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ile background

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창조신앙

이은일
2017-05-03

4차 산업혁명을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 

결국 사람, 가정, 공동체의 문제… 교회만이 문제 해결 주체


 1985년 개봉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백투더 퓨처 2’는 주인공 마티가 미래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는 2015년이다. 30여 년 전 사람들이 바라본 30년 후의 모습은 어땠을까. 스마트 안경, 디지털 카메라, 3D 입체영상, 자동화 메뉴판, 지문인식기계, 태블릿 PC, 화상회의와 영상통화, 드론 등 실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상상이 현실이 됐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다. 또 어떤 상상이 현실이 될지 기대되면서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궁금하다. 미래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미래사회를 어떻게 준비해야할 것인가? (편집자 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큰 기쁨과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다가오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우리나라의 미래를 예측한 <매킨지 보고서>에 의하면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화되면서 가사노동이 25% 줄어들게 되고, 자율주행차의 대중화로 2030년에는 교통사고율이 40% 감소하며, 인공지능 의료서비스의 향상으로 73세였던 건강수명이 2030년이 되면 77세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가사노동이 감소되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증가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생활이 편리하고 풍요해졌는데, 왜 삶은 더 팍팍해지고 삭막해졌을까? 이것은 과학기술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과학기술 발전이 인류의 삶에 미친 거대한 영향의 결과라는 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과학기술은 불과 몇 십 년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것이었다. 현대인들은 압도적인 과학기술 앞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버렸고, 지나치게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룬 현대문화는 더 빨리, 더 편한 세상을 추구하였고, 무엇보다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보다 무엇이 나를 더 기쁘게 해줄 수 있는지를 찾는 사람들로 가득 찬 감각적이고 쾌락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생활은 편리해질 수 있지만, 사람들은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길 걱정을 하고 있다. 이미 대규모 공장에서는 로봇을 이용한 자동화가 진행되어 공장의 규모가 커져도 고용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 공장을 넘어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하는 많은 일들을 로봇이 대신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올해 1월 매킨지글로벌 연구소에서 인공지능과 로봇이 얼마나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지를 조사했다. 820여 가지 직업이 수행하는 업무를 총 2,069가지로 세분화했다. 그 결과 710가지(34%)의 업무를 향후 50년 내에 로봇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요리사 73%, 기자나 법조인 22%, 의사와 간호사의 일 29%를 로봇이 대신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로봇을 발전시키고 있는 과학기술이 잘못된 것인가? 힘든 일들은 로봇이 하고, 사람들은 좀 더 창의적인 일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4차 산업혁명이 인간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도약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지금까지의 사회체계, 교육내용 등 모든 것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하는 도전과 두려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거부하고 물질이 모든 것의 시작이고, 전부라고 믿는 진화론자들은 인공지능보다 못한 인간이 살아남는 길은 인공지능을 뇌에 이식해 인공지능과 결합한 인간으로 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두려움을 과학기술로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진화론자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는가?


1~4차 산업혁명의 득과 실

과학기술이 인류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은 1차 산업혁명부터다. 증기기관차로 상징되는 1차 산업혁명은 공장에 많은 근로자들이 모이게 됨에 따라 급격한 도시 팽창을 가져왔다. 농경 중심의 사회가 도시중심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도시로 모여든 농촌 청년들에게 농촌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은 쓸모없어지면서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했다.

2차 산업혁명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시대를 열었다. 개개인의 기호보다 대중의 유행이 중요해졌고, 각자의 개성을 대량소비에 맞추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 각각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소비자로서의 인간만이 대우받는 사회가 되었다. 사람이 인격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산업혁명은 자본주의의 탄생과 뗄 수 없다. 거대한 자본 없이는 과학기술을 공장으로 구체화시켜 산업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자신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했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모두가 달음질치는 사회가 되었다.

디지털 혁명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의 발전으로 자동화,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해 정보의 홍수가 이뤄지는 시대를 열었다. 좋은 정보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악하고 음란하며 거짓된 인간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정보들을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정보만을 선택하면서 나와 기계, 지식과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보다 우선되는 왜곡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1, 2, 3차 산업혁명을 통해 우리가 빼앗긴 것은 가정과 공동체의 권위와 구조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양육 받고 지식과 기술을 전수받던 시대에서,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 줄 전문교육기관에 자녀들을 맡겨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어머니들이 직업을 갖는 것이 보편화됨에 따라 양육마저 외부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시대이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공동으로 일을 하고, 공동으로 수확해서 기쁨을 나누던 시대에는 공동체의 권위가 매우 컸다. 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손해 보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공동체는 없다. 모두가 나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울 뿐이다.

4차 산업혁명은 가정과 공동체가 파괴된 현실에서 세워지고 있기 때문에, 그 파괴력은 더 엄청날 수 있다. 정보화혁명 시대의 승자들인 일부 회사들(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독점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은 엄청난 풍요와 엄청난 박탈을 동시에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로봇에게 소득세를 내게 하고 최소임금을 주어 모든 사람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하려는 정책은 필요하지만, 궁극적인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신만의 일을 할 때 진정한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돈을 버는 노동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노동으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을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찾아야 한다. 노동의 의미, 지식의 가치, 자본의 역할 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길을 개척하여 진정 새 길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갈 때는 함께 갈 사람들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수년 내에 쓸모없는 지식이 되는 시대에는 평생 같이 공부하면서 서로에게 교사가 될 수 있는 동료들이 필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고, 가정과 공동체의 울타리에서 자녀들을 새로운 개척자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나타날 수많은 문제들이 결국 사람과 가정과 공동체의 문제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교회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리스도인들만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이 땅을 다스릴 것을 믿기 때문이다. 교회만이 과학기술이나 자본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직 교회만이 사람이 치열한 경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과 행복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출처 - 2017. 4. 30.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598

참고 :

한윤봉
2017-01-02

성경적 창조신앙 회복을 위해 함께 가십시다.


       36년 전에 이 땅에 한국창조과학회를 세우셔서 창조신앙을 지키고 전파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역사하신 하나님,  2017년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부족한 제가 제7대 신임회장으로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창조과학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중심에 신앙적으로 학문적으로 탁월하신 역대 회장님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특히 지난 4년 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35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다양한 사역으로 창조과학회의 지경을 넓히신 이은일 전임 회장님과 눈물로 기도하며 섬기신 김경 본부장을 비롯한 창조과학회 동역자들과 후원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성경적 창조신앙이 심각한 도전과 공격을 받고 있는 엄중한 때에 차기 회장을 맡게 되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저는 앞으로 2년 동안 새로 선임된 회장단, 위원장, 위원들과 함께 전임 회장님이 이뤄놓으신 사역들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창조신앙의 회복을 통해서 ”교회와 다음 세대를 건강하게 세우는 한국창조과학회”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사람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창조과학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역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회장으로 섬기는 동안 창조과학회의 Keyword는 ”교회와 다음 세대”입니다. ‘교회들이 필요로 하고 협력하는 창조과학회, 젊은이들이 찾고 가입하는 창조과학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다음 세대들의 성경적 창조신앙 회복을 위해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주일학교용(2017년) 및 중고등학생용(2018년) 창조신앙교재를 만드는 것과 젊은이들의 창조신앙을 회복하고 헌신된 창조과학자를 찾기 위해 ‘창조과학 토크 콘서트’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인본주의와 진화론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 창조과학자로서 살아가는 길은 참으로 힘들고 외로운 길입니다. 성경적 창조신앙 회복을 통해서 교회와 다음세대들을 강건하게 세우기 위해 우리 모두 함께 가십시다. 결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서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신,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요.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514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16-12-22

유신진화론의 위험성 1 

: 하나님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Perils of Theistic Evolution)

Philip Bell


      수년 동안 나는 성경의 권위와 진리에 대해서 말해야하는 책임감과 의무감을 절실하게 느껴왔다. 어디에도 유신진화론자(theistic evolutionists, TEs)과의 논쟁보다 더 격렬한 의견 대립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생물들이 존재하게 하셨다고 주장한다.[2] 그래서 진화론과 하나님을 같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신진화론자인 데니스 알렉산더(Denis Alxander)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창조론자’들은 ”복음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피해를 주며”, ”불화를 일으키고”, ”진화론을 거부하자는 캠페인은 성도들의 주의를 딴 데로 쏠리게 한다”는 것이다.[3]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창조론자들이 지속적으로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해왔던 캠페인은 힘을 얻어 왔으며, 분명 무시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한다.


타협의 위험성

대학에 있을 때 잠시 몇 년 동안, 나 자신도 성경 창세기를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유신진화론에 동조했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나의 신앙에 위기를 초래했다고 증언할 수 있다. 나는 진화론이 틀렸던 지, 아니면 창조/타락/홍수/바벨탑에 대한 창세기 기록이 틀렸던 지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직면했었다. 만약 창세기를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면, 기독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믿음은 영적인 난파선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원에 대한 나의 싸움(고뇌)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세속적 철학(진화론)을 수용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을 더욱더 확신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시켜준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분명한 의미와 모순되게 말하는, 자칭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크리스천들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다. 복음주의적 교회가 진화론과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 되는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몇 가지만을 다루고자 한다.


1. 유신진화론은 성경을 세속적 이론에 굴복하도록 한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은 의심되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심지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읽는 것과 불일치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예로서, 유신진화론자인 데니스 알렉산더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타락을 이해할 수 있을까?” 라고 적고 있었다.[4]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이론이 성경의 진리보다 앞서는 것이다! 일부 유신진화론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내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그들은 성경보다 그들의 이론을 우위에 두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하며 불변한다.(시 119:89, 잠 30:5,6). 진리는 결코 타협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는 진화론적 해석에 굴복되지 말아야한다. 유신진화론은 사상적으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5] 그리고 유신진화론을 허용할 때마다, 피할 수 없는 결과는 (그 결과가 좀 늦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see here).


2. 유신진화론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읽는 것을 부정하게 만든다.

유신진화론은 "성경의 명료성(the perspicuity of Scripture)"으로 알려진 것을 부인하게 만든다.[6] 유신진화론은 우리의 성경을 읽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창세기 1~11장의 기록을 역사적인 설명이 아니라, 신화, 우화, 시, 비유로 격하시킨다. 그리고 다윈 시기 이전의 크리스천들과 위대한 신앙인들 모두가 창세기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었다는 참으로 뻔뻔하고 대담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 세기에 걸쳐 성경적 창조론을 옹호했던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지고 불화를 일으키는 자들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명료성과 성경의 분명한 뜻은 진화론과 어긋날 때마다 하찮은 것이 되어버린다. 예로서, 유신진화론자인 샘 베리(R. J. Sam Berry)는 그의 책 ‘하나님과 생물학자’에서[7], ”만약 하나님이 정말로 전지전능하다면, 분명히 그 분은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부터 하와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그렇게 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남자는 여성과 같은 수의 갈비뼈를 가지고 있다”라고 원본에 강조하면서 적고 있었다.

기초적인 번식 생물학적 지식에 반하여, 잃어버린 갈비뼈가 어떻게든 아담의 후손에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터무니없는 조롱을 하고 있는 것이다.[8] 갈비뼈는 아담 한 명에서만 부족하면 된다. 더군다나 갈비뼈는 재생될 수 있다!(see here). 샘 베리의 주장은 창세기 2:22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라는 기록을 무시하고, 그의 뻔뻔한 주장을 의도적으로 숨기기 위한 연막전술인 것이다. 만약 그 구절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일이고,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어떠한 구절도 그 의미를 확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3. 성경적 창조주 대 ‘진화를 사용하는 신’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마 5:48), 거룩하시고(사 6:3), 전지 전능하시고(렘 32:17), 생명이시고(요 1:4), 빛이시고(요일 1:5), 사랑이시다(요일 4:16). 그리고 그 분의 속성들은 ”분명하게 보여 알 수 있다”(롬 1:20).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 지식, 사랑이 유신진화론적 방식에서 분명하게 들어날까? 진화를 사용하는 신은 (제한된 지식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물들을 신속하게 창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제한된 능력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수억 수천만 년에 걸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과정으로 생물들을 창조하셨다면, 그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죽음들과 고통들은 어찌된 것인가? 그 잔인하고 처절한 과정들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창 1:31). 간단히 말해서, 유신진화론은 예수 그리스도(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의 영광을 훼손하고, 찬탈하는 행위인 것이다.


4. 유신진화론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증언을 무시하는 것이다.

만일 유신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창세기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기록자들도 잘못 말씀하시고, 잘못 기록한 것이 될 것이다. 신약성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살펴보라.

(1)태초부터 사람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눅 11:50),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막 10:6),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행 3:21),

(2)땅은 물에서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다 :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벧후 3:5),

(3)노아 홍수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마 24:37~38),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 3:6),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히 11:7),

(4)사람은 동물과 구별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전 15:39),

(5)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다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롬 5:12~14, 고전 15:45-49),

(6)아담에서 하와가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3~14),

(7)뱀에 의해서 하와가 문자 그대로의 유혹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고후 11:3)

창세기가 신화나 비유라면, 이와 같은 창세기를 인용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기록들도 모두 틀렸다는 말인가? 이 무슨 참람한 주장인가!


<다음에 계속 됩니다>


미디어위원회
2016-11-25

창조질서와 결혼제도 : 창조와 성

이은일 


서론

많은 사람들이 결혼과 성(性)은 별개의 문제라고 믿는다. 결혼과 상관없이 성적 행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 행위가 결혼 제도 안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구시대적인 고리타분한 주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에 따라 나온 열매는 뚜렷하다. 청소년들의 성적타락, 미혼모와 미혼부, 버려지는 아기들, 혼외 정사로 인한 가정의 붕괴, 그로 인한 자녀들의 삶의 붕괴, 성매매, 성폭행, AIDS 등 성병 전파, 동성애 등등.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대가는 사회와 개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흐름은 거세지고 있다.

