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The Most Important Verse in the Bible?)
Dr. Henry M. Morris
성경의 첫 번째 절은 성경의 기초가 되는 구절이다. 사실상 창세기는 성경의 기초가 되는 책이며, 또한 전 세계와 모든 민족들을 다루고 있는 창세기의 처음 11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다루고 있는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창조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요약하고 있으므로, 처음 11장의 기초가 된다. 결국 창세기 1:1절은 이들 기초가 되는 장의 기초가 되는 절로써, 우주 자체의 최초의 창조를 말하고 있다. 그 절은 모든 기초들 중의 기초이므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 절은 기록된 단어 중 최초의 단어들을 담고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책의 시작 문장이므로, 이 단어들은 기록된 것들 중에 가장 널리 읽혀진 단어들이다. 서양 문명의 사람들은 최소한 성경을 읽으려 했을 것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는 경우라도 최소한 성경의 시작 문장들은 읽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창세기 1:1절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나머지 어떤 부분이라도 믿기 어렵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다. 즉, 하나님이 정말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그분은 만물을 지배하시며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더욱이, 이 한 절은 세상의 기원과 의미에 관한 인간의 잘못된 모든 철학들을 반박한다.
1. 그것은 무신론(atheism)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2. 그것은 범신론(pantheism, 신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신이라는 믿음)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것들을 초월(물질적인 우주와 독립적이시고 그것들과 떨어짐)하시기 때문이다.
3. 그것은 다신론(polytheism)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한 분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4. 그것은 물질주의(materialism)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물질은 시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5. 그것은 이원론(dualism)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홀로 계셨기 때문이다.
6. 그것은 인본주의(humanism)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며, 궁극적인 실체이시기 때문이다.
7. 그것은 진화론(evolutionism)을 반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러한 모든 잘못된 철학들은 단지 같은 믿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각각의 철학들은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실체는 영원한 우주 자체 안에서 발견될 수 있고, 우주가 현재의 형태로 발달한 것은 단지 그 자신의 성분들이 본질적으로 갖는 성질들에 의해서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질에 있어서, 위의 철학들 각각은 다른 모든 것들을 포용한다. 예를 들면, 이원론은 다신론의 요약된 형태이고, 다신론은 범신론의 통속적인 표현이며, 범신론은 물질주의를 전제로 하고, 물질주의는 그 기능이 진화론으로 이루어지며, 진화론은 인본주의 안에서 완성되며, 인본주의는 무신론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위대한 진리에 대항하다
위의 모든 철학 체계들은 무신론적 진화론적 인본주의 체계(system of atheistic evolutionary humanism)라고 말할 수 있다. 기타 철학 개념(자연주의,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이신론(deism), 불가지론(agnosticism), 일원론, 결정론(determinism), 실용주의(pragmatism) 및 기타)들은 그와 같은 기괴한 구조 속에 합병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놀랍도록 단순하며,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무진장 심오한 위대한 진리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대해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다.
고대나 현대나 유신론에 반대하는 수많은 철학들이 있어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왔지만, 하나님의 책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창세기의 첫 번째 구절은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사실은 아주 명확하여, 어리석은 자만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시 14:1)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만 그러한 계시가 나타난다는 것은 반대편에서 바라볼 때 분명해진다. 즉, 현대의 모든 철학들처럼 고대의 모든 종교 책들과 종교 체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물질이나 에너지로부터 시작한다. 태고의 혼돈(물이든 불이든 기타 무엇이든)에서, 자연의 힘(또는 그것들을 인격화해 주는 신과 여신)이 우주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해서 세상을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대 민족들 가운데, 그러한 범신론적 진화론적 우주기원론이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감을 받은 창세기의 기록은 그것들을 반박하거나,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이상한 침묵의 이유는 대개, 창세기 기록이 이들 다른 체계들이 발달되기 이전에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것들은 창세기의 진실한 기록을 대치하거나 반박하려는 바로 그 목적으로 나중에 발전된 것들이다. 성경은 원래 천지창조 직후에, 하나님 자신에 의해("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 2:4) 창조주간의 실제 사건을 단순한 이야기 형태로 시작하면서 쓰여졌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존재하심(reality of God)과 창조(Creation)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주장할 필요가 없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성경에 있는 것들이나, 혹은 일반적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창세기 1:1절의 가르침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 중요한 선언에 들어있는 단어들을 고찰해 보자.
◈ ‘하나님 (God)’. 처음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엘로힘(Elohim)으로써, 그분의 장엄하심과 전능하심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는 창세기 첫 장 내내 사용되는 이름이다. 마지막의 ‘임/im'은 히브리어의 복수어미이므로, 엘로힘은 실제로 ’신들(gods)‘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방인의 신들에 관련된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번역되었다 (예로써, 시편 96:5). 그러나, 여기서는 장엄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분명히 단수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런 방식으로 사용된 2,000번 이상의 경우 중 첫 번째이다. 이와 같이 엘로힘은 단수의 의미를 갖는 복수형 이름, 즉, ‘단-복수’ 명사로써, 신격(Godhead)의 단-복수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또한 한 분 이상이시다.
◈ ‘창조하시다 (Created)’. 이것은 놀라운 단어 빠라(bara)로써, 항상 하나님의 사역에만 사용된다.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에 명령하여 존재하도록 하실 수 있다. 그분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하나님만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일
사람은 사물을 ‘만들거나(make) 조성할(form)’ 수 있지만, 창조하지는 못한다. 하나님도 역시 사물을 ‘만들거나 조성할’ 수 있으신데(히브리어로 각각 아사(asah)와 야싸르(yatsar)), 사람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빨리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창조의 사역은 하나님만 유일하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만들거나 조성하는 일은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보다 복잡한 체계로 구성하는 것인데 반해, 창조의 활동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다만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 가운데만 있었던 것이 말씀하심으로 인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창세기 1:1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다음의 정보를 주고 있다. 즉, 물리적인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활동 이전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 한 분만 무한하시며 영원하시다. 또한 그분은 전능하시므로, 그분이 말씀으로 우주를 존재하게 하시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영원한 초월적인 하나님에 관한 이 개념을 전적으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에 대한 단 하나의 대안(alternative)인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우주(eternal self-existing universe) 개념도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영원한 하나님(Eternal God)이냐, 혹은 영원한 물질(eternal matter)이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현재의 원인-결과에 관한 과학법칙이 유효하다면, 영원한 물질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작위적인 물질 입자들이 복잡하고, 질서 있고, 지성적인 우주를 저절로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격적인 하나님만이 그러한 결과(effects)를 산출해 내실 수 있는 적합한 단 하나의 원인(Cause)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4/i2/verse.asp
출처 - Creation 14(2):20-21, March 1992.
창세기와 잃어버린 점토판들
(Genesis and the Lost Tablets)
Clifford A. Wilson Ph.D.
나의 이전 학생 중 한 명이 창세기 앞부분의 기록들이 문자 그대로 사실인지에 대한 나의 설명과 확실성을 물어왔다.
다른 민족들도 창세기 1-11장의 내용들과 비슷한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로서 알려져 있는 바빌로니아의 서사시(Babylonian epic)에는 창조(creation)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마르두크(Marduk) 신은 괴물인 악어 신 티아마트(Tiamat)를 둘로 잘라서, 하나로부터 하늘(heavens)을, 다른 하나로부터 땅(Earth)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유프라테스(Euphrates) 강은 한쪽 눈으로부터 흘러 나왔고, 다른 한쪽 눈에서는 티그리스(Tigris) 강이 흘러 나왔다.
이 점토판(tablet)의 한 복사본이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오스납발, BC 625년에 죽음)의 궁전에서 발견되었을 때, 그것은 원래의 창조 점토판(original creation tablet)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래서 창조는 그때 이후 성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에스라(Ezra)는 그보다 1000년을 더 일찍 살았던 모세를 대신하여 창세기 기록에 대한 신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바빌로니아 서사시의 다른 (수백년 더 초기의) 복사본들이 발견되어오고 있다.
성경적 기록의 우수성
또한 아시리아의 궁전에서 길가메쉬 서사시(Epic of Gilgamesh)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발견된 12 개의 단편적인 점토판(fragmentary tablets)들 중에서 11번째 점토판은 왜곡되었지만 홍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성경적 기록에 비해서 매우 열등함을 보여주었다. 거기에서 신들은 홍수물들이 점점 올라가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신들은 자신들이 하늘 밖으로 씻겨져 나갈 수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홍수가 끝났을 때, 신들은 바빌로니아의 노아인 우트나피쉬팀(Utnapishtim)이 제공한 희생 제물에 파리 떼처럼 모여 들었다. 배고팠던 불쌍한 신들은 그들을 먹여줄 사람들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바빌로니아의 이야기에서, 사람은 존엄한 신들 아래에서 천한 일을 떠맡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친구로서 창조되었다.
최근에 아트라하시스(Atrahasis)의 단편 서사시가 번역되었는데, 이제 거기에는 창조, 사람의 역할, 홍수가 하나의 연속적인 기록으로서 함께 모아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자기 성서고고학의 세계는 창세기의 (극적으로 우수한) 기록이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세상을 떠난 유명한 알브라이트(W. F. Albright) 교수는 홍수에 대한 창세기의 상세한 설명들은 다른 어떠한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요소들이라고 썼다.
또 다른 유명한 고고학자인 크라머(Samuel N. Kramer) 교수에 의해서 잘 정리된 바빌로니아의 기록에는 바벨탑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기록을 성경의 기록에 비유하였다.
성경적 설명이 인정되다.
과거 사람들이 오랜 수명을 가졌었다는 사실은 키쉬(Kish, 오늘날 바그다드 남쪽)에서 발견된 수메르 왕들의 목록(Sumerian king list)에 의해서 인정되었다. 최근에 학자들은 왕들의 나이에 대한 수만 년이라는 숫자를 잘못 번역했었음을 밝혀내었다. 이들 수메르인들은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60진법이 아니라 십진법을 사용했었다. 따라서 이제 수메르인 목록에 있는 전체 연대는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전체 연대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홍수 이전에는 환경이 매우 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입심 좋게 말해지던 오래된 연대를 던져버리게 한다)
창세기 10장의 민족들의 표는 단순한 전설로 간주되었었다. 다시 한번 알브라이트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그는 이들 표들이 "놀랍도록 정확하게(astonishingly accurate)” 쓰여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참조 : 노아의 16명의 손자 : 고대의 지명과 민족들의 이름 속에 남아있다. https://creation.kr/EvidenceofFlood/?idx=1288381&bmode=view)
소위 세속적 고고학에서도, ‘전설(legends)’들은 오늘날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예는 아시리아 왕의 목록(Assyrian king list)으로, 여기에는 그들 왕들이 텐트에서 살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 중 최초의 왕은 투디야(Tudiya) 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었는데, 그 왕의 실존 여부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름의 왕은 BC 2200년에 에블라(Ebla, 오늘날 시리아)의 왕과 동맹을 맺었던 실제로 존재했었던 왕으로서 밝혀졌다. 에블라 왕의 또 다른 동맹은 이집트 기록에서 알려진 것처럼 이집트의 바로인 페피 1세(Pepi I)와 이루어지고 있다.
