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신학 탐구, 신학자의 과학 탐구
: 요하네스 케플러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학문과 신앙
(Scientist's Theological Quest, Theologian's Scientific Quest)
박형진
요약 :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학문의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지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인 과학자로서 신학적 탐구를 추구한 이도 있고 신학자로서 과학적 탐구를 시도한 이도 있다. 17세기의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와 18세기의 신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과학자의 신학탐구와 신학자의 과학탐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한 다기보단 학제간 연구를 통해 시각과 문맥을 넓히고 상호교감을 통해 오히려 성경의 해석과 이해에 큰 빛을 던져주었다. 이로 인해 복음의 이해를 더욱 선명하게 고양시키고, 그 영역을 확장시키며,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해준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과학활동은 충분한 선교적 의미를 지닌다.
Abstract : Authentic Christian faith demands integration between the Word of God and academic disciplines. Christian history has demonstrated such attempts among scientists' quests for theological truth as well as theologians' quests for scientific truth. Johannes Kepler, the seventeenth-century astronomer, and Jonathan Edwards, the eighteenth-century theologian are such cases. Interplay between science and theology actually brought hermeneutic contributions to the understanding of the Bible with perspectives and contexts expanded and through border-crossing experiences. Thus, the understanding and implications of the Gospel have been enhanced, enlarged, and enriched. In this sense, creation science exerted its missional task.
1. 들어가면서
한국창조과학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함에 진심어린 축하와 아울러 학술발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됨에 먼저 감사를 드린다. 그 30년의 시간은 필자에게도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30년 전 창립이 되던 해 나는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입시준비로 각박한 고등학교 시절 각별한 의미를 주던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화학시간이었다. 당시 화학 선생님 가운데 한분은 창세기의 창조기사가 자연과학적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역설하고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교회강단에서 조차 들어보지 못한 내용을 기독교학교도 아닌 학교교실에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중학교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특히 물리학을 통해 자연과학에 매료된 나에겐 그 시간이 특별한 시간으로 다가왔다. 지나고 보니 당시 선생님은 한국 내에 창조과학이 태동하기도 전에 창조과학을 수업시간에 몸소 주장하던 분이었었다. 자연과학 전반에 걸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던 나는 과학도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평생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탐구하는 삶만으로도 충분한 가치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뜻을 좇아 이학계열로 진학하였다. 당시 캠퍼스에서 열띤 논쟁과 토론으로 등장하던 ‘창조냐 진화냐’라는 세미나가 있을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쫓아다녔다. 바로 그해 나의 대학생활은 창조과학회의 태동과 함께 맞물려 간 것이다.
그러나 대학 생활 중 나에게는 또 한 번의 지적인 전환이 있었다. 그것은 성경을 접하면서였다. 교회생활을 10여년 가까이 하였고 수많은 설교도 들었지만 정작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군 생활을 하는 기간 성경을 통독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결심대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읽다보니 이전과는 다른 성경의 깊이와 묘미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장엄히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전개됨이 보이면서 자연스레 나의 관심은 신학적이며 역사적인 탐구에 빠져든 것이다. 이제 창조의 공간에서 뿐 아니라, 구속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찾고 싶은 관심과 함께 나의 진로에도 점진적인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다. 긴 여정의 과정을 거두절미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선교역사가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하잘것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의 신앙은 과학과 신학의 길목에 서있었다. 걸어야 할 길은 한길 밖에는 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 갈래길 중 어느 길을 걸었던 결국은 하나님께로 향한 길이었음을 돌아보며 고백한다.
이번 논고의 제목을 '과학자의 신학탐구, 신학자의 과학탐구'라고 잡아본 것은 개인적인 편력에서만 아니라, 지나온 2000년의 기독교역사를 공부하면서 신앙의 선현들 가운데도 학문과 신앙의 통합적 시도로 과학과 신학간의 인터플레이(interplay)를 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상호 교차적 학문행위가 가져다 준 결과는 어떠하였는가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열정이 자연과학과 기독교의 지적 유산에 풍성한 결과를 가져다 준 예가 있을까? 그리하여 이번 논고에서 필자는 이러한 기독교의 풍요로운 지적 유산을 남긴 이들을 생각해 보고 그 가운데 두 사람을 뽑아보았다. 한사람은 16세기 독일출신의 수학자요 천문학자로서 근대 천문학 발전에 탁월한 기여를 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또 다른 한사람은 18세기 신대륙 뉴잉글랜드의 목사요 선교사요 신학자요 독창적인 사상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이다. 전자는 목회자가 되고자 했으나 천문학자로 생을 살다 마감하였고, 다른 한 이는 목회자의 길을 걸었으나 자연철학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진 학자였었다.
이 논문에서는 이 두 영역간의 학문행위가 성경과 복음의 이해에 어떻게 기여하였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케플러나 에드워즈 모두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이전 시대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논의는 오늘날과 같은 ‘창조론 대 진화론’적인 특정한 대결의 구도에서 다루어지고 있진 않다.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두 사람 모두 개신교적 전통에서 성경의 권위를 믿고 있었으며 과학적 사실이 더 엄밀히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성경적 창조를 더욱 잘 증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이 그들의 학문행위에 박차를 가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근대과학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가져온 발견들을 가져왔고, 그러한 발견은 거꾸로 성경적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해석해주는 효과를 가져다 준 것이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인 이상 신앙과 학문이 분리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과학적 진리나 신학적 진리나 모두 한 진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학제간 연구는 혼동이나 해악보단 유익을 가져다주어야 할 것이다. 창조과학활동이 선교학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필자는 창조과학이 성경말씀과 복음에 대한 이해에 중요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고 보고 논점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2. 요하네스 케플러의 학문과 신앙
2.1. 케플러의 배경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독일 바일(Weil) 태생이었고, 그에 관한 전기적인 기록들을 보면 그의 출생배경은 결코 여유롭지 못한 출신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는 용병으로 집을 떠나 일하고 있었으며, 케플러의 어머니는 한때 전쟁 중에 싸우던 남편과 함께 지내려고 자녀를 내버려두기까지 하여 정서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가정의 환경 속에서 자라나질 못하였다. 다행이도 철저한 개신교 신앙을 가졌던 할아버지가 누구보다 그에게 신앙적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어린 케플러의 기억 속에 그의 삶을 이끈 몇 가지 일들이 있었으니 그의 부친과 모친에 의해서 어린나이에 볼 수 있었던 혜성과 월식 등은 그로 하여금 결국 천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한 우주에 대한 신비와 관심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는 더구나 조산아로 태어남으로 건강한 체질이 아니었으나 머리는 명석하였고 특히 수학에 있어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었다.
그는 목회자로의 길을 생각하고 개신교학교에서 수학했고, 후에 튜빙겐대학에 들어가 석사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튜빙겐 시절 그는 미카엘 마에스트린(Michael Maestlin)으로부터 수업과목의 일환으로 천문학 수업을 받게 되는데 특히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이론을 접하면서 그 월등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때까지 케플러는 목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뜻밖에도 졸업을 앞두고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의 루터교학교의 수학교사로 취업을 하게 된다. 사실 그는 이 직위를 꺼림칙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 천혜의 길목이었다. 그는 곧이어 《우주구조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 1596)라는 천문학연구를 첫 출간하게 되는데 이것은 당시 위대한 두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와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의 관심을 끌어 결국 그들과 친분과 교류를 맺게 하는 물꼬를 터주게 해주었다.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의 청에 의해 프라하(Prague)에 있던 관측소에서 그의 조수로 일을 돕게 되고 곧 이어 죽게 된 브라헤의 뒤를 이어 제국의 궁중 수학자가 되었다.
2.2. 케플러의 신학적 탐구
케플러는 무엇보다 그가 확신하고 있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입장을 성서와 조화시키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와 우주를 지배하는 질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주구조의 신비》에서 케플러는 당시에 지구를 포함해서 6개로 알려진 행성들(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과 플라톤의 5개 정다면체(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들 행성이 나열된 우주의 모습은 마치 이들 다면체들을 다른 다면체 안에 들어가게 할 때 각각의 다면체를 감싸는 구형의 천구의 배열과 상응한다고 보고 거기서 행성간의 거리를 측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가정과 실제적인 천문 관측 데이터들이 맞아 떨어지지 않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가정을 포기하게 된다.
우주와 기하학적 구조사이의 유추를 통해 우주의 신비를 캐어 보려는 케플러의 사변적인 발상은 우주가 기하학적 조화와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본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본다. 케플러는 우주의 구조에 신의 이미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고 영적인 구조와 물질적 구조사이에도 무슨 상관관계가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특히 행성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는 태양은 태양계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태양을 중심적으로 사고한 데는 적어도 신플라톤주의적 영향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수학과 천문학의 시행착오 과정에서 케플러는 뜻하지 않은 발견을 하게 되니 곧, 행성들의 공전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도는 타원계도임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케플러 제1법칙이 된다.
