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아내
박창성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했습니까?
아담의 후손들 이외에도 다른 부족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아담의 제1세대 자손은 맏아들 가인과 그리고 그의 남자 동생들인 아벨과 셋 뿐이기 때문에 이들이 누구와 결혼하였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문제로 인해서 성경의 창세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분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아담과 하와를 모든 인류의 조상으로 기록한 성경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 3명의 아들 이외에도 다른 아들과 딸들이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3-5절에는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모두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지 성경에는 적혀져 있지 않지만, 아담이 930세까지 살았다는 점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많은 자녀들을 낳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학자인 요세푸스(Josephus)는 그가 쓴 책에서,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아담의 자손은 33명의 아들과 23명의 딸들이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아담이 셋을 낳기 전 130년 동안에도 아들, 딸들을 많이 낳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셋의 이름만이 나타나 있는 것은 그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가인의 결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가인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들 중의 한 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서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들 이외에 다른 부족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1) 모세의 율법(레위기 18-20)에 근친결혼이 금지되어 있는데 어떻게 오빠와 동생이 결혼할 수 있습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후,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하라고 하셨을 때는 근친결혼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한 사례(창세기 20:12)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근친결혼을 금지하신 것은 모세 때부터입니다. 오늘날에도 오누이간의 결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근친결혼일수록 유전병에 걸리거나 정상적이지 못한 자손을 낳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는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께서 벌로서 이 땅에 내리신 저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에는 돌연변이로 인한 많은 결함들이 포함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유전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각각 물려받기 때문에 2개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중에서 어느 하나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라고 할지라도 좋은 유전자가 결함이 있는 유전자보다 강해서 결함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으나, 친족들 중에는 결함이 있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근친결혼을 할 경우, 결함이 있는 유전자끼리만 만나서 정상적이지 못한 자손을 얻을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을 비롯한 처음 세대들은 아직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많이 누적되지 않은 상태였고 사람들의 수가 아직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근친결혼을 허락하셨으나,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사람들 몸에 결함이 있는 유전자가 점점 많아지고 사람들의 수가 충분히 늘어나게 되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근친결혼을 금지하는 율법을 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창세기 4장 14절에서 가인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죽일까봐 겁을 낸 것은 아담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가인을 죽이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벨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전혀 낯선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족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130세 때 셋을 낳았는데 하와가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창세기 4:25)고 생각한 것으로 보아, 셋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아벨이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가인의 출생과 아벨의 죽음 사이에는 100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아담의 후손들이 충분히 많이 퍼져있었을 것입니다.
흔히, ”가인이 아내를 어디서 구했겠느냐, 아담과 하와 이외에 혈통이 다른 부족들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유인원에서 진화하였다고 믿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우리의 조상이라고 기록한 성경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아담을 ”첫 사람”(고린도전서 15:45)라고 하였고, 하와는 ”모든 산 자의 어미”(창세기 3:20)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창 2:4~7) <창세기 강해 8>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2장 3절까지의 말씀의 주제는 ‘창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시작해서 창조를 모두 마치시고 제 칠일에 안식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진정한 안식은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부족함이나 불균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창조질서의 회복은 안식을 통해서만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거룩한 주일을 통하여 창조의 세계로 나아가고 무너진 건강과 사업과 가정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일을 복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회복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중심인 책입니다. 그런데 2장 4절부터 지금까지 설명하고 있던 창조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장부터 설명되던 커다란 창조의 파노라마 중에서 한 점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 스포트라이트는 은하계도 아니고 빛도 아닌 사람에게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1장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2장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우주와 역사와 인생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대상은 사람입니다. 물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2장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1장과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천지창조는 조금 다릅니다. 혹 갈등의 요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초점의 문제입니다. 2장에서는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는 장엄하고 능력 있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2장 4절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바꾸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으로 표현이 달라진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1장에서 천지창조에 대한 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에 또 다시 이런 설명이 나왔을까요? 이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사업가가 공장에 기계 설비를 할 때 여러 가지 기계가 많이 설치됩니다. 그러나 설치되었다고 해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설계사가 원하는 대로 모두 설치가 된 후에 가동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계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한 두 개의 기계가 가동된다고 모두 가동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
하나님께서 1장에서 7일 동안 완벽한 창조를 하셨고 이제 운행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운행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바로 이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우주는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들고 하늘에 구름을 만들었지만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 대기상태였습니다.
바위를 만들고 지구에 흙을 만들어서 산천초목을 만들어 놓았지만 거기에 인간이 없기 때문에 경작할 것도, 초목도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분으로 형성된 안개만 이 지구위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나타나게 되면 그 인간이 모든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창조는 1장과 달리 6일 동안의 창조를 모두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인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관리인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책임자로 만들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운행되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완성되어야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은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1장 27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조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이나 식물이 아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생각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자살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은 배고프면 마땅히 먹을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관리인으로 살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1장 27절에서 두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인간을 동물 취급합니다. 인간을 개나 돼지처럼 죽이고 그 후에도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자식은 부모를 닮았습니다. 누구든지 그 자식을 보면 아버지를 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맞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딸이야”라고 얼굴에 쓰여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임에도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 같습니다. 무섭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죽이는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사람 창조
두 번째,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일한 성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생김새나 기능이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동성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이후 남자와 여자의 성을 혼돈 시켰습니다. 마귀는 문화라는 것을 이용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위배하게 합니다. 이것은 무서운 유혹입니다. 요즈음은 ‘유니섹스’의 문화입니다. 남자 옷도 여자가 입고 여자 옷도 남자가 입습니다. 이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문화가 발전하다보면 결국 동성연애로 흘러 갈 수 있습니다. 동성연애는 죄의 본질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결과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게 됩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남자를 보고 ‘형’이라고 부릅니다. 남자는 ‘오빠’라고 불러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남자는 남자가 되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문화는 이렇게 성을 바꾸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않고 짐승같이 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1장 27절의 말씀과 연결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은 2장 7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부터 창조의 대략을 설명한 후 2장에서는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운행하지 않았으며 온 우주는 인간이 창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구성하셨는지 2장 7절에 나와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인간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흙이란 땅에서 오는 물질입니다. ‘먼지, 티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예가가 흙으로 본을 떠서 만족하게 만들어지면 불에 넣어서 굽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이란 인간의 오장육부와 뼈와 피와 살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건강할 때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고 고통을 받으면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흙으로 된 몸에 우리는 향수도 뿌리고 좋은 옷도 입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흙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흙에 불어넣어 주셔
욥이 건강할 때는 자신의 육체가 흙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었지만 고통에 깊이 들어가게 되었을 때 육신이 흙이라는 사실을 묵상합니다. 욥기 14장 19절을 보면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도 눌려죽는 자이거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루살이에 눌려 죽고 죽으면 티끌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욥기 10장 9절을 보면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가까우면 이것이 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할 때 모두 다시 새몸을 입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7절을 보면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예수와 우리의 차이점은 우리는 흙에서 왔고 예수님은 하늘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십시오. 그러나 인간은 흙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2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을 흙에 불어 넣어주심으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흙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흙이므로 세상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자야 합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인간의 육신은 떡으로 살고 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세상과 물질을 연결하는 통로라면 생명과 영은 하나님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영을 잃어버리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은 가지고 있고 물질도 알고 쾌락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질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주셔서 하나님이 거할 공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 졌지만 흙만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있지만 영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흙과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으로 만들어진 존재를 ‘생령’이라고 부릅니다. 생령이 곧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흙으로 만들어진 혼이 ‘사람’입니다. 물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간 것이 생령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완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외로움이나 고통이나 불완전이 전혀 없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죄를 받아들임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게 되면서 인간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과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육신은 있지만 인간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남은 것은 인간의 육신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외롭고 고독하고 방황합니다.
