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마음이 변하시는 분인가?
(Contradictions : A Change of Heart. Does God change His mind?)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 3:6)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삼상 15:29)
이것과 같은 구절들로부터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 분의 본성과 성품은 변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러나 아래와 같은 다른 구절들에서는, 중보자의 탄원이나 백성들의 회개가 있었을 경우 하나님이 한 국가나 한 그룹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돌이키시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인가?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출 32:14)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렘 26:3)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렘 26:13)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렘 26:19)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3:10)
성경으로부터, 우리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sin)를 벌하셔야만 한다는 것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창 2:15-17, 롬 6:23). 그러나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은혜가 충만하시고 죄를 회개한 자들에게 자비와 용서가 한량없으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 두 특성 사이의 균형은 예레미야서의 이 구절들로부터 가장 잘 요약될 수 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렘 18:7–10)
표현된 감정들
다음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분으로 비난될 때 인용되곤 한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6)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삼상 15:11)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감정(emotions)이 없는 분이심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사실, 감정은 자주 의인화된 언어로, 또는 인신동감론적(anthropopathic, 신의 감정을 사람의 감정처럼 표현하는) 언어로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동과 감정을 사람의 행동과 감정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구절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던 인간들의 죄에 대해서 가지셨던 감정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 구절들은 ”나는 그것을 처음에 즉시 시행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것을 더 잘 이해했다고 생각했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나님은 불순종과 사악함에 대해 우리 모두가 죄에 대해서 가져야만 하는 반응으로, 한탄하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 또는 특성이 변하시는 분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실, 슬픔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은 그 분의 거룩하신 본성이다. 유한한 피조물인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결정과 관련되어 있는 중요성을 알고 있다. 성경은 그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에서 하나님의 가엾게 여기시는 마음은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 많은 인간들에 대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연민과 자비의 마음인 것이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 분은 개인 또는 국가의 행동에 대한 반응을 선택하시는 데에는 변하실 수 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1/05/contradiction-a-change-of-heart
출처 - AiG, 2009. 1. 5.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663
참고 : 4492|4608|4578|4540|4043|4480|4488|4452|4451|4450|4416|4413|4399|4387|3218|3166|3162|3065|3020|2805|2688|2530|2321|1793|1790|1756
노아 홍수 이전의 지명들이 이후에도 나타나는 것은
홍수가 전 지구적 파괴를 일으키지 않았음을 가리키는가?
(Contradictions: Location, Location, Location)
Bodie Hodge
창세기 6~9장을 읽을 때, 노아의 홍수는 전 지구적인 홍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홍수 이전의 지명들이 홍수 이후에도 지명이나 인명으로 등장하는 것은 성경의 모순인가? 예를 들어 표1은 가장 흔한 사례들을 나타내었다 :
표 1.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의 명칭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꽤 간단하다. 몇몇 실례를 사용하여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 자주 지명들은 전해져 사용된다. 예를 들어 일리노이 주의 베르사유(Versailles)는 정착민들이 켄터키로부터 일리노이로 이주하여 왔을 때, 켄터키 주의 베르사유로부터 이름을 따왔다. 그리고 이전의 켄터키의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베르사유로부터 따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베르사유에서 만난 적이 있었죠? 라고 묻는다면, 어느 베르사유입니까? 라고 물어봐야할 것이다.
2. 지명들은 자주 사람의 이름으로부터 붙여지곤 한다. 가나안(Canaan)이라는 지명은 노아의 손자인 가나안에서 유래하였다. 미조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St. Louis)는 프랑스의 왕 루이 9세(King Louis IX)로부터 그 지명이 유래했다.3. 간혹 사람들의 이름은 지명으로부터 유래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이름에 런던(London)이 들어간다. 이 이름은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부터 유래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볼 때, 어떻게 지명들이 홍수 이후에도 쉽게 전달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함의 손자는 하윌라(Havilah) 땅의 이름을 따라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구스(Cush)는 함의 아들이다. 그리고 앗수르(Asshur)는 셈의 아들이다. 노아, 함, 셈은 홍수 이전에 살았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이름들은 바벨탑 분산 이후에 이들 일부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의 지명으로 불려졌을 것이다. 구스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Ethiopia) 지역이고, 앗수르는 앗시리아(Assyria) 제국이 발원하였던 지역이다... 등등.
예를 들어, 만약 내가 템즈 강(Thames River)을 언급했다면, 많은 사람들은 즉시 영국 런던에 있는 유명한 강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 코네티컷 주와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도 같은 이름의 템즈 강이 있다. 정착민들이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만나게 된 강들을 그들이 친숙했던 강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던 것이다. 노아와 그의 후손들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 예상되지 않겠는가? 오늘날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도 에덴동산에 있었던 유명한 강들을 따라 이름 붙여졌을 것이다.
여기에 성경의 어떠한 모순도 없다. 단지 새로운 장소, 강들, 민족들을 이전에 사용했던 이름들을 다시 사용하여 이름 붙였던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3/23/contradictions-location-location-location
출처 - AiG, 2009. 3. 23.
아르박삿을 낳을 때의 셈의 나이에 대한 성경 기록은 오류인가?
(Contradictions : My Three Sons. Were Noah’s sons born when he was 500
as Genesis 5:32 says or not as stated in Genesis 7:6 and Genesis 11:10?)
Bodie Hodge
노아(Noah)는 홍수 이전에 세 아들을 두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창 6:10). 노아의 아들들은 모든 같은 나이가 아니었다. 창세기 5:32절부터 시작하여 보자.
”After Noah was 500 years old; he became the father of Shem, Ham and Japheth.” (Genesis 5: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 5:32)
이 구절은 노아가 그의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 500세, 또는 그 이상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과 같은 목록으로부터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노아가 500세 된 이후부터 아이들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주 자녀들의 목록은 가장 중요한 자녀로부터 시작한다(예. 창 11:26). (셈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가계가 이어진다). 우리는 창세기 10:21절과 9:24절로부터 각 자녀들의 상대적 나이(서열)를 알 수 있다.
