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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박창성
2013-05-28

인간의 창조


*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까?

*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위해 먹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상 바쁘고 힘든 경제생활을 이어가자면,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내 삶의 전부인가?”하는 회의가 일어나곤 합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물처럼 단지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면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인생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바른 삶의 목적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학교에서 진화론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처럼, 자연현상만으로 저절로 이 땅에 생겨났다면,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은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저절로 태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사 64:8)

어떤 물건의 존재 목적을 알아보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 대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청지기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지구와 생물들을 다스리는 임무를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는 청지기(steward)인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청지기라니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 우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이 암시하는 것처럼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지기의 직분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시간은 내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은 없고, 단지 살아가는 동안 그것을 관리하고 사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물질, 자원들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하거나 오염시켜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관리 보존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여행을 하는 순례자에 비유되곤 합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호텔에 있는 물건들은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고 사용할 수는 있으나 떠날 때는 모두 두고 떠나야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물질과 수명을 누리다가 빈손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도 아니고 영원히 소유할 수도 없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동분서주하다가 허망한 삶을 마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43장 7절에서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하며 물질과 시간도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나름대로 고상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대기업의 경영을 꿈꾸며 사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스포츠맨으로서 좋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사는 분, 예술가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는 목적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적들은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아니라, 일시적이거나 그보다 더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중간 목적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기업을 운영 하거나, 좋은 기록과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루어 드리고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성취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큰 부자가 되려는 목적을 가지고 부동산 투기를 해서 대회사를 일구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을 보고 삶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 가난한 자들을 어렵게 만들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였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삶의 목적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그런 식으로 관리하라고 맡기시지도 않으셨고, 이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비록 재물을 많이 모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사업을 하는 과정과 그것을 통해 얻은 물질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목적에 맞는 바른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삶의 목적을 바르게 깨닫는 것은 삶의 방향을 바꾸고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생존경쟁을 통해서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더 발전하도록 한다는 진화론을 가르치면, 우리 자녀들은 어떤 삶의 목적을 갖게 될까요?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부도덕과 부정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성취한 결과만을 중시하는 사고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서적)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6), 487.
Werner Gitt, Questions: I have Always Wanted to Ask (Germany: Ebner Ulm, 1998), 93-96.
G. I. Williamson (최덕성 역), 소교리 문답 강해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9), 13-16.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660

참고 : 5283|3123|2751|2753|2755|2757|5250|5161|4914|4227

미디어위원회
2013-05-02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습니까?

박창성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창조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사실로 믿으려 해도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온 인류가 고통과 죄악가운데 살게 된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부러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따먹게 하고, 벌을 주셨느냐하는 약간 불평 섞인 의문을 가지신 분들이 많습니다.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중요한 것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하나님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사랑이신 분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흔히 우리가 바라듯이 즐겁게 해주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완전해야 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은 바위나 물과 같은 것이 아닌 생물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서로 교제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자발적이라야 합니다. 인간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라야지, 억지로 하거나 자동적으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조건 순종하도록 인간을 만드실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인형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들이  창조주의 뜻을 따르는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회사에서 선발한 직원에게 엄격한 수습 기간을 거치게 하고 평가한 다음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할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9, 16-17)

이 성경구절에 나오는 생명나무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열매 자체에 어떤 신비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을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갖게 하고 선악을 알 수 있도록 했을 것이라는 견해와, 실제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구별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견해입니다.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을 주시고, 불순종에 대한 결과로서는 선악을 알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창조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선악과 대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의 낙원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길로 들어서고야 말았습니다 (창 3:1-7). 그 결과로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나 하나님과 분리되고, 저주를 받아 고통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저지르면, 이처럼 악(惡)을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 모든 피조물은 ”보시기에 매우 좋은” (창 1:31)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선과 악을 모두 경험하고 그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따르면 생명이 있고, 순종하지 않으면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영적 죽음을 초래한다는 뼈아픈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디어위원회
2013-04-30

두 개의 창조신화?

박창성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신화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대하는데 있어서,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신뢰하고 의심 없이 따르려는데 비해서, 다른 사람들은 비판적인 태도로 대합니다.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마저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성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라고 말하면서, 성경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믿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동기는 창세기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창세기 안에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있다면서 창세기 1장(1:1-2:3)과 2장(2:4-25)은 중동지방에 퍼져있던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조 신화를 합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서로 다르다.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창세기 1:1에서 2:3까지는 '하나님(Elohim)”, 창세기 2장 4절에서 25절까지는 '여호와 하나님(Yahweh Elohim)”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신화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과 본질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엘로힘(Elohim), 여호와(Yahweh) 뿐만 아니라, 아도나이(Adonai), 엘로이(El-roi), 엘샤다이(El-shaddai), 등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엘로힘은 '엘(El, 하나님)'의 복수 형태로서 ”장엄하신 하나님(majestic God)”을 나타내며, 창조, 심판, 구원과 같은 전 세계적인 사건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거나,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서 사랑과 관심을 베푸실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외에 아도나이는 '나의 주님”(창 15:2), 엘로이는”'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창 17:1)이라는 뜻으로,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다른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두 개의 다른 신화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창조의 순서가 다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식물, 동물, 사람의 순서로 창조되었는데, 2장에서는 사람, 식물, 동물의 순서로 다르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성경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had planted)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grow) 하시니...” (창 2:7-9)

이 구절들을 잘못 읽으면, 사람의 창조가 먼저 기록되고,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중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식물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8, 9절에서 사용된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식물을 심고(had planted) 자라게 하신(grow) 것이지, 그 때 창조(create)하셨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보다 먼저 창조되어 존재하고 있던 식물을 에덴동산에 심고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had formed)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 2:19)

2장 19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들짐승과 새를 지으시고, 먼저 존재한 아담에게로 보내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앞 뒤 문맥을 조심해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들짐승들과 새를 지으셨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동물들을 데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으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동물을 지으신 사건이 다른 사건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대과거 시제(had formed)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NIV).