하늘의 기쁨 맛보십시오
세상의 모든 소설의 줄거리는 고독한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상실한 사람은 길을 잃어버린 배와 같습니다. 방향이 없고, 목적도 없이 사는 이유를 모르고 동물처럼 살아갑니다. 단순히 동물처럼 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동물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오면 불안해집니다. 자신의 영이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의 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회복하는 길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고, 구원이 이루어지고, 능력이 임하며 하늘의 기쁨을 갖게 됩니다. 이제까지는 세상의 기쁨을 갖고 살던 사람이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죽음만 경험하던 사람이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부활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며 성령의 영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태초에 창조되었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고독과 절망과 좌절과 허무를 경험하고 있던 영혼은 구원을 보게 되고 천국을 보게 되며 절망에서 살아나게 되고 병에서 구원을 받고 모든 사단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 생명이 없으며 이 아들안에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나님의 영이 내안에 들어오고, 하나님의 영이 회복이 되어야 나의 육신도 살고 자아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육신은 세상의 통로이며 혼은 하나님과의 통로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으며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이 ‘거듭나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나이가 먹어서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라는 말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회복되라는 것입니다. 인격도 육신도 회복되어 온전해 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육신만도 아니고 영이나 혼만도 아닙니다. 이 세 가지가 온전히 만들어질 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너졌던 하나님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예수의 영이 살아 움직이게 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심으로 부활의 영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3
참고 :
안식의 축복 (창 2:1~3) <창세기 강해 7>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과정을 창세기 1장을 통해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하신 후에 언제나 ‘참 좋다’고 감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정말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어 이는 여섯째 날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을 보시고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속에는 세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주만물을 재창조하고 회복시키시는 안식의 원리
첫째, 하나님의 창조는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 하나님의 창조는 미숙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완전하게 만들지 않았다가 진화시켜서 오늘의 인류를 만든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코끼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족함 없이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셋째는 완전한 균형과 조화입니다. 창조물 상호간에 부조화가 없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창조를 불완전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재앙이 있고 기후변화와 지진과 화산이 터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고 환경관리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했습니다.
창조의 절정과 완성은 ‘안식’입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후에 7일인 마지막 날 가장 위대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것이 가장 위대한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은 일과 휴식이라는 두개의 리듬을 가지고 계십니다. 창조와 안식이라고 하는 두 리듬을 통해서 우주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쉬어야 합니다. 땅도 쉬어야 하고 인간도 쉬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 만물을 안식의 원리를 통해서 재창조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창세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장 1절부터 2절을 보십시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6일 동안의 창조를 하신 후에 일곱째날도 창조를 하셨는데 이것이 창조의 결론이며 완성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즐기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실과 그 위대하신 능력을 감상하고 기뻐하고 즐기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창조에는 안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축복과 회복이 일어납니다.
일이라는 것은 끝이 있습니다. 끝이 있을 때 시작이 있습니다. 일을 쉬지 않고 하는 분들을 ‘일중독자’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일을 하면 몸도 땅도 고장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는 쉼이 있습니다. 안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일만 계속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우리는 ‘노예’라고 부릅니다. 노예가 하는 일은 가치가 없습니다. 노예는 그저 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계속해서 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끊임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4백년 동안 노예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창조의 절정인 안식, 예배로 영적 회복되어야
하나님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안식을 위한 탈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도 이 안식의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똑같은 생활을 하며 돈 벌기 위해 사는 사람들, 쾌락을 위해 사는 사람들, 인생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멋진 시민이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은 노예와 같은 삶입니다. 이 노예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안식의 삶입니다. 휴식 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은 마치 서커스단에서 음식을 위해 재주를 넘는 불쌍한 곰과 같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반복적인 삶을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수령님과 당을 위하여’라는 말은 그들 인생의 전부입니다. 북한뿐만 아니라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쾌락을 위해서 인생과 시간을 낭비하며 명예와 성공을 위하여 살아가지만 죽음 앞에 왔을 때는 절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의 절정에 안식의 축복을 준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입니다. 노예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서의 삶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교회에 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잊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영적으로 살아나고 회복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이름을 높여드릴 때 창조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될 줄 믿습니다.
1절을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도 완벽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완벽합니다. 그분에게는 부족함이 없고 미숙함이나 부조화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도 안식을 통하여 부족함이 없고 미흡함이 없고 균형있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라”
일곱번째 창조인 안식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일곱째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을 복 주시며 ‘거룩하게 안식일 지킬 것’ 명령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신 후 ‘참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날을 복을 주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일곱째 날만 복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복 받는 비결은 하나님이 복 내려준 날을 열심히 지키면 됩니다. 주일날 엉뚱한 곳에 가지 마십시오. 복 받은 날에 헌신하시면 복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 받기 원하면서도 주일은 무시합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돈이 많아지면, 혹은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돈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더라도 주일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곱 번째 날에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과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교회에 나오는 일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장사하기 위해 교회에 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기위해 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제 칠일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안식일을 사랑하시고 정성을 들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족과 건강과 삶의 모든 것에 부어 주시는 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시면서 특별명령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꼭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계명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그 십계명 중에서도 하나님은 네 번째 명령을 지키시길 원하십니다. 출애굽기 20장 8절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쉬셨기 때문에 우리도 쉬고,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창세기에서와 같이 출애굽기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복을 줄 것이고 안식일을 기억하는 사람, 안식일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복을 줄 것이며 그날을 하나님이 특별히 거룩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이 오나 고난이 오나 역경이 오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십시오. 안식일의 복을 놓치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은 하나님경외하고 약한 자 돕는 아름다운 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 사람만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가족도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만 예수 믿으면 되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 전체가 예수 믿고 복 받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가축까지 복을 받아야 합니다. 동물까지도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집에서 기숙하는 손님까지도 여러분 때문에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과 가족과 가축까지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 비밀이 안식에 있습니다. 현대의 모든 사상은 안식을 지킬 수 없게 합니다. 모든 관공소의 시험이나 학교의 시험까지 주일날에 치러집니다. 재미있는 오락도 모두 주일날 행해집니다. 주일날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돕는 복되고 아름다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쾌락을 누리는 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일날에 사람들은 모두 쉬어야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은 평안이 없습니다. 쾌락을 즐긴 사람의 마음은 가볍지 않습니다. 좋지 않고 오히려 더 힘이 듭니다. 우리가 탈진하고 피곤한 이유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위해, 남을 위해 도와주고 사는 사람은 몸은 조금 피곤할 지라도 항상 마음이 천국 같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계속해서 갈등만 증폭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하나님을 기억하는 특별한 날로 만들라는 것은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하게 하겠다’는 말은 구별하겠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과는 다른 날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날만 주일입니까? 월요일이나 화요일도 항상 주일입니다.’라고 믿음이 아주 좋은 것 같이 말합니다. 모든 날이 중요하다는 말은 반대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일을 확실히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월요일도 확실히 지키지 못합니다. 주일을 잘 지키면 일주일이 복을 받습니다. 주일을 엉망으로 보낸 사람은 일주일이 엉망인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주일은 공휴일입니다. 자기의 날이고 쉬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가 경제의 축복에 비밀이듯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세상의 생활과 육체의 생활의 축복의 비밀입니다. 안식일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안식일의 위기는 안식일을 24시간으로 여기지 않고 2시간으로 여기는데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만 안식일이고 예배가 마치면 ‘이날은 내 날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은 하루 종일 주님의 날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가족끼리 모여서 가족을 섬기는 날입니다. 주일날 원근각처에 있던 가족들이 모여 점심도 먹고 축복하는 날로 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전히 주님의 집에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섬기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비결은 예수님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날 병을 고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일날 심방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병든 자를 심방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고친 예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사이를 걸어가게 되었는데 배고픈 제자들이 밀을 따먹었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은 엉터리다. 안식일을 범했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다윗을 예를 들어 ‘배고픈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성전의 떡을 먹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식일에 배고픈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어야 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안식입니다. 자신의 쾌락과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고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린 딸의 귀신을 쫓아주기를 원했을 때 안식일 날 고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안식일 날 고치지 말고 월요일 날 고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18년 동안 귀신들려 고생했던 이 딸도 아브라함의 딸이거늘 너희가 너희 집에 나귀도 물을 먹이는데 이 딸을 왜 그렇게 못살게 구느냐’라며 고쳐주셨습니다. 손마른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날을 귀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이 그도 귀히 여길 것입니다. 안식일 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실망한 자를 도와주고,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면 그 영혼이 축복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도 그의 삶도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안식일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성전은 완전한 성전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새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 가게 될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라는 장소에 와서 안식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지만 진짜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날이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과 절망이 있고 죄가 있는 온갖 잡다한 것이 많은 세상에서 여러분이 신앙이 자라는 비결은 오늘의 말씀대로 ‘내가 이날에 복을 주었고 거룩하게 했다’는 안식을 잘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회복시켜 주시고 창조의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안식일의 축복과 거룩함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안식의 축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창조의 모든 축복들이 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2
참고 :
사람의 창조 (창 1:26~31) <창세기 강해 6>
창조의 극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마지막으로 창조하기 위해 모든 만물을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의 별과 해와 달, 그리고 공기, 땅, 물, 이 모든 것을 창조한 이유는 인간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외롭거나 배고프지 않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연과 더불어 완벽한 교제를 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자연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처음으로 만들지 않으신 이유는 사람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이셨습니다. 마치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야 신부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에 등장하는 것처럼 우주만물과 지구를 만드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모두 만드신 후에 마지막으로 창조의 꽃인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벽한 드라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미완성이 없습니다. 불균형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한 균형이요, 완벽한 아름다움이요, 완벽한 충만함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생명의 지구, 하나님의 호흡인 지구가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그곳에 인간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좋은 집이 있다고 해도 그곳에 누가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백악관이나 청와대의 건물보다는 백악관에 클린턴이 있고, 청와대에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그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지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구 안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복 받은 창조의 꽃입니다. 여러분이 창조의 완성이요, 창조의 영광인 것입니다.