성경 기록들이 땅 속에서 파낼 필요 없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왔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창세기는 모닥불 옆에서 들려주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단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시(poetry)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한 인류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기록인 것이다.
* Clifford A. Wilson, Ph.D.
Dr. Wilson is known for his archaeological work and his book refuting Erich von Däniken's 'gods from outer space' theory. He has been in charge of Psycholinguistics at Australia's Monash University and was Professor of Early Childhood Education at the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참조 : How was Moses able to read pre-Tower of Babel texts?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eedback/2006/1027.asp
The development of languages is nothing like biological evolution
http://www.answersingenesis.org/tj/v14/i2/languages.asp
Does Archaeology Support the Bible?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nab/does-archaeology-support-the-bible
On the origin of language—Part 1
https://answersingenesis.org/tower-of-babel/babel/on-the-origin-of-language-part-1/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7/i1/tablets.asp
출처 - Creation 17(1):50–51, December 1994.
벨렉의 시대에
: 고대문헌은 성경의 연대기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In the days of Peleg)
Larry Pierce
창세기 10:25에서는 노아로부터 네 세대 후에 벨렉(Peleg: 나뉨(division))이라는 의미)의 출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세상(the earth)이 나뉘었음이요.” 어떤 사람들은 그 때에 지구의 대륙들이 나뉘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러한 과정은 매우 제한된 시간 간격 이내에 일어났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생기는 지질학적 격변은 굉장한 재앙이 될 것이며, 이것은 또 다른 노아의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대륙이 나뉘는 것과 같은 사건은 노아의 대홍수 동안에 일어났을 것이다.[1]
전통적인 해석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구절을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 때에 민족과 나라들이 나뉜 것과 관련짓는다. (영어에서 ‘earth’ 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듯이, 히브리어의 ‘erets’도 나라(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 따라서 ‘erets Yisrael’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땅, 나라, 민족 등을 의미한다.) 어셔(Ussher) 대주교가 추론한 성경 연대기에 따르면, 대홍수는 B.C. 2349-2348 년에 일어났으며, 벨렉은 약 백년 후인 B.C. 2247년에 태어났다. 이것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 고대의 작가들이 밝혔던 적이 있는가? 그 대답은 틀림없이 ”그렇다”이다.
바빌론이 시작되다
때는 BC 331년이었다. 알렉산더 대제가 아르벨라(Arbela, 앗시리아의 고대 도시) 근처의 가우가멜라(Gaugamela)에서 다리오(Darius) 왕을 쳐부순 후에, 그는 바빌론(Babylon)으로 여행을 했다. 거기서 그는 갈대아 사람들(Chaldeans)이 1903년 동안 천문 관측을 한 자료들을 받았는데, 갈대아 사람들은 그것이 바빌론의 창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이 맞다면 바빌론의 창시가 BC 2234년이 되며, 벨렉의 출생 후 13년 뒤이다. 이것은 AD 6세기에 라틴의 작가였던 심플리키우스(Simplicius)가 쓴 ‘하늘에 관하여(De Caelo)’의 여섯 번째 책에 기록되어 있다. 포피리(Porphyry, 비기독교인 그리스 철학자, AD 234-305경)도 역시 같은 숫자로 추론했다.[2]
이집트가 등장하다
비잔틴의 연대기 작가 콘스탄티누스 마나세(Constantinus Manasses, 1187년 사망)는 이집트인의 국가가 1663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것이 맞다면, 페르시아의 왕인 캄비세스(Cambyses)가 이집트를 정복한 BC 526년으로부터 거꾸로 계산하면, 이집트의 창시는 BC 2188 년이 되는데[3], 이는 벨렉의 출생 후 약 60년이 되는 시기이다. 이때쯤 함(Ham)의 아들인 미스라임(Mizraim)이 그의 집단을 이집트로 인도했다. 그래서 히브리 단어로 이집트가 미스라임이다 [4]. (또는 때때로 ‘함의 땅’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시편 105:23,27).
.미술가에 의한 바벨탑(Tower of Babel)의 복원. 고대의 지구라트(ziggurats)를 모델로 한 이러한 그림은 실제의 바벨탑과 유사할 가능성이 있다. 바빌론을 여행하는 길에 그것을 보았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 BC 5세기 경)는 그것은 8층을 가지고 있었으며, 60m 높이로 거대하게 서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그리스가 출발하다
4 세기에 가이사랴(Caesarea)의 감독이며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에 따르면,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에 있는 고린도(Corinth) 서부의 그리스 도시 시키온(Sicyon)의 왕이었던 에지알레우스(Egialeus)는 그의 통치를 BC 2089년에 시작했는데, 이는 첫 번째 올림픽(Olympiad)이 열렸던 BC 776년 보다 1313년 전이다.[5, 6] 만약 유세비우스가 맞다면, 이 왕은 벨렉의 출생 이후 160년 뒤에 그의 통치를 시작한 것이다.
바빌론과 이집트와 그리스는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함을 주목하라. 이들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히브리인들의 성경에서 발견하는 성경적 계보가 매우 정확하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다. 바벨탑 사건은 이들 다른 왕국들이 창시되기 이전에 생겼어야 할 것이다. 그 탑과 같은 지역에 있었던 바벨(바빌론)은 물론, 최초의 왕국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다른 왕국들 중에서, 바벨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왕국이 가장 늦게 창시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들 작가들이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첫 번째가 바빌론이고, 다음이 이집트이며, 그 다음에 그리스가 창시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인간성(human nature)에 관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기도 한다. 바벨탑 사건이후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언어에 따라서 강제로 그룹이 나뉘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게으르다. 그들은 평화롭게 살기 위해 부득이 할 경우에만 바벨에서 떠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 군사적 위협, 혹은 더 푸른 목초지를 찾고자 하는 열망 등은 그들로 하여금 더 멀리 이동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문명은 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주기적인 이동에 의해 느리게 퍼져나갔을 것이다. 비록 세상의 역사가들은 바벨탑과 대홍수의 사건을 무시하고 있지만, 문명이 바벨탑이 있었던 부근의 중동에서 시작하여, 그곳으로부터 서서히 퍼져나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적 연대기에서 추론한 시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시간 틀(time frame)을 사용하고 있다.
B.C. 3세기에 이집트의 역사를 기록했던 마네토(Manetho)로부터 흥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는 바벨탑 사건이 벨렉의 출생 이후 5년 뒤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다.[7] 이것이 맞다면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이동이 어떤 기간을 두고 일어났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혼잡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들 여러 나라의 확실하게 알려진 지도자들이 매우 어린 아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8]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성경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세속의 역사를 재건했을 때,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건 하지 않건 간에, 그것이 성경의 정확도를 바꾸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적인 연대기를 이용하여 세속주의자들이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를 결정해야 하며, 역사에 관한 최근의 세속적 고찰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고쳐서는 안된다. 이 연구 영역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가장 최근에 재건된 세속적인 인류 역사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앞다투어 조작한 기독교인들이 주로 무시해 왔다.
최근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창세기 1-4장과 6-9장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훌륭한 과업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창세기 5, 10, 11장(및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연대기 부분)의 계보에 대해서는 세속의 역사학자들의 영향권에 조용히 복종해 버렸다. 이들 연대기에 관한 그들의 파괴적인 작업이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거꾸러뜨렸다. 이제 성경적 배경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 성경의 연대기에 들어있는 숫자를 믿을 수 없다면, 그 숫자들 사이에 들어 있는 말씀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의 불신앙을 어디까지 가져갈 것인가?
*Larry Pierce is retired and publishes biblically related material as one of his hobbies and enjoys the study of ancient history. He and his wife, Marion, live in Winterbourne Ontario
References and notes
1. Baumgardner, J., Probing the earth’s deep places, Creation 19(3):40–43, 1997; Snelling, A.A., Plate Tectonics: Have the continents really moved apart? TJ 9(1):12–20, 1995.
2. Ussher J., Annales Veteris Testamenti, Flesher and Sadler, London, p. 5, 1654. (This work is in Latin. I am preparing a new English translation, which is scheduled to be published in September 2000. The paragraph number for this footnote is 49 in that revised work.)
3. Ref 2, p. 5, or paragraph 51 in the revised work.
4. Even now, Egyptians call their country Mizr.
5. Ref. 2, p. 6, or paragraph 54 in the revised work.
6. Eusebius, Chronici Canones, Humphredurn Milford, London, Preface pp. 1–14, 1923. (This Latin copy was prepared by Johannes Knight Fotheringham.)
7. Manetho, The Book of Sothis, Harvard Press, Cambridge, MA, p. 239. (Loeb Classical Library 350). Manetho was the victim of many Egyptian fairy tales in constructing his chronology of Egypt. The Egyptians would place the Flood and Peleg’s birth much earlier than the Bible, but still they linked the Babel incident with Peleg's birth.
8. Ussher deduced that the division of the earth at the time of Peleg’s birth was Noah dividing the land among his grandchildren. They subsequently moved to Shinar, where they conspired to hinder this dispersion of them as commanded by God and begun by Noah, building the city and tower of Babylon (Babel). God frustrated this project with the confusion of languages, which was then followed by the dispersion of nations.
부록 : 성경과 연대기
오늘날 성경의 연대기를 대하는 세 가지 잘못이 있다. 하나는, 성경을 열등하게 보아서 거기에 나오는 연대기적 자료들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위의 기사에서 인용한 고대의 세속 작가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성경에 있는 자료의 정확성을 지지했는데, 이것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신화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분열왕국의 기간을 줄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한 주요 지지자로 에드윈 틸레(Edwin Thiele)가 있다.[1] 틸레는 단편적인 앗시리아의 연대기를 사용하여 분열왕국의 기간을 약 50년 가량 줄임으로써, 앗시리아에서 어림짐작으로 만든 자료와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바빌론은 벨렉이나 바벨탑보다 이전에 창시되었어야 한다.
세 번째 그룹은 성경의 연대기를 늘리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초기의 사람으로는, BC 3세기에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70인역(LXX)을 만든, 이집트의 랍비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마네토의 연구와 일치시키기 위해,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의 기간에 대한 성경 연대기에 700년 가량을 임의로 더했다. 그들이 행한 것이 옳다면, (나라들이 나뉠 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도 그렇고) 벨렉은 바벨탑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죽어 없어진 것으로 된다.
칠십인역의 번역자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많은 성경적 고고학자들은 오늘날에도 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이 이집트 사제들의 꾸며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듯이, 현대의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바빌론과 이집트의 창시를 수천 년 이전으로 되돌린 세속의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의 이야기들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2]
References and notes
1. Thiele E., 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Kregel, Grand Rapids, MI, 1994. The most mysterious thing about his work is the way he handled the Hebrew numbers to make them conform to Assyrian chronology. Little attempt was made to make Assyrian chronology fit the biblical chronology.
