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세대를 위한 디지털 전환을 시작하며
온 세상과 교회가 너무나 힘들었던 2021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희망과 꿈을 꾸며 2022년 임인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지난 한해 저희 한국창조과학회에 부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저희 창조과학회의 사역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대면 강의가 불가능해지고 내부적으로도 모든 모임과 행사가 온라인화되다 보니 우리 창조과학회 특유의 끈끈한 결속력이 점점 약해지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신의 일을 새롭게 시작하셨습니다. 지난해 저희 한국창조과학회 온라인 교육과정은 역대 경험해 보지 못한 많은 분이 전국적으로 참여해 주셨습니다. 기본과정부터 전문사역자과정을 수료하신 많은 분이 다음 과정의 조장으로 섬겨주시는 동역이 일어나며, 무엇보다 해외에 계신 많은 선교사님과 군 선교사님들이 함께 하셔서 놀라운 창조과학 사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작년 한국창조과학회 40주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돌봄’이라는 비전을 선포하며 이를 위한 학회 사역의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전환은 4차산업혁명 시대 속에서 사역하는 우리 학회의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창조과학회는 전임 회장님 재임부터 ‘한국교회와 다음 세대’를 세워가는 것을 우리의 비전으로 목표로 선포하였습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들의 중심 세상인 디지털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폭력과 음란으로 물들어 있는 디지털 세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한 컨텐츠로 다음 세대와 접촉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작년부터 ‘메타버스 기반 디지털 노아방주 전시관’ 구축을 1차 3년 계획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세대들이 이 디지털 공간에서 재미있게 창조과학 컨텐츠를 접하도록 하며, 차세대 창조과학 교육 플랫폼으로 자리잡아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리적인 세상뿐만 아니라 디지털 세상을 어떻게 돌보고 세워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지금부터 우리 창조과학회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됩니다. 2022년 새로운 디지털 전환 사역을 시작하며 우리 학회의 ‘창조지’를 전면 디지털로 전환하였으며, 이번에 새롭게 시작한 ORJ(Origin Research Journal) 학술지도 온라인으로 발간을 시작하였습니다.
한국교회 미래의 유일한 대안은 건전한 성경적 창조신앙의 선포와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다음 세대를 세워가는 일에 표어나 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안과 도구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한국창조과학회는 2022년도 열정과 창의적인 도전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는 일에 함께 부르심을 받아 동역하는 것이 너무나 큰 기쁨입니다. 위기의 한국교회와 다음 세대를 성격적 창조신앙으로 세워나가는 일에 눈물로 기도해 주시고 끝까지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교회와 온 세상을 향한 ‘거룩한 충격(Holy Impact)’입니다.
2022년 첫날 폭풍우로 시작하는 미국에서..
2022년 1월 1일
한국창조과학회 8대 회장
이경호 배상
창조신앙으로 지혜롭게 살아가기!
이은일
창조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지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지혜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창조를 알면 세상이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가 인간의 범죄로 훼손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며 구원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죄악에 대해 놀라지 않고, 그렇다고 실망하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미 궁극적인 승리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과 끝을 알고 있으니 중간 과정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 애청자가 드라마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드라마의 맥락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장면을 보면서 왜 사람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드라마의 맥락을 알고 있어야 중간에 전개되는 스토리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창조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드라마 애청자와 같이 인류 역사의 맥락을 알고,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신앙의 지혜와 하나님의 성품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드라마와 같은 역사가 나에게 펼쳐질 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갔을 때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창조신앙의 지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선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요셉은 노예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사람으로 살았고, 이집트의 총리가 되지 못하고 그렇게 일생을 마쳤을지라도 결코 후회스러운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의 표현처럼, 그릇이 그릇을 만든 토기장이에게 항의할 수 없듯이 모든 상황에서 그분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이다. 물론 요셉도 자신의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고, 바로의 신하들에게 탄원한 것처럼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의 결정이 나의 뜻과 다르다고, 내가 원하는 때에 바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없다. 그분은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선한 뜻은 반드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분의 선한 뜻은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창조목적과 존재 이유를 알게 하시고, 그 뜻이 이뤄지도록 훈련시키고 전진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뿐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해야 할 때도 반드시 필요하다. 모세의 예를 생각해보자.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왕자로서 누리고 있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는 놀라운 신앙의 결단을 하였다. 그런데 그 결단 이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만다. 모세의 결단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존경받을 만 했지만, 믿음의 결단 이후 모세의 행동은 급했고 잔인했다.
창조신앙의 지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고 해도 우리의 힘을 사용해서 그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할 때라고 믿는다면 이런 행동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유함과 겸손함, 공의로움과 거룩함, 거짓 없는 깨끗함과 오래 참음, 무엇보다 사랑의 능력이 나의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가?”
