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BRARY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이재만
2004-09-13

창세기 1장 (32)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31b)

성경은 매번 창조의 하루가 지날 때 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몇째 날이니라”로 마친다. 그리고 이것이 여섯 번 지속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과학적인 이해로는 24시간씩 지구가 자전을 여섯 번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구절은 창조주간의 마지막인 여섯 번째 하루가 지났음을 의미한다.

창세기 1장을 접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는 진화론뿐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진화론적 지질시대에 벗어나야 한다. 수 십 억년씩 하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숫자에서도 자유 하여야 한다. 또한 창조의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이 조작한 진화론적 우주와 지구의 생성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

앞서 이 글을 통하여 하루가 지날 때마다 다루었던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해석들을 언급해왔다. 창세기 1장의 1절과 2절 사이를 늘이려고 했던 간격이론, 진화론과 창세기를 타협했던 유신론적 진화론과 진보적 창조론, 하루를 지질시대와 연결시키려고 했던 날-시대이론(day-age theory) 등이 과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다루었다. 한편, 타협을 너머 사실임을 회피했던 구조가설(framework hypothesis)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 우주, 식물, 동물들의 완전하게 디자인된 모습을 그려보았다. 여기에는 시간적 간격이 들어갈 수 없으며, 오히려 시간이 들어가면 설명이 안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주의 완벽성은 시간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창조주의 신성과 능력만을 보여준다. 식물이 없이 동물이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곤충을 포함한 동물 없이 식물이 존재할 수 없다. 누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는 아주 짧은 시간에 행하지 않았으면 안 된다. 창조의 기간을 늘이고자 하는 마음은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자신의 편견을 성경에 맞추고자 하는 욕심일 뿐이다. 자신의 한계에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자 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창세기 1장의 창조가 오늘날의 하루 여섯 번이 지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만 남았다. 성경에서는 여기에 추호의 양보가 없다. 매번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출 20:11)' 라고 직접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2절에도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기록을 찾아볼 때 어디에도 이에 대하여 타협이 없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믿는 것은 그 사실 자체를 너머서 말씀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관련이 된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를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사 40:13-14)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사의 위치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사의 위치인가 하는 자세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항복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견에 항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207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9-10

창세기 1장 (31) - 하나님의 Very Good

이재만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 1:31a)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신 후에 하신 말씀이다. 이전에는 여섯 번에 걸쳐 ”보시기에 좋았다(good)”고 하셨는데, 창조를 마치신 후에는 특별히 '심히 좋았다(very good)'고 하셨다.


창세기 1장은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완벽하고 선하신 창조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극치의 완벽하고 선한 창조의 모습을 강조하셨다. 여기에는 어떤 불완전하고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시간 공간 물질을 창조하셨다. 완전한 빛과 대기와 땅과 바다 그리고 식물들을 창조하셨다. 완벽한 상태로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 완전한 물고기와 새와 짐승들 그리고 완전하고 선한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시행착오도 없으셨고 처음부터 완전했다. 창조하시는 순간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으며, 그 결과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다.


만약에 창세기 1장을 보면서 어떠한 불완전한 창조의 과정이나 모습을 그린다면 분명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악을 통하여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성품을 가진 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불안전한 어떤 부분도 찾을 수 없다. 과정도 완전했으며 결과도 완전했다. 선하지 않은 과정도 볼 수 없다. 과정도 선했으며 결과도 선했다. 완전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그 피조물에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인간이 만든 수많은 창조모델 가운데 어디에도 과정과 결과가 이와 같이 완전하고 선한 것을 찾을 수 없다. 이는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은 처음이 완전하지 않았으며 시간에 따라 더 완전한 상태로 간다고 한다. 이에 영향을 받은 우주의 모델인 빅뱅이론도 마찬가지 이다. 처음부터 인간과 생물이 살기에 완전한 우주를 말하지 않는다. 이런 모델들은 과정이나 결과에서 완전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들은 과학적으로도 결함이 있을 뿐더러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하고도 거리가 멀다.


