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이재만
2004-09-07

창세기 1장 (28) - 세속적 / 기독교적 인본주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해야 할 일을 명령하시는 모습이다.  우리가 이를 지상명령(Supreme Order)이라고 부른다. 


인본주의(humanism)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와 기독교적 인본주의(Christian humanism)이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최고이며 진리는 인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결정한다.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 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즉 인간이 창조주의 형상인 것을 아는 것은 죄인인 인간에게는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이 최고의 존재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최고가 되어야 할 텐데 결과적으로는 사람보다도 더 낮은 동물 중에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라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관계가 깨어지면 '무'에서 '유'가 된 것을 알 수 없으며, 반면에 '유'에서 '유'로 되었다고 밖에 여길 수 없는 것이 죄인의 한계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형상이란 말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백 속에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전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자신이 하나님같이 될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보이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즉 보이는 우주, 자연, 동물 등에서 찾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우주의 부속품, 자연의 산물, 또는 동물 중에 하나로 여기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진화론적 사고인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적 인본주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자신이 귀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이 귀하지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신이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옳고 그른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앎으로써 자신은 우주의 부속품이 아니라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자신을 하나님 아래로 낮출 때,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본주의라는 말 속에 동일하게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내용이 들어 있지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닫게 되어 나머지 피조물을 올바르게 다스리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부인하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스려야 할 동물 중에 하나로 전락하는 것이다.


'다스리라' 하는 명령 속에서 우리는 이미 지어진 피조물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과 구분되게 창조주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의미를 확인 받고 있는 것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98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9-06

창세기 1장 (27) -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재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상태가 남자와 여자였음을 묘사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일련의 사건을 시간에 따라 기록하다가 그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자세히 기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0장에서 바벨탑 사건을 통해 흩어진 종족과 나라를 나열하면서 11장 전반부에는 특별히 바벨탑 사건의 그 동기와 방법에 대하여 따로 기록하고 있다.  긴 하루가 기록된 여호수아서에 아모리사람과 싸우는 전투에서도 일련의 전쟁을 묘사하다가(수 10:6-11), 나중에 그 전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인 여호수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12-14)을 따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창세기 1장에서 2장 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반면에 2장 4절부터는 그 창조하신 상태와 함께 특별히 인간 창조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2장에는 창조된 지구의 상태(4-6), 아담을 지으시는 모습(7), 아담을 이끄시는 에덴동산의 모습(8-15), 선악과(16-17), 하와의 창조(18-25)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1장 27절 한 절에 대한 내용이 2장 7절부터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을 창조하시는 2장 7절부터 하와를 창조하시는 장면까지는 모두가 엿새째 하루동안 일어난 내용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안식을 취하신 일곱째 날 전인 엿새째 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신 이유는 아담의 독처함을 좋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그 목적은 돕는 배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2:18).  그리고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도중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를 취하여 살로 대신 채우셔서 하와를 창조하셨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1장 27절에 기록하였다.  또한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바로 동등한 인격체로써 서로 돕는 관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의 첫마디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했다.  하와가 얼마나 아담에게 꼭 맞도록 꼭 필요하게 창조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한마디로 나의 모든 것이란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직접 디자인 하시는 모습이고 그 가정의 처음이 얼마나 완벽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4). 가정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만들어졌을까?  동물처럼 살다 보니까 필요에 의해서 시작됐을까?  그렇다면 가정도 점점 발달해 왔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살다 보니 가정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화론은 바로 근원을 희미하게 만들므로 가정도 파괴시켜버렸다.  진화론자, 특별히 진화론자라고 하지 않더라고 성경적 가정의 기원을 믿지 않은 사람은 가정의 기원에 대하여 한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다.  살다 보니 필요에 따라 가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기원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가족의 기원에 대하여 분명히 말한다.  처음이 완전한 가정이었으며 나중에 죄가 들어온 다음에 완벽한 가정이 깨어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완전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깨어진 것이다.  어떻게 살다 보니 지금의 가정이 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디자인된 가정이 있었으나 죄로 인하여 오늘날의 불안정한 가정으로 타락한 것이다.


진화론적 교육을 받은 세속적 인본주의가 들어오게 된 이래로 오늘날의 가정이 어떤 위기를 맞고 있는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  이혼율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져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본적 질서가 깨어지고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답이 있는 책, 사실인 책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해답도 얻을 수 없다.  창조주께서 시작하신 가정이라는 근본적인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미디어위원회
2004-09-03

창세기 1장 (26) - 하나님 형상의 창조

이재만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하나님께서 시간을 포함한 천지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난 후, 마지막 차례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인 사람창조를 계획하시는 모습이다. 