2. Merrill F. Unger, Archaeology and the Old Testament, Zondervan, Grand Rapids, MI, 1954. On page 84 he states Egypt dates back to about 5000 BC. On page 97 he states that Susa near Babylon dates back to about 4000 BC. Since the biblical date for the Flood is 2349 BC, how long could these people tread water? Although this book was published in 1954, its opinions are reflected in newer works dealing with biblical archaeology. If anything the situation has become worse, not better, in the last fifty years. Unger is a very conservative and well-respected Bible scholar. If he could be deceived, how much more careful should we be today when so many more errors are afoot?
*참조 : The Genesis 5 and 11 fluidity questio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54/
Biblical chronogenealogie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06/
A reliable historical record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2/j20_2_20-23.pdf
‘In Peleg’s days, the earth was divided’: What does this mean?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420/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2/i1/peleg.asp ,
출처 - Creation 22(1):46–49, December 1999.
900년의 수명
: 홍수 이후 단축된 인간 수명의 원인은?
(Living for 900 years)
Carl Wieland
소수의 사람들만이 120년 정도까지 산다. 우리가 (수명에 관하여) 더 많이 알아가고 있지만, 과연 새로운 연구를 통하여 우리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 노화에 관한 놀라운 새로운 정보는 대홍수 이전 사람들의 긴 수명(long lifespans)에 관하여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창세기는 오늘날의 경험에 비추어 말도 안 되는 긴 인간의 수명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담은 930 년(아래 그래프 참조)을 살았고 ,노아는 더 긴 950 년을 살았다. 이 긴 수명은 아무렇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노아의 홍수 전에는 길었고 홍수 이후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홍수 이전 족장들에서부터 (출생년도에 따라 표시) 성경기록에 나타난 수명을 살펴보면, 홍수 후에 수명이 급격히 짧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계 역사에서 극적인 무엇인가가 일어났다는 증거가 된다.
성경은 이러한 긴 수명이 그 당시의 시대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긴 수명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쉽게 비웃는다. 모든 치명적인 질병을 피한다고 해도, 오늘날의 인간은 일반적으로 100세를 얼마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도 120세를 많이 넘기지 못한다.
그러나 노화(aging)에 관한 증거에 의하면, 오늘날 평균 수명의 상한선은 사람이나 다른 다세포 생물의 예에서 보듯이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어떤 것 때문은 아님을 제시하고 있다,
질병, 음식, 부상과 여러 환경 요인들은 물론 우리의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의 저변에는 우리의 유전인자 속에 어떻게든 기록되어 있는 유전정보가 수명의 상한선을 결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정말로 놀라운 것이 아님은, 우리들은 어떤 가계는 대부분이 고령까지 살며, 또 어떤 가계는 그 반대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비록 평균 수명의 상한선이 각 종마다 프로그램 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육종 실험은 이 한계가 바뀔 수 있음을, 심지어 극적으로도 바뀔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초파리(fruitflies)와 벌레(worms)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이 개체군에 수명연장을 발현시킬 수 있기도 하고 제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로 같은 종류의 초파리 군에서 한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보다 평균 몇 배나 더 오래 살게 할 수 있다. 심지어 수명과 관련되는 유전자 스위치(genetic switch)가 벌레의 한 종에서 확인되었다.
우리는 왜 노쇠해 가는가?
왜 모든 다세포 생물은 (인간처럼) 결국 노쇠하여 죽게 되는가? 모든 고정된 구조들은 결국 마모되어 없어진다는 물리법칙을 단순히 인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생물학적 조직체는 그 자체를 스스로 수리하는 능력인 내재된 지능(DNA에 정해진 대로)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박테리아와 같은 단세포 동물들은 노쇠로 죽지 않는 이유이다. 그들은 단지 2개의 복제품으로 분화되고 각각이 다시 두개로 분화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인간과 같은 생물체에는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진 조직기관이 있다 (예: 간, 콩팥 등). 이 세포들은 왜 계속 나누어지고, 수리하여, 영원히 그 장기를 새롭게 하지 않는가? 만일 노쇠한 세포를 새 세포로 교체하여 새로운 조직기관이 만들어진다면, 인간의 신체도 노쇠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넘어지는 나무에 깔려죽거나 감염으로 죽을 수는 있겠지만, 늙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는 되지 않고, 우리의 각 기관은 노쇠하게 된다. 기관 내의 세포들은 일정기간 동안은 증식하지만 영원히 계속하지는 않는다. 몇 번의 분화(dividing)를 거친 후에, 이 세포들은 분화를 멈춘다. 보통 인간의 세포는 단지 약 80–90 회 분화를 하면, 그 이상은 분화하지 않는다.
우리 염색체들 각각의 끝에는 텔로미어(telomere)라고 불리는 구조가 있다. 이것은 끝에 많은 구슬(beads)이 달린 계수장치(counting device)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포가 둘로 나뉘어 질 때마다 구슬 하나가 잘라져 나가서 텔로미어(아래의 그림 참조)가 짧아진다 [1]. 구슬이 모두 없어지면 세포 분열이 더 이상 발생할 수 없다. 그때부터는 각 세포는 쇠약해지더라도 새 세포로 교체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당신이 치명적인 사고나 질병을 피하더라도, 결국은 어느 기관의 고장으로 죽게 된다.
세포가 나누어지는 작용은 DNA에 기록되어 있는 유전정보의 지시에 의해 통제된다. 그래서 노화를 결정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미리 정해진 유전적 한계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만일 그 유전적 한계가 다른 수명을 정해두었다면, 900년 이상의 수명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할 어떠한 알려진 생물학적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 유전적 수명한계에 정말로 큰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다. 우리는 단순히 초파리에서 육종 선택을 통하여 유전자 순서를 뒤섞어서 그들의 수명을 현저하게 늘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진짜 문제는 홍수이전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하는가’이다.
노아의 새로운 환경
홍수 이후 수명 감소를 보면서, 그것이 현저하게 변화된 세계와 관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화석 기록의 증거는 홍수이전 세계에서 탄산가스 (아마 산소도) 농도가 더 높았음을 시사한다. 많은 학자들이 대기의 수증기층이 홍수이전 세계를 우주방사선(cosmic radiation)으로부터 보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로 인해 노화가 크게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홍수 후의 환경이 엄청나게 유해하게 변화되어 수명이 800년이나 줄어들어 1/9로 되었다고 보는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에 그는 벌써 600 세가 넘었다. 그러나 훨씬 유해한 환경으로 인해 그가 빠르게 노화하여 20-30 년 만에 죽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350 년을 더 살아 심지어 그의 조상 아담보다도 오래 살았다.
우리는 환경적 요인들이 인간 삶의 발달 단계에서만 문제를 초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노아가 여전히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하나의 쉬운 설명은 노아의 유전적 구성상태가 그에게 긴 수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홍수 이전의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정해진 수명보다 매우 긴 수명을 가지도록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나? 전 세계의 인구가 단지 몇 사람으로 줄어버린 점을 상기해 보자. 긴 수명을 결정하는 정보가 포함되었을지 모르는 특정 유전자가 (대립형질(alleles)로 알려짐) 인류가 사실상 8명만 남고 멸절되는 과정(병목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래글 참조)
다른 요인들
비록 그런 유전정보의 손실이 수명감소의 원인이었다 할지라도,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닐지도 모른다. 유해한 돌연변이가 더 많이 발생한 것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돌연변이의 일부는 텔로미어 길이의 손실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홍수 이후에는 음식물로 사용 가능한 식물군이 급격히 줄어들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시점에서 사람에게 고기를 먹도록 허락한 하나의 이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장 열렬한 건강식품 예찬론자라도 우리가 단순히 음식을 바꿈으로서 오늘날 다시 950년이나 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이 다른 요인들 일부는 수세기 동안 계속되는 지속적인 수명감소의 이유였을 것이다. 이삭은 180세까지 살았고, 모세는 120세, 다윗왕은 단지 71세까지 살았다. 흥미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는 환경요인으로 인해 수명이 증가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노아의 수명에 가깝게 살기 위해서는 그의 유전적 인자들의 일부가 있어야 될 것이다.
물론, 모든 노화와 죽음의 궁극적인 이유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저주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아담은 영적으로는 즉시 죽었고, 육적으로는 오늘날 우리들처럼 바로 그날부터 죽어가기 시작했다.
현대의 유전학 연구는 우리 모두가 노쇠와 죽음의 필연성을 타고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울로 우리 얼굴에 생기는 주름살을 볼 때, 신성한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죄가 참으로 무거움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정죄함으로부터의 피할 길을 주셨음을 한없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수명의 차이
사고나 질병에 의한 사망을 무시하면, 여러 생물들은 상이한 평균수명을 가지도록 유전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정된 수명이 완전히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점점 축적되고 있으며, 어떤 종류의 생물에서는 선택적인 육종이 평균 수명을 크게 늘렸다.
가진 것 이상으로 사는 방법
약 30 년 전에, 프랑스의 어느 중년 변호사는 90대의 여성 고객과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이 변호사는 그녀에게 상당한 월급을 주기로 하고, 그녀의 아파트 소유권을 양도받았다. 그녀는 그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지 않고 평생 살수 있도록 합의가 되었다. 이 합의는 명백히 양쪽에게 다 유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나이가 워낙 많았으므로 그 변호사는 아파트를 매우 싼값에 사는 셈이었고, 고객은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여생을 충분한 수입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변호사에게는 아주 불운하게도 그의 고객 칼멘트(Jeanne Calment)는 현대 역사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 되었다. 1997년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는 122세 하고도 164일을 살았다. 그녀의 변호사는 그녀가 죽기 훨씬 이전에 노환으로 죽었다. 그는 결국 그녀에게 아파트의 가격의 몇 배를 지불하게 되었다.
최근 두 명의 프랑스 학자가 칼멘트의 양쪽 가계 5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조사를 했다. 그녀의 조상들은 모두 같은 지역 사람들의 평균 수명에 비하여 무려 10.5년을 더 오래 살았다. 그 학자들은 그녀의 생활양식이나 음식물은 장수에 큰 요인이 아니었으며, 희귀한 장수 유전자들의 집합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분명히 그녀는 더 일찍 죽음을 초래했을지도 모르는 다른 불운도 겪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수명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는 우리의 논제와 일치한다. 홍수 이전 우리 조상들에게 여러 가지 장수하는 유전적 요인이 있었던 것이 그들이 장수한 이유였고, 그 이후 이들 유전요인을 잃어버린 것이 수명감소의 원인일 수도 있다.
홍수 이후의 유전적 손실이 수명 감소의 원인?
여러 형태의 유전자들(대립 형질로서 여러 특질을 나타내는 DNA 정보 사슬)이 소수의 개체군에서는 소멸되는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 이라고 알려진 단순한 현상이 있다.
