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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미디어위원회
2020-04-10

내가 변증가가 되어야하는 이유

(Do I need to be an apologist?)

Lita Cosner


       모든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을 갖고 있다. 그래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거나, 지옥에서 영원한 죽음과 고통의 벌을 받거나 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변증론(apologetics, 기독교 진리를 지적으로 변호하는 일)이 단순히 지적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님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확대되어, 언론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한다.  


성경은 변증하라고 말씀한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에게 맡겨진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다서 1:3)고 분명하게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변증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관해 물을 때, 그에 대한 대답을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불신자들이 회심하기를 원한다면, 복음을 위해 그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오늘날 인터넷의 발달로, 누구나 성경의 모순이나 오류로 알려진 수많은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누군가가 믿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질문(의문)에 대해 대답해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신성, 성령님의 특성에 대한 믿음을 방어하고, 성경에 오류나 모순이 있다는 일반적인 논쟁에 대해서, 대답해주는 일은 기독교인이라면 힘써 감당해야할 일인 것이다. 당신은 성경 공부에 시간을 할애할 수도 있고, CMI나 다른 훌륭한 성경적 창조론 단체에서 이미 대답해 놓은 자료들을 공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복음을 전하는 마음으로 변증하라. 

새롭게 대답을 준비한 기독교인들은 밖으로 나가, 무신론자와 성경의 정확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싶은 유혹이 들 수 있다. 이것은 다툼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그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비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으므로, 각기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첫째, 거짓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짓 복음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기본적 목표로, 공개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증오하는 것이 허락된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이것을 구경 및 방관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온유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심지어 거짓교사들까지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 단지 정보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진리를 확신시키는 것을 목표로 은혜롭게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설명해주기 전까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 쉬워진다.


대위임 명령의 확장

또한 우리는 복음의 우선순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들어야하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 ‘한 요소도 제거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 환원불가능한 복잡성)’과 같은 것으로 토론하여,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믿음에 대한 그들의 반대(의문)를 명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준 다음, 복음에 대한 대화로 들어가라.

성경적 창조론자들은 가장 자신감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다.

변증론이 복음전도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선순위와 어조를 조절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불신자들의 회심을 원한다면, 복음을 위해 그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가 진화론자인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창조의 최신 증거를 가지고, 친구를 ‘심하게 공격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그러한 증거들을 공유하는 것이 적절하다 싶을 때는,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그렇게 하라.

누구나 자신의 마음이 밤사이에 바뀌지는 않기 때문에, 여기에는 인내심이 요구된다. 불신자와의 관계를 구축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헌신이 필요하다.


변증론과 복음주의에서 기초가 되는 성경적 창조론

성경적 창조론자들은 죄의 기원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자신감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기초는 성경이며, 성경의 첫 구절부터 절대적으로 진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무신론자, 타종교인, 여러 유형의 비기독교인들을 대할 때, 확고한 기반을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론에 대한 열심이, 창조의 증거들을 가지고 진화론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데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논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으로 돌아서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타협을 거부하면서도, 선동적 형태의 과격한 공격을 자제하고, 설득력 있고 온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Lita Cosner has a B.A. in Biblical Studies from Oklahoma Wesleyan University and an M.A. in New Testament fro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She is the full-time Information Officer for CMI-USA. For more: creation.com/cos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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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2 : 자료실/성경/고고학

http://creation.kr/archaeology

자료실/성경/성경과 역사

http://creation.kr/BiblenHistory

자료실/성경/창세기

http://creation.kr/Genesis


출처 : CMI, Creation Magazine, Vol. 41(2019), No. 2 pp. 26-27

주소 : https://creation.com/apologist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03-30

두 신학자의 다른 길

(A tale of two theologians)

Dr. Jonathan Sarfati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창조를 믿는 것이 크리스천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1] 그러나 진화론과 성경적 기독교 신앙 사이에는 많은 확연한 불일치(모순)가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적 진리를 배울 때,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

1. 불일치(모순)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일부 크리스천들이 하는 것처럼, 모순된 신념에 따른 심리적 갈등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신앙적 행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축복된 모순'에 대해 감사할 수도 있다.

2. 성경을 확신하고, 진화론을(그리고 진화론의 전제 조건인 수십억 년의 연대도 함께) 던져버리는 것이다.

3.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포함하여 성경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 글은 2번과 3번의 길을 선택한 두 신학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 번째 신학자는 에사 허키넨(Esa Hukkinen) 목사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목사님이었지만, 처음에는 진화론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교인 중 한 젊은이가 그에게 ‘역사로써 창세기를 받아들여야할 15가지 이유(15 Reasons to Take Genesis as History)’라는 창조과학 서적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그 책은 그에게 진화론을 성경적으로 과학적으로 연구해보도록 이끌었다.

허키넨 목사는 진화론은 복음 자체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제는 더 일관성 있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그의 믿음을 공유하는 것에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결혼과(창세기에서 시작하는)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성경적 가르침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예수님도 결혼에 대해 질문 받았을 때, 창세기 1:27절과 2:24절을 실제 역사적 사실로써 인용하시면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연합으로 정의하셨다. (마 19:3~6, 막 10:3~6).

기원에 관한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명백한 가르침까지도 거부하게 만든다!

두 번째 신학자는 반대의 길을 걸어간 케이스 마스코드(Keith Mascord) 목사이다. 그는 2006년까지, 창세기의 가르침에 있어서 한때 건전했던, 명성있는 시드니의 성공회 무어 신학교(Anglican Moore College)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신학교는 건전한 복음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평판 받고 있지만, 이제는 성경적 창조론에 대해 적대적인 신학교가 되었다. 그들은 믿기 어려운 젊은 지구와 전 지구적 홍수를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마스코드는 잘못된 방향으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최근 시드니 모닝 헤럴드(Sydney Morning Herald) 지에 쓴 한 컬럼에서, 크리스천들은 동성애 결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2] 물론, 그는 성경이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한 구절들을 재해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해석방법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에게는 그렇다. 그는 마찬가지로 노아의 홍수를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성경의 노아 홍수가 지역적 홍수 또는 우화적인 이야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많은 타협적 크리스천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말한다 : 

”더군다나, 그 이야기가 성경 다른 곳에서 언급될 때마다, 성경의 저자들은 그 이야기를 사실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노아 홍수 이야기를 사실로써 받아들이고 있다(눅 17:26~27). 또한 유대인과 기독교 주석가들도 대부분 지난 수백 년 전까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노아 홍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결혼에 대한 그분의 말씀도 믿지 않는 것이다 :

”우리가 결혼에 대한 이슈도 동일하게 적용할(성경 구절의 의미를 재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3]

따라서 기원에 관한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의 명백한 가르침까지도 거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창조(Creation) 지는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를 보여주는 수많은 글들을 게재해왔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에 관한 홍수처럼 많은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해왔다. 화강암은 수백만 년이 아니라 매우 빠르게 형성될 수 있으며, 수억 년 전이라고 주장되는 박테리아가 다시 살아나며, 공룡 화석과 여러 고대 화석들에서 연부조직이 아직도 남아있고, 이암은 빠르게 퇴적될 수 있었으며, 캄브리아기에서 척추동물이 발견되었고, 살아있는 화석들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사층리는 물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밝혀졌고, 영국해협은 거대한 홍수로 파여졌으며, 세인트 헬렌산의 폭발로 다지층나무들의 형성 메커니즘과 석탄 형성 메커니즘들이 밝혀지고 있고, 격변적 판구조론의 증거들은 점점 쌓여가고 있고, 공룡들이 머리를 젖히고 죽어있는 것은 익사했기 때문이며....등등.      

그래서 이러한 창조과학 자료들이 더 많은 신학자들과 크리스천들을 2번의 길(성경을 확신하고, 진화론과 장구한 연대를 던져버리는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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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E.g. Moritz, K., Can Christians believe evolution?, 21 October 2010.
2.Mascord, K., Beliefs must be tempered by facts, smh.com.au, 18 June 2012.
3.For more information, see Sarfati, J., Gay ‘marriage’ and the consistent outcome of Genesis compromise, creation.com/gay, June 2012.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com/tale-of-two-theologians 

출처 - Creation 34(4):6, October 2012.

미디어위원회
2020-01-23

진화론-창조론 논쟁이 중요한 이유 

: 토양, 나무, 그리고 그들의 열매 

(Soil, trees and their fruit. Why creation matters!)

Gary Bates


       CMI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창조과학 단체들은 창세기의 기록이 복음을 이해하는 기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간단히 말해서, 문자적으로 죄가 없고, 문자적으로 인간의 타락이 없었다면, 그리고 죽음이라는 저주가 없다면, 문자적으로 어떤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창조론-진화론 논쟁이 동성애, 낙태, 안락사와 같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논란 중인 문제들” 중 하나 일뿐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이 주제에 관해 교회에서 이야기할 때, 나는 그림 1을 가지고 그 이슈들을 설명한다.

.이들 두 나무가 심겨져 있는 토양을 주목하라.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 사람이 진리를 결정함)의 나무는 진화론이라는 토양에 심겨져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나무와 그 열매에 대해서 이렇게 많이 말씀하셨다 :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태복음 7:16~19)

 

나무와 세계관

그림 1의 나무는 서양 문화에서 지배적인 두 세계관(worldviews)을 나타낸다. 우리의 세계관은 현실 세계의 모든 것들을 바라볼 때 사용하는 안경 또는 필터와 같은 것이다. 더욱이 우리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하면, 자신들 스스로 세계관이라는 안경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대부분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누군가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주요한 요소들이 어디에서 온 믿음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진화론은 유물론적 기초를 갖고 있다. 즉, 우리 존재에 대해서 물질적인 원인만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적 사고에서만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그러므로 어떤 규칙을 세워놓으신 분은 없으며, 인간 스스로가 삶에 대한 규칙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진리는 자신 스스로가 결정하거나, 또는 사회가 수립한다. 궁극적인 권위는 사람들이 만든 법률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하나님은 하실 일이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낙태와 동성애와 같은 문제는 사실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그 문제들은 단지 진화론의 토양에 뿌리를 둔 인본주의의 열매(또는 증상) 일뿐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장구한 시간과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는다면,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자궁에서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현대의 모든 생물학 교과서들은 자궁 속의 배아들은 진화 과정을 되풀이하며,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

자,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라. 나는 진화론이 우리 사회의 모든 병폐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죄라는 본성이다. 진화론의 유명한 대제사장인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이렇게 썼다 : ”다윈(진화론)은 지적으로 충실한 무신론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1] 진화론은 하나님이 없다는 과학적 변명을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2]


열매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래된 말처럼, ”사과나무는 사과를 만들기 때문에 사과나무가 아니다.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를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인 성경적 역사에 의하면,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다.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린도전서 15:21), 우리는 문자 그대로 아담의 후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그러나 우리가 이전에 갖고 있던 인본주의적 세계관(하나님은 없고, 성경은 오류투성이의 책)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대체될 때, 논리적으로 그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믿게 되는 좋은 토양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세계관과 일치되는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크리스천이 되겠다고 고백할 때에도, 그가 자동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따르지는 않는다. 신자들은 구원에 대한 필요성, 특히 우리가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적 역사에 근거하는 것이다. 즉, 성경은 처음 책인 창세기부터 참되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히 12:2), 우리는 그분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만 한다.(요 1:1-3).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4~6).


좋은 열매를 어떻게 맺을까?

진화론자였던 에른스트 헥켈(Ernst Haeckel)은 생물들의 배아는 자궁에서 진화론적 조상의 발생과정을 반복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전파하기 위해서, 사진 맨 윗줄의 그림을 조작하여 그려 넣었다. 이 사기는 100년 이상 동안 사실인 것처럼 가르쳐져 왔었고, 오늘날에도 비슷한 그림이 여전히 생물학 교과서를 장식하고 있다. 실제 배아의 사진(하단 줄)들은 서로 거의 유사하지 않다.

마태복음 7장과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열매 맺는 것에 초점을 맞추셨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의 열매 맺기에 관한 말씀 직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3~15)

그림 2를 보라. 우리 대부분은 과학적으로 진화론을 배웠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내의 어딘가에 수십억 년의 연대를 집어넣으려고 시도하고 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주의 필요를 배제하는 물질주의적 개념이다. 우리가 그러한 진화론을 성경에 혼합한다면, 복음을 훼손되게 된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전 수억 수천만 년 동안 죽음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창세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역사적인 아담과 하와, 노아 홍수 등을 언급하셨던 분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는 것이 합리적이겠는가?

진화론은 창조주의 필요를 배제하는 물질주의적 개념이다. 우리가 그러한 진화론을 성경에 혼합한다면, 복음을 훼손되게 된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전 수억 수천만 년 동안 죽음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진화론을 혼합시키고 만족하는 사람(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을 믿지 말라.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무신론자들조차도 성경에 진화론을 첨가한(유신진화론) 교회 지도자들은 '속임수'라고 말하고 있다.[3] 진화론자들은 그와 같은 타협을 하고 있는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을 보며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전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화론을 믿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진화론이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6일 창조를 믿는 것은 '좁은 길'인 것이다.

