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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성경

미디어위원회
2005-12-14

좁은 길 (The narrow road) 

: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론이 걸어가는 길

Ken Ham 


      현대의 복음주의가 6일 창조에 관하여 타협을 하는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다.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녀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창세기에서 비본질적인 요소에 관한 견해를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이간시키지” 말라고 항변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자기 교회 사람들을 우리 세미나에 보내서 창조에 관한 메시지를 듣게 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와 젊은 지구 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대하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우리의 세미나를 지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외쳤다! ”단지 본질적인 요소만 의견이 일치한다면 이러한 분열 없이 함께 일할 수는 없을까요?”

”본질적인 요소란 무엇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거듭났다면, 그는 창세기의 내용을 당신이 믿듯이 믿고 있지 않은 경우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지 않으세요?”

나는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내가 창세기에 대해 믿는 바와 동일하게 믿고 있지 않더라도, 그들은 분명히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보세요, 당신이 창세기에 대해 믿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입니다. 믿어야 할 본질적인 내용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때 나는 매우 중요한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나요?”

”우리의 죄들을 위해서요” 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죄’ 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십시요.

그녀의 대답은, ”음, 죄란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내가 계속 말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반항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예, 물론이지요.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문자 그대로의 사람과 뱀, 선악과 등이 있었던 실제의 동산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죄에 대한 기원은 없다는 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했다. ”사람들이 거듭나서 천국에 가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원죄‘를 믿는 것이 본질적인 요소인가요, 아닌가요?”

”요즈음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 점점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일치되는 모든 영역을 묻어버리고 같이 일할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요청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단지 사소한 교리상의 차이를 치워놓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중요하고 근본적인 영역에 있어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항의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에 입각한 몇 가지 교리를 살펴보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사소한 논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과 부활. (고전 15:21-22)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전적인 이유는 (문자 그대로의)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罪性)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심으로, 성경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26절)라고 말한 (육체적) 죽음을 정복하셨다. 오래된 지구 연대 이론이 옳다면, 하나님은 수십억 년 동안의 죽음과 고통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 어떻게 해서 ‘원수‘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거기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분의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 (창 1:31)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겠는가?


결혼. (막 10:6-9) 예수님은 (수백만 년 이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으로부터) 문자 그대로의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인용하고 계신다.


회복. (행 3:21; 계 21:4, 22:3) 오래된 연대의 지질 시대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고통이 오랜 세월 동안에 계속 있어왔다. 최초의 장소에 죄가 없었고 죽음이 없었던 세상이 결코 없었다면, 모든 사물은 그런 세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성경의 신뢰성. 최고의 히브리 학자들은, 창세기가 정확히 우리 창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데에 만장일치이다.[1]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수천 년 간 잘못 인도했었다고 거부했던 자들이 아닌가?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조과학운동, 문자 그대로의 6일 창조,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음(따라서 지구는 젊다) 등의 견해에 반대하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적인 논점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창조과학자들을 편협하고 쓸 데 없이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고 있다.

슬프게도, 이런 공격 중의 몇 가지는 스스로 ‘진화론을 반대하는 창조주의자‘ 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예를 들어, 휴 로스(Hugh Ross) 박사는 점진주의적 창조론자(progressive creationist)로서, ‘빅뱅(Big Bang)‘을 믿고, 노아 시대의 홍수가 국지적인(a local Flood) 것이었으며, 죄가 들어오기 전에 수백만 년 동안 죽음과 피흘림이 있었고, 아담과 하와 이전에는 인간을 닮은 다양한 ‘혼이 없는‘ 존재들이 있어서 자기들의 시체를 묻었고, 동굴 벽화를 그렸다고 믿고 있다. ‘창조와 시간(Creation and Time)‘ 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세기의 교회가 할례 때문에 분열되었던 것처럼, 요즘 세기에는 창조의 연대에 관한 논점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음을 본다. 할례가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주의를 방해하였듯이, 요즘에도 젊은 지구 창조론이 그러하다.”[2]

그런데, Answers in Genesis와 같은 사역이 급격히 성장하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복음주의의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수년간 창조과학 사역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이 창세기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돌아온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편지를 받아왔다. 그 중에는, 그들이 (죄를 짓기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는 오래된 연대 개념을 성경에 끼워 맞추려는 기독교인들에게) 들었던 해답이, 성경을 왜곡하여 현존하는 통설에 끼워 맞추려는 시시한 시도였기 때문에, 이전에 기독교를 포기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창세기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유용한 방법 중의 하나는, 오늘날 그들에게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 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때는 기독교의 ‘근본‘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붙여졌던 명예로운 용어였다. 그런데 대중매체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테러행위 및 광신과 연합함으로써, 이제는 그것이 극단주의 및 편협한 신앙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가 이렇게 바뀌어 버렸으므로, 차라리 나는 역사의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 안에 진리를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 ‘계시론자(revelationist)‘로 불리고 싶다.

심지어 카톨릭 교회에서도 그런 활동에 가담하고 있다. 1994년의 AP 연합통신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관한 새로운 바티칸 문서는 근본주의자들의 접근방법이 왜곡되고, 위험하고, 인종차별로 이끌 수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교황직속의 성경위원회가 쓴 그 문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일종의 지적 자살(intellectual suicide)로 유도하고 있다.... 근본주의자적 접근은, 성경이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돋우므로 위험하다.”[3]


문자적 창세기에 대한 또 다른 ‘공격‘으로, ‘창세기: 살아있는 대화‘ 라는 빌 모이어(Bill Moyers)의 프로그램이 1996년 10월에 미국 공영 TV에서 방영되었다. 이 쇼는 하나님의 속성과 동기에 대해 경멸적인 판단을 담고 있는데, 창세기를 실제의 역사라고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슬람인, 자유주의 기독교인 및 무신론 주석자들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4]

모이어의 연재물에 관한 Newsweek 지의 기사는 요즘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재미있는 논평을 하였다.

”종파에 대한 충성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이론을 오히려 신학교에서 퍼뜨리고 있다....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거의 절대성을 잃어가고 있다.” [5]

성경적 창조 운동(Biblical creation movement)은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literal Genesis)를 주장한다. 성경의 권위를 고수하며, 교회나 속세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세속적인 학문과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많은 조롱과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압도적으로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이 세속적인 이론(증거 없이 주장되는 지구의 나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재해석되기 시작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도 재해석하는 문이 열리게 되어, 궁극적으로 모든 진리가 상대적인 것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의 동료가 영국의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선도적인 설교가 중의 한 분이며, 매우 영향력 있는 목사님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자 그대로의 창세기를 반대하는 그 분의 입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성경의 권위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그 주제는 태고의 지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스터플랜’ (Masterplan, 창세기를 다룬 그의 책)에서 내가 고의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이 난처한 주제에 대해서 분열되어 있는 의견들이 복음주의 안에서 연합되고자 하는 바램을 반영한 것입니다.” [6]


슬픈 것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관점을 세속적인 견해와 타협하며, '연합'이라는 미명 하에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고 있는 동안에, 비기독교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World 지가 보도하기를 빌 모이어의 창세기 프로그램에 나온 한 이슬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믿음을 타협하기를 거절한다. 이슬람은 최소한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유지하기를 원한다. 유대교는 끝없는 문답(dialogue) 때문에 곤경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기독교는 변명과 혼돈 속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7]

우리의 서구 문명에는 갈라진 커다란 틈이 존재한다! 그 틈은 교회와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려는 문자적 창조론자 같은 교회와 나머지 교회 및 이 세상 사이에 나있는 것이다.