창조신앙의 지혜와 교회 공동체
창조신앙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이유는 이세상의 모든 질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년 이상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태양계를 질서정연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해서 인류역사에 크게 기여한 많은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믿었고, 그로 인해 과학의 큰 진보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진화론이 교육과 학문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 지식의 탑을 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은 하나님 대신 기원을 설명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일 뿐이며, 증명되지 않은 이론을 과학이라고 포장할 뿐이다. 과학적 발견들을 하나님의 설계로 설명하면 단순명료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진화론자들은 수많은 논문을 써서 복잡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면서 혼란만 가중할 뿐이다. 최근 유전자 정보에 대한 연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복잡하고 절묘한 설계들은 진화론적 해석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처럼 진화론은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연과학의 범주를 벗어나 인문학에서도 주된 이론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죄악과 다양한 행동들을 진화론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은 결국 인간의 죄를 정당화시키고, 사람을 물질과 동물의 수준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인간의 존재이유는 쾌락일 뿐이라며 인간의 성적인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결혼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또한 성관계는 남자와 여자 사이가 아니어도 가능하며, 남자와 여자라는 기준 자체가 편협한 것이고, 스스로 자신의 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교육하고 있다. 창조신앙의지혜는 이러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더욱 돋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창조신앙의 지혜를 세상에 잘 전달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켜야한다고 말하면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논리적이고 따뜻한 스토리를 만들어야한다.
창조신앙의 지혜는 창조신앙에 바탕을 둔 지식과 지혜를 세상에 나눠주는 것이다. 가정을 이루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자녀를 갖게 되면 얼마나 기쁘고 복된 것인지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사회와 국가가 이런 일을 더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일에도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환경오염을 막고 창조질서를 복원하는 행동에도 세상의 논리가 아닌 기독교적 논리를 가지고 적극 참여해야 한다.
창조신앙의 지혜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유주의와 집단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공리주의와의 논쟁을 머리 아프게 다루었다. ‘ 개인의 자유’ 와 ‘ 사회의 공익’ 모두 매우 중요한 것이며,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희생시킬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귀중한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이 책이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미국 대법원의 판결을 분석한다. 합헌 결정을 내린 근거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다면 왜 국가가 결혼에 대하여 관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결혼이 개인의 선택 문제라면 국가가 결혼제도를 관리하지 말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국가가 결혼을 관리하는 것은 가정이 건강해야 국가사회가 건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동성 결혼 합헌 결정은 건강한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 국가사회의 노력과는 상반된 가치를 지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자유와 공익의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떤 해결 방법이 있을까? 저자는 그 해결책으로 ‘공동체’ 를 제안하였다. 공적인 이익에 의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유의지로 희생을 선택해서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공동체를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체가 세상에 있는가? 바로 교회 공동체만이 세상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저자 자기도 모르게 결론내리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교회 공동체를 지금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진정 자신의 희생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사례들이 얼마나 있는지 안타깝다.
예수님께서 그 희생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세상이 바라는 공동체의 모델이라고 교회를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 안에서 진정 자유롭고, 헌신과 희생을 통해 모든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라고.
출처 : 온누리신문(2021.10.3)
창조, 그 놀라운 신비 : 하나님 말씀과 능력에 대한 신뢰가 근원
정성수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학생 때부터 교수님들께 한결같이 듣는 말이었다. 당시 내게는 선뜻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도 진단조차 내리지 못하던 그때, 그분들은 단몇 분 만에 척척 진단을 내리고, 치료 결정을 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웠기에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말이 충격이었다. 이제는 나 역시 학생들에게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말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날 엄청난 양의 과학 정보가 쏟아져 나오지만, 사실 과학자들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고백이다. 피조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보이심에 감사할 뿐이다.
우리는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에 대해 무지하다. 나 또한 세포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소기관이 있고, 인간이 만든 어느 기계장치 보다 훨씬 많은 10억 개 이상의 부품으로 구성되어있다는 단순한 지식만 알 뿐이다. 세포는 생명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일치된 목적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작동하고, 뛰어난 안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이 동시에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1:500,000 축척의 서울시 전도(全圖)를 보면서 아무것도 없는 평면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세포도 마찬가지로 겉보기에는 별것 없어 보이지만, 확대해 들어가면 그 규모와 정교함이 어마어마하다. 내가 아는 아주 부분적인 지식 범위에서도 그 작은 세포가 최소 서울시 이상의 도시와 같은 역동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예를 들면 시청, 발전소, 전기 송전, 유지보수시스템, 화학 공장, 조립공정, 분해, 교통, 통신, 검문, 경찰, 폐기물 처리, 재활용 등의 역할을 하는 모든 것이 세포 내에 있다. 세포 소기관보다 작은 단위인 분자 모터 같은 장치 단백질에도 적용되고 있고,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 및 연합되어 기능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경이 그 자체이다.