오스트랄로피데쿠스, 자바원인, 필트다운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 기존에 원숭이와 인간의 공통조상으로 발표된 유인원들에 대하여는 이미 지면을 통하여 여러 번 언급되었기에 자세히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들은 공통조상도 아니며, 언제나 원숭이는 원숭이,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진화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들은 신체적 기능뿐 아니라, 두뇌조차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늘날의 더 나은 현대인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나아질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기존에 창조된 피조물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적응되어야 하는 불완전한 모습으로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준비된 피조세계 가운데 완벽한 사람을 창조하셨다. 어디에서도 유인원과 같은 진화과정이 들어갈 틈이 없다.  진화론과는 반대로 처음이 완벽했으며,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리 떠나면서 불완전해졌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도 진화론적 사고는 성경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오랜 기간 동안 생존경쟁에서 이겨낸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선하고 선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완벽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진화론은 인간을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로 여기게 만든다. 단순한 동물에서 복잡한 동물로 진화된 지질시대표를 보여주면서, 생존경쟁이 역사의 원리인 양 가르친다. 이 지질시대를 지구상에서 보여주는 곳은 어떤 곳도 없을 뿐 아니라, 이를 믿으면 순식간에 사람은 악하디 악하게 창조된 경쟁의 원리에 가장 적합한 존재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보면 누구와도 타협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삼위하나님 자신의 계획 하에 직접 창조하셨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누가 그를 교훈 하였으며… (사40:13-14)'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의 상담자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상담자가 아니다. 창조에 관하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창조자께 창조를 가르치는 자세를 취하는 반대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 6일 동안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빅뱅을 사용하셨습니다. 진화를 사용하셨습니다. 수 억년을 걸려 창조하셨습니다. 유인원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등등이다. 창조하신 장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수그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류로 가득찬 자신의 편견을 가지고, 감히 창조주의 모사가 되려고 한다.  더구나 자신의 형상을 창조할 때는  '우리가' 라고 강조하셨는데도 말이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이라고 하셨다. 창조주의 성품을 닮은 존재며, 교제를 나눌 대상인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모양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시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1절에 언급된 것과 같이 시공간 상에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셔야만 했는데, 바로 사람의 모습이었으며 자신의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 왜 눈은 여기 있을까, 코는, 입은? 등과 같이 궁금해 하기도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시공간 속에 드러내기에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 가장 완벽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이웃들을 보자.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죄악으로 떨어져서 도저히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을 때,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바로 이 복음을 전파할 대상들인 것이다.

이재만
2004-09-02

창세기 1장 (25) - 자신의 형상 위한 준비완료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5)”

24 절에 땅 위에 생물을 창조하시며 명령하신 말씀 그대로 창조되고 있는 장면이다. 코끼리는 무게가 6.6 톤이나 되는데, 현재 살고있는 육상동물 중 가장 큰 포유류이다. 한 번에 40 갤론의 물을 마시며 227 킬로그램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코끼리는 놀라운 청각을 갖고 있는데, 그의 큰 귀는 중요한 냉각기 역할을 하여 체온을 유지케 한다.


기린은 육상동물 중에 가장 큰 심장을 갖고 있다. 기린의 심장은 길이가 60 센티를 넘는다. 이 심장은 5 미터가 넘는 높이의 머리에 중력과 반대로 피를 끌어올려 준다.  만약 기린이 그러한 강한 심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높이 있는 머리에 피가 공급되기 어려우므로 졸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 반면에 그러한 혈압으로는 물을 먹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혈압이 머리에 쏠려 뇌출혈로 모두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 기린이 물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면 자동으로 혈관밸브가 작동해 뇌에 갑작스럽게 피가 모이지 않게 하여 뇌출혈을 막아준다. 사실 기린은 자연적인 상태라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회색곰은 후각이 매우 발달하여 18 마일 떨어진 시체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 북극곰은 그 몸의 털이 털옷과 같아서 차가운 온도에서도 몸을 격리시키는 마치 단열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차가운 얼음이 떠있는 물에서 수영을 할 수 있으며,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 북극곰은 수영 선수이기도 한데, 50 마일 이상 수영할 수 있다. 인도산 곰의 일종인 슬로스(sloth)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무에서 거꾸로 매달려 지내는데, 땅에 내려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는 거꾸로 매달린 채로 머리를 270도 돌릴 수 있으며, 매달렸는데도 불구하고 머리는 똑바로 세우고 지낸다.