교제하기 위해 만든 인간
하나님이 무언가 부족하거나 우리를 어떤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영원한 교제와 축복을 나눌 파트너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남자가 여자를 애기 낳는 도구로 쓰기 위하여 혹은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하여, 집에서 일하는 청소부로 쓰기 위하여 결혼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내를 혹은 남편을 만나는 것은 서로 이용하고 필요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기 위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인간창조 입니다.
인간창조를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해 2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인간의 창조는 창조의 절정이고 모든 피조물들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창조의 방법도 다릅니다.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창조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로 하셨습니다. 의논을 하거나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단독적으로 생각하시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인간됨의 가치와 영광이 있습니다. 2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이 의논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불쾌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의논하지 않고 무언가 지시하는 것입니다. ”왜 나와 의논하지 않았느냐”고 사람들이 말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의논하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싫은 일도 합니다. 아마 그것은 부부관계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끼리 회의를 했습니다. 의논하고 얘기하시고 논쟁하시고 토론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많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만들까, 어떤 존재로 만들까”를 의논하신 후에 하셨습니다. 여기에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동물은 죽으면 끝입니다.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하게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라고 말합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 분이십니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세분은 모두 다른 개체요, 인격이요, 기능을 가진 독자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하나로 존재하십니다. 또한 세 인격과 모습으로 존재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사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됨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사회의 특징은 일치입니다.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사람을 보내시고 인류를 만드셨는데 만일 인간에게 죄가 없었다면 분열도 없었을 것입니다. 미움과 분쟁과 전쟁과 싸움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 되지 못한 데서부터 미움이 생기고 분열과 전쟁이 생기고 지옥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하나 되고, 교회가 하나 되고,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북통일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이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것과 자녀가 집을 나가고 부모님을 멀리 보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가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계획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였습니다. 유물론이나 무신론과 같은 관점에 따라 인간에 대해 해석하는 것이 다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과 운명은 두 문장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어진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의 성품이 인간 안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고 동물과 동일한 본능이 있지만 신적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당하게 주장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인간들이 동물처럼 살아갑니다. 인간의 선의 본능을 동물처럼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윤리나 도덕을 모두 버리고 동물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 인간을 무차별로 죽이게 하고 고문해도 괜찮고 인권을 유린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동물일수도 있으며 이용가치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경제적인 동물에 불과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면 가치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있고 똑똑하면 존경받을 가치가 있고 좋은 환경에서 먹고 살아도 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들이 나중에 극대화 되면 원자탄을 터트리게 되고 식량전쟁을 하는 등 엄청난 재난들이 벌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을 믿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이 엄숙하고 거룩하고 놀라운 인간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다고 해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내면적인 모습이며 하나님의 모양은 하나님의 외면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물질로 된 사람처럼 키가 얼마이며 무게가 얼마인지 측량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것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형상 회복위해 오신 예수님
그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영원히 잃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모양과 형상이 모두 파괴되어 그저 동물처럼 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시켜 주셔서 인간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나누게 될 성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피와 살을 뜯어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짐승처럼 살지 마십시오. 개띠니, 말띠니, 호랑이띠니 하는 것은 ”나는 개같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려는 노력보다는 형이하학적이고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저질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데 익숙합니다. 여러분, 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욕할만한 인격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입에서 기도와 찬양이 나오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더러운 것을 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짐승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귀하고 거룩한 존재입니다. 진주를 개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석 중에 보석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 진주를 돼지우리에 넣어 짓이겨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짐승처럼 살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으면 자기와 동일하게 생긴 아이를 낳습니다. 자기의 형상이 그 아이에게 있습니다. 형상은 사진을 찍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나에게 사진 찍듯이 찍어 놓은 것이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내 얼굴에는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보면 하나님을 본 것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본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얼굴에서 마귀가 보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얼굴에서 개가 보이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예수님을 발견하고 천국이 생각나는 축복이 여러분의 얼굴 속에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만들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유전인자가 계속 세대에 이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유전인자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왕은 왕같이 살아야 합니다. 왕이 거지같이 살면 안 됩니다. 기품이 있는 사람들은 걸음걸이부터 다릅니다. 교회를 걸어 나가실 때는 모두 그렇게 걸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모든 고민은 홀로 다 지고 자살할 것같이 걷지 마시고 어깨와 가슴을 펴고 하늘나라의 왕자와 공주같이 미소를 짓고 멋있고 고상하게 걸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사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모양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잘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분의 형상을 알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 모습
또 한 가지 방법은 ‘나’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도덕적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고 내 마음에 사랑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사랑이 있고 내가 진리를 사모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거룩을 사모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런 도덕적 성품들은 짐승에게는 없습니다. 동물은 상상력이 없습니다. 인간만이 무한한 상상력을 갖습니다. 인간은 미와 예술을 추구합니다. 동물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은 자기가 아름다워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무한한 상상력과 아름다움과 예술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언어가 있습니다. 동물은 자기의 의사소통의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극히 원시적입니다. 인간은 고도의 언어로 의사전달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에게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존재인 것은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하갈이 도망을 갈 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고 계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듣고 계신 분입니다. 시편 94편 9절 말씀을 보면 ”귀를 만드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며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동일한 눈을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보고 계시며 우리와 같은 귀를 가지지 않았어도 들으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모양대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냄새도 맡으십니다. 노아가 홍수가 다 끝난 후에 하나님께 번제물을 태워 제사를 드렸을 때 ”향기를 흠향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번제의 냄새도, 기도의 향도 맡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 뼈의 힘줄을 쳤다는 말이 창세기 32장에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오셔서 치시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십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눈을 만지면 눈을 뜨고 죽은 자에게 손을 대면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지십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안수하십니다. 안수하실 때 손이 펴지기도 하고 상한 마음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을 까요?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하면서 다스리고 통치하도록 우리를 관리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도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는 분이나 하수에 오물을 마구 버리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구의 관리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의 환경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때문이며 우리는 동물을 양육하고 세상을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육축과 동물과 지구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책임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사명입니다. 인간이 그저 애기 낳고 돈 벌고 잘 살고 쾌락을 느끼며 동물같이 살라고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이 지구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책임을 주셨습니다. 지구 관리는 못하더라도 집 관리라도 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청지기로 부름받은 인간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는데 히브리말로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란 남자와 여자를 의미
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여자를 학대하고 때리고 애기낳는 도구로 생각하고 성욕구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물질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왜 짐승처럼 생각할까요? 왜 여자를 때릴까요? 저는 우리 교회에 여자를 때리는 남자가 하나도 없기 바랍니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 인간입니다. 남자 없는 여자 없고, 여자 없는 남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이며 원칙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죄를 지은 인간들이 얼마나 이 원칙을 바꾸었는지 모릅니다. 제일 나쁜 것은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을 바꾼 것입니다. ‘호모’와 ‘레즈비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이고 여자는 여자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는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여자는 그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입니다. 인간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원리와 질서대로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가정을 만들어야 하며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과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은 사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저 놀고먹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도 일하십시오. 인간은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명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는가에 대해 28절에 나와 있습니다. 복을 주셨습니다. 그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지구는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있고 살 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땅을 잘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표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동물도 인간을 위한 음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환경보호가 지나쳐서 우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지금까지 그저 ‘좋았더라’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31절에서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완성이기도 했고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 그대로 회복되어 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1
참고 :
땅의 창조 (창 1:9~13, 24~25) <창세기 강해 5>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창세기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시작하면 창세기는 문을 엽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창조의 놀라운 신비와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는 천지창조에 대해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합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졌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날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도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곧 능력입니다. 둘째 날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시고 셋째 날 하나님은 땅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늘을 만드셨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땅을 만드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땅은 물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물에서 하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구에는 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습니다. 하나의 물은 하늘 위로 올라갔고 하나의 물은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사이의 공간을 궁창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대기권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9절은 하나님께서 땅을 만든 현장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땅으로 내려온 물은 지구를 덮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지구는 물이 덮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셨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물에게 하나님이 명령합니다. ‘물은 한 곳으로 모여라’ 이 물이 한 곳으로 모인 곳이 바다요, 물이 없어지고 드러난 곳이 땅입니다. 흐르던 물이 어떻게 한 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었을까요? 물의 속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한 곳으로 이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사건을 구약의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 한곳 모으고 홍해 가르시는 하나님
모세를 따라 애굽을 나온 수십만의 이스라엘 백성이 부딪힌 것은 바로 홍해였습니다. 마음이 변한 바로가 군대를 보냈고, 바로의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기 위해 뒤쫓아 오고 있었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 앞에는 홍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홍해를 육지같이 가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졌을 때 무엇이 생겼을까요? 물 벽이 생겼을 것입니다. 물 벽이 생겼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다 사이에 길이 생겼습니다. 만약에 물 벽이 생기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물을 말려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말린 후에 건넌 것이 아니라 물이 갈라진 곳을 지나갔습니다.