 

본론

1. 결혼과 성

진화론 입장에서, 특히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인간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적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당연한 행위이며, 따라서 인간을 성적 행위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결혼과 상관없이 성적 행위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성적 행위가 절대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절대적 가치를 갖는다고 분명하게 기록하셨다. 성적 행위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통해 탄생된 가정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축복일 뿐이다. 결혼의 테두리 내에서 이뤄지는 성적 행위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자녀 생산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결혼 테두리 밖에서 이뤄지는 성적 행위는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번째 사회적 질서이며, 세상의 가치관에서도 가정이 사회의 기본단위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가정은 부부간, 가족간 사랑을 경험하고 키우는 곳이며, 자녀를 생산하고 양육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가정을 통해 자녀들은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배우며, 사회질서를 배우면서 성장한다.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가정이 없는 사회를 상상하면 된다. 부모 없이 자란 자녀들로 가득한 사회가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질까?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 사회는 절대적 기준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저술한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집단의 이익을 대표하는 공리주의적 주장과, 개인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유주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어떤 편을 들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지에 대한 집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센델 교수의 주장을 알려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 고충이 있지만,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는 ‘동성애’를 합헌 판결한 판사의 판결문에 대한 센델 교수의 날카로운 반박이다. 동성애 결혼에 대한 합헌 판결의 요지는 성적 행위와 배우자 선택의 자유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센델 교수는 동성이던, 이성이던, 배우자 선택이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라면, 왜 국가가 결혼제도를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배우자 선택이 개인의 자유에 해당된다면, 왜 국가가 누가 누구와 결혼하는지에 대한 관리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런데 모든 국가가 결혼제도를 관리한다. 그 이유는 가정이 그 국가를 유지하는 기본 단위이고, 그 기본 단위가 건강하지 못하면 국가 사회가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가정을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동성을 선택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판결은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성애 결혼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판결하는 것은 국가가 결혼제도를 관리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사법기관이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와 사회는 결혼제도를 통해 존속할 수 있다. 결혼을 해서 가정 당 2.1명 이상의 자녀를 생산해야 그 나라의 인구가 유지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서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강한 자녀들을 어른으로 성장시켜야 그 나라가 계속 발전할 수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기를 안 낳으면, 결론은 그 나라는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 예측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생산 가능 인구는 2016년도에 최고조에 이르고, 그 이후부터는 계속 감소하며, 2017년에는 고령인구가 유소년 인구를 초과하게 된다. 2100년 인구는 2천만명 수준으로 줄어들고, 2300년이면 더 이상 우리나라 인구는 소멸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아마도 그 전에 외국에서 들어온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한반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오직 결혼을 통해서 자녀들이 생산되고 양육될 때 나라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며, 결혼과 자녀 양육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질서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어 있다. 아니,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결혼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 절대적으로 반영된 제도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나 되기 원하시는 뜻이 담겨져 있다. 교회와 예수님이 하나 되어야 하듯, 부부가 주님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다. 또한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수고와 희생을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자녀 양육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수고와,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신 희생과 닮아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의지적인 희생을 하시는 사랑이다. 범죄한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희생하신 십자가의 사랑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의 마음에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과 자녀 양육은 어려운 것이다. 하나 되는 것도 어렵고, 희생하는 것도 어렵다. 결혼과 자녀생산, 자녀양육을 당연한 가치로 여겨졌던 사회에서는 힘들어도, 위기가 닥쳐와도, 심지어 죽을 것 같아도 부부관계를 깨지 않았고, 자녀들을 최우선으로 돌보았다.

그런데 이런 결혼과 가정에 대한 절대적 가치가 깨어졌다. 결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고, 부부관계가 냉랭해져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배우자 외에 애인을 두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힘들면 결혼을 유지하기보다 이혼하는 편이 더 낫다고 믿는다. 자신의 자녀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는 부모들이 늘어날 정도로, 가정이 이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안전한 곳이 아닌 곳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아시아 국가 중에 1위이며, 이혼하는 것이 두려워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정은 창조 이후로 계속 문제가 많았지만, 가정을 대신할 곳은 없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말이 아닌 행동으로부터 배우고, 그대로 행동한다. 문제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문제 아이들이 되는 것이고, 문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건전한 가정이 되기 위한 노력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선 결혼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결혼을 수단처럼 생각하면, 아무리 목적이 고상하더라도 결혼이 유지되기 힘들다.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이루기보다 자신들이 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면, 가정이 안식의 장소가 아닌 전쟁터가 되기 쉽다. 결혼은 그 자체가 목표를 갖고 있는 제도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체의 모델이다. 결혼만이 하나님의 자녀를 늘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땅에 충만하도록, 땅을 정복하도록, 모든 생물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이런 일들이 이뤄질 수 있다. 

  결혼을 통한 관계를 이룰 때,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된다. 에로스적 사랑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사랑이다. 아무리 받아도 부족하다. 아가페적 사랑은 넘쳐남으로 흘러 나오는 사랑이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도 주어도 남는 사랑이다. 결혼을 통해 부부간에, 부모자녀 간에 이런 주는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사랑을 받는 경험을 통해 사랑을 주는 성숙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비유하면서 부부간에 대한 사랑을 정의한 에베소서 5장 말씀의 핵심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경외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배우자를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소유 당하라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에베소서에 말씀하시는 사랑은 남편들이 쉽게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 같은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오신 겸손한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만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보다 아내를 더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영적 권위를 갖고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처럼 아내의 머리 역할을 해야 한다. 오직 사랑과 희생만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남편의 자리이다.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남편을 돕도록 놀라운 지혜를 주신 아내는 자신의 지혜로 남편을 지배하거나 조정해서는 안된다. 남편이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가장으로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지혜로 남편을 도와 남편이 지혜롭고 정의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가정의 중심에 부부가 있어야한다. 자녀들이 가정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부부간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자녀들도 그 문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자녀를 잘 양육하는 방법은 부부가 사랑이 넘쳐야 한다. 자녀들도 그 넘치는 사랑 속에서 잘 양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과 자녀양육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신의 은사와 사명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결혼과 자녀 양육은 힘들지만, 인생에서 가장 복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만 준비하고, 결혼을 준비하지 않아서, 실제 결혼하고 나서 당황한다. 결혼은 힘든 것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결혼 전에 미리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성적 행위는 부부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고, 자녀를 낳은 것도 하나님의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부부가 하나로 연합되는 과정에서 성적 행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 사랑과 성(性)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신뢰, 존중, 희생, 이해, 네 가지로 분리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복잡하고 깊이가 한정 없기 때문이다. 성적 행위 없이도 얼마든지 깊은 인간관계, 고상하고 거룩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관계와 부부관계가 다른 것은 바로 성적 행위를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있다. 오직 성적 행위를 통해 자녀를 생산할 수 있고, 부부간의 친밀함과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부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인 성(性)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 불행의 시작이다.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는 이제 더 이상 혼전성관계나, 외도 등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성관계를 통해 임신한 것을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즉, 사랑과 희생으로 섬겨야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보는 음란한 사회가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이 백악관 인턴 사원과 성관계를 갖고도 회개하지 않고,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표현하면서 적당히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진화론적 가치관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도리어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진화론적 가치관은 자신들을 옳다고 주장하게 만든다. 

  절대적 기준을 상실한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는 감정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성적 행위로 표현하기 원한다. 느낌으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었다. 결혼에 대한 책임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진화론적 물질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이런 감정의 주인이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학물질에 의해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며, 물질을 조정하면 그런 감정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유전자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고, 느끼는 감정도 물질에 의한 것이므로, 감정이 이끄는 데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감정도 소중하고, 우리의 육체도 소중하지만, 우리의 주인은 우리의 존재이지 감정도 육체도 화학물질도 아니다. 도리어 우리의 감정, 생각, 행동 모두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존재로 만들어가야 한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성숙해야 한다. 그런데 성적 연합은 이런 성숙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적 연합을 성숙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성적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도리어 sex의 노예가 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적 연합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우리의 뇌에 쾌락중추를 만들어주셨다.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은 성적 행위에서 분비되어 성적 연합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부부간의 연합에는 도파민 외 여러 호르몬이 필요하다. 성적 쾌락 뿐 아니라, 행복감, 신뢰감, 일체감, 안정감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도파민뿐만 아니라, 세로토닌, 옥시토신, 바소프레신, 엔돌핀 등 다양한 호르몬을 통해 이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다. 이런 호르몬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부관계를 통해 이런 감정들을 함께 건전하게 추구하는 것은 악셀과 브레이크를 사용해서 안전하게 차를 모든 것과 같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오직 성적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악셀만 있는 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 오직 도파민 분비만을 원하는 성관계는 곧 도파민 중독이 되고, 뇌가 손상 받게 된다. 이런 일은 성적 행위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에서 일어난다. 마약, 약물, 도박, 쇼핑 등 다양한 행동들이 도파민을 분비하게 하고 쾌락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하다. 한 순간의 쾌락을 계속 선택하면, 육체의 쾌락이 나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 나의 인생 전체를 망쳐버리게 된다.

  도파민 중독이 어떻게 뇌를 손상시키는지는 포르노 중독 연구에서 잘 나타나있다. 포르노를 보면서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 웬만한 도파민 분비로는 쾌락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더 강한 포르노를 탐닉하다 보면, 도파민 중독이 되고, 놀랍게도 뇌에 구조적 변화가 오며, 성관계 능력도 떨어진다. 포르노에 중독되면 도리어 성욕이 감소한다. 포르노 중독 환자의 치료에 노인은 2개월 정도 걸리지만, 젊은이의 경우는 4-5개월로 더 걸린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포르노를 많이 다운로드 받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포르노를 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포르노를 너무나 많이 보기 때문에 성추행과 성폭행도 우리나라에서 계속 늘어가고 있다. 

  모든 중독은 비극을 초래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도 비극적으로 만든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도 파괴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성에 중독된 사회다. 아니 세계가 성에 중독되어 있다. 동물대상 sex를 금지하는 법이 나올 정도로 성에 중독된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교육도 어떻게 성관계를 가지면서 임신을 하지 않고, 성병을 피할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혼제도 안에서만 성관계를 가지라는 순결교육은 구시대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사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성관계가 이뤄지는 현실에서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갖지 말라는 교육은 설득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은 변화되어야한다. 성교육은 성관계에 대한 교육, 피임 교육, 성병 예방 교육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교육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성행위가 단순한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남녀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만약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된다면, 성교육에서 어떻게 남성끼리 항문성교를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이성 간의 성관계, 동성 간의 성관계를 가르치는 것이 학교 성교육의 내용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성중독을 포함한 모든 중독의 치료의 시작은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을 어떻게 치료할 지에 대한 내용을 보면, 첫 번째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두 번째가 자신의 힘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공동체의 격려와 도움으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알콜 중독에 대한 치료 원리는 구원의 십자가의 도와 같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듯이, 오직 하늘의 도움으로만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알콜중독이나 성중독만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중독의 진정한 뿌리는 우리의 죄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모두가 죄에 중독된 자들이다. 이런 죄의 문제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해결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중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의 복음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를 통해 전달하시도록 하신 것처럼, 성중독 사회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메시지도 우리를 통해 전달되길 원하신다. 복음은 말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전달되어야 한다. 복음으로 변화된 삶이 없다면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변화시킨 것은 여성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한다. 당시 오직 여성 그리스도인들이 순결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귀족들이 여성 그리스도인들을 며느리로 삼길 원했고, 그 결과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양육되었고, 가족들이 변화되었다. 결국 로마의 지도층들 안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의 사회는 로마처럼 성중독에 빠진 사회이다. 사람을 성적 도구로 여기는 세상이다. 그러나 교회만이 사람을 쾌락의 도구로 여기지 않고, 서로의 삶에 대한 헌신과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 교회가 진정한 공동체가 될 때, 힘든 자녀 양육도 함께 짐을 질 수 있을 것이다.  

 

3. XX와 XY

   XX는 여성의 염색체를 의미하고, XY는 남성의 염색체를 의미한다. 결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절대적 제도라면, 남성과 여성도 염색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절대적인 것이다. 질병 때문에 이런 염색체 이상이 생겨서, 완전한 남자 또는 여자의 역할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길 수 있지만, 염색체에 의해 남성과 여성이 결정되는 것은 변화될 수 없다. 또한 아무도 자신의 염색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염색체에 의해 남자와 여자가 결정되는 것은 변화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질서이다. 남자면 남자이고, 여자면 여자이지, 다른 존재는 없다. 바로 이 남성과 여성을 통해 자녀가 태어나는 것도 변화될 수 없는 창조질서이다. 남성과 남성 사이에,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날 방법은 전혀 없다. 

  남성과 여성이 염색체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고, 결혼에 의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면, 이런 질서를 보호하고 장려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그런 책임이 있다. 그런데 염색체에 의해 결정된 남성과 여성을 거부하고, 다른 성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몸은 남자 또는 여자일지라도 마음은 여자 또는 남자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술을 하더라도 다른 몸을 갖길 원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수술을 하더라도 염색체가 변화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구별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남성과 여성에 대한 문화적 구별 및 차별에 대하여는 열린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과거에 요리를 하는 것은 여성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이 어떠해야 한다는 많은 생각들이 문화적 가치관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우리가 남성과 여성의 기질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의 상당부분도 문화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부여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다른 역할을 하고 싶은 부분에 대하여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여성 같은 남성일지라도 아기를 가질 수 없듯이, 선천적으로 정해진 남자, 여자의 구별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질서를 무시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동성끼리 서로 사랑하니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것이 사회의 진보적인 모습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동성끼리 성적관계를 갖고 살면서 부부로서 법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 결혼을 통해 자녀는 낳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해 다른 이성과 또 결혼해서 두 여자와 한 남자가 같이 사는 일들이 벌어진다.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동성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이 원한다고 모든 것을 허용한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실제로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는 많은 법들을 가지고 있다.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고, 병역의 의무도 있다. 운전할 때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 공공장소에 담배를 피우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왜 이런 법과 규정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법과 규정을 지킬까? 이런 법과 규정들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가정은 남자와 여자로 이뤄지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는 결국 어떻게 될까? 동성 결혼이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동물과의 결혼을 허용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 결혼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동물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할 근거는 무엇인가?