유전자들은 쌍으로 존재하며,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또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다. 위의 그림에서 보여준 것처럼 유전자의 G 형태는 아버지에게 있고 어머니에게는 없다. 그들의 아이들은 각각 G 형태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반반이다. 그러므로 후손의 누구도 이 유전자를 계승하지 않을 가능성은 그렇게 낮은 것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단지 3명의 자녀를 가졌다면, 확률은 1/8이다). 전체 인류가 노아와 그의 3명의 아들과 3명의 며느리로 감소되었던 상황에서, 노아의 유전자 중 일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지금 노화가 대부분 유전적 요인인 것으로 보이므로, 장수 유전자들의 일부 손실이 홍수 이후 수명감소의 이유일 수 있다. 아마 그 이후의 개체군 분리가(바벨에서) 이 유전자 제거에 더 한층 기여했을 것이다.[2]
자손에게 전달되는 유전적 조합의 가능성
죽음으로의 초읽기
각 염색체(텔로미어(telomere)로 불리는)의 끝에 있는 ‘덮개(capping)’는 운동화 끈의 끝에 있는 덮개처럼 말단이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텔로미어는 세포가 분열될 때마다 짧아지다가 한계에 이르면, 세포는 더 이상 분열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제한된 수명이 결정되는 단지 하나의 방법이다. 만일 사람들이 적절한 유전적 구성(genetic makeup)을 가진다면, 그들이 현재보다 훨씬 오래 살지 못할 어떤 생물학적 이유도 없다.
인간의 세포 중에서 영원히 분열을 계속할 수 있는 세포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암세포이다. 이들에게는 분열을 멈추게 명령하는 스위치가 없는 것 같다. 그러한 까닭으로 인간의 세포를 필요로 하는 의학 실험실은 어느 불행한 암환자의 암세포에서 키운 세포를 계속 공급받을 수 있다 (이것을 헬라 세포(HeLa cells)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세포가 바로 Henrietta Lacks라는 여성의 암세포이기 때문이다). 헬라 세포는 실질적으로 영생한다 (기존의 헬라 세포를 전부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는 한).
최근, 텔로미어의 복제와 관련된 효소에 의한 실험 결과는 많은 흥분을 초래했다.[3] 인간의 세포라인을 변화시켜 그들의 한계보다 많은 횟수로 분열하게 만들었다. 일부는 그런 조작에 의해 사람들이 질병이나 사고로 죽지 않는 한 매우 오래 살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화라는 것은 분명 이러한 기초적인 결과로 단순화한 논의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증거로 보아 유전적 요인이 주된 역할을 하고 있음이 강력히 제시되고 있다.
*참조 : Temporal changes in the ageing of biblical patriarch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151/
Did People Like Adam and Noah Really Live over 900 Years of Age?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06/04/did-people-live-over-900-years
Bibliography/further reading
▷ New Scientist: November 22, 1997, p. 7; January 3, 1998, p. 6; February 7, 1998, p. 14; February 28, 1998, p. 23.
▷ ‘Can science beat the body clock?’ Sunday Times (London) January 18, 1998, p. 15.
▷ ‘Extraordinary lifespans in ants: a test of evolutionary theories of aging’, Nature389:958–960, 1997.
▷ ‘Why do we age?’ U.S. News & World Report, August 18–25, 1997, pp. 55–57.
▷ ‘Genetics of Aging’ Science 278(5337):407–411, 1997.
References and notes
1. Simplified for brevity — there is a fluctuation in length, with a net shortening. In our brain cells, the telomere does not shorten.
2. This assumes that there was probably considerable variation in lifespans in the pre-Flood world, with some only programmed to live a maximum of say, 400 to 500 years. This may be why Noah’s sons failed to match his great age.
3. This enzyme, called telomerase, was discovered in 1980 by the winner of the 1998 Australia Prize, Prof. Elizabeth Blackburn. Without telomerase, cells cannot copy their ‘caps’. Prof. Blackburn, along with Carol Greider and Jack Szostak, were awarded the 2009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for the discovery of how chromosomes are protected by telomeres and the enzyme telomerase.”
*참조 : 아담은 정말 930년을 살았는가? : 사람 수명의 감소곡선은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가리킨다.
http://creation.kr/Genesis/?idx=1289129&bmode=view
노아 홍수 이전 사람들의 긴 수명에 관해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883&bmode=view
조상들과의 만남 : 창세기 연대기의 정확성과 족장들의 긴 수명
http://creation.kr/BiblicalChronology/?idx=1289265&bmode=view
홍수 이후 단축된 인간의 수명
http://creation.kr/BiblenScience/?idx=1288796&bmode=view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living-for-900-years
출처 - Creation 20(4):10-13, September 1998.
좁은 길 (The narrow road)
: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론이 걸어가는 길
Ken Ham
현대의 복음주의가 6일 창조에 관하여 타협을 하는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창세기에서 비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견해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이간시키지” 말라고 항변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자기 교회 사람들을 우리 세미나에 보내서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듣게 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와 젊은 지구 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우리의 세미나를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외쳤다! ”단지 본질적인 요소만 의견이 일치한다면 이러한 분열 없이 함께 일할 수는 없을까요?”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듭났다면, 그는 창세기의 내용을 당신이 믿듯이 믿고 있지 않은 경우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세요?”
나는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내가 창세기에 대해 믿는 바와 동일하게 믿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당신이 창세기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입니다. 믿어야 할 본질적인 내용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때 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요?”
”우리의 죄들을 위해서요”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죄’ 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십시요.
그녀의 대답은, ”음,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반항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예, 물론이지요.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문자 그대로의 사람과 뱀, 선악과 등이 있었던 실제의 동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죄에 대한 기원은 없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천국에 가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원죄‘를 믿는 것이 본질적인 요소인가요, 아닌가요?”
”요즈음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점점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일치되는 모든 영역을 묻어버리고 같이 일할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단지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를 치워놓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역에 있어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항의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에 입각한 몇 가지 교리를 살펴보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사소한 논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 (고전 15:21-22)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전적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의)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罪性)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심으로, 성경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26절)라고 말한 (육체적) 죽음을 정복하셨다. 오래된 지구 연대 이론이 옳다면, 하나님은 수십억 년 동안의 죽음과 고통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 (창 1:31)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결혼. (막 10:6-9) 예수님은 (수백만 년 이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문자 그대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인용하고 계신다.
회복. (행 3:21; 계 21:4, 22:3) 오래된 연대의 지질 시대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고통이 오랜 세월 동안에 계속 있어왔다. 최초의 장소에 죄가 없었고 죽음이 없었던 세상이 결코 없었다면, 모든 사물은 그런 세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성경의 신뢰성. 최고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가 정확히 우리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데에 만장일치이다.[1]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수천 년 간 잘못 인도했었다고 거부했던 자들이 아닌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조과학운동,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음(따라서 지구는 젊다) 등의 견해에 반대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인 논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창조과학자들을 편협하고 쓸 데 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슬프게도, 이런 공격 중의 몇 가지는 스스로 ‘진화론을 반대하는 창조주의자‘ 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예를 들어, 휴 로스(Hugh Ross) 박사는 점진주의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로서, ‘빅뱅(Big Bang)‘을 믿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국지적인(a local Flood) 것이었으며, 죄가 들어오기 전에 수백만 년 동안 죽음과 피흘림이 있었고, 아담과 하와 이전에는 인간을 닮은 다양한 ‘혼이 없는‘ 존재들이 있어서 자기들의 시체를 묻었고, 동굴 벽화를 그렸다고 믿고 있다. ‘창조와 시간(Creation and Time)‘ 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의 교회가 할례 때문에 분열되었던 것처럼, 요즘 세기에는 창조의 연대에 관한 논점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본다. 할례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주의를 방해하였듯이, 요즘에도 젊은 지구 창조론이 그러하다.”[2]
그런데, Answers in Genesis와 같은 사역이 급격히 성장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복음주의의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수년간 창조과학 사역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세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아왔다. 그 중에는,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오래된 연대 개념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해답이, 성경을 왜곡하여 현존하는 통설에 끼워 맞추려는 시시한 시도였기 때문에, 이전에 기독교를 포기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창세기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오늘날 그들에게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 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때는 기독교의 ‘근본‘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붙여졌던 명예로운 용어였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테러행위 및 광신과 연합함으로써, 이제는 그것이 극단주의 및 편협한 신앙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차라리 나는 역사의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 안에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계시론자(revelationist)‘로 불리고 싶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서도 그런 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1994년의 AP 연합통신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관한 새로운 바티칸 문서는 근본주의자들의 접근방법이 왜곡되고, 위험하고, 인종차별로 이끌 수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교황직속의 성경위원회가 쓴 그 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일종의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로 유도하고 있다.... 근본주의자적 접근은, 성경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돋우므로 위험하다.”[3]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또 다른 ‘공격‘으로, ‘창세기: 살아있는 대화‘ 라는 빌 모이어(Bill Moyers)의 프로그램이 1996년 10월에 미국 공영 TV에서 방영되었다. 이 쇼는 하나님의 속성과 동기에 대해 경멸적인 판단을 담고 있는데, 창세기를 실제의 역사라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슬람인, 자유주의 기독교인 및 무신론 주석자들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4]
모이어의 연재물에 관한 Newsweek 지의 기사는 요즘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재미있는 논평을 하였다.
”종파에 대한 충성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이론을 오히려 신학교에서 퍼뜨리고 있다....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거의 절대성을 잃어가고 있다.” [5]
성경적 창조 운동(Biblical creation movement)은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literal Genesis)를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를 고수하며, 교회나 속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세속적인 학문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압도적으로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 세속적인 이론(증거 없이 주장되는 지구의 나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재해석되기 시작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재해석하는 문이 열리게 되어,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의 동료가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선도적인 설교가 중의 한 분이며, 매우 영향력 있는 목사님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반대하는 그 분의 입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성경의 권위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 주제는 태고의 지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스터플랜’ (Masterplan, 창세기를 다룬 그의 책)에서 내가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 분열되어 있는 의견들이 복음주의 안에서 연합되고자 하는 바램을 반영한 것입니다.” [6]
슬픈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관점을 세속적인 견해와 타협하며, '연합'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는 동안에, 비기독교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World 지가 보도하기를 빌 모이어의 창세기 프로그램에 나온 한 이슬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믿음을 타협하기를 거절한다. 이슬람은 최소한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유지하기를 원한다. 유대교는 끝없는 문답(dialogue)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기독교는 변명과 혼돈 속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7]
우리의 서구 문명에는 갈라진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 그 틈은 교회와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려는 문자적 창조론자 같은 교회와 나머지 교회 및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다.
분열은 항상 나쁜 것인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2:5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말씀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고자 할 때는 약간의 분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자적 창조론자들이 오늘날의 보수적인 교회에 있어서까지도 소수파로 여겨진다는 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3-14장의 구원에 관한 말씀 속에서, 넓은 길로 열려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점에 관하여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의 멸망적인 타협 속으로 황급히 돌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종종 그 말씀을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에 따르는 것은 항상 ‘좁은 길(narrow road)‘ 인 것이다. 당신은 진정 어느 길에 서 있는가?