그림 3을 보라. 만약 창세기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가 훼손되거나 파괴된다면, 기독교의 나무가 시들어질 것이 예상될 것이다.(실제로 많은 나라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진화론을 파괴시킴으로서, 유물론적 인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파괴하는 것이고,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한 국가의 태도를 바꾸는 성경적 방법은 먼저 각 개인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마음으로 크리스천의 도덕성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이것이 사도들이 행했던 방법으로,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사상을 바꾸고, 문화를 바꾸고, 법과 나라를 바꾸는 일들을 행하여야할 것이다.[4]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마음과 생각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소식은 교회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가리키는 수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의 기초가 파괴된다면, 인본주의적 세계관은 쇠퇴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문화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다. 예수님이 나무와 그 열매의 비유를 사용하셨을 때, 그 결과를 알고 계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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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and notes
1. Dawkins, R., The Blind Watchmaker, W.W. Norton, New York, p. 6, 1986.
2. It’s also important to avoid the opposite error: ‘Evolution was just an excuse; the real problem was sin.’ This is like blaming an airplane crash not on the pilot or equipment failure, but on gravity. This is true but misses the point: it doesn’t explain why a particular plane crashed while most avoid crashing, because gravity is universal. Sin is also universal, so is insufficient for explaining why apostasy correlates strongly with evolutionary indoctrination.
3. Richard Dawkins: 'Theistic evolutionists are deluded”, youtube.com, uploaded 14 September 2011.
4. See Zimmermann, A., The Christian foundations of the rule of law in the West: a legacy of liberty and resistance against tyranny, J. Creation19(2):67–73, 2005; creation.com/law. Dr Augusto Zimmermann is one of Australia’s top legal scholars—see Creation 31(2):15–17, 2009; creation.com/law-creation.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com/tree-fruit-and-the-relevance-of-genesis-creation

출처 - Creation 37(4):49–51, October 2015.

미디어위원회
2020-01-14

죽음의 문화, 그 뿌리에 있는 진화론

: 낸시 피어시의 신간 ‘당신의 몸을 사랑하라’ 

(Reading: Darwinian Roots of the Culture of Death)

David F. Coppedge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의 신간은 오늘날 죽음의 문화와 진화론 사이의 연관성을 다루고 있다. 낸시 피어시는 그녀의 최신 저서인 ‘당신의 몸을 사랑하라(Love Thy Body, Baker Books, 2018)’에서, 섹스, 삶과 죽음, 이혼, 결혼의 정의, 낙태, 안락사, 동성애, 트랜스젠더, 접속문화(hook-up culture, 일회성 성관계)... 등과 같은 현대문화의 가장 심각한 이슈들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을 탐구하고 있었다.

피어시는 칸트 철학에 기반을 둔 세속적 세계관의 "두 이야기"로부터 주제를 풀어가고 있었다. 칸트의 철학은 가치(형이상학)와 물질적 현실(형이하학)을 완전히 분리시켰다. 다음은 안락사를 다룬 제3장에서, “죽음으로 가는 다윈의 길”(pp 87-88)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

2장에서, 우리는 두 세계관의 발전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낙태와 안락사를 처음 주장했던 많은 주요 인물들이 진화론을 지지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생학(eugenics)'을 옹호했으며, 신체장애와 유전적 결함을 가진 사람들과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인류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옹호했다. 대중들은 우생학은 나치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나치즘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서구의 많은 지역에서 추진되고 실천되고 있었다.

19세기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진화론의 대변인으로 명성을 얻었던 사람이다. 헤켈의 견해로, 장애인을 돌보는 현대 문명은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원칙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는 출생 직후 장애아를 죽여버렸던 “스파르타인(Spartans)과 북미원주민(Redskins)의 사례를 따르라”고 촉구했다. 헤켈은 또한 장애를 갖게 된 성인의 안락사를 선호했다.

대서양의 이쪽에서도 진화론은 많은 저명한 사상가들로 하여금 낙태와 안락사를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다. 한 역사가(Cynthia E. Russett)는 “안락사 운동의 초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진화론이 미국으로 들어온 것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더 나쁜 잔학 행위들이 일어났다. 피어스는 많은 예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는 소매상 트럭처럼 "안락사 버스(euthanasia vans)"가 운행되어, 그들의 "서비스"를 홍보하였다. 일부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 어린이는 12세까지 소모품일 수 있으며, 노인은 비인간으로 취급해야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인격”은 상위에 해당하지만, 육체는 하위에 해당한다는 두 이야기를 받아들인 문화로 인해,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정부가 결정할 수 있게 했다고, 피어시는 설명했다. 그것은 칸트(Kant)와 데카르트(Descartes)의 사상과 같은 나쁜 아이디어로 시작했으며, 진화론의 등장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가치라는 상위 개념도 진화하여, 모든 것이 물질이 되어버렸다.  

.낸시 피어스(Nancy Pearc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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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피어시는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 관점과,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진(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통일된 존재) 성경적 관점을 대조하고 있다. 그 관점들은 사회와 개인에게 너무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피어시는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와 같은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어떻게 희망과 평화를 제공하고,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 짧은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의 몸을 사랑하라’는 오늘날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한 주제에 대한 잘 문서화 된 치료법이다. 그것은 이 사회가 어떻게 그러한 혼란에 빠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 진화론의 수용과 더불어, 성경적 창조에 대한 불신과 조롱, 교회와 기독교의 기본 교리의 쇠퇴로부터, 이러한 혼란이 초래됐던 것이다. 이 책은 특히 목회자들에게 가치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섹스와 죽음에 관한 혼란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성적 혁명을 외치는 사람들의 세계관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다. 


출처 : CEH, 2020. 1. 12.

주소 : https://crev.info/2020/01/pearcey-darwinian-roots-death/

번역 : 미디어위원회

미디어위원회
2020-01-06

이 시대 교회의 뜨거운 감자, 창조론 대 진화론 논쟁! 

: 청소년 사역자를 놀라게 하는 조사 결과

(Creation—the ‘dealbreaker’ for today’s generation)

by Gary Bates and Carl Wieland 


      CMI(Creation Ministries International) (ICR, AiG, CSR, KACR 등과) 같은 창조과학 단체들이 하고 있는 사역이 이 시대 청소년들의 신앙과 관심사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역이기 때문에 필요성이나 존재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CMI와 전혀 관련이 없는 기독교 연구기관에서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조사한 것을 특별히 인용하고자 한다. 조사 결과에 대한 이유를 충분히 분석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조사결과 자체만으로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조사 결과는, 청소년 사역자들이 ”일차적으로 좀 더 근본적인 질문들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호주 시드니에 있는 유스웍스 대학(Youthworks College)의 ‘교회 역사와 복음’ 강사인 룻 루카비오(Ruth Lukabyo)는 최근 호주 시드니 인근의 11개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208명의 11~14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수행했다.[1]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의)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기독교 과목을 수강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주 정부에서 허용하기는 하지만, 재정 지원을 하지는 않는 이 과목은 ‘성경 수업(scripture class)’ 또는 ‘성경(scripture)’ 과목으로 불려진다. 소위 ‘성경을 배우고 있는 어린이(scripture kid)’들의 부모들은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크리스천이기 쉽다.

루카비오는 ‘성경 어린이’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다고 말한다. 루카비오와 같은 기독교 청소년 사역자들이, 이들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질문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는가?”, ”하나님은 왜 우리의 혼전(婚前) 성관계를 싫어하시는가?” 등과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질문들은 청소년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대신에 루카비오가 보고하고 있는 조사 결과는, 청소년 사역자들이 ”일차적으로 좀 더 근본적인 질문들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기본적인 것도 당연한 것으로 가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교회 청소년들(church children, 당신의 자녀나 손자 손녀일 수 있음)’이라도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것을 믿고 있다고 전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루카비오가 수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주요한 네 가지 질문은 ‘하나님의 실재(實在)와 인격성’과 같은 기본적인 것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물론 질문 넷 중 셋은 CMI가 직접적으로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던 질문이었고, <창조에 대한 답변> (Creation Answers Book)에 실려 있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이 계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이 세계에는 많은 고통들이 있는데,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나?

.진화론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나?

루카비오는 또한 Y세대(1980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신앙을 조사한 책을[2] 참조하여 말하기를, Y세대의 50% 미만이 어떤 종류의 신(神)이건 간에 신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그리고 더 조사해보았더니, 이 세대가 믿음을 잃어버린 가장 큰 한 가지 이유는 ‘과학’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루카비오가 조사한 위에 열거한 질문들은 설문지 목록에서 고른 것이며, 또한  청소년들이 개별적으로 어떤 질문이라도 설문지에 쓸 수 있도록 했다.   

루카비오는 또한 위에 언급한 ‘Y 세대의 신앙을 조사한 책’에서 가장 일반적인 (여러 번 반복적으로 나오는) 질문 네 개를 제시하고 있었다. 질문 넷 중 셋은 CMI 홈페이지에 그 답변을 제공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   

.하나님은 어디서 왔나?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나?

.빅뱅이론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루카비오의 조사 결과와 ‘Y 세대의 신앙을 조사한 책’, 양쪽의 네 번째 질문은 비슷한 주제이며, 다음과 같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는가?", 그리고 "천국과 지옥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나?" 이 주제들을creation.com에서 다루기는 했지만, CMI 사역의 (다른 여섯 질문과 같은 정도의) 핵심적 부분은 아니다. 나머지 두 질문에 대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빅뱅이론과 함께 ‘원인과 결과’의 과학법칙을 배운다. 그들은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철칙(鐵則)을 마음에 새기고, 우주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면,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서 왔으며, 누가 만들었는가? 빅뱅이론이 우주의 궁극적 기원이라면,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서 수용하지 않는 부모나 교사들은, 빅뱅이론은 창세기 역사와 모순되며[3], 수많은 문제점을 가진 빅뱅이론은 많은 무신론 과학자들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라고 말해주기 보다는, 둘 다 믿으라고 말하기 쉽다.

조사자가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중요성”을 분석해봤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청소년 사역자들이 ”인과 관계의 과학적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는 루카비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얼마 전에 대학 캠퍼스에서 활동하는 주요 교단 선교팀의 사역자들에게 위에 언급한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공식적 입장은 대답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조 Christians ducking and weaving on campus).

성장해 가면서 많은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에 대해 힘없이 머리를 흔들기보다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있음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진화론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도록 어려서부터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격려함으로써, 우리의 자녀들을 충분한 정보로 무장시켜야 한다. 


부모와 사역자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할 뿐만 아니라, 진화론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도록 어려서부터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강조하고 격려함으로써, 우리의 자녀들을 충분한 정보로 무장시켜야 한다. 나는 이러한 일이 성취된 많은 가정들을 대상으로 했던 수십 년간의 CMI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자녀들은 <창조> 지와 창조에 대한 책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그들은 자신들의 반석과 같은 믿음이 지속적으로 받아들인 창조과학 지식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니키(Nikki C.)는 이메일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내왔다. 

우선 CMI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진화론과 신앙의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은 후에, CMI 자료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진화론에 노출되기 전 어렸을 때부터, CMI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던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과학으로 위장한 진화론의 해악에 대해 면역이 된 후에, 대학에서 생물의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들과 함께 훌륭한 CMI 자료들을 활용하기를 남편과 함께 기대하고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CMI의 훌륭한 연구 자료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매주 전 세계의 어느 곳에선가는 CMI 강사가 창조과학 정보를 전파하고, 이전에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며,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삶이 변화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CMI)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조사를 수행한 루카비오가 지적하듯이 모범적인 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아직도 창조과학을 등한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창조론에 대해서 양극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진화’라는 주제는 분란(紛亂)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교인 중 많은 수, 특히 청소년들이 창조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또는 ”하나님도 믿고 진화도 믿으면 되지” 그러면 또 다른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논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들 모두 논란이 되는 주제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기원 문제에 대한 진정한 답을 알지 못하며, 성경 말씀만으로 믿음을 굳건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주류 과학이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교 교회라도 창조/진화와 관련한 주제를 잘 다루지 않는다.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 이렇게 반응한다. ”그거 보라니까! 창조/진화 논쟁은 분란만 일으킨다구!”   

보다시피 이것은 악순환의 성격을 띠는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역자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답변을 우려하여 골치 아픈 주제를 회피하지만, 성도들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변명할 수 없다

많은 교회들이 창조/진화 주제를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 글을 쓸 당시에(2011년), CMI는 33년 동안 활동해 왔다. 일반적으로 대형교회일수록 더 그런 것 같으며, 대형교회에서 창조론/진화론 세미나를 개최하고 사역을 했던 경우는 많지 않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것은 누군가(진화론을 믿는 성도들)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논쟁거리를 회피하려는 것 같다.

또 다른 요인은 CMI와 많은 창조과학 단체들의 사역이 교회에서 교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수 백 가지의 여러 사역들 중 하나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설립 목적부터가 다르다. CMI는 전 세계적으로 사역하고 있으며, 교회 사역에 어떤 종류의 걸림돌이라도 되지 않도록 사역하고 있으며, 또한 CMI가 돈벌이를 위해 일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정해진 강사료를 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역을 한다.   

행정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선포하는 사역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믿는다.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자료들이 가족과 친지들을 통해 전파되고, 그래서 사역의 성과가 배가(倍加)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로 닉(Nick W.)이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하나님이 CMI를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조과학 사역은 기독교가 과학적으로 건전한지 아닌지에 대한 저의 의문에 답을 주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정말로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고, 무엇보다도 지구의 나이에 대한 저의 이해를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이 사역을 중지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대외사역(outreach)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의 중요성에 대하여 데빈(Devin S.)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창조> 지 구독 신청을 하고, 기부금을 조금 냈습니다. 우리 부부는 십대 딸 둘이 있으며, 재정 상황이 빠듯합니다. 저는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옹호해야할 기독교 사역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성경이 우리의 최종적인 권위라는 것을 담대히 선언합니다.”


References and notes
1. Lukabyo, R., What questions do adolescents have about the Christian faith? Accessed at www.youthworks.net on 4 February 2011.
2. Mason, M, Singleton, A., and Webber, R., The Spirit of Generation Y, Mulgrave: John Garratt pub., 2007.
3. In big bang ideas, the sun is supposed to be there for millions of years before the earth, a total reversal of the sequence of appearance in Genesis Chapter 1. In our experience, young people can easily see through flimsy ‘accommodationist’ notions once they see such contradictions between what the Bible says and what naturalistic theories claim.