필자가 진료하는 대상인 폐포도 마찬가지다. 폐포는 산소와 이산화탄소 교환이 일어나는 호흡의 기능 단위이다. 폐포는 직경 약 0.3mm크기의 미세한 주머니로, 폐포벽의 두께는 가스교환이 잘되도록 0.01mm 정도로 얇다. 호흡에 따라 폐포가 접혔다 펴졌다를 반복하는데 1시간에 약 1천 번 정도 물리적 스트레스가 가해지는 셈이다. 폐포 보다 10배나 두꺼운 A4 용지라면 찢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폐포는 수십 년 동안 손상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 얇은 폐포벽에는 모세혈관이 배관 되어 있고, 기가 막힌 스프링 구조가 갖춰져 있다. 폐포의 스프링 구조는 들숨에 의해 당겨진 스프링에 탄성이 발생하고, 이에 의해 날숨은 거저 쉬게 된다. 이런 스프링 구조가 없다면, 우리는 숨을 내쉴 때 마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 발생한다. 호흡을 통해 산소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산소는 물속에 많이 녹아 들어가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는 장치가 헤모글로빈이다. 산소를 있어야 하는 조직에 운반해줘야 한다. 이를 해결하는 운반 차량이 적혈구이다. 적혈구라는 아주 큰 대형 트럭에 산소를 붙들어 매어 싣는 헤모글로빈이라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이 좌석은 조직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산소를 놓아주는 자동화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폐포는 이렇게 철저히 적혈구와 모세혈관과 연계되어 있다. 적혈구는 골수에서 생성되므로 호흡은 폐와 순환기, 골수와도 동시에 처음부터 완벽히 존재해서 서로 연합해야 하는 과정이다.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부분적인 지식이라도 마음을 열고 조금만 깊게 바라보면 누구나 생명현상이 경이이고, 하나님의 설계임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신앙의 토대는 과학적 지식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과학을 모르기에 성경적 창조신앙을 모른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과학을 깊이 이해할수록 창조신앙이 구체화할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경적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만 한다. 오늘날 진화와 창조가 과학논쟁의 화두인 것처럼, 예수님 당시 가장 큰 창조과학 논쟁은 사두개인에 의해 촉발된 부활 논쟁이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에게 과학으로 부활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들도 익숙한 출애굽기 말씀을 인용해서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해했다고 하셨다.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대한 신뢰가 그 근원이다. 결국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와 세계관과 믿음의 문제이다.
출처 : 온누리신문(2021.9.19)
이 세상을 붙잡고 있는 강력한 힘
오경숙
고2 가을, 친구에게 억지로 끌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나는 당시 복음의 불모지, 청소년 복음화율 1%였던 지극히 전통적인 제주의 가정에서 혼자 믿음을 갖게 되었다. 성경도 하나님도 기독교 문화도 생소한 나는 모든 것이 궁금했고, 이해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나무라지 않으셨고, 기도하고 물을 때마다 모두 말씀해주셨고, 기도마다 응답하여 보여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는 못했다. 특히 구약의 두려운 하나님과 설화와 같은 창조이야기는 동의가 되지 않아 믿음의 한켠에 ‘보류’의 딱지를 붙이고 멀찍이 방치해 두었다. 그러던 중 물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원 시절, 처음 창조과학 강의를 들은 그 날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나의 믿음의 새로운 창을 열어 준 날이었다. 일단 충격이었다. 기존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넘겼던 과학의 지식들이 모두 다 새롭게 다가 왔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한계에 대해 너무나 큰 동의와 공감이 되었고, ‘보류’의 딱지를 붙이고 방치했던 것들을 펼쳐내고 직시하게 되는 담대함이 생겨났다. 그 후 나는 하나님을 과학에 한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고, 그 생각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커져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연구하고 원리를 밝혀나갈 수는 있으나 모든 것을 밝힐 수 없으며, 그것이 과학이 한계이고 과학을 하는 우리가 갖고 있는 한계이다.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였고, 작은 빛과 에너지를 이용하여 작고 작은 미시세계를 연구하였다. 12년간 연구원으로 몸담았던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과도 같았다. 태양의 에너지원인 핵융합 원리를 지구상에서 구현하는 인공태양을 만들어 다음세대 에너지원으로 자리매김 하는 것이 연구의 목표였다. ‘핵’이 들어간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맞다. 핵폭탄의 원리를 에너지로 활용한 것일 뿐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다루고 있는 것은 맞다. 자연계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네 가지 힘 중에 가장 강력한 힘이 핵력이다. 원자를 구성하는 전자와 양성자 외에 중성자를 발견한 것은 1932년이다. 원자의 핵에 양성자가 주를 이루고 있어 원자의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데, 양성자끼리만 있으면 자석의 같은 극은 서로 밀어내는 척력이 있는 것과 같이 양성자끼리는 서로 밀어낸다. 