  동성애는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동성애 유전자를 주장하는 연구논문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학자에 의해 억지로 주장되는 것일 뿐, 과학자들은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성애적 경향은 있을 수 있다. 범죄자들에게도 범죄자적 경향이 있다. 범죄자들이 범죄자적 경향이 있다고 해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정상참작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거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이런 유전적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유전적 성향으로 정당화할 수 없으며, 사회적으로 허용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행동을 절제해야 한다.  

  사실 동성애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다. 많은 동성애자들이 민감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을 가졌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깊은 관계를 갖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상처를 받기도 쉽다. 그런데 같은 동성애자들은 이런 마음을 잘 이해하고 어루만져주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강한 공동체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모두 동성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란 동성끼리 깊은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끼리 항문성교를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험이 없는 사람이 성중독 환자가 될 수 없듯이, 항문성교를 하지 않고 동성애자가 될 수 없다. 동성애는 동성끼리의 깊은 사랑과 우정도 있겠지만, 항문성교의 쾌락을 누리고 싶다는 갈망이 존재한다(남성 동성애자들 중심으로 글을 쓴 것이다). 그러나 항문 성교는 성병과 에이즈 등이 전파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항문기능이 훼손되어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 항문은 배설기관이지, 생식기관이 아니다.

  항문성교 없이 민감한 성품을 가진 동성끼리 깊은 우정의 교제를 나누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다. 따라서 동성애의 치료는 성중독과 마찬가지로 항문성교의 쾌락을 포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두려움도 회복해야 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을 때, 주님께서 먼저 사랑하신 것처럼, 동성애자들도 주님은 사랑하시고 회복되길 바라신다. 우리도 동일한 마음으로 동성애자들과 성중독자들을 비롯한 모든 중독자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도 종류만 다를 뿐, 죄에 중독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이 중독에서 죄에서 우리 모두를 건져주실 것이다.

 

결론

  성중독에서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서는 교회가 대안을 보여주어야 한다. 힘들어도 결혼해서 서로 사랑하면서 한 몸을 이뤄가는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를 많이 낳고 열심히 사랑과 희생으로 양육하면서, 좋은 아빠, 엄마가 되어야 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우리의 아이들이 사랑과 희생을 배워서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서 주님의 일군이 될 것이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열강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힘으로 이들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고 희생하는 국민이 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가 될 수 있다. 또한 그 사랑과 희생으로  열방과 세계를 섬긴다면, 힘이 아닌 사랑으로 세계의 으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를 섬김으로 더 큰 나라를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오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삶이다. 

  또한 교회는 사랑과 희생과 함께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염색체를 바꿀 수 없다면, 인정해야 한다. 이성을 믿을 수 없더라도 건전한 가정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선택의 결과이다.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면, 지금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한다. 진정한 자유는 질서를 깨는 것이 아니라, 질서 내에서 다양성의 조화를 통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만이 세상의 대안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가정을 창조하시고, 부부와 자녀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려고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을 통해 이 땅에 교회를 창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 교회만이 죄에 중독된 사회를 구원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출처 - 제5회 선교사와 목회자를 위한 창조과학세미나 자료집 (2016. 10. 10)

구주와
2016-11-08

과학주의와 청소년 교회 교육


1. 청소년과 과학주의

   청소년들은 교회를 잘 나오지 않는다. "공부를 해야 해서, 학원에 가야 해서, 친구와 싸워서, 재미가 없어서" 등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청소년들이 교회에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을 믿지 않는 이유는 바로 성경의 내용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유인원이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빚고 코고 생기를 불어 넣어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친다(이런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들도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교과서와 성경 중 어느 책을 진리라고 받아들일까? 더 많은 시간을 보고, 듣고, 공부하는 교과서이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학교에서 진화론만을 가르치면서 청소년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심각한 시기에 교회에서 진화론이 틀렸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못하고 있다. 일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될 수도 있고, 여러 질문들이 들어와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진화론이라도 어릴때부터 세뇌교육을 당하게 되면 뿌리깊게 진화론자가 되어 사회로 나오게 된다. 중장년층은 섬기는 교회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며 은혜를 받는데, 청소년들은 학교 선생님과 교과서의 내용과 어긋나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교과서의 내용이 왜 틀렸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가르쳐야만 한다. 단순한 세뇌교육의 싸움만으로는 학교와 교회는 그 시간에서 싸움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와 선교사분들은 성경은 물론이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의 내용과 그 거짓됨을 공부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시대적 사명감이 필요하다. ”과학과 신앙은 별개이다.”, ”과학으로 성경을 부정하려고 하지 마라”, ”너무 깊게 따지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조건 성경을 믿어라”라는 말은 더 이상 청소년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은 이미 어른들보다 더 많은 수학, 과학 지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2.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과학교과서의 내용을 보면 정말 참담함을 감출 수 없다. 부모들과 목사님들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칭찬하기 바쁘고, 좋은 대학, 스카이 대학에 보내는 데에만 급급하다. 하지만 다른 과목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과학이나 생물과목에 있어서는 공부 잘한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교과서 내용은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고, 그 원숭이 역시 또 다른 생물로부터 진화하였고 이는 결국 분자(molecule), 원자(atom)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어떠한 이단 종교단체를 가더라도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단에서조차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빚으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이브를 만드신 것을 알고 있다. 학교에서는 지금 이단들도 가르치지 않는 내용을 학생들 머릿속에 계속해서 주입시키고 있다. 학교공부를 잘 하면 세상적으로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갈 수는 있겠지만, 뿌리깊게 진화론에 물들게 되고 성경을 부정하게 되어 결국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과학 교과서를 공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며,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되, 진화와 관련된 내용은 성경과 모순되며 실제로는 창세기의 모든 창조의 과정, 노아의 홍수과 같은 내용이 설화가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사실이라는 점에 대하여 함께 설명해주어 진화론은 틀렸고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진화론의 내용을 일부 들여다보도록 하자.

인류의 진화
 『인류는 400-800만 년 전 사이에 인류와 유인원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진화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석으로 발견되는 모든 인류의 조상형을 모두 ‘화석 인류’라고 한다. 화석 인류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약 300만 년 전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이 원시 인류는 키가 1~1.5m 정도였으며, 오늘날의 사람과 비슷하게 작은 송곳니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뇌 용량은 450~650ml 정도로 오늘날의 유인원과 비슷하며 직립보행을 하였다. 사람 속(屬)에 속하는 최초의 화석 인류는 약 200만 년 전에 살았던 호모 하빌리스이다. 이들의 뇌 용량은 평균 650ml 정도였다. 호모 하빌리스로부터 현대인과 더욱 가까운 호모 에렉투스가 진화됐다고 여겨진다.』

말의 진화
『화석은 생물이 진화해 온 방향을 제시한다. 최근으로 올수록 생물의 구조는 더욱 복잡해지며 새로운 종의 출현으로 생물의 종류도 다양해진다. 화석은 특정한 종이 진화해 온 모습을 밝혀준다. 말의 화석을 보면, 시간이 지난수록 몸집이 커지고 발가락의 수는 적어지는 방향으로 변했다. 또 어금니의 변화를 보면 말이 살아온 환경의 변화를 추정할 수 있다.』

시조새(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종)
 『시조새는 시기적으로 파충류와 조류 사이에 출현하였으며, 파충류와 조류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척추동물이 파충류에서 조류로 진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시조새와 같은 중간 종의 생물은 한 생물에서 다른 생물로의 진화를 밝혀주는 열쇠가 된다. 비둘기 정도의 크기인 시조새는 꼬리에 긴 뼈가 있고, 한 쌍의 날개와 부리가 있으며 부리 속에 이가 발달돼 있다. 날개에는 깃털이 있고 날개 끝에 발톱이 달린 3개의 발가락이 있다.』

우리들의 어린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위와 같이 그럴 듯한 계통도 그림과 화석사진을 근거로 진화론을 배우고 있다. 위 내용은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진화론의 내용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반면 교회에서 청소년들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신비에 대하여 얼마나 배우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3. 청소년들에 대한 강력한 세뇌교육
 

목사님들이나 부모님들은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진화론을 공부한다고 하여도, 주일에 교회에서 성경과 말씀으로 교육받는 이상 학생들이 진화론을 믿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막연히 ”우리 자녀들은 교회에 다니니까 진화론을 믿지는 않을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목사님들은 교회에서만 학생들을 보고, 부모님들 역시 학생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모습은 잘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와 학원에서 매일같이 적어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진화론으로 무장된 세뇌교육을 당하고 있는데 비하여, 주일에 성경과 말씀을 듣는 시간은 채 1시간도 되지 않는다.

세뇌교육은 영어로 brainwashing-education 이라고 하며 한자로는 ‘洗(씻을 세)腦(골 뇌)’ 라고 쓴다. 말 그대로 뇌를 씻어낸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이슬람 무장단체인 IS에 세뇌된 어린 아이들이 자폭테러를 하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뇌교육의 결과가 교통사고가 난 후 가해자가 ”How are you?”라고 물으면 쓰러진 피해자가 ”I'm fine, thank you, and you?”라고 대답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천지에서도 신입 성도들에 대한 세뇌교육은 유명하다. 수개월간 매일 같이 하루 몇 시간씩 성경공부라는 이름으로 세뇌교육을 시키는데, 그렇게 세뇌당하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신천지 이론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불법 다단계 업체의 경우에도 신입회원들을 상대로 약 1달 간 강제 합숙을 시키면서 자신들의 이론을 계속 설명하는데, 이렇게 세뇌교육을 당한 사람들은 다단계 이론이 진실된 것으로 믿고 다단계 판매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세뇌교육으로 가장 유명한 북한에서는 학생들이 5년 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그리고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까지 김씨 가문에 대해 무려 684시간의 수업을 듣는데 그 내용은, 김정일이 햄버거를 개발했으며, 평소 골프를 즐기던 김정일은 1994년 어느 날 18홀 코스에서 38언더파 34타의 신기록을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홀인원을 11개 해야 가능한 기록이다.


 4. 청소년에게 미치는 진화론의 영향

진화론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우연의 산물이자 분자와 원자들의 우연한 조합으로 만들어진 물건으로 여기기 때문에, 유물론과 무신론을 기반으로 생명에 대한 경시현상(자살, 낙태), 도덕경시, 쾌락주의 등의 많은 부작용을 발생시키게 된다.

낙태 : 낙태란 태아를 자연분만기에 앞서서 인위적으로 모체 밖으로 배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화론과 무신론에 의하면, 태아도 생명이긴 하지만 생명 자체가 분자들의 조합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생물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게 되므로, 자연히 생명경시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낙태를 해도 별다른 죄책감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1993. 3. 5.자 한겨레 신문에 의하면 기혼여성 절반이 낙태수술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전세계 임신 4건 중 1건이 낙태되는데, 우리나라 한해 신생아수 43만 명에 낙태수가 30만이라고 한다. OECD 국가 중 단연 1위임에 의문이 없다. 조사되지 않은 건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규모가 큰 산부인과가 아닌 개인 산부인과의 경우 불법 낙태를 하지 않으면 병원 운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낙태의 95%는 불법이라고 한다. 그럼 합법적인 낙태도 있다는 말인가?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에 의하면, 대통령령이 정하는 우생학적, 유전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연골무형성증, 낭성섬유증 등),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풍진, 톡소플라즈마증 등),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임신 24주 이내인 경우에 한하여 임신중절수술이 허용되고 있다.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국가는 약 60여개국에 이르고 있다.

자살률 증가 : 진화론으로 인한 생명경시현상은 자살률 증가라는 또 다른 비극을 낳게 된다. 국내 청소년 자살률은 10년 새 57.2% 증가하여 10만 명당 약 5.58명에 이르고, 청소년 사망원인 1위는 바로 자살이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이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신 소중한 축복이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안다면 결코 자살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행위이다.

동성애 : 동성애는 쾌락주의의 산물로서, 이미 소돔과 고모라를 통해 하나님이 절대 금기시하고 있는 행위이다. 진화론자들은 영혼을 믿지 않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 최대한 쾌락을 즐기게 되고 동성애도 그 도구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는 유명 방송인은 학창시절 남자선배들 300여명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동아일보 2007. 5. 18.자 인터뷰).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그 사실여부를 떠나 내용 자체로서 매우 충격적이다. 삼성서울병원이 5년간 중고생 373,371명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중고등학생 165명 중 1명꼴로 동성 성접촉이 있다고 하며, 동성 성접촉에는 키스를 포함한 것으로서, 남학생 1,360명, 여학생 946명이었다. 동성 성접촉 청소년의 경우 이성 성접촉자의 경우보다 음주율이 2.84배, 흡연율이 4.24배 높았으며, 약물사용 13.54배, 폭력율 8.09배, 우울감 2.23배, 자살생각 2.75배, 자살시도 4.18배 높았다. 에이즈의 주된 감염원인이 동성애라는 사실은 상식에 해당한다. 10대의 에이즈 신규감염비율은 2006년 1.7%에서 2016년 4.1%로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이는 바로 10대들의 동성애가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중독 : 진화론은 영혼의 존재를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결국 모든 생명체는 죽음으로써 종국적인 결말을 보게 된다. 따라서 자연히 살아있을 때 모든 쾌락을 즐기다가 죽어야 한다는 쾌락주의에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쾌락은 대부분 중독을 발생시키게 된다. 우리나라 청소년 흡연율이 7.8%에 이르며, 고3 남학생의 경우 22.8%의 흡연율을 보이고 있다. 그 외에도 알콜중독, 섹스중독, 스마트폰 중독, 음란물 중독 등 청소년들은 수많은 중독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 해리티지재단의 연구결과, 미국 중고등학생 6,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경험을 가진 여학생의 자살충동비율은 14.3%로서 성경험이 없는 여학생의 5.1%의 약 3배에 달했고, 남학생의 경우 무려 9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들은 비단 청소년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고 전국민의 문제이다. 지하철을 타면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5. 최근의 교과서개정 내용

진화론의 잘못된 증거들로 가득찬 교과서를 올바르게 개정하기 위하여,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일명 ‘교진추’)의 5번에 걸친 청원이 있었고 그 결과 상당부분의 교과서 내용이 수정되는 결과를 낳았다. 2011. 12. 5. 교육과학기술부에 접수된 1차 청원은 '시조새'가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단계라는 내용이 과학적 근거가 없으므로 교과서에서 삭제하거나 멸종된 조류로 수정해 달라는 내용이었고, 2012. 3. 5. 접수된 2차 청원은 ‘말의 진화계열’이 상상의 산물로서 교과서에서 삭제해달라는 내용이며, 2012. 12. 18. 접수된 3차 청원은 ‘화학적 진화’는 생명의 탄생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서 교과서에서 삭제해달라는 내용, 2013. 10. 접수된 4차 청원은 ‘후추 나방’의 공업암화는 진화의 증거가 아니므로 교과서에서 삭제해달라는 내용, 2014. 8. 1. 접수된 5차 청원은 '핀치새' 부리의 변형은 진화의 증거가 아니므로 교과서에서 삭제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일부 교과서에 수록된 시조새 및 말의 진화와 관련된 내용이 수정되었는데, (주)교학사 교과서 집필진은 ”청원 대상이 된 말의 진화 계열 역시 화석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논란의 여지는 충분하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화의 증거로 제시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며, 청원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해당 내용을 삭제하고...”와 같은 입장을 밝히며 교과서 내용을 개정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모든 청원내용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아 큰 아쉬움이 남는다.