번역 - 홍기범

링크 - http://creation.com/creation-dealbreaker

출처 - CMI, 2015. 12. 31.

미디어위원회
2020-01-01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2020년, 새해 새날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올 한 해도 성경적 창조신앙 회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교회와 다음세대들을 강건하게 세우고 부흥하게 하는 ‘불씨’가 되기 위해 다짐하고 동역하시는 회원들과 후원하시는 여러분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게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3년 전에 제7대 회장에 선출되었을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 43장 19절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지난 3년 동안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수호하고, 성경적 창조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한 다양한 사역들이 추진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할렐루야! 

미국의 창조과학 기관인 AiG(Answers in Genesis), 합동신학대학원, 생터성경사역원, 한국CCC, 한동대학교와 협력 MOU를 체결함으로써 한국 교회와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한 중요한 네트웍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님들이 ‘성경적 창조론 선언문’을 발표하여 유신진화론의 신학적 성경적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으며, 합신대학원에 2019년 1학기부터 2년 과정의 “성경적 창조론 전문강사 양성과정”이 개설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열매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이었으며, 동역하시는 창조과학회 회원들과 후원하시는 여러분들이 함께 기도하며 협력해준 덕분이었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립니다. 

2020년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그 이유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수호하고 한국교회와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하여 창조과학회를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도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요나 1:2)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모두 순종하며 결단하며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나타내실 새 일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오직 성령님의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저들보다 많은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우리를 지켜주시고(왕하 6:14-16), 결국에는 승리하게 하실 겁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좁고 외로운 길이지만, 결국에는 영광의 길입니다. 어두움을 인내하며 잘 견딘 자만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빌 4:2)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같이 가십시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2020년에도 늘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20년 1월 1일

회장 한윤봉 드림

미디어위원회
2019-07-18

창조신앙의 역사, 그 교회사적 고찰 

: 초대교회를 중심으로

(Trajectory of the Faith in Creationism in Church History 

: Early Church Period)

박형진 


요약

오늘날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는 결국 창조신앙의 중요성 및 그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2000년간 기독교역사에 나타난 창조신앙은 어떠하였는가를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본다. 본 논문은 그중 초대교회 기간에 초점을 맞추어 교부들의 성경해석 및 설교강론 가운데 나타나는 창조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 맥락에서 쓰였고 무엇을 강조하였는지를 살펴본다. 기독교초기부터 창조신앙의 본질을 끊임없이 위협해온 주변 세계관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오늘날 창조신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중요한 안목을 열어 주리라 본다.

Today's issues in creationism against evolutionism demonstrates the significance and restoration of Christian faith in God's creation. What is the shape of the trajectory of faith in creationism in church history? This study examines the early church period, especially with early church fathers' understandings of the creation account in their biblical interpretations and sermons. In what contexts did they defend, explicate, and emphasize creationism? This study will throw light on understanding the essence of faith in creationism and the nature of worldviews that has threatened the faith in God's creation.


I. 들어가면서

성경의 초두에 나타나는 창조기사는 기독교신앙의 근본이다. 오늘날 창조신앙은 과학주의적 세계관과 진화론이라는 양상으로 위협받고 있다. 기독교초기에는 창조기사에 관하여 어떠한 이해를 가졌으며 또 당시 창조신앙을 위협하였던 도전은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가?

창조신앙의 역사를 기독교 2000년간의 교회사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고 유익한 일이라 생각된다. 본 논문은 그중 초대교회기간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위에 제기된 중심 질문의 좀 더 세부적이고 단계적인 질문으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하위질문을 갖는다. 첫째, 창조기사에 관한 초대교회의 성경해석은 어떠하였는가? 둘째, 초대교회당시 창조신앙을 위협하던 이단사상과 이들의 세계관은 무엇이었는가? 셋째, 초대교회의 창조신앙에 대한 변증이 오늘날 창조과학운동에 던져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아마도 위의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가정을 두고 던져지며 또한 답변을 시도할 것이다. 첫째,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의 입장과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은 창조신앙의 이해를 도와주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다. 둘째, 창조신앙을 위협하는 이단사상은 오늘날 진화론과 같이 나름대로 총체적 세계관적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셋째, 초대교회든 현대교회든 창조론을 위협하는 불신앙은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통적인 요소를 반드시 공유할 것이다.

연구방법은 역사문헌을 중심으로 하되, 특히 자료에 있어서 이 논문은 초대교부들의 주석 및 설교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 그리고 성경본문으로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기사에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하려고 한다. 교부들은 사도시대가 끝나고 등장하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으로부터 초대시대가 끝나고 중세로 넘어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던 어거스틴(Augustine)까지 A.D.100-430에 이르는 초대교회시대의 교부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방대한 기독교역사가운데 이 논문은 초기시대에 국한되어지긴 하지만 이 기간에 나타난 해석학적, 철학적, 신학적 논쟁은 그 이후 교회사에서 계속 이어질 창조신앙에 대한 논쟁에 큰 틀을 제공해 준 것이라 본다. 그리고 현 창조론에 대한 입장과 이해에 더 한층 역사적인 의의로 조명해 주는 기여가 되리라 본다.

 

II. 초대교부들의 성경 창조기사 해석

창조와 타락을 서술하고 있는 창세기 1-3장은 교부들의 글들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이 집중된 곳으로 양적인 측면에서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해 볼 때 그 양이 상당히 많다는 면에서 창조에 관한 인식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2) 본 절에서는 교부들의 창조기사(창세기 1장)에 관한 이해들을 창조기사의 순서를 따라 살펴보기로 하고 그 분석된 내용을 종합하여 전반적인 양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태초의 천지 창조

초대교부가운데 탁월한 설교로 인해 '황금의 입”이라 불렸던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왜 하나님이 천지 즉, 하늘을 먼저, 그리고 땅을 뒤이어 언급하셨을까에 대해 배열된 단어의 순서대로 실제 하늘을 먼저 내시고 그 다음에 땅을 내셨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는 인간적인 상식의 집짓기와는 순서가 다름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기초(땅)를 먼저 내고 그 위에 지붕(하늘)을 덮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과는 반대로 지붕을 먼저 내시고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러한 해석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넘는 창조주시라는 면을 보여주시려 했다고 강조했다.3) 이토록 교부들 가운데 성경해석을 문자적(literal)이고 역사적(historical)인 방법을 따랐던 이들이 있다. 바실(Basil)과 같은 교부도 은유적, 상징적인 해석을 피하고 가능한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하여 창조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4) 그들은 단어의 순서배열과 그 함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반면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는 궁창위의 물과 궁창아래의 물은 영계와 물질계라는 두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 구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5)

 

2. 창조사역에 있어서의 성부, 성자, 성령

에프렘(Ephrem)과 같은 시리아계열의 교부는 수면위에 운행하시는 성령을 어미 새에 비교하였다.6) 그는 여기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모두 창조사역에 참여함을 강조하였다. 성부는 말씀하시고, 성자는 창조하시고, 성령은 베푸셨다는 것이다.7) 제롬(Jerome)과 같은 라틴계열의 교부는 창1:2의 장면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는 마치 앞으로 임할 세례에 대한 전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질 세례의 한 모습으로 본 것이다.8) 에프렘도 이 장면에 세례의 의미를 부여하여 마치 어미닭이 알을 품음으로 인해 생명을 부화시키는 것과 같이 물세례도 그 위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산출시키는 구속적 의미 이상의 창조적 의미를 바로 이 구절이 전조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9)

 

3. 빛의 창조: 첫째 날의 빛, 셋째 날의 식물, 넷째 날의 광명의 상호관계에 관한 문제

에프렘은 첫째 날 창조된 빛은 태양으로부터 비롯된 빛이 아님을 말하면서 빛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임을 강조하고 있다.10) 암브로우스(Ambrose)는 첫째 날의 빛은 태양보다 선재하고 태양을 태양되게 한 원초적 빛이요 태양의 전조라고 소개하였다.11) 한때 마니교에 심취하였던 어거스틴의 경우도 창세기 1:3에 언급된 첫째 날의 빛에 대해 이 빛은 자연의 가시적인 빛이 아닌 보다 근원적이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빛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2) 이러한 어거스틴의 답변은 사실상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때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고 비꼬았던 마니교도들에 관한 변증이었다. 즉, 이들은 궁창위의 빛인 태양이 넷째 날 창조되었다면 그 첫째 날 나온 빛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어떻게 태양과 지구의 상호주기작용으로 인한 '날”(하루 24시간 개념)이라는 부조리한 말을 쓸 수 있느냐는 식으로 구약의 말씀을 도전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셋째 날 창조된 식물에 관해 에프렘은 설명하기를 풀은 즉시 창조되었지만 이미 성년에 이른 완숙한 풀이요, 나무도 하루 만에 단숨에 창조되었지만 벌써 과실을 맺을 만한 완숙한 형태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13) 바실은 셋째 날 창조에 있어 풀과 채소와 과목과 같은 식물이 이미 넷째 날 태양의 창조이전에 선재한 것을 통해서 이미 지구와 식물계가 사실상 태양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마치 태양을 생명의 기원을 야기한 존재로 보아 이를 예배하거나 숭배하는 행위는 무지하고 악한 우상숭배임을 통렬히 지적하였다.14) 크리소스톰도 이미 셋째 날 식물계의 창조는 가시적 태양광선이전에 이미 성년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이렇게 된 이유는 주님께서 생명의 근원을 태양이 아닌 하나님 자신에게 돌리려하게 함이었던 의도라고 밝히고 있다.15) 암브로우스 또한 태양은 사실상 식물보다도 더 어린 존재임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태양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생명력을 주는 근원임을 알게 하려함이라 하였다.16)

 

4. 새와 물고기의 창조에 관한 이해

바실은 넷째 날과 다섯째 날에 창조된 궁창의 빛들(해, 달, 별)과 새와 어류와 같은 생물들을 창조된 공간과 무대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장식물(ornamentation)로 보았다.17) 그는 문자의 나열과 단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다섯째 날의 경우 물고기와 새의 출현에 있어서 물에게(만) 명령을 내린 구절(창1:20)을 설명하면서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새의 날개가 공통적으로 유체 속에서 유영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유영을 위한 공통적 구조가 곧 공통의 출처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18) 이토록 바실의 경우 이러한 세심한 차이도 빠뜨리지 않고 설명을 부과하려 한 면밀함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초대교회 교부 중 영지주의(Gnosticism)에 대해 가장 맞선 사람이 이레니우스(Irenaeus)였다면, 마니교(Manichaenism)에 대해 가장 맞선 사람은 한때 그것을 추종하고 따랐던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의 경우 창세기 주해는 대부분 마니교도의 성경비판에 대한 변증이었음을 보게 된다. 마니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때 파생될 수 있는 비과학적, 비논리적인 면을 끄집어내어 성경의 권위를 비판하려고 하였다. 특히, 다섯째 날의 새의 창조를 물고기가 창조된 물이라는 배경에서 같이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하면서 어찌 조류와 어류를 한 통속으로 보느냐는 것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설명하기를 여기서 이야기하는 물은 바다나 강과 같은 물이 아닌 많은 수분을 내포하는 공기라고 설명한다. 물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로 유영할 수 있는 매질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공중의 새들도 축축한 수분이 내포된 공기가 그들의 날개로 날 수 있도록 매질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그 공기 중의 수분은 밤새 이슬이 되어 응축된 자연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19) 반면 알레고리적(allegorical) 해석으로 유명한 오리겐(Origen)과 같은 교부는 궁창을 마치 우리의 마음에 비유하면서 궁창을 나는 새는 마침 우리 마음속에 어지럽게 날고 있는 악한 생각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으로 설명하였다.20)

 

5. 여섯째 날 동물의 창조에 관한 이해

바실의 경우 여러 동물들의 종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러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이렇게 종류대로 된 것들이 아무리 수십 세대 간을 거치는 동안에라도 변함이 없이 보존된다는 자연현상에서 더욱 입증되고 있다고 설명한다.21) 그러므로 종자의 순종(purebred)은 창조질서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이나, 잡종(hybrid)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잡종은 창조질서의 역행으로 인해 사실상 고통을 당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해석함으로 상당히 생물학적인 언어로 종에 관한 이해를 설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22)

마니교도들은 여섯 째날 하나님이 땅을 향하여 명하시되 동물들을 종류대로 내라(창1:24)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마치 광물질인 땅 자체에 유기물인 생명을 낼 수 있는 창조적 장치가 있느냐는 식으로 기독교를 힐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실은 땅이나 물이 자체로 부터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의 궁극적 근원을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23) 바실은 이러한 창조행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다.24)

 

6. 여섯째 날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해

인간의 창조에 관해서는 교부들이 좀 더 세심한 이해와 해석을 덧붙였다. 특히,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은 다른 피조물과 두가지면에서 특이하게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인간의 창조에 있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간의 논의(Triune consultation)가 있었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이는 위대한 갑바도기아 교부가운데 한 사람인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의 주장이다. 다른 피조물들이 단순한 한 명령어에 의해 존재케 된 반면 인간은 삼위의 하나님의 신중한 논의에 의한 결정체였다는 것이다.25) 크리소스톰 역시 인간은 논의와 협력과 토의를 거쳐 나온 존재라는 면에서 타 피조물과 구별될 수 있다고 하였다.26) 그레고리는 인간의 창조가 순서상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면에서도 그 완성도가 다른 피조물과 다르다(이는 진화를 의미하진 않음)고 주장한다.27)

