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시할 수 있는 다른 교리는 무엇인가?
(What Other Doctrines Do You Ignore?)
by John D. Morris, Ph.D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최근에 나는 한 명의 복음주의적 목사님과 창조에 관한 견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안하지만 이해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창조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창조보다 더 많은 기독교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창조에 대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성경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에 영향을 끼친다.
불행하게도, 창조에 대한 그 목사님의 태도는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태도이다. ”오, 나는 그 주제에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논쟁적입니다. 게다가, 현대 과학은 수십억 년의 우주 및 지구의 연대를 증명해왔습니다. 창조와 지구의 나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것 외에 오늘날에 필요한 더 많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이것은 매우 영적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창조의 교리는 다른 교리들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다른 교리들에 손상 없이 창조의 교리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기되어지는 그 다음 질문은 ”그러면, 당신이 무시할 수 있는 또 다른 교리는 무엇입니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창조론은 모든 것 위에 주권자로서 하나님을 위치시키는 '세계관(worldview)”을 가진 개념이다. 창조주로서 그분의 역할은 인생을 이끄시고, 그의 율례를 벗어나는 경우 벌을 가하실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어떤 기계의 제조업자가 어떻게 그 기계를 작동시키고 수리하는 지에 관한 매뉴얼을 저술할 권리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류의 창조주는 우리의 인생과 택함에 대한 권한을 갖고 계신다.
그런데, 창조주의 매뉴얼(성경)에는 예수님 자신이 창조주라고 기록되어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1:16절을 보라). 창조주로서 예수님의 역할을 부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칠 수 없다. 창조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시부터 유래된(현대적 편의에 의한 것이 아닌) 결혼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최근 창조(recent creation)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전 세계적인 홍수(worldwide Flood)를 말씀하셨으며, 동물들을 구별된 종류(separate kinds)들로 창조하셨음을 말씀하셨다.... 그분의 창조에 대한 가르침은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창조와 노아홍수가 사실이었음에 근거하여, 그의 재림에 대해 가르치셨다.
많은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우리들이 의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일부 과학자들의 의견은 자주 진정한 과학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으며, 흔히 반하나님적 사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동정녀 탄생과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르침에서 그러한 사항들은 삭제시켜야 하는가? 창조론은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서 기초이다. 창조가 아니라면, 하나님, 죄, 인간, 죄에 대한 심판, 창조주의 죽으심을 통한 구속, 재림... 등에 관한 기독교 교리들에 대한 논리(logic)가 무너지게 된다. 만약 우리가 많은 기독교 교리들의 기초가 되고 있는 창조의 교리를 그렇게 쉽게 포기한다면, 다음에는 어떤 교리라도 쉽게 포기할 수 있지 않겠는가?
* Dr. John D. Morris is the President of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2904/
출처 - ICR, BTG 213a, 2006. 9. 1.
창조과학 사역자로 택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등학교 2학년 초에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성경의 서두에 써있는 이 글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더 이상 관심조차 두지 않았고 고등부 공과에서 배우는 성경공부 외에는 신약성서를 복음서 별로 나눈 쪽복음서를 읽어보는 것이 전부였던 나였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서서히 창조와 진화에 대한 갈등이 커갔지만, 신앙과 학문은 서로가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을 함께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는 논리로 마음 편하게 피해갔다. 그러면서도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어린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천지와 우주 만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해야 할 때는 믿음과 신념이 실리지 않은 말이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가르치는 말에도 힘이 실리지 못했고, 내심으론 솔직히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교사로 또는 찬양대원으로 교회에서 주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몸으로는 열심히 임했던 것 같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동물 형태/발생학을 전공하게 된 이후부터는 학부시절에 별로 접하지 못했던 진화론 일색의 문헌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교수로서 대학에서 동물발생학, 무척추동물학을 강의하다가 대학의 사정상 주 전공이 아닌 동물분류학까지 강의하게 되면서부터는 교재와 참고문헌들에 충실한 진화론적 개념을 기조로 한 강의를 열심히 하였다. 그러던 중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일신상에 어려움이 많아지자 단순히 “살고 싶다. 이렇게 일생을 마칠 수는 없다.”는 절박한 이유 하나만으로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난 후부터 일련의 영적체험이 시작되면서 나에게는 생각의 기본 틀이 바뀌기 시작했다.
화학원소와 전기, 전자 등을 제외하고 눈으로나 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대부분 그 존재조차 별로 믿지 못하는 형태학자 특유의 근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나의 의식구조에 맞게 모든 것을 보여주셨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영이라는 것의 존재를 믿게 되면서, 더불어 성령, 부활, 창조 등 성경에서 흔히 등장해서 항상 거북스러웠던 단어들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경을 읽으며 “이런 말씀이 있었나?” 하며 새삼스럽게 놀라는 대목이 많아졌는가 하면, 대학에서 가르쳐온 전공에 관한 교재나 문헌들을 읽을 때 생명현상의 오묘함에 놀라 온 몸에 감동의 물결이 치듯 하는 경험을 하곤 했다. 그 이전에는 솔직히 단순히 지식으로만 습득했을 뿐 크게 감동할 줄은 몰랐었다. 이런 상황이 되니 진화론을 기저에 깔고 있는 강의가 송두리 채 잘못되었다는 자책감이 커져서 “이걸 어쩌나?” 하는 당황스러움에 찾은 것이 한국창조과학회에서 발간되는 ‘창조’지를 구해 읽었고, 창조과학회의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여 창조론적 개념을 익혀갔다.
1990년도 1학기부터 나의 강의는 강의의 기조와 해석이 완전히 다른 강의로 탈바꿈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입에 밴 진화라는 단어 때문에 기도해야만 했다. 그 후로는 나의 생물학 강의가 창세기 부록을 강해하는 듯한 강의가 된 셈이다. 그런 만큼 강의를 끝내고 강의실을 나오는 나의 기분은 즐겁고 이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이 되었다. 나의 창조과학 사역은 이렇게 강의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창조과학 사역은 내가 알아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권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두려움과 감회가 더 큰지 모른다. 내가 무엇이기에 불신 가정에서 택하여 성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주시고, 이 믿음을 근거로 전공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전파하게 하시는가하는 의문과 감사함이 얼버무려진 것이 나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해보려고 시도해왔다. 과학이 기적을 낳는 학문이 아닌 이상, 과학이 증명할 수 있는 한계는 그리 넓지 못하다고 본다. “구약성서 요나서에서 요나를 삼켰던 물고기는 어떤 물고기였을까?”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물고기 중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보면서 나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든다. 과학적 상식적으로는 물고기 뱃속이나 구강 속에서 사람이 생존할 수가 없다. 우선 산소가 절대 부족하다. 또 큰 물고기들은 보통 작은 물고기들을 씹지 않고 거저 삼켜버린다. 그래도 그 물고기가 통째로 삼킨 물고기의 가시에 찔려 위장에 탈났다는 기록이 없고 또 그럴 리도 없다. 그만큼 강한 소화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창조주의 능력을 되새겨 보면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어 이름을 붙인 동물의 종만 해도 150여만 종이 되는데, 그들 하나하나가 수백 권의 책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한 기관계의 총체적인 조화로 생명현상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불가능하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기 위해서 요나를 삼킨 후 살려두었다가 다시 뱉어 버릴 수 있는 특수한 물고기를 뱃사람들이 요나를 들고 물로 던질 즈음에라도 만드실 수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 후에 그 물고기가 좀 더 번성했었는지 그것 하나로 살다 소멸했는지는 차치하고, 나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현존하는 물고기의 크기와 구조를 조사하며 가늠해보는 것보다 더 타당한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라고 본다. 이 부분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건들에 대하여 내가 평상시 가졌던 의문 중 일련의 영적체험을 한 후 제일 먼저 풀린 의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창조과학 사역을 하는 동안 어려웠던 부분들은 생명과학 분야 학회에서 이방시하는 부분이 작지 않은 어려움이었고, 사역 자체로 말하면 큰 도회지에서보다 시골내지 소도시에서 주로 시청각 기자재에 얽힌 일화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때로는 교역자들의 창조과학에 대한 몰이해 내지 편견이 적지 않은 장애이기도 했다. 창조론에 대한 강의는 학생들이나 들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그간 조사한 기독교인들의 의식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론이 믿어져서 믿는다고 사람보다 사실은 잘 믿어지지 않지만 믿으려고 노력한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므로 보다 확고한 신념을 불어 넣어줄 창조과학자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현실을 교역자들이 인식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모 신학대학에 강의하러 갔을 때 신학대학 교수의 질문 중에는 “창조과학회에서는 성경에 있는 창조의 날을 문자대로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최초의 동물을 성체로 만드셨다고 보십니까 알로 만드셨다고 보십니까?” 라는 것도 있었다. 놀라운 질문들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신학의 흐름이라고 본다.