팬다는 아주 특별한 손목뼈를 갖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 안에서 대나무가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팬다는 또한 하루에 3,000 개 이상의 대나무를 씹어댄다. 한편 코알라의 엄지손가락은 새끼에게 젖을 주거나 안고있는데 적합하도록 디자인되었다. 또한 이들은 직접 물을 취하지 않고, 대부분의 물을 유칼리나무 잎을 섭취함으로 충당한다.


낙타의 털은 극심한 기후로부터 신체를 보호한다. 코는 모래를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며 평평한 발바닥은 모래에서도 걷기에 알맞다. 낙타의 육봉에 있는 지방은 음식과 물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보다 물 없이 열 배나 더 견딜 수 있다. 캥거루 어미는 새끼 취향에 맞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를 생산해 낸다. 필요에 따라 주머니 속에 있는 새끼에게는 지방이 풍부한 우유를 제공하며, 더 작은 새끼일 경우는 탄수화물이 더 많은 우유를 준다.


표범은 육상동물 중 최고의 높이뛰기 선수인데 5.5미터의 높이를 넘는다. 또한 그들의 청각과 시각은 밤에는 사람보다 6 배의 능력을 갖고 있다. 동물의 왕 사자도 3.7 미터 높이를 넘는다. 사자는 시속 64 킬로미터로 뛰며 넓이뛰기도 12 미터를 한다.


하나님께서 24 절에 땅 위의 동물들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된 모습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it was good) 라고 만족하셨다. 바로 이어 창조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거주하도록 하기 위한 완전한 세계를 준비하시는 모습이다 (사 45:1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먼저 표현하신 후에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더할 곳도 뺄 곳도 없는 완전한 피조세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진화의 흔적도 시간의 간격도 필요 없고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롬 1:20)만을 보여줄 뿐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90

참고 :

이재만
2004-09-01

창세기 1장 (24) - 땅 위의 생물의 창조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창 1:24)

셋째 날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드러난 땅에, 그리고 이미 식물들이 자란 땅을 채우시는 장면이다. 여섯째 날의 동물들은 다섯째 날 창조된 동물과 근본적으로 생화학적 구조나 생식과정이 동일하다. 성경에서는 여섯째 날의 동물들을 세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육축, 기는 것, 짐승이다. 여기서 육축(가축, cattle)은 길들이기 쉬운 동물, 짐승은 야생동물, 기는 것들은 그 외에 땅 위에 동물 즉 기는 곤충, 파충류, 양서류, 작은 포유류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노아홍수 이후부터 동물들이 사람을 피했다는 것은 홍수직후 하나님의 말씀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창 9:2)'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홍수 전에는 모든 동물들은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가축과 야생동물을 따로 구분하셨다는 표현은 흥미롭다. 이는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 의탁하겠느냐?” (욥 39:9-12) 

여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물을 지으시되 가축과 짐승의 용도를 다르게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물의 힘이 세거나 약한 정도를 보고 인간이 사용 용도를 선택하기 앞서,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할지를 창조 때 이미 정하셨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생물분류법은 진화론적 사고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인간의 구미에 맞게 분류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류법이 창조의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펭귄이나 타조는 생물학적으로 조류로 구분될 수 있으나, 창조된 시기는 여섯째 날 이었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펭귄이나 타조가 날아본 적이 있다거나 미래에 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다면, 이는 진화론적 사고가 남아있다는 것일 게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러나 그 몸이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욥 39:13, 18)' 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타조를 창조하실 때는 날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말보다 빠르게 뛰도록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박쥐나 고래도 예외는 아니다. 고래나 박쥐도 포유류로 분류되지만, 이들은 모두 성경적으로 나는 것과 기는 것이 창조된 다섯째 날 창조되었다. 고래가 육지에 살았던 증거도 없으며, 가능성도 없다. 날아다니는 박쥐와 기어 다니는 쥐 사이에 어떤 중간단계 생물이 발견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  곤충의 경우도 마찬가지 인데 진화론자들은 기는 곤충에서 나는 곤충으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오히려 나는 곤충은 다섯째 날, 기는 곤충은 여섯째 날로 오히려 순서가 반대이다. 진화론은 파충류가 먼저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성경은 새가 먼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창조를 믿는 것이야 말로, 아직도 남아있는 진화론적 찌꺼기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분류학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생물의 분류학에서도 진화론의 영향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지금의 분류학적 체계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면, 이를 통하여 우리의 내면에는 진화론적 순서가 자기도 모르게 남아있게 되며, 그 편견을 통해 생물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믿음이 중요하다. 왜냐 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진화론적 사고, 즉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다 할지라도 진화 순서로 창조하셨다는 진화론적 생각을 벗어 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진짜 창조순서인 창세기 1장을 믿음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화란 말도, 진화의 순서도, 진화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종류대로만 창조하셨다.