”Sons were also born to Shem, whose older brother was Japheth; Shem was the ancestor of all the sons of Eber.” (Genesis 10: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창 10:21) (개역개정, 개역한글 등의 한글 성경은 야벳이 셈의 형이 아니라, 셈이 야벳의 형으로 번역하고 있다).”When Noah awoke from his wine and found out what his youngest son (Ham)had done to him.” (Genesis 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함)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 9:24)
창세기 10:21절은 야벳이 가장 나이가 많은 자녀였고, 노아가 500 살이었을 때 태어났던 자녀이었음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9:24절이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함은 가장 나이가 어린 자녀로서, 그의 아버지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했던 자녀였다.
그러므로 셈은 야벳과 함 사이에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창세기 7:6절과 창세기 11:10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셈은 노아가 500살 때에 야벳과 함께 태어난 쌍둥이 또는 세쌍둥이가 아니었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창 7:6)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 11:10)
따라서 노아는 (500세에 야벳을 낳았고) 홍수가 땅에 일어났을 때 600세 였고, 셈은 홍수가 일어난 2년 후에 100세 였다. 그러므로 셈은 노아가 502세 였을 때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셈은 백 세(노아 나이 602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는(창 11:10) 성경 기록은 오류가 아닌 것이다). 성경에서 함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함은 셈 이후에 태어났음에 틀림없다. 이처럼 창세기 5:32절은 노아의 모든 아들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그리고 다른 구절들은 그들의 탄생 순서와 나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9/02/02/contradictions-my-three-sons
출처 - AiG–U.S. 2009. 2. 2.
창세기 1장의 수 패턴
: 날(day, 욤)의 길이에 대한 결정적 단서
(The numbering pattern of Genesis : Does it mean the days are non-literal?)
Jonathan Sarfati
창세기 1장의 날(days)들은 히브리어로 보면 재미있는 패턴(형태)을 가지고 있는데, 영역본에는 종종 잘 반영되어있지 않다. 그 최초 날에 사용된 수사는 기수(cardinal number, 예를 들면 하나, 둘, 셋 ...)로서, יום אֶחָד (yôm echad, 욤 에하드, Day One)는 한 날(하루)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날들은 서수(ordinal numbers, 둘째, 셋째, 넷째 ...)로 수식되어 있다. 또한,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에는 정관사(ה, ha, 하, the)가 없고, 반면 여섯째 날부터 일곱째 날은 정관사가 붙여져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간의 문자적 번역은 ‘하루’,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그 여섯째 날’, ‘그 일곱째 날’이 된다.
이 패턴은 문자적 날(literal days)들에 반대하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 중의 선두주자인 휴 로스(Hugh Ross)가 제기한 논증들 가운데 하나를 무력화하는데 충분하다 :
”특별한 창조의 날들을 일일이 열거하는 데 있어서 문장들의 색다른 배열이 존재한다. 히브리어를 낱말 대 낱말로 번역한 텍스트를 보면, 다음과 같은 어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저녁이었고 아침이었다. 몇째 날” ... 그 낱말의 배열은 단순하고 평범한 표현을 분명히 벗어난 것이다. 이 구문론적 불분명함이 어떤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그 '날(day)'이 여기에서는 어떤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1]
앞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휴 로스는 그 구문에 대해 틀렸으며, 따라서 그의 논증은 붕괴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러한 주장은 히브리어에 대해 학식이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무모하게 해석했던, 그리고 허위인 것으로 판명된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2]
호주 장로교회의 교회사에 대해 박사 논문을 썼던 목사인 로렌드 와드(Rowland Ward) 박사는 창세기가 쓰여진 그대로의 역사라는 견해를 지속적으로 반대해온 사람이다. 그는 심지어 과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신뢰할 수 없는 책인, 무신론자인 이안 필머(Ian Plimer, 호주의 지질학자)가 쓴 책 ‘신을 위해 거짓말 말하기(Telling Lies...)‘에 대해서도 신뢰를 부여하고 있었다.[3] 와드는 휴 로스보다 더욱 궤변적이다. 그리고 정확한 패턴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창세기의 기록된 그대로의 해석을 반대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에 ’골격가설(Framework Hypothesis)‘을 주장하였는데, 그 가설은 세속적 과학(진화론)에 비굴하게 항복하여 변형시킨 견해이며, 또한 빈약한 해석에 의한 불일치로 와드 자신이 썼던 것처럼, 창세기 1장의 날들은 실제로는 시대(ages)들로 해석되어야함을 요구하고 있는 이론이다.[4] 그러나 골격가설은 이미 폐기처분되고 있는 중이며[5, 6], 따라서 이 글은 오직 수 패턴(number pattern)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와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들 특징들은 단지(mere) 사건들의 연대기적 순서를 강조했다면 기대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cf. 민수기 29:17, 20, 23, 26, 29, 32, 35).”[7]
성경(cf. 눅 3:1-2)에 기록되어 있는 연대기(chronology)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연대기가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면, ‘단지(mere)’라는 단어도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서 아래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와드와 같지 않게 히브리어 전문가들은 그 패턴이 실질적으로 문자적 날들의 경우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일리노이주의 콩코디아 대학(Concordia University)에서 신학 및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는 앤드류 스타인만(Andrew Steinmann) 박사는 창세기의 패턴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그는 ‘욤 + 수 = 문자적 날’이라는 규칙에 예외는 없으며, 그 패턴은 창세기의 날들은 24시간의 날들임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주장하였다 :
”만약에 אחד (에하드는 first가 아니라 one이라는 의미)가 기수로 사용되었다면, 창세기 1:5절의 설득력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 대답은 ‘밤’, ‘낮’, ‘저녁’, 그리고 ‘아침’이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을 것이다. 창세기 1:5절은 그 날의 주기를 시작하고 있다. 빛이 창조됨으로써 빛과 어둠은 하나의 주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낮'과 '밤'이라는 명칭을 주셨다. 저녁은 빛/낮으로부터 어둠/밤으로의 전환이다. 아침은 어둠/밤으로부터 빛/낮으로의 전환이다. 하나의 저녁을 가지고 하나의 아침을 가지는 것은 온전한 하루를 가지는 것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창세기 1:5절은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 저녁 + 아침 = 하루(evening + morning = one day).