하지만 중성자가 있음으로서 양성자를 작은 핵 안에 묶어줄 수 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자연계에서 밝혀진 가장 강한 핵력인 것이다. 그 다음 약한 힘은 전자기력이다. 양성을 띈 핵 주변을 도는 전자가 이 힘에 해당되고, 자석에서의 양극과 음극이 서로 당기는 힘도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전자기력보다 더 작은 힘은 핵 안에 불안정한 중성자들에 의해 분열되는 약한 핵력이 있다. 자연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힘 중에 가장 작은 힘은 중력이다. 규모로 보면 중력이 가장 큰 힘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가장 작은 힘이다. 중력의 힘을 1로 둔다면, 약력은 1033배, 전자기력은 1037배 핵력은 1039배이다. 그만큼 가장 작은 세계가 가장 큰 우주 보다 더 강한 힘으로 결합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는 과학을 통해 자연계를 관찰하고 힘을 발견해 낼 수는 있었지만, 이 힘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그 힘들을 활용할 뿐이다. 때론 강력한 힘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세계대전의 최후를 들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힘을 알아내고 사용하는 것 못지않은 책임이 얼마나 큰지 온 세계가 체험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다른 한 면으로 역사의 수많은 민족들이 강력한 힘으로 만들어진 태양을 숭배해 온 것은 그 힘에 대한 두려움이요, 창조주에 대한 무지함이다. 힘을 발견했다고 노벨상을 받으며 우쭐대지만, 그 힘을 만드신 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이다. 우리는 아직도 이 힘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과학에 세상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의지하는 이 시대에 그 시작을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찾는 다면 믿음이 과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이들의 한계이고, 과학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편협한 믿음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이 땅에 있게 한 부모가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힘과 모든 것의 처음을 있게 한 존재는 자연 스스로가 아니라 창조주이심을 알아야 세상도 과학도 올바로 보고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을 붙잡고 있는 가장 큰 힘은 핵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이다.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와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출처 : 온누리신문(2021.9.10)
하나님의 목적과 준비 그리고 순종
정우성
고등학교 1학년에 서 2학년으로 올라가는 2월 교회 수련회였다. 거기서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부모님은 넌 크리스천(non-christian)이셨고, 내가 동생들 데리고 교회 가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정말 싫어 하셨다. 그래서 꽤 힘들었다. 하지만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처음에는 이상했고 나중에는 놀라웠다. 그래서인지 교회 가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이, 찬송하는 것이, 교회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았다. 행복했다. 그때 믿음이 생겼고, 성경이 믿어졌다. 창세기도 믿어졌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믿어졌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게 믿어졌다. 내 부족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존재가 성경 속의 창조주라는 것이 믿어졌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왜 그게 가능했는지 설명은 불가능하다. 은혜다. 전적으로 은혜다.
나는 지금 IT업계 19년차 반도체 개발자이다. SSD라는 데이터 저장 장치의 컨트롤러를 만든다. 당연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십 명의 팀원들과 함께 기능을 구현하고, 그 기능이 잘 구현되는지 검증해서 세상에 내놓는다. 많은 테스트를 하는데도 종종 버그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어떻게든 그 이슈를 해결한다. 이슈 해결도 실력이다. 설계라는 일에도, 이슈를 해결하는 일에도 설계자의 지혜와 지식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더 복잡한 기능일수록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다. 복잡도가 높은 목적을 달성하고 싶을수록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반도체 설계자는 반도체 칩에 원하는 대로 동작하는 회로를 만들어 넣는 일을 한다. 손톱만한 칩에 목적을 심는 일이다. 그래서 그 목적을 어떻게 하면 잘 이루도록 할까를 고민한다. 날마다 고민한다. 날마다 더 잘하려고 궁리하고 생각하는데도 늘 어렵다. 신기한 일이다. 부족한 설계자인 셈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생기게 하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했으며 너를 여러 민족들을 위한 예언자로 정했다”(렘 1:5)
참 이해가 안 가는 구절이었다. 존재하기도 전에 알다니, 그런 게 가능한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건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만들고자 하는 칩이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내 생각 속에서 먼저 존재하는구나!’