요즘은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불변하신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을 다시금 꼼꼼히 되새겨야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한국창조과학회에는 다른 학회와는 전혀 다르게, 학문의 전공분야가 전혀 다른 학자들이 창조 신앙 하나로 뭉친 너무도 독특한 학회이다. 많은 회원들이 모든 어려움을 딛고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헌신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동이 크고 부럽기까지 하다. 창립한지 25주년이 되어 성년이 된 우리 학회는 이제 모든 활동 주역이 차세대로 넘어가야하는 중인데, 능력 있는 젊은 학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고, 또 계속 등장하고 있어 무척 고무적이며, 더없이 감사한 일이다. 이후로도 창조과학 교육이 다방면으로 진행되며, 많은 차세대 젊은 창조과학자들을 발견하고 지원할 수 있는 체제도 필요하고, 외국 창조과학자들과의 끊임없는 교류로 서로의 필요를 채울 수도 있어야 하겠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창조과학자 모두를 향한 특별한 계획이 있으셔서 택하여 세우시고 이제까지 인도하여 오셨다고 믿는다. 왜곡된 진실을 바로 알려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바쁜 창조과학자들의 발걸음마다를 성령님께서 동행하여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출처 - 창조 제148호, 2007년 1-3월호.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791
참고 :
거룩한 지성으로 창조를 교육하라.
신명기 6장에서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알아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합니다. 잠언 1:7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32에서 ”진리(하나님의 말씀)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지성을 연마하되 거룩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20세기 초에는 노도처럼 밀려오는 진화론과 인본주의의 거센 지적 도전에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기독지성인들이 체계적인 거룩한 지성으로 대응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젊은이들이 진화론과 인본주의로 세뇌되어 성경에 회의를 느끼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지성의 중요성을 간과한 탓입니다. 이제는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 이시고, 인간사와 역사의 주관자이시므로, 모든 학문과 예술과 삶은 그러한 전제와 시각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기독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며, 그러한 동력과 연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흔히 일반대중들에게는 창조와 진화의 논쟁이 주관적인 종교와 객관적인 과학의 갈등으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종교는 윤리적으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이고, 과학은 물질세계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니, 서로 갈등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기독인들이 그러한 그럴 듯한 술수에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인간의 머리에서 만들어낸 윤리적 경전이나 모범적 도덕책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성경과 진화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참계시로 믿는다면, 그 말씀과 진화를 동시에 수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화란 모든 것에 초월적 전능자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자연주의(naturalism)에 입각해서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진화는 두 배경신념, 즉 두 세계관의 싸움이지 종교와 과학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크리스천들이 과학으로 포장된 진화라는 거대한 바벨탑의 위세 아래서 겁 먹고 패배의식에 젖어 기원에 관한 문제는 될 수 있는 대로 회피하고, 창세기를 포함한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라 믿는 대신에 구속에 관한 중심내용만을 계시로 보는 그런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성경의 많은 저자들이 직접 창세기를 포함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참계시로 기록되었다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이러한 회피와 패배의식 때문에 이 세상 교육기관에서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진화론 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우리들의 자녀들은 그 안에서 더욱 자연주의로 세뇌되며 신앙의 혼란과 방황을 거듭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화론으로 세뇌된 자녀들에게는 창세기의 창조는 사람이 만들어낸 신화정도로 들릴 것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교회와 부모들이 아직까지도 이 문제에 너무도 둔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 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후서 3:17)
복음주의 신학의 거장 패커 (J.I. Packer)는 자연주의라는 누룩은 오늘날 기독신앙의 암적존재이며, 그러한 풍조에 대하여 "오늘날 교회가 갖고 있는 많은 연약한 점들의 뿌리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무지, 즉 기독교적 지성이 현대의 인본주의의 지성에 항복하고 따르게 된 것이다. 즉 인간과 과학에 대해서는 대단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소하게 생각하는 그런 풍조를 말한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제 교회와 크리스챤 가정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바로 보고 더욱 창조교육에 힘써야 합니다. 이번 여름에도 많은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창조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을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금년 또는 내년에 꼭 한 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ACT의 [공룡캠프]와 같은 주일학교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앞으로 더 많은 지원과 자원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당신은 거듭난 기독인으로 거룩한 지성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자녀에게 창조를 교육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자녀들에게 야망을 교육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소명을 교육하고 있습니까?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1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683
참고 : 3384|4039|1984|2497|3728|5559|2535|5122|5906|4140|3771|4628|4501
‘창조와 격변(양승훈 저)’에 대한 한국창조과학회의 입장
2006년 8월에 출간된 양승훈 교수의 저서 ‘창조와 격변’은 책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창조와 격변 두 가지 중요 내용을 이 책의 주제로 삼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이론과 견해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이론들 중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는 ‘다중격변론’은 한국창조과학회가 오랫동안 주장하여 왔던 노아의 대홍수에 의한 격변론과는 매우 다른 내용이어서, 회원들에게 양 교수의 주장이 학회의 입장과는 현저히 다른 위치에 있음을 알릴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양승훈 교수께서는 과거 한때 한국창조과학회 부회장도 역임하였고, 과거에 ‘창조론 대강좌’와 같은 창조론 관련 저서들도 집필하였기 때문에, 양승훈 교수의 저술 내용이 마치 한국창조과학회의 변화된 새로운 입장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과학적 지식들을 동시에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해석과 변화되는 과학지식에 대한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합니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올바른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오랫동안 하나님의 창조와 노아홍수의 대격변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들을 밝혀 왔습니다.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이론을 세울 수 있고, 주장과 해석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학회의 공식적인 입장과 다를 때에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중심으로 학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 '창조와 격변” 책 내용 중 일부 한국창조과학회 입장과 다른 내용 요약 >
1. 다중격변론과 오래된 지구
- ‘창조와 격변’ 제14장 ‘대홍수와 다중격변’ 내용 중 대홍수론에 대한 비판에서 저자는 성경의 기록으로는 전 지구적인 홍수의 증거가 압도적이지만, 지질학적인 면에서는 국부홍수론의 주장이 만만치 않으며, 방사성 연대측정법이 재현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다중격변모델이 성경적 해석과 지질학적 해석의 딜레마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모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중격변모델의 가장 분명한 증거로는 지구 곳곳에서 발견된 크고 작은 운석공들이며, 지구상에 확인된 171개의 운석공들 중 지구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직경 2km 이상 인 것들은 140여 개에 이르는데, 지난 4000년의 인류 역사에는 이런 흔적이 없기 때문에, 인류 역사 이전에 장구한 기간에 걸쳐서 운석충돌들이 일어났을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운석충돌과 동시에 일어난 화산폭발이 격변을 가능하게 했고, 노아 시대 대홍수는 마지막 격변으로 신생대 홍적세 지층을 만든 홍수였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한국창조과학회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한국창조과학회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창세기의 대홍수가 대격변을 동반한 전 지구적 홍수였을 뿐 아니라, 화석을 포함하고 있는 고생대 캄브리아기부터 신생대 홍적세에 이르기까지의 지층들 대부분을 형성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전 지구적 홍수는 성경에 기록된바 대로 짧은 기간동안 이러한 일들을 발생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대격변이었습니다. 산을 덮는 대홍수는 지금의 과학 수준으로도 가름하기 힘든 엄청난 격변이었고, 너무도 광대한 수평퇴적층들, 수많은 잃어버린 지층들의 존재, 평탄하게 이어져있는 부정합 지층 경계면들,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볼 수 없는 대규모 지층구조들, 거대한 물에 의해 분류되어진 퇴적지층 모습들, 수많은 해저 화산들, 실험실 내에서의 빠른 퇴적지층 형성 모델 확립, 굳지 않은 상태에서 퇴적지층들의 변형 모습들, 격변적 퇴적 모습의 지층과 화석들, 대륙들의 빠른 이동, 해수면의 급격한 변화 증거들, 진화론적 연대로 수억년(?) 전과 동일한 모습의 수많은 동식물 화석들, 수억 수천만년(?) 전 화석에 남아있는 DNA 조각이나 연부조직......등등의 지금까지 밝혀진 수많은 지질학적 화석학적 증거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한 번의 전 지구적인 대홍수를 동반한 대격변과 더 잘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랜드 캐년의 코코니노 사암층에서처럼 지층 중간에 보이는 사층리들을 이전에는 사막 모래의 퇴적으로, 그래서 풍성층으로 불렸었으나, 최근 물 속에서 퇴적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지층 중간에 보이는 수축균열도 건열로 불려지며 대기 중에서 건조된 모습, 또는 한발의 증거로 생각했었지만, 이것도 퇴적층에 물이 빠져나가며 수축되어지면서 생겨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한 번의 대홍수만으로도 이러한 지질학적 모습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중생대 말에 공룡들을 멸종시킨 거대한 운석 충돌이 있었고, 운석에 풍부한 이리듐이 K-T 경계면에 이리듐 층을 남겼다는 가설도, 이리듐은 화산재에도 풍부히 존재하며, 이리듐 층 이후에도 공룡의 화석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K-T 충돌 이전에 살았던 기후와 온도에 민감한 동식물들이 충돌 이후에도 계속 살아왔었다는 증거들이 계속 발견되면서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중격변론의 중심이 되는 운석공들의 충돌 흔적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으며, 운석공들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창조과학회는 수억 수천만 년의 지질시대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지층들은 한 번의 전 지구적인 홍수와 이어진 일련의 지질학적 사건들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지구의 연대도 매우 젊다고 보고 있습니다.