케플러의 또 하나의 걸작인 《우주의 조화》(Harmonices Mundi,1619)는 위에 언급된 여섯 행성의 운동을 중심으로 천상계의 조화를 음악으로 묘사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태양계의 운동을 네 가지 목소리 (soprano, contralto, tenor, bass)로 나타낼 수 있다고 보고 그 움직임이 연주하는 우주의 교향곡을 들어보고자 했다. 이 책에서 그 유명한 케플러 제3법칙인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도출해낸다. 이는 훗날 아이삭 뉴튼(Isaac Newton)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추론할 때 근거가 되었다. 케플러는 그의 서문에서 이르기를,
가장 뛰어나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감과 열정을 불러 일으켜 주시고 나의 삶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나는 천체의 운동이 충만한 조화로 움직이고 있음을 관측했습니다... 나는 이집트의 황금기구를 훔쳐 하나님의 성막을 짓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초기교부가운데 하나인 오리겐에게서도 볼 수 있다. 즉, 케플러는 신앙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온 과학이라는 것을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재료로 삼겠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케플러는 천문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성서에 나타난 연대기적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1604년 초신성(SN1604)의 출현을 보고 2년 후인 1606년 《뱀주인자리의 발부분에 있는 신성》을 집필하였다. 1613년 출간된 《진실한 1년에 대해》는 마리아로 부터 나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보충 논문이었다. 1603년 12월 목성과 토성의 회합(conjunction)이 있었고 1604년 9월 26일 화성이 토성과 회합하고 연이어 10월 9일 화성이 다시 목성과 회합하면서 이즈음 상간엔 일부 천문학자와 점성가들은 아마도 혜성과 같은 것이 형성되거나 출몰하게 되는 현상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대 속에 1604년 10월 10일경 목성보다 더 밝은 별이 프라하의 하늘에서 목격되었다. 당시 케플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BC 4년이라 주장한 라우렌티우스 수스리가(Laurentius Suslyga)의 견해를 발전시켜 자신의 천문학적 지식으로 실제 그리스도의 탄생을 BC 5년으로 산정하였다. 그리고 목성과 토성과 회합이 그리스도의 탄생 보다 조금 앞선 BC 7년에 일어났던 것으로 계산하였다. 그리고 BC 6년 2월엔 화성이 토성과, 같은 해 3월엔 화성과 목성이 회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고 계산하였다. 바로 이시점이 그리스도가 수태된 때로 보며 이즘에 일어난 베들레헴의 별이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였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1603년에서 1605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행성들 간의 회합과 초신성의 출현은 BC 7년에서 BC 5년 상간에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던 베들레헴의 별이 보였던 때와 비슷한 상황을 설명해 준다고 믿고 있었다.
케플러는 목성과 토성간의 회합이 이루어지는 패턴의 관측으로부터 산정하기를 매 800년 마다 천체에는 주기가 있었으며 각각의 주기의 시작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세상은 창조된 후 그가 살던 때까지 여덟 번의 주기를 갖고 있었으며 첫 번째 주기가 세상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노아의 홍수는 세 번째 주기의 시작에, 그리스도의 탄생은 여섯 번째 주기의 시작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일곱 번째 주기의 시작에 해당되는 때(AD 800)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샤를마뉴대제의 대관식으로 보고 여덟 번째 주기가 시작되던 케플러 당대를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로 믿어 그는 사람들에게 각각 그 양심을 돌아보고 회개해야한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케플러의 천문학적 관찰로부터 나온바 우주의 연대로 보면 그는 BC 4000년경에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당대의 전통적 입장과 성경의 연대기에 근거한 젊은 지구에 대한 견해를 견지하고 있었다.
3. 조나단 에드워즈의 학문과 신앙
3.1. 에드워즈의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뉴잉글랜드 코네티컷(Connecticut)에서 태어나 청교도적 전통을 지닌 목회자 가문 속에서 성장하고 예일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하바드대학에서 수학한 목회자들이였으며 특히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rd)는 이미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노스햄프톤(Northampton)에서 영향력 있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에드워즈의 부인이 된 사라 피에르폰(Sarah Pierpont)의 부친은 예일대학 설립자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녀의 모친은 영향력 있는 청교도지도자가운데 한사람인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의 증손녀였다.
대학을 졸업한 에드워즈는 1727년부터 그의 외조부의 교회에서 목회수련을 시작하여 1750년 사임하기까지 20년 이상 목회사역에 전념하게 된다. 이 기간 중 그는 자신의 목회지에서 대각성(The Great Awakening) 현상이 일어남을 목격하게 된다. 즉, 죄에 대한 회개와 중생(당시에는 'New Birth'라고 부름)에 대한 체험이 회중가운데 일어남을 보게 되었다. 1730년대부터 일기 시작하여 1740년대에 이르러 영국으로부터 온 부흥사 조오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 의해 신대륙을 강타한 1차 대각성운동에 대해 에드워즈는 이를 신학적으로 대변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성찬의 자격에 대한 그의 엄격한 입장 때문에 결국 그가 20년 이상 목회하였던 현장에서 떠나야만 했던 에드워즈 목사는 매사추세츠주 스톡브릿지(Stockbridge)에서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사역(1750-1757)에 헌신하게 된다. 그는 1758년 대각성운동의 여파 속에 출범한 장로교학교인 프린스턴대학의 3대 총장으로 요청을 받고 부임하게 되나 아쉽게도 몇 달 안 되어 천연두접종의 부작용으로 인해 아쉬운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과학적 정신으로 접종에 몸소 본보기로 나섰으나 결국 희생자가 된 셈이다. 에드워즈는 설교가요 목회자요 선교사요 신학자요 집필가로서 미국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상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3.2. 에드워즈의 과학적 탐구
예일대학을 다닐 때부터 에드워즈는 자연과학에 관한 노트를 작성하며 자연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과학적 관심은 자연철학에 대해 논한 그의 일련의 노트들, 즉, '자연철학에 관해'('Natural Philosophy”, ca. 1720)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원자에 대해”('Of Atoms”), '무지개에 대해”('Of the Rainbow”), '빛에 대해('Of Light Rays”), '곤충에 대해”('Of Insects”)등과 같은 다양한 소고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자연철학에 관해 논하는 에드워즈의 과학적 탐구영역은 동물의 변형, 식물의 번식, 호흡, 혈액순환, 감각기관, 신경계, 뇌, 정기, 영혼과 육체의 결합, 대기, 구름, 무지개, 번개, 습곡, 계절, 온천, 심연, 유성, 혜성 등등에 걸쳐 다양하고 방대함을 볼 수 있다.
물리학의 영역에 있어서 그는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있다고 보는 일종의 원자설을 이야기하고 있고, 뉴튼의 광학을 읽고 빛은 입자로 되어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중력에 관한 안목도 갖고 있었다. 생물학의 영역에 있어서는 곤충, 특히 거미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하고 있었으며 지질학과 해양학에도 관심을 갖고 논하기를 지구의 지각 밑에 지표면보다 무겁고 밀도가 높은 물의 심연이 있다고 보았고 바다물의 심층부는 짜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에드워즈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방대한 관심의 영역에 대해 언급하기를 그가 아마도 자연과학의 총체적 영역에 대한 야심찬 저술을 계획했었을 것으로도 보고 있다.
당시 스콜라주의적 전통에서 과학을 가르치던 학부의 한계를 뛰어 넘어 에드워즈는 독자적으로 근대 과학적 자료들(Descartes, Gassendi, Boyle, Newton)을 폭넓게 접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로버트 보일과 아이삭 뉴튼과 같은 유신론적 과학자(theistic scientists)들의 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드워즈의 과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이라고 본다. 그는 과학이 더욱 완전해 질수록 그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는 더욱 명백히 드러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18세기에 창조과학적 작업을 시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한 예로 거미에 관해 관찰한 그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글은 자연과 생태계속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지혜에 관심을 가짐을 보여주고 있다.
거미에 대한 관찰은 '곤충에 대하여”('Of Insects')라는 글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고 에드워즈는 이 글을 기초로 나중에 소위 거미서한(The 'Spider' Letter)을 쓰게 된다. 이 서한은 1723년 10월 31일 쓰여졌음이 밝혀졌다. 이때 에드워즈는 이미 예일대학으로부터 학사 및 석사학위를 마친 시점이었다. 수령인은 폴 더들리(Paul Dudley)로 당시 매사추세츠주 대법원의 부대법관이었으며 왕립런던학회(Royal Society of London)의 펠로우(fellow)이기도 하였다.