둘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면에서 더욱 구별된다. 헬라의 교부들은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요소로 보고 애써 이를 구별하여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오리겐은 형상(image)은 선천적 요소로, 모양(likeness)은 후천적 요소로 보아 후자를 인간자신이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으로 획득되어 질 수 있는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28) 창1:26절에서 언급된 형상과 모양 중 형상에 관한 것만 한 번 더 그 다음절에 언급되어 있고 모양에 관해서는 침묵하신 이유도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 한다고 보고 있다.29) 또한 헬라교부들의 치밀하고도 정밀한 해석적 시도는 우리의 형상과 모양에서 '우리”라는 말은 복수로 쓰인 반면, '형상”이나 '모양”이라는 말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지칭한 점에서 우리 하나님의 특성 즉, 세 인격(복수)으로 있으나 본질상 하나(단수)인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설명하였다.30)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할 때 이를 단순한 내면적 인격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외적인 신체의 모습까지도 이야기하는 지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 모두가 있었다. 내면적 인격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이야기한 자는 오리겐으로 그는 우리의 영적인 특성, 즉 내면적 사람, 보이지 않고 비육체적이며 부패될 수 없고 죽지 않는 영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31)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내면적 성정은 반드시 삼위일체적 특성을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여 삼위일체에 기반한 인간이해를 도모하였다. 포타미우스(Potamius)같은 교부는 인간의 외적인 신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체적 발현이라고까지 보았다.32)

 

7.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관

지금까지의 관찰에 의하면 대체로 초대교부들은 창세기1장의 창조기사에 관한 해석에 있어 두 갈래로 나눠짐을 보게 된다. 하나는 문자적(literal) 해석이요, 다른 하나는 알레고리적(allegorical) 해석이다. ‘알레고리(allegory)’라 함은 우의적, 은유적, 풍유적 해석이라 하여 문자가 의도하는 것 이상의 뜻(주로 영적인 의미)이 있다고 믿고 숨겨진 진의를 해석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동방 헬라 교부의 대표적 인물인 오리겐을 들 수 있다. 서방 라틴 교부를 대표하는 어거스틴의 경우 성경해석에 있어 그 나름대로 합리성과 조화를 시도하기 위해 문자적 해석에만 머물지는 않았음을 보게 된다.33)

일례로, 창조기사의 ‘날’(Day)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그 입장이 크게 세 부류로 나눠지게 됨을 본다. 첫째는 ‘하루 24시간’으로 보는 입장이며, 둘째는 ‘긴 연대’적 입장이며, 셋째는 ‘순간적 창조’의 입장이다. 먼저, 첫 번째 부류로 문자적 접근을 시도했던 크리소스톰의 예를 들어보자. 창조기사에 있어서 ‘날'이라는 말을 태양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첫날부터 쓴 것은 그 시간의 정해짐이 넷째 날 창조된 태양에 대한 지구자전주기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러한 시간대(24시간)로 날을 지정하였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하루를 지구의 자전에 의한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하신 말씀의 권위에 의한 의도적 결과로 해석하였다.34) 바실의 경우도 문자적 해석에서 벗어나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가는 것은 계시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더 과시하는 태도라고 보고 성경은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했다.35) 에프렘도 6일간의 창조를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즉, 문자적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36)

두 번째 견해로 알레고리적 해석을 시도한 오리겐은 물론이고, 순교자 저스틴이나 이레니우스, 카르타고의 키프리안(Cyprian of Carthage)은 하루를 천년 혹은 그에 상응하는 긴 시간으로 보았다. 그것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벧후3:8) 같다는 비유를 그대로 적용한 것이고 아담도 과실을 따서 ”먹는 날” 바로 죽지 않고(창2:17) 930세에 죽은 것(창5:5)으로 보아 ‘날’의 의미를 하루 24시간으로 만 볼 필요는 없다고 유추한 결론들이었다.

그러나 초대교부들 가운데에는 특이하게도 또 다른 세 번째 입장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있었다. 암브로우스 같은 교부는 다섯째 날의 창조기사에서 아예 모든 생물의 창조는 순식간이며 동시적이었다고 보았고, 단지 창조기사는 이를 우리의 인식에 맞게 설명하도록 순서적으로 배열된 묘사에 불과하다고 믿었다.37) 그의 회심에 있어 암브로우스의 영향을 받고 세례까지 받은 어거스틴의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창조를 24시간 길이의 하루가 여섯 날에 걸쳐 창조된 것이라 보지 않고 오히려 일순간에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38) 그도 역시 창조기사의 서술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논리적 순서(이때 논리는 과학적 시간의 순서 논리가 아닌 영적인 의미에서의 논리)에 의해 기술되었을 뿐 실제 창조는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반해서 닛사의 그레고리는 창조는 순서적으로 이행된 하나님의 행동으로 보아야 된다고 주장했다.39) 이에 관해 크리소스톰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절차 없이 다 창조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나 우리의 이해와 교훈을 위해서 순서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40)

초대교부들의 창조기사 해석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다른 성향이 있음에 관해 통찰력 있게 연구한 샌드웰(Isabella Sandwell)은 두 인물로 위에서 언급되어온 크리소스톰과 바실을 대비시키고 있다.41) 양자의 공통점이라 한다면 모두가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고백을 충실히 따르는 정통 교부들이라는 점과 문자적 의미의 해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42)그리고 두 사람 다 알레고리적 해석에 찬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43) 그러나 상이점이라면 크리소스톰의 경우 좀 더 목회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바실의 경우 좀 더 과학적이고 변증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이다.44)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말씀으로 '선포‘하는 쪽에 섰다면,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납득해야 할‘ 말씀으로 ‘설명‘하는 쪽에 있었다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궁창을 설명하면서, 바실은 마치 오늘날 노아홍수의 캐노피 이론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공기가 찬 하늘의 물[즉, 궁창위의 물]이 있어서 위로 올라 온 수증기, 즉 강과 못과 늪과 그리고 바다에서 오른 그 증기가 위로부터 오는 엄청난 열기로부터 [궁창 아래의 땅을] 타는 것을 방지해 주는 것이다.45)

바실은 처음 3일간의 빛도 태양과 상관없이 아침과 저녁을 구분 짖게 하셨으나 오직 넷째 날 광명을 만드신 이유는 이 원초적 빛을 담을 하나의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하였다고 설명한다.46) 마치 이것은 빛과 램프를 비교해 봄으로 더 명확히 설명할 수 있다. 빛 자체가 램프와 분명 구별되는 것처럼 등(광명)은 빛을 담기위해 준비된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다.47) 반면 크리소스톰은 설명하기를 하나님께서 태양을 처음부터가 아니라 셋째 날 식물이 창조되고 넷째 날 만드신 이유는 헬라인들로 하여금 식물을 자라게 하는 근원이 태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만 근거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보이시기 위한 것임을 말하여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48) 바실은 가능한 기존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비유적 방법(analogy)을 사용하여 이해를 돕고자 하였지만 크리소스톰은 오히려 청중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이러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비약적이고 탈 논리적 방법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더욱 부곽 시키려고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49) 한마디로 바실이 그 예리한 지성으로 우리의 이성에 호소하였다면 크리소스톰은 그 황금의 입으로 우리의 믿음에 호소하였던 것이리라 여겨진다.

 

III. 초대교회시대의 창조신앙을 위협하던 사상들과 이들의 세계관

1. 헬라주의적 세계관: 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

오늘날 창조신앙을 위협하는 것이 과학사조 가운데 하나인 진화론 사상이라면 초대교회당시 창조신앙을 위협하였던 것은 헬라(Greek)의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인 플라톤주의(Platonism)였으며 이후 발전된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와 이것이 기독교내에 영입되어 혼합주의적 양상을 띤 영지주의(Gnosticism)라 할 수 있겠다.

초대교부들의 창조론은 대체로 당시 그들을 위협했던 플라톤주의적,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대응이었고 변증이라고 하겠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는 상위 및 하위 개념의 이원화된(dualistic)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상위 개념이 완전하고 선하며 불변하는 원형(Form 혹은 Idea)의 진리의 세계인 형이상학적 세계라면 하위 개념은 불완전하고 선하지 않으며 가변적인 형이하학적 세계로 대비된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에선 당연히 물질적인 것은 정신적이며 이성적이며 영적인 것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기독교의 창조론에 심각한 위협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 세계관에선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50) 창조는 기껏해야 조물주(Demiurge)가 이토록 선재하는 물질을 창조사역을 위한 필연적 재료로 의존하고 사용한 ‘유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materia)를 의미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전능성에 근거한 ‘무로부터의 창조’를 위협하는 세계관이었다.51) 헬라권에서 플라톤철학에 깊이 젖어들었던 순교자 저스틴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같은 이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유로부터의 창조로 본 반면에, 시리아권의 타티안(Tatian)이나 라틴권의 터툴리안(Tertullian)과 같은 교부들이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로 본 것은 이러한 교부들의 사상 속에 배어 있는 정신문화적 배경을 엿보게 해준다.52)

더 나아가 영지주의적 세계관의 위협은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구약의 창조를 악신의 창조로 보며 구약을 폐기하려는 위협이었다. 이러한 부류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르시온주의(Marcionism)라 하겠다. 그 창시자 마르시온(Marcion)의 이름을 딴 이 이단사상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지은 조물주(Demiurge)로서 신약의 예수의 아버지가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라고 본 것이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의 하나님과 달리 보복적이며 열등한 유대인의 부족 신 정도로 보았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그의 저서 Against Heresies(이단에 대항하여)에서 이러한 이원론적이고 위험한 사상을 견제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이며 로고스를 통해서 이룬 무로부터의 창조를 강조하였다.53)

 

2.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세계관: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를 위협할 만큼 팽배했던 종교 사상가운데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와 마니교(Manichaeism)가 있었다. 이 둘은 고대로부터 헬라에 맞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던 페르시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두 가지 모두 그 세계관을 살펴 볼 때 헬라적 사상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는 이원론적 특성을 지녔다는 면에서 영지주의와 사촌관계라 할 수 있겠다. 형이상학적 이원론(metaphysical dualism)은 곧 도덕적 이원론(moral dualism)과 연결되어 불가분의 관계가 형성되는데 플라톤주의에서는 형이상학적 이원론(완전한 것 vs. 불완전한 것)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면,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도덕적 이원론(선한 것 vs. 악한 것)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시작된 조로아스터교는 우주와 역사의 이해를 선신과 악신의 대결양상으로 믿었는데 이는 훗날 마니교 사상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쳐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구도로 나타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조론은 이토록 대결구도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선신과 악신이 각각 선한 것의 창조, 악한 것의 창조를 하였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의 성경적 창조신앙에 위배됨을 볼 수 있다.

마니교는 기독교 초기시대에 조로아스터교보다 더 급진적이고 널리 퍼진 고대종교가운데 하나로 북아프리카의 젊은 어거스틴에게까지 파급력을 미친 것을 볼 수 있다. 3세기 페르시아의 예언자 마니(Mani)의 사상은 어거스틴을 매료시켰고 그의 주장은 이후 어거스틴이 기독교인이 되고 난 후 그의 신학사상을 고뇌하는 가운데 정련케 시킨 대표적 이단사상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들이 기독교신앙을 위협하였던 부분은 두 서로 다른 신과 실체의 대립구도로 인해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앙인이 된 어거스틴은 이러한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악은 실체가 아닌 선의 부재로 보았으며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 1:2에 언급된 흑암에 관해 이는 존재로서의 어두움이 아니라 빛이 없는 부재로서의 어두움, 즉 어두움이 실체가 아닌 빛이 없는 상태임을 가리키고 있음을 주장하였다.54)

마니교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도들이 성경을 너무 문자적으로 곡해 한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하였으나 그는 기독교인으로 새로운 변증을 제시해야만 했다. 한때 마니교에 심취하였던 어거스틴의 경우 마니교에 대항하여 무로부터의 창조를 옹호하기위해 마니교가 유로부터의 창조를 근거로 삼는 창1:2을 변증하기위해 창1:1과 창1:2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설명을 시도하였다. 즉, 창1:1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였으며 이후 언급된 창1:2은 이 상간 어느 때인가 무로부터 만들어진 물질을 언급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납득될 수 있는 해석과 조화를 시도하며 마니교도의 공격에 일축을 가했다.55) 그러나 이 결과 어거스틴은 창세기의 첫 두절 상간에 불가분 갭(gap)을 초청하는 틈을 주고 말았다.

시리아의 교부 에프렘과 페르시아의 현자(sage)라 불리는 교부 아프라하트(Aphrahat)는 이 지역에 팽배하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창조신앙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핵심교리들을 위협하였던 조로아스터교 및 마니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고 페르시아권에 만연하던 점성술등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해서는 안 될 여러 일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견지해 줄 신앙고백을 서술하고 있다.56)
 


Ⅳ. 초대교회의 창조신앙에 대한 변증이 오늘날 창조과학운동에 주는 함의

1.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from Demiurge to Creator

이상과 같은 세계관들이 위협하였던 것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시요 창조자가 되심을 제한하는 도전들이었다. 결국 초대교회 창조논쟁의 열매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이는 이후 전개될 창조신학과 창조과학의 토대를 놓아 줄 출발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온전한 ‘창조신앙’의 정의를 의미한다. 당시 창조에 관한 수많은 논의가운데서도 가장 핵심과 사활이 걸린 것은 결국 ‘무로부터의 창조’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자유의지라는 속성에서 필연적으로 귀추 될 수밖에 없는 결론이었다.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닌 유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을 창조주가 아닌 조물주(이미 있던 물질로 질서지우는 자)로 제한하는 영지주의적 요소를 인정하는 바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이후 2세기 말부터는 무로부터의 창조는 점차 교회의 정통적 창조신앙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57)

초기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한 대항이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에 관하여 공헌하였다면, 영지주의에 대한 대항은 무로부터의 창조교리를 잉태한 셈이다. 이로 보건데 무로부터의 창조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초대 기독교역사의 두드러진 신학적 산물(theological landmark)로서 정통신앙의 표지(signpost)가 되었으며, 창조론의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이정표(milestone)가 되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창조신앙의 핵심교리로 당시 창조론을 위협했던 많은 이단적 사상들에 대해 더 무게 있게 강조되어지고 변증되어졌다.58) 무로부터의 창조는 특히, 영지주의와 기독교를 구별 지어주는 가늠자가 된 것이다. 초기교부가운데 위에서 언급된 순교자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과 같이 헬라 철학적 특성이 강한 교부들을 제외하곤, 무로부터의 창조는 바실, 에프렘, 어거스틴과 같은 대부분의 주요 교부들에 의해 옹호되었다.59)

성경은 분명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히11:3),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롬4:17), ”만물은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다”(계4:11)고 하시며,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라고 선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충실히 따를 때 성경자체가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로부터의 창조’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에게 자연은 언제나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직 스스로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출3:14). 그러한 관점에서 자연(自然)은 오직 타연(他然)일 뿐이다.