분명히 물 벽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고 그 뒤를 애굽 군대가 쫓아 왔을 때 다시 물을 흩으셔서 그들은 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을 한 곳으로 모이라고 했더니 한 곳으로 모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대하고 놀랍습니까? 우리는 작은 필름을 보고도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고 놀랍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은 땅이 깊이 파인 곳에 고였습니다. 그래서 드러난 곳을 땅이라고 부르고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땅이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베드로 사도가 증언합니다. 베드로 후서 3장 4~5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성경을 보면 재미있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하나님은 이것의 경계를 어떻게 만드셨을까요? 예레미야 5장 22절을 보면 땅과 바다의 경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계한을 삼아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흉용하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육지와 바다를 모래로 경계선을 삼으셨습니다. 욥기 38장에서부터 41장까지 읽어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오묘한 진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게 될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 -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시거나 빛을 만드실 때 중요한 원리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면 창조의 능력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 여러분에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 ‘말씀’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고 누구든지 그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내 종이 낫겠나이다’라고 말했던 백부장이나 ”주여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마리아처럼 저는 여러분도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 말씀으로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그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고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된 축복을 받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창조하실 때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것을 보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늘을 보고 좋아하셨고 땅을 보시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좋아하십니다. ”난 네가 좋아, 참 좋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빈말로만 좋아한다고 해도 좋은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대상이 바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지창조 중 셋째 날의 창조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우리는 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나눈다’입니다. 하나님이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밤과 낮을 만들었고 둘째 날 하나님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과 물을 나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날 하나님은 땅과 바다를 나누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눔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하나님과 세상을 구별하십시오
나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세상과 짝하고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구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를 택하십시오.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매일 지옥만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짝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과 짝하지 않습니다.
셋째날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실 때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를 맺는 나무를 만드셨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을 만드실 때 땅에서 자라나는 풀과 채소들과 나무를 만드셨는데 하나님은 드디어 생명체인 식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은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동물은 여섯째 날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비스럽고 재미있고 좋으신 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을 보면 감탄, 감탄할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체를 만드는 것도 특이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고 다음에 하늘을 만들어 대기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땅을 만들고 물을 나눕니다. 인간이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환경을 모두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풀과 채소와 과실을 만들 때에도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풀은 풀이요 채소는 채소요, 나무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혼돈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풀이 자라서 나무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나무는 나무대로 완성품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아담의 씨를 주어서 자라게 한 것이 아닙니다. 발전하고 진화하고 종을 만들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고기로, 하늘에 나는 새는 새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숭이와 사람을 혼돈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우리가 또 하나 발견하는 것은 바로 ‘종류대로’라는 말입니다. 채소를 종류대로, 나무를 종류대로, 새를 종류대로, 육축을 종류대로 하나님은 그 종류대로 완성품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섞거나 발전시키거나 진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셋째 날의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요, 조화의 하나님이요, 중용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됩니다. 땅을 만드시고 그곳에 여러 가지 동물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 드디어 동물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24절과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마지막 창조의 끝단계로 땅의 짐승들을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24절과 25절을 보니까 ‘그 종류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종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하등동물을 고등동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등동물은 처음부터 하등동물로 고등동물은 처음부터 고등동물로 만드신 것입니다. 변하고 진화하고 발전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 태초에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들에 핀 꽃들을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웅장함과 신비로움과 상상할 수 없는 창의력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창조의 능력이며 아름다운 신비이며 기막힌 조화입니까?
우리는 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의 모습들을 고린도전서 15장 38절~41절에서 더 놀라운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체를 주시고 종자를 주셨습니다. 모두 육체이지만 모두 같은 육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새의 육체가 다르고 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모두 고깃덩어리이지만 하나님이 만드실 때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육체는 모두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섞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짐승도 되고 짐승이 인간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물사관입니다. 인간을 하나의 경제적 동물로 밖에 보지 않습니다. 인간을 하나의 물질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을 물질로 평가합니다. 내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 없이 인간을 죽입니다.
인간과 동물은 섞여질 수 있다는 착상에서 인류비극 시작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짐승처럼 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종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이 짐승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인간은 하나의 육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유익의 도구, 경제적 활동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인간은 쾌락의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은 동물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안에 짐승이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악을 가져오는 것입니까?
이것이 인간과 동물은 섞여질 수 있다는 발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각기 종류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죽음이 없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인간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창조의 모습을 회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들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에는 해의 영광이 있고 달의 영광이 있고 수천억 개의 별들의 영광이 따로 있습니다. 얼마나 창조의 신비가 놀랍습니까? 우리는 동물과 같은 육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 땅의 형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체는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특권이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십시오. 짐승처럼 살지 마십시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개같이 사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뱀처럼 천하고 추하게 삽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속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띠’입니다. 개 띠니, 호랑이 띠니 하는 것입니다. 절이나 산에 가 보십시오. 모두 짐승의 형상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모두 짐승으로 덮여 있습니다. 윤회설이 가짜인 이유는 사람이 다시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이 되었다가 또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이 합쳐지면 더러워집니다. 지옥과 천국이 합쳐지면 지옥이 됩니다. 짐승과 인간이 합쳐지면 짐승이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식을 결혼시킬 때 사주보고, 띠를 봅니다. 그것은 ”나는 짐승이요” 하는 소리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주셨습니다. 인간은 동물이 아닙니다. 원숭이는 원숭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된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동물과 식물과 해와 달과 별과 우주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라고 인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짐승처럼 살지 마십시오. 인간답게 사십시오. 동물적인 여러분의 본능을 예수의 이름으로 꺾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이것이 창조의 축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새롭게 회복되게 하여 주시사 우리 안에 온전한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4.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80
참고 :
하늘과 바다의 창조 (창 1:6~8, 20~23) <창세기 강해 4>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셨습니다. 첫째 날 창조하신 것은 빛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맨 처음 창조한 것이 빛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다른 것보다 먼저 빛을 창조하신 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은 놀라우신 분이시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궁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둘째 날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수천 억개 별들 중에 지구를 택하셔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달나라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화성에서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구에 생명을 주시고 사람을 창조하시기 위한 작업을 하셨습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땅, 바다, 공기 등의 환경을 만드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수면 위를 운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준비하신 후 일을 하십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습니다. 빛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넷째 날에 만들어집니다. 둘째 날 하늘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다섯째 날 하늘에서 나는 새들을 만드셨고 셋째 날 하나님은 땅과 바다를 만드시고 땅에서 사는 동물을 여섯째 날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창조의 절정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관리하도록 책임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 요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둘째 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늘을 만드셨고 궁창을 만드셨는가를 성경을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6~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날이니라”