2.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 결과에 대한 해석
- ‘창조와 격변’ 제12장 ‘과학적 연대 논쟁’ 내용 중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에 대한 기술에서 아이소크론 연대측정법의 원리를 통해 초기조건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고, 시료의 오염 여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K-Ar 연대측정 방법은 초기 암석에 자원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을 때만 사용될 수 있는 측정방법으로,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 가정이 신뢰할만 하며, 전체적으로 방사성 연대측정은 암석 연대를 측정하는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비교적 짧은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방사성탄소(C-14)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도 노아 홍수 이후 C-14이 증가하는 속도를 여러 가지로 가정해서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의 정당성을 시험하였으나, 어떤 방법으로도 6,000년 이상 된 탄소 연대가 나온다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 한국창조과학회는 오랫동안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 방법이 신뢰할만한 연대를 보이고 않고 있음을 밝혀 왔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 방법은 방사성 붕괴가 항상 동일했으며, 최초에 자원소가 하나도 없었고, 붕괴 전 과정 동안 모원소와 자원소의 유출입이 없었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분출이 확인된 얼마 되지 않은 용암들에 대한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들이 수백 수천만 년의 연대측정 결과들을 보였으며, K-Ar 시계의 경우 초기부터 자원소인 아르곤이 상당량 존재하는 등 문제점들이 계속 제기되어 오고 있었고,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의 경우도 만약 노아 홍수 시에 깊음의 샘들이나 화산들이 터지면서 지하에 있던 C-14이 전혀 없는 CO2가 대기 중으로 유입되어졌다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가 실험실에서 매우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2005년 11월 미국 ICR에서 8년 간의 연구 끝에 발표한 RATE 프로젝트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가 과거 한때 엄청난 가속화가 일어났었으며, 지르콘 내에 아직도 헬륨이 풍부하게 잔류하고 있었고, 수억 년 되었다는 고대 석탄 및 다이아몬드 내에 반감기가 비교적 짧은 C-14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으며, 같은 암석 시료에 대한 방사성 연대측정 시계들마다 서로 다른 연대측정 결과를 보이는 등, 오래된 지구 연대의 핵심 근거인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 방법이 매우 신뢰할 수 없는 방법임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 결과가 재현 가능하고 상호 검증이 가능한 신뢰할만한 방법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한국창조과학회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3. 아담 창조 이전 동식물들의 죽음
- ‘창조와 격변’ 14장 ‘대홍수와 다중격변’의 내용을 보면, 고생대와 중생대 지층들 속에 들어있는 동식물들의 화석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아담의 창조 이전에도 죽음이 있었을 수밖에 없다는 성경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롬 5:12, 창 3:14-19). 만약 아담 이전에 사망이 이미 있었다면, 사망은 "죄의 삯”(롬 6:23)이 될 수 없으며,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고전 15:26)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롬 8:22)과 "썩어짐의 종 노릇”(롬 8:21)하는 이유는 "(피조물들의)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0)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화석 기록에는 죽음 이외에도, 질병과 기형, 기생충, 독, 암, 다른 생물체를 잡아먹음... 등과 같은 모습들이 존재합니다.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낭비해가며, 이유 없이 수많은 생물들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등 가장 비효율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이끌어 오셨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보시고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전에도 사망이 있었다는 예로서 아담과 하와가 걸을 때, 미생물과 곤충들의 죽음이 있었을 것으로(휴 로스는 아담이 식물을 먹었을 때도 식물의 죽음으로 주장함) 보고 있지만, 아담과 하와가 걸었을 때 미생물들과 곤충들이 죽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피를 가지고 있는, 그리고 호흡을 하는, ‘네페쉬(nephesh)’로 불려진 생물들과 구별됩니다. 그리고 먹이사슬을 통해 동물들의 죽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성경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사람과 동물들은 채식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29-30). 즉, 하나님은 동물들에게 푸른 풀을 식물로 주셨기 때문에 육식은 없었습니다. 또한 송곳니와 발톱과 같은 육식동물들의 모습들과 행동들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에게도 같이 내려진 저주(창 3:14) 또는 대홍수 이후 사람의 육식 선포 시점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며, 노아의 방주에 발려진 역청(pitch)은 식물들의 송진에 숯을 가하여 가열할 때도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생물들의 유해, 즉 죽음과 상관없으며,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 등의 형성도 한 번의 전 지구적인 노아의 대홍수만으로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아담 이전에 사망이 있었고, 이것들이 화석 연료들을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작업일 수도 있었다는 양승훈 교수의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창조과학회는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사람과 동물들의 죽음, 피흘림, 고통, 질병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듯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006. 8. 31. 한국창조과학회
믿음과 현실의 분리
(Separation of faith and reality)
최근 호주 연방의회의 한 크리스천 의원은 교회에 다니는 다른 크리스천 의원들로부터 명백한 지지를 얻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곤 슬퍼했다. 그들은 지지를 부탁받을 때 자주 이렇게 반응했다. “당신은 왜 종교와 정치를 혼합하려 하는가?” 그들은 “교회와 정부의 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의 본래 의미는 기독교 종파가 ‘국립 교회(national church)’의 위치로서 지지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 크리스천들이 정부에 어떤 참여 또는 영향을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만 한다고 가르치셨다.(마 5:13). 확실히 이것은 정부를 포함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 노력들의 모든 합법적인 제도들을 포함하고 있다.(로마서 13장). 확실히 루터(Luther)와 캘빈(Calvin)과 같은 개혁자들은 크리스천들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공적인 삶(public life)들을 포기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의 분리는 정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현실적인 일들에서 믿음을 분리시키려는 더 넓은 개념으로 선전되어지고 있다. 최근 한 보수적 복음주의(추정) 신학교에 다니는 한 학생이 나에게 말하였다. 그의 교수는 창세기는 과학에 관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신학적 서술(theological statement)이라고 강의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신학적 서술로서의 창세기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 학생은 창세기는 하나님이 모든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하지만, 오늘날 신학교와 대학교에서 ‘과학(science)’은 모든 만물들은 스스로 저절로 생겨났다고 가르쳐지고 있음을 그는 지적했다. 과학에 의하면, 모든 만물들은 순전히 자연적인 과정들을 통해서 우연히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우주적 사건이며, 하나님은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적) 과학과 신학은 여기에서 만물의 역사(history)라는 같은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같이 진실일 수는 없다. 하나는 스스로 생겨났다는 것이고,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신학과 과학은 깔끔하게 분리되어질 수 없다. 이것은 정말로 스코틀랜드의 신학자는 말했던 것과 같다. “종교와 과학의 분리는 결국 종교와 진실의 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가 진실을 찾고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망되어질 것을 의미한다.”[1]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는 거의 죽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세상의 것과는 다른 마음(mind), 감성, 영원의 영역과 관련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성경의 초기 역사를 포기하기 시작했을 때, 서구 사회의 크리스천들에게 이러한 일들은 시작되었다. 이것은 다윈(Darwin)과 함께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1700년대 말에 허튼(Hutton, 동일과정설의 제창자)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허튼과 그의 추종자들의 과학은 다윈과 함께 성경의 역사와 반대되는 위조된 역사를 제공하였다. 만약 성경의 역사가 틀렸다면, 어떻게 그 신학이 바로 설 수 있겠는가?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믿음은 전적으로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는 역사에 기초하여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독특하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믿음은 (불교나 힌두교에 비해) 전적으로 다르다. 성경은 사실(facts)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에덴 동산.... 당신은 홍수의 역사를 기억하는가?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역사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셨다.... 바벨탑... 아브라함....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 [2]
물론 신학교나 대학교에서 존경받고 있는 복음주의적 교수들은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수들이 창세기 1–11 장의 역사(history)를 부정한다. 그러나 그 역사가 없다면, 예수님의 구속 사건도 의미가 없어진다.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해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아담의 후손들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된 타락(Fall)이 실제의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를 위해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에이리치(Dudley Eirich) 박사가 말한 것처럼, “진화론은 성경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한번 그 경사면 아래로 미끌어진다면, 이제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거한 진정한 세계 역사의 회복은 한때 그것을 믿지 않았던 크리스천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나는 창조(Creation) 지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의 진정한 역사를 믿는데에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들이 자기와 화목케되기 위하여 죽으셨던(골 1:15–23) 그 분을 신뢰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References
1. Denney, J., Studies in Theology, London, p. 15, 1894 (cited from Kelly, D., Creation and Change, Mentor, Fearn, UK, p. 17, 1997).