머릿속에서 뭔가 순간 번쩍였다.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경험이었다. 그러고 나니 저 말씀이 너무 쉽게 이해가 되었다. 예레미야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먼저 존재하는 것이구나. 예를 들어 사자를 조각하고 싶은 조각가가 있다고 하자. 숙련된 조각가였던 그가 가로 1m, 세로 1m, 높이 2m짜리 큰 바위를 하나 마련했다.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바위다. 조각가가 바위를 째려본다. 열심히 째려본다. 아직도 세상에는 사자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각가의 마음속에 먼저 사자상이 존재한다. 멋지게 포효하고 있다. 조각가가 바위 중에 사자가 아닌 부분을 쪼아낸다. 그러면 조각가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사자가 비로소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세상에 예레미야가 아직 없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먼저 존재한다. 열방의 선지자라는 목적을 가지고 존재한다. 예레미야만 그럴까? 당연히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생각 속에 먼저 존재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한다.
나 같은 부족한 인간 설계자도 무언가를 만들 때 무턱대고 만들지 않는다. 정말 많은 준비를 한다. 그런데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분은 창조주이시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준비가 예레미야의 삶에 담기게 된다. 그리고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대단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준비가 인간의 삶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일이다. 겁나도록 흥분되는 일이다. 그래서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내 삶에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준비로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일이다.
그해 2월 평생 예수님을 따라다니겠다고 결심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려고 노력하고 있다. 은혜다. 전적으로 은혜다. 그때는 그것이 나의 결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 그것은 하나님의 준비였다.
출처 : 온누리신문(2021.8.20)
내가 경험한 창조신앙
창조신앙, 그것은 초석이자 반석!
김정민
황해도 장연에서 월남하신 부모님의 신앙심이 매우 돈독하셨다. 특히 어머님은 1년 365일 새벽기도를 다니셨다. 가난한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한방을 썼는데 밤에 무슨 기척이 느껴져서 잠에서 깨어보면 어머님이 기도하시곤 하셨다. 가난했지만 우리 집에는 늘 손님으로 북적였다. 그 안에서 느끼던 풍성함은 아마도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어머님께 부어주시던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던 것 같다.
청년 시기 믿음의 위기가 도래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이공계통으로 전공을 정하고 KAIST 석사 과정을 졸업할 즈음 한국창조과학회가 창립되었고 가입을 권고 받았다. 그 순간 나는 진화론이 과학임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의심의 구름이 마음 한쪽에서부터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음한구석에 ‘ 창세기는 비과학적이므로 사실이 아니고 신화일 뿐’ 이라는 불신앙의 댐이 봉인된 상태로 있었다. 불신앙의 댐에 진화론의 거짓 속임수가 작은 구멍을 뚫은 셈이 되었다. 이 구멍을 메우고 터지는 과정이 1년 넘게 반복됐다. 그래도 나는 ‘ 모태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왔는데’ 라는 쓸데없는 자존심이 있어서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신앙상담을 받는 것도 껄끄러워했다. 결국 창세기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결론으로 방향이 기울어졌다. 믿음이 쏜살같이 떠나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창조가 의심되니까 그분의 전능하심도 의심되었고, 기도는 점점 더 형식화되었다.
미국 유학 생활을 하던 중에 한인 학생들의 교제권 중심에 있던 한인교회를 가게 되었다.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달게 느껴졌다. 말씀이 내 영혼 안으로 스며드는 기적이 일어났다. 내 영혼이 주님으로 다시 뜨거워지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성경공부그룹 및 중보기도 모임에 매주 참석하게 되었다. 또한 시카고 KOSTA 유학생 수련회에서 영적 부흥을 맛보게 되었다. 진화론이 사실이고 창세기는 신화라고 속이면서 나를 멸망으로 이끌던 모든 공격이 힘을 잃어버려 작용하지 않게 되었다. 창세기 1~11장 말씀을 믿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의 전능하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진화론의 악한 영향력에서 벗어나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믿어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경의 이적과 기사들이 문자 그대로 믿어지게 되었다.
성경의 많은 저자들이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고 찬양하는 가장 주된 방법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45:7).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주임을 믿는 창조신앙으로 나를 새롭게 출발시키셨다. 진화론의 거짓 속임수를 이기는 과정을 통해서 모태신앙 대신 창조신앙이라는 반석을 구축하게 하셨다.
내가 양재온누리교회 창조선교팀을 섬기게된 계기가 있다. 젊은 시절 진화론의 시험에 빠져 신앙의 퇴보를 겪었던 일이 30년 후 내 자식들에게도 일어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단은 세대를 건너뛰며 흰 도화지 같은 청소년의 마음과 생각에 진화론의 거짓을 사실이라고 속이는 전략을 계속 구사하고 있다. 차세대와 청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과학의 언어와 지식으로 진화론의 허구를 밝혀준다면 우리 자녀들이 진화론에 오염되기 전에 창조신앙을 굳건히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나에게 창조신앙이란 무엇일까? 신앙의 초석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부여받는 반석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신앙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나게 해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라고 믿는다.