에드워즈는 소위 '날아가는 거미”(flying spider)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미들을 일컬어 경이로운 공중의 곡예사로 묘사하면서 거미줄 치는 과정의 단계들을 상세히 관찰하며 논하고 있다. 나뭇가지에서 밑으로 거미줄로 내려오자마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동작으로 공중에 달린 채 방향을 바꾸어 또 거미줄을 분비하게 된다. 이렇게 분비된 거미줄이 공기로 인해 부상하여 또 다른 가지나 나무에 닿게 되면 그 감촉이 거미줄을 통해 마치 신경을 통해 감각이 전달되는 것처럼 거미에게 전달되며 거미는 이를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해 연결된 줄은 다리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거미는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줄의 길이로 인해 부상력과 낙하력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것은 여러 종류의 거미가운데, 소위'날아가는 거미”(flying spider)라는 종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관찰 속에서 창조주의 솜씨를 찬양하고 있다:
창조주의 지혜는 놀랍기 그지없다. 놀라운 체액을 그 몸에서 외부에 미세한 가닥으로 뽑아내면 공기 중에 부상케 되면서 즉시 건조해 지며 그 목적에 맞게 쓰이는 과정을 보라
우리는 모든 생물, 심지어는 하찮은 곤충에게까지 생존에 필요한 필수적인 것만 아니라 삶을 여유 로이 즐길 수 있는 것까지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에드워즈는 또한 생태학적 통찰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는 관찰하기를 미대륙 동북부인 뉴잉글랜드의 경우, 8월말에서 9월초 날씨가 청명하고 건조할 때 거미를 포함한 곤충들이 내륙에서 바다로 바람을 타고 이동함을 보았다. 에드워즈는 생각하기를 거미들은 바람을 타고 이동하여 종국적으로 바다에 이르러 죽게 된다고 보았다. 바다의 수분에 거미줄은 무거워져 내려 결국 거미들은 물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토록 다음해에 지속할 알을 낳아 내륙에 남겨놓고는 겨울철에 바다로 이르러 생을 마감하는 것은 다른 곤충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았다. 에드워즈는 가끔씩 나무보다 높은 높이로 떼 지어 가는 일군의 곤충들을 관찰하면서 자연에 나타난 생태학적 질서와 하나님의 지혜를 언급하고 있다. 즉, 만일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양의 번식으로 불어날 곤충들로 인해 애굽의 재앙 이상의 재해를 겪게 될 것이다. 곤충의 양이 매년 일정량 이상 되지 않도록 수학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하나님의 놀랍고 오묘한 섭리이다.
4. 과학자의 신학탐구, 신학자의 과학탐구
4.1. ‘회심된’ 학문행위
지금까지 케플러와 에드워즈의 예를 통해 창조에 관한 깊은 신앙을 지닌 과학자와 신학자의 학문탐구의 예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일은 자연스러운 신앙의 발로로 이해될 수 있다. 복음으로 거듭난 자는 이 창조세계를 복음의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해석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가 과학자라면 과학을 재조명할 것이고, 역사가라면 역사를 재조명할 것이고 철학자라면 철학을 재조명할 것이다. 이렇게 재조명된 과학과 역사와 철학을 필자는 각각‘회심된’(converted) 과학이요 역사요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토록 회심된 학문행위 (즉 converting science, converting history, converting philosophy)등은 복음으로 거듭난 신앙인이 학문과 신앙을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로 지난 2000년간의 기독교역사 가운데 적지 않은 예들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아닌 이상 완벽한 통합은 불가능하다. 아직까지 우리의 과학지식, 역사지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케플러의 경우 고대와 중세전반을 지배해온 점성술적인 요소도 있었고 철학에 영향을 받아 사변적인 요소도 많았음을 본다. 에드워즈의 경우도 전문적으로 과학훈련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적인 수준에서 과학을 이해하였다. 이들 역시 그 시대적 환경에 있었기에 그 한계에 또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러한 시도가 어떠한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
4.2.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의 의미
그렇다면 과학자의 신학탐구와 신학자의 과학탐구와 같이 학제간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일각에선 신학과 과학의 엄격한 학문적 분리를 주장할지도 모른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시대에는 타학문영역을 시도하는 것은 서로 남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이 인식되어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수세기 전만 해도 여러 과학자와 신학자들은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위해 학제간 연구의 시도들을 하였음을 보게 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학제간의 연구는 오히려 장려되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과연 이러한 학제간의 소통이 우리에게 해악을 가져다 줄 것인지 아니면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지에 대해 물을 수 있겠다. 필자는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명제에서 볼 때,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학제간 연구는 결국 유익을 가져다주었다고 주장한다. 먼저 학제간의 연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첫째는 시각의 확장(perspectival expansion)이다. 학문을 하는 시각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주선을 타는 경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로 이 땅을 아무리 넓게 활보하고 다닌다 하더라도 여행자의 시각이 이 땅에서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지형을 국지적(local)으로 밖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를 타게 된다면 우리는 높은 고도에 올라 같은 땅을 바라보더라도 다른 차원의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시각이 확장된 것이다. 국지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부분을 비행기로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대기권 안에서만 운항하는 비행기로 지구를 보는 관점은 겨우 지구적(global)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 대기권 밖으로 나가게 되어 우주공간속에 여행을 하면 우리의 시각은 그만큼 우주적(cosmic)인 시각에 놓이게 된다. 현대문명과 과학은 이러한 면에서 우리의 시각을 확장해 주었다. 이러한 시각의 확장에서 이제 성경을 대하면 전에는 깨달을 수 없었던 많은 언급들이 더 분명한 사실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우주공간에 떠있는 지구의 모습에 대해 욥기에서 언급되어진바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earth)을 공간에 다시며”(욥26:7)라는 구절은 이제는 단순히 문학적이거나 수사적 표현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둘째는 문맥의 확장(contextual expansion)이다. 같은 사건이나 사물도 어떠한 문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모습이 달라진다. 한 가지 문맥이나 시각에서만 보는 것 보단 여러 문맥과 시각에서 살핀다면 좀 더 총체적인 이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일각에선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문맥을 신학적인 면으로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만 해도 모세오경에서 법을 다루고 있고, 선지서에서 역사를 다루고 있고, 시가서에서 문학을 다루고 있는 만큼 성경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를 총망라한 인간세계의 모든 범주를 다 다루고 있기에 성경을 이해하는 문맥도 그만큼 확장해 볼 때 성경의 이해가 깊어지고 풍요로워 질뿐만 아니라 복음의 의미도 더욱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학제간의 연구는 이러한 면에서 성경이해의 폭을 넓히는 공헌을 한다고 본다. 창조과학의 공헌은 성경을 과학적인 문맥에서 제외시켜 단지 종교적, 문학적인 면에서만 보려했던 해석의 제한성을 뛰어넘어 여러 과학적 반증을 통해 그 과학적 접근방법이 해석학적으로도 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비과학적(심지어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적 해석의 방법론에 대해 과학적인 문맥에서의 해석이 오히려 성경의 사실성을 더 확증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셋째는 경계간 넘나들기의 경험(border-crossing experience)이다. 이것은 마치 타문화 경험(cross-cultural experience)을 통해 얻어지는 것과 같은 효과라 본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의 관찰에 의하면 인간은 타문화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정체성(self-identity)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경험과도 일치한다. 타문화 권에 들어가 지내다보면 전에는 노출되지 않았던 새로운 상황 속에서 타문화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론 자신이 자라고 속해왔던 문화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정체성의 자각은 곧 자신의 한계를 본다는 것과도 같다. 전에는 자기경험만이 다인 줄 알고 우월감과 이데올로기로까지 높아진 것에 도전을 받고 수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롯한 여러 과학적 발견들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교회의 잘못된 전통과 가르침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는 도전이었다. 이러한 역동적인 인식과정은 학제간의 연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과학과 신학이라는 두 영역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비로소 신학은 신학의 한계를 과학은 과학의 한계를 보게 되며 수정적(corrective)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4.3. 창조과학의 선교적 의미
선교의 정의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진리로 선포하는 것이라 할 때 창조과학의 공헌은 성경의 이해와 해석에 있어서 또한 복음을 이해하고 증거하는데 있어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그 유익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표현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복음의 이해가 더 ‘풍요’(enrichment)로와 진다는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창조의 진리는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이끌어 준다. 우리는 진리를 도적질 하여 우리를 빈곤케 하며 결국은 멸망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거짓된 이론을 경계해야 한다.
둘째, 복음의 이해가 더 ‘확장’(enlargement)되어 진다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창조의 영역에 선포되어지고 적용되어져야 한다. 단지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인간에게 주신 소위 ‘문화명령’(창 1:26-28)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영역에서 청지기로서의 사명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복음의 이해가 더 ‘선명’(enhancement)하여 진다는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성경의 진실성은 부정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긍정되어 진다. 창조와 부활의 사실에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욥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비로소 깨달음을 얻고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욥 42:1-6 참조).