이러한 완벽한 창세기 1장의 모습에 금이 간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인간 스스로 도저히 바른 창조모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죄악으로 떨어진 인간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 수가 없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what is seen)은 나타난 것(things which are visible)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이것이 첫 믿음이며, 이 믿음 없이는 눈에 보이는 모습을 보고 시작의 모습을 그려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진화론적인 사고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을 바르게 믿어야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왜 이런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죄악 된 우리는 타락 전의 창세기 1장이 말하는 완전한 세상을 도저히 그릴 수 없다. 그러나 감사할 것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우리에게 창조의 완전했던 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소망으로 완전히 회복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완전히 선한 모습에 대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히 회복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믿음하고 직결된다. 그런 면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한 순수한 믿음은 죄로 인해 저주 받은 이 땅에 대한 미련 보다 죄 없는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간절히 바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망이 구체화되면 될 수록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변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살전 1:3)를 갖고 살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위원회
2004-09-10

창세기 1장 (30) - 채식동물과 육식동물

이재만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 1:30)

창조하신 동물들에게는 푸른 풀을 먹이로 주시는 장면이다. 인간에게는 식물(plant) 중에서도 채소와 과일을 음식으로 주시는 반면 동물들에게는 푸른 풀을 먹이로 주고 계시다. 어쨌든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셋째 날 창조된 식물을 자신의 신체를 유지할 수 있는 주 에너지 원으로 주신 것이다.


오늘날 많은 동물이 육식을 하거나 잡식을 한다. 성경에는 인간에 대한 육식의 언급은 노아홍수 직후지만 동물에 대하여는 직접적 언급이 없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직후였는지 아니면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한 노아홍수 직후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방주 안에 모두 탑승한 것을 보아 인간과 같이 홍수직후 였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당시 즉 인간의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만을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육식동물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등은 하나님의 저주동안에 생겼을 수도 있다. 이는 뱀에게 저주를 하여 배로 다니고 흙을 먹게 하였던 장면(3:14)과 땅에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장면에서, 인간이 타락한 후에 피조물의 변화를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빨이나 발톱이 꼭 육식동물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채식동물에게도 요긴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어떤 모습들은 창조될 당시 모습 그대로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생물학적으로 육식동물과 채식동물이 왜 생겼을까 하는 것은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실제로 육식동물에게 채식만 시켰을 경우에 신체적 어려움 없이 잘 자란다. 예를 들어 1980년도에 웨스트뷰(Westbeau) 부부가 자신이 키우는 아프리카 산 암 사자인 Little Tyke(사진)에게 9년 동안 고기 없이 곡물, 달걀, 우유만 먹인 적이 있다. 그런데 결과는 다른 사자와 다름없이 건강하게 살았다. 훈련도 잘 받아서 양이나 병아리를 보고 식욕을 전혀 느끼지 않을 뿐더러 함께 놀기도 한다. 고기를 주어도 거절하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뿐 아니라 육식동물로 분류된 동물에게 채식만을 먹였을 경우 생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그리고 보고있는 것들은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 의해 변화된 것들이다. 탄식하며 고통 받는 피조물을 보고 있는 것이다 (롬 8:22). 우리는 도저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던 그 모습을 완전히 상상할 수 없다. 단지 저주 받기 전 모습을 보여주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벽하게 회복된 모습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믿음으로 소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

  

*참조 : The Scriptural advent of animal carnivory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5_1/j15_1_69-75.pdf