References and notes
1. Oxford Hebrew professor James Barr has written (in a letter to David C.C. Watson in 1984) that he knows of no professor of Hebrew at any world-class university who thinks that Genesis was meant to convey anything other than an actual account of a real, recent creation in six ordinary days and a global Flood. Like Barr, that does not mean they actually believe Genesis to be true, just that they are unanimous about what it means.
2. Dr. Hugh Ross, Creation and Time, Navpress, p. 162, 1994.
3. Quoted in Foundation, News & Views XV(4), July–August, 1994. On top of this, the Pope’s announcement in October 1996, saying that he saw no conflict between evolution and Christianity (so long as God created the soul of man) provided the media with more ammunition to continue to try to alienate creationists from what it sees as ‘mainstream Christianity.’
4. Time, p. 72, October 28, 1996, reported: ‘ ... Moyers decided not to include Christian Fundamentalists: ... It would have struck people as the same discourse they’ve been hearing for the last 15 years.’ Earlier, the same article stated: ‘Much of the recent popular controversy around Genesis has focused on the issue of whether the Creation should be understood literally. That debate has tended to obscure a further set of issues hinging on the character of both God and the patriarchs.’ Again, literal creationists are made out to be a stumbling block to people understanding the ‘real truth’ of the Bible.
5. Newsweek, October 21, 1996, p. 76.
6. Correspondence from Pastor Roy Clemens, Eden Baptist Church, Cambridge UK September 25, 1996.
7. World, October 26, 1996, p. 23.
*참조 : The Reformation of the 16th Century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reformation-sixteenth-century
Progressive creationist anthropology: many reasons NOT to believ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3/j20_3_31-38.pdf
Western culture and the age of the eart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21/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2/narrow.asp
출처 - Creation 19(2):47–49, March 1997.
창조, 타락, 그리고 콜레라
(Creation, Corruption, and Cholera)
Frank Sherwin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은 사람에게서 장질환인 콜레라를 일으킨다.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toxin) 때문에 감염은 치명적이다. 타락 이전에 이 독소는 다른 기능(alternative function)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여러 과학 분야의 공헌들에 의해서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창조 모델은 많은 비진화론적 시각으로 분석되어왔다. 창조과학자들은 오늘날의 병원성 세균과 기생충들은 사실 타락 이전의 세계에서는 유익하거나 적어도 중립적이었다고 제안하고 있다. 때때로 유해한 것들이 있지만, 우리의 대장에 있는 대장균(E. coli)과 같은 것들은 유익한 세균이다. 이 복잡한 유기체는 비타민들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질병을 예방하기까지 한다. 또한 분선충(Strongyloides stercoralis)이라고 불리는 실처럼 생긴 벌레가 있다. 그것은 독립 생활과 기생 생활을 같이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벌레는 사람 밖의 환경에서 잘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에게 감염되었을 때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생충 감염과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타락과 우주적 저주의 결과였다고 제안되고 있다.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은 사람에게서 장질환인 콜레라를 일으킨다.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 때문에 감염은 치명적이다. 타락 이전에 이 독소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하와이산 짧은 꼬리 오징어(Hawaiian bobtail squid)에 공생(symbiotic)하고 있는, 기묘한 빛을 내고 있는 발광 박테리아(V. fischeri)는 이 독소와 매우 유사한 독소를 만든다. [1] 짧은 꼬리 오징어는 먹이가 있는 맑은 물에 사는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박테리아의 발광 특성( luminescent properties)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는 좋은 사냥꾼이지만, 커다란 야행성 포식자들에게는 맛있는 간식이 된다. 물 아래에서 보면, 어두운 오징어는 달빛(moonlight)에 의해 신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목표물이 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오징어의 배 쪽(ventral side)에는 카메라의 조리개와 매우 유사하게 작동되는, V. fischeri을 포함한 잉크 주머니(ink sac)에 의해서 둘러싸인 빛을 내는 장기(a light organ)를 가지고 있다. 세균이 내는 빛은 반사체에 의해서 증강되고 달빛과 같이 아래쪽으로 비춰지게 되면서, 오징어는 은밀한 잠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균들이 배가 고파지면, 그들은 콜레라균과 비슷한 독소를 분비한다. 이 독소는 오징어를 병들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먹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징어는 먹이를 제공한다.
한 진화론자는 제안했다 : ”아마도 우리가 콜레라의 병인을 연구해오고 있었을 때,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연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2] 창조과학자들은 이것은 저주(Curse)의 결과일 것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생물학자인 조 프란시스(Joe Francis)에 의해서 제안된 한 창조 이론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창조론적 관점에서 바이러스와 미생물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미생물들은 화학적으로 풍부하지만 생명이 없는 물질 환경(physical environment)과 거대한 유기체 사이(macro-organisms)의 연결 고리로서 하나의 유기적 기질(organosubstrate)로서 창조되었다. 이들은 다세포 생물체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기질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3]
정말로 많은 박테리아 세포들은 하나의 공생적 군집(symbiotic community)으로서 의사소통을 하고,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은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병원성은 최초의 창조 의도로부터 벗어난 것일 수 있다. 미생물 V. fischeri와 V. cholerae가 그 예이다.
1. http://whyfiles.org/022critters/light2.html
2. Ibid.
3. Francis, J. 'Organosubstrate of Life,' The Fifth International Conference
▶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병원균과 질병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creation-corruption-cholera/
출처 - ICR, 2005. 11. 1.
회의론자들의 도전 : 사랑의 하나님은 왜 킬러 해파리를 창조하셨는가?
(Skeptics challenge : a ‘God of love’ created a killer jellyfish?)
David Catchpoole
눌러 부수고, 죽이고, 파괴하고... 왜 생물체들은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고, 죽이고, 먹는 기관들을 가지고 있을까?
크리스천들이 설계자(하나님)가 계시다는 증거로서 살아있는 생물체들의 복잡성을 지적할 때, 조롱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설계된 모습들 중에서 많은 부분들이 먹이를 사냥하고, 사로잡으며, 포식자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을 즐겨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장 유독한 바다생물 중 하나인 상자해파리(box jellyfish)의 경우에 대해서, 한 반창조론자(비과학자인)는 ”만약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리고 그가 사랑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모든 생물 종들을 창조하셨다면, 왜 그러한 쓸데없는 그리고 정교한 잔학성을 가지도록 생물체들을 창조하셨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어떤 동물이 해파리에 의해서 죽기를 원하겠는가?” [1] 그는 ”이것보다 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라고 결론짓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물체들이 갖고 있는 방어-공격 구조(defence-attack structures, DAS)들에 대한 유사한 도전들에 대해 답을 할 때, 성경은 사람과 동물 모두 태초에는 채식을 했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은 기억해야만 한다.(창세기 1:29-30).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에서 nephesh chayyah 라 불리는 척추동물이나 사람에게 처음에는 죽음이 없었다. 그러나 식물들과 무척추동물들은 그와 같이 기술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들은 성경적 의미에서는 ‘살아있는 창조물(living creatures)‘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전체 창조를 저주하셨던 아담의 타락(Fall of Adam)으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과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창3:19, 롬8:20-22).
성서적 구조 틀로부터 답을 한다면,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조롱자의 도전에도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특별한 경우도 이러한 일반적인 범주 내에서 설명될 수 있다.[2]
(a) 현재 DAS로서 사용되어지는 것들은 이 목적을 위해서 설계되지 않았으며, 타락 이전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그것들은 퇴화(degeneration), 즉 돌연변이에 의해서 현재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b) DAS를 위한 설계 정보는 이미 타락 이전에 아마도 잠재적이거나 숨겨진 형태로 존재했을 수 있다. 하나님은 타락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타락된 세상에서 생존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을 창조물들에 미리 프로그램 해 놓으셨다.
해파리는 약간의 거리에서도 특별한 먹이를 독으로 공격하는 메커니즘을 시발하는 극적인 효율성을 가진 자세포(stinging cells)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첫 번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나님은 아마도 이 자세포에 대해서 타락 이후에 스위치가 켜질 복합적인 정보를 설계해 놓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해파리는 타락 이전에는 무엇을 먹었을까? 아마도 오늘날의 해파리들에서 관찰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은 우리들에게 타락 이전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 일부 해파리들은 식물성 플랑크톤(phytoplankton, 즉 동물이 아니라 식물로부터)으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고 말해진다. Scientific American 웹사이트에서 해파리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일부 해파리(전도된 해파리(upside-down jellyfish)와 같은, Cassiopeia xamachana)들은 채식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먹이를 키우고, 그것들을 운반한다. 이들 해파리는 그들의 갓 안쪽에 조류들을 모은다. 그들은 대양에서 떠다닐 때 먹이 근원으로서 그들을 데리고 다닌다.” [3]
▶ 많은 물고기들은 해파리의 갓(bells) 아래에서 촉수(tentacles) 사이를 자유롭게 수영하면서 피난을 한다. 그들의 접촉은 자포의 발포를 시발하지 않는다.
▶ ‘독(poison)’의 개념은 양(amounts)에 달려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대부분의 독들은 적은 양에서는 유익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치명적인 보툴리늄 독소(botulinum toxi)도 현대 미용술(botox)에서 사용되고 있다. 반대로, 산소(oxygen)와 같이 좋은 것도 많은 양에 노출되면 독으로서 작용된다. [4]
사실, 문제는 진화론자들이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너무도 많다. 이것이 그들이 과학적인 것보다 의사-이론적 주장들에 호소하고 있는 이유이다.[1]
1. 해파리의 진화론적 기원과 다른 동물과의 추정되는 진화론적 관계는 자주 많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으며, 생물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수수께끼 중의 하나라고 묘사되고 있다. [5]
2. 해파리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그리고 보통 원시적인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도 자포(nematocysts)는 가장 복잡한 동물성 구조 중에 하나라는 것과 침의 발사(the firing of the dart)는 아마도 알려져 있는 가장 빠른 생물학적 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6]
3. 해파리 여러 종들은 주입하는 독소(toxins)들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연구자들은 해파리를 계통발생적 관계(phylogenetic relationships)보다 자포의 형태와 행동 방식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러한 서로 다르고, 복잡하고, 효율적인 자세포의 메커니즘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진화론자에 있어서의 거대한 어려움이다.)
4. 상자해파리(box jellyfish)가 맹독을 갖게 된 이유에 관한 2 가지의 주요 진화론적 이론은 (a) 그들은 부서지기 쉬운(fragile)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그들의 먹이를 제압해야만 했으며, 그리고 (b) 그들 자신을 거북이와 같은 약탈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한 강력한 독소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 두 이론이 모두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서지기 쉬운 종들은 단단한 종들보다 더 적은 독을 가지고 있으며, 거북이와 여러 물고기 종들은 독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해파리를 먹어치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7]
만약 해파리들이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주변에 있었다면, 원래에 자세포는 무엇을 위해 사용됐었을까? 한 진화론자는 해파리와 같은 커다란 포식 생물체(predatory organisms)가 그들 주변에 먹이감이 아무 것도 없었던 시기에도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8] 말하고 있다. 동일하게, 해파리는 약탈자에 대항하기 위해 자세포를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에 의하면 아직 약탈자가 진화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거는 타락(the Fall)이 모든 생물체들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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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dreds of jellyfish fossils! : Creation 25:4 (September 2003)
References
1. Davis, R.G., Killed by a jellyfish, Freethought Today, 1 July 2003 (‘freethought’ is a pretentious self-description of some of the most dogmatic-thinking atheists).