분열은 항상 나쁜 것인가? 예수님은 누가복음 12:5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 말씀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추고자 할 때는 약간의 분열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문자적 창조론자들이 오늘날의 보수적인 교회에 있어서까지도 소수파로 여겨진다는 것이 정말로 문제가 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3-14장의 구원에 관한 말씀 속에서, 넓은 길로 열려있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선호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소수의 사람들이 찾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택하라고 가르치셨다. 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논점에 관하여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의 멸망적인 타협 속으로 황급히 돌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종종 그 말씀을 생각한다. 성경의 진리에 따르는 것은 항상 ‘좁은 길(narrow road)‘ 인 것이다. 당신은 진정 어느 길에 서 있는가?

 


References and notes

1. Oxford Hebrew professor James Barr has written (in a letter to David C.C. Watson in 1984) that he knows of no professor of Hebrew at any world-class university who thinks that Genesis was meant to convey anything other than an actual account of a real, recent creation in six ordinary days and a global Flood. Like Barr, that does not mean they actually believe Genesis to be true, just that they are unanimous about what it means.

2. Dr. Hugh Ross, Creation and Time, Navpress, p. 162, 1994.

3. Quoted in Foundation, News & Views XV(4), July–August, 1994. On top of this, the Pope’s announcement in October 1996, saying that he saw no conflict between evolution and Christianity (so long as God created the soul of man) provided the media with more ammunition to continue to try to alienate creationists from what it sees as ‘mainstream Christianity.’

4. Time, p. 72, October 28, 1996, reported: ‘ ... Moyers decided not to include Christian Fundamentalists: ... It would have struck people as the same discourse they’ve been hearing for the last 15 years.’ Earlier, the same article stated: ‘Much of the recent popular controversy around Genesis has focused on the issue of whether the Creation should be understood literally. That debate has tended to obscure a further set of issues hinging on the character of both God and the patriarchs.’ Again, literal creationists are made out to be a stumbling block to people understanding the ‘real truth’ of the Bible.

5. Newsweek, October 21, 1996, p. 76.

6. Correspondence from Pastor Roy Clemens, Eden Baptist Church, Cambridge UK September 25, 1996.

7. World, October 26, 1996, p. 23. 

 

*참조 : The Reformation of the 16th Century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reformation-sixteenth-century

Progressive creationist anthropology: many reasons NOT to believe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0_3/j20_3_31-38.pdf

Western culture and the age of the eart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721/


번역 - 이종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19/i2/narrow.asp 

출처 - Creation 19(2):47–49, March 1997.

미디어위원회
2005-11-29

창조, 타락, 그리고 콜레라

(Creation, Corruption, and Cholera)

Frank Sherwin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은 사람에게서 장질환인 콜레라를 일으킨다.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toxin) 때문에 감염은 치명적이다. 타락 이전에 이 독소는 다른 기능(alternative function)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여러 과학 분야의 공헌들에 의해서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창조 모델은 많은 비진화론적 시각으로 분석되어왔다. 창조과학자들은 오늘날의 병원성 세균과 기생충들은 사실 타락 이전의 세계에서는 유익하거나 적어도 중립적이었다고 제안하고 있다. 때때로 유해한 것들이 있지만, 우리의 대장에 있는 대장균(E. coli)과 같은 것들은 유익한 세균이다. 이 복잡한 유기체는 비타민들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고, 질병을 예방하기까지 한다. 또한 분선충(Strongyloides stercoralis)이라고 불리는 실처럼 생긴 벌레가 있다. 그것은 독립 생활과 기생 생활을 같이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벌레는 사람 밖의 환경에서 잘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에게 감염되었을 때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생충 감염과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은 타락과 우주적 저주의 결과였다고 제안되고 있다.


콜레라균(Vibrio cholerae)은 사람에게서 장질환인 콜레라를 일으킨다. 세균이 분비하는 독소 때문에 감염은 치명적이다. 타락 이전에 이 독소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하와이산 짧은 꼬리 오징어(Hawaiian bobtail squid)에 공생(symbiotic)하고 있는, 기묘한 빛을 내고 있는 발광 박테리아(V. fischeri)는 이 독소와 매우 유사한 독소를 만든다. [1] 짧은 꼬리 오징어는 먹이가 있는 맑은 물에 사는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박테리아의 발광 특성( luminescent properties)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징어는 좋은 사냥꾼이지만, 커다란 야행성 포식자들에게는 맛있는 간식이 된다. 물 아래에서 보면, 어두운 오징어는 달빛(moonlight)에 의해 신체가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목표물이 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오징어의 배 쪽(ventral side)에는 카메라의 조리개와 매우 유사하게 작동되는, V. fischeri을 포함한 잉크 주머니(ink sac)에 의해서 둘러싸인 빛을 내는 장기(a light organ)를 가지고 있다. 세균이 내는 빛은 반사체에 의해서 증강되고 달빛과 같이 아래쪽으로 비춰지게 되면서, 오징어는 은밀한 잠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균들이 배가 고파지면, 그들은 콜레라균과 비슷한 독소를 분비한다. 이 독소는 오징어를 병들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먹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오징어는 먹이를 제공한다.


한 진화론자는 제안했다 : ”아마도 우리가 콜레라의 병인을 연구해오고 있었을 때,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연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2] 창조과학자들은 이것은 저주(Curse)의 결과일 것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생물학자인 조 프란시스(Joe Francis)에 의해서 제안된 한 창조 이론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창조론적 관점에서 바이러스와 미생물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미생물들은 화학적으로 풍부하지만 생명이 없는 물질 환경(physical environment)과 거대한 유기체 사이(macro-organisms)의 연결 고리로서 하나의 유기적 기질(organosubstrate)로서 창조되었다. 이들은 다세포 생물체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기질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3]


정말로 많은 박테리아 세포들은 하나의 공생적 군집(symbiotic community)으로서 의사소통을 하고, 기능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은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병원성은 최초의 창조 의도로부터 벗어난 것일 수 있다. 미생물 V. fischeriV. cholerae가 그 예이다.


1. http://whyfiles.org/022critters/light2.html
2. Ibid.
3. Francis, J. 'Organosubstrate of Life,' The Fifth International Conference


▶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병원균과 질병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25615&t=board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www.icr.org/article/creation-corruption-cholera/

출처 - ICR, 2005. 11. 1.

미디어위원회
2005-11-28

회의론자들의 도전 : 사랑의 하나님은 왜 킬러 해파리를 창조하셨는가? 

(Skeptics challenge : a ‘God of love’ created a killer jellyfish?)

David Catchpoole 


    눌러 부수고, 죽이고, 파괴하고... 왜 생물체들은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고, 죽이고, 먹는 기관들을 가지고 있을까?


    크리스천들이 설계자(하나님)가 계시다는 증거로서 살아있는 생물체들의 복잡성을 지적할 때, 조롱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설계된 모습들 중에서 많은 부분들이 먹이를 사냥하고, 사로잡으며, 포식자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을 즐겨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장 유독한 바다생물 중 하나인 상자해파리(box jellyfish)의 경우에 대해서, 한 반창조론자(비과학자인)는 ”만약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그리고 그가 사랑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는 모든 생물 종들을 창조하셨다면, 왜 그러한 쓸데없는 그리고 정교한 잔학성을 가지도록 생물체들을 창조하셨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어떤 동물이 해파리에 의해서 죽기를 원하겠는가?” [1] 그는 ”이것보다 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는 없을 것이다” 라고 결론짓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물체들이 갖고 있는 방어-공격 구조(defence-attack structures, DAS)들에 대한 유사한 도전들에 대해 답을 할 때, 성경은 사람과 동물 모두 태초에는 채식을 했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은 기억해야만 한다.(창세기 1:29-30).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에서 nephesh chayyah 라 불리는 척추동물이나 사람에게 처음에는 죽음이 없었다. 그러나 식물들과 무척추동물들은 그와 같이 기술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그것들은 성경적 의미에서는 ‘살아있는 창조물(living creatures)‘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전체 창조를 저주하셨던 아담의 타락(Fall of Adam)으로 인해, 이 세상에 죽음과 고통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창3:19, 롬8:20-22).