또한 동물을 창조하시는 여섯째 날의 모습 어디에서도 생존경쟁, 약육강식 등의 잔인한 진화과정도 엿볼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모습으로 완벽하게 창조하고 계시는 그의 능력과 신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88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8-31

창세기 1장 (23)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하)

이재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1:22)

진화론에 의해서 흔들리는 기독교인들이 진의파악을 버리고 이에 회피하려는 자세가 바로 구조가설(framework hypothesis)이다. 창세기의 전반부를 포함하여 사실 이성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문학작품, 시, 설화 등으로 취급하는 자세이다. 바로 기독교교리는 유지하려고 하면서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에는 회피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도 신학교에서 창세기의 많은 부분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취급하는 것을 보고 적지않게 실망한 적이 있다.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배우기 위하여 신학교에 왔다고 생각되는 것이 불편했었다. 성경이 사실이라는 기초 위에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배우러 신학교에 온 것이지, 하나의 문학작품을 다루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응은 필자뿐이 아니라, 그 과목을 택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학작품을 주셨는가? 창세기 1장, 아담과 하와 이야기, 노아홍수, 바벨탑 사건 등은 훌륭한 문학작품인가? 그렇다면 훌륭한 문학작품을 선지자들은 사실처럼 인용했는가? 훌륭한 문학작품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돌아가셨는가?

실제로 문학작품화 한 신정통주의가 세속철학인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하나님을 빼고 사고를 하던 서양 철학자들이 딜레마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이에 진화론으로 고민하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바로 유신론적 실존주의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치자” (존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라고 생각하며 믿는 것이다. 유신론과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가장 근본적 차이점은 그 출발점에 있다. 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시작되었는데, 후자는 믿음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사실' 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믿음은 자신이 믿기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고 믿는 믿음인 것이다. 바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내가 선택한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자세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는 천국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대로 실재로 존재하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적 신앙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창세기를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취급한다면 뒤의 내용은 어디로 갈까? 복음의 설 자리가 있을까? 어느 부분이 우화이고 어느 부분이 사실인가?  내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우화로 취급하고, 이해되는 부분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오늘날 진화론적 사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 사실인가? 나의 판단 속에 성경을 집어넣는 것인가, 아니면 성경 속에 나의 판단을 포기하는 자세를 취하는가?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해석을 하고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진화론적 사고가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도 진화론과 함께 진정한 성경주해(exegesis)를 할 수 없다. 창세기를 공부하는 신학도에게 '사실인 성경'이 '문학작품 성경'으로 자리잡아 가는 갈등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이 오늘날 안타까운 현실이다. 더 나아가 다음세대가 진화론의 영향인 실존주의적 신앙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치자”라고 생각하며 찬양할 것을 염려해야만 되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인 것이다.

미디어위원회
2004-08-30

창세기 1장 (22)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상)

이재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1:22)

진화론교육으로 인해 기독교인들도 성경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 흔들리는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두 가지 자세를 취하였다. 하나는 진화론과 '절충'하려는 것과 '회피'하려는 자세이다. 바로 회피하고자 해서 나온 방법이 있는데, 바로 구조가설(framework hypothesis)이다. 기존에 소개된 간격이론, 날-시대이론, 유신론적 진화론, 점진적 창조론 등은 진화론과 성경사이의 절충(compromise)하려는 시도임에 반하여, 구조가설은 회피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즉 종교는 종교이고 과학은 과학이므로, 성경에 과학을 거론하지 말자는 자세이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자장 많이 접근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나누어 볼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 회에 걸쳐 이야기해 보자 한다.