2. See also Batten, D. (Ed.), Ham, K., Sarfati, J. and Wieland, C., The New Answers Book, Master Books, Arkansas; Triune Press, Brisbane, Australia, 1999; and Q&A: Genesis—Curse.
3. Scientific American <www.sciam.com/print_version.cfm?articleID=00031A14-67F1-1C72-9EB7809EC588F2D7>, 1 July 2003.
4. Bergman, J., Understanding Poisons from a Creationist Perspective, TJ 11(3):353–360, 1997.
5. FAQ—Where do the jellyfish come from?, 2 July 2003.
6. California Academy of Sciences—The Venoms Lecture Series, 1 July 2003.
7. Why are Box Jellyfish toxic?, 30 June 2003.
8. Phylum Cnidaria, 1 July 2003.
▶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생물 독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5/i4/killer.asp
출처 - Creation 25(4):34–35, September 2003.
창세기의 하나님은 진정 누구이신가?
: 삼위일체의 하나님
(Who really is the God of Genesis?)
Russell Grigg
창세기의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여기지 않는 오늘날의 유대교, 힌두교, 여호와 증인, 유니테리언파(삼위일체론을 부인하고 유일 신격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기타 다른 신앙 체제들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체제들과는 달리, 창세기는 기독교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한 분이시며 또한 한 분 이상인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경의 맨 첫 번째 절은 이렇게 써 있다. ”태초에 하나님(복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단수)”(창세기 1:1).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어로서 단수인 엘(el) [3] 또는 단수의 시적인 형태인 엘로아(eloah)를 사용하지 않고, 복수 용어인 엘로힘(elohim)을 사용했다. 그러나 동사에 대해서는 단수형태를 사용하고 있다!
엘로힘 이라는 단어 이외에도 모세는 창세기의 하나님에 관련하여 다른 복수 형태를 사용하기도 했다. 창세기 1:26은 다음과 같이 써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복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복수)” [4]. 여기서 모세는 ‘가라사대’ 라는 단수동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대해서는 복수 대명사와 복수의 동사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1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모세는 이들 복수 형태를 사용했는가?
어떤 사람은 이 복수가, 오늘날 왕이나 여왕 및 기타 다른 사람들이 당당하게 사용하는 ‘짐(朕)’(royal we)이라는 말과 같이 단순히 장엄 복수일 뿐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성경 기사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모두 단수로 부르고 있다. 언어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박사는 말하기를, ”모세의 시대 혹은 그 이전에 사람들이 왕이나 왕자를 복수 형태로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상 성경은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서 보더라도 그러한 증거는 없다.” [5]
또 다른 사람들은 좀더 나아가서, 엘로힘은 하나님이 그 분 안에 복수의 능력과 속성과 인격을 포함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한다. 엘로힘은 단수의 의미를 갖는 복수 명사이다. 구약의 저자들은 이 단어를 2,500회 이상 사용했는데, 통상적으로 (창세기 1:1에서처럼) 단수의 동사나 형용사와 함께 사용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동시에 한 분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신격의 ‘단일복수(uniplurality)’ 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단일복수’ 혹은 ‘인격(personhood)의 복수’가 삼위일체(trinity)를 말하는가?
두 번째 위격 : 하나님의 말씀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약에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 (부록을 보라).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요한복음 1:1-14에서 그분의 명칭 중의 하나가 ‘말씀(the Word)’ (헬라어로 ‘로고스(logos)’)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the Word was God)” (요한복음 1:1)의 구절을 주목하라. 이것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 제1장을 다시 읽으면, 창조주간 6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His Word)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각 날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공식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and God said) …” 였으며, 그대로 되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록 창세기의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활동이 밝혀져있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것을 명백하게 확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골로새서 1:16절은 다음과 같다. ”만물이 그에게(by Him, 14절; 그 아들) 창조되되...” [7]. 따라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스스로의 작용(self-causation)이나 진화론적인 자연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룩하고, 능력 있고, 지성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작동하였다. 거기에다가, 그 동일한 아들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히1:3, 골1:17 참조).
세 번째 위격 : 하나님의 성령
창세기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모세가 사용한 히브리 단어 루아흐(ruach)는 문맥에 따라서 ‘영(spirit)’, ‘바람’, ‘숨(breath)’ 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면 모세는 바람이 물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특별히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땅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8] 창조의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답 : ‘운행하시니라(hovering)’ 라는 분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단지 창조주간의 중요한 사건을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에는 땅에 사람이 살 수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이 모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결론짓는다 [9].
결론
우리는 저자가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은 성경구절을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이 삼위일체를 명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창세기의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 혹은 성령에 관하여 나중에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하나님의 영감으로 사용한 단어들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에 관하여 성경에서 나중에 완전하게 드러난 것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록 참조).
창세기는 성경의 맨 첫 구절에서부터 창조주 하나님이 진정으로 한 분의 하나님이라고 확증한다. 신명기 6:4의 유명한 쉐마 (Shema, ‘들으라(hear)’에 대한 히브리어)에서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one)인 여호와시니.”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one)’에 대한 단어 에하드(echad)는 종종 단일성 안에서의 복수에 대해 사용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19:5과 마가복음 10:8에서 인용하셨던) 창세기 2:24에서 남편과 아내(두 사람)가 '한(echad) 몸을 이룰지로다” 와 같은 것이다 [10].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한 분의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임을 드러낸다. 세 구별된 위격이 하나의 영원하고 거룩한 본질 혹은 실재 안에 있다. 따라서 실제로 창세기 1장에서 삼위일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 유일하고 삼위일체이신 -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창세기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율법을 주셨으며, 우리의 구원자와 심판자가 되신다.
References and notes
1. Modern-day non-Messianic Jews might believe that God created as per Genesis, but they reject God’s uniplurality.
2. The first of some 2,570 times elohim is used of God in this way in the Old Testament. Although it usually refers to the Living God, it is also used occasionally in the Bible to refer to pagan deities (in the plural), as in: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elohim] before me’ (Exodus 20:3; cf. Joshua 24:16; Jeremiah 5:7).
3. Corresponding to the Greek theos, the Latin Deus, and the English God.
4. Some antitrinitarians try to claim that God is conversing with angels here. But there is no indication anywhere in Scripture of angels being involved in creation, or having such creative power. And more importantly, mankind was made in the image of God, not in the image of ‘God plus angels’—see also Hebrews 2.
5. Taylor, C.V., The First Hundred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p. 3, 1996.
6. E.g. Morris, H.,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p. 39, 1976.
7. See also John 1:3; 1 Corinthians 8:6; Hebrews 1:2.
8. Whom the Bible tells us is eternal (Hebrews 9:14), omniscient (1 Corinthians 2:10–11) and omnipresent (Psalm 139:7–10).
9. Kelly D.F., Creation and Change,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Ross-shire, UK, p. 91, 1997, who references Young, E., Studies in Genesis One,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Co, Philadelphia, USA, p. 36, 1964.
10. Paul, thoroughly educated in Judaism and writing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understood this. In 1 Corinthians 8:6, he wrote: ‘Yet for us there is but one God, the Father, from whom all things came and for whom we live; and there is but one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all things came and through whom we live.’ Here, Paul is applying the Shema, using the key phrase ‘one Lord’, and applying it to Jesus Christ, thus including Jesus in the identity of the one true God!
부록 1 :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elohim)의 근본적인 의미는 ‘능력 있는 분(the powerful one)‘이므로, 엘로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한다. 모세가 창조주간의 창조주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주 적절하였다. ”길고 잡아 늘려진 진화론의 시간표 동안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다양한 물체와 존재들을 창조하신 것에서 그분의 능력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1]
일반적으로 엘로힘은 하나님에 대한 이름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직함(title) 혹은 서술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정말로 개인적인 이름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그분이 드러내신 이름(출애굽기 3:15), 즉 YHWH로서 종종 야훼(Yahweh)로 음역하며, 영어로는 ‘Jehovah(여호와)‘와 대문자 ‘LORD(주)‘로 쓴다. 그 의미는 ‘나는 나다(I am that I am)'이며 ‘스스로 있는 자‘ 혹은 ‘있게 하는 자‘를 뜻한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2]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와 맺는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모세는 결합된 용어인 여호와 하나님(Yahweh elohim, 야훼 엘로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번역가들이 영어로는 ‘주 하나님(the LORD God)‘으로 번역했다.
References and notes
1. Taylor, C.V., The First Hundred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p. 3, 1996.
2. As well as of God’s covenant relationship with His people.
부록 2 :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격의 하나됨(unity) 안에 영원하고도 서로 동등한 세 위격(persons)이 존재함을 말한다.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본질에서는 동일하지만, 역할이 다른 세 위격(혹은 의식의 세 중심)이시며 하나의 존재(being)이시다 (그림을 보라). 이 교리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존재에 관해 성경에서 드러내신 것이므로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예로써,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내려오셔서 아들 위에 임하는 것이 보였으며,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마태복음 3:16-17). 그리고 예수님이 대 위임(great commission)을 주실 때에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마태복음 28:18-20).
하나 됨(oneness)과 셋 됨(threeness)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교리가 스스로 모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원리에 있어서, 해군과 육군과 공군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전투 집단이지만, 또한 하나의 군대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주 : 이것은 세 위격이 하나님의 ‘부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각각의 위격은 신격의 충만을 갖고 있다(골로새서 2:9). 보다 나은 비유는, 공간이 세 개의 차원(길이, 폭, 높이)을 갖고 있지만, 그 차원들은 ‘부분들‘이 아닌 것과 같다. 즉, 세 개의 모든 차원이 없다면 ‘공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삼위일체와 사랑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 라고 말한다(요한일서 4:8,16).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특이한 것이며, 아직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때에도 사랑은 하나님 본질의 일부이다. 그런데 사랑은 최소한 두 사람을 필요로 하며, 자기 사랑은 전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신격 안에는 최소한 둘의 위격이 있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단 하나의 위격이라면, 사랑은 그분의 본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그들 자신에게로 제한되지 않고, 둘이 연합하여 다른 사람을 지향할 때 그 사랑은 더 위대하다. 이것은 가족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데, 즉,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며, 또한 그들의 사랑이 연합하여 그들의 자녀에게로 향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충만함의 견지에서 사랑을 나타내려면, 세 위격이 있어야만 하며, 개별적인(individual) 사랑과 집합적인(collective) 사랑이 모두 있어야 한다. 집합적인 사랑을 위해 셋 이상은 불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위격의 수만 증가시킬 뿐, 사랑의 본질을 증가시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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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이종헌
주소 - https://creation.com/who-really-is-the-god-of-genesis
출처 - Creation 27(3):37–39, June 2005.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Should Genesis be taken literally?)