6. 유신진화론은 청소년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만드는 해답이 될 수 없다.

진화론, 빅뱅이론 등 현대과학이라 일컬어지는 이론들과 성경을 조화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유신진화론’이 교계 및 학계에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유신진화론은 말 그대로 하나님도 계시고 진화론도 인정하는, 성경과 진화론을 조화시키고 양립시키기 위한 절충설이다. 유신진화론은 교회가 현대과학이론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내놓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서, 최초 하나님이 빅뱅으로써 천지를 창조하시고 진화의 방법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인정하며 전지구적인 노아의 대홍수를 부정하는데, 이는 결국 창세기의 대부분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나님은 결국 우주를 창조하실때만 이 세상에 개입하시고 그 이후에는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으시고, 진화의 법칙에 의하여 세상은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청소년들이 교회와 신앙으로 돌아올 것인가? 이미 유신진화론은 널리 퍼져있지만 청소년들은 점점 교회를 떠나기만 할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최근의 일부 유명 기독과학자들조차 유신진화론적 주장을 펼치며, 교회에서 지구 나이가 1만 년이라고 가르치면 천문학, 화석증거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고 결국 과학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신진화론대로 교과서도 맞고, 성경도 맞다고 가르치면 청소년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될까? 유신진화론대로 성경을 가르친다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아담, 이브의 창조, 노아 홍수의 대심판 부분은 설교를 할 수 없게 된다. 아담, 이브, 노아가 실존인물인지? 노아의 홍수가 실제 있었던 사건인지?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몇 년전 일어났던 사건인지? 이러한 질문들이 쏟아질 것이고 이에 대하여 답을 하여야 하는데, 마땅한 답변이 없다. 그렇다고 성경 중 일부는 틀렸다고 말을 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기독교 방송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노아의 홍수, 진화론에 대한 설교 듣기가 어렵다. 목사님들이 이 부분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유신진화론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 교회에서 유신진화론을 가르치면 결국 청소년은 ”역시 교과서가 맞군”, ”역시 성경은 틀렸어”라는 의심에 확신을 갖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청소년들에게 창조의 진리와 성경은 설화가 아닌 사실이며 진리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7. 목회자들이 용기를 내야 할 때

국내 크리스천 락밴드 예레미(Yeremy)의 2000년 7월 발매된 3집 앨범 수록곡 중 ‘진화론’이라는 노래가 있다. ”진리들이 변해버렸어 거짓들이 가득한 이곳. 오만하게도 빛을 보지 못하여 지극히 못생긴 원숭이의 진화론을 따르는 지식의 사기꾼들을 보라. 커다란 시계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척이나 아는 척하네. 언제까지 속일건가, 언제까지 고집할까. 어둠은 이제 땅에 엎드려”. 진화론의 허구성을 용기 있게 잘 표현한 노래이며, 예레미의 대표곡이다.

이에 목회자들이 목소리와 용기를 내야 할 때이다. 청소년들은 나라의 희망일 뿐 아니라, 장래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주역들이다. 진화론에 한 번 빠진 청소년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교회에서만큼은 창조의 진리가 선포되어 청소년들의 귀와 영혼에 울려야 한다. 그럼으로써 청소년들의 신앙 회복, 나아가 한국 교회 전체가 회복되고 재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출처 - 제5회 선교사와 목회자를 위한 창조과학세미나 자료집 (2016. 10. 10)

구분 - 4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483

참고 : 6332|6439|6270|6278|2864|3682|5110|6369|6481|5462|3186|4542|4501|4345

미디어위원회
2016-11-04

진화론의 확산과 선교사의 사명

김연수 선교사(SMI/KWMA)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에릭 머택서스(Eric Metaxas)는 2013년 7월에 크리스챤 포스트(Christian Post)에 ”젊은 무신론자에게서 배워야 할 점 – 왜 그들은 기독교를 떠났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거기서 그의 교회를 떠난 수많은 젊은이에 대한 설문과 인터뷰를 통해 얻게 된 결과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이 기독교를 떠난 이유가 첫째로는 교회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사역자들이 ”열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그들이 기독교를 떠나게 된 데에는 다른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 교회가 더 이상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열정을 잃어버린 것이 그들이 교회를 떠난 가장 중요한 이유라는 사실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2009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이미 떠났다(Already Gone)”에서는 유명 조사기관인 ”미국 연구 그룹(America’s Research Group)”이 그 당시를 기준으로 최근에 교회를 떠난 1,000명의 이십대를 대상으로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내어놓았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 가운데 39.8%는 중학교 때에, 43.7%은 고등학교 때에, 10.6%는 대학교 때에 성경에 있는 모든 기사와 이야기들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고 다양하고 복합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성경에 대한 신뢰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심각한 면을 시사해 주고 있다. 

결국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리 문제, 성경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그 교회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에서 성경적인 창조신앙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거나, 세상에서 마치 진리인양 버젓이 가르쳐지고 있는, 그리고 일부 교회 안에서까지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성경을 해석하려는 유신진화론을 교묘하게 신앙과 함께 섞어서 가르치는 것은, 그것 자체가 기독교 존립에 가장 위협적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타협점이 없는 완전히 상반된 이론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진화론의 등장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상 중의 하나는 18, 19세기 유럽을 지배했던 ”자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자연주의라는 것은 한 마디로, ”보이는 모든 것을 보이는 것만으로 설명하자는 사상”이며, 진화론이야말로 그 자연주의 사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할 때에도, 성경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설명하기보다는 외형이 인간을 가장 많이 닮은 ”원숭이의 형상”에서 왔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하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자들은 모든 것이 물질로부터 출발했다는 자연주의적 믿음만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결국 물질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진화론은 과학적 이론이면서, 동시에 신앙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은 진화론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1. 진화론이 인간사회에 끼치는 폐해 

진화론은 검증된 이론도 아니며, 하나의 정립된 이론으로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과학적 타당성을 가진 사실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과학적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사회에 들어오자 실로 거의 모든 방면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 사회, 학문, 종교, 문화 등에 깊숙이 파고들어 심각한 폐해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말 진화론이 옳은 것이라면, 신이 존재하는 증거도 없고, 사후 생명도 없으며, 인간에게 절대적인 윤리적 토대도 있을 수 없고, 인간 삶의 궁극적인 의미도 없게 될 것이다. 

1) 인간의 존엄성 훼손

무엇보다도 진화론은 인간의 고유의 존엄성을 심하게 훼손시킨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온 것을 부인하기에, 그리고 저급한 생물에서 진화를 통해 생겨난 것이 인간이기에, 그들에게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이고 확고부동한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생명은 어쩌면 단순히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것이기에, 인간이나 인간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2) 인종차별에 대한 정당화  

진화론은 하류 인종, 상류 문명, 인종우생학 등의 개념을 만들어 인종차별을 만들어냈다. 결국 그러한 사상은 흑인들의 노예화를 정당화했고, 히틀러 같은 사람은 진화 사상을 근거로 게르만족의 번창을 위해 기생충처럼 여겨졌던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하기도 했다. 호주에 사는 많은 백인들은 원주민들은 원시 미개인이어서 백인의 기술과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었으며,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이나 몽골인에 대해 인종차별적 개념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다. 지금도 진화론을 진실로 신봉한다면 백인우월주의나 인종차별적인 사상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깊은 내면에 깃들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제국주의나 식민지주의의 정당화

사실상 근세 역사에서 유럽의 오랜 동안의 제국주의는 진화론을 국가적으로 장려했던 나라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었다. 일본 또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진화론을 가르쳤던 나라였다. 진화 사상에 따라 스스로를 우수한 민족이라고 믿게 되었던 그들은 아직 산업화가 되지 않았던 약한 나라들을 침공하고 그들을 강제로 지배하고 수탈하고 학살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4)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출현

헤겔이 말하듯이, 자연선택이론을 도입한 정치이념은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통치체제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소수의 선택 받은 사람들은 번성하고, 대부분의 선택 받지 못한 사람들은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을 당연시한다. 이러한 사상은 극우 쪽에서는 퍄쇼주의를, 극좌 쪽에서는 공산주의가 출현하도록 만들었다. 그 둘은 전체주의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다윈의 ”생존경쟁”(struggle for survival)이라는 용어에서 ”계급투쟁”(class struggle)이라는 이론을 도출해냈다. 다윈이 일종의 생물의 진화법칙을 발견했다면, 마르크스는 인류역사의 진화법칙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말로 그들의 창조기원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5) 극심한 경쟁주의–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ist)과 생명 경시 풍조

진화론이 주장하는 ”적자생존” 사상은 다른 개체를 죽여서라도 살아남아야만 된다는 의식을 부채질한다. 생존경쟁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쓰러뜨려야 된다는 당위성을 정당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인간사회의 극심한 경쟁주의는 그 깊은 뿌리를 진화론에서 찾을 수 있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는 결국 그러한 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물을 그 ”종류대로” 다르게 창조하셨다는 창조론과는 반대의 개념이다. 또한 인간 존재를 기계나 조직의 한 부품 정도로 생각하는 사상은 인간의 존재와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왔다. 얼마든지 잘라낼 수 있으며, 쉽게 대체할 수 있다는 전제를 그 바닥에 깔고 있다. 생명 자체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어떤 영원한 가치나 의미를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6) 모든 학문 분야에 끼치는 해악   

진화론은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교육학, 경제학, 철학, 문학, 역사, 예술, 신학 등 모든 학문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는 기독교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신학 분야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해 본다면, 무엇보다도 진화론의 영향으로 20세기에 일어난 ”고등비평주의”(Higher Criticism)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고등비평주의자들은 성경 자체와 성경의 진리가 진화를 해왔다는 ”성경진화론”(Biblical Evolutionism)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 중의 하나인 ”문서설”은 헤겔주의적 진화론에 기초한 것으로, 성경의 신뢰성을 크게 실추시켰다. 그러한 자유주의적 신학 사상은 결국 성경적 창조론을 부인하고, 진화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창조를 주장하게 되었다.

특히, 1912년 주장된 ”필트다운인 화석” 사건은 그것이 1962년에 가짜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까지 50년 동안 현대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진화론이 과학적인 증거를 갖추었다고 굳게 믿게 되었던 많은 신학자들은 그들의 창세기와 구약의 해석을 다르게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진화론자인 샤르댕 신부는 ”원숭이가 진화하여 인간이 되었고, 인간이 진화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주장까지 했다.


2. 진화론이 선교지에 끼치고 있는 해악과 상황

진화론이 모든 인간사회에 그렇게 큰 폐해를 끼쳐왔다면, 선교지에도 예외일 수가 없을 것이다. 선교지의 거의 모든 나라의 공교육에서 진화론은 그것이 마치 이미 증명되고 확정된 사실로 가르쳐지고 있다. 과학 분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 분야에서도 진화론이 직접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1) 진화론적 세계관 형성

선교지의 공교육 현장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릴 때부터 진화론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게 되어 아이들은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부터 진화론으로 무장하게 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진화론 교육을 통해 하나님이 없는, 인본주의적인 진화론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대부분의 선교지 국가들의 생물, 지리 교과서에는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왜곡된 진화론이 마치 실험적으로 확인된 사실처럼 기술되고 있다. 그러한 진화론의 교육에 따라 인간은 목적 없이 우연히 태어난 존재이며, 그에게는 영원한 의미가 없으며, 절대적인 윤리도 있을 수 없다고 그들은 믿게 된다. 그들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는 철학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것이다.