2. Dr Martyn Lloyd-Jones, What mean these stones? Sermon preached 12 November 1977, Evangelical Action 2002(6):17–24, 200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7/i1/editorial.asp
출처 - Creation 27(1):6, December 2004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423
참고 : 3024|540|548|2346|2864|2313
아인슈타인, 우주, 그리고 하나님
(Einstein, the universe, and God)
타임(Time) 지가 '세기의 인물(Person of the Century)'[1]로 선정한바 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2] 여러 가지 면에서 유명하다 (그의 텁수룩한 모습 이외에). 그의 특수상대성 이론 및 일반상대성 이론과 질량 에너지 등가 공식인 E = mc2 는 시간과 공간, 빛과 중력,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영원히 바꾸었다. 그가 ”하나님은 우주를 우연에 맡겨두지 않으셨다” 라고 언급한 것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말한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과 어느 정도라도 유사한가?
어린 시절의 영향
독일계 유대인 부모에게서 1879년에 태어났지만, 알버트는 유대교 신앙으로 길러지지는 않았다. 그는 뮌헨의 가톨릭 초등학교에 다녔고, 그 후에는 근처의 일반 고등학교에 다녔다. 약간 느리고 꿈 많은 학생이었던 알버트는 비과학적인 주제에는 흥미가 없었고[3], 19세기의 엄격한 군대식 독일 교육시스템에서 거의 배운 것이 없었다. 그는 규율을 혐오하며 성장했고, 일생동안 모든 권위들을 의심했다. 11세 때 그는 강한 종교적 교육과정을 거치며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하여 학교 가는 길에 부르곤 하였다.[4]
12살 때부터 알버트는 유명한 과학책들을 읽었고, 자습으로 대수, 기하, 미적분을 공부하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반신앙적 책인 ‘순수이성 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을 공부했다. 이 시절에 관하여 그는 나중에 술회하기를,
”유명한 과학책을 읽으면서 나는 곧 성경 이야기의 많은 것들이 사실일 리가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이 결과로 나는 국가가 어린이들은 의도적으로 거짓말로 속이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적극적으로 자유분방함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소망과 희망과 소박한 느낌이 지배하던 어린 시절의 종교적 천국은 잃어버리게 되었고, 나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질 수 있었다” 라고 했다.[4]
알버트는 반권위주의 생각과 아마도 17세에 징집을 피하고 싶은 욕망으로 그는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1896년 1월 28일에 그는 16살의 무국적자가 되었다. 그는 1900년 2월 21일에 스위스 시민권을 얻었다.
고등교육, 아버지가 되고 결혼하다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알버트는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좋은 기술학교인 스위스에 있는 츄리히 공대(Zurich Polytechnic)에 다녔다.[5] 그는 거의 강의실에 출석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훌륭한 물리실험실에서 그 자신의 실험을 수행하거나, 당시의 과학계 선구자인 헤르츠(Hertz), 헬름홀츠(Helmholtz) 등과 다른 과학자들이 쓴 물리학의 첨단 연구결과들을 읽으며 보냈다. 그는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아들러(Friedrich Adler, 1918년에 오스트리아의 총리를 암살하여 유명해졌음)에게서 혁명적 사회주의(revolutionary socialism)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교실에서 헝가리 출신의 홍일점 학생이었던 밀레바 마릭(Mileva Maric)에게 반하였다. 그녀는 평범했지만 다리를 절었고, 경박하지 않았으며, 알버트와 지적인 대화를 할 정도로 물리학을 알고 있었다. 1901년에 그는 그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1903년에 베른에 있은 스위스 특허청(Swiss Patent Office)에서 특허심사관의 자리를 얻은 후 밀레바와 결혼했다.[6]
1905년에 저명한 베를린 저널 Annalen der Physik 는 알버트가 쓴 4편의 논문을 실었는데, 이것들은 그해 3월 17일에서 6월 30일 사이에 그가 여가시간에 쓴 것이었다![7] 첫 번째 논문은 어떻게 빛이 파동(wave)의 성질과 입자(particles)의 성질을 모두 가지는지를 설명했는데, 그는 이 논문으로 16년 후에 노벨상을 받았다. 두 번째 논문은 원자의 크기(the size of atoms)에 관한 것으로, 그는 이 논문으로 취리히 대학교(Zurich University)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8] 세 번째는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에 관한 것이었으며, 현대 통계역학(statistical mechanics)의 기초가 되었고, 네 번째는 그의 특수상대성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의 기반이 되었다. 이 네 번째는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 안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볼 수 없을지에 대하여 ‘생각만의 실험(thought experiments)’을 한 결과이다.
1916년에 알버트는 '일반상대성 이론의 기초(The Foundation of the General Theory of Relativity)'를 발표했다. 이것은 중력(gravity)과 가속(acceleration)이 동일한 효과를 나타내며, 중력이 공간과 시간을 휘게(뒤틀리게) 한다는 또 하나의 ‘생각만의 실험’에 의한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당황했다. 이 이론은 그 후 1919년 5월 29일에 서인도 제도에서 일식을 관측하는 동안 확인되었다.[9] 세계의 언론은 알버트를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알버트와 엘사
알버트와 밀레바의 결혼생활은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고, 1914년에 그들은 별거하였다. 한 때 알버트가 병들었을 때 간호를 해주었던 이혼녀인 그의 사촌 엘사 루웬탈(Elsa Löwenthal)과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1918년에는 이혼절차를 밟기 시작했다.[10] 취리히 법정은 1919년 2월 14일에 이혼을 허락하면서, 특히 알버트가 노벨상을 받게 되는 경우에는[11] 밀레바에게 위자료를 지불하도록 판결했다.[12]
알버트는 1919년 6월 2일에 엘사와 결혼했으나, 또 다시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않았다.[13] 훗날에 그는 사망한 어느 친구가 긴 세월을 한 여자와 평화롭고도 조화로운 일생을 산 것을 칭찬하면서, 자기는 부끄럽게도 두 번이나 그 일에 실패했다고 썼다.[14]
노벨상
1922년에 알버트는 그의 이론물리학에 관한 연구결과와 광전법칙(photoelectric law)으로 1921년도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공식 뉴스를 접했다. 그 당시 아직도 매우 논쟁의 여지가 많았던 상대성이론은 이 상에서 특별히 제외되었다.[15]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에게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회신의 어떤 부분들은 그의 심술궂은 유머 감각을 보이고 있다. 베를린에 있을 때 그는 뉴욕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에 그 사람은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가요, 아니면 다른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라는 것이었다. 알버트는 회신하기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이 결코 아니고, 중력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라고 하였다.[16]
또 한 번은, 누군가가 그에게 성공의 공식을 물어왔다. 그는 대답하기를 ”A를 성공이라고 치면 그 공식은 A = X + Y + Z 가 될 터인데, 여기서 X는 일이고, Y는 노는 것이며, 그럼 Z는 뭐지? 그것은 입을 닥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7]
1933년에 히틀러(Adolf Hitler)가 권력을 잡고 나서, 나치당은 유대인들이 과학을 연구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에 착수했고, 알버트의 암살에 20,000 마르크의 상금을 내걸었다.[18]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Princeton)에 정착했고, 1940년 10월 1일에 이 대과학자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
대부분의 생애를 통하여 그는 유순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독일 과학자들이 우라늄 원자를 쪼개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1939년 8월 2일에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새로운 현상을 이용하여 폭탄을 만들 수 있으므로 미국이 빨리 원자탄 연구를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19]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가 2 년 후에 시작되었으나, 알버트는 안보상의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이 연구에서 제외되었다.[20] 원자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폭발하고 난 후에, 그는 그 편지를 자기의 가장 큰 실수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했다.
1952년 11월에 알버트는 이스라엘의 벤구리온(David Ben-Gurion) 수상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되기를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12]
그는 일생의 마지막 30년 동안의 대부분을 전자기력(예를 들어 빛)과 중력간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확립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의 목표는 하나의 공식으로 전자부터 항성까지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소위 통일장 이론(Unified Field Theory)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1955년 4월 18일에 잠자던 중 복부 동맥파열로 숨을 거두었다.
아인슈타인과 '하나님'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의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믿는 것에 대하여 아무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종교와 하나님에 관한 그의 시각은 진화론과 범신론이었다.
그가 쓴 글에 의하면
”나는 자기가 지은 피조물을 상주기도 하고, 벌하기도 하는 신을, 또는 의도적으로 우리가 현세에서 당하는 이러한 경험을 하게 하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나는 육체적 죽음 후에도 살아남는 개인을 상상하기도 싫고 원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이나 어리석은 이기심으로 가득한,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이나 그런 생각을 하라.”[22]
”보호받고 사랑과 도움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인 또는 도덕적인 신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보편적인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라면, 세상사를 간섭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한 순간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상주기도 하고 벌하기도 하는 신은 상상할 수가 없다....”[23]
”인류의 정신적 계발의 초기단계에서 인간의 공상이 인간과 닮은 신들을 생각해 내었다.... 설파되는 종교에서의 하나님은 그 오래된 개념의 신들을 승화한 것이다. 윤리적인 선을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개인적인 신의 교리 대신 내세울만한 상징이 있어야만 했다.”[24]
아인슈타인은 과학적인 진리에 대하여 그에게 문의한 어느 일본 학자에게 회신하기를,
”모든 고도의 과학적 업적의 바탕에는 이성적 세계관이건 지적 세계관이건 종교적 측면의 확신이 깔려 있음이 틀림없다. 세상의 경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초월자의 존재에 대하여 마음 속 깊이 느끼는 이 확신이 내가 이해하는 신이다. 흔한 표현으로 이것은 범신주의(pantheistic) 라고도(Spinoza)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썼다.[25]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하나님’ 즉, ”하나님은 우주를 우연에 맡겨두지 않는다” 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악의적이진 않다”[26] 고 했을 때의 하나님은 우주의 합리성을 지칭하는 뜻이었다. 그는 또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우주에 나타나 있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감성적인 확신이 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이다”[27] 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는 결단코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통치자, 심판자, 구세주인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지 않다.