미디어위원회
2004-09-08

창세기 1장 (29) - 채식과 육식의 기원을 통해서

이재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 1:29)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신체유지에 필수적인 음식을 준비하셨음을 가리킨다.  바로 음식의 기원이다.  그런데 음식을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명령을 하셨다는 것이 흥미롭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28절)”고 명령을 하신 다음에 자신이 직접 마련하신 음식을 보이셨다.  그 지상명령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당하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채소와 과일이 어디에 있었냐 하면 온 지면(upon the face of all the earth)이라고 하셨다.  오늘날 지구상에 채소와 과일이 온 지면에 있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래뿐인 사막이나 얼음으로 덮인 동토나 바위 산이나 사람이 살기 어려운 어떤 지면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극한 기후들은 심한 기온차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에서 추위와 더위에 대하여 노아홍수 직후에 처음으로 언급된다 (창 8:22).  이는 노아홍수 이전은 둘째 날 만들어진 궁창 위의 물이 덮게 효과를 일으켜 온실처럼 지구 전체가 골고루 따뜻했으며, 노아홍수 때 그 궁창 위의 물들이 제거됨으로 지구에 온도차가 발생했다는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노아홍수 이전에는 온 지면이 채소와 과일로 가득찰 수 있는 환경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창조당시 사람에게 식물(food)로 채소와 과일만을 주셨다.  그러던 것이 노아홍수 이후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창 9:3)” 라고 하시면서 처음으로 육식을 허락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왜 이 때 육식을 허락하셨는지 성경에 직접적 언급이 없다.  홍수 전후의 환경변화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실치 않다.  어쨌든 육식의 기원도 창세기를 통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며, 심판 이후에 동물과의 관계도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피흘림이 없는 관계였으며, 죄가 들어온 후에서부터 홍수 전까지는 제사를 드릴 때에나 사용되었던 동물들이 이제는 육신의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 살생되어야 하는 관계까지 악화된 것이다.  농사나 목축(창 4:2)을 넘어서 이제는 먹기 위해 사냥도 해야 하는 노동이 추가된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심판이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이 채식만 한 것이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동물과 사람을 동등한 위치에서 두고 채식만을 하라는 진화론적 개념과는 결코 같은 내용일 수 없다.


성경은 생물 또는 생명이라고 할 때 동물에서부터 시작한다.  생물은 동물을 창조하시는 다섯째 날 처음 언급된다.  실제로 생명(life) 이라는 뜻인 히브리어 네페쉬(nephesh)는 혼(soul)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면에서 동물과 식물은 성경적으로 그 근본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생명은 피(레 17:11)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노아에게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창 9:4). 


생명은 하나님께로만 온다.  생명은 피에 있으며,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히 9:22)고 하셨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영원한 피를 흘리셨다 (히 9:11-12).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가 흘리신 영원한 피가 내가 흘려야 할 피인 것을 믿음으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롬 6:23).  육신을 위한 음식의 기원을 생각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참조 : The carnivorous nature and suffering of animals
http://creation.com/the-carnivorous-nature-and-suffering-of-animals

이재만
2004-09-07

창세기 1장 (28) - 세속적 / 기독교적 인본주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해야 할 일을 명령하시는 모습이다.  우리가 이를 지상명령(Supreme Order)이라고 부른다. 


인본주의(humanism)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와 기독교적 인본주의(Christian humanism)이다.  세속적 인본주의는 인간이 최고이며 진리는 인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결정한다.  자신들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 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즉 인간이 창조주의 형상인 것을 아는 것은 죄인인 인간에게는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자신이 최고의 존재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최고가 되어야 할 텐데 결과적으로는 사람보다도 더 낮은 동물 중에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라고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관계가 깨어지면 '무'에서 '유'가 된 것을 알 수 없으며, 반면에 '유'에서 '유'로 되었다고 밖에 여길 수 없는 것이 죄인의 한계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형상이란 말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백 속에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전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자신이 하나님같이 될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보이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을 수 밖에 없다.  즉 보이는 우주, 자연, 동물 등에서 찾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우주의 부속품, 자연의 산물, 또는 동물 중에 하나로 여기게 된다.  바로 이것이 진화론적 사고인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적 인본주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자신이 귀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이 귀하지만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자신이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옳고 그른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앎으로써 자신은 우주의 부속품이 아니라 그들을 '다스리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자신을 하나님 아래로 낮출 때,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더욱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본주의라는 말 속에 동일하게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내용이 들어 있지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임을 깨닫게 되어 나머지 피조물을 올바르게 다스리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부인하면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스려야 할 동물 중에 하나로 전락하는 것이다.