욥기에 하나님에 의해 친히 언급되어진 창조세계의 섭리와 질서는 현대과학을 무색케 한다(욥 38-41 참조).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고대인의 지혜에서 배울 것들이 많음을 본다. 현대과학문명은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자랑할지 모르지만 놀랍게도 미개하였으리라 여겨지던 고대세계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고대인의 지혜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시대적으론 더 앞설수록 진리에 대해 많은 지혜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지식과 지혜가 더 발전할 것이라는 진화론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바로 현대과학이 겸손해져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5. 나가면서
30년 전 시작되었던 한국창조과학회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교회가 부흥의 시기를 거쳐 양적 성장을 한 이후 1980년대에 들어가는 문턱에 소개되었다. 창조과학은 이때부터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은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에 나름대로 기여를 해왔다. 젊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캠퍼스를 중심으로 확산된 창조과학회 활동과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무엇보다 개혁주의적(Reformed) 세계관에 기초한 평신도운동이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 운동이 목회자나 신학교 주도적이었다기 보단 대학생과 전문지식을 갖춘 교수들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한국기독교사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 가치와 공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들 활동의 공헌은 학생운동, 학원운동으로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를 향한 지적, 영적인 기반을 제공해 준 것이다. 특히 성경을 비과학적이라고 여겨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 ‘진리와의 만남’(truth encounter)이라는 구도를 통해 복음을 전해왔다는 점이다. 또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다분히 감성적이고 이원론적이고 균형 잡히지 못한 자들에게 통합적 신앙관을 제공해줌으로 그간 부흥과 성장가도로 치우쳐온 한국교회의 방향을 다시 성경적인 방향으로 조명해주었다. 구속의 메시지로만 한정된 복음을 창조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리고 회복시켜 선포했다는 점에서 지역교회(modality)가 담당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선교단체가 지닌 소댈리티(sodality)적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창조과학은 충분히 선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 창조과학의 제2의 세대를 맞으며 향후 30년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성경대로 창조주 되심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이에 발맞추어 꾸준히 전개될 과학기술의 발전과 발견들은 성경의 진리를 더욱 확증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과학의 이름으로 추방된 하나님이 과학의 이름으로 다시 모셔 들여져야 할 것이다.
6. 참고 문헌
1. DuBose, Francis M., ed. Classics of Christian Missions. Nashville, TN: Broadman, 1979.
2.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Volume 15, Ptolemy, Copernicus, Kepler. Chicago: Encyclopaedia Britanica, 1952.
3. Hall, Edward T. The Silent Language. Garden City, NY: Doubleday and Company, 1959.
4. Hummel, Charles E. The Galileo Connection: Resolving Conflicts between Science & the Bible. Downers Grove, IL: IVP, 1986.
5.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ume 6,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0.
6. 김성환. 『17세기 자연철학』. 서울: 그린비, 2008.
7. 김정훈,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서울: 예영, 2004.
출처 - 2011 한국창조과학회 국제학술대회 논집
하나님이 주신 두 권의 책
이웅상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는 두 권의 책을 주셨다. 하나는 신학에서 말하는 일반계시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하나님이 창조자 되심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령의 감동을 통한 인간의 문자로 계시된 성경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은 윤리, 도덕적으로는 위대한 책일지 몰라도, 과학적으로는 무엇인가 문제가 많은 책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 중세 때 카톨릭 교회의 과학에 관한 부정적 태도가 큰 원인을 제공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학문의 영역, 특히 과학과 신앙의 영역을 따로 구분하고 서로 건드리지 말자 하는 이원론적인 사고가 만연하게 되었다. 즉 성경과 과학의 영역을 구분하여 별개의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자세이다. 신앙과 학문은 별개의 것일 수가 없다. 비록 성경은 과학이 태동하기도 전에 쓰여진 오래 된 책이지만, 성경과 과학의 관계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갈등의 관계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진화론 일색의 교육이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초과학적인 기적들을 포함하고 있어 과학으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뿐이지, 많은 내용들이 현대과학과도 자연스럽게 화합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왜냐하면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과학의 탐구영역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의한 것만이 아니고, 실제로 과학적으로 증명된 많은 증거들이 있다. 성경과 과학의 조화를 잘 보여주는, 과학이 밝혀내기 수백 년 내지 수천 년 전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과학적 진리들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1. 창세기의 유전 법칙
멘델은 1866년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성의 법칙, 분리의 법칙이란 유전법칙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시의 과학자들은 이 놀라운 유전에 관한 창조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50년 가까이 사장해 놓았었다. 보라색의 꽂을 피는 완두와 흰색의 완두를 교배하면 제 1대에선 보라색만 나오는데, 그 이유는 보라색이 우성이요 흰색이 열성이기 때문이며, 이를 우성의 법칙이라 한다. 그러나 열성인 흰색도 같은 열성인자와 만나면 흰색이 발현 되므로, 제 2대에선 우성과 열성이 3:1로 분리되어 나온다. 이를 분리의 법칙이라 한다. 과학자들이 20세기에 와서야 겨우 이해되기 시작한 이 이론이 3450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에 언급되어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창세기 31:12]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야곱은 외삼촌이요 장인인 라반이 자기에게 주기로 약속한 아롱진 양, 점 있는 것, 검은 양을 많이 낳게 하기 위해 주위의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암수가 교배하는 구유에 세워 보게 한다. 이 결과로 얼룩진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양을 많이 얻는데 성공함으로, 유전 보다는 환경의 변화가 후손의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므로 야곱은 라반이 열 번이나 약속을 변역하면서 지키지 않지만 동일한 수고를 반복하였던 것이다(창 30:37-43). 이러한 생각은 라마르크와 다아윈과 같은 19세기의 진화론자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라반이 열 번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지만, 그 때마다 야곱의 몫이 많이 태어나게 된 것은 야곱이 유도한 환경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라반의 악한 행위를 보시고 빼앗아 주신 것을 꿈에 천사를 통해 알려 주신다 (창 31:7-12). 라반은 의도적으로 위의 열성형질을 갖고 있는 양을 따로 분리하고 흰 양만을 야곱에게 맡겼지만, 교배하는 수양은 모두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 되도록 하여 이런 열성형질의 양이 많이 나오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흰 양들이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열성인자를 하나님이 보시고 주로 교배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물론 19세기 진화론자들이 믿고 있던 용불용설과 같은 이론 들은 후천적 획득형질이 유전하지 않은 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멘델의 유전법칙이 알려지면서 수정 되었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야곱에게 보여주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은 유전형질은 다른 성경에도 언급되어 있다.
[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이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형질(유전인자)을 기록하신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표현인 것이다.
2. 전형설과 유전자설
부모에게 있는 쌍가풀과 귀의 모양이 어떻게 자녀에게 유전될까? 사람은 사람만 낳고 돼지는 돼지만 낳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로 16세기까지 과학자들은 정자 속에 이미 다 형성된 작은 아이가 있는 것으로 설명해왔는데, 이를 Preforemed theory 라고 한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범유전자설이 제기되면서 온 몸에 있는 세포가 정자와 난자를 만드는 생식세포에 특별한 정보를 주어 부모를 닮은 후손을 생산하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1953년에 DNA의 구조가 밝혀지면서 모든 정보는 ATCG 라는 네 종류의 염기의 배열순서에 따라 다른 종류의 아미노산이 결정되고 이들의 순서에 따라 만들어진 단백질에 의해 여러 형질이 결정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과정을 종합해 보면 DNA에 기록된 유전정보는 핵에서 정보RNA에 모든 정보를 전달하여 세포질에서 리보솜에 의해 단백질을 합성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부모에게 있던 정보가 후손에게 DNA를 통해 전달된 후 형질로 나타나게 되어 닮게 되는 것이다.
[시편 139:1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3000년 전에 기록된 시편 139:13절은 나의 모든 장기(원어의 켈라요츠는 신장을 의미)가 모태에서 하나님이 조직하셨다는 말씀을 통해 16세기까지 과학자들이 믿고 있던 Preformed theory가 옳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시편 139:16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태에서 조직하시되 이미 기록된 정보대로 지으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현대생물학이 밝힌 모든 형질에 필요한 정보는 DNA에 기록되어 있다는 유전자설인 것이다.
3. 지구의 구조
이제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지구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지구는 둥글게 생겼으며 허공에 떠서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언제부터 이해하기 시작했을까?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지구는 평평하며, 태양이 지구주위를 도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이를 천동설이라고 하며 중세의 교회들도 이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는 둥글며, 태양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이론을 뉴튼은 17-8세기에 두 물체는 질량의 곱에 비례하며,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작용한다는 중력의 법칙으로 훌륭히 설명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지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이사야 40:21-22]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
놀랍게도 위 성경의 ”땅 위 궁창”이라고 한 궁창은 원형의 모양을 의미한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은 ”above the circle of the earth”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궁창은 잠언 8:27에도 말씀하고 있다. 또한 욥기 26:10에는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경계라는 말의 의미가 역시 '원'이라는 의미이다.
[욥기 26:7-8]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물을 빽빽 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과학자들이 18세기에 와서야 정확히 이해한 지구가 허공에 떠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공간에 다시며'하는 말은 허공에 띄워 놓으셨다는 말로 NIV 영어 성경은 이 의미를 ”suspends the earth over nothing”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동설이란 표현과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과학적 표현은 성경에 없지만, 2700년 전에 기록된 이사야와 3800 여 년 전에 기록된 욥기의 말씀들이 지구에 대해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것을 히브리서 1:3절은 만물을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다고 표현해 주고 있을 뿐이다.