1939년 5월 19일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연설하면서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종교계에서 성경 기록이 절대적인 진실임을 주장하면 분쟁이 일어난다.”[25, 28]
기독교 호교주의자인 휴 로스(Hugh Ross, 점진론적 창조론자) 박사는 주장하기를, 비록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아인슈타인은 동료 과학자들과의 입장과는 달리 창조주의 존재에 대하여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29]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의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볼 때,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믿음을 갖지 않았다. (별빛과 시간에 관한 아래의 글 참조).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설교나 글에서 부적절하게 아인슈타인을 인용하게 된다면, 그들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크게 훼손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노트 : 아인슈타인은 그의 과학논문과 대부분의 그의 서신을 독일어로 썼으므로, 위에 사용한 인용들은 번역자에 따라 약간 다를 수 있다.
References and notes
1. Time, pp. 42-67, December 31, 1999.
2. Albert was born in Ulm, Germany, on March 14, 1879. The family moved to Munich in 1880.
3. His interest in science stems from age five. His father gave him a compass. 'Why does the needle always point one way?', Albert wanted to know. 'Magnetism.' 'How does an invisible force pass through space?' Albert lay awake that night pondering the mystery. His life-long interest in asking and solving scientific questions had been awakened.
4. Pais, A., Einstein Lived Here, Oxford Uni. Press, New York, NY, USA, pp. 114-15, 1994.
5. Eidgenossische Technische Hochschule or ETH (the Federal Institute of Technology).
6. This lasted from June 1902 to July 1909.
7. Translated titles: 1. On a Heuristic Viewpoint Concerning the Production and Transformation of Light. 2. A New Determination of the Size of Molecules. 3. On the Motion of Small Particles Suspended in a Stationary Liquid According to the Molecular Theory of Heat. 4. On the Electrodynamics of Moving Bodies.
8. He received the first of his many honorary doctorates in 1909.
9. According to Einstein's theory, light from distant stars should be deflected when it passed through the strong gravitational field of the sun. During the eclipse, the light from stars previously not visible because of the sun's brilliance appeared to be bent, i.e. the stars appeared to be in a different position from when their light did not pass close to the sun. The amount that the starlight was bent by the sun's gravity agreed with Einstein's predictions.
10. Ref. 4, p. 19 states that Albert 'admitted adultery' in a letter dated August 31, 1918.
11. Albert was nominated for the Nobel Prize for Physics every year from 1910 to 1921, except 1911 and 1915.
12. This he did in 1923. It was then worth about US$32,000. Mileva bought a house in Zurich and lived there for most of the rest of her life. She died in 1948.
13. Ref. 4, p. 20 states that one 'extramarital affair came to an end in 1924. Several others appear to have occurred in later years.' See also p. 38.
14. Ref. 4, p. 25.
15. Ref. 4, p. 63.
16. Ref. 4, p. 88.
17. Ref. 4, p. 152.
18. Ironically, this anti-Semitism may have kept the Nazis from developing an atomic bomb.
19. He signed another letter about the atomic bomb, intended for Roosevelt, on March 7, 1940.
20. Ref. 4, pp. 218-19.
21. Fölsing, A., Albert Einstein, Viking, New York, NY, USA, p. 734, 1997.
22. Ref. 4, p. 118.
23. Ideas and Opinions by Albert Einstein, Crown Publishers, New York, NY, USA, pp. 36-39, 1954.
24. Ref. 23, pp. 46, 48.
25. Ref. 23, pp. 261-62.
26. He was objecting to the random unpredictable element in quantum mechanics, where one cannot calculate what will happen, only what will probably happen.
27. Barnett, L., The Universe and Dr. Einstein, Victor Gallancz Ltd, London, UK, p. 95, 1953.
28. Albert overlooked Psalm 14:1.
29. The Creator and the Cosmos, Navpress, CO, USA, p. 49, 1993.
‘자연에 나타난 신성’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믿음
범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이 신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신은 모든 것을 달리 표현하는 것일 뿐이며, 아무런 실질적 의미가 없어 모든 것이 징크스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의미하다. 허치슨 백과사전(The Hutchinson Softback Encyclopedia) 1996년판에 소개된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명백히 스피노자(Spinoza)의 범신주의에 공감하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마음과 물질은 우리가 신, 또는 자연(Nature)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한한 것의 두 가지 형태이며,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뉴에이지(New Age)와 동양 사상처럼, 이것은 일원론적(monistic) 믿음이며,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창조주, 즉 모든 피조물 이전에 존재하였고, 피조물과 독립적이며, 피조물 외부에 존재하는, 그런 창조주를 부정한다.
상대성과 도덕성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의 도덕적 쇠퇴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 비난한다. 사실, 아인슈타인은 자연을 보는 관점에서 절대적인 공간과 시간을 절대적인 빛의 속도로 대체하였다. 그는 그의 이론을 불변이론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상대성(relativity)’ 이라는 용어가 고착되었다.
도덕성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하나님의 규칙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때문이 아니고, 진화론적 가르침 때문이다. 진화론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진리와 인간은 그 분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거부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이 결정하도록 가르친다.
과학은 단지 우리에게 현상만을 설명할 뿐, 무엇이 옳은지를 말해주지 못한다. 예를 들면, 과학은 어떤 사람의 심장을 쏘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것과, 어떤 성적 행동은 AIDS의 전파를 촉진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그러한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말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상대성과 먼 곳에서 오는 별빛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 GR)은 중력 이론에 관하여 가장 실험적으로 잘 인정된 이론이다. 그것은 뉴턴의 법칙을 틀린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더 큰 규모(우주적 규모)의 일부로 포함되게 하여, 어떤 상태에서는 더 정확하게 중력을 설명하고 있다.
일반상대성 이론에는 직관과 어긋나는 개념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빛조차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질량이 집중된 영역인 블랙홀(black holes)이 그것이다. 또 다른 개념은 중력이 시간을 변화시키므로,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리학자인 러셀 험프리(Russell Humphreys) 박사가 제안한 대표적인 창조론적 모델은 일반상대성 원리를 사용하여, 젊은 우주에서 먼 곳의 별빛이 어떻게 지구에 도착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인들을 위한 험프리 박사의 책, ‘별빛과 시간(Starlight and Time)’에 (기술적 부록도 포함)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많은 점진론적 창조론자들이 험프리 박사의 논리를 강하게 공격해 왔지만, 그는 지금까지는 무리 없는 설명을 해 왔다. 이 책의 내용을 잘 아는 독자들은 논쟁의 내용이 실려 있는 Technical Journal 이나 질의응답 란의 'Countering the Critics'을 참조하기 바란다.
*관련기사 : 아인슈타인 '무신론' 자필편지 경매 나왔다 : 독일어로 "성경은 원시전설들 집대성" (2012. 10. 8. 한국일보)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1210/h2012100821013191560.htm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3/i1/einstein.asp
출처 - Creation 23(1):50–53, December 2000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342
참고 :
과학과 신앙이 만나는 자리
1985년 달라스에서, 과학과 종교에 관한 회의가 열렸었다. 토론의 주제는 우주의 기원이었고, 토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뉠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과학자라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의외로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유신론자가 많았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관측우주론자인 앨런 렉스 샌디지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전설적인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의 사사를 받은 사람으로서, 퀘이사(quasar, 준항성 전파원)의 신비를 풀었으며, 구상성단(globular cluster, 수십만 개에서 수백만 개의 별들이 공 모양으로 모여 있는 항성의 집단. 우리 은하계 안에는 100개 이상의 구상성단이 있다)의 나이를 밝혔고, 멀리 떨어진 은하계의 거리도 알아냈으며, 우주 팽창량도 측정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어릴 때부터 무신론자였음을 잘 알고 있었는데, 샌디지는 유신론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빅뱅에 대해 발언하던 도중에 50세의 나이에 기독교인이 되기로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빅뱅이 기존의 물리학 영역에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
'과학은 우리를 제1사건까지 데려다 주었지만, 더 멀리 있는 제1원인까지는 데려다 줄 수 없다. 물질, 시간, 공간, 에너지의 갑작스런 출현은 태초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샌디지 이외에도, 하버드의 저명한 천체물리학자 오웬 깅그리치도 빅뱅이 유신론적 세계관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의 생화학자인 케니언도 과거에 자연주의적인 시각으로 저술한 자기 책의 결론을 부정하고, 세포 분자의 엄청난 복잡성과 정보를 포함하는 DNA의 특성들은 생명의 설계자를 대변하는 증거라고 믿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스티븐 마이어는 우연히 그 회의에 들렀다가 샌디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젊은 지구물리학자인 그는 인생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던 끝에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과학이 신앙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과학적 증거를 무시한 믿음의 도약이 아니라, 과학적 증거 때문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과학을 전공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몰랐던 것이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두 번째 인터뷰 : 스티븐 마이어 박사
스티븐 마이어 박사는 물리학과 지질학을 공부했고,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분자생물학, 물리학사, 진화론 연구에 집중했으며, 그 후에는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과학적, 방법론적 쟁점들을 분석한 논문으로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신생 지적설계운동의 가장 박식하고 강력한 대변자 중 한 사람이다.