'다스리라' 하는 명령 속에서 우리는 이미 지어진 피조물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과 구분되게 창조주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의미를 확인 받고 있는 것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98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9-06

창세기 1장 (27) -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이재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상태가 남자와 여자였음을 묘사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일련의 사건을 시간에 따라 기록하다가 그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자세히 기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0장에서 바벨탑 사건을 통해 흩어진 종족과 나라를 나열하면서 11장 전반부에는 특별히 바벨탑 사건의 그 동기와 방법에 대하여 따로 기록하고 있다.  긴 하루가 기록된 여호수아서에 아모리사람과 싸우는 전투에서도 일련의 전쟁을 묘사하다가(수 10:6-11), 나중에 그 전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인 여호수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12-14)을 따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창세기 1장에서 2장 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사실을 그대로 기록한 반면에 2장 4절부터는 그 창조하신 상태와 함께 특별히 인간 창조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2장에는 창조된 지구의 상태(4-6), 아담을 지으시는 모습(7), 아담을 이끄시는 에덴동산의 모습(8-15), 선악과(16-17), 하와의 창조(18-25)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1장 27절 한 절에 대한 내용이 2장 7절부터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을 창조하시는 2장 7절부터 하와를 창조하시는 장면까지는 모두가 엿새째 하루동안 일어난 내용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안식을 취하신 일곱째 날 전인 엿새째 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신 이유는 아담의 독처함을 좋게 여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며 그 목적은 돕는 배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2:18).  그리고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도중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를 취하여 살로 대신 채우셔서 하와를 창조하셨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1장 27절에 기록하였다.  또한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다.  바로 동등한 인격체로써 서로 돕는 관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을 때 아담의 첫마디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고 했다.  하와가 얼마나 아담에게 꼭 맞도록 꼭 필요하게 창조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한마디로 나의 모든 것이란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직접 디자인 하시는 모습이고 그 가정의 처음이 얼마나 완벽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4). 가정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만들어졌을까?  동물처럼 살다 보니까 필요에 의해서 시작됐을까?  그렇다면 가정도 점점 발달해 왔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살다 보니 가정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화론은 바로 근원을 희미하게 만들므로 가정도 파괴시켜버렸다.  진화론자, 특별히 진화론자라고 하지 않더라고 성경적 가정의 기원을 믿지 않은 사람은 가정의 기원에 대하여 한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다.  살다 보니 필요에 따라 가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기원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가족의 기원에 대하여 분명히 말한다.  처음이 완전한 가정이었으며 나중에 죄가 들어온 다음에 완벽한 가정이 깨어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완전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깨어진 것이다.  어떻게 살다 보니 지금의 가정이 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디자인된 가정이 있었으나 죄로 인하여 오늘날의 불안정한 가정으로 타락한 것이다.


진화론적 교육을 받은 세속적 인본주의가 들어오게 된 이래로 오늘날의 가정이 어떤 위기를 맞고 있는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  이혼율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아져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본적 질서가 깨어지고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답이 있는 책, 사실인 책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해답도 얻을 수 없다.  창조주께서 시작하신 가정이라는 근본적인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미디어위원회
2004-09-03

창세기 1장 (26) - 하나님 형상의 창조

이재만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하나님께서 시간을 포함한 천지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난 후, 마지막 차례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인 사람창조를 계획하시는 모습이다. 