그러므로 매우 비범한 문법적 구조의 사용에 의하여, 창세기 1장은 하루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구절에서 특별히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이 한 절 내에서 '날(day)'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나타난 의미는 하루의 주기 동안에 일광(밤의 대비로서)에 의하여 조명되는 시간(낮)이다. 그 두 번째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일광과 어둠의 시간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기간(날)이다.
그것은 그 본문이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져서, 주의 깊은 독자들은 그것을 '첫째 날'이라고 읽을 수 없도록 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신에, 정관사의 생략에 의하여 그것은 '하루'라고 읽혀져야 하며, 그것에 더하여, 비록 넷째 날 이전까지 태양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어둠 그리고 낮과 밤의 전환을 가진 태양력의 24시간의 하루와 동일한 하루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둘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정관사가 없음을 설명해준다. 다른 저녁과 아침은 '하나의(a)'('the'가 아니라) 둘째 날을 성립시켰다. 다른 저녁과 아침은 하나의 셋째 날을 만들었고, 그리고 넷째 날도 그런 식이었다. 그 여섯째 날에, 마침내 그 관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조차, 문법은 이상한데, 왜냐하면 기대되는 바와 같이 욤(יום)에 관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여섯째 날이 통상적인 한 태양일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그러나 그것은 또한 창조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와 같이, 그 일곱째 날은 욤(יום)에 관사가 없는 채로, 욤 하쉬브아(יום השביעי, 날 그 일곱째)(창세기 2:3)라고 서술되어있다. 이것은 또한 서술자가 부여한 것이며, 통상적인 한 태양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날이었으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이다.” [8]
그 일곱째 날에 대한 맨 마지막 부분은 그 일곱째 날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휴 로스와 같은 (수십억 년의 지구 나이를 주장하는) 점진적 창조론자들에 의해 제기된 저속한 주장을 논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9] 그러한 주장도 다른 타협안들처럼 불신되어지고 있다.[10, 11]
그리고 스타인만은 특별한 문맥보다 전반적인 의미론적 범주에 의해 한 단어를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지적하면서[12], 히브리어는 명백하게 24시간 하루(24-hour days)들임을 가리킨다고 결론지었다.
‘욤(יום)’은, 영어 단어 ‘날(day)’과 같이, 그 의미가 다양하다. 그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 24시간 하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ref] 그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의 길이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5절에서 에하드(אחד, one, 하나, 기수)가 사용되고, 그 이후 다른 날들에 대하여는 서수들이 사용된 독특한 용례는 그 본문 자체가 통상적인 태양일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3]
결론
창조론자들은 서수와 기수의 패턴들, 그리고 어떤 날들에는 정관사들이 있고 다른 데는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패턴은 창조에 대한 사실과는 관련이 없지만, 사용되어진 날(욤)을 24시간의 하루로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것이다.
References
1. Ross, H., Creation and Time, NavPress, Colorado Springs, p. 48, 1994.
2. For examples, see Sarfati, J., Shame on Charisma! 29 May 2003.
3. For thorough refutation, see Plimer Files.
4. Ward, R.S., Foundations in Genesis: Genesis 1–11 Today, New Melbourne Press, Melbourne, Australia, p. 44, 1999.
5. Pipa, J.A., From chaos to cosmos: a critique of the Framework Hypothesis, 13 January 1998.
6. Kulikovsky, A., A critique of the literary framework view of the Days of Creation, 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 37(4):237–244, 2001.
7. Ward, Ref. 4, p. 45.
8. Steinmann, A., אחד as an ordinal number and the meaning of Genesis 1:5,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JETS) 45(4):577–584, 2002; quote from pp. 583–584; italics in original, bold added.
9. Ross, Ref. 1, pp. 48–49.
10. Is the seventh day an eternal day, Creation 21(3):44–45, 1999.
11. Kulikovsky, A.S., God’s rest in Hebrews 4:1–11, Journal of Creation 13(2): 61–62, 1999.
12. New Testament scholar Dr Don Carson referred to the exegetical fallacy of ‘Unwarranted adoption of an expanded semantic field. The fallacy in this instance lies in the supposition that the meaning of the word in a specific context is much broader than the context itself allows and may bring with it the word’s entire semantic range.’ Exegetical Fallacies,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2nd Ed., p. 60, 1996.
13. Steinmann, Ref. 8, p. 584, italics added. He has a footnote, ‘Whether or not one believes in the veracity of the Genesis account of creation in six solar days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As the ETS accepts biblical inerrancy, we can presume that the author himself doesn’t intend to advocate error in Genesis. Rather, he is pointing out that it is more honest to say that Genesis teaches 24-hour days but is wrong, than pretending that it’s right but teaches something else.
*참조 1 :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 - 김명현 교수 (Youtube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Po6SaewoYLw
The Ultimate Assertion : והארץ :הארץ ואת השמים את אלהים ברא בראשית
Evidence of Supernatural Design in the Divine Prologu
https://creation.com/images/pdfs/tj/j07_2/j07_2_184-196.pdf
*참조 2 : The meaning of yôm in Genesis 1:1–2: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52-55.pdf
Day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69-76.pdf
Good approach misapplied to get ‘analogical days’ : A review of Genesis 1–4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35-39.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1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2/j21_2_71-76.pdf
On literary theorists’ approach to Genesis 1: Part 2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21_3/j21_3_93-101.pdf
The days of creation: A semantic approach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4100/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670/
출처 - Journal of Creation 17(2):60–61, August 2003.
‘충만하라’ 인가, ‘다시 충만하라’ 인가?
(Contradictions: Full of Meaning Replenish or fill?)