출처 : 온누리신문(2021.7.25)
성경적인 창조세계관의 역할과 사명
정크 사이언스 VS 창조신앙
한필규
과학 전문 칼럼니스트 스티븐 말로이가 쓴 <정크 사이언스>는 지난 몇 년 동안 잘못 알려진 과학적 사실을 분석한 책이다. 정크 사이언스(Junk Science)는 ‘ 특정 이익’ 을 추구하기 위해 악용되는 잘못된 과학적 자료와 분석이라는 뜻이다. 특정 이익 집단을 위한 사이비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적 사실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과학을 이용한 것이다. 예컨대 기업이 교수에게 연구비를 줘서 자기 제품에 유리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거나 시민단체가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건강에 대한 위험을 과장해서 공표하는 것 등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모 기업의 유제품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예방 효과가 있다고 발표해서 문제가 된 것도 이런 사례에 속한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창조과학을 사이비 과학이라고 부른다. 창조과학자들을 기독교 신앙을 위해 과학을 악용하는 광신적인 과학자들로 취급한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과학의 법칙들도 만드셨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과학 법칙들이 하나님의 창조신앙과 모순될 수 없음에도 창조과학을 사이비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론이 과학과 교육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이 지배하고 있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중세에 이르기까지 발붙일 곳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케플러, 갈릴레오, 뉴튼에 이르는 과학혁명 시대의 주역들에 의해 천동설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지동설이 과학이론으로 새롭게 정립되었다. 진화론은 생명체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이론은 될 수 있지만, 생명체의 기원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모든 것의 기원을 하나님 대신 설명하는 패러다임이 되어버렸다. 진화론 패러다임은 과학의 발전에 따라 그 모순을 더 크게 드러내고 있지만, 그 자체가 과학이 아닌 무신론적 철학이며 무신론 신앙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고 있다.
지구과학도 진화론 패러다임에 갇혀있다. 현재 지구의 지형들은 거대한 물의 움직임과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격변적으로 짧은 시간에 형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진화론 패러다임에 갇힌 판구조론은 아주 오랜 시간 서서히 현재의 지형들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과학자 중에도 진화론 패러다임으로는 현재의 지형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거대한 운석충돌의 격변적인 사건으로 현재 지구 지형들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미 창조과학 분야에서는 대홍수 격변 사건이 지구과학의 모든 이론을 수용하면서 훨씬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지구물리학 이론을 가지고 있다. 지구과학이나 생명과학이나 어떤 과학영역에 서도 하나님의 창조 설계를 인정하면 더 좋은 과학이론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진화론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과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설계조차 진화론적 패러다임으로 설명해야만 과학적 연구로 인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조과학자들은 사이비 과학자라는 비난과 배척을 받으면서 과학과 교육의 영역에서 창조신앙을 전파하고 있다. 창조과학자로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창조과학자들만이 이런 삶을 사는 것일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삶의 영역에서 동일한 도전과 비난을 받고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장 22절에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은 이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이다.
진화론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창조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둠 속의 빛과 같은 삶이다. 하나님의 진리 편에 선 성도라면 과학의 영역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의 비난과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온전한 신앙은 두려움 없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영역에서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창조세계관은 우리의 인격과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며 나의 가정, 우리의 교회, 세상의 일터에 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복된 삶을 누리는 중요한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출처 : 온누리신문(2021.7.11)
기적과 창조주
한윤봉 (전북대학교 석좌연구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한국창조과학회 전 회장)
성경에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과학법칙과 자연과정에 위배되는 초과학적인 사건’을 기적이라고 한다. 기적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창조신앙과 구원신앙에 직결되는 중요한 사건들이다. 그러나 기적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화적 또는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기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은 알파(처음)와 오메가(나중), 즉 차원을 창조하신 초차원적인 창조주”라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차원을 사용하며 살고 있다. 점을 영차원이라 하며, 점이 모여서 1차원인 선이 만들어지고, 선들이 모여서 2차원인 면이 만들어진다. 면들이 모여서 3차원인 입체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 3차원 공간에 시간을 더하면 4차원이 된다. 4차원에 또 다른 차원요소를 더하면 5차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차원은 확장이 가능하지만, 어떤 과학자도 우주가 몇 차원인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적어도 우주는 4차원 이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4차원 세계 속에 살고 있지만, 3차원적인 제한된 능력만을 갖고 있다.
따라서 현재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만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을 뿐,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 수 없다. 과거를 알 수 있는 것은 기억과 역사적인 기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차원이 낮을수록 제한된 능력을 가진다.