4. 공기의 무게 발견
욥기 28장25절에 보시면 ”바람(공기)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분량을 정하시며” 라는 놀라운 기록이 있다. 물리, 화학, 생물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욥기에 나오는 중에 공기도 무게가 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과연 과학자들이 공기의 무게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 알기 시작했을까? 16세기에 이르러서야 갈릴레오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을 그의 제자인 토리첼리가 1640년에 공기의 무게(압력)을 재는 기계인 압력계를 최초로 만들어, 수은으로 치면 760mmHg에 해당되는 무게로 이를 1기압이라고 하며, 이 단위를 자기 이름을 붙여 torr(토르)라고 하였다. 16-17세기에 알게 된 공기에 관한 사실을 성경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밝히고 있는 것이다.
5. 해로의 발견
시편 8편 8절에 보면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바다에는 '해로'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해양학의 아버지 마태 마우리 박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던 과학자였다. 이분이 한 때 병에 걸려 장기간 누워있을 때, 그의 부인이 성경을 읽어 드리곤 했는데, 마우리 박사는 이 시편 구절을 듣다가 큰 충격을 받고 영감을 받아서 ”내가 해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였는데 해로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씀 하니, 병이 나으면 한 번 조사해 보아야 겠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병이 나은 후 연구한 결과 세계 최초로 1860년 해로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마우리 박사의 고향인 미국 버지니아 주의 리치몬드 시에 있는 마우리 박사의 기념비문에는, ”해양학의 아버지 마태 마우리는 시편 8편 8절을 읽고 해로가 있음을 깨달아 최초의 해양지도를 만들었다.”라고 씌어 있다. 이 예는 성경이 비과학적이고 신화나 설화를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앞서가는 과학자를 더 앞서가게 하는, 우주와 자연에 있는 창조의 놀라운 진리를 시대를 초월해 선포하고 있는 놀라운 책임을 보여주는 좋은 경우라고 볼 수 있다.
6. 한 명의 하와
성경은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도 놀라운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흔히 인류는 황하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등 여러 문명으로 각각 다르게 시작하였다고 믿고 있었다. 과학적으로 인간은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진화를 통해 현생인류로 진화되었다는 다지역 진화설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인류는 한 지역에서 한 여인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바로 미토콘드리아 때문이다. 세포 속에는 핵이 있고, 핵 안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유전정보가 DNA 라는 형태로 들어 있다. 그런데 핵 바깥 즉 세포질 내에 있는 에너지 만드는 공장인 미토콘드리아 안에도 독자적인 DNA 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를 '미토콘드리아 DNA(mitocondrial DNA)' 라고 하는데, 이것을 이용해서 인류의 기원을 조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는 정자와 난자가 반반씩 기여를 하는데 반해, 미토콘드리아의 DNA는 난자에게서만 받는다. 그러므로 여러 인종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특징을 조사해 올라가면 모계혈통을 통해 기원을 밝힐 수 있게 된다. 이 연구 결과로 흑인이나, 황인종, 백인이건 관계없이 모든 인류의 여자 조상은 단 한 사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미토콘드리아 DNA 조사를 통해 증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서야 유전공학이 발견한 놀라운 개가이었다. 이를 'African Eve' 혹은 ’Mitochondrial Eve' 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3450 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3장 20절에 보면 ”아담이 그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으니 하와는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되었음이더라”며 모든 사람들은 하와의 후손임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과 과학의 관계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단순히 진화론의 영향과 잘못된 과학관으로 인해 오해하고 있을 따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책으로 때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어떤 것은 그 당시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창조의 신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창조의 신비한 능력과 신성(롬1:20)이 현대과학을 통해 계속 밝혀짐으로 성경과 과학은 자연스럽게 잘 화합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방사능 vs 창조/진화
최근 일본의 유례없는 대지진과 쓰나미의 영향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안타까움과 불안에 휩싸이고 있다. 대재앙의 결과로 일본내 수많은 인명과 물적 손실뿐만아니라 원자력발전소가 손상을 받아 방사능이 일부 누출되어 일본뿐만아니라 어쩌면 모두에게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사능이 유출되면 왜 인체에 위협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방사능이 인체의 유전정보에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방사능 입자들은 인체세포의 핵안으로 침투하여 DNA 유전정보에 손상을 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돌연변이는 결국 암들의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돌연변이는 정말로 인체에 유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아메바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돌연변이, 적자생존 등을 거쳐서 어류, 양서류, 원숭이조상 등을 거쳐 현재 인간으로 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진화론적 과학관에 따르자면 돌연변이를 유발시킬 수 있는 방사능의 유출은 어쩌면 인류의 진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해석될 수 있으나, 현재 어떤 과학자도 이번의 방사능유출이 인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사능의 영향을 피하고자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실상이다. 그래서 교과서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진화론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비과학적인 가설인 것이다.
성경적 창조론에 따르면 인간은 태초(약 6,000여년 전) 6일째에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피조되었으며 (창세기 1장 27절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아담의 원죄 이후 죽음을 겪는 불완전한 존재로 되어버렸다.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이후에는 방사능 등의 각종 돌연변이 유발적 요인들에 의해 인간은 질병과 죽음을 겪는 존재가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간의 죽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를 믿는 피조물은 원죄이전의 죽음이 없는 존재로서 회복되었다.
금번 방사능 유출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창세기 3장의 말씀을 묵상하고 경이로운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에 순응하며 하루빨리 일본땅이 회복되도록 중보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창세기 3장 17-19절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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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들어본적이 없는 가장 흥미로운 소리
(The Most Interesting Sounds You've Never Heard)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시편 77:17))
우리가 사는 곳은 소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나는 소리보다 더 시끄러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소리들을 전혀 듣지 못한다. 인프라사운드라고 불리는 이것은 실제적인 소리로 장비만 있으면 기록할 수 있다.
인프라사운드의 파장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낮은 파장인 20헤르쯔보다 낮은 소리로 파장은 길고 수백 심지어 수천 마일까지도 전달될 수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밤 하늘을 색칠하는 그 아름다운 북극 빛(Northern Lights) 또한 인프라사운드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소리는 들어오는 태양입자들이 공기를 바깥쪽으로 밀어내면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이 인프라사운드를 들을 수는 없지만, 이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영국의 과학자들이 콘서트홀에 인프라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기계를 설치하고서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지정한 순간에 인프라사운드를 첨가시켰다. 연주회가 끝난 후 청중들에게 특정 부분의 음악을 들었을 때의 감정들 혹은 연주회 동안에 어떤 이상한 감정을 느꼈는지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과학자들은 인프라사운드가 음악을 듣는 동안 사람들이 느끼는 어떠한 감정의 상태라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북극 빛을 바라볼 때 무언가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 그것은 아마도 당신이 감지하는 인프라사운드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에 관하여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발견하게 된다.
Notes: Science News, 1/10: 2004, pp. 26-28, Kate Ramsayer, 'Infrasonic Symph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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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김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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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사자
(David Livingstone’s Lion)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여기에 의료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 박사가 1872년에 썼던 일기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이빨과 발톱이 붉은” 사자의 표적이 되었던 경험을 토대로 하나님의 자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고함 소리를 들었다. 내가 돌아보려고 반쯤 몸을 돌렸을 때 나를 덮치려고 달려드는 사자를 보았다. 내가 약간 높은 곳에 있어서 사자가 내 어깨를 물었고 우리 둘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내 귀 가까이에서 무시무시하게 으르렁거리면서 이 사자는 사냥개가 쥐를 흔들듯이 나를 흔들어 댔다. 이 흔듦이 고양이가 쥐를 처음 흔들었을 때, 쥐가 느낄 것 같은 것과 유사한 멍청한 상태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식은 하고 있으나, 고통이나 공포를 느낄 수 없는 일종의 몽롱한 상태였다. 마치 부분적으로 클로로포름 마취 하에서 모든 수술을 보고 있지만, 칼을 느낄 수 없는 환자가 설명하는 것 같은 것이었다. 이 순간의 상태는 어떠한 정신적으로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 아니었다. 그 흔듦이 공포를 제거했으며, 그 맹수를 바라보는 동안에 어떠한 공포에 대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 특이한 순간은 아마도 육식동물에 의해 잡아먹히는 모든 동물에서 만들어질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죽음의 고통을 줄여 주시려는 은혜로우신 창조주의 자비이다.”
References: Livingstone, David, 1872. Adventures and Discoveries in the Interior of Africa (Philadelphia: Hubbard Brothers. pp. 96, 102, 103)
Copyright 2010 Creation Moments. All Rights Reserved.
번역 - 김계환
링크 - http://www.creationmoments.com/content/david-livingstones-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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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 시대를 향하여
과학사를 공부하다 보면 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발표 당시에 인정받지 못하다가, 수 년내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인정받는 경우를 보게 된다. 멘델의 법칙도 이러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1866년 멘델이 완두의 유전현상에 관한 결과를 The Brunn Societyfor Study of Natural Science의 회의에 발표하였을 때, 모든 참석자가 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에 멘델이 사용했던 정량적이고 실험적인 방법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멘델의 연구보다 7년 전인 1859년에 다윈이 진화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여 이미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즉 멘델의 결과는 다윈의 내용과 상반되는 창조론을 지지하는 결과였던 것이다.