성서적 구조 틀로부터 답을 한다면,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조롱자의 도전에도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특별한 경우도 이러한 일반적인 범주 내에서 설명될 수 있다.[2]

(a) 현재 DAS로서 사용되어지는 것들은 이 목적을 위해서 설계되지 않았으며, 타락 이전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그것들은 퇴화(degeneration), 즉 돌연변이에 의해서 현재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b) DAS를 위한 설계 정보는 이미 타락 이전에 아마도 잠재적이거나 숨겨진 형태로 존재했을 수 있다. 하나님은 타락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에, 타락된 세상에서 생존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들을 창조물들에 미리 프로그램 해 놓으셨다. 


해파리는 약간의 거리에서도 특별한 먹이를 독으로 공격하는 메커니즘을 시발하는 극적인 효율성을 가진 자세포(stinging cells)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첫 번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나님은 아마도 이 자세포에 대해서 타락 이후에 스위치가 켜질 복합적인 정보를 설계해 놓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해파리는 타락 이전에는 무엇을 먹었을까? 아마도 오늘날의 해파리들에서 관찰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은 우리들에게 타락 이전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 일부 해파리들은 식물성 플랑크톤(phytoplankton, 즉 동물이 아니라 식물로부터)으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고 말해진다. Scientific American 웹사이트에서 해파리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일부 해파리(전도된 해파리(upside-down jellyfish)와 같은, Cassiopeia xamachana)들은 채식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먹이를 키우고, 그것들을 운반한다. 이들 해파리는 그들의 갓 안쪽에 조류들을 모은다. 그들은 대양에서 떠다닐 때 먹이 근원으로서 그들을 데리고 다닌다.” [3]

▶ 많은 물고기들은 해파리의 갓(bells) 아래에서 촉수(tentacles) 사이를 자유롭게 수영하면서 피난을 한다. 그들의 접촉은 자포의 발포를 시발하지 않는다.

▶ ‘독(poison)’의 개념은 양(amounts)에 달려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대부분의 독들은 적은 양에서는 유익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치명적인 보툴리늄 독소(botulinum toxi)도 현대 미용술(botox)에서 사용되고 있다. 반대로, 산소(oxygen)와 같이 좋은 것도 많은 양에 노출되면 독으로서 작용된다. [4]


사실, 문제는 진화론자들이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너무도 많다. 이것이 그들이 과학적인 것보다 의사-이론적 주장들에 호소하고 있는 이유이다.[1]

1. 해파리의 진화론적 기원과 다른 동물과의 추정되는 진화론적 관계는 자주 많은 신비에 둘러싸여 있으며, 생물학에서 가장 흥미로운 수수께끼 중의 하나라고 묘사되고 있다. [5]

2. 해파리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 그리고 보통 원시적인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도 자포(nematocysts)는 가장 복잡한 동물성 구조 중에 하나라는 것과 침의 발사(the firing of the dart)는 아마도 알려져 있는 가장 빠른 생물학적 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6]

3. 해파리 여러 종들은 주입하는 독소(toxins)들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연구자들은 해파리를 계통발생적 관계(phylogenetic relationships)보다 자포의 형태와 행동 방식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러한 서로 다르고, 복잡하고, 효율적인 자세포의 메커니즘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진화론자에 있어서의 거대한 어려움이다.)

4. 상자해파리(box jellyfish)가 맹독을 갖게 된 이유에 관한 2 가지의 주요 진화론적 이론은 (a) 그들은 부서지기 쉬운(fragile)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빠르게 그들의 먹이를 제압해야만 했으며, 그리고 (b) 그들 자신을 거북이와 같은 약탈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한 강력한 독소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 두 이론이 모두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부서지기 쉬운 종들은 단단한 종들보다 더 적은 독을 가지고 있으며, 거북이와 여러 물고기 종들은 독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해파리를 먹어치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7]


만약 해파리들이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오랫동안 주변에 있었다면, 원래에 자세포는 무엇을 위해 사용됐었을까? 한 진화론자는 해파리와 같은 커다란 포식 생물체(predatory organisms)가 그들 주변에 먹이감이 아무 것도 없었던 시기에도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8] 말하고 있다. 동일하게, 해파리는 약탈자에 대항하기 위해 자세포를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론에 의하면 아직 약탈자가 진화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거는 타락(the Fall)이 모든 생물체들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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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dreds of jellyfish fossils! : Creation 25:4 (September 2003)


References

1. Davis, R.G., Killed by a jellyfish, Freethought Today, 1 July 2003 (‘freethought’ is a pretentious self-description of some of the most dogmatic-thinking atheists).
2. See also Batten, D. (Ed.), Ham, K., Sarfati, J. and Wieland, C., The New Answers Book, Master Books, Arkansas; Triune Press, Brisbane, Australia, 1999; and Q&A: Genesis—Curse.
3. Scientific American <www.sciam.com/print_version.cfm?articleID=00031A14-67F1-1C72-9EB7809EC588F2D7>, 1 July 2003.
4. Bergman, J., Understanding Poisons from a Creationist Perspective, TJ 11(3):353–360, 1997.
5. FAQ—Where do the jellyfish come from?, 2 July 2003.
6. California Academy of Sciences—The Venoms Lecture Series, 1 July 2003.
7. Why are Box Jellyfish toxic?, 30 June 2003.
8. Phylum Cnidaria, 1 July 2003.


▶ 성경의 모순으로 주장되는 것들 - 생물 독

https://creation.kr/Topic502/?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6825628&t=board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creation/v25/i4/killer.asp 

출처 - Creation 25(4):34–35, September 2003.

미디어위원회
2005-11-14

창세기의 하나님은 진정 누구이신가? 

: 삼위일체의 하나님

 (Who really is the God of Genesis?)

Russell Grigg 


      창세기의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여기지 않는 오늘날의 유대교, 힌두교, 여호와 증인, 유니테리언파(삼위일체론을 부인하고 유일 신격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기타 다른 신앙 체제들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체제들과는 달리, 창세기는 기독교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한 분이시며 또한 한 분 이상인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경의 맨 첫 번째 절은 이렇게 써 있다. ”태초에 하나님(복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단수)”(창세기 1:1).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어로서 단수인 (el) [3] 또는 단수의 시적인 형태인 엘로아(eloah)를 사용하지 않고, 복수 용어인 엘로힘(elohim)을 사용했다. 그러나 동사에 대해서는 단수형태를 사용하고 있다!

엘로힘 이라는 단어 이외에도 모세는 창세기의 하나님에 관련하여 다른 복수 형태를 사용하기도 했다. 창세기 1:26은 다음과 같이 써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복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복수)” [4]. 여기서 모세는 ‘가라사대’ 라는 단수동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대해서는 복수 대명사와 복수의 동사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또한 창세기 1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여...” 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모세는 이들 복수 형태를 사용했는가?

어떤 사람은 이 복수가, 오늘날 왕이나 여왕 및 기타 다른 사람들이 당당하게 사용하는 ‘짐(朕)’(royal we)이라는 말과 같이 단순히 장엄 복수일 뿐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성경 기사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은 모두 단수로 부르고 있다. 언어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박사는 말하기를, ”모세의 시대 혹은 그 이전에 사람들이 왕이나 왕자를 복수 형태로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상 성경은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서 보더라도 그러한 증거는 없다.” [5]

또 다른 사람들은 좀더 나아가서, 엘로힘은 하나님이 그 분 안에 복수의 능력과 속성과 인격을 포함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 동의한다. 엘로힘은 단수의 의미를 갖는 복수 명사이다. 구약의 저자들은 이 단어를 2,500회 이상 사용했는데, 통상적으로 (창세기 1:1에서처럼) 단수의 동사나 형용사와 함께 사용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동시에 한 분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신격의 ‘단일복수(uniplurality)’ 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단일복수’ 혹은 ‘인격(personhood)의 복수’가 삼위일체(trinity)를 말하는가?