1차원적인 동물은 1차원적인 능력, 즉 직선적인 운동만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으로만 가는 지렁이, 구더기, 뱀 등이 1차원적인 동물들이다. 1차원 동물들은 2차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에 2차원적인 동물들은 직선적인 운동뿐만 아니라, 전후좌우 방향감각이 있다. 2차원적인 동물은 날지는 못하지만, 살고 있는 집(둥지)을 나갔다가 찾아서 돌아올 수 있는 동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2차원적인 동물은 3차원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에, 3차원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지 못한다.
반면에 3차원적인 동물은 방향감각과 입체적 공간 개념을 갖고 있는 동물로 정의할 수 있다. 3차원 동물들은 1차원과 2차원 동물들이 할 수 없는 다양한 능력(예를 들면, 공간을 날아다니거나 높이 뛸 수 있는 능력 등)을 갖고 있지만, 3차원적인 제한된 능력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4차원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 따라서 과거나 미래로 여행할 수가 없다.
2차원 세계(즉, 평면적인 세계)에서 1차원 동물과 2차원 동물이 출발지점을 출발하여 목표지점까지 갔다 와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런데 불행하게도 중간지점에 커다란 장애물이 있다. 장애물에 도착했을 때, 1차원 동물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2차원 동물은 그 장애물을 우회하여 목표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1차원 동물의 눈에는 2차원 동물이 장애물 지점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한참 후에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즉, 1차원 동물의 눈에는 엄청난 기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2차원 동물에게는 장애물을 우회하여 목표지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일이다. 차원을 한 단계 높여서 커다란 웅덩이(3차원)에 2차원적 능력을 가진 거북이와 3차원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빠졌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그 곳을 탈출해야 한다. 거북이는 탈출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하지만, 웅덩이 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반복할 뿐이다.
2차원 동물은 공간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설령 누군가가 구원의 사다리를 넣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용하여 탈출할 수 없다. 그러나 3차원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구원의 사다리(또는 밧줄)을 이용하여 웅덩이를 쉽게 탈출할 수 있다.
탈출한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여 웅덩이에 빠진 거북이에게 갖다 주고 구해준다면, 거북이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거북이에게는 기적이지만,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일이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4차원 세계에 속해 있지만, 3차원적인 유한한 능력밖에 없다. 4차원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들이 얼마든지 일어 날 수 있다. 이는 2차원적인 거북이가 3차원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을 모르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기적에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기적은 우주에 적용되는 과학법칙이나 통일성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과학법칙에 위배되는 기적들이 일어났지만, 현재 피조세계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적의 특징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모든 과학법칙과 자연과정의 주관자이심을 뜻한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원점을 태초에 시작하심으로써(창1:1) 차원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주 안에 가능한 모든 차원을 초월하신 초차원적인 분이다.
즉, 하나님은 3차원적인 능력밖에 없는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신 기적들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법칙이나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초차원적인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 이상을 먹이시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기적들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단지 유한한 차원에 속한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시는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부인할 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초차원적인 존재만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으며, 온갖 종류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하나님의 존재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놀라운 선언이다.
기적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성경은 초차원적인 창조주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우리의 이성과 과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즉 예수님의 강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남은 자들의 휴거가 있을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살전 4:16-17).
마지막 때에 일어 날 이런 기적은 초차원적인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모든 과학법칙과 자연과정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참조 : 시간, 공간, 물질, 그리고 삼위일체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76&bmode=view
삼위일체 우주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77&bmode=view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기적을 설명해보려는 과학자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64&bmode=view
애굽의 열 가지 재앙 : 기적인가, 자연현상인가?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43&bmode=view
시간과 창조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96&bmode=view
창조주를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윤봉, 전북대학교 석좌연구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한국창조과학회 전 회장
과거에 과학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진화론을 반박하고 비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면서 많은 과학적 사실들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으며, 따라서 진화론의 비과학성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진화론의 비과학성을 비평하는 지적 양심을 가진 학자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주류 학계와 지성인들은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믿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복음을 전하다 보면, 지식수준이 높을수록 전도가 어렵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지적타락과 지적교만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며, 하나님을 떠나서 살려는 욕망 때문에 영적으로 타락해졌을 뿐만 아니라, 지적인 순결함을 잃고 지적으로도 타락한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 자연을 더 경외하게 되었다. 자연이 인간보다 더 위대해 보이고, 해와 달과 별들이, 하늘을 나는 새들이, 용맹스럽고 거대한 짐승들이 더 위대해 보이고 신비롭게 보였다. 자연을 보면서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버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학문을 통해 습득한 지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결국에는 자연이,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지적타락과 인간의 이성으로 인한 지적교만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은 자가 되어, 피조물을 우상으로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버렸다(로마서 1:21-23).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과 불신앙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죄로 인해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는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호세아 4:6). 오늘날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성경말씀을 믿게 하는 지식과 정보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살아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며 마음을 찢으며 애통해 할 것이다. 홍수가 나면 먹을 물이 없는 것처럼, 첨단 과학시대에 지식과 정보는 넘쳐나고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발견하게 하는 지식과 정보는 거의 없다. 믿음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게 힘든 시대가 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을 보면서 진화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연이 진화의 증거이며, 진화가 자연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으며,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질서와 신비는 창조의 결과라고 고백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3).