언제부터인가 신학자들 사이에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시(poet), 설화(allegory), 예배문(liturgy), 또는 초역사(suprahistory)로 해석하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창세기 1장을 포함하여 인간창조, 타락, 저주, 노아홍수, 바벨탑사건 등을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취급하려는 시도가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창조사실, 타락사실, 홍수사실을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다. 이들은 창세기가 담고있는 신학적인 중요성은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면서(!), 반면에 사실이라는 부담감은 피하고자(?) 한다. 이 방법을 소위 1920년경부터 시작된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인간적인 방법은 새로운(neo) 것도 아니며, 정통주의(orthodoxy)도 아니다.


여기에는 성경적으로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성경 기자들은 수없이 창세기의 전반부를 사실로 인용하였으며, 역사적 교리적으로 항상 사실로 받아들였다. 모세는 창세기 1장을 6일로 (출 31:17), 바벨탑도 사실로 묘사했다 (신 32:8).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의 조상을 창세기 11장에 기초로 언급했다 (수 24:2).  역대상에는 창세기 5장의 족보를 그대로 반복했다. 욥은 창조와 홍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시편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언도 창조를 언급한다 (잠 8:22-31). 선지서를 보아도 그들은 창세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사 40:26; 45:18, 렘 10:11-13, 겔 14:14, 20, 미 5:6, 슥 5:11). 


신약에 와서도 이는 마찬가지 이다. 바울은 아담과 하와를 첫번째 인간으로 (롬 5:12-19, 고전 11:7-12, 15:21-22, 고후 11:3, 딤전 2:13-15), 히브리서 기자도 창조완성과 안식을 (4:1-11), 11장에 믿음의 선진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베드로도 홍수를 (벧전 3:20; 벧후 2:4-5; 3:5-6), 요한은 가인과 아벨을 (요일 3:12), 유다는 가인, 에녹, 아담을 (6, 14) 그대로 언급하였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직접 표현하셨다. 결혼 (마 19:3-6), 노아의 날 (눅 17:26-27), 아벨 (마 23:35), 하나님의 창조 (막 13:19), 에덴동산 (요 8:44)  등 기본적인 근거를 창세기 전반부에 두었다. 창세기 내용들을 인용한 부분을 더 이상 나열하려 해도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뿐 아니라, 실제로 창세기 12장에서 계시록까지 모든 곳에 성경은 창세기 전반부를 역사적 근거로 삼고 있으며, 기독교 교리의 기초로 사용하고 있다. 만약에 창세기 전반부를 설화나 문학작품으로 여긴다면, 기독교의 교리 또한 그와 같이 취급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유독 최근에 들어와서 창세기 전반부를 문학작품으로 취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편에서 계속)

이재만
2004-08-27

창세기 1장 (21) - 충만하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 1:22)

필자가 살았던 미시간에는 겨울이 되면 철새인 청둥오리가 강을 메우고 있다. 어떤 것들은 차가운 강에서 헤엄도 치고 눈 위에서 잠도 잔다. 이들은 이 추운 곳에서 어떻게 살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추운 곳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적응되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게 된 것일까? 이 표현이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인간을 포함해서 생물들은 적응능력이 있다. 이 적응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적응능력을 심어놓지 않으셨다면, 조그만 환경변화에도 살아남을 생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낙타를 예로 들어보자. 낙타는 왜 사막에서 살 수 있을까? 낙타는 물을 좋아하지 않을까? 낙타에게 물을 잘 주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낙타는 물을 잘 주면 더 좋아한다. 단지 그냥 참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 많이 살고 있는 다른 파충류 등도 실제로는 물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냥 참고 살고 있는 것이다.


생물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적응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은 무한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러한 한계를 적응한계, 또는 내성한계라고 부른다. 모든 생물들은 자신의 내성한계 내에서만 적응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미시간의 청둥오리도, 사막의 낙타나 파충류 등도 자신의 내성한계를 넘어보지 못해서 그렇지, 이를 넘기면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동물들은 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곳에서 참고 사는 것일까?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물들은 이주본능(migration)이라는 것이 있다.  물고기, 새, 육지의 짐승 들은 정해진 궤도를 따라 이주를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연어, 송어, 거북이, 청둥오리, 제비갈매기, 제왕나비, 얼룩말, 물소 등 수 많은 동물들은 자신에게 새겨진 이주본능에 의해서 이동한다. 그런데 이 이주본능이 자신의 몸에 알맞은 정도보다 더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주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동물들을 관찰해 보면 어떤 때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이주하는 동안에 위험한 지형을 만나거나 적들을 만나도, 그들은 철저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향한다. 또한 어렵게 도달한 목적지가 자신에게 적당하지 않을지라도 그냥 참고 산다.