2) 창조론은 한 종교의 신앙적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가르침

어릴 때부터 그러한 진화론적인 교육을 받아 온 사람들은 창조론에 대해서는 아주 편협된 결론을 갖게 된다. 창조론은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하나의 신앙일 뿐이며, 진화론만이 과학적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고 학문이라고 가르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진화론은 결과적으로 복음을 파괴한다.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권능을 거부하는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현대과학이 모든 물질과 자연법칙만으로 설명하려는 자연주의적 과학을 다루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은 궁극적으로 창조와 진화 두 가지 이론밖에 있을 수 없는데, 창조주를 언급하는 것은 특정 존재나 종교를 다루는 것으로 간주하여 창조론을 강하게 거부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고 될 수도 없는 진화론만을 과학적인 사실인양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3) 교회 안에서의 세상과 상반된 가르침과 타협

학교에서 진화론이 옳은 이론인 것처럼 배운 학생들이 교회에 와서 창조론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성장해 갈수록 성경 진리에 대해 심하게 흔들리게 되면서, 창조론을 단지 신앙적인 것으로만 치부하고 문제를 삼지 않든지, 아니면 창조론은 단지 신앙적인 면에서만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 두 가지를 혼합하여 타협적인 이해를 갖게 된다. 아마도 유신진화론이 그들에게 그럴듯한 타협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화론이 혹시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말씀은 거짓이 되기 때문에, 신자로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동시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4) 성경적인 창조론이 교회에서조차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음

선교지의 대부분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조차 성경적인 창조론은 제대로 가르쳐지지 못하고 있다. 교사들도 그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어떤 경우에는 성경적인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모두 믿음과 신념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과 사상의 체계라고 볼 수 있으며, 진화론을 과학의 이름으로 가르친다면, 이와 함께 무신론에 대한 신앙과 신념을 결국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조차 진화론을 묵인한다면, 그리고 올바른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갖고 있는 성경과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결과적으로 소홀히 하게 되고 바른 신앙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선교지 상황에 따른 선교사의 사명과 역할

”창조, 설계, 진화”, 이 세 개의 단어는 어쩌면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신의 존재, 우주의 생성, 신과 우주의 관계, 인간의 기원과 정체성 등을 모두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성경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에서는 성경의 말씀을 근거로 모든 것을 주장하고 모든 사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간이 그 성경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그의 영원한 운명이 갈리게 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결국 한 인간이 복음을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들의 영원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교지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대게는 이미 그들이 어떤 종교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가 다른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의 깊은 마음을 붙잡고 있는 진화론적 사상 때문일 수 있다.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절대자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진화에 의해 우연히 주어진 것이라는 신념은 기독교의 창조 신앙을 허황되게 보이게 만들며, 미신적이라고 판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그러한 선교지 사람들에게 복음수용의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 진화론적 사상의 거짓과 폐해를 가르쳐 줌으로, 복음전파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창조신앙의 강조는 선교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절실히 요청되는 부분이다. 교회의 근세 역사에서 교회의 변질과 쇠퇴는 진화론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침체 역시 진화론 교육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 성경적인 가르침과 신앙이 약해지면 그 다음은 반드시 교회의 쇠퇴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1) 선교사의 창조신앙 교육 – 장기적인 안목에서 지속적으로 체계적으로 가르쳐져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모든 동식물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래서 우주와 인간의 존재 의미가 바로 그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영혼, 원죄, 인간의 죽음과 부활은 핵심적인 신학적 논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선교지의 진화론 교육의 보편화는 창조 신앙을 전하는 기독교의 복음에 가장 장애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지의 학생들과 사람들에게 창조신앙의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유치원이나 학교 사역, 신학교 사역, 일반인 교육을 통해 창조신앙을 계속적으로 보급함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그들에게 예상되는 장애를 미리 제거해 나가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2) 창조신앙 교육의 효과적인 사용 – 창조과학 집중 강의 등을 활용.

선교사들은 본국에서나 선교지에서 한국창조과학회와 연계하여 본인들이 그러한 교육을 받고 그러한 훈련이나 교육을 선교지 사람들에게도 제공할 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본인들의 훈련을 지나 현지인 교육을 한국창조과학회를 통해 유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선교지 상황에 따라 방학 중이나 특별한 기간에 집중강의 등도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현지 학교 교사와 주일학교 교사에 대한 교육의 기회 제공.

일차적으로 선교사들이 관여하고 있는 현지 교회의 주일학교와 어른들에게 특별한 기간이나 정규적인 시간을 확보하여 창조신앙을 보급함으로 학생들이나 그곳 사람들로 하여금 학교에서 배우거나 배웠던 진화론의 허구성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며, 현지 학교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 좋은 강사를 다양한 다른 과목들과 연계하여 그 학교들에게 창조신앙 교육에 대한 기회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진화론의 과학적 허구성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창조신앙의 필요성이 강조될 수 있을 것이다.

4) 현지 학교에서의 과학 교실 운영.

대부분의 선교지는 과학기구나 과학교실이 현저하게 열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을 잘 선용하여 기구나 교실 등을 제공하여줌으로, 창조신앙 교육의 기회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순수한 과학 실험이나 교실을 통해서 그들의 과학 교육에 공헌하면서, 다양한 합법적인 기회를 얻어 내어 창조과학 교육을 함께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김광, 창조, 맞습니다, 서울: 세창미디어, 2016.
김홍석, '청장년을 위한 창조과학 교육-창세기 고고학”, 제2회 선교사와 목회자를 위한 창조과학 세미 나, 한국창조과학회, 2013.
윤철민, 개혁신학 vs. 창조과학, 개혁신학으로 본 창조과학의 신학적 문제, 서울: CLC, 2013.
이재만,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1장 vs 진화론, 서울: 두란노, 2014.
임번삼, 창조과학 원론(상, 하) -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아서-, 서울: 한국창조과학회, 2007.
한국창조국과학회, 이병수 편역, 정확무오한 성경, 서울: 세창미디어, 2012.
한국창조과학회, 30가지 테마로 본 창조과학,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2.
한국창조과학회, 당신이 몰랐던 유신진화론, 서울: 세창미디어, 2016.

Ham, Ken & Paul Taylor, 한국창조과학회 역, 창세기에 답이 있다, 서울: 한국창조과학회, 2010.
Haasma, Deborah & Loren D. Haasma, 오리진-창조, 진화, 지적설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들, 서울: IVP, 2012.
Metaxas, Eric, 'Learning from Young Atheists – What Turned Them off Christianity”, Christian Post, July 1, 2013.
Strobel, Lee, 홍종락 역, 창조 설계의 비밀, 서울: 두란노, 2010.

*필자는 남서울교회(홍정길목사 시무)에서 대학부 사역자로 사역하다가 1990년에 위클립성경번역선교사(GBT)로 파송되어 2006년까지 인도네시아, 이리얀 자야, 끄웨르바 부족을 위한 성경번역 사역을 했고, 그 후에 한동대, 통번역대학원, 응용언어학과 교수로 사역하다가 2011년부터 현지 선교사를 돕는 성경 스토리텔링 사역(SMI대표)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의(KWMA국제총무)에서 사역하고 있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 Ph.D. 신약신학)와 미국 텍사스주립대학원(M.A. 언어학)과 미국 풀러신학대학원(Th.M.)에서 수학했다.


출처 - 제5회 선교사와 목회자를 위한 창조과학세미나 자료집 (2016. 10. 10)

미디어위원회
2016-09-16

창조과학 사역의 의미 1 : 창조과학에 대한 소개

이은일 


      창조지에 연재된 창조과학 지상 강좌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글을 올리면서, 창조과학 자체에 대한 이해 전에 왜 창조주 하나님이 강조되어하며, 진화론이 어떻게 확대되었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어떻게 창조과학이 활용되는 지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서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없으시다고, 또는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100년 이상 공격받고 있었고, 진화론이 바로 그 공격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1)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가 비과학적인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창조과학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강조하는 사역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는 심판자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시대에 창조주 하나님이 강조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하다. 그것은 교회 밖의 세상에서 진화론 교육을 통해 하나님이 이 모든 지구와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진리가 비과학적인 거짓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고등학교 생물교과서의 ”생명의 기원” 서론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중세기까지는 생명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설과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창조론이 신봉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과학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생명은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학설이 대두되었고, 1859년에는 다윈에 의해 종의 기원에 관한 논문이 발표되면서 생물의 진화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글을 보면 비과학적인 ‘생명 자연발생설’과 ‘창조론’을 함께 비과학적인 무식한(?) 이론으로 동일시하고, 과학적인 ‘생명 속생설'과 ’진화론‘을 함께 과학적인 이론으로 소개하고 있다. 진화론은 비과학적인 증명할 수 없고, 증명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진화론은 마치 ’진화법칙‘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세상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하나님의 창조를 비과학적인 것으로 만들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창조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교육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혼란을 겪고 있다. 즉, 성경의 말씀이 과학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일부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설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화론의 영향으로 자신들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십자가의 구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1절, 성경의 처음을 자신이 창조주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성경의 첫 말씀에 대하여 의심하는데, 그 뒤에 있는 말씀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기는 어렵다. 성경은 죄와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지금의 땅과 하늘을 다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죽었던 몸이 영원한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창조 -> 타락 -> 구원 -> 최후의 심판 -> 새 하늘과 새 땅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첫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시작하셨고, 그 뜻대로 끝내신다는 것이며, 그분이 만드셨기 때문에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에 대한 믿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본론

1. 진화론의 대두와 그 배경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부인하는 진화론이 어떻게 대두되었고, 왜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1) 계몽주의의 영향

지금 세계의 문명은 유럽 문명이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유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를 통해 전 세계로 퍼진 곳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화 된 후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합쳐져 중세의 암흑시대를 낳게 되었다. 16세기에 시작된 계몽주의, 즉 르네상스는 중세의 종교적 권위주의 시대에서 벗어나 그리스 로마시대와 같은 인본주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또한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종교전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게 하였다. 중세의 신본주의를 버리고 인간이 중심이 된 인본주의는 이성 중심의 철학과 과학주의를 낳았고, 마침내 기원문제 조차도 하나님을 버리는 진화론을 낳게 되었다.


2) 다윈의 진화론 발표 - 다양성에 대한 오해

1859년 다원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소개하였다. 다윈은 갈라파고스 군도에 서식하는 다양한 동물들을 보면서 이런 다양한 동물들이 어떤 변화를 거쳐서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고,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에 대하여 나름대로 이론을 만든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이 시대에 다윈 말고도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변화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유전학 등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유전정보에 의해 이런 다양성이 발현된다는 것에 대하여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다윈 등의 당시의 과학자들은 이런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이론을 채택하였고, 첫 기원에서부터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진화론이 발표된 후 1860년 동물학자인 헉슬리와 월버포스 주교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역사적 논쟁을 하였다. 진화론자들은 동식물의 다양성에 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진화론을 변명하였고, 이에 비해 월버포스 주교의 창조론 변증은 과학적 증거가 약해 보였다. 이 당시의 과학수준으로는 생명체에 있는 생화학 기전이나 DNA 등에 대하여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생명체가 지적설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때 다양성과 진화가 다르다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3) 진화론 확대의 시대적 배경과 거짓 증거의 영향력

창조론은 주로 정치적 세력으로 인정되던 가톨릭 쪽에서 주장하였기 때문에 창조론 옹호자들은 보수주의자들로 취급되었고, 진화론 옹호자들은 개혁적인 인사들로 인정되었다. 따라서 진화론은 시대적으로 인기가 있는 이론이었다. 또한 이 당시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 전쟁은 진화론의 양육강식에 의한 자연선택 이론으로 합리화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흑인 및 동양인들을 인격적인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열등한 인종으로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진화론에 있었던 것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진화론은 인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나타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즉 인본주의 시대에서도 물질의 기원,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진화론은 이 기원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 없이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이 인본주의 시대에 환영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청교도들이 세운 미국은 유럽에서 교육되고 있는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했었다. 그러나 1925년 프로테스탄트 보수주의의 아성인 테네시주에서 인간과 원숭이의 선조는 같다는 진화론을 가르쳤던 고교 생물교사 죤 스콥스는 재판에 회부되어 $100의 벌금을 내라는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도리어 진화론자들의 거센 도전이 시작되었다. 그 후 진화론자들의 법정 투쟁이 42년이나 계속되었고, 1967년에 대법원이 ”반진화론법은 연방헌법에 위배 된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미국의 과학 수준을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학문적으로 유럽보다 뒤진 상태였고, 발전된 유럽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원숭이 재판으로 불리우는 스콥스의 재판을 통해 진화론이 미국에 자리 잡게 된 중요한 계기는 진화론이 과학적 증거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재판에서 제시된 진화론의 과학적 증거들은 ”중간 단계 화석의 증거들”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필트다운인’이었는데 이 필트다운인은 영국 필트다운지역에서 발견된 1912년 발견된 것으로, 진화론자들이 예측한대로 원숭이의 턱뼈를 가진 인류의 두개골이었다. 진화의 완벽한 증거로 인정받았던 필트다운인 화석은 1953년 뼈에 대한 연대측정결과 수십 년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정밀 조사결과 조작된 것임을 1962년 공식 확인하였다. 1912년부터 1962년, 20세기 초반 중요한 시기에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완벽한 증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살고 있던 위대한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의 과학적 증거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들, 기독교인들이 쓴 글에는 진화론을 인정하는 글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진화론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것이다. 50년 동안의 거짓 증거의 위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진화론은 생물학에서 유일한 과학적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생물학 뿐 아니라 학문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지질학, 우주과학 등의 자연과학 뿐 아니라, 역사, 문화인류학 등 인문과학에까지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학문의 전 영역에서 다뤄지게 되면서, 사람들의 생각 속에 가설에 불과한 진화론이 법칙인 것처럼 인식되게 된 것이다.


2. 진화론과 과학만능주의의 쇠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진화론과 과학만능주의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진화론에 대하여는 그 허구성을, 과학에 대하여는 그 한계에 대하여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 진화론적 역사관의 쇠퇴

진화론의 역사 해석은 끝없는 진보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 진화되고,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우수한 집단이 더 진화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역사는 계속 발전한다고 믿고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사람들은 과학의 진보와 그 열매를 누리면서 사람의 능력에 의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이런 환상은 진화론적 역사의식과도 잘 맞는 것이었다. 인본주의와 과학만능주의, 진화론은 서로 잘 어울리는 동무들이었던 것이다.  

인류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진화론적으로 역사 발전이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인간 이성을 절대시하던 철학적 풍토도 깨어지게 되었다. 또한 문화 인류학이 발전하고, 인권 존중 사상이 퍼지면서, 원시인적인 삶이라고 경멸받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삶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진화론적으로 발달되지 못한 문명이라고 낮게 평가되었던 것은 지나친 서구 기계 문명 위주의 평가이며, 그들 나름대로 독특하고 발전된 문화를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진화 이론에 의해 낮은 단계에 있다고 흑인들을 평가하는 것은 진화론적 선입관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1, 2차 세계 대전이 바로 진화론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적자생존, 자연선택 이론은 어떤 특별한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주었고,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멸절시키는 것도 진화론적으로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우생학”도 바로 진화론의 결과이다.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에게 불임 수술을 하거나, 결혼을 제한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도태시키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세계에서 진화론의 영향력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역사 등의 인문과학 분야에서는 그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현장에서는 아직도 진화론의 영향력이 강력한 실정이다.