자신의 연구업적이 인정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발길을 돌렸던 멘델은 결국 1884년 죽으면서 ”나의시대는 올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였는데 1902년 네델란드의 De Vries, 독일의 Correns, 오스트리아의 Tschermak 등 세 사람은 각각 독립적인 연구를 하다가 자신들의 연구결과가 30여년 전에 멘델에 의해 이미 밝혀진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들 세 사람은 자신들의 연구결과인 유전의 기본 법칙에 멘델의 이름을 붙여서 ”멘델의 유전법칙”이라고 함으로써 드디어 멘델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1902년을 ”멘델의 법칙 재발견의 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멘델의 유전법칙이 1902년 이후에 인정되었다고 해도 진화론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지난 40여년에 걸쳐 다윈의 진화론이 너무나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유전 법칙의 핵심인 창조가 받아들여지기에는 시기적으로 늦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우리로서는 통한의 7년인 셈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멘델의연구결과가 다윈의 진화론보다 7년 앞서 발표되었더라면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도 진화론이 발표되었을 때 아무런 지지를 받지 못하였을 것이고 현재는 창조론이 창조법칙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헌신할 명분이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든다. 창조섭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각자의 전공분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은 우리가 진화론과 싸우기 위해서 힘들여 노력하지만 우리의시대(창조의 시대)는 올 것이다. 우리를 이렇게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창조과학회를 위해서 헌신할 것을 다짐해 본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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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성경과 성경적 과학
성경에 기록 된 많은 사건 중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을 뿐 아니라 과학 법칙에 위배되 는 사건도 많이 기록되어있다. 나뭇가지를 물 에 던지니 도끼가 떠오른 사건, 해 그림자가 10°뒤로 물러간 사건, 상온에서 H2O가 변하여 C2H5OH가 된 사건,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이미 부패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사건.....등등 자연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우주 만물과 모든 생명체를 창 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위에서 열거한 사건들은 그야말로 하나님께는 식은 죽 먹기(?)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학과 진화론에 세뇌되어 유신론적 진화론을 믿고 있다. 그들은 성경이 신앙과 도덕의 관점에서는 정확하지만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정확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성경은 자연현상에 대하여 과학 교과서처럼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만약 성경이 과학 교과서라면 시대에 뒤떨어진 쓸모없는 교과서일 뿐이다. 왜냐하면 과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온 수 천년 동안 성경은 단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성경은 개정의 필요가 없을 만큼 정확하 게 기록된 과학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과학의 근본원리와 자연현상의 법칙을 설 명할 수 있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속의 사건을 과학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려고 한다면 그 사건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과학으로 증명되는 분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날 수 있는 영적인 존재인 동시에 모든 과학법칙을 초월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과학 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면 어떨까? 이것은 성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현재의 과학 지식 중에서 많은 부분이 성경의 기록을 근거로 밝혀진 사실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타당한 방법이라 여겨진다.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설명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원칙과 법칙에 맞도록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지만, 과학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창조주의 원리와 법칙에 있어서 어긋나지 않은 것이다. 즉 성경은 과학적이 아니지만 과학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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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날에 하나님 묵상하기
4월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고 믿기 때문에 각 나라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연구비를 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에서도 전체 예산중에 연구투자 예산 비율이 높은 나라에 속한다. 이처럼 과학기술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여러 부분에서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가져야만 치열한 세계 경쟁구도의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 수준을 갖고 있는 미국은 왜 쇠퇴하고 있는 것일까?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국가가 발전하고 국민들도 많은 유익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기술의 발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바로 과학기술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 1:7)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으면 지식이 많더라도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도 보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와 해방 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 때, 순교자도 많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뜨거웠었다. 그런데 경제가 발전하고,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능력을 갖게 된 지금은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너무나 약화된 상황이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경외할 때는 나라가 부강해지지만, 부해지면 신속하게 우상숭배로 빠지는 것을 보게 된다. 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경외하지 못하고, 우상 숭배의 타락된 삶으로 그렇게 빠르게 변화되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는 이스라엘만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과학기술의 역사 가운데서도 잘 나타난다.
근대과학이 발전하게 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1543년), 갈릴레오에 의한 지동설 확립(1616년), 케플러의 행성 타원궤도 발견, 뉴턴의 만유인력 발표(1687년) 등에 이른 과학혁명 덕분이다. 과학혁명의 주역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들이었다. 혁명의 주역들이 왜 기독교인들이었나?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새로운 근대 세계를 만드는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바로 성경말씀이었고, 성경말씀에 순종한 기독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르네상스가 근대 세계를 낳은 것으로 생각한지만, 르네상스는 귀족들의 예술활동이 중심이었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삶은 중세보다 더 어려웠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근대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을 비롯한 많은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는가?
중세 시대 로마 카톨릭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지만, 당시 성경은 사람들이 읽을 수 없는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고, 사제들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가 등장하였고, 모두가 제사장(만인 제사장)이므로 각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직접 회개하고, 말씀에 따라 사는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사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시대에서,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내가 직접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교육은 당시의 카톨릭교육처럼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지 않고, 각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을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또한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신성하다고 믿었고, 자신의 직업과 일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담당하였다. 과거에는 높은 산이나 큰 바위를 두려워하였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처음 제안한 것도 하나님께서 우주를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천동설을 믿던 시대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원들이 존재해야 했고, 별들을 더 많이 관찰할수록 이론은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중심이라고 가정했을 때 별자리 움직임을 훨씬 단순하고, 더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태양이 중심이기 때문에 지구도 태양처럼 둥글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주장은 너무 충격적이었고, 지구가 둥글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고 지구에 붙어있을 수 있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프로테스탄트, 특히 루터파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코페르니쿠스는 원치 않았지만 루터파 목사인 오지안더에 의해 출판이 되었다.
갈릴레오는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을 발견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내려오던 천동설을 굳건히 믿고 있던 과학자들과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오가 교수로 있던 피사 대학의 동료들과 날카로운 대립을 하게 되었다. 당시 갈릴레오는 교황청과 대립관계에 있던 토스카나 대공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이런 정치적 관계와 과학자들 간의 갈등이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재판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과학적 주장인 지동설을 억제하려고 했다. 과학자들간의 대립이 종교권력을 이용한 재판으로 확대된 것이다. 종교재판의 가장 큰 문제는 과학적 주장을 힘으로 억압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과학이론이 순순히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과학자들에 의해 억압당해왔고, 지금은 진화론 과학자들에 의해 진화론이 아닌 이론들은 철저하게 억압당하고 있다. 갈릴레오 당시 카톨릭의 문제는 성경말씀보다 과학자들의 주장을 더 신뢰하였다는 점이다. 지동설이 성경 말씀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주의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과 부합될 수 있다는 것을 외면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권력을 이용하여 과학적 이론을 탄압한 것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지만,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비판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천동설과 지동설을 주장하는 주된 근거는 별자리 운동을 어느 이론이 더 잘 설명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고, 이런 복잡한 과학적 관찰을 이해하고 지동설을 지지하기는 힘들었다. 또한 근본적으로 지구가 둥굴고 돌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과학혁명을 있게 한 또 다른 과학자인 케플러도 독실한 루터파 신교도였다. 케플러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을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체 관측을 통해 밝혔지만, 왜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돌 수 있는지, 왜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상의 물체들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지 등의 질문에 대하여는 역시 답을 할 수 없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둥근 지구 위에 어떻게 사람들이 살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독실한 영국의 청교도인이었으며, 영국 국교의 성직자였다. 뉴턴은 하나님이 우주를 작동하는 규칙을 수립했고, 그 규칙을 알아내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뉴턴은 공간이라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의 존재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공간이 절대적이라고 믿었다. 바로 이 개념이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코 기하학적인 분석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탄생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뉴턴 등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과거 어떤 전통, 권위에 예속되지 않고, 도리어 수학적, 합리적, 경험적, 실험적 방법만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었다. 바로 이러한 과학혁명을 통해 근대 과학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연구비 지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과학자를 우대하는 풍토가 있었던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과학자들을 통해 과학혁명이 이뤄진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연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육기관을 통해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교육을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까지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이런 과학자들이 프로테스탄트 교육기관을 통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사회가 변화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근대 이전의 과학기술은 중국 등이 더 발전되어 있었지만, 근대 이후 역사의 중심이 유럽이 된 것은 바로 영국을 중심으로 이뤄진 프로테스탄트 교육과 프로테스탄트 혁명 때문이다. 영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다른 유럽국가들도 영국의 민주주의제도, 교육제도,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우대하는 것들을 모방하며 쫓아오게 된다.