오늘 6~8절 말씀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것은 빛을 창조할 때처럼 하나님은 말씀으로 하늘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가라사대 ”궁창이 있으라”고 하시매 그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라고 하셨을 때 빛이 창조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말씀 자체가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궁창이 있으라 하시자 궁창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 모두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말씀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입으로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록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그것이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창조의 신비와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씀을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자기 부하가 중풍 병에 걸렸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백부장이 병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래, 내가 네 집에 가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제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나이다. 저도 부하가 있는데 부하더러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합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예수님은 사람을 보고 좀처럼 놀라지 않는 분이신데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놀라시며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백부장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대로 하인이 나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의 능력이 백부장에게 임한 것처럼 오늘 여러분에게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또 한사람을 기억합니다.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처녀였을 때 예수님을 잉태하게 됩니다. 천사가 나타나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말하자 마리아는 ”제가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때 천사가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말씀대로 되리이다.”라며 순종합니다. 마리아는 이 말로 인하여 성령으로 잉태하는 축복의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하실 때에 궁창이 생겼습니다. 말씀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감하지 마시고 해석을 달리 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6일 동안 창조했다고 하면 그대로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셨다면 만드신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늘을 만드셨을까요? 오늘 6~8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궁창은 물에서 나왔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늘이 물에서 나왔을까요? 하지만 성경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물 가운데 있던 하늘
하나님께서 지구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 물을 주신 것입니다. 지구는 물이 감싸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물이 왜 그렇게 중요한 줄 아십니까? 물이 없으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은 곧 생명입니다. 땅은 없어도 되지만 물은 없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명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물로 지구를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심으로 생명을 불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다른 위성에 물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물이 없으면 생명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에만 모든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물을 주셨습니다. 그 물에서부터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어떻게 물에서 하늘을 만들 수 있습니까? 6절을 다시 보시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지구는 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곧 성령이 물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는 말씀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빛이 없는 상태를 ‘어둠’이라고 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것처럼, 물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물과 물이 나누어질지어다.”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하나님이 물과 물 사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물을 위로 올리고 다른 하나의 물은 밑으로 내립니다. 물과 물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양쪽으로 밀어내니까 그곳에 공간이 생겼습니다. 대기권이 되고, 땅의 물이 되었습니다. 물이 모여 바다가 되고, 물이 흘러 드러난 곳이 땅이 되었습니다. 위로 올라간 물은 층이 되어 유해광선과 추위를 막아주고 걸러주었습니다. 지금은 오존층이 그것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물층이 그것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합니다. 캄캄한 곳에 빛이 옵니다. 어둠이 두 갈래로 나뉩니다. 수증기가 자욱했는데 갑자기 두 갈래가 되어 하나는 위로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밑으로 떨어집니다. 위로 올라간 하늘이요 궁창입니다. 그 궁창이 인간을 쾌적하게 알맞은 온도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물층으로 하늘을 만드셨기 때문에 온도가 일정합니다. 그곳에는 번개도, 폭설도, 사막도, 지진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완전한 자연입니다. 지금 저희가 살고 있는 죄가 가득한 세상도 이토록 아름다운데 죄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성경에는 하늘에 대해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숨쉬며 살 수 있는 하늘과 또 하나는 ‘하늘의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과 우주와 행성들이 있는 우주를 말할 때 성경에서는 ‘하늘들’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하나의 하늘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히브리서 9장 24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하나님이 계신 보좌가 있는 곳이 하늘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합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십니다. 대기권이 아닙니다. 은하계도 아닙니다.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니,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나를 위하여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게 하신 분이 바로 여러분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역대하 2장 6절 이하를 보면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관대 어찌 능히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었지만 짓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 솔로몬이 지었습니다. 솔로몬이 집을 짓고 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집보다 크신 분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 집은 다윗과 약속하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지은 집이오니 이 집에서 기도하는 것은 다 들어주십시오. 죄인이 와서 기도하면 용서해 주시고, 병든 자가 와서 기도하면 병을 고쳐주십시오. 지진이 나고 기근이 오고 땅이 황폐케 될 때 비를 주시고 응답해 주십시오. 전쟁이 생겼을 때 그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이방인이 와서 기도할 때도 들어 주십시오. 하나님, 여기서 하는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돌아보옵소서.”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용기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온누리 교회에만 계시겠습니까마는 이 제단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다 들어주옵소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창공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분입니다. 인간을 제일 나중에 창조하십니다. 시집 장가보낼 때 다 준비해 놓으시고 마지막 날 결혼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를 선택하시고 물을 주시고 빛을 주시고 하늘을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새를 주시고 땅을 만드시고 고기를 주시고 식물과 동물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 동물을 만들고 난 후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6절과 7절을 한번 다시 읽어보십시오. 궁창 위의 물은 올라갔습니다. 그 물이 언제 쓰였는지 아십니까? 대 홍수 때입니다. 바다, 지하수, 샘물이 터지고 하늘의 물이 쏟아졌습니다. 위에 있는 물 층이 터졌기 때문에 홍수가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존층이 파괴된다는 경고를 듣고 있습니다. 오존층이 파괴되면 외계로부터 오는 유해광선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했던 것이 물층이 깨진 것이었습니다. 오존층보다 더 완벽하게 지구를 보호했던 것이 물층이었습니다. 물층이 깨지면서부터 사계절이 생기고, 태풍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연대에 대한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대홍수 이전에는 사람들이 8백세, 9백세를 삽니다. 그러다가 노아시대에는 3백, 4백세를 살고 시간이 흐를수록 수명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러다가 70~80세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인간의 시간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영원한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준비를 하시되 차근차근 순서를 따라 하십니다. 결국 창조의 절정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하늘을 만드시고 대기권을 만드시고 빛을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20절을 보시면 하늘을 나는 새를 만드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이 지상에 사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물에서부터 번성합니다.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까? 물이 좋은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물이 깨끗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어서 물을 오염시켰습니다. 물만 다시 살아나면 그 나라는 살아납니다. 건강도 살아납니다. 이것의 물의 철학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모든 물이 세계에서 제일 깨끗한 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염시키지 마십시오. ”물들은 생물을 번성케 하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리고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숭이는 원숭이, 사람은 사람
21절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바다에 큰 물고기를 집어 넣으셨습니다.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로 된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큰 물고기를 만드셨습니다.
최초로 나온 짐승이 큰 물고기입니다. 굉장히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공룡이 살았던 것을 압니다. 바다에는 고래보다 큰 물고기가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없습니다. 요나가 물속에 빠졌을 때 요나를 삼킨 것은 큰 물고기였습니다. 진화론은 세상에서 가장 그럴듯한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원숭이는 처음부터 원숭이였고 사람은 처음부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다를 수 있지만 사람이 다른 곳에서 진화되거나 다른 모습으로 진화된 것이 아닙니다.
기린은 누군가를 그리워해서 목이 길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처음부터 목이 길었습니다. 얼룩말은 얼룩무늬를 열심히 봐서 무늬가 생겼을까요? 아닙니다. 원래 무늬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있는 그대로입니다.
21절을 보면 처음부터 하나님은 큰 동물은 큰 동물대로, 작은 동물은 작은 동물 대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진화하거나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이 여기까지 진화되어 왔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진화하겠습니까?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좋다”라고 하십니다. 왜 절망하십니까? 왜 포기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 용기를 가지십시오. 우리는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미가 있는 존재입니다. 비참하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22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식물과 동물과 모든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아이를 낳는데 고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희 형제는 여섯입니다.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지구가 인구문제를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될까요? 주님이 오실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원이 없다, 뭐가 없다 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사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십시오. 물을 깨끗하게 만들며 사십시오. 내가 살고 있는 땅이 생명으로 가득찰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요즘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에 좋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IMF다’, ‘실직이다’, ‘부도다’ 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6. 25도 겪었고, 보릿고개도 겪었고, 기가 막힌 세월을 겪은 민족입니다.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창조의 능력과 축복이 사랑하는 성도들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 민족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1998. 3.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79
참고 :
빛의 창조 (창 1:3~5, 14~19) <창세기 강해 3>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주의 주인이라는 선언으로부터 성경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시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피조물인 우리에게 시간은 선물입니다. 그 시간이 영원하면 영생입니다. 물질도, 인간도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만드시고 그 물질을 둘 수 있는 공간도 만드셨습니다. 1천억 개의 별이 마음대로 운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2절에서는 거대한 우주공간에서 우리를 하나의 별로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구입니다. 이 우주 공간에 천억 개가 넘는 별들이 있지만 오직 지구에만 생명을 주셨습니다.
지구가 달이나 토성과 목성처럼 생명이 없고 그저 하나의 물질로 있었을 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있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직은 빛이 없기 때문에 흑암 중에 있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공허하고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돈했습니다. 다른 별들처럼 지구는 하나의 물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 사람과 생명이 살 수 있는 땅을 만들고 대기권과 물을 주시고 공기 등에 산소의 적당량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병들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일을 하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식물이나 동물을 창조하기 전에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 주셨습니다. 수천억 개의 별 중에 하나의 별에 관심을 가지고 생명을 주었다는 사실은 참으로놀랍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 다른 위성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습니다. 별이 많은 것은 확인되었지만 생명은 지구에만 있습니다.