 

2. ”정녕 죽으리라” vs.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오늘날 과학주의적 사고, 진화론적 사고가 성경의 창조신앙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면 초대교회 때 창조론에 지극히 위협을 미친 것은 이원화된 구조의 철학 및 종교사상, 특히 영지주의적 사고가 성경의 창조신앙에 대한 위협이라고 대응시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주의와 진화론이 영적인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고 오히려 유물론적 사고, 진화(evolution)란  이념에 사로잡혔다면,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적 세계관에선 오히려 영적인 세계에  대해 지나치고 신비적일 정도로 사로잡혀 있고 창조세계는 오히려 퇴화(devolution)되었다고 여기는 잘못된 이념을 보게 된다. 오늘날 과학주의와 진화론이 자연세계를 절대화하여 하나님을 배제시킨 것이라면 초대교회당시 플라톤주의, 영지주의는 오히려 자연세계를 경시함으로 이를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경시하고 한갓 열등한 신인 조물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조물주 사상은 플라톤주의, 마르시온주의와 같은 영지주의, 그리고 마니교등에선 'Demiurge'라는 이름의 조물주로,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선한 신에 대항하는 악신인 'Ahriman'이란 이름의 조물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보건데, 초대교회당시 이토록 격하된 창조세계에 대한 인식에서는 기독교의 핵심진리라 할 수 있는 창조, 성육신, 몸의 부활과 같은 것들이 오히려 그들에겐 부합될 수 없는 걸림돌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모든 핵심적 진리가 시간과 공간과 인간, 즉 구체적인 역사 속으로 계시되었다는 기독교 진리의 역사성(historicity)마저도 경멸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십자가의 도’가 결국 지혜(philosophy)를 찾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unsophisticated, foolish) 것으로 거치는 반석밖에는 될 수 없었던 것이다(고전1:18; 1:22-24).

초두에 가정한 바처럼 초대교회 시대이든 오늘날의 시대이든 창조신앙을 위협하는 사상들과 세계관속에는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떠한 공통적인 요소가 있음을 보게 된다. 과연 무엇이 공통적인 요소였는가?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한 불신앙이라고 하겠다.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다. 이것은 인류의 첫 조상에게 처음으로 부닥뜨려진 바로 그 테스트였다. 그 본초적인 현장으로 다시 찾아가 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6-17)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1,4)

”정녕 죽으리라”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사이에는 어떠한 중립의 여지도 없다.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선택의 문제이고 그 결과 사실여부에 의해 진정한 권위가 누구에게 속하는가를 판가름 짓는 문제이다. 그리고 지구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은 모든 육체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아니 모든 사람은―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에 대해서는 높은 견해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성경을 대할 때, 계속되는 자연의 관찰과 과학의 발견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드러나고 그 말씀의 권위가 더욱 견고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것이 '주의(-ism)' 곧, 이데올로기화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다. 우리는 과학과 과학주의, 철학과 철학주의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과학행위도, 철학행위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위협하는 ‘과학주의’와 ‘철학주의’의 모습에 대해선 대처할 줄 알아야 하겠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언제나 수정당할(to be corrective) 마음의 각오를 할 줄 알아야 될 것이다.

 

V. 나가면서

지금까지 창조신앙의 역사(歷史)를 더듬어 보고자하는 마음에서, 창세기1장의 창조기사에 관한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 초대교회당시 창조신앙을 위협하였던 사상과 세계관들, 그리고 초대교회의 창조신앙에 대한 변증이 오늘날 창조과학운동에 던져주는 함의가 무엇인가 살펴보았다.

초대교부들의 창조기사에 대한 이해와 입장은 통일된 것이 아니었고 다양하였음을 보여준다. 문자적 해석, 알레고리적인 비유적 해석, 그리고 절충적인 입장등 차이가 있었고 이러한 차이는 개인적 성향 뿐 아니라 그들이 살던 시대와 지역의 정신문화적 특성도 반영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졌을 뿐 아니라 초대시대를 마감하고 중세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이후에 도래할 중세 천 년,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개혁자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던 어거스틴의 경우만 하더라도 오늘날 창조과학자들이 다 동의할 수 없는 해석과 입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상, 그의 방대한 저술과 사상의 폭에서 일관되고 체계적인 창조론의 논지를 관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심지어는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부분도 있어 보인다. 초대시대의 교부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신앙적 유산과 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으나 그 누구도 창조에 있어 완벽한 이해를 한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당시의 다양한 형태의 철학, 종교, 이단적 사상들에게서 총체적인 세계관적 구조를 갖고 나타나는 ‘이원론’이라고 하는 공통분모적인 특색 에 대해서 창조신앙을 변증하기 위해 ‘무로부터의 창조’가 그 전면에 나섰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창조론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오직 시작점에 불과할 뿐이다. 초두에 물었던 가정대로, 창조신앙에 대한 초기의 도전들이나 오늘날의 도전들이나 그 공통적인 요소는 ‘말씀의 권위’에 대한 태도로 압축되어 진다.

이제 부족한 능력과 여러 가지 한계 속에 내놓은 소견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으로 소고를 마쳐야겠다. 앞으로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초대교회시대를 이어 중세, 종교개혁과 근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창조신앙이 어떠한 도전을 받아왔고 어떻게 대처해 왔는지, 그 신앙의 여정을 계속 추적해 보기를 기약해 본다.

 


Footnotes

1) 이를 위해서 주로 사용한 자료는 The Ante-Nicene Fathers (hereafter, ANF). Thomas Oden, general ed.,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hereafter, ACCS), Old Testament, I, Genesis 1-11, edited by Andrew Louth in collaboration with Marco Conti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2001). R. R. Reno, Genesis, Brazo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Bible (Grand Rapids, Michigan: BrazosPress, 2010). 그리고 관련학회지로서 북미주교부학회(The North American Patristic Society)에서 발간되는 Journal of Early Christian Studies를 참조했다.
2) CCS I, li.
3) Chrysostom, Sermon 1:3, ACCS I, 4.
4) Basil, Hexaemeron 3:9, ACCS I, 10.
5) Augustine, 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 I 11:17, ACCS I, 10.
6)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ACCS I, 6.
7)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ACCS I, 6.
8) Jerome, Homilies 10, ACCS I, 6.
9)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ACCS I, 6.
10)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8:3; 9:2, ACCS I, 7.
11) Ambrose, Hexaemeron 4:1, ACCS I, 17.
12) Augustine, 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 I 3:6, ACCS I, 5.
13)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22:1-2, ACCS I, 15.
14) Basil, Hexaemeron 5:1, ACCS I, 15.
15)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6:12.
16) Ambrose, Hexaemeron 3:6, ACCS I, 15.
17) Basil, Hexaemeron 7:1, ACCS I, 20.
18) Basil, Hexaemeron 8:2, ACCS I, 21.
19) Augustine, 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 I 15:24, ACCS I, 21.
20) Origen, Homilies on Genesis 1:8, ACCS I, 21.
21) Basil, Hexaemeron 9:2, ACCS I, 22.
22) Ambrose, Hexaemeron V 3:9, ACCS I, 23.
23) Basil, Hexaemeron 8:1, ACCS I, 25.
24) Basil, Hexaemeron 9:2, ACCS I, 25.
25) Gregory of Nyssa, On the Origin of Man, ACCS I, 28.
26) Chrysostom, Sermons on Genesis 2:1, ACCS I, 28.
27) Gregory of Nyssa, On Creation of Man 8:7, ACCS I, 28.
28) 이와 비슷한 견해로 디아도쿠스(Diadochus of Photice)도 하나님의 모양(likeness)은 자발적 사랑과 헌신에 의해 이를 수 있는 요소로 간주하였다. 참조) Diadochus of Photice, On Spiritual Perfection 4, ACCS I, 30.
29) Origen, On First Principles III 6:1, ACCS I, 30.
30) Fulgentius of Ruspe, To Peter on the Faith 5, ACCS I, 31.
31) Origen, Homilies on Genesis 1:13, ACCS I, 31.
32) Potamius of Lisborn, Letter on the Substance 356-64, ACCS I, 33.
33)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The City of God(신의 도성)에서 창조기사에 나오는‘날’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정의하기 극히 어려운 사안이라고만 언급하고 명확한 입장을 내놓진 않았다. 참조) Augustine, 'The beginning of the world and the beginning of time are the same,' The City of God, Book 11: Chapt. 6; 'Of the nature of the days when there was 'morning and evening' before the creation of the sun,' The City of God, Book 11: Chapt. 7. 어거스틴은 문자적 해석을 따르는 교부들과는 달리 24시간에 기초한 6일 창조론을 따르진 않았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인류역사의 연도에 관해선 비교적 짧은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아담 이후 인류의 역사는 600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참조) Augustine, 'Of the Falseness of the History Which Allots Many Thousand Years to the World’s Past,' The City of God, Book 12: Chapt. 10.
34)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6:14, ACCS I, 16.
35) Basil, Hexaemeron 9:1, ACCS I, 16.
36)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1, ACCS I, 9.
37) Ambrose, Hexaemeron 5:2-3, ACCS I, 21.
38) 어거스틴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저서 On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14.28-29; 6.6.9)에 언급되어 있다. 이는 성경을 주해적으로 접근(exegetical approach)해서 얻은 결론이라기보다 오히려 철학적인 추론(philosophical inference)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다. 어거스틴에게서 창조는 '시간 안에서'(in time) 이루어지는 것(즉, 시간의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될 수 없고 '시간과 함께' (with time) 이루어진 것(즉, 시간이 시작되는 그 찰나적 시점)이어야만 한다는 사상에서 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창조이전의 시간이란 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 창조는 곧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의 시작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9) Gregory of Nyssa, Homilies on Genesis 44, ACCS I, 45.
40)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3:12, ACCS I, 45.
41) Isabella Sandwell, 'How to Teach Genesis 1.1-19: John Chrysostom and Basil of Caesarea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Journal of Early Christian Studies 19 no. 4 (Winter 2011), 539-64.
42) Sandwell, 539.
43) Sandwell, 543.
44) Sandwell, 539.
45) Basil, Hexaemeron 3:7, Sandwell, 555.
46) 이와 비슷한 견해로 훗날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도 넷째 날의 광명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 광명은 그 자체가 빛의 근원이라기 보단 첫째 날 창조된 빛의 수용체(receptacle)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참조) John of Damascus, Orthodox Faith 2:7, ACCS I, 17.
47) Basil, Hexaemeron 6:2, Sandwell, 556.
48)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6:14, Sandwell, 557.
49) Sandwell, 561.
50)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중 하나인 Timaeus에서 우주는 선재하는 물질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그의 사상에 근거한다. 참조) 알리스터 맥그래스 저, 박세혁 역, 『과학신학』 (서울: IVP, 2004), 71.
51) Paul M. Blowers, 'Creation,' in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ed. Everett Ferguson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1990).
52) 아무리 교부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시대적 산물이기도 하기에 이러한 당시의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의 교부 에프렘의 경우는 하늘, 땅, 불, 바람, 물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는 창세기 1:1에서 언급된 최초의 창조, 즉, 무로부터의 창조로 보고, 이후에 나오는 창조들, 즉, 창세기1:3에서 언급된 빛의 창조로 부터는 이미 있었던 이들 요소를 이용해서 창조된 유로부터의 창조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Ephrem, Commentary on Genesis I 1:14; 15:1, ACCS I, 9 참조). 이처럼 교부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의 기본적인 요소들, 즉, 물, 불, 흙, 공기들에 대한 언급은 당시 헬라적 세계관에서 너무도 강력히 나타나는 자연철학적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써 바실과 같은 초대교부들의 성경해석에서도 나타남을 볼 수 있다 (Reno, 548 참조).
53) Blowers, 'Creation.'
54) Augustine, Two Books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aeans, I 9:15, ACCS I, 8.
55) Reno, 39.
56) 이러한 예는 아프라하트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서 Demonstrations 1:19을 참고하기 바람.
57) 이후 1215년의 제4차 라테란 회의 때는 교리로서 공식화 되었고, 1870년 제1차 바티칸 회의 때 재확정 되었다.
58) Basil, Hexaemeron 2:2-3, ACCS I, 2.
59) 예) Augustine, On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4:13, ACCS I, 6.

 

참고문헌

(1) The Ante-Nicene Fathers.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89.
(2)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 Second Series.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89.
(3) Ferguson, Everett, ed. Encyclopedia of Early Christianity. 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1990.
(4) Oden, Thomas, general ed.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Old Testament, I, Genesis 1-11, edited by Andrew Louth in collaboration with Marco Conti.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2001.
(5) Reno, R. R. Genesis. Brazo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Bible. Grand Rapids, Michigan: BrazosPress, 2010.
(6) Sandwell, Isabella. 'How to Teach Genesis 1.1-19: John Chrysostom and Basil of Caesarea on the Creation of the World.' Journal of Early Christian Studies 19 no. 4 (Winter 2011): 539-64.
(7) 알리스터 맥그래스 저, 박세혁 역. 『과학신학』 서울: IVP, 2004.