오스트랄로피데쿠스, 자바원인, 필트다운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등 기존에 원숭이와 인간의 공통조상으로 발표된 유인원들에 대하여는 이미 지면을 통하여 여러 번 언급되었기에 자세히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들은 공통조상도 아니며, 언제나 원숭이는 원숭이,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진화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들은 신체적 기능뿐 아니라, 두뇌조차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늘날의 더 나은 현대인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나아질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기존에 창조된 피조물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적응되어야 하는 불완전한 모습으로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준비된 피조세계 가운데 완벽한 사람을 창조하셨다. 어디에서도 유인원과 같은 진화과정이 들어갈 틈이 없다.  진화론과는 반대로 처음이 완벽했으며,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리 떠나면서 불완전해졌다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도 진화론적 사고는 성경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오랜 기간 동안 생존경쟁에서 이겨낸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선하고 선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완벽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진화론은 인간을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로 여기게 만든다. 단순한 동물에서 복잡한 동물로 진화된 지질시대표를 보여주면서, 생존경쟁이 역사의 원리인 양 가르친다. 이 지질시대를 지구상에서 보여주는 곳은 어떤 곳도 없을 뿐 아니라, 이를 믿으면 순식간에 사람은 악하디 악하게 창조된 경쟁의 원리에 가장 적합한 존재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보면 누구와도 타협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삼위하나님 자신의 계획 하에 직접 창조하셨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였으며 누가 그를 교훈 하였으며… (사40:13-14)'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의 상담자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상담자가 아니다. 창조에 관하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창조자께 창조를 가르치는 자세를 취하는 반대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 6일 동안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빅뱅을 사용하셨습니다. 진화를 사용하셨습니다. 수 억년을 걸려 창조하셨습니다. 유인원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등등이다. 창조하신 장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수그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류로 가득찬 자신의 편견을 가지고, 감히 창조주의 모사가 되려고 한다.  더구나 자신의 형상을 창조할 때는  '우리가' 라고 강조하셨는데도 말이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이라고 하셨다. 창조주의 성품을 닮은 존재며, 교제를 나눌 대상인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모양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시지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1절에 언급된 것과 같이 시공간 상에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셔야만 했는데, 바로 사람의 모습이었으며 자신의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 왜 눈은 여기 있을까, 코는, 입은? 등과 같이 궁금해 하기도 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시공간 속에 드러내기에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기 가장 완벽한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이웃들을 보자.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죄악으로 떨어져서 도저히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을 때,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바로 이 복음을 전파할 대상들인 것이다.

이재만
2004-09-02

창세기 1장 (25) - 자신의 형상 위한 준비완료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25)”

24 절에 땅 위에 생물을 창조하시며 명령하신 말씀 그대로 창조되고 있는 장면이다. 코끼리는 무게가 6.6 톤이나 되는데, 현재 살고있는 육상동물 중 가장 큰 포유류이다. 한 번에 40 갤론의 물을 마시며 227 킬로그램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코끼리는 놀라운 청각을 갖고 있는데, 그의 큰 귀는 중요한 냉각기 역할을 하여 체온을 유지케 한다.


기린은 육상동물 중에 가장 큰 심장을 갖고 있다. 기린의 심장은 길이가 60 센티를 넘는다. 이 심장은 5 미터가 넘는 높이의 머리에 중력과 반대로 피를 끌어올려 준다.  만약 기린이 그러한 강한 심장을 갖고 있지 않다면, 높이 있는 머리에 피가 공급되기 어려우므로 졸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 반면에 그러한 혈압으로는 물을 먹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혈압이 머리에 쏠려 뇌출혈로 모두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 기린이 물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일 때면 자동으로 혈관밸브가 작동해 뇌에 갑작스럽게 피가 모이지 않게 하여 뇌출혈을 막아준다. 사실 기린은 자연적인 상태라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회색곰은 후각이 매우 발달하여 18 마일 떨어진 시체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 북극곰은 그 몸의 털이 털옷과 같아서 차가운 온도에서도 몸을 격리시키는 마치 단열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차가운 얼음이 떠있는 물에서 수영을 할 수 있으며,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다. 북극곰은 수영 선수이기도 한데, 50 마일 이상 수영할 수 있다. 인도산 곰의 일종인 슬로스(sloth)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무에서 거꾸로 매달려 지내는데, 땅에 내려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는 거꾸로 매달린 채로 머리를 270도 돌릴 수 있으며, 매달렸는데도 불구하고 머리는 똑바로 세우고 지낸다.