Stacia McKeever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Genesis 1:28, KJV)
어떤 사람들은 킹제임스 역본(King James Version)에서 이 구절이 아담과 하와가 지구 행성을 ‘다시 채우는(refill)’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최초의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두 번째 창조(second creation)’의 부분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간격이론(Gap theory)을 받아들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뉴킹제임스 역본(New King James Version)에서 같은 구절을 읽어보라.
”Then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fillthe earth and subdue it;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over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s on the earth.” (Genesis 1:28, NKJV)
킹제임스 역본에서 사용된 단어 ‘replenish’는 17세기(King James Version이 번역될 당시)에 단순히 ‘fill(채우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졌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킹제임스 역본에 참여했던 번역가들이 살던 그 당시에 단어 ‘replenish‘는 ’refill(다시 채우다)‘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 단어는 비축하다(stock), 채우다(fill), 공급하다(supply), 거주하다(inhabit)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Fill‘과 ’refill‘의 단어 관계처럼 ’plenish‘와 ’replenish‘ 관계는 성립하지 않음을 주목하라(plenish 라는 단어는 영영사전에 없다). ’Replenish‘라는 단어는 ‘replete(충만한)’이라는 단어로부터 왔다. 행복으로 ‘replete’하게 되었다는 것은 행복으로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어 ‘replenish’가 ‘to fill again(다시 채우다)’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된 기록은 1612년에 있었다. 이 해는 킹제임스 역본이 발간된 그 다음 해이다. 더군다나 그것은 하나의 시적인 의미(a poetic sense)로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창세기 1:28절은 시가 아니다. 영어 단어는 수세기에 걸쳐서 의미가 변하면서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replenish 단어는 일반적으로 ‘refill’을 의미하게 되었다.
창세기 1:28절에 ‘replenish’ 단어에 대한 원래 히브리어 단어는 ‘male’ 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fill’을 의미한다. 그리고 킹제임스 역본의 다른 모든 곳들에서(예로 창 1:22) 그와 같은 방식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그 단어는 히브리 단어에서도, 그리고 킹제임스 역본 번역자들에 의해서 선택되어진 그 당시 단어에서도 ‘refill(다시 채우다)’을 의미하지 않았다. 번역가들이 ‘replenish’ 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fill up(가득 채우다. 즉 make replete(full))’에 가까운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지구를 다시 채우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의도하지 않았다.
뉴킹제임스 역본(그리고 몇몇 다른 번역본들)은 그 단어를 정확하게 오늘날의 말투인 ‘fill’로서 번역하고 있다. 이 명백한 것처럼 보이는 모순은 원본 사본들에서의 오류가 아니라, 단순히 번역 때문에 기인한 것이다.
번역 - IT 사역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22/contradictions-full-of-meaning
출처 - Answers, 2008. 12. 22.
하나님은 일부다처를 묵인하셨는가?
(Contradictions: A Man of Many Wives Does God condone polygamy?)
Roger Patterson
”왕은 후비가 칠백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왕상 11:3)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 3:2)
성경에는 일부다처(polygamy) 관계가 명백히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 명의 처를 두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거짓말, 살인, 강간의 사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분명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다처의 사례가 기록되었다는 것이 그것이 묵인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에는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어떠한 구절도 없다.
창세기 기록에 의하면 태초부터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을 작정하셨던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2장은 아담을 위한 한 여성의 창조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24절에 이것 때문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만약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룬다면, 셋이나 더 많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9:3-9절에서 예수님이 이혼에 대하여 질문 받으셨을 때 확실해진다. 예수님은 본래(from the beginning)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이루어진 결혼 개념을 지지하시면서 창세기 2:24절을 인용하셨다. 본래(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일부다처 관계가 아니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한 예언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위의 열국 같이 그들 위에 왕을 세우리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었다(신 17:14). 이어서 하나님은 앞으로 세워지게 될 왕들에 대한 기준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17:17절에서, 왕들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분명히 왕은 일부다처를 행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부다처를 묵인하셨는가?
왕들을 포함하여 많은 유대 지도자들과 족장들도 여러 명의 아내들을 두고 있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다처 관계는 심판과 곤경을 불러 일으켰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관계로 인해 죄 값을 치렀다. 아브라함은 하갈과의 관계로 인해 가족 내의 갈등과 분쟁으로 고통당했다. 다른 사례들에서도 이러한 결과들이 뒤따랐다.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야곱의 생활이 하나님에 의해서 축복받은 것이 아니냐고 일부 사람들은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죄의 관계를 사용하셨다고 죄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계는 밧세바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일부다처는 많은 문화들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혼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되었다(마 19:8).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창조의 부분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선택한 ‘음란한 세대(adulterous generation)’ 라고 부르셨다. 유대인(또는 어떠한 다른 사람)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것을 묵인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조 : A Man of Many Wives. Does God Condone Polygamy?
https://answersingenesis.org/family/marriage/a-man-of-many-wives/
Does the Bible condone polygamy?
https://creation.com/does-the-bible-condone-polygamy
What About Polygamy in the Bible?
https://answersingenesis.org/family/marriage/what-about-polygamy-in-the-bible/
Family/Marriage questions and answers
https://creation.com/family-marriage-questions-and-answers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2/01/contradictions-a-man-of-many-wives
출처 - AiG, 2008. 12. 1.
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즉시 죽지 않았는가?
(Contradictions : Time of Death. Why didn’t Adam and Eve die the moment
they ate as Genesis 2:17 implies?)