Russell Grigg
창조론자들은 성경 전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자주 비난당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열쇠는, 논의하는 책 또는 부분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확인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다음의 것들이 분명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시(詩) - 시편의 경우. 관념의 반복 또는 대구법이 영국의 전통적 시에서 중요시 되는 운(소리의 대구법)과 운율(시간의 대구법)이 없이, 시에 관한 히브리인의 관념과 일치한다. 이것이 시편이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질 수 있는 이유이며, 아직도 문자적인 간절함과 시적인 맛의 대부분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서양의 시들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을 때 리듬과 운율의 요소들은 대게 잃어버리게 된다.
비유 - 예수님의 여러 가지 말씀의 경우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23) 같은 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것은 비유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며, 씨나 흙과 같은 여러 가지 항목들에 대한 의미를 그분이 직접 알려 주셨다.
예언 - 구약의 뒷부분에 있는 책들(이사야에서 말라기 까지)의 경우.
서신 - 신약에서 바울, 베드로, 요한 및 다른 사람들이 쓴 사도서신의 경우.
전기(傳記) - 복음서의 경우.
자서전/증언 - 사도행전의 경우.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개종한 것을 역사적 사실로 언급한 뒤에(행 9:1-19),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한 증언의 일부로써 이 개종의 경험을 포함시키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 22:1-21, 26:1-22).
인증된 역사적 사실들 - 열왕기상·하 등과 같은 책들의 경우.
따라서 성경의 각 책들의 문체와 내용을 통해 볼 때 그에 관한 저자의 의도는 아주 분명한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저자는 누구였으며, 기록한 그의 문체와 내용으로부터 어떤 의도가 드러나 보일까?
창세기의 저자
주 예수님 자신과 복음서 기자들은 율법이 모세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했으며(마 10:3, 눅 24:27, 요 1:17), 유대인 학자들 및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한결같은 전통과, 요즘의 보수적인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창세기가 모세에 의해 쓰여 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 ···의 후예(히브리어로 톨레도스 = ‘혈통’, 즉 ‘혈통의 기록’이라는 뜻)[1]는 이러하니라”라는 구절이 열한 절에 들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주: 창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참조), 점토판에 새겨 보존된 족장들의 기록이 아담-셋-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의 계통을 따라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모세가 참고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그들이 언급한 사건의 뒤에 따라 나오며, 각 구절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 지명된 개개인의 죽음 뒤가 아니라 앞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위첨자(superscript) 즉 표제가 아니라, 아래첨자(subscripts) 즉 마감 서명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그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은, 아담, 노아, 셈 등이 그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의 설명을 각자 기록했으며, 모세는 성령의 인도 하에 이들을 발췌하고 편집하여 자기 자신의 주석을 달아서 현재 우리가 창세기라고 알고 있는 책 속에 삽입했다는 것이다.[2] (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성경을 훼손하고 있는 사기적인 문서가설을 보라)
바벨론 서판 조각이 니푸르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은 고대 바벨론 지역으로써 아브라함이 나온 곳이 바로 그 지역이다. 검정색 테두리를 한 부분이 대홍수에 관한 기록이다. 전 세계적으로 홍수에 관한 내용이 300개 이상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 약 30개는 문자로 남아 있다. 몇 개는 원래의 기록인 성경과 상세한 부분까지 현저하게 일치한다.
창세기 12-50장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및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였던 야곱의 열두 아들에 관한 삶을 묘사하고 있으므로 신뢰할만한 역사로서 쓰여졌음이 매우 분명하다. 유대민족들은 초기 성경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줄곧, 창세기의 이 부분이 그들 나라 역사의 사실적 기록이라고 믿어왔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이 부분은 우리의 주요 관심사이며, 자유주의 학자나 현대 과학자들 및 회의론자들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부분이다.
창세기 1-11장, 이들 중 시가 들어있는 부분이 있는가?
특별히, 창세기가 말하는 것을 기원에 관한 오늘날의 현대 이론과 일치시키려는 일부 자유주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인 ‘신학적 시’가 들어있는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히브리 시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의 대구법’이 의미하는 바를 다소 깊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시편 1:1을 생각해 보자 :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우리는 명사와 동사의 사용에 있어서 3중의 대구법을 보게 된다:
좇다(walketh) 꾀(counsel) 악인(ungodly)
서다(standeth) 길(way) 죄인(sinners)
앉다(sitteth) 자리(seat) 오만한 자(scornful)
이러한 명백한 대구법뿐만 아니라, 은밀하고도 미묘한 의미의 진행도 있다. 첫 번째 열에서, ‘좇다’는 단기간의 면식을 나타내고, ‘서다’는 의논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며, ‘앉다’는 장기간의 연루를 말한다. 두 번째 열에서, ‘꾀’는 일반적 권고를 나타내고, ‘길’은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을 말하며, ‘자리’는 마음을 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세 번째 열에서, ‘악인’은 소극적인 나쁜 사람을 나타내고, ‘죄인’은 적극적인 나쁜 사람을 뜻하며, ‘오만한 자’는 남을 경멸하는 나쁜 사람을 의미한다.
다른 형태의 히브리 시로 잠언 27:6에서와 같은 대조적 대구법을 들 수 있다 :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또한, 시편 46:1에서와 같은 완성적 대구법도 있다 :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3]
그러면 우리의 문제로 돌아가자. 창세기의 처음 열한장 중에 신학적 시가 어느 하나라도 있는가?
답 : 없다. 이 열한 장에는 드러난 형태이든 숨어있는 형태이든 히브리 시의 형태에 대한 어떤 정보나 암시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 : 물론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가 열 번 나오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심히 좋았더라”가 일곱 번, ”그 종류대로”가 열 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 날이니라”가 여섯 번 반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위에서 논하는 시적인 형태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사실에 대한 서술이므로, 그 반복은 반복되는 단어의 중요성을 나타내려는 강조를 위한 것이다.
시리아 에블라에서 발견된 창조 서판으로 기원전 3천 년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위대한 창조의 작업을 하신 분이 ‘루갈/Lugal’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로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모세의 시기보다 1000년 이전에 사람들이 창조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며, 문자에 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창세기 앞부분의 장들은 솔로몬 시대보다 수백 년 이후에 최초로 기록된 것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생각이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일부 현대주의자들이 제시하듯이 이 열한장 중에 비유가 들어있는가?
아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그분이 그것을 비유라고 말씀하시든가, 아니면 그것을 미소와 함께 소개하셨으므로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이 비유라는 것이 명백하게 하셨다. 그런 예는 ”천국은 마치 ···” 등과 같은 그분의 말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11장의 저자는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고 그런 문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들 열한 장에 예언이 들어 있는가?
비록 이 부분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이 훗날에 성취된다는 견지에서 예언적이기는 하지만, 전체 문맥상으로는 예언이 아니다. 그 중 하나는 창세기 3:15 로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여자의 후손’(예수님)이 궁극적으로는 사탄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 ‘그(메시야)의 발꿈치’[5] 라는 표현 때문에 유대인들의 탈굼[4](Targums, 아람말로 번역된 구약성경)까지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후손(‘seed’)을 메시야(Messiah)로 해석해 오고 있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정상적으로 아이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반하여(예로 창세기 5장, 11장, 역대상 1-9장,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23-38), 메시야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부름으로서 동정녀 탄생(virginal conception)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또 하나는 창세기 8:21-22와 9:11-17이다. ”여호와께서 ···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부분에 서신이나 전기, 또는 자서전/증언이 들어 있는가?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아래첨자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아담이 창조의 제1일에서 6일까지의 사건들을 알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주셨음이 분명하다. 아담은 제6일에 가서야 지어졌으므로 그 이전의 사건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해 주셔야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2:4a의 말씀에서 강조된다. "하늘들과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것들의 내력이 이러하니라(KJV 직역)." 제7일, 안식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이 앞인 창세기 2:2-3에 포함되어서, 그로써 (예상할 수 있듯이) 전체 7일의 주간에 대한 기록이 완료되고, 그 뒤에 이 아래첨자 혹은 마감 서명이 등장한다.
그리고는 창세기 2:4b-5:1a의 사건들이 뒤따른다. 이 부분에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비록 3인칭으로 쓰여 있기는 하지만, 에덴동산과 하와의 창조(2장),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배반(3장) 및 그들의 후손들의 행적(4장-5:1)에 관련하여 아담이 알고, 보고,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설명을 읽을 수 있다(주: 3인칭의 사용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에서 자신의 일생에 대한 긴 설명을 3인칭으로 썼다.) 이 부분은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라는 말로 마친다.
타락 이전에 아담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로부터 창세기 1:1-2:4a를 그가 쓸 수 있었다는 것과, 창세기 2:4b-5:1을 그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록으로 썼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의 능력을 고려해 볼 때 그렇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담은 성인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DNA에 부여받았다. 그는 원숭이가 아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 데에 충분한 원예 기술을 알고 있었으며(창 2:15), 서로 다른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인식하고 이름 붙일 정도로 광대한 지능을 가졌다(창 2:19). 그와 하와는 알파벳을 배운 적이 없어도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가 전혀 쓸 수 있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7]
추정되는 모순
창세기 2장에 나타나는 사건의 순서와 1장에서의 순서 사이에 추정되는 모순은 어떠한가? 하나도 없다!
다음의 두 구절을 읽어보면 제 2장은 식물과 동물이 아담 이전에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창 2:19) [강조가 추가됨].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줄 때는(창 2:20) 이미 그 동물들이 존재해 있었다. 창세기 2:20에 나열된 동물의 순서에도 크게 모순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아담이 동물을 만난 순서로 짐작되며, 반면에 창세기 1:20-25에는 그들이 창조된 순서가 주어져 있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제로 아담에게 나아온 동물은 사람과 아주 친밀하며 사람에게 순응하여 사귀기에 아주 쉬운 후보자들뿐이었다. 여기에는 공중의 새와 육축(20절 - 아마도 길들이기 쉬운 동물들)과 들의 짐승들이 포함되는데, 들의 짐승은 사람들의 거주지 근처에 사는 작은 야생동물임이 분명하다. 포함되지 않은 동물로는 바다의 물고기, 기는 것들, 그리고 땅의 짐승들(창 1:24)인데, 땅의 짐승이란 사람 및 경작지로부터 상당한 거리에서 사는 야생동물로 짐작된다.”[8]
지리적인 위치의 이름을 고려해보면, 대홍수 이전의 세상이 완전히 멸망되었으므로, 홍수 이전에 땅이나 강들의 형상이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대홍수 이전에 이름 붙여진 땅과 강들은 대홍수 이후에 유사하게 이름 붙여진 특징과 일치하지 않는다.