팬다는 아주 특별한 손목뼈를 갖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 안에서 대나무가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팬다는 또한 하루에 3,000 개 이상의 대나무를 씹어댄다. 한편 코알라의 엄지손가락은 새끼에게 젖을 주거나 안고있는데 적합하도록 디자인되었다. 또한 이들은 직접 물을 취하지 않고, 대부분의 물을 유칼리나무 잎을 섭취함으로 충당한다.


낙타의 털은 극심한 기후로부터 신체를 보호한다. 코는 모래를 밖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며 평평한 발바닥은 모래에서도 걷기에 알맞다. 낙타의 육봉에 있는 지방은 음식과 물을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보다 물 없이 열 배나 더 견딜 수 있다. 캥거루 어미는 새끼 취향에 맞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를 생산해 낸다. 필요에 따라 주머니 속에 있는 새끼에게는 지방이 풍부한 우유를 제공하며, 더 작은 새끼일 경우는 탄수화물이 더 많은 우유를 준다.


표범은 육상동물 중 최고의 높이뛰기 선수인데 5.5미터의 높이를 넘는다. 또한 그들의 청각과 시각은 밤에는 사람보다 6 배의 능력을 갖고 있다. 동물의 왕 사자도 3.7 미터 높이를 넘는다. 사자는 시속 64 킬로미터로 뛰며 넓이뛰기도 12 미터를 한다.


하나님께서 24 절에 땅 위의 동물들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된 모습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it was good) 라고 만족하셨다. 바로 이어 창조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거주하도록 하기 위한 완전한 세계를 준비하시는 모습이다 (사 45:1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먼저 표현하신 후에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더할 곳도 뺄 곳도 없는 완전한 피조세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진화의 흔적도 시간의 간격도 필요 없고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롬 1:20)만을 보여줄 뿐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90

참고 :

이재만
2004-09-01

창세기 1장 (24) - 땅 위의 생물의 창조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창 1:24)

셋째 날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드러난 땅에, 그리고 이미 식물들이 자란 땅을 채우시는 장면이다. 여섯째 날의 동물들은 다섯째 날 창조된 동물과 근본적으로 생화학적 구조나 생식과정이 동일하다. 성경에서는 여섯째 날의 동물들을 세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육축, 기는 것, 짐승이다. 여기서 육축(가축, cattle)은 길들이기 쉬운 동물, 짐승은 야생동물, 기는 것들은 그 외에 땅 위에 동물 즉 기는 곤충, 파충류, 양서류, 작은 포유류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노아홍수 이후부터 동물들이 사람을 피했다는 것은 홍수직후 하나님의 말씀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창 9:2)'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홍수 전에는 모든 동물들은 사람을 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가축과 야생동물을 따로 구분하셨다는 표현은 흥미롭다. 이는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 의탁하겠느냐?” (욥 39:9-12) 