2) 과학만능주의의 쇠퇴

르네상스 이후 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두려움의 대상이던 자연(피조세계)은 분석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별의 운행에도 규칙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물리학적 법칙들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은 세계가 하나의 정교한 기계인 것처럼 인식하였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인본주의적 세계관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인간 이성을 왜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지를 설명해야하는 철학의 입장에서 기계와 같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인간 이성은 그 중심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과학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기원에 관하여는 진화론만이 유일한 과학적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 이성으로 실험하고, 연구하는 과학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이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이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많은 과학적 발전은 사람들에게 큰 변화와 유익을 주었다. 쉬운 예로 자동차의 발명은 길거리에 널려있는 말똥의 공해로부터 사람들의 삶을 해방시키는 것으로서 크게 환영받았다. 과학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고, 이것은 과학만능주의로 나타났다. 즉, 과학은 하나님을 대신한 현대인들의 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1,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무너지기 시작했고, 증가되는 환경오염과 지구에서 인류가 사용할 에너지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과학 발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철학적으로도 인간 이성의 절대성이 비판받고 과학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인 부분이 있고, 인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니체, 프로이드, 하버머스 등의 학자들은 학문이 이해관계나, 인격성, 신념 등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하였고, 물리학의 발전으로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일 수 있다’는 등의 인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3.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상

하나님 대신에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세웠던 계몽주의 운동은 자신들의 이상향으로 꿈꾸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처럼 다신론과 죄가 가득한 세상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1) 다신론적 사회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불리우는 지금의 시대는 어떤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으며, 비합리주의, 상대성, 다의성, 이질성 등을 인정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수백 년간 고민하며 내린 결론인 것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이 된 인간 이성, 과학은 이제 그 신적인 자리에서 내려와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오만한 자리에 앉았던 서구문명은 천대하던 동양문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양에 있는 철학, 종교 등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이성과 과학의 절대성에 회의를 갖게 된 서양은 이러한 동양의 철학과 종교,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동양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범신론적 가치관과 문화 등이 급속도로 세계에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서양의 신비주의와 쉽게 결합할 수 있다. 뉴에이지 운동 등이 동양적인 범신론적 세계관과 밀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심각하게 인간 이성 및 과학의 절대성을 고민하지 않더라도, 현대인들은 문화적으로 인간 이성 중심의 건조한 사상에 목마르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과학과 인간 이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으며, 다른 의지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만능주의적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과학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과학만능주의적 생각을 아직도 붙들고 있다. 현대 문명은 이와 같이 과학만능주의와 신비주의의 두 가지 어울리지 않는 사상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사상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세계는 다신론적 가치관이 지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 이성과 과학만이 신이던 시대에서, 이제 그것을 포함하여 천사숭배, 악마숭배, 자연숭배 등 다양한 신이 생긴 것뿐이다.


2) 죄의 번창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로마서 1장 21절부터 32절까지 잘 나와 있다. 우상을 숭배하고, 동성연애, 음란, 간음 등 성적인 죄를 짓고, 살인, 분쟁, 비방, 교만, 부모를 거역, 우매, 무정, 무자비 하는 등 상실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런 상실한 마음은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하여, 마약, 도박 등의 쾌락을 쫓게 된다. 점차 마음의 양심의 소리는 작아지고, 죄를 짓기에 익숙하게 된다.  이제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이 죄를 짓는 사람들을 옳다고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로마서의 기록은 지금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컴퓨터의 발전은 가상공간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등장시켰고, 가상공간 내에서는 어떤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 살인, 폭력, 성적인 쾌락 등이 아무런 문제없이 행해질 수 있고, 그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깊은 고민과 사색보다는 즉각적인 반응이 컴퓨터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인간의 죄가 바로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무시한 결과 가상공간에서의 죄악은 실제 현실의 삶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청소년들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다.

마치 노아 시대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람들의 죄가 관영하고, 세상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세상의 죄에 대하여 선지자적 비판을 가해야하는 교회도 세상의 소금과 빛을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모습이야말로 복음을 강력하게 증거해야하는 시대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진정한 신, 창조주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 창조주 하나님이 필요한 세상

1) 절대적 기준이 필요한 사람들

죄의 번창함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목마름을 느끼고 있다. 쾌락을 추구하며 죄를 짓고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어떤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군인 문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절대적 기준에 대한 헌신, 충성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모습인 것이다. 자신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강력한 신적 존재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소개는 신은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창조주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으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신이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위해 존재해야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또한 창조주에 대한 개념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의 절대적 기준이 있음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기준을 바라면서도, 절대적 기준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 뜻에 맞는 절대적 기준만을 찾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만이 참된 절대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된 책이고, 그분의 감동에 의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쓰여진 많은 내용들, 특히 창세기의 기록들이 신화처럼 취급받았지만, 과학적 증거는 도리어 성경의 기록만이 참된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절대적 기준인 성경 말씀이 유일한 진리이며,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마음 밭이 돌로 가득 찬 사람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여러 종류의 밭이 나온다. 복음의 씨가 떨어지더라도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옥토에 떨어져야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있지만, 갈수록 열매 맺는 일은 힘들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진화론적 교육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교육을 계속 받아왔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현실의 쾌락을 제거해야하는 거침돌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으면서도 진리로 향하는 이정표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기원에 대하여 설명하는 진화론은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진화론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진화론의 허구성을 드러내면 이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사상이 깨어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음 밭에 있는 돌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이런 거침돌들을 제거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 열매를 크게 맺을 수 있게 된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의 기록이 진리임을 확신 못하는 기독교인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기 힘들다. 창조과학 강연을 듣거나 책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이 완전히 변화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마음 밭에 있는 돌들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삶의 주인이 자신에서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 또는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할 뿐이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단지 다른 신처럼 잘 보이면 복을 주는 신중의 하나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기 전에, 예수님은 성부, 성령 하나님과 함께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세계의 주인이 되신 분이 종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를 묵상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묵상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창조주 되신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시킬 것을 약속하셨다. 창조주 되신 분은 만물을 통치하시므로 역사의 시작과 끝도 주관하시는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분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복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온전히 통치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복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할 것은 분명하다. 이런 믿음은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해준다. 예수님이 궁극적으로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어 만물을 그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회복하실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동일한 회복이 일어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결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이다 (엡 6:12). 예수님을 유혹했듯이 지금도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성경을 보면 살인자 가인이 쌓은 에녹성에서 찬란한 문화가 꽃피웠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말았다. 노아시대 홍수의 심판 이후에 등장한 사람들도 바벨성을 쌓으며 하나님께 도전하다가 흩어지고 말았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사상이 있어왔고,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창조과학 사역은 진화론이 지배하는 시대에 진화론이 거짓 과학이며, 과학적 증거는 도리어 성경의 기록을 지지함을 보여주는 일을 하고 있다. 그를 위해서는 과학적 연구를 수행해야하고, 연구 결과를 잘 전파할 수 있도록 사람을 훈련시키고, 강연하고, 책을 출판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 창조과학적 지식을 계속 연구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자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을 전파하는 사역자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학교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선교지에서든,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훈련받으면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과학 사역은 하나님의 도구이지 그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진화론과 같은 사상을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고전 10:4,5)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진화론을 비롯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본주의 사상은 과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견고한 진임을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의 증거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믿음에 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믿음을 공고하게 해주고, 복음의 목적을 분명하게 해주고, 선교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지만, 이런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 뿐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전 10:4,5) 

모든 하나님의 사역이 그렇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창조과학 사역도 지식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헛된 사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창조과학 사역자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울의 해박한 지식으로 위대한 서신서가 태어났지만,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던 바울처럼 창조과학자들과 사역자들은 창조과학 지식을 발전시키면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길 소망한다.

미디어위원회
2016-09-15

진화론이 신학에 미친 영향 

(The Influence of Evolutionism on Theology)

박창성  

요약

    1859년에 등장한 다윈(Darwin)의 진화론은 혁명적이라고 할 만큼, 현재까지 모든 분야에 큰 영향을 미처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것은, 창조를 신앙의 기초로 하고 있는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들이 진화론을 보는 시각에 따라, 성경관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다양한 신학 사조로 나뉘게 되었다. 현재 기독교가 여러 교파로 분열된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진화론의 영향에 의한 신학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기 위해서는, 분열을 일으키고 믿음을 약화시킨 공동의 적이 진화론이라는 것을 깨닫고 바르게 대처함으로써, 믿음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Darwin's theory of evolution, called as a revolution, has influenced significantly on every fields since appeared in 1859. Among them, Christianity has been most seriously influenced because its foundation is creation. According to theologians' view on evolutionism, their views of the Bible were varied, and then their theology were varied. One of the important reasons, why Christianity is divided into many sects, is the theological difference caused by evolutionism. Therefore, in order to unite churches into one, their beliefs should be one by acknowledging that evolutionism is their common enemy and responding correctly to it.   

 

I. 서론

현재 기독교는 한 분이신 하나님과 그 분께서 주신 같은 성경을 믿으면서도, 믿음이 같지 않고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신학의 차이로 교회가 분열되고 반목함으로써, 주 안에서 화합하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단합된 공동체로서 사회에 대한 영향이 미약하며,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교회가 쇠퇴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 원인의 중심에는 진화론이 있다. 진화론은 기독교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믿음을 약화시키고 분열시켰으며, 선교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진화론이 우리의 적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본 논문에서는 진화론이 신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역사적 흐름에 따라 고찰하고, 그 결과에 대한 부정적 요소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과학과 신학의 관계

1.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세계, 즉 자연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일반계시이다 (시 19:1, 롬 1:19-20). 따라서 피조물의 세계를 연구하는 것이 과학이므로, 바른 과학은 당연히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창조의 섭리를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에 자연계시를 잘 깨닫지 못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롬 1:21-23). 자연계시는 불완전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며, 항상 특별계시인 성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2.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

더욱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참 하나님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특별계시이며, 그 특별계시를 인간을 통해서 책으로 기록하게 하신 것이 성경이다.

비록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기계적으로 직접 받아 쓴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성경 저자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재능과 특성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을 것이다(딤후 3:15-17). 모든 성경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라면, 성경은 신학과 윤리뿐만 아니라, 과학과 역사, 모든 면에서 오류가 없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진리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며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그림 1.  과학과 신학의 관계 

     
3.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관계

1)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피조물의 세계인 자연을 통해 일반계시를 먼저 깨닫고, 성경을 읽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된다. 또, 성경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연을 바라보면 일반계시를 더욱 쉽게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함께 깨닫도록 해야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있다.

2)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 한 분께서 우주 만물을 지으셨고, 성경 66권의 원저자도 하나님 한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다(말라기 3:6). 따라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전체적으로 서로 모순됨이 없이 일관성(Coherence)이 있어야 하고, 과학과 신학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보완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 때문에 자연을 잘못 이해한 과학이론이 나오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고, 과학과 신학이 갈등을 겪게 된다.

 

III. 진화론이 등장하기 전의 과학과 신학

19세기 초까지 과학,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영국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과학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성경에 대한 의심과 비판이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나, 19세기 초 1830년대 까지는 비교적 과학과 신학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1. 격변설과 창조론 (Catastrophism and Creationism)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창조하셨고, 대륙을 덮고 있는 대부분의 지층과 화석들은 지구전체가 물로 덮인 격변(노아의 홍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2. 정통 신학(Orthodox Theology)의 성경관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학과 윤리뿐만 아니라, 역사에 있어서도 오류가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 도표에서 보는바와 같이,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창세기 1-11장은 약 6,000년 전에 이루어진 창조를 역사적 사건으로 기술한 것이며, 창조의 '날”은 24시간의 하루이고,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인 홍수(global flood)라고 믿었다.

소수의 주석가는 창조주간의 '날”을 지질시대로 해석하여 오래 전에 창조된 늙은 지구로 생각하거나, 노아의 홍수가 신화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에 의해 영감되었으며, 오류가 없고, 역사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도표 1.  성경 주석 비교

(위 도표는 Mortenson, The Great Turning Point, 46p 에서 부분 인용한 것임)

1)'ages ago' 는 지질학적인 오랜 시대 전에 창조되었다는 의미이다.
2)'Day 1'은 창세기 1:1이 6일 창조 중에서 첫째 날의 창조에 해당한다는 뜻이고, ”summary'는 창조주간 전체를 요약해서 한꺼번에 표현한 구절이라는 뜻이다. 'nc'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3)'24 hr'은 창조주간의 ”날'이 24시간의 하루라는 뜻이고, ”ages'는 지질시대와 같은 긴 기간을 의미한다.
4)'global'은 노아의 홍수가 지구 전체가 물로 덮인 전 지구적 홍수라는 뜻이고, ”myth'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신화를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IV. 동일과정설과 다윈의 진화론 등장

1830년대에 들어서서 과학계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오류가 없다고 믿어 오던 성경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과학적 주장들이 등장한 것이다.