결과적으로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순서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6일 동안의 창조를 진행된 순서대로 요약한 것이지만, 2장은 피조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여섯째 날에 창조된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더욱 자세히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창조된 순서대로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신화를 토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대한 의심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참고 문헌

Henry M. Morris, The Defender's Study Bible: Defending the Faith from a Literal Creationist Viewpoint (Grand Rapids, MI: World Publishing, Inc., 1995), 10.

John Calvin, 칼빈 성경주석 (서울: 성서원, 1999), 46-47.

John D. Morris, The Names Of God, http://www.icr.org/article/21253/

Henry M. Morris, Created And Made, http://www.icr.org/article/19407/

Bodie Hodge, What Is God’s Name in the Old Testament?,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12/04/17/contradictions-names-of-god


*참조 : 창세기 1장은 바벨론의 신화를 재편집했는가?

https://creation.kr/Genesis/?idx=3863816&bmode=view

성경의 내용들이 신화인가? : 오늘날 주요 신학대학에서 골격가설이 가르쳐지고 있다.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58&bmode=view

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 성경을 훼손하고 있는 사기적인 문서가설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30&bmode=view

미디어위원회
2012-06-15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000년을 있었는가? 

(Jonah was in the fish... 3,000 years?)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5)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So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Genesis 1:5)

  이 구절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읽는다면, 창조주간의 첫째 날은 일반적 길이의 하루였다.[1] 창조주간의 날들은 어두움과 밝음이 되풀이되는 저녁과 아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초 3일 동안의 빛의 근원이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제외하곤(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 그 날들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하루와 차이가 없었다.

창세기 1장의 날(days)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창조 시점에 대한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출애굽기 20:9-11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6일 동안은 일하고 하루는 안식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 주간에 이와 같이 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출애굽기 31:17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마가복음 10:6절에서 예수님은 ”창조 때로부터(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울은 로마서 1:20절에서 ”창세로부터(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사람의 창조 이전에 수십억 년이 있었다는 것이 허구임을 가리키고 있다. 만약 수십억 년의 연대가 맞는다면, 예수님과 바울은 잘못 말씀한 것이 된다.


(진화론에 의한 영향으로) 하나님이 수십억 년에 걸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의 길이에 대한 부자연스러운 변칙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1] 이러한 시도는 궁극적으로 성경에 모순들과 신학적 딜레마들이 생겨나도록 만든다. 아담의 범죄 함으로 악한 것들이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이 수억 년에 걸친 동물들의 죽음, 질병, 폭력, 약육강식, 멸종 등을 허락하셨고, 허리케인, 토네이도, 쓰나미, 지진 등과 같은 자연적인 재해도 허락하셨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시는 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날(day)’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로 ‘욤(yom)’이다. 창세기 1장에서 욤은 수사로 수식되고 있으며, 밤(night)이라는 단어 및 '저녁과 아침(evening and morning)”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 1장 외의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 욤은 언제나 정상적 길이의 하루를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날'들은 문자 그대로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욤'은 세 가지 요소, 즉 수사, 밤이라는 단어,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인용하여 이것을 반대한다. ”베드로후서 3:8절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창조의 날들은 오랜 기간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7일 동안 행진했다는 구절에서, 또는 요나가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는 구절에서 어느 누구도 그 날들이 하루를 의미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어떤 크리스천들은 창세기 1장의 명백한 의미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믿는 현대 과학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사람의 의견을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 보다 더 권위(authority)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정말로 권위의 문제이다. 늘 변해왔고,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그곳에 없었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견해에 그 권위를 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그 권위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결코 거짓말을 하실 분이 아니시다. 성경의 그 분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우리는 오류투성이의 인간의 이론보다, 과거에 대한 그 분의 설명을 신뢰해야만 한다.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하자!


Get Answers about Creation and Jonah

Could God Really Have Created Everything in Six Days?

Defense—Poor Reasoning

Jonah—3,000 years in the whale? (radio program)

Jonah and the Great Fish


Footnotes

1Some say that Hosea 6:2 is an exception to this because of the figurative language. However, the Hebrew idiomatic expression used, 'After two days ... in the third day,” meaning 'in a short time,” makes sense only if 'day” is understood in its normal sense.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get-answers/features/jonah-in-fish-days? 

출처 - Answers Magazine

미디어위원회
2012-03-29

사해 침전물 코어는 창세기를 확증한다. 

(Dead Sea Sediment Core Confirms Genesis)

by Brian Thomas, Ph.D.