두 번째 위격 : 하나님의 말씀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약에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 (부록을 보라).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요한복음 1:1-14에서 그분의 명칭 중의 하나가 ‘말씀(the Word)’ (헬라어로 ‘로고스(logos)’)인 것으로 드러났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the Word was God)” (요한복음 1:1)의 구절을 주목하라. 이것을 염두에 두고 창세기 제1장을 다시 읽으면, 창조주간 6일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His Word)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각 날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공식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and God said) …” 였으며, 그대로 되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비록 창세기의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활동이 밝혀져있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것을 명백하게 확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골로새서 1:16절은 다음과 같다. ”만물이 그에게(by Him, 14절; 그 아들) 창조되되...” [7]. 따라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스스로의 작용(self-causation)이나 진화론적인 자연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거룩하고, 능력 있고, 지성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작동하였다. 거기에다가, 그 동일한 아들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히1:3, 골1:17 참조).


세 번째 위격 : 하나님의 성령

창세기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모세가 사용한 히브리 단어 루아흐(ruach)는 문맥에 따라서 ‘영(spirit)’, ‘바람’, ‘숨(breath)’ 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면 모세는 바람이 물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특별히 아직 완성되지 않은 땅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8] 창조의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 ‘운행하시니라(hovering)’ 라는 분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이 단지 창조주간의 중요한 사건을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바람이 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에는 땅에 사람이 살 수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이 모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결론짓는다 [9].


결론

우리는 저자가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은 성경구절을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이 삼위일체를 명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창세기의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 혹은 성령에 관하여 나중에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하나님의 영감으로 사용한 단어들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에 관하여 성경에서 나중에 완전하게 드러난 것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록 참조).

창세기는 성경의 맨 첫 구절에서부터 창조주 하나님이 진정으로 한 분의 하나님이라고 확증한다. 신명기 6:4의 유명한 쉐마 (Shema, ‘들으라(hear)’에 대한 히브리어)에서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one)인 여호와시니.”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나(one)’에 대한 단어 에하드(echad)는 종종 단일성 안에서의 복수에 대해 사용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19:5과 마가복음 10:8에서 인용하셨던) 창세기 2:24에서 남편과 아내(두 사람)가 '한(echad) 몸을 이룰지로다” 와 같은 것이다 [10].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한 분의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임을 드러낸다. 세 구별된 위격이 하나의 영원하고 거룩한 본질 혹은 실재 안에 있다. 따라서 실제로 창세기 1장에서 삼위일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 유일하고 삼위일체이신 -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창세기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율법을 주셨으며, 우리의 구원자와 심판자가 되신다.



References and notes

1. Modern-day non-Messianic Jews might believe that God created as per Genesis, but they reject God’s uniplurality.
2. The first of some 2,570 times elohim is used of God in this way in the Old Testament. Although it usually refers to the Living God, it is also used occasionally in the Bible to refer to pagan deities (in the plural), as in: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elohim] before me’ (Exodus 20:3; cf. Joshua 24:16; Jeremiah 5:7).
3. Corresponding to the Greek theos, the Latin Deus, and the English God.
4. Some antitrinitarians try to claim that God is conversing with angels here. But there is no indication anywhere in Scripture of angels being involved in creation, or having such creative power. And more importantly, mankind was made in the image of God, not in the image of ‘God plus angels’—see also Hebrews 2.
5. Taylor, C.V., The First Hundred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p. 3, 1996.
6. E.g. Morris, H.,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p. 39, 1976.
7. See also John 1:3; 1 Corinthians 8:6; Hebrews 1:2.
8. Whom the Bible tells us is eternal (Hebrews 9:14), omniscient (1 Corinthians 2:10–11) and omnipresent (Psalm 139:7–10).
9. Kelly D.F., Creation and Change,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Ross-shire, UK, p. 91, 1997, who references Young, E., Studies in Genesis One,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Co, Philadelphia, USA, p. 36, 1964.
10. Paul, thoroughly educated in Judaism and writing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understood this. In 1 Corinthians 8:6, he wrote: ‘Yet for us there is but one God, the Father, from whom all things came and for whom we live; and there is but one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all things came and through whom we live.’ Here, Paul is applying the Shema, using the key phrase ‘one Lord’, and applying it to Jesus Christ, thus including Jesus in the identity of the one true God!                 


부록 1 :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elohim)의 근본적인 의미는 ‘능력 있는 분(the powerful one)‘이므로, 엘로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한다. 모세가 창조주간의 창조주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주 적절하였다. ”길고 잡아 늘려진 진화론의 시간표 동안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다양한 물체와 존재들을 창조하신 것에서 그분의 능력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1]

일반적으로 엘로힘은 하나님에 대한 이름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직함(title) 혹은 서술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해 정말로 개인적인 이름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그분이 드러내신 이름(출애굽기 3:15), 즉 YHWH로서 종종 야훼(Yahweh)로 음역하며, 영어로는 ‘Jehovah(여호와)‘와 대문자 ‘LORD(주)‘로 쓴다. 그 의미는 ‘나는 나다(I am that I am)'이며 ‘스스로 있는 자‘ 혹은 ‘있게 하는 자‘를 뜻한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2]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와 맺는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모세는 결합된 용어인 여호와 하나님(Yahweh elohim, 야훼 엘로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번역가들이 영어로는 ‘주 하나님(the LORD God)‘으로 번역했다.


References and notes

1. Taylor, C.V., The First Hundred Words, The Good Book Co., Gosford, NSW, Australia, p. 3, 1996.
2. As well as of God’s covenant relationship with His people.



부록 2 :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격의 하나됨(unity) 안에 영원하고도 서로 동등한 세 위격(persons)이 존재함을 말한다.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본질에서는 동일하지만, 역할이 다른 세 위격(혹은 의식의 세 중심)이시며 하나의 존재(being)이시다 (그림을 보라). 이 교리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존재에 관해 성경에서 드러내신 것이므로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예로써,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내려오셔서 아들 위에 임하는 것이 보였으며,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마태복음 3:16-17). 그리고 예수님이 대 위임(great commission)을 주실 때에 그분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단수)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마태복음 28:18-20).


하나 됨(oneness)과 셋 됨(threeness)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 교리가 스스로 모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원리에 있어서, 해군과 육군과 공군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전투 집단이지만, 또한 하나의 군대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주 : 이것은 세 위격이 하나님의 ‘부분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각각의 위격은 신격의 충만을 갖고 있다(골로새서 2:9). 보다 나은 비유는, 공간이 세 개의 차원(길이, 폭, 높이)을 갖고 있지만, 그 차원들은 ‘부분들‘이 아닌 것과 같다. 즉, 세 개의 모든 차원이 없다면 ‘공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하다.


삼위일체와 사랑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 라고 말한다(요한일서 4:8,16).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특이한 것이며, 아직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을 때에도 사랑은 하나님 본질의 일부이다. 그런데 사랑은 최소한 두 사람을 필요로 하며, 자기 사랑은 전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신격 안에는 최소한 둘의 위격이 있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단 하나의 위격이라면, 사랑은 그분의 본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그들 자신에게로 제한되지 않고, 둘이 연합하여 다른 사람을 지향할 때 그 사랑은 더 위대하다. 이것은 가족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데, 즉,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며, 또한 그들의 사랑이 연합하여 그들의 자녀에게로 향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충만함의 견지에서 사랑을 나타내려면, 세 위격이 있어야만 하며, 개별적인(individual) 사랑과 집합적인(collective) 사랑이 모두 있어야 한다. 집합적인 사랑을 위해 셋 이상은 불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위격의 수만 증가시킬 뿐, 사랑의 본질을 증가시키지는 않는다.