과학을 공부한 사람 중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과학만이 합리적이고, 과학만이 진리를 밝히며, 다른 모든 것은 신념과 의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이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말은 자기모순인 철학적 가정이다. 과학적 지식이 다른 지식들보다 반드시 앞선다고는 할 수 없다. 과학은 우리에게 많은 참된 것을 가르쳐 주는데,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과학적 증거는 실제로 유신론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한다. 지난 50년 동안 폭넓은 과학 분야에서 밝혀진 증거들은 유신론의 확고한 논거를 제공해 주었다. 유신론만이 이 모든 증거들에 대해 지적으로 만족할 만한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NOMA의 문제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교도권‘ 아래에서 서로 다른 영역을 차지한다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말을 따르고 있다. 굴드는 이 철학을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 교도권의 분리)라고 부르며, ‘과학의 그물은 경험적 우주에, 종교의 그물은 도덕적 의미와 가치의 문제들에 펼쳐져 있다‘고 말하며, 과학은 변치 않는 사실로, 종교는 변덕스런 믿음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NOMA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과학과 종교는 분명 관심과 초점의 대상이 다르다. 하지만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문제 등에서는 과학과 형이상학이 상호작용을 하는 영역이 있으며, 이와 같이 세계관의 문제가 걸려있는 영역에서는 과학의 발견이 필연적으로 세계관의 문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NOMA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NOMA에 따르면 과학은 사실의 영역이고, 종교는 도덕과 믿음의 영역이다. NOMA가 제 역할을 하게 하려면, 과학이나 신앙을 희석해야 한다. 그래서 굴드는 종교란 그저 윤리적인 가르침 정도로 생각하고,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우화로 취급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존립 여부는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신에 달려있다. 성경적 기독교는 신앙만이 아니라, 사실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마이어의 결론은 "과학의 증언이 유신론을 지지한다. 제대로 하기만 하면, 과학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과학이 유신론을 지지하는 증거
1) 우주론 : 우주에는 분명한 시작점이 있다. 지금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에너지, 물질, 공간과 시간에 시작점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반유물론적인 믿음이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 자연법칙 등으로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우주론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유신론 가설을 제거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2) 인위적 미세 조정 : 근본적인 물리 법칙과 매개 변수들이 정확한 수치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어떤 초지성적 존재가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끼어들었고, 자연에는 이렇다 할만한 맹목적 힘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처럼 우주가 미세하게 조정된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미세조정자가 있기 때문이다.
3) 생명의 기원과 생명이 생겨나는 데 필요한 정보의 기원 : DNA와 단백질 분자에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유전자의 기계어 부호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컴퓨터와 유사하다. 컴퓨터는 지적 공학자가 만든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정보들은 지성적 존재의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모든 생물의 모든 세포 속에 들어있는 정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4) 생물 속에 있는 통합적이고 복잡한 분자 체계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 생물학적 기계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분들이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무작위적 변이에 가해지는 자연선택의 과정으로는 그런 체계를 만들 수 없다. 자연선택은 일단 만들어진 체계를 보존할 따름이다. 한 요소도 제거 불가능한 복잡한 체계들의 문제는 체계 안의 모든 부분이 다 갖춰지고 긴밀한 조정을 통해 서로 협력하기 전까지는 작동을 하지 않는다. 진화가 순전히 우연에 의해 거대한 도약을 해서 한 번에 그런 체계를 만들어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5) 캄브리아기의 대폭발 : 캄브리아기에는 20가지에서 35가지에 이르는 전혀 새로운 구조의 몸체를 갖는 생물들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것은 엄청난 복잡성의 증가인데, 그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고, 이행단계의 중간 형태가 없다. 도대체 진화가 얼마나 빨리 일어나야 그것을 더 이상 진화라고 부르지 않을 것인가. 다윈 또한 자연이 갑작스런 도약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다윈주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설계가 더 나은 설명이다. 따라서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은 다윈의 진화론에 반대하는 부정적 논거일 뿐 아니라, 설계를 지지하는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논거가 된다.
6) 인간의 의식이 인간본성에 대한 유신론적 견해를 지지함 :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인간은 단순한 물질 이상의 존재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존재이며, 자기반성, 재현예술, 창의성과 같은 능력이 있다. 뇌 속에 있는 물질의 물리적 상호작용만으로는 이런 종류의 의식을 설명할 수 없으며 유신론이 최선의 설명이다. 자연주의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말했던 19세기 과학자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난 50년 동안의 발견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 과학과 신앙은 적대관계가 아니다. 과학적 증거와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해석할 때, 그 둘은 서로 지지할 수 있고 서로를 뒷받침하게 된다.
최선의 설명을 찾는 추론 : 창조주 가설(God Hypothesis)
1998년 수학자 윌리엄 뎀스키와 마이어는 유신론적 믿음을 뒷받침하는데 쓰일 수 있는 추론 모델을 밝히는 논문을 썼는데, 그것을 "최선의 설명을 찾는 추론"이라고 불렀다.
이 추론은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실용적인 형태로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고 싶을 때, 먼저 광범위한 가설을 검토하고, 그 중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만한 가설을 세운다. 즉, 가능한 설명들을 남김없이 분석하고 주어진 자료들을 모두 담아 낼 수 있는 설명이 하나 남을 때까지 계속 정보를 더해간다. 더 좋은 가설을 고르는 방법은 그 가설이 증거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보는 것이다.
앞서 우주론, 물리학, 생물학, 인간의식을 거론하며 언급한 증거를 살펴볼 때, 유신론이 훨씬 더 폭넓고 놀라운 설명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존재는 자연주의나 범신론 등 주요 경쟁세력을 포함한 다른 어떤 세계관 보다 더 간단하고, 적절하고, 포괄적으로 폭넓은 증거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유신론을 보강하고 보충하는 증거들이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창조주 가설‘은 지난 100년 내 어느 시기보다 더 인정받고 있으며, 그냥 인정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 증거가 충분히 강력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평결을 보증한다.
몇 가지 반론들
1) 유신론에 대한 증거가 그토록 강력하다면 왜 더 많은 과학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 새로운 발견들이 퍼져 나가 그 함축하는 바가 충분한 고려의 대상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유신론에 대한 최고의 증거 중 일부는 아주 최근에 등장했으며, 그래서 구체적인 한 분야에 집중하는 과학자들은 유신론의 증거가 되는 다른 분야의 발견들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유물론이 지난 150년 넘게 주도권을 행사해 왔고, 그것을 반대한 과학자들은 적대와 박해를 받아왔다. 과학자들은 과학이 자연주의적 설명만 허용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며, 설계 가설을 고려의 대상에서 아예 배제하고 있다.
2) 과학자들이 기적의 가능성을 설명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로 인해 추가 연구 의욕을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 → 유물론적 과정을 포함하는 답만을 허용하겠다는 주장은 오히려 폭넓은 연구를 저해하는 발언이다. 과학은 자연주의적 설명만 고려해야 한다는 제멋대로 된 일방적인 규칙은 옳지 않다. 과학자는 증거가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3) 불완전한 설계가 하나님의 존재를 반박하는 증거가 아닐까? → 예를 들어, 맹점 등을 보면 "우리 눈의 구조가 어설픈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에게는 눈이 두 개 있고 맹점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눈은 실제로 엄청난 설계물이다. 사람들은 한 가지 변수만 보고 더 낫게 설계될 수 있었다며 그것이 잘못된 설계라고 말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결국 최고의 기능 설계(소비자가 요구하는 기능상의 요건을 고루 갖추도록 제품을 설계하는 행위)가 된다.
4) 완벽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면 세상도 완벽할 것인데,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 성경은 자연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악이 세상에 들어와서 원래의 설계를 망가뜨렸기 때문에 쇠퇴와 악화가 일어나고 있다. 로마서에는 자연계가 구원을 바라며 신음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묘한 미소
"하나님 없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실재하시고, 창조주시며, 우리가 그분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시기 위해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는 내가 그 분과 더욱 깊고 충만한 관계를 누리도록 끊임없이 자극합니다. 과학적 증거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내 삶과 별개가 아닙니다. 그 일은 나의 신앙 경험 속에 깊이 박혀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거나 DNA 분자의 구조와 정보를 품고 있는 성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은, 그것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경배하는 시간입니다.”