     염해(Salt Sea)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사해(Dead Sea)는 해수면 보다 300m나 낮다. 사해는 성경에 기록된 어떤 고대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그 호수는 너무 염분이 많아서 마른 적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극단적인 염분 농도는 모든 물의 증발을 막아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해 깊은 곳을 굴착하여 얻은 퇴적물 코어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Science (2011. 12. 7) 지는 사해심부 굴착프로젝트(Dead Sea Deep Drilling Project)에서 235m 깊이에서 채취한 코어 시료는 그 지역 대부분이 말랐던 시기에 ‘해변 퇴적층 같은’ 자갈층(layer of pebbles)을 나타냈다고 보도했다.[1]


성경 기록에 의하면 BC 2000 경에 오늘날의 사해는 아마도 근처의 타락한 소돔성 사람들이 농경지로 사용하던 평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14장에 최초로 그 계곡의 이름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아브람으로 불리던)의 시기 동안에 그곳은 싯딤 골짜기(the vale of Siddim)로 불렸었다.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창 14:3). 따라서 그 지역은 골짜기, 또는 계곡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후 4백여 년이 지나 창세기가 모세에 의해 편집되어 쓰여질 시기에는 염해라는 이름이 다시 생겨나 있었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성경(The Bible Comes Alive)’이라는 책에서 고고학자인 클리포드 윌슨(Clifford Wilson)은 ”곧 지금의 염해에”라는 구절은 아마도 후에 편집 시 추가되었을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었다 :

”유대 사람들이 기록된 말씀을 존중했고, 그것을 변경시키는 것을 이례적인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적절한 편집 노트를 단순히 추가했다. 이 경우에 싯딤 골짜기는 염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

연구자들은 많은 폭풍들과 소금과 진흙의 계절적 퇴적층 아래 층에 대한 굴착 코어에서 염해의 존재 이전에, 즉 소돔과 고모라(Sodom and Gomorrah)의 파괴 이전에 한 시기를 나타낼 수 있는 자갈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사해가 한때 마른 육지였다는 것을 입증한 이러한 연구는 성경이 진실된 역사적 기록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다. 



References

1.Gramling, C. Dead Sea Dried Up in Past. Science. Posted on news.sciencemag.org December 7, 2011, accessed December 16, 2011.
2.Genesis 14:2-3.
3.Wilson, C.1997. The Bible Comes Alive. Green Forest, AR: New Leaf Press, 9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icr.org/article/dead-sea-sediment-core-confirms-genesis/ 

출처 - ICR News, 2012. 1. 4.

미디어위원회
2012-03-27

가인의 아내

박창성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했습니까?
아담의 후손들 이외에도 다른 부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아담의 제1세대 자손은 맏아들 가인과 그리고 그의 남자 동생들인 아벨과 셋 뿐이기 때문에 이들이 누구와 결혼하였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성경의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분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아담과 하와를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기록한 성경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 3명의 아들 이외에도 다른 아들과 딸들이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3-5절에는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모두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 성경에는 적혀져 있지 않지만,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다는 점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많은 자녀들을 낳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는 그가 쓴 책에서,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아담의 자손은 33명의 아들과 23명의 딸들이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아담이 셋을 낳기 전 130년 동안에도 아들, 딸들을 많이 낳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셋의 이름만이 나타나 있는 것은 그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가인의 결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가인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들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 이외에 다른 부족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 모세의 율법(레위기 18-20)에 근친결혼이 금지되어 있는데 어떻게 오빠와 동생이 결혼할 수 있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후,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셨을 때는 근친결혼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한 사례(창세기 20:12)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근친결혼을 금지하신 것은 모세 때부터입니다. 오늘날에도 오누이간의 결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근친결혼일수록 유전병에 걸리거나 정상적이지 못한 자손을 낳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 벌로서 이 땅에 내리신 저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에는 돌연변이로 인한 많은 결함들이 포함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유전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각각 물려받기 때문에 2개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라고 할지라도 좋은 유전자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보다 강해서 결함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친족들 중에는 결함이 있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근친결혼을 할 경우, 결함이 있는 유전자끼리만 만나서 정상적이지 못한 자손을 얻을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을 비롯한 처음 세대들은 아직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많이 누적되지 않은 상태였고 사람들의 수가 아직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근친결혼을 허락하셨으나,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사람들 몸에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점점 많아지고 사람들의 수가 충분히 늘어나게 되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근친결혼을 금지하는 율법을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창세기 4장 14절에서 가인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죽일까봐 겁을 낸 것은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가인을 죽이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벨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전혀 낯선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족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130세 때 셋을 낳았는데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창세기 4:25)고 생각한 것으로 보아, 셋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아벨이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가인의 출생과 아벨의 죽음 사이에는 100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아담의 후손들이 충분히 많이 퍼져있었을 것입니다.

흔히, ”가인이 아내를 어디서 구했겠느냐, 아담과 하와 이외에 혈통이 다른 부족들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하였다고 믿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기록한 성경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아담을 ”첫 사람”(고린도전서 15:45)라고 하였고,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창세기 3:20)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용조
2012-02-01

최초의 인간 (창 2:4~7) <창세기 강해 8>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2장 3절까지의 말씀의 주제는 ‘창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시작해서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제 칠일에 안식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진정한 안식은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부족함이나 불균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창조질서의 회복은 안식을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거룩한 주일을 통하여 창조의 세계로 나아가고 무너진 건강과 사업과 가정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일을 복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회복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중심인 책입니다. 그런데 2장 4절부터 지금까지 설명하고 있던 창조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장부터 설명되던 커다란 창조의 파노라마 중에서 한 점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 스포트라이트는 은하계도 아니고 빛도 아닌 사람에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1장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2장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대상은 사람입니다. 물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2장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1장과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천지창조는 조금 다릅니다. 혹 갈등의 요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초점의 문제입니다. 2장에서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는 장엄하고 능력 있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2장 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으로 표현이 달라진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1장에서 천지창조에 대한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에 또 다시 이런 설명이 나왔을까요? 이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사업가가 공장에 기계 설비를 할 때 여러 가지 기계가 많이 설치됩니다. 그러나 설치되었다고 해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설계사가 원하는 대로 모두 설치가 된 후에 가동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계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한 두 개의 기계가 가동된다고 모두 가동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

하나님께서 1장에서 7일 동안 완벽한 창조를 하셨고 이제 운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운행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바로 이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우주는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들고 하늘에 구름을 만들었지만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 대기상태였습니다.