창조와 구원의 원리
이 지구상에 수십억의 인류가 있는데 왜 하필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온누리교회에 나오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수많은 별들 중에 한 개의 별에 생명을 주신 것처럼 놀라운 기적입니다.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내가 똑똑하고 잘났거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운행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신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 있는 땅에 오셔서 알을 품듯이 운행하시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신 것처럼 성령님은 여러분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믿고 축복받은 자녀가 되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와 내가 구원받은 원리는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미리 보내어 준비하시고역사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백년 전에 이 땅에 선교사가 왔지만 그전에 이미 중보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당의 후손들인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둠의 자식으로 소망이 없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이처럼 엄청난 축복을 주시어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고 그 분의 이름을 노래하고 선전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 1절에서는 천지창조의 선언이 있고 2절은 성령님이 오셔서 운행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이제 3절에 이르면 창조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 신약의 성경구절 하나가 있는데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장 3절의 중요한 주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에서 말씀은 무엇일까요?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빛입니다. 하나님은 빛으로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합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에게는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동일하게 임하게 됩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말씀의 형태로 존재하십니다. 이 생명 안에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은 사람들에게 비춰졌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를 거부하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런 묵상을 통해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그 말씀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씀하신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말씀을 알게 되고 그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만나게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가게 되고 그 영원 안에 있는 빛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함축되어 포함된 말이 바로 창세기 1장 3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입니다.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 성자하나님을 통하여 이 우주의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 절에서 배우게 3 되는 사실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과 동일한 형태를 지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도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개념이 없다면 입을 만들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귀를 만드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눈을 만드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은 아니시지만 그분은 들으시고 말씀하시고 보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의 형편을 보고 여러분의 기도를 듣고 어렵고 힘들 때 격려해주시고 축복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가슴을 만드신 하나님은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개념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철학이나 신이 아닙니다. 그 분은 나를 사랑하셔서 보고, 듣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새로운 사실은 ‘말씀은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성경에 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자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능력들과 지혜와 영감을 얻을 것입니다. 말씀의 거룩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쓰는 단순한 의사전달이나 대화의 수단의 말이 아닙니다.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씀 안에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조의 능력과 영감들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있는 빛에 대해 우리는 자연과학적인 빛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빛은 태양입니다. 태양이 없다면 빛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발전소를 통해서 빛을 만들어 쓰고 있는 전기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되면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적외선과 자외선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하는 빛의 종류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창세기 1장 3절에서 말하고 있는 빛이 아닙니다. 하늘의 별과 달과 발광체들은 첫째 날이 아니라 넷째 날에 만드셨습니다. 14절부터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어마어마한 우주공간에 전등불 하나 달아놓은 것이 태양입니다. 지구에는 생명을 주시고 태양을 전기불처럼 사용하신 것입니다. 태양에 빛이 있습니다. 빛이 있다는 것은 그림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이 비췰때 어떤 물질로 차단하면 차단된 곳에는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태양이 나를 비취면 내 뒤에는 그림자가 생깁니다.
이것이 동양에서 말하는 음양설입니다. 음양이론으로 우주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음이나 양이 아니고 빛과 그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태양에는 음양의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태양은 굴속에 들어가면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굴속에도 바다 속에도 우주 끝에도 그 분의 빛은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빛입니다.
참으로 오묘한 창조의 원리
따라서 태양의 빛과 창세기 3절에 나오는 빛은 다릅니다. 빛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어 어둠에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지구를 중심으로 달이 돌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깁니다. 태양이 비취지 않는 곳을 밤이라고 말하고 태양이 비취는 곳을 낮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부터 징조가 생깁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해가 집니다. 사계절이 존재합니다. 자전과 공전이 있기 때문에 24시간과 년 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위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인간을 만들어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살 수 있도록 창조의 중심으로 세우셨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시고 넷째 날에는 빛을 낼 수 있는 것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 하늘과 바다를 만드시고 다섯째 날에는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 땅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에는 땅에서 살 수 있는 모든 동물과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빛과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후에 그 곳을 채우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합니다. 그리고 나서 안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일하고 쉬도록 만드셨습니다. 육일 동안에는 세상에서 일하고 제 칠일에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일날에도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건강과 리듬에 무리가 옵니다. 또 밤에는 자고 낮에는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잡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죄는 창조의 원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의 생명체를 파괴합니다. 환경오염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빛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설이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있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3절 이전에는 어두움이 있습니다. 그곳을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습니다. 어두움에 빛을 비취라고 하시던 하나님이 빛의 영광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두시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더럽고 치사한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거룩과 영광의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거룩과 성령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역대하 7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은 후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에 있는 모든 번제물을 태운 후에 성소에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육이 아니시기 때문에 빛으로 임하십니다. 성전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제사장이 섬길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고 질병이 떠날 것입니다. 악한 세력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앞에서는 존재할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영광의 빛에 참예한 자들그 영광의 광채를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위하여 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사십일을 주야로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이 쓰인 돌판을 들고 내려올 때 사람들은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수건을 씌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다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에 빛이 납니다. 요한1서 1장 5절을 보면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태양빛에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전기불도, 촛불도 끌 수 있지만 하나님의 빛은 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빛입니다. 이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빛을 본 또 한 사람은 바로사도바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길을 가던 중 다메섹도상에서 한 빛을 만나게 됩니다. 그 빛은 여러분에게도 임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빛으로 오십니다.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 어두운 생활을 청산하고 습관들을 끊게 해 주시고 빛으로 오셔서 역사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변형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에 대한 모습을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그 옷은 빛과 같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빛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1장 12절부터 16절에 또 나타나고 있습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런 모습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머지않아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빛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한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결혼한 남녀가 임신을 해서 해산의 고통을 거치고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좋았더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 때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을 생각하고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겠습니까? 절망이나 좌절하는 것은 창조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고 ‘좋다’고 말하는데 여러분이 ‘난 죽을 꺼야’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일로 위대하신 창조의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자살하려고 했던 마음을 가졌던 분들은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고민을 크게 보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의 고민은 십자가 앞에서 보면 결코 크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잊었기 때문에 분하고 억울하고 죽을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십니다. 지구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보다 더 영광스러운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뻐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시고 좋아하셨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좋아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받아주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78
참고 :
성령님께서 운행하시다 (창 1:2) <창세기 강해 2>
창세기는 감탄사로 시작됩니다. 좋은 것을 보면 우리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감탄을 하게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니...”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성경은 지식이나 정보, 교훈을 위해 쓰인 교과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감격과 기쁨과 축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책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설명이 아니라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따지고 논쟁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논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경배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분은 예배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무릎 꿇고 나아가 기도하며 찬양하며 죄를 고백할 때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고 고백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에게 창세기는 문을 엽니다. 자기를 공개하기 시작합니다.
창조무대에 주인공으로 나타나신 성령하나님
1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웅장한 선언을 한 후 구체적으로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창세기는 잘못 발을 들여 놓으면 논쟁으로 끝나고 맙니다. ”과학적이다, 아니다, 진화론이다”라고 논쟁을 하게 되면 창세기의 진정한 의도는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드시고 어떻게 형성하셨는가에 대해 말씀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즉 성부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 성자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하나님이 창조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나오고 있는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분이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켜 ‘엘로힘’이라는 복수형을 씁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류에 사회를 주신 것도 하나님이 사회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1장 17절을 보면 ‘예수님’이 창조의 현장에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세기 자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로새서에 오면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다고 확실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창조 전에 계셨던 분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사역에 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만 동참한 것은 아닙니다. 2절을 보면 성령 하나님도 천지창조사역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광활함
”땅이 혼돈하고...” 땅은 지구를 의미합니다. 최초의 지구 상태를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천문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은하계는 1천억 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1천억 개인지, 1천5백억 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계산할 수 없고 한계를 지을 수 없을 만큼 무한합니다.
사실 하늘위에 별이 얼마나 있는지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려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과연 이 우주는 끝이나 한계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만물은 인간의 상상력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크고 엄청난 것입니다. 제가 안식년 때마다 즐기는 것은 하늘의 별을 보는 것입니다. 시골에 가서 보면 바로 내 머리위에 별이 떨어질 듯이 보입니다. 그 많은 별들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이 창조의 위대함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과학의 잣대로는 모두 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잣대는 하나님의 창조보다 더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에는 이렇게 시편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감탄사 외에는 없습니다. 창조의 끝에는 감탄사가 있을 뿐입니다. 과학으로나 학문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을 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설명할 수 없고 마음으로는 창조를 느낄 수 없습니다.
무인우주선을 보내거나 사람이 있는 우주선을 달나라에 보내어 전송되어 온 달 표면 사진에는 아무 생명체도 없었습니다. 화학요소와 물질과 원자와 분자로 구성된 거대한 물체에 불과했습니다. 분화구 같은 것이 있었지만 생명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먼지만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좀 더 과학이 발달되어서 탐사선을 화성, 토성, 목성까지 보내서 사진을 찍어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은 빛과 물 같은 요소들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구도 다른 모든 별들처럼 생명이 없었습니다. 물도 빛도 생명도 없는 하나의 물질이었습니다. 분자와 원자로 구성된 일정한 화학요소들, 수소라든지 이런 물질일 뿐이었습니다.