하나님께서 처음 동물을 창조하실 때 '충만하라' 란 명령을 하셨다. 동물들을 보면 성실히 자신의 행로를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무던히 순종하는 모습이다. 과학적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의 행위가 창조주의 '충만하라'는 명령 속에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생물들은 지금 살고있는 곳이 만족하여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찰의 결과이다. 명령에 의지해서 꾹 참고 버티고 있는다는 말이 더 적절한 말이다. 사막에 낙타는 왜 거기 살고 있는가? 이주본능에 의해 낙타가 그곳에 왔으며, 다른 것들과 달리 물 없이 살 수 있는 한계가 넓기 때문에 참고 살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낙타 가운데 밀림에서 살고 있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보고 있다. 동물들은 '충만하라'는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만족하지는 않지만 참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형상의 타락으로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한다 (롬 8:22)”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설명하기 어려운 동물들이 이주하여 그 자리에서 참고 있는 모습을 성경 속에서 언급되는 묘사가 기막히게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울러 이들도 구원 받은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회복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롬 8:1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80

참고 :

이재만
2004-08-26

창세기 1장 (20) - 물고기와 새를 종류대로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1)

성경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동물이 큰 물고기이다. 히브리어로 탄닌(tannin)인데, 영어로는 great whale, 또는 great sea-monsters로 번역되어있다. 같은 말이 '용, dragon'으로 자주 번역되어있다. 어쨌든 지금은 살지 않은 바다의 큰 동물임에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단순한 작은 물고기가 아니라 큰 물고기부터 창조했다는 것이 진화개념이 들어갈 틈이 없도록 한다.


진화론자들은 물고기를 첫 번째 척추동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류는 조개, 산호 등과 같은 무척추동물에서 진화되었다고 한다. 지구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조개와 같은 무척추동물 화석이 발견된다. 수백억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 무척추동물에서 물고기로 진화되는 과정인 전이화석이 기록된 경우는 단 한건도 없다. 언제나 조개류는 조개, 산호는 산호, 물고기는 물고기로 발견될 뿐이다. 만약 진화가 사실이라면 전이화석이 발견되더라도 엄청나게 많이 발견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진화론자의 기대는 화석을 연구하면 할수록 실망으로 돌아갈 뿐이다.


20, 21절에서 새(fowl)는 모든 나는 동물을 지칭한다.  즉 새, 곤충, 박쥐(포유류) 등을 포함된다. 오늘날의 생물의 분류학은 많은 부분에서 진화론적 순서에 영향을 받았다. 이 분류순서는 진화의 순서이지, 실제 창조순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생물분류학 순서와 성경적 창조순서가 일치하지 않다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진화론자들은 새는 파충류에서 진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어떻게 비늘이 깃털로, 냉혈동물이 항온동물로, 앞발이 날개로 변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실재로 긴다는 것과 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그 과정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Barbara Stahl은 척추동물역사에서 ”비늘과 깃털 사이에 전이를 보여주는 어떤 화석도 알려진 바 없다.  최근에는 이를 위한 어떤 이론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1974)” 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 동안 시조새라고 발표됐던 것들도 분명한 새 아니면 조작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최근에 중국에서 발견되었다고 '깃털가진 공룡, Feathered Dinosaurs'으로 National Geographic(Nov. 1999)에서 발표되어 세계 일간신문에 보도되었던 시조새는 중국의 화석수집가의 조작한 내용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내용인즉 새의 몸통과 공룡의 꼬리를 교묘하게 붙여 미국의 고생물학자에게 넘겼으며,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단지 그러한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신문 독자들의 사고에 시조새라는 상상의 산물이 자리잡게 하는 결과만 초래한 것이다. 만약 파충류에서 조류로 진화된 것이 사실이라면, 파충류와 조류를 이어주는 화석들이 수없이 발견돼야 하는데 아직도 발견된 것이 전혀 없다.


식물을 창조할 때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질서있게 창조하신 것이다. 어떤 경우도 다른 종의 물고기끼리 새로운 새끼를 만드는 경우가 관찰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을 나는 수많은 철새들이 있어도 그들은 각기 같은 종끼리만 날아다니며 종끼리만 알을 낳는다. 이는 과학적으로 관찰된 사실이며,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완벽한 질서이다. 그리고 이를 보시고 하나님은 '좋았다(good)' 라고 표현하셨다.