위대한 기독교 과학자들에 의해 이뤄진 과학혁명은 안타깝게도 18세기 계몽주의를 강화시키는 큰 역할을 하였다. 중세 이후 대두된 인본주의 운동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함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뉴턴을 통해 완성된 과학혁명은 인본주의자들에게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런 방식을 풀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 대신 과학과 이성이 하나님이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계몽주의 교육은 자연 상태 그대로를 ‘자유의 실존’이라고 생각하여 초월적인 신, 전제 정치 및 교회의 영향력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본주의자들은 자신 만만하게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기원의 문제만은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진화론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론은 나오자마자 인본주의자들을 통해 엄청나게 환영받았고, 과학의 이름으로 창조를 거부하고, 하나님 없이 시작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진화론은 생물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에서 시작을 설명하는 유일한 과학적 이론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화론의 이론대로 인류의 기원이 있다고 믿고 화석을 경쟁적으로 찾던 과학자들은 결정적인 중간단계 화석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자바인 등 조작적으로 만들어진 증거들은 있었으나 정작 진화론이 출현한 영국에서는 아무런 화석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 가짜로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형태인 필트다운인이 만들어졌다. 영국에서 진화의 결정적 증거가 나온 것으로 1912년 발표하였다. 이 뼈들은 1953년 연대측정결과 수십년밖에 되지 않은 것이 밝혀졌고, 1962년 공식적으로 가짜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지금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진화론의 증거라는 것이 거짓이거나, 잘못된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솔직한 진화론 과학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필트다운인이라는 완벽한 진화의 중간단계 화석의 증거가 있던 50년 동안 진화론은 완벽한 이론이었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말씀과 다른 진화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많은 신학자들은 진화론과 성경을 조화시키는 노력을 하였고, 진화론을 사실로 인정하는 신학이 자리잡게 된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 신학적 이론은 하나님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론은 마치 이성과 신앙이 조화를 이룬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진화론은 증거가 없어서 몰락하고 있는데, 도리어 진화론을 믿는 것이 이성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은 확대되고 있다. 대부분의 세계적인 신학교들, 우리나라의 신학교들 중 다수의 신학교에서 이런 유신론적 진화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론은 증거가 없으니까, 이제는 물질과 우주의 진화를 기정사실로 하면서 진화론을 거부하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혁명의 풍요함이 인본주의자들을 통해 계몽주의와 진화론을 만드는데 이용된 것이 역사의 비극이다. 과학혁명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근현대의 풍요로움은 프로테스탄트 혁명이 가져온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자본주의를 낳았지만, 그 정신을 잃어버리자 탐욕적인 자본주의가 되었다. 막스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의해 시작된 투명한 경영, 양질의 노동 등이 자본의 재투자로 연결되고, 사회 구성원의 신뢰가 구축되어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문화가 탄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자본주의는 제도와 문화로 정착되면서 더 이상 정신적 지주인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과학적 탐구가 가져온 과학혁명은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인본주의자들에 의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과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누리고 있다는 대한민국은 현재 어떤 상황에 있는가? 과학의 날은 하나님 없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부를 이룩하고자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과학과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 정신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보다 진화론을 더 신뢰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선교의 피 위에 세워진 교회가 이제는 세상에서 누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하늘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안주함으로써 서서히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지 않는 로마카톨릭교회를 향해 생명을 걸고 이의를 제기하였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지금은 세상의 향해 이의를 제기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믿음과 용기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과학의 날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그 일을 이미 시작하셨음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일에 우리 한국창조과학회를 부르셨다. 하나님,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옵소서.
구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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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창조 논쟁의 본질과 창조과학 사역의 방향
Ⅰ. 진화는 과학, 창조는 신앙?
먼저 진화론은 과학이고 창조론은 종교라는 관점이다. 진화론은 과학의 영역이고, 과학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은 진화론을 확립된 과학적 사실로 큰 비판 없이 받아드리는 입장이다. 동시에 창조론은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고, 이는 종교 영역이라는 입장이다. 서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공존할 일이지 대립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논쟁의 핵심은 진화론이 과학영역만의 문제이고, 객관적으로 입증된 과학적 사실인가 하는 점이다. 진화론자들 주장이 처음에는 가설수준에서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과학지식이 발전함에 따라서 많은 오류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지금도 진화론의 핵심주장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진화론은 아직도 입증되지 않은 불완전한 가설수준이다. 결코 입증된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진화론은 잘 확립된 과학 이론처럼 인식되고 있다. 진화론은 생물의 영역을 넘어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심지어 종교계에서 조차 통용되는 등 그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조차 진화론을 확립된 과학적 사실로 본다. 창조주 하나님도 인정하고 진화론도 받아드린다. 진화론은 누구도 반대하기 힘든 중심사상이 되었다. 모든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Ⅱ. 진화, 창조 논쟁의 본질은 과학적 문제다!
과학은 통상적으로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한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다.
과학에서 연구란 자연현상에 대하여 하나의 가정을 세운 뒤, 실험과 측정을 통하여 가정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밝히는 과정이다. 맞으면 그 한계 내에서 가정은 진리로 받아 드려진다. 틀리면 가정을 수정하여 실험과 측정을 반복하면서 자연현상에 대한 하나의 규칙을 확립하여 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명의 기원 문제를 과학적으로 밝히려는 노력은 분명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최초의 생명체가 진화되었는지 혹은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었는지 관찰한 사람도 없고, 실험을 반복할 수도, 관측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진화되었건 창조되었건 최초의 생명체가 만들어진 후에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규칙대로 생명체는 종족번식을 한다. 결코 처음 생명체가 나온 방법대로 진화나 창조에 의하여 생명체가 다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즉 과학적 문제로 국한하면, 생명의 기원을 다루는 일은 분명 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느 모델이 보다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느냐를 추론하는 정도일 것이다. 과학적 잣대만을 진화론 창조론 논쟁의 심판자로 삼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진화, 창조 논쟁의 본질이 과학적 문제라고 한다면 비교적 명쾌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에서의 진리와 주장은 객관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연발생설, 대진화, 중간생물체 존재가 과학적 객관적 타당성을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지속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궤변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이는 논쟁의 본질이 과학적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Ⅲ. 논쟁의 본질은 서로 다른 세계관의 충돌이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바라보는 생각의 틀, 신념, 믿음이다. 세계관은 개인의 가치, 행동, 결정, 사상에 영향을 준다. 진화, 창조 논쟁의 본질은 생명체들이 진화되었다고 믿는 진화론자들의 믿음(세계관)과,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체를 창조하셨다는 믿음의 차이라는 인식이다. 본인의 세계관에 객관적 과학적 증거들이 있으면 더욱 공고하여 지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각자 생각하는 틀, 신념은 주관적 성격도 많기 때문이다. 다윈은 인생 말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진화론은 어린 시절의 추측과 공상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하나의 종교로 여길 줄은 미처 몰랐다.
다윈이 처음부터 세계관적 관점에서 종의 기원을 작성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하나의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진화, 창조가 단순히 과학적 논쟁이 아니라 세계관적 논쟁임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 캐톨릭 교황인 베네디톡스 16세도 진화론의 본질이 세계관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세계관이다.
반면 17-8세기 만유인력, 중력 법칙을 발견한 영국 물리학자인 뉴턴은 정교한 자연, 우주의 질서에 감탄을 하면서 다음과 말했다.
자연, 우주의 아름다운 질서는 우주만물의 설계자, 창조주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달은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것은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 때문이다. 이런 아름다운 질서는 우연히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설계자, 창조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진화, 창조 논쟁의 뿌리에는 각각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다른 세계관이 있다.
Ⅳ. 진화론은 기원 문제를 결코 밝힐 수 없다.
세계관적 관점에서 볼 때 진화론의 뿌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인 인본주의, 과학주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 스스로 우주, 생명의 기원 문제를 밝혀보려는 자유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결코 생명의 기원을 밝힐 수 없다. 자연발생설은 물질, 중간생물체, 대진화는 각각 하나의 특정 물질 또는 생명체를 그 출발로 하고 있다. 즉 진화론은 있는데서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을 뿐 결코 출발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하여는 설명하지 못한다. 자연발생설에서 제기하는 생명체의 근본이 되는 물질은 어디서 왔는가? 에 대하여 진화론은 답을 줄 수 없다.
우리는 물질이 분자 또는 분자들의 혼합으로 되어 있고, 분자는 원자들의 집합체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연계에 존재하는 104개의 서로 다른 원소들은 각각 전자와 핵으로 되어 있고, 핵은 양성자, 중성자로 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 원소는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면 대답이 힘들어 진다. 이렇게 근원을 캐면 결국 한계상황에 도달한다. 인간의 이성, 지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도달한다. 진화론은 그 출발이 있는 상태에서의 변화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기원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줄 수 없다. 진화론은 인간적인 이성, 지성의 노력으로 생명의 근원을 밝히려 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한테 주목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과학의 한계, 인간 이성, 지성의 한계로 결코 기원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Ⅴ. 진화론은 무신론이다.
진화론을 받아드리면 성경과 대치되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된다. 첫째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천지창조(공간, 우주, 생물, 인간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이 된다. <생명체는 무생물에서 우연히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다.> 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창조의 주체가 됨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혹자는 자연발생설과 최초 생명체가 다양한 생물들로 진화된 것이 하나님의 창조역사라고 주장을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생명체들을 창조하셨다고 한다. 창조주 하나님도 인정하고 진화론도 받아드린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다. 그런데 막상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들이다. 한마디로 유신진화론은 하나의 억지타협, 궤변에 불과하다. 진화론은 결코 창조주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다.