바위를 만들고 지구에 흙을 만들어서 산천초목을 만들어 놓았지만 거기에 인간이 없기 때문에 경작할 것도, 초목도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분으로 형성된 안개만 이 지구위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나타나게 되면 그 인간이 모든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창조는 1장과 달리 6일 동안의 창조를 모두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인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관리인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책임자로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운행되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완성되어야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은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1장 27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조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이나 식물이 아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생각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살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은 배고프면 마땅히 먹을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관리인으로 살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1장 27절에서 두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인간을 동물 취급합니다. 인간을 개나 돼지처럼 죽이고 그 후에도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자식은 부모를 닮았습니다. 누구든지 그 자식을 보면 아버지를 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맞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딸이야”라고 얼굴에 쓰여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임에도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 같습니다. 무섭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죽이는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사람 창조

두 번째,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일한 성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생김새나 기능이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동성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이후 남자와 여자의 성을 혼돈 시켰습니다. 마귀는 문화라는 것을 이용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위배하게 합니다. 이것은 무서운 유혹입니다. 요즈음은 ‘유니섹스’의 문화입니다. 남자 옷도 여자가 입고 여자 옷도 남자가 입습니다. 이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문화가 발전하다보면 결국 동성연애로 흘러 갈 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는 죄의 본질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결과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게 됩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남자를 보고 ‘형’이라고 부릅니다. 남자는 ‘오빠’라고 불러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남자는 남자가 되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문화는 이렇게 성을 바꾸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않고 짐승같이 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1장 27절의 말씀과 연결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은 2장 7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창조의 대략을 설명한 후 2장에서는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운행하지 않았으며 온 우주는 인간이 창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구성하셨는지 2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인간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흙이란 땅에서 오는 물질입니다. ‘먼지, 티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예가가 흙으로 본을 떠서 만족하게 만들어지면 불에 넣어서 굽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이란 인간의 오장육부와 뼈와 피와 살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건강할 때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고 고통을 받으면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흙으로 된 몸에 우리는 향수도 뿌리고 좋은 옷도 입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흙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흙에 불어넣어 주셔

욥이 건강할 때는 자신의 육체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었지만 고통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 육신이 흙이라는 사실을 묵상합니다. 욥기 14장 19절을 보면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도 눌려죽는 자이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루살이에 눌려 죽고 죽으면 티끌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욥기 10장 9절을 보면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가까우면 이것이 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할 때 모두 다시 새몸을 입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7절을 보면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예수와 우리의 차이점은 우리는 흙에서 왔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십시오. 그러나 인간은 흙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2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흙에 불어 넣어주심으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흙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흙이므로 세상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합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인간의 육신은 떡으로 살고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세상과 물질을 연결하는 통로라면 생명과 영은 하나님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영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은 가지고 있고 물질도 알고 쾌락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주셔서 하나님이 거할 공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 졌지만 흙만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있지만 영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흙과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으로 만들어진 존재를 ‘생령’이라고 부릅니다. 생령이 곧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흙으로 만들어진 혼이 ‘사람’입니다. 물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간 것이 생령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완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외로움이나 고통이나 불완전이 전혀 없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죄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게 되면서 인간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과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육신은 있지만 인간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남은 것은 인간의 육신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외롭고 고독하고 방황합니다.


하늘의 기쁨 맛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소설의 줄거리는 고독한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상실한 사람은 길을 잃어버린 배와 같습니다. 방향이 없고, 목적도 없이 사는 이유를 모르고 동물처럼 살아갑니다. 단순히 동물처럼 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동물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오면 불안해집니다. 자신의 영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의 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회복하는 길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고, 구원이 이루어지고, 능력이 임하며 하늘의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세상의 기쁨을 갖고 살던 사람이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죽음만 경험하던 사람이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부활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성령의 영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태초에 창조되었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고독과 절망과 좌절과 허무를 경험하고 있던 영혼은 구원을 보게 되고 천국을 보게 되며 절망에서 살아나게 되고 병에서 구원을 받고 모든 사단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 생명이 없으며 이 아들안에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의 영이 내안에 들어오고, 하나님의 영이 회복이 되어야 나의 육신도 살고 자아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육신은 세상의 통로이며 혼은 하나님과의 통로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으며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이 ‘거듭나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나이가 먹어서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라는 말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회복되라는 것입니다. 인격도 육신도 회복되어 온전해 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육신만도 아니고 영이나 혼만도 아닙니다. 이 세 가지가 온전히 만들어질 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너졌던 하나님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의 영이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심으로 부활의 영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3

참고 :

하용조
2012-01-31

안식의 축복 (창 2:1~3) <창세기 강해 7>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과정을 창세기 1장을 통해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하신 후에 언제나 ‘참 좋다’고 감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정말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이는 여섯째 날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고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속에는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주만물을 재창조하고 회복시키시는 안식의 원리

첫째, 하나님의 창조는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의 창조는 미숙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완전하게 만들지 않았다가 진화시켜서 오늘의 인류를 만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코끼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족함 없이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셋째는 완전한 균형과 조화입니다. 창조물 상호간에 부조화가 없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창조를 불완전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재앙이 있고 기후변화와 지진과 화산이 터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고 환경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했습니다.