창세기 2:18-25의 목적은 창조에 대해 또 다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담과 동물들 사이에 어떤 형태이든 친족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를 닮은 동물은 하나도 없으며, 어떤 것도 그에게 우정이나 교제를 제공할 수 없다. 그것은 아담이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생령’이기 때문이다(창 2:7 및 1:27).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아담을, 그분이 말을 걸 수 있고, 그는 응답할 수 있으며, 그분과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성경의 솔직한 진술은 인간 진화의 개념과 상치된다.
따라서, 아담이 창세기 2:4b-5:1의 가장 가능성 있는 저자이며, 이 부분은 에덴동산에서의 사건, 하와의 창조, 타락, 및 가인과 아벨과 셋의 삶에 관해 그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증거가 충분히 많다.
창세기 6:9b에서 10:1a까지의 부분은 주로 방주와 대홍수를 취급하며 다음의 말로 마친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이러한 어법으로 보면 이 부분은 노아의 아들 중의 하나가 썼음을 암시하는데, 모세가 셈의 계통을 이었으므로 아마도 셈일 것이다. 이 장들은 거기에 포함된 내용이 매우 상세한 것으로 보아 눈으로 목격한 것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8:6-12를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해서 눈으로 목격한 설명의 특징인 확실성의 고리를 담고 있는지 주목하라.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창 8:6-12)
이렇게 세밀한 설명은 신빙성 있는 목격에 대한 증언의 본질이다. 그것들은 진실의 고리를 갖고 있다.
아래첨자로써 기술된 창세기의 이 부분들은 영원한 기록을 만들어서 전할 목적으로 그 안에 이름이 들어있는 사람이 쓴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이들 처음 열한 장은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었는가?
답 :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
창세기 내에서의 증거
1. 창세기 자체 내에 증거가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유대 사람들은 12-50장을 그들의 사실적인 역사 기록이라고 항상 여겨왔으며, 또한 1-11장의 서술 방식이 12-50장의 방식과 현저히 다르지 않다.
2. 다음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어 흠정 강좌 담당교수였던 제임스 바(James Barr) 교수가 1984년에 썼던 편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세계 여러 대학에서 히브리어나 구약을 담당하는 교수 중에는 창세기 1-11장의 저자(들)가 그들의 독자에게 다음의 개념을 전달할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a) 창조는 연속되는 6일에 걸쳐 일어났으며, 그것은 현재 우리가 겪는 24시간의 하루와 같다. (b) 창세기 가계에 들어있는 숫자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성경 이야기의 나중 단계까지의 연대기에 단순히 더할 수 있다. (c) 노아의 홍수는 세계적인 것이며, 방주에 있던 사람들 외에는 모든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절멸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혹은 부정적으로 보아서, 창조의 '날들'이 긴 시대의 시간이라고 보는 변증적 논법이나, 년한의 숫자가 연대기적이 아니라거나, 홍수가 단순히 메소포타미아에 제한적이라는 내용은 내가 아는 한 그런 교수 중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9]
3. 창세기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 주권은 창세기 1-11장의 네 가지 현저한 사건(창조, 타락, 대홍수, 바벨의 흩어짐)과 관련한 하나님의 행동 및, 창세기 12-50장의 네 명의 두드러진 사람(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그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창세기 전체는 어떠한 부분이라도 신화적이고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실패로 끝나게 되는 통일된 주제가 있으며, 한편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을 보충해준다.[10]
성경의 다른 책에서의 증거
4. 창세기 1-11장에 언급된 주요 인물들은 성경의 나머지에서 실제의 (신화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람으로 종종 여러 번 언급된다. 예로써, 아담, 하와, 가인, 아벨 및 노아는 성경의 창세기 이외의 15권에서 인용된다.
5.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혼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에서 창세기 1:27과 2:24를 인용함으로써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실제의 역사로 언급하셨으며(마 19:3-6, 막 10:2-9), ‘인자의 오심’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에서 노아를 실제의 역사적 인물로, 대홍수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으로 언급하셨다 (마 24:37-39, 눅 17:26-27).
6. 창세기의 처음 열한장이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나머지의 성경은 그 전체의 의미로써 불완전하며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의 주제는 구속하심이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창세기 1-11장에서 드러난다.
i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창세기 12장에서 유다서 25절까지 진행되며,
ii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계시록 1-22장에서 완성된다.
그런데 인류는 왜 구속을 받아야 할까? 무엇으로부터 구속받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창세기 1-11장에 주어진다. 즉, 죄에서 초래된 파멸로부터,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한 진짜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대속하는 속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불가사의이다. 역으로, 창세기 1-11장의 역사적 진실성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공정한 노하심 아래 들어왔으며, 죄의 형벌, 권능, 존재로부터 구원이 필요함을 알게 해 준다.
7. 창세기의 앞부분 장들의 사건들이 사실의 역사가 아니라면, 사도 바울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 무의미해진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한 사람(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21-22,45). 첫 번째 아담에 관한 기록의 역사적 사실은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서 마지막 아담(예수님)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을 보증해준다.
결론
이 기사의 제목이 되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답 : 보통의 성경 주석 원리를 적용하면(우리 시대의 진화론적 편견을 따르게 하려는 압력을 무시하면), 창세기는, 솔직하고 분명하게, 실제적으로 일어난, 신빙성 있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 압도적으로 분명하다.
References
1. See Genesis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2. The seminal author on the colophon concepts was P.J. Wiseman, Creation Revealed in Six Days, Marshall, Morgan & Scott, London, 1948, pp. 45~53. For an excellent evaluation of this by a evangelical linguist see The Oldest Science Book in the World, by Dr Charles V. Taylor, Assembly Press, Queensland, 1984, pp. 21~23, 73, 121.
3. This discussion of Hebrew poetry was adapted from J.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Vol. 1, pp. 13~16.
4. Aramaic paraphrases of the OT originating in the last few centuries BC, and committed to writing about AD 500. See F.F. Bruce, The Books and the Parchments,(Westwood: Fleming H. Revell Co., Rev. Ed. 1963), p. 133.
5. A.G. Fruchtenbaum, Apologia 2(3):54~58, 1993.
6. The use of the third person is no problem. Moses wrote the long account of his own life in Exodus to Deuteronomy in the third person, and many classical authors like Julius Caesar also wrote in the third person.
7. Adam and Eve knew how to sew fig-leaf ‘aprons’ for themselves (Genesis 3:7). Within a few generations, Adam’s descendants founded a city (Genesis 4:17), were tent-makers, cattle farmers, musicians with the ability to make both stringed and wind instruments, and metallurgists with the ability to smelt the ores of copper, tin and iron and then to forge all kinds of bronze and iron tools (Genesis 4:20~24). Dr Henry M. Morris comments in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1976, pp. 146~147):
‘It is significant to note that the elements which anthropologists identify as the attributes of the emergence of evolving men from the stone age into true civilization?urbanization, agriculture, animal domestication, and metallurgy?were all accomplished quickly by the early descendants of Adam and did not take hundreds of thousands of years.’
8. Henry Morris, The Genesis Record, p. 97.
9. Letter from Professor James Barr to David C.C. Watson of the UK, dated 23 April 1984. Copy held by the author. Note that Prof. Barr does not claim to believe that Genesis is historically true; he is just telling us what, in his opinion, the language was meant to convey.
10. Adapted from J.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Vol. 1, pp. 27~29.
*참조 : Genesis: Bible authors believed it to be histor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3736/
Is Genesis poetry / figurative, a theological argument (polemic) and thus not history? :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450/
From Chaos to Cosmos : A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http://www.westminsterreformedchurch.org/ScienceMTS/Science.Pipa.Framework.Critique.htm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http://hermeneutics.kulikovskyonline.net/hermeneutics/Framework.pdf
Vintage Journal: Literary theory and Genesis 1: Part 2
https://creation.com/literary-theory-2
Vintage Journal: Literary theory and Genesis 1: Part 1
https://creation.com/literary-theory-1
Genesis: Myth or History?
https://creation.com/genesis-myth-or-history
Does God have body parts?
https://creation.com/does-god-have-body-parts
Do I have to believe in a literal creation to be a Christian?
https://creation.com/do-i-have-to-believe-in-a-literal-creation-to-be-a-christian
Why do you take the Bible literally?
https://creation.com/why-do-you-take-the-bible-literally
How could the days of Genesis 1 be literal if the sun wasn’t created until the fourth day?
번역 - 이종헌
주소 - https://creation.com/should-genesis-be-taken-literally
출처 - Creation 16(1):38~41, December 1993.
간격이론 이란 무엇인가?
미디어위원회
“간격이론(Gap Theory)이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이론이다. 간격이론은 화석을 포함하는 지질시대의 수억 년이 이 두 절 사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이를 재창조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화론이 대두된 이래로 진화론적 지질학과 창세기 1장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간격이론도 그 중에 하나인데,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창세기 1장 어딘가에 긴 기간을 넣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간격이론은 에피스코피우스(Dutchman Episcopius. 1583-1643)가 처음 언급했지만 당시 내용도 불분명했고 신학계에 영향력도 없었다. 간격이론이 알려지게 된 것은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Scottish, 1780-1847)에 의해서이며,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지질학자이면서 목사인 윌리암 버크랜드(William Buckland)가 대중화시켰다. 그 후에 이 이론에 대한 여러 글들이 등장했는데, 19세기 지질학자 휴 밀러(Hugh Miller)가 더 자세한 이론을 전개했다. 즉 진화론적인 지질학 개념을 가진 기독교인이 자신의 이론과 창세기 1장을 엮으려는 노력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커스탄스(Arthur C. Custance)가 “혼돈하고 공허하며(Without form and Void)”라는 책에서 간격이론을 옹호했다.
위의 글들은 어김없이 기존 진화론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주석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스코필드 성경(Scofield Study Bible)에는 “화석은 원시창조로 설명되며, (그러면) 창세기의 우주진화 모양과 과학은 모순이 없다” 고 설명했었다. 데이크 주석 성경(Dake’s Annotated Reference Bible)에는 “(진화론적) 지구 나이에 동의할 때,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수천만년을 놓는다. 그러면 창세기와 과학 사이에 모순이 사라진다.” 라고 전형적인 간격이론에 기초한 해석을 썼다.
성경으로 볼 때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출20:11)” 속에 긴 기간이란 것이 들어갈 틈이 없다.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분명히 사람의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간격이론대로라면 아담 이전에 지질계통표에 근거한 유인원이 죽었어야 했다.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분명히 성경은 죄로 인해 피조물이 고통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간격이론은 죄 이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고 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간격이론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부터 죽음이 있었다고 하며 복음의 기초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노아홍수를 제거함으로 동일한 말씀으로(벧후3:7) 심판하신다는 말씀도 막연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사45:7)” 2절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깜깜한 세상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간격이론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사실인 성경이 아니라, 사실이 아닌 진화론에 기초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지질계통표의 역사는 있지도 않고 우주의 나이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다. 창세기 1장을 통해 “보시기에 심히 좋다(very good)”를 통해서도 화석과 같은 잔인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서 나온 해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