 

Related Articles


번역 - 이종헌

주소 - https://creation.com/who-really-is-the-god-of-genesis

출처 - Creation 27(3):37–39, June 2005.


관리자
2005-06-25

   간격이론 이란 무엇인가?

미디어위원회


    “간격이론(Gap Theory)이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이론이다. 간격이론은 화석을 포함하는 지질시대의 수억 년이 이 두 절 사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이를 재창조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화론이 대두된 이래로 진화론적 지질학과 창세기 1장과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간격이론도 그 중에 하나인데,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이 창세기 1장 어딘가에 긴 기간을 넣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간격이론은 에피스코피우스(Dutchman Episcopius. 1583-1643)가 처음 언급했지만 당시 내용도 불분명했고 신학계에 영향력도 없었다. 간격이론이 알려지게 된 것은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Scottish, 1780-1847)에 의해서이며, 진화론에 영향을 받은 지질학자이면서 목사인 윌리암 버크랜드(William Buckland)가 대중화시켰다. 그 후에 이 이론에 대한 여러 글들이 등장했는데, 19세기 지질학자 휴 밀러(Hugh Miller)가 더 자세한 이론을 전개했다. 즉 진화론적인 지질학 개념을 가진 기독교인이 자신의 이론과 창세기 1장을 엮으려는 노력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커스탄스(Arthur C. Custance)가 “혼돈하고 공허하며(Without form and Void)”라는 책에서 간격이론을 옹호했다. 

위의 글들은 어김없이 기존 진화론을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에 영향을 받은 주석성경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스코필드 성경(Scofield Study Bible)에는 “화석은 원시창조로 설명되며, (그러면) 창세기의 우주진화 모양과 과학은 모순이 없다” 고 설명했었다. 데이크 주석 성경(Dake’s Annotated Reference Bible)에는 “(진화론적) 지구 나이에 동의할 때,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수천만년을 놓는다. 그러면 창세기와 과학 사이에 모순이 사라진다.” 라고 전형적인 간격이론에 기초한 해석을 썼다. 

성경으로 볼 때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출20:11)” 속에 긴 기간이란 것이 들어갈 틈이 없다.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2)” 분명히 사람의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간격이론대로라면 아담 이전에 지질계통표에 근거한 유인원이 죽었어야 했다.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롬8:22)” 분명히 성경은 죄로 인해 피조물이 고통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에 간격이론은 죄 이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고 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간격이론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부터 죽음이 있었다고 하며 복음의 기초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노아홍수를 제거함으로 동일한 말씀으로(벧후3:7) 심판하신다는 말씀도 막연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사45:7)” 2절의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깜깜한 세상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다.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간격이론은 논리적 일관성이 없다. 사실인 성경이 아니라, 사실이 아닌 진화론에 기초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지질계통표의 역사는 있지도 않고 우주의 나이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다. 창세기 1장을 통해 “보시기에 심히 좋다(very good)”를 통해서도 화석과 같은 잔인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서 나온 해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미디어위원회
2005-06-14

에서의 아내들 (Esau’s Wives) 

: 성경의 오류라는 지적에 대한 반론

Stephen Caesar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 자주 창세기의 오류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 에서의 아내(Esau’s wives)들에 관한 것이다. 창세기 26:34 과 28:9에 의하면, 에서의 아내들은 다음과 같다.

-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 (Judith, daughter of Beeri the Hittite) (창 26:34)
-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 (Bashemath, daughter of Elon the Hittite) (창 26:34)
-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 (Mahalath, daughter of Ishmael, sister of Nebajoth) (창 28:9)

그러나 창세기 36:2-3에 의하면, 그의 아내들은 다음과 같다.

- 헷 족속 중 엘론의 딸 아다 (Adah, daughter of Elon the Hittite)
-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딸 아나의 소생 오홀리바마 (Aholibamah, granddaughter of Zibeon the Hivite)
-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 (Bashemath, daughter of Ishmael, sister of Nebajoth)

바스맛 (Bashemath, 정확하게는 Basemath) 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셈족어(Semitic)의 어간인 b-s-m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의미는 ‘향기로운(fragrant)’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besem 은 히브리어에서 'balsam(향유)”을 의미한다). 여기에 히브리어에서 여성을 뜻하는 어미 -ath 를 붙이면, 바스맛(Basemath), 즉 ‘향기로운 여인(fragrant woman)’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할랏(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과 아다(헷 족속 중 엘론의 딸)는 둘 다 '향기로운 여인(바스맛)”이라는 별칭(nickname)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Douglas 1982: 124). 다시 말해서, 창세기 26:34절의 엘론의 딸 바스맛은, 창세기 36:2절의 엘론의 딸 아다와 같은 사람이었으며, 창세기 36:3절의 이스마엘의 딸 바스맛은, 창세기 28:9절의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브에리의 딸 유딧과 첫 번째 결혼 후에, 에서는 엘론의 딸 아다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녀의 별칭은 '향기로운 여인(Fragrant)” 이었을 것이다. 아다가 죽은 후에,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얻으면서,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별칭을 '향기로운 여인”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에서는 '향기로운 여인” 아다와 이혼을 했고 (이것은 족장시대에 세속적인 근동지역의 법으로 허락되어 있었다), 마할랏과 결혼하면서 그녀에게 아다를 대신하여 '향기로운 여인”이라는 별칭을 주었을 가능성이다. 그래서 에서의 여러 번의 결혼은 다음과 같이 타당성을 가지고 재구성될 수 있다.      

첫째 부인 :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
둘째 부인 : '향기로운 여인(the Fragrant, Bashemath)”인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 그녀는 일찍 죽었거나 이혼했다.
셋째 부인 : '향기로운 여인”인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
넷째 부인 : 히위 족속 중 시브온의 손녀 오홀리바마

아내들이 진짜 이름과 다른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례는 적어도 두 경우가 있다. 첫 번째 예는 족장시대(Patriarchal Era)와 동시대였던 마리토판(Mari text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말라마트(Abraham Malamat)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몇년 전, 나는 마리(Mari)의 여인들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짐리림(Zimri-Lim, 족장 시대에 마리의 왕)의 왕비인 쉬부츠(Shibtu)에 대한 연구(P. Artzi와 함께)를 발표하였다.... 꽤 최근까지도 쉬부츠는 알렙포(Aleppo)의 왕인 야림림(Yarim-Lim)의 딸이었고, 왕의 첫째 부인은 가쉐라(Gashera)로서 여겨졌었다. 그러나 몇몇 기록에서, 쉬부츠의 어머니는 지지(Zizi)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쉬부츠는 알렙포의 왕인 야림림의 두 번째 왕비가 난 공주이거나, 지지가 가쉐라의 별칭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별칭은 고대사회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짐리림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족들은 자주 그를 ”my Star' 로 불렀었다” (Malamat 1989: 12).    

훨씬 후에, 앗시리아의 왕인 산헤립(Sennacherib, 705-681 BC)의 부인은 아람어(Aramaic)  이름으로 나퀴아(Naqia) 이지만, 앗시리아 이름으로는 자쿠투(Zakutu) 였다. (Boardman 1991: 138; Kuhrt 1995: 527).


따라서 에서의 두 아내는 태어나서 아다와 마할랏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별칭인 '향기로운 여인(바스맛, Fragrant)”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References

Boardman, J, et al., eds. 1991. Cambridge Ancient History, 2nd ed., Vol. 3., Part 2: The Assyrian and Babylonian Empires and Other States of the Near East, from the Eighth to the Sixth Centuries B.C. (Cambridge University Press).