창조의 절정과 완성은 ‘안식’입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후에 7일인 마지막 날 가장 위대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이 가장 위대한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은 일과 휴식이라는 두개의 리듬을 가지고 계십니다. 창조와 안식이라고 하는 두 리듬을 통해서 우주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쉬어야 합니다. 땅도 쉬어야 하고 인간도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 만물을 안식의 원리를 통해서 재창조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창세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장 1절부터 2절을 보십시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6일 동안의 창조를 하신 후에 일곱째날도 창조를 하셨는데 이것이 창조의 결론이며 완성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즐기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실과 그 위대하신 능력을 감상하고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창조에는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축복과 회복이 일어납니다.

일이라는 것은 끝이 있습니다. 끝이 있을 때 시작이 있습니다. 일을 쉬지 않고 하는 분들을 ‘일중독자’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몸도 땅도 고장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는 쉼이 있습니다. 안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만 계속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우리는 ‘노예’라고 부릅니다. 노예가 하는 일은 가치가 없습니다. 노예는 그저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계속해서 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끊임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4백년 동안 노예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창조의 절정인 안식, 예배로 영적 회복되어야

하나님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안식을 위한 탈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 안식의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돈 벌기 위해 사는 사람들,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들, 인생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멋진 시민이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은 노예와 같은 삶입니다. 이 노예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안식의 삶입니다. 휴식 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은 마치 서커스단에서 음식을 위해 재주를 넘는 불쌍한 곰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반복적인 삶을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수령님과 당을 위하여’라는 말은 그들 인생의 전부입니다. 북한뿐만 아니라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쾌락을 위해서 인생과 시간을 낭비하며 명예와 성공을 위하여 살아가지만 죽음 앞에 왔을 때는 절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의 절정에 안식의 축복을 준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입니다. 노예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서의 삶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회에 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잊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영적으로 살아나고 회복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이름을 높여드릴 때 창조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될 줄 믿습니다.

1절을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도 완벽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벽합니다. 그분에게는 부족함이 없고 미숙함이나 부조화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도 안식을 통하여 부족함이 없고 미흡함이 없고 균형있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라”

일곱번째 창조인 안식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일곱째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을 복 주시며 ‘거룩하게 안식일 지킬 것’ 명령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신 후 ‘참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날을 복을 주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일곱째 날만 복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복 받는 비결은 하나님이 복 내려준 날을 열심히 지키면 됩니다. 주일날 엉뚱한 곳에 가지 마십시오. 복 받은 날에 헌신하시면 복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 받기 원하면서도 주일은 무시합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돈이 많아지면, 혹은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돈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더라도 주일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곱 번째 날에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과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교회에 나오는 일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장사하기 위해 교회에 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기위해 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제 칠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안식일을 사랑하시고 정성을 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족과 건강과 삶의 모든 것에 부어 주시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면서 특별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꼭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계명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그 십계명 중에서도 하나님은 네 번째 명령을 지키시길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우리도 쉬고,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창세기에서와 같이 출애굽기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복을 줄 것이고 안식일을 기억하는 사람, 안식일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복을 줄 것이며 그날을 하나님이 특별히 거룩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이 오나 고난이 오나 역경이 오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십시오. 안식일의 복을 놓치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은 하나님경외하고 약한 자 돕는 아름다운 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 사람만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가족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만 예수 믿으면 되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 전체가 예수 믿고 복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가축까지 복을 받아야 합니다. 동물까지도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기숙하는 손님까지도 여러분 때문에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과 가족과 가축까지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 비밀이 안식에 있습니다. 현대의 모든 사상은 안식을 지킬 수 없게 합니다. 모든 관공소의 시험이나 학교의 시험까지 주일날에 치러집니다. 재미있는 오락도 모두 주일날 행해집니다. 주일날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돕는 복되고 아름다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쾌락을 누리는 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일날에 사람들은 모두 쉬어야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은 평안이 없습니다. 쾌락을 즐긴 사람의 마음은 가볍지 않습니다. 좋지 않고 오히려 더 힘이 듭니다. 우리가 탈진하고 피곤한 이유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위해, 남을 위해 도와주고 사는 사람은 몸은 조금 피곤할 지라도 항상 마음이 천국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계속해서 갈등만 증폭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을 기억하는 특별한 날로 만들라는 것은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하게 하겠다’는 말은 구별하겠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과는 다른 날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날만 주일입니까? 월요일이나 화요일도 항상 주일입니다.’라고 믿음이 아주 좋은 것 같이 말합니다. 모든 날이 중요하다는 말은 반대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일을 확실히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월요일도 확실히 지키지 못합니다. 주일을 잘 지키면 일주일이 복을 받습니다. 주일을 엉망으로 보낸 사람은 일주일이 엉망인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일은 공휴일입니다. 자기의 날이고 쉬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가 경제의 축복에 비밀이듯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세상의 생활과 육체의 생활의 축복의 비밀입니다. 안식일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안식일의 위기는 안식일을 24시간으로 여기지 않고 2시간으로 여기는데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만 안식일이고 예배가 마치면 ‘이날은 내 날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은 하루 종일 주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가족끼리 모여서 가족을 섬기는 날입니다. 주일날 원근각처에 있던 가족들이 모여 점심도 먹고 축복하는 날로 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히 주님의 집에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비결은 예수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날 병을 고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일날 심방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병든 자를 심방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고친 예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를 걸어가게 되었는데 배고픈 제자들이 밀을 따먹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엉터리다. 안식일을 범했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다윗을 예를 들어 ‘배고픈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성전의 떡을 먹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식일에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어야 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자신의 쾌락과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고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린 딸의 귀신을 쫓아주기를 원했을 때 안식일 날 고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안식일 날 고치지 말고 월요일 날 고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18년 동안 귀신들려 고생했던 이 딸도 아브라함의 딸이거늘 너희가 너희 집에 나귀도 물을 먹이는데 이 딸을 왜 그렇게 못살게 구느냐’라며 고쳐주셨습니다. 손마른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을 귀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이 그도 귀히 여길 것입니다. 안식일 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실망한 자를 도와주고,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면 그 영혼이 축복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도 그의 삶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안식일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성전은 완전한 성전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새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 가게 될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라는 장소에 와서 안식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지만 진짜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과 절망이 있고 죄가 있는 온갖 잡다한 것이 많은 세상에서 여러분이 신앙이 자라는 비결은 오늘의 말씀대로 ‘내가 이날에 복을 주었고 거룩하게 했다’는 안식을 잘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창조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안식일의 축복과 거룩함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안식의 축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창조의 모든 축복들이 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2