둘째로 진화론은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만이 많은 생명체들 중 유일하게 영적존재이다. 영적으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이 있다. 분명한 것은 많은 생명체들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하는 영적 존재라는 점이다. 진화론에서는 인간도 단지 하나의 진화 산물일 뿐이다. 진화론 주장대로 사람과 원숭이가 공통조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면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하나님 형상을 가진 인간 정체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셋째로 진화론 창조론 논쟁은 치열한 영적 싸움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하나의 종교로 여겼다는 것을 보고 스스로 놀랐다는 다윈의 고백은 진화론이 영적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이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살후 2:11-12)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12절은 거짓 것을 믿고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다. 진화론을 종교로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도 된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하나의 탈출구, 대안으로 삼아서 진화론을 하나의 종교로 믿게 된 사람들의 영적 심판에 관한 경고이다. 결국 진화론의 본질은 무신론이다.
Ⅵ. 창조과학 사역의 방향.
한국창조과학회가 설립된 1980년부터 지금까지 창조과학 사역의 중심은 교회였다. 신앙인을 상대로 진화론의 허구에 대한 세미나 활동을 주로 하였다. 미국의 관련기관들로부터 자료를 입수하고, 책을 번역하는 일들을 하였다. 창조과학 사역자는 대부분 신앙을 갖고 있는 대학 교수들이었다. 창조과학 세미나는 진화론의 허구를 폭로해왔다. 창조과학 세미나는 온누리 교회, 지구촌 교회, 대학생 선교회 등에서 필수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교회가 창조과학 세미나 한 두 번 한 것으로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도 사실이다. 창조과학 사역의 전략적 가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극히 인색하다,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앞으로 창조과학회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창조과학 전문가들이 각 전공 영역에서 진화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근거를 심도 있게 마련해야 한다. 자연발생설이 불가능함을 화학적 논리로 반박하는 일, 소진화와 종의 다양성에 대한 명쾌한 설명, 자연선택이 대진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생물학적 논리, 방사성 원소 붕괴에 의한 연대측정의 명백한 한계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하여 각 영역에 있는 전문가 집단에서 진화론의 허구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일반 대중을 향한 창조과학 전달 매체수단을 업그레이드 해야 한다. 창조과학의 핵심내용은 대부분 전문적 과학영역에 속한다. 과학 용어자체가 일반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많다. 일반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핵심내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확, 간결,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는 소통기술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 디자인 전문가들이 창조과학 contents를 애니메이션, 만화, 동영상, PPT자료로 쉽고 재미있게 표현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동시에 창조과학 강사들도 과학의 어려운 기술적 내용을 쉽게 풀어서 전달하는 technical communication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창조과학 사역자는 일반대중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창조과학 운동은 확고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진화/창조론 논쟁은 성격상 끝이 없는 싸움이다. 논쟁의 본질이 증명할 수 없는 세계관 싸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도, 신앙의 근본을 확고하게 지키기 위해서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필요하며, 그 중심에 창조과학이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 온누리 교회가 일본 선교전략에 창조과학을 활용하여 좋은 평가를 받은바 있다. 유럽교회가 진화론과 타협한 유신진화론 입장을 취한 것이 유럽교회 쇠락의 주요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는 세계관 운동의 전략적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과학으로 포장된 진화론 정체를 폭로해야 한다. 과학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기독교의 지도자들과 연합하여 핵심 선교, 교육 전략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창조과학 운동은 인간정체성을 회복하는 신앙훈련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진화론의 본질은 하나님 형상을 상실한 사람들이 자유의지로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이다. 기독교인들은 교육, 연구, 철학, 예술 등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하나님 하신 일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도 없음을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성경을 진리로 받아 드리며 하나님을 인정하기로 결단하는 일이다. 최근 교회를 중심으로 회복사역, 정체성 회복 운동, 아버지 학교 등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 효과적인 신앙훈련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가 왔고, 결과로 거절감, 상처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형상을 회복케 하는 창조신앙 운동은 21세기에 사는 창조과학 신앙인들의 소명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오늘도 창조역사를 지속하신다.
출처 - 2009. 10. 10. 한국창조과학회 학술대회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773
참고 : 6636|6634|6627|6610|6604|6597|6585|6583|6582|6562|6561|6556|6553|6486|6550|6149|6132|5081|5130|4639|5740|5683|5420|5994|6449|4821|6263|6018|6468|6148|6474|5510|5947|5954|5591|6211|5589|5602|5966|4837|6090|485|3890|390|2349|3782|6438|4510|5474|6495|5458|6243|5863|2698|6399|5460|6489|5135|5000|4828|6118|6394|6168|6138|5996|774|5497|5827|5158|5962|6358|6258|6119|4066|5544|5443|6501|6096|5459|5274|5450
교회는 왜 창조과학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올해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 된지 150 주년 되는 해이다.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은 본질상 동시에 진리일 수 없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은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오늘날 교회에게 있어 창조과학 사역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받아 적은 것으로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모두가 성경이지 어느 부분만 성경인 것은 아니다.
창조과학 사역은 바로 말씀을 창세기 1장 1절부터 바로 믿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창세기는 전체 성경의 토대가 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 부분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게 되면, 그 뒤에 나오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또한 아무런 의심 없이 믿을 수 있게 된다.
창세기 중에서도 특히 1장에서 11장의 내용은 우주의 창조와 인류의 기원, 그리고 노아의 홍수를 비롯한 지극히 중요한 인류의 초기 역사를 기록하고 있어, 이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후에 이어지는 성경의 다른 기록과의 연속성을 제공함으로써 아주 중요한 성경적 교리의 기초가 되고 있다.
하지만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인본주의 교육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창세기 내용을 한갓 신화나 전설로 생각하게끔 공헌하였고, 그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갔으며,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자들 또한 세상에서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약한 신앙인들로 바뀌어 버렸다.
과거 유럽의 찬란했던 교회들을 생각해 보라. 지금은 텅 비어 버린 그 교회당을 한 때 가득 채웠던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없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다윈의 진화론을 선두로 한 인본주의 사상이 휩쓸고 간 결과들이 아니겠는가?
당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교인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교회의 근간을 무너뜨린 다윈의 무덤을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 중앙에 안치할 정도로 당시의 교회는 영적인 눈이 멀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미국의 경우도 1925년 테네시 주에서 열렸던 소위 ‘원숭이 재판’ 이후 기독교인들은 지성과는 거리가 먼 맹신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일반 공립학교의 교과 과정은 물론이고, 박물관을 가도 TV를 켜도 온통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한갓 우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게 설명되어지고 있음을 볼 때, 성경을 손에 갖고 있는 교회의 무관심과 침묵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를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많은 것 중에서 말단 지엽적인 한 가지 이슈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정말 우주 진화의 부산물로서 우연 발생한 존재라면, 죄의 문제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고, 도대체 복음을 사실로 받아드릴 논리적 이유가 없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복음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단코 누군가 생각하듯이 말단 지엽적인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오늘날 신학교에서조차도 인본주의 학문의 영향으로 진화론과 혼합한 창조 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더욱 이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타협하는 이론들은 그 근본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적 과학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재해석하여 내놓은 하나의 신학적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진화론이 어떤 절대적인 과학적 증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최신 과학 정보들을 볼 때 설계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걸 보면, 성경을 떠나 과학과 타협을 시도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언젠가 또다시 그 이론의 수정을 요구할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창조과학자들은 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들에 대하여 성경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하여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은 우리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창조과학은 교회의 여러 지체 중에서 주일학교 및 성인 교육부와 연결 되어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거나, 선교 및 전도부와 협조하여 바울이 이방인 전도에 창조의 메시지를 들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처럼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초가 들어갈 마음의 밭을 준비케 하는데 사용되어 질 수 있다.
성경적 이면서도 동시에 과학적인 내용을 다루어야 함으로 다분히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역이기는 하나, 교회 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본인이 갖고 있는 달란트에 따라 여러 가지 영역에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오늘날 교회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도전을 받고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과 교회 내에 침투한 세속주의의 영향,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New Age의 물결, 세상문화에 대안으로 내놓을 기독교 문화의 부재,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첨단 과학기술의 개발과 그에 따른 교회적 입장의 요구 등등.
신학교 3~4년 동안의 교육만으로 목회자들이 이 모든 문제에 답을 명쾌히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미 선교 사역에 전문인 평신도 사역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교회의 총체적 방향과 목표는 성경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여전히 목회자 중심으로 세워져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역의 내용은 각 분야의 전문 사역자를 중심으로 상호간의 긴밀한 협력 아래에 진행되지 않으면, 21세기 첨단과학시대에 오히려 더욱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의 갈증을 채워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과학 사역은 그 한 부분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창조과학 사역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출처 - 인천기독교신문, 2009. 10. 18.(225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753
참고 : 6107|4487|6480|6639|3782|4241|6211|6356|6169|6473|6096|5083|5274|6461|6075|6634|5796|6292|6476|2647|6174|5718|6180|905|6165|6618|6631|6633|6636|6566|6638|6468|6449|6582|6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