출처 - 2012 국제학술대회

김영길
2019-06-30

21세기의 선교교육 창조과학, 이것을 선교한다.

김영길


 *진화론이 만연한 이 시대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처럼,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힘껏 외치셨던, 김영길 초대 한국창조과학회 회장이시자 전 한동대 총장님께서 2019년 6월 30일 새벽 3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창조의 진리를 전파하고, 젊은이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셨던, 그리고 언제나 밝은 얼굴로 저희들을 맞아주시던 총장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총장님! 사명 감당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품에서 편안히 안식하십시요! 총장님이 그리울 것입니다!  

                                                             - 2019년 6월 30일 한국창조과학회 회원 일동


1. 서론

얼마 전 러시아로부터 날아온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3년 전 독립국가연합(C.I.S.) 우즈벡 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에 선교사로 파송된 부모를 따라 그곳에 간 한 국민학교 학생의 상담 편지였다. 그 내용을 그대로 조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저는 지금 러시아 학교 6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곳 학교 교과서에는 무신론에 따른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과학회에서 나온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 등을 읽어보고 무신론에 따른 생각을 물리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창조론과 관련된 문제에 관하여 상담을 하는 편지였다.

신학자 반틸(C. Van Til)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계신다는 전제가 기독교 선교의 핵심임을 역설한다. 반틸의 강조가 아니더라도 우주를 지으신 분이 계시며, 그분이 치밀한 계획과 섭리로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 된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과학적 사고에 익숙해지고 과학적인 것들을 신뢰하는 정도가 심해지면서, 믿음 안에서도 과학적 논리로 따져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증가하여 왔다. 성경의 역사적 기록들과 창조의 사실 자체에 대하여 과학으로 검증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 것이다.

사실, 더 명확히 알고 싶어 하는 탐구의 정신은 죄악이 아니다. 성경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시19편)고 하였으며,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며 각각의 이름을 부르시는(사40:26) 치밀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알아보라고 직접 명령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다(롬1:20)고 하였지만, 오늘날 과학은 오히려 하나님을 부정하는 도구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이에 선교의 수단으로서의 창조과학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창조과학>은 창조를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과학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증거하면서 과학의 전제인 우주에 놀라운 질서를 부여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의 오묘한 창조 질서와 계시로서의 성경의 역사적 기록(창세기 대홍수 사건 등)에 대한 확실성을 과학적 방법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창조론을 전파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1차적 문제가 과연 우주와 생명의 진화에 대한 가설이 성경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점이다.


2. 진화론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이론

성경은 신구약 66권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셨다는 조그마한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모든 천지 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주간에 창조하셨으며(창1, 출20:11), 생물은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종류대로 라는 말은 창세기 1장의 여러 곳(11, 12, 21, 22, 24, 25절)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으로 보아, 각별한 메시지임이 분명하다.

현대 생물학은 생물들 간에 유연관계가 있는 것끼리 일정한 분류 체계를 정하여 놓고 진화의 계통도를 만들어 종류를 구별한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말하는 종류(Kind)대로라는 말은 교배가 가능한 범위를 말하는 것 같고, 이 말은 현대 생물학이 말하는 ‘종(種, Species)’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속(屬, Genus)’ 또는 ‘과(科, Family)’에 해당될 것이다.

종(種)은 기본이 되는 단위인데, 대체로 같은 형질을 나타내므로 같은 종 사이에는 교배가 가능하다. 그러나 집고양이와 들고양이의 경우에는 같은 속에 속하지만 다른 종이면서도 교배가 가능하다. 그리고 가끔 다른 속(屬)사이에서도 교배가 가능할 수도 있다. 즉, 어떤 종류의 곡물류는 목초류와 교배시킬 수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종류가 과(科)에 해당되는 것이다.

같은 속에 속하면서 다른 종류인 말과 당나귀는 서로 인위적으로 교배시켜 노새를 생산할 수 있는데 생식력은 없다. 따라서 이 두 종은 <종류>라는 말의 한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이 종(種)의 근본적 변천을 주장하는 진화론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종류대로>라는 개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대 생물학의 분류체계에는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가 없다. 즉 하나님은 일정한 종류의 기본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종류 범위 내에서만 환경에 따라 적용하여 변천할 수 있는 기본 형식을 정하셨지만, 그 한계는 엄격히 유지하고 계시며, 우리 인류가 그 한계를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레19:19, 고전15:38-40).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를 깨달은 유대의 랍비들은 말과 나귀를 다른 종류로 간주하고 교배를 금지하였다. 물론, 레위기 19장 19절의 서로 다른 육축의 종류에 대한 교접을 금지시킨 하나님의 규례는 성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분리된 삶을 요구하는 영적인 교훈도 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유전공학의 방법이 하나님이 설정하신 <종류의 범위>를 인위적으로 벗어나는 일들과 무관하지만은 않으므로, 앞으로 이 문제는 신학자들과 크리스천 과학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성경 창세기 6~9장에 걸쳐 서술된 대홍수 사건은 우리들에게 진화론을 결정적으로 거부하게 만든다. 진화론을 신봉하면서 창세기 대홍수 사건을 성경대로 믿는 것을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 진화론은 과학의 기본법칙에도 위배

진화론은 아무런 과학적 증거를 갖지 못한 ‘이론(Theory)'이면서도 마치 과학적 ’사실(Fact)'인 것처럼 우리들에게 일방적으로 교육되어 왔다. 미국 창조연구소(ICR)의 소장인 헨리 모리스 박사는 진화론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과학적 기본 사실로부터 증거 된다고 하였다.

(1) 모든 지구역사를 통하여 진화(한 종류에서 다른 종류로)의 보기로서 관찰된 결정적 생물이 하나도 없으며, 단지 그대로 멸종해 버린 생물들만이 확인된다.

(2) 진화되어 가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완전히 과도기적인(반쯤 발달한 머리나 눈, 날개, 귀, 반쯤 발달한 생식기관 등) 구조를 갖는 생물이 과거로부터 관찰된 적이 전혀 없고, 현재 또는 진화론자들이 오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지층 등에서 화석으로 발견된 경우가 전혀 없다.

(3) 우주의 질서는 끊임없이 붕괴하고 감소되어 간다고 하는 과학의 기본 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이 있다. 그런데 진화론의 논리는 그와 반대로 우주가 점점 더 복잡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변화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 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진화론과 과학의 기본 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이 정면으로 위배됨을 나타낸다. 열역학 제2법칙은 어느 땐가 과거에 우주는 완벽한 질서를 유지한 적이 있음을 알려 주며, 현재는 계속해서 그 질서가 일정하게 붕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과거 언젠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벽한 질서를 갖춘 아름다운 태초가 있었음을 알려주며, 지금은 인간의 범죄 이후로 끊임없이 우주가 붕괴(롬8:22)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사실, 진화론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우연히 저절로 점차적으로 복잡한 구조로 변화되어 왔다는 것을 믿는 단순한 믿음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진화론은 고대로부터 다양한 생각들과 혼합되어 수많은 진화의 가설들을 만들어 내었다.

진화를 믿는 믿음은 동일해도, 진화에 대한 메커니즘이나 그 경로는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진화론은 일치된 견해가 아닌 더욱 혼잡스럽고 다양한 이론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이 일치하지 않고 제각기 고집과 주장을 꺾지 않는 완고한 모습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진화론은 과학적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10년 또는 20년 뒤에는 또 다른 진화론의 모습으로 완강히 남아있을 것이다.


4. 인류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진화론

진화론은 우리 인류의 양심에 반하여 윤리, 도덕적 기준을 허물어뜨리며 선악의 기준을 제거할 뿐 아니라, 결국은 인류 스스로의 타락과 파멸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오늘날 이와 같은 경향은 이미 사회주의 국가나 자본주의 국가를 막론하고 그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준다.

교조주의적 진화론자였던 도브잔스키는 "진화론의 적자생존은 자기 본위, 쾌락주의, 비겁함, 속임수와 약탈 등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윤리학은 인간의 윤리학이어야 한다. 그것들은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다”라고 하였다.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은 신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독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10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러시아인을 학살하고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던 매우 잔인한 사람으로 갑자기 변한 데에는 진화론에 관한 한 권의 책이 그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서두에 소개된 편지를 보낸 우즈벡 공화국의 타슈켄트나 카자흐 공화국과 같은 중앙아시아에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이유도 스탈린의 우리 동포에 대한 무자비한 강제 이주정책에 기인한다.

스탈린의 어릴 적 주일학교 친구였던 야로슬라브스키라는 사람이 쓴 <스탈린의 생애에 있어서의 라마르크>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아주 어린 시절, 교회학교 학생 시절에 스탈린 동지는 비판적인 생각과 혁명적인 감정이 생겨났다. 그 후 그는 다윈의 진화론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무신론자가 되었다.”

진화론의 해악성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이론의 과학적 토대로 삼았던 것도 진화론이었다. 인간을 고도로 진화된 고등동물로 취급하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다양한 현대적 기초도 진화론에서 왔다. 심지어 미국 에모리 대학의 머디 교수는 '미래의 다른 세대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행하여지는 한 세대의 무분별한 방종도 생물학적 진화 과정의 하나이며, 이성적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하였다.


5. 결론 : 창조론을 통한 21세기 선교교육

한국창조과학회는 앞으로 국내 선교뿐 아니라, 공산권 선교와 일본 선교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들 지역이 어느 곳보다도 철저한 진화론에 근거한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시즘은 인간이 완전한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진화론적 낙관론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사회 진화의 최고 형태는 공산주의이고, 이 공산주의로 가는데 방해가 되는 진화의 장애물들은 ‘적자생존’이나 ‘자연도태’라는 근거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론이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는 달리 그 자체의 이념이 매우 종교적임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공산권 선교가 어려웠던 점은 바로 이와 같이 그 이념 자체가 지니고 있는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공산권 지도자들의 종교에 대한 억압, 그에 따르는 일반 대중들의 잘못된 세뇌가 종교적 편견을 불러 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공산권이나 오랫동안 공산권에 남아있던 러시아 등의 북방 선교에 있어서는 진화론의 모순에 대한 올바른 지적과 과학적 창조론의 전파가 매우 긴요하고도 시급하다.

얼마 전 북경의 한 캠퍼스에서 은밀히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한 선교사가 중국 대학생 선교의 어려움에 관하여 모 선교지에 언급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무신론적, 진화론적 유물사관에 세뇌되어 있는 그들에게 과학적으로 신앙을 변증해 줄 수 있는 중국어로 된 서적이 거의 없어 매우 안타깝다는 말씀이 있었다.

만일 이들에게 진화론적 유물사관의 모순을 지적하고 창조론을 변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한 다음 복음을 전한다면, 그들의 잘못된 편견을 쉽게 깨칠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범신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일본의 선교에 있어서도 ‘과학적 창조론’의 필요성은 이미 여러 부분에서 확인되고 있다. 우리의 북한 동포를 위해서도 이와 같은 준비는 매우 필요할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분명해졌다. 모리스 박사는 진화론적 사고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온통 유해하고 부패한 것뿐이라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7:18)고 하셨다. 하나님의 원칙과 어긋난 진화론이 만연된 곳에서 결코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과연 하나님께서 진화의 방법을 창조 사역에 사용하셨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창조과학 사역을 지난 10년 가까이 감당해오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도마와 같이 의심 많은 사람들을 그래도 사랑하셔서 과학이라는 초등학문의 이름을 통해서라도 선교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도마는 12사도 중 가장 의심이 많았으나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유일한 사도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도마는 가장 먼 곳까지 자청하여 선교를 떠난 사도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심지어는 한반도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일부 주장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아마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다면 더욱 값진 믿음일 것이다. 그러나 도마처럼 과학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크신 은혜요 사랑이 아닌가! 창조과학은 바로 다만 이런 것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번역 -

링크 - ,

출처 - 창조 제148호, 2007년 1-3월호.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3778

참고 : 2501|2197|2864|548|3024|3682|3423|2313|2346|2412|2332|540|2059|2566|653|192|2942|2797|6107|4487|6480|6639|3782|4241|6211|6356|6169|6473|6096|5083|5274|6461|6075|6634|5796|6292|6476|2647|6174|5718|6180|905|6165|6618|6631|6633|6636|6566|6638|6468|6449|6582|6553

김준곤, 김영길, 송만석
2019-06-30

새 천년을 열며 - 회고 및 한국창조과학회의 나아갈 길

김준곤, 김영길, 송만석


      한국창조과학회에서는 새 천 년을 맞아 본 학회의 창립과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신 세 분을 모시고, 그동안 학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회고해 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망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오랫동안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를 역임하시면서 대학생 사역에 헌신해 오셨고, 김영길 총장님은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이자 초대 창조과학회 회장으로서 창조과학 사역을 담당해 오시다가 몇 년 전부터는 한동대학교의 총장으로 교육에 헌신하고 계시며, 송만석 회장님은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로서 현재 창조과학회 회장으로 수고하고 계십니다. 


대담 및 정리 : 김성현 <창조>지 편집장, 김경 사무총장, 조혜진 간사. 

사회 : 대망의 2000년이 밝았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건강하시며 계획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뤄지시길 바랍니다. 올해는 창조과학회가 설립된 지 19년이 되는 해이고 내년이면 2O주년을 맞게 됩니다. 그동안 질적, 양적으로 많은 성장을 하였는데 창조과학회가 설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해 주시지요. 