참고 :

하용조
2012-01-30

사람의 창조 (창 1:26~31) <창세기 강해 6>


      창조의 극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마지막으로 창조하기 위해 모든 만물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의 별과 해와 달, 그리고 공기, 땅, 물,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이유는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외롭거나 배고프지 않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연과 더불어 완벽한 교제를 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자연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처음으로 만들지 않으신 이유는 사람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이셨습니다. 마치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야 신부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등장하는 것처럼 우주만물과 지구를 만드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모두 만드신 후에 마지막으로 창조의 꽃인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벽한 드라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미완성이 없습니다. 불균형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한 균형이요, 완벽한 아름다움이요, 완벽한 충만함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생명의 지구, 하나님의 호흡인 지구가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그곳에 인간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좋은 집이 있다고 해도 그곳에 누가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백악관이나 청와대의 건물보다는 백악관에 클린턴이 있고, 청와대에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그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지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복 받은 창조의 꽃입니다. 여러분이 창조의 완성이요, 창조의 영광인 것입니다.


교제하기 위해 만든 인간

하나님이 무언가 부족하거나 우리를 어떤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영원한 교제와 축복을 나눌 파트너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남자가 여자를 애기 낳는 도구로 쓰기 위하여 혹은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하여, 집에서 일하는 청소부로 쓰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내를 혹은 남편을 만나는 것은 서로 이용하고 필요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기 위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인간창조 입니다.

인간창조를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해 2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인간의 창조는 창조의 절정이고 모든 피조물들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창조의 방법도 다릅니다.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창조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로 하셨습니다. 의논을 하거나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단독적으로 생각하시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인간됨의 가치와 영광이 있습니다. 2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이 의논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의논하지 않고 무언가 지시하는 것입니다. ”왜 나와 의논하지 않았느냐”고 사람들이 말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의논하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싫은 일도 합니다. 아마 그것은 부부관계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끼리 회의를 했습니다. 의논하고 얘기하시고 논쟁하시고 토론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많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만들까, 어떤 존재로 만들까”를 의논하신 후에 하셨습니다. 여기에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은 죽으면 끝입니다.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하게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라고 말합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 분이십니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세분은 모두 다른 개체요, 인격이요, 기능을 가진 독자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하나로 존재하십니다. 또한 세 인격과 모습으로 존재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사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사회의 특징은 일치입니다.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사람을 보내시고 인류를 만드셨는데 만일 인간에게 죄가 없었다면 분열도 없었을 것입니다. 미움과 분쟁과 전쟁과 싸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 되지 못한 데서부터 미움이 생기고 분열과 전쟁이 생기고 지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 되고, 교회가 하나 되고,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북통일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이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자녀가 집을 나가고 부모님을 멀리 보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가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계획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였습니다. 유물론이나 무신론과 같은 관점에 따라 인간에 대해 해석하는 것이 다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과 운명은 두 문장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어진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의 성품이 인간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고 동물과 동일한 본능이 있지만 신적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당하게 주장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인간들이 동물처럼 살아갑니다. 인간의 선의 본능을 동물처럼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윤리나 도덕을 모두 버리고 동물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 인간을 무차별로 죽이게 하고 고문해도 괜찮고 인권을 유린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동물일수도 있으며 이용가치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경제적인 동물에 불과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면 가치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있고 똑똑하면 존경받을 가치가 있고 좋은 환경에서 먹고 살아도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들이 나중에 극대화 되면 원자탄을 터트리게 되고 식량전쟁을 하는 등 엄청난 재난들이 벌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을 믿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이 엄숙하고 거룩하고 놀라운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다고 해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내면적인 모습이며 하나님의 모양은 하나님의 외면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물질로 된 사람처럼 키가 얼마이며 무게가 얼마인지 측량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형상 회복위해 오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영원히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모양과 형상이 모두 파괴되어 그저 동물처럼 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시켜 주셔서 인간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나누게 될 성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피와 살을 뜯어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짐승처럼 살지 마십시오. 개띠니, 말띠니, 호랑이띠니 하는 것은 ”나는 개같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려는 노력보다는 형이하학적이고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저질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데 익숙합니다. 여러분, 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욕할만한 인격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입에서 기도와 찬양이 나오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더러운 것을 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짐승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귀하고 거룩한 존재입니다. 진주를 개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석 중에 보석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 진주를 돼지우리에 넣어 짓이겨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짐승처럼 살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으면 자기와 동일하게 생긴 아이를 낳습니다. 자기의 형상이 그 아이에게 있습니다. 형상은 사진을 찍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에게 사진 찍듯이 찍어 놓은 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내 얼굴에는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보면 하나님을 본 것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본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얼굴에서 마귀가 보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얼굴에서 개가 보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예수님을 발견하고 천국이 생각나는 축복이 여러분의 얼굴 속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만들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전인자가 계속 세대에 이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왕은 왕같이 살아야 합니다. 왕이 거지같이 살면 안 됩니다. 기품이 있는 사람들은 걸음걸이부터 다릅니다. 교회를 걸어 나가실 때는 모두 그렇게 걸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모든 고민은 홀로 다 지고 자살할 것같이 걷지 마시고 어깨와 가슴을 펴고 하늘나라의 왕자와 공주같이 미소를 짓고 멋있고 고상하게 걸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사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모양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잘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의 형상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 모습