 

 

*참조 : The Current Status of Baraminology.
http://www.creationresearch.org/crsq/articles/43/43_3/baraminology.htm

Bara-What?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3/n4/bara-what

Identification of species within the cattle monobaramin (kind)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6113

Identification of species within the sheepgoat kind (Tsoan monobarami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973/

A baraminology tutorial with examples from the grasses (Poacea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6_1/j16_1_15-25.pdf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75

참고 :

이재만
2004-08-25

창세기 1장 (19) - 생물의 창조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 1:20)

둘째 날 만드신 궁창과 궁창아래 물을 채우시는 모습이다. 물에는 물고기로, 대기권에는 새로 채우시고 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생물(living creature, nephesh)이 성경에 등장한다. 실제로 히브리어로서 이 단어는 '영, soul' 이라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으며, 많은 경우에 사람의 영과 동물의 생명 모두에 사용된다.


현재 살고 있는 생물 가운데 가장 큰 동물은 무엇일까?  바로 바다에 살고 있는 고래이다. 고래 가운데 청고래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0톤의 무게에 달하며, 길이는 32m이며 심장의 크기만 해도 작은 승용차 만하다. 고래의 귀와 눈은 육지의 포유류의 것과 아주 다르며, 이는 바다에서 듣고 보기에 가장 알맞게 생겼다. 어미 고래는 새끼들에게 젖을 주기 위한 고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새끼의 주둥이도 어미의 몸에 잘 맞게 되어 있어서, 짠 바닷물이 젖과 섞이지 않게 된다. 돌고래는 수중 음파탐지기를 이용하여 서로 교신하며 먹이를 잡는다.


물고기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손길을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많다.  물총고기는 물 아래 우거진 수초에 몸을 숨기면서 물 위의 곤충을 본다. 물총고기는 물 바로 밑까지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떠오른 후, 입에서 물을 쏘아 곤충을 물로 떨어뜨린 다음 곧 바로 잡아먹는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물총고기의 눈은 물 아래 있으며 곤충은 물 밖에 있기 때문에, 물과 공기의 굴절률의 차이를 계산할 수 없으면 목표물을 적중 시킬 수 없다. 그러나 물총고기는 그 차이를 조정할 수 있는 법을 알고 있기에 항상 명중시킨다.


캘리포니아 해변에 그루니온은 보름날 밤 사리 때 육지 모래사장에서 알을 낳는다. 그래서 다음 사리 때 바닷물이 그 알들을 깨트려 막 부화된 새끼들을 바다로 쓸려 보낼 때까지 정확하게 2주 동안 모래 속에서 부화의 기간을 갖는다. 그루니온이 사리 때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모래사장에 올라 올 수도 없으며, 그 알이 부화하지 못해 멸종 할 수 밖에 없다.


바라쿠다(Barracuda)는 깜깜한 수중에서도 정확히 먹이를 잡는다. 클라운 물고기(Clown Fish)는 촉수로 다른 물고기를 죽이는 바다아네모네와 함께 서식하는데 이 촉수가 클라운 물기기에게는 전혀 해롭지 않다. 해파리는 우산같이 생긴 독특한 모양을 갖고 이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물 속에서 이동한다. 낙지는 자신의 색깔을 변화무쌍하게 변화시켜 주위환경과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데 일등이다. 태평양연어는 자신이 알에서 부화되었던 곳으로 정확히 다시 돌아와 알을 낳는데, 그 동안 여행하는 거리는 수 백 마일을 넘는다. 전기 뱀장어는 레이더를 이용해 먹이를 잡고, 계속적으로 300볼트의 전기충격을 낼 수 있다. 물고기들의 놀라움을 이야기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바다 생물들은 25만종을 훨씬 넘게 다양하다. 그 모양과 크기는 하나하나 특징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어떠한 사육실험도 어류의 단 한 종도 다른 종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 조차 보여주지 못했다. 창조자가 세워놓은 질서가 깨어지는 것도 관찰된 적이 없으며, 깨트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다양하고 완벽한 모습에 진화나 시간이 들어갈 틈이 없다. 오직 창조자의 능력과 신성만을 드러낼 뿐이다.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욥12:7-9)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72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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