Bodie Hodge
이 질문은 창세기 2:17절로부터 생겨난다. 거기서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듣게 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몇몇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즉시로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창세기 2:1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은 일종의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구절이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는 그 날로 죽었어야만 했음을 뜻하는 ”죽으리라(die)”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 날 즉시로 죽는 것인가, 아니면 죽기 시작하는 것인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창세기 2:17절의 의미처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그 날로 죽지 않았다는 것은(창 5:4-5)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못 말씀하셨든지, 아니면 사람의 해석이 잘못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히 6:18). 그렇다면 오류투성이의 인간들이 실수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곳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히브리어를 영어로 문자 그대로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 ”Tree knowledge good evil eat day eat die (dying) die”
히브리어는 두 개의 다른 동사 시제(dying and die)를 가지는 'die die(muwth—muwth)”로 되어 있다. 이 단어는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 또는 글자 그대로 ”반드시 죽도록 죽어가는(dying you shall die)”으로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죽음에 들어섰다는 의미로 죽음의 시작을, 그리고 마침내 죽을 것임을 가리킨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었던 시점에서 죽기 시작하였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었다(창 3:19). 만약 그들이 즉시로 죽을 것임을 의미했다면, 하나님은 단지 한 번만 ‘muwth’를 사용하셨을 것이고, 그것은 죽기 시작하는 또는 정녕 죽으리라가 아니라, 죽는, 죽다, 죽었고 등을 의미했을 것이다. 구약의 저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의미들을 잃어버릴 때가 간혹 있다.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 하나는 문자적으로 또는 단어 대 단어 (word-for-word)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용의 동등성 또는 생각 대 생각(thought-for-thought)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만약 이 구절이 단어 대 단어로 번역되었다면, 'dying die” 또는 'die die”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단어가 반복 사용될 때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문법적 구조를 가지는 영어권의 독자들에게 어려울 수 있다. 그러한 문법적 구조를 허락한 제롬(Jerome)의 라틴어 번역본(Latin Vulgate)은 이것을 ”dying die” 또는 ”dying you will die” (morte morieris)로서 번역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은 더 동적인 의미를 갖는 ”정녕 죽으리라(surely die)”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죽지는 않지만, 확실히 죽음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욤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2:17절의 네가 먹는 '날(day)에는'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욤(yom)에 관해 말하면, 그 단어는 나중에 나오는 단어 ”정녕 죽으리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행동(eating)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2:37절에서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말할 때, 거의 동일한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왕상 2:37)
여기서도 창세기 2:17절처럼 ”날(yom, day)에는”과 ”죽임을 당하리니(dual muwth)”가 사용되었다. 창세기 2:17절에서 욤이 행동(먹는 것)과 관련한 것과 똑같이 여기에서도 행동(나가서 건너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두 경우에서 모두 그것은 그들이 죽을 특별한 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솔로몬도 또한 시므이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그 날에 즉시 죽는다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부터 시므이의 날은 카운트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날에 그들(아담과 시므이)의 행동은 마지막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죽음은 시작되었다. 그들의 행동의 결과로서 그들은 정녕 죽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2:17절에 나오는 날은 그들이 먹었던(불복종했던) 날에 관한 것이고, 그들이 죽는 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참조 : Why Didn't Adam Die Immediately?
https://apologeticspress.org/why-didnt-adam-die-immediately-797/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2008/10/20/contradictions-time-of-death
출처 - AiG, 2008. 10. 20.
성경의 진리를 풀기
(Unlocking the Truth of Scripture)
성경은 보물 상자다. 그 안에 가득히 든 보물을 열기 위하여 크리스천들은 특정한 열쇠, 즉 성경해석학 또는 해석법칙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성경의 정확한 해석은 거의 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 자체의 교리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결코 의도하지 않은 방법으로 말씀들을 해석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과 성경의 인간 저자가 의도한 대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크리스천들은 먼저 ”이것은 어떤 종류의 구절인가?”를 질문하여야 한다.
성경 구절의 여러 유형들
성경은 역사적인 서술, 시, 비유, 서신, 예언 등 여러 종류의 다른 문학형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만일 성경의 어느 구절이 분명하게 역사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의 목적이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여야만 한다. 만일 어느 구절이 시이면 비유적인 언어를 기대하여야 한다. 예를 들자면 시편 104편 3절은 하나님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다른 성경에 비추어서 우리는 시편 기자가 문자적 사실보다는 은유를 사용하고 있음을 안다.
아마도 예언이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성경구절의 유형일 것이다. 성경에서 예언을 대하면 그 예언의 뒤에 있는 배경적 상황과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와의 관련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잡이는 그 예언이 신약에서 설명되어진 방식이다. 성경에 대한 신중한 연구와 성경 해석학 원리를 적용하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글을 고찰하고 있는지와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방법을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문맥이란 무엇인가?
1 . 성경의 문맥
절(verse) 전후의 구절들을 반드시 읽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가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 즉 신자인가 비신자인가, 젊은이인가 노인인가, 순종하는 자인가 불순종하는 자인가? 등등. 이 구절에서는 어떤 논제를 다루고 있는가? 성경의 이 특별한 책(낱 권)의 통합적 주제는 무엇인가? 주변의 절들은 이 절을 설명하는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등과 같은 것들을 파악해야 한다.
2. 역사적인 맥락
본문이 기록될 때, 또는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시대에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 주변으로부터 가해지고 있었던 위협을 알지 못한다면 많은 예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다윗은 광야에서 사울 왕에게 쫒기고 있던 중에 시편의 일부를 썼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시편들은 더욱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다가올 것이다. 역사적 맥락은 성경 그 자체에서 흔히 발견된다. 그러나 좋은 성경 주석이나 성경 백과사전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참고 서적들은 많은 성경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당시의 지역적 관습들, 예를 들어 목동, 고기잡이, 혼인, 의복, 희생제사 등과 같은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명백한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공부하는 성경 구절의 문학적 종류와 그 맥락을 파악한 후에는, 그 단어의 문법적인 의미와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다소 확실하지 않거나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보통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문자적 의미가 사리에 잘 맞으면, 다른 의미를 찾지 말라는 것이 건전한 충고이다. 예수께서는 가끔 ”너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성경은 근본적으로 그 뜻이 명확하다고 생각하셨다.