김준곤 : 지난 80년에 세계복음화대성회를 준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교회 전문 분야별로 대학생, 10대, 교사 등 여러 분과가 있었는데 제가 동아시아 C.C.C. 전체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기쉬 박사와 모리스 박사를 잘 알고 있던 비서 셜리가 창조과학회 발족을 제안해 왔고, 이를 미국 쪽에서도 기쁘게 받아들여 강사를 초청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장로님 중 대학교 생물학 교수로 재직 중인 분들을 만나 발기인이 되어 주실 것을 신청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널리 광고하여 관심 있는 기독교 학자들을 모으고 '창조론 대 진화론'에 대한 토론도 열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한국은 안 된다"라고 하시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창조를 믿으면서도 학교에서는 학문이니까 당연히 진화론을 가르치신다고 하시면서 "모순 아니냐?"는 질문에는 "생각하기도 싫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C.C.C. 출신의 다른 교수님들, 그리고 김영길 박사 등과 접촉이 되면서 일이 진행되었고, 결국 대성회 기간을 거쳐 한국창조과학회가 발족되었습니다. 

김영길 : 저는 당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중이었는데, 하루는 C.C.C. 간사였던 심영기 박사(현 본회 대전지부장)께서 찾아오시더니 "창조냐 진화냐"라는 세미나의 통역자 4명을 구해 달라고 하시면서,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강사로도 서 달라고 부탁하시는 거예요. 저는 전공이 금속재료공학이어서 부적합하다고 거절했는데, 생명공학전공자들은 세미나에 아예 오지도 않을 것이고, 할 사람도 없다고 하시면서, 막무가내로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도 있고 해서 맡았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제일 처음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실 때 세상적으로 준비되어 있고 자격 있는 사람을 쓰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도 무너진 성벽을 쌓는 역사를 일으킨 사람인데, 하나님께 부름 받을 당시에는 바사 왕국의 술 관원이었잖아요? 성벽을 쌓으려면 토목공학이나 건축공학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하나님은 그 일을 술 관원을 부르셔서 하신 겁니다. 결국 3주를 앞두고도 할 사람이 없어 제가 하기로 하고는, 그 때부터 헨리 모리스 박사, 기쉬 박사의 책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니, 그 때까지 막연히만 알고 있던 진화론이 너무나 허구적이고, 보면 볼수록 창조론이 맞더군요. 

8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정동 C.C.C. 회관에서 세미나가 열렸을 때 참 놀랍게도 연인원 4,000명이 참석했었습니다. 강사로는 미국에서 온 헨리 모리스 박사와, 기쉬 박사, 통역자로 김해리 교수, 류한영 박사 등이 나섰습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과학자가 창조론을 선포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어떻게 과학자가 진화론을 부정하는가?" 하며 의견이 분분했지요. 특히 다른 사람들은 통역이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진화론이 틀렸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했으니까요. 며칠 뒤에는 신문에서도 "한국 과학의 본산지 홍릉과학단지에 비과학적인 창조과학자가 나와서 자기 전공은 하지 않고 타전공의 정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고… 사실 그러면서부터 창조과학회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송만석 : 대성회가 끝나고 나서도 창조과학 강연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은 계속적인 지원 의사를 밝혀 오셨고, 그래서 C.C.C. 정동회관에 자리를 빌려 일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김영길 총장님 댁에 모여 기도회를 하며 대성회 기간중에 있었던 강연 내용들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국에 창조과학 자료들이 너무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바로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였습니다. 재정도 과기원의 교수 한 분을 통해 연결된 기독교 실업인의 후원으로 꼭 필요했던 만큼이 채워졌습니다.

정식 발기 대회는 81년 1월 31일에 전경련 회관에서 있었습니다. 장소 사용료는 C.C.C.에서 후원했습니다. 재정이 부족하여 홍보도 못했는데, 주요 일간지 사회면에 학회 창립 소식이 주요 기사로 나와 자연적으로 홍보가 되었습니다. 이후 강의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많은 교회에서 후원해 주셔서 오늘처럼 창조과학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 개인적으로 창조과학 사역을 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김준곤 : 기독교의 인간관, 우주관을 보면 창세기에 있는 대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보게 되죠.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이고요. 삶을 보면 현실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나온 것이 아니지요.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 우리의 지·정·의, 몸의 구조, 다른 많은 조건들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우리는 피조된 것이지요. 또한 생존에 필요한 공기, 햇빛, 대지, 물 등도 다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이 나와 과학의 이름으로 창조를 부인하며 생물이 우연히 저절로 태어났다고 주장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생물학의 분야를 넘어 하나의 철학이 되고 또 종교화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연이냐 신이냐, 창조냐 진화냐 하는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지요. 다신론이나 범신론 등 많은 논(論)'들이 있지만, 우주관이나 인간관에서는 창조론, 진화론, 이 둘 중의 하나밖에 없습니다. 물론 진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이지요. 또한 과학 법칙, 자연 법칙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만드셔서 주신 것입니다. 진화론자들도 생명, 자연의 신비에 대해 감탄하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눈을 만든 자가 보지 않겠느냐, 귀를 만든 자가 듣지 않겠느냐" 라고 분명히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편견을 버리고 이 자연을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 판단하면 창조론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영길 : 저는 개인적으로 1975년에 미국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78년 12월에 한국과학기술원에 교수로 오게 되었는데, 창조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히 믿고만 있었습니다. 특별히 창조가 과학적으로 더 맞고 진화는 이러이러해서 틀렸고 이런 것은 모르고 있었고요. 그러니 사실상 그 때 심영기 박사께서 찾아오신 것이 창조과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거예요. 만약 저도 생명과학을 전공했었다면 어느 정도 자제를 했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이웅상 교수님(본회 부회장) 등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그 때만 해도 생명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진화론을 부정하게 되면 아예 학계에서 인정을 못 받는 때였으니까요. 비전공자로서 막연한 믿음만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심 박사를 보내주신 것이 제가 창조과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송만석 : 저는 그 때(세계복음화대성회) 다른 분과에서 통역을 맡았었는데, 창조과학세미나에 참석해서 강연을 들었지요. 그 전까지는 특별히 창조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강연을 들으면서 이 진화론이 도대체 근거가 없고, 밝혀진 사실로 봐도 창조론이 더 타당성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사역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사회 : 지금까지 창조과학 사역을 해 오시면서 힘들었던 일, 기억에 남는 일, 감사한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지요. 

김영길 : 힘들었다기보다는 낙심될 때가 있었습니다. 이양림 교수를 통해 창조론을 언급하는 과학 교과서를 펴내려 했던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1차, 2차에 다 합격했기 때문에 3차도 될 줄 알았었는데, 그만 거절당했지요. 그 때 거절 통지가 오고 나서 두 달 내에 제소를 했어야 했는데, 그만 그 기간을 넘겼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 있으면서 연결이 잘 안 되기도 했고, 또 사람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믿음으로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참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는 박동원 교수의 소천이었습니다. 생명과학을 하시는 분은 많아도 지구과학을 하시는 분은 별로 없었는데, 박 교수님은 그 중 한 분이셨지요. 또 최근에는 이영훈 교수님도 그렇게 되셨지요,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그 보내 주신 사람이 아직 그의 학문적 재능과 잠재력을 충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 발휘하지 못했는데 데려가셨다는 것이, 물론 하나님께는 더 큰 뜻이 있으시겠지만, 저로서는 정말 아쉽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창조과학 세미나에 관한 것입니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창조에 대한 말씀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것보다는 "선포(proclaim)"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외치는 자의 소리" 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81년에 시작한 이후 이제까지 수천 회에 이르는 창조과학 강연이 있었고, 또 우리 회원들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들어온 강연 요청을 거절하는 일이 거의 없이 다 나가서 자원 봉사를 하는데, 멀리서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에는 당시 자동차와 기사가 있었던 제가 많이 갔었지요. 그 중에 한 번, 파주에 갔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가 보니까 우리 집도 안동에서 산골인데 그건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큰 길로 가다가 옆길로 또 가다가… 거기가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이 태어난 곳이라는데 정말 산골 중에 산골이었습니다. 갔더니 그 전도사님이 정말이지 이렇게 시골까지 오실 줄은 몰랐다고 그러시더군요. 교회는 조그마한 초가집 비슷해요. 들어가 보니까 할머니 대여섯 분이 앉아 계시고 초등학생 너댓 명이 앉아 있어요. 거기에 뭐 창조과학 강연이 맞지도 않더라고요. 슬라이드도 다 가져갔었는데, 다 관두고 간증을 좀 하고 나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따라 나오셔서는 속바지에서 돈 이천 원을 꺼내 주시더라고요. 제가 그것을 받을 수가 없어 극구 사양했는데도 절대 안 된다고 그러시는지라 결국은 받았지요. 

그 때만 해도 저희 집에서 임원회를 하면서 임원들이 강연을 하고 오면 보고서를 썼었습니다. 어디서 했고 몇 명이 참석했고 질문이 뭐고…. 거기서 제가 제안을 하기를, "우리는 다 외치는 자의 소리인데 많이 모인다고 마이크를 더 크게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3명 모이나 3천 명 모이나 하나님께는 다 똑같은 것이니, 이제는 어디 갔다 오면 몇 명 참석했냐는 것은 묻지 말자"고 했죠.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고, 사람이 적으면 안 쓰시는 것이고 그것은 아니니까요. 그게 제가 창조과학을 하면서 참 기억에 남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감사할 일 중의 하나는 바로 지금 이 자리이지요. 처음에 심영숙 간사가 C.C.C. 건물에서 일하다가 일이 커지고 하면서 그 장소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서 사무실을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때 계몽사의 김춘식 부회장이, 소망교회 안수집사님이시고, 제 먼 친척뻘쯤 됐는데, 우리가 앞으로 교과서를 발행할 때도 그렇고 출판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만나서는 창조과학회의 사무실 자리를 요청했더니, 서초동에 있는 영빌딩의 방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빌딩이 팔리게 됐을 때, 놀랍게도 그 분이 그 대금 중에서 십일조를 저희한테 헌금하시면서 그것으로 사무실을 구해 보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적당한 가격, 적당히 여유 있는 공간에, 교통 편리해서 사람들 오기 쉬운 곳으로 기도하며 여러 군데를 알아보다가 지금 이 건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김춘식 부회장님께 감사 드립니다. 제가 늘 바빠서 인사드리러 제대로 다니지를 못하는데요. 언젠가도 한 번 갔었지만, 차후에도 또 한 번 찾아 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계몽사에서는 이것뿐만이 아니라 나중에 창조론, 진화론에 대한 책들이나 과학 교과서를 쓸 때에도 집필료니 착수금이니 해서 모든 재정을 부담해 주셨습니다. 저희 창조과학회에서는 돈 한 푼 안 쓰고요. 또 영빌딩에 있을 때부터 그 관리비에 간사 월급, 경상비 등으로 지출되는 금액의 상당 부분을 온누리 교회와 횃불 재단에서 지속적으로 헌금해 주셔서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감사한 일이고요, 또 그 당시에는 고(故) 유상근 박사님이 명지대 총장님으로 계셨는데요. 이 분이 창조과학회 초창기 때부터 관심이 많으셔서, "대학에서 가르치고 싶은데 왜 창조과학회에서 그런 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책을 안 쓰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유 총장님이 재촉하셔서 나온 책이 「자연과학」입니다. 그리고 그 책이 나오자마자 명지대에서 교과서로 다 썼지요. 결국 창조과학회의 많은 결과들이 우리가 스스로 했다기보다는 주변의 강한 권유들로 진행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창조는 과학적 사실인가?」라는 책도 고려대학교의 김준 박사님께서, 왜 이것은 책으로 안 내느냐고 하시면서, 미국 유학 가기 전에 번역을 다 해놓겠다고 하시더니, 진짜로 그 분이 그 일을 다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책으로 나왔지요. 

송만석 : 이 시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사무총장님이 새로 오시고 간사들과 연구원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동안 기도만 해 오던 일들을 실제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는데, 과학관 같은 경우도 컴퓨터로 구현하는 일들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진행이 되어 가고 있지요. 또 교회 회원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교회들이 더 구체적으로 창조과학 사역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이해하고 참여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지난 99년에는 학교 현장에서 가르치시는 선생님들의 연합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분들이 현재 생물 교과서에 있는 진화론적 기술을 바로잡고 창조론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새 교과서를 펴내기 위한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올해에는 더 많은 교육과 활동들이 일어나서 학교 현장이라는 영적 전쟁의 최일선에서 싸우시는 분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기를 바라며, 초중고의 모든 믿는 선생님들과 대학 교수님들께서 전부 동참하시는 가운데, 그동안 기도로 많이 준비해 온 교과서 개정 작업을 꼭 구체적으로 추진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회원의 날 행사를 개최했지요. 많은 회원들이 모두 각지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1년에 한 차례라도 모임의 장을 마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두 차례 실시했었는데, 참여자도 늘어나고 있고 반응도 좋아서 기뻤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주 찬양 축제가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고, 또 찬양받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영적, 신앙적으로 성장해서 찬양에 임하게 되면 진화론의 허구적 세력은 하나님 앞에서 힘을 잃고 문제도 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찬양은 우리 스스로에게서 우러나와서 해야 하기도 하고 깨우쳐서 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되고, 이제 2년이 되었는데, 앞으로도 더 잘되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사회 : 창조과학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과학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에서 말씀해 주시지요. 