지구의 모습을 세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혼돈을 너무 철학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카오스니 코스모스니 ‘ ’ ‘ ’ 생각하다보면 본래의 뜻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저 혼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혼돈이라는 말이 ‘공허’라는 말과 함께 있습니다. 영어로 설명하면 ‘형태가 없다’는 말입니다. 형태가 없기 때문에 질서가 없고 자연 물질 그대로 있는 것뿐입니다. 지구의 최초의 모습은 지금의 달처럼 생명이 없이 물질만 있었습니다.
지구의 모습은 혼돈과 공허였습니다. 어두움만 있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생명체가 있기 전에는 무질서였습니다. 그저 물질일 뿐인 혼돈과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어두움만이 있었습니다. 달나라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이 되면 캄캄한 어두움이 달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지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요즘 컴퓨터를 배우고 있습니다. 디스켓은 구입해서 바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먼저 포맷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입력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디스켓을 포맷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지구도 생명이 없을 때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깔려 있는 하나의 물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호흡이 지구를 감싸
흑암과 혼돈과 공허가 있는 달나라와 같은 지구에 ‘하나님의 신’이 찾아왔습니다. 성령님이 찾아와서 지구를 감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바로 ‘루하흐’인 바람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운이 지구를 돌았다는 것입니다. ‘루하흐’는 ‘바람, 숨, 호흡’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즉 호흡이 공허하고 흑암이 있고 혼돈이 있는 지구를 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움직였다’ 혹은 ‘흔들었다, 진동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했다는 말은 물체의 위에서 영향력이나 기운을 내리쏟았다는 말입니다.
이 뜻을 조금 더 원어적으로 이해해보면 암탉이 계란을 품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란을 그저 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온도 안에서 굴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이 지구를 감싸고 하나님의 생명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찬송가가 생명을 만들어 줄 수 없습니다. 생명은 생명이 있는 분으로부터 옵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를 본 일이 없이 외롭게 자랐습니다. 그가 커서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부모를 잃어버렸을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돌에서 나오거나 계란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서 태어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지만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나왔습니다. 그분이 예수입니다.
여러분, 이 우주에 1천억 개의 별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생명이 있는 별은 지구 밖에 없습니다. 가까운 달이나 다른 별에는 왜 생명이 없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기를 달에는 외계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미래에는 우주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요즘 영화들의 주제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어떤 위성에도 생명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물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수면에 운행하다”라는 말과 ”물과 물위를 나눈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별들 중에 하나님의 생명이 지구라는 별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지구 주변을 운행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이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의 신인 성령님이 땅과 하늘을 만들고 동물과 빛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셔
창세기에는 논쟁이 없습니다. 믿음뿐입니다. 지구를 하나의 계란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미닭이 계란을 품고 있듯이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럽고 엄청난 사실입니까? 이것은 마치 생명이 어머니의 태속에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수정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서 아이의 심장은 뛰고 오장육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뇌가 그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낙태에 대한 것을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태아는 6개월이 지나면 완전히 사람의 형태가 이루어집니다. 낙태는 살인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산 사람과 똑같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나이법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서양나이는 태어난 후부터 계산 하지만 우리나라는 임신하면서부터 계산합니다. 그 아이가 태속에서 숨 쉬고 자라다가 어느 날 태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듯이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3절에서 빛이 있으라고 할 때 아이가 ‘으앙’하고 태어나듯이 빛이 있게 된 것입니다.
죽은 영혼 살리는 생명의 영
우리는 2절의 말씀에서 더 깊은 진리를 묵상하게 됩니다. 첫째는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입니다. 창세기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접근하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천지창조는 성령님이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지구를 품고 생명을 불어넣어주셨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별에도 생명이 없지만 지구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성령을 받는 자마다 생명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성령의 생명의 영이 부활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생명의 영이 들어가게 되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며, 죽은 영혼이 다시 거듭나고 부활될 줄 믿습니다. 이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리스도 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며, 죽었던 우리를 살게 하시며, 기쁨이 있게 하시며,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살아있는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미온적인 이유는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타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차 있던 이 지구에 성령이 임함으로 생명력이 생기고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생겼던 것처럼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임하시면 생명이 임하고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성령님에 관심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성령님의 창조의 능력을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너무나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 믿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거지 별게 있는가?’라며 자기 수준으로 끌어 내립니다. 하나님을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의 영적 정도가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신앙은 아주 밑바닥일 수 있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성령과 생명은 따분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격, 기쁨, 확신입니다. 고난, 위기, 아픔, 어떤 실망과 죽음도 모두 이겨낼 수 있는 성령님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메시지에서 묵상할 수 있는 또 하나는 성령과 말씀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일 때 창조의 말씀 나와
이제 성령님께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가라사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능력과 기적과 감동이 없는 이유는 성령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빛이 있으라”하시면 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운행함이 없이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신비스러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심으로 생명이 들어가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없이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생각, 상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하한다면 그것은 지식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무릎 끓고 성령님을 받아들이고 성령님이 운행하심을 사모하고 성령의 운행하심이 내 영혼을 감싸고 있었을 때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묵상하면 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통찰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때 귀신들이 떠나갑니다.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심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과 말씀이라는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을 2절에서는 성령님을, 3절에서는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연구한다고 아기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묵상한다고 아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결혼해야 아기가 태어납니다. 똑똑하고 박사 학위가 있다고 혹은 부자라고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해야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란 그런 것입니다. 진리는 지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저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성령님이 흑암과 공허와 혼돈 속에 있는 지구를 운행함으로 말미암아 지구에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이 움직일 때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그 말씀이 능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창세기의 놀라운 비밀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성령님을 부어주시옵소서. 주여, 창조의 신비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3. 온누리신문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5277
참고 :
창조주 하나님 (창 1:1) <창세기 강해 1>
하용조
성경을 펼 때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말씀인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인간의 지성과 경험과 상식과 합리성으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은 분만 이 성경을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신 책인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에 충만해 있을 때 그 문이 열립니다. 비밀이 보이고 말씀이 드러납니다.
또한 성경을 공부할 때 기억해야 할 말씀은 마태복음 5장 18절 이하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했던지 이해하지 못했던지, 해석이 되던지 되지 않던지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다 응답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번 창세기 공부에 마음을 열고 정성과 뜻과 마음을 다하여 집중하시면 창세기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하나님의 음성들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첫 번째 책이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와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면 창세기를 여는 열쇠는 무엇입니까? 바로 1장 1절입니다.
‘선언’으로 시작하는 창세기
무슨 책이든지 서론이 있고 설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시작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선언이 있을 뿐입니다. 놀랍고 신비스럽고 권세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설명도, 변명도, 논리의 전개도, 설득도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선포가 있을 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놀라운 진리의 선포를 믿고 고백하면 창세기가 전부 열립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믿지 못할 것이 없고 의심할 것도 없습니다. 이 고백이 있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일도 간단합니다.
1장 1절의 말씀을 조금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태초에’라는 말을 빼고 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가 됩니다. 이 말씀을 더 줄인다면 ‘천지를’이라는 말을 빼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느니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압축해서 ‘창조’라는 말을 빼면 ‘하나님’ 만이 남습니다. 이 구절의 열쇠는 ‘하나님’입니다. 우주 만물과 사람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주 만물의 중심과 인생의 중심도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나를 만드신 것을 믿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선포합니다” 라는 고백으로 창세기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논쟁하는 책이 아닙니다. 세미나를 하거나 연구하는 책이 아니라 선포하는 책입니다. 창세기는 특이합니다. 하나님이 우구이시며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한마디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선포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1절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본문의 주어는 ‘나’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면 불행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될 때 축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모든 문제가 안개같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와 능력과 신묘막측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 중심의 축을 인간중심으로 바꾼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사탄에게 받은 유혹은 ”선악과를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최대의 유혹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조금만 권력을 가지고 높은 위치에 있게 되거나 남보다 돈이 많거나 똑똑하다는 말만 들으면 신이 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려는 유혹은 다른 사람을 종으로 만들려는 지배욕에서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싶고 명령하고 통치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 신이 되려는 유혹의 첫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 사상에서 가장 우리를 헛갈리게 하는 것이 휴머니즘입니다. 굉장히 멋있게 느껴지지만 휴머니즘은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인권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권이 우상이 되면 신권이 없어집니다. 인본주의가 있으면 신본주의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싫어합니다. 불의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을 싫어합니다. 정의로운 사람 옆에 있으면 자기의 불의가 비교되고 드러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을 절대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영접지 아니하더라”라고 말합니다. 빛인 예수 그리스도가 왔지만 아무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캄캄한 어두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거부하고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14편 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편 1절부터 4절을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
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계속해서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귀와 영광받기 합당한 하나님
그렇습니다 . 잠언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 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때에야 여러분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인생과 우주만물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세미나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책에 계시거나 도서관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배하고 찬양할 때 그분은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논쟁하고 따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그 분의 위대하심과 영원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의 거룩과 능력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여러 곳에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내게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너희에게로 가까이 가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자 여호와께 나아와 경배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릴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을 보면 네 생물이 나타납니다. 여섯 날개가 있는데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 이 생물들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던 24 장로들이 보좌에 계신 그분에게 면류관을 던지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그분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참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거룩이 나타나며,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뿐만 아니라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들이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흰 옷을 입고 보좌와 어린 양 앞에서 찬양하며 경배하는 놀라운 찬양의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인생을 만드신 그 하나님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 1장 1절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성령세례 받아야 창조신비 보여
창세기 1장 1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시간을 만드신 분이시며 시간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태초에’라는 말에 있습니다. ‘태초에’라는 말은 인간의 시간이 시작된 바로 그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있다는 말은 공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공간이 없는 시간은 없고 시간이 없는 공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 시간을 주셨습니다.