Douglas, J.D., organizing ed., 1982. New Bible Dictionary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Kuhrt, A. 1995. The Ancient Near East c. 3000-330 B.C., in 2 vols. (London: Routledge).

Malamat, A. 1989. Mari and the Early Israelite Experience. London: Oxford Univ. Press.

*Stephen Caesar holds his master’s degree in anthropology/archaeology from Harvard. He is a staff member at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and the author of the e-book The Bible Encounters Modern Science, available at www.authorhouse.com.

 

 *참조 : Get Answers: Countering the Critics
http://www.answersingenesis.org/home/area/faq/critics.asp#contradiction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rae.org/esauswives.html 

출처 - Revolution Against Evolution, 2004. 9. 15.

미디어위원회
2005-05-20

그러나 창세기는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But Genesis is not a science textbook!)

Jonathan Sarfati


     당신은 이러한 말을 몇 번이나 들어보았는가? 이 질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짧은 대답은 "교과서는 언제나 많은 오류와 몇 년 지나면 구식이 되어버리는 정보들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은 전혀 오류가 없고, 언제나 새롭다” 는 것이다.


역사 대 과학

사실 창세기는 과학(science, 창세기는 확실히 인류학, 생물학, 지질학 등과 매우 관련이 되어있지만) 이라기보다는 역사(history) 이다. 달을 여행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등의 보통 과학(normal science, 활용되는 과학)은 현재(present)에 반복될 수 있는 관측(repeatable observations)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과거' 의 목격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창세기는 창조에서부터 메시야가 오시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까지 세계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몇몇 사람들은 "창세기는 광대한 지질시대, 또는 진화를 이해할 수 없었던 단순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기에, 역사교과서 또한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화론에 의한 창세기'의 글에서 지적했듯이, 만약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광대한 지질시대나 진화였다면, 단순한 언어를 가지고도 충분히 그 뜻을 전하실 수 있었다.


창세기와 과학

과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현대 과학(modern science)이 다른 여러 문화들에서는 번성하지 못했지만, 기독교화 된 유럽(Christianized Europe)에서는 꽃을 피웠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놀라운가? 그러나 놀라지 말다. 과학은 합리적인 생각과, 우주는 질서 정연하며, 인간은 온 세계를 탐사할 수 있으며, 그리고 결과들은 정직하게 보고 되어야 하는 것들을 필요로 한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창 1:26~27),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며(고전 14:33),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창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창 1:28), 우리들에게 정직하라(출 20:16)" 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것들에 대한 논리적인 기초가 모두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Creation) 지에 매번 성경을 믿는 과학자의 글들을 소개하고 있는 이유이다. 이번 창조 지에서는 한 사람의 뛰어난 '행성 과학자'와 많은 생명들을 구한 'MRI의 개척자‘를 소개하고 있다. 후자인 분은 창조론자들을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자주 '사이비 과학자'라는 비난도 당하였다. 이들 비난하는 자들은 현대과학의 위대한 설립자이며 창조론자들이었던 뉴튼(Newton), 패러데이(Faraday), 파스퇴르(Pasteur)와 같은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살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단지 믿음과 도덕만을 말하는가?

"...성경은 믿음(faith)과 도덕성(morality)에 관한 책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리와 도덕성은 성경의 역사적/과학적인 면과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제 삼일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과, 일시에 500여명의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것은(고전 15:1~6)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과학과 충돌한다. 자연주의적 과학자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진정한 역사인 창세기 3장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존재했던 최초의 인간 '아담'은 실제로 죄를 지었고, 실제로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실제로 죽음으로부터 육체적 부활을 가져오신 것이다.(고전 15:1~4, 21~22, 45)

혼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혼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하나의 도덕적인 가르침에 불과한가? 그러나 예수님이 이 주제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역사로서 창세기 1:27과 2:24을 인용하여 말씀하셨다 (마 19:3~9, 막 10:6~9). 게다가 예수님은 첫 번째의 사람 부부는 창조 후 수십억 년 후가 아니라, 창조의 시작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성경을 '빅뱅 이론'으로 맞추어 재해석하려는 크리스천들에게 주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도덕성에 관한 내용인 십계명에서도, 역사를 배제하면 그것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네번째 계명, 즉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확실히 '창조 주간(Creation Week)'의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출 20:9~11)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태초의 일들(창조의 사건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늘의 일들(즉 믿음과 도덕성)을 믿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위(authority)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질문들이 있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왜 당신들은 창세기가 의미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만큼, 세례, 안식일, 예정론 대 자유의지, 마지막 날, 주님의 축복, 교회의 형태들에 대해서는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습니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이 모든 논쟁들은 성경만이 권위(the Bible is authority)라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인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과거 지구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성경(the Bible)이 그 권위가 있는지, 현대 과학(modern science)이 그 권위가 있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성경은 태초에 그곳에 계셨고, 오류가 없으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창조주의 목격을 기록한 책이다. 예수님도 성경은 폐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0:35). 그러나 과학자들은 태초에 그곳에 있지 않았으며(욥 38:4),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실수투성이인 것이다.

이것은 창조론자들은 성경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 하라는 요구가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대답하기 위해서 대답하지 말라'의 글(p.43)에서 논했던 것처럼,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대답인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효과적으로 성경이 진리라는 주장을 포기하도록 하고 있으며, 패배를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진리의 최종적인 결정권자라는,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심판대 위에 올려놓고자 하는, 믿지 않는 자들의 죄악된 견해를 확립시키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관련기사  : 양승훈 “성경은 과학교과서가 아니다”  <창조론 오픈 포럼 대표 >에서 창조과학회의 '젊은 지구론' 비판. "성경이 과학교과서라는 주장은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다." (2008. 8. 11. 뉴스파워)

(반론) 창조론자들은 성경을 과학책이라고 주장하는가? (2017. 3. 22. 기독일보)


번역 - 미디어위원회

주소 - https://creation.com/but-genesis-is-not-a-science-textbook

출처 - Creation 26(4):6, September 2004.