또 한 가지 방법은 ‘나’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도덕적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고 내 마음에 사랑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사랑이 있고 내가 진리를 사모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거룩을 사모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런 도덕적 성품들은 짐승에게는 없습니다. 동물은 상상력이 없습니다. 인간만이 무한한 상상력을 갖습니다. 인간은 미와 예술을 추구합니다. 동물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자기가 아름다워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무한한 상상력과 아름다움과 예술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언어가 있습니다. 동물은 자기의 의사소통의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극히 원시적입니다. 인간은 고도의 언어로 의사전달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에게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존재인 것은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하갈이 도망을 갈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고 계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듣고 계신 분입니다. 시편 94편 9절 말씀을 보면 ”귀를 만드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며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동일한 눈을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보고 계시며 우리와 같은 귀를 가지지 않았어도 들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모양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냄새도 맡으십니다. 노아가 홍수가 다 끝난 후에 하나님께 번제물을 태워 제사를 드렸을 때 ”향기를 흠향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제의 냄새도, 기도의 향도 맡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 뼈의 힘줄을 쳤다는 말이 창세기 32장에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오셔서 치시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십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눈을 만지면 눈을 뜨고 죽은 자에게 손을 대면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지십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안수하십니다. 안수하실 때 손이 펴지기도 하고 상한 마음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을 까요?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면서 다스리고 통치하도록 우리를 관리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는 분이나 하수에 오물을 마구 버리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구의 관리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환경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때문이며 우리는 동물을 양육하고 세상을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육축과 동물과 지구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책임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인간이 그저 애기 낳고 돈 벌고 잘 살고 쾌락을 느끼며 동물같이 살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이 지구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을 주셨습니다. 지구 관리는 못하더라도 집 관리라도 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청지기로 부름받은 인간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는데 히브리말로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란 남자와 여자를 의미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여자를 학대하고 때리고 애기낳는 도구로 생각하고 성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물질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왜 짐승처럼 생각할까요? 왜 여자를 때릴까요? 저는 우리 교회에 여자를 때리는 남자가 하나도 없기 바랍니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인간입니다. 남자 없는 여자 없고, 여자 없는 남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이며 원칙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죄를 지은 인간들이 얼마나 이 원칙을 바꾸었는지 모릅니다. 제일 나쁜 것은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바꾼 것입니다. ‘호모’와 ‘레즈비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는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여자는 그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입니다. 인간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원리와 질서대로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가정을 만들어야 하며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과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은 사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저 놀고먹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도 일하십시오. 인간은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가에 대해 28절에 나와 있습니다. 복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지구는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있고 살 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땅을 잘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표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동물도 인간을 위한 음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환경보호가 지나쳐서 우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지금까지 그저 ‘좋았더라’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31절에서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완성이기도 했고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 그대로 회복되어 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1

참고 :

하용조
2012-01-27

땅의 창조 (창 1:9~13, 24~25) <창세기 강해 5>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창세기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시작하면 창세기는 문을 엽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창조의 놀라운 신비와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는 천지창조에 대해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합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졌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도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곧 능력입니다. 둘째 날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시고 셋째 날 하나님은 땅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늘을 만드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땅을 만드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땅은 물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물에서 하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구에는 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습니다. 하나의 물은 하늘 위로 올라갔고 하나의 물은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사이의 공간을 궁창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대기권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9절은 하나님께서 땅을 만든 현장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땅으로 내려온 물은 지구를 덮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지구는 물이 덮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셨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물에게 하나님이 명령합니다. ‘물은 한 곳으로 모여라’ 이 물이 한 곳으로 모인 곳이 바다요, 물이 없어지고 드러난 곳이 땅입니다. 흐르던 물이 어떻게 한 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었을까요? 물의 속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한 곳으로 이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사건을 구약의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 한곳 모으고 홍해 가르시는 하나님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온 수십만의 이스라엘 백성이 부딪힌 것은 바로 홍해였습니다. 마음이 변한 바로가 군대를 보냈고, 바로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기 위해 뒤쫓아 오고 있었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 앞에는 홍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홍해를 육지같이 가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졌을 때 무엇이 생겼을까요? 물 벽이 생겼을 것입니다. 물 벽이 생겼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다 사이에 길이 생겼습니다. 만약에 물 벽이 생기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물을 말려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말린 후에 건넌 것이 아니라 물이 갈라진 곳을 지나갔습니다.