셋째, ‘진화론=과학적 사실’이란 믿음 때문이다. 첨단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자연을 보면서 창조주를 발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학 시간에 배운 진화론 때문이다. 진화론은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기원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가설로 만들어진 이론으로서 창조주가 없다고 주장한다. 진화론 교육 때문에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진화론은 곧 과학적 사실’이란 믿음을 갖게 된다.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믿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는 진화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창조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지성인’이라고 무시하며 조롱한다. 그들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를 부인하며,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창세기를 기초로 하는 기독교 신앙을 비(比)과학이라고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 말씀보다 진화론을 더 믿기 때문에, 성경을 진화론에 꿰어 맞추는 다양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자연을 해석하지 않고, 반대로 진화론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려 한다. 그 결과 창조(유신론)와 진화(무신론)을 혼합한 다양한 타협이론(유신진화론)이 등장했다.
죄로 인해 영적으로 지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자연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함을 받은 사람만이(로마서 10:9-10)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다음세대 부흥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한윤봉, 전북대학교 석좌교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한국창조과학회 전 회장
신앙적으로 방황하거나 교회를 떠난 다음세대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상담하다 보면,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내용을 기록된 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처녀가 어떻게 스스로 임신할 수 있으며, 사람은 동물 중의 하나인데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 날 수 있나?”라고 의심한다. 예수님은 역사상 실존했던 성인 중의 한 사람인데, 사람인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6일 동안의 창조와 전 지구적인 노아홍수 사건은 학교에서 과학적 사실로 배운 진화론과 빅뱅우주론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다음세대들이 갖고 있는 성경에 대한 불신과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에 대한 의심과 불신앙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창조신학의 변질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세대를 건강하게 세우고 다시 부흥케 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적 창조신학을 바로 세우고,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며 오직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이다.
창조신학에는 두 가지가 있다.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적 창조신학’과 성경 말씀보다 주류과학계가 주장하는 진화론과 빅뱅우주론을 더 믿기 때문에 창조와 진화를 타협하여 해석하는 ‘비성경적 창조신학’이다. 비성경적 창조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세대들을 붙잡기 위해서 창세기를 기록된 대로 믿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진화론을 받아들여 몰락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교회들이 이런 주장이 틀렸음을 반증한다.
성경적 창조신학은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6일 동안에 말씀으로 창조’하셨음을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다. 성경적 창조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성경적 창조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고 핵심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성경적 창조신앙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로 떼어 내어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교리와 복음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첨단과학시대에 다음세대들의 ‘영적 야성’을 회복하고 주님의 강한 군사로 양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적 창조신앙의 회복과 확신이 없다면,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키는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없다. 영적 야성을 회복하기 위한 첫 번째 단추는 ‘성경의 권위’를 바탕으로 ‘성경적 창조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이 뒷받침될 때 세워진다. 성경의 권위는 곧 성경의 무오성을 뜻한다. 만일 성경 기록에 오류가 있다면,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신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크리스천들이 있어서 너무나 안타깝다.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정통 복음주의 기독교 교리는 창세기를 바탕으로 하며, 인간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창세기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심판과 구원의 약속’을 믿지 않는 다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은 변질되거나 왜곡된다.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3가지다. 첫째, 성경의 신적 권위와 하나님의 주권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 10:35)고 선포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참되며(시 18:30)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이다(눅 1:37).
둘째,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딤후 3:16). 성경은 사람이 기록했지만, 단순한 인간의 글이 아니다.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받아 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예수님도 "천지가 다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확인하셨다.
모든 성경 말씀의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축자영감)을 믿지 않는다면, 성경의 메시지는 해석자의 주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정통 조직신학자들의 주장은 “창세기 1-11장은 축자영감이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 옳다.
셋째, 성경을 주신 목적 때문이다. 성경의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욕심으로 인해 타락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만일 성경에 오류가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볼 필요도, 믿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구원의 목적도 실패하고 말 것이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할 때와 똑같은 전략과 방법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고,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소통이 안 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관계가 끊어지고, 결국에는 세상으로 떠나게 된다.
하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다음세대들을 다시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성경적 창조신학과 성경의 권위를 바탕으로 ‘오직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크고 작은 산당들(즉, 지적 우상들)을 다 버리는 지적회개를 먼저 해야 한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에스라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신앙회복 운동을 했던 것처럼, 이 시대에 무너진 성경적 창조신앙과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바로 세우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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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파워, 2021.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