모든 언어는 문법적 규칙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규칙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젊은 크리스천들은 요한일서 3:9절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해석은 만일 네가 죄를 범하면 너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어 동사가 ”현재 진행” 시재로 사용되었고,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아무도 삶의 방식으로서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같은 단어라도 그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개개 단어의 뜻을 연구하면서, 그 단어가 그 문장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같은 저자에 의해서 다른 구절들에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어떻게 쓰였는지 등을 연구하라. (Strong's 과 같은 좋은 성경공부 컴퓨터 프로그램의 성구사전, 또는 일반 웹상의 성경공부 도구들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여느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성경도 일상적인 언어들을 사용한다. 일상 언어들을 인지하는 것이 성경의 바른 이해에 있어 필수적이다. 성경이 직유나, 은유 또는 과장법과 같은 일상 언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그와 같은 언어의 정상적인 용법에 따라 해석되어야만 한다. 다른 말로하면, 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취해지도록 의도되어졌지만, 말의 비문자적 유형은 문맥 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창세기 1장은 문자적인 역사(literal history)로서 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문맥은 결정적이다.
이것이 다른 성경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성경해석학의 또 다른 원칙은 성경의 조화를 포함한다. 진리의 하나님이 성경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바르게 해석했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성경과 성경을 비교하여야 한다. 만일 한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한 절 또는 그 이상의 다른 절들과 모순되면 우리는 틀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더욱 신중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오늘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적용(application)이 전문적으로 해석 과정의 한 부분은 아니지만, 성경은 단순히 지적 자극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을 개조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성경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더 잘 이해하게 된다고 지적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0-13)
잡상인들을 조심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화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의 유전을 좇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5-13)
바울은 그들 자신들의 목적대로 가끔 물질의 취득을 위해 성경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반대하며 고린도 교인들을 경고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7)
베드로는 성경의 어려운 구절을 억지로 비틀어서 그들 자신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고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크리스천들은 성경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위험은 성경 이야기를 미화시키고, 그리고 나서 그들이 마치 자기들 뒤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첨가 사항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변하는(정확하게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결론
하나님은 우리들이 말씀의 보화를 정확히 알고 삶에 적용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의미로 성경이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신 것과 그분이 의미했던 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해석학의 상식적인 원칙들을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 이들 원칙들은 따르기가 쉽고,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그 원칙들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2/n4/unlocking-scripture
출처 - Answers Magazine, September 18, 2007
구분 - 3
옛 주소 -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4430
참고 : 4374|4058|4423|3055|666|2797|4380|4375|3591|4401
아르박삿의 아들은 누구인가? : 가이난, 셀라?
(Who was Arphaxad’s son : Cainan or Shelah?)
Stacia McKeever
만일 당신이 성경 관련 잡지에서 족보 도표를 대조해 본다면, 대부분의 현대 번역 성경들에 기록되어있는 누가복음 3:36절의 가이난(Cainan)의 이름이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이 이름이 창세기 10:24, 11:12, 그리고 역대상 1:18,24절에 있는 상응하는 족보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딤후 3:15-17), 이 모순은 무오 했던 성경 원본에서는 오류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이 삽입(insertion)은 후대의 70인역(Septuagint, LXX) 필사본들(비-영감된 히브리 필사본들)에서 발견되어진다.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라는 이름이 삽입된 것에 대해서는 2 가지의 가능성 있는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가이난은 원본 사본에는 들어 있었는데, 히브리 필사자들이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을 필사하던 중에 이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모리스 박사가 지적했던 것처럼[1] 히브리 서기관들은 필사 과정에 매우 신중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성이 낮은 설명이다. 또한 그 이름은 구약성경의 다른 고대 판(사마리아역, 불가타역, 가장 오래된 70인역 등)들에서도 빠져있다.
두 번째의 설명은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즉 누가의 편지를 필사한 70인역 필사자들이 부주의로 인해 아르박삿(Arphaxad, 아박삿)과 셀라(Shelah, 살라) 사이에 가이난을 실수로 삽입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1:12). 따라서 그 사이에 가이난이 들어가는 것은 나이 상으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중의 70인역 필사자들이 누가복음에 있는 명단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와 역대상의 구절들에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을 삽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래리 피어스(Larry Pierce)는 이러한 설명이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38 – 약 100)의 자료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요세푸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도를 편집하기 위해 분명히 70인역을 사용했지만, 가외의 가이난을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그는 입증하였던 것이다 :
만약 요세푸스가 ‘70인역(LXX)’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70인역에 기초하여 쓰여진 어떤 다른 문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저술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70인역의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시대에는 가이난이라는 가외의 세대가 70인역 또는 요세푸스가 사용했던 문서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요세푸스는 그(가이난)를 넣었을 것이다! 만일 70인역에 가이난의 이름이 포함되어있었다면, 요세푸스가 착오로 그것을 누락시켰거나(가능성 없음), 그 자료를 가볍게 취급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제롬(Jerome, 약 AD 347~419/420)은 벌게이트 성경(Vulgate, 성경의 라틴어 판)을 AD 5세기에 번역하였을 때,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는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롬은 70인역이 너무나도 부정확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변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히브리 텍스트(Hebrew text)를 사용했다[2].