김영길 : 창조과학의 중요성은 20세기 물질주의와 과학주의 시대를 맞으면서 더 중요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 발달하면 성경이 더 신화화되어 가고 믿음도 불분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성경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창세기 1장 1절 말씀은 그 기초가 됩니다. 기초가 부실하면 아무리 높은 건축물이라 해도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단이 기독교 신앙을 희석하고 방해하기 위해서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을 부정한 것이 아니고 진화론이라는 학설을 도입해서 기독교의 기초를 흔들어 놓은 것이지요. 이것을 누가 바로잡아야 하는가. 물론 목사님을 비롯해서 신학을 하신 분들이 모두 다함께 기도하시면서 해야 하겠지만,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과학을 통해서도 해야 하는 거예요. 사실 "진화론은 과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사실이 아니다." 라는 것은 과학 전공자가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결국 창조과학의 중요성은 과학 기술 시대에 신앙의 보루를 지키고 진화론의 공격을 차단하여 기독교 신앙을 보다 확실히 할 수 있는 대전제, 기초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준곤 : 그렇습니다. 창조과학은 신학적으로 제1장 1조나 같아요. "어리석은 자는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자" 라고 했고 잠언에도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이 인간의 절대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지요. 하나님을 중심에서 제해 버리면 죄와 사망, 고통, 혼란,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 조건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출발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성경에는 2000번 이상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창조하시고 말씀도 하시고 심판도 하시는 주권자이시지요. 하나님이 없으면 인류에게 기원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송만석 : 과학적으로도 창조과학과 진화론 중 어느 것이 더 합리적이고 타당한가 살펴보면, 가령 유전공학에서 밝혀낸 DNA를 보십시오. 컴퓨터를 보면 거기에는 모든 정보가 1과 0으로 암호화되어 저장이 되어 있는데, 유전정보들이 그 작은 세포에, 또 그보다도 더 작은 핵 속에 다 들어 있다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 풀어서 쓰면 80만에서 200만 페이지에 이르는 암호 코드들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페이지밖에 안 되는 정보들로도 몇 년에 걸쳐 똑같은 것을 계속 만들어 내기가 어려운데, 수천 년이 지나도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팔을 심으면 팔이 나고… 또 사람도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데, 다른 이상한 것이 나올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요. 그 짜여 있는 지식의 오묘함은 보면 볼수록 두렵고 경이롭고, 단순히 만드신 분이 계시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위대하시면 이렇게 하실 수가 있을까 싶어서 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게 되지요.

또 이렇게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우주의 공간의 크기며, 별의 운행 등에 대해 생각해 보고 구체적으로 계산된 것을 접하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하시는 스케일이 얼마나 크신지 보게 되고, 그 수많은 별들을 하나하나 헤아리신다는 것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동자같이 지키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지요. 성경을 읽을 때 그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읽게 되면서 받는 감동도 더 크게 밀려오고, 전능하신 분이 주시는 것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깨닫고 이해하게 될까 늘 생각하게 됩니다. 가끔 하나님을 제약한다든지 자기 자신을 제한하고 미래를 설계해 나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생명력 있게 전달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이런 면에서 창조과학이 귀하게 쓰일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사회 : 최근 캔자스 주의 공립학교에서의 진화론 교수 금지 결정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진화론 교수금지 결정뿐만 아니라 창조론을 가르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교육, 특히 공교육에서 창조론 교육이 어떤 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송만석 : 저는 가르치는 자라면 마땅히 학생들에게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화론이란 과학적으로 입증된 적도 없고, 사실일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실인 것처럼 가르치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오늘날 과학을 통해 밝혀진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바른 일이고 중요한 일이지요. 또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멸망에 이르는 길을 터놓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에, 이런 일은 적극적으로 지양하고 창조의 진리를 전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의 진리가 바로 되어 있으면 세상의 모든 학문이나 사람 삶의 기본 방향, 모든 철학들이 바로 잡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제일 중요하게 가르쳐져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창조과학이고 창조 진리라고 봅니다. 

김준곤 : 우주, 생명의 기원을 물질에서 찾는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절대자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절대 표준을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인간의 주권자, 인간을 다스리는 주인, 도덕적 심판자가 없으면 어디에서 윤리의 권위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존엄성도 그렇고요, 휴머니즘만 가지고는 히틀러가 나오든지 스탈린이 나오든지 김일성이 나오든지 그들을 정죄할 기준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자기가 만들겠다고까지 하지요, 신이 없으면 인간이 살 수가 없으니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창조자가 있고 역사의 심판자가 있다고 할 때 비로소 행동에 대한 영원한 책임도 지게 됩니다. 그래서 도덕적 권위자가 없으면 인간에 대한 교육도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권위, 절대 표준, "~하지 말아라" 하는 당위성 등은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왜 그래야 하는가의 문제에 봉착하는 데 단지 유익해 보이면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타산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하니까 안되지요. 윤리는 절대 명령입니다. 죽이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등은 하나님의 십계명으로부터 나온 지상 명령인 것입니다. 문화적 차이에 의해 모계 사회라든지 일부 다처제 등의 상대적인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아무나 겁탈한다든지 남의 아내를 빼앗는다든지, 살인, 거짓말 등은 어떤 문화권에서도 용납이 안 되지요. 이런 면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는 창조과학적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영길 : 그래서 저희 한동대학교에도 신입생이 입학하게 되면 '창조와 진화' 혹은 '기독교 세계관' 중 하나를 필수로 듣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성경 과목들에서 많이 다루고, '창조와 진화'라는 과목에서는 주로 과학적 입장에서 본 창조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많은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많은 학생들이 진화론을 막연히 알고 있다가 한동대에 와서 이 과목을 통해 많은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애초에는 불신자였던 학생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경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회 : 그렇다면 이 창조 신앙이 기독교인들의 삶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영길 : 창조론에는 일반적으로 과학적 창조론과 성서적 창조론이 있습니다. 과학적 창조론은 "진화론은 잘못됐다. 창조가 맞다. 창조자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창조자가 있다는 것은 절반은 되지만, 정말로 우리 신앙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그 창조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적 창조론입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도 나와 있는데요. 우리의 창조주이고 구세주이시며 다시 오실 예수님, 그 분께 우리 창조과학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하나의 과학적 논쟁이나 지식 차원에 머무른다면 흥미를 유발시키고 진화론이 잘못됐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초점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넘어 신앙의 본질이 되시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렇게 할 때 성령님이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고, 비로소 창조과학도 올바른 신앙 생활과 영적 성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론이 바로 서야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진리도 바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지 못하지요. 다른 일반 종교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는 것도 바로 이 성서적 창조론에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김준곤 : 이 창조 신앙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 나오는 바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릴 때 결국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의 양식을 살펴봐도 이 세계는 기독교 윤리를 받아들인 나라들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습니다. 이 기독교 윤리관을 기준으로 해서 인권 문제니 자유니 노동 문제니 하는 것들, 또 모든 문화나 법률이 나오게 되었지요. 결국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보편 타당한, 인류 전체가 공감하는 윤리가 바로 기독교 윤리입니다. 

송만석 : 저 개인적으로는 창조과학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알아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창조과학이 신앙 생활에 큰 유익을 끼쳤습니다. 무심코 밟고 다니는 땅이며, 돌이며, 나무 잎사귀, 기어다니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사실 우리는 그 말씀을 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무인지는 알아볼 수 있어도 탄소동화작용을 비롯해서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참으로 다 알지도 못하고 눈으로 보지도 못하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그 배경에 있는 생명력과 표현되어 있지 않는 것들을 모두 다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표현된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지식이 더해지게 되면 제한적이나마 알아 가는 깊이에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실제 생활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접하게 되면 늘 묵상하게 되고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하는 훈련도 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게 된다는 큰 축복이 있습니다. 


사회 : 이제 새 천 년이 막 시작된 시점에서 창조과학회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나 전략은 무엇입니까? 또 창조과학회에 바라고 계시는 내용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지요. 

송만석 : 2000년도에 특별히 추진하려고 하는 첫 번째는 과학 교과서를 개정하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진화론이 도무지 맞지 않는 이론이라는 것을 지적해서 진화론은 과학적 진리가 아닌 것을 사람들이 알도록 할 생각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생명이나 우주의 기원이 어떤 설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까지는 교과서에 실을 수 없을지라도, 디자인된 세계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정부에 대해서는 건의안을 제출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교사들을 통해 현장에서도 교육하고 학생들도 지도해서 학교에서 배우는 진화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TV나 라디오를 통해 계속 국민여론도 환기시키면서요. 이 교과서 개편 문제가 올해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두 번째로는 교육 부문에 많은 투자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교육원을 통해 창조과학 교육만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교재 개발 등을 통해 전 성도에게 창조를 바탕으로 한 바른 신앙교육을 제공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가 잘못되어서라기보다는 조금 더 개선되고 이해의 폭도 넓어져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과학관 건립 추진에 매진해야 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들을 배우고 즐겁게 공부하면서 창조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과학관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는 후대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높이고 바른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인데, 1차로 소프트웨어로 구현해내는 일을 할 계획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가 올해의 대표적인 추진 목표사업입니다. 

김준곤 : 저는 창조과학이 선교에도 귀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선교를 한다고 하면 남의 문화권에 가게 되잖아요? 그런데 어느 문화권이든 대학이나 지성인들은 진리에 열려 있게 마련입니다. 과학이라는 '학문'과 '진리'는 다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러니 창조과학회의 회원이 천 명도 넘는데, 그 분들이 세계 각국의 대학에 가서 영어 등으로 자기 분야의 학문에서 봉사를 하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대학을 손에 넣으면 그 나라의 미래의 지도자들을 다 전도하는 것이 되니까요. 저희도 지금 중국에 학생들을 보내고 있는데, 이런 사역에서 창조과학회와 협력할 의사도 있습니다. 

김영길 : 저는 한국창조과학회가 더 전문화되어 명실상부한 한국 창조과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기독교 대학에서 인재 양성을 맡고, 이런 대학들과 한국창조과학회가 연계해서 본격적인 연구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과학회는 학회이기 때문에 기초 연구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으므로, 현재 창조과학연구소가 설립된 명지대나 한동대와 연계하여 생명과학 등의 연구를 하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과학 활동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 논쟁도 아니고 근본적으로 엄밀히 말한다면 연구도 아닙니다. 창조과학회의 사명은 '창조'라는 사실을 'Proclaim',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이것을 받쳐 주는 역할일 뿐이지요. 학문적인 것만 한다면 그저 또 하나의 학회만 되어 버리는 거에요. 본질적으로는 어떤 학문적인 것보다도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 증거에 필요한 사역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기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21세기를 맞아 창조과학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비전은 역시 비기독권에 대한 선교 사명입니다. 회교권이나 공산권, 일본 등에 창조과학을 가지고 가는 것이지요. 거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반 선교사들이 가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 선교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전문인 선교입니다. 이렇게 할 때 창조과학이 21세기 선교 시대의 중요한 한 분야를 열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제는 실제 창조과학관도 만들고 사이버 전시관도 만들고 해서, 지금까지가 자리를 잡는 기간이었다면 앞으로는 한 단계 도약해서 한국만이 아닌 전세계를 무대로 하는 그런 꿈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사회 : 모두 하나님이 주신 비전들이니 함께 기도하고 열심히 하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송만석 회장님께서 창조지 독자들, 창조과학회 회원님들께 한 말씀해 주시지요. 

송만석 : 창조과학회의 회원으로 참여해 후원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지면으로나마 정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뒤에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어디서 무슨 말을 하든지 힘이 생기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마음도 기쁘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아뢰고 구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물질적인 후원은 그 일을 더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일이 되고요. 회원님들께서도 자부심을 가지시고, 21세기 창조과학 사역을 통해 큰 복음화 운동을 일으키는 이 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충만해져 가는 사회를 만들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이 일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주변에 많이 알려져서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시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 :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귀한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창조지,  118호 [2000. 1~2]

구분 - 2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2

참고 :

관리자
2019-04-30

세상을 향한 新프로테스탄트 운동

이경호
인하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부회장


     4월은 과학의 달이다. 지난 30년을 과학기술의 메카인 대덕연구단지와 대학에 몸 담아 오면서 과학기술인으로 보람을 느끼며 인생을 열심히 달려온 것 같다. 얼마 전 우연히 초등학교 통지표를 발견하였다. 거기에 쓰여진 나의 장래희망이 ‘공학박사’였다. 왜 그때 장래희망을 공학박사라고 썼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지금 공학박사로, 대학교 교수로, 또한 순수한 과학기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학기술은 하나님을 부인하는가? 창조를 부인하는가? 과학기술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주신 최고의 선물인 것 같다. 나는 내가 가진 과학기술로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나는 '프로테스탄트(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 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중세 종교개혁을 통해 이 세상의 많은 패러다임을 바꾼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천동설이 지배해 오던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해 우주에 대한 관점을 바꾼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등은 불변의 진리로 알고 있던 과거의 패러다임을 뒤바꾼 과학자들이다. 이렇듯 패러다임의 변화는 세상을 바꾼다. 진정한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이 시대의 진화론적 패러다임, 타협이론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될 것이다. 그러면 21세기 젊은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주역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다음세대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다음세대를 키워야 한다. 이것이 新프로테스탄트 운동이다.

세상에는 운동에너지(E=1/2mv2)와 위치에너지(E=mgh)가 있다. 운동에너지는 움직이는 속도(v)의 제곱에 비례한다. 젊은이들은 화려한 움직임이 있고 활동적인 운동에너지를 좋아한다. 그러나 위치에너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너무나 정적이다. 물체의 높이(h)에 따라 위치에너지가 결정된다. 그래서 위치에너지는 영어로 포텐셜(Potential, 잠재적인) 에너지라고 말한다. 물체가 어느 위치에 올라가느냐에 따라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위치 에너지를 좋아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정확한 위치에 서 있기를 바란다. 정확한 위치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新프로테스탄트 운동은 화려한 운동에너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되고,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충격(Holy Impact)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성경의 열 처녀 비유를 생각해 본다. 열 처녀 모두 등불을 준비했지만,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했다. 등불과 기름에 대해 묵상한 적이 있다. 등불은 조금씩은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환경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기름은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것들에 대한 기대가 新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핵심 가치이다.

나는 가슴이 뛴다. 내가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는 과학기술의 최일선에 서 있다는 것 때문이다.또한 17년차 교수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무한 가능성을 가진 젊은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과학의 달을 맞아 우리 젊은이들의 新프로테스탄트 운동을 기대해 본다. 젊은이들이 변화시킬 세상과 더 든든히 세워져 갈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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