. 2차원 동물과 3차원 동물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2차원 동물은 탈출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하지만, 그 안을 왔다갔다 하거나 반복 선회하다가 지쳐버릴 것이다. 2차원 동물은 공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설령 누군가가 구원의 줄을 넣어준다 하더라도 탈출하지 못한다. 그러나 3차원 동물은 공간을 이용하여(예를 들면, 벽을 이용하거나 줄을 사용하여) 웅덩이를 쉽게 탈출할 수 있다. 탈출한 3차원 동물은 먹을 것을 잔뜩 구하여 웅덩이에 빠진 2차원 동물에게 갖다 준다. 2차원 동물은 3차원 동물이 갑자기 사라져서 거의 절망상태에 있었는데, 3차원 친구가 갑자기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생각지도 않았던 음식을 갖고 와서 너무 놀란다. 3차원 세계를 이해 못하는 2차원 동물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2차원 동물이 평생을 노력해도 안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다. 이 기적은 2차원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지만, 2차원 세계의 질서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단지 2차원 세계에 적용되는 과학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3차원 동물이 한 것일 뿐이다.
1차원이 2차원에 속하고 2차원이 3차원에 속한 것처럼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가 4차원 세계에 속해 있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2차원 동물들이 3차원 동물이 행하는 일들을 모르는 것과 같이, 단지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이다. 비신앙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기적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비과학적이라고 비웃는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많은 기적들은 역사적으로 있었으며, 현재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기적들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성경에 의하면 그 분은 전 우주적 존재로서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출3:14), '처음과 나중 되시는 분'이시며(계1:8), '천년을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같이 여기시는 분'(시 90:4)이시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4차원의 세계로 정의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임을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원점을 태초에 시작하심으로써(창1:1) 차원을 창조하신 분이고, 우주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의 세계를 초월하신 분이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은 3차원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분임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그 분의 존재와 행하신 일(기적)들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3차원 세계에 적용되는 과학적 법칙이나 방법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차원을 초월하신 하나님 편에서는 6일 동안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여러 가지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또한 그 분이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단지 유한한 차원에 속한 피조물들이 그 분의 존재와 행하시는 일들을 부인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주 안에 적용되는 통일성이나 법칙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수많은 비밀들(즉, 자연 법칙들)을 숨겨 놓으셨으며 또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기적이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지만, 우주가 자연법칙들에 위배됨이 없이 통일성을 가지고 하나의 우주(universe, not multiverse)로서 작동하는 이유도 우주가 한 분이심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3차원 공간에 갇혀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기적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음은 인간의 이해와 지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 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성경의 기적들을 부인하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그 분의 존재를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지혜가 부족하여 깨닫지 못하던 비밀들을 알 수 있다(약1:5).
번역 -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3/e32/e32o18.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26
참고 :
일본 복음화를 소망하며
일본에서 창조사역이나 복음전파의 활동을 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드문 기회이지만 은혜의 말씀과 사역을 증거할 기회가 있을 때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귀한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 온 지도 어느새 7년이 되어갑니다. 적응하기 어려웠던 점은 수많은 우상들이 공중권세를 잡고 사회를 지배해서라고 생각되지만, 쇼윈도우의 신형 자동차에도 아이스크림에도 진화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사용되며,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진화론이 사회에 난무(?)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신교의 신자가 1% 미만이라는 통계 보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사회에서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런 만큼 창조사역이나 복음전파의 활동을 펴는 것 역시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더욱 크다고, 드문 기회이지만 은혜의 말씀과 사역증거의 기회가 있을 때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귀한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일본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실험실 세미나를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시야가 좁아서인지 많은 소재를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다음은 실험실 세미나에서 소개했던 논문으로 저와 관련된 전공분야에서 발표된 것 중 노아의 방주를 증거하는 논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 마우스 선조가 서부 중앙 아시아에서부터 이동하여 각
지역(대륙)에서 아종(亞種, subspecies)으로 분화하였다.
제 전공은 실험동물학으로 유전학, 독성학, 의학, 수의학, 동물학, 축산학 등이 부분적으로 복합된 영역의 학문입니다. 따라서 학문의 위치를 정하는 것도, 정의하는 것도 개개인에 따라서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습니다만, 현재는 독립된 학문의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는 학문으로 저의 경우는 분자유전학을 기초로 암억제 유전자를 찾아내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소개하고자 하는 논문은 1998년 학술잡지 Genetics(Prager E.M. et al., 150, 835-861)에 실렸던 분자유전학적 기술을 사용하여 집쥐(마우스)의 기원이 서부 중앙아시아라는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도북부 히말라야 지역을 마우스 발원지라고 생각했던 것을 부인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입니다. 논문에서 실험 재료가 된 쥐는 학명으로는 Mus musculus에 속하는 쥐로, 여러 종의 쥐 중에 사람의 주거지 주위에서 음식물 찌꺼기 등을 먹고 살아가는 종류입니다. 따라서 이 쥐의 이동 경로를 조사한다는 것은 사람의 이동 경로를 조사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논문은 아시아 곳곳,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반도와 이집트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우리 나라와 일본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아시아대륙 18개국 67개소에서 포획된 마우스의 유전자(mtDNA1), Y Chr., p53 pseudogene2))를 조사하여 유전자 염기배열의 유사정도를 비교 분석 정리한 결과로 '마우스 선조가 서부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이동하여 각 지역(대륙)에서 아종(亞種, subspecies)으로 분화하였다'라는 학설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의 홍수 때 방주에 들어온 동물들을 제외한 육상의 모든 동물들이 멸종되었고, 그 후 노아의 방주가 처음으로 지면에 닿은 곳이 아라랏산(논문에서 언급한 서부 중앙아시아, 현 터어키 동부지방)이었으며, 바벨탑 사건(현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남쪽지역) 이후 사람들이 제각기 흩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논문이 이러한 성경의 사건들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유학생활을 하면서 일본인들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복음화되어 있지 않은 이유를 어디서 여러분은 찾고 있습니까? 저는 그 원인을 저희 한국인의 선조가 믿음을 굳건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우리의 선조들은 세계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 중 일부가 한반도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다시 일부가 일본에까지 오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반도에 들어온 우리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해야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현재 일본땅이 카미가미(神神, 잡신)의 '잡신의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사선상에 일제 식민지 탄압도 우연히 있었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언제까지 허락될지는 모르지만, 이 땅에 복음의 자녀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기도하며 저도 창조과학 사역에 더욱 힘쓸 것을 다짐해 봅니다.
주석
1) mtDNA(mitochondrial DNA): 세포내 소기관의 하나인 미토콘드리아에서 독립적인 유전양식을 갖고 유전되며, 암컷으로부터만 유전되어지는 유전자. mtDNA의 유전자 염기배열의 변이를 조사함으로써 모계조상을 찾아 올라갈 수 있다.
2) Y Chr.(Y chromosome): 성염색체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수컷에만 있는 염색체. mtDNA가 모계조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재료라면, Y 염색체의 연구는 부계조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소개한 논문에서는 Y 염색체상의 Zfy-2라는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조사하였다).
3) p53 pseudogene: 쥐이 17번 염색체상에 있는 암억제 유전자 p53의 위유전자(僞遺傳子). 암억제 유전자 p53과 상당히 유사하나 유전자로서의 기능을 하지 않는 유전자. 위유전자는 통상의 유전자에 비해 점돌연변이의 발생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변이의 분포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공통선조를 추론하는데 연구되어지고 있다.
번역 -
링크 - http://www.kacr.or.kr/databank/document/data/evolution/e3/e32/e32o17.htm
출처 - 창조지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25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