피어스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 AD 약 180~ 약 250)로부터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아프리카누스도 그가 분명히 70인역의 부풀려진 연대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대표(AD 220년에 쓰여짐)에 가이난을 누락시켰다. 가외의 가이난의 추가는 AD 22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졌음에 틀림없다. 피어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
... 요세푸스는 크리스천 저술가가 아니었고 누가복음 족보의 필사본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지만, 이에 반해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아리스티데스에게 보낸 서신(Epistle to Aristides) 3장에서, 그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족보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 사실 그는 누가복음 3:25절을 인용하고 있었다[3]. 따라서 아프리카누스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사본들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프리카누스가 누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누가복음의 사본들에 이 가짜 가이난이 들어 있었다면, 아프리카누스는 분명히 그것을 포함시키기 위해 그의 연대기를 수정했을 것이다. 사실 현존하는 가장 초기의 누가복음 사본이라고 알려진 P75 (AD 175-255년 사이[4])라 불려지는 보드머 소장품(Bodmer Collection)의 파피루스 사본(papyrus codex) 102 페이지(원래는 144 페이지)에는 가이난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3:36절에 있는 내용은 AD 220년 이전에는 존재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개혁주의 침례교파 신학자인 존 길(John Gill)은 누가복음 3:36절에 가이난이 더해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
이 가이난은 창세기 11:12절에서 모세에 의해서 언급되지 않았고, 구약의 어떤 히브리어 사본들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또한 사마리아어 판(Samaritan version)이나, 탈굼어 판(Targum version)에도 없다. 또한 요세푸스도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가계의 족보가 반복되고 있는 역대상 1:24절에도 없고, 베자(Beza)의 가장 오래된 누가복음의 헬라어 판에도 없다. 그 이름은 정말이지 현대의 70인역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원래는 거기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자료로부터 누가가 취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의 어떤 부주의한 누가복음 필사자의 탓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권위 있는 70인역에 부주의하게 삽입되어진 그때부터, 많은 헬라어 판들(Greek copies), 라틴어 판인 벌게이트(Vulgate Latin), 모든 동방 판들(Oriental versions), 심지어 그들 중 가장 오래된 시리아어 판(Syriac)에도 가이난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셀라의 아버지가 되는 그러한 가이난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성경의 어느 사본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5].
Footnotes
[1] Morris, H.M.,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1976, p. 282.
[2] Pierce, L., Cainan in Luke 3:36: insight from Josephus, CEN Technical Journal 13(2):76, 1999.
[3] Ante-Nicene Fathers 6:126, Hendrickson, Peabody, MA, 1994.
[4] Geisler, N.L. and Nix, Wm. E.,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Bible, Moody Press, Chicago, revised and expanded, pp. 390–391, 1986.
[5] Commentary available online.
*참조 : What about Cainan?
http://creationontheweb.com/images/pdfs/tj/j18_2/j18_2_41-43.pdf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6
Inspired Writers and Competent Copyists
https://apologeticspress.org/inspired-writers-and-competent-copyists-2093/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am/v1/n2/chronology-conundrums
출처 - AiG, 2006. 9. 14.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요세푸스는 말했다.
(Josephus says, ‘Genesis means what it says!’)
Frank Luke
창세기의 분명한 의미에 대해서 타협하고 있는 사람들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은 현대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신하여, 과거의 대부분 주석가들은 오래된 연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창세기 1장의 날들을 보통의 날(24시간으로 된 하루)들이라고 해석했다. 더군다나, 오리겐(Origen)이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과 같은 사람들조차 오래된 연대 사상을 신랄하게 공격하였고, 지구의 나이는 수천 년에 불과하다고 단언했었다.[1] 유대인 주석가들 중 1세기에 살았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약 100)는 여타 사람들 중에서 두드러졌다.
유대(Judea)에서 태어나서 성장기를 거기에서 보냈던 요세푸스는 의심의 여지없이 성경 밖의 인물들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사가였다. 만일 요세푸스가 아니었다면, 유대 역사의 전체 기간이 세월의 뒤안길에서 잊혀졌을 것이다. 여느 선량한 유대인처럼, 요세푸스도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한 우선적인 이해가 없다면, 유대인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성경이 유대교를 정의한 바와 같이, 요세푸스는 먼저 성경을 정의함으로써 유대교를 설명하였고, 그들의 거룩한 경전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사랑을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서로 불일치하고, 서로 모순 되는 셀 수 없이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과거 시대의 모든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는 22권의 책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들은 당연히 신성한 것으로 믿어지며[2], 그들 중 5권은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모세가 죽을 때까지의 인류 기원에 관한 전승들과 율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간은 3,000 년 보다 약간 짧은 기간이다... 예언서들은...13권이 있다. 나머지 4권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인생들에 대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3].
늘 그렇듯이, 요세푸스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그의 분명한 단어들은 명확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인류는 모세의 시대까지 단지 3,000년 정도 되었다고 그는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성경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또는 성경의 신적 교리들 중 어떤 것이라도 바꾸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였다고 말하고 있었다.[4]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인 ‘유대 고대사’의 서문에서, 요세푸스는 성경에 대한 그의 해석을 더 깊이 설명하고 있었다. 왜 모세가 성경을 창조 기사로부터 시작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요세푸스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인류에게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모세가 이 교훈을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열망했을 때, 그는 다른 입법자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약이나 다른 권리들에 관하여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율법의 제정을 시작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존중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우리 인간들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함으로써 시작했다. 이제 그가 일단 그들을 신앙에 순복하도록 인도하였을 때, 그는 다른 모든 일에도 순복하도록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우리의 입법자는 어떤 일을 지혜롭지만 수수께끼 같이, 어떤 것들을 점잖은 풍유로 말하고 있지만[5],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명백하고 확실하게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6].
요세푸스는 그의 방법론을 설명한 후, 창조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간다. 그는 모세의 설명이 전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었다 : ”이것은 정말로 첫째 날이었다[7], 그리고 단지 6일 동안에 이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8]. 요세푸스는 그가 이런 말들이 수수께끼 같다거나 우화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어떠한 지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논평은 창세기에 기록된 모세의 말만큼이나 의미가 분명하였다.
요세푸스는 에덴동산에 이어, 아담의 타락과 아담에서 노아까지 10 세대를 기록하고 있었다.[8] 요세푸스는 위에서 모세와 아담 사이의 시간이 3,000년이라고 언급했던 바와 같이[10], 아담에서 홍수까지 사이에 어떠한 시간적 간격도 허용하지 않았다.[9] 요세푸스는 대홍수에 관한(그는 물이 모든 곳을 덮었던 전 지구적 홍수로서 기록하고 있다[11]) 그의 글에서, 창세기 5장의 계보들 사이에 간격이 없음을 여러 번 확인하고 있었다.[12].