시간은 인간의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있을 것을 가리켜 ‘역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한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하나님 없이 만들어진 역사는 ‘인류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시간이 기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있습니다. 인간이해는 곧 시간이해입니다. 시간을 잘 이해할 때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게 칠십 혹은 강건하면 팔십의 생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잘 써야 합니다. 시간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사탄에게 준 사람들은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쓰고 잘 선용한 사람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간을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스러운 시간이요, 축복된 시간이요, 천년같은 시간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하고 파멸의 시간이 됩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어떻게 쓰이느냐 또는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주인이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지 않아야 합니다. 시간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과 접붙여질 때 영원한 시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영원한 시간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가운데 거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시간
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주 만물과 인생은 하나님이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도, 우리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소유권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갈등이 있는 이유는 소유권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 땅이라고, 내 이름으로 땅문서를 섰기 때문에 자신의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죽을 때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땅문서도, 기업도, 반지도 모두 놓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소유권이 아니라 위탁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끝날 때 잘 돌려주십시오. 어떤 사람은 빌리고 나서 영원히 주지 않으려는 분이 있습니다. 물질도, 시간도,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있는데서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력, 젊음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비웃으십니다. 인간의 법칙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존귀와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기계가 고장 났을 때 기계를 만든 사람에게 가져가면 금방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가면 바로 해결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높여드리십시오. 그 때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창조의 두 번째 뜻
창조’라는 말에는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창조라는 뜻은 없는데서 있게 할 뿐 아니라 만든 것을 통치하고 다스리시고 관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고 나서 부모역할을 다했다고 떠나는 무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부모의 눈은 반짝이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합니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고, 병이 나면 걱정하고, 학교에 보냅니다.
창조는 세상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관리하시고 통치하시고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분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도와주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부인한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할 뿐입니다. 태양을 인정하십시오. 지하실에서 나와서 밝은 태양 앞으로 나오십시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 걸어 나오십시오. 하나님께 가슴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기 시작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쏟아질 줄 믿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깊이 생각할 것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셨지만 그 창조의 과정 중에 성령이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령님을 만나면 창조의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십시오. 성령의 인치심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묘막측한 것을 내 안에서 느끼기 시작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을 보면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와 함께 섰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시간을 만드실 그 때에 예수님이 거기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천지창조의 원리는 예수님을 영접하셔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그 창조의 하나님, 우주를 만드시고 신묘막측하게 나를 지으신 그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가운데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 그 때 이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나는 이것을 선포합니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이럴 때 창세기는 열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논쟁과 의심은 사라지고 그 안에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이 이 창세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서론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질문 하나를 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혹은 여러분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혹은 ”하나님은 남자야 여자야?”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만들어졌다면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피조물일 뿐입니다. 창조자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그는 창조자이신 것입니다. 그는 영원 전에 계셨습니다. 영원 후에도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나 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남자와 여자가 다 있습니다. 그는 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그는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은 관념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기도하시면 응답해 주시는 그분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으십시오. 선포하십시오. 이 믿음을 가지고 창세기 여행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여기 머리숙인 당신의 종들에게 이 창세기의 1장 1절의 위대한 선포와 믿음이 있게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1998. 3. 온누리신문
창세기 1장의 빛의 존재와 의미
김홍석
창 1:3-5 (개역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흠정역)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나누시고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첫째 날이더라”
창 1:14-15 (개역개정)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흠정역)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밤에서 낮을 나누도록 하늘의 궁창에 광체들이 있고 또 그것들은 표적들과 계절들과 해(year)들을 나타내라 또 그것들은 하늘의 궁창에서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Point 1. 창조 6일 가운데 제4일에 태양 등 광체들이 창조되기 전의 빛인 창 1:3-5의 빛, 즉 창조 6일 가운데 첫째 날의 빛은 제4일의 빛과 다른가?
창조 6일 가운데 제4일에 창조된 태양이 있기 전에 지구를 비추던 빛은 태양 빛이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그 빛은 어디서 왔는가? 이에 대하여는 질문으로 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빛이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태양이 있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가 않다. 빛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지 태양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강조하시고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태양을 제4일이 되어서야 창조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제3일까지는 태양이 없이 빛이 존재하여 지구를 비추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태양이 지금 위치에서 지구를 비추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태양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구는 자전을 통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 역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 태양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제4일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제1일부터 그때까지 빛을 발산하여 지구를 비추었던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동일하게 기능하도록 태양을 만드시고 달을 만드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태양이 빛을 냄으로써 지구를 비추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비추어 온 것과 동일하게 기능하도록 나중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태양에게 일러주셨다. 태양은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도록 땅을 비추라(히.오르, 동사)고 소명을 받아 임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3-5의 빛(히.오르, 명사)은 태양 빛은 아니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태양이 바로 이 빛을 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그 기능면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듯하다! 왜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지구와 함께 창조하시지 않고 제4일이 되어서야 태양을 만드셨을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통하여 무엇을 교훈 받는가? 빛,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이나 모든 존재와 현상들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만유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계신다고 생각된다.
Point 2. 창 1:3-5 빛의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제 이러한 이해 위에 우리는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박사의 ‘빛’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 있고 친숙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된다. 헨리 모리스박사는 그의 저서 「The Genesis Record」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가져왔다! (중략)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요 1:1, 14) ”세상의 빛”(요 8:12)이시며, ”그 분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요일 1:5). (필자 주 : 헨리 모리스박사의 이러한 표현은 빛이 존재하게 된 것, 빛의 근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영혼을 밝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영적인 빛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상기시킴으로써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빛이 존재하게 된 근원 또한 태양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음을 각성하게 한다. 태양이 있어야 빛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빛이 먼저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빛이 나타나자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지구에 관한한 어두움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라 다만 빛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였다. 이어서 ”하나님은 빛을 낮(day)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마치 후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용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낮'(욤)이란 말을 사용하셨으며 그것을 '밤'이라 칭하는 '어두움'과 구별하시기 위해 '빛'으로 정의내리셨다.
낮과 밤을 구분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 사역을 마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필자 주 : 사실 이 첫째 날은 히브리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첫째 날이 아니라 하루 one day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하루’라는 시간 단위가 창조되고 정의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다음 날부터 이와 같은 하루하루가 지속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동일한 형식의 문구가 6일 간의 역사의 각 결론부에 반복해서 사용되어 있다. 따라서 첫째 날을 포함해서 엿새 동안의 하루하루의 길이는 동일했음이 분명하다.
첫째 날에서 시작해서 그날 이후로 계속 낮과 밤이, 다시 말해서 빛과 어두움의 시간이 반복해서 교체되어 나타났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반복적인 낮과 밤의 교체는 땅이 그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으며 태양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땅의 한 면에는 태양에 견줄만한 빛의 근원이 있었음을 분명히 암시해준다. 동시에 그러한 날들의 길이는 정상적인 태양일의 길이일 수밖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창조된 빛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선적으로 눈에 보이는 빛을 의미하는데 그 까닭은 어두움과 대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빛의 파동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필연적으로 전자기 스펙트럼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가시적인 빛 위에는 자외선 및 다른 모든 단파 광선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적외선 및 다른 장파 광선들이 있기 마련이다.(필자 주 : 電磁氣 스펙트럼 electromagnetic spectrum은 전자기파를 파장에 따라 분해하여 배열한 것이다. 일반적인 스펙트럼이 가시광선 영역에 대한 것이라면 전자기 스펙트럼은 보다 넓은 전자기파의 범위에 대한 것이다. 위키백과)
한편 전자기력을 활성화시키자 결과적으로 물질적인 우주의 동력화가 이루어졌다. 우주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유형의 힘과 에너지는 전자기력과 중력 및 핵력으로 구분되는데 이제 이 모든 힘들이 활성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