미디어위원회
2005-03-23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김정훈 


      얼마 전의 일이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화제가 아담과 이브도 우리 처럼 배꼽이 있었는가 하는 쪽으로 넘어 가게 되었다. 은근히 재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초등학교 1,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필자의 두 아이에게 생각을 물어 보니, 둘 다 대답이 같게 나왔다. 아담과 이브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으므로 당연히 배꼽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를 역사적으로 실제했던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는 사실이 고맙고 기특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아이들이 놓치고 있음을 발견하고 조금은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이다. 성경은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어 그 안에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창 2:7). 즉, 이 말은 아담은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달리 엄마의 자궁 속에서 수태되어 지은 바 된게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 사실은 이브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브 또한, 누구의 뱃속에도 들어 있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어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는 과연 우리 아이들의 대답대로 배꼽이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기는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필요한 영양분을 탯줄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공급 받고 있는데, 아기가 출생하게 되면 이제 이 탯줄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므로 출생과 동시에 잘라 버리게 된다. 배꼽은 바로 이 탯줄이 붙어 있던 자리가 흔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적당한 기간을 보내고서야 출생을 하게 되므로, 따라서 누구나 예외 없이 그 증거로서 배꼽을 자신의 배 한 가운데에 지니고 다니게 된다. 만약에 누군가가 엄마의 자궁을 통해서 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는 틀림 없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배꼽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바로 하나님이 최초로 만드신 아담과 이브가 유일한 그 예가 될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마치고 이제는 바뀌어진 아이들의 대답을 기대하면서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뜻 밖에도 이번에는 두 아이의 대답이 다르게 나왔다. 큰 아이는 아직도, 그래도 아담과 이브는 배꼽이 있을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그 이유인 즉슨, 비록 그들이 엄마의 자궁 속에 존재치 않았었다 하더래도 그 뒤에 나오는 그들의 자손들과 서로 다르게 보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배꼽을 따로 만들어 붙이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그만 우리 모두는 서로가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래 그거야 진짜 하나님만 아실 일이라고 결론을 내림으로 그 날의 대화는 끝을 내렸는데, 그날 밤에도 필자는 여전히 아담과 이브에게는 우리와 같은 배꼽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바꿀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담과 이브에게 배꼽이 없다면, 배꼽 없는 그들을 바라 볼 때 마다 그 자손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지 않았겠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의 기원에 대한 무엇 보다도 확고 부동한 창조론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어느 누가 배꼽 없는 그들을 보면서 감히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지구의 나이가 수 십억년이나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배꼽 없는 아담과 이브는 당시에 같이 살았던 후손들에게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지은바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들의 나이를 헤아림으로서 지구의 나이를 또한 가르쳐 주는 역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아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굳이 가짜 배꼽을 만들어 부치셨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담의 배꼽과 관련지어 이따끔씩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조롱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경대로라면 남자의 갈비뼈 수가 여자 보다 하나가 모자라야 하는 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으로 성경이 한갖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창 2:21-22)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셔서 이브를 만드셨다고 되어 있으므로, 분명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신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갈비뼈 하나를 아담이 상실했다 하더래도 그의 자손은 여전히 완전한 수의 갈비뼈를 갖고 태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이와 같은 현상을 가르켜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말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쉽게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가령 우리가 살면서 사고로 눈을 한 쪽 다치거나, 팔을 하나 잃어 버리게 되었다고 하였을 때, 그 뒤로 부터 태어나는 모든 우리의 자손들이 팔이나 눈이 하나인채로 태어 난다면,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새로이 얻게 된 소위 '획득 형질'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로 '유전'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관찰을 통하여 아는 사실은, 아무리 우리가 사고로 팔 다리를 잃게 되었다 하더래도 여전히 우리의 자손은 두 팔과 다리를 갖고 태어 난다는 사실이다. 과거 19세기에 프랑스의 라마르크라는 사람은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기린의 목이 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기린의 목은 그리 길지 않았었는데,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열매를 따먹으려고 자꾸 목을 뻗침으로 목이 길어지게 되었고, 그 뒤 그의 자손들이 그 형질을 물려 받아 그 뒤로는 기린의 목이 모두 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을 가리켜 '용불용설'이라고 불렀는데, 그 뒤 유전학적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게 되었고, 따라서 획득형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전학에 있어서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이같은 유전학적 법칙에 비춰 볼 때, 아담이 갈비뼈 하나를 잃은 사실은 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요 그의 자손에게는 하등 영향을 주지 않는 일임을 쉽게 알 수 있음으로, 따라서 성경의 이 기록을 가지고 오늘날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의 갈비뼈와 그 숫자가 같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경의 기록이 마치 잘못된 것인 양 놀리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과연 아담이 하나님께서 갈비뼈 하나를 취하심으로 평생 갈비뼈 하나가 모자라는 채로 그의 생을 살았을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 몸을 잘 관찰해 보면, 갈비뼈는 골막이라고 하는 섬유성 조직에 의하여 덮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골막 조직은 바로 그 안에 뼈를 만들어 내고 또 영양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함으로, 이 조직만 살아 있으면 갈비뼈가 다시 재생되어 생겨 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병원에서 갈비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하더래도 의사들이 이 골막 조직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잘라내면, 차츰 갈비뼈가 재생되어 수술 후에 곧 상처가 아물고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이 되게 된다. 그렇다면, 누구 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재우고 갈비뼈를 꺼내는 수술을 하실 때 왜 이 골막 조직을 남겨두고 수술하지 않으셨겠는가? 어쩌면, 아담의 갈비뼈는 얼마 후 멋지게 재생이 되어 하나님의 수술로 인한 아무런 불편도 겪지 않고 지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성경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성경이 누구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너무나도 쉽게 씌여져 있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훈련이 부족하다. 가령 우리는 노아의 홍수로 인해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와 바뀌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데, 성경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면, 창세기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처음에 아담과 이브의 배꼽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우리 아이들 처럼, 성경의 기록에 충실하기 보다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놓치게 된다. 바른 성경의 이해는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창조과학은 정확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잘못된 성경의 이해를 바로 잡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그 기록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세계관의 정립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5-03-22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가?

김정훈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혹은 훈련의 부족으로 알고 있는 사실도 잘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특히 성경내에서 역사적이나 과학적 사실성을 요구하는 구절에 가서는 전혀 답변을 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그냥 지나쳐 버리던지 아니면 무조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우리들의 제한된 지식으로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 일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는 내용도 또한 상당히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한 번쯤은 궁금해 보았을 대표적인 질문은 바로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얼핏 보면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질문 같지만, 그래서 왠만한 교회의 성경공부 시간에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 같은 것은 별로 안해 보았을 내용이지만,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질문 하나도 그 답이 교회에서 주어지지 않았을 경우, 얼마든지 한 사람의 영혼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의 믿음을 실족시킬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준비할 수 있도록 성경을 연구하고 그에 걸맞는 훈련을 받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 임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의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보았다는 라는 천체 우주 documentary program으로 유명한 Carl Sagan 박사는, 그의 자서전격인 소설 에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한다. 자신은 어렸을 때 주일 학교에 다녔었던 적이 있지만, 어느날 성경을 읽다가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지 궁금했었고, 그에 대한 답을 교회서 얻지 못했을 때, 차츰 성경을 불신하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교회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Carl Sagan은 그 후 철저한 진화론자로 탈바꿈 하여, 인간 보다 고등한 외계의 생명체를 찾아 보겠다고 수억의 돈을 투자하여 설립한 천체 망원경을 가지고 외계에서 오는 radio 신호를 찾는데 그의 일생을 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진화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낙태를 옹호하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결국, 사소한(?) 질문에 답변이 준비되지 못했던 교회는 한 사람의 영혼을 잃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반기독교 인물을 배출하는데 간접적인 역할을 하고만 셈이 되어 버렸다. 그런가 하면, 192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 열려 세인의 관심을 크게 끌었던 소위 원숭이 재판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기독교 지성으로 잘 알려져 있던 William J. Bryan이 피고측 변호인으로 나섰던 Clarence Darrow의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는데, 여기서 Bryan은 특히 여러 가지 난해한 성경구절들을 골라 질문해대는 Darrow에게 이렇다 할 답변을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넘어감으로 말미암아, 후에 이 재판이 끝나고 난 뒤에 마치 그가 무식하고 근시안적이며, 맹신적인 기독교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도 되는 양 media에 묘사되는데 이용당하게 되었다.

 

Darrow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지만, 그 중에 하나는 바로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복음의 내용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고, 사회적인 여러 가지 issue에도 관심이 많았던 Bryan이었지만, 언뜻 사소해 보이는 성경의 몇 가지 구절들이나 그와 관련된 질문들에는 미처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마치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 전체가 비합리적이고 맹신적인 믿음의 바탕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세인들에게 주고 만 것이었다.