요세푸스는 그의 저술 전반에 걸쳐서, 그가 기록하고 있었던 핵심적인 입장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유대 분파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 사이의 교리 차이를 말하고 있었지만, 창세기 1-11장에 대한 이런 핵심적 해석에 대한 유대인들의 단 한 마디의 다른 의견도 기록하지 않고 있었다.[13]. 만약 어떤 다른 의견이 있었다 할지라도, 요세푸스는 그 의미가 애매하지 않고 명백하였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언급할만한 가치가 없었던 것이었다.
요세푸스는 히브리 성경을 설명하는 동안, 오늘날의 안티기독교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말하고 있었던 반유대주의자들과 직면했었다. 요세푸스의 시대에 이교적인 헬라 역사가들은 성경에 기록된 유대인의 역사를 부인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동일과정설적 과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부인하고 있고, 지구와 그 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진정한 역사를 부인하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는 오늘날의 교회가 문자적 창세기의 반대자들(오직 세속적 과학만이 기원에 관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해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들에 대해 대답하고 있었다 :
”무엇보다 나는 오로지 헬라인들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고대의 역사들에 대해 알고 싶어질 때, 우리 자신의 것에서부터 그 진실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서, 다른 사람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헬라의 역사가들은 자료들을 쉽게 수집할 수도 없었고, 그들이 기초할 수 있는 어떤 좋은 기록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추측으로부터 그들의 역사를 썼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쓴 책들을 두고 서로 논박하고 있으며, 동일한 사건들에 대하여 매우 상충된 설명을 하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14].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현대 교회가 창세기와 지구의 시작에 관한 성경의 기록에 강력히 서 있어야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예수님의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창세기에 대한 일관된 견해는 ”창세기는 말하고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 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notes
1. This is thoroughly documented in Sarfati, J., Refuting Compromise, ch. 3, Master Books, Arkansas, USA, 2004, which includes sections on Josephus.
2. The Jewish canon contains the same books as the Protestant Old Testament, but they are numbered and grouped differently (for example, they counted all the minor prophets as one book—The Book of the Twelve).
3. Against Apion, 1.8, p. 776, emphasis added. All quotations from Josephus taken from Flavius Josephus, The Works of Josephus, Complete and Unabridged,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Hendrickson Publishers, Inc., Massachusetts, USA, 1987. These books are also available in the Online Bible.
4. Against Apion, 1.42. And many Jews have died rather than compromise Scripture and God’s commands. The Maccabean revolt started when one man and his five sons refused to let Hellenists sacrifice to Greek gods in the Jewish Temple.
5. Josephus uses ‘allegory’ as we would use ‘typology’. The difference is that typological events really happened and have a deeper, spiritual meaning underneath the literal one (you might think of it as the ‘preaching point’). By his own account, Josephus prefers the literal over any figurative meaning and uses ‘allegory’ exactly as Paul does in Galatians 4:24.
6. Antiquities Preface, 4.
7. Antiquities 1.1.1, emphasis added.
8. Antiquities 1.3.2, emphasis added.
9. The Flood occurred 2,656 years after Creation in most copies of Antiquities 1.3.3. This agrees with the Greek Septuagint translation (ca. 250 BC), while our English Bibles are mainly translated from the standard Hebrew (Masoretic) text, which says 1,656 (see also Hansen, P., Real History: The Timeline of the Bible, Creation 27(4):28–29, 2005). Dr Pete Williams shows why the Masoretic Text is likely to be closer to the original Hebrew in ‘Some remarks preliminary to a Biblical chronology’, Journal of Creation 12(1):98–106, 1998; <www.creationontheweb.com/chronology>. It is possible that Josephus couldn’t find a Hebrew manuscript in the heart of the Empire, or else later scribes changed Josephus’ Hebrew numbers to conform to the Septuagint. Indeed, a few very old manuscripts of Josephus agree with the later Masoretic text. Those manuscripts report 1_56 years between Creation and the Flood (the centuries marker is smudged beyond recognition).
10. Indeed, the book’s heading is, ‘Containing the interval of three thousand eight hundred and thirty-three years: From the Creation to the death of Isaac.’ Once again, the expanded figures are due to Septuagint numbers, but the point is still that there is no room for millions of years since creation.
11. Antiquities 1.3.5.
12. Antiquities 1.3.3–4.
13. The groups themselves record some few differences amongst individual members, but the vast majority follow the liter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11.
14. Against Apion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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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누구였는가?
요세푸스의 본명은 요세프 바르 마티아스(Joseph bar Matthias)였다. 그는 사두개인(Sadducee)으로 출생했고, 엣세네파(Essenes) 사람들의 친구였지만, 바리새인(Pharisee)으로서 훈련을 받았다. 요세푸스는 또한 예루살렘에서 외교 사절로서 로마에 가기도 하였고, 나중에 열심당 민병대(Zealot militia)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AD 66년의 유대 반란(Jewish Revolt) 동안에 그는 로마에 대항해서 갈릴리를 방어했다(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AD 67년에 그의 주둔지에서 집단학살을 간신히 피했으나, 포로로 잡혀서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게 넘겨졌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누스가 후에 황제가 될 것이라고 통찰력 있게 예언했다. 이런 일이 AD 69년에 실제로 일어났을 때, 베스파시누스는 요세푸스를 방면해 주었다. 저항운동이 희망 없음을 깨닫고,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매국노로 낙인 찍혔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AD 70년 처참하게 점령되었다. 곧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요세푸스의 학식과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인정하였다.
황제의 보호 아래,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역사에 관한 각각 여러 권들로 이루어진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즉 한 권은 ‘유대 전쟁사(Wars of the Jews)’ (약 BC 145년부터 AD 70년까지의 마카비 혁명(Maccabean revolt, 마카베오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함락까지 초점을 맞춘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 (창조로부터 BC 145년까지를 망라하는 유대인의 성경, 전통, 민속에 관한 해설서)이다. AD 100년에 어느 시민의 후원으로, 그는 ‘아피온을 반박함(Against Apion)’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삶(The Life of Flavius Josephus, 자서전)’을 출판했다.
번역 - 미디어위원회
링크 -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5769/
출처 - Creation 29(3):15–17, June 2007.