지질학자 라이엘(Lyell)이 1830년부터 1833년 사이에 ‘지질학 원리 (Principles of Geology)’라는 3권의 책을 출판하여 동일과정설 (uniformitarianism)을 주장하였다. 이 가설은 대륙에 쌓여 있는 지층과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생물의 화석들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작은 규모의 지질현상들이 오랜 세월 동안 느린 속도로 진행되어온 결과라고 해석하는 이론이다. 이것은 그 때까지 대부분의 지질학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에 의해서 짧은 시간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석해왔던 격변설(catastrophism)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동일과정설이 다윈에게 용기를 주었다. 다윈은 격변설 때문에 지구의 역사에서 하등동물로부터 고등동물로 진화하는데 필요한 긴 시간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꺼운 퇴적층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쌓여진 것이라면, 생물이 진화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남미의 갈라파고스 섬을 여행하면서, 동일과정설과 자신의 진화 가설을 확신하고 돌아와,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판하여 진화론을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이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홍수를 부정하는 지질학의 진화론이라면, 다윈의 이론은 생물의 창조를 부정하는 생물학의 진화론이다. 과거에도 현재와 동일한 지질학적인 사건이 되풀이 되었을 것이라는 동일과정설의 주장은 실제로 관찰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사고에서 나온 가정이다. 그리고 다윈의 진화론도 같은 종(species)내에서 일어나는 변이(variation)만을 목격한 후,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그와 같은 변이가 오랜 세월 누적되어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로 진화(evolution)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 가설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진화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반박할 만큼 유전학과 같은 과학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이 당시의 특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진화론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퍼져나가게 되었다.

 

V. 기독교계의 반응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창조를 부인하는 진화론이 널리 퍼지게 되자, 과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독교 진영에서는 이 진화론에 대해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반응이 나왔다.

첫째, 진화론을 잘못된 이론으로 간주하고,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오던 성경에 대한 정통적인 신앙을 지켰다.

둘째, 성경과 진화론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여 조화를 이루려는 방향으로 타협하였다.

셋째, 진화론을 과학적 진리라고 생각하여, 정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추구하였다.

 

VI. 창세기 해석의 변질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직접적인 도전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은, 창조와 노아의 홍수, 바벨탑 사건에 대한 기록이 포함된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이다. 진화론이 타당성 있는 과학이론이라고 생각한 신학자들은 진화론의 공격으로부터 창세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주로 믿어오던 것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되었다.

 

1. 유신론적 진화론 (Theistic Evolutionism)

우선 성경과 진화론의 충돌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생물을 창조하신 후, 진화의 방법을 통해서 여러 종류의 생물들을 만드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전향하였다.

이 이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주간의 내용이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절충한 것이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 성경의 기록은 진화론의 주장과 다르다. 성경에는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변형하여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언제나 각 생물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2) 진화론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속성과 맞지 않는다. 진화론의 핵심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다. 하나님께서 싸움을 시켜서 약한 자를 없애고 강한 자를 남게 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생물들을 만드셨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불쌍하고 세상에서 버림받는 자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꺼이 이 땅에 오셔서 희생당하셨다.

(3) 진화론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맞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생물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두 알고 계시며,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 왜 오랜 세월이 걸리고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불확실한 방법으로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생물들을 만드시겠는가?

성경을 방어하기 위해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타협한 것은, 사실상 실질적인 내용은 진화론이 차지하고 하나님을 명목상의 창조주로 전락시킨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신론적 진화론은 현재까지 가톨릭의 공식적인 견해가 되어있고, 개신교에도 널리 퍼져있다.

 

2. 날-시대이론 (Day-Age Theory)

동일과정설이 나온 이후, 지구의 나이를 매우 오래된 것으로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자,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날'(day)을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고생대, 중생대와 같은 지질학적 '시대'(age)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바꾸어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날'을 지질시대로 볼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질시대로 해석한다고 해서, 진화론과 같은 내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창세기의 내용은 연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진화론의 주장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 창세기에서의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여진 히브리어의 'yom'은 24시간의 '하루' 이외에 정해지지 않은 기간(indefinite time)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전후 문장을 살펴보면 어느 의미인지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히브리어 문법상 하나, 둘 ,셋, 혹은 첫째, 둘째, 셋째와 같은 수를 세는 단어가 앞에 나오는 경우는 예외 없이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한다. 만약 '날'이 긴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날이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 출애굽기 20:11에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명하시면서 ”이는 엿새(six days) 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고 직접 하신 말씀이 기록 되어있다. 만약 '날'이 지질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6억 년 동안 일하고 1억 년 동안 쉬라는 말씀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7일마다 주일을 지키고 있는가?

(3) '날'을 지질시대로 바꾸어서 해석하는 것은 진화론에서 수십억 년이라고 주장하는 지구의 역사에 성경을 맞추어 보려는 의도가 들어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동물과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일이 반복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성경 말씀과는 달리 죽음, 질병, 고통을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말함으로써 복음의 기초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다.

아담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었으며,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기 전에는 인간에게 육체적 죽음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롬 5:12, 고전 15:45). 인간에게 내려진 육체의 죽음 대신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만약 원래부터 인간이 육체적으로 죽도록 창조된 것이라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

 

3. 간격 이론 (Gap Theory)

오래된 지구의 나이에 성경의 연대를 맞추는 방법으로, 6일 창조주간의 길이를 늘이려고 한 것이 날-시대 이론이라면, 창조주간의 앞에 긴 시간을 두려고 한 것이 간격이론이다. 

간격이론의 주장은 창세기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사탄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나님께서 큰 홍수(Lucifer's flood)를 일으켜 전 지구의 생명체를 멸하셨고, 그 때문에 2절에서 지구는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3절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창조하셨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수십억 년의 지질학적 시간 간격이 있기 때문에, 성경상의 지구의 역사는 매우 긴 것이어서 현대 과학에 비추어 볼 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층 속에서 발견되는 많은 화석들은 노아의 홍수 때문이 아니라, 1절과 2절 사이에 일어난 Lucifer의 홍수로 인해서 죽은 생물들의 잔해라고 생각한다.

간격이론의 골자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생물들을 멸하시고 다시 창조하셨다는 것인데,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1)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6일 동안 지으셨다는 성경말씀과 모순된다. 출애굽기 20:11에서는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을 6일 동안 지으셨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는데, 그 긴 간격을 어디에 넣을 수 있겠는가?

(2) 2절의 ”혼돈하고 공허하며”는 무질서하고 폐허가 된 상태(chaotic and ruined)라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형태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고 아직 생명체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비어있는 상태(unformed and uninhabited)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3) 날-시대 이론과 마찬가지로, 죽음, 질병, 고통을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말함으로써 복음의 기초를 무너뜨린다.

(4) 간격이론은 노아 홍수의 증거를 없애버림으로써 의미를 약화시킨다. 만약 화석이 Lucifer의 홍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노아의 홍수는 무슨 일을 한 것인가? 간격이론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지도 않는 Lucifer의 홍수를 전 지구적인 홍수로 가정하고, 노아의 홍수를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홍수로 격하시킴으로써 노아의 홍수가 지닌 앞으로 오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로서의 귀중한 의미를 약화시킨다(벧후 3:2-14).

 

4. 창조와 노아의 홍수를 신화로 해석

이라크의 니느웨(Nineveh) 유적지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를 서사시 형태로 기록한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1849년에 발견된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 서사시는 창조에 대해서, 1853년에 발견된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는 홍수에 대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서사시들에 기록된 내용이 창세기의 창조와 노아의 홍수에 대한 내용과 유사점이 많고, 창세기가 기록된 시기보다 앞선 유물이라고 보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퍼져있던 신화를 차용하여 창세기에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말하자면, 창세기의 창조와 노아의 홍수에 대한 기록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사점이 많고 기록된 시대가 앞섰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경이 그 신화들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세히 비교해 보면, 성경과 매우 다른 부분도 많고, 창세기의 내용은 역사적, 지질학적 증거가 뒷받침되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반면에, 서사시의 기록들은 주로 이치에 맞지 않거나 비과학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나라들에서 창세기의 창조,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신화가 발견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 사건 이후 전 세계로 흩어져 살게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가 구전되어 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사실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기록된 성경을 갖게 되었지만, 이방지역에서는 그들의 문화에 맞는 신화로 각각 변질되어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표 2.  진화론의 등장 전, 후의 창세기 해석 비교  


VII. 성경관의 변질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신론적 진화론, 날-시대 이론, 간격 이론을 주장하고 창세기의 기록을 신화로 해석한 것은, 성경적 근거로 판단하기보다는 진화론에 맞추어 창세기를 왜곡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진화론의 공격에 믿음을 잃고 타협하자, 성경에 대한 불신은 필연적으로 성경 전체에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다.

벨하우젠 (Wellhausen, 1844-1918)은 모세오경이 서로 다른 저자들이 기록한 네 개의 문서를 후대의 유대인들이 편집하여 만든 것이라는 문서설을 주장하여, 성경의 기원으로서 하나님의 영감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불트만(Bultmann, 1884-1976)은 복음서에 옛날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나온 신화가 많기 때문에, 신화를 벗겨내고 현대인들에게 맞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수님의 동정녀탄생, 부활, 승천, 기적을 행하신 일들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에 대한 믿음이 전체적으로 흔들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정통적인 성경관에서 변질된 성경관이 나오게 되고, 그에 따라 여러 갈래의 신학 사조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VIII. 신학 사조의 분화

진화론을 과학적 진리로 여기고 수용하여, 성경을 진화론에 맞추어 다시 해석함으로써, 이제까지 믿어 오던 정통 신앙과는 전혀 다른 신앙을 만든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미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1768-1834)로부터 시작하였으나, 진화론이 등장한 이후 리츨(Ritschl, 1822-1889), 등에 의해 계승되어,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고 비평하는 인본주의 신학이다. 성경의 권위보다는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하신 교훈에만 권위를 두고, 성경에 계시된 사건들의 객관적 역사성을 부정한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나오게 된 신학이 유럽의 신정통주의와 미국의 근본주의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1차 대전을 기점으로하여 쇠퇴하였으나, 아직도 기독교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신학사조들의 성경관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정통 복음주의 (Orthodox Evangelicalism)5)

정통 복음주의는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종교개혁가들이 지켜온 정통 보수신앙이다. 정통 복음주의는 성경을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완전 영감되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오류가 없는 궁극적인 권위로 생각한다.

5)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자유주의에 대하여 강경한 근본주의와 비교적 온건한 신자유주의를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경의 완전 영감과 무오성을 믿는 정통 보수 신학으로 정의하였다.

2. 자유주의 (Liberalism)

자유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부정하였다. 창조, 노아의 홍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부활, 기적을 행하신 것까지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성경의 완전 영감과 무오성을 부정하였다. 성경의 일부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나머지는 사람의 글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내용을 기록한 부분은 영감을 받았지만, 역사나 과학적인 현상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영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은 영감 받은 부분과 영감 받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이 성경보다 우위에 서서 믿을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하게 된다는 점이다. 간단한 역사적, 과학적 사실조차도 실수를 포함하여 기록한다면, 누가 나머지 영적 문제를 다룬 글들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3. 신정통주의 (Neo-orthodoxy)

바르트(Barth, 1886–1968)에 의해서 시작된 신정통주의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고,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의 진실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신정통주의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개체이지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는 아니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만나면, 그 때서야 비로소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중간 역할을 할 뿐, 그 자체로는 오류가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의 책이라고 보는 것이다. 독자가 감동을 받아야 영감을 받은 책이 된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영감을 받은 책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한낱 사람이 쓴 책에 불과할 것 아닌가? 객관적인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신정통주의의 계시개념은 비성경적이다.

도표 3.  신학사조와 성경관의 비교 

 

IX. 기독론, 구원론, 다른 종교에 대한 입장의 차이

창세기는 복음의 기초가 되는 창조, 인간의 범죄, 타락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구원론에 있어서 정통 복음주의 신앙과 큰 차이가 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종교에 대한 견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자유주의는, 철학화 되었거나 실재(reality)와 연결되지 못한 관념적인 종교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차이를 잘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해서 포용적, 혹은 다원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게 된다. 

1. 복음주의

아담 하와의 원죄와 인류의 타락,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는다. 창조주이시면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그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게 된다. 성도들의 영적 변화와 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수님만이 참 진리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다. 다른 종교는 진리를 바로 찾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어선 것으로 보고,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2. 자유주의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인류의 타락을 부정하므로,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도 부정한다. 내세보다는 현재의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다. 예수님께서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억눌린 자를 위해서 오셨다고 믿기 때문에, 사회의 정의가 실현되고, 변화되는 것을 구원으로 본다. 따라서 개인의 영혼 구원을 위한 선교보다, 가난한 자, 약한 자, 억압받는 자를 위한 사회 구원에 더 관심이 많다.

예수님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부활을 부정하고, 그 대신 인성을 강조한다. 기독교를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포용하거나 다른 종교에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를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대등하게 생각하는 것은 창조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X. 교회의 분열과 쇠퇴

1. 교회의 분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화론의 영향으로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신앙과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서 스펙트럼처럼 여러 갈래로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사실상 정통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같이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같은 신학적 견해를 가진 교회들 끼리 교파를 이루어 분열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강조하는 부분과 특성에 따라 교단을 이루었지만, 그 후 각 교단들이 분열한 원인들 중에는 신학적 차이가 중요한 문제로 작용하였다.  

1929년 미국 프린스톤 신학대학과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의 분열, 1953년 한국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의 분열, 1959년 예수교 장로회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나누어진 것은 신학의 차이로 분열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현재도 미국은 동성애에 관한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고 있으며, 한국은 WCC(세계교회협의회) 문제로 교단간의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이와 같이 분열된 교단, 교파간의 반목과 갈등은 기독교의 연합을 해치게 되고, 사회에 대한 복음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반기독교 정서를 불러일으켜서 선교에도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교회의 쇠퇴

현재 세계적으로 볼 때, 많은 나라들의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이 성행했던 유럽의 교회들은 대부분 쇠퇴하였다. 영국은 반세기 전만해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교회를 다녔는데, 이제는 5% 이하로 줄어들었다. 세계 제일의 선교국인 미국조차 급속도로 세속화 되어 오히려 선교지로 변하고 있으며, 한창 급속도로 부흥하던 한국 교회도 정체내지 쇠퇴기를 맞고 있다.