"광대한 우주와 고생물학의 먼지 나는 유물과 복잡한 세포 속에서 우리가 그분의 지문을 발견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과학적, 역사적 증거를 탐구하는 일은 인지적 활동만이 아니라, 예배 행위입니다. 창조주께 합당한 공로와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리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창조를 자연적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우리 모두 빠지기 쉬운 우상숭배입니다.”
"자연과 성경에서 하나님의 증거들을 볼 때, 나는 거듭해서 그 분이 누구신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분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번역 - 이종헌
링크 - ,
출처 - 창조과학회 대구지부 월간소식지 '창조' 제36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962
참고 :
창조주 찬양주일 설교
- 창조주 하나님 (본문 : 사 44:21,24 45:12)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성도님 여러분! 오늘은 창조주 찬양주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창조신앙을 확고히 다지는 날입니다. “라브리윤!” 이스라엘에서는 옆 사람이 기침만 해도 “라 브리윤!”(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때의 건강을 회복하세요) 이라고 인사합니다. 가장 귀한 인사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생기를 동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영’인 생기는 바로 생의 고동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의인화했을 때,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의 말씀은 생기요ㆍ영이요ㆍ영감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활동장소요, 무대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 갈등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기에서 벗어나고 갈등문제가 없어지게 합니다. 딤후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합니다. 이때 감동(inspiration)은 헬라어로 theopneustos(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 된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지난 4월 광주사립동물원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악어들이 뭍으로 올라오더니 3일이나 꼼짝하지 않았으며, 뱀들이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 꽈리를 틀고는 3일이나 움직이지 않아 사육사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하게 생각했답니다. 그로부터 3일째 되는 날에 일본의 강진으로 한국에도 그 여파가 몰려왔습니다. 동물들은 지진이 발생할 것을 감지했으나, 사람들은(지진 측정 장비 없이는) 그 징조를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의 신비에 있습니다. 바다 물고기의 측선에는 파이프 같은 홈이 파여 있으며, 거기에 있는 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나 진동을 쉽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이 지진계입니다. 즉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동물들을 만들자 그것들은 그 즉시 움직였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흙으로만 지음을 받은 동물들은 땅의 상태(진동…)를 잘 알 수 있어 이에 대처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산 존재, 사람)이 되었다고 창2:7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된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아 가야 정상이고 그렇지 못하면 정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및 바다의 고기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설명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욥12:7-8). 정직한 과학은 성경과 일치합니다. 이제 몇가지 예를 들어 ‘성경의 신빙성의 증거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욥기26:7 절에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에서 펴다는 히브리어로 ‘기울(이)다’란 뜻을 가진 ‘나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북편 하늘을 허공에 기울게 하시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사람의 모든 생존 조건을 아시고 지구를 빈 공간에 23.5˚ 기울게 하여 자전과 공전을 하게 하므로써 가장 살기좋은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이보다 조금이라도 가감하여 기운다면 더위와 추위로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고 과학자들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케플러(Kepler) 역시 우주에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와 조화가 있음(렘33:25)을 확신하고 태양계의 ‘별들의 운행법칙’을 발견한 것은 기본적인 앎의 욕구에서 출발한 기원에의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바다의 고기’를 연구하면 할 수록 놀라운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정확한 생명의 말씀임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마17:24-28절에는 ‘입 안에 은화를 물고 다니는 물고기’가 나오는데, 이 동화같은 이야기가 사실임을 밝혀주는 증거자료가 있습니다.(참고: ‘성서기행’ 신약편. 한길사 p276). 2000년 6월 이스라엘 현지 탐방시 예수님 당시의 배를 복원한 ‘Jesus Boat'를 타고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간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이 호수의 대표적인 어종인 ’베드로 물고기‘를 찾아보니 큰 것은 무려 120cm 나 되고, 이 물고기가 은화나 금화를 입속에 물고 다닌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물고기는 새끼들을 입 안에 넣어 기른다는 것입니다. 그 새끼들이 다 자랐을 때 토해내기 위한 수단으로 작은 돌도 함께 입 속에 물고 다닌다고 합니다. 작은 돌이라고 생각하여 입에 물고 있는 것 가운데는 호수에 떨어뜨린 금화나 은화가 섞여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고기를 지으신 이가 베드로에게 세금 낼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은 과학적이라고 어류학자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동화처럼 들릴 수 있는 ‘요나를 삼킨 물고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군산대 어류학자 최윤 교수는 ‘요나를 삼킨 물고기’를 7년간 연구한 결과 그 물고기는 백상아리(흰색 상어)로 판단된다고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참고: 2004년도 창조과학 학술대회 논문집 p203. 한국창조과학회 발간). 요나 1장에서 요나가 살 수 있는 조건의 물고기는 첫째, 씹지 않고 그냥 삼켜야 하고 둘째, 3일 이상의 저장능력이 있고, 셋째 가끔 토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고래도, 고래상어도 아닌 식인 상어중의 하나인 백상아리(흰색상어)를 양어장에서 60일 이상 관찰한 결과, 이 물고기는 먹이를 주면 통째로 삼키며, 30일 이상 먹이를 소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뱃속에 저장하는 경우도 있고 때때로 위속의 먹이를 토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식인 상어는 이스라엘의 수도가 위치해 있는 지중해나 우리나라의 군산을 비롯한 육지 가까운 연안에서 자주 출현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 백상아리는 남자 어른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 2장 4절에 보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개역개정 성경)라고 한 것은 ‘미워도 다시 한번’(?) 성전을 바라보며 해저신학교(?)에 입학한 요나가 마치 졸업성명서를 발표하듯 기도할 때 그 성명서에 대한 답사(?)로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10)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할 때 요나를 삼킨 물고기는 백상아리로 판단된다고 최윤교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고전2:15) (‘판단하다’의 원뜻은 평가, 즉 ‘시험하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분별하다’). “들의 百合花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6:28)(‘보라’의 헬라어의 뜻은 ‘주목해서 생각하다’.‘주목해서 관찰하다’)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과학적인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에레모스산의 70~90 종류의 百合花를 잘 관찰하여 그 아름다움, 그 기이함, 그 완벽함이 누구의 솜씨요, 걸작품인지 알아내라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들의 선언문’에는 ‘학교에서 창조의 증거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인본주의자들도 창조의 증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척 콜슨은 “지난 수십 년에 걸친 교회의 실패는 성경의 진리를 모든 윤리와 피조 세계의 질서를 설명해 주는 종합적인 삶의 체계 및 세계관으로 정립시키지 못한 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교회마다 창조론을 분명하게 가르쳐서 철저한 창조신앙을 회복하고 견지(堅持)하게 하므로써 과학시대에 살고있는 청년들을 살리는 영적 쇄신 운동에 교회가 앞장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과학자(사람)는 모방’ ‘창조는 과학, 진화는 비과학’입니다. 성경은 비과학적인 책이 아니라, 초과학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연구ㆍ적용해 나가므로써 우리의 영ㆍ육이 건강한 복된 생애를 누리시길 원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worthless things)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renew my life according to your Word)" (시119:37)
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 복된 생애를 누리시고 인생의 목표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참 창조주로 온전히 믿고 인정하며 그 이름을 높여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대전 카이스트교회
김수웅 창조과학 담당목사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640
참고 :
목사님과 평신도, 그리고 창조과학
창조과학 사역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가 교회 강연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한국에 창조과학이 처음 선을 보일 1980년 당시부터 사실 창조과학은 전국의 각 교회마다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크고 작은 창조과학 강연을 통해 오늘의 발전된 모습으로 성장해 왔다. 초창기 한국 창조과학을 이끌어온 김 영길 현 한동대 총장을 비롯하여 수 많은 헌신된 한국의 기독교 과학자들이 교회의 요청이 있을 때면, 모이는 인원에 상관 없이 산간 벽지를 멀다하지 않고 강연을 하며 일궈온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 사실을 과학자의 객관적인 입으로 증거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의 기초를 쌓는데 도움을 줄 뿐만아니라, 궁극적으로 창조의 역사성에 기초한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국창조과학회의 그 신념과 열정은 오늘도 하나의 전통처럼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가면 갈수록 진화론적 과학주의에 물든 이 시대에 창조과학이 갖는 그 시대적 사명의 중요성이 더 해 가고 있다.