분명히 물 벽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고 그 뒤를 애굽 군대가 쫓아 왔을 때 다시 물을 흩으셔서 그들은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을 한 곳으로 모이라고 했더니 한 곳으로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하고 놀랍습니까? 우리는 작은 필름을 보고도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고 놀랍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은 땅이 깊이 파인 곳에 고였습니다. 그래서 드러난 곳을 땅이라고 부르고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땅이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베드로 사도가 증언합니다. 베드로 후서 3장 4~5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성경을 보면 재미있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하나님은 이것의 경계를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예레미야 5장 22절을 보면 땅과 바다의 경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아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육지와 바다를 모래로 경계선을 삼으셨습니다. 욥기 38장에서부터 41장까지 읽어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오묘한 진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게 될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 -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시거나 빛을 만드실 때 중요한 원리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면 창조의 능력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 여러분에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 ‘말씀’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고 누구든지 그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내 종이 낫겠나이다’라고 말했던 백부장이나 ”주여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마리아처럼 저는 여러분도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 말씀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그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고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된 축복을 받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창조하실 때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것을 보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늘을 보고 좋아하셨고 땅을 보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좋아하십니다. ”난 네가 좋아, 참 좋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빈말로만 좋아한다고 해도 좋은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대상이 바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지창조 중 셋째 날의 창조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우리는 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나눈다’입니다. 하나님이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밤과 낮을 만들었고 둘째 날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과 물을 나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날 하나님은 땅과 바다를 나누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눔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과 세상을 구별하십시오

나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세상과 짝하고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구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를 택하십시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매일 지옥만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짝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짝하지 않습니다.

셋째날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실 때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드셨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을 만드실 때 땅에서 자라나는 풀과 채소들과 나무를 만드셨는데 하나님은 드디어 생명체인 식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동물은 여섯째 날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비스럽고 재미있고 좋으신 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을 보면 감탄, 감탄할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체를 만드는 것도 특이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고 다음에 하늘을 만들어 대기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땅을 만들고 물을 나눕니다. 인간이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을 모두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풀과 채소와 과실을 만들 때에도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풀은 풀이요 채소는 채소요, 나무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혼돈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풀이 자라서 나무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나무는 나무대로 완성품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아담의 씨를 주어서 자라게 한 것이 아닙니다. 발전하고 진화하고 종을 만들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고기로, 하늘에 나는 새는 새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숭이와 사람을 혼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우리가 또 하나 발견하는 것은 바로 ‘종류대로’라는 말입니다. 채소를 종류대로, 나무를 종류대로, 새를 종류대로, 육축을 종류대로 하나님은 그 종류대로 완성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섞거나 발전시키거나 진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셋째 날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요, 조화의 하나님이요, 중용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됩니다. 땅을 만드시고 그곳에 여러 가지 동물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 드디어 동물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24절과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마지막 창조의 끝단계로 땅의 짐승들을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24절과 25절을 보니까 ‘그 종류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종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하등동물을 고등동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등동물은 처음부터 하등동물로 고등동물은 처음부터 고등동물로 만드신 것입니다. 변하고 진화하고 발전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 태초에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들에 핀 꽃들을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웅장함과 신비로움과 상상할 수 없는 창의력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창조의 능력이며 아름다운 신비이며 기막힌 조화입니까?

우리는 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모습들을 고린도전서 15장 38절~41절에서 더 놀라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체를 주시고 종자를 주셨습니다. 모두 육체이지만 모두 같은 육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고깃덩어리이지만 하나님이 만드실 때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육체는 모두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섞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짐승도 되고 짐승이 인간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물사관입니다. 인간을 하나의 경제적 동물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인간을 하나의 물질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물질로 평가합니다. 내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 없이 인간을 죽입니다.


인간과 동물은 섞여질 수 있다는 착상에서 인류비극 시작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짐승처럼 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종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이 짐승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인간은 하나의 육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유익의 도구, 경제적 활동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인간은 쾌락의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동물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안에 짐승이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악을 가져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인간과 동물은 섞여질 수 있다는 발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각기 종류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죽음이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인간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들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에는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고 수천억 개의 별들의 영광이 따로 있습니다. 얼마나 창조의 신비가 놀랍습니까? 우리는 동물과 같은 육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 땅의 형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체는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특권이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십시오. 짐승처럼 살지 마십시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개같이 사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뱀처럼 천하고 추하게 삽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속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띠’입니다. 개 띠니, 호랑이 띠니 하는 것입니다. 절이나 산에 가 보십시오. 모두 짐승의 형상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모두 짐승으로 덮여 있습니다. 윤회설이 가짜인 이유는 사람이 다시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이 되었다가 또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이 합쳐지면 더러워집니다. 지옥과 천국이 합쳐지면 지옥이 됩니다. 짐승과 인간이 합쳐지면 짐승이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식을 결혼시킬 때 사주보고, 띠를 봅니다. 그것은 ”나는 짐승이요” 하는 소리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주셨습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닙니다. 원숭이는 원숭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된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동물과 식물과 해와 달과 별과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라고 인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짐승처럼 살지 마십시오. 인간답게 사십시오. 동물적인 여러분의 본능을 예수의 이름으로 꺾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이것이 창조의 축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새롭게 회복되게 하여 주시사 우리 안에 온전한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0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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