여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물을 지으시되 가축과 짐승의 용도를 다르게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물의 힘이 세거나 약한 정도를 보고 인간이 사용 용도를 선택하기 앞서, 하나님이 어떻게 사용할지를 창조 때 이미 정하셨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생물분류법은 진화론적 사고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인간의 구미에 맞게 분류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분류법이 창조의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펭귄이나 타조는 생물학적으로 조류로 구분될 수 있으나, 창조된 시기는 여섯째 날 이었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펭귄이나 타조가 날아본 적이 있다거나 미래에 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다면, 이는 진화론적 사고가 남아있다는 것일 게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러나 그 몸이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욥 39:13, 18)' 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타조를 창조하실 때는 날도록 지으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말보다 빠르게 뛰도록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박쥐나 고래도 예외는 아니다. 고래나 박쥐도 포유류로 분류되지만, 이들은 모두 성경적으로 나는 것과 기는 것이 창조된 다섯째 날 창조되었다. 고래가 육지에 살았던 증거도 없으며, 가능성도 없다. 날아다니는 박쥐와 기어 다니는 쥐 사이에 어떤 중간단계 생물이 발견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럴 수도 없다.  곤충의 경우도 마찬가지 인데 진화론자들은 기는 곤충에서 나는 곤충으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오히려 나는 곤충은 다섯째 날, 기는 곤충은 여섯째 날로 오히려 순서가 반대이다. 진화론은 파충류가 먼저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성경은 새가 먼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창조를 믿는 것이야 말로, 아직도 남아있는 진화론적 찌꺼기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분류학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생물의 분류학에서도 진화론의 영향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지금의 분류학적 체계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면, 이를 통하여 우리의 내면에는 진화론적 순서가 자기도 모르게 남아있게 되며, 그 편견을 통해 생물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믿음이 중요하다. 왜냐 하면 우리의 마음 속에 진화론적 사고, 즉 하나님이 창조를 하셨다 할지라도 진화 순서로 창조하셨다는 진화론적 생각을 벗어 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 진짜 창조순서인 창세기 1장을 믿음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진화란 말도, 진화의 순서도, 진화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종류대로만 창조하셨다.


또한 동물을 창조하시는 여섯째 날의 모습 어디에서도 생존경쟁, 약육강식 등의 잔인한 진화과정도 엿볼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모습으로 완벽하게 창조하고 계시는 그의 능력과 신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2188

참고 :

미디어위원회
2004-08-31

창세기 1장 (23)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하)

이재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1:22)

진화론에 의해서 흔들리는 기독교인들이 진의파악을 버리고 이에 회피하려는 자세가 바로 구조가설(framework hypothesis)이다. 창세기의 전반부를 포함하여 사실 이성에 의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문학작품, 시, 설화 등으로 취급하는 자세이다. 바로 기독교교리는 유지하려고 하면서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에는 회피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도 신학교에서 창세기의 많은 부분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취급하는 것을 보고 적지않게 실망한 적이 있다. 성경을 문학작품으로 배우기 위하여 신학교에 왔다고 생각되는 것이 불편했었다. 성경이 사실이라는 기초 위에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배우러 신학교에 온 것이지, 하나의 문학작품을 다루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응은 필자뿐이 아니라, 그 과목을 택했던 대부분의 학생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학작품을 주셨는가? 창세기 1장, 아담과 하와 이야기, 노아홍수, 바벨탑 사건 등은 훌륭한 문학작품인가? 그렇다면 훌륭한 문학작품을 선지자들은 사실처럼 인용했는가? 훌륭한 문학작품을 성취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돌아가셨는가?

실제로 문학작품화 한 신정통주의가 세속철학인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이다. 하나님을 빼고 사고를 하던 서양 철학자들이 딜레마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이에 진화론으로 고민하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바로 유신론적 실존주의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치자” (존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라고 생각하며 믿는 것이다. 유신론과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가장 근본적 차이점은 그 출발점에 있다. 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시작되었는데, 후자는 믿음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사실' 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믿음은 자신이 믿기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고 믿는 믿음인 것이다. 바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내가 선택한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자세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는 천국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대로 실재로 존재하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적 신앙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창세기를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취급한다면 뒤의 내용은 어디로 갈까? 복음의 설 자리가 있을까? 어느 부분이 우화이고 어느 부분이 사실인가?  내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우화로 취급하고, 이해되는 부분은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오늘날 진화론적 사고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 사실인가? 나의 판단 속에 성경을 집어넣는 것인가, 아니면 성경 속에 나의 판단을 포기하는 자세를 취하는가?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해석을 하고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진화론적 사고가 지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도 진화론과 함께 진정한 성경주해(exegesis)를 할 수 없다. 창세기를 공부하는 신학도에게 '사실인 성경'이 '문학작품 성경'으로 자리잡아 가는 갈등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이 오늘날 안타까운 현실이다. 더 나아가 다음세대가 진화론의 영향인 실존주의적 신앙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치자”라고 생각하며 찬양할 것을 염려해야만 되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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