그러면, 창조과학 사역은 과연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첫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요, 둘째는, 비록 교회 안에는 있지만 성경의 내용을 부분적으로만 믿거나 그 역사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별명답게 수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성경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모세오경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먼저 소개하며 그 기초 위에 예수의 부활과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설명하였던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행 14:8-18; 17:22-31).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날 학교의 일방적인 인본주의 교육으로 인해 진화론을 자연스럽게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고려해야할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는 이유를 파고 들어 가면, 결국은 그들의 마음 속에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어떤 내용들이 비과학적으로 비쳐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창조의 사실만 하더라도, 마치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인양 세뇌적 교육을 받아온 상태에서는 성경의 내용을 거부감 없이 사실로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것이 불보듯 훤한 것이다. 이것은 비록 예수의 복음을 어떤 경로로든지 믿게되어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해당되는 중요한 문제인데,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말씀에 기초한 균형잡힌 신앙이 되지 못하고, 그 신앙이 실생활과 따로 존재하거나 급기야는 위기가 닥쳤을 때 쉽게 신앙을 잃어 버리기가 십상이다. 결국, 이말은 창조과학 사역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 교회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세상 밖의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전도하고자 할 때는 물론이고, 교회내의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인류의 참 역사적 기록임을 확신을 갖고 믿게 하는데, 창조과학 사역만큼 적절한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은 교회가 이러한 사실을 숙지하고 헌신된 창조과학 사역자들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경우에 교회의 창조과학 강연을 일반인 보다는 청년부를 주 대상으로 하거나, 주일의 정규 성경 과목으로 채택하여 지속적으로 교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하기 보다는 주중에 단회성 특강으로 그치거나, 그나마 성도들은 모아 놓고 담임 목사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전도사나 부목사가 대신하여 얼굴을 내비치는 지나가는 행사 정도로 가볍게 치루고 마는 경우들이 있다. 청년부는 청년부대로 필요한 집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오히려 일반 성도들에게 강연이 필요한 경우가 더 많다. 교회의 사정상 단회성 특강이라도 계획한다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창조과학 사역은 교회내에 정규 프로그램으로 정착하여 자녀 및 일반 성도들의 신앙 교육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는게 필요하다. 전도사나 부목사가 행사를 진행해도 창조과학을 통해 은혜를 받는데는 달라지는게 하나도 없지만, 그 교회에 가장 큰 책임을 맡고 있는 담임목사의 참석과 관심은 결국은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창조과학 강연을 다녀 보면, 일반적으로 평신도들의 반응이 데체로 더 뜨거움을 발견하게 되는데, 다른 성경 공부에서 깊게 다루지 않고 지나간 부분들이나, 과학적 혹은 이성적 경험과 상충된다고 여겨졌던 성경의 부분에 대하여 성경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시원한 답을 얻게 되었을 때 그들의 표정이 밝아짐을 많이 보게 된다. 반면, 교역자들의 경우 일반인의 예상과는 달리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다.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책을 맡은 교역자들이 어찌 창조를 믿지 않겠냐마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창조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뜻 밖에도 진화론과 혼합된 창조의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쉽게 이야기 하면,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었다는 진화론적 가정하에 성경의 6일 창조에 나오는 하루를 지질학적 긴 연대로 인식 한다든지, 하나님께서 진화의 가정을 거쳐서 생물을 만드셨다든지, 심지어 노아의 전 지구를 덮은 홍수를 그저 중동지방에 있었던 지역 홍수 정도로 취급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런 사고 방식들은 모두 인본주의 학문의 영향을 받은 신학의 결과로써, 많은 수의 신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기독교 대학에서도 버젓이 교과 과정으로 가르쳐 지고 있는 내용들이다. 실례로 필자가 L.A.에 있을 때 다니던 A 교회에서는 교회행사의 하나로 외부 사람을 초청하는 광고를 내고 창조과학 강연을 준비한 적이 있었는데, 강연을 일주일 앞둔 어느날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부터 느닷 없이 지구의 나이가 젊다는 증거가 무엇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중에 보니 그 목사님은 성경의 6일 창조와 진화론에서 가르치는 오래된 지구의 연대 사이에 본인 자신이 상당한 갈등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만년 이내의 젊은 지구를 증거하는 많은 지질학적 증거 앞에서 자신의 갈등을 모두 해소하고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사실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해 들은바 있다. 아마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다른 목사님들도 많이 계실지 모르겠다.
창조과학 사역은 창조의 주제에 전문적인 사역이다. 과학적 이면서도 동시에 성경적으로 모순이 없는 내용만을 소개하며,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게 궁극적인 존재의 목적이다.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들여다 보면,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에 어떤 교육을 받았던, 그래서 어떤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건, 창조의 문제는 그 전문 동역자에게 도움을 받는게 현명한 목회의 방법일 듯 싶다.
사실, 한국 창조과학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셨던 분은 다름 아닌 CCC의 김준곤 목사였으며, 그 뒤 하용조 목사께서 시무하시는 서울 온누리 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뒤 따름으로 오늘의 창조과학이 있기 까지 크게 공헌 하였다.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나 20 세기 최고의 설교가 중의 하나로 존경 받는 영국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성경의 창조를 조금도 기록된 바대로 의심 없이 믿었던 사람들이다. 문제는 평신도냐 목사냐가 아니라, 결국 우리의 믿음의 분량인 것이다.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가?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인가? 나의 이성으로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 나오더래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임으로 사실로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되집어 물어 봐야 될 질문이 아닌가 싶다. 차마 드러내 놓고 고민 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창조 기록에 웬지 자신이 없는 목사님들이나, 물어 봐도 시원한 대답을 어디서도 구하지 못해 답답해 하던 평신도들이나,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자연의 경이를 통해 말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고 맘껏 그 분을 찬양하기 원하는 주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창조과학 사역이 자그마한 도움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출처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522
참고 :
합하여 세워질 기독 지성인의 성막
이곳 College Station에서는 BSF (Bible Study Fellowship) 성경공부 'Life of Moses' 가 진행중 입니다. 출애굽기 31장을 묵상하던 중 다음의 구절에서 한 비젼(vision)을 보게 되었습니다.
“브사렐(하나님의 그늘(보호)속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Spirit of God)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skill) 와 총명(ability)과 지식(knowledge)과 여러 가지 재주(crafts)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출 31:3-4).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 (출31:6)
“무릇 내가 네게 명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 (출31:11)
즉 하나님께서 믿음의 지성인들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그들의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재주를 총동원하여 하나님께서 임재 하실 성막(Tabernacle)을 지음으로 만천하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학문과 교육과 예술과 기술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그 연구와 창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되 세속적 생각대로 임의로 하지말고 계시하여주신 성경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니” (고후 10:5)
“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자연과학, 형이하학, 예술)과 보이지 않는 것들(인문사회 과학, 형이상학)과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6)
“그(예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 2:3)
“이는 너희가 그(예수)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고전 1:5)
지금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모든 학문의 패러다임은 진화론적 인본주의입니다. 즉 지금의 학문이란 인본주의의 바벨탑을 쌓고 창조주 하나님께 대적하여 높아진 것입니다.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패러다임 아래서, 교육현장에서, 연구실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잃어버린 것들이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는 삶의 현장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과 예술의 장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기독 지성인들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공급하여 줄 것이니 공교한 일들을 연구하여 보라고 지명하여 부르시며 약속하십니다. 세상 학문의 패러다임에 끌려 다니지 말고 내가 명한 대로 즉 성경말씀으로 계시된 내용을 중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성막의 건축은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함께 동참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25:2-9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 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한 두 사람의 힘이 아닌 모든 자원하는 기독지성인들의 합력된 손과 발과 머리와 재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학문과 문화/예술의 장막을 세워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작은 금이나 홍색, 자색실을 바쳤을 때, 과연 그것이 성막을 짓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어우려져 결국 광야에 성막이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한 적은 재물과 작은 학문적 노력들이 합하여 졌을 때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바벨탑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현 학문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릴수있고,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학문과 예술의 참 진리의 성막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곳에 주님이 모든 학문과 예술의 주인으로 영광 중에 거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과학, 철학, 학문, 예술들이 다 무용한 것이므로 버려져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12장 35-3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고 말씀 하십니다.
성막을 지을 수 있었던 모든 재료들이 결국 애굽사람들로부터 온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창세기 15:13-14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예언적으로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애굽사람들로부터 받은 재료를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위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애굽의 재물들이 그 전까지는 피조물/우상들을 숭배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쓰여졌던 것들입니다. 똑같은 재료들인데 앞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막을 세워가는데 사용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지금까지의 진화론적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지적, 예술적 활동들은 다 쓸모없는 것이니 쓸어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까지 여러 분야에서 축적된 연구와 자료들을 진화론적 인본주의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기술, 예술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은 배경신념의 문제입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도 과학이 절대적 진리가 지배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패러다임이 지배한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인간과 우상과 피조물을 숭배하는데 쓰였던 애굽의 재물들을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막 건축의 재료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 두 사람의 헌신이 아닌 모든 기독 지성인들의 각 분야에서의 공헌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금이나 놋이나 청색실이나 홍색실 각각의 모습으로 바쳐질 때는 도대체 성막을 언제 세울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바쳐지지 않고는 성막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에 자원하는 사람에게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막은 모세시대 사람들의 손과 발을 통하여 광야에 세워졌습니다. 당신은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학문과 예술의 성막에 대한 비젼을 갖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 시대의 브사렐로 지명하여 부르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332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