 

자, 그러면 과연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지 그 답을 찾아 보기로 하자. 우선, 성경은 아담이 첫 사람이며 (고전 15:45), 그의 아내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되었다고 (창 3:20) 기록하고 있으므로,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하와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성경은 아담이 930세 까지 살았으며, 그 동안에 많은 자녀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창 5:4-5) 있으므로, 아담의 큰 아들인 가인에게는 배필로 삼을만한 그의 여동생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아담의 자손들이 계속하여 인구를 늘려갔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가인은 필경 당시 아주 큰 인구를 이루었을 아담의 자손 중에서 아내를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당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명령을(창 1:28)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류가 번성하여 자리를 잡기까지, 이 같은 근친간의 결혼은 불가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법의 결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들게 되다가, 모세의 때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율법(레 18-20)으로 금지하게 되는데, 이는 사회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또한 근친간의 결혼을 통한 유전적인 위험성도 상당히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류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유전인자에 여러 가지 환경 요인으로 인한 결함이 많이 늘어나게 되고, 근친간의 결혼은 이와 같은 유전적 결함을 유전병으로 발현시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담이후 초기의 인류에게는 근친 결혼을 하더라도 아직 이같은 유전적 위험이 나타날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얼마 되지 않은 때이므로 매우 건강하고 장수하였음을 성경에 나타나는 족장들의 나이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성경을 잘 읽어 보면, 노아의 홍수를 기점으로 족장들의 나이가 급격히 감소함을 발견할 수 있어, 아담이 창조된 때부터 홍수 이전 까지의 대기와 환경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장수하기에 적합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인이 범죄한 후에 만나기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살펴 보기로 하자. 성경에 보면, 가인이 범죄 한 후에 아담은 셋을 새 아들로 얻었는데, 그 때 그의 나이가 130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5:3). 한 세대를 25년으로 잡고, 세대 당 평균 8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가정하면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건강과, 자손을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고려할 때 비교적 적게 잡은 숫자이다), 아담의 나이 130세가 될 때에는 이미 5세대를 지나 적어도 2000명 이상의 인구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가인이 범죄 하였을 당시에만 하더라도 이미 상당히 많은 수의 아담의 자손들이 주변에 퍼져 살았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가인은 범죄 한 후에 땅에서 유리 하는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만나 죽임을 당할까 염려하였는데 (창 4:14), 이들은 바로 다름 아닌 주변에 흩어져 살던 가인의 친족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분명 역사책은 아니요, 과학책은 더더구나 아니다. 하지만, 성경에 어떤 역사적이거나 과학적인 기록이 나올 때는 이것은 분명 사실이다. 가인이 만나기를 두려워 했다는 사람들이나(창 4:14) 그가 결혼하여 아내를 얻었다는(창 4:17)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성경의 기록을 토대로 다시 추적하여 그려보면, 별 어려움 없이 역사적 사실로 그리고 과학적으로도 아무런 모순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을 접하게 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적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은 성경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라 (사 34:16). 하나님께서 그 답을 주실 것이다. 적어도 제 2의 Carl Sagan 같은 이는 나오지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 중에서

미디어위원회
2005-03-21

다시 생각해보는 창조의 순서와 그 내용

김정훈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성경에 관하여 많은 질문을 받게 되는데, 한 번은 어떤 교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질문을 받게 되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보면, 창조의 순서에 있어서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에 보면, 식물이 먼저 창조되고(1:11-12) 그 후에 사람이 지은바 된 것으로(1:26-27) 기록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마치 식물이 사람보다 나중에 창조 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록이 있음으로,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해석상의 정리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필자 자신도 같이 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기회에 창세기 1장과 2장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으며, 각각의 창조의 순서는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는지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창세기 2장의 성격부터 분명히 이해해 보도록 하자. 앞서 1장에서 연대기적인 창조의 기술이 있은 후 그 결론이 2장 3절까지 이르러서 일단락을 지음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이어지는 2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2장에 나오는 창조의 내용은 1장과 서로 다른 창조의 기사를 후대에 와서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은 소위 '문서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문서설'이란 그 이론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옴을 인하여 사실 신앙생활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2장 4절이 뒤에 나오는 창세기 2장 전체의 해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Westminster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를 지낸 Edward J. Young 박사는 이 구절을 단호하게 표제문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4절은 앞서 1장의 창조의 내용에 대한 종결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단을 여는 표제문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4절에서 사용된 '대략' 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톨레돗' 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만 열 번이나 사용되고 있으며, 그 때마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앞서 기술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으로 범위를 좁혀 가며 기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장 4절에서도 이 구절이 사용됨으로써 앞서 1장에서 기술한 창조의 내용을 이제 보다 자세하게 그 중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는 게 자명해 진다. 결국, 창세기 2장은 1장의 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에덴 동산으로 창조의 시선이 모아간다. 이는 또한 뒤에 3장에 나오는 에덴 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3장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창세기 2장의 성격이 1장의 많은 창조 내용 중에서 특히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의 환경을 1장에 대하여 보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그 안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내용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2장 5절은 분명히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들'과 '밭'은 동일한 원어에서 나온 단어로서 인간의 농사를 암시하고 있는 단어라는 점이다. 실제로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번역할 때 들의 초목(plant of the field) 과 밭의 채소(herb of the field)라는 말에서 같은 field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같은 사실은 5절 앞부분에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고 있다. 사실 밭(field)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얻게된 결과로써,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우면서 이마에 땀을 흘린 후에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얻어 낼 수 있는 땅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결국 5절에 기록된 내용은 앞서 1장에서 창조의 셋째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으로 표현된 지상의 모든 종류의 식물이 '땅'에는 이미 창조되었으나(1:11-12),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땀흘려 농사 지으며 가꾸게 될 '밭'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2:5)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그럼 여기서,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지구와 함께 모든 우주에 필요한 구성 물질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 'bara'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로서,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지구는 아직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있었다(2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자전시키심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을 오게 하여 지구에 첫째 날을 되게 하셨다(3-5절). 여기서 창조된 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주의 어딘가 에서 단지 지구를 비추는 빛의 근원에 대한 창조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한 가지 더 주목하여 말할 것은 여기서 창조된 빛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자신이 빛을 비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낳고 말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둘로 나눠 궁창 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로 나누시었다(6-8절). 여기서 궁창 위의 물은 당시 지구의 환경과 후에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날에는 육지가 드러나면서 식물이 만들어진다(9-13절). 식물은 본래 광합성을 할 때 태양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 때 창조된 식물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장성한 식물로서 태양이 있기 전에 만들어 졌어도 다음 날 태양이 나올 때까지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이미 그 잎사귀에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첫째 날 만들어진 보다 근원적인 빛이 지구를 비추고 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하등의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시는데(14-19절),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창조를 하시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족속들은 한결 같이 태양을 하나의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태양을 하나의 피조물로써 넷째 날 만드신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제 태양이 창조됨으로써 지구를 비추는 빛의 역할을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맡아 하게 된다. 다섯째 날이 이르러 하늘의 새와 물 속의 생물을 창조하시는데(20-23절), 이때 다시 한 번 'bara' 라는 특별 동사를 사용하신다. 아마도 이제까지의 식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무언가를 동물을 창조하실 때 새로이 창조하신 것 같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soul' 로 보는데, 꽤 설득력이 있는 생각이다. 이제 여섯째 날이 이르러서는, 땅 위의 모든 생물과 사람을 지으시는데(24-31절),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시 한번 'bara'가 사용됨으로 이제까지의 피조물에는 없는 근본적인 새로운 것을 사람에게 새로이 창조하여 주심을 볼 수 있다. 동물을 포함한 모든 다른 피조물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사람만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형상, 'spirit' 이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6일간에 걸쳐서 창조를 하셨을까?  그 분은 본래 전능하시어서 단 하루 만에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제 칠일 째 되는 날 친히 안식을 하심으로(2:1-3), 우리도 하나님처럼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에는 안식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출20:8-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 익숙하여 창조의 각 하루를 수억 년의 긴 연대로 인식하는 혹자들에게는 6일 창조의 내용이 오히려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가령, 셋째 날 만들어진 식물이 수억년 동안을 태양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6일의 노동 후 7일째 안식의 개념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수억 년을 안식하셨어야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의 기록에 있어서 분명하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순서를 6일 간에 걸쳐 명시하고 2장에서는 초점을 에덴 동산으로 모아 3장에서 타락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체를 밝힐 준비를 한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상상하여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다.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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