이렇게 교회가 쇠퇴하게 된 원인의 중심에는 진화론이 있다. 기독교 여론조사 기관인 Barna Group 의 최근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교회를 다니던 자녀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집을 떠나면, 그들 중 70%가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진화론 교육으로 성경을 의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Barna Group의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는 개신교인의 8% 만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더욱 놀라운 것은 목회자는 51% 만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6) 이와 같은 통계들은 교회가 쇠퇴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진화론은 성경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고 복음을 파괴한다. 교회가 진화론과 타협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게 되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잘 말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교회는 쇠퇴하고, 성경의 권위를 믿는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6) The Barna Group, Most Adults Feel Accepted by God, But Lack a Biblical Worldview, August 9, 2005

https://www.barna.com/research/most-adults-feel-accepted-by-god-but-lack-a-biblical-worldview/

 

XI. 결론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서로 일치한다. 피조물의 세계인 자연은 성경에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자연을 연구하는 과학과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이 서로 반목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진화론 때문이다.

진화론은 참된 과학이 아니라, 인간이 영적으로 어리석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계시를 왜곡하여 해석한 잘못된 과학 이론이다. 생물은 자연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진화했다는 화석상의 증거가 없다. 더구나 DNA에 저장되어 있는 정교하게 설계된 정보가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는 한, 진화론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 가설로 시작된 진화론이 정설로 입증도 되기 전에 널리 퍼져서, 학문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지만, 언젠가 붕괴될 날이 올 것이다.

따라서 진화론과 타협한 성경해석과 진화론을 수용한 자유주의 신학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정죄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모두 진화론의 피해자들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들도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서 진화론에 맞춘 신학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로 자신들의 신앙이 옳다고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진화론이 우리 모두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진화론이 기독교 안에 깊숙이 들어와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분열하게 만든 것이다. 다시 연합하려면, 성경에 대한 믿음을 되찾고 바른 신앙으로 돌아와야 한다. 믿음이 각자 다르면서, 교회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모든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거짓과학인 진화론의 도전에 담대히 맞서서, 하나님의  창조와 그 분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주안에서 한 마음, 한 믿음이 되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를 부흥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Davis, Percival and Dean H. Kenyon. Of Pandas and People: The Central Question of Biological Origins. Dallas, TX: Haughton Publishing Co., 1993.
(2) Elwell, Walter A.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2nd e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1.
(3) Erickson, Millard J. Christian Theology.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5.
(4) Hiebert, Paul G. 'Cultural Differences and the Communication of the Gospel” in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1999.
(5) Morris Henry M. and John D. Morris. The Modern Creation Trilogy Vol. 1. Scripture and Creation.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7.
(6) ________. The Modern Creation Trilogy Vol. 2. Science and Creation.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97.
________. The Long War against God. Grandrapids, MI: Baker Books, 1989.
(7) Mortenson, Terry. The Great Turning Point. Green Forest, AR: Master Books, 2004.
(8) 목창균, 현대 신학 논쟁. 서울: 두란노, 1995.


출처 - 2012. 국제학술대회

미디어위원회
2016-09-14

무신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일어난 일

: 기독교 세뇌한다고 자녀를 빼앗겼던 노르웨이의 부부

권혁상 


       2015년 11월 중순, 노르웨이 나우스트달(Naustdal, 주민 1,100여명)에서 살고 있는 마리우스 보드나리우(Marius Bodnariu) 가족에게 일어난 악몽과 같은 끔직한 사건은 진화론 즉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독교인이 당할 수 있는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세상이 어떠할지를 보여주는 예고편 같은 사건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편 마리우스는 시장 집무실의 IT 엔지니어로, 그리고 아내 룻 보드나리우(Ruth Bodnariu)는 지방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는 기독교인 부부로, 생후 3개월 된 아이부터 중학교 재학 중인 장녀까지 3남2녀를 양육하고 있는 행복한 부부였다. 이들 부부는 루마니아의 한 기독교 자선 센터에서 만나, 불우한 아이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복음전하는 사역을 하다가 결혼하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환경을 제공하려고, 아내 룻의 고국인 노르웨이의 소도시 나우스트달로 이주하여 약 10여 년째 살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중학교 다니는 장녀가 학교 친구들과 이야기 하는 중 ”하나님이 죄를 벌하신다”고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들은 교장선생님이 그 학생이 ”광신적인 기독교인 부모로부터 기독교 세뇌적인 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우려하여, 아동복지기관인 '바르네베르넷(Barnevernet)”에 신고하면서 벌어졌다. 바르네베르넷은 학교에 있는 두 딸을 데려가 여러 유도 질문을 하면서 부모들에게 맞은 적이 있냐고 물었고, 딸들은 그들이 잘못하면 부모가 손바닥으로 등이나 머리를 때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바르네베르넷은 경찰과 함께 집에 있던 두 아이를 그 부모로부터 빼앗아갔고, 그 다음 날(11월 17)에는 생후 3개월 된 아들까지 빼앗아갔다. 그리고 그 부모는 자녀에게 신체적 학대를 했다는 이유로 자녀양육권을 빼앗겼다. 5남매들은 양육을 위탁 받은 3가정으로 나뉘어 보내진 후, 생후 3개월 된 아들은 한 주에 2번, 두 아이들은 한 주에 한 번 방문이 허락되었고, 장녀와 차녀는 아예 부모와 만남을 차단하였다.

남편 마리우스의 동생 다니엘에 따르면, ”형과 형수는 보통의 기독교인 부부로서 결코 자녀들을 학대한 적이 없고, 잘못하면 약한 체벌만 가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바르네베르넷은 자녀들을 병원에 데려가 물리적으로 학대 받은 증거를 찾으려고, 피부검사, CT 촬영 등을 했지만, 그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바르네베르넷은 자녀들을 빼앗아가는 과정에서 그 부모들에게 확인도, 설명도 하지 않았고, 그 이웃 사람들에게 보드나리우 부부에 대한 인터뷰 조사도 하지 않았다.

자녀를 돌려 달라는 탄원이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수차례 거부되자, 보드나리우 부부는 그들의 억울한 내용을 인터넷 (http://bodnariufamily.org/)에 올려 세상에 알렸고, 이를 알게 된 기독교인들이 루마니아, 미국, 캐나다, 스페인의 노르웨이 대사관 앞에서 항의 데모를 지속적으로 벌여, 결국 사건 발생 7개월 후인 2017년 6월 14일, 바르네베르넷은 다섯 자녀들을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자녀들을 돌려받았지만, 보드나리우 부부는 지역 경찰과 아동복지기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고 있다. 현재 보드나리우 부부는 가족의 치유와 평화를 찾아 루마니아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루터교가 국가종교로, 명목상으로 인구의 83%가 기독교로 분류되어, 왕 즉위식, 결혼, 장례, 세례가 루터교 의식으로 진행되는 나라다. 그러나 최근(2010년) 조사에 따르면,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슬람 포함)은 22%에 불과할 정도로 대부분은 무신론자다.

왜 기독교 국가인 노르웨이가 참 기독교인이 급격히 줄어, 인구의 약 80%가 무신론자가 되었을까? 이는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한데, 100여 년 전부터 진화론을 학교에서 교육한 후 벌어진 일이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고 무신론자들의 믿음에 불과한데, 이를 과학인 것으로 공교육에서 가르친 결과, 무신론자들이 양산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나치 정부의 홍보 장관인 괴벨스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의심받지만 자주, 오랫동안, 크게 말하면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과학적 증거가 전혀 없는 거짓의 진화론도 중·고등학교 6년 동안 과학시간에 지속적으로 배우게 되면, 진화론을 과학으로 믿게 되고, 결국 무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보드나리우 가족의 장녀가 재학 중인 중학교 교장선생님도 진화론의 피해자로서 ”하나님이 죄를 벌하신다”고 무심코 이야기한 장녀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교장 본인은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어린 학생(장녀)이 1)하나님은 계시며, 2)그 하나님이 죄를 지으면 벌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장녀가 이단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으로 보았고, 그 주범이 장녀의 기독교인 부모로 판단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신고를 받은 아동복지기관, 즉 바르네베르넷 직원이나 지역 경찰, 법원 판사 등 모두 교장선생님과 같이 무신론자 입장에서 이 사건을 처리한 점이다. 이들에게는 부모가 자녀들의 나쁜 행실을 바로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머리나 등을 때린 것을 아동학대로 간주한 반면, 보드나리우 부부는 성경 말씀대로 자녀의 올바른 행실을 위해 자녀들의 적절한 체벌은 사랑의 매(회초리)로 본 것이다 ;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거니와 그를 사랑하는 자는 어릴 때에 그를 징계하느니라” (KJV 잠 13:24).

”그(자녀)를 회초리로 때려서 그의 혼을 지옥에서 건질지니라” (KJV 잠 23:14).

미국은 25개 주에서 과학시간에 진화론과 창조론을 균형 있게 가르쳐, 학생들에게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진화론과 창조론을 동일한 비중으로 과학교육에 반영하여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 국내 교회를 비롯한 기독교계에서 사이비 이단 종교에 대하여는 크게 경계하지만, 공교육에서 무신론자를 대량으로 양산하는 진화론 교육에 관대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배운 진화론으로 무장된 학생들이라도 창조과학 사역자들이 진행하는 1시간의 창조과학 강의를 듣고 대부분 진화론이 잘못된 것을 깨닫는 점이다. 기독교계가 진화론 교육에 무관심 하는 한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무신론자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 성경은 불법서적으로, 그리고 참 기독교인들은 마치 사이비 이단 광신자로 취급 받는 세상, 즉 보드나리우 가족이 경험한 무서운 세상이 올 것이다.

 

*관련기사 : ”다섯 아이를 뺏겼어요!” 기독교인 부모의 눈물…전세계 항의시위 (2015. 12. 30.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206859&code=61221111&sid1=mis&sid2=0010

노르웨이 정부, ”하나님께서 죄 벌하신다” 는 가정교육 이유로 자녀 양육권 박탈하고 입양 추진(2016. 1. 4. 목장드림뉴스)
http://www.p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97

‘기독교 세뇌’한다고 자녀 빼앗긴 노르웨이 부모, 양육권 회복 (2016. 6. 8. 복음기도신문)
http://gnpnews.org/archives/20697?ckattempt=1

출처 - 대전지부 소식지 GooD 42호

미디어위원회
2016-06-03

과학 발전의 기초가 됐었던 신학 

(How Theology Informs Science)

by Jake Hebert, Ph.D.


      한때 '신학(theology)'은 학문의 여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증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무의미한 연구 분야로 간주하고 있다. 결론은 이것이다. 만약 성경이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신화나 오류투성이의 책이라면, 그것을 연구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명백한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시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 그 말씀에 대한 연구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무신론자들과 성경 비판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은 물리, 화학, 수학과 같은 '진정한' 학문과 같지 않게, 인간의 지식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이며 무신론자인 로렌스 크라우스(Lawrence Krauss)는 이렇게 말했다 :

정말로 나는 과학의 여명기부터 적어도 지난 오백 년 동안, 신학(theology)이 지식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보라고 여러 신학자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도 거기에 대해 반증 사례를 제시한 신학자는 없었다.[1]

이러한 주장과는 달리, 반증 사례가 존재한다. 성경에 기초한 신학은 좋으며, 우리의 창조주와 올바른 관계를 갖는 데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기여하고 있다. 보통의 경우 그 기여는 미세하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놀랍도록 직접적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과학을 가능하도록 만든다.[2] 과학은 관측에 의존하기 때문에, 감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이 세계에 대한 정보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과학적 연구는 무의미하다. 당신이 관측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사실인지 아닌지,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당신의 뇌가 당신이 보고 있거나 듣고 있는 정보들을 전기적 자극으로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은 신실하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 세계에 대한 정보가 감각(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신)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고 예상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우주가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비교적 드문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 행동할 것을 예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고린도전서 14:33)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신학은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인 ‘에너지보존 법칙’과 같은 것을 발견하는 데에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했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뭔가가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능력으로 에너지를 생각한다. 이 법칙은 어떤 에너지가 다른 종류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는 있지만, 에너지 자체가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제임스 주울(James Joule)은 1파운드의 물을 화씨 1도 상승시키는 데에 필요한 마찰의 양은 동일한 량의 기계적 작업 772 foot-pounds의 결과와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에너지보존 법칙의 공식에 있어서 한 중요한 스텝이었다. 그의 발견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서, 물리학자들은 에너지 단위에 줄(joule)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주울의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그의 신학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3]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주울은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창조하거나 소멸시킬 수 있으시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혔었다 :

내가 확인한 것은 소멸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창조주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 수행될 때 힘(오늘날 ‘에너지’로 말해지는)의 소멸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잘못된 것이다.[4]

그래서 크라우스의 주장과는 다르게, 신학(세속 과학과 타협한 신학이 아닌, 좋은 신학)은 자연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5]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태복음 7:18) 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 세계관이 현대 과학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시대에 신학의 사용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추가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 모두에서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References

1.Krauss, L. 2012. A Universe from Nothing. New York: Free Press, 144.
2.Lisle, J. 2009. The Ultimate Proof of Creation. Green Forest, AR: Master Books.
3.Weisstein, E. W. Joule, James (1818-1889)Wolfram Research. Posted on scienceworld.com, accessed March 7, 2016.
4.James Prescott Joule. New World Encyclopedia. Posted on newworldencyclopedia.org, accessed March 7, 2016.
5.It is ironic that Krauss (reference 1) attempts to find loopholes in conservation of energy so that a universe can come into existence without the need for a Creator. One can only wonder what Joule would have thought of this.

* Dr. Hebert is Research Associate at the 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 and received his Ph.D. in physics from the University of Texas at Dallas.

Cite this article: Jake Hebert, Ph.D. 2016. How Theology Informs Science. Acts & Facts. 45 (5).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9293

출처 - ICR, Acts & Facts. 45 (5). 2016.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3

대표전화 02-419-6465  /  팩스 02-451-0130  /  desk@creation.kr

고유번호 : 219-82-00916             Copyright ⓒ 한국창조과학회

상호명 : (주)창조과학미디어  /  대표자 : 박영민

사업자번호 : 120-87-70892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21-서울종로-1605 호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26길 28-5

대표전화 : 02-419-6484

개인정보책임자 : 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